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출간된 프래그머티즘에 관한 또 다른 입문서(大賀裕樹『希望の思想─プラグマティズム入門』、筑摩選書、2015年)에 따르면, 퍼스의 생애가 평탄치는 않았다. ‘만성적인 안면신경증에 시달린 탓에 모르핀과 코카인을 항시 복용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1859년부터 30년간 미합중국의 해안측량부에서 일했지만 기괴한 행동으로 쫓겨나는 날이 더 많았다고 한다. 그 후 퍼스는 유산으로 펜실베니아의 거대한 토지를 사들였지만 일정한 수입이 없어 빈한하게 살았고 심지어 하인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체포장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체포를 피해 뉴욕에서 2년 가까이 노숙생활을 했다고 한다. 영양실조에 걸린 퍼스를 위해 제임스가 퍼스의 연속강연을 기획하고 그 강연료를 미리 건네주었지만 강연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고, 또 친구들이 퍼스의 집필 작업을 위해 기금을 모아주었지만 단 한권의 저술도 남기지 못한 채 1914년 자택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21-22). 그가 살아생전 자신의 사상이 100년을 뛰어넘어 21세기의 ‘미래의 철학’으로 부활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한 그의 사상은 지금도 계속 진화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다음의 글을 통해 대략을 이해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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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류의 프래그머티즘―퍼스

 

 

격동하는 신세계의 사상

프래그머티즘의 첫 번째와 두 번째의 탄생 사이에 놓인 20년 이상의 세월 동안 미국이라는 나라는 엄청난 변모를 경험했다.

찰스 퍼스(1839~1914)가 이 사상의 이름을 처음으로 고안한 1870년 무렵 영국, 프랑스,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유럽에서는 식민지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에 의한 경제적 팽창이 최고조에 이른 한편 파리코뮌과 같은 혁명적 기운도 높아갔지만, 미국은 아직 남북전쟁을 일으킨 분단과 상호불신, 전투와 사상자로 넘쳐나던 극히 비참한 세계에서 겨우 몇 년 지났을 뿐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런데 윌리엄 제임스(1842~1910)가 이 사상을 국내외의 사상계로 발신했던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때에 미국은 그때까지 ‘팍스 브리태니커’를 구가해왔던 영국제국의 국력을 따라잡으며 경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세계의 패자(覇者)로서 도약해갔다.

예를 들어, 미국의 대부호의 대명사이기도 한 록펠러 가문의 최초의 성공자인 존 록펠러가 26세의 젊은 나이로 오하이오주에 작은 석유회사를 설립하고 석유자본의 선구적인 활동을 개시한 것이 1865년이며, 또 미국중서부와 서부해안을 잇는 대륙횡단철도를 개설한 것이 1869년이다. 이 시기는 프래그머티즘의 첫 번째 탄생시기와 완전히 겹친다.

이러한 사업을 시발로 석유산업의 경이적 성장과 서부개척운동의 활발화에 의해 19세기 말 뉴욕의 주식시장은 매매규모에서 런던의 주식시장을 앞서갔을 뿐만 아니라 세계최대의 시장으로 발돋음 한다.

미합중국은 내부적으로 분단되고 혼란스러운 신세계에서 세계를 석권한 경제대국으로 급속하게 변모해갔다. 프래그머티즘은 무엇보다 이 격동하는 신세계에서 탄생할 수 있었던 청년들의 사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로운 사상운동

퍼스와 제임스는 동시대를 살았으며 하버드대학에서 함께 수학한 친구사이였다. 하버드대학을 중심으로 새로운 철학이 발흥할 수 있었던 것은 위에서 언급한 신세계의 경제적인 급 발전과는 별도로 당시 하버드대학을 둘러싼 문화적, 사상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우선 그들이 젊은 연구자였던 시절 남북전쟁 후의 신생미국은 당시 구세계인 유럽의 과학적 진전을 따라잡기 위해서라도 미국 독자의 과학연구의 발전이 요구되었다. 당시 링컨대통령 등 국가의 핵심적 리더들은 이를 강하게 의식했고, 실제로 퍼스의 아버지 세대는 그러한 과학적 발전을 경주하게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미국의 주요대학에서 그때까지 200년 가까이 지속되어온 청교도(Puritan) 개척민의 신학적 전통에 반발하는 별종의 철학적ㆍ사상적 운동을 예비하는 정신적 기운이 생겨난 것이다. 그 중심적 역할은 하버드대학이 위치한 보스턴 주변 지역에 널러 퍼져있던 ‘초월론주의(transcendentalism)’라는 독자적인 사상에게 주어졌는데, 그 사상으로부터 문예와 종교에 관한 새로운 발상이 일어났다. 이 운동의 중심에는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라는 철학자가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등의 문학가들이 모여들었고, ‘아메리카 르네상스’라고도 불리는 미국 독자의 사상운동이 형성되었다. 에드가 앨런 포(Edgar Allan Poe)와 같은 특이한 문학가의 세계도 이 운동의 기풍을 받지 못했다면 불가능했을는지 모른다.

이 에머슨의 지적인 그룹에는 하버드의 유력한 수학교수였던 퍼스의 아버지와 스웨덴보르그(Emanuel Swedenborg 1688~1772, 자연과학자ㆍ신학자ㆍ철학자)주의의 종교가인 제임스의 아버지가 있었다. 프래그머티즘의 ‘원류’에 위치하는 퍼스와 제임스는 이 아버지들 세대의 친교를 통해 하버드의 학창시절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과학적 지식의 고도의 발전에 대한 희망을 키워감과 동시에 정신적인 사상운동에도 공명해나가는 것—이것이 고전적인 프래그머티스트들을 길러낸, 당시의 뉴잉글랜드(미국 북동부의 매사추세츠ㆍ뉴햄프셔ㆍ버몬트ㆍ메인ㆍ로드아일랜드ㆍ코네티컷 등 6개 주의 총칭) 특유의 지식환경이었다.

 

형식논리학에서의 혁명

고전적 프래그머티즘의 최초의 주창자인 퍼스는 링컨대통령의 과학아카데미 설립계획에도 참여한 유력수학자인 아버지 벤자민 퍼스의 차남으로 유년시절부터 과학자, 수학자, 논리학자로서의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근무하는 대학에서 전도유망한 학생으로 주목받았다.

그의 아버지 벤자민 퍼스는, 19세기 중반 서양의 수학세계에서 일어난 이제까지의 상식을 깨는 대대적인 혁명뿐만 아니라 수론에서 기하학까지 수학 일반을 토폴로지 등을 응용하여 추상성 높은 일반이론으로서 체계화하고자 하는 야심적인 기획을 목표로 삼았다. 19세기 중반의 수학세계에서 일어난 대대적인 혁명이란 유클리트 기학학의 공리와는 다른 공리체계에 따른 비유클리트기하학—니콜라이 로바쳅스키(Nikolai Lobachevsky 1792~1856, 러시아의 수학자)와 게오르크 리만(Georg Friedrich Bernhard Riemann 1826~1866, 독일의 수학자)—과 무한의 요소를 가진 집합에 대한 연구—게오르크 칸토어(Georg Cantor 1845~1918, 러시아의 수학자)—등의 완전히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리킨다. 수학세계에서 일어난 이러한 혁명은 바로 철학에서 근대를 개척한 데카르트가 고대 이후의 기하학과 아라비아 유래의 해석학을 총합하여 해석기학학의 창출이라는 혁신을 이룩한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의 세계에서 엄청난 혁명이었다.

퍼스 자신은 부친의 이러한 수학적 기획의 연장선상에서 자신의 연구방향을 세우고 그것을 형식논리학의 분야에서의 혁명이라는 또 다른 모습으로 구체화하는 한편,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철학의 사상적 전제와 문제설정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작업을 통해 서양근대철학에 대해 전면적으로 재고하는자 했다. 우리가 이제부터 이해하고자 하는 프래그머티즘의 사상은 바로 이 후자의 반데카르트주의 철학관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여기서는 논리학의 분야에서의 퍼스의 업적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할 것인데, 그것은 이 테마가 철학사의 언저리에서 그저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형식논리학에서 퍼스가 일으킨 혁명은 철학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사건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서술했던 것처럼, 고대그리스 이래 19세기 후반까지 철학의 세계에서는 암묵적으로 논리학이라는 학문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완성했고 그 이후 논리학에는 어떤 발전도 변화도 없다고 이해해왔고, 퍼스와 고틀롭 프레게(Friedrich Ludwig Gottlob Frege 1848~1925, 독일의 논리학자ㆍ수학자ㆍ철학자)에 의한 이 한계의 돌파는 이 논리학에 대한 그간의 암묵적인 이해에 대한 결정적인 파산선고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퍼스는 칸트의 범주론 등의 연구와 아버지의 토폴로지 등의 공간구조의 연구를 병행함으로써 도상적인 ‘관계의 논리학’의 시스템을 구축했는데, 그것은 내용적으로 완전히 독자적인 방식으로 한정사(quantifier)[명제함수를 정의하는 데 사용하는 기호를 말하며 양화사(量化詞)라고도 한다. 이를테면 ‘모든 ~에 대하여’를 나타내는 전칭양화사는 ∀이고, ‘어떤 ~에 대하여’를 나타내는 존재양화사는 ∃이다]를 포함한 함수적인 형식논리학을 독일에서 구축했던 프레게의 업적과 거의 맞먹는 것이다. 게다가 퍼스와 프레게는 전혀 교류하지 않았는데도 거의 동시기(1880년을 전후)에 각각의 체계를 공공화했다. 퍼스의 논리기호의 시스템은 그 후 에른스트 슈뢰더(Ernst Schroder 1841~1902, 독일의 수학자ㆍ논리학자)와 앨프리드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 영국의 수학자ㆍ철학자)에 의해 채용되고, 프레게 체계는 화이트헤드의 제자이며 공저자이기도 한 러셀에 의해 발전된다. 우리가 이 책의 후반부에서 보게 될 콰인의 계승자들은 화이트헤드와 러셀 등의 논리 사상을 자신의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았는데, 그 초석을 닦은 한 사람이 퍼스라고 말할 수 있다.

 

반데카르트주의 철학

이제까지 논리학자로서 퍼스의 업적을 극히 간단하게 소개했다. 그는 논리학과 수학 등의 형식적인 학문뿐만 아니라 지리학, 천문학, 물리학 등 실질적인 과학의 분야에서도 활약했다. 그의 업적과 경력은 그의 생애를 통해 여러 분야로 제각각 흩어져 있고, 그 속에서 가장 길게 이어간 것은 미합중국 연안측량부에서 지리학ㆍ물리학의 연구자로서의 위치와 하버드대학의 천문대 연구원이라는 자리였다.

수학자이면서 과학자이기도 하고 철학자였던 퍼스는 자신의 사명이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 등 과거의 위대한 과학자ㆍ철학자를 비판적으로 넘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철학의 최대 과제를 근대철학의 아버지인 데카르트를 비판한다는 테마로 설정했다. 그의 반데카르트주의의 철학은 대체로 다음의 단계를 밝아가며 전개되었다.

①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출발점을 이루는 ‘보편적 회의ㆍ방법적 회의’라는 발상은 애당초 무의미하고 불가능한 기획임을 보인다.

② 데카르트는 ‘회의’ 끝에 ‘명석ㆍ판명한 관념이야말로 진리이다’라는 원리를 세웠다. 그러나 ‘회의’가 무의미하다면 ‘관념의 명석성’의 다른 기준ㆍ격률(格率)이 세워져야한다. 우리가 가진 신념이나 관념은 어떻게 명석화 될 수 있을까? 그 ‘방법으로서의 프래그머티즘’은 바로 이 질문에 답한다.

③ 이 기준 하에서 관념이 명석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진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래서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정의해야 한다.

퍼스는 1876년경 『월간 파퓰러 사이언스』라는 과학 잡지에 ‘과학의 논리를 해명한다’라는 표제로 연속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시리즈에서 과학적 탐구에 관한 다양한 테마—예를 들어 귀납법의 문제라든지 가설 형성의 방식 등—을 순차적으로 논했는데, 그가 자신의 ‘방법으로서의 프래그머티즘’을 공적으로 논한 텍스트의 중심에 이 논문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주로 이 논문을 통해 퍼스를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위의 ①의 논점에 대해서는 ‘과학의 논리를 해명한다’라는 논문 시리즈보다 8년 전, 그가 30세 무렵 『사변철학잡지』라는 또 다른 잡지에 낸 두 편의 논문을 참조한다. 먼저 이 후자의 논문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데카르트적 회의는 무의미하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데카르트 철학의 출발점은 ‘방법적 회의’라는 신선한 발상이다. 『방법서설』 등에서 전개된 데카르트 철학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과학을 근본적으로 넘어서기 위해서는 우선 일체의 일상적 신념과 과학적 지식을 백지로 돌려놓고 전면적인 회의를 행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전면적인 회의 후에 어떤 관념이 아직 정신 속에 남아있는가를 검토해보면, 그것들은 모두 ‘명석하고 분명한 관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과학을 출발시키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선 전면적인 회의를 행한 다음 무엇이 명석하고 분명한 관념인가를 주의 깊게 탐구해야 한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생각하고 회의로부터 ‘코기토 에르고 솜’으로 향하며 근대적인 자아를 확립했다.

그러나 퍼스는 이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의 주제에 대해 과감하게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사상을 전개한다. 그는 이 테마를 『사변철학잡지』에 발표한 「인간이라면 갖춰야 한다고 주장되어온 몇몇 종류의 능력에 대한 질문」과 「네 능력의 부정의 귀결」이라는 두 논문에서 주장한다.

데카르트적 탐구의 논리는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전면적인 회의를 행한 후 자신의 정신을 들여다본다 해도 우리의 정신에는 그러한 ‘내면’이 없기 때문이며, 나아가 그러한 내면이 있다고 해도 회의라는 방법으로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신념과 지식을 모두 완전히 백지로 철회하는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하며 가능하다 해도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퍼스가 이 논문들에서 말한 ‘인간이라면 갖춰야 한다고 주장되어온 몇몇 종류의 능력’이란 데카르트 이후 서양근대철학의 세계에서 합리론과 경험론의 구별을 넘어서 공통으로 확인되어온, 인간의 인식능력에 대한 이미지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우리의 인식작용이란 인식주체인 내가 자신 안에 있는 관념을 직접적으로 파악하고 직관 혹은 지각하는 것’라는 도식, 즉 ‘사고란 내적인 관념의 지각’이라는 사고방식을 가리킨다.

퍼스는 서양의 근대철학에 공통하는 이 도식에서 암암리에 인정되는 능력을 크게 네 종류로 나눈다. ‘관념’, ‘확실한 자기인식’, ‘기호 없는 사고’, ‘물 자체의 인식’으로서, 이 인식능력들에 대해서는 심리학의 실험결과를 보아도, 개념 그 자체의 정합성을 보아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데카르트적 관념설이 전제하는 ‘네 가지 능력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인식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견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코기토로서의 나는 없다

인간의 인식능력 혹은 인식작용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견해란 우리가 ‘기호 없이는 사고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인식주체로서의 자아란 바로 그것이 산출하는 기호의 연쇄 그 자체이며 인식 혹은 사고란 결국 기호적인 표현 혹은 언어를 연쇄적으로 만들어내며 종결 없는 추론의 과정에 참가하는 것에 다름 아닌 사고이다. 인간이란 기호 내지는 언어이며, 기호와 인간은 서로를 배우며 서로에게 가르친다. 기호체계가 변화하고 발전하듯이, 인간의 사고도 변화하고 발전하고 과정적으로 이행한다. 이것은 인간의 인식이 최종적으로는 ‘내관(內觀)’에서 종결하며 나아가 ‘직관’이라는 단적인 모습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사고에 강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에는 ‘내관’에 의해 투시되는 것과 같은 투명한 의식의 내면이 없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우리의 의식과 사고가 기호에 매개되어 물질적인 측면을 소거할 수 없으며 외계에 대한 지시적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바꿔 말해 외부세계와 단절된 코기토로서의 ‘나’는 없음을 뜻한다. 그러나 코기토로서의 ‘나’가 없다는 것은 단지 정신이라는 실체가 마음속에서 찾아질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데카르트가 공부한 ‘보편적 회의’라는 철학적 탐구방법이 사실은 실행불가능하며 무효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완전한 회의에서 시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의 출발점은, 철학연구에 착수하고자 할 때에 우리가 실제로 취하는 모든 선입견이다. 이러한 선입견을 하나의 격률에 의해 불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선입견은 본래 의심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단서에서 회의론은 단순한 자기기만이며 실제의 의심이 없다는 것이 된다. 데카르트적 방법의 추종자이든 다른 누구든 우선 형식적으로 방기한 모든 신념을 다시금 형식적으로 발견하기까지는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퍼스는 이처럼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와 보편적 회의는 실제로는 일종의 자기기만이며 우리의 지적활동에서 가치가 있는 것은 ‘실제의 의심(real doubts)’, ‘진짜 회의’라고 한다. 퍼스가 생각하는 진짜 회의란 우리가 견지하는 다양한 신념의 기존의 네트워크에서 어떤 의심들이 생겨나고 그 의심들을 버려두면 우리의 삶의 활동이 지장을 받게 될 때 그러한 장면에서 행해지는 문제제기이다. 우리는 신념의 네트워크에 기초하여 개개의 욕구와 희망을 만족시키며 무수한 행동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그 행동에서 실패와 좌절이 연속된다면 우리는 어떤 신념이라도 의심하며 그 신뢰성을 다시금 음미할 것이다.

 

신념과 회의의 연쇄

우리는 본래 다양한 활동으로 나아가려는 본능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지적능력을 활용하고 무언가를 인식한다거나 신념체계를 형성한다거나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누구라도 활동으로 나아가는 것이 유쾌하며 실패나 좌절이 불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활동, 행위, 실천은 그리스어로 ‘프라그마(pragma)’라고 한다. 따라서 데카르트적인 회의의 길을 부정하고,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인식의 역할을 음미하고자 하는 그의 인식론은 행위를 축으로 사고하는 한에서 프래그머티즘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이 프래그머티즘이라는 사상에서 우선 주목되어야 할 ‘프라그마’라는 말의 의미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자연스레” 이해하는 속에서 무수한 활동을 행한다. 이 추론은 신념이 욕구가 조합됨으로써, 외부세계로 향해가는 행위를 위한 디딤판을 제공한다(비근한 예를 들어보자. 나는 저녁식사로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는 욕구를 가짐과 동시에 오믈렛이 맛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며 오믈렛을 만들기 위한 식재료를 떠올려보고 그 재료를 얻기 위한 필요한 수단을 정리하여 그 수단과 관련된 다양한 조건을 고려한다 … 이 경우에 다양한 신념을 엮어내어 하나의 추론의 연쇄가 생긴다).

이 행위의 버팀목으로서 각각의 신념은 그러나 항상 신뢰가능하며 확실한 기반이 있는 것이 아니다. 몇몇 신념은 다양한 행위의 맥락을 통해 신뢰성이 상당히 희박한 것, 혹은 극히 의심되는 것으로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우리에게 그 전까지 충분히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되던 신념이 다양한 새로운 상황 하에서 경험을 축적함으로써 극히 의심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지적탐구에서 회의란 퍼스에 따르면, 이러한 실제 행위의 맥락 속에서 의심되는 것으로 간주된 낡은 신념을 진지하게 음미해보는 것이다. 회의란 이 맥락에서 처음으로 의미 있고 실질적으로 살아있는 회의가 된다.

따라서 우리의 지적탐구에서 신념과 회의는 항상 역동적으로 교체되는 연쇄를 이룬다. 다양한 신념의 네트워크 없이는 구체적인 회의는 없다. 그리고 구체적인 회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탐구의 수행을 거쳐 그때까지 가지고 있었던 신념은 다른 내용으로 개정된다. 우리가 신념에 기초한 회의로 나아가고 이 회의로부터 탐구로 향함으로써 새로운 신념에 도달한다는 【신념—회의—개정된 신념】의 사이클에서 모든 신념은 상호 관여함과 동시에 잠재적으로는 오류일 가능성을 가진다. 모든 신념은 연계되어 있음과 동시에 개정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가류적(可謬的)’이다[과오를 저지를 수 있다].

우리의 탐구에 의해 달성되는 지식이란 이처럼 데카르트가 꿈꾸었던 것처럼 절대적인 확실성의 기초(코기토 에르고 솜)의 기저로부터 파고들어가 명석판명성(明晳判明性)이라는 기준으로 선별된 지식의 층이 순차적으로 쌓아간다는, 수목과 같은 형식을 가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떠받치는 신념의 네트워크가 몇 겹으로 조합되는 시스템으로서의 지식이다.

 

프래그머틱한 격률

그러나 모든 것이 신념의 네트워크이며 그 모든 부분이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개정가능하다고 한다면, 이 신념체계에 ‘진리’라는 개념이 들어맞지 않는 것이 아닐까? 모든 신념이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확실성을 부정당하고 어떤 신념도 지식체계의 기초라는 지위를 얻을 수 없다면 애당초 신념에 대한 진위를 묻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닐까? 데카르트의 인식론을 근저에서 부정하는 것은 실제로는 그 자체로 지식의 단념, 진리의 방기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그 때문에 퍼스는 앞서 반데카르트주의의 철학으로 ②와 ③의 논점을 제기하고 이것을 1877년의 『월간 파퓰러 사이언스』에서의 연속논문 시리즈로 논했다.

그는 우선 ②의 테마를 생각하기 위해 이러한 행위와 연계된 신념이라는 발상 하에서 ‘사고와 판명, 신념과 명제를 명석하게 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논한다. 그가 여기서 ‘명석ㆍ판명한 관념은 진리’라는 ‘데카르트의 격률’에 대체하여 ‘프래그머틱한 격률’을 도입한다. 앞서 인용한 것처럼 데카르트는 『방법서설』 등에서 그 자신의 방법론ㆍ인식론으로서 우리가 자신의 정신을 반성적으로 이끌고자 할 때에 필요한 지침으로서 ‘격률’을 제기한다. 격률이란 근본적인 원리는 아니지만 행위지침으로서 충분히 기능하도록 하는 유의미한 규칙을 말한다.

퍼스에 따르면, 데카르트의 보편적 회의가 무의미한 것처럼, 데카르트의 격률, 즉 ‘명석ㆍ판명한 관념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 것도 무효하다. 왜냐하면 데카르트가 말하는 의미에서 ‘명석ㆍ판명’이란 어디까지나 정신의 내면에서 출현한 관념의 특징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주관적인 현상이며 대개 개인이 품는 ‘느낌’과 같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관념이 개인에게 명석하게 느껴지는 것과 그것이 실제로 명석하고 활용 가능한 의의를 가진다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 사고는 내면에서가 아니라 공적인 장면, 기호 등의 공공적인 것을 매체로 함과 동시에 그것이 행위와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확실하게 드러나야 한다.

회의를 포함하여 지적노력의 의의가 안정된 행위의 지침에 대한 인식에 있다고 한다면, 사고의 명석ㆍ판명은 어떤 행위지침을 제공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 귀착되어야 한다. 그래서 퍼스는 다음과 같은 ‘프래그머틱한 격률’을 사용해서 관념 혹은 신념에 관한 ‘고쳐 쓰기의 도식’을 제안한다. (그는 자신의 주장과 데카르트와의 대비를 부각시키기 위해 자신의 논문에 ‘어떻게 하면 우리의 관념을 명석하게 할 수 있는가?’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여기서 관념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내관(內觀 introspection)에 의해 지각되는 마음속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신념’ 혹은 ‘글’이라고 바꿔 부를 수 있다.)

‘다이아몬드는 단단하다’는 관념ㆍ신념ㆍ글‘다이아몬드를 사용해서 긁으면 모든 물질에 흠집을 낼 수 있다’는 관념ㆍ신념ㆍ글

이것은 얼핏 보면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문장의 교정인데, 문법적으로는 큰 변환이 숨겨져 있다. 처음의 문장은 ‘주어+술어’의 보통의 평서문이며 단문이다. 한편 그 다음 문장은 두 개의 문장을 포함하는 복문이며 그 형식은 ‘앞서 행하면 그 다음으로 귀결한다’는 전제ㆍ귀결을 표하는 조건문이다. 즉 보통의 평서문은 이 ‘명석화’의 방법에 따르면 조건문으로 고쳐 쓸 수 있다.

고쳐 쓴 전제ㆍ귀결의 조건문은 행위의 지침을 제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무엇인가에 흠집을 내고 싶다는 ‘욕구’를 가질 때, ‘다이아몬드를 사용해서 긁으면 모든 물질에 흠집을 낼 수 있다’는 ‘신념’이 이 욕구표현을 위한 기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명석함의 제3단계

서장에서 잠시 살펴본 제임스의 ‘프래그머티즘의 의미’에서 제임스는 프래그머티즘이 우선 퍼스에 의해 ‘방법론’으로 제시되었다고 하면서 퍼스가 만든 ‘격률’을 언급했다. 제임스는 퍼스의 격률을 그 나름의 사고 변형을 가해 설명했는데, 그것은 퍼스가 『월간 파퓰러 사이언스』에 실은 첫 번째 논문, 「우리의 관념을 어떻게 명석하게 할 것인가?」에 서술된 격률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격률을 보면, 퍼스의 원래 문장과 제임스의 인용문과는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변화는 프래그머티즘이라는 사상의 엄밀한 이해라는 관점에서는 결코 무시될 수 없지만, 대략을 소개하는 본 글에서는 큰 문제로 삼을만한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이해의 명석함의 제3단계에 도달하기 위한 규칙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가진 개념의 대상이 무엇인가의 효과를 발휘하게 되면, 우리가 생각한다고 해도 만약 그 효과가 행동에 대해서도 실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상정된다면 그것이 어떤 효과라고 생각되는지를 꼭 음미해보아야 한다. 이 음미에 의해 파악되는 효과에 대해 우리가 가지는 관념이야말로 그 대상에 대해 우리가 가지는 모든 개념을 이룬다.

퍼스는 여기서 이해의 명석함에 관한 제3단계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가 의미하는 제1단계란 사회적인 통념의 수준에서의 명석함 혹은 우리가 상식 하에서 ‘자명’하다는 명석함을 뜻한다. 그리고 그 다음의 제2단계는 데카르트적 회의 하의 내관의 수준에서의 명석함이다. 이에 반해 그 자신이 말하는 명석함의 제2단계란 어느 대상에 대한 사고와 관념을 그 대상이 ‘효과가 행동에 대해서도 실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상정된다면 그것이 어떤 효과라고 생각되는가’ 라는 모습으로 분석되는 것이다.

퍼스는 이 격률을 ‘프래그머틱한 격률’로 부르는데, 그것은 우리의 사고내용을 실천과 행동에 임하는 자기 자신에 의한 유의미함의 관점에서 확실한 것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며, 그리고 행동에 임할 때의 유의미함의 관점이란 대상이 행동에 대해 어떠한 실제의 영향, 효과를 갖는가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격률을 중심으로 구상되는 우리의 인식 혹은 지혜의 본성과 의의를 생각하는 철학전체에 대해 ‘프래그머티즘’이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신념의 진리화로의 길

조금 더 이 의미의 격률에 대해 부가하면, 이 의미의 격률은 통상 평서문에서 표현되는 신념(‘S는 P이다’)을 행위와 효과의 연결을 나타내는 조건문(‘만약 행위a를 실행한다면 효과e가 얻어질 것이다’)의 모습으로 고쳐 쓰시오 라고 명한다.

평서문에서 조건문으로 고쳐 쓰기를 언어철학과 논리학의 문제로서 조금 더 언급하면, 앞서 살펴본 것처럼 퍼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논리학에서 평서문의 이해를 함수와 변항(變項 variable)의 형식으로 이해함으로써 프레게와 나란히 현대논리학의 선조가 되었다. 이때 ‘다이아몬드는 단단하다’의 형식논리적인 표기는 거칠게 정리하면 ‘함수ㆍ단단하다(x) 그리고 x=다이아몬드’이며, 그것은 명제 간의 진리보존을 주요한 목적으로 하는 연역적 추론에서 큰 위세를 발휘한다.

그러나 집합론적 의미론에 대응하는 이 함수표기적 분석과 실천적 신념의 활용이라는 입장에서 사유되는 평서문의 조건법적 변환이라는 발상은 완전히 동일한 아이디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 모순된 것이 아니라고 해도 반드시 서로 잘 들어 맞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퍼스의 의미의 격률을 엄밀하게 생각하고자 한다면 논리학적으로는 다양한 기술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서는 2부의 논리실증주의에 대한 논의에서 조금 더 다룰 것이며 나아가 3부에서 살펴볼 퍼스의 수학론의 재평가라는 테마와 관련해서도 한 번 더 검토하기로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우선 고전적인 프래그머티즘의 기본적인 발상을 다룬다는 맥락에서 이 의미 분석의 골격을 대략적으로 이해해보았다.

여하간 우리의 신념은 이 격률을 활용함으로써 행위에서 충분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유의미한 신념인가 아닌가를 판정하는 기준을 갖게 된다. 다이아몬드의 단단함을 예로 간단하게 보여준 것처럼 우리의 평서문의 형식의 주장은 가설적인 조건문으로 변환됨으로써 행위의 맥락에서 이용 가능한 유의미한 문장으로 명석화된다. 그러나 문장이 명석하다는 것은 그것이 진리임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의 신념을 명석화하기에 앞서 그 진리화의 길을 탐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신념 확정의 스타일

앞서 언급했다시피, 퍼스의 프래그머티즘에서 진리라는 것을 해명하는 단계 ③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행하는 지적활동에서 탐구는 다양한 스타일을 가진다. 그에 주목하여 사고의 명석화에 더욱 적합한 탐구방법은 무엇일까를 생각한다면, 그 스타일이 채용할 수밖에 없는 진리관을 진리의 새로운 정의로 채용하게 된다. 이것이 단계 ③이다.

우리의 지적탐구는 어디까지나 다양한 의심의 상태에서 벗어나 신념을 확정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려는 기획이다. 탐구에 대한 이 정의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어떤 방법으로도 일정한 신념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는 것이 된다. 즉 ‘어떤 방법도 무방하기 때문에 신념만 얻을 수 있다면 좋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퍼스는 말한다.

신념을 ‘확정하는 힘’에는 다양한 스타일이 있다. 그것들을 그룹으로 분류하면, 각각의 스타일에는 일장일단이 있는데, 그러나 그것에 의해 얻을 수 있는 신념이 그 후의 의심에 대해 더욱 강고하게 저항하여 길게 가져갈 수 있는 신념의 획득법인가 라는 의미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신념의 확정스타일로 ‘전통에 맹목적으로 따른다’, ‘사회적 귄위에 따른다’, ‘이성이 이끄는 대로 따른다’, ‘과학적 탐구의 공동체가 이끄는 대로 따른다’라는 네 종류가 있다고 해보자. 우리는 자신의 신념을 확정하기 위해 이것들 중 어떤 방법에 따른다고 할 때에 어떤 신념의 확정스타일이 유의미한 스타일일까?

우리는 무언가를 믿기 위해 충분한 탐구 과정을 밟을 수도 있으며 무엇도 생각하지 않고 다만 믿는다고 할 수도 있다. ‘전통에 맹목적으로 따른다’는 것은 다양한 환경의 변동이나 위기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일체의 의심을 품지 않고 어떤 신념을 “그냥” 계속해서 믿는 것이며, 종종 ‘타조정책(ostrich policy)’이라는 경멸적인 어구로 표현되기도 한다(타조는 적이 나타나면 모래 속으로 머리를 박고 ‘보지 않으려는 행동’을 한다고 한다). 또 ‘사회적 권위에 따른다’는 방법은 자신의 신념체계에 어떤 의문도 품지 않기 위해 현실직시를 거부한다는 자세는 아니지만 무엇인가 의문이 생기는 경우, 예를 들어 국가지도자가 주입하는 이데올로기나 종교상의 절대적 지도자의 교시를 절대시하는 것으로서 맹신의 일종으로 생각된다.

이것들은 신념을 확정하는 힘으로서는 완전히 어리석은 것이며 무가치한 정책인 것일까? 물론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신념을 개정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극히 에너지를 요하는 작업이며, 대가가 따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너지와 대가라는 것을 최대한 중시한다면, 신념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지적노력을 진정으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신속하게 신념을 확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둘이 극히 유력한 스타일이다.

 

과학적 탐구의 방법

그러나 이 두 스타일은 사회의 변화와 환경의 격변에 대응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분명 건강함을 결여하고 있다. 신념체계에 어떤 의심이 생길 가능성이 있을 때에 종래의 신념을 고집하는 것만을 선택하는 것은 다른 체계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 극히 폐쇄적인 사회에서만 유효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은 환경의 격변 등을 경험한다면 매우 큰 혼란을 낳을 수 있다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이성을 중시하는 방법과 과학적 탐구를 중시한다는 후자의 두 방침은 맹종도 아니며 지적인 의미에서 큰 가치를 가진다. 다만 그것들은 지적노력을 필요로 하는 이상 어느 쪽에서 지적노력이 유효한 것일까 라는 문제를 발생시킨다.

이 점에 대해 퍼스는 데카르트적인 이성에 기초한 탐구는 단지 방법적 회의라는 자기기만을 내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성’이라는 모호한 개인적 자질에 의거하고 있는 한에서 그 결론은 결국 개인적 선호의 세계에 머물 수밖에 없는 위험한 것이라고 말한다. 어떠한 추론이 이성에 맞을까? 그것이 개인의 수준에서 판단되는 한, 그것은 개인적 선호의 판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개인적 선호의 판정이 무의미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신념의 실패나 좌절에 동기 지어지는 회의와 탐구가 개인적 선호의 판정으로 귀착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중간하다.

신념이 개정된다면, 그것이 대가를 수반하는 작업인 이상, 신념이 고정 후에는 가능한 한 장기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즉 가능한 한 건강한 것이어야 한다. 그 때문에 개인적 선호에 의거하는 방법은 너무나도 신뢰성이 낮다. 따라서 개인적 판정의 단계를 벗어나는 방법을 구하는 것인데, 그것은 복수의 탐구자의 의견과 신념을 상호 비판적으로 대조하여 그 합의에 따라 더 나은 탐구를 기도한다는 과학적 탐구로 나아간다. 바꿔 말하면, 탐구를 개인의 수준에 머물지 않고 탐구자의 공동체의 결착에서 판정을 구하는 스타일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신념개정의 가장 우월한 스타일로 인정될 수밖에 없다. 즉 과학적 탐구방법이야말로 우리의 신념의 확정방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적 탐구방법은 그것이 복수의 탐구자의 공동 작업에 의해 성립된다는 의미에서 단독의 이성적 반성자의 인식보다도 더 건강하며 유효성이 높다. 그러나 과학의 강함은 탐구자의 복수성이라는 것만으로 산출되지 않는다. 과학적 탐구는 가설의 경험적 실험이라는 의미에서의 귀납적 추론과 가설의 착상이라는 의미에서의 가설 형성적 추론과 법칙이나 가설로부터의 예측의 도출이라는 의미에서의 연역적 추론이라는 세 종류의 추론의 패턴이 서로가 서로를 떠받치는 모습으로 잘 맞추어서 실행된다. 즉 과학적 탐구는 복수의 서로 다른 추론 스타일이 그물망처럼 서로가 서로의 추론의 강함을 보강한다.

퍼스에 따르면, 과학적 탐구가 공동체적이라는 것과 다수의 추론스타일의 상호보증이라는 것은 사태의 표리이다. 과학은 형이상학을 근간으로 하여 그곳으로부터 성장하는 줄기와 같은, 데카르트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많은 탐구자와 많은 가설적 추론이 하나의 그물망처럼 얽혀감으로써 그 강함을 발휘하는 것이다.

 

‘공동체의 미래’와 진리

즉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진리’의 의미는 탐구방법에서 가장 신뢰성 높은 스타일이 있을 때에 그 스타일 속에서 전제되는 진리개념이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한에서 과학적 탐구방법이야말로 그러한 신뢰성 높은 탐구방법이다. 따라서 그로부터 산출되는 진리의 의미란 과학적 지식의 추구에서 상정되는 진리개념이다.

그렇다면 과학적 지식의 공동체가 상정하는 진리개념이란 결국 어떤 것인가? 퍼스에 따르면, 그것은 ‘탐구의 공동체라는 이념적인 조직을 사고하고, 그 속에서 탐구의 무제한적인 지속을 통해 무한의 과정의 수렴점으로서 생각되는 최종적 신념’이다. 진리란 눈앞에서 바로 찾아지는, 이미 손에 넣은 신념이 아니다. 모든 신념은 가류적인 이상, 최종적 신념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최종적 신념’으로서의 ‘진리’가 불가능하며 무의미한 개념이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무제한의 탐구의 지속이라는 이념적인 모델과 상관하는, 이념적인 존재로서 무수한 탐구를 이끄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란 공동체와 결속되며, 나아가 공동체의 미래의 모습과 결속되는 개념이다. ‘언젠가’ 모든 신념이 총합적으로 체계화되어 최고도의 조화를 체현하는 것이라면, 그때 진리란 현현(顯現)하는 무엇인가의 또 다른 이름이다. 수학과 논리학뿐만 아니라 많은 분야에서 선구적인 과학적 발견을 해낸 퍼스는 이러한 ‘공동체의 미래’에서 의견일치라는 비전을 자신의 진리개념으로 삼았다. 그는 때로 다양한 신념의 네트워크가 최종적으로 하나의 수렴점으로 결정되도록 ‘운명 지어졌다’는 강한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탐구과정이 ‘최종적으로는’ 하나의 이론적 조화로 ‘수렴’하는 것. 이것은 여러 과학적 분야에서 활약하며 수학과 논리학에서 결정적인 발자취를 남겼던 퍼스가 품은 ‘진리’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그 후에 나온 프래그머티스트들의 상다수(콰인, 로티 등)는 이 개념에 강한 의문을 표명한다. 그리고 그 의문을 최초로 표명하고 진리에 대해 다른 견해를 제시한 사람이 바로 다음에서 살펴볼 퍼스의 절친, 제임스이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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