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팀 잉골드의 경우

 

 

야나기사와 타미(柳澤田美)

 

 

 

0. 초콜릿과 치즈를 나란히 놓다

 

들뢰즈&가타리가 창출한 매력적인 개념 가운데 ‘도주선’(ligne de fuite)이라는 것이 있다. ‘선’(ligne)이란 우리의 삶 그 자체의 ‘욕망’을 의미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 무수한 방향으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선’은 우리의 욕망을 억압하는 다양한 해석의 격자들, 서사, 개념, 존재론에서 빠져나와 도주한다. 도주한다는 것은 “현실을 생산하고 삶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들뢰즈&가타리는 이 개념을 국가라는 권력의 집중으로부터의 도주를 말하는 데에 사용하며 부모와 자식을 구성원으로 하는 ‘가족’이라는 모델과 이 ‘가족’ 모델에 입각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에 의한 억압으로부터의 도주를 말하는 데에도 사용한다. 즉 그들이 비판의 칼끝을 겨눈 곳은 주로 정신분석이라는, 담론에 의한 권력의 행사며 또 국가와 아버지로 대표되는 다양한 권력의 담지자다. 이는 아직까지는 온당하다.

 

인류학자인 팀 잉골드(Tim Ingold)는 이 ‘도주선’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선’(line)이라는 개념을 기축으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들뢰즈&가타리가 전제한 정신분석이라는 맥락을 완전히 도외시한 채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는데, 잉골드가 한 사람의 인류학자로서 오리지널한 모색을 전개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이러한 개념의 응용 자체가 비판받을 만한 일은 아니다. 그의 독해는 가타리는 물론 적어도 들뢰즈 철학의 큰 테두리에서 일탈하지는 않는다. 잉골드는 알프레드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 영국의 수학자ㆍ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을 잇는 노선에 들뢰즈&가타리를 위치짓고, 삶에 관해 그들의 이해를 매우 충실하게 공유한다. 잉골드를 포함하여 그들이 공유하는 삶의 이해란 다음과 같다. ‘살아 있는 것’은 분단할 수 없는 ‘흐름’이자 ‘운동’이며, 이 ‘운동’에는 외부가 없고 또 이 ‘운동’을 잘라 나눈 부분들의 집합으로 다뤄질 수 없다. 이 테제를 반복하는 잉골드는 사상사적으로는 화이트헤드, 베르그송, 들뢰즈를 잇는 계열의 직계임이 분명하다. 그 의미에서 기본도식의 측면에서 보면 그가 어떤 새로운 제안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사상의 계열에 잉골드 자신이 참조하고 있는 그레고리 베이트슨과 데이비드 봄(David Joseph Bohm)을 덧붙여도 무방하다.

 

그의 모색이 이채로울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선학들의 고도로 추상적인 철학적인 모색을 그 자신의 대담한 직감에 의해 구체적인 사상이나 실천과 결부시키는 그의 비상한 재주 때문이며, 또 그렇게 결부시킴으로써 오리지널한 사색을 스스로 전개시키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의도한 것은 아닌 것”이라고 해도 “초콜릿과 치즈”라는 극과 극에 있는 것들을 순식간에 나란히 놓게 된다고 술회한 것처럼, 제대로 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우스울 정도로 호쾌하게 잉골드는 철학적 사색과 구체적인 사례를 결부시키면서 논의를 전개시켜나간다. 나는 이번 기회에 잉골드의 ‘선’을 둘러싼 논의에서 특히 “선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실천적인 질문을 중심으로 논의를 검토하고, 이 작업을 통해 잉골드의 오리지널리티를 드러내고자 한다. 잉골드가 이 개념을 어떤 실천으로 구체화했는가를 확인함으로써, 들뢰즈&가타리가 고안한 ‘도주선’이라는 개념 자체의 실천적 의의에 대해서도 일부 밝혀지리라 기대한다.

 

 

1. 애니믹 온톨로지: 물질과 생명의 불가분성

 

들뢰즈&가타리의 저작과의 만남을 통해 ‘선’이라는 결정적인 이미지를 얻은 잉골드는 그 후 『Lines: A brief history』(2008)를 저술한다. 이 책에서 그는 음악, 보행, 문학, 소묘, 건축 등을 자유롭게 오가며 살아있는 것 그 자체의 궤적이 악보그리기, 교통수단, 인쇄기술, 원근법, 제도법 등의 다양한 제도에 의해 점과 점을 연결하는 고정적인 선이 되면서 그 역동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그려내었다. 앞서 나는 잉골드의 독자성은 추상적인 논의를 구체적인 사물과 연결하는 대담성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잉골드는 들뢰즈&가타리의 ‘선’을 단순한 비유로서 이해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문자 그대로의 ‘선’과 결부시켜 풍요로운 선의 세계를 그려내었다. 이러한 ‘선’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거쳐, 2011년 『Being Alive』라는 논문집을 출간한다. 잉골드는 “선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실천적인 탐구에 착수한다. 물론 잉골드는 들뢰즈&가타리가 말한 것처럼 권력기구에 대한 투쟁의 수단으로서 도주선을 자각적으로 논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 인류학이 삶을 억압하는 것으로부터의 가장 유망한 도주선인 이상, 우리는 그가 탐구하는 새로운 인류학의 기술법에서 잉골드에 의한 도주선의 묘사방식의 가이드라인을 읽어낼 수 있다.

 

이제 『Being Alive』에서 ‘도주선의 묘사방식’이라는 본고의 테마와 관련하여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장을 중심으로 논의를 재구성해보겠다. 잉골드의 사상은 말하자면 생명=물질의 일원론으로서 유물론이자 철저한 내재주의다. 요컨대 그는 인간의 정신이 자연이나 물질에 대해 초월적 입장을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유기물과 무기물 각각이 생명의 선을 무수하게 도주해나가면서 뒤얽히는 상태로서 세계를 그려내고자 한다. 이러한 세계상을 전제하는 잉골드가 “선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물음에 어떻게 답했는가를 미리 서술하면, 무언가를 새롭게 이미지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물질에 따른다”(following the material)는 것이다. 잉골드는 이 문구를 들뢰즈&가타리의 『천의 고원』의 야금술에 관한 텍스트에서 인용하여 자신의 논문집의 제17장 ‘만들기의 텍스틸리티’(Textility of making)에서 전개시킨다. 그리고 이 “물질에 따른다”는 테제를 검토한 후에 제18장과 에필로그에서 사물을 대상화하지 않는 드로잉(drawing)을 논한다.

 

우선 제17장에서 언명한 “사물에 따른다”에 이르기까지의 논의를 확인해보자. 모든 존재자들의 무수한 선들의 일원적으로 뒤얽히는 모습으로 세계를 그리는 잉골드는 서구의 자연과학이 전제로 삼고 또 그 영향 하에 있는 우리가 습관적으로 행하는 다양한 존재론적인 이원론을 부정한다. 제5장 ‘생명 있는 것을 재고한다, 사고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Rethinking the animate, reanimating thought)에서 잉골드는 우선 비활성(非活性)의 물질과 생명을 나누어 생각하는 사고의 틀을 비판한다. 이러한 서구적인 사고에 의해 미개사회의 ‘애니미즘’은 비활성의 물질 혹은 물질에 생명을 귀속시키는 미신이라고 간주되어 왔다. 동시에 이러한 비활성의 물질이라는 이해에 의해, 우리는 환경을 생물이 활동하는 정적인 무대로 간주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상식이야말로 잘못된 것이라고 잉골드는 지적한다.

 

잉골드에 따르면, ‘활성’(animacy)이란 생명과 물질이라고 하는 이원론에 앞서는 것이며, 근본적으로 관계성에 대해 열려 있는 것이다. 또 ‘활성’은 무수하게 도주하는 선들에 의해 그물 세공(meshwork)을 형성한다. 잉골드는 이러한 생명에 대한 지각을 중심으로 하는 애니믹 온톨로지(animic ontology)에서 가장 우위에 있는 것이 바로 ‘운동’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운동이 생명의 표지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유보하면서도, “생명이 있는 곳에 운동이 있다”고 잉골드는 서술한다. 여기서 잉골드는 인류학자답게 애니믹 온톨로지의 사례로서 이누이트의 코유콘족의 문화를 가져온다. 이 종족에서 동물의 이름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또 북아메리카 평야에서 발견되는 비문에서 태양은 다음과 같은 상형문자로 표현된다(그림 참조). 여기서 발견되는 것은 태양이 하늘을 가로질러 가는 대상이 아니라 바로 “하늘을 통과하는 움직임의 길”이라는 이해다.

 

그림

 

 

잉골드는 이렇듯 아름다운 사례들에 기초하여 대지든 하늘이든 우리를 휘감는 환경 속에는 활기 없는(inanimate) 고정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움직이고 흐른다고 서술한다. 게다가 우리는 이 유동하는 세계를 관찰할 때 과학자들이 종종 상정하듯이 이 세계로부터 자신들이 분리되어 객관적인 입장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스스로 유동하는 자에 의한 관찰이라는, 행위와 지각을 통한 참여(participation)가 있을 뿐이며, 그 속에서 새로운 선, 즉 유동의 뒤얽힘이 필연적으로 생겨난다. 자연과학에도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한 관찰과 기술방법이 요구되고 있다고 잉골드는 서술하면서, 움직이는 흐름으로서 세계를 다루는 데에 능숙한 자로서 풍경을 사생하는 화가를 참조한다.

 

 

2. ‘방심’을 축복하다

 

이처럼 제5장에는 잉골드가 자신의 논문집에서 주장하는 기본적인 요소가 전부 담겨 있다. 첫째, 세계란 모든 존재자가 물질로서 유동하고 생성하는 상태에 있다. 둘째, 그 세계는 생성하는 선들의 뒤얽힘, 곧 그물 세공으로서 다뤄질 수 있다. 셋째, 이러한 세계관을 전제로 할 때, 비활성의 물질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사고나 표상을 투영한다는 이해방식은 중지되어야 한다. 넷째, 인간이 세계를 관찰하는 입장에 설 때조차 인간 또한 유동하는 선이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되고 관찰자 또한 참여자로서 세계의 흐름의 일부를 이룬다는 새로운 모델과 기술방법이 필요하다. 다섯째, 이 새로운 모델의 존재방식은 화가나 장인 등의 크리에이터에게서 발견된다. 그의 이 주장들은 책의 중반부와 후반부에서 구체적으로 기술되는데, 예를 들어 첫 번째, 두 번째 문제가 제10장의 ‘날씨 세계’(weather world)에서 다시금 전개된다. 또 세 번째 문제가 각각 소재를 달리 해서 제1장과 제17장에서 다뤄진다. “선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도주선의 문제는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문제의 핵심인데, 이를 중심적으로 다루는 장은 앞서 언급했다시피 제18장과 에필로그의 제19장이다.

 

제5장의 요약 내용처럼 잉골드에게 세계는 무엇보다 유동하는 선들의 뒤얽힘이며,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손상시키는 것은 우리 관찰자인 인간 측의 이해와 해석에 좌우된다. 우리는 살아있는 한, 이미 선들을 무수하게 도주시키며 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아무리 자각한다 해도 우리가 느닷없이 이누이트의 코유콘족이나 아메리카 선주민처럼 애니믹 온톨로지로 살아갈 수는 없다. 우리가 ‘동물화하는’ 것의 어려움에 관한 문제에 대해 잉골드는 제6장에서 더욱 깊게 파고든다.

 

제6장에 등장하는 것은 제임스 깁슨, 마르틴 하이데거, 야콥 폰 윅스퀼, 그리고 들뢰즈&가타리다. 조금 논의가 복잡하므로 가능한 단순하게 정리해보겠다. 우선 잉골드는 깁슨의 환경이해와 윅스퀼의 환경이해를 비교한다. 깁슨과 윅스퀼은 세계의 ‘의미’를 유기체와 환경과의 관계성 속에 위치짓는다는 점에서는 입장을 같이 한다. 이것은 인간의 정신이 세계 속에서 의미를 찾아낸다는 아마도 지금까지 가장 유력한 인지모델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다. 모든 존재자를 관계성의 그물 세공으로서 파악하는 잉골드 또한 이 입장을 공유한다. 그러나 깁슨은 유기체와 환경 속에서 행위를 통해 의미를 지각하고 채용한다고 말하면서도 이 환경 내의 의미, 더 강하게 표현하면 환경 그 자체의 자립성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점에서 모순적이라고 잉골드는 비판한다. 이러한 환경의 유기체에 대한 자립성은 결국 매우 서구적인, 곧 생물이 활약하는 고정적인 무대로서의 환경=세계라는 모델을 여전히 고수하는 것이라고 잉골드는 주장한다. 이에 대해 윅스퀼의 ‘환경세계’는 철저하게 관계적인 개념이다.

 

깁슨의 용어에서는 피난처 혹은 석전의 돌 무기는 모두 다듬어서 이용가능하게 된 돌의 특성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윅스퀼에게 그것은 해당의 생물이 필요로 함에 따라 바로 그 돌에 주의한다는 행위로부터 돌에 전수된 성질이다. 게는 급할 때 돌을 피난처 삼을 수 있다. 또 개똥지빠귀는 껍질을 부수는 받침으로 돌을 쓸 수 있고, 나아가 사람들이 그것을 던지기 위해 돌을 주워들었을 때 돌은 무기가 된다. 이러한 활동의 외부에서 이 사물들은 그 무엇도 아니다. 따라서 세계의 특정한 ‘니치’(niche)와는 적합하지 않고 동물 쪽이야말로 기능적인 성질을 자신이 맞부딪히는 사물에 대해 귀속시킴으로써, 그리고 그에 의해 그 성질들을 동물 자신의 정합적인 시스템과 통합함으로써, 세계를 자기 자신에게 접합시킨다. 이 시스템—동물의 지각과 행위의 회로의 내측에서 구성되는 것으로서의 세계—을 가리키기 위해 폰 윅스퀼은 환경세계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중략) 우리가 보아왔던 것처럼 ‘니치’(niche), 곧 의미장치는 환경 쪽에 있으며 유기체의 힘을 방향 짓는다. 그러나 환경세계는 정반대에 있다. 그것은 환경의 방향으로 향해 있는 유기체 쪽에 있다. 유기체를 제외하면 환경세계는 유기체와 함께 사라진다. (『Being Alive』79-80쪽)

 

그러나 인간에 관해서는 어떠할까? 라고 잉골드는 의문을 제기한다. 인간에게만 환경 내의 의미가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인식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윅스퀼에 입각하면서서 인간의 특권성을 견지한 하이데거로 잉골드는 향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하이데거는 윅스퀼의 논의에 경의를 품고 참조하면서도 “돌은…무세계적이다. 동물은 세계빈곤적이다. 인간은 세계형성적이다”라고 말했다. 돌은 환경 내에서 의미를 찾지 않기 때문에 세계를 갖지 않는다. 인간은 환경 내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나아가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에 반해 동물은 환경 내에서 의미를 찾아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세계를 가진다 해도 빈곤한 방식으로 가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세계에 열려 있음에 반해 동물은 환경에는 열려 있지만 세계에는 닫혀 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이다. 하이데거는 또한 동물이 자신이 놓인 상황을 인식할 수 없는 상태에서 환경에 촉발되어 행위를 하는 양태에 대해 “사로잡혀 있다”(benommen/captivated) 혹은 “방심”(Benommenheit/captivation)으로 표현한다.

 

하이데거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 잉골드는 다음의 세 가지로 답변한다. 첫째, 인간 또한 장인처럼 눈앞에 있는 것에 몰두할 때에는 얼핏 ‘방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세계를 가지지 않는’ 동물과, 세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닫혀 있을 수 있는 인간과의 차이는 분명 존재할 수 있다. 둘째, 하이데거의 환경 이해는 유기체로부터 독립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깁슨의 환경이해보다는 양호하지만 유기체와 환경을 분리하는 관점 자체를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셋째, 유기체와 환경을 분리하지 않고 생명을 뒤얽힘으로서 다루기 위해서는 동물의 ‘방심’을 하이데거와 달리(아마도 윅스퀼에 입각하여) ‘축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동물의 방심을 축복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잉골드는 동물에게 실현되는 ‘방심’이야말로 “용기에 담기지 않고 그 주변을 에두르는 모든 경계를 넘어 흐르는” 리좀 위로 확장해가는 “생명의 개방성”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유기체와 환경이라는 쌍방의 외부로부터 관찰된 생태학적 입장도 아니고(깁슨), 유기체 측으로부터 관찰된 현상학적 입장도 아니며(하이데거) 유기체와 환경이라는 구분에 앞서 생명의 차원에서의 개방성이다. 그리고 이 생명의 선들에 대해 말하는 자로 윅스퀼을 읽어내는 들뢰즈&가타리가 참조된다.

 

생성변화의 선은 그것과 결부되는 복수의 점들에 의해서도, 또 그것을 구성하는 복수의 점들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다. 생성변화의 선은 점과 점 사이를 빠져나와 중간에서만 맹아를 피울 뿐인가? … 근접하는 점과 떨어져 있는 점 사이로 국한되는 관계에 대해 선은 이 점들을 횡단하는 방향으로 질주한다. 점은 항상 기원이다. 그런데 생성변화의 선은 처음도 끝도 없고 … 생성변화의 선에는 <중간>이 있을 뿐이다. … 생성변화는 항상 <중간>이며, 이것을 취하기 위해서는 <중간>을 억압할 수밖에 없다. 생성변화는 일(一)도 이(二)도 아니고, 이 둘의 <사이>이며, 이 둘과 수직을 이룬다. … 도주…의 선이다. (『천의 고원』)

 

하이데거는 환경을 의미로 넘쳐나는 것으로 다루며 생명체는 환경으로부터 촉발되도록 환경을 ‘억지 해제하는’, 즉 다양한 자극에 대해 닫혀 있는 자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는 것으로 다루었다. 인간은 환경을 인식해서 행할 수 있지만 동물은 ‘억지 해제’를 선택하지도 못하며 자각하지도 못한다는 의미에서 ‘빈곤하다’. 잉골드는 여기서 생명체가 이미 포위되어 있음에 ‘열려 있다=억지 해제한다’는 의미에서의 ‘열려진’ 것이 아니고 생명이 근본적으로 살아있는 한 ‘열려’ 있고,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도 포위되거나 갇힐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렇듯 열려진 선에 의해 이뤄지는 세계는 그물 세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 핵심은 그것이 네트워크와 같이 점들의 연결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잉골드는 여기서 들뢰즈의 꿀벌과 난의 예, 그리고 곰과 파리의 예를 들면서 각각의 관계성은 분명 선상 위에 있지만 그것은 양자를 묶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상호작용하는 “가능성의 조건을 규정한다”고 서술하고, “만약 이 선들이 관계하고 있다면 그것들은 사이(between)의 관계가 아니라 따르는(along) 관계다”라고 말한다.

 

이상과 같이, 최종적으로 생명을 얽어매는 그물 세공에 대한 논리는 제5장과 동일하다. 제6장은 세계나 환경에 대해 초월적인 위치에 서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정신을 다룬다. 잉골드는 도주선을 유기체의 활기 있는 모습에서 찾아내어 동물의 ‘방심’을 ‘생명에 대해 열린’ 것과 동일시하여 이것을 ‘축복’하고자 한다. 동시에 그는 동물처럼 ‘방심’하는 것을 우리 인간에게 맹목적으로 권유하지 않는다. 잉골드는 들뢰즈&가타리의 ‘동물이 되는 것’(devenir animal)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으며 또 조르주 아감벤의 ‘동물의 방심’과 ‘인간의 권태’ 간의 유사성에 관한 논의를 당연히 알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동물이 되어’ ‘방심하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태도에서 나는 잉골드 특유의 리얼리즘을 본다. 생명세계에 대한 낭만적인 동경을 언제나 표명하면서도 소박한 실재론자이기도 한 잉골드는 좋든 나쁘든 인간일 수밖에 없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세계를 움직이는 흐름으로 지각하기 위한 도구적인 방책을 다음과 같이 찾아낸다.

 

이것들의 차시성(此是性, haecceitas)은 우리가 지각하는 무엇이 아니다(what we perceive). 왜냐하면 유동공간의 세계에 지각의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함께 지각하는 무엇이다(what we perceive with). 요컨대 환경을 지각하는 것은 세계에서 발견될 수 있는 사물을 회고하는 것도, 고정화된 형태나 배치를 식별하는 것도 아니며, 그 사물들의—그리고 우리의—진행 중에 형성에 기여하는 물질의 흐름이나 운동에서 그 사물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 (『Being Alive』88쪽)

 

차시성(haecceitas)은 들뢰즈의 개념인데, 여기서 잉골드는 삶을 직조하는 선 더미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what we perceive와 what we perceive with의 대비다. 그는 이를 통해 드러나는 ‘대상화하지 않음’으로서 삶의 유동을 다루고, 유동과 일체화하는 행동을 중심으로 ‘선을 그리는 방법’에 관한 논의를 전개한다.

 

 

3. 물질에 따르다.

 

‘살아있는 것’을 역동적ㆍ창조적인 흐름으로 다루는 많은 사상가들은 살아있는 것의 발상 형태를 미개사회의 문화, 생명세계, 그리고 예술 속에서 찾아내었다. 들뢰즈&가타리,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베이트슨과 함께 잉골드 또한 이 사상적인 경향을 공유하고 있다. Being Alive의 마지막 파트, 제5부에서 “선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으로 그는 장인이나 예술가를 모델로 한 드로잉론을 제기한다. 이 논의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잉골드가 선 그리기를 단순한 은유로서 혹은 추상적인 모델로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인 우리가 유기적인 신체를 사용해서 능동적으로 선을 그려간다는 것을 우직하게 추구한다는 점이다.

 

잉골드에 따르면, 살아있는 것은 스스로 선을 그린다. 이는 다만 걸으면서 남은 흔적이 선이 된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제16장에서는 중세의 사본화가, 애버리지니(Aborigine, 오스트레일리아의 선주민)의 예술, 그리고 칸딘스키의 화법(畫法)을 사례로, 그림 그리기가 화가의 머릿속의 표상을 물질세계로 투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과 세계를 진행시키는 하나의 움직임으로 묶이는 것임을 논증한다. 그리고 제17장에서는 화가, 건축가, 장인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기’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이제까지와 동일한 논리로 전개해간다. 비활성의 물질세계에 이미지를 투영한다는 모델을 아리스토텔레스 기원의 질료ㆍ형상 개념을 사례로 비판한 다음, ‘만들기’란 “운동 상태에 있는 세계의 살결(texture)을 찾아내어서 그 전개를 덧그림과 함께 발전해가는 어떤 목적에 부합시키면서 그 흐름을 이끄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이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앞서도 서술했던 “이러한 흐름으로서의 물질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테제가 인용된다.

 

제17장에서는 본래 작품의 완성 모습, 대상으로 간주하는 관점으로부터 그 이미지를 소급하여 작가라는 행위주체성(agency)의 내적 표상과 의도를 파악한다는 유추를 ‘가설적 추론’(abduction)을 통해 비판한다.

 

예술작품은 대상(object)이 아니라 사물(thing)이다. 예술가를 포함하여 모든 창작인의 역할은 그것이 참신할 수 있다고 사전에 마음속에 품은 아이디어를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작품의 형태를 만드는 소재의 힘과 흐름에 합체하며 그것에 따르는 것이다. 작품은 관람자를 예술가의 여정으로 안내한다. 관람자는 작품이 세계에 전개하는 모습을 작품과 함께 보는 것이며(to look with it as it unfolds in the world), 그 배후에 작품이라는 최종형태를 일으킨 원래의 의도를 독해하는 것이 아니다. (『Being Alive』216쪽)

 

어떻게 ‘보는/관람하는’ 것이어야 할까? 코유콘족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며 장인전문가나 예술가도 아닌 우리가 ‘선 그리기’ 전에 미리 이 관점의 전환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인가? 앞 절의 마지막에서도 확인했다시피 우선은 ‘대상’(object)으로서 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unfold라는 말에서 표현되듯이 작품이 세계에 전개하는 열려진 모습을 그에 수반하는 방식으로 보아야 한다.

 

이 unfold라는 말이 염두에 두는 것은 물리학자인 데이비드 봄의 논의다. 봄은 유동하는 세계의 조직을 이루는 관계성 전체가 직조되면서 은폐된 질서가 전개되는(unfold) 세계를 내장질서(implicate order)로 부르고, 표상된(imagined) 질서가 전개된 세계를 외장질서(explicate order)로 부른다. 그리고 물리학이 내장질서를 기술하고자 한다면, 항상 실제의 양자(量子)의 움직임을 이해하면서 손상시킨다는 점을 봄은 지적한다. 봄은 관찰자를 포함한 운동 전체를 기술하는 방법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잉골드는 봄과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잉골드는 사물의 묘사(description)를 논할 때 봄의 두 질서의 대비를 사용한다. 내장질서와 외장질서는 단지 대립적으로 다뤄져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드러나지 않는 내장질서를 다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잉골드는 말한다. 우리가 주시하는 어떤 현상에도 그 속에는 관계성 전체가 직조되어 있다고. 본래 현상이란 관계성 전체가 전개할 때 그 전개의 순간적인 결과다. 따라서 어떤 현상 속에서도 이 내장질서를 알 수 있는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

 

결국 잉골드는 유동하는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지를 논한다. 대상으로서 보지 않고 그 전개에 수반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말이지만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관찰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관점은 관찰자적으로 맹목적인 것이라고 잉골드는 단언한다. 이러한 관찰방법을 저지하는 방법으로서 잉골드가 제안한 것이 바로 ‘소묘하기’(drawing)다. 그리기 전에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묘사함으로써 보는 것이다. 잉골드는 여기서 옥외에서 풍경화를 그리는 사생 화가를 예로 든다. 화가가 이젤을 세우고 옥외에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화가는 자신이 지각하는 것을 캔버스 위에 선으로 그린다. 화가는 자신이 지각하는 너무나도 풍부한 세계, 그리고 시시각각 변하는 세계와 마주하여 그것들을 캔버스 속에 종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부분적인 이미지의 단편을 종합함으로써 실현되지 않는다. 앞서 제17장의 요약에서 다루었듯이 바로 이 세계를 조성하는 무기물과 유기물을 포함한 복수의 존재자들에 의해 생겨나는 운동을 묶어내야만 실현될 수 있다. 나아가 매우 구체적이기 때문에 유머러스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잉골드는 객관적으로 관찰하지 않기 위해서는 ‘곁눈질’로 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대화(dialogue)에 참가하는 태도에 뿌리박힌 상대적인 태도(comparative attitude)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풍경을 드로잉하는 화가의 눈의 지각과 손의 움직임, 그리고 손의 그 움직임의 흔적은 그대로 캔버스 위에 선으로 남겨진다. 이러한 그리기 방식은 보는 것을 대상화한, 즉 전치사 of의 관계가 아니라 with 혹은 along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것은 소묘하는 화가가 붓이나 목탄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옥외의 빛과 공기와 호흡하며 종종 자세를 바꿔가면서 손과 팔목 등의 자기 자신의 신체 전체의 움직임을 조정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풍경을 사생하는 화가는 바로 복수의 유동하는 것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것들과 더불어 호흡하는 자신의 신체를 조정하면서 소묘한다. 여기서 행해지는 조정은 이미 손의 움직임으로 나타나고 캔버스 위의 선으로 그대로 반영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묘사(description)와 관찰(observation)은 분리될 수 없는 일체화의 상황에 놓인다고 잉골드는 말한다.

 

이와 같이 잉골드의 논의에 의하면, 선으로 그리는/소묘하는 드로잉(drawing)이라는 세계에 대한 태도에 의해 움직이는 흐름의 세계를 따라가다 보면 ‘보는 것’과 ‘그리는 것’의 양자가 일거에 실현된다. 잉골드에게는 이러한 관찰과 기술의 실천이야말로 인류학(anthropology)에 다름 아니다. 다양한 예외적인 사례와 이질적인 것을 사상해서 일반화하여 법칙을 세우는 자연과학과는 대조적으로, 또 현장으로부터 퇴각하려는 이른바 안락의자의 철학자들과는 달리, 오히려 ‘이질적인 것’(the unfamiliar)에 더욱 근접해서 그것을 이질적인 그대로 묶어나가며 “이 세계에서 인간의 삶의 조건과 가능성”을 탐구하는 철학, 그것이 잉골드가 제창하는 인류학이다. 그러나 본고의 서두에서 논했다시피 인류학이 서구적 사고 혹은 근대 과학적 사고에 억압된 우리의 삶을 적절하게 고쳐나가는 기술이라면 바로 이것이 잉골드가 말하는 ‘도주선을 그리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당장 눈앞에 있는 것을 소묘하는 태도로 살펴보자. 분명 새롭게 ‘보일’ 것이다. 즉 그것은 바라보는 것도 아니며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것도 아니고 전혀 다른 ‘보임’이다. 이 ‘보임’ 속에서 삶의 움직임의 모든 것은 도주선이 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잉골드가 상정하는 존재론에서 살아있는 것들과 움직이는 것들은 모두 도주선을 달리고 있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반복적으로 확인했던 서구적 존재론, 물질관, 세계관에 의해 그리고 그것들에 기초한 제도들에 의해 삶의 역동성이 억압되어 왔다. 예를 들어 차보다 달리기가 좋다, 키보드보다 필기가 좋다는 잉골드의 지적은 삶을 회복하기 위해 알기 쉽게 설명하는 처방전과 같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바로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 속에 우리를 맹목적으로 만드는 다양한 사고와 습관에서 재빨리 빠져나가는 ‘선’을 그리는 것이다. 단지 내일부터 차를 타지 않겠다거나 컴퓨터를 버리겠다거나 하는 이외에도 적극적인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이 방법의 전개는 잉골드의 텍스트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Being Alive』의 제13장 ‘분류에 대항하는 이야기’(Stories against classification)에서 ‘지식’(knowledge)에서 제기하는 문제를 다뤄보자. 이 문제의 도식은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지식을 실체화하고 공정하게 다루는 관점 대신 운동으로서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잉골드는 전달이나 학습을 독립적인 지식을 운반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소위 ‘운송’ 모델을 비판한다. 여기서 잉골드가 염두에 두는 것은 문화의 전달뿐만 아니라 유전자의 전달도 포함하며, 그 어느 쪽도 어떤 정보가 개체로부터 개체로 수직적으로 ‘운송’된다는 계보학 모델이 채용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 계보학 모델은 분류라는 사고방식을 전제로 하며 분류 또한 지식이 개별적으로 분할되어 독립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유전자를 예로 들어보면, 눈 모양의 유전자, 머리털 색깔의 유전자로 분할되어 분류된다. 이러한 지식을 분할ㆍ독립을 통해 다루는 이해에 대해 잉골드는 ‘이야기하기’(story-telling)를 대안으로서 제시한다. 분류에서 개개의 사상은 기능이나 그 밖의 것과의 접촉에서 영향을 받지 않는 성질에 의해 ‘무언가’가 결정된다. 그러나 이야기에서는 모든 것이 ‘무언가를 하는’ 것에 의해 ‘무언가’가 제시되며, 그 이야기에서 말해진 것들과의 관계만으로는 그것이 ‘무언가’인지를 알 수 없다. 잉골드는 여기서 다시금 봄을 가지고 와 분류를 외장질서에, 이야기를 내장질서에 대응시킨다.

 

이러한 이야기에 의한 지식의 전달은 ‘운송’이 아니다. 이야기된 지식은 실제로 그 청자들의 나아감에 의해 비로소 전달된다. 잉골드는 이러한 이야기에서의 지식의 전달을 ‘운송’(transport)과 대비하여 ‘도주여행’(wayfaring)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우리는 지식을 계보학적 모델을 따라 선조의 유산으로서 개개가 소유하게 되는 유전적인 성질과 같은 부류로 간주할 수 없다. 분명 숙련자는 미숙련자보다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차이는 머릿속에 담긴 학습된 표상의 증가로서의 내적 내용물의 축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환경에 있는 단서를 보다 잘 포착하는 감수성과 판단과 정직함에 기초하여 이용 가능한 단서에 보다 잘 반응할 수 있는 우수한 자질에 있다. 말하자면 이 차이는 얼마만큼 알고 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알고 있는가에 있다. 잘 알고 있는 자는 말할(tell) 수 있다. 그들이 세계의 서사를 상세하게 말할 수 있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변에 있는 자들의 지각적 깨달음을 상황에 맞게 조정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아는 것은 주위의 세계와 관계를 가지는 것이며 알면 알수록 지각의 깊이와 명확함이 더욱 확장된다. 요컨대 말하기는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뒤에서 잘 따라올 수 있도록 경로를 그리는 것이다. … 대체로 이야기는 의미가 새롭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각각의 사람들에게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가 의미하는 것은 오히려 듣는 쪽이 자신의 삶의 역사의 맥락 속에 그 이야기를 위치짓는 것을 통해 스스로 발견해내는 것이다. 실제로 이야기의 의미가 명확해지는 것은 말해진 다음일 수 있다. 그때 당신 자신은 이야기가 관계하는 것과 똑같은 경로를 따르고 있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때에 비로소 이야기는 사물이 어떻게 진행되는가에 대한 경로를 알려준다. 분명 볼로시노프(Volosinov)가 언어에 대해 논한 것처럼 사람들은 사건의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안내받은 재발견”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과정을 통해 그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이 프로세스는 지형을 통해 흔적을 더듬게 된다. (『Being Alive』162쪽)

 

이야기하기가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그 뒤를 더듬을 수 있는 길을 그려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삶의 흐름이 수반하는 다양한 삶의 행동 또한 말해짐에 의해 이미 도주선에 들어선 것이며 게다가 다른 자들을 안내할 수 있는 여행의 길에 들어선 것이 아닐까? 잉골드는 자신의 사례들에 입각해서 그것은 산보이기도 하며 연날리기이고 하다고 말한다. 어떤 일상적인 행동 또한 이러한 도주선의 길에 수반하여 합류하게 된다. 지금까지 여러 번 확인한 것처럼, 다양한 사물들이 뒤얽혀 살아가는 세계의 흐름에 시선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동물처럼 방심할 수는 없다. 또 숙련된 장인처럼 지금 당장 살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시선을 획득할 수 있을 수는 있다. 앞서의 인용에서 잉골드가 ‘아는 것’을 지각의 명료함과 깊이와 결부시켰듯이, 또 이제까지 여러 번 확인했듯이, 우리는 세계 이해에 대한 습관화된 착오를 그 때마다 정정할 수 있도록 세계의 대상화하지 않는 지각방식을 무엇보다도 학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지각의 훈련 또한 ‘선 그리기’라는 태도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에 우리는 우선 세계 속에 선을 그리기 시작해야 한다.

 

 

4. 착지하는 도주선

 

지식이란 타자들이 더듬을 수 있는 길이며 그것이 이야기됨에 따라 타자들을 안내하고 또 그 안내에 따르는 타자들에게 실질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Being Alive』의 다른 장들의 내용과 합치해서 사고할 때에 더욱 의미가 깊어진다. 우리는 이 책 속에서 미개사회의 문화, 자연현상, 예술, 공예, 건축과 같은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살아가는 것’의 흔적인 도주선과 만날 수 있다. 또한 잉골드 스스로가 이 도주선을 더듬어 찾아내고 나아가 다양한 우리의 사고의 제약에서 빠져나오면서 도주선을 그리는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잉골드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우리에게 도주선의 길을 안내해준다.

 

잉골드의 ‘도주선’ 해석은 들뢰즈&가타리가 가진 마이너 지향을 불식시킨 결과,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어떤 부류의 회고적인 보수주의로 받아들여질 수 있고 사상적으로는 생명을 절대시하는 낙관적인 낭만주의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잉골드의 ‘도주선’ 해석의 의의는 이 지구에서, 이 스케일에서, 이 신체에서, 이 중력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인간의 입장에 철저하게 입각하여 그러한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실천 가능한 방식이 무엇인지를 말한다는 점에 있다. 그 의미에서 잉골드의 ‘선’을 둘러싼 논의는 들뢰즈&가타리와 같이 사회적 규범을 돌파해가는 경쾌함을 결여한다 해도, 일상적으로 당연한 듯이 살아가는 경험을 심화시키기 위해서 바로 그러한 경험의 깊이 속으로 바람구멍을 내기 위한 유효한 도구를 풍부하게 지시하고 있다는 것이 현 시점에서 나의 생각이다.

 

 

 

柳澤田美 「どのように線を描けばよいのか」 『現代思想』 2017年3月臨時増刊号.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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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 2017년 3월 임시증간호에서 '인류학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최근 인류학의 이론적 동향과 현대철학과 교차되는 지점들을 다루고 있다. 1년전 『현대사상』에서 '인류학의 행방'이라는 주제로 다뤘던 권호보다 훨씬 내용이 깊다. 그 사이에도 이론적으로 상당히 진척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호에서 재밌는 글들을 골라 번역해올리겠다. 

 

다음의 글은 실재론과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가 상통하는 측면으로서 "비홀리즘적 전회"를 논하고 있다. 이 글은 그 둘의 가교로서 메릴린 스트래선의 이론을 가져오는데, 가교의 내용도 그렇거니와 난해한 스트래선의 문화이론 자체가 잘 정리되어 있어서, 존재론적 전회를 공부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학자 중 한 사람인 스트래선의 소개글로도 의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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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ㆍ홀리즘적 전회: 인류학에서 현대철학으로

 

 

시미즈 타카시(清水高志)

 

 

 

2016년 11월, 〈사물 그 자체—오늘날의 형이상학과 실재론〉(Choses en soi: Métaphysique et réalisme aujourd’hui)이라는 제목의 학술회의가 엠마누엘 알로아(Emmanuel Alloa)와 엘리 듀링(Elie During)의 주관 하에 파리 서낭테르(西Nanterre) 대학에서 개최되었다. 퀑탱 메이야수, 레이 브라시에(Ray Brassier), 패트리스 마니글리에(Patrice Maniglier),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 등 쟁쟁한 학자들이 참가한 이 모임이 어떠했는지를 말하기에는 현시점에서 정보가 충분치 않다.

 

그러나 공식사이트에 게재한 취지문에 “어떤 이들은 사물의 상호객체성을 이론화하여 새로운 코스몰로지의 길을 열고자 노력하고, 다른 이들은 이를테면 <다자연주의>의 퍼스펙티브와 함께 민족지 혹은 문화인류학에서 착상을 얻고 있다”고 한 것처럼, 사물 그 자체에 접근하고자 하는 철학의 21세기의 경향과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다. 2007년 영국의 골드스미스컬리지(Goldsmiths college)에서 열린 학술회의가 사변적실재론의 조류의 시작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이후 사변적실재론으로 세상의 이목을 모았던 브라시에와 메이야수의 이름이 있는 반면 하만과 그랜트의 이름이 없고 그 대신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와 마니글리에라는 인류학자 혹은 인류학과 깊은 관련이 있는 철학자의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포스트구조주의를 넘어서 철학을 갱신하고자 하는 운동을 앵글로색슨권으로부터 프랑스로 옮기려는 의도를 가진 모임이었음은 분명하다.

 

하만과 인류학자이자 철학자인 라투르는 종종 공저를 발표했는데,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가 하만 주변과 적극적으로 손을 맞잡았다거나 의견교환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없다. 그리고 알로아와 듀링이 공동주관한 이 학술회의는 바로 이러한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필자는 2015년에 듀링 씨를 자택으로 초대하여 건축가인 카라사와 유우스케(柄沢祐輔)와 함께 약 네 시간에 걸쳐 환담을 나누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복수의 존재론(ontology)를 다루는 인류학의 최근 경향에 대해 전통적인 철학교육을 받은 한 사람으로서 차분하지 않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동향을 적극적으로 흡수하고자 할뿐만 아니라 현대사상의 갱신이라는 기획을 둘러싸고 앵글로색슨권이 선취한 정세를 뒤집을 유력한 지원군으로서 인류학의 온톨로지를 받아들이려는 것이다.

 

2007년에 열린 학술회의는 결과적으로 영미와 유럽대륙이라는 서로 다른 지역의 사상운동의 콘트라스트를 만들어냈지만, 이번 프랑스에서는 <포스트구조주의 이후>의 방향성에 대해 동시대를 대표하는 여러 영역의 우수한 학자들에 의해 확인받고자 했다는 것이 괄목할 만하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포스트구조주의가 개화한 바로 그 곳에서 새로운 세대가 낡은 사조를 청산하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어떤 의미에서 현대 철학은 전회를 하려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며 홀리즘을 어떻게 초극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접근법으로 오늘날의 사상을 다양하게 모색하려는 것이다. 인류학이 현대사상에 제시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홀리즘을 극복하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비베이로스의 퍼스펙티브주의, 복수의 대립적인 이항 조합과 그 변화에 의해 형성되는 데스콜라의 네 유형, 그 자체의 역할을 변환하여 집단과 개인, 전체와 부분, 객체와 주체의 위치를 가환(可換)하는 다양한 ‘도구’에 관한 스트래선의 민족지 등은 모두 대립적인 이항 속에서 상호 위치의 교체가 반복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공통항으로 부상해온 이 경향이 포스트구조주의까지의 방법론과 비교하면 과연 얼마나 다르며 그리고 왜 그것이 유망한가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은 아직까지 충분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 본고에서는 그러한 측면에서 이론상의 분석을 시도하며, 그와 더불어 작년 『현대사상』의 인류학특집(「인류학의 행방」)에서 검토한 미셸 세르(Michel Serres)의 최근사상인 간(幹)-형이상학(Métaphisique souche)이라는 구상도 다른 관점에서 조명해보고자 한다.

 

 

 

1. 홀리즘을 탈구시키다

 

먼저 오늘날의 영국을 대표하는 인류학자의 한 사람인 메릴린 스트래선을 예로 들어보자. 그의 저작인 『부분적인 연결』(Partial Connections)이 제시하는 것은 전체성과 부분의 관계의 변경이다. 특히 민족지 연구에서 어떤 집단이나 요소들의 집합이 ‘부분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것을 넘어서 포섭하는 전체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게 된 것이 아니라 부분들의 연결에 의한 것임을 이 책에서 그녀는 밝히고 있다. 이것은 바꿔 말하면 부분을 '부분적인' 것으로 만드는 요소 간에 일방향적인 위계(hierarchy)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트래선에 의하면, 민족지의 대상은 조사의 스케일이 작든 크든 마찬가지의 치밀함과 복잡함을 가질 수 있다.

 

통문화적인 비교에 관심이 있는 인류학자가 스케일 혹은 스케일 상의 몇몇 지점에서 [그 때마다] 상이한 레벨을 그 혹은 그녀의 도식에 도입할 수 있는 것은 비교나 차이화를 상대적으로 억압하기 때문이다. 즉 상대적인 의미에서 파푸아뉴기니의 사회들에서 하겐과 기미의 차이는 고지대와 저지대의 차이나 멜라네시아와 폴리네시아의 차이와 똑같이 중요하다.

 

복수의 문화를 횡단하는 비교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은 차이화와 비교 그 자체의 ‘상대적인 억압’ 때문이기도 하다고 스트래선은 말한다. —문화들의 차이를 표면화시키기 위해서는 그 문화들에 얽힌 정보를 증가시킬 필요가 있는데, 무제한적으로 증가시키는 것은 오히려 각각의 문화의 특징 그 자체를 흐릿하게 만들 수 있다. 여하간 어떤 억압 하에서 그것들을 조망해야 하며, 그에 의해 치밀한 비교도 가능하다. 따라서 예를 들어 하겐과 기미라는 뉴기니의 지역들 간의 비교가 멜라네시아와 폴리네시아와 같은 큰 지역 간의 비교보다 단순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그 유명한 ‘칸토어의 먼지’처럼 작은 스케일의 대상도 큰 스케일의 대상과 마찬가지로 치밀함과 농밀함을 가질 수 있다. 그 지역들은 아무리 세분화된다 해도 전체이며 부분은 그 자체 또한 전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부분과 전체의 관계에 대해서는 우선 소박하게 생각하면 부분의 총화로서 전체가 구성된다는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이미 발견되는 부분의 구성물로 전체를 환원해버리는 발상이다. 이에 반해 전체가 부분들을 뛰어넘는 순간 비로소 전체의 부분들이 성립된다는 입장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홀리즘적인 전체를 전제로 하는 세계관이라고 불러야 한다. 예를 들어 “뒤늦게 출발한 아킬레스는 앞서 출발한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역설에서 지속하는 전체여야 하는 아킬레스의 운동을 공간의 부분들의 총합으로 환원해서 생각하는 것이 이 패러독스의 원인이라고 할 때, 패러독스가 염두에 두는 것은 이러한 <환원 불가능한 전체>로서의 지속=전체다.

 

이때 전체와 부분은 대립적인 것으로 간주되는데, 그 한편으로 지속=전체가 있다는 것에서 부분들이 산출된다. 패러독스를 예로 들면, 부분들끼리는 거꾸로 선 원추형의 각 절단면마다 축약의 정도를 바꿔가며 병존하고 있으며, 그것들을 분화시키는 역동성은 어디까지나 지속=전체에 의해 이끌린다. 전체와 부분은 상호 배반하며 배반하기 때문에 상호 성립하고 생성된다. 홀리즘은 이러한 양극의 차이를 끝까지 중시하는 입장이다.

 

『차이와 반복』(Difference et Répétiton)에서 들뢰즈 또한 베르그송으로부터 영향을 강하게 받아 알랭 바디우가 지적했다시피 이러한 홀리즘의 경향을 강하게 띠고 있다. 이러한 홀리즘적인 경향에 대해서 그는 말년에 라캉이론을 도입한다거나 과타리와 제휴해서 탈각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홀리즘을 기피할 목적으로 이론을 모색하면서 전체와 부분을 배반적이지 않도록 다루는 방법론을 확립하지는 않았다. 이에 반해 현재 존재론적 전회를 제기하는 인류학에서 전체와 부분, 부분과 부분의 관계 그 자체를 직접 재고함으로써 홀리즘을 무효화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게다가 그것은, 이를테면 스트래선처럼 인류학에서 포스트모던 비평(포스트콜로니얼 비평)에 대한 반론이라는 형태로 매우 명료하면서 자각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2. ‘봉지에 넣기’(Ensachage)로서의 세계

 

그러한 문제의식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부분적인 연결』에서 스트래선은 앞서 서술한 것처럼 민족지의 소재가 스케일의 크기와 상관없이 치밀한 농도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본래 ‘부분들을 넘어서는 원인으로서의 전체’라는 논점을 처음부터 무시한 것이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 대해 후자가 전자로 포섭되는 관계로 다루는 서양적 및 메레올로지(Mereology)적인 전체/부분관계에 대해 스트래선은 메로그래픽(Merographic)한 관계를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일(一)과 이(二)의 관계에 대해 이(二)에 일(一)이 포섭되어 이(二)가 분할됨으로써 일(一)이 생겨난다는 사고에는 계층성이 있지만, “일(一)은 그 두 배가 된 이(二)를 포함한 것이며, 이(二)는 이(二)의 반인 일(一)을 분할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각각의 측면에서 ‘상호 부분으로서의 관계’ 또한 통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족지 연구에서는 그 대상의 “어느 쪽을 어느 쪽의 부분으로 보는가?”라는 퍼스펙티브의 상호 전환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이 전환이 이뤄질 때, 어느 한 부분과 다른 한 부분은 각각 상호포섭적으로 된다.

 

상호포섭이라는 관점에 대해서는 의료인류학 분야에서 행위자 네트워크이론(ANT)을 효과적으로 응용하고 있는 안네마리에 몰(Annemarie Mol)에게서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다(多)로서의 신체 The Body multiple』). 라투르가 ANT를 이론화하면서 참조한 미셸 세르는 무엇보다 이 상호포섭이라는 관점에서 몰에 시사점을 던져준 것 같다. 본래 세르의 강의 수강자이기도 했던 몰이 세르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본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포섭관계의 개념의 극복이라는 주제다. 몰은 여기서 ‘상자에 넣기’(Emboîtement)와 ‘봉지에 넣기’(Ensachage)에 관한 유명한 세르의 비유를 가지고 들어온다.

 

세르는 우리의 사고에 시사점을 던져주는 단순한 객체물(Things)을 즐겨 주시한다. (중략) 그가 언급하는 객체 중 하나는 상자다. 우리는 대체로 객체를 추이적(transitive)으로 상호 관여하는 고형의 상자와 같은 것으로 다룬다. 어느 한 상자가 다른 상자보다 큰지 작은지를 묻는다. 그리고 만약 상자가 크다면 그보다 작은 상자를 그 안에 집어넣을 수 있고 만약 상자가 작다면 그보다 큰 상자 속에 집어넣을 수 있다.

 

세르는 이러한 추이적(transitive)인 포섭관계를 마트료시카(Matryoshka)[러시아목제인형]의 겹쳐 쌓이는 상태라고도 말하는데, 여기에는 당연히 부분과 그것을 포함하는 더 큰 전체와의 비가역적인 관계가 있다. 나아가 이것은 포섭적인 큰 것에서 더 작은 것이 단계적으로 분기해가는 수목형의 구조이기도 하다. 이 모델에서 포섭적인 큰 것은 더 작은 부분적인 것을 병존적으로 연결하는 매체가 되며 부분적인 것은 비가역적인 계층을 거슬러 분기해간다. 서구의 전통적인 사고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론을 답습한, 하나인 것 곧 Ens로부터 세계가 뻗어나가는 과정을 그려낸 ‘포르피리오스의 나무’ 등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듯이, 이러한 의미에서 큰 것 혹은 전체가 실체의 개념과 결부되는 경향이 강하고 또 그 속에서 전체와 부분의 배반적인 역할분담이 끝없이 지속되면서 분류가 이뤄진다. 이때 이러한 배반성을 동적인 과정으로 다루어 전체 쪽이 그 이항성의 표지를 달아주고 갱신하는 동인(動因)이 되어 다양한 부분이 분기해간다는 바로 그 생각이 앞서 서술한 홀리즘이다.

 

이 구조에서 부분과 부분은 상호 괴리해가는 관계에 있으며, 그 속에 포함된 개별적인 것은 전체로서의 보편적인 것에 대해 어디까지나 배반적으로 뒷걸음쳐갈 뿐이다. 이에 대해 부분과 부분, 부분과 전체가 서로 만나 또 서로 역할을 바꿔가며 서로를 부분으로 포함해서 합쳐지는 상황(메로그래픽으로 상호포섭적인 국면)이 있다고 한다면, 다양한 개별적인 것 속에도 매체적인 기능이 존재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매체가 있다면, 그것은 문자 그대로 개물(個物), 개별적인 것으로서의 사물일 것이다. 홀리즘적인 사고에서 실체화되는 어떤 것과 달리, 이러한 매체=사물을 전면에 등장시키려는 것이 스트래선이나 몰이 가진 것과 같은 오늘날의 인류학의 문제의식이다.

 

다음으로 앞서 서술한 마트료시카적인 구조(추이적인 관계)에 대해 세르가 제시한 <봉지>의 이미지를 살펴보자. 예를 들어 파란 봉지 안에 노란 봉지를 집어넣었다 해도 그 노랑 봉지를 꺼내어 펴보면 이번에는 역으로 파란 봉지를 그 안에 집어넣을 수 있다. 이러한 상호적 포섭으로 세계를 생각하는 것. —물론 추이적인 관계가 있어서 좋다. 추이적인 관계를 집어넣듯이 ‘전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 바로 여기에서 비홀리즘적인 발상이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매체가 서로를 <봉지에 넣기>로 포섭할 때, 포섭된 부분들로서의 봉지는 주름처럼 접힌다. 세르의 <봉지에 넣기>에는 물론 모나돌로지(monadologie, 單子論)적인 다원론의 함의가 있는데, 그것과 연결되는 부분이나 매체는 각각에 개별적인 것으로, 전체로 향하는 비가역적이고 추이적인 과정에 있음을 전제하지 않는다.

 

 

 

3. 복수의 매체와 비(非)ㆍ홀리즘

 

이러한 대상의 모델만을 예로 들면, 부분이나 매체가 각기 다른 양태로 나타남으로써 서로 연결되어 느슨하게 전체를 형성해가는 구조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평이한 이미지를 제공할 뿐이다. 그리고 본래 위계를 형성하지 않는 상대주의적인 관점은 포스트모던 사상에서 이미 호되게 비판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포섭이나 스케일의 문제가 스트래선에게 어떻게 포스트콜로니얼 비평과 ‘성찰 인류학’(reflective anthropology)에 대한 비판과 결부되는지를 보다 상세하게 살펴보면 차이는 더 명확해진다. 스트래선에 의하면, 포스트모던 인류학인 ‘성찰 인류학’은 그 진지함으로 인해 민족지를 어디까지나 단편적이고 미완결적인 것으로 제시해왔다(「세계시스템의 단편화」로 이어져왔다). 그 속에서 특권적인 화자로서 ‘현장연구자’가 일방적으로 이문화(異文化)를 대변한다는 구래의 접근법은 벌써 폐기되었다. ‘성찰 인류학’의 화자는 ‘이문화’를 여행하는 중에 무언가의 변화를 꿈꾸고 ‘그 자신의’ 사회로 귀환하는 ‘여행자’이며, 이 ‘여행자’를 통해 복수의 문화가 중층화된다. 문화들을 단편화하며 다양한 부분들로 만드는 것은 그것들을 줄줄이 엮는 이 ‘여행자’의 존재인 것이다.

 

‘여행자’는 어떤 문화의 특권적인 ‘대변자’일 수 없는 만큼, 그 부분들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매체다. 특권적인 대변자=화자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문화들을 중층화시켜 다뤄야만 한다는 이 발상은 ‘작가의 죽음’을 말하는 포스트모던 이후의 텍스트론과도 상통하며, 그 민족지가 미완결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해석에 대해 텍스트가 열려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특정한 부분으로서의 문화들로부터 떨어져나가 순수한 매체가 된 ‘여행자’는 부분들을 산출하기 위해 부분들과 배반적이어야 하는 특별하고 유일한 매체며 실제로 바로 그것이 앞서 서술한 홀리즘에서의 전체=매체다. ‘여행자’는 확실히 어떤 부분=문화의 대변자라는 의미에서 익명화된 플랫의 존재인데, 그 자신을 부분들과는 완전히 이질적인 것으로서 정립하면서 문화들을 단편해가는 유일한 주체다. 그리고 또 ‘여행자’와 문화들 사이에는 배반적이고 비가역적인 관계, 추이적인 관계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 스트래선이 시도한 것은 문화들이 서로에게 부분적인 것으로 연결되는 매체 그 자체를 이러한 ‘유일한 주체’로 다루지 않는 방법론이다. 이를 위해 그녀가 주목한 것은 어떤 문화집단을 연결하면서 다른 문화집단과도 부분적으로 연결될 정도로 상이한 대상적인 매체=사물이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도구나 사물은 피리, 가방, 가면, 가발 등이며, 때로는 특정한 의례이기도 하다. 이러한 도구=사물이 부분적인 연결이 되는 것은 그에 대해 어느 한 부족이 갖는 특유의 의미가 다른 부족과는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하겐의 남자들이 오락으로 부는 피리는 다른 곳에서는 남자들의 오두막 안에 자루에 담겨있거나 소년 입사자들을 위압하는 도구인 성스러운 기다란 악기로 다뤄진다. 조심스럽게 말해도 연결은 부분적이다. 연결이 부분적인 것은 피리의 사용법에 [일관된] 접근법을 만들기 위한 기축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환기해야 할까? 위압에 사용되는 피리의 유비물을 하겐의 남자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설득을 위한 말 속에서 찾아내야 할까? 하겐의 오락을 위한 악기의 유비물을 기미의 소문이나 농담 속에서 찾아내야 할까?

 

매체로서 사물=도구는 복수의 문화를 연결하면서도 그 문화들에서 각기 다른 의미를 부여받으며, 그 용도나 의미부여에는 일관된 접근법이 성립하지 않는다. —어느 한 부족에서 오락을 위해 부는 피리가 다른 부족에서는 소년들을 위압하는 도구가 되는 것처럼. 그 속에서 그들은 서로의 사물=도구를 빈번하게 차용한다.

 

다양한 부족들을 듬성듬성 연결하는 이러한 사물=도구는 각각의 사회집단에서 각기 다른 역할을 맡는 사물=도구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각기 다른 다양한 사물=도구가 그러한 기능을 맡게 된다. 재귀인류학에서 ‘여행자’라는 주체가 결여태로서 홀리즘의 불변의 역할을 맡았음을 생각해보면,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4. 사물=도구와 배치(도)의 교차교환

 

앞서 서술한 것처럼 스트래선이 주목한 것은 무엇보다 사회적인 역할을 가진 사물=도구며 그로부터 사람들이 분명하게 만들어내는 관계들 그 자체다. 또 그러한 관계들을 알리기 위한 연행(performance)도 그것들을 둘러싸고 행해진다. 이러한 관계들과 연행에 대해 스트래선은 지도(figure) 혹은 이미지로 말하는데, 이러한 이미지는 적극적 및 연쇄적으로 점차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내며 생성해나간다. 이 이미지의 반전은 한 이미지를 지면으로 삼으면서 그로부터 다른 이미지, 즉 지도가 “떼어내지”듯이 만들어진다. 이 속에서 지면과 지도의 역할은 끊임없이 반전된다.

 

지도(figure)와 지면(ground)의 반전에 의해 지면이 잠재적인 지도가 되기 때문에, 이 반전의 움직임은 지면에서 “떼어내진” 지도가 지면에 덧붙여진 지도가 아님을 당연히 드러낸다. 그러나 물론 그 지도들이 단편인 탓도 아니고 그 속에 부분과 전체의 관계가 있는 탓도 아니다. 오히려 지도와 지면은 두 차원으로 기능한다. 그것들은 스케일을 스스로 만들어낸다(self-scaling). 본래 두 퍼스펙티브가 아니고, 지면은 또 하나의 지도이며 지도는 또 하나의 지면이기도 한 것처럼 하나의 퍼스펙티브가 두 갈래로 조망되는 것이다. 다른 쪽에 대한 관계에서는 어느 쪽도 바꾸지 않고 행동하기 때문에, 이 차원들이 전체화되도록 구성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도구=사물은 그것을 둘러싼 관계들의 배치(도) 곧 이미지를 스스로 가진다는 것인데, 이에 기초하여 다른 관계들의 배치(도)가 새롭게 만들어진다. 사물=도구에는 이러한 배치(도)가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지도는 다양한 사물=도구를 관계짓고 결부시키는 매체지만 동시에 사물=도구는 상이한 배치가 겹쳐 만나는 매체가 되기도 한다.

 

어느 한 배치(도)로부터 다른 배치(도)가 산출될 때 맨 처음의 배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맡은 사물=도구는 종종 주변적인 역할에 놓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이한 복수의 배치를 결부시키는 매체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그 사물=도구이다. 다양한 배치로 회수되지 않는 사물=도구의 선재성(先在性)이 새로운 배치(지도, 이미지)가 차례차례로 만들어지는 국면에서 이렇게 노출된다.

 

지도가 다른 지도의 부분(단편)으로서 회수되어 가는 추이적인 전체화에서는 다만 지도만이 포섭적인 매체로 상정된다. 이것은 관계주의적인 홀리즘으로 불릴 수 있다. 또 한 사물=도구에 다양한 배치가 단지 덧붙여지기만 한다면, 그 경우는 사물=도구만이 매체가 된다. 이것은 페티시적인 홀리즘으로 불릴 수 있다. 이것들은 부분들의 관계와 그것을 뛰어넘는 것(그것이 관계 그 자체인가, 사물인가라는 차이가 있다 해도)의 배반적이고 비가역적인 관계를 전제로 한 확장이나 전체화의 프로세스 자체는 단선적인 것이다.

 

이에 반해 사물=도구와 배치(도)의 양극이 매체가 되며, 나아가 그 쌍방이 점차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간다는 스트래선의 모델에서는 확장의 프로세스 그 자체가 반복적으로 단절(절단)되며 사물을 매체로 함에 따라 복선화하며 또 배치(도)도 어긋남으로써 사물도 대체되어 간다. 홀리즘은 이러한 조작을 거쳐 마침내 회피된다. 성찰 인류학에서 매체로서의 ‘여행자’는 동일인물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화들이 상대화되어 다뤄지는 것인데, 실제로는 사물=도구로서의 매체가 복수화될 필요가 있으며 그럼으로써 마침내 지도와 지도도 단절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사물=도구와 배치(도)의 상호포섭이 일어나는 순간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며 또 그에 의해 배치(도)와 배치(도)가 상호포섭하게 된다.

 

 

 

5. 정교화(Elaboration)와 창조

 

도구=사물에 관계들의 배치가 ‘내재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이러한 교차교환적인 왕복에서 도구=사물이 매체로서 행동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 왕복에서 어느 한 지도로부터 다른 지도가 차례차례로 만들어지게 되는데, 멜라네시아 혹은 파푸아뉴기니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조작은 창조행위이기도 했다. — 스트래선에 의하면, 그것은 관계들의 정교화(Elaboration)하는 행위이며, 관계의 증대(전체화)로서는 오히려 배치의 재독해로서 정교화라는 특수한 사건 그 자체를 증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사물과 배치(도)의 상호포섭과 왕복을 통해 단절을 낳으면서 또 연결해가는 세계는 이러한 창조행위와 더불어 스스로를 개시하는 것이며, 이 속에서 아직 분명해지지 않은 잔여의 부분(말하자면 지면 그 자체)도 그러한 운동의 배경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여기서 중시해야 하는 것은 다양한 배치(도)는 다양하게 단절되며 다른 배치(도)들 사이에서 관계를 반전시키는데, 본래 이러한 상호포섭과 단절이라고 하는 복수의 배치(도)에 의해 직조되는 메타적인 관계 그 자체가 사물 속에 노골적으로 드러난다고 멜라네시아 사람들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멜라네시아 사람들은 전통에 은유적인 균열을 삽입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살의 표면을 자른다. 또 그들은 개인을 은유적으로 전도시켜 문화적 기원(roots)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대신에 문자 그대로 나무뿌리를 뽑아 거꾸로 세워 나무줄기가 항상 뿌리에 의해 지탱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리터럴리즘(直解主義, literalism)을 오독하지 말아야 한다. 절단해서 움직이도록 만드는 것은 이미지 그 자체다. 남자들과 나무와 정령과 피리와 여자들과 카누 모두가 서로의 아날로그로 간주될 때, 그리고 완토와트(Wantoat)에서와 같이 나무를 쓰러뜨려 광장 중앙에 끌고 왔을 때 사람들은 나무를 한 사람의 남자의 이미지로서 숲에서 떼어낸 것이다.

 

“떼어낸” 사물들은 사물과 지도의 상호교섭, 지도(이미지)와 지도(이미지)의 상호교섭, 그리고 그것들 간의 절단이라고 하는 앞서 서술한 관계, 그러한 사건 그 자체를 선취(Prefigure)해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사물과 그것을 둘러싸고 직조된 관계(지도)는 여기서는 이미 이중화되어 있으며 겹쳐 쌓이게 된다. 관계들의 매체 혹은 메타적인 관계는 거대한 포락선(包絡線, 엔빌로우프 곡선)을 그리면서도 다시금 사물 속에 차곡차곡 쌓이듯이 포섭된다. 여기서 발견되는 것은 사물과 관계(도)의 양극을 어디까지나 가역적인 것으로서 다루고자 하는 의지며, 그러함으로써 비홀리즘적ㆍ비서구적인 부분들의 연결에 의해 직조되며 복선적으로 겹쳐 쌓이는 세계를 스스로 정교화(Elaboration)하고자 하는, 말하자면 세계창조에 대한 의지다.

 

 

 

6. 선재하는 사물, 복수의 프로세스

 

스트래선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수법과 문제의식을 지금 다시 한 번 일반적인 형태로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① 사물과 관계(도)를 상호 포섭적이고 가역적인 것으로 다룬다. ② 사물과 관계(도)를 그것들이 서로를 포섭하면서 매개하는 운동 속에서 복수화한다. ③ 관계(도)와 관계(도) 또한 각각 사물을 포함해가면서 상호포섭적인 것이 된다. ④ 이 조작들, 메타적인 관계를 ‘내재시키는’ 사물을 ‘떼어내고’ 그것에 착목한다. ⑤ 거기서 나타난 사물과 지도를 연마=전개(Elaboration)하면서 점차 변주해간다(고정화되지 않으면서 복수화한다).

 

결국 사물(객체)을 축으로 복수성의 문제를 고찰함으로써 복수성을 단일한 비가역의 프로세스에서 생각하는 사고는 홀리즘을 회피하고자 하는 사고다. 왜 여기서 사물(객체)과 그것이 낳는 관계들의 배치, 또 창조행위라고 하는 일련의 주제에 특히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첫 번째로 말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사물(객체)이 성립할 때, 숲에서 나무를 ‘떼어낼’ 때, 그 성립은 무엇보다 단적이며 일회적이다. 그러나 그 사물(객체)이 어떤 배치 속에 놓일 때, 그 존재방식은 복수적일 수 있다. 사물이 창조된 행위와 다양한 배치(도) 사이에서는 무엇보다 수적인 낙차가 존재한다.

 

본래 홀리즘이란 단일한 비가역의 프로세스에서 다수성이나 부분들을 생각하는 사고이기 때문에, 그 속에 있는 것은 무엇보다 다수성과 단일성의 문제, 다(多)와 일(一)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이때 다수성은 하나가 되는 과정으로 회수되어(혹은 그 과정으로 사고되어) 실제로는 과정 그 자체는 끝난 것이 아니고 열려진 것으로만 사고되며, 다수성 그 자체도 이미 회수되지 못하는—따라서 프로세스의 단일성도 실제로는 완결되지 않는다— 여기에 홀리즘적인 구조의 난점이 있다. 다수성은 그 속에서 회수 불가능한 잉여로만 나타난다.

 

이러한 회수 불가능한 잉여는 또 객체의 문제로도 고찰된다. 예를 들어 칸트에서 보이듯이, 초월론적인 통각이 현상들을 다수성으로 정합해서 총합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해도 물 자체가 그 속에 회수될 수 없는 것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주객(主客)의 문제이기도 하며, 나아가 앞서의 일(一)과 다(多)의 문제가 “완결되지 않고” “열린” 그대로라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여기서의 주체도 객체도 여전히 프로세스적이며 단독의 것으로서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인류가 아직 나타나기 이전(Ancestral) 세계에 대한 언명을 사람들은 과연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회의론적인 입장까지 포함한 철학이 주객의 상관관계로만 대상세계를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메이야수는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이 또한 홀리즘적인 발상의 권역을 20세기까지의 사상이 벗어나지 못했음을 비판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주객의 문제와 일대다 문제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상관주의적 및 프로세스적, 홀리즘적인 해결이 산발적으로 주어질 따름이었다. 나아가 그 결과로서 주체와 객체, 일대다의 어느 쪽도 개별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태에 머물고 만 것이다.

 

쌍을 이루는 복수의 문제가 병렬적, 아날로지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사물(객체)과 그 ‘떼어내짐’, 창조행위라는 관점이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인가? 중요한 것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그렇게 떼어내져 창조된 사물(객체)이 단적으로 현전하게 될 때, 그것이 나타내는 관계의 배치(도), 그 사물=도구의 역할은 복수였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형태로 사물(객체)과 그에 관한 어떤 관계를 그려내는 주체 혹은 다른 사물(객체)이라는 주제에 복수성(다수성)의 주제가 이미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때 일대다 관계는 창조행위(조작행위)를 통해 주객관계와 나선형으로 조합된다.

 

그래서 어떻게 될까? 이때 다수성, 주체, 잉여, 단일성, 객체라고 하는 요소들은 홀리즘적인 모델과 버선 뒤집듯이 대칭적인 존재방식으로 조합된다. 사물(객체)은 그 자체로 ‘하나인 것’이지만, 그것이 가질 수 있는 역할, 그것에 관해 묘사되는 관계의 배치(도)와 주체는 복수적, 즉 다수다. —통상의 상관주의적인 모델처럼, 총합하는 ‘하나인 것’으로서의 주체와 다수성으로서의 개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주객관계의 프로세스는 이에 의해 비가역적으로 나란히 다수화, 복선화한다. 또 이러한 재편성에 의해 다수성은 ‘이미 포함된 것’의 위치와 반대로 놓이게 된다.

 

나아가 이러한 사물(객체)과 그것이 그려내는 배치(도)가 다른 사물(객체)을 중심으로 하는 배치(도)와 서로 포섭하는 형태로 단절을 일으키는 ‘하나인 것’의 같은 부류도 다극화하기 때문에, 각각이 그려내는 배치(도)는 비가역적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수차례 전도되어 고리로 연결된다. 이러한 복선화, 전도, 절단, 겹쳐 쌓이는 상태의 상호포섭에 의해 전체와 부분의 스케일 그 자체가 무화된다. 이로써 마침내 세르가 말한 ‘봉지에 넣기’(Ensachage)의 상황이 성립된다.

 

이러한 연결에 의해 성립하는 세계는 일대다의 결절점으로서의 사물(객체)을 여러 개 가진 네트워크와 같은 구조를 그려내는 방식으로 다뤄질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그 속에서 바로 반복해서 단절이나 전도가 일어나는 것이며 ‘하나인 것’으로서의 사물(객체)의 선재성이 그러한 단절, ‘떼어냄’, 즉 연속적인 창조행위의 반복 속에서 노출되기도 한다. 비상관주의적인 사물의 선재성, 고립이라는, 그레이엄 하만이 중시한 그 주제도 사물에 관한 이러한 연속적인 창조행위와 고리, 상호포섭의 분석을 기점으로 좀 더 명확해져야 한다.

 

 

 

7. 데스콜라의 경우

 

주객의 관계와 일대다 관계라는 두 쌍을 중첩시키고 그 조합을 대체한다는 방법은 필리프 데스콜라의 작업 속에서도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그에게 주체와 객체는 인간정신 및 문화와 자연이라는 식으로 읽히는데, 단수의 (하나로서의) 자연과 복수의 문화를 전제로 하는 세계관을 그는 내추럴리즘이라고 부르며 서양근대적인 사고로 서술하는데, 앞서 서술한 홀리즘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단일한 자연과 이에 반해 상대적으로 다뤄지는 문화들이라는 구도는 얼핏 보면 그 반대일 것 같으면서도 총합하는 움직임인 ‘하나인 것’으로서의 주체와 그것으로 회수되는(그리고 회수되지 않는) 잉여적인 사물(객체)이라는 도식이 그려낸 것과는 완전히 동일한 비가역적으로 단일한 홀리즘을 전제로 하며, 주체와 객체는 그 속에서 끝까지 배반적일 수밖에 없다.

 

한편 애니미즘적인 세계관은 이러한 단자연주의에 대해 <다자연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데스콜라에 의하면, 애니미스트는 생명과 정신을, 생물종을 넘어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본래 다자연주의라는 개념은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가 먼저 제기한 것인데, 그 퍼스펙티비즘의 주장은 여기서도 전제로 놓인다. 동물이나 비인간은 각각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사물의 배치를 다루는 퍼스펙티브를 가지고 있으며, 사람과 비인간은 서로 각각의 퍼스펙티브 속에서 상대편을 포섭하고자 한다. 모든 퍼스펙티브를 총합한 ‘객관적인’ 퍼스펙티브는 성립하지 않는다. 또 그만큼 자연은 복수적이며 사람과 비인간은 동렬에 놓인다.

 

이러한 세계관은 사물=도구와 각각을 둘러싼 다양한 배치(도), 그리고 그것들의 상호포섭이라는 관계에 대해 스트래선이 분석한 것과 동일한 구조를 시사하고 있다. —사물=도구, 창조행위, 그 속에 ‘내재’하는 다양한 배치, 그것들이 다극적이며 서로 포섭하려는 한편으로 각기 그 자체로서는 바뀌지 않는 것으로 있다는 균열(단절). 애니미즘의 세계관은 이것들이 도구역할을 행할 때 비로소 <다자연주의>일 수 있다.

 

애니미즘의 세계관의 구조는 데스콜라에 의해 ‘하나인 것’으로서의 정신ㆍ생명과 ‘여럿인 것’으로서의 비인간의 신체성,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생겨나는 퍼스펙티브와 다양한 자연의 (단절을 낳는) 다수성이라는 식으로 규정되는데, 이것을 단순한 내추럴리즘으로서 주객관계와 일대다관계의 조합의 전도로 다뤄서는 안된다. 하나인 것으로서의 객체(자연, 신체)는 단층을 이루면서 그 자체로 복수가 되며, 또 스트래선이 말하는 정교화(Elaboration)로서의 창조행위도 사물이나 배치를 아울러가며 연선과 변주를 반복하면서 지속해간다. —전자를 자연, 후자를 창조적 행위와 함께 자기를 다양하게 전개하는 정신ㆍ생명으로 다루는 데스콜라에 의한 애니미즘과 <다자연주의>의 정식화가 이러한 물구나무선 형태를 탐구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8. 인류학에서 철학, 미학으로—비ㆍ홀리즘적 전회의 도미노

 

마지막으로 이러한 인류학의 조류들이 철학이나 미학 등의 현대의 동향과 어떠한 모습으로 교차하고 있으며 또 향후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관해 간단하게 언급해두고자 한다.

 

오늘날의 철학이 자각하고 있는 것은 주객관계, 일대다관계라고 하는 대립하는 이항은 이제까지의 상관주의적인 사고에서는 비가역적 및 홀리즘적 과정 속에서 다뤄질 뿐이었다는 것이며, 그 속에서 객체, 주체, 하나인 것, 여럿인 것은 그 자체로 단적인 것으로 다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홀리즘적이고 단일한 ‘열린’ 구조를 20세기가 마구잡이로 만들어왔던 것에 대한 비판은 최근에는 미학의 영역에까지 미치고 있다. 엘리 듀링은 어느 한 부류의 개념미술(conceptual art)이 다양한 해석에 ‘열린’ 채로 스스로를 제시하고자 하는 경향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 반복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오늘날의 인류학은 포스트모던적인 비평 속에서도 집요하게 잔존하고 있는 홀리즘적인 구조를 넘어서기 위해 다양한 접근법을 제시해왔는데, 그와 마찬가지의 사고의 전환이 금세기에 이르러 각 영역에서 일제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듀링은 앞서 서술한 과잉의 <해석주의의 축척>을 <낭만주의>라는 이름하에 단죄했다. 듀링과 함께 작년 말 심포지엄을 조직한 알로아도 <해석주의>의 비판이라는 취지하에 공통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듀링에 의하면, 예술작품은 무엇보다 하나의 ‘원형’(prototype)을 보여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열기관이 발명됨으로써 온도가 몇도 상승한 기관의 내부로부터 증기를 자동적으로 배출하기 위한 밸브가 고안된다. 이 밸브라는 사물=도구에는 압력솥과 같이 내부의 과열을 피할 필요가 있는 다양한 용도에 대한 적용이 사후적으로 복수발견된 것이다. 이처럼 해석에 앞서서 우선 오브제로서 완결해서 성립하는 것이 예술작품이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창조행위, 사물(객체)을 축으로 다루고 그것을 둘러싼 역할의 해석을 사후적으로 복수로 찾아내며, 그에 의해 포스트모던적인 해석주의를 비판한다는 입장은 스트래선의 주장과도 매우 상통한다. 듀링은 또한 시간론과 공간론에서도 <객관적인> 단일한 시간과 공간이 아니라 복수적인 시간과 공간이 공존하여 서로를 상호포섭하려는 구조를 집요하게 고찰하는데, 그러한 문제의식 그 자체가 매우 21세기적인 것이다.

 

상관주의적이고 홀리즘적인 모델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객체, 주체, 하나인 것, 여럿인 것은 교차교환적, 상호포섭적인 창조론에서는 단적인 것으로 제시되는데, 복수의 쌍이 병행적이지 않은 중첩되는 형태로 고찰된다. 예를 들어 사물(객체)은 하나인 것이기도 하며 그로부터 도려내어진 배치(도)나 해석이 수많을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사물(객체)은 또한 다극적으로 여럿인 것이기도 하며, 그러한 창조행위(연마)에 의해 다양한 사물을 아우르는 창조행위가 스스로를 변조해가며 산출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전체와 부분이 상호적인 포섭에 의해 서로에게 그 의미를 중성화하는 것처럼, 주체와 객체, 하나와 여럿, 만든 것과 만들어진 것은 그 어느 쪽도 배반적이지 않으면서 중성화한다. 그것들이 단적인 것으로서 주어진다는 것과, 대립하는 항들이 중성화한다는 것은 모순적이지 않다.

 

철학에서는 2007년에 미셸 세르가 데스콜라의 네 유형으로부터 힌트를 얻어 幹-형이상학(Métaphisique souche)라는 개념을 Écrivains, savants et philosophes font le tour du monde(『작가, 학자, 철학자는 세계를 여행한다』)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이 책에서 그의 착상은 주체, 하나와 여럿이라는 대립하는 항에 의한 복수의 쌍과 조합을 특정 인물의 작업이나 어떤 대상 속에서 여러 겹 중첩시켜서 읽어가는 시도로 실천적으로 추구된다. 예를 들어 장 드 라퐁텐(Jean de la Fontaine)의 작품은 토테미즘적인 조합 속에서 읽을 수 있음과 동시에 애니미즘적인 조합 속에서도 읽어갈 수 있으며, 총체적이고 혼합적인 종교인 카톨릭이나 학문(Sciences) 그 자체도 네 유형을 동시적으로 복잡하게 중첩시킴으로써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립하는 이항이 중성화하여 그에 의해 도리어 객체와 주체, 하나와 여럿 등 대립항의 각각의 극이 단적인 모습으로 추출될 수 있다는 것은 앞서 서술한 바다. 데스콜라가 제기한 각각의 유형, 즉 조합의 형태 또한 그러한 단적인 표현형으로서 다뤄질 수 있다. 따라서 각각의 표현형은 다른 표현형과 교체가능하며 특이하게 창조된 것(작품, 학문 등), 창조하는 자(작가, 학자, 철학자 등), 즉 창조행위와 그 산물이 생길 때에 그것들의 표현형 자체가 복수 겹쳐지는 것이 발견될 수 있다. 창조하는 것을 축으로 그러한 유형 혹은 표현형의 가변성과 중첩을 독해해나갈 때, 그 속에서 발견되는 것은 복수의 대립항의 쌍, 복수의 데스콜라적 유형(표현형)에 앞서는 가장 중립적인 상태며 그로부터 완만하게 각각의 항이 단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거나 조합(표현형)을 만들어낸다. 세르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분석해간다.

 

이러한 중성적인 상태에 발을 들이면서 다양한 항을 분석적으로 발견해서 또 표현형과 표현형의 중첩을 독해해가는 것은 바로 신체의 다양한 조직을 산출하는 줄기세포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세르는 철학에 줄기세포를 비견해서 말한다. 이러한 줄기(幹, Souche)와 그것을 둘러싸고 행해지는 조작과 분석이 간-형이상학(Métaphisique souche)이다. 대립하는 이항을 복수 조합시켜 중성화하여 사물과 그것을 둘러싸고 생기는 관계들을 교차 교환한다는 아이디어는 세르 자신이 처음부터 다양한 형태로 세련화시킨 것인데, 데스콜라의 방법은 그러한 시행착오에 보다 구체적인 형식을 부여했다. 세르에게 그것은 가장 먼저 과거의 다양한 창조행위의 에피스테몰로직한 분석이라는 형태로 결실을 맺게 된다. —복수의 표현형이 겹쳐져, 얼핏 보면 무질서한 작품, 줄기(Souche)로서의 작품과 그것을 창조하는 자들을 새롭게 조명한다.

 

그렇지만 간-형이상학이라는 주제가 이미 <창조된> 작품이나 학문에 대한 분석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하나인 것’으로서의 객체 또는 주체가 어떻게 성립하는가, 그것들이 ‘여럿인 것’으로서 상호 포섭적으로 혹은 겹쳐 쌓여서 네트워크적으로 나타나는 국면에서 어떠한 기구를 가지는가라는 질문 전반에 해답이 구해진 것은 아니다. 세르의 경우, 전자 곧 ‘하나인 것’으로서의 객체(個物), 그리고 주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혹은 스스로를 만들어내며 생성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특수한 문화적 사례를 넘어 모든 사례로 확장되지는 못하고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작년 발표한 ‘간-형이상학으로서의 인류학’에서 시도되었듯이, W 제임스와 니시타 기타로(西田幾多郎)의 순수경험론과의 접합이 이론적으로는 유망할 수 있겠다. 주어진 지면을 할애하여 보편적인 세계구조로서 간-형이상학을 그려내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다. 아마도 그것이 성립한다면, 하만 등의 문제의식도 더 깊게 파고들 수 있으며, 그러한 강고한 이론적 배경을 가진 금세기적이고 범생명론적인 새로운 오브제의 철학이 탄생될 것이다.

 

 

 

清水高志「非・ホ─リズム的転回」『現代思想』2017年3月臨時増刊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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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기원이라는 사고 그 자체에 대하여

 

 

요시카와 히로미츠(吉川浩満, 문필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누구나 관심을 갖는 질문들이다. 그만큼 이 토픽—생물종으로서의 인류의 역사—은 바람직하지 않은 여러 도그마(편견이나 선입견)에 놓여있다. 그러나 그 한편으로 최근 인류학, 고고학, 집단유전학, 진화생물학 등에서 이뤄진 몇몇 획기적인 발견은 이 도그마를 돌파할 힘을 갖는 것 같다.

 

본고에서는 인류의 역사를 둘러싼 두 개의 도그마를 다루고, 그것이 최신연구를 통해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지 그 현황에 대해 간단하게 검토하겠다.

 

덧붙이면 현재 인류연구에서는 더 이상 그러한 도그마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TV프로그램, SNS, 각종 광고, 블로그 등을 통해 원치 않아도 그 도그마를 접하지 않을 수 없다. 본고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인류연구를 일부 포함하는 우리 사회 전체에 침투하고 있는 그러한 통념이다.

 

 

첫째, 인류는 기원을 가져야 한다는 특권성의 도그마다. 간단히 말해 인류는 기원을 갖는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왜 기원이라는 말이 즐겨 사용되는 것일까?

 

생명의 탄생 이래 생물진화는 언제나 이미 “중간부터 스타트”(Daniel Clement Dennett)하고 있다. 인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많은 경우, 기원이라는 말은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처럼 영어의 origin에 담긴 유래ㆍ출자(出自)라는 함의를 살려낸 진화적 용법보다는 창세기류의 일회적ㆍ특권적인 시점을 말하는 서사적 용법에 더 힘이 실리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기원을 통해 인류의 역사가 특권적인 역사적 서사, 즉 신화에 버금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신화란 “세계의 처음 시대에 일어난 일회적인 사건을 이야기하는 서사”이다. 그에 따라 신화는 “존재하는 것을 단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이유를 기초 짓는” 것이 된다.

 

이 의미에서 기원은 과학적이라기보다 신화적인 개념이다. 만약 ‘인류’가 침팬지와 공통된 선조에서 분기한 것이 문제라면, ‘분기’ 혹은 ‘(종)분화’로 말하는 것이 정확하며, 또 오해도 적을 것이다. 물론 누구나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분기나 분화에 그 역할을 맡길 수는 없다. 분기나 분화의 개념은 “처음 시대에 일어난 일회적인 사건”으로서 그 특권성을 결정적으로 결여하기 때문이다. 서사적인 호소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결과적으로 실질적으로는 분기나 분화에 대해 서술한 문헌 혹은 기록이 기원신화의 옷을 입고 우리 곁에 당도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 서사적인 호소력에 설득당한 만큼 기원신화를 믿고 있다.

 

 

둘째, 인류의 진화는 이미 완료했다는 동일성의 도그마다. 이에 대해서도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과거의 인류든 현대의 인류든 미래의 인류든 모두 각각의 완성품인 것처럼 다뤄지는 경향이 있다. 통상의 생물진화의 스케일에 비해 개별의 인간의 생애주기는 압도적으로 짧다는, 어느 정도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언제나 이미 진행 중인 인류 진화에 대한 관심은 ‘원시인’이나 ‘미래인’과 비교하면 현저하게 낮다. 실상 사람들은 진화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두 번째 도그마는 첫 번째 도그마와 연관된다. “처음 시대에 일어난 일회적인 사건”인 기원의 개념은 인류가 그 동일성을 보유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기원 신화가 효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당대의 인류가 변화해서는 안된다. 인간이 바뀌어버리면 신화는 서사적인 호소력을 잃기 때문이다.

 

생물종과 마찬가지로 진화하는 존재로 자주 이야기되는 기업체와 유비를 시도해보자. 통상 기업의 서사에 ‘기원’이 거론되는 아니다. 기껏해야 ‘탄생’이다. 왜일까? 그것은 대부분의 기업이 신화적 존재로서 갖춰야 할 충분한 특권성과 동일성을 보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통의 기업은 범속하기 마련이다. 만약 기업이 ‘기원’과 함께 말해질 수 있으려면, 그것은 GM, 애플사, 구글 등과 같이 특권성과 동일성을 그 나름의 제국적 기업으로서 갖춘 경우에 한할 것이다. 이때 인류는 거대기업보다 중소기업이나 개인사업주에 더 가깝다.

 

그 정도로 인류의 역사는 특권성과 동일성의 도그마에 의존하는 기원신화를 필요로 한다.

 

롤랑 바르트는 『현대사회의 신화』라는 제목의 저서에서 신화란 역사가 자연으로 변환된 것이라고 논했다. 신화는 역사를 소재로 사용하면서 그 구체성을 개발하여 일정불변의 자연의 섭리로 변형시킨다. 요컨대 오늘날의 신화란 자연스러움을 갖춰가는 사회현상이라는 것이다.

 

그 의미에서 인류의 역사라는 토픽은 과학적 연구의 대상임과 동시에 현대의 신화를 구성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것은 인간의 언어활동이나 사회현상에 흥미를 가진 이들에게 전혀 무관한 토픽이 아니다. 그 신화작용을 독해하고 개발시킨 구체적인 역사를 복원해야 하는 임무가 제기된다.

 

다행히도 현대의 인류연구는 그 재료로 적격이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인류의 기원신화를 일정정도 탈신화화하는 지식체계가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생인류(호모 사피엔스)의 선조가 침팬지와 공통된 선조로부터 분기한 것은 약 700만 년 전의 일로 추정되고 있다. 분기직후의 시점에서는 도저히 우리의 일원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그들은 언제 우리의 동류가 되었을까?

 

최근 연구가 밝혀낸 바에 따르면,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상식인데, 인류는 일거에 인류가 된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인류의 특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성질들—직립이족보행, 큰 뇌용량, 언어의 사용, 인간적인 사회성 등등—은 말하자면 모자이크모양의 점차적인 획득과정을 거쳐 왔다.

 

이 하나만 보더라도 “처음 시대에 일어난 일회적인 사건”을 상정하는 기원의 개념이 얼마나 유지되기 어려운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특징들의 기원을 묻는 것에는 충분한 의의가 있다. 또 그러한 특징들 중 하나둘을 주요소재로 삼아 서사를 직조하는 것도 가능하다.)

 

나아가 인류는 직선적으로 한길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 몇 번의 갈라짐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는 생각에 이르고 있다. 지금까지 몇 종류의 ‘인류’가 등장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는데, 신종의 설정에 신중한 통합주의자로 불리는 연구자들조차 10종류를 말하고, 신종의 설정을 좋아하는 분리주의자들은 20종류로 추정하고 있다. 인류는 그만큼 수많은 ‘기원’을 거쳐 왔다는 것이며 우리는 그렇게 일어난 몇 번의 갈라짐의 과정에서 한 가지의 끝에 매달려 있는 것에 불과하다.

 

과거에 다양한 인류가 등장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복수의 인류가 동시대에 공존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점차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예를 들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수만년전)에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은 시간과 장소를 공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인류’라고 말하면 우리 호모 사피엔스를 가리키지만, 인류의 역사에서는 ‘우리 이외의 인류’(우치무라 나오유키内村直之)들이 공존한 시대가 호모 사피엔스의 시대보다 훨씬 길었으며, 그들이 모습을 감추고 우리만이 남은 최근의 수만 년이 예외적인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의 인류 진화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인류가 지금도 진화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캐나다의 영장류 학자인 메리 파벨카(Mary Pavelka)가 제기한 “모든 사람이 같은 수의 자식을 갖는가?”라는 수사학적 질문을 되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물론 인류 진화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우유에 포함된 락토스(유당)을 소화하는 능력의 획득을 들 수 있다. 젖을 뗀 후에도 우유를 마실 수 있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포유류는 통상 젖을 뗀 이후에는 락토스를 분해할 능력을 잃는다. 그러나 인류는 목축문화에 의해 락토스를 분해하는 유전자의 변이를 가진 자의 비율이 높아지는 경향으로 진화해왔다. 이것은 우리의 게놈이 문화적 습관에 의해 일순간(수천 년 안에) 진화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례만으로도 인류의 기원설화와 그것을 지지하는 두 가지의 도그마를 돌파하기에 충분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러한 새로운 과학적 지식체계의 보급에 의해 우리의 도그마는 머지 않아 사라지게 될 것인가? 마지막으로 이에 대한 생각을 간단하게 서술하고자 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두 도그마는 일찍이 최전선에 있었던(하지만 이제는 시대에 뒤쳐진) 지식체계가 사회통념으로서 침전된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 두 도그마는 100년 전만 해도 학계의 공식적인 교의였다. 확실히 그러한 측면이 있었다. 이 도그마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해도, 현재 최전선의 지식체계는 점차 사회전체로 확장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이야기를 끝낼 생각은 아니다. 실증적인 증거도 없고 또 어떻게 실증할 수도 알 수 없는 채로 인간에게 특권성과 동일성에 도달하는 기원신화는 매우 뿌리 깊은 휴먼 유니버설의 하나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특권성과 동일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신화 혹은 신화 그 자체로부터 자유로워진 인간사회라는 것을 나는 과문한 탓인지 알지 못한다.

 

목축문화를 통해 인류가 락토스의 내성을 얻게 된 것처럼, 과학문화를 통해 인류가 신화로부터 해방되어 예지적 존재로 되어가는 도정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오귀스트 콩트나 테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hard de Chardin, 1881~1955, 예수회사제, 고생물학자)이 꿈꾸었던 발전적 진화관이며 그 자체가 초-신화적 서사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여기서 18세기 독일에서 일었던 헤르더와 칸트의 논쟁을 떠올려보자.

 

헤르더는 『인류사의 철학고』에서 풍부한 상상력에 기초하여 당시의 과학적ㆍ인문적ㆍ종교적 지식체계를 집대성했다. 그는 자연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도 신의 현현(顯現)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했다. 말하자면 그는 자연과 역사의 발전을 통일적으로 다루는 스피노자주의적인 역사철학을 제창했다. 헤르더는 헤겔에서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Mason Diamond, 1937~)까지 근대의 인류사를 다루는 작가 모두의 선조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찬물을 끼얹은 이가 비판철학의 선조인 칸트다. 칸트는 헤르더의 인류사의 구상을 독단적 형이상학이라고 비판했다. 칸트가 문제 삼은 것은 헤르더의 스피노자주의 그 자체는 아니었다. 문제는 자연과 역사의 통합에 스피노자주의를 관철시킬 수 있을 것인가였다.

 

칸트가 내린 진단은 우리 인간은 항상 통합이 결여되어 있든지(통합론), 과잉되어 있든지(합리론), 둘 중 하나에 있다는 것이다. (그 해결방안으로서 『비판력 비판』이 쓰인 것인데, 이를 제대로 다루려면 문제가 배증되므로 여기서는 더 들어가지 않겠다.)

 

그래서 칸트에게 전략은 인류사가 기원을 필요로 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기원의 개념을 (구성적으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규제적으로(regulatively) 사용하는 것, 바로 이것이었다. 기원을 구성적으로 사용하는, 즉 그것을 그 자체로 경험적 대상으로 확장하는 것은 인류사를 신화로 전화시키는 결과에 이른다. 그 대신 경험적 영역에서 지성의 움직임의 방향을 잡아내는 것으로만 기원개념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 적용사례의 하나가 「인류의 역사의 억측적 기원」이라는 소품이다. 이 에세이에서 칸트는 기원신화는 구성적인 억측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시하면서, 그 다음으로 자유롭게 ‘억측’을 구사하여 성서를 지도로서 역사의 유람여행을 펼쳐 보인다. 그것은 헤르더의 구성적인 인류사 서사에 대한 멋진 탈구축적 비평이며, 행간에는 자크 데리다의 “유한책임사회 abc...”를 떠올리게 하는 잔혹한 유머마저 부유하고 있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것인데, 현대사회의 신화를 자연의 역사로 전환, 자연스러움을 갖춘 역사로 간주하는 바르트의 신화분석은 그러한 칸트의 분석철학의 계승이자 발전이다. 역사와 자연의 분리를 고심한 칸트를 계승하면서 신화작용에 의해 일단은 자연으로 전화된 역사를 끊임없이 그 구체성으로 되돌리는 것, 그것이 바르트의 신화분석이기 때문이다. 18세기의 비판철학자는 20세기에 신화학자로서 변신한 것이다.

 

이것은 현재 우후죽순처럼 나타나고 있는, 천년만년 단위의 인류사라는 서사에 대한 비평으로도 유효할 것이다. 여하간 폭우로 형용하기에 적절할 정도로 다수의 발견이 이뤄지고 있다. 죽순이 쑥쑥 자라는 것은 필연이며, 신화학자가 해야 할 작업은 날로 쌓여간다. 일찍이 질 들뢰즈와 하시미 시게히코(蓮實重彥)가 가르쳐주었듯이 그것은 차이와 반복(개체발생과 계통발생)의 운동을 기원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기획으로서 의의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전략이 앞으로도 유효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나는 자신이 없다. 근년의 획기적인 몇몇 과학적 지식체계는 어쩌면 헤겔의 꿈을 실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스피노자주의의 관철이 실현될지도 모르겠다. 그 여명은 비판철학=신화학은 “사라져가는 매개자”(프레드릭 제임스)로서 그 역할을 끝낸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항간에 떠도는 포스트 휴먼의 시대의 도래와 궤를 같이 한다.

 

그 까닭에 지금 인류는 시대에 뒤쳐진 도그마와 프리휴먼에 관한 실증적 지식체계와 포스트 휴먼으로의 개막의 예감 간에 노출된 붕괴감각을 맞이하고 있지 않는가?! 이것이 나의 시대진단이다. 그러나 이 불편한 심정이 반드시 불쾌한 것만은 아니다. 매일 수신되는 과학뉴스를 체크하면서 그것이 일으키는 붕괴감각을 은밀히 즐기고 있으므로.

 

 

 

 

吉川浩満 「人類の起源という考えそのものについて」 『現代思想』 2016年5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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