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인의 형이상학』에 관한 짧은 소회를 적어놓는다. 이 책은 최근 인류학에서 거대한 폭풍처럼 일고 있는 ‘존재론적 전회’라는 이론적 흐름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그래서 소회라는 것은 이 책에 당연히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깊이 파고들어서 논리적으로 정리해내기에는 내가 아직 이 책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 작업은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그 작업에 단초가 될 만한 피상적인 생각의 편린들을 생각나는 대로 간략하게 언급해두고자 한다.

무엇보다 내가 이 책에 매료되었던 것은 이 책의 저자인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독특한 글쓰기 양식이다. 대학원에 진학한 후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내가 받은 학문적 훈련의 정신은 한마디로 말하면 ‘상식에 준하기’이다. 즉 학문을 상식화하는 것, 상식을 학문화하는 것이다. 상식은 상식적으로 대다수가(혹은 대체로) 동의할 수 있는 어떤 것들을 가리킨다. 어떤 대상에 관한 상식들의 관계형식을 설정하고 그 설정된 관계형식으로 그 대상에 관한 상식들을 차곡차곡 쌓아올려서 결국에 그 대상을 총체적으로 규정하는 것,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내가 이해하고 실행한 학문이 그랬다. 그러나 나는 한편 이러한 ‘상식 쌓아올리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지루했고 너무나도 고루했기 때문이다. 다만 ‘상식 쌓아올리기’의 미덕이라고 한다면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겠다. 그것은 달리 말해 돌이 ‘상처’를 주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러한 학문의 실행방식이 나만의 방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학회지 논문들을 읽지 않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돌이 어떻게 재미를 주겠는가? (돌이 재미를 준다면 그것은 돌을 형상화하는 사고의 능력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학회지 논문들, 그 논문들이 논하는 무엇들은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표현을 빌면 이미 ‘응고된 행위’로서 사물화된 것들에 불과하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대체로 그렇다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오게 된 과정을 유추해볼 수 있다. 지식의 주변부에서 중심부의 지식을 ‘진리’로 수입해오던 한국 학계의 관행, 그에 안주하고 이권을 챙겨온 유학파 출신의 기득권 교수집단, 그에 편승하고 굴복한 무수한 석박사과정생들, 그리고 나처럼 그러한 기득권집단과 대학 언저리의 떡고물로 연명하는 준-학자집단, 이들의 살아가는 방식의 총합, 즉 ‘정신의 식민화’가 작금의 이 사태를 불러들였다. 

그렇다면 학문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상식에 반하는 것이다. 상식을 비판하고 상식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학문이 상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학문은 새로운 상식을 만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학문은 사방을 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적들과 상식을 논하지는 않는다). 이 상황을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유연관계‘론’을 아날로지적으로 가져와서 묘사해보겠다. 카스트로는 생산과 생성을 친족체계의 출자(出自)관계(부모-자식관계, 즉 혈연관계)와 유연(類緣)관계(인척관계)에 각각 대응시켰다. 카스트로에 의하면, 레비-스트로스의 친족의 구조주의에서 친족의 존재방식은 생산으로서의 출자관계를 끊임없이 부정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생성으로서의 유연관계를 구조화한다. 그러면서도 친족은 유연관계를 출자관계로 끌어당기려 한다. 이를테면 한 남성은 그의 아내의 남동생과 매형-처남관계(많은 부족사회에서 이러한 관계는 “의리의 형제”로 불린다)가 되는 한편, 그 남성의 처남은 그 남성의 자식의 삼촌이라는 출자관계의 선을 따라 설명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출자관계의 선을 끊어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완벽한 유연관계, 즉 처남-매형만의 순수한 인척관계로 남는 방법)은 유연관계의 매형-처남을 잠재적인 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카스트로는 브라질 남단의 투피남바 족의 카니발리즘 의례를 통해 이를 설명해낸다. 투피남바 족은 전쟁의 상대편을 의도적으로 생포한 후 생포한 포로를 집단 내의 여성과 결혼시키고 일년이라는 일정 기간 매형-처남관계로 지낸다. 그리고 일년 후 포로를 죽이는 의례를 행한다. 이 의례의 절정에서 죽임 당한 포로의 신체는 집단 내의 성원들에게 음식으로 제공된다. 이때 의례의 집행자이자 포로의 대리자인 샤먼과 포로의 아내는 그 음식을 먹지 않는다. 샤먼과 포로의 아내를 제외한 집단성원들은 포로의 신체를 ‘의례적으로’ 먹음으로써 포로의 퍼스펙티브를 얻는다. 이처럼 생산을 끊어내고 생성을 얻는 대가는 죽음이다. 생성으로서의 학문은 유연관계로서의 적을 둘 뿐이며, 그때의 생성은 죽음의 이면에 다름 아니다.

『식인의 형이상학』의 토해내듯 정곡을 찌르는 긴장감,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 독아청정의 독자성, 어떤 인과관계의 상식을 허용하지 않는 서슬 퍼런 청량감, 이것들로 한번에 독자를 저격하는 그의 글쓰기 양식은 투피남바 족의 카니발리즘을 충실하게 재현한다. 사냥과 전쟁, 음식과 카니발리즘 사이를 위태롭게 유영하면서 말이다.

에두아르도 콘이 말했듯이 막스 베버에 의한 근대성은 탈주술화로 요약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가 들뢰즈를 인용한 표현에 따르면, 개념을 얻는 대신 내재평면을 잃은 것이다. 신이라는 개념과 인간이라는 개념은 성스러운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을 파멸적으로 분리해내었고, 근대적 인간은 인간이라는 개념의 식민화에 지배되고 말았으며 역설적이게도 식민지(=대지)에 종속되고 말았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형이하학의 토대를 갖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정한 형이상학은 식민지(=대지)에서 탈식민화하는 것이다. 그의 학문은 근대가 식민화한 형이상학을 죽음의 생성으로서 되살려내는 것이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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