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앙리 위베르와 마르셀 모스의 '희생'에 관한 논의를 접수해야 하는데, 한국어번역본으로 출간된 마르셀 모스의 저작은 『증여론』뿐이라 한국어로 그 논의를 접할 수가 없다. 영어번역본으로는 『Sacrifice: its nature and function』을 참조할 수 있다.

 

모스의 '희생'에 관한 문제의식을 간략하게 정리해보겠다. 먼저 모스의 '증여론'에서 '증여'는 주어야 할 의무, 받아야 할 의무, 되돌려주어야 할 의무로서 사회적인 관계를 순환한다. 그 순환의 힘은 '마나(mana)', 즉 혼에 의한다. 그렇다면 그 최초의 '마나'는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희생제의('공의')를 통한 신과 인간 간의 '증여'에서 나온다. 앞서의 번역글인 「포식의 형이상학」에서도 잠깐 언급되다시피, 아마존의 카니발리즘 또한 이제까지 이 도식으로 설명되어왔다. 아마존의 식인행위는 인간이 초월적인 존재인 신에게 인간을 바치는 의례로 이해되어왔다. 그런데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식인행위를 퍼스펙티브의 교환으로 개념화하고 모스식의 '증여'의 원천으로서 희생제의의 초월성을 전쟁과 카니발리즘의 내재성으로 반박한다. 다음의 글 또한 그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수직적인 샤머니즘과 수평적인 샤머니즘의 대조는 모스식의 초월성과 비베이로스의 내재성의 대조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또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자신의 주장의 철학적인 토대로서 들뢰즈&가타리를 삼는 한편, 인류학적 토대로서 피에르 클라스트르를 적극적으로 포섭한다(들뢰즈&가타리가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영향을 받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특히 11장)를 참조하면 카스트로의 정치인류학적 논의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우에서 덧붙여 설명하자면, 인류학적으로 '수평성'은 '평등성'을 뜻하고 '수직성'은 '위계성'을 뜻한다. 영국의 인류학자인 에드먼드 리치가 버마의 카친족을 연구하면서 '굼사/굼라오' 체계를 정식화한 이래로 그렇게 이해되어 왔다. 굼라오는 카친족 내의 여러 부족의 평등한 상태일 때의 친족·정치 체계를 가리킨다. 계곡 깊은 곳에 자리한 카친족은 화전을 주요생계수단으로 삼기 때문에, 그곳의 생산성은 기후의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가뭄이 계속되어 생산량이 낮은 해에는 각 부족들은 각자도생으로, 즉 관계하지 않는 평등상태에 돌입한다. 반면 적정의 강우량으로 생산량이 높은 해에는 각 부족들은 서로 적극적으로 관계하면서 위계를 만들어낸다. 이 상태의 체계가 굼사이다. 우리가 보통 예상하기로는 평화는 평등과 관련되지만, 카친족 사회에서 평화는 위계가 안정적으로 지속될 때 실현된다. 각 부족들 간의 위계가 깨지는 순간, 즉 평등한 상태로 진입하는 순간 평화 또한 깨진다.

이러한 굼사/굼라오의 도식을 수직적인 샤머니즘과 수평적인 샤머니즘에 적용해서 이해해볼 수 있을텐데, 그것은 어떤 정치적인 차원에서만 그러하고 퍼스펙티브적인 코스모폴리탄의 차원에서는 반드시 그렇지가 않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도 그 점을 유의하기 위해 마지막에 내재성과 평등성을 혼동하지 말기를 당부한 것이다.

 

앞서의 번역글과 마찬가지로 글의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 임의적으로 소절을 나누었다.

 

이제 『식인의 형이상학』에서 번역하기로 한 장들 중에서 마지막 장인 '구조주의의 생성'만이 남았다. 이 장은 조금 기일을 두고 올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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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하는 샤머니즘

 

 

1.

 

퍼스펙티브주의의 이론을 소묘하면서 언급했던 샤머니즘의 문제를 다시 다루어보겠다. 아마존의 샤먼들은 다른 종(種)을, 그들이 자신을 마음속에 상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인간과 마찬가지로—보기 때문에, 자연사회의 다양한 이해가 대립하는 아레나[고대 로마의 원형 투기장]에서 코스모폴리탄적인 외교관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 의미에서 샤먼의 기능은 전사(戰士)의 기능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양자 모두 퍼스펙티브의 변환기(變換機)이자 조작계(操作係)이다. 전자[샤먼]는 종 사이에서 기능하고, 후자[전사]는 인간 동료들 사이에서 내지는 사회들 사이에서 기능한다. 그들의 영역은 외연적으로 수평적인 인접관계 혹은 수직적인 포괄관계로 배열된다기보다 그보다 훨씬 강도적으로 중첩된다. 종종 지적되듯이, 아마존의 샤머니즘은 다른 수단에 의해 행해지는 전쟁의 연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폭력성 그 자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전혀 아니고,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것[샤먼]은 커뮤니케이션할 수 없는 것들 간의 횡단적인 커뮤니케이션이며, 인간의 지위를 놓고 끊임없이 투쟁하는 퍼스펙티브 간의 위험하고도 미세한 비교이다. 여기서 인간의 지위는 어디에 속하는가? 한 개인이 다른 종족의 일련의 정동(情動)과 행위주체성(agency性)에 직면했을 때 이것이 항상 문제시된다. 즉 숲속에서 만나는 동물과 미지의 생물, 오랫동안 마을을 떠나있다 돌아온 혈육, 꿈속에 나타나는 죽은 자의 이미지로 말했던 것이 중요하다. 존재자들의 보편적인 인간성—기저에 놓인 우주론적인 인간성이 모든 존재종(種)을 반성적으로 인간종으로 삼는다—은 상보적인 원리에 따를 수밖에 없다. 즉 두 개의 다른 종은 각각 자신의 시선에서 틀림없이 인간적이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한편의 시선에서 보면 하나의 [개별적인] 존재일 수가 없다는 사실에 의해 규정된다.

 

마찬가지로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해 성립되는 샤머니즘의 연장이다. 아마존에서는 전쟁이 초자연적인 것인 것과 마찬가지로 샤머니즘 또한 폭력적이다. 이 둘은 위험에 대한 형이상학(Rodgers 2002)의 매혹적인 힘을 보여주며, 모든 삶의 활동이 포식자의 확장형식이라는 깊은 확신에 의해 의연히 특징지어지는 초인간적 존재에 대한 행동목록을 작성하면서, 퍼스펙티브주의의 투쟁모델로서 사냥과 연계를 유지한다.

 

레비-스트로스적인 대비의 관점에서 보면, 샤머니즘은 확실히 공의(共儀) 쪽에 위치한다. 샤먼의 활동은 상호 대립하는 관점의 차이 간의 능동적인 상동성과 등가성을 탐구함으로써 각각의 자연종이 갖는 세계 간의 상호관계 혹은 번역을 설정한다(Carnerio da Cunha 1998). 그러나 샤먼 자신은 실재적인 ‘관여자’이며 형식적인 ‘상관항’이 아니다. 하나의 시점에서 다른 시점으로 변화해야 하고 동물을 인간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동물로 변용해야 하며 그 반대 또한 그러하다. 샤먼은 우주를 구성하는 퍼스펙티브의 다양성에 내재한 잠세력의 차이를 이용한다(‘물질’과 육체를 이용해서 관계성과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샤먼의 힘은 그러한 차이에서 유래하는 힘의 한계와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공의의 모스적 이론이 가진 특정한 산출력을 손에 넣을 수 있다. 포화하여 완전해진 매개의 구조를 만들어내는 공의의 도식, 공의를 행하는 자(공의의 집행자)와 희생자의 이중의 중계에 의해 예배하는 자([누가] 희생되기를 바라고 그것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자)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를 연결하는 공의의 도식을 상상해보자. 아마존의 ‘공의’의 두 형상, 즉 의례적인 카니발리즘과 샤머니즘을, 한정교환이 일반교환의 수학적인 의미에서의 퇴화라고 논한 레비-스트로스의 견해와 같은 의미로 모스의 도식에서 후퇴한 것으로 상상해보자.

 

아마존의 샤머니즘의 독특한 성격은, 샤먼이 공의의 집행자임과 동시에 매개자라는 것이다. 샤먼이야말로 ‘근접성의 결여’—신체와 혼의 분리에 의해 산출된 공백이며, 샤먼의 인격의 몇몇 부분을 끌어내어 외재화하는 것—를 실현화하고,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서 효과적인 기호의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다. 거울의 반대편으로 건너가는 것은 샤먼 자신이다. 그는 희생의 형식을 취한 대리인 혹은 대표자를 보내지 않는다. 바로 그가 희생자이다. 예기된 죽은 자는 아라우에테의 샤먼과 완전히 똑같이 천공을 여행하는 동안 ‘우리의 미래의 음식’으로서 아라우에테 민족의 식인의 신성(神性)에 의해 불려나온다. 이것은 투피남바가 5세기도 전에 자신들의 전쟁의 능력을 시시덕거리면서 사용한 표현과 같다. 샤먼이 타자의 공의집행인이 될 때, 우리는 우주사회의 다른 체제의 문턱을 넘어선다. 예를 들어, 샤먼은 인간의 희생을 받드는 자이며, 다양한 힘에 의해 주어진 공의의 관리자이며, 움직임의 확인만으로 그것을 승인하는 자이다. 여기서 샤먼의 형상의 배후에 사제의 그림자의 윤곽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2.

 

주지하다시피 절대적인 대립이 문제는 아니다. 휴-존스 스테판(Huge-Jones Stephen 1996)이 지적한 것인데, 아마존의 선주민에게 일반적으로 샤머니즘이 의미하는 것은 ‘수평적인’ 샤머니즘과 ‘수직적인’ 샤머니즘 간의 결정적인 차이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 대비는 중앙브라질의 보로로족, 리오네그로(Rio Negro)의 투카노족, 아라와크족(Arawak族)과 같은 민족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거기서는 신비적(神秘的)인 매개자에 관한 명확한 두 개의 범주가 있다. 휴-존스가 수평적인 것으로 분류한 샤먼은 영감과 카리스마적인 힘을 만들어내고 사회체의 외부를 향해 공격성와 모랄의 모호함을 피하지 않는 행위를 하는 타입의 전문가이다. 그들의 전형적인 대화상대는 아마존의 선주민에게 가장 빈번하게 병의 원인을 제공하는 동물의 영이다(병은 종종 먹힌 동물 측에서 식인적인 보복이 행해지는 경우로 해석된다). 한편 수직적인 샤머니즘으로 분류되는 것은 노래하는 자들의 지도자이며 의식의 전문가이며 집단 내부의 관계성을 재생산하는 프로세스—즉 출산, 통과의례, 명명(命名), 장의(葬儀)—를 능숙하게 주도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는 신비적인 지식을 평화 속에서 보존하는 자이다.

 

내가 ‘공의의 집행인-희생자’로 부르는 샤먼은 수평적인 샤먼이다. 이 전문가는 휴-존스의 지적에 의하면 평등주의적이고 호전적인 에토스를 가진 아마존 사회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에 비해 수직적인 샤먼은 보다 위계화된 평화적인 사회에서만 나타나며, 오히려 사제의 형상과 닮아있다. 그런데 수직적인 샤먼만이 의례를 행하는 아마존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아마존에는 샤먼으로 간주되는 단 하나의 유형만이 있을 뿐이며, 그것이 보로로족과 투카노족에 의해 알려진 샤먼의 두 개의 기능을 가진 경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수평적인 샤머니즘의 특성과 책임이 확실히 우위에 있긴 하지만.

 

휴-존스가 설정한 대비는 명백히 관념적인 유형이라는 관점에서 고안된 것이며 극히 단순하고 도식적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것이 완전하게 민족지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고, 샤머니즘 간의 차이에 관한 그의 분석의 타당성을 다시금 문제로 삼고 싶지 않다. 두 타입의 샤먼 간의 코스모폴리틱한 매개의 분업에 대해서는 레비-스트로스가 ‘신화의 구조’에서 열거했던 매개의 이중성이라는 계열(série)에 적용해서 생각해보면, 중요한 대비의 의미=방향을 가지게 된다. 즉 메시아>디오스쿠로이(Dioskuroi)[각주:1]>트릭스타(trickster)[각주:2]>양성구유>교차사촌[각주:3]>부부>삼항이다(Lévi-strauss 1958/1955: 251). 이러한 이유로 샤먼의 비대칭적인 이중성은 아메리카 선주민의 우주론적 구조의 중요한 특성을 보여준다. 이것은 『살쾡이 이야기(Histoire de Lynx)』(1991)에서 ‘영속적인 불균형의 상태에 있는 이원론’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그에 앞서 위에서 열거한 최초의 항인 메시아니즘은 실질적으로는 휴-존스가 두 샤먼을 구별하면서 만들어낸 문제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19세기 중반 이후 북서아마존의 지역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확장해온 천년왕국운동은 모두 ‘수평적’인 특징을 갖는 샤먼-예언자에 의해 선도되어왔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구별이 설정되어야 하는 것은 전문가의 두 유형—협의의 샤먼(혹은 ‘샤먼-전사’)과 샤먼-사제—가 아니라 샤먼적인 기능에 관한 가능한 두 방향성이다. 즉 사제로 변용하는 것과 예언자로 변용하는 것과의 구별이다. 이때 예언은 샤머니즘의 역사적인 재연(再燃) 프로세스의 결과인 반면, 사제의 기능의 발생은 정치적으로 다시 냉정해지는 것, 즉 사회적인 권력에 의해 포섭되는 것에서 유래한다.

 

가설을 만드는 또 하나의 방법은 사제로 변용하는 것(기본적인 샤먼의 기능에 기초한 차이화)이 사회의 내부를 구성하는 프로세스, 즉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변증법적 연속성을 나타내는 선조(先祖)라는 가치 그리고 산 자들 간의 공시적인 불연속성을 설정하고 시인하는 정치적 위계(hierarchy)라는 가치의 발생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수평적인 샤먼과 대면하는 원형적인 타자는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음에 반해, 수직적인 샤머니즘의 타자는 선조의 의인적인 모습을 떠안는 경향이 있다.

 

아메리카 선주민의 수평적인 샤머니즘은 우주론적인 경제 속에 위치하는데, 그 속에서 살아있는 인간과 죽은 인간 간의 차이는 적어도 죽은 인간과 살아있는 비인간 간의 유사성만큼 중요하다. 콘크린(Beth A. Conklin)(2001)이 서부아마존의 와리족의 생사관에 대해 지적한 것처럼, 죽은 자의 세계에 동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은 자 자신이 동물이기 때문이다—그것은 사냥감으로서 동물 그 자체이다. 그들은 고기의 본질이며, 고로 참된 음식인 야생의 멧돼지로 변용한다. 그 외의 죽은 자들, 그 외의 인간들은 사냥꾼 혹은 카니발(사육사)로서 동물성의 반대방향의 극인 샤먼으로 생성된다. 동물인 것 같은 존재는 모두 처음부터 인간이며, 인간은 마지막에는 동물이 된다. (탈)개체화라는 생사관은 다시금 전종화(前種化)의 신화와 함께 한다. 동물이 계통발생의 영역에 속하듯이, 죽은 자의 망령은 개체발생의 영역에 속한다. “처음에는 모든 동물은 인간이었다….” 죽은 자는 인간의 신체에서 이접(離接 disjunction)하여 그 이접이 규정한 이미지로서 동물의 신체로 이끌린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따라서 아마존에서는 죽는다는 것은 동물로 변용하는 것이다. 만약 동물의 혼이 원초적인 인간의 신체의 형식을 갖는다고 생각하면, 인간의 혼이 사후(死後)에 동물의 신체를 갖는다거나 산 자에 의해 우연히 죽임을 당해 잡아먹힌 동물의 신체에 스며든다고 해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수직적인 샤머니즘의 출현은 타성의 두 위치—죽은 자와 동물—간의 경계와 결부된다. 어떤 특정 순간으로부터—도무지 확정할 수 없는 순간이라고 말해야겠다—인간의 죽은 자는 죽은 자라기보다는 인간으로 간주되기 시작한다. 그 결과 비인간의 완전한 ‘객체화’라는 대칭적인 가능성이 초래된다. 즉 인간과 비인간 간에 경계를 설정하는 것, 동물전반의 형상을 인간성의 타자로 사고하는 것은 죽은 자와 동물 간에 미리 경계선을 긋는 것이며, 선조의 모습을 취해 객체화된 인간성의 전반적인 형상이 돌연 발생하는 것과 연관된다. 죽은 자는 동물로 생성된다는 기본적인 생사관의 사실은 일거에 동물을 인간화해서 죽은 자를 변질시키는 어떤 것이 된다. 즉 죽은 자와 동물이 이혼하면 죽은 자는 인간에 머물거나 초인이 되며 동물은 존재자이기를 그만두고 인간 이하 혹은 인간에 반하는 방향으로 변화해간다.

 

휴-존스가 검토한 구별의 몇몇 측면을 정리하면, 수평적인 샤머니즘은 외적인 실천인 반면 수직적인 샤머니즘은 내적인 실천이다. 아마존의 선주민에게 외적인 실천은 (논리적으로, 시계열적으로, 우주론적으로) 내적인 실천에 앞선다. 그리고 외적인 실천은 완전한 형이상학적 내면성을 갖춘 추장제나 국가의 산출을 저지하는 잔여로서 항상 조작적인 상태에 머물며, 그 결과 북서아마존의 집단과 같은 더욱 계층적인 형식에도 적용된다. 죽은 자는 부분적으로 동물이기를 결코 그만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죽은 자는 신체를 소유하는 한 망령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의미에서 귀족으로 태어날 수 있었다 해도 그 누구도 선조를 지워버릴 수 없다. 만약 그것이 내부의 시공간, 즉 신화의 전(前)우주론적이고 전(前)신체적인 평면에 있지 않다면, 순수한 선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속에서 인간과 동물은 상호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다른 장소에서 동물, 식물, 그리고 존재에 대한 다른 아마존의 범주는 완전한 인간적 상태이기를 끊이지 않고 계속한다. 그들이 포스트신화적으로 동물로 변용하는 것은 원초의 인간성, 즉 그들의 현실역동적인 표상을 향유하는 샤먼적인 언어실천에 더 가까이 가기 위한 기초를 반(反)-실현한다는 것이다. 모든 죽은 자는 어떤 종(種)의 동물적인 존재이기를 이어간다. 그리고 모든 동물은 어떤 종의 인간적 존재이기를 이어간다. 아마존의 사회체라는 밀집하고 다양하고 풍부하며 드넓은 숲속을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초월성의 발생원에 푹 담금으로써 인간성은 여전히 강도적이기를 계속한다.

 

아마존의 수평적인 샤먼은 이 지역에 편재하며, 정치적 권력과 우주적인 힘이 동시 발생할 수 없음을 나타내며, 고전적인 타입의 공의의 시스템의 산출을 매우 곤란해한다. 아마존이나 중앙아메리카의 이른바 ‘위계(hierarchy)’에 의한 공의(共儀) 제도는 마치 국가가 샤머니즘을 포획한 것 같다. 샤먼의 우주론적인 브리콜라쥬의 끝이자 사제의 신화적 엔지니어링의 시작이다.

 

 

3.

 

수직적 샤머니즘과 수평적 샤머니즘의 대립은 여러 차례 초월성과 내재성 간의 대비와 관련지어지기도 했다(Pedeerson 2001; Holbraad et Willerslev 2007). 아마존의 샤머니즘은 그 배경이 되는 퍼스펙티브주의와 완전히 똑같이 실질적으로는 내재적인 실천이다. 이것은 샤머니즘을 통해 결부되는 인간과 초인간 간의 지위가 평등하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라고 나는 단적으로 지적하겠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이다(내재성과 평등성을 혼동하는 것은 아마존의 민족지에서 종종 나타난다). 그렇다고 존재들 간의 시점에서 고정화된 계층구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존의 퍼스펙티브주의는 존재론적인 존엄한 연쇄를 낀 점진적으로 포섭하는 퍼스펙티브의 척도로 해석될 수 없으며, 하물며 어쩐 일인지 ‘모든 것의 시점’을 투영하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없다. 존재자들 간의 변용하는 잠세력의 차이는 샤머니즘의 존재이유이며, 여러 방향의 방식으로 타자의 시점을 포함하지 않는 시점도 아니다. 모든 시점은 ‘전체적’이며, 어떤 시점도 평등하지 않다면 유사하지도 한다. 즉 수평적인 샤머니즘은 수평적인 것이 아니라 횡단적인 것이다. 시점들 간의 관계성(다양체로서의 시점이라는 관계성)은 이접적(離接的) 총합 혹은 내재적인 배타성의 영역이며, 초월적인 포섭의 영역이 아니다. 결국 퍼스펙티브주의자의 시스템은 레비-스트로스가 아메리카 선주민의 우주론에 대해 논한 표현을 다시금 빌려 말한다면 영속적인 불균형의 상태에 있다.

 

그러나 만약 그러하다면, 모스적인 도식의 구조적 환원인 아마존의 (수평적) 샤머니즘의 해석은 결국 부적절하게 된다. 샤머니즘은 토테믹한 논리와 공의적인 실천 간에 역력히 존재하는 것과 같은 대립을 회피한다. 샤먼은 미숙하고 미발달한 사제가 아니다. 샤머니즘은 준-성직자의 종교라기보다는 오히려 작은 임팩트를 가진 예언이다. 샤머닉한 조작은, 그것이 토테믹한 분류의 상징적인 사례로 환원되지 않는다면, 공의의 상상적인 상호-계열성이 연달아 일어나는 것과 같은 융합의 연속체를 만들어내지도 않는다. 제3의 관계성의 전형으로서 그것은 전(前)-개인적, 강도적, 리좀적인 다양체에 의해 구성되는 이질적인 항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수행한다. 우리의 사례로 되돌아오면, 피/맥주는 재규어가 되는 것을 함의한다.

 

여기서—생성을 논하고자 한다면—우리는 들뢰즈&가타리의 작업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천의 고원』으로, 즉 그들이 토테미즘과 공의의 대립을 말하면서 그러했던 바로 그 장소로.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 제우스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그리스신화에서 쌍둥이형제인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를 가리킨다. 항해의 보호자로서 호메로스는 이들을 사람으로 보았다. [본문으로]
  2. 신화나 민화에 등장하는 ‘장난꾸러기’로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여 그저 장난을 일삼고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는 반사회적인 존재이면서 인간에게 불이나 문명을 가져다준 영웅으로 묘사된다. [본문으로]
  3. 부모와 성(性)이 다른, 부모의 형제의 자식 [본문으로]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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