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의 전반부(http://sarantoya12.tistory.com/84)에 이어 후반부를 번역했다. 이 논문은 1998년의 「Cosmological deixis and Amerindian perspectivism」을 조금 수정해서 2005년 『The land within: indigenous territory and the perception of the environment』에 실린 것이다. 본문의 내용은 세부적인 차이만 있을뿐 전체적으로는 거의 같다. 다만 1998년 논문에서는 우주론(cosmology)에 기반해서 아메리카인디언의 퍼스펙티비즘을 중점적으로 논했다면, 2005년의 논문에서는 퍼스펙티비즘과 다자연주의의 논리(적 연관)을 좀더 부각시켰다. 

 

실은 지난 전반부를 번역했을 때에는 무척 고되었다. 반면 이번에 후반부는 즐겁게 번역했다. 그동안 카스트로의 그외의 글들의 번역과 강의준비와 리뷰를 통해 공부가 늘은 탓이다.

 

카스트로의 이론이 워낙 압축된 논문이라 결코 혼자 독해될만한 것 같지는 않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읽고 서로 파악한 내용을 교환하고 토론해야만 습득되지 않을까 한다. 

 

 

--------------------------------------------------

 

자민족중심주의

 

이제는 매우 유명해진 데스콜라의 레비-스트로스는, 야만인에게는 인간성이 집단의 경계에서 소멸한다는 것, ‘진짜 인간’을 의미하는 대자적인 민족 명칭이 광범위하게 나타난다는 것으로부터 예증된 사고, 바꿔 말하면, 어떤 방식을 통해 외지인을 인간-외의 영역에 속하는 자로 규정하는 것까지 다루는 사고를 논하고 있다. 즉 자민족중심주의는 서양의 가련한 특권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집합적인 생활 본래의 자연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태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태도의 보편적인 상호성을 어떤 일화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

 

아메리카가 발견된 수년 후 대앤틸리스제도[서인도제도의 주요섬군]에서 스페인인은 선주민이 혼을 가지고 있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한 반면, 선주민들은 그들 백인의 사체가 부패하는지를 긴 시간에 걸쳐 확인하기 위해 백인의 포로를 수장하고자 했다(Lévi-Strauss 1952: 329).

 

이 우화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주지하다시피 모순적인 결론을 이끌어낸다. “야만인이란 무엇보다 우선 야만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수년 후 앤틸리스의 사례를 재인용할 때, 레비-스트로스는 퍼스펙티브의 비대칭성을 강조한다. <타자>의 인간성에 대해 조사할 때에 백인은 사회과학에, 인디오는 자연과학에 의지하였고, 백인은 인디오가 동물이라고 결론내린 반면 인디오는 유럽인이 신이 아닌가 의심했다((Lévi-Strauss 1955a: 82-83). ‘동일한 무지에서’ 저자는 후자의 태도 쪽이 보다 더 인간에 적합한 것으로 결론짓는다.

 

여기에서 본 것처럼 이 우화는 이와는 별도의 것을 보여준다. 우선 전체를 아우르는 것은 하나다. 즉 유럽인침략자와 마찬가지로 인디오는 자신이 속한 집단만이 인간성을 구현한다고 생각한다. 외지인은 인간을 동물이나 정령으로부터, 문화를 자연이나 초자연으로부터 구분하는 경계의 반대쪽에 위치한다. 자민족중심주의가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자 매트릭스로서 자연/문화의 대립은 사회적 통각이라는 보편으로서 나타난다. 즉 스페인침략자들에 의한 질문의 해답은 긍정형으로 나타난다. 확실히 야만인은 혼을 가지고 있다.

 

레비-스트로스가 이 글을 썼을 때, 우리가 만든 것과 동일한 구분을 야만인도 만들어낸다고 논증한 것에는 그들의 충분한 인간성을 옹호하기 위한 전략이 숨어있다. 야만인이 그들만이 진정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그들이 진정한 인간임을 증명한다. 우리처럼 그들도 문화를 자연으로부터 구분하고 자연민족(Naturvolke)이 항상 타자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자연과 문화 간의 문화적 구분의 보편성은 인간적인 <자연>으로서의 <문화>의 보편성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제 사태는 크게 변하고 있다. 야만인은 이미 자민족중심적인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우주론적인 중심을 점하고 있다. 야만인은 동물로부터 구분되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우리가 증명해야 하는 대신에 그들이 결코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인간과 비-인간을 대립시키기 위해 이제는 우리가 얼마나 사람이 아닌 사람인지를 드러내야한다. 그들에게 자연과 문화는 동일한 사회-우주적인 영역의 일부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은 인간성과 동물성을 분리하는 데카르트적인 <거대한 분할>을 우회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견해는 생태학의 기본적인 교훈을 예언하고 있으며, 우리는 지금 바로 그것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Raichel-Dolmatoff 1976; Wagner 1977). 이전에는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이 인간적인 속성을 다른 인간에 귀속시키는 것을 거부한 것에 대해 피와 살이 거론되었다. 이제는 우리에 의한 대상화의 한계가 허용되는 한에서 습득해야 하는 ‘생태학적 예지’를 그들이 표할 때에 그러한 속성이 자신의 종의 경계를 저 멀리 뛰어넘어 확장된다는 것을 우리는 강조한다(Århem 1993). 일찍이 야생의 사고를 내추럴리즘의 유아단계인 자기도취적인 애니미즘으로 동화한 것에 반론하기 위해 토테미즘이 인간과 자연 간의 인지적인 구분을 명확히 하는 것임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오늘날 애니미즘은 다시 야만인에 귀속되고, 또 (서둘러 강조하건대 데스콜라뿐만 아니라) 광범위하게 주장되고 있다. 그 속에서 애니미즘은 이분법적으로 생각한다는, 순진하다고는 하지 않더라도 어리석은 탓에 우리 근대인이 항상 시선을 보낼 수 없는, 주체와 객체, 인간과 비-인간의 보편적인 혼교를 둘러싼 진정한 혹은 적어도 ‘유효한’ 지(知)가 되고 있다. 근대적인 오만에서 우리를 구해주는 것은 미개와 포스트모던의 하이브리드(hybrid)다.

 

따라서 두 개의 이율배반은 실은 하나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은 인간성의 관념을 확장하기 위해 자민족중심주의자답게 소극적으로 대처하면서 자연과 문화를 토테미즘에서처럼 대립시킨다. 혹은 그들은 그러한 구분을 표명시키지 않고 우주중심적으로 애니미즘적이기에, 세계에 있는 관점의 다원성을 받아들이는 상대주의적인 관용성의 모델이 된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기-폐쇄적인 것일까? 아니면 오히려 그와 완전히 대조적으로 근본적으로 ‘타자에 열려 있는’ 것일까(Levi-Strauss 1991:ⅹⅶ)?

 

내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이율배반의 해법은 예를 들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태도를 논한 최신버전이 정당하다고 단언하며 그 외의 버전을 전근대-포스트모던의 그늘로 쫓아내자고 하듯이 한 쪽을 선별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테제와 안티테제가 함께하는 진실이지만(양자 모두 견실한 민족지적인 통찰과 일치한다), 동일한 현상을 각기 다른 양상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덧붙이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우주론에는 적합하지 않는 자연과 문화라는 카테고리의 실체론적인 이해를 조정한다는 점에서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으며 양자 모두 부정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점은 저 자민족중심적인 자기언급을 만들어내는, 보통 ‘인간’으로 번역되는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용어는 자연종으로서의 인간을 지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용어가 지시하는 것은 오히려 인격성의 사회적 조건이며, 특히 ‘진정한’, ‘실제’, ‘진짜’ 등의 강조말로 수사되는 경우 체계적이지 않을지라도 용어 논리상으로는 실명사(實名詞, noun substantive)라기보다 대명사로서 기능한다. 그것은 주체의 위치를 지시한다. 언명의 표지라 해도 이름은 아니다. 이 용어는 (‘사람’을 민족명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보통명사가 고유명사가 되는 의미론적인 감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방향으로 (‘사람’을 ‘인간’이라는 집합적인 대명사로 이용함으로써) 명사에서 퍼스펙티브로 나아간다. 이 때문에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집합적인 동일성의 카테고리에는 한 에고의 근친에서부터 인류 전체, 나아가 의식의 모든 존재까지 맥락적ㆍ대조적으로 표시하는 대명사에 특징적인 시야의 특출난 가능성이 부착된다. ‘민족명’으로 응고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민족지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물처럼 생각된다. 문헌에 기록된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민족명의 상당수는 자기언급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민족으로부터 지명된 경우(그 대부분이 멸칭(蔑稱)이다)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민족명에 의해 대상화되는 자는 기본적으로 주체의 위치에 있는 자가 아니라 타자로 격하되는 자다(Urban 1996: 32-44). 민족명은 제3자의 이름이며, ‘우리’라는 카테고리가 아니라 ‘그들’이라는 카테고리에 속한다. 그런데 이것들 간에 일관성이 있다. 그것은 개인적인 고유명사학의 수준에 있는 자기언급의 기피다. 이름은 그것을 운반하는 자나 그 인물 앞에서 발설되지 않는다. 이름 짓기는 외재시키는 것, 주체를 분리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라는 집합적인 자기언급은 ‘사람이라는 종의 성원’이 아니라 ‘인격’을 의미한다. 그것은 발화하는 주체의 관점을 기록하는 인칭대명사며, 고유명이 아니다. 다시 말해 동물이나 영령을 사람이라고 서술하는 것은 그것들이 인격이라고 서술하는 것이며, 비-인간에 주체라는 언표행위의 위치를 점하는 의식적인 지향성과 행위의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은 이 비-인간들이 내려주는 혼과 정령으로서 대상화된다. 주체란 혼을 가진 자이며, 혼을 가진 자는 누구라도 관점을 가질 수 있다. 아메리카 선주민적인 혼과 주체성이란 인간적이든 비-인간적이든 퍼스펙티브와 관련한 카테고리이며, 우주론적인 지시사(指示詞)이기도 하다. 그 분석에 필요한 것은 실체적인 심리학보다도 기호의 용어론이다(Viveiros de Castro 1992b: Taylor 1993b: 1996).

 

이처럼 관점이 부여되는 모든 존재는 주체일 수 있다. 혹은 더 정확성을 기하자면, 관점이 있는 곳에 주체의 위치가 있다. 우리의 구축주의적 인식론이 소뤼르의 정식—‘관점이 대상을 창조하는’ 주체적인 존재는 원초적으로 관점이 그로부터 발생되는 고정된 상태다—에 의해 요약 가능한 반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은 관점이 주체를 창조한다는 선을 따라 전개된다. 관점에 의해 활성화된 것이나 행위능력을 가진 것은 우선 주체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와리(Vilaça 1992), 테네(McDonnell 1984), 마세(Århem 1993) 등은 ‘사람’을 의미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존재의 계층을 표하기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 존재들에 의해 사용될 수 있다. 인간이 사용할 때에는 이 말들은 인간을 지시한다. 그러나 이 말이 멧돼지(peccary)나 원숭이(howler monkey), 비버(beaver)에 의해 사용될 때에는 멧돼지, 원숭이, 비버로 자기 언급된다.

 

그러나 이 비-인간들이 자신을 ‘사람’이라고 부르는 주체적인 퍼스펙티브에 선다, 라는 것만이 생겨날 이유는 없다. 샤먼의 설명 혹은 보통 사람들이 광범위하게 공언하는 바에 따르면, 비-인간들은 자신을 형태학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인간으로 간주한다. 동물을 상징적으로 영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러한 사람화와 문화화를 함의한다. 즉 선주민적인 사고의 인간중심적인 성격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여기서 완전히 다른 것이 문제시된다. 자신에 관한 일인 것처럼(vicariously) 참조항의 관점에 서는 모든 존재는 주체의 위치에 서기 때문에 자신을 사람이라는 종의 구성원으로 본다. 인간적인 신체의 형태와 인간적인 문화—특수한 배치에 ‘신체화되는’ 지각과 행위의 도식—는 앞서 논한 자기-지시와 동일한 타입의 대명사적인 속성이다. 그것들은 재귀적 혹은 통각적인 도식(스트래선(1988)이 말한 의미에서는 ‘물상화’)이며, 이를 통해 모든 주체는 스스로를 파악한다. 즉 축어적이며 구성적인 인간적인 속성이 예를 들어 부적절하게도 비-인간에게 비유적으로 투영될 수는 없다. 이 속성들은 관점에 내재되어 있으며, 관점과 더불어 이동한다. 인간은—태어날 때부터—바로 그 특권(prerogative)을 향유한다. 그리고 헷갈리기 쉬운 형용모순을 바엘이 제시한 것처럼(Baer 1994: 350) “자신을 자신으로서 본다”.

 

확실히 해두자. 혼을 받은 동물이나 다른 존재물은 그것들이 (변장한) 인간이기 때문에 주체인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그것들은 (잠재적으로) 주체이기 때문에 인간이다. 다시 말해 <문화>는 <주체>의 본성이다. 주체는 모든 행위자가 자신의 본성을 경험할 때의 형상이다. 애니미즘은 실체적이며 인간적인 질(質)을 비-인간에게 비유적으로 투영하는 것이 아니다. 애니미즘이 표현하는 것은 인간과 비-인간에 의한 대자적인 관계의 실제적인 등가성이다. 이리는 이리를, 인간이 인간을 보는 것처럼—인간으로서—본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이리’가 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이리는 이리에게 인간이다. 왜냐하면 앞서 보여준 것처럼 인간과 동물에 공통하는 조건은 동물성이 아니라 인간성이기 때문이며, 인간성이란 <주체>가 띠는 일반적인 형상을 표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신체적 형태 혹은 문화적 관습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타입의 의식과 지향성을 비-인간적인 존재에 부여하는 것은 통상 중립적으로 ‘인간중심주의’ 혹은 ‘의인화’로 불린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두 라벨은 대립하는 우주론적인 태도를 지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서양에 광범위하게 보급된 진화론은 어마무시하게 인간중심적이지만 내게는 특별히 의인화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반대로 선주민의 애니미즘은 의인화로 특징지을 수 있지만 분명 인간중심적이지는 않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인간을 제외한 수많은 존재가 ‘인간적’이라고 한다면, 우리 인간은 그렇게 특별한 존재일 수 없다. 구래의 ‘미개의 나르시시즘’은 풍문이 아니다. 나르시시즘의 진짜 사례를 찾아보자면, 근대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예를 들어 청년마르크스가 우리의 종에 대해 기술한 일설을 살펴보자.

 

대상적 세계의 실천적인 산출, 비유기적 자연의 가공은 인간이 의식하는 존재임을 확증한다. (중략) 그렇다, 동물 또한 생산한다. (중략) 그러나 동물은 단지 자신 혹은 그 존재를 위해 직접 필요로 하는 것만을 생산한다. 즉 동물은 일면적으로 생산한다. 그러나 인간은 보편적으로 생산한다. (중략) 동물은 다만 그에 속한 종의 기준과 욕구에 따라 형상을 만들어내지만 인간은 다른 종의 기준에 따라서 생산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Marx 1961[1844]: 75-76 in Sahlins 1996).

 

인간이 “보편적으로 생산한다”는 이 명제를 통해 마르크스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든지 간에 나는 이것을 인간이 보편적인 동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읽힌다. 흥미로운 생각이다. (만약 인간이 동물이라면 다른 동물종 각각은 특수한 인간성인 것은 아닐까?) 인간성은 행위자의 보편적인 형상이라는 점에서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관념 사이를 관통하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마르크스의 판단을 실은 그 순수한 반전이다. 그것은 모든 종들 이상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반대로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이 말한 바에 따르면, 어떤 동물 속에서 지각되는 이상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모든 동물은 인간이 될 수 있다. 완전히 다른 두 의미에서 인간은 보편적 동물이다. 마르크스의 경우에 보편성은 인간중심적인 반면, 선주민의 경우에 보편성은 의인화다.

 

지금까지 내가 논한 것은 인간을 포함한 각각의 종의 대자적이고 재귀적인 관계와 논리적인 등가물을 표현한 것으로서 애니미즘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북미북서부해안의 츠므시족(Tsimshian族)의 우주론에 관한 구절을 살펴보자.

 

주요 신화에 따르면, 인간이 보기에 세계에는 영적인 영역에 둘러싸인 인간적인 공동체라는 틀이 있으며 그 영적인 영역은 모든 존재가 각각의 특징에 따른 삶을 영위하며 상호 존재에 간섭하는 동물의 왕국을 포함한다. 그러나 우리가 동물로—예를 들어 연어로—변신한다면, 연어인간에게 자신은 우리에게서의 인간인 것으로서, 인간은 나스노크[정령] 혹은 연어를 탐하는 곰으로 나타난다. 이 번역의 과정은 몇몇 차원을 횡단한다. 예를 들어 스키나 강에 떨어진 목화 잎사귀는 연어인간에게는 연어다. 잎사귀에게는 연어가 무엇인지를 나는 모르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연어인 것처럼 나타난다고 나는 생각한다—곰처럼 보이지 않는다면(Guédon 1984: 141-42).

 

즉 연어는 인간이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처럼 연어에게 나타나는 것이라면—이것이 애니미즘이다—, 연어는 인간에게는 인간으로서 나타나지 않으며 인간 또한 연어에게 인간으로서 나타나지 않는다—이것이 퍼스펙티비즘이다.

 

아마도 애니미즘과 퍼스펙티비즘에서는 데스콜라의 모델에서 예견되는 것보다 더욱 근원적인 관계가 토테미즘과의 사이에 놓여있다. 왜 동물들(이나 그 외의 자들)은 스스로를 인간으로 보는 것일까? 내 생각에 단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그들을 동물로 보기 때문에 자신을 인간으로 보는 것이리라. 멧돼지가 자신을 멧돼지로 보는 것(그리고 인간이나 그 외의 존재가 그 특징적인 의복 밑에 멧돼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으로부터 보일 때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인간으로 간주하며, 비-인간으로부터는 비-인간으로—동물이나 정령으로—간주된다면, 동물은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인간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 퍼스펙티비론적인 애니미즘의 비대칭적인 비틀림은 토테미즘이 노정하는 대칭성과 매우 흥미로운 콘트라스트를 보여준다. 전자에서 (인간은 자신에 대해 특수한 동물이라는) 재귀적인 동일성의 상관이 인간적인 계열과 동물적인 계열의 관계에 대한 기초가 된다. 후자에서 (한 인간은 한 동물에게, 다른 인간이 다른 동물에 대해서 그러한 것처럼 존재한다는) 차이의 상관이 두 계열을 분절한다. 차이의 상관이 대칭적이고 가역적인 구조를 산출하는 반면, 동일성의 상관은 애니미즘이라는 비대칭적이고 유사투영적인 구조를 산출한다. 내 생각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도 결국은 애니미즘이 주장하는 것이 동물이 인간과 유사하다는 생각이라기보다 동물들은—우리처럼—자기 자신과 다르다는 사고이기 때문이다. 차이는 밖에 있는 외연적인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내포적인 것이다. 모든 것에 혼이 있다면, 이로부터 어떤 분류도 확정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인간일 수 있다면, 틀림없이 인간적인 것은 그 무엇도 아니다. <존재의> 기저에 있다는 인간성은 시사적으로 종 특유의 표상으로서의 인간성을 문제시한다.

 

 

다자연주의

 

주체적인 위치의 다원성을 아우른 세계라는 사고방식은 즉각 상대주의의 관념을 상기시킨다. 분명 상대주의에 대한 직접적 내지는 간접적인 언급은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우주론에서 종종 나타난다. 마쿠나족(makuna族)의 민족지학자인 카이 오렌이 전경으로 밀어낸 다음과 같은 판단을 생각해보자. 오렌은 아마존의 북서부 사람들의 퍼스펙티브적인 우주를 서술한 후에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마쿠나에 관해 말하자면, 현실에 대해 다원적인 관점이 있다는 사고를 포함하는 바, “모든 지각은 동등하게 유효하며 또한 진실하”고 “세계에 대한 진실하고 정확한 하나의 표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Århem 1993: 124).

 

오렌은 확실히 옳다. 다만 제한된 의미에서 그렇다. 인간에 관해 말하자면, 완전히 그 반대로 세계에는 진실로 정당한 하나의 표상만이 존재한다고 마쿠나 사람들은 말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우리가 유체에 들끓는 구더기를 어망 속에 타버린 물고기로서, 독수리에게 보이듯이 본다면, 우리에게 무언가 이상한 일이 생긴 것이라고 결론지을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독수리로 변신하고 있다는 것, 즉 보통 때라면 누구의 평면에도 기재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병 들을 불운의 전조다. 퍼스펙티브는 분리한 채로 있어야 한다. 샤먼만이 종에 관해 양성구유적인 것처럼 각기 다른 종들을 교신시킬 수 있는데, 그것도 특수하고 제약된 조건하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층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의 이론은 오렌이 논한 것처럼 동일한 세계에 대한 표상의 다원성을 상정한 것일까? 민족지학자의 논의를 수용함에 따라 일어나는 것들을 반대로 취하는 것은 여기까지 해두자. 모든 존재는 세계를 동일한 비법으로 본다(표상한다)—바뀐 것은 그것들이 보는 세계다. 동물은 인간과 동일한 카테고리와 가치를 이용한다. 우리 세계처럼 그들의 세계는 어로와 수렵, 요리와 발효주, 교차사촌혼과 전쟁, 의례와 입사식, 샤먼과 추장, 정령을 중심으로 움직인다(Guédon 1984: 142). 달과 뱀, 재규어가 인간을 맥이나 야생돼지로서 본다면, 그것은 우리처럼 그들이 맥이나 야생돼지를, 즉 인간에 적합한 식량을 먹기 때문이다. 이 이외에는 있을 수 없으며 비-인간은 고유의 구역에서 인간이며, 그들은 사물을 인간이 보듯이 본다. 그러나 그들이 보는 곳의 것들은 별개다. 우리에게 피인 것은 재규어에게 발효주다. 죽은 자의 영(靈)에게 부패한 유체인 것은 우리에게 발효된 카사바다. 우리가 진흙탕으로 보는 것은 맥에게는 거대한 의례용 건물이다….

 

얼핏 보면, 이러한 사고방식은 매우 반직관적인 것처럼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지도와 땅의 반전으로서 널리 알려진 착시도처럼 그 자체가 반대물로 변형하듯이 생각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제라드 웨이스(Gerard Weiss)는 캄파족(campa族)의 세계를 “다른 타입의 존재가 동일한 것을 다른 방식으로 보는, 상대적인 외견의 세계”로서 기술하고 있다(1972: 120). 여기서도 부분적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웨이스가 간과하는 것은 다른 타입의 존재가 같은 사물을 다른 방식으로 본다는 사실은 다른 타입의 존재가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물을 본다는 사실의 단순한 귀결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같은 사물’로 간주된다는 것일까? 누군가에 대한 관계에서 무언가의 종과의 관계에 있어서 같다는 것일까? 웨이스의 정식은 물(物) 자체의 망령이 덧씌워져 있다.

 

퍼스펙티비즘은 상대주의가 아니라 다자연주의다. 문화상대주의는 일종의 다문화주의가 전제하는 주관적이고 부분적인 표상의 다양성이며 각각은 외재적으로 통일된 자연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인데, 자연은 그것들의 표상과는 완전히 무관계한 것으로 남게 된다. 아메리카대륙 원주민은 그 반대물을 제시한다. 실재하는 다양성으로 골고루 적응되는 순수하게 대명사적인, 현상학적 혹은 표상의 통일체다. 유일한 ‘문화’와 다원적인 ‘자연’, 즉 불변의 인식론과 가변적인 존재론—퍼스펙티비즘은 다자연주의다. 퍼스펙티비즘은 표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하다.

 

퍼스펙티브가 표상하지 않는 이유는 표상이 정신의 재산인 반면 퍼스펙티브는 신체에 거하기 때문이다. 관점에 설 수 있는 능력이란 의심할 여지없이 혼의 잠재능력이며, 그래서 비-인간은 정신을 가진(혹은 정령인) 한에서 주체다. 그러나 관점 간의 차이—그리고 어떤 관점은 차이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다—는 혼에 없다. 혼은 형식적으로는 모든 종을 관통하는 동일자며, 모든 곳에서 같은 사물을 인식할 뿐이다. 그렇다면 차이는 신체의 특수성에 부여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앞서 제기한 질문에 대한 응답이 가능해진다. 만약 비-인간이 인격이며 혼을 가지고 있다면 무엇에 의해 인간으로부터 구분될 수 있을까? 그리고 인간이라면 왜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것일까?

 

동물들이 우리가 다른 사물을 보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보는 것은 그것들의 신체가 우리의 신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언급하는 것은 물리학적인 차이—이 점이 제기되는 한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은 신체의 기본적인 단일성을 인식한다—가 아니라 각각의 종들의 신체를 특이한 것으로 만드는 정태, 경향성, 역능이다. 즉 먹는 것, 교신하는 방법, 사는 곳, 군집성이라든지 단독성이라든지 등등. 신체의 형태학은 정태로서의 이것들의 차이에 대한 힘으로 넘쳐나는 기호지만, 그것은 눈을 속이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인간적인 외견은 재규어적인 정태(jaguar-affect)를 숨기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신체로 부르는 것은 변별적인 신체적인 실질이나 특징 있는 해부학적 구조와 무관하다. 아비투스를 구성하는 정태와 존재의 양태의 집합체다. 혼이라는 형상적인 주체와 유기체라는 실질적인 물질성 사이를 정태와 역능의 다발로서 신체가 점거하고 있으며, 그곳에 퍼스펙티브의 원천이 있는 중핵적인 평면이 존재한다. 퍼스펙티비즘은 상대주의라는 정신적인 본질주의와는 전혀 동떨어진 신체적인 매너리즘(maniérisme)이다.

 

그러나 신체 간의 차이는 외재적인 관점의 타자만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대자적으로 모든 부류의 존재는 동일한 형상(인간이라는 총칭적인 형상)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신체는 타성(他性)이 그 자체로 파악되는 양태다. 통상의 양태에서 우리가 동물을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그 반대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우리의 신체가 각각(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퍼스펙티비즘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만약 <문화>가 혼의 관념에 의해 대상화된, 주체의 재귀적인 퍼스펙티브라면, <자연>이란 다른 신체적 정태에 대한 행위자의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문화>가 <주체>의 본성이라면, <자연>은 신체인 한에서, 즉 다른 누군가에 대한 무언가인 한에서, <타자>의 형상이다. <문화>는 ‘나’라는 대명사의 자기참조적인 형상을 띤다. 반면 자연은 비인칭적인 대명사인 ‘그것’에 의해 드러난다. 객체의 특히 ‘비-인격적’인 형상이다(Banveniste 1966a: 256).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시선에서 신체가 차이를 만들어낸다면, 레비-스트로스가 전한 일화 속 스페인 사람과 앤틸리스 주민이 취한 타자의 인간성을 탐사하는 방법이 그처럼 비대칭적이었다는 이유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유럽인에게 타자를 혼을 가진 자인지 아닌지로 판단하고자 했다. 반면 선주민의 목적은 타자가 어떤 부류의 신체를 가지고 있는지를 확정하는 것이었다. 유럽인에게 우월하고 변별적인 것, 즉 퍼스펙티브의 차이화 장치(=微粉機)는 혼이다(인디오는 인간인가, 동물인가?). 인디오에게 그것은 신체다(유럽인은 인간인가, 정령인가?). 유럽인은 인디오가 신체를 가지고 있음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동물 또한 신체를 가지고 있다. 인디오는 유럽인이 혼을 가지고 있음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동물 또한 혼을 가지고 있다. 인디오가 알고자 했던 것은 이것들의 ‘혼’의 신체가 그들 자신과 동일한 정태를 가지고 있는지—유럽인이 인간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는지, 그럼에도 부패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변환할 수 있는 영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는지—였다. 정리해보자. 유럽적인 자민족중심주의는 타자의 신체에 스스로가 가진 것과 동일한 혼이 있는 것을 부인함으로써 성립된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자민족중심주의는 타자의 혼이 동일한 신체를 가지고 있는지를 의심함으로써 성립된다.

 

잉골드가 강조한 것처럼(Ingold 1994: 1996), 서양적인 사고에서 인간의 지위는 본질적으로 양의적이다. 한편으로 사람이라는 종은 그 외의 것들과 동일한 동물종이며, 동물성이라는 영역에는 인간도 포함된다. 반면 인간성은 동물을 배제하는 도덕적인 조건이다. 이 두 가지 지위는 ‘인간의 본성’(human nature)이라는 문제와 이접적인 이념으로서 양립한다. 바꿔 말하면, 우리[근대인]의 우주론은 인간과 동물 간에 형이하학의 연속성과 형이상학의 불연속성을 가정한다. 전자는 자연과학의 대상으로서의 ‘인류’를 만들어내며, 후자는 인문학의 대상이 된다. 정신은 우리의 중요한 차이화 장치다. 정신은 우리를 동물이나 물질 일반보다 상위에 위치 지으며 우리 동료들에 대해 개별의 인간을 특이화 한다. 정신은 집합의식과 시대정신 등의 어휘를 통해 문화와 시대를 구분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신체는 주요한 융화장치(=집적회로)이며, ‘근대적인 융합’의 매체다. (DNA, 탄소화합물 등) 보편적인 기질(에 의해 융화된) 다른 생물에게 우리를 접속시킨다. 달리 말하면 모든 물질적 ‘신체’라는 궁극적인 자연에 연결시킨다. 한편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은 우주의 존재들 간에 형이상학의 연속성과 형이하학의 불연속성을 조정한다. 전자는 애니미즘—예를 들어 ‘미개의 융합’—으로, 후자는 퍼스펙티비즘으로 귀결된다. 정신과 혼—비물질적인 실질이라기보다 재귀적인 형상으로서—은 융화하고, 신체—물질적인 유기체가 아니라 활성화하고 있는 정태의 체계로서—는 차이화 한다.

 

퍼스펙티비즘은 상대주의가 아니라 관계론이다. 아마존의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다른 논의를 살펴보자. 르나르-카즈비츠의 마치겡가족의 신화론에 대한 저작(Renard-Casevitz 1991)을 검토해보자. 인간인 주창자가 외부자의 마을을 방문하면 그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먹는 뱀과 박쥐, 불덩어리를 ‘물고기’, ‘아구티’, ‘마코앵무’(인간의 식량)라고 부른다. 저자는 이렇게 불리게 된 신화를 해설하면서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이 문화상대주의 그 자체는 아님을 깨닫는다.

 

신화는 모든 국면에서 유효한, 문화횡단적이고 민족횡단적인 규범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 규범은 동일한 기쁨과 혐오, 음식에 관한 동일한 가치나 동일한 금지와 기피를 규정한다. (중략) 신화가 불러일으키는 오해는 야만적인 선호나 부적절한 언어의 이용이 아니라 견해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바에 있다(Renard-Casevitz 1991: 25-26).

 

그러나 이것은 저자가 더할 나위 없는 평범함을 인정해버렸다는 사실을 방어할 수 없었다.

 

퍼스펙티브에 몸을 두는 것은[mise en perspective] 보편적인 사회적 실천의 적응과 전조에 불과하며 X의 어머니 혹은 아버지는 Y의 시부모라는 사실과 같은 것이다. (중략) 점유된 장소에 따른 이름의 가변성은 어떻게 A가 동시에 X에게서 물고기이며 Y에게서 뱀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Renard-Casevitz 1991: 29).

 

사회생활에 고유한 위치에 기반한 상대성의 일반화는 종들 간 혹은 세대 간의 차이에 적응함으로써 인간적인 문화를 자연에, 즉 절대적인 것으로 바꾸어버리는 모순으로 가득 찬 귀결에 이른다는 것이 문제시된다. 누구라도 ‘물고기’를 먹게 되고, ‘뱀’을 먹는 자가 사라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나르-카즈비츠가 말한 친족에서 위치잡기와 존재의 상이한 유형에 따라 물고기 혹은 뱀으로 알려진다는 것 간의 아날로지는 매우 흥미롭다. 사고실험을 해보자. 친족용어는 열려진 관계사로서 논리를 조작한다. 다시 말해 다른 사물에 대한 관계를 통해 무언가를 규정하는 명칭의 계층에 속한다. (물론 언어학에서는 이러한 용어를 나타내는 라벨이 있다. ‘이항술어’ 혹은 그렇다고 생각되는 것.) ‘물고기’나 ‘나무’ 등의 개념은 닫힌 혹은 명확하게 경계를 긋는 ‘고유’ 명사이며,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특성에 의해 어떤 대상에 끼어 맞춰진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에서 생겨나는 것, 곧 ‘물고기’, ‘뱀’, ‘해먹’, ‘카누’ 등의 명사에 의해 지명되는 실질은 관계사로서 명사와 대명사 간에, 실사(實詞)와 직시(直示) 간에 있는 무언가로서 사용된다. (‘물고기’ 등의 자연종의 이름과 ‘해먹’ 등의 인공물의 이름에는 차이가 있다—다음을 참조할 것.) 한 인물은 그 인물을 아버지로 두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한에서 아버지다. 즉 부성과 관계한다는 것인 반면, ‘물고기성’ 혹은 ‘뱀성’은 물고기나 뱀 본래의 특성이다. 그러나 퍼스펙티비즘에서 생겨나는 것은 어떤 사물 또한 이 사물을 물고기로 두는 다른 누군가가 존재하는 한에서 물고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진짜로 귀뚜라미가 죽은 자의 물고기이며 물웅덩이가 맥의 해먹이라고 말하는 것이 나의 누이인 이사벨의 딸 니나가 나의 조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면, 어떤 상대주의도 관여하지 않는다. 통상 표현이 의미하는 한에서 주관론적인 니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사벨은 니나에게서의 어머니가 아니다. 이사벨은 니나의 어머니고 이사벨은 바로 객관적으로 니나 어머니며 나도 니나의 외삼촌이다. 관계는 내적으로 속격(屬格)—이처럼 산자의 귀뚜라미가 죽은 자의 물고기인 것처럼 나의 누이는 누군가의 어머니며, 그리고 나는 그 인물의 외삼촌이다—이며, ‘그 자체’가 무엇이든지간에 단지 물고기로서 표상된다는 것을 함의하는 “X는 누군가에게서의 물고기다”라고 하는 부류의, 외적이고 표상적인 연결이 아니다. 니나는 이사벨의 딸이지만 내 딸은 아니기 때문에 니나는 내게서의 ‘딸’이 아니다—왜냐하면 니나는 실제로 정확하게는 나의 누이의 딸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부조리할 것이다. 『과정과 실재』에서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실세계(real world)>라는 어구는 서 있는 위치를 통해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바꿔내는 <어제>나 <내일>과 같은 것이다”(Whitehead 1929: 65, in Latour 1994: 197). 즉 관점은 주관적인 의견이 아니다. ‘어제’나 ‘내일’이라는 관념에 주관적인 것은 그 무엇도 없다. ‘나의 어머니’나 ‘너의 형’이라는 관념도 그와 마찬가지다. 각기 다른 종의 현실세계는 그 관점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세계’는 각기 다른 종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세계는 관점에 의해 각각의 종 동료들이 분기하는 추상적인 공간이다. 사물에 대한 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사물과 존재야말로 관점이다(Deleuze 1969: 203). 즉 여기서 문제는 ‘원숭이는 세계를 어떻게 보는가’(Chency&Seyfarth 1990)가 아니라 원숭이를 통해 어떤 세계가 표현되는가, 원숭이는 어떤 세계에 대한 관점에 있는가이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신체적 실질’은 이러한 타입에 관한 것이라고 상상해보자. 동일한 양친을 둔 두 개인이 형제인 것과 마찬가지로, 같은 물고기, 같은 뱀, 같은 카누 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종이라고 상정해보자. 그렇다면 아마존 지역의 우주론에서 인간과 인척관계를 통해 맺어지는 것들로서 종종 동물들이 사고된다는 것이 더 잘 이해될 것이다. 나의 누이는 나의 처형의 아내인 것처럼—그리고 마찬가지의 이유로—, 인간의 피는 재규어의 발효주다. 종들 간의 혼인을 이야기하는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신화는 실로 무수히 많다. 인간인 의리의 형제 및 의리의 자식이 동물인 의리의 형제 및 의리의 부모와의 어려운 관계를 설명함으로써 행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개의 아날로지를 하나의 아날로지로 묶는 그 자체다. 이렇듯 퍼스펙티비즘이 교환들과의 사이에서 어떻게 밀접한 관계를 갖는지를 알 수 있다. 퍼스펙티비즘의 교환의 양태(서두의 인용문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퍼스펙티브의 상호성)로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교환 자체가 이 용어에 의해—퍼스펙티브의 교환으로서—규정되어야 한다(Strathern 1988, 1992a, b).

 

이제 우리는 관계적인 존재론을 입수했다. 그 존재론에서는 개별의 신체적 실질과 실체적인 형태는 궁극적 실재가 아니다. 여기서는 일차성질과 이차성질—철학에서의 전통적인 대비를 불러온다면—사이에는, 혹은 ‘삶의 사실’과 ‘제도적 사실’—셜의 최근 저작(Searl 1995)에서 제시된 이원성을 불러온다면—사이에는 어떤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셜의 이 저작에 대해 간단하게 논해보겠다. 저자는 의식이란 독립된 실재성에 있는, 그가 삶의 사실과 객체라고 한 것—중력과 산, 나무와 동물(모든 자연종은 이 계층에 속한다)—을 그 존재, 동일성, 목적이, 인간이 그것들에 부여하는 특정의 문화적인 의미에서 유래하는, 제도적이라고 불리는 사실과 객체—혼인과 화폐, 도끼와 컴퓨터 등—에 대치한다. 문제가 되는 이 저작은 베르크(Peter Berger)와 루크만(Thomas Luckmann)의 『현실의 사회적 구성(The Social Construction of Reality)』이 아니라 『사회적 현실의 구성』이라 불리는 것에 주의하자. (삶의 사실에 대한 언명을 포함한) 제도적 사실이 구축된다고 하지만, 삶의 사실은 구축되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부터 어떤 자연/문화의 이원론의 현대화된 버전에서 문화상대주의는 자연의 보편주의가 자연인 객체에 적합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문화적인 객체에 대해 유효하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의 논의를 셜이 우연히 착목했다면 아마도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에게 모든 사실은 정신 내지는 제도적인 타입에 관한 것이며 모든 객체는 나무와 물고기조차 화폐와 카누와 동일한 것이라는 것(나무토막이나 종이조각으로서가 아니라 화폐나 카누로서)이며, 이 또한 특수한 실재성은 인간이 그것들에 부여하는 의미와 이용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라고 나는 말하고자 한다, 라고. 이것은 상대주의에 다름 아니며, 그것도 극단적이며 절대적인 모습을 띠는 상대주의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애니미즘적인 퍼스펙티비즘의 존재론이 함의하는 하나는 자율적인 자연적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서의 ‘자연’이 다른 자에게서의 ‘문화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제정적인 규칙, 혹은 제도적 사실을 표하는 정식이 “맥락 C에 있어서 X는 Y로 간주된다”(Searle 1959: 51-52)라고 한다면, 우리의 흥미를 끄는 선주민적 사실은 바로 이 타입에 관한 것이다. “재규어의 맥락에 있어서 피는 발효주로 간주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도적 사실(셜의 정식에서 Y)은 보편적인 것의, 삶의 사실이 보편적이고 제도적 사실이 특수하다는 셜의 대안을 피해가는 어떤 것이다. 퍼스펙티비즘을 (모든 사실을 제도적이라고 규정하고 그것들에는 문화적인 가변성이 있다고 결론내릴) 구축론자의 상대주의로 감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수중에 있는 것은 그 반대물로서 자연상대주의문화보편주의(이 표현은 라투르로부터 빌려왔다) 혹은 내가 부르기 좋아하는 방식으로는 다자연주의의 하나의 사례다.

 

 

야생의 신체

 

아마존의 우주론에서 신체가 우수한 사회적 장치로서 나타난다는 관념—즉 다른 것으로부터 구별되는 한에서 동일한 타입의 존재를 통합하는 것—은 이 지역의 민족학에서 고전적인 질문을 새로운 조망 하에 재고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아마존의 사회들에서 신체성의 의의라는, 지금은 고풍스럽게 울려 퍼지는 이 주제(Seeger, DaMatta&Viveiros de Castro 1979)는 우주론적인 근거를 갖고 있다. 이 주제를 통해 예를 들어 동일성의 카테고리—개별적이든 집합적이든, 민족적이든 우주론적이든—가 빈번하게 특히 식사의 실천과 신체장식 등의 신체적인 성구를 통해 표현되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식량이나 요리 제도의 상징적인 함축은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레비-스트로스의 “익힌 것과 날 것”에서부터 피로족 사람들을 백인과 문자 그대로 차이화하며 피로족을 피로족으로 만드는 ‘진짜’ 음식(Gow 1991a)까지. 중앙브라질에서 ‘신체적인 실질 집단’을 규정하는 음식기피(Seeger 1980)에서부터 식습관에 연관된 존재의 기본적인 분류(Baer 1994: 88)까지. 공식성(共食性)과 식생활의 유사성과 먹이-객체와 포식자-주체라는 상대적인 조건의 개념적인 생산성(Vilaça 1992)으로부터 혼인, 식사, 전쟁 등과 관련한 타자와의 모든 관계의 ‘술어적’ 평면으로서의 카니발리즘의 편재성(Viveiros de Castro 1993)까지. 이 보편성은 신체를 구성하는 습관과 과정이 바로 동일성과 차이가 출현하는 장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인격적인 동일성의 확정과 사회적 가치의 유통의 경우 신체를 기호론적으로 정력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Turner 1995). 아마존 사회체에서 관계성의 토대로서 기능할 수 있는 사물의 자원적 제약—사회적 교환이 증여경제나 상품경제처럼 물질적인 객체화에 의해 매개되지는 않는 상황—과 (특히 그 가시적인 표면에서) 신체의 중층결정 간의 연결에 대해서는 터너가 깔끔하고 정확하게 정리했으며, 인간적인 신체가 사회적인 객체의 원형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나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이 신체의 사회적 구축을 강조하는 것은 자연적인 기질의 문화화라기보다 시차적(示差的)으로 인간적인, 이른바 인간적인 신체의 산출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이 표현하는 것은 문화적으로 특징지어짐으로써 신체를 ‘탈-동물화’하려는 갈망이 아니다. 오히려 여태껏 아무 특징도 없는 신체를 다른 인간적인 집단과 그 외의 종으로부터 차이화함으로써 특수화하고자 하는 갈망이다. 차이를 낳는 퍼스펙티브의 장으로서 신체는 그 퍼스펙티브를 충분히 표현하기 위해 최대한으로 차이화되어야 한다.

 

인간적 신체는 인간성과 동물성의 계보투쟁의 장으로 간주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본성에 의해 본질적으로 동물적이며 문화에 의해 은폐되고 제어될 필요 때문이 아니다(Riviére 1994). 신체는 주체가 표현하기 위한 근원적인 도구임과 동시에 타자의 시야에 던져진 특단의 대상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신체가 사회적으로 최대한 객체화된다는 것, 즉 장식과 의례적 피로(披露)를 통해 표현되는 최대한의 특수화가 동시에 최대한의 동물화의 기회가 되는 이유다(Goldman 1975: 178; S. Huge-Jones 1979: 141-142; Seeger 1987 ch. 1&2; Turner 1991; 1995). 그때 신체는 깃털, 채색, 도안, 가면, 그 외의 동물적인 보철들로 덮인다. 의례적인 동물로 치장하는 인간은 초자연적으로 벌거벗은 자신의 신체의 ‘자연적인’ 특수성을 자신에게 드러낸다. 이 인간은 외적인 형상으로부터 해방되어 인간으로 나타남으로써 정신의 ‘초자연적’ 유사성을 드러낸다. 정신 모델은 인간적인 정신인 반면, 신체 모델은 동물적인 신체다. 그리고 주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문화가 <나>의 총칭이 되는 형상을 띠고 자연이 <그것>의 형상을 띤다면 주체자신의 대상화에는 신체의 특이화—문화의 자연화 곧 문화의 신체화—를 요하게 되는 한편, 객체의 주체화는 정신의 수준에서 의사소통—자연의 문화화 곧 자연의 초자연화—을 요하게 된다. 이 때문에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자연/문화의 구분의 문제계는 인간-동물이 공유하는 애니미즘적 사회성의 이름하에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퍼스펙티비즘의 광명 하에 재독되어야 한다.

 

‘신체 모델은 동물적 신체’라는 사고를 지지하기 위한 중요한 논거는 아마존 민족지와 신화론에서 인간으로 ‘치장하는’ 동물, 즉 인간의 신체를 의복처럼 몸에 두르는 사례가 사실상 하나도 발굴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인간적인 신체까지 포함해서 모든 신체는 의복에 싸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동물이 인간적인 의복과 장식을 몸에 두른 모습은 결코 보이지 않는다. 인간이 동물적인 의복을 몸에 두르고 동물이 되는 것인가, 동물이 동물적인 의복을 벗고 인간으로 나타나는가, 이 둘 중 하나다. 인간적인 형상은 신체의 내부의 신체며, 원초적인 벌거벗은 신체—신체의 ‘혼’—다.

 

이러한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신체는 여건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으로 사고된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신체의 계속적인 제작이라는 수법이 강조된다(Viveiros de Castro 1979). 신체적, 성적, 영양적인 유체의 공유를 통해—물질적인 본질(substantial essence)의 수동적인 유전이 아니라—개인을 적극적으로 동화하는 과정으로서의 친족 관념(Gow 1989; 1991a), ‘고기’로 기재되는 기억 이론(Viveiros de Castro 1992a: 201-207), 나아가 더 일반적으로는 신체에 위치지어진 지식 이론(Mc Callum 1996).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형성은 정신보다도 신체에서 이뤄진다. 신체의 변태, 즉 정태와 역능을 규정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뛰어넘는 정신적인 변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건이라기보다 행위수행적인 신체의 특징, 즉 신체가 ‘자연적으로’ 차이화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문화적’으로 신체를 차이화시켜야 한다는 사고에는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우주론에서 항상 그 가능성이 표명된다. 종들 간의 변신(metamorphose)과 분명히 연계되어 있다. 신체를 탁월한 차이화 장치로서 조정함과 동시에 그 변신가능성을 확립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그들의 사고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우주론에서는 특이성이 정신의 특징으로 상정되지만, 이를 통해 (이를테면 독아론은 항상 문제시된다 해도) 의사소통의 불가능성이 표명되는 것도 아니라면, 교육이나 종교적인 회심 등의 과정에 더 잘 일어나는 심적 내지는 정신적인 변태가 부인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그것은 바로 정신이 심적이 필요로 하는 차이의 장이기 때문이다(서양인은 인디오를 변화시키기 위해 그들이 혼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자 했다). 신체적인 변신은 영적인 회심이라는 유럽적인 주제인 반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에게는 그 반대물이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샤머니즘이라는 복합체에서 영적빙의라는 양의성 없는 사례가 상대적으로 희귀한 것도 신체의 변신이 우세하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선주민의 종교적 회심이라는 문제도 이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다. 선주민의 ‘문화적응’ 경험은 정신적인 동화라는 사고보다도 서양의 신체적인 습관의 수용과 신체화—음식물, 의복, 민족 간의 섹스, 육체적인 능력으로서의 언어 등—쪽에 초점을 둔다. 사회문화적인 변용에 관한 인류학의 이론은 혼혈이나 인종적 동화가 민족-문화적 구분의 상실과 연결된다는, 서양의 민족발생론적인 사고를 거부한다. 여기에 이유가 있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와 반대로 문화적응 과정은 이데올로기의 변화, 즉 무엇보다도 현지의 ‘신념’에 악영향을 미치는, 본질적으로 정신적인 과정으로서 규정된다. 문화적응은 딱 문화가 종교의 이미지를 가지고 생각되는 것처럼, 종교적 회심의 이미지를 가지고 생각된다. 결과적으로 그리고 이러한 경향에 더욱 세밀한 채색을 가하는 것 같은 아비투스의 개념조차 문화적응에 휘말린 신체의 변화는 그 원인보다도 ‘집합적 표상’의 수준에서의 그 효과로서 이해된다. 생각해보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사고방식이 다른 이유는 그들의 사고가 다른 방식으로 신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의할 것은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변신이 평온한 과정이 아니라면 사회적으로 가치가 부여된 목적일 필요도 없다는 점이다. 만약 독아론이 우리의 우주론을 위협하는 환영(幻影)—동종의 동료들이 인식할 수 없다는 공포의 확장, 잠재적으로 절대적인 정신의 특이성을 고려해둔다면 실은 그들이 우리와 같지 않다는 것—이라면, 변신의 가능성이 표현하는 것은 그 대극에 있는 공포, 동물로부터 인간을 이미 차이화할 수 없다는 공포, 나아가 자신이 먹은 동물 신체에 잠재된 인간적인 것을 보는 공포다(Goldman 1975: 183; Brightman 1993: 206ff; Erikson 1997: 223). 이것은 퍼스펙티비즘의 더욱 중요한 민족지적 반복 속에서 번역된다. 동물들의 옛 인간성이 가시적인 형상에 숨겨진 현재의 영성(靈性)에 부가되기 때문에 신화적으로는 인간과 동일 실체인 몇몇 동물은 식용에 적합하지 않다고 표명된다면, 특정 동물을 먹기 전에 샤먼에 의한 탈주체화가 필요하다는, 식량금기 혹은 예방책으로서 성립되는 복합이 산출된다. 샤먼에 의한 탈주체화는 동물의 영을 무력화하고 그 고기를 식물로 구체화하든지 덜 인간적인 다른 동물로 의미론적으로 환원한다—이 모든 것은 사람을 먹는 보복의 포식으로서 이해되는, 질병의 모습을 취하는 복수의 위협 하에 있다. 이것을 수행하는 것은 포획물의 영, 인간을 동물로 변태시키는 퍼스펙티브의 치명적인 전치를 통해 포식자가 되는 것이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에게 독아론이라는 문제와 동등한 것이 카니발리즘이라는 망령이다. 독아론이라는 문제가 신체적인 유사성이 정신 사이에 실재하는 공동성을 보증하는 것인지에 대한 염려에서 유래하는 것이라면, 카니발리즘이라는 망령은 정신의 유사성이 실재하는 신체적인 차이에 우월한지를, 그리고 먹힌 동물이, 가령 샤먼에 의한 탈주술화의 시도가 있다 해도 인간으로 머물러 있을지를 위태로워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어느 정도는 근원적인 독아론자가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세련되거나 문자 그대로 식인적인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이 부정될 이유는 없지만.

 

아마존의 카니발리즘이 의도하는 것은 적의 주체적인 상(相)을 흡수하는 것이며, 그 목적을 위해 적(敵)은 동물의 신체의 사례에서 보이듯이 탈주체화되는 것이 아니라 과도하게 주체화된다(Viveiros de Castro 1992a; Fausto 2001 참조). 앞서 서술한 것처럼 샤먼의 움직임 속에 선량한 부분은 죽은 동물을 탈주술화해서 먹기 위해 어떤 위험도 존재하지 않도록 순수하게 자연의 사체로 변신시킨다는 점이다. 반대로 정령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것들이 궁극적으로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그것들은 한층 더 탁월한 대식가, 즉 사람을 잡아먹는 자가 된다. 따라서 탁월한 동물적 포식자는 정령들이 즐겨 나타나는 형상이 된다. 나아가 왜 먹잇감인 동물은 인간을 정령으로 보는가, 포식자는 우리를 먹인감인 동물로 보는가, 왜 먹히지 않는다고 이해되는 동물은 정령과 관계하는 경우가 많은가를 이해할 수 있다.

 

변신의 관념은 이미 몇 번이나 언급한 동물적인 의복이라는 교리와 직접적으로 결부된다. ‘신체는 차이를 발생시키는 퍼스펙티브의 장’이라는 사고와 애니미즘과 퍼스펙티비즘을 해석할 때에 상기되는 외견본질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양립시켜야 하는 것일까? 내 생각에 여기에는 중요한 오인이 있는 것 같다. 즉 신체적인 ‘외견’을 비활성적이고 허위인 것으로서, 정신적 ‘본질’이 활성 있는 진정한 것으로서 받아들이는 오인이다(골드만의 결정적인 견해를 참조할 것. Goldman 1975: 63, 124-145, 200).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이 의복과의 관계로 신체에 대해 말할 때의 사고에서 그리 멀리 갈 것도 없다. 신체가 특정 종의 의복이라기보다 의복이 특정 종의 신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피부에 효과적인 의미가 새겨진다. 그리고 적절한 의례적 맥락에서 이용된다면, 몸에 둘러진 인물의 동일성을 형이상학적으로 변태시키는 힘을 저장한 동물의 가면이 사용된다(혹은 적어도 그 원리가 알려져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가면-의복을 두르는 것은 동물적인 외형 밑에 인간적인 본질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신체의 힘들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우주를 여행하기 위해 샤먼이 사용하는 동물적인 의복은 코스프레가 아닌 도구다. 그것은 카니발 의복이 아니라 다이빙용품이나 우주복에 가깝다. 잠수복을 몸에 두를 때의 지향은 수중에서 숨을 쉬게 하는 것, 물고기처럼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를 기묘한 덮개 밑에 은폐시키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동물 사이에서 인간적인 타입의 내적인 ‘본질’을 씌우는 의복은 단순한 변장이 아니라 동물 각각을 규정하는 정태와 역능을 품고 있는 변별적인 장비다. “외견은 속일 수 있다”(Hallowell 1960; Riviére 1994). 물론이다. 그러나 내 인상으로는 동물적인 의복이라는 주제로 다뤄지는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이야기의 관심은 그것이 숨기는 것보다도 이 의복이 이루는 것에 있다. 게다가 존재와 그 외견 사이에 있는 것이 신체다. 그리고 그 신체는 단지 그것인 이상의 것이다—이야기 그 자체는 어떻게 외견과 일관되지 않는 신체적인 제스처에 의해 항상 외견이라는 ‘가면이 새겨지는’ 것일까를 이야기한다. 즉 다음과 같다. 신체는 처분가능 및 교환가능하며 그 ‘배후’에는 형상의 측면에서 인간으로 확정 가능한 ‘주체성’이 있다. 이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관념이 외견과 본질 사이에서 우리가 품는 대비와 동일하지는 않다. 그 관념은 신체의 객체적인 교환가능성이 정신의 주체적인 동등성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이 틀에서 해석될 수 있는 남미 민족지학의 또 하나의 주제는 산자와 죽은 자 간의 사회학적 불연속성이다(Carneiro da Cunha 1978). 산자와 죽은 자 간의 근본적인 구분은 정신이 아닌 신체에 의해 만들어진다. 죽음은 신체적인 파국이며, 산자와 죽은 자 사이를 교통하는 ‘활력’을 억누르는 차이화 장치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우주론은 동물의 시야로 향하는 만큼, 아니 그 이상의 관심을 죽은 자의 세계를 보는 양태로 향한다. 그것은 산자의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를 강조한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체로부터 결정적인 순간까지 분리되므로 죽은 자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적인 신체와의 분리에 의해 규정되는 영(靈)으로서 죽은 자는 논리적으로 동물의 신체로 옮아간다. 이것은 왜 죽은 자가 동물로 변태하는지, 또 그와 마찬가지로 왜 인척이나 적대자 등의 다른 신체적인 타성의 형상으로 변태하는지가 설명된다. 이렇게 해서 애니미즘은 인간과 동물 간의 주체적이고 사회적인 연속성을 끌어내고, 그 육체적인 보완물인 퍼스펙티비즘은 살아있는 인간과 죽은 인간 사이의 객체적이고 그만큼 사회적인 불연속성을 확립한다. (조상숭배에 기초한 종교는 그 정반대를 가정한다. 즉 정신적 동일성이 죽음이라는 신체적인 장벽을 뛰어넘으므로 산자와 죽은 자는 동일한 정신을 표하는 만큼 동일하다—이렇듯 한편에서는 초인적인 조상의 영의 빙의가, 다른 한편에서는 죽은 자의 동물화와 신체적인 변신이 있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이 내포하는 다양한 논점들을 이제까지 검토해왔다. 이제 남은 것은 정신의 종-횡단적인 균일성에 부여된 우주론적인 역할이다. 내 생각으로 이 속에서 특정 카테고리의 관계론적인 정의를 제시할 수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는 악평일색이었고 유용성은 거의 거론되지 않았던 <초자연>이라는 카테고리다. ‘천체 이상’의 유형이 속하는 우주지(宇宙誌)의 영역으로 라벨링되거나 선주민의 우주론에서 지향성을 가진 존재의 제3의 유형—인간도 동물도 아닌 존재(내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정령’이다)—을 규정하는 것 등 잘 알려진 사용례와는 별도로 초자연의 관념은 특정한 관계적인 맥락과 특수한 현상학적인 질을 지시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다. 그 맥락과 질은 사회적인 세계를 규정하는 간주관적인 관계로부터도 동물의 신체화의 ‘간-객체적 관계’로부터도 마찬가지로 구별된다.

 

대명사적인 계열과의 유사(Benvenisete 1996a, b)에 따라 (혼이나 정신이라는 관념을 만들어내는) 문화라는 재귀적인 <나>와 (신체적 타성과의 관계를 기록하는) 자연이라는 비인격적인 <그것> 사이에는 간과된 입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너>라는 2인칭이며, 그 관점이 <나>의 관점의 잠복된 메아리인 것처럼, 다른 주체로서 받아들여진 타자에 관한 것이다. 나는 이 관념이 초자연적인 맥락을 규정하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주체가 우주론적으로 우세한 다른 관점에 포획된다는 예외적인 맥락, 그가 비-인간적인 퍼스펙티브의 <너>인 맥락에서는 <초자연>은 <주체>로서의 <타자>의 형상이다. 인간적인 나를 이 <타자>에게서 <너>로 대상화하는 것, 바로 이것이 그 의미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상황의 전형은 처음에는 단순히 동물이 인간으로 보이지만 그로부터 정령이나 죽은 자로서 나타나 인간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존재를, 인간이 숲 속에서 마주친다는 것이다. (타일러의 텍스트에서는 이 의사소통의 역동성이 정교하게 분석되어 있다(Taylor: 1993b). 이 만남은 응답자에게 치명적인 경우가 많다. 비-인간적인 주체성에게 정복되면 그것들 쪽으로 옮겨가서 발신자와 동일한 부류의 존재—죽은 자, 정령, 동물—로 변태해버리기 때문이다. 비-인간에게서 <너>라고 불려 그에 응답한 자는 그 존재의 ‘2인칭’의 조건, 즉 그에게서의 <나>의 위치에 이미 담겨 있는 비-인간적인 조건을 받아들인 자다. (정의상 혹은 공식적으로 다자연적인 존재인 샤먼만이 여러 퍼스펙티브를 왕래할 수 있고 자신의 주체의 조건을 잃지 않고 동물 혹은 영적인 주체로부터 <너>로 불릴 수 있으며 또 그것들을 <너>라고 부를 수 있다.) 이처럼 초자연적인 만남의 기준형식은 타자가 ‘인간적’임을 서둘러 발견하는 것, 즉 <그것>이 자동적으로 응답자를 탈인간화하고 소외시켜서 먹잇감—동물—으로 변신시키는, 인간이라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것이 외견의 배후에 숨겨진 것으로서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이 품고 있는 염려가 진정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외견이 속일 수 있다는 것은 어떤 무엇과의 상호작용에서 어느 쪽이 지배적인 관점인지, 즉 어느 쪽의 세계가 작동하는지가 결코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위험하다. 특히 모든 것이 인간이며 우리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때에는.

 

 

맺음말을 대신해서

 

서로 대조해본 두 개의 우주론적인 관점—내가 ‘서양적’이라고 부르는 것과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관점에서는 통약불가능하다. 컴퍼스라는 것은 한쪽의 다리를 고정하고 다른 한 쪽의 다리가 그 주변을 돌아서 움직여야 한다. 우리는 자연에 대응하는 다리를 우리의 기준으로 선택하고 다른 다리가 문화적인 다양성의 축을 그려내도록 하고 있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은 우주론적인 컴퍼스의 기준이 되는 다리로서 우리가 ‘문화’라 부르는 것에 대응하는 쪽을 선택함으로써 우리의 ‘자연’을 계속적인 변화와 변이에 위탁하고 있다. 양쪽 다리가 동시에 움직일 수 있는 컴퍼스—상대주의의 극단—는 기하학적으로 성립되지 않으며 철학적으로도 불안정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컴퍼스의 끝이 어디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은 다리가 머리 부분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자연과 문화의 구분은 이 구분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머리 부분의 끝 주변을 배회한다. 라투르(Latour 1991)가 정교하게 논한 것처럼 <이론>이 실천이라는 ‘중간세계’를 실태나 원리 등의 대치된 영역으로 분리하고 순화하는 움직임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 끝에 있는 점은 우리의 근대에서 이론-외적인 실천에서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자연>과 <문화>처럼.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사고—아마도 모든 신화적 사고—는 그 정반대의 궤적을 선회한다. 왜냐하면 신화론의 대상은 <자연>과 <문화>의 분리가 아직 순수한 잠재성이라는, 바로 머리 부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퍼스펙티비의 잠세적인 원천에서 절대적인 운동과 제한 없는 다원성은 경직된 부동성과 형용할 수 없는 통일성을 구분불가능하게 만든다.

 

두 번째,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점을 이야기해보겠다. 선주민이 옳다고 한다면 두 관점 간의 차이는 문화적인 문제도 아니고, 하물며 ‘정신성’의 문제도 아니다. 상대주의와 퍼스펙티비즘, 혹은 다문화주의와 다자연주의 간의 대조성이 우리의 다문화적 상대주의가 아닌 선주민의 학설 하에서 독해될 수 있다면,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려야 한다. 퍼스펙티비의 상호성은 상호성 그 자체로 적합하다. 그리고 차이는 세계 속에 존재하며 사고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우리 중 몇몇은 신화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에서 작동하는 논리가 실은 동일한 것이라는 것, 그리고 인간은 똑같이 언제나 잘 사고해왔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진보는 아마도—가령 이 용어가 그 경우에 더 적합하다면—의식이 아닌 세계를 무대로 하고 있으며 항상적 능력을 부여받은 인류는 그 긴 역사를 통해 이 세계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대상과 엮여왔을 것이다(Levi-Strauss 1955b: 255)

 

 

 

신고
Posted by Sarantoya

지난 주에 끝난 여름학기의 페이퍼 중 "상징적인 포식"을 다룬 것이 있었다. 이 수업을 총정리한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나로서는 평가서나 다름 없었다. 페이퍼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인간이 이 지구상의 최상위 '포식자'로 등극한 데에는 상징적인 기호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 즉 인간은 맹수에 신체적으로 열등하지만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맹수를 포식할 수 있는 '사냥꾼'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언어'는 애초부터 포식의 기호이며, 그 기호에 의해 산출된 의식과 신체에는 포식자-먹잇감의 먹이사슬이 내장되어 있다. 호모 사피엔스 이래로, 특히 문명의 인류사 속에서 끊임없이 위계를 만들고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재생산해온 인간은 그래서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이 아닌 다른 종, 이를테면 '인공지능'이 출현하게 되면 이 '인간중심주의'는 어떻게 될까? 그 페이퍼에서는 <혹성탈출>이라는 영화를 예로 들어 비인간이 인간을 대체하더라도 그 비인간은 인간(의 의식과 신체)을 모델로 삼은 것이기에 '인간중심주의'의 '상징적인 기호'로서 포식의 질서를 계속 이어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는 해결해야 할 여러 논점들이 있지만 일단 두 가지 논점을 제기해볼 수 있다. 하나는 포식의 논리를 '동물성'으로 환원하고 동물과 다른 '합리성'으로서 인간의 본질적 특질을 규정하는 근대적인 인간관(휴머니즘)에 대립한다는 점이다. 이 논점은 인간의 본질이 '합리성'이 아닌 '동물성'에 있다는, 휴머니즘에 대한 반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있고 의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있고 인간이 있다는 대역전을 시도한다. 사고 그 자체를 탐구하고자 했던 레비-스트로스처럼, 인간의 독점성과 특권성은 도덕적인 시혜로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또 하나는 사고의 주체로서 인간이 문명사 속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온 것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전쟁은 흔히 (합리적인) 협상의 결렬에 따른 무력충돌로 이해된다. 통제에 실패한 야만적인 동물성이 이성을 압도한 것이 전쟁이라고 본다. 20세기의 양차 세계대전을 통해 인간의 이성에 회의를 불러일으켰다면 그것은 이성이 동물성에 압도될 정도로 미약하기 때문이라고들 생각한다. 그런데 전쟁이 '포식=인간'이라는 기호를 선취하기 위한 과정이라면? 인류는 오히려 전쟁을 통해 '인간'이라는 범주를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 두 번째 논점과 관련해서 카스트로의 다음의 글을 독해해볼 수 있다. 레지스 드브레가 인간이 의식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죽음을 '발견'한 때부터라고 했듯이, 그때부터 이미 죽음은 '자연사'가 아니다. 의식 속에서 모든 죽음은 의도된 죽음이다. 죽음을 통해 기억이 산출되고 의식이 의식된다. 그렇다면 죽음을 불러들이는 죽음을 통해 의식은 자기 확장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복수, 복수에 의한 끊임없는 전쟁이 아니던가? 자기의 죽음을 자기는 의식할 수 없다는 의식의 불완전성, 우리는 타자의 죽음만을 의식할 수 있다는 의식의 근원적인 타자의존성이 전쟁을 멈추게 할 수 없다. 

 

 

----------------------------------------------------

 

 

시간을 말하다

 

복수가 가진, 기억과 관련된 기능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포로와 그를 죽이려는 자 사이에 행해지는 의례적인 대화가 말해주는 맥락을 살펴보아야 한다. 포로를 희생으로서 죽이는 것은 ‘이론적인’(logical) 것과 ‘육체적인’(physical) 것의 명확하게 구별된 두 차원에서 행해진다. 투피남바의 식인적 인류학(Cannibal Anthropology)은 대화적인 인육식(人肉食), 포로의 처형이라는 의례적인 드라마 속에서 주역들을 대결시키는, 과장된 말싸움을 통해 어렵게 획득된다. 이 대화는 문제적인 의례의 정점을 찍는다. 게다가 그것이야말로 몽테뉴(Michel Eyguem de Montaigne)의 「식인종에 대하여」(Des cannibales)[『수상록』(Les Essais 초판 1580년)에 수록]에서 전개된 기사도적인 독해를 통해 투피남바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 글에서 몽테뉴는 이 대화를 헤겔적인 승인을 구하는 싸움, 즉 이야기라는 경위(境位) 안에 갇힌 생사를 건 투쟁으로 해석했다(Lestringant 1982).

 

사실 이 대화는 전사로서의 명예라는 관점의 해석에 경이로우리만치 딱 들어맞는다. 그러나 그 밖의 해석에는 거의 들어맞는 것이 없다. 이 대화의 사례들에서 종교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시사하는 바가 없고 신들이 언급되지도 않으며 희생자의 혼의 운명이 암시하는 것도 없다. 반면 이 대화의 모든 말들은 논자들이 간과해온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즉 시간에 대한 것이다.

 

이 대화는 포로를 죽이는 일을 맡은 자에 의한 장황한 연설로부터 성립되며, 그자는 포로에게 자신이 포로의 부족의 성원을 죽인 자들 가운데 하나인가, 그리고 죽을 준비가 되었는가를 묻는다. 그자는 포로에 대해 용감한 남자로서 죽음에 ‘기억을 남기도록’ 충고한다(Monteiro 1610: 411). 포로는 자랑스럽게 이에 응대하면서 자신도 사람을 죽였고 또 먹었던 자임을 언명하고 지금 자신이 놓인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에서 죽인 적들의 일을 상시시킨다. ‘동의한 피해자’의 사나운 모습을 한 이 포로는 복수로서 자신을 죽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나를 죽여 봐라! 그러면 나의 친족들이 복수를 행하러 올 것이므로 너희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죽게 될 것이다!

 

이 대화는 다양하게 언급되어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은 자유간접화법이나 요약된 내용으로 다뤄져왔다.

 

그들은 죽이기 전날 포로의 몸을 깨끗하게 씻는다. 그리고 다음날 포로의 허리를 끈으로 동여맨 채 광장에 데리고 나와 세운다. 몸에 장식을 멋지게 두르고 나타난 그들 중 한 사람은 선조들에 대한 짧은 설법을 포로에게 행한다. 이것이 끝난 직후 죽고자 하는 남자가 답례를 행한다. 포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용감한 자의 특질임을, 자신도 그들 중 수많은 자들을 죽였음을, 그리고 이승에 남겨진 자신의 친족들이 원수를 갚으러 올 것임을 말한다. (Nóbrega 1549:Ⅰ, 152)

 

이 의식이 완료되면 죽음의 집행자는 포로로부터 조금 물러나 일종의 설교술의 양식으로 연설을 시작한다. 그는 포로에 대해 자신들이 그에게 불명예를 주지 않고 끝내도록, 자신들이 죽인 것은 여자들처럼 용기 없는 약한 겁쟁이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끝내도록, 스스로의 인격을 언제까지나 지킬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또 죽음을 통해, 명예를 거머쥘 운명에서 벗어난 약한 여자들처럼 자신의 해먹 속에 죽은 것이 아니라 적의 손에 의해 죽은 용감한 남자임을 상기시키라고 말한다. 그리고 형에 처해진 자가 강건하여, 이따금 일어나는 일처럼 이 시점에서 혼절하거나 하지 않는 한, 그는 죽음의 집행자에 대해 다분한 존대함과 도발을 가지고 되묻는다. 그는 죽음의 집행자에게 자신도 그의 많은 친족과 친구를 위해 마찬가지의 일을 해왔기 때문에 지체 말고 자신을 죽이라고 말한다. 그와 동시에 그는 죽음의 집행자에게 그들이 그들 자신에 대해 친족과 친구의 죽음의 복수를 하려하듯이 자신의 친족도 용감한 남자로서 반드시 자신의 원수를 갚을 것이며 그와 그의 일족 전체를 위해 똑같은 짓을 해보일 것임을 상기시킨다. (Gandavo 1576: 137)

 

포로를 죽이고자 하는 자는 다음으로 공희용(供犧用) 곤봉을 다시 손에 쥐고 말한다. “그렇다. 나는 여기에 있고 너를 죽이고 싶다. 왜냐하면 너의 친족들이 나의 수많은 친구들을 죽이고 먹었기 때문이다.” 포로는 이에 답한다. “내가 죽었어도 내게는 내 원수를 갚아줄 의향이 있는 수많은 친구들이 있다.” (Staden 1557: 182)

 

“너는 우리에게 적이다…같은 민족인가? 너도 우리의 친족과 친구를 죽이고 먹지 않았는가?”—그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자신 있게 응했다. “파ㆍ체ㆍ탄탄, 아이오우카ㆍ아토루파베. 그럼에도, 나는 매우 강하고, 정말로 몇 사람도 쓰러뜨려서 먹어왔다…아아, 거짓이 아니다. 아아, 너희들의 친족을 습격해서 사로잡을 정도로 나는 용감했다. 나는 그자들을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먹어왔다.” 그를 처형하고자 하는 자는 덧붙인다. “너는 지금 우리 손 안에 있으며 이제 곧 내 손에 죽을 것이다. 그리고 연기에 그을려서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먹힐 것이다.”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아아, 그런가, 그렇다면 나의 친족들도 원수를 갚아줄 것이다.” (Léry apud Métraux 1967: 62-63)

 

그러나 그 남자는 기독교도가 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는 세례를 받은 자들은 용기 있는 자로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이름 있는 것으로서 자신의 용감함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광장에서 매우 긴 포승줄을 허리에 결박하고, 그 포승줄을 3,4인의 젊은이들이 꽉 붙들어 매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 시작한다. “나를 죽여다오. 너희들에게는 확실히 내게 되갚아야할 빚이 있을 것이다. 나는 너희들의 아버지인 누군가를, 또 너희들의 형제인 누군가를, 나아가 자식인 누군가를 먹었다.”—그는 이처럼 자신이 먹은 상대편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 격정적으로 이야기했다. 그 모습은 마치 그가 죽임을 당한다기보다 오히려 상대편 사람들을 죽이려는 것으로 생각될 정도다. (Anchieta 1565: 223-24)

 

그리고 이 자들은 매우 조야하며 눈앞에 있는 것 이외의 어떤 화도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태연하며 마치 자신의 역량을 높이듯이 그 일을 평온하게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 후에 인생에 이별을 구하고, 많은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이라고 말하며, 더욱이 원수를 갚으려는 형제와 친족이 아직 남아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그 사람은 자신의 몸과 떨어질 준비를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모든 명예가 그러한 죽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Cardim 1583: 118)

 

그리고 이 포로들은 자신이 고통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왔음을 알고 연설을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의 인물상을 상찬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죽이려는 사람들에 대해 자신의 복수가 이미 이뤄지고 있으며 자신의 무훈과 자신을 죽이는 자의 친족들에게 다가올 죽음을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친족이 원수를 갚아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죽음의 집행자를 마을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위협한다. (Soares de Souza 1587: 326)

 

이 대화는 주역들의 입장을 역전시키는 것 같다. 안시에타는 놀란다. 포로는 “죽임을 당한다기보다 오히려 상대편 사람들을 죽이려는 것처럼 보였다”. 또 소아레스 데 소우자는 또 한 번의 역전, 즉 시간적인 역전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다시 말해 포로는 자신을 죽이려는 자에 대해 자신은 이미 복수를 행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말싸움은 복수의 시간적 순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그 희생자의 과거란 한 집행인의 과거이며, 그 집행인의 미래는 한 희생자의 미래가 된다. 처형에 의해 과거에 놓인 죽음이 미래에 놓인 죽음으로 이어지고 또 합쳐지면서 시간에 의미가 부여된다. 과거시제와 미래시제만을 포함한 이러한 이야기는 피에르 클라스트르가 구아라니의 성스런 노래에 대해 서술한 것과 비교될 수 있다.

 

[이 성스런 언어에서] 말하는 자는 동시에 듣는 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질문할 때에도 자신의 질문이 끝없이 반복되고 있으며 그 이외의 응답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응답을 불러오지 않는 질문이다. 혹은 오히려 이 아름다운 언어가 시사하듯이, 질문과 응답은 어느 쪽도 불가능하다. 시제와 동사의 형태에 주의를 기울여보자—긍정문이 성립되는 것은 과거와 미래에서만이며, 현재는 항상 부정되는 시간이다. (Clastres 1975: 143-44)

 

투피남바의 대화에서는 이와 반대로 현재란 정당화된 시간, 즉 복수의 시간이다. 그것은 요컨대 시간을 긍정하는 때다. 포로와 집행인 간의 대화와 대결은 전사의 두 시간상을 불가분하게 결합시킨다. 그것들의 시간상은 서로 듣고 응답하며 질문과 응답을 호환하게끔 만든다. 그리고 바로 이것[영어판에서는 ‘포로와 응답자 간의 극단적인 비로티적인 대화’]이 과거와 미래의 관계를 가능하게 만든다. 죽이고자 하는 자와 죽고자 하는 자만이 실제로 현재에 있다. 즉 살아있다. 의례적 대화는 투피남바 사회에 있어서 시간의 초월론적 총합을 이룬다. 복수라는 선험적 범주는 언어적으로든 식인적으로든 이 이중의 도식기능을 맡고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생성을 구체화한다. 먹기 전에는 대화는 없었다—그리고 이 두 가지 행위가 시간성을 풀어헤쳐놓는다. 그러한 시간성은 적과의 상호포함과 상호전제라는 관계로부터 나타난다. 복수의 복합은 원초적인 전체성을 회복하는 장치, 즉 생성을 부정하는 장치이기는커녕 이 말싸움을 통해 시간을 만들어낸다. 이 의례는 위대한 <현재>를 이룬다.

 

바로 기호를 먹는 것이다. 이미 다룬 것처럼 죽임을 당하고 먹힌다는 것은 분명 시간, 즉 언어, 약속과 기억으로부터 성립되는 존재인 것에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저 대화에서 정점에 달하는 의례의 제한 없는 상세는 희생자를 완전히 인간적인 주체로서 구성하려는 이 노력을 증거로 내세운다. 프랑크 레트랭강(Frank Lestringant)은 투피남바를 다룬 몽테뉴의 에세이에 대한 아름다운 분석에서(Lestringant 1982) 식인이 단순한 ‘언어의 경제학’으로 환원된다는 것, 기록자들의 기술이 저 정도로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야만성의 측면이 은폐되고 있음을 간취하고 있다. 레트랭강의 지적에 다르면, 몽테뉴는 투피남바의 식인의 비-영양학적인 상(像)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식인의 자연화[식인관습을 영양상의 필요성 등의 신체적ㆍ생태학적인 요인으로 설명하는 것]로 특징화된 긴 단절 후에 현대인류학에 다시금 나타나는 상징적 독해를 선취한 것이다. 식인을 자연화하는 경향은 마치 마빈 해리스(Marvin Harris)의 선조와도 같은 카르다노(Girolamo Cardano)의 공격적인 유물론에 의해 이미 16세기에 명시되었다. 그러나 레트랭강이 몽테뉴의 ‘관념론’을 특징짓는 방식은 우리에게는 투피남바의 의례에서 대화적 계기를 더할 나위 없이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다음과 같은 언어를 나의 논의로 끌어오는 것을 허락해 달라.

 

이제부터 먹히는 포로의 고기는 어떤 의미로도 음식물이 아니다. 그것은 기호다…[…]식인 행위는 예사롭지 않은 복수를 표상한다…[…]몽테뉴는 대학살의 귀결에 대해 계속해서 서술하지 않고 명예로의 도전, 모욕의 되갚음, 포로가 죽음 전에 창작하는 ‘전사의 노래’로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래서 결국 식인자의 입에는 이빨이 있다는 것이 잊히고 만다. 그 입은 무언가를 게걸스럽게 먹는 대신에 언어를 발한다. (Lestringant 1982: 38-40)

 

식인자들의 입에는 이빨이, (마찬가지로 날카로운) 혀가 있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레트랭강은 게걸스럽게 먹는 입과 언어를 발하는 입을 구별한다. 그렇지만 당사자가 몽테뉴가 아닌 투피남바임을 잊고 있다. 즉 죽음의 집행자는 적의 고기를 먹지 않는 유일한 한 사람이다(Correia 1551:Ⅰ, 228; Gandavo 1576: 139). 저 연설, 복수의 ‘표상’은 먹히고자 하는 고기를 기호로 변용시킨다. 대화를 통해 요리하는 자는 그 맛을 볼 수 없다.

 

복수에 의해 그리고 복수를 위해 확립된 ‘이것’의 내용이란 무엇인가? 복수 그 자체, 즉 순수한 형식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다. 적들 간에 널리 풀려나가는, 시간의 순수한 형식. 플로레스탕 페르낭지스(Florenstan Fernandes 1952)의 허락을 받아 말한다면, 나는 전사의 복수가 희생자의 공희를 통해 사회를 선조들과 다시금 연결시키고, 사회를 그 자체와 다시금 일치시킴으로써 구성원의 죽음을 통해 위기에 처한 사회체의 통일성을 회복한다는, 종교의 도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 나는 식인이 게걸스럽게 먹히는 적의 신체라는 매개를 통해 사회의 죽은 구성원의 ‘신체적인 실체를 돌려놓는’ 과정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문제는 사람들이 죽어버린다는, 생성의 파괴적인 흐름으로부터 구출될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복수를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히려 복수를 만들어내기 위해, 또 그와 마찬가지로 미래를 만들어내기 위해 죽는다(그럴 수밖에 없다면 적의 손에 의해)는 것이다. 집단의 죽은 구성원들은 그 집단을 적과 결부시키며, 그 역이 아니다. 복수란 회귀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충동이다. 과거의 죽음의 기억, 즉 자집단의 그것과 타집단의 그것은 모두 생성의 산출을 밀어낸다. 전쟁은 종교의 시녀가 아니고,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다.

 

끝없는 과정 속에서 그 항에 의해 포착되면서도 그대로인 것도 아닌 관계라는, 복수가 띠고 있는 이 이중의 제한 없음은, 복수가 널리 드러나는 시간을 폐절하기 위한 저 기계들 중 하나가 아님을 시사한다. 오히려 그것은 시간을 만들어내고 또 시간 속을 여행하는—이것이야말로 시간을 진정 폐절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기계다. 분명 복수는 과거와 결부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의례적인 대결이라는 위대한 현재를 통한 미래의 잉태이기도 하다. 복수가 없다면, 즉 적이 없다면 죽은 자도 생길 수 없다. 또 아이들도, 이름도, 연회도 없을 것이다. 즉 그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집단에 속한 고인들의 기억의 회복이 아니라 적과의 관계의 지속이다. 적이야말로 집합적 기억의 수호자다. 왜냐하면 이름, 문신, 연설, 노래라는 집단의 기억은 적의 기억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투피남바에서 복수를 위한 전쟁은 (아로레스탄과 그 후 피에르 클라스트르가 말한 것처럼) 이 게임의 상대 선수들의 서로에 대한 자율성의 집요한 주장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원초적인 타율성의 현현(顯現)이며, 타율성 그 자체가 자율성의 조건임을 승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복수란 ‘사회의 진실’이 언제나 타자의 손에 달려 있음을 인정하는—우리가 바타유(Georges Bataille)와 함께 헤겔주의자가 된다면(Bataille 1973: 64)—수밖에 없다면, 어떤 모티브가 주어지는 것일까? 복수는 종교의 귀결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자신의 적에 대해, 또 그것을 통해 존재하는 사회의—가능성의 조건으로 기능하는 목적인(目的因)이다. 그렇다면 눈앞의 과제는 단지 종교와 그 신념을 대신하여 복수와 그 명예를 <전체성>이라는 기체(基體)의 함수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투피남바에서 전사의 복수가 이 사회의 중추적인 가치로서 구성될 때에 표현되는 것은 근원적인〔존재론적〕불완전성, 근원적으로 긍정적인 불완전성이다. 항상성(constántĭa)과 변덕스러움, 개방성과 강고함은 한 진실의 두 얼굴이다. 그 진실이란 타자의 절대적인 필요성에 관한 것이며, 바꿔 말하면 <타자> 없는 세계의 사고불가능성(Deleuze 1969)에 관한 것이다.

 

 

 

신고
Posted by Sarantoya

예전에 오키나와의 "구치카미자케"(口噛)에 관한 일본어 논문을 한국어로 번역한 적이 있다. "구치카미자케"는 말 그대로 '생쌀을 씹어서 발효시켜 만든 술'이다. 지금은 명맥이 거의 끊겼지만 적어도 제2차세계대전 직후까지만 해도 오키나와에서는 '신주'(神酒)로서 널리 음용되었다고 한다. 그 논문에서는 동아시아의 술의 여러 계보―탁주, 청주, 소주―중 "탁주"에 속하는 것으로서 누룩발효법을 대신한 제조법에 초점을 두고 논의되었다. 예전에 이 논문을 번역했을 때에는 "처녀"들이 생쌀을 씹어 발효시킨 술을 신에게 바친다는 것 자체가 뭔가 미개하면서도("비위생적이면서도") 에로틱하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아마존에서 마니옥(고구마류의 뿌리식물)으로 신주를 만들 때에도 "구치카미자케"와 동일한 제조법을 사용한다는 내용을 카스트로의 이 책에서 접하고나서 "구치카미자케"가 다른 측면에서 또 다르게 탐구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에서 선발된, 치아가 고른 대략 6명의 "처녀"가 신사에서 이틀에서 삼일 간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씹고 뱉은 쌀로 만든 "구치카미자케"는 유효기간이 매우 짧다. 3일이면 바로 술이 되고 5일이 지나면 산화되어 시어진다. 산화된 술은 약으로 쓰이는데, 오키나와 말로 이 술을 마시면 "쿤키", 즉 정령이 붙는다고 한다. "구치카미자케"의 발효법에 초점을 두다보니 처녀의 '침'으로 발효가 된다는 그 점에만 집중해왔지만, 술의 이름을 문자 그대로 읽어내면 '치아'가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닐까? '치아'와 '정령', 바로 이 두 가지는 애니미즘(동아시아의 샤머니즘을 포함하여)에서 '포식자'로서의 가장 중요한 징표다. 치아가 고르고 튼튼해야 포식자다. 그리고 그 포식자는 혼을 갖는다. 시베리아의 곰 수렵족에서 시작된 샤머니즘은 한편으로는 몽골, 만주, 한반도를 거쳐 오키나와까지 이르렀고, 또 한편으로는 베링해를 건너 알래스카, 북아메리카를 거쳐 남아메리카의 아마존까지 이르렀다.

카스트로에 따르면, 아마존에서 '초경의례'의 하나로서 초경의 연령대의 소녀들이 마니옥을 씹어 술로 만드는 의례는 식인(카니발리즘)의 젠더적 분할이다. 카니발리즘은 동물적인 포식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자연상태'에서 '문화상태'로의 이행을 나타내기에, 카스트로가 파고든 것처럼 그 이행의 논리에서 서구의 코스몰로지와 다른 코스몰로지를 해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씹어서 신에게 바친다는 "구치카미자케"에서 또한 오키나와, 나아가 동아시아의 코스몰로지의 일단을 밝혀볼 수 있지 않을까?

 

끊임없는 전쟁, 복수, 카니발리즘..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이것들을 관통하는 논리를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로 해석했고, 레나토 로잘도는 "비탄"의 감정으로 이해했다. (필리핀의 일롱고트족의 '머리사냥'에 대해 레나토 로잘도는 참으로 어의 없게도 '비탄'이라는 감정을 '사냥'이라는 특정행위에 부착시키는 상대주의적 문화논리로 환원해버린다. 포식과 카니발리즘의 결합인 '머리사냥'이라는 코스몰로지를 연구방법론으로 전치시키는 문화상대주의의 극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권력의 집중화를 거부하고 그에 저항하며 일상적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전사들에게서 또 다른 사회형태를 추출하고자고 했던 클라스트르의 논의를 카스트로는 레비-스트로스의 (포스트) 구조주의적 사고와 연결짓는다. 그것은 바로 '복수'가 가진 생성의 힘에 주목하는 것이다. 『식인의 형이상학』에서 보다 분명하게 전개된 이 '생성으로서의 구조주의'는 이미 『인디오의 변덕스런 혼』이라는 이 책에서 논리적인 완결성을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

 

 

투피남바는 어째서 전쟁에 패했는가/전쟁을 잃었는가?

 

 

사제들의 종말론적인 설교는 혼의 불사성, 현세의 삶의 질에 따라 달라지는 내세, 묵시록적인 대화재 등 몇 가지 점에서 재래의 관념과 부합했다. 반면 올바른 길에 관한 기독교적인 이해와 현지인의 이해가 내포한 명령에 대해서는 원칙상 불일치했다. 핀다부수도 말했듯이, 전쟁하는 것과 복수하는 것은 성인 남자의 당연한 몫이었다. 복수라는 명령이 해안지역의 민족들의 사회적 기계를 떠받쳤다. “투피남바는 매우 호전적이므로 그들의 토대를 이루는 것 모두는 적에 대해 어떻게 전쟁에 복무할 것인가와 관련되어 있다”(Soares de Souza 1587: 320). 여기서 현지인의 변덕스러움은 극단적이다. 인디오들이 적어도 하나의 영역에서 훌륭할 정도로 일관되며 또 그들이 “그들을 오래 버티게 할 만큼 매우 예민한 감정”을 무언가에 대해 품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복수에 관한 모든 정황과 엮어있다.

 

그들은 서로 전쟁을 한다. 즉 10, 15 혹은 20 레구아[각주:1] 떨어진 민족과 다른 민족이 싸우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분단되어 있다. […] 그리고 그들의 모든 명예는 두 가지로 한정된다. 하나는 많은 아내를 가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적을 죽이는 것이다. 이 두 가지야말로 그들을 행복하게 하고 또 그들이 바라는 바다. […] 그리고 그들은 그 강한 욕망 때문만이 아니라 […] 단지 증오와 복수로 인해 전쟁을 행한다…. (Nóberga 1549:Ⅰ, 136-37)

 

친족을 모두 불러들여서 복수를 행하고자 한다—복수는 그들에게 가장 큰 명예다. 곧 세상을 떠나려는 자는 적의 고기를 먹여주기를 바라는데,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위로를 얻어갈 수 있다. 또 그들은 잠자는 곳인 해먹의 머리 두는 부분에 전혀 새로운 고기를 한 점 가져다 놓는 것을 큰 명예로 본다…. (Rodrigues 1552:Ⅰ, 307-08)

 

그리고 그들을 가장 맹목적으로 만드는 것은 복수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욕구이며, 그들의 명예는 이 복수로부터 성립된다…. (Grã 1554:Ⅱ, 132-33)

 

그들의 거의 모든 사고와 관심을 모으는 전쟁…. (Anchieta 1560:Ⅲ, 258-59)

 

[전쟁에 임하기 전에 지도자는 사람들에게 연설을 행한다.] 그들에게 전쟁에 돌입하여 용감하게 싸울 의무를 들이대기 위해 적에게 복수하러 가는 의무에 대해 말한다. 또 지도자는 적으로부터의 승리를 약속하고 그들에게는 어떤 위험도 없으며 이 모든 것들을 후세 사람들이 기억해줄 것이며 그들을 찬양하는 노래가 울려 퍼지리라는 것을 약속한다…. (Soares de Souza 1587: 320)

 

브라질의 민중들은 목숨을 걸만한 우상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것을 위해 죽음에 내몰리고 또 죽인다. 즉 그들의 “뿌리 깊은 관습”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 여기에 바로 왜 이 관습들이 예언자들에게 진짜 장해가 되었는지의 이유가 있다. 전쟁에 의한 복수는 모든 악습의 근원이었다. 식인, 일부다처, 만취, 다수의 이름을 얻는 것, 명예—이 모든 것은 이 주제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카라이바의 담론은 본질적인 규칙들을 폐지함으로써 [타나의 흐름의 ‘코뮤니스트’를 목적으로 하듯] 사회구조를 일시적으로 중지시키는 것—혼인에 관한 규칙과 촌락의 농경생활을 방기하는 것 등—을 설파한 것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담론에서조차 전쟁이라는 영위를 유지하며 장려하고 있음에 주의해보자. 악 없는 대지는 전쟁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잠재적인 것으로 본다. 예언자에 의해 이뤄지는 약속의, 고전적인 3개 조를 떠올려보자. 즉 장수, 노동 없는 풍요로움, 그리고 적에 대한 승리가 그것이다. 샤머니즘은 전쟁과 결정적으로 이어져 있다. 테베에 따르면 “파제와 카라이바는 예언자로서 이 민중들에 관한 사건, 특히 그들의 주요한 관심사인 전쟁에 관한 일을 떠맡는다”(Thevet 1575: 82).

복수라는 진홍빛 실이 투피남바 족 남녀의 삶과 죽음을 관통한다. 남자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작은 화살과 재규어와 독수리의 손톱으로 만든 머리장식물을 선물로 받는다.

 

이 아이가 덕이 있고 매우 용감한 자가 되도록 마치 그 아이에게 적에 대해 항상 전쟁에 복무하기를 약속받듯이.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과거에 전쟁한 사람들과는 결코 화해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 여자아이라면 그들은 머리 주변에 ‘카피이고우아레’라고 불리는 짐승의 이빨 몇 개를 씌운다. […] 그들에 따르면,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그 아이의 이빨이 더 튼튼해야 하고 강해져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Thevet 1575: 50)

 

여기서 ‘고기’는 포로의 고기를 말한다. 물론 지나친 생각일 수 있다. 그러나 초경의례에서와 마찬가지로 캐피바라(Capybara, 남아메리카 원산지의 가장 큰 설치류)의 이빨로 만들어진 머리장식물을, “카오우인이라고 불리는 음식물을 씹어서 만들 정도로 이빨이 강해지도록”(Thevet 1575: 207) 머리에 쓴다. 이것은 남녀의 두 성(性)에 대해 전쟁복합에서 각각의 주요한 활동을 담당하도록 정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남자들은 적을 잡아 죽이는 일을, 여자들은 식인 연회의 불가결한 구성요소인 카우인[즉 사춘기의 여성이 마니옥을 씹어서 술로 발효시킨 알코올 음료]을 만드는 일을 각각 맡았다.

 

남성에게 첫 몽정 의례에 해당하는 통과의례는 포로의 의례적 처형이었다. 포로를 죽여서 처음으로 이름이 바뀌는 것을 경험하지 않으면, 젊은이는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간주된다(Anchieta 1585: 434; Cardim 1584: 103; Monteiro 1610: 409). 적을 한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포로로 잡고 그렇게 함으로써 어린 시절의 이름을 바꾼 남자가 아니고서는 엄마들은 자신의 딸을 줄 수 없었다(Thevet 1573: 134). 즉 집단의 재생산은 이념상 적을 잡아서 의례적으로 처형하는 장치, 전쟁의 원동기와 결부되어 있었다. 일단 결혼하면 남자들은 의리의 부모와 형제에게 포로를 선물하고 이 인척들이 복수를 행하고 새로운 이름을 얻도록 해야 했다. 혼인에 기반한 이러한 급부는 남성이 처가 쪽에서의 ‘노예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요건 중 하나였다.

 

포로들을 전쟁에서 사로잡아 처형함으로써 남자들은 몇몇 이름과 명성을 축적해갔다.

 

그들에게 행복은 사람을 죽이고 몇몇 이름을 얻는 것이며 이 영광을 위해 그들은 최대한의 힘을 발휘한다. (Nóberga 1556-7:Ⅱ, 344)

 

남자는 수많은 적을 사로잡아 죽이는 것을 자신의 최대한의 명예로 여기는데, 그러한 행위는 그들에게 관습이 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이 죽인 적의 숫자만을 명예로 여기며, 그들 사이에서 가장 고귀한 자는 많은 이름을 가진 자다. (Staden 1557: 172)

 

이 사람들에게 인생의 모든 명예와 즐거움 중에 적을 죽여서 그 머리로부터 이름을 얻는 것만큼 큰 것이 없다. 또 그들은 성대한 의식을 통해 적을 죽이는데, 이 적의 죽음을 축하하는 연회에 필적하는 잔치는 없다…. (Cardim 1584: 113)

 

이 민족이 갖고 있는 최대의 욕구 중 하나는 적을 죽이는 것이며 그를 위해 그들은 극단적인 행동을 한다. […] 그들은 용감하다고 인정받기 위해 그렇게 한다. 왜냐하면 그들 사이에서는 자신이 죽인 적들로부터 새로운 이름을 얻는 것은 지상의 명예를 얻는 것이며 가장 큰 행복이기 때문이다. 남자들 가운데에는 백 개 혹은 그 이상의 이름을 가진 자도 있다…. (Monteiro 1610: 409)

 

이처럼 몇 개의 이름은 용감한 공적에 대한 기억이기도 하며, 투피남바 족에게 명예의 본질적인 기호로서 그 가치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것들은 또한 의례적인 반흔문신[피부에 상처를 내어 모양을 만드는 문신]이나 얼굴에 구멍을 내어 장식물을 삽입하는 것, 혹은 사람 앞에서 연설할 권리, 여러 명의 처를 들이는 것 등의 한 세트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사치로서의 일부다처는 추장이나 위대한 전사에 어울리는 것으로 여겨졌다. 포로를, 기호를, 여자들을, 의리의 아들들을 축적하는 것—전사로서의 명성에 의해 처가에 대한 의존상태로부터 벗어남으로써 남성은 이것들과 동일한 종속형태를, 자신의 젊은 의리의 아들, 즉 자신의 몇몇 아내가 낳은 딸들의 남편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 “이렇게 더 많은 딸을 가진 남자가 이 딸들을 통해 연결된 의리의 아들들에게 존경받게 된다. 의리의 아들들은 자신의 의리의 아버지 및 형제들에게 항상 종속된다…”(Anchieta 1584: 329).

 

나아가 전사로서의 공적이 현세에 있어서 명예의 조건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또한 <피안>에서의 안일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다. 용감한 자만이 낙원에 갈 수 있으며, 겁쟁이의 혼은 ‘아냔’이라고 불리는 악령들과 함께 지상을 비참하게 떠돌도록 정해져 있다(Thevet 1575: 84-5; Léry 1578: 185; Abbeville 1614: 252; Métraux 1928: 111-12; Fernandes 1949: 285) 그뿐만이 아니다. 적을 죽임으로써 복수를 행하는 것이 용감하고 가치 있는 삶의 방식의 핵심이라면, ‘좋은 죽음’이란 싸우는 와중에 성취될 수 있으며 또 그 지상의 형태는 촌락의 중앙광장에서 의례적으로 처형되는 것이다. 포로의 상태에서 ‘희생’되는 것을 용감하고 호기로운 태도를 가지고 받아들여야 한다.

 

서로를 먹는다는 이 악행은 그들 사이에서 상당부분 폐지되기 시작했으며 며칠 전에는 이 목적을 위해 살찌운 한 사람인가 두 사람에게 생명을 구해줄까를 물었다. 이 질문을 받은 포로는 그들에게 자신을 되팔지 말아달라고, 왜냐하면 용감한 대장으로서 죽임을 맞이한다면 자신의 명예가 보존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Azpiculeta 1551:Ⅰ, 279)

 

그들은 적들을 이 모든 의식에 걸쳐 용감하고 결연하도록 설득하고, 또 만약 적들이 죽음의 공포로 인해 이 의식을 거부한다면 그들은 적들을 약한 겁쟁이라고 부른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관점에서 가장 나쁜 이 불명예를 쫓아내기 위해 그들은 죽음의 순간에 ‘그것을 실제로 보지 않는 자는 믿을 수도 없다’는 것처럼 행동한다. 다시 말해 마시고 먹으며 분별을 잃은 자들처럼 육체적인 쾌락에 잠기는 그들의 안일한 모습은 그들 자신이 죽음을 전혀 보지도 알지도 못한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Blázquez 1557:Ⅱ, 386)

 

여기서는 서로 엮이는 두 개의 모티브가 있다. 한쪽은 종말론적이고 개인적=인격적인 수준에 속하며, 다른 한쪽은 사회학적이고 집합적인 수준에 속한다. 적에 의해 게걸스럽게 먹히는 것은 투피=구아라니의 우주론에 특징적인 하나의 주제, 즉 매장과 사체의 부패에 대한 공포와 결부된다.

 

포로들에서조차 이 상황에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 즉 그들의 생각으로는 영광스러운 죽음이 덮치는 것을 고귀하고 위엄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에 따르면, 묘지의 흙의 무게—그들의 생각으로는 상당한—를 떠받치고 있어야 하는 것은 겁먹은 혼에 적당하며, 전쟁에서의 죽음에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Anchieta 1554:Ⅱ. 113)

 

[그리고] 그 중에는 먹히는 것에 만족하는 자들도 있으며, 그들은 그에 임하는 데에 도움을 받는 것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에 따르면, 죽어서 썩은 내를 풍기며 짐승에게 먹히는 것은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Cardin 1584: 114)

 

자코모 몬테로(Jácomo Monteiro)[1574-1629, 포루투칼 출신의 예수회 수사]는 ‘이교도의 징후’를 상기시키면서 원정 나가는 전사들이 걱정하는 것 중 하나는 운반하는 식량의 부패라고 서술한다.

 

조리된 고기에 구더기가 끼면—이 땅에서 가장 무더울 때에는 그렇게 되기가 쉽다—그들은 고기에 구더기가 낀 것과 똑같이 적도 자신들을 먹을 수 없을 것이라고, 대신 적들을 죽이고 구더기 투성이로 만들자고 말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야만인들에게는 최대의 모욕이다. (Monteiro 1610: 413)

 

포로를 잡는 측과 포로가 되는 측 사이에는 공모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관계에 의해 한 사람의 투피남바는 또 다른 투피남바에게 최적의 적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적을 포로로서 처형하는 다양한 양상이 포로를 투피남바의 이미지에 합치된 존재로 만들려는—그가 아직 투피남바가 아닌 경우에는—노력을 입증한다. 유럽인의 경우, 신체와 얼굴의 털이 다 뽑혀나가고 현지의 양식으로 온 몸에 색이 입혀진다. 한스 슈타덴(Hans Staden)의 경우가 그러했다. 포로는 자신들을 사로잡은 사람들과 함께 춤추고 식사를 하고 술을 마셔야 했으며, 때로는 그들의 전쟁에 동행해야 했다. 나아가 포로에 처를 준다는 것, 즉 그를 의리의 형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적을 사회화하기 위한 기획으로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투피남바는 자신을 죽이고 먹고자 하는 타자가 완전히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정의되어야 하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이해하고 바라고 있다고 확신했다.

 

적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먹히는 현상이 투피계의 여러 민족들에게 공통되는, 사람의 부패되기 쉬운 부분을 화장함으로써 불사성을 달성한다는 문제계(Clastres 1975; Viveiros de Castro 1986)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 또 투피남바의 외-식인이 직접적으로 하나의 장송체계가 되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또 투피남바가 적을 게걸스럽게 먹었던 것이 애도가 아닌 복수와 명예를 위한 것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는 내가 근본적이라 생각하는 사회학적인 모티브와 조우한다. 이 모티브는 부패한다는 것과 부패할 수 없다는 것에 관한 인격론적인 주제보다도, 더 근본적일 수 있는 무언가—선교사들에 의한 교화와 개종의 노력에 대해 식인관습 이상으로 저항한 무언가와 관련되어 있다. 적의 죽음 및 적의 손에 의한 죽음이 가능한 것은 복수의 영속화 그 자체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처럼 적의 고기를 먹게 된 후에는 적에 대해 품는 증오는 영원히 확고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강한 모욕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며, 이로써 서로 반드시 원수를 지기 때문이다…. (Gandavo 1576: 139)

 

무엇보다 첫 번째로 알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전쟁하는 것은 그들의 영토의 경계를 수호한다거나 확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또 적으로부터 얻을 전리품으로 자신들의 부를 늘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명예를 위해, 그리고 복수를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웃과 다른 먼 곳의 주민들이 자신들을 모욕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혹은 자신들의 친족이나 친구가 적으로부터 사로잡혀 먹혔다는 것을 상기함으로써 그들은 용감하게 전쟁에 임할 수 있다…. (Abbeville 1614: 229)

 

타인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 죽음은 그것이 보복될 수 있는 죽음, 즉 정당하게 복수를 행할 수 있다는 죽음이 된다. 그것은 의미 있는 죽음이며, 가치와 인격을 만들어낼 수 있는 죽음이다. 안드레 테베는 어떻게 자연의 숙명으로서의 죽음이 사회적인 필연성으로 전환되고, 나아가 사회적인 필연성이 개인의 덕으로 전환되는지를 정교하게 표현하고 있다.

 

포로가 [자신이 곧 처형되고 먹힌다는] 사실을 충격으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죽음은 명예로운 것이며 또 그렇게 죽는 것은 고향에서 어떤 전염병으로 죽는 것보다도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들에 따르면)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입어 생명을 잃고 죽음에 이르게 된 것에 대해서는 복수할 수 없지만, 전쟁에서 학살된 자의 원수를 갚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Thevet 1575: 196)

 

그렇다면 복수는 결코 단지 인디오의 공격적인 기질이나 과거로 향한 모욕을 허락하고 기억하는 능력이 그들에게 병적일 정도로 결여되어 있다는 것의 산물이 아니다. 그와 정반대로 복수는 바로 기억을 만들어내는 제도다. 기억이란 복수를 통해 개인의 죽음이 사회체의 장수를 위한 역할로 자리 매김되는, 적에 대한 관계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다. 개인의 역할과 집단의 역할과의 분리, 명예와 모욕의 기묘한 변증법은 이로부터 생겨난다. 즉 타인의 손에 죽는 것은 전사에게 명예로운 것이나, 그가 속한 집단의 명예로서는 모욕이며 동등한 반례를 행할 필요를 제기한다. 결국 명예는 복수에 대한 동기가 될 수 있고 그 자체의 생성을 통해 사회의 존속을 위한 담보가 됨으로써 그 기초를 다진다. 적과 동료들을 연결하는 죽음에 가닿는 증오는 서로에게 불가결한 핵심이다. 외-식인이라는 이 시뮬라르크는 개인을 먹고 소비함으로써 그 집단의 어떤 본질적인 것을 유지하고자 한다. 요컨대 이 집단들의 타자에 대한 관계, 절대불가결한 코나투스(Conatus)[자기 보존의 노력ㆍ경향]로서의 복수다. 불사성은 복수에 의해 획득되며 또 불사성의 탐구가 복수를 만들어낸다. 적의 죽음과 자신의 불사성 사이에 모든 개인이 걸어가야 할 궤적,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 있다.

 

 

 

  1. 거리의 단위. 지역ㆍ시대에 따라 용법이 다르다. 1레구아는 약 5.0~6.6km에 해당한다. [본문으로]
신고
Posted by Sarantoya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