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상의 출처를 밝히는 것, 그것은 이론에 관한 지식이 결코 시대와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 지식과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실천적으로 해명한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생성의 인류학'―차이를 통한 타자로의 열림―이 우리에게 감흥을 주는 것은 그것이 시대와 공명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의 글은 그것을 잘 서술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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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오의 변덕스런 혼』 일본어판 역자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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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Eduardo Viveiros de Castro, “O mármore e a murta: sobre a inconstância da alma selvagan”(2002 In A inconstância da alma selvagem. São Paulo: Cosac Naify, pp. 183-264)의 번역본이다. 이 책의 초안이 된 논문에는 몇 가지 버전이 있다. 맨 처음 버전은 1992년에 발표된 포르투갈어 논문이다. 그것을 기초로 하여 1993년 불어판이 나왔고, 2011년에 영어판이 나왔다. 이 영어판은 1992년의 포르투갈어판을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가 2010년 수정한 미발간 포르투갈어 원고에 기초한다. 1992년의 포루투칼어 논문집에 수록된 다른 논문들도 향후 수세이샤(水声社)에서 출간할 예정이다.

이 책의 번역과정은 예상치 못한 사건의 연속이었다. 당초 번역자들은 새롭게 재작성된 영어판에 기초하여 번역작업을 진행했다. (이 책의 전반부는 콘도 히로시(近藤宏), 후반부는 사토미 류주(里見龍樹)가 담당했다.) 그런데 진행 중에 저자인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가 재작성한 원고에서 각주 등이 대폭 생략된 영어판을 번역의 원본으로 삼는 것은 저자의 희망을 따르지 않는 부적절한 조치로 판단하게 되었다. 그래서 역자들은 일단 작성한 번역문을 2002년의 포르투갈어판과 대조하여 전면적으로 개정하는 작업에 돌입했다(이 작업은 주로 콘도 히로시가 맡아 진행했다). 이때 포르투갈어판과 영어판에 차이가 있는 경우에는 원칙적으로 전자에 따르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본문의 상이한 부분, 특히 영어판에 더 추가된 포르투갈어판의 부분은 〔 〕표시를 해두는 방침을 세웠다. 포르투갈어판의 각주를 모두 담아내어 영어판보다 더 원저에 충실하고자 했다. 다만 이 책에서 혹시 있을 부정확한 번역어에 대해서는 독자들의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

이 책의 제목은 영어판 제목에서 따왔다. 이 책의 초안이 된 포르투갈어판의 제목은 “대리석과 은매화—야생의 혼의 변덕스러움에 대하여”인데, 책을 읽기 전에는 이 제목이 책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지금의 제목을 달게 되었다. 다만 제목이 길지 않도록 영어판의 부제는 생략했다. 나아가 저자인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이름을 포함하여 인명 표기는 기본적으로 기존 관례에 따랐고 또 책 전반의 일관성에 유의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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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를 간단하게 소개하겠다. 그는 1951년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루에서 태어났고, 폰띠피시아 카톨릭 대학 리오데자네이루 사회과학부에서 사회학을 배운 후 1974년 브라질국립박물관 대학원 과정에 진학했다. 1974년 야와라피티(Yawalapíti)에서 조사를 시작하여 1977년에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81년부터 파라주에 있는 투피계 인디오인 아라우에테에 대한 조사를 행했다. 이 조사를 기초로 1984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간행된 박사논문 『아라우에테—식인의 신들』(1986년) 외에 1990년대에는 「아마존의 트라비타형의 측면들」(1993년)이라는 논문을 통해 아메리카니스트로서의 업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나아가 「우주론적 직시와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1996; 1998)이라는 논문을 계기로 지역을 불문하고 인류학 분야에서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현재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라 불리는 새로운 이론적 동향을 이끌고 있다. 이제까지 일본에 번역 출간된 그의 논문ㆍ저작은 다음과 같다.

2011년 「강도적 출자와 악마적 결연」 『현대사상』

2013년 「구조주의와 생성변화」 『사상』

2013년 「내재와 공포」 『현대사상』

2015년 『식인의 형이상학』

2016년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과 다자연주의」 『현대사상』

이중 2013년 『사상』지에 실린 논문에는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 자신의 지적인 영향 관계 등이 담긴 인터뷰에 기초한 역자 해제가 덧붙여져 있다. 또 이 논문을 포함한 『식인의 형이상학』에는 ‘다자연주의’,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이라는 개념과 더불어 들뢰즈 철학과의 관계 등 최근 인류학에서 주목받고 있는 논의가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번에 새롭게 출간된 이 책은 세계적인 인류학자로서 입지를 다진 저자가 그러하기까지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책이다. 2002년의 저작집 전체 제목에 이 책의 초안인 논문의 부제가 쓰인 것을 보아도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 자신에게도 이 책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식인의 형이상학』에서 생성론적 인류학을 확립했고 지금까지 그 개념적 논의를 전개하는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가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사고에 근접해가는 브라질 출신의 민족지학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강조해두어야겠다. 그가 현지조사를 시작한 1970년대에 아라우에테와 그 종족이 속한 투피-구아라니계의 사회들은, 인류학의 영역에서 마이너한 아마존 지역 선주민 사회들 속에서도 그 복합적인 사회조직 등을 통해 상대적으로 메이저한 제어족(Gê語族)과도 다른 연구대상이었다. 인류학에서 극히 마이너한 집단 특유의 사회성을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한 그의 논의는 그 출발점을 잃지 않으면서도 점차 확장해갔다. 이것은 이 책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속에서 아라우에테와 투피-구아라니 연구는 역사적인 맥락에 위치하면서도 인류학 및 정치학의 사상사적 질문을 포섭한다. 이와 동시에 이 책은 기이하게도 같은 시기 레비-스트로스가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사고와 존재의 원리로서 제기한 ‘타자로의 열림’을 처음으로 고찰한 저작이기도 한다. 이후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레비-스트로스의 『살쾡이 이야기』(1991년)와 ‘타자로의 열림’에 관한 논의를 긍정적으로 참조한다.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이 논의야말로 레비-스트로스의 사고와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사고를 일치시키는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 외에도 『살쾡이 이야기』는 아마존 사회들의 사회성을 개념화하기 위한 중요한 착상의 원천으로 활용되고 있다. 여기서도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인류학적 사고의 출발점을 밝히는 초기 대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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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했다시피, 이 책의 논의는 1992년에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1992년은 브라질 리오에서 지구서밋(서방선진국 정상회담)이 개최된 해이며, 또 신대륙 ‘발견’으로부터 정확히 500년이 되는 해이다. 식민지 개척에 의한 대륙 발견을 축하함과 동시에 구대륙과 신대륙의 만남을 새롭게 조명한 이 해에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그러한 만남을 다시금 문제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이 논문이 다룬 주제는 선교사들의 눈에 비친 인디오 혼의 ‘변덕스러움’이다. 그러나 유럽인과 선주민의 만남을 다시금 되묻는 주제로서 이 논의가 무엇을 말하려는지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이 책에도 등장하는 질베르토 프레이레(Gilberto Freyre)는 브라질의 국민 형성을 논한 저서—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가 비판적으로 언급한 저작이기도 하다—에서 이 책의 자료와 동일한 사료를 가지고 선주민 여성이 성과 생식에 의해 (피)식민자로 통합되는 과정을 브라질 국민형성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논증한다(Freyre 2005). 존 헤밍은 16세기 브라질 아마존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유럽인의 도래 이후 점차 선주민을 휘감은 전쟁의 격화를 다룬다(헤밍 2010). 몬티이루는 16세기 중반 이후 인디오 지배를 확립한 두 가지 대응, 즉 멘데사의 투피족과의 전쟁과 예수회 신부의 교화촌 건설에 주목한다(Monteiro 1999).

이처럼 남미의 동해안에서 유럽인과 선주민의 만남은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될 수 있다. 그렇다면 “내 손에 남겨진 영역에 추가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이 책 23쪽)고 유감을 표명하면서도 선택한 ‘변덕스러움’이라는 논점은 이제까지의 질문들을 되묻는 것이라는 저자 자신의 판단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입장을 단서로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사고의 기저를 이루는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을 마주할 때 사고해야 하는 것’에 접근하면서 이 책의 의의를 생각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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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책의 최초 판본이 레비-스트로스의 『살쾡이 이야기』(1991년)에 동시대적으로 응답한 것이라는 점이다. 『살쾡이 이야기』는 이 책과 유사한 관점에서 쓰였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 점을 확인해두어야 한다.

1991년에 간행된 레비-스트로스 신화론의 맨 처음을 장식하는 저작인 『살쾡이 이야기』에서는 북아메리카 북서 해안부의 안개 신화와 바람 신화 등의 신화군이 분석되는데, 책 전반에서 이 지역의 신화군에 차용된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의 민요가 언급된다. 이야기의 차원이 아니라 유럽인과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만남이라는 유사한 문제가 다뤄지고 있다. 이 만남의 주제화는 서론의 다음 구절—이 책에서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가 참조한 구절이기도 하다—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이원론을, 그 철학적ㆍ윤리적 원천까지 파헤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 이원론이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백인이 [인디오와] 정반대의 자질로 인해 인디오와 맞부딪혔다고 하지만 백인과의 최초 접촉에서 인디오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타자에게 열려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바로 여기서부터 하나의 사건을, 즉 신세계—발견이라기보다—침략을, 그 사람들과 그 가치의 파괴라고 나는 부르고자 하는데, [인디오와 백인의 만남을] 축복으로 삼을 때에 이것[타자로의 열림]이 상기되는 것은 회한이며 기도이기도 하다. (레비-스트로스 2008: 1270)

‘타자로의 열림’의 순간에 펼쳐지는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이원론에 대해서는 몇몇 연구가 진행되었는데(山口 2011; 渡辺 2009 등),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사고에 자신이 ‘이항성의 이데올로기’라고 명명한 것을 찾아내고 또 확인한다. 이 이항성의 이데올로기적 특징은 영속적인 시소 게임 속에서 잡히지 않는 균형 위에 수립된 것으로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쌍생아와 연결된다. 쌍생아는 […] 듀메질(Georges Dumézil)이 고찰한 인도유럽 문명의 사고와 같은 동일성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신화론에서 나타나는 절대적인 차이를 상징한다. […] 불균형한 두 극의 부단한 운동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이원론은 우주를 뒤흔들며 그 균형을 확보한다. (Mauzé 2008: 1875)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논의가 레비-스트로스의 발견에 전면적으로 의거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최초 저작인 아라우에테 민족지는 그 집단만을 고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고 그 외 투피-구아라니계의 민족들과의 비교 속에서 기술된다. 그 목적은 ‘투피-구아라니의 우주론의 포괄적 모델의 구축’(Viveiros de Castro 1992:ⅹⅴ)이다. 동일성을 원리로 삼지 않고 우주론적으로 포섭된 사회의 양상을 기술하는 속에서 투피남바 족에 관한 민족지적 보고도 등장한다. 양자(『살쾡이 이야기』와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논문)는 각각의 독자적인 길로 나아가면서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 공통의 사고로 근접해간다고 말할 수 있다.

『살쾡이 이야기』와 이 책 사이에는 확실히 공통의 저류가 흐르고 있다. 그렇다면 인디오혼의 변덕스러움을 논하는 것이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사고를 특징짓는 ‘타자로의 열림’을 묘사하는 것으로 환원될 수 있을까?

그렇다고 가정한다면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논증 절차는 매우 번잡스럽다.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철학을 논하기 위해 선교사의 눈에 비친 인디오의 모습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레비-스트로스의 대응과 대조된다. 레비-스트로스는 투피남바 족을 논할 때에도 새로운 인물이 탄생됨에 따라 차이가 더욱 확대되도록 이야기가 전개되는, 백인 신(神)인 마이루가 등장하는 신화 텍스트를 직접 언급함으로써 타자로의 열림을 표상하는 인물, 즉 신대륙에서의 쌍생아의 형상—동일하면서도 불가능한 대상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발견으로 이어간다.

이와 비교하면 ‘변덕스러움’을 가이드로 삼는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방식은 기억하는 자가 보다 전경(前景)에 나타난다. 분개하는 비에이라, 낙관시하는 노브레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는 안시에타…. 변덕스러움은 선교사들의 시선에 비친 투피남바 사회의 양식에 관한 것으로서 그 시선의 소유자를 불러내지 않고서는 논의를 진행할 수 없다. 투피남바와 같은 시대를 산 유럽인이 이 논의에 반드시 등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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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논의 전개에서 16세기 유럽인이 불가결하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살쾡이 이야기』의 또 다른 특징, 즉 16세기 유럽인인 몽테뉴가 소환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살쾡이 이야기』에는 「몽테뉴 다시 읽기」라는 제목의 장이 개개의 신화분석이 거의 끝나갈 무렵 마지막 장 직전에 돌연 배치되어 있다.

프레데릭 켁은 레비-스트로스의 후기 저작에서 보이는 몽테뉴에 대한 참조를 루소에 대한 언급과 연결지으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이렇듯 참조하는 인물의 변화는 “자연주의에서 회의론으로 이어지는 인식론적인 패러다임”일뿐만 아니라 “18세기—인류학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진화론에 의한 해결을 눈앞에 두고서 루소, 칸트와 함께 초월론적인 심리학이 응답한 때라고 레비-스트로스가 재발견한 시기—에서 16세기—인류학이 인문학=인간성의 나머지 반(半)을 고찰의 대상으로 삼아야했던 정복의 시기이며 몽테뉴는 이 시기를 최초로 자각한 증인이다—로 거슬러가는 역사적인 차원”에서의 변화로도 이해될 수 있다(Keck 2008: 1878). 구대륙과 신대륙의 만남 이후 500년,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의 사고를 이끌어가기 위해 몽테뉴를 동시대인으로서 호출했다. 그러나 그 몽테뉴론은 다소 기이하게 전개된다. 여기서 조금 우회해서 그 큰 흐름을 살펴보도록 하자.

『수상록』의 여러 장에는 신세계 발견의 영향이 나타난다. 그 충격에 대한 몽테뉴의 반응은 신세계 관습에 대한 성급한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었다. 반면 투피남바 족을 논할 때에는 “이성에의 호소가 후렴구처럼 되살아난다”(레비-스트로스 2008: 1446-47).

이러한 몽테뉴의 태도에는 계몽의 철학—‘이성에 기반한 사회라는 유토피아’—과 문화상대주의—‘한 문화가 다른 문화를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의 부인’—의 두 가지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사이를 “사변적이지 않다면 실천적인 이성의 지령에 응하는 움직임”, 즉 “모든 습관에는 동일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양식에 부응할 수 있도록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사회의 관습에 순응하게”(레비-스트로스 2008: 1447) 된다.

한편 몽테뉴 나름의 문화상대주의를 『수상록』의 “다른 장보다 가장 근본적인 방식으로 민족지적인 테마로 다루는”(레비-스트로스 2008: 1447) 「레이몽 스봉의 변호」에서도 찾아낼 수 있다. 그 속에서 다양한 관습의 관점에서 이성 그 자체가 판단된다. 새롭게 발견된 신대륙 관습은 유럽의 그것과 이질적이면서도 유사하다. 결국 그것은 관습조차도 확실한 기반이 없는 것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철학전반에 나타나는 가장 강력한’ 회의론의 정식화—우리는 존재와의 사이에 어떤 교류도 가질 수 없다—에 이른다. 존재론적이라기보다 지(知)에 대한 이 회의는 “지(知) 자체를 규정하는 지(知)는 지(知)인 것일까?”라고 의심된다(레비-스트로스 2008: 1450).

그러나 지(知)의 회의론은 철저하지 않다. “만약 이 근원적인 회의론에 우리의 사고와 활동의 모든 것을 바친다면 삶은 불가능해진다. 경험적인 확인사항과 대립하지 않는다면 일관된 회의론은 자살 등의 가장 극단적인 금욕주의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레비-스트로스 2008: 1451). 결국 “회의론은 종교적인 신앙고백을 의례작법으로 환원한다. 그 대신 (다름 아닌) 이 의례작법의 존중은, 실제 생활의 활동전체를 고려한다면 회의론의 표명이 기질의 문제일 뿐인 세계를 보는 것을 허용한다”(레비-스트로스 2008: 1452). 이와 같이 회의론은 특정한 ‘보수주의적인 색체를 띠게 된다’.

이렇게 독해된 몽테뉴는 16~17세기의 선교사와 모험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라고 레비-스트로스는 평가한다. (다만 켁이 지적하듯이 『살쾡이 이야기』 이후 레비-스트로스는 더욱 인상적인 방식으로 몽테뉴를 종종 언급한다.) 몽테뉴의 모습과 부분적으로 중첩되는 선교사나 모험가는 신대륙 선주민의 관습을 “이집트, 그리스, 로마 등”의 그것과 연결지음으로써 그 발견이 주는 충격을 흡수해간다. 즉 신세계는 유럽의 과거와 동화되었다.

몽테뉴 개인의 모습까지 파묻어버리는 이 기묘한 몽테뉴론에는 일정한 절차가 있다. 오레곤과 브리티시콜롬비아의 선주민 신화에 차용되는 캐나다-프랑스계의 민요의 재창조는 타자와의 만남에서 보이는 ‘유럽인의 반응’과는 매우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 아메리카 선주민 측에서 발견되는 것은 앞서 보았던 타자로의 열림인데, 레비-스트로스는 이것을 확증하기 위해 오레곤과 브리티시콜롬비아의 선주민이나 투피남바 족이 아닌 또 다른 선주민 사회인 아스텍과 잉카를 가져온다.

잘 알려진 것과 같이, 아스텍과 잉카의 붕괴, 즉 유효한 저항으로써 정복자들과 싸울 수 없었던 그들의 모습은, 성스러운 전승(傳承)이 그 귀환을 예언하고 나아가 현지 민중을 기다리게 한 행방불명의 신들을 현지인이 정복자들 가운데서 느꼈다는 사실에 의해 많은 것들이 설명된다. (레비-스트로스 2008: 1445)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아스텍과 잉카는 사회의 파국을 더 직접적으로 상기시킨다. 여기서 완전히 이질적인 세계와의 만남에서 몽테뉴의 회의론이기도 한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방식으로는 전개되지 않았던 ‘유럽인의 반응’과 스스로 파국을 불러들였던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반응이 병치된다. 그런데 이 병치는 그 어떤 다른 물음으로 옮겨가지 못한다. 아스텍과 잉카에서 보이는 ‘불가능한 쌍생아’의 형상을 확인하면서 「몽테뉴 다시 읽기」의 장은 마무리된다. 몽테뉴의 사색을 살펴보려는 이 시도는 또 다른 유럽적인 반응과 또 다른 신세계에 대한 태도를 찾아내는 것 혹은 1992년 이전에 다시금 발견되어야 하는 윤리와 도덕의 편린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몽테뉴의 사색을 단순히 비판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상대주의와 이성이 충돌한다는 점 등에서 자신의 사고를 몽테뉴의 사고에 근접시키고 있다.)

어느 쪽에도 치중하지 않으면서도 불편할 정도로 대조적인 반응의 이 단순한 병치는 그 차이에 명확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회피함으로써 신대륙의 선주민을 상상하는 ‘회한과 기도’의 장을 열어놓고 그 속에 남아있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몽테뉴론은, 1991년 출판이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레비-스트로스 2013a: 103)고 저자 자신이 회고한 『살쾡이 이야기』—레비-스트로스 자신 안에 축적된 연구과제인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사회철학인 이원론의 고찰—에서 동시대 사회의 움직임에 대한 비판적인 대응이라는 성격이 부여될 수도 있다. 『살쾡이 이야기』가 출간된 직후인 1992년에 이탈리아 일간지인 ‘레프브리카’에 게재된 「몽테뉴와 아메리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상징적인 우연의 일치라고 지적했다. 신세계 발견으로부터 정확히 백년 후인 1592년이 몽테뉴가 서거한 해라는 것, 즉 백년 주기로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몽테뉴가 중첩된다. “현대의 사고의 기초를 이룬” 몽테뉴는 적어도 그 사색을 신세계에 빚지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서양세계 또한 자신의 발전의 상당 부분을 신세계에 빚지고 있다. 이 우연의 일치는 사물의 가치의 측면뿐만 아니라 현재의 서구가 신세계 없이는 성립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레비-스트로스 2013b). 레비-스트로스에게 아메리카 대륙의 ‘타자로의 열림’의 발견은 신대륙에 대한 서구의 위치를 역사 속에 재위치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레비-스트로스에게 백년 주기가 만들어낸 역사적인 우연의 일치가 상징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축적된 해소되지 않는 부채이며, 그것을 떠올리는 것은 파괴된 것 혹은 파괴되고 있는 것에 대해 ‘기도하는 것’ 혹은 존재가 위협당하고 있음을 사고하는 것이다. (『살쾡이 이야기』를 유럽인과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 간 만남의 재고로 위치 지을 수 있게 된 것은 1990년에 캐나다에서 일어난 모호크 인디언 봉기 때문이라고 레비-스트로스는 회고하였다.) 기억을 회복하거나 기도의 장을 마련함으로써 동시대 사회에 타자의 모습을 불러내고 비판의 계기를 열어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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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트로스에게 『살쾡이 이야기』는 서구의 역사가 그려낸 동시대 세계에 대한 비판과 연결되며 몽테뉴가 그 안내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의 논의와 얼핏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살쾡이 이야기』의 몽테뉴론을 살펴본 것은 레비-스트로스의 몽테뉴처럼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에게 노브레가와 안시에타 등이 그 나름의 비판을 이끌어내기 위해 동시대로 불러낸 인물상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인디오에 관한 것만이 아닌 ‘변덕스러움’이라는 주제의 설정은 자신과 닮지도 않았고 동화시킬 수도 없었던 16세기 유럽인을 논의 속에 필연적으로 호출한다. 그리고 이 인물을 통해 사고하는 것은 인디오에 관해 말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산출하게 된다. 이렇게 설정함으로써 이 책의 행간에 감춰진 동시대 사회에 대한 비판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그러나 신대륙에 살고 있는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비판은 서구 세계에 살고 있는 레비-스트로스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형태를 취한다. 이것은 이 책의 형식적인 특징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책에는 서두에서 말미까지 논리적으로 전개되는 주된 논의가 상대적으로 짧은 분량으로 완결되는데, 논문의 주석이 아닌 보족적인 코멘트가 종종 삽입되어 있다. 이 코멘트에는 본문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로베르트 다마츠타와 피터 가우 등의 남미 저지대 선주민의 민족지학자, 파가손과 샤농, 자크 리조 등 야노마미 연구자, 질베르트 프레이레와 브아르키 데 오란다 등의 브라질 역사가, 진보파 교회에 속하는 현대 선교사들, 인디헤니스모[각주:1]의 추진자들이다.

이 모든 이들은 20세기 브라질과 아마존 인디오와 관련된 인물들이다. 이들과의 거리를 측정하는 논의가 16세기 선교사들의 모습을 환기하는 논의와 병렬로 놓인다. 이 형식에서 분명한 것은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에게 투피남바 족을 논하는 것은 동시대 사회를 겨냥한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 합중국의 인류학자인 나폴레옹 샤농이 등장하는 부분이 있다(이 책 108-110쪽). 이 야노마미 연구자는 지금도 인류학의 윤리를 둘러싼 광범위한 논의에서 핵심적인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그렇게 된 계기는 2000년에 영어권에서 출간된 『황금향의 그늘』이라는 제목의 어느 저널리스트의 책(Tierney 2000)에 있다. 이 저작의 일부는 거의 근거 없이 기술되었음이 확인되었는데, 샤농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사실로서 확인되는 부분이 많다. 왜냐하면 이 책에는 그때까지 아카데미즘 내에서 이뤄져왔던 비판을 다시금 정리해서 기술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Borofsky 2005) 이 코멘트도 이 책의 최초 판본(1992년)에 이미 언급되었으며, 『황금향의 그늘』 이전에 샤농의 어떤 논문을 계기로 일어난 논쟁을 문제로 삼고 있다.

1988년 샤농은 『사이언스』지에 발표한 논문에서 야노마미 사회에서 나타나는 복수 등 살해를 수반하는 폭력이 생식상의 성공을 위한 활동이라는 것을 통계 데이터를 통해 논증하고자 했다(Chagnon 1988). 그는 사망자 수에서 차지하는 살해 비율이나 다툼의 경험자 비율 등의 통계 데이터를 사용해서 야노마미의 폭력성을 평가하고 그 폭력을 야노마미 사회의 본질적인 활동으로 보았다. 이 논문에 대해 브루스 알베르와 자크 리조 등의 다른 야노마미 연구자들이 반론을 제기했다. 야노마미에 관한 인구와 살해자 통계 데이터를 수집한 장소의 정보가 모호하다는 의구심이 제기되었고 현지 개념의 의미를 혼동해서 통계 데이터가 작성되었음이 지적되었으며 여성을 둘러싼 다툼으로 전쟁을 위치짓는 논의 자체가 일부다처의 낮은 비율을 생각하면 통계적으로도 지지받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리조는 그 자신이 야노마미에서 행한 조사결과에 기초한 연구를 샤농이 불명료한 형태로 참조했으며 야노마미의 폭력은 인상적일만큼 피해를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비판도 표명하였다(Albert 1989; Lizot 1989).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 또한 그와 같은 관점에서 그들을 지지하였다. 또한 리조는 샤농의 서술이 미디어에 확산됨으로써 야노마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유포하는 데에 기여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 비판이 함의하듯이 샤농 논문의 문제는 과학적 데이터의 타당성뿐만 아니라 그 기술이 발생시키는 집단의 이미지와도 결부되었다. 

1987년부터 브라질의 야노마미가 살아가는 일대에는 불법적인 금 채굴이 성행하였으며 야노마미와 금광채굴업자의 충돌도 빈번하게 발생한 탓에 의료 팀 등을 포함한 모든 외국인이 이 지역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게다가 지하자원 개발과 더불어 야노마미의 권리가 인정된 토지의 경계를 재검토하는 논의가 브라질 국내에서 진행되었다. 이 시기에 샤농의 논문이 발표되었고 야노마미를 본질적으로 폭력적인 사람들로 규정하는 내용의 기사가 영어권에서 유포되었으며 이어서 브라질 국내의 몇몇 신문에 게재되었다. 이 일 직후 브라질 군부의 요직에 있는 인물이 야노마미의 토지를 세분화하는 정책안을 채택한다. 그들이 하나의 토지에 함께 살면 더욱 폭력적으로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 상황에서 브라질 인류학회—당시 회장은 마뉴엘라 카르네이로 다 쿠냐—가 인류학자의 학술적 성과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자각을 촉구하는 항의문을 북미 인류학계에 전달하기도 했다(Albert 1992; Borofsky 2005). 즉 인디오의 폭력을 말하는 것이 사회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것이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직접적으로 이 일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자신의 논의가 사실로서의 폭력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이라고 있을 수 있는 일’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폭력과 관련된 측면에서 타자를 대상화할 때의 배려가 엿보인다.

그런데 샤농을 언급하는 부분은 다른 인류학자인 파가손에 대한 코멘트에서 시작하고 있다. 여기서 샤농을 둘러싼 논쟁에 대한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입장을 읽어낼 수 있다. 파가손의 논의는 샤농을 비판하는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샤농의 논문이 일으킨 논쟁이 보여준 문제를 중시하면서도 그것이 만들어낸 대립적인 틀—샤농파/반샤농파—에 자신을 위치짓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 논쟁을 소화 흡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는 그 논쟁이 일으킨 몇몇 논의가 폭력과 관련된 측면에서 타자를 대상화할 때 나타날 수 있는 문제의 대처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활용되고 있다. 이것은 영어판에서 부활한 한 구절—1992년의 논문에 적혀있던 한 구절—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이 책 106-107쪽). 폭력의 발생을 역사적 조건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사회생물학적인 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둘은 모두 그 사람들을 고유한 방식으로 ‘사회를 생각할 능력이 없는 자’로 위치짓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선주민 고유의 사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고방식과 같은 이유로 인지과학적인 상징표현론이 비판된다(Viveiros de Castro 2013: 493).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에게 인디오의 폭력을 문제시하는 논의에 대한 응답은 폭력에 대해 말하기를 멈추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어떻게 폭력의 현상을 통해 타자를 파악할 것인가를 되묻는 것이다. 즉 폭력적인 관점에 기초한 대상화는 실제의 폭력적 행위를 타자의 본질로 삼는 것과 같지 않다. 이것이 이 책에서 저자가 취하는 자세이다. 이러한 관점은 사상/사고 없는 자로서 인디오를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타자를 사고하는 것이다. 여기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 나름의 작업에 의한 대칭성—“현지인이 말하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Vibeiros de Castro 2003)—에 기초한 타자이해의 모랄이라고 할 수 있다.

타자의 대상화의 모색은 동시대의 다른 사회와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과제이다. 1980년대 말 건설안이 제기된 싱구 강 댐 개발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논문(루시아 멘도사 모라토 데 안드라데와 공저)에서는 그 계획의 담론에 묻힌 인디오의 대상화 양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문제제기 한다.

계획을 입안할 때 환경에 대한 영향을 문제로 삼아야 한다. 이때의 환경이란 물리적 환경, 생물적 환경, 사회-경제적 환경을 그 하위개념으로 갖는 개념이다. 이 환경개념에 의해 인간 또한 댐이나 보전구역이라는 환경의 구성요소가 된다. 반대로 그 환경 혹은 ‘복합이 주체’가 된다. 그 결과 “인구는 자연화되고 자연종으로 동화되어 <부정적인 영향>이나 일시적 혹은 <창조적>인 정비에 복속된다”(인용문 중 <>는 저자 자신이 댐 개발 계획서에서 인용했음을 나타낸다)(Vibeiros de Castro & Morato de Andrade 1990: 66).

이러한 계획의 담론은 인디오 사회를 광의의 환경으로 포괄하고 또 그 사람들을 ‘자연인’에 가깝게 만든다. 이 이미지는 자연의 수호자로서 자연환경과 일체가 되는 인디오의 이미지에도 가깝다. 그런데,

인디오 사회를 사회적인 주체로서 생각할 수 없다는 이 손해는 그 대상(代償)으로서 국가의 공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한 부정적인 자연화를 일으킨다. 이것은 진화론의 도식에 기초하여 확립된, 뒤처진 것으로서, 또 충분히 사회적이지 않은 인간으로서 인디오 사회를 표상한다. 인디오 사회를 관념적인 대문자 인간의 불완전한 샘플—그리고 통계상 무의미한 것—로 이해함으로써 이 이데올로기는 이 사람들이 충분한 사회 상태에 있다고는 인정할 수 없고 객체화된 비대칭적이고 자연화된 형식 하에서가 아니라면 문화적인 차이를 사고할 수 없다(Vibeiros de Castro & Morato de Andrade 1990: 67).

이렇듯 국가차원에서 인디오는 국가에 통제된다. 브라질의 경우 그 통제는 양의성으로 가득한 ‘보호’의 형식을 취한다. 이 ‘보호’란 신체적으로 보호되면서도 통합에 의해 고유의 사회성을 파괴한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이 보호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 ‘인디오의 영토를 자본의 투자에 대해 개방하는’ 것이다(Vibeiros de Castro & Morato de Andrade 1993).

인디오 고유의 사회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타자를 대상화하는 것은 인디오의 자연화(그것과 동질의 역사화)에 항의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아가 그것은 동시대의 사회 속에 인디오를 위한 다른 장소를 만들어내는 대응과 완전하게 분리되지 않는 과제이기도 하다. “왕 없는, 법 없는, 신앙 없는” 암묵의 비교를 통해 드러나는 부재에 의해 사회를 특징짓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사회성 그 자체 속에서 사회를 특징짓는 것은 인디오를 둘러싼 구체적인 상황에 직면한 커다란 과제이기도 한다. ‘변덕스러움’을 논하는 것은 이를 해명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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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인디오의 변덕스러움이 현실적인 문제임을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변덕스러움은] 브라질 인디오에 대한 현대의 규율 훈련가들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지금도 울려 퍼지고 있다.” 또 20세기 브라질을 살아온 인물이 16세기 선교사들의 모습과 중첩되는 형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 질베르토 프레이레와 부아르키 데 오란다 등 브라질의 국민성 논의와 관련된 역사가, 그리고 인디헤니스모의 추진자, 진보교회파, 인류학자 등이 바로 그들이다. 후자의 그룹은 동시대 사회 속에서 인도적인 모습으로 인디오와 결부된다. 그들은 모두 경험적으로 인디오에게서 변덕스러운 종자의 모습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16세기 선교사의 모습과 중첩된다. 인디오의 변덕스러움을 성가시게 생각한 선교사는 이러한 의미에서 매우 현실적인 인물상이다. 반면, 질베르토 프레이레 등에게 성가시기도 하고 변덕스러운 인디오의 모습은 어떤 인종주의적인 인식과 일체가 된다. 부아르키 데 오란다 등의 인용문이 보여주듯이 인디오의 변덕스러움은 생산성을 높이는 활동 혹은 ‘시민사회’적인 모랄과의 불화의 증거이다.

시민사회와의 관계에서 어떤 무능력을 노정하는 인디오의 모습은 브라질에서는 인디오의 법적 신분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제였다. 1916년의 민법 이후 인디오에게는 특별한 법적신분—‘한정적 무능력’—이 할당되었다. 인디오의 법적인 능력이 통상의 시민보다 제한하는 상태에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공적기관이 인디오에 대해 후견권을 가지는 것이 정당화되어왔다. 얼핏 보기에 이것은 차별적인 규정으로 보이지만, 아마존 개발 과정에서 인디오의 생명, 자유, 재산을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인디오에 대한 국가의 후견권을 구체적으로 담당하는 행정기관인 인디오 보호국(Serviço de Proteção aos Índios)이 설립 당초 “필요하다면 내 자신이 죽어도 결코 죽이지 않겠다”를 모토로 삼은 것처럼, 후견 제도는 분명 인디오 보호에 공헌해왔다. 이 제도는 “속기 쉽기 때문에 <한정적 무능력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상용거래에서 특별히 법적인 보호를 받는다. 선주민에 대한 후견이라는 관념은 경멸적인 시대착오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매우 유익한 법적 영향력을 그들에게 끼치고자 하는 것이다”(Carneiro da Cunha & Almeida 2000: 318). 이후 몇몇 법과 개정헌법을 통해 인디오에게 법적인 특권, 세금 우대나 토지에 대한 영속적인 점유 등이 승인되어왔다. 그러나 이것은 통합이라는 틀을 전제로 하는 신분이기도 하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이 특수한 법적 신분으로부터 탈각하여 통상의 시민이 되는 절차는 1973년에 제정된 법률에 의했다. 이에 따라 필요한 것은 ‘이탈(Emancipação)’의 절차였다. 이것은 후견 제도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며 언어능력과 양복을 입는 습관 등을 몸에 익힌 인디오가 청구하여 민사능력을 획득하는 과정을 가리켰다. 그러나 이탈은 그와 동시에 인디오의 신분을 지켜왔던 특권을 잃는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토지에 대한 권한상실을 의미했다. 정부가 인정하는 집단의 영속적인 점유권 대신 개인의 특권으로서 토지에 대한 권리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은 보호를 통해 인디오 이외의 경제활동이 금지된 토지가 매매 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Ramos 1998: 243-248; Carneiro da Cunha & Almeida 2000). 인디오가 통상의 시민이 되는 것과 토지가 매매 가능하게 되는 것이 일체가 되는 이 신분의 변화에 대해서는 1978년 당시 내무장관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서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켰다(Ramos 1998: 243).

1988년에 새로운 헌법이 발포된다. 신헌법에서 인디오의 권리로서 토지에 대한 집합적인 권리가 인정되는 대신에 특별한 법적 신분은 폐기된다. 그러나 이 헌법의 초안이 논의된 1987년에는 ‘문화변용한 인디오’, ‘문화변용하지 않은 인디오’의 구분이 정해짐으로써 ‘토지에 대한 권리의 법적 승인에 의해 다른 법적인 철자를 확립하기’ 위한 법령이 발포된다. 그 결과 투카노와 야노마미는 토지에 대한 배타적인 점유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지하자원 채굴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Carneiro da Cunha 1993: 14). 나아가 그보다 앞선 1981년에도 최종적으로 공인되지는 않았지만 국립인디오재단(인디오 학살과 권리를 둘러싸고 부당하게 가담한 사실이 드러났으며, 1967년에 해체된 인디오 보호국의 후견조직)은 ‘인디오성(性)의 기준’을 확정하는 60가지 이상의 항목을 만들고자 했다(Ramos 1998: 249-252). 카르네이로 다 쿠냐는 새로운 헌법을 논한 1990년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그것[행정부]이 인디오의 권리들을 오로지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미개인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의 이미지에 더 이상 인디오가 일치하지 않을 때 그 권리들이 소멸하는 것은 분명하다”(Carneiro da Cunha 1993: 15).

시민사회와의 관계에서 누가 인디오인가, 그리고 인디오란 어떤 자인가? 이러한 질문이 1980년대 브라질에서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나아가 행정부는 어떤 진화론적인 관점을 인디오가 무능력하다거나 문화 적응했다거나 하는 판단의 기반으로 삼았다. ‘한정적 무능력’이라는 신분 탓에 인디오는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었지만 그것은 보호를 가능하게 하는 시민으로의 통합을 전제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그 신분을 제거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 설정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틀에서 차이는 통합의 도식과 그에 기초한 능력의 진단 속에서 위치지어진다. 인디오를 시민으로 삼는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다 해도 이러한 처분이 가능했던 차이의 사고방식이 [브라질 사회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고 다 큐냐는 지적한다.

이 시기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도 앞서 다룬 싱구 댐에 관한 것 외에도 인디오의 신분에 관해 짧게 언급해두었다. 예를 들어, 구체적인 정책 차원에서 인디오의 ‘자기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후견 제도에 대해(Vibeiros de Castro 1983), ‘인디오성의 기준’ 등의 유사과학적인 판단이 후견 제도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Vibeiros de Castro 1982), 마땅한 토지승인의 양상에 대해(Seeger & Vibeiros de Castro 1979) 등 각각의 구체적인 상황에 직면하여 그 나름의 견해를 표명해왔다.

‘인디오성의 기준’을 비판할 때에는 ‘인디오성’은 어떤 인류학자도 규정할 수 없는 ‘유사과학적’ 개념이라고 비판한다(Vibeiros de Castro 1982: 32). 민족적인 특징이란 맥락에 따라 변용하는 것이며, “어떤 집단의 민족적인 동일성은 유전적, 사회적(사회적인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초월적인 실체가 아니다. 모든 통일성은 언제나 상황적이며 맥락에 의존하며 구축되는 것이다[…]”(Vibeiros de Castro 1982: 34). 확실히 여기서는 통합을 전제로 타자를 배치하는 ‘인디오성의 기준’이라는 개념적인 장치를 파괴하는 근본적인 비판을 행하고 있다. 앞서 댐에 관한 논의도 살펴보면, 인디오 정책을 비판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브라질 인디오의 운명을 좌우해왔던 인디오라는 차이의 통치에 의한 대상화를 되묻고 있다.

이와 같이 ‘변덕스러움’을 논하는 것은 인디오의 대상화를 되묻는 시도이다. ‘변덕스러움’은 확실히 16세기 선교사들의 시선에 비친 인디오의 모습인데,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 선교사들과 같은 시선을 20세기의 다양한 사람들 또한 공유하고 있다. 선교사가,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무능력을 인디오에게서 찾아낸 것처럼, 부아르키 데 오란다는 시민사회적인 행동에 대한 무능력을 찾아내고 있다. 통합을 전제로 하는 정책을 생산한 관료적인 관점이 인디오에게서 찾아낸 것은 ‘능력’의 유무이다. 그렇다면,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변덕스러움의 모습을 재고하고자 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즉 “미개인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의 이미지”와 일치하는 정도에 따라 타자에 장소를 부여하거나 빼앗는 사고, 백인의 것을 사용하는 것을 ‘문화적응’으로 진단하는 사고에 항의하면서 20세기 말 브라질이라는 사회에 대한 비판을 행하고 있다.

그러나 백인 유래의 물품을 인디오가 이용한다는 사실과 그 사실을 ‘문화적응’이라고 평가하는 것 사이를 단절시키는 사고는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에게는 이미 확립된 사고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라우에테를 자신의 조사지로 선택한 경위를 그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내가 인류학을 배우기 시작할 때, 투피족은 과거의 절멸했거나 ‘문화적응’한 사람들로 여겨졌습니다. 그들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재구성과 ‘민족변용’의 사회학 이회에는 민족학적인 조사를 통해 해명되는 것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70년대에 아마존 횡단도로가 개통되면서 파라주에 사는 ‘고립된’ 투피-구아라니계의 인디오와 막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앗수리니, 아라우에테, 파라카냐 등이 그들입니다. 아시다시피 투피-구아라니계의 고전적인 자료에서 가장 주목받은 것은 유명한 투피남바 족의 전쟁에 의한 식인입니다. 그런데 아라우에테에게서 무언가 그와 비슷한 것이 발견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라우에테로 조사를 간 것은 이제까지 연구되지 않은 집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때마침 그들이 투피계였던 것이지요. 아라우에테에서 조사는 매우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그때가 그들이 외부와 접촉한지 5년 정도 경과된 후였고, 5년은 매우 짧은 기간이기 때문이지요. (Viveiros de Castro 2002: 479)

아라우에테는 그 외의 투피계와는 다르게 문화 적응한 상태가 아니었고 오히려 막 접촉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문화적응의 상태에 있다고 상정하기 어려운 집단을 선택해서 조사를 행한 것인데, 그런데도 그들에게서 백인 유래의 물품이 흔하게 보였다.

전통적인 치료방법을 구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 해도, (인디오 포스트[인디오와 접촉하기 위해 국립인디오재단이 설치한 출장소. 다양한 교역품이 여기서 인디오 마을로 유입된다.]가 존재하는 한에서) 서양의 의료와 치료의 방법에 대한 아라우에테의 의존도는 매우 높다. […] 의료와 헬스워커(health worker) 서비스를 요청하는 목소리는 매우 높았고, 현실적이든 상상속이든 인디오의 필요성을 한층 증폭하고 정치-의례적인 영역까지 그것이 미치고 있었다. […] 모든 점에서 내린 결론은 아라우에테가 틀림없이 백인의 수중에 있으며, 민족의 모습이 급속하게 그리고 통렬하게 변형되는 길을 가게 되도록 운명 지어졌다는 점이다. (Viveiros de Castro 1992: 20)

그러나 백인이 인도한 길에 의존하는 듯한 모습에서 종족의 모습이 상처 입거나 변형하는 것, 즉 문화적응의 표지는 없었다. 위의 인용문을 뒤이어 다음의 문장이 이어진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이 어떤 지적인 대응이며 아라우에테는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스타일에 의해 그들과 우리 사이의 개념적인 차이를 상술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Viveiros de Castro 1992: 20)

요컨대 백인의 물품을 이용한다는 사실을 문화적응 혹은 종족변용으로 진단하지 않는 것은 그 자신의 판단을 바꾼 것이다. 동화의 증거가 읽힐 수도 있는 곳에서 아라우에테의 차이에 대한 사고를 차이로서 읽어 들인 것이다. 즉 동화의 징후의 해독에서 새롭게 대체된 사고가 작동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차이의 장을 여는 사고이다.

‘변덕스러움’이라는 주제를 논하는 것은 이것과 동형의 사고의 실천일 것이다. “야생의 변덕스러움은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 사회에서 함께 생활할 때에 경험하는 어떤 것에 확실히 대응한다”라면,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 본인 또한 변덕스러움을 경험으로 알고 있을 것이며, 선교사들에게는 자신과 동화되지 않는 상대 그 자체이기도 했을 것이다. 실제로 때때로 ‘변덕스러움’에 대한 선교사의 비판의식이 자유간접화법과 비슷한 방식으로 기술된 이 텍스트는 그렇게 읽어 내려갈 수 있다. 혹은 적어도 저자인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텍스트를 그렇게 구성하고 있다.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가 선교사와 부분적으로 중첩된 위치에 있는 만큼, ‘변덕스러움’을 재고하는 것이 단지 16세기의 몰이해에 대한 비판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 대응은 그 자신조차 거꾸로 새로운 사고를 탐구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변덕스러움에 초조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혐오하는 감성에, 그로부터 파생하는 차별의식에, 그 의식에 의해 용인된 불평등한 대우에 결코 일치하지 않는 사고과정을 보여주는 것. 그것은 곧 인디오 사회를 해체할 수 있는 사회정책을 지지하는 사고의 조건에 항의하는 것이며, 동시대 사회에서 실현되는 차이를 사고하는 조건을 바꾸려는 도전이기도 하다. 이 사고의 이미지는 후에 현대적인 인류학적 사고로서 결실을 맺는다. “인류학의 역할은 타자의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를 다원적으로 만드는 것이다”(Viveiros de Castro 2014).

여기서 구대륙에서 신대륙을 사고하는 레비-스트로스와 달리 인디오 사회의 일원으로서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차이를 생각해내기 위해 불가결한, 자신을 변화시켜나가는 지향이 더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태도와 일체화가 되었을 때 차이에 대한 사고는 사회비판의식을 담고 있다. 수백 년간 이어져온 차이에 대한 사고의 조건을 되묻기 위해서는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차이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다루는 것이 아니라 혐오와 차별로 전화되지 않는 사고방식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는 20세기말 브라질 사회, 앞으로 더욱 인디오와 관계가 밀접해질 사회, 16세기 선교사가 자신으로 동화시켜야 하는 누군가가 있는 사회에서 다른 방식으로 차이를 사고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대응은 단지 타자의 모습을 파악하는 것만으로 완수할 수는 없다. 문화개념, 나아가 권위와 복종을 둘러싼 사상사적인 사정범위를 더욱 깊게 파고들어 ‘우리’의 사고에 근본적인 도전을 해야 했다.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차이를 부인하지 않으면서 그 차이를 혐오와 차별과 불평등으로 전화시키지 않는 사고를 탐구하는 것은 다만 20세기 말의 브라질 사회에 한정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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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역자들이 처음 만난 곳은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를 게스트로 맞은 2010년 12월의 국제심포지엄의 회장이었다. 당시 지금처럼 그의 연구를 맞아들일지는 전혀 생각지 못했지만, 그때의 우연이 지금의 기회로 이어졌다. 그것은 하나의 타자를 생각하는 것의 어려움과 즐거움을 맛본 둘도 없는 기회였다.

이 책의 번역 과정에서 많은 분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포르투갈어 번역과 가타카나 표기에 관해서는 다카하시 케이스케(高橋慶介)에게, 16세기 선교사의 텍스트 해석에 대해서는 파울라 오죠스 한토리(Paula Hoyos Hattori) 씨에게 조언을 구했다. 물론 이 책의 모든 책임은 역자 2인에게 있다. 또 저자인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 씨와 연락을 도운 야다우치 타다수(箭内匡) 에게 감사하다.

또 수세이샤(水声社)의 고토 토오마(後藤亨真)에게, 부분적으로 이 책의 돌발적인 제작 과정을 잘 이끌어왔던 것에 감사하며, 또 번역의 기회를 주어서 감사하다.

 

 

  1. 인디헤니스모(indigenismo) 라틴아메리카 선주민의 복권운동. 16세기 이래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본문으로]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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