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레비-스트로스의 토테미즘에서 안티나르시스를 통해 포스트구조주의로 가기 위한 중간경유지이다. 즉 '공의'와 토테미즘의 차이에 주목해서 '공의'의 타자개념을 이해하면, '적'이 왜 포스트구조주의 인류학의 생성에서 핵심적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

 

포식의 형이상학

 

 

 

1.

 

상식에 반하는 구조주의의 독해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나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약간 돌아가는 길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 이야기가 아메리카를 연구하는 민족지학자로서의 나의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를 바란다.

 

1962년이라는 전환기에 출간된 두 권의 책, 『오늘날의 토테미즘』과 『야생의 사고』에서 『친족의 기본구조』의 ‘전(前)구조주의’는 『신화학』의 ‘포스트구조주의’로 대체된다. 레비-스트로스는 그 두 권의 책에서 ‘토테미즘’과 ‘공의(供儀)’의 전형적인 대비를 설정하고 바로 신화적인 것으로서 어떤 가치를 받아들이는데, 나는 그 덕분에 구조인류학의 한계로 어렴풋하게 느낀 것을 보다 명확하게 표명할 수 있게 되었다. 술어의 지리학적인 의미에서의 한계—레비-스트로스의 방법론의 영역의 한계—, 그것은 수학적-역학적인 의미에서의 한계이며, 그 한계의 방향으로 이 방법론의 어떤 잠재성을 이끈다. 이 대비는 특히 아마존 동쪽의 투피어족(Tupi語族)으로 분류되는 아라우에테(Araueté)에서 행한 나의 연구를 되돌아보고 아마존의 민족지를 재독하기 위해 중요하다. 그것은 내게 호전적인 카니발리즘과 샤머니즘의 의미, 즉 투피와 그 외 아메리카 선주민 사회의 중심(혹은 ‘탈-중심’)에 있는 코스모폴리탄 체제를 재고하고자 할 때의 기점이 된다.

 

 

2.

 

아마존 선주민 사이에서 ‘공의’에 관한 의례가 존재한다는 것은 남아메리카 저지대의 문화와 안데스나 중부아메리카의 국가체제 간의 역사적ㆍ유형적인 관계성에 관한 질문을 제기한다. 아마존 선주민에게 공의는 극히 중요한 신학정치적인 장치이다. 이 문제의 배후에는 미개로 일컬어지는 사회에서 국가의 발생이라는 더 큰 문제가 놓여있다. 일단 샤먼은 초월적인 것을 위탁받은 원-사제의 모습을 떠안는다. 그래서 아마존에서 이러한 질문에 관심을 가진 전문가는 샤머니즘 현상에 주목하게 된다. 그런데 아메리카 연구자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공의에 관한 고전적인 정의는 프랑스사회학(Hubert et Mauss, 1950/1899)에서 주어지는데, 이것은 여전히 이 분야에서 일반적인 참조문헌으로 자리하지만 남아메리카의 다양한 샤머니즘에 대한 설명이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다.

 

그러나 아라우에테의 민족지와 공의 개념 간의 연결은 그들의 샤머니즘 실천으로부터 내가 직접 받은 인상에서 도출된 것이 아니다. 나는 오히려 그들의 생사관에 관한 담론으로부터 그 연결을 이해했다. 아라우에테의 우주론에서는 사후(死後)의 카니발리즘에 의례적인 의미가 부여된다. 하늘의 신들(les Maï)은 마침내 천국에 입성한 죽은 자의 혼을 먹어치우는데, 그것은 죽은 자가 먹어치우는 자와 동일한 불사의 상태로 변신(metamorfose)하기 위한 서곡이다. 내가 민족지에 논했던 것처럼, 이 신비적인 장례의 카니발리즘은 투피남바족(Tupinamba族)(16세기 브라질의 남단 끝에 살았고, 지금은 투피어족의 가장 중요한 종족으로 리오데자네이루와 바히라에 정주하고 있다)의 호전적 사회학으로서의 카니발리즘의 한 구조변형이다.

 

우선 투피남바족의 카니발리즘의 일반적인 특징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적을 포획하고 쏘아죽이고 의례적으로 먹는 일련의 과정에 공들이는 시스템이 문제이다. 전쟁포로는 같은 언어와 관습을 가진 민족에 의해 포획되는데, 그들은 마을의 중심에 있는 광장에서 엄중하게 의례가 집행될 때까지 포획자들 옆에서 충분히 오랜 기간 살아간다. 그들은 대체로 자상한 돌봄을 받고 중후한 집행의례를 위해 길게 이어지는 준비기간 동안 감시를 받으면서 자유롭게 생활한다. 이것은 [포획자의] 집단의 여성을 처로 받아들이는 관습을 포함한다—따라서 포로는 의리의 형제[처남]로 변용된다(예전에는 투피어(Tupi語)에서 ‘적’과 ‘의리의 형제’의 호칭이 같았다. 토바자(tovajar)는 문자 그대로 ‘적대자’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이미 레비-스트로스가 지적한 대로, 아메리카 선주민의 포식이 친척관계를 얼마만큼 함의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의례적인 사이클은 포로를 죽일 때 최고점에 달한다. 그것은 사제자에게 통과의례의 가치를 가진 행위이다(그는 이때 새로운 이름을 획득하고 기념으로 신체를 상처 입히고 결혼해서 자녀를 갖고 낙원으로 통하는 권리를 얻는다 등등). 그 의례 가운데 모든 협력자, 즉 방문객과 이웃마을의 초대 손님들이 포로의 신체를 먹는다. 예외는 살해에 가담한 사제이다. 그는 포로를 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장례를 위해 격리된다. 즉 상을 당한다. 달리 말하면, 그는 죽임을 당한 ‘적대자’와 동일화하는 과정에 관여한다.

 

투피남바족의 식인은 종종 ‘인신공양’의 한 형태로 해석되어왔는데, 그것은 초기의 [식민지] 연대기 제작자들 몇몇이 사용한 표현이기도 하고 브라질사회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플로레스탕 페르낭지스(Florestan Fernandes 1920~1995)(1970/1952)가 만들어낸 정치한 개념(그는 앙리 위베르(Henri Hubert)와 마르셀 모스(Marcel Mauss)의 도식을 16세기 브라질에 관한 자료에 적용했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때 페르낭지스는 원전에는 기재되지 않은 정보, 즉 공의의 받는 측, ‘초자연적인 실체’를 설정했다. 그에 의하면, 공의란 그룹의 죽은 자의 혼을 위해 행하는 것이며, 전쟁의 포로를 죽거나 먹음으로써 복수 혹은 축복을 행하는 것이다.

 

아라우에테에 관한 연구에서 나는 ‘투피의 카니발리즘에 초자연적인 실체가 관여하며 그들이 의례적인 이성(理性)을 통해 죄를 면할 수 있다’는 사고에 이론(異論)을 주장했다. 아라우에테의 경우, ‘초자연적인 실체’가 식인관계의 능동적인 극(極)의 역할을 맡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식인에 관한 이러한 초자연적인 조건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투피남바족의 사회학을 통한, 이 민족의 생사관에 관한 나의 해석이다. 아라우에테의 하늘의 신들(les Maï)은 투피남바족의 의례에서 주체가 되는 집단이 점하는 위치에 놓인다. 즉 [투피남바족의 의례에서] 살해하는 그룹과 그 동맹자가 포로를 먹는다. 그러나 공의의 객체(투피남바족의 의례에서 포로)는 아라우에테의 죽은 자가 점하는 위치에 놓인다. 아라우에테에서 산 자는 결국 공(共)-주체의 위치를 점하며, 그것은 아라우에테에게 적의 그룹이 점하는 위치이며 희생자는 그로부터 유래한다. 요컨대 아라우에테의 신성한 카니발리즘으로부터 투피남바족의 식인적 카니발리즘으로의 변용은 이러한 실천의 상징적 내용과 그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프라그마틱한 변화, 아니 혹은 퍼스펙티브의 번역이다. 그것은 가치들과 주체-객체의 기능, 방법-목적의 기능, 자기-타자의 기능과 관련된다.

 

이와 같이 나는 시점(視點)에 의한 교환의 이념이 식인에 관한 아라우에테와 투피남바족의 모티브를 기술하는 것 이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교환은 행위자(actant)의 도식에서는 투피의 카니발리즘 그 자체를 보여준다. 따라서 나는 이 교환을 퍼스펙티브를 교환하는 프로세스라고 정의했다. 그 속에서 ‘나’는, 타자가 ‘나’에게 빙의함으로써 ‘타자’로 규정된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타자가 ‘나’가 된다. 다만 그것은 언제나 타자 속의 나이다. 문자 그대로 ‘타자를 횡단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는 단순하면서도 반복되어왔던 하나의 물음에 답을 준다. 즉 도대체 누가 실제로 적을 먹을까 라는 물음이다. 의례적 카니발리즘에서는 질(質)적인 의미에서 희생자의 고기를 소비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이상 문제는 물질적인 측면이나 ‘실체’일 수 없다. 나아가 우리가 아는 자료에 한에서는 적의 신체에 어떤 물질적 혹은 형이상학적인 효과가 머물고 있다는 증언은 거의 없거나 완전히 결정적인 것은 없다. 먹히는 ‘물질’이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신체라는 것이 본질적이다. 그러면서도 신체는 하나의 기호이며 그것은 순수하게 타(他)의 기호와의 관계에서 그 가치가 결정된다. 먹히는 것은, 적과 먹는 자와의 관계이며 달리 말하면 적의 조건이다. 희생자로부터 흡수되는 것은 타성의 기호이며, 그 속에서 이해하는 것은 자기에 대한 시점으로서의 타성이다. 카니발리즘과 선주민의 전쟁의 타입은 상호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적의 시점에 의한 상호적인 자동결정이라는 역설적인 운동을 함의한다.

 

내가 전개한 이 주제는 분명히 이 분야의 어떤 고전적인 가르침에 반하는 해석이다. 서양의 다문화주의적인 인류학의 목적은 현지인의 시점에서 경험한 인간의 삶을 설명하는 것이지만, 선주민의 다자연주의적 인류학은 적의 시점에서 서서 ‘기호물리적’인 포획(죽이고 먹는 것)을 자기기술의 결정적인 조건으로 간주한다. 인류학으로서의 안토르포파지(anthropophagy 식인풍습)이다.

 

내가 이 착상을 품은 것은 아라우에테의 싸움의 노래를 들을 때였다. 그 노래 속에서 전사(戰士)는 부름과 답함이 복잡하게 엮인 놀이를 통해 죽은 적의 시점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말한다. 그 노래의 (두 가지 의미에서) 주체=주제인 희생자는 그가 죽인 아라우에테의 자를, 그리고 그를 죽인 자—‘화자(話者)’ 자신으로 요컨대 죽은 적의 말(파롤)을 노래하는 자—를 식인적인 적으로 이야기한다(무엇보다도 아라우에테는 말 외에는 먹을 수 없다). 아라우에테의 살육자들은 그 적을 통해 스스로를 적으로 간주하거나 적과 같은 상태가 된다. 즉 ‘적으로서’ 나타난다. 그는 희생자의 시선을 통해 스스로를 이해한 순간부터, 혹은 오히려 희생자의 목소리에 의해 스스로의 특이성을 표명한 순간부터 스스로를 주체로서 파악한다. 이것이 바로 퍼스펙티브주의이다.

 

투피의 호전적인 기호론적 식인은 아메리카 선주민의 코뮌 밖에서는 전혀 발전하지 않았다. 카니발리즘에 관한 선주민의 정치철학이 존재한다는 이 테마는 그와 동시에 정치에 관한 식인적인 철학이기도 한데, 전쟁에 관한 클라스트르의 이론에서 그 개략이 묘사된다(Clastre 1977, 선구적인 논문으로서 Clastre 1968과 1972 참조). 그러나 몇몇 아마존 연구자의 노력 덕분에 그의 민족지의 일반성과 복잡성은 내가 투피의 연구테마로 삼은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마침내 알려지게 되었다. 이 작업이 조준한 것은 아마존 사회의 기초적인 제도로서 포식자의 타성(他性)의 체제이다. 이 사고방식에 의하면, 사회체제의 ‘내면성’은 외계의 상징적인 자원—이름과 혼, 인격과 전리품, 말과 기억—을 포획함으로써 남김없이 구성된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사회는 적이 가져온 특성을 거두어들이는 움직임의 원리를 삼음으로써 그와 동일한 특성에 의해 ‘규정’되도록 작용한다. 이것은 투피남바족의 생활에서 중대한 의례의 순간, 즉 포로를 죽일 때 나타나며 그때 의례의 장(場)은 살해자와 그 희생이 되는 자의 쌍방의 형상에 걸쳐 배분된다. 그리고 그러한 형상은 무한하게 반사(反射), 반향(反響)된다. 결국 여기에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포식의 형이상학’의 핵심이 있다. 내부 없는 사회로서의 미개사회는 그 외부에서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그 내재성은 그 초월성과 호응한다.

 

이와 같이 나는 샤머니즘이 아닌 전쟁과 카니발리즘에 의해 처음으로 공의의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그런데 만약 모스의 정의가 적절하지 않다면—받는 사람도 성스러운 물건도 없다—, 레비-스트로스가 토테미즘의 논의에서 제기한 관념은 [모스의 정의와] 반대로 투피의 식인풍습[인류학으로서의 안트로포파지]을 새롭게 밝혀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3.

 

토테미즘과 공의의 대비는 처음부터 오지브와족(Ojibwa族, 북미인디언의 한 부족)의 토템과 마니도(Manido)[오지브와족의 홍수신화에 등장하는 창조주]의 시스템 사이에 놓인 직각적인 대립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오늘날의 토테미즘』 1장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Lévi-strauss 1962a: 32). 『야생의 사고』 7장에서 이 대립은 일반화되어 묘사되며(1962b: 298), 다음과 같이 시스템화된다.

 

  1. 토테미즘은 전체로서 동형의 두 차이의 시스템 간에 형식적 및 가역적인 상관관계를 정함으로써 두 병렬적인 계열(série)(자연종과 사회집단) 간의 상동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정립한다.

  2. 공의는 연속적으로 방향 지어진 단 하나의 계열의 존재를 정립한다. 그 계열 속에는 양극단에서 비상동적인 두 개의 항(인간과 신) 사이를 하나의 실재적이고 불가역적인 매개가 움직인다. 그 속에서 유사성은 동일성 혹은 연속하는 아날로지적인 근접성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

  3. 토테미즘은 은유적이며 공의는 환유적이다. 즉 토테미즘은 ‘참조항의 해석체계’이며 공의는 ‘조작자의 기술체계’이다. 전자는 랑그의 영역이며, 후자는 파롤의 영역이다.

 

이 규정으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공의는 언뜻 보면 토테미즘과 『야생의 사고』에서 분석되는 또 하나의 ‘변용의 체계’에서 비율의 균형에 관한 다른 타입의 프로세스를 현실화한다. 토테미즘의 논리변용은 상호적인 입장을 치환, 전치, 교차 혹은 그 밖의 조합적이고 외연적인 재분배로 간주하도록 항들 사이를 설정된다. 즉 토테미즘은 비연속성의 유형이다. 그와 반대로 공의적인 변용은 자연을 자신의 술어로 개변하도록 내재적인 관계성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공의적인 변용은 그것들 사이에 무엇인가를 ‘통과시키기’ 때문이다. 여기서 변용은 조합이라기보다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 1924~1989, 프랑스의 기술철학자)이 말한 의미에서의 전도(轉導 transduction)이다. 그것은 연속성의 에너지의 도움을 받는다. 토테미즘의 목적은 각각의 극에 있는 차이의 두 계열 간에 유사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공의의 목적은 자기동일화한다고 가정되는 두 극 사이에 하나의 장면 혹은 식별불가능한 어떤 계기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차이를 이룬다(외부를 통한 것이 아니라 내부를 통해). 수학적인 알레고리를 빌어 말하면, 토테미즘에서 구조변용의 모델은 조합의 분석이다. 그때 공의의 강도적인 형태변화에 의해 만들어지는 ‘연속성의 왕국’(레비-스트로스)을 탐구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은 오히려 미분적인 계산의 어떤 영역으로 향한다. 희생자의 죽음이 접선 즉 신성(神性)의 곡선에 대한 최적의 근사치라고 상상해보자….

 

이와 같이 레비-스트로스류의 정의에서 토테미즘은 형식의 시스템으로서 이해되며, 그 한편으로 공의에 대해서는 힘의 시스템이 현존하는 것을 시사하도록 형식화에 호소한다. 유동하는 진짜 기계. 레비-스트로스는 예를 들어 ‘저장고’ 간의 ‘연속성의 해결’, ‘자동적으로’ 보충하는 ‘유사성의 결여’ 등이라는 표현을 증거로 삼으면서 공의를 설명하기 위해 커뮤니케이션하는 용기라는 완전한 도식주의를 활용했다. 이 사고로부터 공의의 원리로서 잠세성(潛勢性)의 차이라는 단서의 이념이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4.

 

『벌거벗은 인간』의 ‘피날레’에서는 축적된 상징 에너지를 경감시키는 것으로서 웃음과 미적인 감정을 분석하면서 물(水)-에너지적인 언어가 다시 나타난다. 레비-스트로스는 ‘뜨거운’ 역사를 가진 사회를 언급할 때에도 그렇게 다룬다. 집단의 불평등성 혹은 타자들의 착취에 포함된 잠세성의 차이를 사용해서 생성이나 에너지를 산출하기 위해 엔트로피에 저항한다는 것이다(Lévi-strauss et Charbonnier 1961: 44-48). 잠세성의 차이라는 개념은 거의 주목되지 않았지만, 그것은 『주술의 일반원리의 소묘』에서 마나의 개념을 만들어낼 때 결정적인 역할을 맡는다. 위베르와 모스는 마나가 사상(事象)과 존재물을 차이/미분화하는 가치의 이념이라는 것(“주술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 속에서 인정되는 각각의 가치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계층적인 배열(arrangement)의 이념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의 계층적인 차이(니체와 함께 하는 모스!)는 휴이트에 의해 ‘주술적인 잠세성’이 된 마나(mana)와 오렌다(orenda)라는 개념의 번역과 정합하는 것임이 강조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우리가 사상(事象)의 상대적인 지위와 상호적인 가치라고 부르는 것은 잠세성의 차이라고 부르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상(事象)이 상호 작용하려는 것은 이러한 차이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 마나의 개념이란 그러한 가치들의 관념이며, 이 잠세성의 차이라는 개념에 다름 아니다. 주술적인 사고와 주술에 관한 사고방식의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Hurbert et Mauss 1950/1902-1903: 114).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의 틈으로서의 마나라는 레비-스트로스류의 해석은 그러한 이유로 시니피앙의 계열과 시니피에의 계열 간의 상관적인 차이의 모델을 끌어오며, 그때 그 모델은 토테미즘형의 설명 그리고 이 두 계열 간의 끝없는 변조(‘조정’의 결여)상태에 지지되는 위베르와 모스의 ‘잠체성의 차이’와 아주 유사한 불균형으로서의 공의형의 설명, 이 두 설명 사이의 하나의 타협이다.

 

 

5.

 

결국 차이에 관한 두 개의 다른 이미지, 외연적인 이미지와 강도적인 이미지가 있다. 즉 형식과 힘이다. 레비-스트로스가 ‘양립불가능’(1962b: 295)이라고 할 정도로 다른 두 이미지를 나는 (레비-스트로스가 종종 인용한) 닐스 보어(Niels Henrik David Bohr 1885-1962, 덴마크의 물리학자)의 의미에서의 상보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하겠다. 이 경우 토테미즘과 공의는 두 개의 ‘시스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동시에 필요로 하면서도 동일한 일반적 현상에 관해서는 상호 배타적인 두 개의 기술, 즉 이질적인 계열의 분절화 작용만큼의 의미 혹은 기호작용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적어도 레비-스트로스로 말하자면, 이러한 상보성은 분명 비대칭적이다.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열린 강의에서 그는 구조인류학이 역사에 저항하는 ‘유체(流體)라기보다는 변용에 관한 어떤 방법’(1973/1960: 28)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동시에 차이/미분화하는 역학보다도 오히려 집단의 대수학을 제안한다. ‘유체의 방법론’은 뉴턴이 미분법에서 명명한 것임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실제로 바로 그대로 인류학에서 구조의 방법론은—아마도 이 방법의 관습적인 해석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힘이라기보다는 형태를, 차이보다는 조합을, 물결모양보다는 다루기 쉬운 입자상태를, 파롤을 밀어내서 랑그를, 행위보다는 유형화를, 각각을 설명하기 위해 받아들였다. 따라서 구조의 방법론을 다소 거스르는 [유체의 방법론의] 이러한 측면은 통상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비주류의 기호학(혹은 존재론)의 양태로서 다뤄진다. 이 책이 서두에서부터, 사고 가능한 것의 한계에 대한 증언이든 의미의 결여의 재평가이든 아니면 착오의 힘의 표현이든 비주류의 인류학에 대해 말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공의는 상상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을 위해 끌어온 것이며, 토테미즘은 객관적인 것과 참됨을 높게 평가한다(같은 책 301-302). 이러한 판단은 『벌거벗은 인간』(1971: 596-603)에서 전개된 신화와 의례 간의 중대한 대립에서 되풀이되고 일반화된다. 즉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이 판단은 그가 연구한 민족의 우주론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레비-스트로스 [자신]의 우주론의 특정한 측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토테미즘은 오늘날 야생의 사고 속의 일반적인 분류행위로 해체되고 말았다. 그리고 공의는 항상 [토테미즘과] 잘 어울리는 구성적 해체를 바라고 있다. 토테미즘이 어떻게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해체되는지는 주지한 대로이다. 그것은 하나의 제도이기를 멈추고 분류의 방법과 의미작용의 시스템이 되었고 그곳에서 자연종의 계열에 대한 참조는 부차적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의를 생각해볼 수 있을까? 즉 공의적인 관계성의 표현으로 기능하는 신성(神性)을 토테미즘의 자연종과 마찬가지로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 전형적인 제도적 결정화가 특수사례의 하나에 불과할 때, 공의의 일반적 도식은 무엇과 유사한 것일까? 혹은 토테미즘과 비교해서 더 공의적인 언어로 문제를 형식화하기 위해 공의를 특이성의 현실화로 만드는 역동적인 잠재성의 영역이란 대체 무엇일까? 공의는 얼마만큼의 힘을 일으킬 수 있을까?

 

레비-스트로스의 가치판단과 거리를 두었을 때, 은유적인 불연속성과 환유적인 연속성, 위치적인 양과 방향을 가진 질(質), 범형론(範型論 paradigm)의 참조와 통어론(統語論 syntax)의 조작 간의 대비가 내게는 완전히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나는 투피의 의례적인 카니발리즘을 공의 속에(범형!) 포함된 것으로 보았다. 반(反)-토테미즘의 참된 조작으로서 카니발리즘은 잠재적으로는 상호적인 변환으로 나타난다(투피남바족의 사회에서 그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보복의 명령이다)는 것인데, 실재적으로 말하면 연결된 같은 부류의 항들은 불가역적이다. 그 중간에 있는 것은 고도의 유사성과 ‘비유사성’(희생자의 신체를 죽음에 이르게 하여 해체하고 먹는다는 난폭한 물리적인 접촉)이며, 그것은 살해자와 희생자, 먹는 자와 먹히는 자 사이에 비규정적이고 식별불가능한 영역을 만들어내는 움직임이 있음을 함의한다. 사람이 공의의 요소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초자연적인 실체의 존재를 정립할 필요는 전혀 없다. 내가 아라우에테의 민족지에서 행한 투피남바족의 의례의 삼중의 해석에서 행위자(actant)는 먹는 자의 집단, 죽임을 당해 희생당한 인물, 그리고 적의 집단이다. ‘죽음’은 의례의 세 축에 의해 교대로 바뀌고 바뀌는 가정된 보상 기능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순환하는 힘을 조정하는 것은 그러한 기능에 다름 아니다.

 

전적으로 그러하다. 그러나 ‘공의’의 개념을 이 새로운 레비-스트로스류의 의미에서 정말로 식인의 의례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까? 투피의 카니발리즘에는 상상적인 것도 인위적인 것도 전혀 없다. 마찬가지로 보복은 ‘불가능’할 수 있지만 상상적이지 않다. 즉 그것은 사회적인 포이에스의 도식이며, 적의 집단과의 영속적인 불균형을 만들어냄으로써 집단적인 시간을 의례적인 것으로 산출하는 기구(제한없는 보복의 순환)이다. 여하간 만약 항상 적을 상상해야한다면—타자를 그러한 것으로 만들어내야 한다면—, 그 목적은 실제로 적을 먹는 것이며, 그것은 자기를 타자로서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다. 가령 토테미즘의 개념보다 더 많은 것이 공의의 개념에서 생겨난다 해도, 공의의 개념에서 생겨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Posted by Sarantoy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