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에 의하면, 파트리스 마니글리에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의 진정한 계승자이다. 말마따나 마니글리에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철학적, 기호학적인 측면에서 더 깊이 파고들었다. 베르그송에서 시작해서 소쉬르와 레비스트로스를 경유하여 마니글리에에 이른 가상성의 실천으로서 기호적 삶은 활력을 얻는다. 이 글의 원문은 Common Knowledge에 2016년에 실린 https://doi.org/10.1215/0961754X-3622260이며, Matthew H. Evans가 영어로 번역한 것을 번역한 것이다. 

 


 

 

기호와 관습: 레비스트로스, 실천적 철학자

 

파트리스 마니글리에

 

“우리는 왜 복종했는가?” 우리는 이런 질문을 거의 하지 않는다. 우리는 부모와 선생을 따르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다. 이와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앙리 베르그송은 사회과학의 철학에서 가장 위대한 작업 중 하나로 남은 것을 소개한다.[각주:1] 베르그송은 사회과학 분야, 대표적으로 에밀 뒤르켐의 작업이 의무의 문제를 철학보다 더 잘 보여준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즉 이론적 및 윤리적 관점에서 의무가 제기하는 진짜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좀처럼 인식할 수 없다는 점이며, 이 점을 사회과학이 철학보다 더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철학이 의무의 문제를 주체가 의식적으로 타자의 권위에 스스로 복종하는 합법적인 조건 중 하나로 다룬다면, 사회학이 구축한 사회 개념은 복종을 역설적으로 근거 없기에 더욱 만연한 것으로 묘사한다. 사회라는 바로 그 개념은 의무에 대한 우리의 무자각을 들추어낸다. “우리는 이것을 완전히 깨닫지 못했지만, 부모와 선생 뒤에서 부모와 선생을 통해 우리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거대하면서도 불투명한 무언가가 있음을 어렴풋이 알았다. 후에 우리는 그것이 사회였다고 말할는지 모른다.”[각주:2] 사회적인 것은 개인적이고 의식적인 행동의 인과관계로 환원할 수 없는 인과관계의 층위이며, 이는 의문―권위의 합법성―의 부재로 드러난다. 따라서 사회과학의 목적은 왜 개인이 자신의 이해 범위를 초과하는 이유에서 자신에게 부과되는 것들을 행하는지를 더 잘 이해하는 것이어야 한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을 뒤르켐과 마르셀 모스 그리고 프랑스 사회학파의 유산 상속자로 여겼다. 이것은 그를 의무의 문제에 관해 제각기 답변을 내놓을 3인조―뒤르켐, 모스, 레비스트로스―의 세 번째 회원으로 영입하게 만든다. 각자의 답변을 들어본다면, 뒤르켐은 집합 표상―원천적으로 개인의 표상과 다른―의 제약의 힘으로 돌렸을 것이고, 모스는 표상의 본질이 아니라 교환 메커니즘을 통한 시스템에의 참여로 돌렸을 것이다.[각주:3] 레비스트로스라면? 사람들은 그가 사회적 규범의 제약적 성격을 논리적 제약, 아니 어쩌면 인지적 제약으로 설명할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빈센트 데꽁브(Vincent Descombes)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1953)를 끌어와서 논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규칙을 제약으로 이해함으로써 규칙을 실체화하려는 시도는 아포리아로 끝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각주:4] (데꽁브는 레비스트로스에 종종 부과되는 이의제기를 일반화하면서, 사회과학의 이론가들은 대개 행위를 ‘이해하기’보다 ‘설명하기’를 더욱 열망한다고 비난한다.) ‘왜 사람들은 해야만 한다고 느끼는 것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실제 대답은 사람들이 항상 그 이유를 명확하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으며 그 말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가 속한 사회가 무엇이든지 개인은 이 규칙적 순응에 원인을 지정할 능력이 거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사태가 항상 이와 같았으며 사람들이 그 전에 한 일을 그가 한다는 것뿐이다.”[각주:5] 이에 따라 의무의 문제는 대체된다. 우리가 하는 일을 왜 하는지를 이해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해야만 할 일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하는지를 이해하는 문제이다. 문제는 통상적 실천, 습관 혹은 관습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아낼 것이며, 또 그 일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집합적 행위는 흔히 생각하듯이 안정된 관계를 유지하는 여러 개인에게 공통적으로 관찰 가능한 일련의 행동으로 정의 내릴 수 없다.

‘인지적’ 혹은 ‘상징적’ 차원에서 관찰 가능한 행위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제안은 구조주의가 사회과학에 공헌한 바가 아니다. 오히려 공헌은 언어학, 인류학, 역사학, 그 외 “문화 과학”에 있어서 기초적인 문제─데이터의 특성과 관련된 문제─를 드러낸 것에 있다. 구조주의는 문화적 실천의 단위(담화, 의례, 신화, 습관 등등)가 관찰 가능한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부정적이지만 심히 교훈적인 관측에서 시작한다. 문화적 실천의 세계는 필수적인 데다가 이중적인 가변성(variability)에 의해 정의된다. 다른 언어들 사이에서의 가변성뿐만 아니라 한 가지의 같은 언어를 말하는 방식에서의 가변성. 우리는 구조주의를 신(新) 엘레아 학파[각주:6]고 비난하며 자축했다. 그러나 구조주의는 정말로 우리에게 이 가변성이 우연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적 실천을 더불어 구성하는 단위들을 정하는 방식(mod) 속에 확고히 놓여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각주:7]

나는 여기서 레비스트로스가 『신화학』 시리즈에서 변환 개념을 통해 구조적 분석을 재정의하면서 기이하게도 원래 소쉬르의 문제였던 기호의 동일성(identity) 문제와 우연히 마주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려 한다. 그러나 나는 그뿐만 아니라 새로운 방법론의 구축, 즉 구조적 방법론―‘차이’와 ‘시스템’이라는 작동 개념을 고려해서―이 어째서 새로운 철학적 문제의 공식화를 통해 필수적으로 작동해야 했는지도 밝혀보려 한다. 차이 간의 상관관계를 통해 독특하게 구성되는 특정한 종류의 동일성 혹은 통일성,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존재론이라고 부르는 문제이다. 항간에는 소쉬르, 야콥슨, 트루베츠코이, 레비스트로스와 같은 저자를 독해하려는 움직임이 최근 다시 일고 있다. 이들은 모두 한동안 구조주의 운동과 분리되는 조건에서만 구조주의자로 인정받았고, 그렇게 구조주의 운동은 사라지는 지위로 강등될 수 있었다.[각주:8] 그러나 내게 필요한 것은 그 반대 절차이다. 즉 구조주의 운동을 위해 이 저자들을 되찾는 것, 그리고 ‘문화 과학’과 교차하는 순전한 철학적 문제의 유리한 지점으로부터 그렇게 하는 것. 구조주의라고 알려지게 된 무언가의, 누가 보아도 불확실하고 논쟁적인 일관성은 내부의 불균형 그리고 자신의 방법론에 있는 철학적 문제의 발견이 ‘실천의 이론’을 부추긴다는 과격한 주장에서 찾아야 한다. 기호학(semiology)은 새로운 이론적 영역을 위한 이름이기보다 다양한 학문 집단 내에서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철학적 문제를 지칭한다. (순전히 방법론적인) ‘좋은’ 구조주의를 가지고 철학적 사변론에 복무하는 ‘나쁜’ 구조주의를 막아봤자 얻는 것은 별로 없다. 방법론적인 프로젝트와 사변적인 구성물의 조합을 이해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구조주의가 제기하는 진짜 문제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철학이 제1 원리를 향해 되돌아가라고 영원히 비난받을 필요도 없고 (무관심 속에서 매우 흔하게 철학자가 밑바닥에서 무엇을 찾든지 간에) 철학은 어떤 새로운 지적 규율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의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무심코 보여준 것이 구조주의의 최대 장점이다.

 

소쉬르와 철학: 존재론적 문제로서 기호의 동일성

 

우리는 이제 겨우 소쉬르에 관해서 우리가 아무것도 혹은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구조주의로 가는 연구에서 묘사되는 소쉬르 그리고 소쉬르의 자료를 재개봉하는 것에 쉽게 낙담하는 비판적 편집과 학술적 비평에서의 소쉬르, 이 사이의 격차는 매우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쉬르의 노고에 대한 일관된 해석은 가능하다. 그가 기호만큼 의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면 말이다. 그의 야망은 결코 의미화(signification)의 일반 이론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기호를 가지고 모든 종류의 것을 할 수 있고 그 속에서 우리가 ‘의미화(signifying)’ 혹은 ‘소통(communicating)’이라고 부르는 것은 타자들 간의 게임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옳았다. 그러나 소쉬르의 질문은 더 간단하고 더 즉각적이다. 요컨대 우리는 기호의 조작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왜냐하면, 기호의 정체화(identification)는 엄청난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소쉬르는 다음과 같이 쓴다. “내가 여러분(messieurs)이라는 단어를 발화할 때마다 나는 그것의 물질적 존재를 새롭게 한다. 즉 새로운 발성 행위이고 새로운 심리학적 행위이다. 같은 단어의 두 가지 사용 사이의 연관성은 물질적 동일성이나 의미의 정확한 유사성에 기반하지 않고, 언어학자가 언어 단위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내는 어디에라도 접근하려면 반드시 발견해야 하는 사실에 기반한다.”[각주:9] 이해해야 하는 것은 매번 반복할 때마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단순한 변이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심지어 최소한의 ‘알맹이(kernel)’의 보존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호에서 우연적인 것(the accidental)과 본질적인 것(the essential)을 분리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기호가 실재한다면, 그때 그것은 관찰 불가능한 실재이다. 관찰 불가능하다는 것은 측정 불가능하고 경험적으로 증명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소쉬르 시대 이후 언어학의 역사는 기호의 경험적인 영역을 측정하기 위해 시행된 어떤 방책도 소용없음을 입증한 것일는지 모른다. 1943년 야콥슨이 뉴욕의 ‘신사회연구소(the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행한 “소리와 의미에 관한 여섯 개의 강연”의 첫 강연―레비스트로스는 이 강연의 매우 열렬한 청자였다―에서 야콥슨은 1930년대에 촬영된 음성장치의 방사선 필름이 발성 동작의 관찰 가능한 단위가 음운 인식의 단위와 일치하지 않음을 처음으로 입증한다고 설명했다.[각주:10]

그러나 소쉬르는 그의 관점을 실험적으로 검증하기 훨씬 전에 언어학은 단순한 이유로든 복잡한 이유로든 다른 어떤 경험과학과 같은 대상을 가지지 않는다고 가정했다. 빵(bread)이라는 소리는 예를 들어(“나는 약간의 빵을 원한다.”라고 구별되고 분류되는 문장에서) 소리의 경험적으로 독특한 특이성을 충분히 기록하지 않는다. 의미화는 하나 이상의 청각적 차이를 하나 이상의 청각적 차이와 완전히 다른 평면(차원)―거의, 적어도 처음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 바로 그 원래―에서 연합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시청각 평면(차원) 혹은 심리학적인 평면(차원)―예를 들어 우리는 이 평면(차원)을 의미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일 수 있다.) 문제는 두 개의 차이 혹은 두 개의 차이 시리즈의 병존 혹은 상관관계이다. 소쉬르는 단지 기호는 그것의 독특한 형태의 조합(set)으로 규정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나아가 그는 breaddread  사이에 발음상 차이가 있으므로 완전히 구별되는 질서의 또 다른 차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언어적인 문장에서 구조는, 어떤 진정한 구조주의자도 그렇게는 주장하지 않는 공식적인 규칙 시스템—다른 말로 통사론(syntax)—이 아니다. 오히려 구조는 두 개의 차이 시스템 간의 상호 규정에 의해 구축되는 시스템이다. 구조는 형식적인 시스템의 논리적인 감각에서, 노암 촘스키가 『통사 구조(Syntactic Structures)』(1957)에서 공개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물론 촘스키는 절대로 구조주의자가 아니었다. 언어학에서 인류학까지 그리고 이때 인류학에서 대개의 문화까지 움직이는 확장적이고 문제적인 운동이라고 우리가 구조주의를 의미한다면. “차이”와 “접평면”이라는 개념의 중심성은, 구조적 분석의 실제 실행에서 나타나는 어떤 것과도 거의 일치하지 않는 구조 개념을 갖는 자들에 의해 너무나 자주 과소평가되어왔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그들은 용어 규정을 위해 구조주의 저자들에서보다 어디서나 보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기호의 문제”를 둘러싸고 과학적 지식과 철학적 반성은 함께 해왔다. 게르만 신화에 관한 노트에서,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한 번 더 인용된 것이기도 한, 소쉬르는 다음과 같이 쓴다.

사물에 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는 이 분야에서 언어학 관련 분야에서만큼 사고의 모든 부조화(불일치)가 본성이나 동일성 혹은 동일성의 특성에 대한 부적절한 성찰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 우리는 말(words), 혹은 신화적 인물이나 알파벳의 편지, 즉 철학적 의미에서 기호의 다양한 형태인 것과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 개체를 다루게 된다.

따라서 언어적 사고가 빠지기 쉬운 교착상태를 지나가려면 철학적 해명이 필요하다. 즉 언어학이 제기한 문제들─철학적인 만큼 방법론적인 문제들─은 그 외 다수의 현상과 공통한다는 인식으로 나아가는 해명. 그러므로 기호학은 그 대상이 공통의 기능, 의미화의 기능을 공유한다는 가설에 따라 정의되지 않지만, 대신 저 대상들의 본성─길버트 시몬돈이 만들었고 최근 브뤼노 라투르에 의해 일반화된 저것들의 “존재 모드”─이 변이 없이는 반복될 수 없다는 계시 때문에 정의된다.

따라서 소쉬르의 노트는 계속된다.

그래픽 개인 그리고 그와 같은 의미에서 기호론적인 개인은 유기체적 개인과 달리 그것이 동일한 것으로 남을 수 있음을 증명할 수단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유로운 연합에 의해 그의 완전체가 지어지기 때문이다. 보시다시피 특정한 동일성을 유지할 능력 없음은 궁극적으로 시간의 영향─요컨대 기호에 관심이 있는 것들의 현저한 오류─으로 설명될 수 없고, 오히려 우리가 애지중지하고 유기체처럼 관찰하는 개체의 바로 그 구성 속에서 미리 폐기된다. 그때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두세 가지 관념의 덧없는 조합으로부터 나타나는 유령일 뿐이다. 그것은 정의의 모든 문제다. … 우리가 한 번에 한 편씩 보게 되는 것은, 신화가 이러한 개체들의 근본적인 본성 위에서 일반적으로 그 이유를 발동한다는 것이다.

소쉬르의 문제는 다양한 말하기 방식 이면에 있는 진정한 언어적 동일성을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에 있지 않았고, 오히려 어떻게 “비교문법의 인식론”을 얻을 것인가에 있었다. 비교문법이 하는 일이란, 라틴어, 고딕어, 산스크리트어처럼 겉보기에 달라 보이는 언어가 원래 “하나와 같은” 언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때, 우리가 하나의 언어를 말하려고 노력하는 속에서 또 다른 언어를 말하고 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불어는 라틴어에서 온 것이 아니고, 그것이 라틴어이다.” 라고 소쉬르는 제네바 대학의 취임회견에서 선언했다.

그의 발견은 언어적 기호의 반복이 언어적 기호의 변환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었다. 이 변환은, 공시적인 동일성은 그 자체로 보증되지 않는다는 것을 소쉬르가 소급해서 보여주게 한 것이다. 소쉬르의 편집자들이 『일반언어학 강의』에 부여한 형식은 소쉬르 사고의 가장 풍부한 측면 중 하나─언어적 가변성은 기호의 고유한 결정 방식에서 비롯된다는 관념─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언어적 가치 체계”라는 그의 개념은 변이로 운명지어진 것의 논리를 모델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소쉬르는 철학자들이 비교문법의 긍정적인 발견의 완전한 측정을 하도록 격려했다. “기호 이론에 관한 언어 연구의 중요한 대응 그리고 그것이 열어갈 완전히 새로운 지평은 … 저 이론에 기호의 완전히 새로운 측면을 부과할 것이다. 새로운 측면이란, 기호가 전달할 수 있는 어떤 것일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전달되고 수정될 수 있도록 운명지어진 어떤 것임을 이해할 때에만 기호를 진정으로 알기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철학적 일반화는 비교 방법론과 그것의 다른 영역으로의 확장 모두를 가능하게 한다. 민속연구, 신화, 전설, 관습 등등. 소쉬르 덕분에 우리는 본질적인 가변성을 “문화 과학”의 대상을 정의하는 속성으로서 간주하게 된다. 나아가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기호학을 “사회 안에서 기호의 삶을 연구하는 과학”, 달리 말해 기호가 “순환” 속에 있는 한 스스로 어떻게 변화하는지의 연구로서 정의하는 그의 정의와 병행한다.

구조적 방법이 될 것에 대한 소쉬르의 정교한 탐구는 따라서 한 쌍의 관련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한다. 첫 번째는 기호의 결정(해석이라기보다)에 관한 것이다. 말하게 된 무엇에 관한 결정. 두 번째는 말하게 된 무엇의 동일성이 장기적이든 단기적이든 어떻게 해서 기호의 변이를 일으키는 반복과 같은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원인과 이유를 넘어서: 행해진 것의 동일성

 

레비스트로스가 구조적 방식을 사회과학의 영역으로 확장하도록 동기부여 한 것은 이러한 이중의 문제와 의무의 문제 간의 관계이다. 소쉬르가 “우리의 전임자가 사람과 개를 말했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과 개를 말한다.”라고 한 것처럼, 레비스트로스는 “그는 사람들이 먼저 했기 때문에 한다.”라고 말한 것으로 파악했다. 만일 “왜?”라는 질문에 대한 이 응답이 레비스트로스에게 “완전히 진실하게” 보였다면, 그것은 행동의 원인이 그 정의만큼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쉬르에서와 마찬가지로 외국어를 배우는 문제는 문장을 파악하는 문제라기보다 그것을 지각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소쉬르에게 언어학의 핵심 문제가 의미의 문제가 아니라 기호과정(semiosis)의 문제라면, 레비스트로스에게 사회과학이 당면한 진짜 문제는 행동, 실천, 혹은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것의 경계를 표시하는 문제─『야생의 사고』에서 “의지적 실천(praxis)”(구식에 딱 어울리는)으로서 지정된 연속성 내에서─이다. 결국 “그게 우리 방식”은 유일한 명증한 답이다. 사실 무엇을 행하든─결혼하든, 시계를 보든, 철학 논문을 쓰든, 심지어 자살하든─, 그것은 문화적 동일성을 실현하는 것, 행해진 것을 하는 방식일 뿐인 어떤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군이라고 말하는 각각의 방식은 기호를 실현하는 한 방식이며, 만일 우리가 그 속의 잠재 가능성을 인식할 수 없다면 인지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행해진 무엇의 동일성은 따라서 기호의 동일성만큼 문제적이다. 게다가 그것은 뒤르켐의 자살론에 대한 재빠른 재해석이 포착하게 될, 사회과학에서의 근본적인 질문이다.

저 근본적인 텍스트의 서문에서 뒤르켐은 자살에 대해 객관적으로 작동하는 정의를 찾는다. 그가 저속한 사용법으로 간주한 “평범한” 의미를 무시하면서. 객관적인 정의는 뒤르켐이 옹호한 통계적 접근법의 보족 장치이다. 요점은 일반적인 사건의 발생으로서 개인의 자살은 통계적 수치를 위해 행위자 자체가 필연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질적인 다양성(각 자살이 수행되는 방식, 암시된 모든 동기, 행위자의 인격 등등)을 전적으로 무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심지어 나 자신의 자살은 유일한 자살인데도 여전히 또 다른 자살을 말하게 된다. 행위를 카테고리의 너무나 많은 인스턴스화로 줄이는 시선과 함께 수치에 다름 아닌 것으로 하나가 다른 하나와 구별된다. 뒤르켐은 이렇게 객관적 정의(자살=x의 공식)를 구축한다.

행위를 기록하기 쉽게 무언의 사실로서 접근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르켐의 수많은 독자가 곧 만나게 될 갖은 어려움을 제기한다. 결국, 뒤르켐 자신은 일부 의도적이고 주관적인 요소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고, 자살은 의식적인 동기부여로 정의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그 대신 죽음에 이르게 될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 저지르는 것으로 자살을 정의했다. 고귀한 군인의 경우든 불운한 사람의 경우든 기차 앞에 자신을 던지는 행위는 “사정을 잘 알고” 저지른 짓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주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리고 죽음의 정의는 자살의 정의만큼 저속하고 “평범하지” 않는가? 달리 말해 새로운 정의가 옛 정의만큼 모호해질 위험이 없는가? 둘째, 새로운 정의가 뒤르켐의 처리에서 통계적 데이터와 모순되는 것 같다. 민족학 방법론적 관점에서 잭 더글러스와 맥스웰 아트킨슨 혹은 하비 색과 같은 저자들은 통계가 개인이 자살을 저지른 횟수를 나타내지 않고 자살로 분류된 사망의 횟수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회학적 문제는 자살이라는 특정한 죽음의 분류를 담당하는 행위자를 알리는 제도적 혹은 인지적 절차이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문제시되는 것─즉 결정 가능한 계층에 속하거나 속하지 않는 것─의 본성을 가정하는 통계적 방법론을 부분적으로 사용했다. 따라서 만일 뒤르켐식 방법이 그 자체로 철학적 문제를 수반한다면, 그것은 일부 철학자들이 만족스러워했던 것처럼, 인간의 행위를 객관적인 원인으로 설명하는(이해하기보다) 척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뒤르켐이 저 행위들을 객관적으로 정의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마치 사건 그 자체가 총칭적 카테고리로 강등하기를 허용하는 관찰 가능한 표지판을 지겨워하는 것처럼.

그러나 이러한 자살의 정의와 함께 뒤르켐이 동질적인 “사회적 사태”를 식별한다고 주장한다거나 상대적으로 일정한 자살률이 독특한 사회적 원인을 나타낸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을 수 있다. 반대로 뒤르켐은 통계적 비율이 자살 사이의 질적 다양성을 감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 자신의 카테고리를 해체하려고 노력한다. 통계적 상관관계 연구에서 우리는 통계 시리즈의 의존성(공변량)이나 독립성에 초점을 두어야만 다양성을 밝힐 수 있다. “이제 하나의 결과가 우리의 조사에서 눈에 띄게 드러났습니다. 즉 … 다양한 자살 형태가 있습니다.” “에고이즘”, “이타주의”, “아노미” 유형. 뒤르켐의 야망은 개인이 자살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보다 자살을 분류하는 과학적 수단을 구축하는 것에 있었고, 인과관계에 의한 접근방식은 이 분류학상의 끝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실제로 분류가 요구하는 것은 “형태학상의” 분류보다 “병인적 분류”를 더 선호하는 “역전의 방법”이다. 달리 말해 각 행위의 내적인 성질 간의 질적인 차이에 근거해서 자살을 분류하는 것에 대한 거부 그리고 행위 그 자체(행위자가 직업, 연령대, 지역 등등에 속한다는 것)에 대한 외부적 환경 간의 통계적 상관관계에서만 유지되는 결정. 이 관점에서 상대적으로 임의적인 성격의 지표는 궁극적으로 균질적인 한에서 거의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목적은 자살률의 변이를 다른 매개변수와 관련하여 그려보는 것이고, 이 상관관계를 통해서 완전히 이질적인 통계적 경향과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 방법론은 우리가 “다양한 유형들을 동일화할 수 있는 능력 없이 유형의 다양성을 가정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존재와 수치를 증명할지라도 그 특수한 성격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 뒤르켐은 다른 한편으로 적어도 어느 정도는 자살의 양적인 분포를 통해 질적인 다양성을 회수할 목적이 있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자살(예를 들어 이타적 자살)이 그 자체로 다른 행위(이 경우에는 살인)의 변형임을 보여줄 수 있고, 일상적인 활동의 표면적인 다양성으로부터 맥락─즉, 사회적 영역을 만들어내는 개체 간의 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현실화하는 사회적 가상(“경향”)을 추출할 수 있다. 자살의 본질을 전제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객관적인” 정의는 한꺼번에 정리하고 변수로서 기능하도록 해서 인간의 현상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론적인 조건이다. 따라서 우리는 측정 불가에서 일반성으로, 양에서 질로, 수치에서 본질로, 원인에서 결과로, 설명에서 이해(comprehension)로 나아간다. 뒤르켐의 접근법이 제기한 문제는 그러므로 통계적 카테고리를 사회적 카테고리로 실체화하는 것보다 자살의 경험적 혹은 관찰 가능한 속성이 적어도 처음에는 객관적인 판단에 기초하여 그 외 수많은 행위와 더불어 행위를 식별할 수 있게 한다는 그의 추정을 포함한다.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에서 공식화된 구조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다. 이 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그 기원을 둔다. 레비스트로스가 『식사 예절의 기원(신화학 3)』에서 구조적 방법론과 역사적 방법론을 대조한 것은 그 결과이다.

어려움은 사실을 정의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어느 지점에서도 역사적 방법은 무엇이 민속학에서 사실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내러티브의 표면적 내용에 대한 관찰자의 주관적 이해가 그렇게 간주하는 어떤 사실적인 요소로서 받아들인다. 어떻게 둘 이상의 테마가 표면적으로 서로 다르며 서로와 변환적 관계에 있는지를 거의 또는 전혀 시도하지 않는다. 과학적 사실의 지위는 각각의 특정 테마 혹은 각각에 기인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스키마 자체는 잠복해 있다.

다른 한편 구조적 방법은 유사성에 대한 내러티브 간의 동일성에도 근거하지 않고 그 차이에도 근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저 유사성은 민족지학자에게만 명백하므로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수행한 작업은 매우 다르다. 그것은 비슷하지 않거나 유사성이 처음에는 우연으로 보이는 신화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구조를 표시하고 같은 변환 그룹에 속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공통된 형태(features)를 나열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증명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들 때문에 처음에는 유사점이 전혀 보이지 않는 듯한 신화들도 같은 원리에 따라 진행되고 단일한 작동 그룹에 기원한다.

그래서 한 지역에서 고슴도치로 보이는 것은 기호학적으로 다른 지역에서 논병아리로 나타나는 것일 수 있다. 사회과학 혹은 문화 과학에서 동일성은 구조적이어야 한다. 이것은 또한 비교 방법론을 통해서만 식별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관점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앞서 언급한 소쉬르의 원고를 인용하면서 소쉬르의 자료에서 기호의 동일성이 철학적 문제임을 주장한다. 이어서 만일 인류학이 더욱 일반적인 기호학에 참여한다면(“사회 인류학이 흥미로워할 모든 현상은 실제로 기호로서 특성화할 수 있다”라고 한다면), 그 참여는 언어적 현상이 취하는 부류의 소통적 기능이 있는 저 현상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환원 불가능한 동일한 철학적이고 방법론적인 문제들을 언어적 현상이 하듯이 저 현상들이 제기한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확실히 인류학적 현상과 마찬가지로 언어적 현상은 변이로서만 결정될 수 있고 개별화될 수 있고 독자화될 수 있다. 공유되는 관찰 가능한 속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데꽁브가 하듯이 소위 의미화(signification)의 구조주의적 개념을 비판하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구조주의의 실제 지분은 의미의 질문을 상대화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며, “문화 과학”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주요한 방법론적 문제─자신의 데이터를 어떻게 규정하는 가의 문제─에 직면하기 때문에 특정한 단위를 가지고 있다고 간주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 여전히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왜 방법론이 구조주의를 통해 이 문제가 “기호”로서 그 고유의 주제를 정의하는 구조주의자적 정의와 함께 하는 문제인지를 풀어가려 하는가이다. 우리는 더욱 상세히 언어학에서 인류학으로의 구조적 방법의 확장이 왜 레비스트로스의 유명한 명언─우리는 “상징주의의 사회 이론”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상징적 기원”을 찾아야 한다─을 통과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실천적 삶과 기호적 삶

 

구조적 방법의 핵심 문제는 정의와 관련될, 어떤 주어진 행동의 특징의 본성을 우리가 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조적 방법은 임기가 거의 끝나가는 뒤르켐의 방법과 모순된다. 뒤르켐은 자살에 대한 예비적이고 추상적인 정의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양적 시리즈 간의 관계를 조사하여 질적인 다양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반면 레비스트로스는 특정 신화에서 시작해서 다른 버전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질적 변이들이 상호 동시에 발생하는 방식을 분석한다. 레비스트로스의 관심은 내러티브 “모티프”의 변환, “홀로 발생하지 않고 언제나 다른 변화와 함께 연관되는” 변화에 있다. 이러한 상호관계된 변환은 “호환성 및 비호환성의 시스템”을 조명하는데, 그 시스템 덕분에 우리는 각 모티프를 실질적인 질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실현하는 대립들의 분포에 의해 정의할 수 있다. 형태 A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중요하지 않고, 형태 A가 긍정적일 때 형태 B가 부정적임을, 그 반대로 형태 A가 부정적일 때 형태 B가 긍정적임을 보여줄 수 있다. 소쉬르의 경우 특유의 음운 형태가 특유의 의미론적인(semantic) 형태와 연합되는 한에서만 관련성이 있다고 간주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레비스트로스의 경우 특유의 형태 간의 상관관계는 행위자들 자체와 관련된 형태를 추론할 수 있게 한다. 이어서 각 버전은 변환 시스템 내의 상대적인 위치에 따라 재정의될 수 있다. 그와 관련하여 저 항들은 치환될 수 있다. 또는 더 정확하게는 변환 시스템을 변환 시스템의 시스템 내에서만 정의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레비스트로스는 단계별로 구조 분석을 확장하고 개발하여 점점 더 많은 아메리카의 신화를 포괄한다. 그 결과 신화학의 첫 권을 열어가는 보로로 신화를 이해하게 된다.

이 채석장 탐사에서 특정 내용(이 신화적 내러티브 혹은 친족 공식)은 점진적으로 대수값으로 감소하고, 구조 내 위치에 따라 공식적인 항으로 규정된다. 변수(자살=x)의 본성을 가정할 필요 없고, 그 속에서 다양한 내용이 합산된다. 개별의 내용을 서로의 변종으로서 조명하는 저 변이 간의 상관관계를 연구함으로써, 변수가 단계마다 질적 변이와 함께 점진적으로 포착된다. 우리는 불확실한 것에서 다양한 것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것에서 구조적인 것으로 움직인다..

따라서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적 방법이 “갈릴리적(Galilean)”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목표가 변이의 법칙을 밝혀내는 것이고,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관점과 모순되며 주로 귀납적 상관관계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구조주의적 방법이 그 안에 위치하는 “질의 논리”는 형식주의적 방법만큼 통계적 방법과 구별된다.

형식주의와는 반대로 구조주의는 추상적인 것에 대항해서 구체적인 것을 놓기를 거부하고 후자에 특권적 가치를 인식하기를 거부한다. 형식(form)은 그 자체보다 물질적인 다른 것에 대립함으로써 규정된다. 그러나 구조는 고유의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내용 그 자체이며, 내용은 실재의 속성으로 인식되는 논리적인 조직 속에서 파악된다.

레비스트로스가 구조라고 부르는 것은 추상적인 변수(달리 말해 구조를 실체화할 수 있는 내용에 무관심한 변수)로 감소하는 항 간의 관계 도식이 아니다. 그보다 구조는 “변환 그룹”이며, 이 속에서 각각의 내용은 변종으로 결정된다. 따라서 만일 내용이 “구조화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것들이 마치 외부에서처럼 추상적인 형식을 부과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내용이 상호관계에서만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조는 적용에서 고립될 수 있는 규칙 집합이 아니다. 각 요소가 변종으로 등장하는 가상의 장이다. 그리하여 각 요소는 상대적인 가능성을 실현한다.

이 측면에서 구조 분석(신화적 내러티브, 의례적 행위, 복식 관습, 심지어 기술까지)의 실천적 단위는 기호로 간주할 수 있다. 여기서 기호는 찰스 퍼스가 정의하고 레비스트로스가 반복한 것에 따른 것이다. “무언가를 누군가 대신에 대체하는 것” ─혹은 다른 말로 시스템적으로 상호 관계된 몇몇 변환을 통해 또 다른 기호에 해당하는 것. 기호의 필수적인 속성은 잠재적으로 다른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돌도끼와 같은 도구가 기호라면, 레비스트로스가 콜라주드프랑스의 취임강연에서 말했듯이, 그것은 “주어진 맥락에서 사용법을 이해할 능력이 있는 관찰자에게는 그것이 다른 사회에서 같은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다른 장치를 대표하는” 한 그렇다.

행위는 우리가 그것에 “의미화”를 담는 선험적 기능을 부여했기 때문에 “상징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대체 가능한 행동에 의해서만 정의되기 때문에 “상징적인”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내가 지적했듯이 그것은 비교 방법론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가 인류학을 인간 정신(human mind)의 보편 법칙의 이론으로서 정의했을 때─그리고 저 법칙들을 이번에는 “상징적인 기능”과 동일시했을 때─, 그의 의도는 “정신적 제약(mental constraints)”을 조망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신적 제약이란 예를 들어, 주체들이 주어왔던 선물을 호혜적으로 주고받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주체가 “무형의” 단위나 동일성(소쉬르의 의미에서)을 구축하도록 하는 것─엄격하게 차별화된 매개변수와 일치하는 관찰 불가능한 단위에 예민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자 했다. 상징적 사고는 무엇보다 실질적인 불변에 해당하지 않는 표면적인 개체를 가져오게 함으로써 감각적 현실을 조직하는 방법의 하나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매개변수(높음/낮음, 날것/익힌 것 등등)의 값을 반대로 바꾸는 것은 동일한 기호를 생성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호 개념은 실천 이론의 구축을 어떻게 열어갈 수 있을까? 행동(예를 들어 신화의 서사화)은 순수하게 다른 개체의 실현 혹은 예시화인 한에서 행위자 자체에 의해서만 그 특이성이 파악될 수 있다. … 행위자가 삶의 가능성의 장으로서 인식되는 상징 시스템에 거한다면. (이러한 예로서 상징 시스템은 내러티브의 주어진 버전이 결정적인 내에서 “가상의 신화학적 시스템”일 수 있다.) 다른 추상적인 가치는 상관관계로서 어느 것도 바꾸지 않고 내러티브를 구조화하는 대립들로 지정될 수도 있다. 행동은 오직 관습의 가상 시스템으로 이해되는 실천(practice)의 맥락 내에서만 자리할 수 있다. 따라서 행하는 것은 항상 일반적으로 행해진 것을 하는 것이다. 즉 공통의 실천을 실현하는 것. 실천의 단위를 결정하는 다른 방법은 없다.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닌. 관습은 몇몇 개인들과 설명될 수 있는 사건(토큰)에 의해 반복되는 관찰 가능한 행동의 절차(경험적 유형)가 아니다. 그보다 관습은 순수하게 다른 가상성이다. 이 가상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실현되고 다른 관습과 식별될 때에만 정의될 수 있다. 그래서 만일 레비스트로스가 그러한 것처럼 우리가 행해온 것을 계속해서 행한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규범에 순종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행동이 항상 퍼포먼스이기 때문이다.─촘스키식 의미에서 경쟁을 정의하는 규칙의 적용에서가 아니라 실현될 수 있는 실현의 음악적 의미에서 그렇다. 심지어 자살도 퍼포먼스이다(그것은 공통의 실천이다). 그리고 자살의 인류학이 당면한 문제는 왜 행위자가 왜 행위(수많은 검토 없이 우리가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 행위)를 연행하는가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가 아니다. 문제는 반대로 어떻게─주어진 맥락과 관련된 특징을 조명하게 하는 상관적인 변화를 기반으로─ 행위를 규정하는 실천의 시스템을 재구축할 것인가이다.

우리가 실천 이론이 필요하고 그것의 습득이 방법론의 혁신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대로 “저들은 저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무지함은 그들을 용서하거나 심지어 그들을 원망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구조적 인류학을 실천할 이유이다. 그 방법론을 통해 우리는 다음을 발견한다. 뒤르켐의 동시대성에 있어서 죽을 운명의 군인의 행위는 아이를 낳을 운명의 여성의 행위와 동일시되는 반면, 우리에게 있어서 그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희망 없는 사람의 행위는 타자의 삶이 그의 손안에 있음을 잊는 운전자의 행위와 동일시된다. 이 사례들은 그것들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 아니라 대립하기 때문에 동일시될 수 있다. 게다가 동일시되게 보이는 항들은 구조적 관점에서 다르게 의미화되어서 자신을 스스로 드러낼 수도 있다. 중국에서 자살 행위는 프랑스에서의 자살과 같은 본성을 갖지 않는다. 삶과 죽음이 대립하는 한에서, 여성성과 남성성(과 등등)은 같은 방식으로 분배되지 않는다. 인류학적 탐구는 통계적 변이만큼 영속적인 특징도 설명할 것이다. 뒤르켐과 그 뒤를 잇는 수많은 다른 사회학자들이 결국 받아들이도록 강제한 심리적인 설명에 의존하지 않고.

그러므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에서 행동의 규칙은 소위 적용과 구별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드러낸 모순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이 통찰력에서 시작해서 그는 규칙에 따르는 것은 실천(관행)에 얽매일 뿐이고 실천(관행)은 필연적으로 집합적이라고 결론짓는다. 비트겐슈타인의 경향은 주어진 실천에 대한 익숙함의 관점에서 관습을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의 실천에 대한 환기는 잘 짜인 철학적 문제에 대한 응답이 아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보다 실천에 대한 그의 환기는 위조된(bogus) 철학적 문제(언어(language)의 일반적 정의를 공식화하는 문제)에 철학적 노출에 있다. 다른 한편 레비스트로스가 구조적 방법을 모든 문화 데이터로의 확장이 증명하는 것은 첫째, 실천이 물질적인 것의 일관된 활용도 아니고 행동의 반복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둘째, 우리 자신의 실천을 이론화하는 어떤 시도도 동일성, 통일성, 가상성 등등의 철학적 개념을 재구축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천을 정의하는 것은 그것을 연행하는 행위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며(우리가 부르디외에 합의하여 행위자 또한 서로와의 관계에서 구조적으로 정의된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실천 이론이 다루기 힘든 것은 그것에 적절한 존재 방식에 싸 매여 있기 때문이다. 관습은 그것의 동일성이 총칭적 개념으로 환원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변종과 공존하는 것을 협상할 수 있으므로 필수적으로 집합적이다..

구조적 접근방식의 또 다른 이점은 우리가 관습의 동일성을, 그것을 만들어내는 주체의 표상에 고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내면성이 없는 그것의 동일성은 주체 밖에서 다른 가능한 관습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들이 가치로 갈아타기에 충분하다. 정의로 말한다면 사용법을 변화로. 이 단순하지만 매우 복잡한 직관은, 우리가 그 안에서 알아채는 경향이 있는 유사성에 의존함으로써 실천의 본성을 추정할 수 없음에 따라, 모든 구조주의적 방법론의 핵심이다. 푸코가 『훈육과 처벌』에서 논쟁하게 한 것은 이 직관이 아니었다. 학교, 군대, 병원을 포괄하는 “훈육” 집합과 정렬되자마자 징벌 절차가 본성으로 바뀌게 되는. 우리가 규칙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우리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것은 같은 것이다. 상징적 실천은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서 놀고 있는 크로켓 게임은 핑크 플라밍고가 망치로, 고슴도치가 공으로 노는 것과 같은 어떤 유사성을 담고 있다. 그녀가 그들을 공격하려고 할 때 그들은 예기치 않게 고개를 들었고, 그러는 동안 다른 플레이어는 전진할 순간을 포착한다.

구조주의는 피할 수 없는 이론적으로 사변적인 질문을 제기해왔다. 행해온 것의 본질은 무엇인가? 만일 그렇게 시도하는 속에서 우리가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을 행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 질문은 다른 두 가지의 문제들을 결합했다. 어떻게 실천 이론을 구축할 것인가와 어떻게 관습의 존재론과 그 변이의 논리를 구축할 것인가. 누구는 이때 구조적 방법의 전개가 이미 푸코, 들뢰즈, 데리다가 논쟁한 역행이원론(renversement du platinism)과 함께 하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레비스트로스의 강점은 철학을 경유할 필요성을 인식해왔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우리는 철학을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그는 썼다.) 그와 동시에 그는 철학의 텔로스를 만들기를 거부했다. (“철학적 성찰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그렇다면 구조주의의 철학은 모든 측면에서 실천적인 철학이다.

 

 

Patrice Maniglier, “Signs and Customs: Lévi-strauss, Practical Philosopher,” trans. Matthew H. Evans, Common Knowledge 22(3), pp. 415-430.

 

 

 

 

 
  1. 앙리 베르그송(박종원 역), 1장 도덕적 의무」『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아카넷, 2015. [본문으로]
  2. 앙리 베르그송, 앞의 책. [본문으로]
  3. 다음을 참조. Bruno Karsenti, L’homme total: Sociologie, anthropologie, et philosophie chez Marcel Mauss,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97. [본문으로]
  4. Vincent Descombes, Objects of All Sorts: A Philosophical Grammar, trans. Jeremy Harding and Lorna Scott-Fox,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6, p.205. [본문으로]
  5. Claude Lévi-Strauss, Structural Anthropology, vol. 1, trans. Claire Jacobson and Brooke Grundfest Schoepf, New York: Basic Books, 1963, p.70. [본문으로]
  6. 엘레아 학파는 소크라테스 이전에 활동한 고대 그리스의 주요 학파이다. B.C. 5세기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식민지 엘레아에서 번성한 이 학파의 특징은 극단적 일원론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는 유한하고 무시간적이라고 주장했다.-옮긴이주 [본문으로]
  7. 다음을 참조. Patrice Maniglier, La vie énigmatique des signes: Saussure et la naissance du structuralisme, Paris: Scheer, 2006. [본문으로]
  8. 다음을 참조. Simon Bouquet, Introduction à la lecture de Saussure, Paris: Payot and Rivages, 1997; Johannes Fehr, Saussure entre linguistique et sémiologie,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2000; Lucien Scubla, Lire Lévi-Strauss: Le déploiement d’une intuition, Paris: Odile Jacob, 1998; and Patrick Sériot, Structure and the Whole: East, West, and Non- Darwinian Biology in the Origins of Structural Linguistics, trans. Amy Jacobs-Colas, Boston: Walter de Gruyter, 2014. [본문으로]
  9. Ferdinand de Saussure, Course in General Linguistics, trans. Roy Harris (1916; repr., London: Duckworth, 1983), pp. 12829. [본문으로]
  10. Roman Jakobson, Six leçons sur le son et sur le sens, Paris: Minuit, 197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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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탱 베르케는 1942년 모로코 출생의 프랑스인으로 일본사상 및 일본문화 연구자이다. 프랑스어와 일본어로 저술 활동을 전개해왔으며, 다음의 글은 일본어로 쓰였다. 다음의 글을 데스콜라의 「자연은 누구의 것인가?」(https://sarantoya12.tistory.com/153)와 같이 읽으면 동양(일본)과 서양(유럽)의 자연관에서의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과 주체성

 

오귀스탱 베르크(Augustin Berque)

 

1. ‘누구’란 어떤 것인가?

 

얼핏 보면 인류학자 데스콜라의 ‘자연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물음은 매우 인류학적이다. 이 질문에서 ‘누구’란 인류에 속하는 존재라는 것은 분명하다. ‘누구’라고 말하면 반드시 인물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 나오는 유명한 표현 ‘자연의 주인과 소유자인 듯이’에서 직접적으로 유래하는 사고방식일 것이라고 바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 자연을 (가진) 주인은 인간 주체 외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인상은 일본어의 세계 특유의 지적환경에서 비롯한 것일 수 있다. 일본어에서는 확실히 ‘누구’라고 말하면 반드시 인간을 뜻하며, 한자 ‘誰’의 구성요소 또한 인간존재를 전제한다. 이 글자의 의부(意符)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언어의 ‘言’이고 음부(音符)가 ‘隹’(새 추)이다. 이 글자는 “인간 특유의 옛 새점 풍속에서 누구라도 불특정한 자를 추측할 때 새점을 쳤다는 것을 보여준다”(白川靜, 『字通』, 平凡社, 1996). 이렇듯 ‘누구’는 인간존재의 대명사이다. 이에 반해 프랑스어 원문 제목 ‘À qui appartient la nature?’에 나오는 대명사 ‘qui’는 인간에 한정되지 않으며 생물 일반과 무생물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자연은 qui의 것인가?’라는 물음의 대답에서 자연을 ‘가지는’ 주인은 자연 자신도 포함되고 인간은 물론이고 삼라만상 가운데 어떤 것이라도 될 수 있다. 제목의 뜻을 이렇게 이해하고 데스콜라의 논문 내용을 읽기 시작하면 그가 확실히 이러한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논문의 결론에서 제안하는 관계보편주의(universalisme relatif)[각주:1]는 삼라만상과 인간의 관계성을 기본조건으로 한다. 이것은 분명 와쓰지 데쓰로(和辻哲郎)가 『풍토(風土)』에 썼듯이, ‘인간존재의 구조계기로서의 풍토성’이 인간의 주체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과 상통한다. 이 의미에서 데스콜라의 견해는 와쓰지의 그것과 비슷하다. 인류학자 데스콜라는 철학자 와쓰지와 달리 풍토성이라는 존재론적인 기본개념을 제시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데스콜라의 ‘자연의 인류학’은 와쓰지의 풍토론과 유사한 존재론을 기반으로 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사실 나 또한 일찍이 『지구와 존재의 철학』(1996)에서 시도한 바, 데스콜라도 환경윤리의 가능성을 인간존재의 주체성과 자연과의 관계성(즉 풍토성)을 기반으로 제시하려 한 것 같다.

 

2. 이원론의 재검토

 

이 장에서는 그러나 풍토성에 관한 인간존재의 주체성보다도 일반적인 의미에서 인간 풍토에 한정되지 않는 주체성, 즉 자연 그 자체의 주체성까지 고려하고자 한다. 이 문제 제기는 30년 전부터 나의 연구의 통저음(通低音)이었고, 그것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표현한 것은 아마도 1984년 여름에 쓴 (후에 『풍토의 일본─자연과 문화의 통태(通態)』(1992)라는 제목으로 일본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책의 결론을 ‘자연이라는 더없는 주체(La nature, ce sujet ultime)’로 내린 때였을 것이다.

나는 일본의 풍토성을 고찰한 저 책을 쓰면서 처음으로 자연과 인간존재의 관계에서 주체성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곰곰이 생각할 수 있었다. 실제로 당시 나는 오랜 고민 끝에 『풍토』의 첫 줄에서 ‘인간존재의 구조계기로서’ 정의된 와쓰지 데쓰로의 기본개념인 풍토성을 médiance라는 신조어로 만들어내었고 나의 풍토론의 또 하나의 기본개념인 trajection의 번역어를 새롭게 만들었다. 일본어본에서 그것을 ‘통태(通態)’로 번역했다. 간단히 말해 통태는 시간적인 과정이며 공간적인 구조계기인 풍토성을 발생시킨다. 이에 관해서는 후에 조금 더 상세히 서술하겠다.

지금까지의 문제군을 생각하기 시작한 계기는 분명 일본 풍토와의 만남이었고, 말할 것도 없이 문제 그 자체는 보편적이다. 일본 풍토의 특수성을 논하는 가운데 그 보편성을 발견하고 심화했다. 서양의 고전적 근대 범례의 이원론을 재검토하면서 그 두 개의 신성 축, 하나는 객체적인 동기로서의 nature이고, 다른 하나는 초월적인 cogito(근대 주체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자기 창조)인 주객(主客)의 절대적인 구별의 추상성에 불만을 자각하고 그를 대신한 풍토론의 입장에서 자연과 주체성의 관계 재구축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이 재구축은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자연’의 재검토이다. 자연은 주체의 자연환경이면서 그와 동시에 주체의 주체성 그 자체 속에서 활동하는 것이므로, 자연과 주체성은 나뉘지 않는다. 또 하나는 ‘주체’의 재검토이다. 주체는 자기동일성을 가지면서 그와 동시에 풍토 속에서 ‘자기발견’(와쓰지의 ‘자기발견성’이나 하이데거의 현존재(Dasin)에서 습득하는 사실)한다. 그러한 주체성의 장은 그 신체의 국소성(topicité)에 결코 한계지을 수 없다. 풍토(風土)에도 있는 바람(風)이 어느 정도 발산하고 있을 것이다. 나아가 자연도 살아가는 한, 기계와 다른 한 부류이며 어느 정도의 주체성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3. “Sujet”의 다양성과 위태로움

 

그리스어 hupokeimenon(밑에 깔려있는 것, 기저라는 뜻)의 라틴어 번역인 subjectum에서 유래하는 sujet, Subjeckt, subject 등등의 용어는 매우 다의적이고 모순적이기 때문에, 메이지 시대에 그것을 일본어로 번역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현대일본어에서 단 하나의 단어인 subject에 해당하는 용어는 여러 개이고, 그것들은 겉보기에 서로 관계없는 것 같고 또 경우에 따라 상반돼 보인다. 주어, 주체, 주관, 주제, 문제, 이유, 대상, 환자, 신하 등은 모두 저 하나의 단어에 해당한다. 여기서 가장 의아한 것은 논리학자에게 sujet(주어)가 물리학자에게는 object(대상 또는 객체)라는 것이다. 양쪽 모두에게 주제(subject)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다. 서양과의 접촉 이전 일본어에는 그에 상응하는 용어가 없었기 때문에 언어학자가 밝혔듯이(예를 들어 『근대 일본어의 사상』에서 “‘주어(主語)’는 번역 과정에서 만들어졌다.”라고 야나부 아키라(柳父章)가 썼듯이), 지금은 빈번하게 사용되는 주어, 주체, 주제라는 말들의 개념은 결국은 메이지 시대의 박래품(舶來品)이고 최근까지 그에 반발하여 「일본어는 주어가 필요 없다」라는 논문이 나올 정도로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확실히 서구의 주요 언어에서 발생하여 서양사상, 서양문명의 기본조건이 된 문법적 삼항구조 S-V-O(주어-동사-목적어)와 논리적 이항구조 S-P(주어-술어)가 일본어와는 맞지 않는다. 예를 들어 프랑스어에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구조임을 말해주는 저 유명한 문구인 ‘코끼리는 코가 길다’에서와 같이 두 개의 주어를 가진 문장을 일본어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여기서 ‘은/는’과 ‘이/가’가 보여주는 바, 명사 ‘코끼리’(주제)와 ‘코’(주어)의 문법적인 기능은 실제로 다르지만 그러한 구조는 서구의 주요 언어에서 문법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중국어의 구조 또한 일본어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코끼리는 코가 길다’와 같은 문장, 예를 들어 ‘那個人嘴大大的’(저 사람은 입이 크다)와 같은 예는 흔하다. 중국어에는 ‘은/는’과 ‘이/가’가 없으므로 중국의 문법학자는 그러한 구조를 간과하여 ‘主謂謂語句’(주어-술어 문장)’이라고 부른다. 주어는 술어에, 술어는 주어에 되먹임되는 구조인데 서구에서는 언어 문법뿐만 아니라 논리 그 자체가 전혀 인식되지 않는다. 일본어에서는 ‘은/는’과 ‘이/가’를 교환을 하려고 들면 간단하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베르케이다.’를 ‘내가 베르케이다.’로 바꿔도 구조는 바뀌지 않지만, 실제로는 주어와 술어의 관계가 역전하여 의미가 ‘베르케는 나다.’로 되기 때문에 S(주어)와 P(술어)에서 P가 S로 역전한다.

지금의 논의는 언어학자나 논리학자의 전문가들의 정연한 논리로 벌써 이야기되었을 것 같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현대문명의 원천, 즉 anthropocene(인류세)의 주요 요소인 서양사상의 역사에서 논리상의 주어(sujet)와 술어(prédicat)의 구조계기는 존재론상의 본질(substance)과 우유(偶有, accident)의 구조계기에 상응하는 것이므로 저와 같은 ‘역전’은 존재와 자기동일성에 관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을뿐더러 우리가 지금 당면한 인류세의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러한 구조계기를 재검토하는 것이 시급한 의무이기도 하다.

 

4. ‘자연’은 nature였던가?

 

현대일본어에서 ‘자연’이라는 용어는 원칙적으로 (적어도 과학에서) 서양의 고전적 근대 범례에 따라 주체와 상반된 객체화・기계화된 대상 nature에 대응하는데, 그것 역시 메이지의 번역 사상의 결과에 불과하며, ‘자연’이란 본래 도교의 저 유명한 표현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老子』 제25장)가 말해주듯이 인간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있는 것으로서, 바꿔 말하면 도가 그 자신과 똑같아지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자연’은 현대 문법에서 말하는 명사라기보다 오히려 부사에 가까우므로 전통적인 훈독 ‘스스로 있는’이 그것을 잘 번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스스로 있는’은 뜻밖에도 성경 출애굽기 3장 14절에 야훼가 호렙산 정상에서 모세에게 응답한 말씀(“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을 상기시키는데, 실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일신교의 야훼가 삼라만상을 절대적으로 초월하는 것에 반해 도교의 ‘스스로 있는’은 삼라만상에 내재하며 삼라만상의 자연, 자연의 더없는 주체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대 주체의 자기창립을 표현한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생각=존재라는 동일화를 설정하는데, 결국 호렙산 정상에서 발신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에 상응한다. 코기토는 우리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이므로 나는 그것을 ‘호렙산의 원리’라고 부르겠다. 왜냐하면, ‘스스로 있는 자’에서 ‘자’(근대 주체)의 주체성은 객체화된 삼라만상(근대 자연)의 기계성을 절대적으로 초월하기 때문이다. 『방법서설』에 쓰인 것처럼 “나는 하나의 실체이고, 그 본질 혹은 본성은 오직 생각하는 것이며, 존재하기 위해 하등의 장소도 필요 없고, 어떠한 물질적 사물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원론, 기계론, 공리주의, 유명론 등등의 그 무엇으로 불리더라도, 근대과학 곧 현대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이 호렙산의 원리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원리는 근거가 신비적이며, 합리적인 추론의 결과가 아니다. 주체성을 절대화하고 그것을 인간 주체의 독점적인 속성으로 규정하는 것이 합리적, 과학적이라고 증명된 바는 없다. 오히려 과학이 하루가 멀다고 밝힌 것은 인간 이외의 생물 또한 어떤 부류의 어느 정도의 주체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 물리학에서도 하이젠베르크가 분명히 표명했듯이 고전 근대과학과 달리 현대과학은 자연을 단순히 대상으로 삼지 않으며 자연과의 관계 자체를 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태도는 원리적으로 풍토론과 데스콜라의 관계보편주의와 호응한다.

그런데도 십계명에 정해진 법처럼 과학에 의한 자연의 기계화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그 적절한 예로서 학계는 이마니시 킨지(今西錦司, 1902~1992, 일본의 인류학자이자 생태학자)의 ‘분화이론(棲み分け理論)’[각주:2]을 언급한다.

 

5. 자연의 주체성 외폐(外閉)

 

몇 년 전 『진화론은 왜 철학의 문제가 되는가』(2010)라는 책을 우연히 발견하고 바로 입수한 적이 있다. 지금 이 책을 웹에서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소개 문구를 볼 수 있다. “생물학의 철학에서는 기존의 인문계와 철학계의 틀을 넘어서서 논의를 확장하고 있다. 이 책은 일본에서 생물학의 철학의 주요 연구자들이 진화론을 축으로 과학철학, 시스템 이론, 수학, 심리학, 역사학, 윤리학 등 다양한 분야와의 접점 속에서 다양한 과제를 전개한다. 원리적인 문제에서 개별적인 문제로 독자를 이끈다.” 이 과제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봐도 색인을 뒤져봐도 20세기 후반에 대대적으로 논의된 이마니시 진화론은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우선 철학 일반의 관점에서 이상하다. 왜냐하면, 이마니시 진화론이 틀렸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틀렸는지를 판단해야 하고 그것은 철학적, 인식론적, 존재론적, 방법론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생물학의 철학의 주요 연구자들’은 이마니시 진화론을 문제 제기에서부터 제외하고 폐쇄했다. 의식의 ‘밖(外)’으로 배제하고 의식의 문을 ‘닫은(閉)’ 것이다. 이마니시의 ‘분화이론’과 똑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분화이론’이 전적으로 무시될 만큼 이마니시 진화론이 어떤 규정을 어긴 것일까? 그것은 이마니시가 만년에 저술한 『주체성의 진화론』(1980)의 제목에서도 바로 알 수 있다. 즉 그는 기계일 수밖에 없는 자연에 주체성을 부여하고자 했고, 고전적 근대 범례의 두 개의 신성 축을 동시에 쓰러뜨리고자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생물학의 철학』의 ‘마을’로부터 외폐되고 말았다.

다만 저 ‘마을’은 개구리의 우물에 불과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과학철학의 입장과 다르다. 예를 들어 『과학』 2003년 12월호에는 「자연과학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가와이 하야오(河合隼雄, 1928~2007, 일본의 임상심리학자)가 이마니시 자연관의 기본적인 특징을 고찰했다. 이마니시가 연구하려 한 것은 근대적 자연 대신 ‘스스로 있는’ 자연이었다고 판단한다. “이마니시는 자연 현상에 대해 말하고 있다. 존재의 ‘스스로 있는’ 변화의 힘에서 진화의 모습을 보이고자 한다.” 가와이 하야오는 이에 머물지 않고 현대 자연과학이 우리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게 된, 지구 규모의 환경위기를 일으킨 제도의 본질적인 한 측면을 탐구한 이마니시의 자연학이라는 의미 그대로의 ‘자연학’의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동감한다. 기계로서의 자연으로부터 우리의 주체적 존재를 추상해온 나머지 서양의 고전적 근대 범례의 과학은 결국은 이 지구상에서 인간존재를 본격적으로 제거하고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드는 위험성을 띤 제도를 점차 구축해왔다. 이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초극(超克)해야 한다. 정말로 이마니시 자연학은 그러한 초극의 길을 걸었을까?

 

6. 아기는 정말로 ‘설 수 있어서 선’ 것일까?

 

알다시피 정통 진화론은 개체(지금은 유전자)를 단위로 하여 통계학적 합계(population)를 추정하고 자연도태에 의한 그 비율의 변화를 통해 생물이 진화해왔다고 생각한다. 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는 어떤 주체성도 활동하지 않으며 우연(돌연변이)과 필연(통계법)에 지배된 단지 기계적인 과정만 있을 뿐이다. 이마니시는 그러한 기계성을 부정하고 생물에 주체성을 인정했으며, 그것을 몇 가지 수준(개체, 종, 전체)에서 고찰했다. 그것은 자연의 무주체성이라는 서양의 고전적 근대 범례의 규정을 위반한 것일뿐더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립까지 소급 가능한 중세의 보편논쟁(querelle des universaaux)과 에밀 뒤르켐과 허버트 스펜서의 대립을 거쳐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유명한’ 발언 “사회와 같은 것은 없다(There is no such things as society).”에 이르기까지 모든 실재론(부류의 실재를 인정하는 파)과 유명론(개개의 실재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파)의 대립에 저도 모르게 말려든다. 이마니시의 기본 개념인 ‘종(種) 사회’와 ‘생물 전체 사회’는 근현대에 이르러 (특히 앵글로색슨족 문화권에서) 우세를 점한 근대과학의 지배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인데, 또 다른 신성한 규정을 신성 모독한 것이다. 이러한 이마니시를 벌하려 한 것인지, 그의 잘못을 인정하게 하고 회개하게 하려는 듯 영국에서 대처 급의 유명론자 비버리 할스테드(Beverly Holstead, 1993~1991, 영국의 고생물학자, 동물학자)가 도쿄를 방문하여 몇 주간의 짧은 체류 기간 후에 이마니시 진화론을 뒤집은 책까지 출간한다(『이미니시 진화론의 여행』, 1988). 원문 Kinji Imanishi: the view from the mountain top은 발간하지 않았고 다만 그 내용을 요약하여 논문으로 발표했다(Nature 317 : 587-589, 17 oct, 1985.).

사반세기가 지난 후 저명한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봐알(Frans de Waal)이 할스테드의 뻔뻔한 태도는 대단히 식민지적이었다고 강하게 비판한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드 봐알도 영장류학에서 거둔 이마니시의 거대한 성취와 패러다임 전환을 칭찬하면서도 이마니시 진화론의 중심가설인 (개체의 자연도태를 둘러싼) 종 전체의 동시 변화에 대해서는 난해한 사고라고 소극적으로 평가했다. 실은 이마니시 자신이 그 가설을 적극적으로 증명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만년의 『주체성의 진화론』에서 그는 결국 그러한 공동변화를 합리적으로 증명하기를 포기하고 아기가 “설 수 있어서 선” 것과 마찬가지로 진화 또한 “변할 수 있어서 변한” 것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의 진화론이 ‘할 수 있어서’가 멈춰선 것은 진화를 기계로서가 아니라 ‘과정’으로서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이마니시 진화론이 학회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한 것은 아마도 ‘과정’이 너무나 비과학적이고 신비적인 목적론과 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마니시 진화론의 ‘과정’은 일종의 목적론과 유사할지라도 그것을 그의 자연학 전체에서 주체의 문제 제기 속에서 생각하면 그리 간단하게 외폐(外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7. ‘할 수 있는’을 환세계론의 입장에서 재고하다

 

현대일본어에서 ‘べく(할 수 있는)’라는 조동사는 결의・의지와 의무・당연함을 뜻한다. 이 모두 주체성을 전제한다. 의무를 느끼고 의지를 갖추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결의하는 존재는 반드시 주체여야 한다. 실제로 주체성의 문제는 이마니시의 자연학을 시종일관 관통한다. 그는 『생물의 세계』(1941)에서 이미 정통 진화론의 사고방식인 자연도태에 의한 환경의 생물로의 일방적인 영향 또는 규정을 인정하지 않았고(이마니시는 그것을 ‘주체의 환경화’라고 부른다.), 오히려 주체의 환경화는 환경의 주체화이기도 하며 환경의 주체화는 주체의 환경화이기도 하다고 계속해서 주장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윅스퀼의 환세계론의 입장과 매우 가까운데, 적어도 내가 읽은 이미니지의 논문에서 그는 한 번도 윅스퀼의 환세계론을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환세계론과 완전히 같은 전제(단, 인간에 한정해서)를 가진 와쓰지 데쓰로의 풍토론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여하간 이마니시의 자연학도, 환세계론도, 풍토론도 개체든 사회든 종이든 생물 전체 사회든 우선 존재자의 주체성을 전제로 놓고 그 주체의 현실을 환경 일반(윅스퀼이 말하는 Umgebung, 와쓰지가 말하는 ‘자연환경’)으로 환원할 수 없음을 밝혔다. 주체와의 특수한 관계에서 환경 일반으로부터 특수한 환세계(와쓰지의 경우는 풍토)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생활의 장’과 같이 모호한 표현에 그친 이마니시는 환세계나 풍토라는 본격적인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의 ‘주체화된 환경’은 환세계나 풍토와 마찬가지로 명확하다. 그렇다면 와쓰지가 정의한 “인간존재의 구조계기로서의 풍토성” 혹은 더욱 일반적으로 말하면 “생물 존재의 구조계기로서의 환세계성”이라는 존재론적 개념은 이마니시 자연학에도 들어맞는다. 여기서 ‘구조계기’란 독일어 Strukturmoment의 번역어인데, 역학에서 파생한 개념이다. 통상적 의미에서는 ‘계기’와 ‘동기’의 동의어이고, 철학에서는 ‘사물을 조직, 구성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구조계기로서 ‘환세계성’이란 주체와 그 환세계의 동적인 관계를 가리키므로 이 양자를 어느 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여 어느 한 흐름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존재자를 어느 한뜻(趣)으로, 어느 한 방향으로 진화하게 만든다. 이렇게 보면, 그것은 이마니시 진화론의 ‘할 수 있는’의 뜻과 같다.

이제 이 추상적인 원리의 구체적인 예로서 이족보행을 이야기해보자. 다음의 논증은 이 문제를 연구한 크리스틴 타르디외(Christine Tardieu)의 저서 『우리는 어떻게 이족보행자가 되었는가?』(2012)를 참조한다. 예상외로 이족보행은 인간의 게놈에 기입되어 있지 않으며 결정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우연히 동물(예를 들어 늑대)에 길러진 인간 아이, 이른바 ‘늑대소년’은 실제 사례로도 보고된 바, 그들 대부분은 성장해도 언제까지나 사족보행의 상태 그대로 동물처럼 움직인다. 이족보행자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환세계(가족, 세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기는 어른을 닮아가고 어른으로 격려받으며 처음으로 일어서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장면의 필름을 몇 통이나 찍고 분석한 타르디외는 기묘한 것을 깨닫는다. 아이는 자신이 서는 순간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힐끗 돌아본다. 마치 [스스로] 그들의 의견과 칭찬을 구하듯이.

이러한 사례를 환세계론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인간 아이가 서기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특수한 유대관계가 필요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와쓰지는 『인간의 학으로서의 윤리학』에서 밝혔듯이 그 유대관계란 윤리학의 가능성 자체를 건립하는 기본 조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아기를 세우는 동기는 윤리감과 그 주요 요소인 의무감의 맹아라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그러한 의무감과 당연함을 가리키는 단어에 해당하는 것이 이마니시가 말한 ‘할 수 있는’이 아닐까? 추상적인 ‘자연환경’ 속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 속에서 아기는 설 수 있어서 선 것이다.

그런데 ‘할 수 있는’의 범위가 인간의 삶에 한정되는 것일까? 진화라는 현상의 규모에서 사정은 달라지지 않을까?

 

8. ‘과정’을 환세계론의 입장에서 재고하다

 

‘주체성’을 ‘주관성’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관(觀)’은 지각(시각과 의식), 즉 사물을 어떤 식으로 보는가에 머물지만, ‘체(體)’는 육체 전체이므로 지각만이 아닌, 몸의 행동과 작용까지 포함한다. 윅스퀼이 말하는 Funktionkreis(機能環)에서 동물의 지각범위와 작용범위는 상호작용 속에서 상호 일어난다. 나만의 환세계론에서 그러한 상기(想起)를 통태(通態, trajection)라고 부르며, 환세계성・풍토성이라는 존재의 구조계기를 낳는 과정으로 본다. 통태는 자연환경 일반(Umgebung)을 토대 또는 자원으로 해서 특수한 주체의 신체성과 그 특수한 환세계(Umwelt)라는 양쪽의 현실을 동시에 만드는 창조적인 과정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 과정의 창조성은 주체로서의 생물(인간을 포함하여)의 주체성을 전제로 한다.

이 통태라는 상기(想起, co-suscitataion)는 단지 주관성의 투영이 아니라 새로운 실체로서의 주체와 그 환세계를 동시에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인류학자 앙드레 레로와구랑(André Leroi-Gourhan, 1911~1986)의 해석에 따르면, 인류의 출현(사람화)은 삼중의 과정을 거친다. 앙드레는 기술체계에 의한 환경의 인공화(anthropisation)와 상징체계에 의한 환경의 인간화(humanisation)와 그 귀환작용(feedback)에 의한 사람화(homonisation)를 주장한다. 이 주장은 확실히 이마니시가 주장한 환경의 주체화, 주체의 환경화의 과정에 대응한다.

시간의 척도를 바꿔서 마찬가지의 과정이 진화 전체에서 일어나지 않을 리 없다. 모든 생물은 그 특수한 기능환(機能環)을 가지고 있고 주체적으로 그에 작용하고 다시 귀환작용에 작용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이 관점은 근본적, 존재론적으로 자연도태라는 결정론과 다르다. 자연도태에서는 우선 환경 일반이 있고 생물은 그에 적응해야 한다. 여기서는 어떤 주체적인 창조성이 없고 기계적이며 통계학적인 도태만이 있다. 따라서 정통 진화론은 진화의 창조성(즉 신종의 출현)을 설명할 수 없고 단지 종의 안정성을 가능하게 할 뿐이라는 판단(이마니시의 자연학은 이것만을 말하지 않는다)이 제기되어왔다. 재생산뿐만 아니라 창조성이 있으려면, 어느 한 부류의 어느 정도의 주체성이 있어야 한다.

진화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것이라면 그 속에서 종은 ‘변할 수 있어서 변하는’ 만큼, 바꿔 말하면 그 ‘과정’을 결정할 정도의 주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호렙산 원리의 광신자가 아니라면 그러한 가능성을 찾아 나서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진화가 단지 우연(돌연변이)의 결과였다면, 단백질의 가능한 조합의 수(10의 130승)를 고려한다면, 원 상태의 생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주의 나이가 영겁의 세월을 뛰어넘는, 말하자면 무한의 시간이 걸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특정 과정이 있어야 한다. 생명 전체의 각 수준(개체, 종, 전체)에서의 과정은 어느 흐름의 어느 정도로 결정된 주체성을 전제해야 한다.

이제 ‘과정’은 반드시 목적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또 반드시 목적론의 신비성이 필요하지 않다. 주체가 자신의 흔적을 되돌아보면─역사 세계에서 ‘자기발견’을 한다면─, 그 속에서 어떤 방향성, 어느 한 뜻이 스스로 발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치 안토니오 마차도(Antonio Machado, 1875~1939, 스페인의 시인)의 어느 유명한 시구인 “여행자여, 길은 없다 … 여행자여, 길은 너의 흔적 오직 그것뿐”인 것처럼, 생명과 그것을 육체화하는 생물 모두는 살아가는 한 자기 존재 의식, 즉 주체성을 가진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와 환경을 구별하고 그 구별을 견지할 수 없고 환경 속에 흩어져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자기의식을 갖기 위해서는 자존재(自存在)의 의식이 필요하다. 그 기억을 지금은 게놈이라고 부르지만, 원리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원리란 주체성이다. 말할 것도 없이 박테리아의 주체성은 데카르트의 코기토만큼 발달한 것은 아니지만 그 원리는 다르지 않다. 그것을 ‘마차도의 원리’라고 부른다면 바로 알 수 있다. “생물이여, 과정은 없다 … 생물이여 과정은 너가 걸어온 길(진화) 그 자체이므로 스스로 있으며 같아지는 오직 그것뿐.”

 
  1. 베르케의 원문에서는 ‘상대적 보편주의’라고 번역했으나, 프랑스어 ‘relatif’는 영어로 ‘relative’이고 데스콜라는 ‘관계대명사(relative pronoun)’의 ‘relative’라고 그 뜻을 명시했을 뿐더러 저 말에 관계(relation) 혹은 연결(connection)의 보편주의를 담아내고자 했으므로 ‘관계보편주의’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본문으로]
  2. 진화론의 입장에서 생물이 무리를 지어 주어진 주변 환경에 기계적으로 적응한다는 이론 [본문으로]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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