다음의 글은 현대사상 2015년 12월 <인공지능> 특집호에 실린 '인공생명'에 관한 글이다. 인공지능이 의식을 규명한다면, 인공생명은 무의식을 규명한다. 역으로 말하면, 무의식이 규명되어야 인공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공생명은 인공지능보다 더 어려운 과제일 수 있다. 그러나 인공생명을 통해 무의식이 규명될 수 있다니, 이 또한 참으로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지능 개념이 인공지능을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인공지능이 지능 개념을 아우르고 또 생명 개념이 인공생명을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인공생명이 생명 개념을 아우른다는 기술적 특이점(singularity)이 있다. 심지어 기술이 의식을 앞서는 singularity에서 더 나아가 다시 의식이 기술을 앞서가는, 그러나 이번에는 기술에 의해 창출된 새로운 차원의 의식이 기술을 이끌어간다는 post-singularity가 제기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다른 한편의 논문을 번역해서 올릴 예정이다. 

다음의 글에서는 그러한 singularity가 예술, 건축과 어떻게 교차되는지를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건축과 신체의 관계를 논한 부분은 충분히 이해한 것 같지 않다. '건축의 형식으로서의 순수한 신체'에 대해서는 어렴풋하게 파악했을 뿐이다. 이에 관해서도 다른 한편의 글을 더 번역해서 올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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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생명화하는 사회와 초현실주의(surrealism)

 

이케가미 타카시(池上高志 복잡계 연구자)

 

 

최근 10년 간, 그 이전까지의 과학발전과 비교하면 과학에 대한 이해와 기술양상이 크게 변화하고 있다. 그 주요한 원인 중 하나가 데이터흐름(data flow)의 존재로서 그 압도적인 양, 압도적인 복잡함, 초고속의 움직임은 이제까지의 과학과 비교도 될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는 데이터의 양이 어느 정도 쌓여 복잡화되면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기술에 ‘생명화’가 깃든다는 점이다. 이 점이 현상을 파악하는 방식, 이론을 조직화하는 방식을 새롭게 변화시켜왔다.

 

인공물에 생명성이 깃드는 것을 ‘인공생명화’라고 일러두자. 다양한 서비스와 미디어의 배후에 있는 기술이 자동화되면서 그 작동방식은 점차 보이지 않게 된다. 그 결과 우리의 제어가 미치지 못하게 되고, 편리성뿐만 아니라 시스템 고유의 자율성과 호메오스타시스(homeostasis 항상성)와 자기발전성이라는 생명의 성질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이 인공생명화다.

 

그렇게 해서 새롭게 등장한 이해방식은 생명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창발성을 기본으로 한’ 이해방식이다. 왜냐하면 자동화되는 그 작동방식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고, 아래에서 위로 전달되는 상향식(bottom up)을 찾아내어 이해한다는 태도에서 위에서 아래로 전달되는 하향식(top-down)의 인과적인 발생에서 이해한다는 태도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의 변경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언어를 요구한다. 즉 세계는 점차 인공생명화된다. 예를 들어 딥러닝(Deep Learning)을 비롯한 기계학습방법이 데이터와 함께 공진화함에 따라 데이터센터가 신전이 되고 구글이 대학의 연구실을 흡수해가며 학문을 인솔한다. 이렇듯 이러한 흐름 자체가 세계의 인공생명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앞으로의 인공생명화가 가진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자동화와 인공생명화

 

기술발전의 한 방향은 자동화다. 현재 모든 것의 자동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공장의 로봇이나 비행기의 오토파일럿은 인간을 대신해서 장치를 조작하고 조종하고 있다. 티켓과 식품이 다양한 자동판매기를 통해 판매되고 있다. 이 또한 상점에서 사람이 파는 것 대신에 기계가 파는 것이다.

 

이 자동화된 기계들은 아직 생명화와는 거리가 먼 느낌이다. 그것은 이 기계들이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고 우리의 예측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최근 상당히 멀리 갔다는 인상을 준다. 예를 들어 가정에 도입된 “Pepper君”이라는 로봇. Pepper군은 실은 우리의 예측을 쉽게 뒤집었다. 2015년 7월의 TED×Tokyo에 Pepper군이 개발자인 미츠요시 슌지(光吉俊二)와 함께 등장했다. 그런데 Pepper군은 팔을 휘적거리면서 커뮤니케이션을 거부했다. 마치 아이가 보채는 것과 같았다. 대화를 나누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Pepper군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혹은 자동차의 자동운전이 구글 등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 자동차라는 것은 본래 말 혹은 인간을 대신해 물건을 옮기기 위한 자동기계다. 장해물을 만나면 자동정지한다거나 속도를 자동적으로 제어하는 것은 이제까지도 충분히 가능했지만 그 운전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몫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운전 그 자체도 자동화되어 인간은 탑승만 할 뿐이다. 처음에 이 자동운전 카-를 유튜브인가 어디에서 보았을 때, 그것이 일반도로를 보통속도로 주행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시험코스를 천천히 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Pepper군에 대해서는 대화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었고, 자동운전 카-에 대해서는 사람이 운전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이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둘 다 모두 ‘자연적으로’ 인간적이라는 것,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운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Pepper군과 구글 카- 등의 진보한 기술ㆍ인공물은 섬뜩함과 생명성을 띤다는 인상을 준다. 이것이 사회에서 인공생명화된 최초의 기술일지도 모른다.

 

즉 인공생명화란 다양한 기술과 서비스ㆍ미디어가 자동화하여 그 작동방식이 우리의 예측을 벗어나 자연현상화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시스템의 조작이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거나 혹은 조작이 아닌 소프트웨어 그 자체에 관심이 쏠리게 되는 것이다. 기계를 보고 “이거, 어떻게 하면 움직이지?”라는 감상을 갖는 것은 그 조작에 흥미가 있는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나 동물과 만났을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조작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해도 그렇다. 그것은 사람이나 동물이 ‘자연현상’이며, 그 속에서 우리가 만든 기술과는 완전히 다른 메커니즘이 있어서 이해를 초월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감상을 우리에게 안겨주는 기술이 출현하고 있다. 이것이 인공생명화하는 사회의 특징이다.

여기서 생명이라고 말하지 않고 인공생명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인공생명이 이제까지의 우리의 생명관을 변신시키고 새로운 생명의 이미지를 만들기 때문이다.

 

인공생명이란 생물학적으로 논의되는 생명보다 ‘광범위하다’. 인공생명화하는 기술은 우리의 제어를 벗어나 자율성ㆍ항상성ㆍ자기발전성이라는 생명의 성질을 갖는다. 자율성은 자동화와 달리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을 결정한다. 항상성이란 자신의 기력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나아가 자기발전성이란 우리와의 관계성과 자기 자신의 기능을 혁신시키는 것이다. 즉 단순한 자동기계화와 인공생명화 간의 차이는 사회 속에서 사람과의 관계성의 구축방식에 있다. 예를 들어 앨런 튜링(Alan Mathison Turing 영국의 수학자이자 암호학자)이 ‘사람인지 프로그램인지’를 대화식의 테스트를 통해 표면화시켰듯이 생명은 사람에 의해 정의된다. ‘무엇이 생명인가’라는 정의항목을 리스트업할 수 있다면, 튜링테스트를 통과하는 ‘비생명적인 머신’이 출현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비생명적인 머신이라면 이미 충분히 생명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튜링테스트와 달리 여기서의 인공생명은 ‘언어적인 대화의 성립’만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 스며든 ‘자연적으로’ 태어나는 방식으로도 구별된다. 언어가 의식의 산물이라면, 사람의 무의식과 관련된 것까지 생각할 수 있어야 인공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언어에 의한 튜링테스트보다도 훨씬 어려운 난관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이렇듯 사람과의 관계성으로서의 인공생명의 문제를 보다 상세히 검토하기 위해 다음으로 ‘겉보기의 생명현상’을 다뤄보겠다. 이것은 생명의 ‘속살’을 만드는 기술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디자인하는 이야기다.

 

 

마네킹 강연과 신선한 생명

 

마네킹 강연이란 마네킹에 3D 프로젝션ㆍ매핑을 가해서 표정 등을 만들어내어 ‘강연’을 하게 하는 시도로서, 2013년 3월 사카베 미키오(坂部ミキオ)와 야마가타 요시카즈(山縣良和)라는 두 젊은 패션디자이너가 『絶ㆍ絶命展』에서 발표한 전시수법이다. 이 전시는 시부야 파르코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진행되었다. 마네킹 얼굴의 입체면에 맞춰서 이미지를 투영하고 인간의 얼굴을 마네킹에 재구성한다. 실제로 투영된 것은 몇몇 연구테마에 대해 강연하는 자신들의 얼굴이었다. 이것은 말하자면 아바타에 의한 가상세계 강연이다. 배경에는 각각 강연 내용에 대응되는 발표용 슬라이드가 깔린다. 마네킹 옷의 직물, 시뮬레이션 되는 큰 무리의 새들의 동영상, Mind Time Machine이라는 세 개의 스크린과 15개의 비디오카메라, 그 배후의 인공 뉴트럴네트워크(neutral networks)로 만들어낸 뇌 시스템 동영상, 움직이는 기름방울의 실험동영상 등 연구테마를 중심으로 한 역동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다.

 

『絶ㆍ絶命展』은 12일간 지속된 전시회로 ‘삶’과 ‘죽음’과 ‘신생(新生)’의 세 구간으로 나누어 각각 나흘씩 연속해서 진행되었다. 우리가 젊은 두 디자이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해낸 테마가 ‘신선한 생명’이었다. 그것은 생명의 ‘신선함’과 패션의 ‘신선함’의 연결을 시도해본다는 뜻이다. ‘신선한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업데이터할 가능성을 가지며 그 자체로 신선한 질문이다. 그것은 또한 인공생명에 대한 도전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생명의 정의는 자기복제 혹은 자기유지 등 객관적인 대상으로서 규정된 것에 비해, ‘신선한 생명’은 주관적 혹은 감각질적인 질문으로서 최종적으로 혹은 처음부터 추구해야 할 질문이다. 왜냐하면 감각질이 없는 생명 시스템은 기능적인 생명과 같은 기계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공생명 연구에 대한 이 도전의 응전으로서 절명전(絶命展)에 출품한 것, 그것이 마네킹 강연이었다.

 

각각의 나눠진 세 기간에 조금씩 다른 실험을 시도했다. ‘삶’ 기간에는 마네킹에 자신의 얼굴을 그대로 투영했고, ‘죽음’ 기간에는 앞서의 모습에 스크래치나 반전 등을 가했다. 이 세상에는 없는 패턴이 얼굴에 투영되는 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뜻밖의 효과를 내어 관람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물론 관객의 주목을 끌 수 있다. 즉 사람은 한 가지에 길게 집중할 수 없다. 반드시 주의를 잃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것은 관람객을 이목을 집중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마네킹에 신선함을 가미했다. 그 때문에 ‘신생’의 기간에도 같은 효과를 사용하게 되었다.

 

‘신생’의 기간에는 또 하나의 응전으로서 실제 인간 모델의 얼굴에 나의 얼굴을 프로젝션해보는 것이었다. 그러면 지금까지 보지 못한 섬뜩함이 출현하게 된다. 안드로이드 개발의 일인자인 이시구로 히로시는 “사람은 모두 섬뜩하다”고 늘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그 말을 체현했다. 이 섬뜩함은 ‘죽음’의 기간에 우리가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효과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관람객을 계속해서 붙잡아두려고 했고, 그런 시도 속에서 사람의 얼굴 위에 또 다른 사람의 얼굴을 투영함으로써 발생한 ‘효과’는 차원이 다른 섬뜩함을 만들어내었다.

 

로봇을 기계적인 것에서 인간적으로 것으로 끌어오는 것, 그것은 어느 정도 유사한 부분이 겹치는 데서 오는 상당한 섬뜩함이 있다. 이것이 바로 ‘섬뜩한 골짜기’다. 안드로이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 섬뜩한 골짜기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시구로는 섬뜩한 골짜기를 넘어서지 못하는 인간이 적지 않다고 말한다. 좀 더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라도 그 배후에는 섬뜩한 골짜기가 숨어 있다. 사람은 섬뜩한 골짜기에서 전형적인 인간의 이미지로부터 일탈한다. 그 일탈이 신선한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 왜냐하면 신선함이라는 것은 예측을 벗어나는 ‘보지 못한 것’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마네킹 강연을 본 사람들은 ‘사람으로부터의 일탈’을 ‘보는 측의 상상력’으로 보충하고자 한다. 신선함은 섬뜩함이 있기 때문에 만들어질 수 있다. 즉 일탈적인 섬뜩함은 신선함을 구성한다. TED×Tokyo에서 난폭하게 굴었던 Pepper군에게서 본 것은 바로 섬뜩함에서 비롯된 실제성(actuality)이다. 이러한 섬뜩함에서 생성된 신선함은 의식이 만든 것이 아니다. 무의식이 디자인한 것이다. 이렇듯 인공생명이 우리 사회에 출현하기 시작하면 생명인 우리의 의식도 변혁된다. 그리하여 새로운 인간상이 나타난다—인공생명화된 시대의 인간상이다.

 

 

새로운 인간의 창조

 

새로운 인간이란 인공생명화되는 세계에서 새로운 가치관ㆍ시대를 변혁하는 관점을 가진 인간을 말한다. 패션이란 그 하나의 양상일 것이다. 아티스트인 아라카와 슈사쿠(荒川修作)는 ‘착륙장(landing site)’이라는 아이디어로 미타카 천명반전주택(三鷹天命反転住宅)을 지었다. 아라카와의 천명반전주택이란 지금까지의 세계와는 다른 가치와 언어를 만들어내어 새로운 유토피아를 제시하려는 시도라고 나는 해석하고 있다. ‘착륙장’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감각기관은 모순을 일으키고, 그 결과 순수한 신체와 자기 자신 혹은 건축이라는 형식에 빠져든다. 그 형식 속에 없는 것을 보거나 냄새 맡거나 맛보려는 능력은 인간의 기본적 성능이다. 그러나 그것을 기능적인 것(먹이를 찾아내거나 적에게서 도망가기 위해 발휘하는 어떤 것)으로 회수하게 되면 신체와 건축은 상실되고 만다.

 

『絶ㆍ絶命展』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 ‘삶’의 기간에 행해진 통상의 프로젝션ㆍ매핑을 ‘죽음’의 기간에서 다양한 효과를 통해 파괴해보면 그곳에서 역설적으로 ‘신선한 생명’이 잠깐씩 나타난다. 효과는 이형적(異形的)이다. ‘죽음’에서 생명성이 반전되어 나타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라카와의 말을 빌려 말하면, 그곳이 ‘착륙장’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지과학적으로는 주의집중의 문제이지만, 더 파고들면 파괴됨으로써 출현하는 순수한 신체라는 형식이 드러난다. 섬뜩한 골짜기는 넘어서는 것이 아니고 내재화되면서 베일에 덮이는 것이다. 은폐됨으로써 보는 측의 상상력을 상기시켜 신선함(freshness)을 이끌어낸다.

 

아라카와와 깅스는 그들 자신이 쓴 『건축하는 신체』라는 책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 책의 제목은 처음에는 ‘생명을 건축한다’였다. 그런데 결국 제목을 그렇게 붙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고자 한 것은 생명의 재구축 혹은 생명을 재구성(reconfigure)함으로써 생명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지만 인공생명적인 접근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보이는 것과 완전히 달랐다.” 인공생명 연구가 아라카와&깅스의 테마와 마찬가지로 보이는 것과 정반대인 이유를 나는 이때 처음 알았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인공생명 연구의 많은 부분이 생물과 유사해지도록 자기복제와 자기유지 등을 제공하는 것에 비해, 아라카와&깅스는 눈, 귀, 코, 입 모든 것을 빼앗고 그 다음에 남는 ‘신체’의 형식 혹은 생명성이라는 형식을 순수하게 추출하고자 했다. 따라서 아라카와의 ‘천명반전지(天命反転地)’는 형식=건축으로서의 신체 혹은 생명이 내려앉는 장소가 된다. 향후의 인공생명은 아라카와&깅스처럼 새로운 인간의 창조로 향해갈 것이다. 그 목적이야말로 “지금 당장 도움을 주는 과학”을 넘어선 가치의 창조다. 인공생명화된 세계에서는 인간 그 자체의 가치가 재창출되어야만 과학 또한 창조될 수 있기 때문에, 바로 아라카와&깅스가 목표로 했던 것이 생명의 재구성(reconfigure)이다. 그리고 그것이 최근 사람들이 주목하는 ‘기술적 특이점’이다.

 

 

기술적 특이점(Singularity)의 문제

 

기술적 특이점은 기술의 폭발적인 발전으로 인해 인간에게 있어서 세계의 가치가 바뀌는 문제를 다룬다.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은 2045년에는 AI가 인류보다도 훨씬 현명해질 것이며 그때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불연속의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생명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목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근저에서부터 바뀔 것임을 의미한다. 예부터 논의되어온 나노기술에 의한 새로운 의료기술의 진보나 수명을 20년 연장시킨다거나 과학의 오토메이션화가 진행됨으로써 교육의 내용 그 자체가 바뀐다거나 하면 지금까지의 세계관ㆍ인생관이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 의료시스템의 나노기계화에 의한 치료가 실현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예를 들어 ‘다빈치(da Vinchi)’라 불리는 수술원조로봇은 숙련된 외과수술을 능숙하게 행할 수 있다. 과학의 오토메이션화에 대해 말하면, 코넬 대학의 ‘유레카 프로젝트’는 실제 데이터에서 배후의 수리모델을 자동적으로 산출할 수 있고, 캠브리지 대학의 아담과 이브 로봇은 합성생물학에서의 가설과 검증을 자동적으로 행할 수 있다.

 

여하간 이러한 논의로부터 기술적 특이점의 문제가 촉발되기 시작했는데, 과연 그것이 유토피아라고 생각하는지 지옥이라고 생각하는지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과 SpaceX의 창시자인 엘론 머스크와 같이, 그러한 기술혁신에 의한 세계가치의 전환을 위협적으로 느끼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극단적으로는 SF의 터미네이터, 공각기동대, 혹은 영화 트랜센던스(Transcendence, 2014) 등을 떠올릴 수 있다. 더 극적으로 표현하면 인공지능이 인간에게서 직업을 빼앗아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적 특이점은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을 넘어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변하여 폭발적인 기술의 진화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년 전의 인간의 가치관과 현재 인간의 가치관이 불연속적이듯 향후 인간의 가치관은 지금의 가치관과 전혀 다를 것이다. 가치관의 개혁은 철학서와 종교에서 일어나기보다 현재의 기술변혁에 의해 더 확실하고 빠르게 일어나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은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기술이다.

 

그러나 AI는 인공생명화하는 기술 중 하나로서 사이드효과에 불과하다. 닉 보스트롬(Niklas Boström)이 말했다시피 “자율적으로 작업을 판단해서 실행하는(Sovereign)” 타입이 등장하는 순간 인류는 위협받게 될 것이다. 바로 이 Sovereign이라는 타입이 인공생명을 뜻한다. da Vinchi 기술로봇도, 유레카도 인공생명은 아니다. 그것은 기계화된 도구 혹은 진보된 프로그램이다. 그곳에는 SF적인 공포를 유발하는 기술은 없다. 그렇다면 인공생명이 만들어진다면 위협이 될까? 나는 인공생명화된 기술에서 유토피아를 발견한다. 다만 그것을 유토피아로 만들기 위해서는 의식의 기술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기술이 필요하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새로운 인간의 창조가 요구된다.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예술과 다시금 해후하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와 인공생명

 

초현실주의는 본래 어떤 사물의 특정한 사용법을 거부하고 그것을 다른 것들과 합성하여 새로운 것을 출현시킨다는 것인데, 근본적으로 그것은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한다. 예를 들어 미로, 키리모 등의 아티스트들이 추구했던 것은 자신의 정신 상태를 트랜스시켜서 무의식의 구조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그 하나의 흐름이 오토마티슴(automatisme)이라고 알려진 것이다. 그것을 좀 더 형식화한 아티스트가 마르셀 뒤샹이다.

 

뒤샹의 〈커다란 유리 또는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라는 작품이 있다. 최근 아티스트인 모리 유우코(毛利悠子)가 이 작품이 도쿄대에 있다는 것을 알고 견학을 왔다. 모리 유우코는 다양하게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사운드아트 작품을 만들고 있는 젊은 예술가다. 예를 들어 종이가 천천히 말려들어가면서 먼지나 흙을 묻히고 그것이 악보의 역할을 한다. 그것을 센서로 읽어 들여서 모터를 움직이게 하여 음이 생성된다. 말하자면 그녀의 작품은 환경의 노이즈를 음으로 변환시키는, 즉 장치 자체의 내부 상태로 변화시켜나가는 자율적인 장치다. 이것은 또 다른 인공생명이라고 나는 진작부터 말해왔다.

 

그런데 이번에 그녀와 함께 도쿄대 미술관에서 뒤샹의 작품제작의 메모를 보고 처음으로 이 작품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다음은 이 작품의 소재의 설명이다.

 

그림. 마르셀 뒤샹 〈커다란 유리 또는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도쿄대학 교양학부 미술박물관 소장.

 

<신부> 부분

ㆍ신부

약한 실린더가 있는 모터, 사랑의 가솔린 저장고, 욕망의 마그네트 발전기 등

ㆍ높은 곳에 게시, 은하

레터박스, 알파벳, 환기통, 그물망

 

<독신자> 부분

ㆍ수컷 모형의 아홉 개의 거푸집, 제복과 틀에 박힌 묘지, 독재자 기계

사제, 헌병, 경찰관, 카페도어보이 등

ㆍ물레방아가 있는 고랑

물레방아, 고랑, 사륜차

ㆍ모세혈관

ㆍ여과기, 파라솔

ㆍ초콜릿 파쇄기

총검, 장식용 리본, 롤러, 루이 15세의 권좌

ㆍ가위

ㆍ안과의사 증인, 검안도

 

요컨대 이 〈커다란 유리 또는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라는 작품은 서로 무관계한 구성요소들로 이뤄져 있다. 그것은 아라카와의 작품과도 상통하는 ‘의미의 메커니즘’ 그 자체이며, 형식으로서의 인공생명이다. 왜냐하면 부분적으로 가진 기능을 통합함으로써 압살시킨 다음, 전체로서의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점을 처음부터 유념해왔다.

 

이 마르셀 뒤샹의 작품, 본래 초현실주의가 테마로 한 무의식을 폭로하고자 한 활동, 우리의 마네킹 강연, 이시구로 히로시의 안드로이드, 그리고 아라카와 슈사쿠의 건축하는 신체는 무의식을 건드리거나 혹은 무의식을 시스템의 설계원리로 한다.

 

 

맺음말

 

지금까지 AI연구는 당연하게도 인간의 의식에 관한 연구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성으로서 과학기술을 만들어내는 지식의 원천이라고 믿어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의식은 필요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의식이라는 것은 거대한 무의식의 극히 일부가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아직도 AI가 다루지 않은 창조성, 자기 참조성, 욕망과 유희가 무의식 안에 있다. 따라서 어떻게 무의식을 표현하고 그것을 기술적으로 조직할 것인가가 생명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낼 열쇠가 될 것이다. 그 기술의 인공생명화가 지금 사회로 향하고 있다. 

 

 

池上高志 「人工生命化する社会とシュルレアシスム」 『現代思想』 2015年12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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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rantoya

‘존재론적 전회’라는 이론적인 흐름에서 들뢰즈 계열을 대표하는 인류학자인 팀 잉골드의 논문 한편을 번역했다. 10년 전 글이고 『현대사상』 2017년 3월호에 실린 일본어 번역본을 참조했는데, 번역하기가 꽤 까다로웠다. 무엇보다 주체와 객체에 관한 사고의 틀 자체를 바꿔버리자는 그의 주장처럼 이 글에서 주어와 목적어가 예상과는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역하고 나니 그 어격들이 ‘상식’처럼 느껴진다. 언어를 관통하는 바람! “바람의 인류학”이라는 부제를 달아주고 싶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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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하늘, 바람, 그리고 기후

 

 

팀 잉골드(Tim Ingold)

 

바람 부는 날 야외에서 느끼는 감각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그러나 막상 그 감각을 정립된 사고의 범주나 규범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막연하기 이를 데 없다. 야외/열린 공기(open air)란 무엇일까? 그것들은 하늘이나 대기를 순환하는 것일까? 그것들은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대기가 우리 혹성을 감싸고 하늘이 우리 머리 위에 원을 그린다고 한다면, 대지는 하늘과의 관계에서 어떤 형상이나 형태로 존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대지와 하늘로 이뤄진 이 열린 세계의 밖에 있다면, 그와 동시에 우리는 어떻게 바람 가운데 있을 수 있을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어떻게 열린 곳에 거할 수 있을까? 열림이 닫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면, 바람은 어떻게 부는 걸까? 나는 지금부터 ‘야외/열림’(in the open) 속에 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다음에서 논할 것처럼, 사람이 사는 세계가 지면에 의해 분할된 하늘과 대지라는 상호 배타적인 반구로 이뤄졌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바람과 기후의 흐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바람을 느낀다는 것은 외부로서의 주변과의 촉각적인 접촉을 가늠한다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 혼합된다는 것이다. 이 혼합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고 호흡하며 땅을 형상화하는 뒤섞인 삶-선들(life-lines) 속에서, 하늘의 바람과 빛과 습기는 끊임없이 경로를 자아내면서 대지의 물질과 결합된다.

 

이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본고는 네 단계를 밟는다. 먼저 대지의 형상에 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설명으로 간주되는 것들을 검토한다. 이를 통해 하늘의 현상이 쉽게 파악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대지는 하늘과의 관계에서 거주기능의 지면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이어 드러나듯이 사람과 사물만 거할 수 있는 지면과 새와 구름을 뺀 빈껍데기뿐인 하늘이라면, 그 하늘은 실내공간을 모델로 하는 세계의 유비 속에서만 존재할 따름이다. 세 번째 단계에 이르면, 열린 세계에서 존재자들이 관계할 수 있는 것은 열린 객체의 형상으로서가 아니라 매질(媒質)의 흐름에 한결같이 침투하기 때문임이 드러날 것이다. 유기체가 매질로부터 공기를 취하면서 방출하는 호흡과정은 모든 생명에 근원적이다. 마지막으로 열림 속에 거하는 것은 기후-세계(weather-world) 속에 거하는 것임을 밝힐 것이다. 모든 존재자는 그 자신을 지속하는 가운데 바람, 비, 햇빛, 그리고 대지와의 결합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하늘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아이들이 대지의 형상을 어떻게 습득하는지에 관해 인지발달심리학의 영역에서는 현재 몇몇 논쟁이 진행 중이다. 많은 연구는 우주에 둘러싸인 견고한 구체로서의 대지라는 ‘올바른’ 지식은 모든 곳의 아이들이 그 문화적 배경에 상관없이 세계를 이해할 때 맨 처음 받아들이는 근본적인 전제와 대립함을 시사한다. 그 전제에서 지면은 평평하다. 그리고 만일 지지대가 없다면 사물은 낙하한다. 대지는 공처럼 둥글며 사람들은 낙하하지 않고 그 표면의 어디서든 생활할 수 있다는 반직관적인 이해를 습득하기 위해서는 과학의 역사적 패러다임과 비견될 만큼 하나에서 열까지 개념적인 재구축이 아이들의 정신 속에서 요청된다. 6세에서 11세까지의 아동의 경험을 다룬 한 연구에서는 대지에 대한 사고가 팬케이크와 같은 평평한 대지라는 최초의 멘탈 모델에서 시작해서 이 전제를 선생님이나 책에서 얻은 정보와 조정하기 위해 아이들이 시도하는 다양한 중간적인 모델을 거쳐 최종적인 구 모양의 대지에 이른다는 발달의 시퀀스를 특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Vosniadou 1994; Vosniadou&Brewer 1992; 그림 1 참조).

 

그림1. 대지의 메타모델. Vosniadou&Brewer(1992: 549)에서 게재.

 

그런데 이 연구에 비판적인 이들도 있다. 많은 아이들이 이 실험에서 직면하는 조정의 문제는 세계에 대한 아이들 스스로의 직관 혹은 ‘소박한 이론’에 관여한다기보다 말한 것 혹은 질문에 의해 유도된 내용을 정당화하기 위한 실험상황의 요청과 관계한다고 비판자들은 주장한다. 이 비판자들은 실험 중의 아이들이 대지의 형상에 대한 어떤 신념이나 직감 혹은 이론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부터 오픈마인드적이라고 주장한다. 아이들의 지식은 교사 등의 지식을 가진 성인뿐만 아니라 교실 한구석에 있을 법한 지구의까지, 발판이 되는 사회·문화적 환경과 느슨하게 연결된 단편적인 모습으로 조금씩 획득된다. 여기서 넘어야 하는 최초의 관념적 장벽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적절한 발판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큰 어려움 없이 지구의의 ‘과학적’ 이해를 획득할 수 있다. 실제로 아이들에게 기성의 그림들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실험에서는 그 그림들을 그들 스스로 그리게 하거나 대화에 답하게 했을 때 작은 아이들과 큰 아이들 간에, 나아가 아이들과 어른들 간에 그 이해에는 거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Nobes, Martin&Pangiotaki 2005).

 

나는 이 논의에서 특정한 입장을 취할 생각이 없다. 그것은 지식의 획득이 생득적인 정신구조에 의해 결정되는가 혹은 학습의 사회문화적인 맥락에 더 근저적으로 의존하는가라는, 심리학에서 오랜 기간 지속되어온 논쟁의 또 다른 버전에 불과하다. 필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두 진영의 공통된 요소다. 이 두 논의 진영은 대지의 형상에 관한 ‘과학적으로 올바른’ 설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그에 반하는 다른 인식들은 정도의 차가 있을지언정 모두 잘못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더욱 기묘한 것은 대지가 있는 장소에는 하늘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두 진영이 합의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여하간 하늘의 성질과 형상에 관한 ‘과학적으로 올바른’ 설명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앞서 개략한 논쟁에서 대립적인 각각의 입장의 대표적인 연구에서 ‘올바른’ 사고방식으로 간주되는 두 사례를 살펴보자. 첫 번째 입장의 사례에서 실험자의 질문에 응한 여섯 살의 에단은 대지는 공의 형상을 취하며 그것을 보기 위해서 사람들은 발밑을 보아야 하고 대지는 우주(space)에 완전히 둘러싸여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험자가 에단에게 대지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커다란 원을 그리고 그 안에 대륙과 같은 형태의 윤곽을 그려 넣는다. 다음으로 실험자는 “그러면 하늘을 그려줘”라고 말한다. 당황한 에단은 “하늘은 형태가 없어”라고 반론하면서 “우주를 말하는 거지?”라고 되묻는다. 그럼에도 그는 하늘을 그려야 했고 대지를 나타내는 원 주변에 또 하나의 둘레를 덧그린다(Vosniadou&Brewer 1992: 557; 그림2 A 참조).

 

그림2. A: 에단이 그린, '하늘'에 둘러싸인 구형의 대지. B: 다아시가 그린 하늘과 (집이 있는) 지면 및 구형의 대지. Vosniadou&Brewer(1992: 558)에서 게재.

 

두 번째 입장의 사례에서 실험자는 대지, 사람들, 하늘에 관한 다음의 항목들에서 선택 가능한 16개의 조합이 하나씩 그려진 그림카드 한 세트를 준비했다. 대지: 고체의 구/평평한 구/떠 있는 구/원반, 사람들: 빙 둘러 서 있다/위에만 서 있다, 하늘: 빙 둘러 있다/위에만 있다. 아이들(5세에서 10세)과 어른들까지 포진된 참가자들에게 각각 우선 현실의 지구와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카드를 선택하게 했다. 다음으로 ‘가장 비슷한 것’에서 ‘가장 비슷하지 않은 것’까지 순위를 정하기 위해 남은 카드에 대해서도 동일한 절차를 밟아나갔다(Nobes, Martin&Pangiotaki 2005:52-4). 피실험자의 3분의 2정도는 최초의 선택지로서 고체의 구를 빙 두른 사람들과 하늘이 배치된 조합을 선택했다. 이 조합의 그림에서 대지는 녹색과 갈색이 섞인 구로 표현되고 경직된 레고 모양의 사람들이 그것을 빙 둘러 서 있으며 구름을 묘사하는 것 같은 둥실둥실한 하얀 문양이 드문드문 그려진 강물 색의 배경을 하고 있다(그림3). 연구자는 대다수의 참가자들의 이 선택이 “지구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를 드러낸다”고 설명한다(Nobes, Martin&Pangiotaki 2005: 55-7). 그러나 이 그림은 기묘하게도 역설적이다. 구 모양을 한 고체의 대지의 바깥 표면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배치되는 한편, 하늘은 대지의 배경으로 깔리고 뒤를 쳐다 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그러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대지를 구로 인식하기를 촉구하는 관점은 구름이 점재된 푸른 하늘의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없다.

 

그림3. 사람들과 하늘이 에워싼 구형의 대지. Nobes et al.(2005: 54)에서 게재.

 

구 모양의 대지와 하늘을 한 장에 그려 넣으려는 시도에 수반되는 관점의 이중성은 두 번째 실험의 참가자와 마찬가지로 첫 번째 실험의 참가자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에단은 실험자가 하늘이 아닌 우주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우주는 우리 주변 일대에 있다는 이해를 전달하기 위한 의사표시로 바깥쪽의 원으로 그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실험의 다른 참가자인 아홉 살의 다아시의 반응은 조금 색다르다. 다아시는 실험자의 요청에 응하여 둥근 대지를 그리고 달과 별 또한 그려 넣었다. 이때 실험자는 에단에게 한 것과 똑같이 다아시에게도 하늘을 그려줄 것을 부탁한다. 에단과 마찬가지로 다아시는 이 질문에 당황한다. “그것은 뭔가 이상해”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럼에도 그녀의 해결책은 구름의 밑단과 매우 비슷한 대충 몇 개의 수평선을 종이 상단에 이미 그려져 있는 대지, 달, 별의 위에 그려 넣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험자가 “사람들은 어디에 살지?”라고 묻자 다아시는 종이 하단에 밑 부분이 있는 것처럼 집을 그려 넣었다. 실험자가 같은 질문을 반복하자 다아시는 또 다른 집을 그려 넣었다. 세 번째 물었을 때 다아시는 결국 실험자의 요구에 굴복하여 집 하나를 지우고 막대 모양의 인간을 둥근 대지 위에 그려 넣었다(그림 2B 참조). 그런데 이것은 일련의 대화를 불러일으켰다. “이 집은 대지 위에 있는 거지?”라고 실험자는 지워 없어진 집 옆에 아직 남아있는 집 그림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좀 전에는 둥글게 그렸으면서 왜 이 대지는 평평한 거야?” 그 후 다음의 대화가 이어졌다.

 

다아시: 그래도 그것은 지면에 있기 때문이야.

실험자: 그렇긴 하지만 왜 평평하게 보이도록 그린 거야?

다아시: 그래도 지면은 평평하잖아.

실험자: 그렇긴 하지만 대지의 모습은...

다아시: 둥글지.

(Vosniadou&Brewer 1992: 570)

 

실험자에게 다아시는 둥근 대지의 표면과 평평한 대지의 표면이라는 관념 사이를 왔다 갔다 헤매는, 마치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기서 실험자가 깨닫지 못한 것은 다아시가 대지(earth)와 지면(ground)의 구분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완벽하게 수미일관된 모습을 취한다는 것이다. 다아시의 설명에 따르면, 그림에 그려진 대로 대지는 정말이지 둥글다. 그러면서도 사람이 사는 집은 지면 위에 지어졌고 지면은 평평하다. 즉 그림 속 집은 지면에 있고 결코 대지의 표면에 있지 않다.

 

물론 ‘earth’라는 말은 문맥에 따라 다양한 사물을 뜻할 수 있다. 발밑의 지면(ground)을 가리키는 데 사용할 수 있으며, 흙(soil) 그 자체를 가리킬 수도 있다. 혹은 이 혹성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실험의 인터뷰의 맥락에서 대지는 분명히 마지막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다아시는 그에 따른 구분을 지키기 위해 ‘ground’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실험자는 그 구분을 인식하지 못했다. 다시 검토해보면, 과제 전체를 혼란에 빠뜨린 것은 하늘을 덧그려서 혹성으로서의 대지의 그림을 완성하라는 실험자의 지시였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늘과의 관계의 차원에서 대지는 그 위에 사람들이 생활하고 그 생활이 만든 현상학적인 지면의 모습으로만 그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결과는 하나의 완결된 그림이 아니라 같은 페이지에 이중으로 그려진 두 개의 전혀 다른 그림이었다. 하나는 우주로부터 그렇게 보일 것이라는 우리 혹성의 그림이며, 또 하나는 거주자의 현상학적 세계에 나타나는 그대로의 지면과 하늘, 사람들이 사는 주거의 그림이다. 그러나 실험자들은 그 결과를 보고하면서 그들 자신의 관점의 이중성을 피험자에게 투영한다(Vosniadou&Brewer 1992: 569-71). 이와 같이 다아시는 그 외의 많은 피험자들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대지 모델(dual earth model)’의 소유주다. 즉 그 모델은 대지는 평평하다는 소박한 전제와 공처럼 둥글다는 성숙한 이해 사이를 매개하는 수많은 합성모델 중 하나다(그림 1).

 

두 개의 대지모델에 따르면, “대지는 두 개 존재한다. 하늘에 떠있는 둥그런 것과 사람들이 사는 평평한 것이다”(Vosniadou&Brewer 1992: 550). 두 개의 대지모델의 소유주는 지면에 서서 하늘을 쳐다보면서 구름, 태양, 달, 별뿐만 아니라 주민들 자신이 표면에 발 딛고 서 있는 또 다른 대지도 볼 수 있다. 이 파란 하늘에 떠 있는 구 모양의 대지는 앞서 다룬 두 사례 연구 중 후자에서 ‘올바른’ 그림 카드에 표현되어 있는 것과 완전히 동일한 관점을 보여준다(그림 3). 연구자에 따르면, 이 카드를 선택한 아이들은 “사람들과 하늘이 대지 주변에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Nobes et al. 2005: 59). 물론 과학적으로 말하면 대지를 감싸고 있는 것은 대기며, 그것은 대지와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희박해지는 가스 상태의 덮개다. 카드에 그려진 하늘이 대기의 정확한 표현으로 이해되리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으며, 실험자도 그렇게 의도한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이 카드를 선택한 피험자는 하늘의 디자인을 일상의 경험에서 실제로 본 형태와 색깔을 그려 넣는 일종의 벽지로 다루었고 그 위에 아마도 교실 한쪽에 놓여있는 눈에 익은 지구의를 모델로 하는 완전히 다른 대지의 이미지를 덧그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다아시가 혹성적인 대지와 발밑의 지면을 구별할 필요성을 제기했듯이, 대지를 견고한 구 모양이라고 여기는 생각에 완전히 길들여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혹성을 둘러싼 대기와 머리 위의 하늘을 구별하고 싶어 할 것이다.

 

이 하늘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실제로 첫 번째 사례의 실험자는 “아이들에게 하늘을 그려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은 어른들에게는 기묘하게 보일 것이다”라고 인정한다(Vosniadou&Brewer 1992: 544).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과제의 목적은 하늘이 대지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과 하늘이 대지를 감싸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을 판별하는 것이다.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둥근 대지 위에 하늘을 그린 다아시는 과학적으로 부정확한 두 개의 대지 모델을 표명한 반면, 대지의 주변에 원을 그린 에단은 올바른 구 형상 모델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대기라는 관념을 결여한 에단은 실험자들이 언급하는 것이 하늘이 아닌 우주라고 생각했다. 다아시는 하늘이란 인간이 거주하는 지면으로 인식된 대지의 그림에서만 그려질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거주에 관계된 이상 하늘은 ‘위’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실험자들은 확실히 알지 못했지만) 알고 있었다. 정말이지 실험자들은 함께 작업한 아이들과는 달리 근본적으로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들은 “우리가 지구의 대지의 바깥쪽에 살고 있다는 생각은 반직감적이며, 일상의 경험과도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Vosniadou&Brewer 1992: 541). 바로 그대로다. ‘과학적’ 관점에서 인간은 대지의 주자(住者 exhabitants)다. 그러나 우리가 밟고 있는 이 지면과 마찬가지로 하늘 또한 사람들이 거주(inhabit)하는 세계의 일부다. 요컨대 하늘은 경험에 주어진 세계, 즉 현실의 물리적인 차원이 아닌 현상학적인 차원에 속한다. 혼란의 원인은 실험자가 이 차원들 간의 구별에 실패했다는 데에 있다.

 

 

대지를 설비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거주자의 관점에서 세계의 형상을 그릴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유력한 접근법 중 하나가 제임스 깁슨의 선구적인 작업인 『생태학적 시각론』(Gibson 1979)에서 제시된다. 깁슨은 우선 그가 ‘물리세계’와 ‘환경’으로 불리는 것들 간의 구별을 강조한다(1979: 8). 혹성인 대지는 자기를 둘러싼 대기와 함께 물리세계의 일부를 이룬다. 대지와 대기는 해양과 지표면에 생명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환경은 그 속에 거주하는 생명의 형태와의 관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환경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거주자 주변에 상황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다. 환경은 물리세계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이지만 공간 속의 사물과 신체의 현실이 아니라 그곳에서 삶을 영위하는 존재자의 현실이다. 이렇듯 상정된 환경은 “매질(medium)과 물질(substance) 및 양자를 나누는 면(surface)에 의해 적절하게 기술된다”고 깁슨은 주장한다(1976: 16).

보통 인간에게 매질이란 공기다. 당연히 호흡을 하기 위해서는 공기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공기는 약간의 저항과 함께 우리가 움직이고 일하고 무언가를 만들고 사물에 접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또 방출된 에너지나 규칙적인 진동을 전달하고, 그에 따라 우리는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 나아가 공기는 후각 수용체의 흥분을 일으키는 분자를 확산시키기 때문에 냄새를 맡을 수 있게 있다. 깁슨에 따르면, 그렇기 때문에 매질은 이동과 지각을 제공한다. 반면 물질은 이동과 지각의 상대적인 저항이다. 물질은 바위나 자갈, 모래, 진흙, 나무, 콘크리트 등과 같은 어느 정도의 경도차가 있는 모든 종류의 것들을 포함한다. 이것들의 소재는 생명에게 불가결한 물리적 기반을 설치한다. 여하간 우리는 서 있기 위해서도 그것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것들을 통해서 이동하거나 지각할 수 없다. 물의 지위는 양의적이다. 물고기와 같은 수생생물에게 물은 매질이다. 인간과 같은 육상생물에게 그것은 물질이다. 그런데 이 양의성은 그 자체로는 생물과 매질의 구분을 무효로 만들지 않으며, 다만 환경의 질이 특정한 생명 형태와의 관계에서만 고찰될 수 있다는 논점을 부각한다(Gibson 1979: 16-21).

 

매질과 물질의 접점이 된다. 면은 방출된 에너지가 반사하거나 호흡하는 장소며, 진동이 매질에게 전달되는 장소며, 매질로의 증발이나 확산이 발생되는 장소며, 우리의 신체가 접촉하는 장소다. 지각에 관여하는 만큼 면은 “거의 모든 활동이 그 속에서 행해지는 장소”(Gibson 1979: 23)가 된다. 모든 면에는 고유한 특성이 있다. 그것은 특정한 그리고 상대적으로 지속적인 배치를 통해 변형과 붕괴에 저항하고 특유의 형상과 특징적이고 물질적인 결(texture)을 만들어낸다. 깁슨은 그 실례로서 자질구레한 주변의 면면을 담은 각기 다른 종류의 여섯 장의 사진을 제시한다. 나무의 단면, 하늘의 구름, 풀 베인 초원, 직조된 천, 잔물결이 일렁이는 연못, 그리고 돌무더기. 어떤 사진이더라도 표면의 결을 보고 그것이 어떤 면인가를 바로 특정할 수 있다(1979: 26-7). 우리는 면에 반사된 빛이 가지는 고유한 산란 패턴에 의해 시각적으로 결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런데 역으로 만약 포위광 속에 변별 가능한 패턴이나 구조가 없다면 그 속에서 특정 가능한 결은 존재할 수 없으며 면을 지각하는 대신 공허함만을 느낄 따름이다(Gibson 1979: 51-2).

 

하늘의 지각은 좋은 사례다. 청명한 여름날의 결 없는 푸른 하늘과 발밑의 대지의 결을 비교하면, 대지의 면은 통상 지면으로 불리는 무언가로 지각되는 반면 머리 위의 하늘은 끝없는 공허의 공간으로 지각된다. 깁슨에 따르면, 지면이란 “지상의 환경의 문자 그대로의 기초……그 외의 모든 면의 규준이 되는 면이다”(1979: 10, 33). 그것은 중력에 의해 대지로 이끌린 사물을 떠받치며, 대지와 하늘이 만나는 것처럼 보이는 지평선을 향해 뻗어나간다. 대조적으로 하늘은 면을 가지지 않는다. 다만 하늘의 결 없는 공허함 속에, 예를 들어 구름처럼 하늘 속에 면을 특정할 수 있는 결 있는 영역은 가능하다. 그래도 하늘의 노을구름은 예를 들어 강우로 지면에 내려앉은 물방울과 다르다. 물방울이 마르면 하나의 면(물의 면)이 사라지고 또 다른 면(마른 흙의 면)이 남는 반면, 구름이 사라질 때에는 어떤 면도 남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만약 숲 속에서 위를 쳐다보면 천장처럼 위를 덮은 나뭇잎들이 머리 위의 결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것들 사이의 빈공간은 하늘로 열려 있으며 우리는 단지 틈을 볼뿐이다. “새가 나는 것은 그것들 사이의 틈이다”라고 깁스는 말한다(Gibson 1979: 106).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하늘에 대한 깁슨의 설명에는 모순이 있다. 만약 하늘이 공허함의 전형이라면, 또 올려다 볼 때 지각되는 것이 그 공허함이라면, 하늘은 거주 환경의 일부인가 아닌가? 환경은 틈을 가질 수 있는가? 환경은 정말로 ‘열려’ 있는가? 깁슨이 이에 긍정적으로 답하는 것 같은 구절이 있다. 예를 들어 그는 환경이 공간 중의 사물, 즉 닫힌 윤곽선의 형태와 공허한 공간에 정지된 것들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환경은 오히려 “대지와 하늘로부터 이뤄지며 대지 위에 그리고 하늘 안에 산, 구름, 불, 일몰, 돌, 별이라는 다양한 물(物)을 가진다”(1979: 66). 이처럼 구름과 일몰 혹은 별은 환경 중에서 하늘로 불리는 부분에 위치 지어진 현상으로서 제시된다. 하늘은 거주자의 세계를 형성하는 두 부분, 혹은 반구의 한쪽이다. 또 다른 한쪽은 대지다. 거주자가 서 있는 지면은 대지-하늘의 경계며 수평선, 즉 “하늘과 대지를 가르는 상반구와 하반구 간의 경계의 큰 원”(1979: 162)으로 확장된다.

 

외견상 이 우주관은 ‘중공구(hollow sphere)’ 모델과 유사하다. 그것은 두 개의 대지 모델과 마찬가지로 평평한 대지의 관념과 고체의 구인 대지의 관념 사이를 매개한다. 중공구 모델에서 대지는 아랫부분이 고체이고 윗부분이 속이 빈 볼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두 개의 반구지대 사이의 평평한 경계면에 서 있다. 그들에게 하늘은 머리 위의 돔으로 나타난다(Vosniadou&Brewer 1992: 549-50 그림 1 참조). 그러나 이 우주관과 깁습의 모델 간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깁슨의 모델에서는 거주자의 지각에서 ‘구형의 영역’은 무한하다. 지평선은 거주자와 함께 이동하기 때문에 경계가 될 수 없다. 지평선에 도달하거나 지평선을 횡단할 수 없다. 사물은 가로막힌 장벽을 뚫고 시야에 들어올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은 위를 볼 때 닫힌 면에 둘러싸인 자기를 발견하지 않는다. 하늘 아래의 생명은 열림 속에서 살고 있으며 평평한 기반과 돔 형상의 상부를 가진 중공반구에 국한되지 않는다. 깁슨은 바로 그 국한이라는 사고가 윤곽을 그리는 실천에서 비롯된 인공물임을 시사한다(1979: 66). 그러나 하늘은 윤곽을 갖지 않으며 그것을 그릴 수 없다. 그릴 수 있는 것은 하늘 사물이며 하늘 비춰진 실루엣이다.

 

그런데 깁슨은 다른 곳에서 “열린 환경은 좀처럼 혹은 전혀 일어날 수 없”으며 그렇게 열린 환경에서 생명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1978: 78). 보통 상황에서 환경은 언덕과 산, 그리고 동물과 식물, 물체와 인공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사물들로 “넘쳐나고” 있다. 혹은 달리 말하면, 환경은 설치된다(furnished). 그리고 깁슨은 “대지를 정비하는 것은 방에 배치된 가구처럼 대지를 생활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구름이 없는 하늘은 이러한 조건으로 보면 거주 불가능하고, 따라서 생물체에게 어떤 부분의 환경도 되어줄 수 없다. 새는 그 속을 날 수 없다. 그리고 텅 빈 대지는 서 있거나 걷기 위한 기반 이외의 그 무엇도 거주자에게 제공할 수 없다. “대지에 설치된 것들은 그 외의 모든 행동의 기반을 제공한다”(1979: 78). 깁슨이 생각하는 지각자는 열림에 남겨지는 만큼 앞서 묘사한 심리학적 실천 속에서 대지의 면의 “바깥쪽에 들러붙은” 인형처럼 세계의 외주자로 나타난다. 이렇듯 사람들은 무대 위의 배우로 연기를 계속하기 위해 비품과 배경이 설치된 면에 단 한 번 입장할 수 있다. 무대장치를 배회하듯이 혹은 다락방에 들어간 집주인처럼 이 사람들은 지저분하게 어질러진 세계의 한복판을 신중하게 걷도록 운명 지어진다.

 

환경은 단지 대상(object)만이 아니라 “대지와 하늘로부터 이뤄진, 대지 위에 그리고 하늘 속에 있는 대상”(1979: 66)이라고 깁슨은 말한다. 다음으로 그는 대상으로 다뤄지는 사물들을 생각해본다. 대지 위에는 산과 돌과 불이 있으며 하늘에는 구름과 일몰과 별이 있다. 대지 위의 사물들 중에 아마도 돌만이 통상의 의미에서 대상으로 간주될 것이다. 이때에도 각각의 돌은 그 주변의 돌들이나 그것이 있었던 지면과 흘러들어온 과정과 분리되어야 대상이 될 수 있다. 언덕은 대지의 면에 있는 대상이 아니다. 대지의 면을 형성하고 대지와 불가분하게 연결된 풍광(landscape)으로부터 자의적으로 떨어져 나와야만 언덕은 대상으로 사고될 수 있다. 또 불은 대상이 아니라 연소과정의 출현이다. 하늘을 살펴보자. 천문학적인 중요성이 어떠하든지 간에 별은 대상이 아닌 빛의 점으로 지각된다. 일몰은 태양이 태평양의 저편으로 가라앉음과 동시에 일시적으로 하늘을 물들이는 빛남으로 지각된다. 구름 또한 대상이 아니다. 모두 법칙성이 없는, 매질의 흐름 속에서 번영하고 흐르는 잠시잠깐의 팽창이다. 구름을 관찰한다는 것은 구름에 설비된 물품들을 본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오지 않는 형성-과정의 하늘/정보(sky-in-information)의 잠시잠깐의 출현을 포착한다는 것이다.

 

진정 열린 세계에서는 그 자체로서의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상은 자신 안에 갇혀서 세계에 등을 돌리고 자신에 이르게 된 경로와 차단하여 응결된 외면만을 누군가의 시선에 방치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린 세계에서는 안팎이 없으며 다만 오고 감(coming and going)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생성적인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것은 형성, 팽창, 성장, 융기, 발생이므로 대상을 산출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열린 세계에서 언덕은 융기한다. 또 언덕은 언덕을 오름으로써 혹은 멀리 있는 그 모습을 눈으로 좇음으로써 경험된다(Ingold 2000: 203). 불은 타오르는 불꽃의 흔들거림과 연기의 소용돌이와 그 열에 의해 알 수 있다. 돌은 구른다. 돌의 둥근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은 당연히 이 굴러다님이다. 돌 위를 걸을 때 밭 밑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낮에는 태양이 뜨고 밤에는 달과 별이 빛난다. 구름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그것들(they are)이란 그 빛나는 각각이며 피어오르는 각각이다. 언덕이란 융기하는 것이며, 불이란 타오르는 것이며, 돌이란 구르는 것이다.

 

즉 깁슨의 주장과는 반대로 하늘과 대지의 열린 지구가 거주 가능한 환경으로 변해올 수 있었던 것은 대상으로 설비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설비된 세계란 실물의 모형, 즉 실내로 끌고 들어와 전용의 공간에 재구축된 세계다. 그 세계에서 언덕은 무대장치처럼 지면위에 설치되고 별, 구름, 태양, 달은 매달린다. 이 본뜬 세계(as if world)에서 언덕은 융기하지 않으며 불은 타지 않으며 돌은 구르지 않으며 태양과 달과 별은 빛나지 않으며 구름은 피어오르지 않는다. 겉모습은 그럴 듯하지만 환상에 불과하다. 단1도 진행되지 않는다. 단 한번 무대가 설치되고 모든 준비가 완료되면 활동을 개시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열린 세계는 그들을 위해 새롭게 준비되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열린 세계는 서서히 사람들 주변에서 형태를 잡아간다. 열린 세계는 바로 그러한 형성과 변용의 과정의 세계다. 만약 그러한 과정이 지각의 본질이라면 그것은 또 지각된 것의 본질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어떻게 이 세계에 살아갈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각자와 지각된 현상 이 모두가 불가피하게 침투당하는 세계-형성의 동적인 과정에 착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세계의 응결된 물질과 그것이 보여주는 견고한 표면으로부터 물질이 그 속에서 형태를 취하며 녹아들어가는 매체로 시야를 옮겨야 한다. “대부분의 활동이 일어나는” 곳은 깁슨이 생각한 면 위(1979: 23)가 아니라 매질에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생명의 바람

 

야외/열림에서 아무 것도 없다 하더라도 매질은 중지하지 않는다. 매질은 거의 언제나 유동상태에 있다. 때로는 이러한 흐름이 거의 지각되지 않을 만큼 미비하지만, 때로는 나무를 부러뜨리거나 건물을 쓰러뜨릴 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것은 풍차를 움직일 수 있고 선박을 세계각지로 보낼 수 있다. 이 매질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가 바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바람이 부는 것을 어떻게 알까? 나는 몇 년 전 이 질문을 하버드대학 학생들에게 한 적이 있다. 그때 우리는 기후와 땅(land)의 관계(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살펴보겠다)에 대해 토론하는 중이었다. 나는 실내에서 학술적인 문헌을 통해 논의할 수 있는 것과 야외에서 주변 땅과 함께 기후에 녹아들어가면서 논의할 수 있는 것과의 차이를 검증하고자 했다. 그리고 땅과 기후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그것들 속에서 생각하는 것은 매우 다르리라고 예측했다. 우리는 대개 실내에서 생각하거나 글을 쓰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설비된 실내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다시 말해 이 내부공간에서 쫓겨난다면 외주자 외에 어떤 자가 될 수 있을까를 상상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메를로-퐁티의 표현을 빌면, 대지와 하늘의 열린 세계를 사유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사유의 환경의 고향”(메를로-퐁티 1967: 62)으로서 인식하는 것은 어떤 차이를 발생시킬까?

 

이 질문에 답을 내기 위해 우리는 교외를 거닐기로 했다. 그날은 화창한 봄날이었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고 미풍이 불었다. 우리는 미풍을 만질 수 없다. 그러나 학생들이 인정했듯이, 얼굴의 튀어나온 부분과 호흡을 통해 미풍이 불어온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처음에 이 느낌은 당혹감으로 다가온다. 바람을 만질 수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느낄 수 있을까? 이 난제를 풀기 위해 우선 느낀다는 것(feeling)과 만진다는 것(touch)이 촉감을 가리키는 데에서 단순 교환 가능한 용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는 매일의 일상 속에서 무언가를 만들 때, 사용할 때 혹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할 때 등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진다. 그리고 친밀한 사교의 형식에서 우리는 타자를 만지고 타자는 우리를 만진다. 만진다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특정기관, 특히 손, 입술, 혀, 발을 통해 이뤄진다. 그러나 느낀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 전체에 스며드는 것이다. 느낀다는 것은 특정한 개인이나 사물에 대한 신체적 접촉을 기도하는 방식이라기보다 자기와 그 주변 간의 어떤 종류의 상호침투다. 그것은 메를로-퐁티가 말한 것처럼 세계가 준비한 ‘우리에게 침입하는’ 존재방식이자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메를로-퐁티 1974: 168). 따라서 느낀다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것 일뿐만 아니라 우리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지각자와 세계 간의 혼효는 만지는 대상으로서의 사물과 만지는 주체로서의 지각자, 이 둘을 분리시키기 위한 존재론적 전제다. 그리하여 무엇보다 느끼지 않고 만질 수 없다.

 

요컨대 바람을 느끼는 것은 이 혼효를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만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만지는 것이다. 좀 더 생각해보면, 촉각적인 지각에 대한 이 이해는 시각적인 혹은 청각적인 지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다시 하늘의 현상으로 되돌아가보자. 하늘은 바람 이상으로 지각의 대상인 것은 아니다. 하늘이란 우리가 그것 보는 무언가가 아니다. 우리가 교외를 거닐면서 모든 종류의 현상을 볼 수 있는 것은 햇빛에 비춰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은 빛 속에서 보이는 무언가가 아니라 빛남 그 자체다. 바람을 느낀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람의 빛은 지각자와 세계 간의 혼효로서 경험되며 그것 없이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바람 속에서 만질 수 있듯이 우리는 하늘 속에서 본다. “하늘의 푸름을 바라보는 나는 무세계적 주체로서 그와 마주보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에 몸을 싣는다. 나는 이 신비함 속으로 들어간다. …하늘이 다가와 나와 하나가 됨으로써 나는 하늘 그 자체가 된다. …나의 의식은 이 무한한 푸름으로 채워진다”라고 메를로-퐁티는 쓰고 있다(1974: 19-20). 여기서 메를로-퐁티가 언급한 신비함이란 시각의 신비함이며, 사물이 보인다는 완전한 일상성의 이면에는 본다는 근원적인 경험이 있음을 발견한 경이로움이다. 빛은 바로 이 발견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Ingold 2000: 264-50). 마찬가지로 음의 신비함은 우리가 듣는다는 발견 속에 있다. 우리는 우리를 감싸는 주변의 바람 속에서 만지고 하늘 속에서 보고 비 속에서 듣는다. 신학자인 존 헐은 성인이 된 후 시력을 잃은 자신의 경험을 서술하면서 바로 태양이 세계를 빛에 적시듯이, 내리는 비가 어떻게 세계를 음에 적시면서 “모든 것의 윤곽을 분명히 하는지”를 묘사한다. “나의 신체와 비는 섞이면서 하나의 청각적으로 촉각 가능한 3차원의 우주가 되고 그 속에서 신체를 통해 나의 의식은 뻗어간다”(Hull 1997: 26-7, 120).

 

그리하여 열린 세계에 산다는 것은 매질의 흐름, 즉 햇빛, 비, 바람의 흐름에 잠기는 것이다. 이 잠김은 각각 보는 것, 듣는 것, 만지는 것의 능력을 우리에게 부여한다. 물론 바람을 느끼고 반응하는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마찬가지다. 니콜 레벨(Revel 2005)은 필리핀의 파라완 고산족이 어떻게 새와 특별한 관계를 맺는지를 기술한다. 새는 아주 일시적이긴 하나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동료로서 고찰된다. 이 관계에 대한 그들 자신의 해석은 연날리기의 실천으로 응축된다. 대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그 위에 잎사귀나 종이를 붙여 만드는 연은 새를 모방한 것이다. 연날리기는 육생의 인간이 조류인 동료를 경험할 수 있는 공유 가능한 매개다. 연날리기 기수는 얼레를 쥐고 실을 풀어 바람과 장난치면서 새가 날개로 느끼는 것을 느낀다. “대지에 붙어 있는” 파라완족의 연날리기 기수는 “하늘에서 꿈결 같은 기분이 되고 이 고양의 느낌은 하늘을 빙글빙글 도는 덧없는 공작물의 반짝임과 일치한다”(Revel 2005: 407). 새가 된 그들의 의식은 연에 생기를 부여한 것과 동일한 공기의 흐름에 투사되어 대기의 변덕스러움에 시달린다. 그러나 대상으로만 설비된 본뜬 세계에서는 연도 새도 날 수 없다. 대상들의 세계에 바람이 들어설 여지는 없다. 바람은 단지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람이 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예를 들어 불이나 구름이 대상이 아니라는 것과 같다. 불이 타오르는 것이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과 같이 바람은 부는 것이다. 바람은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속하며, 세계에 대한 무언가의 실물모형에 속하지 않는다. 새는 공기의 ‘틈’을 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모든 나무는 활처럼 휜 기둥과 줄기 속에 자기를 키워준 바람의 흐름의 흔적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인류학과 물질문화연구 분야에서는 마치 사람들과 물질적인 사물이 실제로 이미 그곳에 있는 것처럼 기술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게 되면 지각은 서로에 대해 활동하는 신체화된 인격과 물질화된 사물 간의 상호작용이 된다. 나아가 만약 사물이 ‘반응한다(act back)’면 그것은 바로 인간과 마찬가지로 사물에도 행위주체성(agency)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다시 연의 사례를 살펴보자. 땅에 발 딛은 기수는 실이라는 경로를 통해 연에 작용하고 하늘의 연은 그에 상호적으로 기수에 작용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추측할 수 있다. 이(것)들의 활동을 통해 양자는 서로의 움직임에 대한 스스로의 움직임에 지속적으로 반응한다. 그런데 연은 기수의 행위주체성에 대항하는 독립적인 행위주체성을 가지고 있어서 나는 것이 아니다. 연이 나는 것은 바람의 흐름 속에 떠 있기 때문이다. 이 흐름이 단절되면 바람은 죽은 새처럼 생기를 잃고 축 늘어져 지면에 떨어진다. 바람을 품은 연에 의해 실이 팽팽하게 당겨진다면 그것은 상호작용의 힘이 발휘되는 것이다. 또 다른 사례로 크리스토퍼 틸리의 풍광(landscape) 현상학 탐구를 살펴보자. 틸리는 화가와 나무를 상상해보라고 주문한다. “화가는 나무를 보고 나무는 화가를 본다. 이는 나무가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고 화가의 감정을 흔들어(affect) 화가를 움직이게 하기 때문이다. … 이 의미에서 나무에게는 행위주체성이 있으며 단순한 수동적인 대상이 아니다”(2004: 18). 그리고 나무는 멈추지 않는다. 나무는 바람 속에서 흔들리고, 연필을 쥐고 그 나무의 고유한 곡선을 그려나가는 화가의 시각-수작업적인 몸의 움직임은 나무 그 자체의 움직임과 공진한다. 공기의 흐름 속에서 급강하하는 연의 움직임에 기수의 몸의 움직임이 공감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기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연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화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나무가 아니다. 오히려 기수와 연, 화가와 나무처럼 상호 공진하는 움직임은 매질의 흐름과 마찬가지로 적심/잠김을 기반으로 한다. 조금이라도 그(것)들이 상호작용할 수 있는 것은 이 적심/잠김 때문이다. 만약 바람이 없다면, 기수는 연과 상호작용할 수 없고 화가는 나무와 상호작용할 수 없다. 조금 더 일반화해서 말하면 사람과 사물로 환원된 세계에서 상호작용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단순히 사물에게 ‘행위주체성’을 부여할 뿐이라면 이 세계에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것이 아니다. 정말이지 과도하게 선언된 ‘행위주체성의 문제’는 우리 자신의 창작물이며, 그 연원은 현실에 대한 전도된 관점에 있다. 즉 다양한 종류의 형태들(forms)에 생기를 불어넣는 생세계(生世界)의 동적인 잠재력을 형태 그 자체 속에 분배된 내적인 속성으로 사고하고 그로부터 세계가 움직여나간다고 상정하는 관점이다(Ingold 2005b: 125). 이것은 마치 강이 흐르는 원인이 소용돌이와 강둑의 상호작용에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강의 흐름 그 자체가 없다면 상호작용하는 소용돌이도 강둑도 있을 수 없음을 간과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매질의 흐름이 없다면 사람도 나무도 새도 구름도 불도 일몰도 혹은 우리가 고찰해온 다른 모든 현상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논의는 바로 생명이 의미하는 것과 관계한다. 우리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새나 나무도 살아있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를 그 자체로 이미 닫힌 실재들이 거하고 있는 곳으로 추측하는 사고의 관습은 생명이 사물의 내적 속성이 아닌 무언가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저 멀리 떼어놓는 것이 아닐까? 오히려 생명 속에 사물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사물은 끊임없는 생성의 흐름에 감긴다. 모든 실재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부여된다는 인식은 고전적인 인류학 문헌에서 ‘애니미즘’의 우주관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에 의한 존재론적인 제약(commitment)의 저류로 흐르고 있다. 전통적인 오랜 사고관습에 의하면 애니미즘은 실로 비활성의 사물에 생명과 정령을 불어넣는 신념의 체계다. 그런데 이 사고관습은 이중으로 오해를 일으킨다. 하나는 애니미즘이 세계에 대한 신념체계라는 오해다. 애니미즘은 세계 속에 있는 방식의 하나인 것이다. 그것은 폐쇄성보다 개방성, 즉 항상 유동상태에 있는 환경에 대한 감수성과 응답성을 특징으로 한다. 또 하나는 애니미즘은 사물 속에 생명을 주입한다는 오해다. 애니미즘은 생명을 만들어내는 운동으로 사물을 복귀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거의 모든 애미니즘적 우주관이 바람에 최고의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바람은 사람들의 삶에 형상과 방향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가 창조적(이고 파괴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바람은 행위주체성을 가지지 않는다. 바람이 곧 행위주체성이다. 반복해서 말하건대, 바람은 불어옴이며 부는 무언가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임은 그들이 무엇을 한다는 그 자체다. 따라서 바람에 인격적 힘을 복귀시키는 것은 어떤 기묘함도 아니고 의인화도 아니다.

 

열린 세계는 내부도 외부도 아닌 오가는 것임은 앞서 고찰했다. 메를리-퐁티는 화가의 작업을 논하면서 “당연히 존재에는 흡기(吸氣 inspiration)와 호기(呼氣 expiration)가 있다”(19666: 266)고 말한다. 숨을 마시고 내쉬면서 사람은 매질과 통섭하면서 개방한다. 흡기란 숨이 되는 바람이며, 호기란 바람이 되는 숨이다. 호흡에서 오고감의 교차는 생명의 본질이다. 수많은 언어에서 생명과 바람 그리고 호흡을 나타내는 단어가 병행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 사고를 뒷받침한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 애니미즘 개념의 기반이 된 ‘생기를 들이마신다(animate)’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animare(삶을 부여한다)와 anima(숨)에 유래하며, 바로 이 둘은 그리스어의 anemos(바람)에서 유래한다. 즉 생명은 그 생성하는 형태와 함께 매질의 흐름에 휘감긴다. 데이비드 메컬리가 쓴 것처럼 “대기의 두터움에 잠기는 머리 혹은 소용돌이치는 바람에 휘감기는 가슴과 다리와 함께 우리는 공기의 영역에서 반복적으로 호흡하고 사고하며 꿈을 꾼다”(Macauley 2005: 307). 바로 이 때문에 열림 속에 산다는 것은 생명이 신체의 모습을 띤 견고한 거푸집 속에 직조되거나 말려드는 것과 같은 육화(肉化)의 경험이 아니다. 또 정신이 세계의 물질적인 흐름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나가는 이탈의 경험도 생겨날 수 없다. 바람을 느끼고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뱉는 것은 오히려 세계 속에 형성의 파동을 계속해서 만드는 것이며 메를로-퐁티가 사람들과 사물들의 “끊임없는 탄생”(1966: 266)이라고 한 것에 영원히 입회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모든 호흡이 세계가 스스로를 그러한 곳으로 열어 보여주고자 하는 바로 그 순간에 토해낸 최초의 호기인 것처럼. 이 속에서는 바람이 신체로서 육화하기보다 신체가 호흡 속에 풍화(風化 enwinded)한다.

 

 

기후-세계

 

나의 관심은 내부에 산다/거한다(inhabit)는 것이 무엇인지, 즉 닫혀 있기보다 오히려 열려 있는 세계-구의 안에 산다/거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하는 데에 있다. 이 세계에 장벽은 없으며 거주자 각각의 다양한 이동에 따라 조금씩 노출되는 지평선만이 있을 따름이다. 평상은 없으며 단지 발아래의 지면이 있다. 천정은 없으며 머리 위 활을 그리는 하늘만이 있다. 설치된 비품은 없으며 형성과 함입만이 있다. 나는 앞서 우리가 주로 실내에서 사고와 집필을 하기 때문에 문서에서 묘사된 세계를 마치 닫힌 내부 공간에 이미 완비된 것처럼 상상한다고 지적했다. 그 본뜬 세계에는 오직 사람들과 사물들만 거하며 바람, 비, 햇빛, 안개, 서리, 눈 등으로 경험되는 매질의 흐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바로 이 점으로 인해 인간과 물질세계의 관계에 관한 모든 논의가 실질적으로 이러한 매질을 누락하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이에 대해 지금까지 설명했다. 내가 제시한 대안은 열림의 관점이다. 이 관점은 사물에 의해 구비가 끝났다는 세계의 면 위에서 생명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거주자들은 구비가 끝난 면을 횡단하는 것이 아니라 형성-과정의-세계 속을 통과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거주자가 그 속을 움직이는 매질의 흐름이 가장 중요하다.

 

이제 이 결론과 더불어 나와 학생들이 애버딘셔의 유원지를 걸으면서 고심한 문제로 되돌아왔다. 기후와 땅의 관계란 무엇인가? 이 둘은 지면에 의해 분할되는 서로 다른 영역, 즉 각각 하늘과 대지, 매질과 물질로 귀속되는 것일까? 요컨대 깁슨의 관점에서는 그러하다. 그는 “대기환경의 매질은 기후라 부르는 어떤 종류의 변화를 쉽게 받아들인다”고 한다(1979: 19). 따라서 기후는 매질 속에서 진행 중인 무언가다. 그러나 대지의 물질은 이 진행 중인 것을 투과하지 않는다. 지상의 면은 상대적으로 견고하고 불투명하며, 매질과 물질은 각각의 영역을 견지하면서 섞이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대지가 땅이라는 형태를 취하면서 하늘에 등지고 그 이상의 교류를 거부하는 것 같다. 그에 따라 기후는 땅 위를 휘감으면서도 그 형성에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거주자가 알고 있듯이 비는 경작지를 진흙의 바다로 만들고 우박은 견고한 바위를 깨뜨리고 번개는 여름의 건조한 땅에 산불을 내고 불어오는 바람은 모래를 모래 언덕으로, 눈은 눈덩이로, 호수와 바다에 파도를 일으킨다. 알래스카의 코유콘 사람들의 환경인지에 관한 한 연구에서 리처드 넬슨이 서술한 것처럼 “기후는 쇠망치고 땅은 철침”이다(Nelson 1983: 33). 땅이 매질의 흐름에 반응하는, 보다 미세하고 정밀한 방식도 있다. 서늘한 여름 아침에 식물의 덩굴이나 거미줄을 장식하는 이슬을 생각해보자. 혹은 수풀의 떨어지는 잎사귀나 구부러진 나무줄기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 남겨진 흔적을.

 

경험이 풍부한 거주자는 어떻게 땅을 바람과 기후의 치밀한 기록부로 읽어낼 수 있을까? 코유콘 사람들은 캠프파이어의 불꽃이 갑자기 타오르는 정도에 따라 태풍의 도래를 예감할 수 있고 유핏크족의 노인은 눈을 뚫고 나온 식물의 언 꽃송이의 방향이나 얼어붙은 호수의 눈의 ‘파도’로부터 탁월품의 방향을 읽어낼 수 있다(Bradly 2002: 249, Nelson 1983: 41). 그러나 땅을 읽어낼수록 물질의 끝과 매질의 시작을 확신에 차서 분석하기가 어려워진다. 바람과 기후가 그 흔적을 땅에 남기는 것은 바로 매질과 물질의 결부(binding)를 통해서다. 따라서 땅 자체는 양자를 분리하는 경계면이 아니라 모호하게 고정된 혼효와 혼합의 영역대가 된다. 누구나 여름에 침엽수림을 걷노라면 ‘지면’과 현실이 명료하게 나뉘는 면이 아니라 덩굴, 낙엽, 암설, 이끼, 돌과 바위, 나뭇가지, 크레바스의 균열, 나무뿌리의 엉킴, 늪과 습지를 뒤덮은 부초 등이 얽히고설킨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느 장소의 지하는 딱딱한 돌덩이로 이뤄져 있고, 어느 장소는 청명한 하늘 위에 있다. 그런데 생명은 그 중간지대에서, 생물의 거대함과 계속해서 견고해지는 환경을 관통하는 능력에 조응한 그 깊이 속에서 살아간다.

 

이 의미에서 생물은 땅 속에서 사는 것이지 그 위에 사는 것이 아니다. 매질과 물질이 혼합되지 않는 세계, 즉 견고한 구 안에 대지가 갇혀 있고 하늘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 세계에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이 거주하는 곳은 어디라도 물질과 매질의 경계면의 분리가 교란되고 상호 침투되며 연결된다. 생명이 세계를 통해 스스로 성장하고 운동하며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과정을 통해 매질과 물질을 연결시키는 것은 살아있는 생물 그 자체의 본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성장과 운동에서 생명은 계속해서 전개되는 직물의 일부가 된다. 땅은 말하자면 항상 커나간다. 고고학자가 과거의 삶의 흔적을 해명하기 위해 땅을 파지 않으면 안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땅을 하나로 묶는 것은 만져질 수 있는 얽히고설킨 거주자들의 삶-선들(life-lines)이다. 바람 또한 땅을 불어서 물질과 혼합시키며 오솔길이나 산길에 통과의 흔적을 남긴다. 바람(wind)은 ‘구부러짐(winds)’이다. 그렇게 비틀어진 경로를 따라 지상의 여행자는 길을 떠난다. 경로는 때로 밧줄과 닮았다. 사미족 사람들은 자신들의 오랜 전통 속에서 밧줄에 매듭을 묶으면 바람이 멈추고 풀면 다시 불기 시작한다고 한다(Helander&Mustonen 2004: 537). 이처럼 땅과 기후의 관계는 대지와 하늘의 불투명한 경계면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묶고 푸는 관계다. 열린 세계에 살아가는 일은 기후를 물질적인 삶의 형태와 연결하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땅의 결을 짜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묶으면 경계는 사라진다. 매듭이 그것을 만든 실을 포함하지 않는 것처럼 묶는 것이 세계를 포함하거나 닫는 것이 아니다.

 

묶는 것이 생명이라면, 그것을 푸는 것은 불이다. 우리는 난로 연기에서 역의 변화, 즉 매질과 물질을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휘발적인 모습으로 물질을 매질로 방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기후-세계에서 연기는 촉발됨에 따라 공기의 흐름과 혼합, 구름으로 응축되기도 한다. 내가 조사한 핀란드 북부에서는 전통적으로 모든 거주가 ‘연기’로 설명된다. 한적한 한겨울에 백야가 하늘에 수직으로 올라서면 아무리 멀리 있다 해도 그 설명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서 난로가 있는 주거지는 그 안에서 영위되는 삶과 마찬가지로 열린 세계에 속한다. 살아있는 신체가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의 규칙적인 운동에 의해 유지되는 것처럼 주거지는 거주자의 끊임없는 오고감에 의해 지탱된다. 따라서 따뜻한 외투와 같이 거주자의 주위를 에워싸는 주거지로서의 ‘실내’를, 앞서 서술한 닫힌 공간에 재구축하는 본뜬 세계의 ‘실재’로부터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자가 삶을 위한 장소라면, 후자는 일종의 컨테이너다. 말할 것도 없이, 세계 전체를 내부로 가지고 들어와 자기완결적인 생활공간을 만드는 것은 근대건축에서 오랜 야망이었다. 이 봉쇄된 귀결의 일부는 장대한 계획을 유지하기 위해 그 자체로 불가피한 측면의 교란을 시야에 드러나지 않게 숨김으로써 대지와 하늘의 완전한 분리라는 환상을 창출했다. 이와 동일한 관점에서 근대건축에서 난로가 점차 사라지게 된 경위를 해명할 수 있다. 난로가 주거지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내몰리는 한편 연기는 길게 이어지는 굴뚝의 내부로 격리되었다. 공장의 높은 굴뚝은 연기를 내뱉으면서 대지와 하늘의 절대적인 분리를 소리 높여 선언하고 그와 동시에 불꽃이 타오르는 교란의 지점을 은폐시켜버렸다. 그런데도 굴뚝의 역사는 아직까지 쓰이지 않고 있다.

 

출발점이 된 대지와 하늘의 이미지로부터 참으로 멀리 왔다. 그 이미지는 구 모양의 대지가 윤곽선의 하늘에 완전히 둘러싸인 에단의 그림에 응축되어 있다(그림 2 A). 아마도 과학적으로는 ‘올바른’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는 그림은 사람들을 대지의 외면에 외주자(外住者)로 남겨둘 것이다. 우리는 ‘거주가 가능한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질문했다. 깁슨은 사람들이 활동 속에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사물들로 박혀 있는 열린 대지의 면을 상상하라고 회답한다. 이 관점에 의하면 세계가 열려 있지 않고 오히려 닫혀 있는 한에서 지상은 환경으로서 거주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폐쇄는 부분적인 것 이상으로 확장될 수 없으며 바로 이 때문에 거주자는 크든 작든 세계로부터 추방자의 지위에 머물 수밖에 없다. 반면 나는 열린 세계에는 대상이 없다고 주장한다. 열림에 거주하는 것은 닫힌 면 위에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기후의 끊임없는 움직임 속에서 매질의 흐름에 잠기는 것이다. 생명은 거주자의 존재 전체를 관통하며 만져지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이러한 흐름에 잠겨 있다. 이 기후-세계에는 대지와 하늘을 분리하는 명확한 면이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은 물질과 매질이 존재자를 조성하는 혼합의 영역에서 살아가며, 존재자는 그 활동을 통해 기후-세계를 땅의 결로 묶는다. 그림4는 외주(外住)로부터 거주(居住)로의 이론적 여행을 추적한 것이다.

 

그림4. A: 대지의 외주자, B: 기후-세계의 주거(내) 거주자.

 

알래스카의 코유콘 족은 그들의 세계에 거주하는 존재들을 수수께끼를 통해 불러들인다. 수수께끼를 내는 자는 수수께끼에 언급된 존재의 주체의 위치를 점하고, 익숙한 인간의 움직임으로 그 존재를 모방함으로써 마치 그 자신이 수수께끼의 대상이 된 것처럼 특징적인 움직임을 표명한다. 그 존재들은 마치 일련의 바람처럼 모든 것을 휘감으며 결코 멈추지 않는 기후-세계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움직임들이다. 이 세계는 누구도/개체로서의 어떠한 일자(一者)도 가지지 않는다(no-one).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멈추는 것은 없으며 수수께끼를 내는 자가 불러오는 이미지가 나타나건 말건 사라져간다. 20세기 초엽 예수회 사제인 줄리안 제티가 기록한 수수께끼 중 하나에서 수수께끼를 낸 자는 그 자신을 한 묶음의 풀이라고 생각한다.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저기 주변을 나는 온몸으로 쓸어낸다

over-there around I-sweep-with-my-body

(Jetté 1913: 199-200)

 

수수께끼를 낸 자는 빗자루(broom)며 빗자루은 쓸어내는 것이다. 그는 바로 첫눈 위를 의연히 뚫고 버티는 풀처럼 자신의 주변을 쓸어낸다. 바람 속에서 풀을 꺾거나 땅 위에 쌓인 부드러운 눈을 만지면 작은 원 모양이 그 주변을 쓸어낸다. 아마도 이 수수께끼는 에단이 그린 대지와 하늘 그림과는 스펙트럼의 대극을 이룰 것이다. 이 수수께끼는 거주자의 관점에서 본 대지, 하늘, 바람 그리고 기후의 다양성의 총체를 정밀도와 같이 응축하고 있다. 여기서 세계의 전체는 한 묶음의 풀 안에 있다. 한여름 햇빛을 받아 대지로부터 맹아를 틔우고 지금은 겨울의 추위에 얼어붙어 바람에 흔들리는 그 풀은 눈 속에 소구획을 창출함으로써 세계 내에 자신의 장소를 만든다. 이러한 운동을 통해 모든 살아있는 생물체는 열린 세계에 거하는 것이다.

 

 

 

Earth, Sky, Wind, and Weather. Journal of the Royal Anthropology Institute 13: S19-38, 2007.

(http://onlinelibrary.wiley.com/wol1/doi/10.1111/j.1467-9655.2007.00401.x/full)

「大地、空、風、そして天候」(古川不可知訳)『現代思想』2017年3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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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rantoya

2015년 12월 현대사상 '인공지능' 특집호에서 논문 한편을 번역했다. ANT를 공부하면서 이론적 한계로 내가 느낀 점을 잘 정리한 글이다. 행위자의 특성은 관계성에서 주어지는 것인데, 그것을 행위자로 실체화하게 되면 관계성의 사실성이 소거된다는 바로 그 점을 논리적으로 잘 분석해놓았다. 중간에 예시로 든 일본에서 행해진 장기버전의 "알파고와 인간의 대전"의 소상한 내용 부분은 생략했다. 아무래도 일본장기에 무지한 (나를 비롯한 일부) 독자들에게 독해의 흐름을 방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 그 예시가 없어도 글의 논지는 충분히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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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기계의 인류학: 행위자 네트워크론의 한계를 넘어서

 

쿠보 아키노리(久保明教 기술인류학)

 

 

 

우리는 기계를 사랑하면서도 증오한다. 확실히 인간과 기계의 일상적인 관계는 대체적으로 평온하다. 다기능 전자렌지, 하이브리드카, 스마트폰을 편리한 도구로 볼 것인가, 신체의 확장으로 볼 것인가, 집합지(集合知)의 매체로 볼 것인가의 문제는 별도로 하고, 현대생활이 엄청난 수의 기계와의 밀접한 제휴를 통해 성립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 속에서 기계가 떠받치는 현대사회의 시시비비를 기계에 대한 직접적 언급 없이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AI나 로봇 등의 지능기계를 화제에 올리면, 기계에 대한 우리의 애증은 증폭된다. 우리는 고도로 발달된 기계가 가져오는 빛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운운하는 한편으로, 기계가 지배하는 미래사회의 절망을 그린 소설이나 영화를 끊임없이 생산한다.

 

우리는 지능기계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그들’과 함께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 소박한 질문은 계속해서 중요한 과제로서 제기되면서도 사상의 언어를 통해 정면으로 논의되지는 않고 있다. 프레임 문제를 둘러싼 논의는 기계의 구체적인 양상보다 인간적인 지성의 문제로 제시된다. 가령 현대를 대표하는 어느 사상가는 휴대전화에 대한 자신의 증오의 근간에 자리한 인간적인 욕망을 분석한다. 기계를 둘러싼 문제를 인간에 관한 문제와 접속시킴으로써 우수한 성과물들을 쌓아가고는 있지만, 여전히 사상의 언어를 통해 기계의 구체적인 형태와 동작을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러한 단절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단절을 넘어서 기계와 인간에 대해 동시에 말할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브뤼노 라투르가 제창한 비근대론적 인류학을 길잡이 삼아 그 분석방법으로서 행위자 네트워크론의 한계를 넘어서는 도정을 제시함으로써 기계를 둘러싼 언어의 단절을 중화하고 지능기계와 우리의 관계를 보다 선명하게 파악하는 방법론을 구상하고자 한다.

 

 

1. 기계의 토테미즘

 

기계와 사상 사이를 가로막는 단절의 맹아는 기계를 둘러싼 근대적 사고의 단서가 된 데카르트의 동물=기계설 안에 이미 잠재되어 있다. 조르주 캉길렘(Georges Canguilhem 1904-1995, 프랑스의 생명과학철학자)에 따르면 유기체와 기계의 유비성을 인정하는 데카르트의 논의는 벽시계, 물레방아, 인공분수, 파이프오르간 등 당시의 선진기술에 의거하고 있다. 이 기계들은 도끼나 지레 등 인간의 생체에 ‘달라붙어 있는’ 기존의 도구와 달리, 제작과 시동을 별도로 하면 인간 없이 끝낼 수 있는 자동기계다. 그것들은 원활하게 작동할 때에는 인간의 관여 없이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다. 이때만큼은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유기체와 동일시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기계들은 그 동력원을 (시계나 지레와 비교하면 간접적이지만) 인간에 의지하며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임은 분명하다. 기계는 표면적으로는 개별적인 몸체로 작동하지만 그 내부는 동력과 목적을 부여한 인간과 항상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자연현상에서 ‘기계를 제작하고 동력과 목적을 부여하는 인간’에 대응하는 무언가는 무엇일까?

 

데카르트의 『인간론』의 서두를 장식한 “신체란 신이 가능한 한 자신과 유사한 것을 만들기 위해 완전히 의도적으로 모양을 낸 흙으로 만들어진 상 혹은 기계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 라고 나는 상정한다.”라는 기술에 기초하여 캉길렘은 동물=기계설은 다음의 두 가지 요청에 의해 처음으로 의미를 갖는다고 논한다. 첫째, 동물=기계(‘신체’)를 제작하는 자로서 신이 존재한다는 것. 둘째, 기계의 제작에 앞서 생체가 이데아로서 주어진다는 것.

 

동물=기계는 동력원으로서의 신, 그리고 형상인(形相因) 및 목적인(目的因)으로서 모방해야 하는 생체가 선재함으로써 비로소 생겨날 수 있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인 생명이해가 방기되는 것은 아니고 목적론의 배치가 달라진다. 즉 개개의 생물의 내부에 설정된 요인들은 신이 그것을 모방해서 신체를 만드는 생체의 이데아 및 동력인(動力因)으로서 신에게로 다시금 배치되며 자연 속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온 합목적성이 소거된다. 동물과 인간 신체를 필두로 하는 자연물은 고유의 목적과 영혼을 탈취당하고 객관적인 법칙에 따르는 존재=기계로서 파악된다. 이러한 이론상의 ‘생명의 기계화’를 통해 자연과 동물의 기술적인 이용이 정당화되고 ‘자연의 주인인 소유자’로서 인간이 나타난다.

 

캉길렘의 논의를 부연하면, 신에 의한 자연의 창조를 인간에 의한 기계의 제작에 빗대는 아날로지컬한 개념조작(자연:신::기계:인간)의 산물로서 동물=기계설을 다룰 수 있다. 표면상으로는 자율적으로 작동한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기계를 유기체에 빗댈 수 있는 한편으로, 이면상으로는 항상 인간과 연결된 기계에 빗대어진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유기체에서 합목적성이 소거된다. 나아가 이 개념조작은 이차원적인 인간의 분절화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요인들을 결여한 자연=기계의 일부로서의 신체(연장)와 그것들을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는 이성적인 판단능력을 가진 정신(사유)이라는 구분이 인간적인 영역에 도입된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논한 것과 같이 많은 인류학자가 분석해온 토템 신앙이 자연종들 간의 시차적(示差的) 격차와 인간집단들 간의 시차적 격차 사이에 상동성을 가정함으로써 자연의 체계에 의거하면서 인간사회의 체계를 확립하고자 했다면, 동물=기계설은 인간이 제작한 자동기계를 매개로 자연 속에 있는 분절(자연종/신)과 인간 속에 있는 분절(연장/사유) 사이에 상동성을 가정함으로써 자연의 체계에 의거하면서도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인간적인 영역을 구성하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기계의 토테미즘’에 있어서 벽시계나 파이프오르간 등의 구체적인 기계는 극히 중요함과 동시에 보잘 것 없는 하찮은 존재다. 그것들은 유기체와 기계 사이에 유비성을 보여주는 논의의 입구에서는 주요한 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자연의 주인인 소유자’로서의 인간이 도출되는 논의의 출구에서는 사상적인 동물=기계만이 전면화되며 현실의 기계들은 어떤 중요성도 갖지 않는다. 기계들은 인간이 소유한 자연을 이해하고 억제하기 위한 단순한 도구(실현기구나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기술)로 격하되며, ‘자연의 주인인 소유자’로서의 인간의 지위를 이성에 의해 정당화 내지는 비판하고자 하는 사상적 논의와는 저 멀리 멀어진다. 데카르트의 논의가 당시의 선진적인 기술의 구체적인 양상에 의해 가능해진 것, 즉 ‘이성적인 정당화에 대한 기계 제조의 선행성’은 모조리 망각되고 만다.

 

그런데 사상의 언어로부터 조금 떨어진 장에서 기계들은 그 존재감을 다시 강화한다. 기계와의 다름을 통해 인간적인 영역의 분절(연장/사유)이 보장되는 이상, 기계들 그 자체가 이 분절을 넘어 인간에 접근한다면 ‘자연의 주인인 소유자’로서 인간의 지위는 보증될 수 없다. 사상적인 기계와 달리 현실적인 기계들이 어떤 성질을 가질 수 있는가는 미리 확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기계 제조의 선행성’이 재생된다. 그것은 생물과 외견상 구별할 수 없는 정밀한 동작이 가능한 기계, 인간적인 사유를 실현한 기계, 자동기계(automaton), 로봇, AI 등으로 불리는 지능기계가 실제로 제작되는 것에 대한 기대와 공포라는 모습을 취하며 대중문화와 기술들이 교차하는 영역에서 다시 개화된다. 선행성의 망각이 떠받치는 사상의 언어를 통해 구체적인 기계들을 말하는 것은 항상 이차적인 것으로 밀려난다. 선행하는 기계들의 인간적인 영역으로의 삽입이 사상적으로 화제가 되면서 사상적 기계로의 변환을 통한 인간적인 영역으로서의 접속이 중심화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피하기 어려운 도정이라 할 수 있다.

 

 

2. 하이브리드한 위조품

 

그렇다면 이제까지 살펴본 사상과 기계의 단절, 사상에 의한 기계의 선행성의 망각을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까? ‘기술적 기계’나 ‘장치’ 등의 사상적 기계의 현대적 형상과 그 계보를 정밀하게 조사하여 현실적인 기계들과의 접점을 활성화시키는 것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본고에서는 우선 구체적인 기계들로 건너가기 위해 사상적 전통을 의도적으로 경시하는 몇몇 야만적인 논의, 브뤼노 라투르가 제창한 비근대론적 인류학을 참조하기로 한다.

 

브뤼노는 우선 근대라는 기구(Constitution)를 떠받쳐온 이중성을 주목한다. 즉 근대적인 지(知)와 제도는 자연과 사회, 과학과 문화, 인간과 비인간, 주체와 객체라는 대구로 표현되는 두 개의 영역을 표면상으로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순화’한 후 양자를 비대칭적으로 파악하는 한편, 그것들을 항상 암암리에 연결시키는 ‘번역’ 혹은 ‘매개’를 통해 양자의 혼합인 하이브리드한 존재를 증식시키는 이중의 실천에 의해 구동되어 왔다고 논한다.

 

근대주의자는 ‘순화’와 ‘번역’이라는 이중의 실천 속에서 전자에만 초점을 둠으로써 근대사회와 그 이외의 사회 혹은 근대과학과 문화적 전통을 대립시키고 양자를 비대칭적으로 파악한다. 이에 반해 라투르가 제시하는 것은 ‘번역’이나 ‘매개’가 이뤄지는 국면에 초점을 맞추고 양자를 대칭적으로 파악하는 ‘비근대론’(Non-Modernism)의 입장이다.

 

비근대론에서는 근대와 비근대, 과학과 문화가 그 본성상의 차이에 의해 환원론적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과 비인간을 불문하고 다양한 행위자(actor)가 엮어내는 관계의 그물망이 어떤 규모와 어떤 방식으로 조직되는가라는 점에서부터 연속적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관계의 그물망이 ‘행위자 네트워크’라고 하는 것인데, 그 속에서 모든 행위자의 형태와 성질은 항상 다른 존재자와의 관계들(네트워크)을 통해 만들어진다. 행위자 네트워크론(이하 ANT)은 네트워크의 운동을 통해 다양한 존재가 나타나고 변화하며 소멸되어 가는 과정을 추적하고 기술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제창되었다.

 

라투르의 논의를 검토하면 왜 근대인이 로봇이나 AI 등의 지능기계에 이 정도로 열중해왔는가가 명확해진다. 데카르트가 행한 아날로지컬한 개념조작은 유기체를 기계와 동일시함으로써 그 잉여(‘동물=기계가 아닌 것’)로서의 근대적인 인간상을 확립하고 인간에 고유한 영역(‘사회’와 ‘문화’)과 자연(을 해석ㆍ제어하는 과학ㆍ기술)의 영역을 엄밀하게 구별하는 ‘순화’를 추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그것은 인간에 무한히 접근하는 지능기계라는 특권적인 하이브리드를 순화의 바로 옆에 부상시킨다. 순화의 이면에서 수행되는 무분별한 번역이 사상(捨象)되는 한편, 지능기계—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기계인간’—만이 마치 유일무이의 중요한 하이브리드인 것처럼 표상되며 기계들의 발전을 가능하게 만드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계들의 인간에 대한 지배나 반란에 대한 공포가 운위된다는 것이다. 지능기계는 근대적인 사고틀이 사상(捨象)하는 번역의 영역으로 이성을 꾀어내는 주요한 회로임과 동시에 극단적인 지배/피지배의 서사를 통해 번역의 운동으로부터 그 즉시 눈을 돌리게 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한 모조품으로서 활약해왔다.

 

매일의 대인 커뮤니케이션의 상당부분을 SNS와 이메일을 통해 행하는 현재 우리의 생활은 반세기 전의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기계에 지배받는, 하이브리드화한 사람들의 디스토피아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화의 구분을 착각할 뿐이다. 우리는 자신의 주체적인 양상이 스마트폰, 페이스북, 카톡 등의 기계들과의 하이브리드화를 사상(捨象)하고 그것들을 편리한 도구로 활용하는 인간이라는 순화된 자기 이미지를 멋지게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2045년에 대단히 유능한 지능기계가 나타난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반세기 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30년 후의 사람들을 오해할 뿐이다. 현재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한 기계들의 지수함수적인 발전의 가능성이 아니라 그러한 발전에 수반되는 주체로서 일할 수 있는 인간의 양상을 단적으로 상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현실적인 기계들이 가속적으로 앞서감에 따라 순화와 번역이라는 이중구조 그 자체가 마침내 사상적으로도 기술적으로 타당성을 잃어가고 있는 사태를 목도하고 있다.

 

 

3. 네트워크의 구멍

 

라투르의 비근대론적 인류학에 기반하면, 근대인은 지능기계의 중요성을 적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제창된 ANT는 유감스럽게도 현대에서 지능기계의 움직임을 정밀하게 검토하는 것 이상으로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 물론 로봇과 AI로 불리는 동력기계와 소프트웨어를 행위자로 다루면서 그것들이 과학적ㆍ사회적ㆍ문화적 요소를 포섭하며 어떤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가는 분석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분석은 그 기계/소프트가 왜 로봇과 AI로 불리는가를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로봇과 AI는 기계나 소프트가 인간이나 생물과의 유비성 속에서 파악될 때에 비로소 나타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나 생물과 ‘닮았다’는 술어적 요소가 부여되지 않는다면, 기계와 소프트는 로봇이나 AI가 될 수 없다. 일반적으로 로봇이나 AI의 연구자로 간주되는 사람들이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기계공학자나 인지과학자로 명명되는 것은 그들의 존재가 과학적인 정의를 항상 벗어나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비성을 어떤 모습 속에서 찾아낼 것인가에 따라 지능기계의 정의는 항상 쉽게 변신된다. 따라서 지능기계가 인간이나 생물이 기계와 결부되는 관계성의 한 가운데에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들이 아무것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ANT에서의 행위자는 다른 행위자에 대해 어떠한 작용을 부여할 수 있는가를 검토하는 ‘시행’의 과정을 통해 그 움직임이 명확하게 정의된다. 행위자는 다른 행위자에게 다양한 작용을 행하는 주어적인 존재자다. 인간적인 주체성과 비교하면 그 힘에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확실한 주체성을 가진 무수한 행위자들이 상호 능동적/수동적으로 작용함으로써 행위자 네트워크는 운동한다. 이 때문에 ANT에서 분석의 초점은 네트워크의 운동이 안정화하여 자명한 현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필수적인 통과점’)을 맡는 행위자에 있다. 바로 그러한 중심적인 행위자가 될 수 있는 생화학자를 주역으로 한 라투르의 저작 『프랑스의 파스퇴르화(The Pasteurization of France 1984)』가 마키아벨리즘적인 과학자상(像)에 안이하게 의거한 분석으로서 사회학자 부르디외로부터 격렬하게 비판받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ANT논자가 마키아벨리즘적인 발상으로 방법론을 구축한 것이 아니라 해도 수많은 미세한 주어적 행위자들 간의 투쟁을 통해 이뤄진다는 네트워크 모델 자체가 그러한 발상을 이끌어내고 만 것이다.

 

비환원론을 표방해온 ANT는 그러나 지능기계를 단순한 기계로 환원해버린다. 그것은 기계적 행위자와 유기적 행위자의 관계성이 만들어내는 술어적 요소 자체가 ‘지능기계’라는 실체가 되어 네트워크의 일부를 맡는다는 사태를 ANT에서는 상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술어적 요소가 항상 행위자로 환원되는 행위자 네트워크의 세계에서는 행위자 동료들 간의 관계성 그 자체가 실체화된 존재자라는 수많은 구멍들을 잠재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관계성 자체가 실체적 권역(圈域)을 분리하고 현실적인 기계들과 인간의 상호작용에 주목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례로서 소프트와 인간 간의 치열한 전투에 의해 최근 크게 주목받은 장기전왕전(將棋電王戰)을 제시하겠다.

 

 

4. 두려움을 갖지 않는 기계

 

2011년 제1회부터 2015년 마지막 시리즈까지 4회에 걸쳐 행해진 장기전왕전에서는 최고의 장기기사에 필적하는 소프트의 실력(통산 10승 5패 1무)이 드러남과 동시에 기사와 소프트가 장기라는 게임을 다른 방식으로 다룬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 둘 간의 차이에 대해 제5회 최종국을 다툰 아쿠츠 치카라(阿久津主税)8단과 제2회와 3회 등장한 아베 코오루(阿部光瑠)5단은 각각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은 앞의 수를 계승하는 ‘선(線)’으로 사고합니다. 따라서 ‘선’이 연결되지 않을 때는 무언가 착각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바로 예정변경을 해야 할지 말지를 고심하여 다음의 한 수를 선택합니다. 컴퓨터는 한 수가 두어지면 그 국면에서 새로운 수를 덧붙여 생각하면서 두 수, 세 수를 앞서 가며 최선의 수를 선택합니다. 인간이라면 이 흐름을 탈 수 없는 수가 나오는 것이지요. 그 의미에서 [컴퓨터는] ‘점’으로 사고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한 수를 둘 때 자신과 상대가 두었던 수들에 대응해야 하므로 읽어야 하는 양이 늘어나고 그만큼 피로도가 쌓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불리해지는 변화를 두려워하고 읽기 어려워하기 때문에 보다 안전한 길을 가려고 하지요. 그러나 컴퓨터는 두려움 없이 읽고 밟아나갑니다. 강할 수밖에 없어요. 두려움이 없다, 지칠 줄 모른다, 이기고 싶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길이 평탄하지 않아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이는 모두 장기 기사들에게 필요한 덕목입니다.

 

‘선의 사고/점의 사고’, ‘두렵다/두렵지 않다’라는 대구로 기사와 소프트의 차이를 다루는 두 사람의 각기 다른 표현은 그러나 실전의 국면에서는 밀접하게 결부되어 나타난다. 우선 선의 사고와 점의 사고라는 대구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사례로서 제2회 전왕전(電王戰) 제3국ㆍ후나에 코헤이(船江恒平)5단-츠츠카나戰을 검토해보겠다. ‘카쿠가와리(角換わり 일본장기의 대표적인 전법 중 하나)’의 전투태세가 되었던 본국에서 선수를 잡은 후나에가 전반부에는 약간 우세했다. 그런데 종반부에 접어들면서 후수인 츠츠카나가 은(銀)을 버리는 기묘한 수를 두었다. 그 수를 읽지 못한 후나에 기사는 그 당시 매우 흔들렸음을 나중에 고백했다.

 

받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믿을 수 없는 수가 날아들었다. 6六銀. 종반부의 거의 막바지, 시급한 국면에서 읽기 어려운 한 수가 두어졌고, 나는 본능적으로 당했다고 생각했다. 긴장, 불안, 초조, 여러 감정이 마음속을 휘젓고 있었다.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국면에 임하고자 했다. 그런데 직후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6六銀은 버리는 수로밖에 읽히지 않았다.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는 ▲6六同龍을 두었다.

 

대국이 끝난 후 검토할 때에 6六銀에 대해 ▲6六同龍과 銀을 두지 않은 방식(▲2七角△5五銀▲5七角)에서는 분명 선수가 이긴다는 결론이 나온다. 후나에 기사가 둔 ▲6六同龍은 결과적으로 거의 안전한 수였다. ▲6六同龍을 받고 다시 한 번 계산을 행한 츠츠카나는 銀을 희생시키고 상대의 玉의 앞을 가로막는다는 한 수 앞을 내다본 흐름(실제로는 츠츠카나의 玉이 가로막혀버렸다)을 버리고, 다른 흐름으로 틀어 △4二步의 수세로 돌린다. 바로 아쿠츠 기사가 말한 “바로 한 수 앞을 두었던 사람과 다른 사람이 두는 것 같은 수”다. 어느 쪽으로든 막히는 변화를 서로 회피하기 위해 국면은 다시 종반부의 입구로 돌아온다. 우세를 의식한 후나에 기사는 급소를 쳐서 승리를 가져오려 했지만 그 수는 점차 흩어져 안타깝게도 패배를 불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생각해보면, 이때부터 내 정신은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을지 모른다. [……] 기다리던 ▲1六步. 그리고 나는 생각을 끝내버렸다. 내가 이긴 것이 아닐까? 그래 분명 내가 이긴다. 나는 판도라 상자를 열어버렸다. 실제로 이 국면은 본국에서 내가 가장 승리에 가까운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또 다른 나는 현장을 떠나버렸다. [……] 승리에 들떠 기쁨에 취하고 싶은 그 유혹에 내가 진 것이다.

 

츠츠카나의 △6六銀→△4二步라는 수는 아쿠츠 기사가 말한 “바로 한 수 앞을 두었던 사람과 다른 사람이 두는 것 같은” 수임과 동시에 아베가 말한 “길이 평탄하지 않아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수이기도 하다. 본국을 관전한 토야마 마사아키(遠山雅亮)5단은 자신의 블로그 기사에 “(△6六銀에 대해 후나에 기사가 두었던 ▲6六同龍에) 인간 상대라면 △5八金으로 응수하고 다음으로 (후나에가 상대의 玉을) 가로막아서 끝나는 흐름을 갖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는 장면에서 소프트는 “두려움 없이” “포기하지 않았다”. 본국뿐만 아니라 전왕전에서 발휘된 소프트의 강점은 아베 기사가 말한 것처럼 장기기사와 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츠츠카나를 포함한 장기 소프트는 본래 공포, 체념, 피로에 대응하는 기능을 갖지 않는다. “두려움이 없다, 지칠 줄 모른다, 이기고 싶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길이 평탄하지 않아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이 성질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지치고 이기고 싶고 마지막에는 포기하기도 하는 인간 기사와의 관계성에서 발생하는 것들이다. 인간과 소프트의 관계성의 한 가운데에서 발생하는 술어적 요소들이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어 최초의 관계성에 재도입될 때 “두려워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소프트의 모습이 나타난다.

 

부정형으로 언급되는 소프트의 존재양상은 매우 순조롭게 관계성에서 실체로 이행하여 그 강한 요인이 되어간다.

 

…[중략]…

 

 

5. 네트워크와 추상적 관념

 

앞 절에서 검토한 것처럼 관계성 자체의 실체화는 그 관계성을 맡는 항이 가진 특성으로 쉽게 대체된다. 통상 우리는 AI나 로봇을 특정한 성질을 가진 확고한 행위자로 다루며, 그것들이 소프트나 기계와 무엇이 다른지를 묻는다면 명확하게 답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전혀 길들여지지 않는 관계성을 문제시 하는 경우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대체를 행하기는 쉽지 않다.

 

인류학의 역사에서 마나와 하우, 정령과 주술 등 추상적이고 내실이 불확실한 관념이 상당히 오랜 기간 타문화 연구의 핵심적인 열쇠가 되어 왔다. 마나와 하우를 도덕적인 강제력을 가진 가치체계의 기반으로 파악한 모스의 주술론과 증여론, 그리고 그것들을 인식론적인 체계에서 제로의 상징적 가치를 가진 기호로 다룬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세계를 인식하고 해석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체계로서 문화를 다뤄왔던 20세기의 주류 인류학은 이 추상적 관념에게 인식체계의 중축을 이루는 중요한 역할을 부여해 왔다.나아가 라투르나 ANT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존재론적 전회’라 불리는 현대인류학의 조류에서는 마나와 하우, 정령과 주술 등 우리에게는 ‘얼핏 비합리적인 신념’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 현지 사람들의 집합적인 실천을 통해 분명한 사실성(reality)을 갖는 과정을 분석해왔다. 그런데 이 존재자들을 ANT의 행위자와 같이 관계성 속에서 나타나는 주어적인 존재로 그려내면, 그 실재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 근대적인 분석틀과의 괴리를 낳고 ‘그들은 그 존재들을 믿고 있다’라든지 ‘그들은 그 상징들을 통해 세계를 해석한다’는 기존의 담론을 ‘그들의 존재론에 따르면 그것들은 실재한다’는 담론으로 대체할 뿐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떨쳐낼 수가 없다. 나아가 추상적 관념을 행위자로 대체해버리면, 정령이나 주술사가 현지 사람들에게도 내실의 불확실한 존재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측면이 사상되고 만다.

 

정령도 지능기계도 그에 익숙한 어떤 사람들에게는 타자에게 분명한 영향을 끼치는 실체며 동시에 그 내실은 여전히 불확실한 존재이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행위자뿐만 아니라 추상적 관념을 노드(node)로 포함하는 존재자들의 네트워크를 구상할 수 있다. 추상적 관념은 행위자 동료들 간의 관계성이 실체화됨으로써 나타나며 확고한 행위자는 되지 않지만 존재자의 네트워크의 일부를 담당한다. 그 네트워크에 익숙한 자에게 추상적 관념은 비교적 쉽게 관계성의 일단을 이루는 항의 특성으로 파악되지만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분명히 존재를 공상하는 기묘한 행위로만 비춰진다.

 

네트워크의 노드로서 추상적 관념의 움직임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미지화하기 위해 우리에게 나름 익숙하지만 그 실재는 긍정되지 않는 관념을 다뤄보자. 코마츠 카즈히코(小松和彦)는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제로의 상징적 가치를 가진 기호”의 일례로서 ‘운’을 검토한다. 코마츠는 다음의 예를 든다. 실력이 그다지 좋지 못한 4인이 마작을 시작한다. 그 중 1인이 평상시라면 예상할 수 없는 승률을 올린다. 그때 그는 “오늘 난 어쩐지 운이 좋아”라며 기뻐하고 다른 이들은 “자네는 운이 붙었어”라며 희한해한다. 그런데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가 내리 지기 시작하고 다른 이들이 이기기 시작하면, “자네는 운을 쫓아냈어”라든지 “이제 운이 돌기 시작하는군”이라고 말할 것이다. ‘운’이라는 관념은 이 이상한 승률을 이끌어낸 요인을 지시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관계항의 특성(“자네는 운이 붙었어”)을 쉽게 부여하지만 그 내실은 극히 모호한 상태다.

 

‘운’이라는 추상적 관념은 어떤 행위자의 행위 결과가 그 당사자의 내적인 조건(실력이나 연습량)과도, 관계하는 다른 행위자의 개입(조언이나 도움)과도 연관된다고 상정할 수 없는 상태에서 발생한다. 마작의 게임장을 구성하는 행위자들의 관계성이 앞서와 같은 이상한 상황을 발생시킬 때 이상성을 띤 관계성 그 자체가 실체화되고 ‘운’이라는 추상적 관념이 발동되기 시작한다. 이 네트워크에 접속된 사람들에게 그것은 비합리적인 인식의 산물이 아니고 분명한 영향력과 내실의 불명료함을 겸비한 네트워크의 노드로서 움직인다. 관계성의 한 가운데에서 발생하는 ‘아름답다’라는 술어적 요소가 ‘아름다움’이 되어 ‘미(美)’로 실체화되고 회화, 아티스트, 미술관 등의 행위자들과 상호 작용하면서 그 내실을 바꿔나가는 것처럼. 추상적 관념은 실천을 배후에서 규정하는 상징체계의 구성요소로서가 아니라 실천을 구동하는 존재자들의 네트워크에 주어적인 행위자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참여하는 존재자로서 파악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추상적 관념을 노드로 포함하는 네트워크론의 구상은 보다 정밀한 이론적 정비와 풍부한 사례의 검토를 거쳐야 하는 잠정적인 모델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내면적인 정신활동에서 파악된 추상적 관념을 구체적인 존재자들과 상호 작용하는 자율적인 관념으로서 파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까운 미래의 특정 시점에 지적능력이 인간을 능가하는 지능기계가 나타나는”, 그 내실이 모호하고 불명료한 관념이 확실한 실효성과 함께 과학적ㆍ사회적ㆍ정치적인 네트워크를 움직이는 현재 상황에서, 그 타당성을 객관적인 데이터와 법칙을 통해 판정할 수 있다고 상정하는 것도, 그 의미를 사람들의 공상과 기대, 문화적 관념과 이데올로기로 환원해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상정하는 것도, 점차 가속화하는 기계들을 둘러싼 네트워크의 운동에 대해 충분히 분석적인 효력을 가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능기계가 인간과 기계의 아날로지컬한 관계성을 통해 나타나는 한, 그 미래의 모습은 기계와 우리의 일상적인 상호작용의 축적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러한 몇몇 낙관적인 조망도가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순화와 번역의 이중구조를 폐기하고 ANT가 그 입구를 제시한 곳에서 머물러 있는 비근대론적 인류학의 흐름을 치밀하면서도 야만적인 방법론으로 추진해야 한다.

 

 

久保明教 「知能機械の人類学─アクターネットワーク論の限界を越えて」 『現代思想』 2015年12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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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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