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글은 현대사상 2015년 12월 <인공지능> 특집호에 실린 '인공생명'에 관한 글이다. 인공지능이 의식을 규명한다면, 인공생명은 무의식을 규명한다. 역으로 말하면, 무의식이 규명되어야 인공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공생명은 인공지능보다 더 어려운 과제일 수 있다. 그러나 인공생명을 통해 무의식이 규명될 수 있다니, 이 또한 참으로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지능 개념이 인공지능을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인공지능이 지능 개념을 아우르고 또 생명 개념이 인공생명을 아우르는 것이 아니라 인공생명이 생명 개념을 아우른다는 기술적 특이점(singularity)이 있다. 심지어 기술이 의식을 앞서는 singularity에서 더 나아가 다시 의식이 기술을 앞서가는, 그러나 이번에는 기술에 의해 창출된 새로운 차원의 의식이 기술을 이끌어간다는 post-singularity가 제기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다른 한편의 논문을 번역해서 올릴 예정이다. 

다음의 글에서는 그러한 singularity가 예술, 건축과 어떻게 교차되는지를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건축과 신체의 관계를 논한 부분은 충분히 이해한 것 같지 않다. '건축의 형식으로서의 순수한 신체'에 대해서는 어렴풋하게 파악했을 뿐이다. 이에 관해서도 다른 한편의 글을 더 번역해서 올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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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생명화하는 사회와 초현실주의(surrealism)

 

이케가미 타카시(池上高志 복잡계 연구자)

 

 

최근 10년 간, 그 이전까지의 과학발전과 비교하면 과학에 대한 이해와 기술양상이 크게 변화하고 있다. 그 주요한 원인 중 하나가 데이터흐름(data flow)의 존재로서 그 압도적인 양, 압도적인 복잡함, 초고속의 움직임은 이제까지의 과학과 비교도 될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는 데이터의 양이 어느 정도 쌓여 복잡화되면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기술에 ‘생명화’가 깃든다는 점이다. 이 점이 현상을 파악하는 방식, 이론을 조직화하는 방식을 새롭게 변화시켜왔다.

 

인공물에 생명성이 깃드는 것을 ‘인공생명화’라고 일러두자. 다양한 서비스와 미디어의 배후에 있는 기술이 자동화되면서 그 작동방식은 점차 보이지 않게 된다. 그 결과 우리의 제어가 미치지 못하게 되고, 편리성뿐만 아니라 시스템 고유의 자율성과 호메오스타시스(homeostasis 항상성)와 자기발전성이라는 생명의 성질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이 인공생명화다.

 

그렇게 해서 새롭게 등장한 이해방식은 생명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창발성을 기본으로 한’ 이해방식이다. 왜냐하면 자동화되는 그 작동방식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고, 아래에서 위로 전달되는 상향식(bottom up)을 찾아내어 이해한다는 태도에서 위에서 아래로 전달되는 하향식(top-down)의 인과적인 발생에서 이해한다는 태도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의 변경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언어를 요구한다. 즉 세계는 점차 인공생명화된다. 예를 들어 딥러닝(Deep Learning)을 비롯한 기계학습방법이 데이터와 함께 공진화함에 따라 데이터센터가 신전이 되고 구글이 대학의 연구실을 흡수해가며 학문을 인솔한다. 이렇듯 이러한 흐름 자체가 세계의 인공생명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앞으로의 인공생명화가 가진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자동화와 인공생명화

 

기술발전의 한 방향은 자동화다. 현재 모든 것의 자동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공장의 로봇이나 비행기의 오토파일럿은 인간을 대신해서 장치를 조작하고 조종하고 있다. 티켓과 식품이 다양한 자동판매기를 통해 판매되고 있다. 이 또한 상점에서 사람이 파는 것 대신에 기계가 파는 것이다.

 

이 자동화된 기계들은 아직 생명화와는 거리가 먼 느낌이다. 그것은 이 기계들이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고 우리의 예측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최근 상당히 멀리 갔다는 인상을 준다. 예를 들어 가정에 도입된 “Pepper君”이라는 로봇. Pepper군은 실은 우리의 예측을 쉽게 뒤집었다. 2015년 7월의 TED×Tokyo에 Pepper군이 개발자인 미츠요시 슌지(光吉俊二)와 함께 등장했다. 그런데 Pepper군은 팔을 휘적거리면서 커뮤니케이션을 거부했다. 마치 아이가 보채는 것과 같았다. 대화를 나누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Pepper군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혹은 자동차의 자동운전이 구글 등에 의해 실현되고 있다. 자동차라는 것은 본래 말 혹은 인간을 대신해 물건을 옮기기 위한 자동기계다. 장해물을 만나면 자동정지한다거나 속도를 자동적으로 제어하는 것은 이제까지도 충분히 가능했지만 그 운전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몫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운전 그 자체도 자동화되어 인간은 탑승만 할 뿐이다. 처음에 이 자동운전 카-를 유튜브인가 어디에서 보았을 때, 그것이 일반도로를 보통속도로 주행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시험코스를 천천히 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Pepper군에 대해서는 대화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었고, 자동운전 카-에 대해서는 사람이 운전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이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둘 다 모두 ‘자연적으로’ 인간적이라는 것,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운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Pepper군과 구글 카- 등의 진보한 기술ㆍ인공물은 섬뜩함과 생명성을 띤다는 인상을 준다. 이것이 사회에서 인공생명화된 최초의 기술일지도 모른다.

 

즉 인공생명화란 다양한 기술과 서비스ㆍ미디어가 자동화하여 그 작동방식이 우리의 예측을 벗어나 자연현상화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시스템의 조작이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거나 혹은 조작이 아닌 소프트웨어 그 자체에 관심이 쏠리게 되는 것이다. 기계를 보고 “이거, 어떻게 하면 움직이지?”라는 감상을 갖는 것은 그 조작에 흥미가 있는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나 동물과 만났을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조작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해도 그렇다. 그것은 사람이나 동물이 ‘자연현상’이며, 그 속에서 우리가 만든 기술과는 완전히 다른 메커니즘이 있어서 이해를 초월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감상을 우리에게 안겨주는 기술이 출현하고 있다. 이것이 인공생명화하는 사회의 특징이다.

여기서 생명이라고 말하지 않고 인공생명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인공생명이 이제까지의 우리의 생명관을 변신시키고 새로운 생명의 이미지를 만들기 때문이다.

 

인공생명이란 생물학적으로 논의되는 생명보다 ‘광범위하다’. 인공생명화하는 기술은 우리의 제어를 벗어나 자율성ㆍ항상성ㆍ자기발전성이라는 생명의 성질을 갖는다. 자율성은 자동화와 달리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을 결정한다. 항상성이란 자신의 기력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나아가 자기발전성이란 우리와의 관계성과 자기 자신의 기능을 혁신시키는 것이다. 즉 단순한 자동기계화와 인공생명화 간의 차이는 사회 속에서 사람과의 관계성의 구축방식에 있다. 예를 들어 앨런 튜링(Alan Mathison Turing 영국의 수학자이자 암호학자)이 ‘사람인지 프로그램인지’를 대화식의 테스트를 통해 표면화시켰듯이 생명은 사람에 의해 정의된다. ‘무엇이 생명인가’라는 정의항목을 리스트업할 수 있다면, 튜링테스트를 통과하는 ‘비생명적인 머신’이 출현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비생명적인 머신이라면 이미 충분히 생명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튜링테스트와 달리 여기서의 인공생명은 ‘언어적인 대화의 성립’만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 스며든 ‘자연적으로’ 태어나는 방식으로도 구별된다. 언어가 의식의 산물이라면, 사람의 무의식과 관련된 것까지 생각할 수 있어야 인공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언어에 의한 튜링테스트보다도 훨씬 어려운 난관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이렇듯 사람과의 관계성으로서의 인공생명의 문제를 보다 상세히 검토하기 위해 다음으로 ‘겉보기의 생명현상’을 다뤄보겠다. 이것은 생명의 ‘속살’을 만드는 기술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디자인하는 이야기다.

 

 

마네킹 강연과 신선한 생명

 

마네킹 강연이란 마네킹에 3D 프로젝션ㆍ매핑을 가해서 표정 등을 만들어내어 ‘강연’을 하게 하는 시도로서, 2013년 3월 사카베 미키오(坂部ミキオ)와 야마가타 요시카즈(山縣良和)라는 두 젊은 패션디자이너가 『絶ㆍ絶命展』에서 발표한 전시수법이다. 이 전시는 시부야 파르코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진행되었다. 마네킹 얼굴의 입체면에 맞춰서 이미지를 투영하고 인간의 얼굴을 마네킹에 재구성한다. 실제로 투영된 것은 몇몇 연구테마에 대해 강연하는 자신들의 얼굴이었다. 이것은 말하자면 아바타에 의한 가상세계 강연이다. 배경에는 각각 강연 내용에 대응되는 발표용 슬라이드가 깔린다. 마네킹 옷의 직물, 시뮬레이션 되는 큰 무리의 새들의 동영상, Mind Time Machine이라는 세 개의 스크린과 15개의 비디오카메라, 그 배후의 인공 뉴트럴네트워크(neutral networks)로 만들어낸 뇌 시스템 동영상, 움직이는 기름방울의 실험동영상 등 연구테마를 중심으로 한 역동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다.

 

『絶ㆍ絶命展』은 12일간 지속된 전시회로 ‘삶’과 ‘죽음’과 ‘신생(新生)’의 세 구간으로 나누어 각각 나흘씩 연속해서 진행되었다. 우리가 젊은 두 디자이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생각해낸 테마가 ‘신선한 생명’이었다. 그것은 생명의 ‘신선함’과 패션의 ‘신선함’의 연결을 시도해본다는 뜻이다. ‘신선한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업데이터할 가능성을 가지며 그 자체로 신선한 질문이다. 그것은 또한 인공생명에 대한 도전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생명의 정의는 자기복제 혹은 자기유지 등 객관적인 대상으로서 규정된 것에 비해, ‘신선한 생명’은 주관적 혹은 감각질적인 질문으로서 최종적으로 혹은 처음부터 추구해야 할 질문이다. 왜냐하면 감각질이 없는 생명 시스템은 기능적인 생명과 같은 기계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공생명 연구에 대한 이 도전의 응전으로서 절명전(絶命展)에 출품한 것, 그것이 마네킹 강연이었다.

 

각각의 나눠진 세 기간에 조금씩 다른 실험을 시도했다. ‘삶’ 기간에는 마네킹에 자신의 얼굴을 그대로 투영했고, ‘죽음’ 기간에는 앞서의 모습에 스크래치나 반전 등을 가했다. 이 세상에는 없는 패턴이 얼굴에 투영되는 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뜻밖의 효과를 내어 관람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물론 관객의 주목을 끌 수 있다. 즉 사람은 한 가지에 길게 집중할 수 없다. 반드시 주의를 잃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것은 관람객을 이목을 집중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마네킹에 신선함을 가미했다. 그 때문에 ‘신생’의 기간에도 같은 효과를 사용하게 되었다.

 

‘신생’의 기간에는 또 하나의 응전으로서 실제 인간 모델의 얼굴에 나의 얼굴을 프로젝션해보는 것이었다. 그러면 지금까지 보지 못한 섬뜩함이 출현하게 된다. 안드로이드 개발의 일인자인 이시구로 히로시는 “사람은 모두 섬뜩하다”고 늘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그 말을 체현했다. 이 섬뜩함은 ‘죽음’의 기간에 우리가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효과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관람객을 계속해서 붙잡아두려고 했고, 그런 시도 속에서 사람의 얼굴 위에 또 다른 사람의 얼굴을 투영함으로써 발생한 ‘효과’는 차원이 다른 섬뜩함을 만들어내었다.

 

로봇을 기계적인 것에서 인간적으로 것으로 끌어오는 것, 그것은 어느 정도 유사한 부분이 겹치는 데서 오는 상당한 섬뜩함이 있다. 이것이 바로 ‘섬뜩한 골짜기’다. 안드로이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 섬뜩한 골짜기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시구로는 섬뜩한 골짜기를 넘어서지 못하는 인간이 적지 않다고 말한다. 좀 더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라도 그 배후에는 섬뜩한 골짜기가 숨어 있다. 사람은 섬뜩한 골짜기에서 전형적인 인간의 이미지로부터 일탈한다. 그 일탈이 신선한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 왜냐하면 신선함이라는 것은 예측을 벗어나는 ‘보지 못한 것’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마네킹 강연을 본 사람들은 ‘사람으로부터의 일탈’을 ‘보는 측의 상상력’으로 보충하고자 한다. 신선함은 섬뜩함이 있기 때문에 만들어질 수 있다. 즉 일탈적인 섬뜩함은 신선함을 구성한다. TED×Tokyo에서 난폭하게 굴었던 Pepper군에게서 본 것은 바로 섬뜩함에서 비롯된 실제성(actuality)이다. 이러한 섬뜩함에서 생성된 신선함은 의식이 만든 것이 아니다. 무의식이 디자인한 것이다. 이렇듯 인공생명이 우리 사회에 출현하기 시작하면 생명인 우리의 의식도 변혁된다. 그리하여 새로운 인간상이 나타난다—인공생명화된 시대의 인간상이다.

 

 

새로운 인간의 창조

 

새로운 인간이란 인공생명화되는 세계에서 새로운 가치관ㆍ시대를 변혁하는 관점을 가진 인간을 말한다. 패션이란 그 하나의 양상일 것이다. 아티스트인 아라카와 슈사쿠(荒川修作)는 ‘착륙장(landing site)’이라는 아이디어로 미타카 천명반전주택(三鷹天命反転住宅)을 지었다. 아라카와의 천명반전주택이란 지금까지의 세계와는 다른 가치와 언어를 만들어내어 새로운 유토피아를 제시하려는 시도라고 나는 해석하고 있다. ‘착륙장’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감각기관은 모순을 일으키고, 그 결과 순수한 신체와 자기 자신 혹은 건축이라는 형식에 빠져든다. 그 형식 속에 없는 것을 보거나 냄새 맡거나 맛보려는 능력은 인간의 기본적 성능이다. 그러나 그것을 기능적인 것(먹이를 찾아내거나 적에게서 도망가기 위해 발휘하는 어떤 것)으로 회수하게 되면 신체와 건축은 상실되고 만다.

 

『絶ㆍ絶命展』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도 바로 그것이다. ‘삶’의 기간에 행해진 통상의 프로젝션ㆍ매핑을 ‘죽음’의 기간에서 다양한 효과를 통해 파괴해보면 그곳에서 역설적으로 ‘신선한 생명’이 잠깐씩 나타난다. 효과는 이형적(異形的)이다. ‘죽음’에서 생명성이 반전되어 나타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라카와의 말을 빌려 말하면, 그곳이 ‘착륙장’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지과학적으로는 주의집중의 문제이지만, 더 파고들면 파괴됨으로써 출현하는 순수한 신체라는 형식이 드러난다. 섬뜩한 골짜기는 넘어서는 것이 아니고 내재화되면서 베일에 덮이는 것이다. 은폐됨으로써 보는 측의 상상력을 상기시켜 신선함(freshness)을 이끌어낸다.

 

아라카와와 깅스는 그들 자신이 쓴 『건축하는 신체』라는 책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 책의 제목은 처음에는 ‘생명을 건축한다’였다. 그런데 결국 제목을 그렇게 붙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고자 한 것은 생명의 재구축 혹은 생명을 재구성(reconfigure)함으로써 생명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지만 인공생명적인 접근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보이는 것과 완전히 달랐다.” 인공생명 연구가 아라카와&깅스의 테마와 마찬가지로 보이는 것과 정반대인 이유를 나는 이때 처음 알았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인공생명 연구의 많은 부분이 생물과 유사해지도록 자기복제와 자기유지 등을 제공하는 것에 비해, 아라카와&깅스는 눈, 귀, 코, 입 모든 것을 빼앗고 그 다음에 남는 ‘신체’의 형식 혹은 생명성이라는 형식을 순수하게 추출하고자 했다. 따라서 아라카와의 ‘천명반전지(天命反転地)’는 형식=건축으로서의 신체 혹은 생명이 내려앉는 장소가 된다. 향후의 인공생명은 아라카와&깅스처럼 새로운 인간의 창조로 향해갈 것이다. 그 목적이야말로 “지금 당장 도움을 주는 과학”을 넘어선 가치의 창조다. 인공생명화된 세계에서는 인간 그 자체의 가치가 재창출되어야만 과학 또한 창조될 수 있기 때문에, 바로 아라카와&깅스가 목표로 했던 것이 생명의 재구성(reconfigure)이다. 그리고 그것이 최근 사람들이 주목하는 ‘기술적 특이점’이다.

 

 

기술적 특이점(Singularity)의 문제

 

기술적 특이점은 기술의 폭발적인 발전으로 인해 인간에게 있어서 세계의 가치가 바뀌는 문제를 다룬다.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은 2045년에는 AI가 인류보다도 훨씬 현명해질 것이며 그때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불연속의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생명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목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근저에서부터 바뀔 것임을 의미한다. 예부터 논의되어온 나노기술에 의한 새로운 의료기술의 진보나 수명을 20년 연장시킨다거나 과학의 오토메이션화가 진행됨으로써 교육의 내용 그 자체가 바뀐다거나 하면 지금까지의 세계관ㆍ인생관이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 의료시스템의 나노기계화에 의한 치료가 실현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예를 들어 ‘다빈치(da Vinchi)’라 불리는 수술원조로봇은 숙련된 외과수술을 능숙하게 행할 수 있다. 과학의 오토메이션화에 대해 말하면, 코넬 대학의 ‘유레카 프로젝트’는 실제 데이터에서 배후의 수리모델을 자동적으로 산출할 수 있고, 캠브리지 대학의 아담과 이브 로봇은 합성생물학에서의 가설과 검증을 자동적으로 행할 수 있다.

 

여하간 이러한 논의로부터 기술적 특이점의 문제가 촉발되기 시작했는데, 과연 그것이 유토피아라고 생각하는지 지옥이라고 생각하는지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과 SpaceX의 창시자인 엘론 머스크와 같이, 그러한 기술혁신에 의한 세계가치의 전환을 위협적으로 느끼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극단적으로는 SF의 터미네이터, 공각기동대, 혹은 영화 트랜센던스(Transcendence, 2014) 등을 떠올릴 수 있다. 더 극적으로 표현하면 인공지능이 인간에게서 직업을 빼앗아갈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적 특이점은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을 넘어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변하여 폭발적인 기술의 진화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년 전의 인간의 가치관과 현재 인간의 가치관이 불연속적이듯 향후 인간의 가치관은 지금의 가치관과 전혀 다를 것이다. 가치관의 개혁은 철학서와 종교에서 일어나기보다 현재의 기술변혁에 의해 더 확실하고 빠르게 일어나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은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기술이다.

 

그러나 AI는 인공생명화하는 기술 중 하나로서 사이드효과에 불과하다. 닉 보스트롬(Niklas Boström)이 말했다시피 “자율적으로 작업을 판단해서 실행하는(Sovereign)” 타입이 등장하는 순간 인류는 위협받게 될 것이다. 바로 이 Sovereign이라는 타입이 인공생명을 뜻한다. da Vinchi 기술로봇도, 유레카도 인공생명은 아니다. 그것은 기계화된 도구 혹은 진보된 프로그램이다. 그곳에는 SF적인 공포를 유발하는 기술은 없다. 그렇다면 인공생명이 만들어진다면 위협이 될까? 나는 인공생명화된 기술에서 유토피아를 발견한다. 다만 그것을 유토피아로 만들기 위해서는 의식의 기술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기술이 필요하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새로운 인간의 창조가 요구된다.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예술과 다시금 해후하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와 인공생명

 

초현실주의는 본래 어떤 사물의 특정한 사용법을 거부하고 그것을 다른 것들과 합성하여 새로운 것을 출현시킨다는 것인데, 근본적으로 그것은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한다. 예를 들어 미로, 키리모 등의 아티스트들이 추구했던 것은 자신의 정신 상태를 트랜스시켜서 무의식의 구조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그 하나의 흐름이 오토마티슴(automatisme)이라고 알려진 것이다. 그것을 좀 더 형식화한 아티스트가 마르셀 뒤샹이다.

 

뒤샹의 〈커다란 유리 또는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라는 작품이 있다. 최근 아티스트인 모리 유우코(毛利悠子)가 이 작품이 도쿄대에 있다는 것을 알고 견학을 왔다. 모리 유우코는 다양하게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사운드아트 작품을 만들고 있는 젊은 예술가다. 예를 들어 종이가 천천히 말려들어가면서 먼지나 흙을 묻히고 그것이 악보의 역할을 한다. 그것을 센서로 읽어 들여서 모터를 움직이게 하여 음이 생성된다. 말하자면 그녀의 작품은 환경의 노이즈를 음으로 변환시키는, 즉 장치 자체의 내부 상태로 변화시켜나가는 자율적인 장치다. 이것은 또 다른 인공생명이라고 나는 진작부터 말해왔다.

 

그런데 이번에 그녀와 함께 도쿄대 미술관에서 뒤샹의 작품제작의 메모를 보고 처음으로 이 작품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다음은 이 작품의 소재의 설명이다.

 

그림. 마르셀 뒤샹 〈커다란 유리 또는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도쿄대학 교양학부 미술박물관 소장.

 

<신부> 부분

ㆍ신부

약한 실린더가 있는 모터, 사랑의 가솔린 저장고, 욕망의 마그네트 발전기 등

ㆍ높은 곳에 게시, 은하

레터박스, 알파벳, 환기통, 그물망

 

<독신자> 부분

ㆍ수컷 모형의 아홉 개의 거푸집, 제복과 틀에 박힌 묘지, 독재자 기계

사제, 헌병, 경찰관, 카페도어보이 등

ㆍ물레방아가 있는 고랑

물레방아, 고랑, 사륜차

ㆍ모세혈관

ㆍ여과기, 파라솔

ㆍ초콜릿 파쇄기

총검, 장식용 리본, 롤러, 루이 15세의 권좌

ㆍ가위

ㆍ안과의사 증인, 검안도

 

요컨대 이 〈커다란 유리 또는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라는 작품은 서로 무관계한 구성요소들로 이뤄져 있다. 그것은 아라카와의 작품과도 상통하는 ‘의미의 메커니즘’ 그 자체이며, 형식으로서의 인공생명이다. 왜냐하면 부분적으로 가진 기능을 통합함으로써 압살시킨 다음, 전체로서의 새로운 의미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점을 처음부터 유념해왔다.

 

이 마르셀 뒤샹의 작품, 본래 초현실주의가 테마로 한 무의식을 폭로하고자 한 활동, 우리의 마네킹 강연, 이시구로 히로시의 안드로이드, 그리고 아라카와 슈사쿠의 건축하는 신체는 무의식을 건드리거나 혹은 무의식을 시스템의 설계원리로 한다.

 

 

맺음말

 

지금까지 AI연구는 당연하게도 인간의 의식에 관한 연구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성으로서 과학기술을 만들어내는 지식의 원천이라고 믿어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의식은 필요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의식이라는 것은 거대한 무의식의 극히 일부가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아직도 AI가 다루지 않은 창조성, 자기 참조성, 욕망과 유희가 무의식 안에 있다. 따라서 어떻게 무의식을 표현하고 그것을 기술적으로 조직할 것인가가 생명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낼 열쇠가 될 것이다. 그 기술의 인공생명화가 지금 사회로 향하고 있다. 

 

 

池上高志 「人工生命化する社会とシュルレアシスム」 『現代思想』 2015年12月。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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