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상』 2017년 3월 임시증간호에서 '인류학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최근 인류학의 이론적 동향과 현대철학과 교차되는 지점들을 다루고 있다. 1년전 『현대사상』에서 '인류학의 행방'이라는 주제로 다뤘던 권호보다 훨씬 내용이 깊다. 그 사이에도 이론적으로 상당히 진척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호에서 재밌는 글들을 골라 번역해올리겠다. 

 

다음의 글은 실재론과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가 상통하는 측면으로서 "비홀리즘적 전회"를 논하고 있다. 이 글은 그 둘의 가교로서 메릴린 스트래선의 이론을 가져오는데, 가교의 내용도 그렇거니와 난해한 스트래선의 문화이론 자체가 잘 정리되어 있어서, 존재론적 전회를 공부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학자 중 한 사람인 스트래선의 소개글로도 의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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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ㆍ홀리즘적 전회: 인류학에서 현대철학으로

 

 

시미즈 타카시(清水高志)

 

 

 

2016년 11월, 〈사물 그 자체—오늘날의 형이상학과 실재론〉(Choses en soi: Métaphysique et réalisme aujourd’hui)이라는 제목의 학술회의가 엠마누엘 알로아(Emmanuel Alloa)와 엘리 듀링(Elie During)의 주관 하에 파리 서낭테르(西Nanterre) 대학에서 개최되었다. 퀑탱 메이야수, 레이 브라시에(Ray Brassier), 패트리스 마니글리에(Patrice Maniglier),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 등 쟁쟁한 학자들이 참가한 이 모임이 어떠했는지를 말하기에는 현시점에서 정보가 충분치 않다.

 

그러나 공식사이트에 게재한 취지문에 “어떤 이들은 사물의 상호객체성을 이론화하여 새로운 코스몰로지의 길을 열고자 노력하고, 다른 이들은 이를테면 <다자연주의>의 퍼스펙티브와 함께 민족지 혹은 문화인류학에서 착상을 얻고 있다”고 한 것처럼, 사물 그 자체에 접근하고자 하는 철학의 21세기의 경향과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다. 2007년 영국의 골드스미스컬리지(Goldsmiths college)에서 열린 학술회의가 사변적실재론의 조류의 시작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이후 사변적실재론으로 세상의 이목을 모았던 브라시에와 메이야수의 이름이 있는 반면 하만과 그랜트의 이름이 없고 그 대신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와 마니글리에라는 인류학자 혹은 인류학과 깊은 관련이 있는 철학자의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포스트구조주의를 넘어서 철학을 갱신하고자 하는 운동을 앵글로색슨권으로부터 프랑스로 옮기려는 의도를 가진 모임이었음은 분명하다.

 

하만과 인류학자이자 철학자인 라투르는 종종 공저를 발표했는데,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가 하만 주변과 적극적으로 손을 맞잡았다거나 의견교환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없다. 그리고 알로아와 듀링이 공동주관한 이 학술회의는 바로 이러한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필자는 2015년에 듀링 씨를 자택으로 초대하여 건축가인 카라사와 유우스케(柄沢祐輔)와 함께 약 네 시간에 걸쳐 환담을 나누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복수의 존재론(ontology)를 다루는 인류학의 최근 경향에 대해 전통적인 철학교육을 받은 한 사람으로서 차분하지 않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동향을 적극적으로 흡수하고자 할뿐만 아니라 현대사상의 갱신이라는 기획을 둘러싸고 앵글로색슨권이 선취한 정세를 뒤집을 유력한 지원군으로서 인류학의 온톨로지를 받아들이려는 것이다.

 

2007년에 열린 학술회의는 결과적으로 영미와 유럽대륙이라는 서로 다른 지역의 사상운동의 콘트라스트를 만들어냈지만, 이번 프랑스에서는 <포스트구조주의 이후>의 방향성에 대해 동시대를 대표하는 여러 영역의 우수한 학자들에 의해 확인받고자 했다는 것이 괄목할 만하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포스트구조주의가 개화한 바로 그 곳에서 새로운 세대가 낡은 사조를 청산하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어떤 의미에서 현대 철학은 전회를 하려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며 홀리즘을 어떻게 초극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접근법으로 오늘날의 사상을 다양하게 모색하려는 것이다. 인류학이 현대사상에 제시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홀리즘을 극복하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비베이로스의 퍼스펙티브주의, 복수의 대립적인 이항 조합과 그 변화에 의해 형성되는 데스콜라의 네 유형, 그 자체의 역할을 변환하여 집단과 개인, 전체와 부분, 객체와 주체의 위치를 가환(可換)하는 다양한 ‘도구’에 관한 스트래선의 민족지 등은 모두 대립적인 이항 속에서 상호 위치의 교체가 반복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공통항으로 부상해온 이 경향이 포스트구조주의까지의 방법론과 비교하면 과연 얼마나 다르며 그리고 왜 그것이 유망한가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은 아직까지 충분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 본고에서는 그러한 측면에서 이론상의 분석을 시도하며, 그와 더불어 작년 『현대사상』의 인류학특집(「인류학의 행방」)에서 검토한 미셸 세르(Michel Serres)의 최근사상인 간(幹)-형이상학(Métaphisique souche)이라는 구상도 다른 관점에서 조명해보고자 한다.

 

 

 

1. 홀리즘을 탈구시키다

 

먼저 오늘날의 영국을 대표하는 인류학자의 한 사람인 메릴린 스트래선을 예로 들어보자. 그의 저작인 『부분적인 연결』(Partial Connections)이 제시하는 것은 전체성과 부분의 관계의 변경이다. 특히 민족지 연구에서 어떤 집단이나 요소들의 집합이 ‘부분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것을 넘어서 포섭하는 전체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게 된 것이 아니라 부분들의 연결에 의한 것임을 이 책에서 그녀는 밝히고 있다. 이것은 바꿔 말하면 부분을 '부분적인' 것으로 만드는 요소 간에 일방향적인 위계(hierarchy)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트래선에 의하면, 민족지의 대상은 조사의 스케일이 작든 크든 마찬가지의 치밀함과 복잡함을 가질 수 있다.

 

통문화적인 비교에 관심이 있는 인류학자가 스케일 혹은 스케일 상의 몇몇 지점에서 [그 때마다] 상이한 레벨을 그 혹은 그녀의 도식에 도입할 수 있는 것은 비교나 차이화를 상대적으로 억압하기 때문이다. 즉 상대적인 의미에서 파푸아뉴기니의 사회들에서 하겐과 기미의 차이는 고지대와 저지대의 차이나 멜라네시아와 폴리네시아의 차이와 똑같이 중요하다.

 

복수의 문화를 횡단하는 비교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은 차이화와 비교 그 자체의 ‘상대적인 억압’ 때문이기도 하다고 스트래선은 말한다. —문화들의 차이를 표면화시키기 위해서는 그 문화들에 얽힌 정보를 증가시킬 필요가 있는데, 무제한적으로 증가시키는 것은 오히려 각각의 문화의 특징 그 자체를 흐릿하게 만들 수 있다. 여하간 어떤 억압 하에서 그것들을 조망해야 하며, 그에 의해 치밀한 비교도 가능하다. 따라서 예를 들어 하겐과 기미라는 뉴기니의 지역들 간의 비교가 멜라네시아와 폴리네시아와 같은 큰 지역 간의 비교보다 단순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그 유명한 ‘칸토어의 먼지’처럼 작은 스케일의 대상도 큰 스케일의 대상과 마찬가지로 치밀함과 농밀함을 가질 수 있다. 그 지역들은 아무리 세분화된다 해도 전체이며 부분은 그 자체 또한 전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대해서는 우선 소박하게 생각하면 부분의 총화로서 전체가 구성된다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이미 발견되는 부분의 구성물로 전체를 환원해버리는 발상이다. 이에 반해 전체가 부분들을 뛰어넘는 순간 비로소 전체의 부분들이 성립된다는 입장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홀리즘적인 전체를 전제로 하는 세계관이라고 불러야 한다. 예를 들어 “뒤늦게 출발한 아킬레스는 앞서 출발한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역설에서 지속하는 전체여야 하는 아킬레스의 운동을 공간의 부분들의 총합으로 환원해서 생각하는 것이 이 패러독스의 원인이라고 할 때, 패러독스가 염두에 두는 것은 이러한 <환원 불가능한 전체>로서의 지속=전체다.

 

이때 전체와 부분은 대립적인 것으로 간주되는데, 그 한편으로 지속=전체가 있다는 것에서 부분들이 산출된다. 패러독스를 예로 들면, 부분들끼리는 거꾸로 선 원추형의 각 절단면마다 축약의 정도를 바꿔가며 병존하고 있으며, 그것들을 분화시키는 역동성은 어디까지나 지속=전체에 의해 이끌린다. 전체와 부분은 상호 배반하며 배반하기 때문에 상호 성립하고 생성된다. 홀리즘은 이러한 양극의 차이를 끝까지 중시하는 입장이다.

 

『차이와 반복』(Difference et Répétiton)에서 들뢰즈 또한 베르그송으로부터 영향을 강하게 받아 알랭 바디우가 지적했다시피 이러한 홀리즘의 경향을 강하게 띠고 있다. 이러한 홀리즘적인 경향에 대해서 그는 말년에 라캉이론을 도입한다거나 과타리와 제휴해서 탈각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홀리즘을 기피할 목적으로 이론을 모색하면서 전체와 부분을 배반적이지 않도록 다루는 방법론을 확립하지는 않았다. 이에 반해 현재 존재론적 전회를 제기하는 인류학에서 전체와 부분, 부분과 부분의 관계 그 자체를 직접 재고함으로써 홀리즘을 무효화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게다가 그것은, 이를테면 스트래선처럼 인류학에서 포스트모던 비평(포스트콜로니얼 비평)에 대한 반론이라는 형태로 매우 명료하면서 자각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2. ‘봉지에 넣기’(Ensachage)로서의 세계

 

그러한 문제의식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부분적인 연결』에서 스트래선은 앞서 서술한 것처럼 민족지의 소재가 스케일의 크기와 상관없이 치밀한 농도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본래 ‘부분들을 넘어서는 원인으로서의 전체’라는 논점을 처음부터 무시한 것이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 대해 후자가 전자로 포섭되는 관계로 다루는 서양적 및 메레올로지(Mereology)적인 전체/부분관계에 대해 스트래선은 메로그래픽(Merographic)한 관계를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일(一)과 이(二)의 관계에 대해 이(二)에 일(一)이 포섭되어 이(二)가 분할됨으로써 일(一)이 생겨난다는 사고에는 계층성이 있지만, “일(一)은 그 두 배가 된 이(二)를 포함한 것이며, 이(二)는 이(二)의 반인 일(一)을 분할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각각의 측면에서 ‘상호 부분으로서의 관계’ 또한 통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족지 연구에서는 그 대상의 “어느 쪽을 어느 쪽의 부분으로 보는가?”라는 퍼스펙티브의 상호 전환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이 전환이 이뤄질 때, 어느 한 부분과 다른 한 부분은 각각 상호포섭적으로 된다.

 

상호포섭이라는 관점에 대해서는 의료인류학 분야에서 행위자 네트워크이론(ANT)을 효과적으로 응용하고 있는 안네마리에 몰(Annemarie Mol)에게서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다(多)로서의 신체 The Body multiple』). 라투르가 ANT를 이론화하면서 참조한 미셸 세르는 무엇보다 이 상호포섭이라는 관점에서 몰에 시사점을 던져준 것 같다. 본래 세르의 강의 수강자이기도 했던 몰이 세르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본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포섭관계의 개념의 극복이라는 주제다. 몰은 여기서 ‘상자에 넣기’(Emboîtement)와 ‘봉지에 넣기’(Ensachage)에 관한 유명한 세르의 비유를 가지고 들어온다.

 

세르는 우리의 사고에 시사점을 던져주는 단순한 객체물(Things)을 즐겨 주시한다. (중략) 그가 언급하는 객체 중 하나는 상자다. 우리는 대체로 객체를 추이적(transitive)으로 상호 관여하는 고형의 상자와 같은 것으로 다룬다. 어느 한 상자가 다른 상자보다 큰지 작은지를 묻는다. 그리고 만약 상자가 크다면 그보다 작은 상자를 그 안에 집어넣을 수 있고 만약 상자가 작다면 그보다 큰 상자 속에 집어넣을 수 있다.

 

세르는 이러한 추이적(transitive)인 포섭관계를 마트료시카(Matryoshka)[러시아목제인형]의 겹쳐 쌓이는 상태라고도 말하는데, 여기에는 당연히 부분과 그것을 포함하는 더 큰 전체와의 비가역적인 관계가 있다. 나아가 이것은 포섭적인 큰 것에서 더 작은 것이 단계적으로 분기해가는 수목형의 구조이기도 하다. 이 모델에서 포섭적인 큰 것은 더 작은 부분적인 것을 병존적으로 연결하는 매체가 되며 부분적인 것은 비가역적인 계층을 거슬러 분기해간다. 서구의 전통적인 사고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론을 답습한, 하나인 것 곧 Ens로부터 세계가 뻗어나가는 과정을 그려낸 ‘포르피리오스의 나무’ 등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듯이, 이러한 의미에서 큰 것 혹은 전체가 실체의 개념과 결부되는 경향이 강하고 또 그 속에서 전체와 부분의 배반적인 역할분담이 끝없이 지속되면서 분류가 이뤄진다. 이때 이러한 배반성을 동적인 과정으로 다루어 전체 쪽이 그 이항성의 표지를 달아주고 갱신하는 동인(動因)이 되어 다양한 부분이 분기해간다는 바로 그 생각이 앞서 서술한 홀리즘이다.

 

이 구조에서 부분과 부분은 상호 괴리해가는 관계에 있으며, 그 속에 포함된 개별적인 것은 전체로서의 보편적인 것에 대해 어디까지나 배반적으로 뒷걸음쳐갈 뿐이다. 이에 대해 부분과 부분, 부분과 전체가 서로 만나 또 서로 역할을 바꿔가며 서로를 부분으로 포함해서 합쳐지는 상황(메로그래픽으로 상호포섭적인 국면)이 있다고 한다면, 다양한 개별적인 것 속에도 매체적인 기능이 존재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매체가 있다면, 그것은 문자 그대로 개물(個物), 개별적인 것으로서의 사물일 것이다. 홀리즘적인 사고에서 실체화되는 어떤 것과 달리, 이러한 매체=사물을 전면에 등장시키려는 것이 스트래선이나 몰이 가진 것과 같은 오늘날의 인류학의 문제의식이다.

 

다음으로 앞서 서술한 마트료시카적인 구조(추이적인 관계)에 대해 세르가 제시한 <봉지>의 이미지를 살펴보자. 예를 들어 파란 봉지 안에 노란 봉지를 집어넣었다 해도 그 노랑 봉지를 꺼내어 펴보면 이번에는 역으로 파란 봉지를 그 안에 집어넣을 수 있다. 이러한 상호적 포섭으로 세계를 생각하는 것. —물론 추이적인 관계가 있어서 좋다. 추이적인 관계를 집어넣듯이 ‘전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 바로 여기에서 비홀리즘적인 발상이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매체가 서로를 <봉지에 넣기>로 포섭할 때, 포섭된 부분들로서의 봉지는 주름처럼 접힌다. 세르의 <봉지에 넣기>에는 물론 모나돌로지(monadologie, 單子論)적인 다원론의 함의가 있는데, 그것과 연결되는 부분이나 매체는 각각에 개별적인 것으로, 전체로 향하는 비가역적이고 추이적인 과정에 있음을 전제하지 않는다.

 

 

 

3. 복수의 매체와 비(非)ㆍ홀리즘

 

이러한 대상의 모델만을 예로 들면, 부분이나 매체가 각기 다른 양태로 나타남으로써 서로 연결되어 느슨하게 전체를 형성해가는 구조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평이한 이미지를 제공할 뿐이다. 그리고 본래 위계를 형성하지 않는 상대주의적인 관점은 포스트모던 사상에서 이미 호되게 비판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포섭이나 스케일의 문제가 스트래선에게 어떻게 포스트콜로니얼 비평과 ‘성찰 인류학’(reflective anthropology)에 대한 비판과 결부되는지를 보다 상세하게 살펴보면 차이는 더 명확해진다. 스트래선에 의하면, 포스트모던 인류학인 ‘성찰 인류학’은 그 진지함으로 인해 민족지를 어디까지나 단편적이고 미완결적인 것으로 제시해왔다(「세계시스템의 단편화」로 이어져왔다). 그 속에서 특권적인 화자로서 ‘현장연구자’가 일방적으로 이문화(異文化)를 대변한다는 구래의 접근법은 벌써 폐기되었다. ‘성찰 인류학’의 화자는 ‘이문화’를 여행하는 중에 무언가의 변화를 꿈꾸고 ‘그 자신의’ 사회로 귀환하는 ‘여행자’이며, 이 ‘여행자’를 통해 복수의 문화가 중층화된다. 문화들을 단편화하며 다양한 부분들로 만드는 것은 그것들을 줄줄이 엮는 이 ‘여행자’의 존재인 것이다.

 

‘여행자’는 어떤 문화의 특권적인 ‘대변자’일 수 없는 만큼, 그 부분들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매체다. 특권적인 대변자=화자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문화들을 중층화시켜 다뤄야만 한다는 이 발상은 ‘작가의 죽음’을 말하는 포스트모던 이후의 텍스트론과도 상통하며, 그 민족지가 미완결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해석에 대해 텍스트가 열려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특정한 부분으로서의 문화들로부터 떨어져나가 순수한 매체가 된 ‘여행자’는 부분들을 산출하기 위해 부분들과 배반적이어야 하는 특별하고 유일한 매체며 실제로 바로 그것이 앞서 서술한 홀리즘에서의 전체=매체다. ‘여행자’는 확실히 어떤 부분=문화의 대변자라는 의미에서 익명화된 플랫의 존재인데, 그 자신을 부분들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것으로서 정립하면서 문화들을 단편해가는 유일한 주체다. 그리고 또 ‘여행자’와 문화들 사이에는 배반적이고 비가역적인 관계, 추이적인 관계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 스트래선이 시도한 것은 문화들이 서로에게 부분적인 것으로 연결되는 매체 그 자체를 이러한 ‘유일한 주체’로 다루지 않는 방법론이다. 이를 위해 그녀가 주목한 것은 어떤 문화집단을 연결하면서 다른 문화집단과도 부분적으로 연결될 정도로 상이한 대상적인 매체=사물이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도구나 사물은 피리, 가방, 가면, 가발 등이며, 때로는 특정한 의례이기도 하다. 이러한 도구=사물이 부분적인 연결이 되는 것은 그에 대해 어느 한 부족이 갖는 특유의 의미가 다른 부족과는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하겐의 남자들이 오락으로 부는 피리는 다른 곳에서는 남자들의 오두막 안에 자루에 담겨있거나 소년 입사자들을 위압하는 도구인 성스러운 기다란 악기로 다뤄진다. 조심스럽게 말해도 연결은 부분적이다. 연결이 부분적인 것은 피리의 사용법에 [일관된] 접근법을 만들기 위한 기축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환기해야 할까? 위압에 사용되는 피리의 유비물을 하겐의 남자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설득을 위한 말 속에서 찾아내야 할까? 하겐의 오락을 위한 악기의 유비물을 기미의 소문이나 농담 속에서 찾아내야 할까?

 

매체로서 사물=도구는 복수의 문화를 연결하면서도 그 문화들에서 각기 다른 의미를 부여받으며, 그 용도나 의미부여에는 일관된 접근법이 성립하지 않는다. —어느 한 부족에서 오락을 위해 부는 피리가 다른 부족에서는 소년들을 위압하는 도구가 되는 것처럼. 그 속에서 그들은 서로의 사물=도구를 빈번하게 차용한다.

 

다양한 부족들을 듬성듬성 연결하는 이러한 사물=도구는 각각의 사회집단에서 각기 다른 역할을 맡는 사물=도구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각기 다른 다양한 사물=도구가 그러한 기능을 맡게 된다. 재귀인류학에서 ‘여행자’라는 주체가 결여태로서 홀리즘의 불변의 역할을 맡았음을 생각해보면,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4. 사물=도구와 배치(도)의 교차교환

 

앞서 서술한 것처럼 스트래선이 주목한 것은 무엇보다 사회적인 역할을 가진 사물=도구며 그로부터 사람들이 분명하게 만들어내는 관계들 그 자체다. 또 그러한 관계들을 알리기 위한 연행(performance)도 그것들을 둘러싸고 행해진다. 이러한 관계들과 연행에 대해 스트래선은 지도(figure) 혹은 이미지로 말하는데, 이러한 이미지는 적극적 및 연쇄적으로 점차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내며 생성해나간다. 이 이미지의 반전은 한 이미지를 지면으로 삼으면서 그로부터 다른 이미지, 즉 지도가 “떼어내지”듯이 만들어진다. 이 속에서 지면과 지도의 역할은 끊임없이 반전된다.

 

지도(figure)와 지면(ground)의 반전에 의해 지면이 잠재적인 지도가 되기 때문에, 이 반전의 움직임은 지면에서 “떼어내진” 지도가 지면에 덧붙여진 지도가 아님을 당연히 드러낸다. 그러나 물론 그 지도들이 단편인 탓도 아니고 그 속에 부분과 전체의 관계가 있는 탓도 아니다. 오히려 지도와 지면은 두 차원으로 기능한다. 그것들은 스케일을 스스로 만들어낸다(self-scaling). 본래 두 퍼스펙티브가 아니고, 지면은 또 하나의 지도이며 지도는 또 하나의 지면이기도 한 것처럼 하나의 퍼스펙티브가 두 갈래로 조망되는 것이다. 다른 쪽에 대한 관계에서는 어느 쪽도 바꾸지 않고 행동하기 때문에, 이 차원들이 전체화되도록 구성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도구=사물은 그것을 둘러싼 관계들의 배치(도) 곧 이미지를 스스로 가진다는 것인데, 이에 기초하여 다른 관계들의 배치(도)가 새롭게 만들어진다. 사물=도구에는 이러한 배치(도)가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지도는 다양한 사물=도구를 관계짓고 결부시키는 매체지만 동시에 사물=도구는 상이한 배치가 겹쳐 만나는 매체가 되기도 한다.

 

어느 한 배치(도)로부터 다른 배치(도)가 산출될 때 맨 처음의 배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맡은 사물=도구는 종종 주변적인 역할에 놓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이한 복수의 배치를 결부시키는 매체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그 사물=도구이다. 다양한 배치로 회수되지 않는 사물=도구의 선재성(先在性)이 새로운 배치(지도, 이미지)가 차례차례로 만들어지는 국면에서 이렇게 노출된다.

 

지도가 다른 지도의 부분(단편)으로서 회수되어 가는 추이적인 전체화에서는 다만 지도만이 포섭적인 매체로 상정된다. 이것은 관계주의적인 홀리즘으로 불릴 수 있다. 또 한 사물=도구에 다양한 배치가 단지 덧붙여지기만 한다면, 그 경우는 사물=도구만이 매체가 된다. 이것은 페티시적인 홀리즘으로 불릴 수 있다. 이것들은 부분들의 관계와 그것을 뛰어넘는 것(그것이 관계 그 자체인가, 사물인가라는 차이가 있다 해도)의 배반적이고 비가역적인 관계를 전제로 한 확장이나 전체화의 프로세스 자체는 단선적인 것이다.

 

이에 반해 사물=도구와 배치(도)의 양극이 매체가 되며, 나아가 그 쌍방이 점차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간다는 스트래선의 모델에서는 확장의 프로세스 그 자체가 반복적으로 단절(절단)되며 사물을 매체로 함에 따라 복선화하며 또 배치(도)도 어긋남으로써 사물도 대체되어 간다. 홀리즘은 이러한 조작을 거쳐 마침내 회피된다. 성찰 인류학에서 매체로서의 ‘여행자’는 동일인물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화들이 상대화되어 다뤄지는 것인데, 실제로는 사물=도구로서의 매체가 복수화될 필요가 있으며 그럼으로써 마침내 지도와 지도도 단절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사물=도구와 배치(도)의 상호포섭이 일어나는 순간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며 또 그에 의해 배치(도)와 배치(도)가 상호포섭하게 된다.

 

 

 

5. 정교화(Elaboration)와 창조

 

도구=사물에 관계들의 배치가 ‘내재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이러한 교차교환적인 왕복에서 도구=사물이 매체로서 행동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 왕복에서 어느 한 지도로부터 다른 지도가 차례차례로 만들어지게 되는데, 멜라네시아 혹은 파푸아뉴기니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조작은 창조행위이기도 했다. — 스트래선에 의하면, 그것은 관계들의 정교화(Elaboration)하는 행위이며, 관계의 증대(전체화)로서는 오히려 배치의 재독해로서 정교화라는 특수한 사건 그 자체를 증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사물과 배치(도)의 상호포섭과 왕복을 통해 단절을 낳으면서 또 연결해가는 세계는 이러한 창조행위와 더불어 스스로를 개시하는 것이며, 이 속에서 아직 분명해지지 않은 잔여의 부분(말하자면 지면 그 자체)도 그러한 운동의 배경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여기서 중시해야 하는 것은 다양한 배치(도)는 다양하게 단절되며 다른 배치(도)들 사이에서 관계를 반전시키는데, 본래 이러한 상호포섭과 단절이라고 하는 복수의 배치(도)에 의해 직조되는 메타적인 관계 그 자체가 사물 속에 노골적으로 드러난다고 멜라네시아 사람들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멜라네시아 사람들은 전통에 은유적인 균열을 삽입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살의 표면을 자른다. 또 그들은 개인을 은유적으로 전도시켜 문화적 기원(roots)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대신에 문자 그대로 나무뿌리를 뽑아 거꾸로 세워 나무줄기가 항상 뿌리에 의해 지탱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리터럴리즘(直解主義, literalism)을 오독하지 말아야 한다. 절단해서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은 이미지 그 자체다. 남자들과 나무와 정령과 피리와 여자들과 카누 모두가 서로의 아날로그로 간주될 때, 그리고 완토와트(Wantoat)에서와 같이 나무를 쓰러뜨려 광장 중앙에 끌고 왔을 때 사람들은 나무를 한 사람의 남자의 이미지로서 숲에서 떼어낸 것이다.

 

“떼어낸” 사물들은 사물과 지도의 상호교섭, 지도(이미지)와 지도(이미지)의 상호교섭, 그리고 그것들 간의 절단이라고 하는 앞서 서술한 관계, 그러한 사건 그 자체를 선취(Prefigure)해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사물과 그것을 둘러싸고 직조된 관계(지도)는 여기서는 이미 이중화되어 있으며 겹쳐 쌓이게 된다. 관계들의 매체 혹은 메타적인 관계는 거대한 포락선(包絡線, 엔빌로우프 곡선)을 그리면서도 다시금 사물 속에 차곡차곡 쌓이듯이 포섭된다. 여기서 발견되는 것은 사물과 관계(도)의 양극을 어디까지나 가역적인 것으로서 다루고자 하는 의지며, 그러함으로써 비홀리즘적ㆍ비서구적인 부분들의 연결에 의해 직조되며 복선적으로 겹쳐 쌓이는 세계를 스스로 정교화(Elaboration)하고자 하는, 말하자면 세계창조에 대한 의지다.

 

 

 

6. 선재하는 사물, 복수의 프로세스

 

스트래선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수법과 문제의식을 지금 다시 한 번 일반적인 형태로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① 사물과 관계(도)를 상호 포섭적이고 가역적인 것으로 다룬다. ② 사물과 관계(도)를 그것들이 서로를 포섭하면서 매개하는 운동 속에서 복수화한다. ③ 관계(도)와 관계(도) 또한 각각 사물을 포함해가면서 상호포섭적인 것이 된다. ④ 이 조작들, 메타적인 관계를 ‘내재시키는’ 사물을 ‘떼어내고’ 그것에 착목한다. ⑤ 거기서 나타난 사물과 지도를 연마=전개(Elaboration)하면서 점차 변주해간다(고정화되지 않으면서 복수화한다).

 

결국 사물(객체)을 축으로 복수성의 문제를 고찰함으로써 복수성을 단일한 비가역의 프로세스에서 생각하는 사고는 홀리즘을 회피하고자 하는 사고다. 왜 여기서 사물(객체)과 그것이 낳는 관계들의 배치, 또 창조행위라고 하는 일련의 주제에 특히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첫 번째로 말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사물(객체)이 성립할 때, 숲에서 나무를 ‘떼어낼’ 때, 그 성립은 무엇보다 단적이며 일회적이다. 그러나 그 사물(객체)이 어떤 배치 속에 놓일 때, 그 존재방식은 복수적일 수 있다. 사물이 창조된 행위와 다양한 배치(도) 사이에서는 무엇보다 수적인 낙차가 존재한다.

 

본래 홀리즘이란 단일한 비가역의 프로세스에서 다수성이나 부분들을 생각하는 사고이기 때문에, 그 속에 있는 것은 무엇보다 다수성과 단일성의 문제, 다(多)와 일(一)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이때 다수성은 하나가 되는 과정으로 회수되어(혹은 그 과정으로 사고되어) 실제로는 과정 그 자체는 끝난 것이 아니고 열려진 것으로만 사고되며, 다수성 그 자체도 이미 회수되지 못하는—따라서 프로세스의 단일성도 실제로는 완결되지 않는다— 여기에 홀리즘적인 구조의 난점이 있다. 다수성은 그 속에서 회수 불가능한 잉여로만 나타난다.

 

이러한 회수 불가능한 잉여는 또 객체의 문제로도 고찰된다. 예를 들어 칸트에서 보이듯이, 초월론적인 통각이 현상들을 다수성으로 정합해서 총합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해도 물 자체가 그 속에 회수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주객(主客)의 문제이기도 하며, 나아가 앞서의 일(一)과 다(多)의 문제가 “완결되지 않고” “열린” 그대로라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여기서의 주체도 객체도 여전히 프로세스적이며 단독의 것으로서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인류가 아직 나타나기 이전(Ancestral) 세계에 대한 언명을 사람들은 과연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회의론적인 입장까지 포함한 철학이 주객의 상관관계로만 대상세계를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메이야수는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이 또한 홀리즘적인 발상의 권역을 20세기까지의 사상이 벗어나지 못했음을 비판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주객의 문제와 일대다 문제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상관주의적 및 프로세스적, 홀리즘적인 해결이 산발적으로 주어질 따름이었다. 나아가 그 결과로서 주체와 객체, 일대다의 어느 쪽도 개별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태에 머물고 만 것이다.

 

쌍을 이루는 복수의 문제가 병렬적, 아날로지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사물(객체)과 그 ‘떼어내짐’, 창조행위라는 관점이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인가? 중요한 것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그렇게 떼어내져 창조된 사물(객체)이 단적으로 현전하게 될 때, 그것이 나타내는 관계의 배치(도), 그 사물=도구의 역할은 복수였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형태로 사물(객체)과 그에 관한 어떤 관계를 그려내는 주체 혹은 다른 사물(객체)이라는 주제에 복수성(다수성)의 주제가 이미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때 일대다 관계는 창조행위(조작행위)를 통해 주객관계와 나선형으로 조합된다.

 

그래서 어떻게 될까? 이때 다수성, 주체, 잉여, 단일성, 객체라고 하는 요소들은 홀리즘적인 모델과 버선 뒤집듯이 대칭적인 존재방식으로 조합된다. 사물(객체)은 그 자체로 ‘하나인 것’이지만, 그것이 가질 수 있는 역할, 그것에 관해 묘사되는 관계의 배치(도)와 주체는 복수적, 즉 다수다. —통상의 상관주의적인 모델처럼, 총합하는 ‘하나인 것’으로서의 주체와 다수성으로서의 개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주객관계의 프로세스는 이에 의해 비가역적으로 나란히 다수화, 복선화한다. 또 이러한 재편성에 의해 다수성은 ‘이미 포함된 것’의 위치와 반대로 놓이게 된다.

 

나아가 이러한 사물(객체)과 그것이 그려내는 배치(도)가 다른 사물(객체)을 중심으로 하는 배치(도)와 서로 포섭하는 형태로 단절을 일으키는 ‘하나인 것’의 같은 부류도 다극화하기 때문에, 각각이 그려내는 배치(도)는 비가역적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수차례 전도되어 고리로 연결된다. 이러한 복선화, 전도, 절단, 겹쳐 쌓이는 상태의 상호포섭에 의해 전체와 부분의 스케일 그 자체가 무화된다. 이로써 마침내 세르가 말한 ‘봉지에 넣기’(Ensachage)의 상황이 성립된다.

 

이러한 연결에 의해 성립하는 세계는 일대다의 결절점으로서의 사물(객체)을 여러 개 가진 네트워크와 같은 구조를 그려내는 방식으로 다뤄질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그 속에서 바로 반복해서 단절이나 전도가 일어나는 것이며 ‘하나인 것’으로서의 사물(객체)의 선재성이 그러한 단절, ‘떼어냄’, 즉 연속적인 창조행위의 반복 속에서 노출되기도 한다. 비상관주의적인 사물의 선재성, 고립이라는, 그레이엄 하만이 중시한 그 주제도 사물에 관한 이러한 연속적인 창조행위와 고리, 상호포섭의 분석을 기점으로 좀 더 명확해져야 한다.

 

 

 

7. 데스콜라의 경우

 

주객의 관계와 일대다 관계라는 두 쌍을 중첩시키고 그 조합을 대체한다는 방법은 필리프 데스콜라의 작업 속에서도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그에게 주체와 객체는 인간정신 및 문화와 자연이라는 식으로 읽히는데, 단수의 (하나로서의) 자연과 복수의 문화를 전제로 하는 세계관을 그는 내추럴리즘이라고 부르며 서양근대적인 사고로 서술하는데, 앞서 서술한 홀리즘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단일한 자연과 이에 반해 상대적으로 다뤄지는 문화들이라는 구도는 얼핏 보면 그 반대일 것 같으면서도 총합하는 움직임인 ‘하나인 것’으로서의 주체와 그것으로 회수되는(그리고 회수되지 않는) 잉여적인 사물(객체)이라는 도식이 그려낸 것과는 완전히 동일한 비가역적으로 단일한 홀리즘을 전제로 하며, 주체와 객체는 그 속에서 끝까지 배반적일 수밖에 없다.

 

한편 애니미즘적인 세계관은 이러한 단자연주의에 대해 <다자연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데스콜라에 의하면, 애니미스트는 생명과 정신을, 생물종을 넘어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본래 다자연주의라는 개념은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가 먼저 제기한 것인데, 그 퍼스펙티비즘의 주장은 여기서도 전제로 놓인다. 동물이나 비인간은 각각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사물의 배치를 다루는 퍼스펙티브를 가지고 있으며, 사람과 비인간은 서로 각각의 퍼스펙티브 속에서 상대편을 포섭하고자 한다. 모든 퍼스펙티브를 총합한 ‘객관적인’ 퍼스펙티브는 성립하지 않는다. 또 그만큼 자연은 복수적이며 사람과 비인간은 동렬에 놓인다.

 

이러한 세계관은 사물=도구와 각각을 둘러싼 다양한 배치(도), 그리고 그것들의 상호포섭이라는 관계에 대해 스트래선이 분석한 것과 동일한 구조를 시사하고 있다. —사물=도구, 창조행위, 그 속에 ‘내재’하는 다양한 배치, 그것들이 다극적이며 서로 포섭하려는 한편으로 각기 그 자체로서는 바뀌지 않는 것으로 있다는 균열(단절). 애니미즘의 세계관은 이것들이 도구역할을 행할 때 비로소 <다자연주의>일 수 있다.

 

애니미즘의 세계관의 구조는 데스콜라에 의해 ‘하나인 것’으로서의 정신ㆍ생명과 ‘여럿인 것’으로서의 비인간의 신체성,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생겨나는 퍼스펙티브와 다양한 자연의 (단절을 낳는) 다수성이라는 식으로 규정되는데, 이것을 단순한 내추럴리즘으로서 주객관계와 일대다관계의 조합의 전도로 다뤄서는 안된다. 하나인 것으로서의 객체(자연, 신체)는 단층을 이루면서 그 자체로 복수가 되며, 또 스트래선이 말하는 정교화(Elaboration)로서의 창조행위도 사물이나 배치를 아울러가며 연선과 변주를 반복하면서 지속해간다. —전자를 자연, 후자를 창조적 행위와 함께 자기를 다양하게 전개하는 정신ㆍ생명으로 다루는 데스콜라에 의한 애니미즘과 <다자연주의>의 정식화가 이러한 물구나무선 형태를 탐구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8. 인류학에서 철학, 미학으로—비ㆍ홀리즘적 전회의 도미노

 

마지막으로 이러한 인류학의 조류들이 철학이나 미학 등의 현대의 동향과 어떠한 모습으로 교차하고 있으며 또 향후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관해 간단하게 언급해두고자 한다.

 

오늘날의 철학이 자각하고 있는 것은 주객관계, 일대다관계라고 하는 대립하는 이항은 이제까지의 상관주의적인 사고에서는 비가역적 및 홀리즘적 과정 속에서 다뤄질 뿐이었다는 것이며, 그 속에서 객체, 주체, 하나인 것, 여럿인 것은 그 자체로 단적인 것으로 다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홀리즘적이고 단일한 ‘열린’ 구조를 20세기가 마구잡이로 만들어왔던 것에 대한 비판은 최근에는 미학의 영역에까지 미치고 있다. 엘리 듀링은 어느 한 부류의 개념미술(conceptual art)이 다양한 해석에 ‘열린’ 채로 스스로를 제시하고자 하는 경향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 반복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오늘날의 인류학은 포스트모던적인 비평 속에서도 집요하게 잔존하고 있는 홀리즘적인 구조를 넘어서기 위해 다양한 접근법을 제시해왔는데, 그와 마찬가지의 사고의 전환이 금세기에 이르러 각 영역에서 일제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듀링은 앞서 서술한 과잉의 <해석주의의 축척>을 <낭만주의>라는 이름하에 단죄했다. 듀링과 함께 작년 말 심포지엄을 조직한 알로아도 <해석주의>의 비판이라는 취지하에 공통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듀링에 의하면, 예술작품은 무엇보다 하나의 ‘원형’(prototype)을 보여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열기관이 발명됨으로써 온도가 몇도 상승한 기관의 내부로부터 증기를 자동적으로 배출하기 위한 밸브가 고안된다. 이 밸브라는 사물=도구에는 압력솥과 같이 내부의 과열을 피할 필요가 있는 다양한 용도에 대한 적용이 사후적으로 복수발견된 것이다. 이처럼 해석에 앞서서 우선 오브제로서 완결해서 성립하는 것이 예술작품이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창조행위, 사물(객체)을 축으로 다루고 그것을 둘러싼 역할의 해석을 사후적으로 복수로 찾아내며, 그에 의해 포스트모던적인 해석주의를 비판한다는 입장은 스트래선의 주장과도 매우 상통한다. 듀링은 또한 시간론과 공간론에서도 <객관적인> 단일한 시간과 공간이 아니라 복수적인 시간과 공간이 공존하여 서로를 상호포섭하려는 구조를 집요하게 고찰하는데, 그러한 문제의식 그 자체가 매우 21세기적인 것이다.

 

상관주의적이고 홀리즘적인 모델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객체, 주체, 하나인 것, 여럿인 것은 교차교환적, 상호포섭적인 창조론에서는 단적인 것으로 제시되는데, 복수의 쌍이 병행적이지 않은 중첩되는 형태로 고찰된다. 예를 들어 사물(객체)은 하나인 것이기도 하며 그로부터 도려내어진 배치(도)나 해석이 수많을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사물(객체)은 또한 다극적으로 여럿인 것이기도 하며, 그러한 창조행위(연마)에 의해 다양한 사물을 아우르는 창조행위가 스스로를 변조해가며 산출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전체와 부분이 상호적인 포섭에 의해 서로에게 그 의미를 중성화하는 것처럼, 주체와 객체, 하나와 여럿, 만든 것과 만들어진 것은 그 어느 쪽도 배반적이지 않으면서 중성화한다. 그것들이 단적인 것으로서 주어진다는 것과, 대립하는 항들이 중성화한다는 것은 모순적이지 않다.

 

철학에서는 2007년에 미셸 세르가 데스콜라의 네 유형으로부터 힌트를 얻어 幹-형이상학(Métaphisique souche)라는 개념을 Écrivains, savants et philosophes font le tour du monde(『작가, 학자, 철학자는 세계를 여행한다』)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이 책에서 그의 착상은 주체, 하나와 여럿이라는 대립하는 항에 의한 복수의 쌍과 조합을 특정 인물의 작업이나 어떤 대상 속에서 여러 겹 중첩시켜서 읽어가는 시도로 실천적으로 추구된다. 예를 들어 장 드 라퐁텐(Jean de la Fontaine)의 작품은 토테미즘적인 조합 속에서 읽을 수 있음과 동시에 애니미즘적인 조합 속에서도 읽어갈 수 있으며, 총체적이고 혼합적인 종교인 카톨릭이나 학문(Sciences) 그 자체도 네 유형을 동시적으로 복잡하게 중첩시킴으로써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립하는 이항이 중성화하여 그에 의해 도리어 객체와 주체, 하나와 여럿 등 대립항의 각각의 극이 단적인 모습으로 추출될 수 있다는 것은 앞서 서술한 바다. 데스콜라가 제기한 각각의 유형, 즉 조합의 형태 또한 그러한 단적인 표현형으로서 다뤄질 수 있다. 따라서 각각의 표현형은 다른 표현형과 교체가능하며 특이하게 창조된 것(작품, 학문 등), 창조하는 자(작가, 학자, 철학자 등), 즉 창조행위와 그 산물이 생길 때에 그것들의 표현형 자체가 복수 겹쳐지는 것이 발견될 수 있다. 창조하는 것을 축으로 그러한 유형 혹은 표현형의 가변성과 중첩을 독해해나갈 때, 그 속에서 발견되는 것은 복수의 대립항의 쌍, 복수의 데스콜라적 유형(표현형)에 앞서는 가장 중립적인 상태며 그로부터 완만하게 각각의 항이 단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거나 조합(표현형)을 만들어낸다. 세르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분석해간다.

 

이러한 중성적인 상태에 발을 들이면서 다양한 항을 분석적으로 발견해서 또 표현형과 표현형의 중첩을 독해해가는 것은 바로 신체의 다양한 조직을 산출하는 줄기세포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세르는 철학에 줄기세포를 비견해서 말한다. 이러한 줄기(幹, Souche)와 그것을 둘러싸고 행해지는 조작과 분석이 간-형이상학(Métaphisique souche)이다. 대립하는 이항을 복수 조합시켜 중성화하여 사물과 그것을 둘러싸고 생기는 관계들을 교차 교환한다는 아이디어는 세르 자신이 처음부터 다양한 형태로 세련화시킨 것인데, 데스콜라의 방법은 그러한 시행착오에 보다 구체적인 형식을 부여했다. 세르에게 그것은 가장 먼저 과거의 다양한 창조행위의 에피스테몰로직한 분석이라는 형태로 결실을 맺게 된다. —복수의 표현형이 겹쳐져, 얼핏 보면 무질서한 작품, 줄기(Souche)로서의 작품과 그것을 창조하는 자들을 새롭게 조명한다.

 

그렇지만 간-형이상학이라는 주제가 이미 <창조된> 작품이나 학문에 대한 분석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하나인 것’으로서의 객체 또는 주체가 어떻게 성립하는가, 그것들이 ‘여럿인 것’으로서 상호 포섭적으로 혹은 겹쳐 쌓여서 네트워크적으로 나타나는 국면에서 어떠한 기구를 가지는가라는 질문 전반에 해답이 구해진 것은 아니다. 세르의 경우, 전자 곧 ‘하나인 것’으로서의 객체(個物), 그리고 주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혹은 스스로를 만들어내며 생성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특수한 문화적 사례를 넘어 모든 사례로 확장되지는 못하고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작년 발표한 ‘간-형이상학으로서의 인류학’에서 시도되었듯이, W 제임스와 니시타 기타로(西田幾多郎)의 순수경험론과의 접합이 이론적으로는 유망할 수 있겠다. 주어진 지면을 할애하여 보편적인 세계구조로서 간-형이상학을 그려내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다. 아마도 그것이 성립한다면, 하만 등의 문제의식도 더 깊게 파고들 수 있으며, 그러한 강고한 이론적 배경을 가진 금세기적이고 범생명론적인 새로운 오브제의 철학이 탄생될 것이다.

 

 

 

清水高志「非・ホ─リズム的転回」『現代思想』2017年3月臨時増刊号。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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