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기획한 박동환의 철학과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간의 교차 읽기를 아직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 기획은 전적으로 나의 인류학적 탐구가 존재론적 전회라는 사상적 흐름에 가담하기 위한 기초작업이다. 숲은 생각한다, 부분적인 연결들, 식인의 형이상학, 자연과 문화를 넘어서 등등 존재론적 전회를 대표하는 주요 저작들을 읽고 나도 그와 같은 연구 작업을 하고 싶었다. 구태의연하고 지루하고 그저 학자라는 직업군의 생활적 윤활유로 전락한 20세기 인류학과 단절하는 데에서 나아가 산 것뿐 아니라 죽은 것까지도 살아있는 것으로 다루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인류학을 할 수 있는 길을 찾은 듯했다. 그러나 그 길은 여전히 그들의 길이었고, ‘사고의 탈식민화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만난 것이 x의 존재론이었다. ‘x의 존재론은 나의 인류학에 숨을 불어넣어 주었다. ‘x의 존재론의 관점을 통해 비로소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과 그로부터 비롯된 후학들의 문제의식과 탐구 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해는 관점에서 나온다.)

야생의 진리: 불타는 자아의 경계 위에 살다는 말하자면 x의 존재론의 보론이다. 이 책은 20201222일 한국연구원 학술심포지엄 <x의 존재론을 되묻다>를 계기로 조직된 x의 존재론을 둘러싼 여러 논의에 대한 친절한답변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답변이 친절한첫 번째 이유는 저 논의 대부분이 x의 존재론을 이해하지 못한 무지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지까지도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저 논자 중 누가 x의 존재론에 대해서 사용한 해석의 무덤이라는 수사는 해석할 수 없는 그 자신의 무지를 드러낸다. 아니라면, 저 수사가 죽음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보아서도 해석이란 곧 산 것을 죽은 것으로 만들어 묻어버리는 것일 수 있으며, ‘x의 존재론은 애초에 그러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레비스트로스를 해석하는 글을 본 적이 없다. 레비스트로스에 관한 글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한 무지를 드러내거나 이해한 것을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두 번째 이유는 저 논자들에게 x의 존재론에 이르는 맞춤식 길 안내를 해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브뤼노 라투르, 들뢰즈-가타리 등의 곁길을 알려준다.

박동환의 책은 슬프다. 철학이 시학과 가깝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철학이 사라져갈 인류의 운명을 알아서이지 않을까? 인류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사라질까? 박동환이 말한 대로,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온갖 고난을 감내해야 하는 나무의 지혜보다 못해서 차라리 숨(인간사고)을 스스로 서서히 거둬 가게 되는 걸까? 지구상에 영원히 썩지 않길 바라는 폐기물로 자신의 흔적을 대신하면서. 야생의 진리는 사라져갈 인류의 진혼곡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진혼곡은 인류의 지성에 숨을 불어 넣는다.

그래서 박동환×레비스트로스의 기획은 인류학에 유효하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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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글은 프레데릭 켁(Frédéric Keck)의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출간한 Un monde grippé(2010)의 일본어판인 유감세계(流感世界)(2017)의 서론과 1장의 일부, 결론의 일부를 번역(중역)한 것이다. 켁은 1974년 프랑스 태생의 인류학자이고 20세기 프랑스 지성사(콩트, 레비-브뢸, 베르그송, 뒤르켐, 레비스트로스 등등)에 관한 중요한 저작을 다수 저술했다. 그 책들은 대부분 프랑스어로 쓰였고 또 영어로 번역되지 않아서 그의 학자적 명성은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레비스트로스 4세대를 대표하는, 21세기 존재론의 인류학을 이끄는 주요 학자로 꼽힌다.

이 책은 홍콩에서 발원한 조류 인플루엔자를 현장 연구해서 팬데믹을 신화론으로 다룬 것이다. 원제에서 “grippé”의 뜻은 독감이고, “유감(流感)”은 독감의 중국어 표현이다. 원제를 우리말로 직역하면 독감세상이다. 이 책은 동물 질병(인수 감염병)에 대한 참신한 접근과 이해가 돋보이지만, 무엇보다 그의 독특한 공부 이력 때문인지(프랑스고등사범학교를 나와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캠퍼스에서 문화인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편으로는 현상을 건조할 정도로 꼼꼼하게 기술하여 결론을 끌어내는 미국 인류학의 귀납적인 글쓰기 스타일이, 또 한편으로는 이론적 가설을 앞세워 논리적 추론을 해나가는 프랑스 사회철학의 연역적인 글쓰기 스타일이 엿보인다.

보다시피 20세기 이래 인류는 바이러스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다. 1917년 일명 스페인 독감이 약 5000만 명 추산의 사망자를 낸 이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변형을 거듭하면서 주기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심지어 최근에는 그 주기마저 짧아지고 있다. 특히 중국을 위시한 아시아에서 주로 발생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인구수와 그에 연동된 가축 수가 엄청나게 증가하여 밀집도가 높고(중국에서만 19671300만 마리였던 닭의 개체 수가 30년 만에 그의 1000배인 130억 마리로 늘어났고 돼지의 개체 수가 500만 마리에서 1억 마리로 늘어났다), 인간과 상품의 이동이 국경의 제한을 받지 않고 빈번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대로라면 아시아에서 언제든 또 다른 바이러스 질병이 대규모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켁의 관심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출현이 어떻게 생물학적 실재와 사회정치적 실재를 연결하며 그 결과 어떻게 정치적 파국으로 의미화되는가이다. 다음의 글에서도 나왔듯이, 가령 중세의 페스트는 신의 벌로 의미화되었고 19세기 콜레라는 위생적이지 못한 음료를 섭취할 수밖에 없는 빈곤층을 둘러싼 사회적 불평등으로 의미화되었다. 20세기 인플루엔자는 (유전학의 발전으로 알게 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그것(바이러스)이 생물에 대한 인간의 사회적, 역사적 관계를 반성하기를 촉구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파국을 맞지 않기 위해 생태적 파국을 막으려는 방역(bio-security)’이라는 감시장치는 인간을 포함한 생물들 간의 역사적 총체에 대한 성찰을 회피하고 더더욱 파국으로 치닫게 만든다.

켁은 이 파국을 전체화의 국면, 측 신화로 독해한다. 즉 신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의 실재를 표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실을 총체적으로 떠받치는 세계관을 구축하고 그 표현을 글로벌화한다. 예를 들어 팬데믹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을 현실화하고 인간이 세계를 지각하는 다양한 방식들의 공통분모를 추출해서 그것으로 모든 행위자를 집결시킨다. 요컨대 지구 규모로 전개되는 파국적 위협의 잠재적이고 가상적인 차원을 총체적으로 가시화하는 것이 팬데믹의 신화론이다. 그러나 켁은 인간과 비인간의 사회적, 역사적 관계에 기반한 팬데믹의 신화적 의미화는 끊임없이 변환되는 구조이며, 이 신화가 인간사회를 하나의 전체성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바로 그때 또 다른 신화로 변환한다고 말한다.

2010년에 출간된 책이니 이 책을 통해 조류 인플루엔자 이후 출현한 코로나바이러스의 더욱 강력하고 더욱 총체적인 팬데믹을 설명하기에는 미흡하다. 그러나 현세기의 팬데믹을 둘러싼 방역이라는 감시장치가 전쟁의 효과처럼 전체주의를 부추기는 한편으로 팬데믹의 신화가 전체화에 이른 순간 또 다른 전체화로 향해갈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되씹어보기에 충분하다.

 


 

서론. 동물 질병의 인류학

 

나는 2007년부터 2009년까지 홍콩에서 조류 인플루엔자에 관한 민족지적 현장연구를 했다. 내가 이해하려 한 것은 동물에서 사람으로 바이러스가 전이됐을 때 왜 세계는 인플루엔자 팬데믹에 빠지는가였다. 실제로 홍콩은 인플루엔자가 발생하여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는 전초기지와 같은 양상을 보여주었다. 또 홍콩에서는 1968년에 팬데믹 인플루엔자(H3N2)가 출현하여 전 세계적으로 100만 명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또 이곳에서 1997년에 A형 독감 바이러스(H3N2)가 검출되어 감염된 인간 중 3분의 2가 죽었다. 이 바이러스는 새에게서 인간으로 전이되는 것이었다. ‘세계의 아틀리에라 불리는 광저우 인근에 있어서 금융과 교통의 네트워크가 교차하는 연결망(‘허브’)으로 자리 잡은 홍콩은 다양한 상품이 세계 각지로 운반되기 위한 관문임과 동시에 그러한 상품과 함께 전파될지도 모를 병원체가 통과하는 관문이다. 공식적으로 홍콩은 아시아의 글로벌 도시라고 칭해진다. 경제적, 금융적 조건을 창출하고 상품판매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탓이다. 홍콩은 새로운 질병이 병원보유동물 속에 출현하여 지방의 생태학적 데이터에 따라 글로벌 사회로 퍼지는 양상을 살펴보는 데에는 최적의 장소이다.

그런데 20094월에 멕시코시티에 인플루엔자가 출현했다. 이 발생지 또한 북부와 남부 사이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이었다. 이 바이러스는 몇 주 전에 양돈장이 있는 베라크루스주(Veracruz)의 한 마을에 출현해서 전 세계로 번져갔다. 세계보건기구(WHO)의 담당자들은 611일 이 돼지 기원의 신형 바이러스를 팬데믹이라고 선언하였다. 이처럼 매우 위험하지만 전염력이 낮은 조류 인플루엔자바이러스인 H3N2에 전 세계의 위생 당국이 긴장하는 가운데 전염력이 매우 높지만 위험성은 낮은 돼지 인플루엔자바이러스인 H1N1이 등장한 것이다. 신형 바이러스의 움직임은 여전히 예측 불가능했다. 다만 새에게서 출현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돼지를 매개로 하여 인간에게 전이될 것이라는 거의 30년 전에 나온 과학적 시나리오가 확인됐을 뿐이다.

이 신형 바이러스가 출현했을 때 나는 연속 강의를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머물고 있었다. “분명 당신을 위해 일어난 일입니다.”라고 나를 초대한 사람 중 한 사람이 말했다. 나 자신의 조사를 계속하기 위해 바이러스를 가지고 왔다고 웃으면서 억지를 부리는 자도 있었다. 연구를 깊이 있게 진행할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아르헨티나에 체류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남아메리카에서 공포의 복합체가 형성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고 북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이러한 복합체의 발생을 예측할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이 책을 쓰게 된 것이다. 당초에 나는 홍콩에서 인플루엔자 대책의 글로벌화를 이해하고자 했지만, 바이러스의 전이가 발생한 곳에 내가 우연히 있은 탓에 나는 이 전이를 추적할 수 있었다. 즉 나는 인플루엔자와 그것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준비된 장치를 둘러싼 세계 투어를 자원한 셈이다. 백과전서적인 연구 자세로 세계 전체를 아우른다는 것은 자만일 수 있고, 그러한 목표는 지금 돌이켜보면 접근 불가능한 것이지만, 역사의 우연이 여러 번 겹치면 멀리 떨어진 장소들을 직접 연결해서 단편적인 현상을 수미일관된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다.

나의 시선은 인류학자의 그것이다. 나는 인플루엔자의 궤적을 결정하는 메커니즘을 인식하려 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나타났을 때 각각의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반응하는지를 이해하려 한 것이다. 이 목적에는 현재 바이러스학이 발견한 핵심적인 사실이 결정적이다. 즉 병원체는 예측 불가능한 거동을 보이면서 종()의 장벽을 뛰어넘는 능력이 있다. 바이러스의 전이는 연속적인 생물학적 현상이라고 해도 바이러스에 횡단되는 유기체가 일으키는 반응은 비연속적이다. 똑같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자신의 유전자 코드를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전이시키면서 새나 돼지나 사람 사이를 통과해가는데, 각각의 종에 나타나는 병의 증상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전이 체제에서 이와 같은 변화를 기술하기 위해 통일된 용어를 사용한다. 그들은 DNA 바이러스와 RNA 바이러스(예를 들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구별한다. DNA에는 수복기구가 갖춰져 있지만 RNA는 복제 에러를 수정하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전이의 빈도는 후자가 전자보다 높다. 그리고 분절 RNA 바이러스와 그 외 비분절 RNA 바이러스가 구별된다. 전자는 한 번만 자기 복제하지만, 후자는 수많은 조각으로 분리되어 이 조각들이 복제 때마다 교환된다. 바이러스가 중간적 매체속에서 복수의 동물 종으로부터 요소를 빌려서 자기 복제하는 경우를 유전자 재집합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바이러스가 한 종으로부터 다른 종으로 직접 이동하는 경우에 보이는 유전자 단절(이는 시프트가 아니라 드리프트)과 구별된다. A형 인플루엔자는 동물로부터 사람으로 이동할 때가 있는데 이것과 구별되는 B형 인플루엔자는 보통은 사람들 사이를 순환한다. 마지막으로 A형 인플루엔자 가운데에서도 면역력이 없는 사람의 생체에 출현한 후에 전염할 가능성을 가진 팬데믹 바이러스(예를 들어 1918년에 2천만에서 5천만 명의 사망자를 낸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와 이러한 신형 바이러스가 사람 개체군에 적응한 결과 면역력이 약한 사람에게만 영향을 주는 계절성 인플루엔자(이것은 연간 20만에서 50만 명의 사망자를 내고 있다)가 구별된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은 당연하게도 전이한 바이러스가 위험한 것이 되고 또 게다가 파국적인 것이 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1918A형 바이러스(H1N1)염기배열결정도 특정한 유전자에 의한 그 예외적인 전염력을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이 바이러스의 원인은 그것이 나타난 환경에 귀속되어야 했다. 따라서 종의 장벽이라는 발상은 부분적으로는 확실치 않다. 그것은 동정(同定) 가능한 생물학적 메커니즘이라기보다 사회적 차원을 가진, 생물 사이의 여러 관계의 총체를 나타낸다.

인류학자들이 연구하는 것은 한 사회로부터 다른 사회로 순환하는 요소(기술, 이야기, 영상 등등)가 그것이 횡단하는 다양한 사회 속에서 어떻게 다른 해석을 불러일으키는가이다. 이렇듯 그들은 왜 어떤 환경에서는 병원체가 위험한 것으로서 지각되고 다른 환경에서는 그렇지 않은가에 관한 과학적인 검토를 수행할 수 있다. 인류학이 해명한 것에 의하면, 병의 의미는 그것이 사회적 질서와 신체적 질서를 전복시키는 방식에 의해 주어진다. 그렇다면 동물 질병은 인간이 자신의 환경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으로 작동되는 방법을 구축하듯이 인간과 동물의 여러 관계에서의 변환(transformation)을 표현한다. 이때 인류학은 다양한 생태학적 변화를 통합하도록 공중위생에 관한 문제들을 재구성하는 것에 공헌할 수 있다.

1970년대 말 세계보건기구는 인류가 경험한 가장 무서운 질병 중 하나인 천연두 대책 캠페인의 대성공에 고무되어 전염병의 근절을 선언했다. 이 병(천연두)은 동물에서 사람으로 전이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사람 개체군 전체에 백신 접종을 시행함으로써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앙아프리카 원숭이에서 신형 바이러스가 출현함에 따라(특히 에볼라는 매우 빨리 감염자를 죽이고 효과적으로 전파되고, 에이즈는 인간의 면역계에 비교적 오랜 기간 잠입하여 지구 전체로 확산하였다), 이러한 낙관적인 시나리오는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생물학적 연구는 새로운 병원체의 출현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이러한 병원체를 병원보유동물 안에 오래 묶어 두는 것을 목표로 삼아왔다. 여기서 병원체는 거의 발병하지 않은 상태로 순환하지만, 사람에게 도달하고 나면 높은 병원성을 보인다.

이러한 모든 신흥 감염증 중에 (신형 바이러스가 발견될 때마다 그 수는 계속해서 증가하는데) 인플루엔자는 중심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계절성 인플루엔자라는 형태로 인류에게 가장 흔히 발병하는 질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닭과 돼지라는, 인간이 가장 빈번하게 접촉하는 동물로부터 출현하기 때문이다. 인플루엔자는 주목할만한 동물 질병이 되었다. 즉 그것은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예상을 벗어나는, 우리 일상에 뿌리내리고 있으면서 그와 동시에 이 시대 최대의 파국을 일으키고 있다. 이렇듯 20세기에 인플루엔자가 보여준 중대함은 지금 이 세기에 생물 간의 여러 관계에서 어떤 변형이 일어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중세의 페스트는 신의 벌로서 해석되었지만, 19세기의 콜레라는 음료수에 대한 접근에서의 사회적 불평등을 통해 설명되었고, 바이러스의 전이는 지구상의 인구 증가와 상관적인, 가축의 수의 증대와 결부된다. 20세기가 인플루엔자 팬데믹으로 특징지어진다면(1918년의 A형 독감(스페인 독감)(H1N1), 1957년의 아시아 독감(H2N2), 1968년의 홍콩 독감(H3N3), 2007년의 인플루엔자(H1N1)) 그것은 20세기가 유전학의 시대임과 동시에 동물과 인간 각각의 개체군 간 이동의 시대라는 것을 말해준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유전자의 (헤마글루티닌을 나타내는 H 단백질과 뉴라미니다아제를 나타내는 N 단백질에 의한) 염기배열결정에 의해 글로벌한 수준에서 사람과 동물 각각의 개체군 속 분자적 수준에서 변이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팬데믹의 연속은 단지 과학적 탐색력의 개선의 효과뿐만 아니라 병원보유동물 수의 증가의 결과인 것이며, 따라서 동물 수가 증가함에 따라 바이러스가 전이되는 경우 또한 함께 증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967년부터 지금까지 중국에서 닭의 개체 수는 1300만 마리에서 130억 마리로 증가하였고 돼지 수는 500만 마리에서 일억 마리까지 증가하였다. ‘축산혁명’, 30년 만에 인간의 식량용으로 사육된 동물 수의 급격한 증가는 바이러스의 전이라는 사건의 증식을 일으켰다.

만약 인플루엔자를 글러벌화의 질병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이러스가 많든 적든 치밀한 교통 네트워크를 통해 급속하게 이동될 뿐만 아니라 인간세계에의 반응을 통해 전이를 가능하게 했던 여러 교통 관계를 돌연 정지시킬 가능성이 있음을 내비친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독특한 방식으로 글로벌화의 양의성을 해명한다. 즉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자기를 복제하기 위해 다른 유기체 간의 교류가 필요한데, 유기체 간의 차이가 잘 조정되지 않을 때 바이러스에 의해 유기체는 파괴될 수도 있다. 이 질병에 주어진 이름은 이러한 양의성을 나타내며, 그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불어로 독감을 뜻하는 ‘grippé’는 개인 간 상호이해의 양태를 의미한다. 그 와중에 개인은 자신의 이해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의심한다. ‘gripper’는 아마도 본래 뜻과 바뀐 뜻을 함께 파악한다를 뜻하는 ‘greifen’에서 유래할 것이다(‘누군가를 파악한다혹은 관념을 파악한다’). 영어에서 인플루엔자를 가리키는 말은 ‘flu’이다. 이 말은 이탈리아어의 ‘influenza’에서 유래하는데, 이 이탈리아어는 16세기에 질병과 우주적 영향을 결합한 점성술적 추론의 프레임 내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말은 점차 유출[flux]’의 병, 즉 통제가 풀린 상태에서 교역이 열려 동료들 간의 한정된 영역을 뚫어버리는 병과 결부된다. 중국인은 유감(流感)’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유통에 의한 감염을 가리킨다. ‘감염(contagion)’은 여기서 전염(infection)’과 구별된다. 중국에서 인플루엔자가 염려되는 때는 신년제(新年祭)와 같이 인간과 상품의 이동(‘인류(人流)와 물류(物流)’)이 특히 활발해지는 시기이다. 따라서 인플루엔자로 인한 충격적인 사태는 개인의 연이은 죽음이라는 스펙터클이라기보다는 교역을 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다. 혹은 오히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개인의 연이은 죽음의 의미는 인간적 활동이 스스로 과잉된 격화 때문에 종언을 맞이하게 된다는 지평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인플루엔자는 동물과 인간의 순환 속에 어떤 파국의 가능성을 도입한다. 그것은 생물학자들이 파국이라는 말에 부여하는 의미와 다르다. 파국이 연속적 과정에 불연속성을 도입하는 것이라면 그것에 의해 전복되는 것은 유전자적인 전이의 총체가 아니라 오히려 생물 동료의 역사적인 관계들의 총체이다. 신흥 감염증이 한 인류학자에게 제기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생물학적 수준에서 파국적인 전이 가운데 어떻게 해서 몇몇 전이가 정치적 파국으로 번지는가? 중요한 것은 단지 어떤 사회적 벡터가 바이러스의 출현을 설명하는지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이 출현이 총체화된 행위자들에 의한 정치적 파국이라는 지평 속에서 어떻게 해석되는지를 그려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복잡하게 얽힌 한 세트의 척도와 엮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물학적 변이와 예측할 수 없는 정치적 파국 사이에서 적확한 묘사가 가능한 사회적 수준을 어떻게 선택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소하는 하나의 방법은 파국적인 바이러스 전이 시기에 당장 눈에 띄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사람 개체군의 외부에 있는 병원체를 억압하기 위해 동물의 위생적 살처분을 시행하는 양태이다. 1996년의 BSE 위기 때 광우병에 걸린 소들, 1997년의 H3N2 출현 때 홍콩 인플루엔자에 걸린 닭들, 2003년의 광저우의 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위기 때의 사향고양이들은 무지막지하게 살처분되었다. 2009년의 인플루엔자 때는 사육장의 동물이 단순한 상품일 뿐만 아니라 살해되어야 하는 생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는 신석기 시대에 동물이 가축화된 조건을 되짚어보게 만든다. 동물을 돌봐주는 대신 인간은 소비물자(고기, , 가죽 등등)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을 자신의 거주공간에 들이는 대신 병원체를 받아들여야 했다. 인간은 동물과 함께 독이든 선물을 받았다. 인간과 미생물의 공진화에 의해 이러한 교환에 일시적인 균형이 생겼다 해도, 새로운 동물 질병은 인간이 가축 계약을 스스로 파기한 상황인간이 동물을 돌보지 않고 동물에게서 소비물자만 얻어가는 상황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기에 마치 동물들이 상품으로 변형된 것에 대한 복수를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조건에서 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동물 질병에 대한 공포는 새로운 의학적인 합리성에 의한 그 논리적 기능을 통해 설명된다. 동물은 이 합리성 속에서 교환에 적합한 상품임과 동시에 인간에게서 받은 처우의 복수를 행할 용의가 있는 생물이기도 하다는 양의적인 존재로서 나타난다. 이 긴장 관계는 사육 동물과 애완동물의 구별로 인해 더욱 고조된다. 이 긴장 관계는 이 구별(이 구별은 종종 도시와 농촌을 재구획한다) 하에서 인간이 동물을 보호해야 하는 것과 동물에게서 인간을 보호해야 하는 것 사이의 모순을 일으킨다. 병원체는 겉으로 보기에 양립 불가능한 동물의 두 측면을 명확히 드러낸다. 병원체는 동물로부터 인간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양자 사이의 생물학적인 연속성을 보여주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이 동물을 기르는 사육조건의 결과로서 병원체가 발생한 것이기에 양자는 분할된 정치적 조작이라는 것을 드러내기도 한다. 고대의 희생제의에서는 이 모순을 공동식사를 통해 해소하고자 했다면, 위생상의 살처분은 병원체가 침범한 종()의 장벽을 재설정하고 시장에서 소비에 적합하지 않은 고기를 회수함으로써 이 모순을 풀어내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살처분은 미디어의 시선 하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동물의 현행 사육조건을 가시화하게 되고 공포를 더욱 조장하게 된다.

이 책은 위생상의 살처분을 직접 다루지 않는다. 내가 시도하는 것은 바이러스와 가깝게 있는 과학자들의 추론을 따져 묻는 것이다. 실제로 위생 생물학자들이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감시와 백신 접종이라는 방법을 통해 살처분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병원보유동물로부터 신형 바이러스가 출현하면, 유전학적, 생리학적 특징에서 추적 가능한 형태를 추출하여 이름을 지어주는 것에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살처분에서와 마찬가지로, 전문가들은 동물의 두 측면에 담긴 모순을 해소하겠다고 주장하기는커녕 이 모순을 동물병원에 관한 모든 행위자 사이에 밀어 넣어서 증폭시키려 한다. 즉 전문가들은 매개자의 역할을 연행하는 것이기에 그들은 동물을 둘러싸고 대적하는 두 인식을 하나로 합치는 표상을 만들어내어, 자신들의 맥락 속에서 이 긴장 관계에 대처해야 하는 행위자들에 가까이 이동해간다. 그때 이 모순은 위기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그 속에서 위험의 개연성은 생산과 소비를 연결하는 연쇄 속에서 동물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에 따라 평가될 것이며, 상품의 추적 가능성에 따라 이 연쇄의 통제에서 행위자 각각의 책임을 할당할 수 있다. 따라서 조사 기간 중 나는 행위자들이 이러한 긴장 관계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면서 그들의 대부분(축산업자, 동물보호단체, 식육판매업자, 수의사, 의사, 보건당국, 종교적 권위, 기자들)과 만나고자 노력했다. 행위자들 각각이 동물기원의 재화 생산과 소비를 연결하는 연쇄 속의 위치에 따라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탐구했다.

그림. 20세기 동물 질병을 둘러싼 인간과 가축의 관계

그리하여 이 책은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들에게 중심적인 역할을 부여한다. 전문가들은 두 축에서 매개자의 기능을 담당한다는 것이 나의 가설이다. 즉 생물학적 변이와 위생상의 살처분과 닥쳐올 파국을 관통해서 생물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연결하는 수직축과 생산과 소비를 관통해서 동물과 인간을 연결하는 수평축이다(<그림> 참조). 바이러스를 추적하는 전문가들을 뒤쫓는 것은 인류학자로서는 전염이라는 직선적인 도식을 버리고, 그들이 이동해가는 여러 사회적 연망을 총체로서 보는 것이다. 바이러스는 자신이 출현하는 맥락에 따라 관계들의 구조에 갇히게 되는데, 이 구조는 생물적인 것-정치적인 것과 생산-소비의 두 축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각각의 맥락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병원체는 어떻게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가? 그리고 병원체는 자기로 인해 드러나는 음식물의 연쇄 속에 얼마만큼의 행위자를 집합시킬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을 통해 테러리스트의 습격, 파업, 제노사이드 등등 다양한 파국과 관련한 공공의 공간 속에서 바이러스가 어떻게 표상되는지를 알고자 했다. 이토록 중요하고 논쟁적인 현상들이 동물 질병이라는 겉보기에 기술적인 관점에서 다뤄지고 또 바이러스라는 미시적인 존재를 통해 파악된다는 것은 의외라고 생각할 독자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이 시도하는 것은 바로 동물 질병을 엄밀하게 생물학적인 처우의 밖으로 밀어내어 사회과학의 영역으로 들여온 다음 새로운 현상으로서 조명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바이러스의 출현 원인에 대한 생물학자들의 의문에 부분적으로 답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러한 문제를 더 큰 관계 도식 속에 재위치 시킴으로써 그들이 제기하지 않은 문제를 그들에게 제기하기 때문이리라.

이 책의 제1장에서 내가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관계의 총체가 방역(bio-security)이라는 용어로 정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용어는 각기 다른 본성을 가진 파국을 위기 평가라는 같은 형식 속에 다룰 수 있게 만든다. 나는 현지 조사를 통해 1997년의 홍콩에서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H3N2의 출현 이후, 어떻게 해서 방역 장치가 준비되었고 아시아 각지로 점차 확산되었으며 마지막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의 돼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H1N1의 출현을 통해 글로벌화한 것이 되었는지를 해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지리적인 확대는 동물과 인간의 보건 전문가부터 닭고기 생산자와 소비자에 이르기까지 행위자 수의 증대를 수반한다. 따라서 이 책은 종의 장벽가까이에 있는 전문가들의 추론과 실천에서 출발해서 어떻게 그들이 하나의 독감세상’으로 유입되는지, 또 그들의 추론을 통해 생물을 지각하는 행위자의 총체에 얽혀서 그러한 총체에 의해 변형되는지를 살펴본다. 동물 질병이 일으킨 위생 위기에서 출발하는 이 책은 농장, 시장, 실험실에서도 접할 수 있는, 돌봄과 물자가 맞교환되는 생물과의 일상적 관계로 되돌아온다. 이 과정에서 나는 방역 장치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과 몇 번이나 맞닥뜨렸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이 문제를 글로벌한 수준에서 다루지만 이 문제는 오직 로컬한 비판에서 출발하는 경우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로컬한 비판이라는 것은 독감세상의 편성을 관통하는 극단성(極端性)을 어떻게 지각하는지에 따른 행위자들의 문제 제기를 말한다.

 

1. 방역을 둘러싼 우회로

 

감시의 규범과 형태

 

인류학자의 연구는 하나의 필드로부터 시작된다. 즉 개인적 욕구, 금전적 제약, 지도교수의 조언 등으로 결정되는, 하나의 장소와 하나의 시간에서 시작된다. 반면 나의 작업은 철학적 우회로가 필요했으며, 그 후에야 처음으로 주목한 것을 기술할 수 있게 되었다. 1996년에 나는 철학적 탐구를 시작했는데, 그때 유럽의 농촌에서 자행된 소들의 대량살처분과 야외에서 불태워진 소들의 사체 산 영상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또한 중국에도 관심이 있었다. 중국어를 배웠고, 홍콩반환(1997) 전년에 처음으로 중국에 발을 들였다. 천안문 광장의 게시판은 당시 [홍콩반환이라는] 이 영광의 빛나는 사건까지의 일수를 표시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은 조류 인플루엔자의 억제를 위해 최초로 자행된 살아있는 닭의 살처분과 기묘하게 시기가 겹쳤다. 만약 내가 저 사건 현장에 있었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첫 허베이(華北) 여행에서 내가 얻은 것은 중국철학에 대한 열렬하지만 애매한 관심과 가장 이단적인 공산주의에서부터 가장 조야한 자본주의까지의 불연속성을 개의치 않고 이행할 가능성에 대한 마찬가지의 애매한 문제의식이었다. 처음 접한 중국은 실망스러웠다. 이 나라가 불러들이는 욕망은 너무나 거대하고 이 나라의 현실(reality)은 너무나 광대해서 유일한 적절한 대응은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무는 것이다. 이 첫 만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과 인류학의 교양이 필요했다. 중국으로의 홍콩 회귀를 준비하는 중국에서 목격한 것은 중국문화의 특이성뿐만 아니라 어떤 글로벌한 장치의 예비 단계였고, 그래서 나는 유럽에서 주목한 소의 대량살처분 영상이 이 장치의 또 다른 효과이며 이 장치에 대해 그것의 고유한 합리성을 연구할 필요를 느꼈다. 여행에서 느낀 철학적 사색에서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인류학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인류학에 관한 나의 교양은 두 개의 원천에서 유래한다. 하나는 프란츠 보아스, 알프레도 크뢰버, 클리퍼드 기어츠의 전통에 선 아메리카의 문화인류학이다. 나는 이것을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캠퍼스의 폴 라비노(Paul Rabinow)의 가르침을 통해 발견했다. 캘리포니아에는 당시 생명공학이 진출해 있었다. 실리콘밸리의 야자나무 그늘에 들어선 벤처기업들은 유전학적 방법을 통해 생물에 개입하고 있었다. 아메리카 합중국의 동부 연안 출신의, 유럽의 철학적 전통의 자장 하에 있었던 라비노는 이 장소를 자신의 필드로 삼았다.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캠퍼스의 인류학부에는 크뢰버가 연구한 최후의 인디언이쉬(Ishi)의 뇌가 자손들의 요청에 따라 안치되어 있었다. 이렇듯 소수파의 요구에 충실한 인류학자들은 문화의 개념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그들 역시 문화들의 공존에 관한 유기적 모델을 옹호할 능력이 없었고 프랑스 철학(“French Theory”)에 의존해서 자신들의 잠재적인 비판능력을 발휘해야 했다. 인류학 세미나는 문화와 주체성의 연관성에 관한 격렬한 논의가 오가는 장이 되었는데, 그때마다 라비노는 대화자들의 의중을 파고드는 방식으로 과학자들 자신이 문화들에 대해 중립적이지 않고 하나의 문화만을 고집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설파했다. 이러한 방식은 독일어로 교양이라는 뜻의 “Bildung”의 문화, 곧 자기 수양과 다름없었다. 그는 생명공학이 환기하는 다양한 논쟁을 연구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과학업계 내부에서 가치의 충돌을 일으키는지를 해명했다. 예를 들어, 질병 환자들 가족의 게놈지도를 작성하기 위해 아메리카의 어느 기업과 동맹 관계를 맺는 것에 프랑스인 연구자들이 반대하자 프랑스 수상은 프랑스인의 DNA’ 판매를 금지했고, 그 한편으로 지식인들이 제작한 장대한 가계도를 활용해서 아이슬란드 국민의 게놈지도를 작성하는 프로젝트가 의회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이렇듯 라비노는 과학적 활동이 역설적으로 현대사회에서 비판적인 기능을 수행한다고 주장했다. 과학적 활동이 아직은 질병 지도에 자리를 잡지 않은 DNA 절편과 같이, 지위가 확정되지 않은 생명 물질을 유통하기 때문이다.

나는 프랑스로 돌아와 이러한 문화와 주체성의 관계 그리고 비판적인 현대적 감성 속에서 이 관계가 체화되는 형태에 대해 고찰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인류학 교양에 관한 두 번째 원천으로서 심성(mentalité)’이라는 개념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개념은 프랑스 사회철학에서 오귀스트 콩트를 거쳐 에밀 뒤르켐까지, 그리고 심성사(心性史)’에 이르기까지 독일과 아메리카의 지적 전통에서 문화라는 개념의 활약에 대응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작업은 이데올로기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이 제기하는 철학적 문제로 향했다. 심성은 어떻게 해서 사회적 실천에서의 모순을 표현하는가? 그리고 어째서 심성에 실천적 유효성과 인간사회의 기만적인 속성이 동시에 담기는가? 당시 프랑스는 인지과학의 발전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뒤떨어진 것에 대한 죄책감과 뒤틀린 왜소화에 대한 초조함이 뒤섞여 있었다. 철학적 논쟁을 벌인 부분은 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심리학적인 것과 사회학적인 것의 연관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만약 심성 개념에 담긴 모순이 도덕적 감정을 통해 표현될 수 있다면, 심성 개념은 그러한 연관을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었다. 당시 피에르 마슈레(Pierre Macherey)가 교수로 근무한 릴 대학은 파리의 격렬한 지적 활동의 피난소와 관측소를 동시에 제공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인류학의 역사를 비난하면서도 끈질기게 계속되는 철학적 논쟁을 나는 바로 그곳에서 연구할 수 있었다.

미셸 푸코의 이름은 아메리카 문화인류학과 프랑스의 심성연구라는 겉으로 보기에 양립 불가능한 두 지적 교양을 결합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의 사후 간행물은 당시 분리되어 있었던 두 지적 환경 사이를 순환하면서 남다른 혁신적 힘을 발휘했다. 실제로 푸코의 연구는 심성모델에 영향을 준 과학사로부터 다양한 감시양식의 역사로 이행하면서 점차 주체성에 대한 고찰로 향해갔다. 사회적인 것이 가진 심적 일관성에 대한 질문은 푸코의 스승인 조르주 캉길렘(Georges Canguilhem)으로부터 그의 영향을 받은 푸코에게서 변환되어 사회적인 것에서 생명적인 것의 규범적 힘에 관한 것으로 발전했다. 이에 따라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사회적 역사 속의 논리적 모순을 조명하고, 인지과학은 그것이 도덕적 감정이라는 형태로 표출된다는 것을 해명했다. 이러한 모순이 사회적인 것과 심적인 것의 연관에 따른 것이라면 생명공학에서의 양식변화를 동반하게 된다. 이에 따라 심성과 사회적 모순의 긴장 관계는 감시장치라는 수준에서, 즉 생물의 변형으로 인해 만들어진 새로운 시각장치라는 수준에서 연구될 수 있었다.

이러한 감시장치는 당시 새로운 전쟁형태에 의해 변환되었다. 2001911, 나는 박사학위 논문 집필을 위해 다양한 논리적 심성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읽었다. 이 논문은 1917년의 시엔티아(scientia)잡지에 게재된 것으로 왜 독일인과 프랑스인이 같은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는지를 심리학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러한 문화주의적 논의는 종종 뉴욕의 쌍둥이 빌딩 습격 직후 일어난 테러리즘에 대한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이 논문은 그 점에 대해 참신한 접근을 보여준다. 테러리즘에 대한 전쟁이 이미 이해할 수 없는 국민정신을 가진 민족에 대한 또 다른 민족의 전쟁이 아니라면, 서로 다른 가치관에 각각 결합한 두 개의 정치시스템의 전쟁이 아니고 오히려 감시장치와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이며, 이 적이 이 장치에 이성을 잃을 정도의 확장을 부득이하게 가져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세기의 지식인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어느 한 심성을 비판하거나 어느 한 가치 시스템을 다른 가치 시스템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해도 이 새로운 감시장치의 내부에서 그것이 체화된 규범과 형태를 기술하는 것은 여전히 가능했다.

나는 감시장치의 내부로의 이동을 실행하는 방법을 역설적이게도 레비-브뢸의 1923년 저작인 원시인의 정신세계에서 찾아냈다. 레비-브뢸은 프랑스에서의 심성 개념의 창시자로 볼 수 있는데, 그는 1917년에 전쟁의 새로운 양상(Les aspects nouveaux de la guerre)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위의 논문이 실린 시엔티아같은 호에 발표하여 그때까지 거의 다뤄지지 않은 분쟁에서의 경제적 요인의 역할을 강조했다. 황색 세계의 동요(L’ébranlement du monde jaune)(1920)라는 제목의 다른 논문에서는 세계적 규모로 확장된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 변형을 해명했다. 이처럼 레비-브뢸은 원시심성가운데 그 자신이 초자연적인 것의 지각이라고 부른 것을 분석하면서 전쟁이 창출한 새로운 상황에 대응하려 했다. ‘감시라는 개념 자체는 오늘날 관리사회를 묘사하는 데에서 매우 자주 언급되지만, 레비-브뢸의 분석에서처럼 자연적 존재에게 닥쳐올 위협의 징후를 감지하는, 세계와의 관계방식의 하나로도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감시는 그것을 작동시키는 테크놀로지에 직면했을 때의 유달리 강도 높은 지각양식을 함의한다. 1차 세계대전 직후 레비-브뢸은 유럽에 폭동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한 목적의 경계장치의 준비에 참여했다. 그러므로 원시심성에 대한 그의 기술은 새로운 심적 상태에 대한 고찰로 간주할 수 있다. 그의 저작의 명성은 원시심성이란 보로로족 인디언이 자신들을 아라라새[마코앵무]로 천명하듯이 인간과 인간답지 않은 것 사이의 모순을 지각하는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한 것에 있다. 가령 원시심성이 사회들 각각의 고유한 논리를 설명한다는 주장이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해도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자연재해를 동물이 알려주는 감시양식을 기술한다는 측면에서 이 테제는 허용되지 않는가? 이때 광우병에 걸린 소나 인플루엔자에 걸린 닭은 새로운 초자연적실체로서 나타나고, 이에 대한 감시장치는 전근대적인 지각양식에 대응한다.

여기서 나는 레비-브뢸의 참여(participation)’ 개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다. 21세기를 전후하여 이 말은 정치토론 가운데 어떤 테크놀로지적 변환에 관련된 행위자들의, 그 적용의 투명성과 정당성의 확인을 목표로 하는 집단적인 모임을 뜻하는 단어로 유통되었다. 그러나 나는 레비-브뢸로 되돌아가 그러한 테크놀로지적 변환이 논리적으로 모순된 형태의 표출 속에서 도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비가시적인 배경 속에서 가시화하는 양상을 분석할 것을 제안했다. 신학에서 유래한 참여 개념은 더 높은 수준의 선()이 어떻게 해서 자연적 인과성 속에 발휘되는지를 기술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이 개념은 특히 희생제의의 인류학적 합리성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말리노프스키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서태평양의 섬들에 발이 묶이면서 일정 기간 체류한 이후 참여는 인류학에서 민족지적 방법을 가리키게 되었다. 한 사회집단의 일상생활에 참여한다는 뜻은 위협에 상응하는 가치를 갖춘 징후로써 자연적 실체를 대한다는 것이며 이 징후가 집단적 주의의 방향을 결정지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에번스-프리처드는 레비-브뢸의 고찰을 재해석하면서 수단의 누에르 족에서 암소의 사용방법이 어떻게 분쟁을 해결하고 환경적인 불확실성을 제거하는지를 해명했다. ‘심성에 관한 철학사는 나를 현장연구와 멀어지게 했지만, 인류학의 참여연구는 나를 다시 현장으로 불러들였다. 즉 참여 관찰은 출발점이 아니라 내가 맞닥뜨린 문제의 해결책이었다.

 

결론. 팬데믹은 신화인가?

 

이 책에서 나는 인플루엔자를 사회적 사실로써 다루고자 했다. 그러나 인플루엔자를 사회적 구성물로 단언하고 그 생물학적 현실성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나는 생물학자들의 지식과 의견에 준거해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거동에 관한 불확실성을 파헤치고 다양한 맥락 속에서 그러한 불확실성에 대처해야 하는 행위자들의 다수성(multiplicity)을 기술하고자 했다. 나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웠다. 미생물학자들은 다양한 행위자들 사이를 매개하는 역할을 연행하는데, 그것은 단지 행위자들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와 싸우는 다양한 영역(농장, 자연보호지구, 시장, 병원, 미디어 등)에 그들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실험실 내부에서 바이러스에 의해 밝혀진, 생물에 대한 두 관계 간의 모순을 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생물은 소비를 위한 상품이면서도 복수할 위험을 감수하면서 돌봐줘야 하는 존재로서 상호지각된다. 그래서 실험실은 사회적 제조소와 같았다. 이 말은 실험실에서 뭔가가 발명되고 그 후 상당한 거래가 이뤄지는 사회의 다른 부분으로 보급된다는 뜻이 아니라, 실험실에서 어떤 긴장 관계가 발견되고 그 후 그와 관련해서 항상 불안정한 타협이나 조정을 강요하는 행위자들의 수와 규모가 커짐에 따라 이 긴장 관계가 또 다른 장소에서 변이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바이러스를 쫓는 미생물학자들을 추적함으로써 이 책의 경구로 인용된 보나르의 표현을 빌리면, ‘사회적 세계의 투어를 행했다. 나는 닥쳐올 파국에 시선을 향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 파국으로 인해 공통의 지평에 내던져지고 그러한 파국으로 인해 파국의 지도를 그를 수 있게 된 행위자들의 다수성을 바라보았다.

이 조사의 끝에서 사회과학이 인플루엔자와 같은 현상을 다룰 때 제기할 수밖에 없는 물음에 하나의 답을 제시할 수 있었다. 바이러스의 불확실성은 어떻게 전제주의적 권력을 불러오는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전이에 관한 추적조사는 어떻게 팬데믹의 지평으로 향해가는가? 어떤 점에서 그러한 전체화인류 전체를 뒤흔드는 팬데믹의 고지(告知)는 생물 가까이에서 이뤄지는 작업을 변형하는가? 사회과학이 보여주는 바에 의하면, 사회를 순환하는 실체는 불확실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어서 근대사회를 구성하는 예방정책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때문에 바이러스의 전염에는 항상 관념의 전염이 동반된다. 2009년 팬데믹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 접종 캠페인은 새로운 매체와 커뮤니케이션 기술, 정보의 홍수, 예방원칙에 대한 상호 모순된 해석 등등으로 인해 새로운 바이러스와 새로운 백신 사이의 긴장 관계에 있어서 소문과 같은 역할을 떠안았다. 그러나 팬데믹의 공포는 엄밀히 분석하면 사회적 현상에 관한 연구에서 관념의 전염이나 소문의 순환보다도 더 멀리 나아간다. 그것은 사회의 구성에서 전체화가 맡은 역할에 관한 문제 제기와 연결된다. 단순히 말하면, 왜 전염은 인류 전체를 겁주고 동원하는가? 이 조사 중에 우리가 여러 번 만난 대비라는 관념은 이 사태를 잘 보여준다. 즉 행위자들은 공통의 팬데믹을 대비함으로써 자신이 엮여있는 관계에 대해 말하게 되고 자신에게 닥쳐올 위험을 느끼게 된다. 이 전체화라는 지평 속에서 불확실성의 관리를 기술하기 위해 사회과학은 신화라는 관념을 도입한다. 이 관념은 보통의 일상 언어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저 경우에는 다른 의미를 가지며 해명하기보다는 비판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지금에서야 소박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학문적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요컨대 팬데믹은 신화인가?

계절성 인플루엔자보다도 인플루엔자 팬데믹이 위험성이 낮다고 세계보건기구가 공식화하기 전까지 이러한 질문은 도발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 최초의 의미에서 신화는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혹은 마침내 자신의 고유한 현실성을 만들어내는 무언가에 대한 사회적 표상을 지시한다. 예를 들어 입수 가능한 모든 서류에 기반해서 충분히 자세하게 조사하면 WHO가 어떻게 팬데믹의 정의를 수정해가며 심각도의 기준을 낮추고 지리적으로 다른 두 영역으로 확장의 정도 기준을 견지하는지를 해명할 수 있고 또 그에 따라서 바이러스의 위험성에 관한 불확실성이 커지고 제약산업의 활동이 감퇴한 시기에 어떻게 제약산업에 백신이 주문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팬데믹이라는 개념은 법적인 의미에서 수행적차원을 띤다. 즉 이 개념은 단지 역학적(疫學的) [전염병학적]으로 현전하는 상황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실제 효력으로서 기술적 장치의 총체를 만들어내며 이러한 장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의 현실성을 명시해준다. 그다음 이러한 분석을 이미 주어진 역학적 데이터에 확대 적용함으로써 파국적인 지평의 구축에서 생명 정보학적 모델이 맡는 역할을 고려하게 만든다. 공중위생의 최종결정 기관에서 이 뒤얽힌 수학적 모델에 어떠한 효력이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다음을 함의한다. 즉 이 모델이 어떻게 일상생활의 집단적 공포에 영향을 주고 동원력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지를 보기 위해서는 특히 이 모델이 제시한 양식을 추적해야 한다. 이렇게 숫자로 제시되는 사례와 도덕적 감정의 교점은 사회적 활동을 파국으로 조준하는 현대의 신화’(광우병과 조류 인플루엔자 등의 동물 유래의 역병, 인간 유래의 탄소가스에 의한 지구 온난화)가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

그렇지만 나는 이 의미에서 신화 개념을 팬데믹에 적용하지 않는다. 신화는 표상과 현실의 연관, 계산적인 합리성과 도덕적 감정의 연관보다 다음을 함의한다. 이 개념이 제시하는 것은 독일어의 ‘Weltanshauung’이라는 의미에서의 세계관이다. 즉 그것은 공통의 세계라는 지평에 포함된 모든 것을 지각하는 것이며, 이 세계가 언제나 위협을 받아왔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위협받기 전에 구축된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다. 바로 이 의미에서 신화 개념은 특히 독일 모델에 영향을 받은 아메리카의 인간 과학으로서의 문화연구에 도입되었다. 예를 들어 니콜라스 킹(Nicolas King)신흥 질병의 세계관을 묘사하고 신흥 감염증을 둘러싼 공중위생 장치의 일관성을 논했다. 그는 이 세계관을 다음과 같이 특징짓는다. “극도로 유연하고 수없이 엮어낼 수 있으며, 여러 부분을 재배치하면서 몇몇 요소를 부각하고, 반대로 그 외의 요소를 왜소화하여 행위자 각각의 목적에 부합하려 한다. 이 세계관은 행위자에 일관되고 자율적인 역병의 존재론을 제공한다. 이 존재론은 역병의 원인, 결과, 형태, 전망 등을 정의하고 이 세계관이 표현하는 위험의 배치나 이 위험을 예방하거나 처리하는 것에 가장 적절한 방법의 윤곽을 정해준다. 이 세계관은 도덕 경제와 역사적 서사를 갖추고 있다. 역사적 서사는 악인과 영웅을 동등하게 다루며 실수에 대한 비난이나 승리에 대한 상찬을 분배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그리고 왜 현재 상황에 부닥치는지를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인간과 미생물의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기 위한 보편적 모델이다. 이 세계관에 포함된 규칙과 전제는 글로벌에 적용될 수 있다”(N. King, “Security, Disease, Commerce: Ideological of Postcolonial Global Health,” Social Studies of Science, 32/ 5-6, 2002, p.767.). 니콜라스 킹은 세계관의 이 마지막 측면을 근거로 이 세계관을 이데올로기로써 비판하며, 이 일관성이 몇몇 행위자의 이해를 위해 이용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제약산업과 같은 행위자는 자신의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그가 글로벌 임상이라고 부르는 프레임 내의 새로운 위협에 대해서는 지방적 차원에서만 반응한다. “신흥 질병의 세계관은 중심에서 주변으로 지식의 전파와 나아가 의료제품의 글로벌한 유통에 관한 효율적인 관리와 관련된 것들이 비교적 적다는 점에서 식민지적 세계관과 다르다”(ibid., p.779).

중략

조르주 소렐(Georges Sorel, 1847~1922, 프랑스의 사회이론가이자 생디칼리슴 철학자)은 활동의 파국적 정지에 대한 대비가 사회적 전체화의 효과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하며, 신화의 강력한 사고방식을 제시했다. 소렐에 따르면, 파업이 사람들의 정신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총파업으로 나아가야 한다. 세부적인 논의는 지성의 움직임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부분에서 전체로 이행해야 노동자들 속에 운동의 관념이 자리 잡는다. 그리고 노동조합은 이 관념을 조직한다. “신화는 현재를 움직이게 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 신화를 역사에 현실적으로 적용하는 방법에 관한 모든 논의는 거의 의미가 없다. 그러나 중요한 한 가지는 전체화의 신화적 역할이다. 각 부분은 전체에 포함된 관념을 전체의 구도 속에서 떠올려야만 지적 흥미를 유발할 수 있다.” 총파업은 사람들을 일깨우는 신화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활동의 정지를 예비하는 사람들(노동자 계급)과 그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부르주아 계급)을 구별하기 때문이다. 소렐은 니체에게서 영감을 얻고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고방식을 이어받아 파업을 파국적 지평으로써 그려내었다. 이 파국적 지평은 그것을 믿는 사람들과 경계하는 사람들의 단절을 현재에 도입한다. 이러한 묘사는 사업 지속계획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성을 보여준다. 이 계획에 따르면, 기업과 국가는 조만간 닥쳐올 팬데믹을 대비해왔다. 그렇다면 팬데믹 와중에 초유동적인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의 신화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이 계급은 글로벌한 활동의 정지를 스스로 예비하는 가능성으로 표상할 수 있는데, 그에 직면하는 노동자 계급은 매우 불안정하며 너무나 지방적이어서 파업을 운동의 관념으로 사고할 수가 없다. 인플루엔자 대 파업. 이것들은 대적하는 두 계급이 담당하는 두 개의 신화이며, 전자에서는 그 침략적 본성에 의해, 후자에서는 집단적 노력을 통해 닥쳐올 파국을 표상하는 두 개의 각기 다른 버전이다.

그런데 소렐에 대해 그 자신이 생산의 신비라고 부르는 사태에서 출발하여 또 다른 독해를 해볼 수 있다. 활동의 정지를 상상함으로써 실제로는 노동자 계급은 자신들의 사회적 구조를 구성하는 반응을 총체로써 조사하게 된다. 이 계급은 자신을 일꾼으로 삼은 생산의 기원을 인식할 수 없기에 생산을 파국적인 미래에 내던지는 것 외에는 생산의 기원을 표상할 길이 없다. 따라서 노동자 계급의 입장에서는 생산활동이 각각의 사회적 집단의 독특한 위치를 가시화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산활동의 파국적 정지 또한 근로계급과 유한계급을 대립시키지는 않는다. 이때 거동 없는 자연과 마주 보는 생산활동이 상상적으로 그려지고 이 활동 속에 환경을 구성하는 존재자의 총체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렐을 비난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이의 제기는 소렐의 친구인 샤를 페기(Charles Péguy, 1873~1914, 시인이자 극작가)의 작품에서도 읽어낼 수 있다. 그는 같은 시기에 소렐이 파업에 적용한 파국 모델에 기초해서 인플루엔자에 대해 생각했다. 1900년 페기는 막 창간된 반달 수첩잡지에 인플루엔자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텍스트를 발표한다. 그는 그 글에서 적대적인 미생물들의 일개 연대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효과에 대해 말한다.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어] 침대에서 움직일 수 없었던 그는 지적 생산자라는 자신의 활동의 빈약성을 경험했다. 적대적인 미생물들은 그가 자신의 잡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파리에서 오를레앙으로 갈 수도 있는 커뮤니케이션 연쇄 위를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의인플루엔자에 관한 삽화를 읽은 페기는 매우 근거 있는 그의 가설에 대해 조사해보려고 했다. “나는 어렴풋이 그리고 확실히 내가 건강하다고 생각했다.” 즉 인플루엔자는 신비주의를 통해 그 사회적 메커니즘을 해명했다. 페기는 예언 개념에 준거해서 모든 활동이 정지해버리는 파국적 미래로의 투사를 묘사한다. “나는 병상에 누워 () 반달 수첩에 불운이 닥쳐올 것이라는 예언이 맞았음을 증명했다. 큰 회사는 한 인간에 기반하여 절대로 설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플루엔자는 그의 개인적 의지를 일반의지로 향해가도록 부추겼다. 그것은 위기의 순간에 사회를 구성하는 상호관계의 총체를 깨닫게 한다. 그 속에는 미생물도 포함된다. 미생물은 이미 배제되어야 할 적이 아니고 불확실한 세계 속에서 활동하기 위해서 타협해야만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로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인플루엔자와 파업에 대한 이러한 고찰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쓰였지만, 이 전쟁은 총파업에 관한 어떤 관념에 종지부를 찍음과 동시에 지구상을 이동하는 인간들의 불어나는 순환이 일으킨 파국적 귀결을 보여줌으로써 팬데믹이라는 개념이 새롭게 현실화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렇다면 총파업의 신화가 팬데믹의 신화로 대체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2009년에 H1N1 바이러스에 대한 세계적 동원에 실패한 후 지금 이 순간에 팬데믹이라는 신화의 붕괴에 직면하고 있는 것일까? 특히 중국에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전체화를 만들어낼지도 모를 파업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이 의미에서 나의 이야기는 한 신화의 탄생과 죽음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레비스트로스가 신화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라는 논문에서 행한, 신화는 죽는 것이 아니라 변환하는 것이라는 지적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 책에서 내가 시도한 것은 변환이라는 레비스트로스의 개념을 인플루엔자 팬데믹에 적용해보는 것이었다. 이 개념이 함의하는 것은 신화란 스스로 닫힌 전체성이 아니라 오히려 표층구조라는 것이다. 이 구조는 다른 사회의 다른 신화로부터 다양한 요소를 빌려 복수의 이론적 수준을 연관시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신화는 로컬의 수준에서만 전체화의 효과를 만들어내며, 신화의 전반적 총체는 단독의 맥락 속에서 변환된다는 것이다. “같은 한 신화의 변이와 다른 변이 사이에, 한 신화와 다른 신화 사이에, 같은 신화들 또는 각각의 다른 신화들에 대해 한 사회와 다른 사회 사이에 움직이는 이러한 변환 () 따라서 이러한 변환에서 신화의 소재 보존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충실히 지켜진다면, 또 다른 신화가 그 보존법칙에 따라서 다른 모든 신화를 바탕으로 해서 생겨날 수 있다”(Lévi-strauss, “Comment meurent les mythes,” Anthropologie structuale deux, Paris, Plon, 1996, p.301.).

이 책에서 내가 시도한 것은 신화의 대지는 둥글다.’라는 레비스트로스의 명언을 재검토하는 것이었다. 나는 미생물학자들을 쫓으면서 바이러스의 기원에 관한 그들의 신화를 공유하였다. 그들은 국경을 넘을 때는 이 신화의 변환에 주의를 기울였다. 미생물학자들은 바이러스가 국경을 모른다고 말하면서도, 바이러스에 대한 사회적 표상이 의미를 띠는 것은 역사가 만들어놓은 국경의 맥락에 의해서며, 바이러스가 국경을 넘을 때 이 표상이 변환되거나 반전되는 존재 방식에 의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홍콩으로 되돌아왔다. 홍콩에서 인플루엔자에 관한 사회적 표상은 매우 강도 높다. 이 표상은 홍콩의 중국 국경에 대한 관점을 숙고하는 순간에 구성되기 때문이다. 팬데믹 신화가 홍콩에서 비롯되어 이해되는 것은 이 신화의 기원이 홍콩에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바이러스의 기원은 수수께끼로 둘러싸여 있다, 홍콩의 생태학적 조건경제적, 정치적 이행기에서 동물과 인간의 높은 밀집도이 홍콩을 사람과 동물과 바이러스 사이의 관계들에 대해 생각하는 데에 특별히 풍부한 맥락에 놓여있다는 의미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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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2009년의 H1N1 팬더믹의 종결이 나의 책을 전체화의 한 형태에 이르게 하였고 내가 그것을 다루게 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팬데믹 신화의 죽음 자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신화는 지금까지 변환을 계속해왔고 그 파국적 지평이 일시적으로 완화되는 까닭에 이 신화가 자신의 신화적 가능성에서 벗어났다고 상정할 수도 있다. 인플루엔자 팬더믹이 밀어붙이는 인류 종말의 고지는 잠시 그 힘을 잃었지만, 전문가들은 사전에 신흥 바이러스를 알리기 위해 동물에 대한 감시를 계속하고 있다. 야생동물과 가축의 이동량 증가, 기후 온난화, 토양오염, 삼림파괴 등 바이러스의 출현과 관련된, 완만한 생태학적 파국은 절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홍콩이 조류 인플루엔자에 대한 전초기지의 임무 수행에 실패하고, 멕시코가 돼지 인플루엔자의 이 임무를 맡지 못한다면, 그 외 다른 장소에서 동물들이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재해를 사전에 알릴 수 있는 경계 태세를 갖춰야 할 것이다. 동물들의 감시를 둘러싼 이 변환은 파국에 관한 우리의 표상을 현실화한다. 이것을 추적하려면 또 다른 연구가 필요하다. 나는 여행하면서 그러한 변환의 몇 가지 형태를 파헤쳤을 뿐이다. 나는 논리적 가설을 도입하면서 이 여행의 선형성을 유지하려 했다. 영어권과 불어권의 민족지를 비교하자면, 프랑스의 민족지는 학술서와 문학서 두 장르의 책을 동시에 쓰는 것이다. 이 책의 재료가 된 여행 수첩은 때로는 성급하게, 또 때로는 어떤 후회 속에 쓰였다. 앞으로 필연적으로 그 증명을 요구받을 때 자료는 더 보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 팬데믹은 더욱 새로운 변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하나하나의 표정을 다루려고 할 것이고, 나의 새로운 세계 투어는 팬데믹의 신화를 재배치할 것이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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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잉골드의 주요 저작 중 하나인 『메이킹─인류학・고고학・예술・건축』의 일본어판 공역자로 참여한 카네코 유의 '잉골드론'이다. 그는 다음의 글에서 이야기한 대로 2019년 태국과 라오스의 경계 숲에서 수렵채집민으로 살고 있는 므라브리족에 관한 영상을 촬영했다(https://www.youtube.com/watch?v=5_pgz60dtqE). 다음의 글은 그러한 자신의 영상인류학적 활동과 접목해서 잉골드의 "메이킹(making)"과 "라인즈(lines)"를 논하고 있다.

 


 

생물과 물질의 댄스팀 잉골드에 관한 에세이

 

카네코 유(金子遊)[일본의 비평가, 영상작가, 1974~]

 

만들기란 무엇인가?

 

팀 잉골드(Tim Ingold)1947년 잉글랜드 남부의 버크셔주(Berkshire)의 레딩(Reading)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회인류학자다. 1970년대부터 핀란드 북동부의 라플란드(Lapland)에 사는 사미족을 현장 연구했다. 그는 전통적으로 순록의 사냥과 사육을 통해 생계를 이어온 사미족 사회가 현대에 이르러 어떻게 변용되었는지를 탐구했다. 그 후 맨체스터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1999년부터 애버딘 대학에서 인류학을 가르쳐 왔다.

내가 공역에 참여한 메이킹인류학고고학예술건축(원제 Making: Anthropology, Archaeology, Art and Architecture)2013(일본어 번역본은 2017)에 간행된 팀 잉골드의 저서이다. 집필의 경위에 관해서는 저 책의 서문과 1장에 자세히 나와 있다. 잉골드 자신의 말에 의하면, 그는 맨체스터대학에 있은 1990년대 후반부터 예술과 건축과 인류학의 접점을 찾기 위해 매달 연구회를 열었다. 그리고 메이킹(making)’을 속에서부터 알기 위해 연구자, 학생들과 함께 나뭇가지를 모아 말려서 바구니로 엮거나 자신들이 만든 가마에서 그릇을 구워내거나 화음을 맞춰 합창연습을 하거나 건축을 위한 설계도를 작성했다. 이 독특한 인류학적 탐구 방법은 처음 시도되는 것들이었다. 1999년 이후 애버딘 대학에 인류학과 설립에 관여한 잉골드는 인류학(Anthropology), 고고학(Archeology), 예술(Art), 건축(Architecture)이라는 알파벳의 ‘A’를 첫 글자로 하는 각각의 분야를 조합해서 <네 개의 A>라는 과정을 창설하고 학부생과 대학원생을 위한 강의를 열었다. 실습과 워크숍, 집단활동을 다양하게 편성한 이 매력적인 강의의 진행방식과 내용에 대해서는 메이킹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팀 잉골드는 저서 라인즈(Lines)(2007년 출간)에서 문자 기록, 음악의 기보법, 직물, 손금, 지도, 스토리텔링 등을 사례로 해서 인간 세계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며 끊이지 않고 운동하는 (lines)’을 풀어내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들뢰즈-가타리 철학의 도주선개념에서 착안한 것이다. 국가라는 권력 혹은 가족 모델에 의한 억압으로부터의 도주선을 보다 문화적이고 구체적인 지평에 펼쳐놓고 그로부터 풍부한 의 세계를 추출한 이 영역 횡단적인 책에 대해 잉골드는 이 연구를 통해 나 자신이 인류학과 결별한 것이 아닌가 자문한다.”라고 일본어판 서문에 썼다.

그런데 라인즈다음에 발표한 저서 살아있기(Being Alive)(2011)를 거쳐 출간한 메이킹에서는 원생인류의 주먹도끼, 성당의 고딕 건축양식, 회화와 소묘의 차이 등 인류학과 다른 학문 분야와의 각각의 접점을 탐지하는 시도에 깊이 천착하여 독자들에게 지적인 놀라움을 선사한다. 메이킹라인즈에서 광범위하게 확장된 인류학적인 지()의 문제를 자기 자신의 신체나 손을 사용해서 다시 배워가는 실천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잉골드는 인류학을 떠나 고고학, 예술, 건축 등과의 경계에서 자신의 사상과 연구 테마를 찾아낸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보면 메이킹1장을 중심으로 전개된, 인류학과 민족지에서의 작업 구별의 문제가 중요하다. 잉골드는 민족지를 깎아내릴 생각은 없다고 단언한 후에 민족지적 기술이란 만물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그 기록자료와 데이터의 작성을 목표로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에 반해 인류학의 본질은 참여 관찰 등을 통해 인생행로의 무언가를 배우면서 자기 자신을 생성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라 그에게는 민족지가 아닌 인류학이야말로 무기물이나 유기물의 생성 변화의 흐름에 조응하면서(correspond 상호작용, 응답, 조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인간의 만들기에 이바지할 수 있는 지혜의 원천이다.

물론 이 속에는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에의 깊은 공감이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저서 천의 고원에서는 얼핏 강고하고 불변의 물질로 보이는 무기물의 금속조차도 광맥에서 채굴된 광물로서 휘발하고 용해하고 제련하고 거푸집에 담기는 등의 흐름을 가진 비유기적 생명으로 파악한다. 잉골드가 말하는 만들기란 특정의 건축가나 예술가의 그것을 의미하기보다 금속의 물질-흐름에 따라 탐광자, 채굴자, 야금술의 장인이 다양한 배치배열을 입히는 것과 같은, 인간계에 널리 사용되는 기술적인 영위이며, 그것들을 인류학적으로 기술하려는 시도이다. 만약 인류학이라는 것을 한 인물의 직능적 전문성이나 연구의 기반을 제공하는 지()의 체계라고 생각한다면, 절대로 메이킹을 인류학 저서라고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잉골드가 주장하듯이 인류학이 주변 세계에 주의를 기울여서 지혜를 얻고 참신한 지적 공기를 흡수해서 점차 자신을 변화시켜 환경에 적응해가며 복잡한 자기 자신과 우주와 세계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해하기 위한 지()의 길이라고 한다면, 메이킹만큼 인류학적인 모험을 감행한 책이 없을 것이다.

 

예술과 인류학

 

나 자신은 팀 잉골드와 대면한 적이 없고, 시인이자 비교문학자인 스가 케이지로(管啓次郞)가 잉골드와 만났었다. 스가가 잉골드의 인상에 대해 굵은 팔뚝에 털이 무성한 야성적인 느낌의 사람이다.”라고 한 말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젊은 한때 200~300kg의 순록을 상대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자기 안에서 숙성되어 딱 감이 오는 기분이었다고.

팀 잉골드는 메이킹1속에서부터 아는 것(Knowing from the insid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순록 유목을 하는 사미족 사회에 들어가 참여 관찰의 방법을 가지고 그들과 함께 생활한 청년 시절의 일이다. 사미족 사람들이 전통의 지혜를 조금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분명 가르치는 일을 싫어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간 흐른 후에 알게 된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무언가를 알기위해서는 그 속에서 스스로 발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어로, 수렵, 혹은 순록 방목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말로 이야기해서는 가르칠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미족이 가진 이 지혜를 청년 잉골드가 깨달은 것이다.

나 또한 저 사회인류학자의 접근과는 다르지만, 그와 비슷한 것을 20대 후반의 젊은 시절에 경험했다. 볼렉스[카메라 제작회사 이름] 16mm 카메라를 짊어지고 시인 요시마스 고조(吉増剛造) 씨를 쫓아다닐 때의 일이다. 문화인류학자 이마후쿠 료타(今福龍太) 씨와 요시마스 씨가 삿포로의 한겨울 설경을 배경으로 니시오카(西岡) 저수지의 숲(이마후쿠 씨가 니시오카 월든(Walden)’이라고 부른 곳)을 걸으면서 대화를 나눈다고 해서 촬영하러 갔다. 저수지가 얼어서 눈이 쌓이고 그 위에 백로의 발자국이 띄엄띄엄 나 있었다. 거기에 눈길이 멈춘 시인은 저것은 눈의 바늘땀이라오.”라고 속삭였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아마미 자유대학(奄美自由大学)’[이마후쿠 료타의 주재로 아마미 군도(奄美群島)에서 진행하는 형식 없는 배움의 장]에 참가해서 도쿠노시마(徳之島)에서 소가 없는 투우장을 걷는 순례를 하는 중에 요시마스 씨가 웅크리고 앉아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는 소의 앞발이 파놓아 움푹 파인 구멍을 보고 저것은 투우장의 눈동자구먼.”이라고 중얼거렸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는 스스로 생물과 물질로 이뤄진 세계를 학습하고 있은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계는 시시각각 모습을 바꾼다. 그러한 세계를 탐구하는 기술은 타자에게서 그의 머릿속에 있는 어떤 관념이나 정보를 전달받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끊임없이 변용하는 생물과 물질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이 질문의 답은 스스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요시마스 고조 씨가 백로의 발자국을 바늘땀으로 파악한 것은 단지 시인의 감흥에 불과한 것인가? 잉골드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민달팽이가 납작돌 위에 남긴 흔적처럼 이리저리 감기는 선의 그물세공(meshwork)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선은 고리를 만들어 서로 얽히고 또 굽이굽이 꿰매듯이 나아간다.” 그물망(network)의 모든 선이 연결선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물세공의 선은 운동이자 성장의 선이며 생성 변화하는 선이다. 나는 내 주변에서 질적인 변화를 해나가는 생물과 무생물의 양상을 파악하는 방법을 시인에게서 배웠고, 잉골드는 그것을 살아있기(being alive)’ 혹은 만들기(making)’의 학습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예술과 인류학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는 선주민이 만든 회화, 건축, 조각, 민중예술을 연구하는 것을 의미해왔다. 한편으로 팀 잉골드는 예술과 인류학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여기서 /가 중요하다. ‘예술 인류학에서 감상자는 작품을 통해 제작자의 의도를 미루어 파악하고 작품의 배후에 있는 선행작품으로부터의 영향이나 그것이 제작된 시대가 드리운 그림자를 투시함으로써 작품을 해석한다. 그런데 예술과 인류학에서 감상자는 예술가(artist)의 길동무가 되어 작품이 세계에서 전개해가는 것을 작품과 함께 본다’. 왜냐하면 작품의 생명은 그 소재에 뿌리내리고 있으며 모든 작품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 후에도 계속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메이킹2생명의 소재(The Materials of Life)에 나온 도표를 참조해야 한다. 팀 잉골드는 의식의 흐름(flow of consciousness)’물질의 흐름(flow of materials)’을 두 개의 세로 선으로 나타낸다(<그림 1> 참조). 이 두 선은 위에서 아래로 시간이 흐른다. 앙리 베르그송이 말했듯이 시간의 흐름은 시계처럼 숫자로 계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컵에 담긴 물에 설탕을 넣으면 설탕이 서서히 녹듯이 시간의 흐름은 질적인 변화를 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신체도 물질이기 때문에 세월이 흐를수록 얼굴에 주름이 생긴다. 시간의 경과는 두 번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질적인 변화이다. 그리고 의식의 흐름의 세로 선에는 우리의 시각, 청각, 촉각 등의 다양한 감각이 뭉쳐 있는데, 한 장의 사진을 찍듯이 그것을 일순간 멈추게 하면 그것은 이미지가 된다.

그림 1. 의식, 물질, 이미지, 물체의 도표

그와 더불어 물질의 흐름인 세로 선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차 변화한다. 식물이나 동물과 같은 생물은 시간이 흐르면 성장한다. 실은 무생물도 마찬가지다. 단단하고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강가의 바윗돌도 장구한 세월 속에 이리저리 구르고 물에 씻기어 점차 둥글어진다. 철과 같은 물질도 녹이 슬거나 강도가 약해지거나 부서진다. 아무리 확고한 존재로 보이는 사물도 시간과 함께 시시각각 변하는 것은 생명체와 다를 바가 없다. 생물과 비교해서 질적인 변화의 간격이 길고 속도가 느릴 뿐이다. 즉 물질 또한 한계가 있는 생명을 가졌으며, 비유기적인 생명이다. 잉골드는 우리가 이러한 물질의 흐름이 정지하는 순간에 물체로서 그것을 지각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이미지에서 물체로, 물체에서 이미지로 변환하는 바로 이것을 잉골드는 만들기(making)’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로 방향뿐만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세로 방향으로 만드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메이킹에서는 “perdurance(연속, 영속)”이라는 조금은 생소한 용어를 사용한다. 물질의 영원한 지속을 뜻하는 것일까? 자신의 뇌리에 있는 이미지를 물질에 찍어누르는 것이 만드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관념은 틀렸다고 잉골드는 지적한다. 미리 디자인을 구상하고 설계도를 만들어 거기에 맞춰서 물질이나 소재를 조립해서 예술작품이나 건축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메이킹에서는 도기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도공은 찰흙을 소재로 사용한다. 도기를 만드는 사람은 원반대의 회전에 맞춰 정성스럽게 찰흙을 매만지고 조금씩 시간이 흐르면서 말라가는 흙과 춤을 추듯이 손가락으로 매만지는 동작을 반복하면서 소재의 속에서부터 모양을 만들어간다. 도공의 손가락과 소재인 찰흙 사이에 회전하는 원반대라는 제3항이 끼어들면서 생물과 무생물의 댄스는 가능해진다. 또 다른 예를 보자. 나무로 조작을 만드는 사람은 끌을 나뭇결에 따라 위로부터 아래로 밀어 깎는다. 끌의 칼끝은 그 나무가 성장해온 과거의 역사인 나뭇결에 저절로 이끌린다. 사전에 머리에 구상한 디자인을 물질에 찍어누르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질적으로 변화하는 흐름을 좇는 것. ‘만들기란 이렇듯 물질세계에 참여해서 사물과 힘을 합쳐 작품을 성장시키는 것이며 이에 따라 작품이 생성하는 것이라고 잉골드는 생각한다.

 

모뉴먼트와 마운드

 

메이킹에서는 클레어 투미(Clare Twomey)라는 예술가의 광기인가 아름다움인가(Is it Madness. Is it Beauty)라는 설치미술(installation art)을 소개한다. 옆으로 긴 탁자 위에 굽기 전 점토 상태의 하얀 도기를 한가득 진열해 놓는다. 투미는 물 주전자를 가지고 도기 안에 물을 붓는다. 그러면 당연히 감상자가 보는 앞에서 도기가 천천히 구부러지고 틈이 생기고 느린 그림처럼 무너져서 쪼개진 도기는 탁자나 마루 위에 물을 흘려보내게 된다. 이 작품에서 백색 점토로 만들어진 그릇은 하나의 완성형이 아니라 하나의 덧없는 생명을 가진 존재이다. 이렇듯 현대 예술작품에는 시간에 경과에 따라 물질이 변화해가는 과정 그 자체를 작품 속에 녹여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내가 아사히카와(旭川)의 가와무라 가네토(川村) 아이누 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정원에 더러운 큰 나무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관장인 가와무라 가네이치(川村兼一) 씨에게 저건 무엇인지 물었을 때 이렇게 답했다.

, 저것은 스나자와 빗키(砂澤ビッキ)[홋카이도 출신의 조각가]가 만든 토템 막대요.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겠지만, 빗키라면 그대로 둘 거라고 생각해서 내버려 두고 있소.”

스나자와 빗키는 주로 나무로 작품을 만든 예술가였는데, ‘눈보라라는 이름의 끌로 작품을 만들려고 생각해서, 작품이 자연적으로 풍화하고 썩고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작품 제작 속에 집어넣은 인물이다. 삿포로 예술의 숲 밖에서 상설전시되고 있는 네 개의 바람이라는 대작은 네 그루의 나무 기둥으로 만들어진 작품인데, 이미 그중 한 그루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조각작품 또한 언젠가 썩어 없어질 생명의 끝을 맞이한다는, 예술가의 사고방식이 구현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돌이나 금속에서 모뉴먼트(기념건조물)를 만들고 반영구적으로 그 모습을 유지하려는 사상과 대극을 이룬다. 바로 팀 잉골드가 생각하는 끊임없는 생성 변화의 작품에 가깝다.

지금 모뉴먼트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 용어는 팀 잉골드가 고고학에 대해 생각했을 때에 사용한 키워드이기도 하다. 메이킹6장은 원뿔형의 마운드가 주제이다. 잉골드는 자신이 촬영한 핀란드의 개밋둑 사진을 책 속에 게재하고, 그것이 마운드적인 존재 방식을 체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슬픈 열대에서 브라질의 적토로 만들어진 개밋둑을 언급한 것을 염두에 두었으리라. 개밋둑 외에도 마운드를 이룬 장소에는 고분의 흔적, 묘지, 퇴적물로서의 조개무지 등이 있다. 잉골드의 연속의 고고학에서 마운드는 지표면에 나타난 생명과 성장의 원천으로 간주된다.

이에 대해서는 모뉴먼트와 마운드의 성질의 차이를 비교하면 알기 쉽다. 모뉴먼트는 일정한 모습을 남기기 위해 돌이나 금속을 사용해서 기념될만한 인물이나 사건을 반영구적으로 보전하고자 한다. 그에 비해 마운드는 사람들이 순례를 행한다거나 이웃들이 그 주변을 걷는다거나 인근 논밭을 경작한다거나 인간이 행동하는 속에서 기억을 담지하는 장소로서 존재한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마운드는 신성한 장소이기도 하다. 미야코지마(宮古島)의 성지인 오타케(御嶽)[오키나와에서 조상신을 모시는 성지]”20여 개소 순례했을 때에도 그것이 평평한 토지에서 눈에 띄는 작은 둔덕인 경우가 있었고, 수목이 빽빽한 숲에 오타케가 들어선 경우도 많았다. 혼슈로 말하자면, 신사가 있는, 수호신을 모신 숲도 원래는 기암괴석이나 오래된 나무가 있는 높고 낮은 둔덕인 경우가 많다. 그러한 성지에는 애니미즘적 신령의 유래담이 전해오는데, 훗날 그것이 불교와 습합한다거나 근대에 이르러 신도와 불교 분리령(分離令)으로 제신(祭神)이 바뀐다거나 한다. 그렇지만 표면상의 종교나 제신이 바뀌어도 물질과 장의 힘을 가진 성지 자체는 불변한다. 모뉴먼트는 시간이 지나면 풍화하지만, 마운드는 풍화하지 않는다. 거기에 식물이나 곤충이 서식하고 흙이 퇴적하고 빗물이 표면을 씻기고 세월이 흘러도 마운드는 헐지 않는다. 이 지적은 팀 잉골드의 탁견이다. 마운드는 커지든지 작게 깎이든지 다양한 물질이 교체되면서도 둔덕으로서의 존재를 이어가는 비유기적인 생명의 존재 방식을 상징하는 것이다.

조금 화제를 바꾸면, 나는 2017년에 국제교류기금의 펠로우십을 받아 6주간 태국과 캄보디아를 여행했다. 그때 처음으로 태국의 난(Nan)에서 므라브리족(Mlabri) 사람들을 만났다. 태국 북부와 라오스 국경 주변 숲에서 살아온 그()들은 400명 남짓 규모의 민족이다. 오스트리아의 민족학자 휴고 아돌프 베르나직(Hugo Adolf Bernazik)1936년부터 1937년의 탐험에서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므라브리족과 접촉했다. 당시 그들은 정글 속에서 수렵채집 생활을 하고 있었고, 마을이나 가옥을 가지지 않은 완전한 노마드였다. 므라브리족은 타이족, 몽족, 라오족 등 주변 민족을 경계했기 때문에 주변 민족이 므라브리족을 접촉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바나나 잎으로 침상을 만든 흔적 외에는 좀처럼 접하기 힘들었기에 황색 잎의 정령이라는 뜻의 피 통 루앙(Phi Tong Luang)”이라고 불렸다. -크루메어계의 므라브리어를 말하는 이 소수민족은 197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 타이인에게 다시 발견되어 태국의 정책적 차원에서 숲을 나와 정주화를 진행하고 있다.

2017년에 므라브리족 마을을 방문했을 때 영상을 촬영해서 5분 가량의 황색 잎의 정령이라는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그 후 2018년부터 2019년까지 므라브리어를 연구하는 언어학자인 이토 유우마(伊藤雄馬)와 협력하여 라오스쪽 숲에서 노마드 생활을 하는 그룹을 찾아 숲의 므라브리(2019)라는 장편 민족지 영화를 제작했다. 처음으로 난(Nan) 지역의 마을을 방문했을 때는 대나무로 엮은 작은 오두막에 살면서 숯불로 조리하는 므라브리족의 간소한 생활방식에 놀랐다. 비스켓과 돼지고기를 선물로 들고 가면, 장로들이 대나무로 간단한 기둥을 만들고 바나나잎으로 지붕을 얹는 집 만드는 방법을 답례로 보여주어서, 그것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간소한 생활이라 해도 그것은 우리의 문명과 비교했을 때의 척도에 불과하며 원래 므라브리는 토지를 소유하지 않고 논밭을 경작하지 않으며 자기 집이 없이 정주하지도 않는 유동민(遊動民)의 생활을 견지해왔다. 보아하니 그()들은 손재주가 좋아서 허리춤에 달아놓은 손도끼 하나만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주변에 있는 것을 사용해서 불을 피우고 눈 깜짝할 사이에 바나나잎과 대나무로 냄비와 식기를 만든다. 그리고 대나무 통에 돼지고기를 잘라 넣어 대나무가 머금은 수분으로 쪄내는 전통적인 조리법을 가지고 있다. 종래의 문화 인류학자라면 므라브리족의 집 만들기나 조리법을 보았을 때 장로들과 이들을 돕는 아이들의 브리콜라주를 지적할 것이다.

그러나 메이킹을 읽은 후의 우리는 조금 더 다른 관점으로 다가갈 수 있다. 나 자신이 촬영한 영상을 돌려보면, 장로와 므라브리족의 소녀는 손도끼를 가지고 숲에서 대나무를 자르거나 그 잎과 줄기로 작은 오두막을 만들거나 그 대나무 줄기와 잎사귀로 화톳불을 피워서 조리한다. 집 만들기에서 대나무 줄기와 바나나 잎을 편물처럼 떠서 지붕을 강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리기구를 만들 때 장로는 도끼 칼을 대나무 결에 맞춰 세로로 쪼갠다. 대나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장한 그 방향과 흐름에 응답하듯이. 그가 다루는 손도끼 또한 물질의 흐름을 따른다. 잉골드의 사고방식으로 말하면 머릿속에 있는 디자인을 물질에 찍어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적인 만들기가 아니라 세계와 물질 속에 있는 성장과 지속의 방향에 따라 그것을 이용하면서 사물을 만드는 장인(artisan)의 손놀림이다.

 

쓰기와 드로잉

 

생물도 유기물도 아닌 작품에 생명을 느끼는 일은 나처럼 책이나 영상을 만드는 인간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다. 문장을 쓸 때 어떤 테마에 대해 쓸 것인가, 어떻게 구성할까, 사전에 어느 정도 디자인해둔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미생(未生)의 형태에 머문 구상에 불과하다. 책상 앞에 앉아 쓰기 시작하면, 머릿속 소재를 늘어놓을 때마다 생각지도 못한 형태가 나타난다. 손을 움직이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때로 뇌가 생각하는 것인가 손이 생각하는 것인가 모를 때가 있다. 그러한 소재를 익숙하게 만들어 지면상에서 다양한 모험과 실험을 반복하면, 무언가 나다운 형태로 정리된다. 써 내려간 문장을 다시 읽어보면 처음 생각한 지점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생전 처음 보는 생물을 보는 것처럼 나 자신이 썼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 소설, 평론, 수필, 저널 등 문장의 장르에 거의 관계 없이 쓰기라는 만들기과정에 어떤 창조행위의 비밀이 있는 것 같다.

그러한 만들기의 감촉은 다큐멘터리 영상을 제작할 때에도 여실히 느낀다. 세계나 사회 속에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들어갈 때 다양한 사람과 인터뷰를 하거나 여러 사건의 흐름 속에 몸을 맡긴다. 눈앞에서 조금씩 전개되는 사상(事象)에 직면해서 그 흐름을 따라가면서 그때마다 필요한 대응과 응답을 한다. 현실 세계로부터 움직이는 이미지의 단편을 끄집어내는 작업인 것인데, 각각의 단편을 가능한 한 자기 나름의 색깔이나 분위기가 풍기도록 애쓴다. 그렇게 해서 수집한 영상이나 음성의 이미지를 편집할 때는 소재가 가진 역능을 활성화해서 그것을 발휘하게 하면서 자르고 붙이면서 흐름을 만든다. 소재가 가진 힘을 강화하고 그것이 해방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영상의 편집작업은 촬영 전에 미리 정해진 대본을 쓰는 작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영상의 편집은 어디로 향해갈지를 모르는 가운데 소재와 대화를 계속하며 하나의 종합적인 형태로 결실을 이루는 여행이다.

메이킹8손은 말한다(Telling by Hand)를 읽으면 팀 잉골드는 손으로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손은 촉각 기관일 뿐만 아니라 손이 만들어내는 제스처, 문장어, 직물과 편물, 그림 그리기 등을 통해 이 세계의 다양한 스토리를 말할 수 있다. 그것을 손의 창조성(the creativity of the hand)’이라 하지 않고 손의 인간성(the humanity of the hand)’이라고 하는 부분이 흥미롭다. 손이 스스로 사물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제작이라는 것은 모두 소재와의 대화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앙드레 르루아 구랑(André Leroi-Gourhan)[프랑스의 선사학자, 1911~1986]은 망치질, 뜨개질, 스크래핑 등 수많은 기술적인 작업이 특정한 동작의 규칙적인 반복을 수반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장인의 마음속에 예술품의 최종 형태가 있든 없든, 실제 형태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리듬감 있는 동작의 패턴에서 나온다.” 이것을 이번에는 쓰기에 대해 살펴보자. 하이데거가 타자기 사용을 반대한 것도, 잉골드가 컴퓨터 키보드 사용하지 말라고 한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펜과 종이 사이의 대화에 귀를 기울여 소재의 반응을 끌어내고 소재에 조응하기 위해서는 역시 손의 움직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타자기를 사용해서 종이에 글자를 찍어 넣으면, ‘손의 운반(the ductus of the hand)’을 잃고 신체의 몸짓을 잃는다. 다시 말해 거기에 있는 인장 등 무한의 뉘앙스가 상실된다고 하이데거는 생각했다. 팀 잉골드는 그러한 생각에 동조하면서 손으로 쓴다는 것은 세계 속에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 속에 존재할 때에 우리는 참된 느낌을 느낄 수 있다.”라고 말한다. 잉골드에게 드로잉(소묘)은 작가가 머리에 그린 이미지의 실현이 아니라 손과 연필이 지면과 만나 상호작용을 일으킬 때의 신체 동작의 흔적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문자를 쓰는 것그림을 그리는 것의 경계 따위는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2018년 여름 토치기현(栃木県)의 아시카가(足利) 시립미술관에서 세상 끝의 시성(テノ詩声)이라는 전람회가 개최되었다. 손으로 직접 쓰는 것을 고민해온 시인 요시마스 고조 씨가 본인에게 영향을 준 료칸(良寛)[에도시대 후기의 선승이자 시인, 1758~1831], 아쿠다가와 료노스케(芥川龍之介)[일본의 소설가, 1892~1917], 야나기타 쿠니오(柳田国男)[일본의 민속학자, 1875~1962], 니시와키 준자부로(西脇順三郎)[일본의 근대 시인이자 영문학자, 1894~1982] 등의 책과 편지와 함께 자필 원고나 자작의 사진작품을 전시했다. 놀라운 것은 요시마스 씨의 페인팅 시리즈 불의 자수(刺繍)의 작품군이다(<그림 2> 참조). 원고용지의 괘선에서 삐져나오듯 빽빽하게 시편이 필사된 말이 친필로 써 있다. 대부분은 가타카나로 쓰여 있어서 어떤 주술문으로 보인다. 정성스럽게 쓴 그 노력을 지우려는 듯 그 위에 검정과 색색의 잉크가 덧칠해져 있고 일종의 추성화로서 완성된 모습이다. 잭슨 폴록(Jackson Pollock)[20세기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적 화가, 1912~1956]의 추상화처럼.

그림 2. 요시마스 고조의 불의 자수 (필자 촬영)

나아가 요시마스 고조 씨는 관중 앞에서 검은 안대를 하고 라이브 페인팅으로 제작하는 시도를 행했다. 빼곡히 문장을 써 내려간 원고용지 위에 잉크를 떨어뜨리는 것인데, 안대를 하고 있기에 어떤 모양이 될지는 본인조차도 알 수 없으며 오직 우연성에 이끌려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팀 잉골드처럼 예술의 인류학이 아닌 예술과 인류학을 지향한다면, 불의 자수의 배후에 있는 작가의 의도와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를 그렇게 적극적으로 고찰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감상자가 찾게 되는 것은 예술가의 손이 우주 공간에 그려 넣은 움직임의 흔적을 좇는 것이리라. 불의 자수를 문학작품이나 회화작품의 장르에 편입시키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드로잉이 회화보다도 댄스나 음악에 가깝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것은 잉골드가 말하는 시간의 흐름의 표면에 생기는 소용돌이를 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드로잉은 정지한 점과 점이 이어지는 네트워크와는 다른 어떤 것이다. 왜냐하면, 네트워크는 정지한 공간에 그려진 구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민달팽이가 이동한 후에 남겨진 선을 잉골드는 그물망(network)이 아닌 그물세공(meshwork)이라고 불렀다. 그 선은 띄엄띄엄 이어지며 여기저기 들르면서 고리를 만든다거나 서로 얽힌다거나 굽이굽이 바느질하듯이 나아간다. 즉 그물세공은 운동하는 선이며, 조금씩 성장하는 선이며 생성 변화의 선이다. 그 속에서 손과 신체는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선을 성장시킨다. 그러한 의미에서 불의 자수에 실린 잉크의 염료는 시인의 신체 행위의 흔적이며 그물세공이다. 역시 손의 인간성이 보여주는 활동에는 아직 무한의 가능성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金子遊、「生物物質のダンス」、『たぐいVol.3、202111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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