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존재론의 자루> 일본어논문 강독팀에서 함께 읽고 번역한 것이다. 이 글의 필자인 시미즈 다카시는 불교학자이며 미셸 세르 연구자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대승불교의 창시자인 나가르주나(龍樹), 일본 헤이안 시대의 승려 구카이(空海, 773~835), 가마쿠라 시대의 승려 도겐(道元, 1200~1253) 등의 불교철학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작년부터 관심을 가지고 그의 글을 찾아 읽고 있는데, 너무나도 훌륭해서 많이 배우고 있다. 

시미즈 다카시를 알게 된 것은 오쿠노 카츠미를 경유해서다. 일본에서 전개되는 '존재론의 인류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오쿠노 카츠미를 알 것이다. 오쿠노는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의 채집수렵민에 관한 민족지적 연구를 해왔으며 '존재론의 인류학'의 주요 이론서를 번역했을 뿐더러 그 자신 또한 여러 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5년 전 그의 공개 세미나에 참석한 이후 그의 연구를 한국에 소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면서 오쿠노의 연구활동을 살펴보다가 오쿠노의 동료인 시미즈 다카시를 '발견'하게 되었다. '존재론의 인류학'의 학자들도 그러하거니와 이런 대단한 학자를 만난 것 자체가 내게는 행운 같고, 그래서 그러한 학자들이 감사하다. 

시미즈 다카시는 인류학자는 아니지만 '존재론의 인류학'이 여타 학문과 만났을 때 어떤 시너지를 갖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불교철학 그 자체만으로는 지금의 시미즈의 사상으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존재론의 인류학'에서 보자면 시미즈의 사상은 분명 그 문제의식을 한 단계 밀고 나갔다. 미셸 세르가 '한 연구영역은 다른 연구영역에 의해 풍요로워진다'고 말한 것처럼, 또 데스콜라가 근대의 학문적 세분화는 이제 거의 학문적 효용성이 다했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 인류학자가 어떤 인류학을 해야하는지를 모색할 때에 시미즈의 사상은 훌륭한 본보기를 제공해줄 것이다. 

21세기 학문의 재편성(재구성)은 경쟁적 구도에서 보자면 누가 '게임체인저'가 되는지에 따라 결정되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겉보기에 근대과학(사이언스)의 상대화와 사물의 행위자적 위상을 둘러싼 논쟁들이 과학기술학 또는 과학사회학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 같지만, '결정적인 한방'이 나오기에는 그 태생적 한계가 있다. 다시 말해 안에 있으려 하면서 밖을 보려 하면 그 복잡한 논리에 얽매이기 쉽다. 작금의 학문의 시대적 전환기에서 인류학이 빛을 발하는 것도 안에 있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서양의 우리가 저 안에도 없으면서 저 논리를 따라가게 되면 스스로 변방에 머물게 된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형이상학이자 '게임체인저'로서 과감히 불교철학을 논하는 시미즈의 행보가 주목된다.

다음의 글은 브뤼노 라투르의 사상을 미셸 세르의 그물망 이론을 거쳐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으로 끌어올린다. 이것은 신유물론 등의 논의를 신단자론으로 풀어내기 위한 서설이다. 시미즈의 사상에서 신단자론은 대상적 세계 그 자체인데, 이 글에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대승불교의 화엄적 세계, 곧 만다라로 통한다. 우리 인간에게 그 세계는 정념으로 다가온다. 최근 생태적 연구에서는 그러한 정념을 'sentient'로 이야기하는 것 같다. '생태적 감수성'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것 같다. 불교에서 이 말에 대응되는 용어는 유정(有情)이다.  

 


 

세계의 ‘웅성거림’에 귀 기울이다

: 브뤼노 라투르의 사상적 계보와 그 비전

 

시미즈 다카시(清水高志)

 

브뤼노 라투르는 철학, 인류학, 사회학, 환경론, 현대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진 현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귀재다. 또한, 그는 수많은 논쟁에 참여한 만만찮은 논객이기도 하다. 그는 논객으로서 근대 이래 인간의 뿌리 깊은 어떤 태도에 대한 거절과 기피 등의 형태로 그 자신의 의견을 심심찮게 표명해왔다. 잘 알려졌다시피 그의 의견이란 우리가 과학의 대상을 인간의 관여와는 별개의 외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며 그에 따라 객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Out-there-ness)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이다.[각주:1] 과학적인 지(知)의 대상이 발견되는 과정에서 실제로 인간 주체가 이러저러하게 개입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러한 관여가 사후적으로 은폐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철저하고 집요하게 폭로해왔다.

그의 비판이 향하는 또 다른 표적은 과학적 지식의 입장을 사회학적으로 고찰하는 가운데 주창된 ‘사회구성주의(Social Constructionism)’라고 불리는 입장이다.[각주:2] 이는 앞서 서술한 근대적인 실재론과는 반대로 과학적인 지식 및 기술이 인간집단의 요구와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 그때그때 공유되는 해석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며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던의 근대비판이나 문화상대주의의 말하자면 과학사회학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라투르의 방법론인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 이하 ANT)은 근대인의 가치관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임과 동시에 언뜻 [근대인의 가치관과] 정반대로 보이는 문화상대주의적인 근대비판에 대한 진일보한 비판이다.

본론에서는 후자를 우선 검토하고 그다음 라투르 사상이 어떤 문제의식과 구조를 가지는지를 해명하고자 한다. 또한, 주체와 대상이 환원하는 상호작용 그리고 그 양극에 있는 ‘다수성’과 그 속에서 부상하는 주제군을 미셸 세르의 초기 라이프니츠주의적인 인식론과 비교하고 세르의 인식론을 철학사적인 맥락에 위치 짓고자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대상(질료)으로서의 존재 방식과 형상(형식)으로서의 존재 방식 사이에서 작용체(operator)의 순환, 모듈과 관념의 다극적인 교차교환 등 신단자론적인 세계상으로 이끌리게 될 것이다.

 

1. 비환원의 원칙이란?

 

‘사회구성주의’의 견해를 이론적으로 확립한 트레버 핀치[각주:3]와 비베 비이커[각주:4]의 연구를 예로 들어보겠다. 이 연구 사례는 자전거 기술이 개발되는 과정을 분석하면서 기술개발에 관한 문제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의 관여 없이 그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인위적인 요인이 어떻게 그 성립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지가 분석되고 검증될 필요가 있다. ‘사회구성주의’ 입장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상세한 분석에 기반한다.[각주:5] 그들은 ‘자전거’라는 도구가 그 개발과정에서 어떤 것으로 ‘해석’되는지에 따라 현재의 모습과는 딴판이었을 수도 있고 또 최종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으로 진화했을 수도 있음을 강조한다. 즉, 그것은 [당시] 신사들에게 고속주행을 위한 거대한 앞바퀴와 높은 안장이 있는, 무엇보다 위험을 감수하며 스포츠로서 즐겨 탄 도구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과 아이들까지 포함해서 누구나 안전하고 쉽게 이용하는 이동수단의 가능성이 있었다. 현재의 모습으로 ‘자전거’가 진화해온 것은 반드시 필연적이지 않다. 있을 법한 다양한 ‘자전거’ 가운데 그 모습과 기능이 선택된 사회적 요인과 ‘해석’이 기술의 방향을 크게 좌우한다는 것을 핀치와 비이커는 정밀하게 검증한다.

라투르에 의하면, 근대적인 과학관은 지식이 참인 요인을 소박하리만치 그것이 다루는 외재적인 대상에 귀속시키며 인간의 관여를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사회구성주의’는 오히려 그것[지식이 참인 요인]을 인간집단과 그에 의한 ‘해석’이라는 요인에 일방적으로 귀속시킨다. ‘외재적인 대상’인가 아니면 ‘인간집단’인가에 따라 방향성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양쪽 요인의 작용을 단지 어느 한쪽으로 귀속시킨다는 의미에서 두 입장 모두 환원주의다. 이러한 환원주의 모두를 부정하는 라투르의 태도는 ‘어느 쪽도 아니다(neither)’라는 의미에서 ‘비환원주의’라고 할 수 있다.[각주:6] 자연과학이 다루는 대상이 발견될 때, 기술혁신이 일어날 때, 실제로는 양쪽 요인은 항상 줄다리기하듯이 서로 작용한다. 라투르가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양쪽 요인을 시야에 넣은 다음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순환적인 작용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과학적 지식의 대상을 외재적으로 상정하지 않으며 인간 주체의 작용을 고려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한 대상이 찾아지고 발견되기까지는 다양한 종류의 인간 주체의 관여가 있으며 기술적 대상에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그러한 다양한 양상과 연관(association) 자체는 그 대상이 발견된 후에는 망각되고 만다. 대상과 인간 주체의 순환적인 작용에 대한 분석은 그러한 여러 관계의 경합과 연관까지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어야 한다. 대상이 최종적으로 특정 형태로 수렴되는 데에서 주체의 접근이 복수로 나타난다는 점을 유의해보자.

 

2. ‘다수성’의 문제

 

이 ‘다수성’이라는 주제는 라투르의 접근방법에서 정말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앞서 ‘자전거’의 사례로 말하면 그 있을 법한 모습과 기능에는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더욱 안전한 ‘자전거’를 구현하기 위해 도입된 ‘고무 타이어’가 의외로 고속주행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안 덕분에 현재와 같은 자전거로 안착하였다. 부녀자를 포함해서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손쉽게 이동 가능한 수단이라는 ‘해석’과 스포츠로 즐겨 타는 도구로서의 ‘해석’은 타협점으로서 중간적인 ‘해석’을 포함하며, 실제로 지금 모습의 ‘자전거’가 성립하기까지 다수의 ‘해석’이 경합해왔다. 각각의 ‘해석’을 채택한 인간집단 간의 상호 타협은 사전에 그들 내에서 합의가 성립했기 때문이 아니다.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고무 타이어’라는 객체=매체였고 그것이 초래한 고속주행이라는 부산물에 의해 사후적으로 복수의 ‘해석’ 간의 납득할만한 착지점이 찾아진 것이다.

이렇듯 매체로서의 중심적인 대상이 행위체(actant)[각주:7]로 작용함으로써 다양한 행위자(actor)가 결합하고 또 그것들이 다양한 배치를 채택하는 것(네트워크)이 밝혀지는데, 이것이 곧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의 특징이다. 이 중심적인 대상은 기술적인 지(知)가 수렴하는 [해석의] 절충안 혹은 과학적인 지(知)의 대상인데, 그것과 결합해서 작용하는 행위자들의 ‘다수성’과 그 관계는 단지 대상에 대응되는 사회와 같은 것만이 아니다. 19세기 파스퇴르가 젖산발효 효소를 발견한 것을 예로 들어보자. 당시에는 발효 현상을 무언가의 미생물에 의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이단적이었다. 오히려 화학적인 반응으로 보는 것이 대다수였다. 파스퇴르 자신도 처음에는 발효를 촉발하는 요인으로 어떤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했다. 그러나 젖산발효라는 현상이 수반하는 ‘회색 물질의 점들’이 관찰되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파스퇴르는 이 ‘대상 x’가 어떤 ‘작용’을 할 수 있는지를 연구실 내 행위자를 동원해서 검증해갔다. 그것은 물을 탁하게 하거나 석회를 소실시키거나 결정 또는 침전을 일으킨다. ‘대상 x’는 이 무수한 행위, ‘작용’에 이름 붙여진 것이며 행위체가 된다.[각주:8]

파스퇴르는 이 ‘대상 x’를 알코올 발효를 일으키는 양조효모와 비교하고 발효 현상과 관련해서 그 ‘작용’의 유사성과 차이를 밝히고 나아가 학계의 다른 성원들에 의해서도 그것이 어떤 행위체인지를 검증해간다. 중심적인 행위체로서 젖산발효 효소는 이렇듯 독립적이고 능동적인 행위체로서 차츰 분리되고 객관적인 것이 되는데, 그 과정에서 파스퇴르에 의한 인적 관여, 다른 학계 성원에 의한 관여, 다른 물적 행위자(석회, 물, 결정 등)와의 관계 맺음이 반복적으로 행해지며 그것들이 중심적인 행위자를 둘러싸고 분절화되고 의미화된다.

중심적인 행위체와 여러 행위자의 작용은 전자가 능동적인 행위체라는 것이 검증되는 과정에서 그야말로 순환하듯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지만, 인간 주체에 의한 접근은 그때마다 중심적인 행위체인 객체를 경유해서 행해진다. 그러나 그러한 객체가 지식의 대상으로서 객관적이고 자율적인 것으로 일단 확립되고 나면 순환적인 작용은 자각되지 않고 인간의 관여와는 별개로 그것이 처음부터 존재해왔다고 생각하게 된다. 파스퇴르의 발견 이전부터 젖산발효 효소는 존재한 것이 된다. 그렇지만 그에 따라 우리는 그러한 외재적인 지(知)의 대상과 그것을 언어화하는 주체가 처음부터 서로 분리된 것으로서 ‘일대일 대응’하고 있다는 근대적인 과학관에 함몰된다.

과학적인 지의 대상에 대한 인간 주체의 다양한 접근은 객체를 매체로 다루지만, ANT가 무엇보다 해명한 것은 그러한 접근과 그에 동원되는 주변적인 행위자의 다양성이다. 이때 인간 주체의 존재 양식으로서 그 속에서 구체적으로 분석되는 것은 객체의 능동적인 작용을 맞아 비로소 결합해가는 갖가지의 주체적인 접근이며, 그러한 작용을 빼놓아도 혹은 그러한 작용을 개입해도 낱낱이 흩어진 그 ‘다수성’이다. 그 의미에서 라투르가 행한 것은 실제로 인적인 행위자가 과학의 대상에 과도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해 유일하게 가능한 참된 회의라고도 말할 수 있다.

 

3. 질료에서 형상으로, 형상에서 질료로─순환하는 작용체

 

라투르는 『판도라의 희망』에서 아마존의 삼림토양 조사를 예로 들면서 앞서 서술한 ‘일대일 대응’의 과학 모델을 비판한다.[각주:9] ANT에서는 일반적으로 중심적인 행위체는 매개항으로서 단독의 객체이며 인간 주체에 의한 접근 측에 ‘다수성’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데, 매개항으로서 객체가 복수로 한꺼번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라투르가 제시하는 모델은 ANT가 과학적인 지의 발견보다 보편적인 구조에 대한 해석으로 파악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식이라는 것이 어느 하나의 정신이 어느 하나의 대상과 일대일로 대응하는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참조(Reference)라는 것이 어느 한 사실이 그 사실에 의해 참이 증명된 문장에 의해 특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반대로 우리는 각각의 단계에서 한쪽 끝에 질료(객체), 다른 한쪽 끝에 형상(형식)을 가진 공통의 작용체(Operator)를 인식해왔다. 이 작용체는 유사성으로는 결코 메울 수 없는 단절에 의해 다른 단계와 떨어져 있다. 또 [작용체는] 객체와 언어 사이의 차이를 전달받아, 시대착오적인 언어철학에 의한 이 양자의 고정을 해체하고, 재분배해가는 구슬처럼 잇듯이 연결된다. […] 이 연쇄의 본질적인 특징은 가역적이며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한 정신이 어느 한 대상과 일대일로 대응한다”라는 ‘일대일 대응’ 모델은 “한 사실이 그 사실에 의해 참이 증명된 문장”에 따라 역으로 참으로 간주되는 것과 같다. 대상과 정신(주체)은 이 경우 단지 서로를 긍정하는 루프를 표현할 뿐이라고 라투르는 말한다. 이러한 합선(short circuit)에 빠지는 것은 스스로 만들어낸 물신(fetishism)을 숭배하는 우상숭배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여기서는 또한 객체와 주체의 관계가 ‘대상과 정신’, ‘질료와 형상’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중심적인 행위자와 주체의 접근 간의 순환적인 관계는 그러한 양자를 왕복 순환하는 “한쪽 끝에 질료(객체), 다른 한쪽 끝에 형상(형식)을 가진 작용체”로서 파악된다. 그리고 바로 앞서 서술한 루프에 빠지지 않은 데 필요한 것은 이 ‘작용체’가 그 왕복 순환의 과정을 통해 “결코 메울 수 없는 단절에 의해 다른 단계와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사 과정에서 ‘작용체’ 또는 참조항은 질료(객체)로서의 존재 방식으로서도 형상(형식)으로서의 존재 방식으로서도 점차 원형을 남기지 않게 된다. 라투르는 처음에 삼림과 초원이 찍힌 사진을 예로 들어 ‘토양조사기’라 불리는 바둑판 모양으로 늘어놓은 입방체에 수납된 미묘하게 색조가 차이나는 토양 사진, 식물표본을 채집하는 식물학자 사진 등을 차례차례 보여주는데, 그 변형과정은 매우 뚜렷하다. 이러한 갈지자 순환과 변환의 과정을 경유함으로써 그것들은 어떤 의미로도 복잡화하며 구체화한다. 이러한 순서에 대해 “각각의 단계는 후속하는 것에게는 질료이며 선행하는 것에게는 형상이다. 또 말로서 열거되는 것과 사물로서 열거되는 것 사이의 거리와 똑같은 폭의 단절에 의해 각각의 단계는 다른 단계와 떨어져 있다”라고 라투르는 말한다.

ANT는 대부분 매개항으로서의 중심적 행위자를 고정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적극적으로 변형되고 대체된다. 아니 오히려 그 속에는 매개항과 매개항을 연결 짓고 공존시키는 단절을 내포한 ‘번역’이 있다.[각주:10] ‘일대일 대응’의 과학 모델은 주체적 접근의 ‘다수성’에 의해 부정될 뿐 아니라 매개항=객체 측의 ‘다수성’에 의해서도 부정되어야 한다. 앞서 논한 neither의 ‘비환원주의’는 이러한 양극에서의 ‘다수성’ 또는 그러한 ‘교체’라는 절차를 따라야만 성립한다. 과학적인 지의 대상이 발견되거나 기술혁신이 일어나는 시점에서는 확실히 무언가의 대상으로 수렴이 일어나는데, 인류에 의한 지의 생성 그 전체의 양상 자체를 생각하면 특정의 실재적 대상으로부터의 구성이라는 관점에서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요컨대, ‘사회구성주의’를 부정하는 데에서 인적, 주체적 행위자가 단지 ‘해석의 합의형성’을 위한 성원으로 파악되고 또 그것을 출발점으로 과학적인 지의 대상의 발견이나 기술혁신이 설명되는 것이 논파되듯이, 그와 완전히 마찬가지로 실재적인 객체의 극에서 그것들 속에 특정의 출발점을 설정하고 거기에 원인을 귀속시키는 ‘구성주의’는 논파되어야 한다.

질료와 형상 간의 가역적 및 교차 교환적인 ‘비환원주의’가 과학적 지의 생성 현장에서 이뤄지는 엄정한 회의라고 한다면, 협의의 ANT가 중심적인 행위체에 복수의 주체적인 접근(이 접근에는 연구실 내 다양한 개별 종의 객체까지 동원된다)이 결부된, 말하자면 결절점을 가진 방사선 모양의 구조를 통해 이미지화되는 것과 달리, 그것[비환원주의]이 초래하는 매개항=객체의 ‘다수성’은 그러한 결절점=매개항이 무수히 존재하는 그물망의 총체를 이루게 된다. 그것은 앞서 서술한 “메울 수 없는 단절”을 내포함과 동시에 특정한 출발점이나 중심을 가지지 않는 느슨한 연계로서의 구조를 묘사한다. 실제로 여러 학문의 총체가 엮어내는 것을 그러한 구조체로 이야기한 선각자가 미셸 세르이다. 라이프니츠 학문의 분기 양상을 고찰하는 것에서 발전해 동시대의 인식론을 그러한 그물망의 형상=질료적이며 다극적인 총체─그 자체로 단자론적인 총체─로 파악한 미셸 세르의 초기텍스트가 여기서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낸다.

 

4. 그물망 모델

 

라투르의 사상형성에 있어서 미셸 세르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언급도 많이 돼 있고, 예를 들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에서는 ANT의 방법론 그 자체를 이론화하기 위해 세르의 준-객체론이 원용되고 있으며, 『근대의 〈물신사실〉 숭배에 대하여』의 주해에서는 세르가 『루크레티우스에 있어 물리학의 탄생(La Naissance de la physique dans le texte de Lucrèce)』(1977)에서부터 『동상(Status)』(1987)에 이르기까지 ‘모범적인 과학인류학’을 ‘밀고 나갔다’라고 평하고 있다.

앞서 ‘일대일 대응’의 과학 모델의 부정은 매개항=객체끼리의 단절을 내포한 번역─게다가 중간항끼리의 연계에 의해 이뤄지는 설명과는 다른 비연역적이며 상호적인 번역─에 의한 지(知)의 점진적인 생성이라는 모델로 우리를 불가피하게 이끌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매개항=객체와 매개항=객체와의 상호번역, 상호간섭에 의해 성립하는 그물망의 엔치클로페디(Enzyklopädie)의 전체상을 세르의 초기텍스트 『간섭』은 그려내고 있다. 이 논저는 본래 라이프니츠를 논한 그의 박사 논문의 부 논문으로 쓰인 것으로, 바로크 시대의 천재에 대한 사색에서 제재를 바꾸어 동시대의 여러 학문의 상황에 관한 논의를 처음으로 전개한 기념비적인 저작이다. 또한, 이 논고는 고등사범학교에서 그의 지도교수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의 과학사 연구(신과학적 정신)와 대비하는 형태로 자신의 입장을 제출한 것이며 물의를 일으켰다고 한다.

무엇이 양자의 입장을 그 정도로 가른 것일까? 세르는 동시대의 여러 과학이 이미 특권적인 참조항으로서의 ‘여왕-과학’의 지위를 상실해 상호참조(inter-férence)의 체계로 있을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이론적 우주의 법칙으로서의 교환, 개념들의 수송과 그 착종, 영역들이 교차해 뒤덮이는 것, 참조항 없는 사색 속에서의 의미의 제한 없는 대조가 지금부터 모방하고 묘사하고 표현하고 재현하는 것이 될 터인데 이것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 물 자체인 것들이 담겨있는 그물망 그 자체, 상호-정보화의 터무니없이 착종한 세계의 그물망이다. 이론을 가닿게 하는 순환이라는 의미에서 커뮤니케이션은 다시금 불가결한 것이 된다.

 

학문의 영역들이 여기서는 이미 ‘그물망’의 결절점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자기 참조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영역에서 발견되는 지(知) 속에 틀어박히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상 학문 영역의 분할은 이제 별로 의미가 없다. 오히려 “한 연구영역이 다른 연구영역에 의해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연구자가 아니라고까지 세르는 말한다. 예를 들어 무기화학은 물리학에서 그 고유한 방법을 가져와 크게 변모했으며 배위화합물을 다루는 데에서 분자 유기화학을 본보기로 삼았다. 천체물리학을 예로 들면, 그것은 끊임없이 광학, 분광학, 화학, 전기학, 전자파이론 등의 도움을 얻고 있다. 라투르와 카롱이 중시한 ‘번역’ 개념은 여기서 결절점=매개항끼리의 상호-정보화, 커뮤니케이션, 그것들의 간접적인 대화라는 형태로 일반화되며 엔치클로페디의 바로 그 총체에서 지(知)가 만들어지는 상황으로 다뤄지고 있다. 다극적인 객체들 속에서 행해지는 대화로서 성립하는 엔치클로페디의 이 단계를 세르는 ‘대상-대상’적 단계라고 부르고 있다.

앞서 살펴봤듯이 라투르는 근대인의 과학적 실천에 있어서 지(知)의 대상과 그 연구자, 곧 언어 기술자가 ‘일대일 대응’하고 있음이 전제돼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주체-대상’ 간 일종의 합선(short circuit)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석했다. 이러한 대응 관계의 전제는 가령 그것[대응 관계]이 착각이나 기만이었다 해도 이미 엔치클로페디와 과학적 실천이라는 방향성의 본질적인 차이(相違)를 나타내며 그 패러다임 간의 대비를 가능하게 한다. 세르는 이러한 대응 관계를 『간섭』에서 세 종류로 분류하고 있으며, 제3단계인 ‘대상-대상’적 단계에 앞서서 제1의 ‘주체-주체’적 단계, 제2의 ‘주체-대상’적 단계가 있다고 말한다.

이것들의 다양한 관계 맺음에 대해 세르는 과학사가로서의 입장에서 역사적・단계적으로 논하는데, 여기서는 관계 맺음 그 자체의 존재 양상을 과학적 실천의 문제로서 다뤄보겠다. 라투르가 과학인류학적 분석에서 반복해서 검증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문제다. 세르에 의하면, 수리과학의 진보는 그로 인해[진보에 따라서] 이론의 ‘기원’이 위치 지어지는 여과기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어느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옮겨감에 따라 그 이론은 형식적으로 세련되고 ‘순화’돼 가는데, 그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이전의 이론은 경험적이고 기술적인 것이 된다. 실제로 형식적으로 ‘순수한 것’과 ‘기술적인 것’은 둘 다 ‘기원’일지언정 “그것들의 양 극한에 삽입된 운동이 불가결하다”라는 것이다.

수리과학에도 두 개의 ‘기원’이 있으며 그것들을 섞바꾸어 경유함으로써 발전해간다.─『판도라의 희망』에서 라투르가 말한 ‘작용체(operator)’가 질료와 형상(형식) 사이에서 셔틀처럼 순환하듯이─그렇다면, 이때 과학적 실천은 주체와 대상의 대화로서 다뤄지는 것일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물론 물리학처럼 분야 자체가 실험을 가능하게 하는 대상에 의해 조건 지어지는 학문을 중심으로 세팅해보면, 과학적 실천은 연구하는 주체와 대상의 끝없는 대화로 다뤄지기 쉽다. 그러나 이 대화는 어디까지나 합리적 지성에 의한 ‘순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대상은 계속해서 필요해지는 매체이지만 여기서는 일종의 잔류물, 불순물이다. “자, 그때마다 불순물은 문자 그대로 또 대상적인 의미에서 실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는 의미가 있다.─과용해(過溶解) 등의 잘 알려진 현상을 운운하는 데까지 갈 필요도 없고, 촉매란 정말로 그것이 없으면 화학반응이 일어나지 않는 불순물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주체-대상’적 단계는 그 대화가 이러한 과정에 있는, “기술적이고 점진적이며, 또 가공되고 수정되는 경험”으로서의 과학의 존재 방식이며, 실증적이고 실험적인 과학적 실천을 중심으로 하는 과학관이다. 바슐라르의 과학적 논의 또한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거기서는 ‘주체→대상’ ‘대상→주체’라는 관계 맺음이 성립한다. 이러한 관계 맺음은 그러나 자연과학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경험이라는 것을 수동적인 대상에 대한 나(주체)의 개입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수동적인 나의 오성(悟性)에 대한 사물의 개입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서 각각은 실재론, 경험론 등의 철학적인 입장을 대표하게 된다. 글자를 써넣는 타블라 라사(tabula rasa)[백지]에 해당하는 것이 그때그때 대상 측에 상정되거나 주체 측에 상정된다는 것이다(그림 참조).

 

5. 사물들의 웅성거림

 

그러나 여기서는 또한 하나의 합선, 루프가 성립할 때가 있다고 세르는 말한다. 그 루프에서 다른 단계가 생긴다.

 

주체를 주체로서 구출할 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주체를 모범적인 대상으로 존재시키는 것에 의해서다. 관념론이란 주체에서 대상으로 또는 대상에서 주체로 향하는 정보 회로의 합선이다. 이 합선이 대상을 회로에서 빼버린다(에포케(epohkē); 판단중지). 나는 대상에 정보를 주고, 대상은 내게 정보를 주며, 나는 나 스스로 자기에게 정보를 준다.

 

‘주체-주체’적 단계는 이러한 합선의 대각선상에 있어서 이미 대상이 불순물이기도 한 것을 의식하지 않게 된 바로 그 상태다. 라투르의 표현으로 말하면 이것은 정말로 매개항으로서 대상의 존재 방식이 망각되고 이미 명확히 규정된 중간항만을 연결한 것으로 대상이 이해되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근대인의 과학관의 전제 자체다. 라투르가 ‘순화’라는 용어에서 종종 지적하는 조작과 그 구조는 세르에게는 ‘주체-주체’적 단계라는 형태로 주제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대상의 망각과 그 기만에 대해, 그러나 세르는 ‘주체-대상’적인 존재 방식에 구애되어 저항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가 제시하는 것은 다른 대각선이다.

 

주체-대상, 혹은 대상-주체라는 대화는 실험적인 해독의 대화였다. 이 대화는 수학적인 매체에 의거한 관념론에서 보면 나-타자의 대화(플라톤), 나-나의 대화(데카르트)에 대각화된다. 이제야 이러한 대화들 속에서 전달되는 정보의 개념을 보편화하고 추상화함에 따라서 새로운 대화를 사유하는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대각화 혹은 합선의 절차를 역전시켜야 한다. 그리하면 이 역전이 인식의 이론의 불변항으로서 대상을 등장시킨다.

 

주체는 정보의 이상적인 보유자이며 그 때문에 지금까지는 그 발신자, 수신자로서 안정돼 있었다. 그 속에서 앞서 서술한 합선이 생기는데, 그러나 대상 또한 다양한 형상(morphé)을 받아들여 다른 대상에 건네는 수용자(porte-empreinte)라고 세르는 말한다. ‘주체-대상’적 단계에서 대상은 합리적 이성에서 보면 일종의 필요불가결한 불순물이고 거기서 물리현상이 일어나는 매질(milieu) 혹은 촉매와 같은 것이었다. ‘대상-대상’적 단계에서는 어느 한 현상이 특정 대상(질료)을 떼어내 다른 대상(질료)과 결합해간다. 그 의미에서 대상(질료)은 적극적으로 다른 것이 되어가는데, 세르는 그것을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의 ‘형상(形相)의 수송’이라고 부른다.

『판도라의 희망』에서 라투르는 과학적 실천을 질료와 형상 사이를 섞바꾸어 순환하면서 그 양극을 변환하며 차츰 다른 것으로 ‘호환’해가는 조작으로 묘사했다. 거기서는 매개항=객체는 무언가의 형상(형식)을 모델화하는 것으로서 나타나고 더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것으로서 단계적으로 변환돼 간다. 라투르는 이러한 변환 과정을 앞서 살펴봤듯이 단절과 변화를 강조해가며 말하는데, 세르는 오히려 대상과 다른 대상의 ‘커뮤니케이션’의 성립, ‘형상의 수송’이라는 형태로 파악했다.

“커뮤니케이션의 그물망으로서 세계는 질료 형상적인 극 혹은 정점에서 이뤄지는 그물망”이라고 세르가 적절히 말했듯이, ‘대상-대상’적 단계에 있는 세계는 서로 연결해가는 질료와 형상을 변화시키면서 다극화하고 그물망을 계속해서 짜며 뒤섞여간다.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의 ‘형상의 운송’이란 그러한 형상을 통해 서로 다른 대상=극끼리 서로를 표출해간다는 것이다. ANT에서 분석된 상황이 철저하게 탈중심적으로 엔치클로페디의 총체로 확장된다면, 또 그것이 대상 세계와 그 속에서 성립하려는 온갖 지(知)의 존재 방식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질료 형상적인 실체’인 모나드와 모나드 간 상호표출의 철학에 있어서 라이프니츠가 직관한 것을 현재적으로 재정의한 것이다. 본래 특정의 실재적 대상으로부터의 구성이라는 발상은 라투르의 입장에서 기피될 수밖에 없었는데, 라이프니츠가 모나드를 말한 것도 원자론에 대한 강력한 안티테제로서였다.─복합에 앞서 있는 단순체라는 모나드의 유명한 정의는 구성이라는 것을 끝까지 거절하기 위한 로직이었다. ‘대상-대상’의 대화로서 성립하는 여러 학문의 그물망이 그려내는 것은 특정의 출발점을 갖지 않는 혹은 그것이 편재하는 단자론적인 상호-참조의 공간이다.

라이프니츠가 「관념에 대해서」라는 짧은 글에서 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나를 사물로 이끌 뿐만 아니라 사물을 표현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다”라고 쓴 것을 상기해보자. “사물을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속에 표현될 수밖에 없는 사물의 양태에 대응하는 양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계의 모듈은 기계 그 자체를 표현하고 있으며 입체 투영도는 입체를 표현하고 있으며 언어는 사상이나 진리를, 숫자는 수를, 대수 방정식은 원이나 그 외 도형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그는 표현하는 것이 표현되는 것과 유사할 필요는 없지만 무언가의 유추(analogy)가 있으면 좋다고 말한다. 관념을 얻는다는 것은 그것을 표현하는 다른 무언가를 기호든지 객체로서 가진다는 것이다. 일찍이 탈레스[각주:11]가 피라미드의 높이를 재기 위해 막대의 길이와 그 그림자의 길이가 같게 될 때를 기다려 피라미드의 그림자 길이를 쟀듯이, 무언가의 매개항으로 바꿔놓는 것을 경유함으로써 한 관념은 명확해지고 전용되며 전송된다. 대상=매개항은 그 전형적인 존재 방식으로서 노몬(gnomon)[해시계의 바늘] 또는 모듈이며, 지질학자들이 다루는 ‘토양조사기’ 또한 그러한 것이다.

대상(질료)이 형상(형식)을 표현하며 포함하는 것으로서 있다는 것[각주:12], 그리고 형상 또한 다른 대상들 사이를 매개하는 유추(아날로지)로서 기능한다는 것. 라투르가 분석했듯이 그러한 대상을 몇 번이고 [각기] 다른 형태로 매개항으로 삼아야만 과학적 실천 자체가 성립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를 직관하기 어렵다.─우리는 그에 대해 한 보편적인 형상 속에 개별의 대상(질료)이 포함된다는 쪽으로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주체-주체’의 대화는 이렇게 해서 대상(질료)을 회로에서 빼버리고, ‘주체-대상’의 대화에서도 대화를 주체에 대응시키는 것만으로 그것들의 양극이 항상 ‘교체’되어 탈중심적으로 다극화해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았다. 반대로 말하면 일단 이를 인정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단자론의 세계관으로 이끌리지 않을 수 없다.

세르가 『간섭』에서 이야기한 ‘대상-대상’적 단계로서 엔치클로페디의 그물망은 라이프니츠 학문의 현재성을 재고하며 그것[그물망]을 통해 근대 이후의 과학관을 뛰어넘어 새로운 형이상학(méta-physique)을 확립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여러 학문의 역사의 총체를 이야기하려는 터무니없는 시도이기도 해서 그것을 더 응용해서 발전시키는 것은 당시로선 어렵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라투르가 그의 과학인류학에서 실험한 것은 구체적이고 한정된 상황의 분석이면서 세르의 신-라이프니츠주의의 핵심을 훌륭하게 다룬 집요한 검증이다. 주체 관계에 있어서 ‘비환원의 원칙’, 다수성을 어떻게 다룰지 등등 그의 사고를 형성하는 근본적인 몇몇 문제는 이 지적계보에 위치 지울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대상=모듈로 넘쳐나는 세계의 웅성거림에 귀 기울이는 것. 라투르가 행한 것은 바로 그 경건한 실천임이 틀림없다.

             

「世界の《ざわめき》に耳を傾ける」、『たぐい』 Vol.3、93‐106、2021年2月11日。

 

 

     

  1. 브뤼노 라투르, 스티브 울거, 『실험실 생활: 과학적 사실의 구성』, 이상원 옮김, 한울아카데미, 2019. [본문으로]
  2. 앨런 소칼(Alan David Sokal)이 2000년대 초엽 프랑스 현대사상의 저술가들과 당시 과학론자들을 겨냥해 그들이 사용하는 과학용어의 자의적인 남용 그리고 자연과학을 왜곡하는 태도를 비판하며 반향을 일으킨 소위 “과학 전쟁”에서 라투르는 이러한 ‘사회구성주의자 그룹’과 동일시되었다. 그래서 더더욱 사회구성주의 입장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회의로부터 라투르 사상이 확립되었다는 것을 밝혀둘 필요가 있다. [본문으로]
  3. [역주] 트레버 핀치(Trevor J. Pinch, 1952~2021)는 영국의 사회학자이다. 북아일랜드에서 태어났으며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에서 물리학 학사를, 바스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문으로]
  4. [역주] 비베 비이커(Weibe E. Bijker, 1951~)는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 대학교 사회과학기술학과 명예교수이다. 암스테르담대학에서 철학 학사를, 트벤터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문으로]
  5. Trevor J. Pinch and Wiebe E. Bijker, 1987, “The Social Construction of Facts and Artefacts: or How the Sociology of Science and the Sociology of Technology might Benefit Each Other,” In The Social Construction of Technological System: New Direction in the Sociology and History of Technology, edited W. E. Bijker, T. P. Hughes and T. J. Pinch, MIT Press, pp. 17-50, p.18. [본문으로]
  6. Bruno Latour, 2005, Reassembling the Social: An Introduction to Actor-network-theo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본문으로]
  7. 라투르는 actor보다 actant가 물적 대상까지 아우를 수 있다는 이유로 actant라는 말을 행위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본문으로]
  8. 브뤼노 라투르, 『판도라의 희망: 과학기술학의 참모습에 관한 에세이』, 홍성욱, 장하원 옮김, 휴머니스트, 2018. [본문으로]
  9. 여기서 라투르는 아마존 강가의 숲과 초원의 경계에서 숲-초원의 전이 상황에 대한 토양학자와 박물학자의 조사에 관해 상세히 보고하고 있다. 여기서는 토양 표본이 ‘토양조사기’로서의 입방체 속에 분류, 정리되고 식물 또한 표본으로서 다양하게 채집되는데, 물론 그것은 숲 전체가 아닌 일부를 참조항(reference)로서 가져와 서로 관계짓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표본은 에어컨이 작동하는 식물연구실의 다른 데이터와 비교되거나 기호처럼 그것들을 서로 교체한다. 이러한 참조항을 만들어내는 행위는 “유사성보다도 통제된 일련의 변환, 변성, 번역에 의해 확실성을 증대한다.” 이렇듯 본래의 숲에서 분리된 것이 됨으로써 숲-초원의 상황은 구체적으로 분석되고 조사 자체도 진전해간다. [본문으로]
  10. 이 ‘번역’ 개념을 ANT에 도입하는 데에서 라투르는 미셸 세르의 초기 인식론에서 많은 시사점을 얻었음을 인정한다. 매개항과 매개항 사이에는 ‘간격’과 형상-질료 간의 순환적인 상호작용이 있는데, 객관적인 기성 사실로서 분리되며 받아들여진 것들을 연결해서 설명할 때에 라투르는 그러한 것을 매개항과 구별해서 ‘중간항’으로 부른다. 매개항은 중간항처럼 확정적이지 않다. 바꿔 말해 매개항은 앞서 이야기한 순환적인 상호작용을 거치면서 나아가 그 불확실성 속에서 새로운 앎이 발견되는 상태에 놓여있다. [본문으로]
  11. [역주] 탈레스(Thales of Miletus, B.C.624?~546?)는 그리스의 ‘7현인’ 중 1인이며,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주장했다. 자연현상을 신화 속 신들의 괴력으로 설명하는 대신 자연 그 자체에서 원인을 찾고자 했다. [본문으로]
  12. ‘질료와 그 운동 속에야말로 형상이 있다’라는 주장은 라이프니츠에게서 매우 이른 시기에 발견되는 것으로, 17세의 나이에 은사 토마지우스(Thomasius, Christian, 1655-1728, 독일 계몽주의의 선구자로서 자연법 사상을 주장함)에게 보낸 편지에서 라이프니츠는 그러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는 ‘무언가’가 2분의 1 또는 4분의 1로 분할된다는 것은 ‘2분의 1이 두 개의 4분의 1과 같다’와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관계에 불과하다고 서술한다. 이때 추상적인 전체로서의 선(線) 또한 관계이기에 오히려 ‘합성은 구체적인 것 속에, 즉 이 추상적인 선이 표하는 관계에 있는 물질의 덩이 속에만 있다.’ 그러한 추상적인 관계=형상을 조작적으로 찾아내는 것이 그에게는 수학이다. 데카르트의 수학관이 기하학적인 것에 대해 라이프니츠의 수학관은 대수적이라고 이본 벨라발(Yvon Belaval, 1908~1988 라이프니츠 연구자)이 평한 것은 잘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형상성(形相性)의 위와 같은 조작과 파악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조작은 개념적으로는 무한히 반복할 수 있지만 무한소를 아무리 더한다 해도 결코 전체가 합성될 수는 없다. 이것이 ‘연속체합성의 미궁’이라고 불리는 라이프니츠가 제시한 역설이다. 형상과 질료의 상호포섭과 교차교환을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제논의 역설과도 유사한 이 미궁의 출구를 발견할 수 있다. [본문으로]
Posted by Sarantoya
,

오래전에 기획한 박동환의 철학과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간의 교차 읽기를 아직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 기획은 전적으로 나의 인류학적 탐구가 존재론적 전회라는 사상적 흐름에 가담하기 위한 기초작업이다. 숲은 생각한다, 부분적인 연결들, 식인의 형이상학, 자연과 문화를 넘어서 등등 존재론적 전회를 대표하는 주요 저작들을 읽고 나도 그와 같은 연구 작업을 하고 싶었다. 구태의연하고 지루하고 그저 학자라는 직업군의 생활적 윤활유로 전락한 20세기 인류학과 단절하는 데에서 나아가 산 것뿐 아니라 죽은 것까지도 살아있는 것으로 다루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인류학을 할 수 있는 길을 찾은 듯했다. 그러나 그 길은 여전히 그들의 길이었고, ‘사고의 탈식민화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만난 것이 x의 존재론이었다. ‘x의 존재론은 나의 인류학에 숨을 불어넣어 주었다. ‘x의 존재론의 관점을 통해 비로소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과 그로부터 비롯된 후학들의 문제의식과 탐구 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해는 관점에서 나온다.)

야생의 진리: 불타는 자아의 경계 위에 살다는 말하자면 x의 존재론의 보론이다. 이 책은 20201222일 한국연구원 학술심포지엄 <x의 존재론을 되묻다>를 계기로 조직된 x의 존재론을 둘러싼 여러 논의에 대한 친절한답변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답변이 친절한첫 번째 이유는 저 논의 대부분이 x의 존재론을 이해하지 못한 무지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지까지도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저 논자 중 누가 x의 존재론에 대해서 사용한 해석의 무덤이라는 수사는 해석할 수 없는 그 자신의 무지를 드러낸다. 아니라면, 저 수사가 죽음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보아서도 해석이란 곧 산 것을 죽은 것으로 만들어 묻어버리는 것일 수 있으며, ‘x의 존재론은 애초에 그러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레비스트로스를 해석하는 글을 본 적이 없다. 레비스트로스에 관한 글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한 무지를 드러내거나 이해한 것을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두 번째 이유는 저 논자들에게 x의 존재론에 이르는 맞춤식 길 안내를 해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브뤼노 라투르, 들뢰즈-가타리 등의 곁길을 알려준다.

박동환의 책은 슬프다. 철학이 시학과 가깝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철학이 사라져갈 인류의 운명을 알아서이지 않을까? 인류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사라질까? 박동환이 말한 대로,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온갖 고난을 감내해야 하는 나무의 지혜보다 못해서 차라리 숨(인간사고)을 스스로 서서히 거둬 가게 되는 걸까? 지구상에 영원히 썩지 않길 바라는 폐기물로 자신의 흔적을 대신하면서. 야생의 진리는 사라져갈 인류의 진혼곡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진혼곡은 인류의 지성에 숨을 불어 넣는다.

그래서 박동환×레비스트로스의 기획은 인류학에 유효하다.

 
Posted by Sarantoya
,

다음의 글은 프레데릭 켁(Frédéric Keck)의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출간한 Un monde grippé(2010)의 일본어판인 유감세계(流感世界)(2017)의 서론과 1장의 일부, 결론의 일부를 번역(중역)한 것이다. 켁은 1974년 프랑스 태생의 인류학자이고 20세기 프랑스 지성사(콩트, 레비-브뢸, 베르그송, 뒤르켐, 레비스트로스 등등)에 관한 중요한 저작을 다수 저술했다. 그 책들은 대부분 프랑스어로 쓰였고 또 영어로 번역되지 않아서 그의 학자적 명성은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레비스트로스 4세대를 대표하는, 21세기 존재론의 인류학을 이끄는 주요 학자로 꼽힌다.

이 책은 홍콩에서 발원한 조류 인플루엔자를 현장 연구해서 팬데믹을 신화론으로 다룬 것이다. 원제에서 “grippé”의 뜻은 독감이고, “유감(流感)”은 독감의 중국어 표현이다. 원제를 우리말로 직역하면 독감세상이다. 이 책은 동물 질병(인수 감염병)에 대한 참신한 접근과 이해가 돋보이지만, 무엇보다 그의 독특한 공부 이력 때문인지(프랑스고등사범학교를 나와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캠퍼스에서 문화인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편으로는 현상을 건조할 정도로 꼼꼼하게 기술하여 결론을 끌어내는 미국 인류학의 귀납적인 글쓰기 스타일이, 또 한편으로는 이론적 가설을 앞세워 논리적 추론을 해나가는 프랑스 사회철학의 연역적인 글쓰기 스타일이 엿보인다.

보다시피 20세기 이래 인류는 바이러스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다. 1917년 일명 스페인 독감이 약 5000만 명 추산의 사망자를 낸 이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변형을 거듭하면서 주기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심지어 최근에는 그 주기마저 짧아지고 있다. 특히 중국을 위시한 아시아에서 주로 발생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인구수와 그에 연동된 가축 수가 엄청나게 증가하여 밀집도가 높고(중국에서만 19671300만 마리였던 닭의 개체 수가 30년 만에 그의 1000배인 130억 마리로 늘어났고 돼지의 개체 수가 500만 마리에서 1억 마리로 늘어났다), 인간과 상품의 이동이 국경의 제한을 받지 않고 빈번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대로라면 아시아에서 언제든 또 다른 바이러스 질병이 대규모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켁의 관심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출현이 어떻게 생물학적 실재와 사회정치적 실재를 연결하며 그 결과 어떻게 정치적 파국으로 의미화되는가이다. 다음의 글에서도 나왔듯이, 가령 중세의 페스트는 신의 벌로 의미화되었고 19세기 콜레라는 위생적이지 못한 음료를 섭취할 수밖에 없는 빈곤층을 둘러싼 사회적 불평등으로 의미화되었다. 20세기 인플루엔자는 (유전학의 발전으로 알게 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그것(바이러스)이 생물에 대한 인간의 사회적, 역사적 관계를 반성하기를 촉구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파국을 맞지 않기 위해 생태적 파국을 막으려는 방역(bio-security)’이라는 감시장치는 인간을 포함한 생물들 간의 역사적 총체에 대한 성찰을 회피하고 더더욱 파국으로 치닫게 만든다.

켁은 이 파국을 전체화의 국면, 측 신화로 독해한다. 즉 신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의 실재를 표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실을 총체적으로 떠받치는 세계관을 구축하고 그 표현을 글로벌화한다. 예를 들어 팬데믹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을 현실화하고 인간이 세계를 지각하는 다양한 방식들의 공통분모를 추출해서 그것으로 모든 행위자를 집결시킨다. 요컨대 지구 규모로 전개되는 파국적 위협의 잠재적이고 가상적인 차원을 총체적으로 가시화하는 것이 팬데믹의 신화론이다. 그러나 켁은 인간과 비인간의 사회적, 역사적 관계에 기반한 팬데믹의 신화적 의미화는 끊임없이 변환되는 구조이며, 이 신화가 인간사회를 하나의 전체성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바로 그때 또 다른 신화로 변환한다고 말한다.

2010년에 출간된 책이니 이 책을 통해 조류 인플루엔자 이후 출현한 코로나바이러스의 더욱 강력하고 더욱 총체적인 팬데믹을 설명하기에는 미흡하다. 그러나 현세기의 팬데믹을 둘러싼 방역이라는 감시장치가 전쟁의 효과처럼 전체주의를 부추기는 한편으로 팬데믹의 신화가 전체화에 이른 순간 또 다른 전체화로 향해갈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되씹어보기에 충분하다.

 


 

서론. 동물 질병의 인류학

 

나는 2007년부터 2009년까지 홍콩에서 조류 인플루엔자에 관한 민족지적 현장연구를 했다. 내가 이해하려 한 것은 동물에서 사람으로 바이러스가 전이됐을 때 왜 세계는 인플루엔자 팬데믹에 빠지는가였다. 실제로 홍콩은 인플루엔자가 발생하여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는 전초기지와 같은 양상을 보여주었다. 또 홍콩에서는 1968년에 팬데믹 인플루엔자(H3N2)가 출현하여 전 세계적으로 100만 명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또 이곳에서 1997년에 A형 독감 바이러스(H3N2)가 검출되어 감염된 인간 중 3분의 2가 죽었다. 이 바이러스는 새에게서 인간으로 전이되는 것이었다. ‘세계의 아틀리에라 불리는 광저우 인근에 있어서 금융과 교통의 네트워크가 교차하는 연결망(‘허브’)으로 자리 잡은 홍콩은 다양한 상품이 세계 각지로 운반되기 위한 관문임과 동시에 그러한 상품과 함께 전파될지도 모를 병원체가 통과하는 관문이다. 공식적으로 홍콩은 아시아의 글로벌 도시라고 칭해진다. 경제적, 금융적 조건을 창출하고 상품판매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탓이다. 홍콩은 새로운 질병이 병원보유동물 속에 출현하여 지방의 생태학적 데이터에 따라 글로벌 사회로 퍼지는 양상을 살펴보는 데에는 최적의 장소이다.

그런데 20094월에 멕시코시티에 인플루엔자가 출현했다. 이 발생지 또한 북부와 남부 사이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이었다. 이 바이러스는 몇 주 전에 양돈장이 있는 베라크루스주(Veracruz)의 한 마을에 출현해서 전 세계로 번져갔다. 세계보건기구(WHO)의 담당자들은 611일 이 돼지 기원의 신형 바이러스를 팬데믹이라고 선언하였다. 이처럼 매우 위험하지만 전염력이 낮은 조류 인플루엔자바이러스인 H3N2에 전 세계의 위생 당국이 긴장하는 가운데 전염력이 매우 높지만 위험성은 낮은 돼지 인플루엔자바이러스인 H1N1이 등장한 것이다. 신형 바이러스의 움직임은 여전히 예측 불가능했다. 다만 새에게서 출현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돼지를 매개로 하여 인간에게 전이될 것이라는 거의 30년 전에 나온 과학적 시나리오가 확인됐을 뿐이다.

이 신형 바이러스가 출현했을 때 나는 연속 강의를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머물고 있었다. “분명 당신을 위해 일어난 일입니다.”라고 나를 초대한 사람 중 한 사람이 말했다. 나 자신의 조사를 계속하기 위해 바이러스를 가지고 왔다고 웃으면서 억지를 부리는 자도 있었다. 연구를 깊이 있게 진행할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아르헨티나에 체류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남아메리카에서 공포의 복합체가 형성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고 북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이러한 복합체의 발생을 예측할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이 책을 쓰게 된 것이다. 당초에 나는 홍콩에서 인플루엔자 대책의 글로벌화를 이해하고자 했지만, 바이러스의 전이가 발생한 곳에 내가 우연히 있은 탓에 나는 이 전이를 추적할 수 있었다. 즉 나는 인플루엔자와 그것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준비된 장치를 둘러싼 세계 투어를 자원한 셈이다. 백과전서적인 연구 자세로 세계 전체를 아우른다는 것은 자만일 수 있고, 그러한 목표는 지금 돌이켜보면 접근 불가능한 것이지만, 역사의 우연이 여러 번 겹치면 멀리 떨어진 장소들을 직접 연결해서 단편적인 현상을 수미일관된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다.

나의 시선은 인류학자의 그것이다. 나는 인플루엔자의 궤적을 결정하는 메커니즘을 인식하려 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나타났을 때 각각의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반응하는지를 이해하려 한 것이다. 이 목적에는 현재 바이러스학이 발견한 핵심적인 사실이 결정적이다. 즉 병원체는 예측 불가능한 거동을 보이면서 종()의 장벽을 뛰어넘는 능력이 있다. 바이러스의 전이는 연속적인 생물학적 현상이라고 해도 바이러스에 횡단되는 유기체가 일으키는 반응은 비연속적이다. 똑같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자신의 유전자 코드를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전이시키면서 새나 돼지나 사람 사이를 통과해가는데, 각각의 종에 나타나는 병의 증상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전이 체제에서 이와 같은 변화를 기술하기 위해 통일된 용어를 사용한다. 그들은 DNA 바이러스와 RNA 바이러스(예를 들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구별한다. DNA에는 수복기구가 갖춰져 있지만 RNA는 복제 에러를 수정하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전이의 빈도는 후자가 전자보다 높다. 그리고 분절 RNA 바이러스와 그 외 비분절 RNA 바이러스가 구별된다. 전자는 한 번만 자기 복제하지만, 후자는 수많은 조각으로 분리되어 이 조각들이 복제 때마다 교환된다. 바이러스가 중간적 매체속에서 복수의 동물 종으로부터 요소를 빌려서 자기 복제하는 경우를 유전자 재집합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바이러스가 한 종으로부터 다른 종으로 직접 이동하는 경우에 보이는 유전자 단절(이는 시프트가 아니라 드리프트)과 구별된다. A형 인플루엔자는 동물로부터 사람으로 이동할 때가 있는데 이것과 구별되는 B형 인플루엔자는 보통은 사람들 사이를 순환한다. 마지막으로 A형 인플루엔자 가운데에서도 면역력이 없는 사람의 생체에 출현한 후에 전염할 가능성을 가진 팬데믹 바이러스(예를 들어 1918년에 2천만에서 5천만 명의 사망자를 낸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와 이러한 신형 바이러스가 사람 개체군에 적응한 결과 면역력이 약한 사람에게만 영향을 주는 계절성 인플루엔자(이것은 연간 20만에서 50만 명의 사망자를 내고 있다)가 구별된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은 당연하게도 전이한 바이러스가 위험한 것이 되고 또 게다가 파국적인 것이 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1918A형 바이러스(H1N1)염기배열결정도 특정한 유전자에 의한 그 예외적인 전염력을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이 바이러스의 원인은 그것이 나타난 환경에 귀속되어야 했다. 따라서 종의 장벽이라는 발상은 부분적으로는 확실치 않다. 그것은 동정(同定) 가능한 생물학적 메커니즘이라기보다 사회적 차원을 가진, 생물 사이의 여러 관계의 총체를 나타낸다.

인류학자들이 연구하는 것은 한 사회로부터 다른 사회로 순환하는 요소(기술, 이야기, 영상 등등)가 그것이 횡단하는 다양한 사회 속에서 어떻게 다른 해석을 불러일으키는가이다. 이렇듯 그들은 왜 어떤 환경에서는 병원체가 위험한 것으로서 지각되고 다른 환경에서는 그렇지 않은가에 관한 과학적인 검토를 수행할 수 있다. 인류학이 해명한 것에 의하면, 병의 의미는 그것이 사회적 질서와 신체적 질서를 전복시키는 방식에 의해 주어진다. 그렇다면 동물 질병은 인간이 자신의 환경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으로 작동되는 방법을 구축하듯이 인간과 동물의 여러 관계에서의 변환(transformation)을 표현한다. 이때 인류학은 다양한 생태학적 변화를 통합하도록 공중위생에 관한 문제들을 재구성하는 것에 공헌할 수 있다.

1970년대 말 세계보건기구는 인류가 경험한 가장 무서운 질병 중 하나인 천연두 대책 캠페인의 대성공에 고무되어 전염병의 근절을 선언했다. 이 병(천연두)은 동물에서 사람으로 전이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사람 개체군 전체에 백신 접종을 시행함으로써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앙아프리카 원숭이에서 신형 바이러스가 출현함에 따라(특히 에볼라는 매우 빨리 감염자를 죽이고 효과적으로 전파되고, 에이즈는 인간의 면역계에 비교적 오랜 기간 잠입하여 지구 전체로 확산하였다), 이러한 낙관적인 시나리오는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생물학적 연구는 새로운 병원체의 출현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이러한 병원체를 병원보유동물 안에 오래 묶어 두는 것을 목표로 삼아왔다. 여기서 병원체는 거의 발병하지 않은 상태로 순환하지만, 사람에게 도달하고 나면 높은 병원성을 보인다.

이러한 모든 신흥 감염증 중에 (신형 바이러스가 발견될 때마다 그 수는 계속해서 증가하는데) 인플루엔자는 중심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계절성 인플루엔자라는 형태로 인류에게 가장 흔히 발병하는 질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닭과 돼지라는, 인간이 가장 빈번하게 접촉하는 동물로부터 출현하기 때문이다. 인플루엔자는 주목할만한 동물 질병이 되었다. 즉 그것은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예상을 벗어나는, 우리 일상에 뿌리내리고 있으면서 그와 동시에 이 시대 최대의 파국을 일으키고 있다. 이렇듯 20세기에 인플루엔자가 보여준 중대함은 지금 이 세기에 생물 간의 여러 관계에서 어떤 변형이 일어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중세의 페스트는 신의 벌로서 해석되었지만, 19세기의 콜레라는 음료수에 대한 접근에서의 사회적 불평등을 통해 설명되었고, 바이러스의 전이는 지구상의 인구 증가와 상관적인, 가축의 수의 증대와 결부된다. 20세기가 인플루엔자 팬데믹으로 특징지어진다면(1918년의 A형 독감(스페인 독감)(H1N1), 1957년의 아시아 독감(H2N2), 1968년의 홍콩 독감(H3N3), 2007년의 인플루엔자(H1N1)) 그것은 20세기가 유전학의 시대임과 동시에 동물과 인간 각각의 개체군 간 이동의 시대라는 것을 말해준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유전자의 (헤마글루티닌을 나타내는 H 단백질과 뉴라미니다아제를 나타내는 N 단백질에 의한) 염기배열결정에 의해 글로벌한 수준에서 사람과 동물 각각의 개체군 속 분자적 수준에서 변이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팬데믹의 연속은 단지 과학적 탐색력의 개선의 효과뿐만 아니라 병원보유동물 수의 증가의 결과인 것이며, 따라서 동물 수가 증가함에 따라 바이러스가 전이되는 경우 또한 함께 증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967년부터 지금까지 중국에서 닭의 개체 수는 1300만 마리에서 130억 마리로 증가하였고 돼지 수는 500만 마리에서 일억 마리까지 증가하였다. ‘축산혁명’, 30년 만에 인간의 식량용으로 사육된 동물 수의 급격한 증가는 바이러스의 전이라는 사건의 증식을 일으켰다.

만약 인플루엔자를 글러벌화의 질병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이러스가 많든 적든 치밀한 교통 네트워크를 통해 급속하게 이동될 뿐만 아니라 인간세계에의 반응을 통해 전이를 가능하게 했던 여러 교통 관계를 돌연 정지시킬 가능성이 있음을 내비친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독특한 방식으로 글로벌화의 양의성을 해명한다. 즉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자기를 복제하기 위해 다른 유기체 간의 교류가 필요한데, 유기체 간의 차이가 잘 조정되지 않을 때 바이러스에 의해 유기체는 파괴될 수도 있다. 이 질병에 주어진 이름은 이러한 양의성을 나타내며, 그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불어로 독감을 뜻하는 ‘grippé’는 개인 간 상호이해의 양태를 의미한다. 그 와중에 개인은 자신의 이해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의심한다. ‘gripper’는 아마도 본래 뜻과 바뀐 뜻을 함께 파악한다를 뜻하는 ‘greifen’에서 유래할 것이다(‘누군가를 파악한다혹은 관념을 파악한다’). 영어에서 인플루엔자를 가리키는 말은 ‘flu’이다. 이 말은 이탈리아어의 ‘influenza’에서 유래하는데, 이 이탈리아어는 16세기에 질병과 우주적 영향을 결합한 점성술적 추론의 프레임 내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말은 점차 유출[flux]’의 병, 즉 통제가 풀린 상태에서 교역이 열려 동료들 간의 한정된 영역을 뚫어버리는 병과 결부된다. 중국인은 유감(流感)’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유통에 의한 감염을 가리킨다. ‘감염(contagion)’은 여기서 전염(infection)’과 구별된다. 중국에서 인플루엔자가 염려되는 때는 신년제(新年祭)와 같이 인간과 상품의 이동(‘인류(人流)와 물류(物流)’)이 특히 활발해지는 시기이다. 따라서 인플루엔자로 인한 충격적인 사태는 개인의 연이은 죽음이라는 스펙터클이라기보다는 교역을 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다. 혹은 오히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개인의 연이은 죽음의 의미는 인간적 활동이 스스로 과잉된 격화 때문에 종언을 맞이하게 된다는 지평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인플루엔자는 동물과 인간의 순환 속에 어떤 파국의 가능성을 도입한다. 그것은 생물학자들이 파국이라는 말에 부여하는 의미와 다르다. 파국이 연속적 과정에 불연속성을 도입하는 것이라면 그것에 의해 전복되는 것은 유전자적인 전이의 총체가 아니라 오히려 생물 동료의 역사적인 관계들의 총체이다. 신흥 감염증이 한 인류학자에게 제기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생물학적 수준에서 파국적인 전이 가운데 어떻게 해서 몇몇 전이가 정치적 파국으로 번지는가? 중요한 것은 단지 어떤 사회적 벡터가 바이러스의 출현을 설명하는지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이 출현이 총체화된 행위자들에 의한 정치적 파국이라는 지평 속에서 어떻게 해석되는지를 그려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복잡하게 얽힌 한 세트의 척도와 엮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물학적 변이와 예측할 수 없는 정치적 파국 사이에서 적확한 묘사가 가능한 사회적 수준을 어떻게 선택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소하는 하나의 방법은 파국적인 바이러스 전이 시기에 당장 눈에 띄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사람 개체군의 외부에 있는 병원체를 억압하기 위해 동물의 위생적 살처분을 시행하는 양태이다. 1996년의 BSE 위기 때 광우병에 걸린 소들, 1997년의 H3N2 출현 때 홍콩 인플루엔자에 걸린 닭들, 2003년의 광저우의 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위기 때의 사향고양이들은 무지막지하게 살처분되었다. 2009년의 인플루엔자 때는 사육장의 동물이 단순한 상품일 뿐만 아니라 살해되어야 하는 생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는 신석기 시대에 동물이 가축화된 조건을 되짚어보게 만든다. 동물을 돌봐주는 대신 인간은 소비물자(고기, , 가죽 등등)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을 자신의 거주공간에 들이는 대신 병원체를 받아들여야 했다. 인간은 동물과 함께 독이든 선물을 받았다. 인간과 미생물의 공진화에 의해 이러한 교환에 일시적인 균형이 생겼다 해도, 새로운 동물 질병은 인간이 가축 계약을 스스로 파기한 상황인간이 동물을 돌보지 않고 동물에게서 소비물자만 얻어가는 상황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기에 마치 동물들이 상품으로 변형된 것에 대한 복수를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조건에서 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동물 질병에 대한 공포는 새로운 의학적인 합리성에 의한 그 논리적 기능을 통해 설명된다. 동물은 이 합리성 속에서 교환에 적합한 상품임과 동시에 인간에게서 받은 처우의 복수를 행할 용의가 있는 생물이기도 하다는 양의적인 존재로서 나타난다. 이 긴장 관계는 사육 동물과 애완동물의 구별로 인해 더욱 고조된다. 이 긴장 관계는 이 구별(이 구별은 종종 도시와 농촌을 재구획한다) 하에서 인간이 동물을 보호해야 하는 것과 동물에게서 인간을 보호해야 하는 것 사이의 모순을 일으킨다. 병원체는 겉으로 보기에 양립 불가능한 동물의 두 측면을 명확히 드러낸다. 병원체는 동물로부터 인간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양자 사이의 생물학적인 연속성을 보여주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이 동물을 기르는 사육조건의 결과로서 병원체가 발생한 것이기에 양자는 분할된 정치적 조작이라는 것을 드러내기도 한다. 고대의 희생제의에서는 이 모순을 공동식사를 통해 해소하고자 했다면, 위생상의 살처분은 병원체가 침범한 종()의 장벽을 재설정하고 시장에서 소비에 적합하지 않은 고기를 회수함으로써 이 모순을 풀어내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살처분은 미디어의 시선 하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동물의 현행 사육조건을 가시화하게 되고 공포를 더욱 조장하게 된다.

이 책은 위생상의 살처분을 직접 다루지 않는다. 내가 시도하는 것은 바이러스와 가깝게 있는 과학자들의 추론을 따져 묻는 것이다. 실제로 위생 생물학자들이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감시와 백신 접종이라는 방법을 통해 살처분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병원보유동물로부터 신형 바이러스가 출현하면, 유전학적, 생리학적 특징에서 추적 가능한 형태를 추출하여 이름을 지어주는 것에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살처분에서와 마찬가지로, 전문가들은 동물의 두 측면에 담긴 모순을 해소하겠다고 주장하기는커녕 이 모순을 동물병원에 관한 모든 행위자 사이에 밀어 넣어서 증폭시키려 한다. 즉 전문가들은 매개자의 역할을 연행하는 것이기에 그들은 동물을 둘러싸고 대적하는 두 인식을 하나로 합치는 표상을 만들어내어, 자신들의 맥락 속에서 이 긴장 관계에 대처해야 하는 행위자들에 가까이 이동해간다. 그때 이 모순은 위기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그 속에서 위험의 개연성은 생산과 소비를 연결하는 연쇄 속에서 동물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에 따라 평가될 것이며, 상품의 추적 가능성에 따라 이 연쇄의 통제에서 행위자 각각의 책임을 할당할 수 있다. 따라서 조사 기간 중 나는 행위자들이 이러한 긴장 관계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면서 그들의 대부분(축산업자, 동물보호단체, 식육판매업자, 수의사, 의사, 보건당국, 종교적 권위, 기자들)과 만나고자 노력했다. 행위자들 각각이 동물기원의 재화 생산과 소비를 연결하는 연쇄 속의 위치에 따라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탐구했다.

그림. 20세기 동물 질병을 둘러싼 인간과 가축의 관계

그리하여 이 책은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들에게 중심적인 역할을 부여한다. 전문가들은 두 축에서 매개자의 기능을 담당한다는 것이 나의 가설이다. 즉 생물학적 변이와 위생상의 살처분과 닥쳐올 파국을 관통해서 생물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연결하는 수직축과 생산과 소비를 관통해서 동물과 인간을 연결하는 수평축이다(<그림> 참조). 바이러스를 추적하는 전문가들을 뒤쫓는 것은 인류학자로서는 전염이라는 직선적인 도식을 버리고, 그들이 이동해가는 여러 사회적 연망을 총체로서 보는 것이다. 바이러스는 자신이 출현하는 맥락에 따라 관계들의 구조에 갇히게 되는데, 이 구조는 생물적인 것-정치적인 것과 생산-소비의 두 축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각각의 맥락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병원체는 어떻게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가? 그리고 병원체는 자기로 인해 드러나는 음식물의 연쇄 속에 얼마만큼의 행위자를 집합시킬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을 통해 테러리스트의 습격, 파업, 제노사이드 등등 다양한 파국과 관련한 공공의 공간 속에서 바이러스가 어떻게 표상되는지를 알고자 했다. 이토록 중요하고 논쟁적인 현상들이 동물 질병이라는 겉보기에 기술적인 관점에서 다뤄지고 또 바이러스라는 미시적인 존재를 통해 파악된다는 것은 의외라고 생각할 독자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이 시도하는 것은 바로 동물 질병을 엄밀하게 생물학적인 처우의 밖으로 밀어내어 사회과학의 영역으로 들여온 다음 새로운 현상으로서 조명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바이러스의 출현 원인에 대한 생물학자들의 의문에 부분적으로 답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러한 문제를 더 큰 관계 도식 속에 재위치 시킴으로써 그들이 제기하지 않은 문제를 그들에게 제기하기 때문이리라.

이 책의 제1장에서 내가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관계의 총체가 방역(bio-security)이라는 용어로 정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용어는 각기 다른 본성을 가진 파국을 위기 평가라는 같은 형식 속에 다룰 수 있게 만든다. 나는 현지 조사를 통해 1997년의 홍콩에서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H3N2의 출현 이후, 어떻게 해서 방역 장치가 준비되었고 아시아 각지로 점차 확산되었으며 마지막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의 돼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H1N1의 출현을 통해 글로벌화한 것이 되었는지를 해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지리적인 확대는 동물과 인간의 보건 전문가부터 닭고기 생산자와 소비자에 이르기까지 행위자 수의 증대를 수반한다. 따라서 이 책은 종의 장벽가까이에 있는 전문가들의 추론과 실천에서 출발해서 어떻게 그들이 하나의 독감세상’으로 유입되는지, 또 그들의 추론을 통해 생물을 지각하는 행위자의 총체에 얽혀서 그러한 총체에 의해 변형되는지를 살펴본다. 동물 질병이 일으킨 위생 위기에서 출발하는 이 책은 농장, 시장, 실험실에서도 접할 수 있는, 돌봄과 물자가 맞교환되는 생물과의 일상적 관계로 되돌아온다. 이 과정에서 나는 방역 장치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과 몇 번이나 맞닥뜨렸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이 문제를 글로벌한 수준에서 다루지만 이 문제는 오직 로컬한 비판에서 출발하는 경우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로컬한 비판이라는 것은 독감세상의 편성을 관통하는 극단성(極端性)을 어떻게 지각하는지에 따른 행위자들의 문제 제기를 말한다.

 

1. 방역을 둘러싼 우회로

 

감시의 규범과 형태

 

인류학자의 연구는 하나의 필드로부터 시작된다. 즉 개인적 욕구, 금전적 제약, 지도교수의 조언 등으로 결정되는, 하나의 장소와 하나의 시간에서 시작된다. 반면 나의 작업은 철학적 우회로가 필요했으며, 그 후에야 처음으로 주목한 것을 기술할 수 있게 되었다. 1996년에 나는 철학적 탐구를 시작했는데, 그때 유럽의 농촌에서 자행된 소들의 대량살처분과 야외에서 불태워진 소들의 사체 산 영상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또한 중국에도 관심이 있었다. 중국어를 배웠고, 홍콩반환(1997) 전년에 처음으로 중국에 발을 들였다. 천안문 광장의 게시판은 당시 [홍콩반환이라는] 이 영광의 빛나는 사건까지의 일수를 표시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은 조류 인플루엔자의 억제를 위해 최초로 자행된 살아있는 닭의 살처분과 기묘하게 시기가 겹쳤다. 만약 내가 저 사건 현장에 있었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첫 허베이(華北) 여행에서 내가 얻은 것은 중국철학에 대한 열렬하지만 애매한 관심과 가장 이단적인 공산주의에서부터 가장 조야한 자본주의까지의 불연속성을 개의치 않고 이행할 가능성에 대한 마찬가지의 애매한 문제의식이었다. 처음 접한 중국은 실망스러웠다. 이 나라가 불러들이는 욕망은 너무나 거대하고 이 나라의 현실(reality)은 너무나 광대해서 유일한 적절한 대응은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무는 것이다. 이 첫 만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과 인류학의 교양이 필요했다. 중국으로의 홍콩 회귀를 준비하는 중국에서 목격한 것은 중국문화의 특이성뿐만 아니라 어떤 글로벌한 장치의 예비 단계였고, 그래서 나는 유럽에서 주목한 소의 대량살처분 영상이 이 장치의 또 다른 효과이며 이 장치에 대해 그것의 고유한 합리성을 연구할 필요를 느꼈다. 여행에서 느낀 철학적 사색에서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인류학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인류학에 관한 나의 교양은 두 개의 원천에서 유래한다. 하나는 프란츠 보아스, 알프레도 크뢰버, 클리퍼드 기어츠의 전통에 선 아메리카의 문화인류학이다. 나는 이것을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캠퍼스의 폴 라비노(Paul Rabinow)의 가르침을 통해 발견했다. 캘리포니아에는 당시 생명공학이 진출해 있었다. 실리콘밸리의 야자나무 그늘에 들어선 벤처기업들은 유전학적 방법을 통해 생물에 개입하고 있었다. 아메리카 합중국의 동부 연안 출신의, 유럽의 철학적 전통의 자장 하에 있었던 라비노는 이 장소를 자신의 필드로 삼았다.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캠퍼스의 인류학부에는 크뢰버가 연구한 최후의 인디언이쉬(Ishi)의 뇌가 자손들의 요청에 따라 안치되어 있었다. 이렇듯 소수파의 요구에 충실한 인류학자들은 문화의 개념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그들 역시 문화들의 공존에 관한 유기적 모델을 옹호할 능력이 없었고 프랑스 철학(“French Theory”)에 의존해서 자신들의 잠재적인 비판능력을 발휘해야 했다. 인류학 세미나는 문화와 주체성의 연관성에 관한 격렬한 논의가 오가는 장이 되었는데, 그때마다 라비노는 대화자들의 의중을 파고드는 방식으로 과학자들 자신이 문화들에 대해 중립적이지 않고 하나의 문화만을 고집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설파했다. 이러한 방식은 독일어로 교양이라는 뜻의 “Bildung”의 문화, 곧 자기 수양과 다름없었다. 그는 생명공학이 환기하는 다양한 논쟁을 연구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과학업계 내부에서 가치의 충돌을 일으키는지를 해명했다. 예를 들어, 질병 환자들 가족의 게놈지도를 작성하기 위해 아메리카의 어느 기업과 동맹 관계를 맺는 것에 프랑스인 연구자들이 반대하자 프랑스 수상은 프랑스인의 DNA’ 판매를 금지했고, 그 한편으로 지식인들이 제작한 장대한 가계도를 활용해서 아이슬란드 국민의 게놈지도를 작성하는 프로젝트가 의회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이렇듯 라비노는 과학적 활동이 역설적으로 현대사회에서 비판적인 기능을 수행한다고 주장했다. 과학적 활동이 아직은 질병 지도에 자리를 잡지 않은 DNA 절편과 같이, 지위가 확정되지 않은 생명 물질을 유통하기 때문이다.

나는 프랑스로 돌아와 이러한 문화와 주체성의 관계 그리고 비판적인 현대적 감성 속에서 이 관계가 체화되는 형태에 대해 고찰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인류학 교양에 관한 두 번째 원천으로서 심성(mentalité)’이라는 개념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개념은 프랑스 사회철학에서 오귀스트 콩트를 거쳐 에밀 뒤르켐까지, 그리고 심성사(心性史)’에 이르기까지 독일과 아메리카의 지적 전통에서 문화라는 개념의 활약에 대응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작업은 이데올로기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이 제기하는 철학적 문제로 향했다. 심성은 어떻게 해서 사회적 실천에서의 모순을 표현하는가? 그리고 어째서 심성에 실천적 유효성과 인간사회의 기만적인 속성이 동시에 담기는가? 당시 프랑스는 인지과학의 발전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뒤떨어진 것에 대한 죄책감과 뒤틀린 왜소화에 대한 초조함이 뒤섞여 있었다. 철학적 논쟁을 벌인 부분은 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심리학적인 것과 사회학적인 것의 연관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만약 심성 개념에 담긴 모순이 도덕적 감정을 통해 표현될 수 있다면, 심성 개념은 그러한 연관을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었다. 당시 피에르 마슈레(Pierre Macherey)가 교수로 근무한 릴 대학은 파리의 격렬한 지적 활동의 피난소와 관측소를 동시에 제공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인류학의 역사를 비난하면서도 끈질기게 계속되는 철학적 논쟁을 나는 바로 그곳에서 연구할 수 있었다.

미셸 푸코의 이름은 아메리카 문화인류학과 프랑스의 심성연구라는 겉으로 보기에 양립 불가능한 두 지적 교양을 결합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의 사후 간행물은 당시 분리되어 있었던 두 지적 환경 사이를 순환하면서 남다른 혁신적 힘을 발휘했다. 실제로 푸코의 연구는 심성모델에 영향을 준 과학사로부터 다양한 감시양식의 역사로 이행하면서 점차 주체성에 대한 고찰로 향해갔다. 사회적인 것이 가진 심적 일관성에 대한 질문은 푸코의 스승인 조르주 캉길렘(Georges Canguilhem)으로부터 그의 영향을 받은 푸코에게서 변환되어 사회적인 것에서 생명적인 것의 규범적 힘에 관한 것으로 발전했다. 이에 따라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사회적 역사 속의 논리적 모순을 조명하고, 인지과학은 그것이 도덕적 감정이라는 형태로 표출된다는 것을 해명했다. 이러한 모순이 사회적인 것과 심적인 것의 연관에 따른 것이라면 생명공학에서의 양식변화를 동반하게 된다. 이에 따라 심성과 사회적 모순의 긴장 관계는 감시장치라는 수준에서, 즉 생물의 변형으로 인해 만들어진 새로운 시각장치라는 수준에서 연구될 수 있었다.

이러한 감시장치는 당시 새로운 전쟁형태에 의해 변환되었다. 2001911, 나는 박사학위 논문 집필을 위해 다양한 논리적 심성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읽었다. 이 논문은 1917년의 시엔티아(scientia)잡지에 게재된 것으로 왜 독일인과 프랑스인이 같은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는지를 심리학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러한 문화주의적 논의는 종종 뉴욕의 쌍둥이 빌딩 습격 직후 일어난 테러리즘에 대한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이 논문은 그 점에 대해 참신한 접근을 보여준다. 테러리즘에 대한 전쟁이 이미 이해할 수 없는 국민정신을 가진 민족에 대한 또 다른 민족의 전쟁이 아니라면, 서로 다른 가치관에 각각 결합한 두 개의 정치시스템의 전쟁이 아니고 오히려 감시장치와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이며, 이 적이 이 장치에 이성을 잃을 정도의 확장을 부득이하게 가져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세기의 지식인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어느 한 심성을 비판하거나 어느 한 가치 시스템을 다른 가치 시스템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해도 이 새로운 감시장치의 내부에서 그것이 체화된 규범과 형태를 기술하는 것은 여전히 가능했다.

나는 감시장치의 내부로의 이동을 실행하는 방법을 역설적이게도 레비-브뢸의 1923년 저작인 원시인의 정신세계에서 찾아냈다. 레비-브뢸은 프랑스에서의 심성 개념의 창시자로 볼 수 있는데, 그는 1917년에 전쟁의 새로운 양상(Les aspects nouveaux de la guerre)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위의 논문이 실린 시엔티아같은 호에 발표하여 그때까지 거의 다뤄지지 않은 분쟁에서의 경제적 요인의 역할을 강조했다. 황색 세계의 동요(L’ébranlement du monde jaune)(1920)라는 제목의 다른 논문에서는 세계적 규모로 확장된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 변형을 해명했다. 이처럼 레비-브뢸은 원시심성가운데 그 자신이 초자연적인 것의 지각이라고 부른 것을 분석하면서 전쟁이 창출한 새로운 상황에 대응하려 했다. ‘감시라는 개념 자체는 오늘날 관리사회를 묘사하는 데에서 매우 자주 언급되지만, 레비-브뢸의 분석에서처럼 자연적 존재에게 닥쳐올 위협의 징후를 감지하는, 세계와의 관계방식의 하나로도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감시는 그것을 작동시키는 테크놀로지에 직면했을 때의 유달리 강도 높은 지각양식을 함의한다. 1차 세계대전 직후 레비-브뢸은 유럽에 폭동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한 목적의 경계장치의 준비에 참여했다. 그러므로 원시심성에 대한 그의 기술은 새로운 심적 상태에 대한 고찰로 간주할 수 있다. 그의 저작의 명성은 원시심성이란 보로로족 인디언이 자신들을 아라라새[마코앵무]로 천명하듯이 인간과 인간답지 않은 것 사이의 모순을 지각하는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한 것에 있다. 가령 원시심성이 사회들 각각의 고유한 논리를 설명한다는 주장이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해도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자연재해를 동물이 알려주는 감시양식을 기술한다는 측면에서 이 테제는 허용되지 않는가? 이때 광우병에 걸린 소나 인플루엔자에 걸린 닭은 새로운 초자연적실체로서 나타나고, 이에 대한 감시장치는 전근대적인 지각양식에 대응한다.

여기서 나는 레비-브뢸의 참여(participation)’ 개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다. 21세기를 전후하여 이 말은 정치토론 가운데 어떤 테크놀로지적 변환에 관련된 행위자들의, 그 적용의 투명성과 정당성의 확인을 목표로 하는 집단적인 모임을 뜻하는 단어로 유통되었다. 그러나 나는 레비-브뢸로 되돌아가 그러한 테크놀로지적 변환이 논리적으로 모순된 형태의 표출 속에서 도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비가시적인 배경 속에서 가시화하는 양상을 분석할 것을 제안했다. 신학에서 유래한 참여 개념은 더 높은 수준의 선()이 어떻게 해서 자연적 인과성 속에 발휘되는지를 기술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이 개념은 특히 희생제의의 인류학적 합리성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말리노프스키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서태평양의 섬들에 발이 묶이면서 일정 기간 체류한 이후 참여는 인류학에서 민족지적 방법을 가리키게 되었다. 한 사회집단의 일상생활에 참여한다는 뜻은 위협에 상응하는 가치를 갖춘 징후로써 자연적 실체를 대한다는 것이며 이 징후가 집단적 주의의 방향을 결정지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에번스-프리처드는 레비-브뢸의 고찰을 재해석하면서 수단의 누에르 족에서 암소의 사용방법이 어떻게 분쟁을 해결하고 환경적인 불확실성을 제거하는지를 해명했다. ‘심성에 관한 철학사는 나를 현장연구와 멀어지게 했지만, 인류학의 참여연구는 나를 다시 현장으로 불러들였다. 즉 참여 관찰은 출발점이 아니라 내가 맞닥뜨린 문제의 해결책이었다.

 

결론. 팬데믹은 신화인가?

 

이 책에서 나는 인플루엔자를 사회적 사실로써 다루고자 했다. 그러나 인플루엔자를 사회적 구성물로 단언하고 그 생물학적 현실성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나는 생물학자들의 지식과 의견에 준거해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거동에 관한 불확실성을 파헤치고 다양한 맥락 속에서 그러한 불확실성에 대처해야 하는 행위자들의 다수성(multiplicity)을 기술하고자 했다. 나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웠다. 미생물학자들은 다양한 행위자들 사이를 매개하는 역할을 연행하는데, 그것은 단지 행위자들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와 싸우는 다양한 영역(농장, 자연보호지구, 시장, 병원, 미디어 등)에 그들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실험실 내부에서 바이러스에 의해 밝혀진, 생물에 대한 두 관계 간의 모순을 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생물은 소비를 위한 상품이면서도 복수할 위험을 감수하면서 돌봐줘야 하는 존재로서 상호지각된다. 그래서 실험실은 사회적 제조소와 같았다. 이 말은 실험실에서 뭔가가 발명되고 그 후 상당한 거래가 이뤄지는 사회의 다른 부분으로 보급된다는 뜻이 아니라, 실험실에서 어떤 긴장 관계가 발견되고 그 후 그와 관련해서 항상 불안정한 타협이나 조정을 강요하는 행위자들의 수와 규모가 커짐에 따라 이 긴장 관계가 또 다른 장소에서 변이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바이러스를 쫓는 미생물학자들을 추적함으로써 이 책의 경구로 인용된 보나르의 표현을 빌리면, ‘사회적 세계의 투어를 행했다. 나는 닥쳐올 파국에 시선을 향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 파국으로 인해 공통의 지평에 내던져지고 그러한 파국으로 인해 파국의 지도를 그를 수 있게 된 행위자들의 다수성을 바라보았다.

이 조사의 끝에서 사회과학이 인플루엔자와 같은 현상을 다룰 때 제기할 수밖에 없는 물음에 하나의 답을 제시할 수 있었다. 바이러스의 불확실성은 어떻게 전제주의적 권력을 불러오는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전이에 관한 추적조사는 어떻게 팬데믹의 지평으로 향해가는가? 어떤 점에서 그러한 전체화인류 전체를 뒤흔드는 팬데믹의 고지(告知)는 생물 가까이에서 이뤄지는 작업을 변형하는가? 사회과학이 보여주는 바에 의하면, 사회를 순환하는 실체는 불확실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어서 근대사회를 구성하는 예방정책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때문에 바이러스의 전염에는 항상 관념의 전염이 동반된다. 2009년 팬데믹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 접종 캠페인은 새로운 매체와 커뮤니케이션 기술, 정보의 홍수, 예방원칙에 대한 상호 모순된 해석 등등으로 인해 새로운 바이러스와 새로운 백신 사이의 긴장 관계에 있어서 소문과 같은 역할을 떠안았다. 그러나 팬데믹의 공포는 엄밀히 분석하면 사회적 현상에 관한 연구에서 관념의 전염이나 소문의 순환보다도 더 멀리 나아간다. 그것은 사회의 구성에서 전체화가 맡은 역할에 관한 문제 제기와 연결된다. 단순히 말하면, 왜 전염은 인류 전체를 겁주고 동원하는가? 이 조사 중에 우리가 여러 번 만난 대비라는 관념은 이 사태를 잘 보여준다. 즉 행위자들은 공통의 팬데믹을 대비함으로써 자신이 엮여있는 관계에 대해 말하게 되고 자신에게 닥쳐올 위험을 느끼게 된다. 이 전체화라는 지평 속에서 불확실성의 관리를 기술하기 위해 사회과학은 신화라는 관념을 도입한다. 이 관념은 보통의 일상 언어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저 경우에는 다른 의미를 가지며 해명하기보다는 비판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지금에서야 소박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학문적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요컨대 팬데믹은 신화인가?

계절성 인플루엔자보다도 인플루엔자 팬데믹이 위험성이 낮다고 세계보건기구가 공식화하기 전까지 이러한 질문은 도발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 최초의 의미에서 신화는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혹은 마침내 자신의 고유한 현실성을 만들어내는 무언가에 대한 사회적 표상을 지시한다. 예를 들어 입수 가능한 모든 서류에 기반해서 충분히 자세하게 조사하면 WHO가 어떻게 팬데믹의 정의를 수정해가며 심각도의 기준을 낮추고 지리적으로 다른 두 영역으로 확장의 정도 기준을 견지하는지를 해명할 수 있고 또 그에 따라서 바이러스의 위험성에 관한 불확실성이 커지고 제약산업의 활동이 감퇴한 시기에 어떻게 제약산업에 백신이 주문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팬데믹이라는 개념은 법적인 의미에서 수행적차원을 띤다. 즉 이 개념은 단지 역학적(疫學的) [전염병학적]으로 현전하는 상황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실제 효력으로서 기술적 장치의 총체를 만들어내며 이러한 장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의 현실성을 명시해준다. 그다음 이러한 분석을 이미 주어진 역학적 데이터에 확대 적용함으로써 파국적인 지평의 구축에서 생명 정보학적 모델이 맡는 역할을 고려하게 만든다. 공중위생의 최종결정 기관에서 이 뒤얽힌 수학적 모델에 어떠한 효력이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다음을 함의한다. 즉 이 모델이 어떻게 일상생활의 집단적 공포에 영향을 주고 동원력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지를 보기 위해서는 특히 이 모델이 제시한 양식을 추적해야 한다. 이렇게 숫자로 제시되는 사례와 도덕적 감정의 교점은 사회적 활동을 파국으로 조준하는 현대의 신화’(광우병과 조류 인플루엔자 등의 동물 유래의 역병, 인간 유래의 탄소가스에 의한 지구 온난화)가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

그렇지만 나는 이 의미에서 신화 개념을 팬데믹에 적용하지 않는다. 신화는 표상과 현실의 연관, 계산적인 합리성과 도덕적 감정의 연관보다 다음을 함의한다. 이 개념이 제시하는 것은 독일어의 ‘Weltanshauung’이라는 의미에서의 세계관이다. 즉 그것은 공통의 세계라는 지평에 포함된 모든 것을 지각하는 것이며, 이 세계가 언제나 위협을 받아왔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위협받기 전에 구축된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다. 바로 이 의미에서 신화 개념은 특히 독일 모델에 영향을 받은 아메리카의 인간 과학으로서의 문화연구에 도입되었다. 예를 들어 니콜라스 킹(Nicolas King)신흥 질병의 세계관을 묘사하고 신흥 감염증을 둘러싼 공중위생 장치의 일관성을 논했다. 그는 이 세계관을 다음과 같이 특징짓는다. “극도로 유연하고 수없이 엮어낼 수 있으며, 여러 부분을 재배치하면서 몇몇 요소를 부각하고, 반대로 그 외의 요소를 왜소화하여 행위자 각각의 목적에 부합하려 한다. 이 세계관은 행위자에 일관되고 자율적인 역병의 존재론을 제공한다. 이 존재론은 역병의 원인, 결과, 형태, 전망 등을 정의하고 이 세계관이 표현하는 위험의 배치나 이 위험을 예방하거나 처리하는 것에 가장 적절한 방법의 윤곽을 정해준다. 이 세계관은 도덕 경제와 역사적 서사를 갖추고 있다. 역사적 서사는 악인과 영웅을 동등하게 다루며 실수에 대한 비난이나 승리에 대한 상찬을 분배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그리고 왜 현재 상황에 부닥치는지를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인간과 미생물의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기 위한 보편적 모델이다. 이 세계관에 포함된 규칙과 전제는 글로벌에 적용될 수 있다”(N. King, “Security, Disease, Commerce: Ideological of Postcolonial Global Health,” Social Studies of Science, 32/ 5-6, 2002, p.767.). 니콜라스 킹은 세계관의 이 마지막 측면을 근거로 이 세계관을 이데올로기로써 비판하며, 이 일관성이 몇몇 행위자의 이해를 위해 이용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제약산업과 같은 행위자는 자신의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그가 글로벌 임상이라고 부르는 프레임 내의 새로운 위협에 대해서는 지방적 차원에서만 반응한다. “신흥 질병의 세계관은 중심에서 주변으로 지식의 전파와 나아가 의료제품의 글로벌한 유통에 관한 효율적인 관리와 관련된 것들이 비교적 적다는 점에서 식민지적 세계관과 다르다”(ibid., p.779).

중략

조르주 소렐(Georges Sorel, 1847~1922, 프랑스의 사회이론가이자 생디칼리슴 철학자)은 활동의 파국적 정지에 대한 대비가 사회적 전체화의 효과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하며, 신화의 강력한 사고방식을 제시했다. 소렐에 따르면, 파업이 사람들의 정신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총파업으로 나아가야 한다. 세부적인 논의는 지성의 움직임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부분에서 전체로 이행해야 노동자들 속에 운동의 관념이 자리 잡는다. 그리고 노동조합은 이 관념을 조직한다. “신화는 현재를 움직이게 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 신화를 역사에 현실적으로 적용하는 방법에 관한 모든 논의는 거의 의미가 없다. 그러나 중요한 한 가지는 전체화의 신화적 역할이다. 각 부분은 전체에 포함된 관념을 전체의 구도 속에서 떠올려야만 지적 흥미를 유발할 수 있다.” 총파업은 사람들을 일깨우는 신화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활동의 정지를 예비하는 사람들(노동자 계급)과 그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부르주아 계급)을 구별하기 때문이다. 소렐은 니체에게서 영감을 얻고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고방식을 이어받아 파업을 파국적 지평으로써 그려내었다. 이 파국적 지평은 그것을 믿는 사람들과 경계하는 사람들의 단절을 현재에 도입한다. 이러한 묘사는 사업 지속계획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성을 보여준다. 이 계획에 따르면, 기업과 국가는 조만간 닥쳐올 팬데믹을 대비해왔다. 그렇다면 팬데믹 와중에 초유동적인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의 신화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이 계급은 글로벌한 활동의 정지를 스스로 예비하는 가능성으로 표상할 수 있는데, 그에 직면하는 노동자 계급은 매우 불안정하며 너무나 지방적이어서 파업을 운동의 관념으로 사고할 수가 없다. 인플루엔자 대 파업. 이것들은 대적하는 두 계급이 담당하는 두 개의 신화이며, 전자에서는 그 침략적 본성에 의해, 후자에서는 집단적 노력을 통해 닥쳐올 파국을 표상하는 두 개의 각기 다른 버전이다.

그런데 소렐에 대해 그 자신이 생산의 신비라고 부르는 사태에서 출발하여 또 다른 독해를 해볼 수 있다. 활동의 정지를 상상함으로써 실제로는 노동자 계급은 자신들의 사회적 구조를 구성하는 반응을 총체로써 조사하게 된다. 이 계급은 자신을 일꾼으로 삼은 생산의 기원을 인식할 수 없기에 생산을 파국적인 미래에 내던지는 것 외에는 생산의 기원을 표상할 길이 없다. 따라서 노동자 계급의 입장에서는 생산활동이 각각의 사회적 집단의 독특한 위치를 가시화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산활동의 파국적 정지 또한 근로계급과 유한계급을 대립시키지는 않는다. 이때 거동 없는 자연과 마주 보는 생산활동이 상상적으로 그려지고 이 활동 속에 환경을 구성하는 존재자의 총체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렐을 비난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이의 제기는 소렐의 친구인 샤를 페기(Charles Péguy, 1873~1914, 시인이자 극작가)의 작품에서도 읽어낼 수 있다. 그는 같은 시기에 소렐이 파업에 적용한 파국 모델에 기초해서 인플루엔자에 대해 생각했다. 1900년 페기는 막 창간된 반달 수첩잡지에 인플루엔자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텍스트를 발표한다. 그는 그 글에서 적대적인 미생물들의 일개 연대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효과에 대해 말한다.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어] 침대에서 움직일 수 없었던 그는 지적 생산자라는 자신의 활동의 빈약성을 경험했다. 적대적인 미생물들은 그가 자신의 잡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파리에서 오를레앙으로 갈 수도 있는 커뮤니케이션 연쇄 위를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의인플루엔자에 관한 삽화를 읽은 페기는 매우 근거 있는 그의 가설에 대해 조사해보려고 했다. “나는 어렴풋이 그리고 확실히 내가 건강하다고 생각했다.” 즉 인플루엔자는 신비주의를 통해 그 사회적 메커니즘을 해명했다. 페기는 예언 개념에 준거해서 모든 활동이 정지해버리는 파국적 미래로의 투사를 묘사한다. “나는 병상에 누워 () 반달 수첩에 불운이 닥쳐올 것이라는 예언이 맞았음을 증명했다. 큰 회사는 한 인간에 기반하여 절대로 설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플루엔자는 그의 개인적 의지를 일반의지로 향해가도록 부추겼다. 그것은 위기의 순간에 사회를 구성하는 상호관계의 총체를 깨닫게 한다. 그 속에는 미생물도 포함된다. 미생물은 이미 배제되어야 할 적이 아니고 불확실한 세계 속에서 활동하기 위해서 타협해야만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로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인플루엔자와 파업에 대한 이러한 고찰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쓰였지만, 이 전쟁은 총파업에 관한 어떤 관념에 종지부를 찍음과 동시에 지구상을 이동하는 인간들의 불어나는 순환이 일으킨 파국적 귀결을 보여줌으로써 팬데믹이라는 개념이 새롭게 현실화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렇다면 총파업의 신화가 팬데믹의 신화로 대체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2009년에 H1N1 바이러스에 대한 세계적 동원에 실패한 후 지금 이 순간에 팬데믹이라는 신화의 붕괴에 직면하고 있는 것일까? 특히 중국에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전체화를 만들어낼지도 모를 파업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이 의미에서 나의 이야기는 한 신화의 탄생과 죽음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레비스트로스가 신화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라는 논문에서 행한, 신화는 죽는 것이 아니라 변환하는 것이라는 지적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 책에서 내가 시도한 것은 변환이라는 레비스트로스의 개념을 인플루엔자 팬데믹에 적용해보는 것이었다. 이 개념이 함의하는 것은 신화란 스스로 닫힌 전체성이 아니라 오히려 표층구조라는 것이다. 이 구조는 다른 사회의 다른 신화로부터 다양한 요소를 빌려 복수의 이론적 수준을 연관시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신화는 로컬의 수준에서만 전체화의 효과를 만들어내며, 신화의 전반적 총체는 단독의 맥락 속에서 변환된다는 것이다. “같은 한 신화의 변이와 다른 변이 사이에, 한 신화와 다른 신화 사이에, 같은 신화들 또는 각각의 다른 신화들에 대해 한 사회와 다른 사회 사이에 움직이는 이러한 변환 () 따라서 이러한 변환에서 신화의 소재 보존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충실히 지켜진다면, 또 다른 신화가 그 보존법칙에 따라서 다른 모든 신화를 바탕으로 해서 생겨날 수 있다”(Lévi-strauss, “Comment meurent les mythes,” Anthropologie structuale deux, Paris, Plon, 1996, p.301.).

이 책에서 내가 시도한 것은 신화의 대지는 둥글다.’라는 레비스트로스의 명언을 재검토하는 것이었다. 나는 미생물학자들을 쫓으면서 바이러스의 기원에 관한 그들의 신화를 공유하였다. 그들은 국경을 넘을 때는 이 신화의 변환에 주의를 기울였다. 미생물학자들은 바이러스가 국경을 모른다고 말하면서도, 바이러스에 대한 사회적 표상이 의미를 띠는 것은 역사가 만들어놓은 국경의 맥락에 의해서며, 바이러스가 국경을 넘을 때 이 표상이 변환되거나 반전되는 존재 방식에 의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홍콩으로 되돌아왔다. 홍콩에서 인플루엔자에 관한 사회적 표상은 매우 강도 높다. 이 표상은 홍콩의 중국 국경에 대한 관점을 숙고하는 순간에 구성되기 때문이다. 팬데믹 신화가 홍콩에서 비롯되어 이해되는 것은 이 신화의 기원이 홍콩에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바이러스의 기원은 수수께끼로 둘러싸여 있다, 홍콩의 생태학적 조건경제적, 정치적 이행기에서 동물과 인간의 높은 밀집도이 홍콩을 사람과 동물과 바이러스 사이의 관계들에 대해 생각하는 데에 특별히 풍부한 맥락에 놓여있다는 의미에서이다. 

중략

따라서 2009년의 H1N1 팬더믹의 종결이 나의 책을 전체화의 한 형태에 이르게 하였고 내가 그것을 다루게 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팬데믹 신화의 죽음 자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신화는 지금까지 변환을 계속해왔고 그 파국적 지평이 일시적으로 완화되는 까닭에 이 신화가 자신의 신화적 가능성에서 벗어났다고 상정할 수도 있다. 인플루엔자 팬더믹이 밀어붙이는 인류 종말의 고지는 잠시 그 힘을 잃었지만, 전문가들은 사전에 신흥 바이러스를 알리기 위해 동물에 대한 감시를 계속하고 있다. 야생동물과 가축의 이동량 증가, 기후 온난화, 토양오염, 삼림파괴 등 바이러스의 출현과 관련된, 완만한 생태학적 파국은 절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홍콩이 조류 인플루엔자에 대한 전초기지의 임무 수행에 실패하고, 멕시코가 돼지 인플루엔자의 이 임무를 맡지 못한다면, 그 외 다른 장소에서 동물들이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재해를 사전에 알릴 수 있는 경계 태세를 갖춰야 할 것이다. 동물들의 감시를 둘러싼 이 변환은 파국에 관한 우리의 표상을 현실화한다. 이것을 추적하려면 또 다른 연구가 필요하다. 나는 여행하면서 그러한 변환의 몇 가지 형태를 파헤쳤을 뿐이다. 나는 논리적 가설을 도입하면서 이 여행의 선형성을 유지하려 했다. 영어권과 불어권의 민족지를 비교하자면, 프랑스의 민족지는 학술서와 문학서 두 장르의 책을 동시에 쓰는 것이다. 이 책의 재료가 된 여행 수첩은 때로는 성급하게, 또 때로는 어떤 후회 속에 쓰였다. 앞으로 필연적으로 그 증명을 요구받을 때 자료는 더 보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 팬데믹은 더욱 새로운 변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하나하나의 표정을 다루려고 할 것이고, 나의 새로운 세계 투어는 팬데믹의 신화를 재배치할 것이다.

 
Posted by Sarantoy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