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인의 형이상학』(2014 영어판, 일본어판은 2015년 10월 출간)의 일부를 번역했다. 이 책은 번역출간이 예정되어 있어서 번역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번역본이 (빨라야) 내년 말이나 되어야 나온다고 하고, 세미나 텍스트로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다른 논문을 삼기에는 그 내용이 이 책만 못하다. 그래서 책의 일부를 번역하기로 했다. 내가 번역의 원텍스트로 삼은 것은 일본어번역본이다. 어차피 (저자가 정본으로 인정한) 불어본도 포루투칼어 논문과 영어 논문의 편집번역본이기 때문에 '중역'은 매한가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조금 방심하기로 했다. 오역에 관해서는 한국어번역정본이 나오면 비교참조할 생각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와 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를 교차독해하는 이 책의 일부를 굳이 번역하려는 또 다른 이유는 『야생의 사고』의 독해가 여전히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야생의 사고』는 이제까지 서너번은 읽은 것 같다. 그런데도 책의 논리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조금 지치긴 하는데 하다보면 논파되겠지.. 라는 "긍정적인 마인드"로 『식인의 형이상학』의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 

 

『식인의 형이상학』 또한 결코 쉬운 책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제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근대적 사유방식의 전제를 완전히 뒤엎기 때문이다. 그래도 『야생의 사고』보다는 친절한 것 같다. 이 책은 총 13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사상(事)의 놀라운 회귀

2장 퍼스펙티브주의

3장 다자연주의

4장 야생의 사고의 이마주

5장 기묘한 상호교차

6장 다양체의 반-사회학

7장 모든 것은 생산이다

8장 포식의 형이상학

9장 횡단하는 샤머니즘

10장 생산이 모든 것은 아니다

11장 시스템의 강도적 조건

12장 개념 속의 적(敵)

13장 구조주의의 생성

 

이 중에서 먼저 3장을 번역해서 올려둔다. 앞으로 4장, 8장, 12장, 13장을 순차적으로 (시간 나는대로) 번역해서 올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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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연주의

 

 

 

 

“분명 우리 근대인은 개념을 가지고 있지만, 내재평면(內在平面 Plane of Immanence)을 잃고 말았다…(들뢰즈&가타리 1991: 100).”

 

[내가 이 책에서] 지금까지 기술한 것은 모두 선주민의 이론적 실천에 따른, 대륙의 신화학의 창시자적인 직관에 이끌린 일종의 연역적 전개에 다름 아니다. 즉 그것을 채우고 구성하고 분할하고 현실적인 실재로 넓혀가는, 모든 ‘순간’의 존재론적인 상호침투에 의해 규정되는 고유하게 역사적인 환경—어떤 유명한 절대적 과거, 결코 한 번도 현재가 되지 못하였기에 지나가버린 것도 아닌 과거, 그리하여 현재가 그저 흘러간다는 그러한 전(前)역사적인 환경—의 직관에 의한 전개에 다름 아니다.

 

『신화학』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듯이, 선주민의 내재평면을 서사화하는 것은 그곳에서 나타나는 인물 혹은 행위자의 종(種) 형성의 이유와 결과—특징적인 신체성의 상정—를 특권적인 방식으로 해명한다. 이 속에서 모든 것은 인간적 측면과 비인간적 측면이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뒤섞인 불안정한 일반적 조건을 나누어가진다.

 

[나는 당신에게 단순한 질문을 하겠다. 신화란 무엇인가?] 그 질문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누군가에게 물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그는 바로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과 동물이 아직 구별되지 않았을 시대의 이야기=역사라고. 이 신화의 정의는 내개 꽤 흥미로운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Lévi-Strauss & Éribon 1988: 193).

 

이 정의는 실제로 매우 깊다. 그런데 레비-스트로스가 염두에 둔 것은 [지금 내가 논하고자 하는 것과] 조금 다른 방향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더 깊이 파고들어가겠다. 신화적 담론이란 완전한 투명성을 갖춘, 잠재적이며 전(前)우주론적인 조건에 기초하여 사물의 현재 상태를 현실화시키는 운동의 영역에 있다. 그것은 ‘카오스모스’이며, 그곳에서는 존재들의 신체적인 차원과 정신적인 차원이 각각을 은폐하지 않는다. 이 전(前)우주는 보통 서술되는 것처럼 인간과 비인간 간의 원초적인 동일화를 보이기는커녕, 무한의 차이에 의해 관통될 뿐만 아니라, 차이가 각각의 인물 혹은 행위주에 내재할 때조차도(혹은 그러한 탓에) 그러하다. 이 무한의 차이는 현실적 세계의 종(種)과 질(質)을 구성하는, 무한하고 외재적인 차이와는 전혀 다르다. 이에 따라 신화에 고유한 질적 다양성의 영역이 생겨난다. 예를 들어, 신화에서 샤먼이 재규어의 모습을 한 인간의 정동 덩어리인지 인간의 모습을 한 고양이과 동물의 정동 덩어리인지는 엄밀하게 결정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신화적인 ‘변신(metamorphose)’은 하나의 사건, 즉 현장에서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등질적 상태의 외연적인 위치변동이라기보다 오히려 이질적인 상태의 내포적인 중첩이다. 신화는 역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변신은 과정이 아니며, ‘아직껏’ 과정이 ‘아니’며, ‘결코’ 과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변신은 과정의 과정에 앞서 그 너머에 있다. 그것은 생성의 형상(혹은 형상화)인 것이다.

 

그리하여 기술된 신화 담론에서 발견되는 일반적인 이어짐(線)이란 식별 불가능한 전(前)과정적 흐름이 우주론적인 과정 속에서 흘러갈 때의 순간적인 박편(薄片)이다. 이후 재규어의 (혹은 인간의) 고양이과 동물적 및 인간적인 차원은 각각 잠세적인 지도와 지면으로서 서로 교대해가며 기능하게 된다. 이에 기초하여 원초적인 투명성 혹은 무한한 착종은 세계의 모든 내적인 존재자들의 구성을 특징짓는 (인간의 혼의, 동물의 정신의) 비가시성과 (인간의 신체와, 동물의 신체적인 ‘의복’의) 불투명함 속에서 분기되며 전개된다. 그러나 이러한 비가시성과 불투명성은, 잠재적인 기저가 파괴 불가능한 것이거나 닿을 수 없는 것이라면, 상대적으로 반전 가능하다(선주민의 세계의 재창조라는 거대한 의례는 바로 이러한 파괴 불가능한 기저의 반(反)-실현 장치이다).

 

우리는 앞서 신화에서 유효하게 움직이는 차이란 무한하고 내적이며, 그것은 종(種) 간의 외적으로 유한한 차이와 전혀 다르다고 했다. 신화적인 사건에서 행위자와 피행위자를 규정하는 것은 실제로 그것들이 다른 존재일 수 있는 능력을 내재적으로 갖춘다는 것에 있다. 이 의미에서 각각의 인물은 무한히 자기 자신으로부터 달라진다. 그러한 인물은 신화적 담론에 의해 단숨에 설정되고 치환되고 변용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차이화’는 ‘정신’ 개념의 특징적인 성질이다. 따라서 모든 신화적 존재는 정신으로서(혹은 샤먼으로서) 파악된다. 그리하여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이다. 모든 유한적인 양태 혹은 현실적인 존재자는 그 존재이유가 신화 속에서 말해지며 정신으로서(정신이었기 때문에) 나타날 수 있다. 정신적 주체 간에 상정되는 미분화는 유적(類的)이든 종적(種的)이든 개별적이든 본질적이고 고정된 동일성, 즉 구성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과 관련된다.

 

결국 신화는 유동적이고 내포적인 차이에 의해 명받은 존재론적 영역—그것은 이질적인 연속성 위의 각각의 점에 우발적인 일로 갖춰진다—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 영역에서 변용은 형식에 앞서고 관계는 항에 우선하며 사이는 존재에 내재한다. 각각의 신화적 주체는 순수한 잠재성이기 때문에 ‘다시금 이미’ 그것이 ‘뒤이은 곳의 것’이기도 하며, 따라서 그것은 현실적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그런데 포스트신화적인 (광의의) 특징화에 의해 도입된 외연적인 차이는 구조인류학의 거대한 테마(신화소)를 구성하는 연속성에서 이산성(離散性)으로 이행하는데, 무한의 내적인 자기동일성을 가진 몰(mole)적인 덩어리로 결정화되고 만다(각각의 종은 내재적으로 등질적이며 각각의 분지항(分肢項)은 그와 마찬가지로 무차이적으로 종을 그 자체로 표상할 수 있다). 이 덩어리들은 외재적인 틈새에서 분리되고 양화되어 측정가능하게 된다. 왜냐하면 종(種) 간의 차이는 상관성의, 비율의, 성격의 교대의, 동일한 영역의, 동일한 성질의, 유한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전(前)우주론적 세계의 이질적인 연속성은 그리하여 그 장소를 등질적인 이산(離散)에 물려준다. 그곳에서 각각의 존재는 그 자신뿐인데, 이것은 그 자신이 아닌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정신이 증명하는 것은, 모든 잠재성은 결코 현실화되지 않으며 신화의 유동적인 소용돌이는 소리를 지어내지 않고 타입과 종(種) 간의 명백한 비연속성 하에서 울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는, 관점의 차이가 동시에 사라지면서도 증대하는 신화 속에 그 지리적 장소가 있음을 알려준다. 이 절대적 담론에서 각각의 존재는 다른 존재 속에서 마치 자기 자신에게—인간으로서—나타나는 것처럼 나타난다. 각각의 존재는 이미 명백하게 그렇게 구분되어 결정된 동물의, 식물의, 정신의 본성을 제시하면서 행동한다 해도 그러하다. 퍼스펙티브주의의 보편적인 도주점인 신화는 신체와 이름이, 혼과 행위가, 자기와 타자가 상호 침투하며 전(前)주체적 혹은 전(前)대상적인 환경 속에 내쳐진 존재의 상태를 말해준다.

 

신화학의 의도는 바로 이 ‘환경’의 ‘목적’을 말하는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그것은 ‘자연으로부터 문화’로의 이행을 기술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레비-스트로스가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이론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주제이다. 그런데 다른 학자들이 시사하는 것과는 반대로 다음과 같이 서술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즉 이러한 이행의 중심성은 정반대로 그 깊은 아마존을—그 선주민의 사고에 대한 (다양한 의미에서) 이중의 의미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신화학』을 읽어나가는 가운데 점차 명백해진다고. 마찬가지로 이 이행에서 지나간 생성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이것이 중요한다. 이 이행이란 서양의 통속적인 진화론에서 논하듯이 동물에서 출발하는 인간의 분화 과정이 아니다. 인간과 동물 간의 공통의 조건은 동물성이 아니라 인간성이다. 신화적인 거대한 분할은 문화가 자연으로부터 구분되는 것이라기보다 자연이 문화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화는 어떻게 동물들이 상속되고 보유된 속성을 인간에 의해 잃게 되는지를 말해준다. 비인간은 오래된 인간이다. 인간이 오래된 비인간이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유행하는 인류학이 보통 인간성을 문화에 의해 숨겨진 동물적 기반에 옷을 입힌 것—예전에는 ‘완벽하게’ 동물적이었으며 여전히 우리의 ‘근저에는’ 동물적인 것이 남아있다—이라 간주하는 반면, 선주민의 사고는 예전에는 인간이었던 동물과 그 외의 우주론적인 존재자들이 계속해서 존재하며, 우리에게는 명석하지 않다 해도 그러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여기서 제기되는 더 일반적인 질문은 왜 존재하는 각각의 종(種)의 인간성이 주체적으로는 명확하고 (그리고 동시에 극히 문제적이고) 또 객체적으로는 명확하지 않은지 (동시에 집요하게 확인되어야 하는 것인지)라는 것이다. 왜 동물들 (혹은 다른 것들)은 자신을 인간으로 볼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 우리를 인간으로 보면서 그것들을 동물로 보기 때문이다. 멧돼지는 자신을 멧돼지로 볼 수 없다(그리고 인간과 그 외의 존재자가 특수한 옷을 입은 멧돼지라는 사실로 사고한다라고 누구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에게 그것들이 보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자신을 인간으로 보고, 비인간으로부터 비인간으로—동물이나 정신으로—보인다면, 그 때 동물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인간으로 보는 것이다. 퍼스펙티브주의가 단호하게 주장하는 것은 동물이란 ‘근본적으로’ 인간과 유사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동물은 결국 어떤 ‘근저’를, 어떤 다른 ‘측면’을 갖추고 있다. 그것들은 스스로가 차이화하는 것이다. 퍼스펙티브주의는 애니미즘도 아니며 토테미즘도 아니다. 애니미즘은 동물과 인간 간의 실질적 혹은 아날로지적인 유사를 주장하고, 토테미즘은 인간내부에서의 차이와 동물들 간의 차이 사이에서 형식적이고 상동적인 유사를 주장한다. 퍼스펙티브주의가 주장하는 것은 각각의 존재 내부에서의 인간/비인간의 차이와 관련된 내포적인 차이이다. 그리하여 각각의 존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오로지 차감적인 이중의 조건 하에서 다른 존재와 유사하다. 차감적인 이중의 조건이란 공통의 자기분리성이며 엄밀한 상보성이다. 왜냐하면 만약 모든 존재자의 존재양태가 자신에게 인간이며 다른 어떤 것에서도 인간이 아니라면, 인간성이란 상호 반향적인 것이기 때문이다(재규어는 재규어에게 인간이다. 멧돼지는 멧돼지에게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성은 상호적인 것이 아니다(재규어가 인간일 때 멧돼지는 인간이 아니며 또 그 반대도 그러하다). 최종적으로 이것들은 ‘혼’을 의미한다. 만약 모두가 혼을 가졌다면 누구도 자기 자신과 일치하지 않는다. 만약 모두가 인간일 수 있다면 명석 판명한 방식으로 인간인 것도 아니다. 인간성은 근본적으로 형식으로서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문제 삼는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만약 비인간이 인간이라면,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인간으로 본다면, 왜 그것들은 모든 우주적 인물을 자기 자신을 보는 것처럼 보지 않는 것일까? 만약 우주가 인간성으로 넘쳐난다면, 어째서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에테르(ether)는 불투명할까? 혹은 최적의 경우에도 어째서 그것들은 인간의 이미지를 한 방향으로만 반사하는 뒷면 없는 거울과 같은 것일까? 이 질문들은 우리가 이미 앤틸리스(Antilles) 제도[카리브 해의 서인도 제도의 섬 중 루케이언 제도를 제외한 섬들]의 사례에 대한 논평에서 예기되었듯이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체’라는 개념과 결부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것들을 통해 퍼스펙티브주의의 준인식론적인 개념에서 다자연주의의 참된 존재론적 개념으로 이행한다.

 

주체적인 위치의 다양체를 포괄하는 세계라는 발상이 직접적으로 상대주의를 이끈다. 이 관념의 직접적ㆍ비직접적인 기술은 아메리카 선주민의 우주론의 기술 속에서 종종 발견된다. 아마존의 마쿠나(makuna)를 현지 조사한 아르엠 카즈(Århem Kaj)의 결론을 들어보자. 아르엠은 이 북서 아마존의 사람들의 퍼스펙티브주의적인 우주를 자세히 기술한 후에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마쿠나에서 존재에 대한 다양한 관점의 관념이 의미하는 것은 ‘모든 퍼스펙티브는 동등하고 유효하며 진정한 것’이며 ‘진정으로 정확한 세계의 표상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1993: 124).

 

이 필자는 확실히 옳다. 그러나 어느 한 의미에서만 옳다. 즉 그와 정반대로 마쿠나가 인간에 관해서는 세계에 대해 진정으로 정확한 표상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대체로 있을 법하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사체에 몰려든 구더기를 구운 생선처럼 보는 독수리들처럼 본다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결론지어야 한다. 인간의 혼이 독수리에게 빼앗긴 것이며 그것들의 어떤 것으로 변용된 것이며 그 혈육이 되기 위해 인간이기를 그만두어야 하는 것이다(그것은 상호적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이때 인간은 중대한 병에 걸렸으며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혹은 실천적으로 그와 마찬가지의 일이 재규어에게도 일어난다. 각각이 구분되는 퍼스펙티브를 보유하기 위해—왜냐하면 그것은 양립불가능하기 때문에—온갖 신중함이 요구된다. 그러나 샤먼만이 종에 관한 이중의 시민성(산 자와 죽은 자라는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 그들은 특정의, 제약된 조건 하에서 그것들을 전달시킨다.

 

그러나 여기서 더 중요한 질문이 남아있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의 이론은 실제로 세계에 대한 표상의 복수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닐까? 다만 민족지의 서술을 고찰함으로써 그와 정반대의 사태의 발생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은 아닐까? 즉 모든 존재자는 세계를 같은 방식으로 본다(‘표상한다’). 변화하는 것은, 그것이 보고 있는 세계이다. 동물들은 인간들과 동일한 ‘범주’와 ‘가치’를 이용한다. 그들의 세계는 수렵과 어로, 요리와 발효음식, 교차와 전쟁, 통과의례와 샤먼과 추장과 정령과 … 등등의 주변을 순회하지 않는가? 만약 달이, 뱀이, 재규어가 인간을 맥(貘)이나 멧돼지처럼 본다면, 그것은 달과 뱀이 우리처럼 맥이나 멧돼지를 먹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인간의 음식물을 먹기 때문이다. 그 외에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각각의 영역에서 인간인 비인간은, 인간이 사물을 보듯이 사물을 보기 때문이다. 즉 우리처럼 [비인간은] 인간의 영역에서 인간이 그것들을 보듯이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보고 있는 사상(事象)은, 우리(인간)가 그것을 보듯이 그것들이 볼 때에는 다른 것이 된다. 우리에게 피인 것이 재규어에게는 술이다. 죽은 자의 혼에게 썩은 사체인 것은 우리에게 발효된 카사바(casaba)[라틴아메리카 원산의 열대관목, 덩이뿌리식물]이다. 우리가 진흙으로 보는 것이 맥에게는 멋진 의식의 공간이다.

 

이러한 발상은 처음에는 직관에 반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정신물리학의 다안정적인 대상의 사례와 같이 그것들은 반대로 끊임없이 변용된다. 예를 들어 제럴드 바이스는 페루의 아마존에 사는 아샤닌카족(Ashaninka族)의 세계를 “상대적으로 출현하는 세계이며, 그곳에서는 다양한 타입의 존재가 같은 사상(事象)을 다른 방식으로 본다”(1972: 170)고 기술했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옳다. 그러나 바이스가 ‘보지 않은’ 것은 바로 다른 타입의 존재자가 다른 방식으로 같은 사상(事象)을 본다는 사실은 단지 다른 타입의 존재자가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상(事象)을 보다는 사실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즉 무엇을 ‘같은 사상(事象)’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이 위의 귀결의 논리에는 없다.] 바로 누군가와의, 어떤 종과의, 어떤 방식과 관련해서, 무엇이 ‘같은 사상(事象)’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문화적 상대주의와 다문화주의는 주체적이고 부분적인 다양한 표상과 유일하게 전체적이며 표상과 무관한 외적 자연에 관한 사건을 상정한다. 그런데 아메리카 선주민은 그 반대를 전제한다. 그곳에서는 한편으로 순수하게 대명사적인 표상적 통일성이 있다. 우주론적인 주체의 포지션을 점령하는 모든 존재는 인간적인 것이며, 모든 실재자는 사고하는 것으로서 사고된다(그것이 실재하기 때문에 그것은 사고한다). 즉 하나의 관점에서 ‘활성화시킨’ 혹은 ‘짜여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실재적이고 객체적인 근원적인 다수성이 있다. 퍼스펙티브주의는 다자연적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퍼스펙티브는 하나의 표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의 퍼스펙티브는 하나의 표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표상이란 정신의 특성이며 그에 대해 관점은 신체 속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관점을 취하는 것은 혼의 힘에 의해 가능해지며, 비인간이 주체가 되는 것은 그것들이 정신을 가진(정신인) 것에 부응한 결과이다. 그러나 관점 간의 차이는—관점이란 차이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혼 속에 있지 않다. 혼이란 형식적으로는 모든 종에서 동일한데, 모든 곳에서 동일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차이란 신체의 특수성에 의해 주어질 수밖에 없다.

 

동물은 우리가 보고 있는 것과는 다른 사상(事象)을, 우리와 동일한 방식으로 본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신체는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생리학적인 차이를 참조하자는 것이 아니고—그에 대해서는 아메리카 선주민은 신체의 기본적인 제일성(齊一性)[자연은 동일한 사태 하에서는 동일한 현상을 일으키도록 하는 통일적인 질서를 견지하고 있다는 원리]을 인식하고 있다—, 각각의 종의 신체를 그 강함과 약함을 특이화시키는 정동을 참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이 먹는 것, 그들을 움직이는 방식, 의사소통하는 방식, 어디서 사는가? 군생하는가, 고립한가? 얌전한가, 떠벌이는가? … 신체적인 형질학은 차이의 강력한 기호이다. 그것은 속기 쉬움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 예를 들어 인간의 형상은 재규어의 정동을 숨길 수 있다. 우리가 여기에서 ‘신체’라고 부른 것은 그렇게 때문에 판명성을 갖춘 생리학도 아니라면 특징을 이루는 해부학도 아니다. 그것은 아비투스, 에토스, 에스노그라피를 구성하는 방식과 양태의 집합이다. 혼의 형식적인 주체성과 유기체의 실질적인 물리성 사이에는 정동과 능력의 다발처럼 신체라는 중심적인 평면이 있다. 그것이 바로 퍼스펙티브의 기원이다. 상대주의가 정신적인 본질주의라면, 퍼스펙티브주의는 신체적인 애니미즘이다.

 

 

다자연주의는 각각의 종에 고유한 오성의 범주에 의해 부분적으로 파악되는 물 자체를 전제하는 것이 아니다. 선주민이 ‘X라는 무엇’, 예를 들어 인간이 피로 마시는 무엇, 재규어가 술로 마시는 무엇이 존재한다고 상상한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자연 속에 실재하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지각되는 자기동일적인 실체가 아니라 피/술이라는 타입의 관계론적이고 직접적인 다양체이다. 피와 술 간에는 경계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른바 이 둘의 ‘근접한’ 실체를 의사소통시키고, 각각을 분기시키기도 하는 언저리뿐이다. 결국 어떤 종에게 피이며, 다른 종이게 술인 X는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피/술 외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이 인간/재규어라는 다양성의 특징적인 특이성 혹은 정동성인 것이다. 인간과 재규어 간에 상정되는 유사성은 결국 양자가 함께 술을 마신다는 것인데, 인간과 재규어 간의 차이를 이루는 것을 지각시킬 수밖에 없다. “사람은 언어 속에 있거나, 다른 것에 있다. 세계의 이면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어의 이면은 없다”(Jullien 2008: 135). 그러나 실제로는 사람은 피 속에 있거나 술 속에 있다. 누구도 음료수[라는 언어] 자체를 마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든 술은 피라는 이면의 맛을 갖추고 있으며 그 역 또한 참이다.

 

이제 우리는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에 대한 번역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제기할 것인가, 그리하여 서양적인 인류학의 존재-기호론적인 술어에서 퍼스펙티브주의의 번역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제기할 것인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유사한 혼의 소유란 모든 존재자 측의 아날로지적인 개념의 소유를 포함한다. 고로 어떤 존재하는 종으로부터 다른 종을 이해할 때에 변하는 것은 그 혼의 신체이며, 그 개념에 대한 참조이다. 즉 신체란 각각의 종의 ‘담론’ 간의, 참조적인 이접의 장소이며, 또 도구이다. 그러므로 아메리카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의 문제란 다른 두 표상(‘새벽의 샛별’과 ‘초저녁의 샛별’)에서 공통의 참조항(이른바 금성이라는 혹성)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다의성 주변을 순회하는 것이며, 그러한 다의성이야말로 재규어가 ‘카사바의 술’이라고 할 때에 우리와 ‘같은 것’을 참조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단적으로 우리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을 상상하게 한다.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퍼스펙티브주의는 항상적인 인식론과 가변적인 인식론을 전제로 한다. 즉 같은 표상과 다른 객체로서 유일한 의미와 다양한 참조를 전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퍼스펙티브주의적인 번역의 목적은—그것은 샤먼의 기본적인 방식의 하나인데—다른 종이 거기에 있는 같은 것을 말할 때에 이용하는 표상으로서 이형동의어(異型同義語 synonym)를 인간적인 개념인 우리의 언어 안에서 찾아낸다는 것이 아니다. 그 목적은 그와 반대로 우리의 언어를 다른 종의 언어와 결부하면서 분리하는, 흩어진 동형이의어(同型異義語 homonym)의 내부에 숨겨진 차이를 찾아내려는 것이다. 서양의 인류학은 해석에 기반한 선의의 원리(사고하는 것의 양심, 타자의 조야한 인간성에 대한 관용의 원리)에 기초 지어진 것이며, 그것은 인간의 문화 간의, 자연적인 이형동의어[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메리카 선주민의 대항인류학은 이것과는 정반대로 기피하기 어려운 모든 종류의 다의성의 기원이 되는, 살아있는 종의 담론 간의, 반자연적인 동음이의어[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메리카 선주민의 예방원칙이다. 왜냐하면 지향성을 갖춘 생명체들의 집합으로 이뤄진 세계가 상당한 악의로 넘쳐나는 것 외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다자연주의라는 개념은 인류학적인 다문화주의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것의 결합에 대해 분명히 다른 두 방식과 관련된다. 따라서 다의성 있는 타입의 복수성을 취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문화의 다양성처럼. 즉 좋은 문화의 다수성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반대로 다의성을 문화에서 포착하여 다양성으로서 문화를 포착할 수 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 두 번째 방향이다. 다자연주의의 관념은 여기에서 그 패러독스적인 성격으로부터 유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즉 ‘자연’에 대한 우리의 마이크로적인 개념은 참된 복수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복수의) 자연’이라는 발상을 포함하는 존재론적인 오용을 의식시킨다. 고로 그 잘못을 바로잡도록 위치이동을 실현시켜주어야 한다. 상대주의에 관한 들뢰즈의 정식(1988: 30)을 차용하면, 아마존의 다자연주의는 자연의 다종적인 존재방식을 주장하지 않는 것이라면 다종성으로서의 자연성 혹은 자연으로서의 다종성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다자연주의적인 서양적 정식화의 역전은 기능(통일성과 다양성)에 의해 상호적으로 규정되는 말(자연과 문화)뿐 아니라, 그와 마찬가지로 ‘말’과 ‘기능’의 동일한 가치와 관련된다. 인류학자인 독자는 여기서 물론 이것이 레비-스트로스에 의한 신화의 기본정식임을 알아차렸을 것이다(1958/1955: 252-53). 퍼스펙티브주의자의 다자연주의는 서양적인 다문화주의의 변용이지만, 그것은 이중으로 중첩된다. 즉 그것은 번역가능성과 다의성과의 문턱인 기호-역사적인 문턱을 어떻게 넘어서는지를 보여주며, 나아가 퍼스펙티브적인 변용의 문턱을 지시한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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