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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6.03 지능기계의 인류학: 행위자 네트워크론의 한계를 넘어서

2015년 12월 현대사상 '인공지능' 특집호에서 논문 한편을 번역했다. ANT를 공부하면서 이론적 한계로 내가 느낀 점을 잘 정리한 글이다. 행위자의 특성은 관계성에서 주어지는 것인데, 그것을 행위자로 실체화하게 되면 관계성의 사실성이 소거된다는 바로 그 점을 논리적으로 잘 분석해놓았다. 중간에 예시로 든 일본에서 행해진 장기버전의 "알파고와 인간의 대전"의 소상한 내용 부분은 생략했다. 아무래도 일본장기에 무지한 (나를 비롯한 일부) 독자들에게 독해의 흐름을 방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 그 예시가 없어도 글의 논지는 충분히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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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기계의 인류학: 행위자 네트워크론의 한계를 넘어서

 

쿠보 아키노리(久保明教 기술인류학)

 

 

 

우리는 기계를 사랑하면서도 증오한다. 확실히 인간과 기계의 일상적인 관계는 대체적으로 평온하다. 다기능 전자렌지, 하이브리드카, 스마트폰을 편리한 도구로 볼 것인가, 신체의 확장으로 볼 것인가, 집합지(集合知)의 매체로 볼 것인가의 문제는 별도로 하고, 현대생활이 엄청난 수의 기계와의 밀접한 제휴를 통해 성립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 속에서 기계가 떠받치는 현대사회의 시시비비를 기계에 대한 직접적 언급 없이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AI나 로봇 등의 지능기계를 화제에 올리면, 기계에 대한 우리의 애증은 증폭된다. 우리는 고도로 발달된 기계가 가져오는 빛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운운하는 한편으로, 기계가 지배하는 미래사회의 절망을 그린 소설이나 영화를 끊임없이 생산한다.

 

우리는 지능기계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그들’과 함께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 소박한 질문은 계속해서 중요한 과제로서 제기되면서도 사상의 언어를 통해 정면으로 논의되지는 않고 있다. 프레임 문제를 둘러싼 논의는 기계의 구체적인 양상보다 인간적인 지성의 문제로 제시된다. 가령 현대를 대표하는 어느 사상가는 휴대전화에 대한 자신의 증오의 근간에 자리한 인간적인 욕망을 분석한다. 기계를 둘러싼 문제를 인간에 관한 문제와 접속시킴으로써 우수한 성과물들을 쌓아가고는 있지만, 여전히 사상의 언어를 통해 기계의 구체적인 형태와 동작을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러한 단절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단절을 넘어서 기계와 인간에 대해 동시에 말할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브뤼노 라투르가 제창한 비근대론적 인류학을 길잡이 삼아 그 분석방법으로서 행위자 네트워크론의 한계를 넘어서는 도정을 제시함으로써 기계를 둘러싼 언어의 단절을 중화하고 지능기계와 우리의 관계를 보다 선명하게 파악하는 방법론을 구상하고자 한다.

 

 

1. 기계의 토테미즘

 

기계와 사상 사이를 가로막는 단절의 맹아는 기계를 둘러싼 근대적 사고의 단서가 된 데카르트의 동물=기계설 안에 이미 잠재되어 있다. 조르주 캉길렘(Georges Canguilhem 1904-1995, 프랑스의 생명과학철학자)에 따르면 유기체와 기계의 유비성을 인정하는 데카르트의 논의는 벽시계, 물레방아, 인공분수, 파이프오르간 등 당시의 선진기술에 의거하고 있다. 이 기계들은 도끼나 지레 등 인간의 생체에 ‘달라붙어 있는’ 기존의 도구와 달리, 제작과 시동을 별도로 하면 인간 없이 끝낼 수 있는 자동기계다. 그것들은 원활하게 작동할 때에는 인간의 관여 없이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다. 이때만큼은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유기체와 동일시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기계들은 그 동력원을 (시계나 지레와 비교하면 간접적이지만) 인간에 의지하며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임은 분명하다. 기계는 표면적으로는 개별적인 몸체로 작동하지만 그 내부는 동력과 목적을 부여한 인간과 항상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자연현상에서 ‘기계를 제작하고 동력과 목적을 부여하는 인간’에 대응하는 무언가는 무엇일까?

 

데카르트의 『인간론』의 서두를 장식한 “신체란 신이 가능한 한 자신과 유사한 것을 만들기 위해 완전히 의도적으로 모양을 낸 흙으로 만들어진 상 혹은 기계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 라고 나는 상정한다.”라는 기술에 기초하여 캉길렘은 동물=기계설은 다음의 두 가지 요청에 의해 처음으로 의미를 갖는다고 논한다. 첫째, 동물=기계(‘신체’)를 제작하는 자로서 신이 존재한다는 것. 둘째, 기계의 제작에 앞서 생체가 이데아로서 주어진다는 것.

 

동물=기계는 동력원으로서의 신, 그리고 형상인(形相因) 및 목적인(目的因)으로서 모방해야 하는 생체가 선재함으로써 비로소 생겨날 수 있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인 생명이해가 방기되는 것은 아니고 목적론의 배치가 달라진다. 즉 개개의 생물의 내부에 설정된 요인들은 신이 그것을 모방해서 신체를 만드는 생체의 이데아 및 동력인(動力因)으로서 신에게로 다시금 배치되며 자연 속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온 합목적성이 소거된다. 동물과 인간 신체를 필두로 하는 자연물은 고유의 목적과 영혼을 탈취당하고 객관적인 법칙에 따르는 존재=기계로서 파악된다. 이러한 이론상의 ‘생명의 기계화’를 통해 자연과 동물의 기술적인 이용이 정당화되고 ‘자연의 주인인 소유자’로서 인간이 나타난다.

 

캉길렘의 논의를 부연하면, 신에 의한 자연의 창조를 인간에 의한 기계의 제작에 빗대는 아날로지컬한 개념조작(자연:신::기계:인간)의 산물로서 동물=기계설을 다룰 수 있다. 표면상으로는 자율적으로 작동한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기계를 유기체에 빗댈 수 있는 한편으로, 이면상으로는 항상 인간과 연결된 기계에 빗대어진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유기체에서 합목적성이 소거된다. 나아가 이 개념조작은 이차원적인 인간의 분절화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요인들을 결여한 자연=기계의 일부로서의 신체(연장)와 그것들을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는 이성적인 판단능력을 가진 정신(사유)이라는 구분이 인간적인 영역에 도입된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논한 것과 같이 많은 인류학자가 분석해온 토템 신앙이 자연종들 간의 시차적(示差的) 격차와 인간집단들 간의 시차적 격차 사이에 상동성을 가정함으로써 자연의 체계에 의거하면서 인간사회의 체계를 확립하고자 했다면, 동물=기계설은 인간이 제작한 자동기계를 매개로 자연 속에 있는 분절(자연종/신)과 인간 속에 있는 분절(연장/사유) 사이에 상동성을 가정함으로써 자연의 체계에 의거하면서도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인간적인 영역을 구성하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기계의 토테미즘’에 있어서 벽시계나 파이프오르간 등의 구체적인 기계는 극히 중요함과 동시에 보잘 것 없는 하찮은 존재다. 그것들은 유기체와 기계 사이에 유비성을 보여주는 논의의 입구에서는 주요한 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자연의 주인인 소유자’로서의 인간이 도출되는 논의의 출구에서는 사상적인 동물=기계만이 전면화되며 현실의 기계들은 어떤 중요성도 갖지 않는다. 기계들은 인간이 소유한 자연을 이해하고 억제하기 위한 단순한 도구(실현기구나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기술)로 격하되며, ‘자연의 주인인 소유자’로서의 인간의 지위를 이성에 의해 정당화 내지는 비판하고자 하는 사상적 논의와는 저 멀리 멀어진다. 데카르트의 논의가 당시의 선진적인 기술의 구체적인 양상에 의해 가능해진 것, 즉 ‘이성적인 정당화에 대한 기계 제조의 선행성’은 모조리 망각되고 만다.

 

그런데 사상의 언어로부터 조금 떨어진 장에서 기계들은 그 존재감을 다시 강화한다. 기계와의 다름을 통해 인간적인 영역의 분절(연장/사유)이 보장되는 이상, 기계들 그 자체가 이 분절을 넘어 인간에 접근한다면 ‘자연의 주인인 소유자’로서 인간의 지위는 보증될 수 없다. 사상적인 기계와 달리 현실적인 기계들이 어떤 성질을 가질 수 있는가는 미리 확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기계 제조의 선행성’이 재생된다. 그것은 생물과 외견상 구별할 수 없는 정밀한 동작이 가능한 기계, 인간적인 사유를 실현한 기계, 자동기계(automaton), 로봇, AI 등으로 불리는 지능기계가 실제로 제작되는 것에 대한 기대와 공포라는 모습을 취하며 대중문화와 기술들이 교차하는 영역에서 다시 개화된다. 선행성의 망각이 떠받치는 사상의 언어를 통해 구체적인 기계들을 말하는 것은 항상 이차적인 것으로 밀려난다. 선행하는 기계들의 인간적인 영역으로의 삽입이 사상적으로 화제가 되면서 사상적 기계로의 변환을 통한 인간적인 영역으로서의 접속이 중심화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피하기 어려운 도정이라 할 수 있다.

 

 

2. 하이브리드한 위조품

 

그렇다면 이제까지 살펴본 사상과 기계의 단절, 사상에 의한 기계의 선행성의 망각을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까? ‘기술적 기계’나 ‘장치’ 등의 사상적 기계의 현대적 형상과 그 계보를 정밀하게 조사하여 현실적인 기계들과의 접점을 활성화시키는 것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본고에서는 우선 구체적인 기계들로 건너가기 위해 사상적 전통을 의도적으로 경시하는 몇몇 야만적인 논의, 브뤼노 라투르가 제창한 비근대론적 인류학을 참조하기로 한다.

 

브뤼노는 우선 근대라는 기구(Constitution)를 떠받쳐온 이중성을 주목한다. 즉 근대적인 지(知)와 제도는 자연과 사회, 과학과 문화, 인간과 비인간, 주체와 객체라는 대구로 표현되는 두 개의 영역을 표면상으로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순화’한 후 양자를 비대칭적으로 파악하는 한편, 그것들을 항상 암암리에 연결시키는 ‘번역’ 혹은 ‘매개’를 통해 양자의 혼합인 하이브리드한 존재를 증식시키는 이중의 실천에 의해 구동되어 왔다고 논한다.

 

근대주의자는 ‘순화’와 ‘번역’이라는 이중의 실천 속에서 전자에만 초점을 둠으로써 근대사회와 그 이외의 사회 혹은 근대과학과 문화적 전통을 대립시키고 양자를 비대칭적으로 파악한다. 이에 반해 라투르가 제시하는 것은 ‘번역’이나 ‘매개’가 이뤄지는 국면에 초점을 맞추고 양자를 대칭적으로 파악하는 ‘비근대론’(Non-Modernism)의 입장이다.

 

비근대론에서는 근대와 비근대, 과학과 문화가 그 본성상의 차이에 의해 환원론적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과 비인간을 불문하고 다양한 행위자(actor)가 엮어내는 관계의 그물망이 어떤 규모와 어떤 방식으로 조직되는가라는 점에서부터 연속적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관계의 그물망이 ‘행위자 네트워크’라고 하는 것인데, 그 속에서 모든 행위자의 형태와 성질은 항상 다른 존재자와의 관계들(네트워크)을 통해 만들어진다. 행위자 네트워크론(이하 ANT)은 네트워크의 운동을 통해 다양한 존재가 나타나고 변화하며 소멸되어 가는 과정을 추적하고 기술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제창되었다.

 

라투르의 논의를 검토하면 왜 근대인이 로봇이나 AI 등의 지능기계에 이 정도로 열중해왔는가가 명확해진다. 데카르트가 행한 아날로지컬한 개념조작은 유기체를 기계와 동일시함으로써 그 잉여(‘동물=기계가 아닌 것’)로서의 근대적인 인간상을 확립하고 인간에 고유한 영역(‘사회’와 ‘문화’)과 자연(을 해석ㆍ제어하는 과학ㆍ기술)의 영역을 엄밀하게 구별하는 ‘순화’를 추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그것은 인간에 무한히 접근하는 지능기계라는 특권적인 하이브리드를 순화의 바로 옆에 부상시킨다. 순화의 이면에서 수행되는 무분별한 번역이 사상(捨象)되는 한편, 지능기계—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기계인간’—만이 마치 유일무이의 중요한 하이브리드인 것처럼 표상되며 기계들의 발전을 가능하게 만드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계들의 인간에 대한 지배나 반란에 대한 공포가 운위된다는 것이다. 지능기계는 근대적인 사고틀이 사상(捨象)하는 번역의 영역으로 이성을 꾀어내는 주요한 회로임과 동시에 극단적인 지배/피지배의 서사를 통해 번역의 운동으로부터 그 즉시 눈을 돌리게 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한 모조품으로서 활약해왔다.

 

매일의 대인 커뮤니케이션의 상당부분을 SNS와 이메일을 통해 행하는 현재 우리의 생활은 반세기 전의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기계에 지배받는, 하이브리드화한 사람들의 디스토피아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화의 구분을 착각할 뿐이다. 우리는 자신의 주체적인 양상이 스마트폰, 페이스북, 카톡 등의 기계들과의 하이브리드화를 사상(捨象)하고 그것들을 편리한 도구로 활용하는 인간이라는 순화된 자기 이미지를 멋지게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2045년에 대단히 유능한 지능기계가 나타난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반세기 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30년 후의 사람들을 오해할 뿐이다. 현재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한 기계들의 지수함수적인 발전의 가능성이 아니라 그러한 발전에 수반되는 주체로서 일할 수 있는 인간의 양상을 단적으로 상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현실적인 기계들이 가속적으로 앞서감에 따라 순화와 번역이라는 이중구조 그 자체가 마침내 사상적으로도 기술적으로 타당성을 잃어가고 있는 사태를 목도하고 있다.

 

 

3. 네트워크의 구멍

 

라투르의 비근대론적 인류학에 기반하면, 근대인은 지능기계의 중요성을 적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제창된 ANT는 유감스럽게도 현대에서 지능기계의 움직임을 정밀하게 검토하는 것 이상으로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 물론 로봇과 AI로 불리는 동력기계와 소프트웨어를 행위자로 다루면서 그것들이 과학적ㆍ사회적ㆍ문화적 요소를 포섭하며 어떤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가는 분석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분석은 그 기계/소프트가 왜 로봇과 AI로 불리는가를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로봇과 AI는 기계나 소프트가 인간이나 생물과의 유비성 속에서 파악될 때에 비로소 나타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나 생물과 ‘닮았다’는 술어적 요소가 부여되지 않는다면, 기계와 소프트는 로봇이나 AI가 될 수 없다. 일반적으로 로봇이나 AI의 연구자로 간주되는 사람들이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기계공학자나 인지과학자로 명명되는 것은 그들의 존재가 과학적인 정의를 항상 벗어나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비성을 어떤 모습 속에서 찾아낼 것인가에 따라 지능기계의 정의는 항상 쉽게 변신된다. 따라서 지능기계가 인간이나 생물이 기계와 결부되는 관계성의 한 가운데에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들이 아무것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ANT에서의 행위자는 다른 행위자에 대해 어떠한 작용을 부여할 수 있는가를 검토하는 ‘시행’의 과정을 통해 그 움직임이 명확하게 정의된다. 행위자는 다른 행위자에게 다양한 작용을 행하는 주어적인 존재자다. 인간적인 주체성과 비교하면 그 힘에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확실한 주체성을 가진 무수한 행위자들이 상호 능동적/수동적으로 작용함으로써 행위자 네트워크는 운동한다. 이 때문에 ANT에서 분석의 초점은 네트워크의 운동이 안정화하여 자명한 현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필수적인 통과점’)을 맡는 행위자에 있다. 바로 그러한 중심적인 행위자가 될 수 있는 생화학자를 주역으로 한 라투르의 저작 『프랑스의 파스퇴르화(The Pasteurization of France 1984)』가 마키아벨리즘적인 과학자상(像)에 안이하게 의거한 분석으로서 사회학자 부르디외로부터 격렬하게 비판받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ANT논자가 마키아벨리즘적인 발상으로 방법론을 구축한 것이 아니라 해도 수많은 미세한 주어적 행위자들 간의 투쟁을 통해 이뤄진다는 네트워크 모델 자체가 그러한 발상을 이끌어내고 만 것이다.

 

비환원론을 표방해온 ANT는 그러나 지능기계를 단순한 기계로 환원해버린다. 그것은 기계적 행위자와 유기적 행위자의 관계성이 만들어내는 술어적 요소 자체가 ‘지능기계’라는 실체가 되어 네트워크의 일부를 맡는다는 사태를 ANT에서는 상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술어적 요소가 항상 행위자로 환원되는 행위자 네트워크의 세계에서는 행위자 동료들 간의 관계성 그 자체가 실체화된 존재자라는 수많은 구멍들을 잠재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관계성 자체가 실체적 권역(圈域)을 분리하고 현실적인 기계들과 인간의 상호작용에 주목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례로서 소프트와 인간 간의 치열한 전투에 의해 최근 크게 주목받은 장기전왕전(將棋電王戰)을 제시하겠다.

 

 

4. 두려움을 갖지 않는 기계

 

2011년 제1회부터 2015년 마지막 시리즈까지 4회에 걸쳐 행해진 장기전왕전에서는 최고의 장기기사에 필적하는 소프트의 실력(통산 10승 5패 1무)이 드러남과 동시에 기사와 소프트가 장기라는 게임을 다른 방식으로 다룬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 둘 간의 차이에 대해 제5회 최종국을 다툰 아쿠츠 치카라(阿久津主税)8단과 제2회와 3회 등장한 아베 코오루(阿部光瑠)5단은 각각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은 앞의 수를 계승하는 ‘선(線)’으로 사고합니다. 따라서 ‘선’이 연결되지 않을 때는 무언가 착각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바로 예정변경을 해야 할지 말지를 고심하여 다음의 한 수를 선택합니다. 컴퓨터는 한 수가 두어지면 그 국면에서 새로운 수를 덧붙여 생각하면서 두 수, 세 수를 앞서 가며 최선의 수를 선택합니다. 인간이라면 이 흐름을 탈 수 없는 수가 나오는 것이지요. 그 의미에서 [컴퓨터는] ‘점’으로 사고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한 수를 둘 때 자신과 상대가 두었던 수들에 대응해야 하므로 읽어야 하는 양이 늘어나고 그만큼 피로도가 쌓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불리해지는 변화를 두려워하고 읽기 어려워하기 때문에 보다 안전한 길을 가려고 하지요. 그러나 컴퓨터는 두려움 없이 읽고 밟아나갑니다. 강할 수밖에 없어요. 두려움이 없다, 지칠 줄 모른다, 이기고 싶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길이 평탄하지 않아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이는 모두 장기 기사들에게 필요한 덕목입니다.

 

‘선의 사고/점의 사고’, ‘두렵다/두렵지 않다’라는 대구로 기사와 소프트의 차이를 다루는 두 사람의 각기 다른 표현은 그러나 실전의 국면에서는 밀접하게 결부되어 나타난다. 우선 선의 사고와 점의 사고라는 대구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사례로서 제2회 전왕전(電王戰) 제3국ㆍ후나에 코헤이(船江恒平)5단-츠츠카나戰을 검토해보겠다. ‘카쿠가와리(角換わり 일본장기의 대표적인 전법 중 하나)’의 전투태세가 되었던 본국에서 선수를 잡은 후나에가 전반부에는 약간 우세했다. 그런데 종반부에 접어들면서 후수인 츠츠카나가 은(銀)을 버리는 기묘한 수를 두었다. 그 수를 읽지 못한 후나에 기사는 그 당시 매우 흔들렸음을 나중에 고백했다.

 

받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믿을 수 없는 수가 날아들었다. 6六銀. 종반부의 거의 막바지, 시급한 국면에서 읽기 어려운 한 수가 두어졌고, 나는 본능적으로 당했다고 생각했다. 긴장, 불안, 초조, 여러 감정이 마음속을 휘젓고 있었다.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국면에 임하고자 했다. 그런데 직후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6六銀은 버리는 수로밖에 읽히지 않았다.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는 ▲6六同龍을 두었다.

 

대국이 끝난 후 검토할 때에 6六銀에 대해 ▲6六同龍과 銀을 두지 않은 방식(▲2七角△5五銀▲5七角)에서는 분명 선수가 이긴다는 결론이 나온다. 후나에 기사가 둔 ▲6六同龍은 결과적으로 거의 안전한 수였다. ▲6六同龍을 받고 다시 한 번 계산을 행한 츠츠카나는 銀을 희생시키고 상대의 玉의 앞을 가로막는다는 한 수 앞을 내다본 흐름(실제로는 츠츠카나의 玉이 가로막혀버렸다)을 버리고, 다른 흐름으로 틀어 △4二步의 수세로 돌린다. 바로 아쿠츠 기사가 말한 “바로 한 수 앞을 두었던 사람과 다른 사람이 두는 것 같은 수”다. 어느 쪽으로든 막히는 변화를 서로 회피하기 위해 국면은 다시 종반부의 입구로 돌아온다. 우세를 의식한 후나에 기사는 급소를 쳐서 승리를 가져오려 했지만 그 수는 점차 흩어져 안타깝게도 패배를 불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생각해보면, 이때부터 내 정신은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을지 모른다. [……] 기다리던 ▲1六步. 그리고 나는 생각을 끝내버렸다. 내가 이긴 것이 아닐까? 그래 분명 내가 이긴다. 나는 판도라 상자를 열어버렸다. 실제로 이 국면은 본국에서 내가 가장 승리에 가까운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또 다른 나는 현장을 떠나버렸다. [……] 승리에 들떠 기쁨에 취하고 싶은 그 유혹에 내가 진 것이다.

 

츠츠카나의 △6六銀→△4二步라는 수는 아쿠츠 기사가 말한 “바로 한 수 앞을 두었던 사람과 다른 사람이 두는 것 같은” 수임과 동시에 아베가 말한 “길이 평탄하지 않아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수이기도 하다. 본국을 관전한 토야마 마사아키(遠山雅亮)5단은 자신의 블로그 기사에 “(△6六銀에 대해 후나에 기사가 두었던 ▲6六同龍에) 인간 상대라면 △5八金으로 응수하고 다음으로 (후나에가 상대의 玉을) 가로막아서 끝나는 흐름을 갖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는 장면에서 소프트는 “두려움 없이” “포기하지 않았다”. 본국뿐만 아니라 전왕전에서 발휘된 소프트의 강점은 아베 기사가 말한 것처럼 장기기사와 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츠츠카나를 포함한 장기 소프트는 본래 공포, 체념, 피로에 대응하는 기능을 갖지 않는다. “두려움이 없다, 지칠 줄 모른다, 이기고 싶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길이 평탄하지 않아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이 성질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지치고 이기고 싶고 마지막에는 포기하기도 하는 인간 기사와의 관계성에서 발생하는 것들이다. 인간과 소프트의 관계성의 한 가운데에서 발생하는 술어적 요소들이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어 최초의 관계성에 재도입될 때 “두려워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소프트의 모습이 나타난다.

 

부정형으로 언급되는 소프트의 존재양상은 매우 순조롭게 관계성에서 실체로 이행하여 그 강한 요인이 되어간다.

 

…[중략]…

 

 

5. 네트워크와 추상적 관념

 

앞 절에서 검토한 것처럼 관계성 자체의 실체화는 그 관계성을 맡는 항이 가진 특성으로 쉽게 대체된다. 통상 우리는 AI나 로봇을 특정한 성질을 가진 확고한 행위자로 다루며, 그것들이 소프트나 기계와 무엇이 다른지를 묻는다면 명확하게 답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전혀 길들여지지 않는 관계성을 문제시 하는 경우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대체를 행하기는 쉽지 않다.

 

인류학의 역사에서 마나와 하우, 정령과 주술 등 추상적이고 내실이 불확실한 관념이 상당히 오랜 기간 타문화 연구의 핵심적인 열쇠가 되어 왔다. 마나와 하우를 도덕적인 강제력을 가진 가치체계의 기반으로 파악한 모스의 주술론과 증여론, 그리고 그것들을 인식론적인 체계에서 제로의 상징적 가치를 가진 기호로 다룬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세계를 인식하고 해석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체계로서 문화를 다뤄왔던 20세기의 주류 인류학은 이 추상적 관념에게 인식체계의 중축을 이루는 중요한 역할을 부여해 왔다.나아가 라투르나 ANT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존재론적 전회’라 불리는 현대인류학의 조류에서는 마나와 하우, 정령과 주술 등 우리에게는 ‘얼핏 비합리적인 신념’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 현지 사람들의 집합적인 실천을 통해 분명한 사실성(reality)을 갖는 과정을 분석해왔다. 그런데 이 존재자들을 ANT의 행위자와 같이 관계성 속에서 나타나는 주어적인 존재로 그려내면, 그 실재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 근대적인 분석틀과의 괴리를 낳고 ‘그들은 그 존재들을 믿고 있다’라든지 ‘그들은 그 상징들을 통해 세계를 해석한다’는 기존의 담론을 ‘그들의 존재론에 따르면 그것들은 실재한다’는 담론으로 대체할 뿐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떨쳐낼 수가 없다. 나아가 추상적 관념을 행위자로 대체해버리면, 정령이나 주술사가 현지 사람들에게도 내실의 불확실한 존재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측면이 사상되고 만다.

 

정령도 지능기계도 그에 익숙한 어떤 사람들에게는 타자에게 분명한 영향을 끼치는 실체며 동시에 그 내실은 여전히 불확실한 존재이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행위자뿐만 아니라 추상적 관념을 노드(node)로 포함하는 존재자들의 네트워크를 구상할 수 있다. 추상적 관념은 행위자 동료들 간의 관계성이 실체화됨으로써 나타나며 확고한 행위자는 되지 않지만 존재자의 네트워크의 일부를 담당한다. 그 네트워크에 익숙한 자에게 추상적 관념은 비교적 쉽게 관계성의 일단을 이루는 항의 특성으로 파악되지만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분명히 존재를 공상하는 기묘한 행위로만 비춰진다.

 

네트워크의 노드로서 추상적 관념의 움직임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미지화하기 위해 우리에게 나름 익숙하지만 그 실재는 긍정되지 않는 관념을 다뤄보자. 코마츠 카즈히코(小松和彦)는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제로의 상징적 가치를 가진 기호”의 일례로서 ‘운’을 검토한다. 코마츠는 다음의 예를 든다. 실력이 그다지 좋지 못한 4인이 마작을 시작한다. 그 중 1인이 평상시라면 예상할 수 없는 승률을 올린다. 그때 그는 “오늘 난 어쩐지 운이 좋아”라며 기뻐하고 다른 이들은 “자네는 운이 붙었어”라며 희한해한다. 그런데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가 내리 지기 시작하고 다른 이들이 이기기 시작하면, “자네는 운을 쫓아냈어”라든지 “이제 운이 돌기 시작하는군”이라고 말할 것이다. ‘운’이라는 관념은 이 이상한 승률을 이끌어낸 요인을 지시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관계항의 특성(“자네는 운이 붙었어”)을 쉽게 부여하지만 그 내실은 극히 모호한 상태다.

 

‘운’이라는 추상적 관념은 어떤 행위자의 행위 결과가 그 당사자의 내적인 조건(실력이나 연습량)과도, 관계하는 다른 행위자의 개입(조언이나 도움)과도 연관된다고 상정할 수 없는 상태에서 발생한다. 마작의 게임장을 구성하는 행위자들의 관계성이 앞서와 같은 이상한 상황을 발생시킬 때 이상성을 띤 관계성 그 자체가 실체화되고 ‘운’이라는 추상적 관념이 발동되기 시작한다. 이 네트워크에 접속된 사람들에게 그것은 비합리적인 인식의 산물이 아니고 분명한 영향력과 내실의 불명료함을 겸비한 네트워크의 노드로서 움직인다. 관계성의 한 가운데에서 발생하는 ‘아름답다’라는 술어적 요소가 ‘아름다움’이 되어 ‘미(美)’로 실체화되고 회화, 아티스트, 미술관 등의 행위자들과 상호 작용하면서 그 내실을 바꿔나가는 것처럼. 추상적 관념은 실천을 배후에서 규정하는 상징체계의 구성요소로서가 아니라 실천을 구동하는 존재자들의 네트워크에 주어적인 행위자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참여하는 존재자로서 파악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추상적 관념을 노드로 포함하는 네트워크론의 구상은 보다 정밀한 이론적 정비와 풍부한 사례의 검토를 거쳐야 하는 잠정적인 모델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내면적인 정신활동에서 파악된 추상적 관념을 구체적인 존재자들과 상호 작용하는 자율적인 관념으로서 파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까운 미래의 특정 시점에 지적능력이 인간을 능가하는 지능기계가 나타나는”, 그 내실이 모호하고 불명료한 관념이 확실한 실효성과 함께 과학적ㆍ사회적ㆍ정치적인 네트워크를 움직이는 현재 상황에서, 그 타당성을 객관적인 데이터와 법칙을 통해 판정할 수 있다고 상정하는 것도, 그 의미를 사람들의 공상과 기대, 문화적 관념과 이데올로기로 환원해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상정하는 것도, 점차 가속화하는 기계들을 둘러싼 네트워크의 운동에 대해 충분히 분석적인 효력을 가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능기계가 인간과 기계의 아날로지컬한 관계성을 통해 나타나는 한, 그 미래의 모습은 기계와 우리의 일상적인 상호작용의 축적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러한 몇몇 낙관적인 조망도가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순화와 번역의 이중구조를 폐기하고 ANT가 그 입구를 제시한 곳에서 머물러 있는 비근대론적 인류학의 흐름을 치밀하면서도 야만적인 방법론으로 추진해야 한다.

 

 

久保明教 「知能機械の人類学─アクターネットワーク論の限界を越えて」 『現代思想』 2015年12月。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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