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주일간 가라타니 고진의 『帝国の構造 中心・周辺・亜周辺』[제국의 구조: 중심, 주변, 아주변](青土社, 2014년 8월)과 『트랜스크리틱』(도서출판b, 2013년 10월)을 읽었다. 박사논문을 쓰면서 길들여진 속독 때문인지, 찬찬히 읽으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놓친 논의가 적지 않다. [제국의 구조]는 강독세미나가 계획되어 있어 다시 읽게 되겠지만, [트랜스크리틱]은 아무래도 다시 읽어봐야겠다. 또 [제국의 구조]는 일본어판으로 읽어서 원전에 충실했다는 느낌이 드는데, [트랜스크리틱]은 읽으면서 의심되는 번역어가 한두 군데가 아니어서 원서를 구입할 생각이다.

[제국의 구조]는 가라카니 고진의 가장 최근의 저작으로서, [세계사의 구조]를 수정보완한 것이라고 한다. 가라타니 고진이 2012년 9월부터 두달간 [세계사의 구조]를 가지고 중국의 여러 대학에서 순회강연한 강연록을 정리한 것이라고 하는데, [세계사의 구조]를 읽어보지 못했으므로 어떤 내용이 수정보완됐는지는 모른다. 

내가 [제국의 구조]를 읽게 된 것은 가라타니 고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어느 지인 때문이기도 하고, '식민지기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과 인터뷰하면서 들었던 "제국" 그 자체에 대한 의문 때문이기도 하다. 

우선 말해두고 싶은 것은 한국의 네이션의 역사에서 1910년(한말의 역사를 '대한제국기'와 '보호국기'로 세분화하면 1905년 '보호국기')부터 1945년까지가 '일제강점기'로 시기구분되며 '식민지의 역사'로 통칭되면서 "제국"의 경험이 사상되어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네이션의 역사에서 "제국"은 "식민통치"와 동일시되고, 이 속에서 식민지 조선인의 정치문화적 실천의 양상은 협력/(회색지대)/저항으로 도식화되어 당시의 시대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못해왔다는 것이다. 일례로 나는 '만주제국'(1932~1945)의 건설 이후, 특히 1938년 총동원체제 이후 조선의 지식계를 휩쓸었던 지식인 및 사회주의자들의 대대적인 사상적 전향에 대해 제대로 규명해낸 논의를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이제까지 본 것은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의 전향을 사상적 변절로 치부하거나 거기서 좀 더 나아간 것이라면 근대적 식민지 경영에 의한 생산력의 발전과 그로부터 해소되는 생산관계의 모순이라는 식민지적 근대 담론으로 대체하는 논의 정도이다. 가라타니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각국의 사회민주주의자나 노동자가 전쟁지지로 돌아서고 제2인터내셔널이 와해된 것은 국가에 의한 잉여 가치의 재분배가 내셔널리즘을 강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국외에서 얻어지는 잉여가치에 대해서는 자본도 임노동자도 공통의 이해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생산과정에서만 착취를 찾아내고 그것을 국가권력에 의해 해소하고자 할 때 그것은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내셔널리즘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트랜스크리틱, pp.439-40). 일본제국이 아시아를 하나의 "제국"으로 자급자족적 경제체제를 구축하고자 했을 때--『「大東亜共栄圏」の経済構想─圏内産業と大東亜建設班審議会─』(安達宏昭、吉川弘文館、2013)  참조--, 조선인은 그 잉여가치의 직접적 수혜자가 될 수 있었고 되고자 했다.

바로 이 지점, 맑스주의자들이 맑스의 [자본]에서 자본가와 임노동자를 자본(화폐)과 노동력(상품)이라는 경제적 범주의 '담지자'로서만 발견하고 주체적인 실천의 계기를 찾지 못할 때, 가라타니는 그것은 전혀 [자본]의 결함이 아니며 맑스주의자들이 자본제 경제를 '이론적' 시점에서만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우노 고조의 말을 인용하여 [자본]이 공황의 필연성을 말한 것이지 혁명의 필연성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고 하며, 혁명이 '실천적' 문제라고 했을 때 이 '실천적'인 것을 칸트에게서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트랜스크리틱, pp.440-1). 

그래서 그는 맑스의 [자본]에서 혁명운동--이제까지의 혁명운동이 폭력을 동반했다면 앞으로의 '혁명운동'은 비폭력적이기 때문에 "대항운동"이라고 한다--의 계기를 '생산양식'이 아닌 '교환양식'으로 추출해내는 한편, 그 실천의 윤리를 칸트로부터 정초한다. [트랜스크리틱]이 그 인식론적 토대를 다루었다면, [제국의 구조]는 그러한 '교환양식'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재구성하고 인류의 대안을 제출한다.

가라타니 고진에게서 '교환양식'과 칸트의 윤리는 "타자의 문제"로 집중된다.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칸트는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를 "초월론적 통각X"로 넘어서고자 했고, "초월론적 통각X"는 타자의 타자성에서 주어진다. 나는 나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거울을 통해 보는 나의 얼굴은 나에게 '강한 시차'--역겨움으로 다가오는 이율배반--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타자의 타자성은 마치 죽은 자가 나에게 아무 관심이 없듯이, 미래의 타자에 대해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듯이 이질적인 '객관성'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타자를 넘어설 수 없고 타자는 내게 언제나 '초월론적 주관'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타자'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로의 전회가 칸트의 '전회'이다. 가라타니는 '초월론적'이란 무로서의 작용(존재)를 찾아낸다는 의미에서 존재론적인 동시에 '의식되지 않는' 구조를 본다는 의미에서 정신분석적이거나 구조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물 그 자체'('타자')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로의 전회--'나는 타자의 초월론적 주관에 의해 끊임없이 회의되고 자성된다'--라는 점에서 그는 칸트의 '전회'야말로 관계의 장을 펼쳐보이는 트랜스크리틱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제국의 구조]에서 그와 같은 트랜스크리틱의 인식의 방법론을 통해 맑스의 [자본]의 이론에 기초하여 교환양식의 세계사를 재구성한 것이다. 

[트랜스크리틱]에서 "교환형태"가 [제국의 구조]에서 "교환양식"으로 용어가 바뀐 것인지 아니면 번역어의 문제인지는 찾아볼 일이고, 가라타니의 "교환양식"에 대해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씨족사회의 호수제(증여의 의무), 재분배와 수탈, 상품교환을 각각 교환양식 A, B, C로 도식화하고, 교환양식 A의 '강박적 회귀'를 교환양식 D로 규정했다. 여기서 '강박적 회귀'란 프로이드의 '죽음의 충동'과 같이 과거의 어떤 기억이 강박적으로 되살아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라타니는 교환양식 A, B, C가 그 자신의 세계사적 실현을 통해 스스로 지양하고 그 결과 교환양식 D가 필연적으로 도래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의 "제국"의 경험에서 문뜩 헤아릴 수 없는 관용의 깊이를 발견했을 때, 그것이 혹시 "개인의 의지를 넘어선, 그리고 개인들을 조건짓는 다차원의 사회적 관계들"이라고 하는 교환양식D가 도래한 것이 아닐까 의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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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개설한 티스토리 블로그가 휴면계정이 되었으나, 이미 사라진 프리챌 메일로 아이디를 등록하여 휴면을 풀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그 집은 그 집 대로 놔두고, 다시 집을 지을 수밖에.

어쨌거나.. 내가 좋아하는 배우 스칼렛 요한슨의 <언더 더 스킨>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박사논문을 끝내고 빈둥거리는 한량 짓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책보다는 영화로 오늘을 마감하고 싶었다. 

내가 스칼렛 요한슨과 케이트 윈슬렛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녀들의 풍만한 육체 때문이다. 나의 몸이 빈약해서인지 요즘 걸그룹 아이돌의 비린 체형보다는 그녀들의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에 끌린다. 그래서 <언더 더 스킨>이라는 영화에서 스칼렛 요한슨의 몸이 아줌마 체형이라느니 하는 말들이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매혹적일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케이트 윈슬렛의 살짝 처진 가슴과 살집 있는 허리도 보기 좋았더랬다.

<언더 더 스킨>의 내용은 간추려 말하면 다음과 같다. 스칼렛 요한슨이 외계인으로 나온다. 그녀는 지구인의 육체를 갈취하기 위한 '미끼'이다. 그녀는 아름다운 흑발과 붉고 도톰한 입술과 풍만한 육체로 남자들을 유혹하고, 마침내 유혹에 넘어간 남자들을 심연의 '저장고'에 빠뜨린다. 물과 같은 액체로 가득찬 심연의 저장고에서 남자들의 육체는 서서히 피부와 박리되어 마치 공기 빠진 풍선처럼 피부만을 남겨둔 채 내부의 것들이 골고루 뒤섞여 외계로 운반된다.

영화 전반부에는 잡음인가 싶은 기계음이 깔려있다. 그것은 스칼렛 요한슨이 세상을 '외계'로 감지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녀에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낮고 불규칙한 기계음과 같이 어렴풋하게 들린다. 그녀는 다만 기계적으로 남자들에게 미소를 지어주고 몇 마디 말을 걸 뿐인데, 남자들은 아름다운 그녀의 미소와 말 몇 마디에 욕정을 느낀다. 

그런데 그렇게 '미끼'의 역할에 충실한 그녀가 어느 날 얼굴이 흉직한 어느 청년을 만나면서 변화한다. 자신의 얼굴과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그 청년의 손길에서 그녀는 '미끼'가 아닌 또 다른 무엇인가로 자신을 느낀다. 그 후 그녀는 '미끼'로서의 유혹의 몸짓이 아닌 남자들과 소통을 시도한다. 남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 그들의 친절을 받아들이고, 먹고 걷는 등의 일상의 작은 것들을 남자들과 함께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녀의 행위는 '미끼'의 역할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감시자'(포주와 같은)의 위협을 불러온다.

<언더 더 스킨>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아>나 <희생>처럼 묵시록적이다. 아주 세련된 SF물이다. 네이버의 네티즌 평점이 형편없는 것은 스칼렛 요한슨의 상업영화를 기대한 탓일 게다. 그러나 <언더 더 스킨>은 별점테러를 당할 하등의 이유가 없으며, 휼륭한 영화가 그러하듯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우선 스칼렛 요한슨의 변화가 매우 섬세하게 묘사되며, 스칼렛 요한슨은 그 변화를 섬세하게 연기한다. 그러나 이 변화는 스칼렛 요한슨의 변화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녀가 기계적으로 유혹의 대사를 건냈을 때의 남자들 또한 그 유혹에 반응할 뿐이다. 그녀가 소통을 원하는 순간 남자들 또한 그녀에게 연민을 느낀다. 욕망의 대상에서 연민의 소통으로 나아가는 것은 그녀만이 아니다. 욕망과 사랑의 질적인 차이는 누가 누구의 정념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연민으로 서로를 바라봄에 있는 것이 아니던가. 

스칼렛 요한슨은 연민의 소통을 통해 어느 남자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녀는 인간의 피부를 "입었을" 뿐이고 남자의 육체를 받아들일 '질'이 없다. (어느 영화평에서는, 결정적인 순간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가랑이에 스탠드의 불빛을 가져다보는 것이 촉감에 당황해서라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녀가 불발로 끝난 정사 직후 집을 뛰쳐나간 것은 그녀를 찾아온 '감시자'를 피해 도망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대사가 거의 없어서 확실히 말 못하겠다.) 그녀는 절망에 휩싸여 숲 속을 헤매다 숲 속에서 또 다른 남자를 만난다. 이 남자는 그녀를 겁탈하려다 그녀의 피부를 찢고 그 피부 속에 검은 형체를 발견한다. 그녀가 '미끼'가 아닌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순간, 그녀는 그나마 연민으로 위장가능했던 '피부'마저 잃어버린다. 겁탈하려한 숲 속의 그 남자는 검은 형체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인다. 그녀는 벗겨진 자신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싸안으며 불길에 휩싸인다. 그녀의 시선으로부터 하늘에서 쏟아지며 날리는 검은 눈발을 비추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사람들은 작은 말 한 마디에 흔들린다. 그녀가 남자들에게 건넨 말들은 소소하다. 미소가 아름답다느니, 조금 전에 보았다느니, 외롭지 않느냐 느니. 그런데 그 말을 하는 그녀의 '피부'가 '미끼'를 위한 것인지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에 따라 그녀와 남자들의 관계는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 스칼렛 요한슨은 자신의 육체를 거울에 비추며 유심히 관찰함으로써 자신의 육체를 연민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자신의 육체를 연민하는 남자에게 비로서 연민을 느낀다. 물론 그녀가 변화했다고 해서 남자들이 모두 그 변화에 조응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를 겁탈하려했고 불질렀던 숲 속의 남자가 있다고 해도, 그녀의 '피부'에 연민으로 대했던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부정되지 않는다. 

어느 영화평론가는 <언더 더 스킨>이 에로티즘의 허무함을 다룬 것이라고 하는데, 글쎄... 아름다운 스칼렛 요한슨(외계인)과 볼품없는 남자들(지구인)이 등장한다고 해서, 인간의 육체적 욕망을 다룬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영화는 문법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니까.

8월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마무리해야 할 일과 오는 가을 학기를 위해 준비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2014년 여름, 무진장 헤매고 무진장 놀았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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