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본문에서 인용한 『중론』은 일본의 저명한 불교학자 나카무라 하지메의 번역본을 참조해서 시미즈 다카시가 현대일본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우리말로 바꾼 것이다. 『중론』의 몇몇 한국어 판본을 보면 알겠지만, 번역이 제각각이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중론』자체가 산스끄리뜨어 원문, 티벳어, 한문 등의 여러 판본과 다양한 해석의 주석서로 존재한다. 시미즈 다카시의 번역이 반드시 옳다고 할 수 없고, 다만 이러한 해석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그의 번역을 이해해야할 것 같다. 다음은 『중론』제1장 강론이다. 내용은 『오늘날의 애니미즘』, 『공해론/불교론』과 상당 부분 겹친다.
【『중론』 귀경서(歸敬序): 팔불(八不)의 수수께끼】
귀경서
온갖 다르마(법)는 불생(不生)이며, 불멸(不滅)이며, 항상 불변(不變)하지도 않고, 단멸(斷滅)하는 것도 아니고,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고,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다. 모든 희론(戱論)이 적멸(寂滅)한 이 길상(吉祥)한 연기(緣起)를 설파한 부처, 여러 설교자 중 가장 뛰어난 그분에게 계수(稽首)의 예를 다하다.
『중론』을 처음 읽었을 때 잘 몰랐던 부분이 있습니다. 명제로서 ‘A’, ‘非A’, ‘A이자 非A’, ‘A도 아니고 非A도 아니다’가 열거되는, 사구분별 또는 테트랄레마라고 불리는 인도 특유의 논리입니다. 이 중 제4렌마의 ‘A도 아니고 非A도 아니다’는 ‘불생불멸’이라든지 ‘불상부단’과 같이, 말하자면 메타 수준의 안정된 세계관, 이상적인 결론을 말해주는데요, 현실에서는 ‘불생불멸’처럼 제4렌마가 긍정되는 경우가 거의 없고, 니르바나(열반)조차도 『중론』 안에서는 철저히 부정됩니다. 처음엔 왜 그런지를 잘 몰랐습니다.
제4렌마가 인정되는 것은 네 종류밖에 없습니다(귀경서의 팔불, 즉 불생불멸, 부단불상, 부동불이, 불래불거). 그것이 너무나 기이했습니다.
귀경서에는 팔불을 말한 다음에 바로 “모든 희론이 적멸한 이 길상한 연기를 설파한 부처”라고 하며 제4렌마의 그 독특한 취급을 ‘연기설’과 결부 짓고 ‘연기설을 완성한 이는 부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를 골몰하면서 나는 『중론』에 빠져들었습니다.
먼저 제1장을 보겠습니다.
【제1장 원인의 고찰: ‘사물의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원인은 어디에도 없었다’라는 놀라운 결론】
제1장 원인의 고찰
1. 온갖 다르마(법)는 어느 것에나 어느 쪽에서도 자기원인에 의해서도, 타인(他因)에 의해서도, 그 둘 다에 의해서도 생기는 것이 아니고, 무원인(無原因)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2. 네 종류의 연(緣)(pratyaya, 원인)이란 무엇인가? 인연(직접적인 타인(他因)과 보조인(補助因)), 소연연(所緣緣)(지각의 대상으로서 지각 주체를 생겨나게 하는 연), 등무간연(等無間緣)(지각의 주체로서의 마음이 차례차례 연속해가는 연), 증상연(增上緣)(연이 결실에 이르는 데 방해하지 않고 조력하는 연)이며, 제5의 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3. 온갖 다르마(법)를 그와 같은 것으로서 보이게 하는 자기원인(自性)은 모든 연(緣)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성(自性)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른 것의 자성으로서의] 타성(他性)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4. 작용(일)은 연(원인)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필요로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연(원인)은 작용(일)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필요로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5. 이것들의 연(A)에 의해 결과(B)가 생기므로, 이것들은 [결과 B의] 연(원인 A)이라고 한다. 그러나 결과가 생기지 않는 한, 그것들은 연이 아니다.
6. 결과적인 것이 아직 존재하지 않든 이미 존재하든 연을 상정하는 것은 이상하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면, 연은 무슨 연인가? 이미 존재한다면 연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7. 사물은 이미 존재하든 아직 존재하지 않든 생기(生起)하지 않으며, [동시에]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서도 생기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우에 ‘결과를 생기게 하는 원인’이 어떻게 성립할 것인가?
8. 이미 존재하는 다르마는 의지할 거처로서의 연을 가지고 있지 않다(無所緣)고 설파되고 있는데, 만약 의지할 거처로서의 연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소연연(所緣緣)이 성립될 것인가?
9. [결과로서의] 온갖 다르마(법)가 아직 생겨나지 않을 때 [원인이] 사라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온갖 다르마가 생기기 직전에] 무간연(無間緣)이 사라진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또 이미 무간연이 사라졌을 때 무엇이 온갖 다르마가 생기는 연(원인)이 될 것인가?
10. 자성(自性)이 없는 것에는 유성(有性)이 없다. 그러므로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11. 온갖 연의 각자 속에도, 온갖 연이 모두 합쳐진 속에도 결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온갖 연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어찌 그것들의 연에 의해 생기는 일이 있겠는가?
12. 만약 결과가 온갖 연 속에 존재하지 않는데도 그것들의 연에 의해 생긴다면, 연이 아닌 것에 의해서도 어찌 결과가 생기지 않겠는가?
13. 결과는 온갖 연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 연은 스스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연에 의해 결과가 이루어진다면, 그 결과는 어찌 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겠는가?
14. 그러므로 결과는 온갖 연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라고도, 연이 아닌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결과가 없기에, ‘온갖 연’도 ‘온갖 연이 아닌 것’도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우선 제1장은 ‘원인의 고찰’입니다. ‘연’에는 네 종류(인연, 소연연, 등무간연, 증상연)가 있습니다. ①‘인연’이 있고,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연(緣)인 ②‘소연연’이 있으며, ‘소연연’에는 친소연연(親所緣緣)과 소소연연(疎所緣緣)이라 불리는 것이 있습니다. 뭔가 복잡한 것 같지만 친소연연과 소소연연은 여하간 인식에 관한 것입니다. 또 ③‘등무간연’과 ④‘증상연’이라는 것이 있는데요, 그 각각의 의미에 대해서는 위의 번역을 참조해주세요.
【1-1】 애당초 어떤 것이든 사물(법・다르마)은 ‘자기원인에 의해서도 타인(他因)에 의해서도 그 둘 다에 의해서도 생기는 것이 아니고 무원인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라고 이야기되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여기서는 연기에 관해 느닷없이 제4렌마까지 부정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원인에 의해’가 부정됩니다. ‘자기원인’이라는 것은 앞서 말한 ‘불은 타오르는 것’이나 ‘돌은 떨어지는 것’이라는 ‘소박 목적론’(편계소집성)을 말합니다. 이것이 우선 부정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타인(他因)에 의해’가 부정됩니다. ‘의타기성(依他起性)’, 즉 타인(他因)으로부터 연이 점차 연결되는 것이 부정됩니다. 그림 4를 봐주세요.

삼론교학(三論敎學)을 대성한 학승인 길장(吉藏, 549~623)이 이 부분을 매우 잘 정리해 놓았습니다. 사물이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은 ‘의타기성’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는 이 ‘의타기성’이 영원히 무한 역행하고 이로 인해 최종적인 정의가 불가능하다고 지적합니다. 초기 근대의 세계관[편집자주: 기계론]이 맥빠질 정도로 담담하게 부정됩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반대로 사물에 자성(자기원인성)이 있게 됩니다. 이것이 앞서 말한 제1렌마이며, 중세 스콜라의 ‘소박 목적론’의 실재론입니다. 그러나 자성은 애당초 연이 필요치 않으므로 무인론(無因論)(무원인)이 돼버리기에 불가하다는 것이지요. 타인(他因)과 자기원인을 조합한다고 해도 그 타인(他因) 자체에 자기원인성이 있거나 그리로 무한소행(無限溯行)하기 때문에 그 양쪽에 의해서 모든 것이 생긴다는 것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물론 무원인에서 사물이 생긴다는 것도 논외입니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하면, 연기라는 것이 성립한다면, 그것은 십이지(十二支)라든가 팔불과 같이 단순한 국소적인 상황에서의 연기 등을 생각해보면, 결국은 A와 非A가 루프(순환)하는 형태를 이루지 않으면 이상하지 않으냐고 길장(吉藏)은 말합니다. 그의 설명은 확실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 ‘A와 非A’의 루프(순환)하는 관계를 상의성(相依性)이라고 부릅니다. 나가르주나는 사물에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 그리고 이 상의성의 관계에 의해 모든 것이 성립한다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밝혀냅니다.
이렇게 루프(순환)하는 구조가 아니면 연기는 성립하지 않으며, 반대로 루프(순환) 구조를 말하는 것이 연기입니다. 이것이 인연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교란한다 해도 일방적으로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지적해두겠습니다. 지금 서술한 루프 구조를 나가르주나는 『중론』의 전편(全篇)에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 ‘작용’과 ‘작용하는 사물’의 관계, ‘인지의 주체’와 ‘인지의 대상’의 관계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 철저하게 고찰합니다. 나중에 상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자성(自性)이란 목적인(目的因)이다】
자 이제 『중론』 제1장 【1-3】을 봅시다. 여기서 문제는 무엇일까요?
온갖 다르마(법)를 그와 같은 것으로서 보이게 하는 자기원인(自性)은 온갖 연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성(自性)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른 것의 자성으로서의] 타성(他性)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자성(自性)에 대해 자기목적성(자기원인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연(緣) 속에 있는 하나의 항으로서 그러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림 5를 참조해주세요. 여기서 ‘자성’이라는 것은 정성적으로 자연기술된 그 자체의 ‘존재 방식’으로부터 뒤집힌 ‘주어’이며, 유럽적으로는 중세의 소박 목적론에서의 ‘목적인’에 해당합니다.

『중론』 제2장에서는 ‘가는 자가 가는 것은 이상하다’라는 논의가 전개됩니다. ‘가는 것’이 있고 이 ‘가는 것’은 ‘가는 자’라는 목적성을 가진 주체가 있어서 가는 것이라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운동부정(運動否定)이라고 이해하면, 절대로 저 논의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중론』은 목적성(소박 목적론)을 무엇보다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불교적으로는 ‘편계소집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어떤 ‘존재 방식’이 있고 그것을 ‘실체로서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미혹으로 설명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기계론적으로 부정한 것이 유럽의 문명을 구축한 근대적인 사고방식인데, 불교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과학적으로 발전시키지 않고 그냥 뛰어넘어 버립니다. 예를 들어 라이프니츠와 같이 사이언스를 사고한 사람은 개물(個物)이 다른 것과 상호 공존하도록 가장 다양한 존재 방식의 네트워크를 이루는 세계관을 제시하는데요, 라이프니츠와 유사한 것을 그보다 훨씬 앞서서 불교가 세계관으로서 직관했다는 것이지요. 요컨대 가령 상의성(相依性)이라는 것은 일종의 ‘구조’인데, 애당초 연기라는 것은 하나하나 쌓아 올리듯이 원인에서 결과가 일방향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무명(無明)에서 노사(老死)로 가면 다시 무명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윤회입니다. 게다가 순관(流轉門)・역관(還滅門)이라는 것이 있어서 집착이 증대해서 되돌아오는 것과 집착이 사라져서 되돌아오는 것의 양방향이 있습니다.
이로써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하면, 잠정적인 결론을 조금 앞질러 말하면, 상의성이야말로 테트랄레마의 구조적인 사고라는 것입니다. 인도인의 독특한 논법인 테트랄레마의 제4렌마는 ‘A도 아니고 非A도 아니다’라는 것인데, 이 로직이 맞는다면 ‘답은 어디에도 없다’라는 회의론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연기설(緣起說)은 ‘괴로움의 원인’을 묻지만 결국은 ‘원인은 어디에도 없다’라는 제4렌마의 통찰에 다다르기 위한 귀류법적인 사색이라는 것이죠. 예를 들어 붓다의 시대의 육사외도(六師外道, 기원전 500년경 인도에서 활동하던 6명의 자유 사상가) 중 한 사람인 산자야는 제4렌마를 끝까지 구사한 회의론자였습니다. 유명한 불제자 사리자(舍利子, Śāriputra)와 목련(目連, Maudgalyayana)도 산자야의 고제(高弟)였는데, 산자야는 석가를 만나고 나서 자신의 제자 250인을 데리고 석가에 귀의합니다. 알다시피 그들은 붓다의 십육나한(十六羅漢,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은 16인의 뛰어난 제자)의 필두가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붓다가 테트랄레마를 의식하면서 연기(緣起)의 사상을 통해 ‘괴로움의 원인’을 묻고 ‘괴로움의 원인은 어디에도 없다’라는 구조적 및 긍정적인 통찰에 다다랐다는 것을 방증하며, 바로 이로부터 불교의 사상이 전개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도 그러한데요, 구조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전체로부터 부분을 확정해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발상은 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문제였고, 소크라테스가 몇 번이나 제기한 바 있습니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는 ‘우리는 철자를 기억할 때 어떻게 기억하는가?’라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던집니다.
이것은 대화편에서 여섯, 일곱 번 나온 질문입니다. 철자의 본보기 같은 것이 있어서 그로부터 나오는 문자의 조합의 패턴과 변화를 우선 기억한다는 표음문자의 문제. 표음문자는 BOU라든가 GA와 같이 유한한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서 다양한 말을 만들어냅니다. 예를 들어 자음의 발명을 생각해보면, BA라든가 MA와 같이 자음 한 문자만으로는 발음할 수 없습니다. 즉 모음과 결합해서 복합체와 그 변이로부터 부분이 확정됩니다.
실제로 인간은 그런 식으로 인지하고 있고 색깔과 소리도 마찬가지로 식별합니다. 애당초 무언가의 성질이나 ‘정도’라는 것은 이를테면 ‘뜨겁다’에 대한 ‘차갑다’와 같이 반대되는 것들 사이에서 결정되고, 무언가(기체(基體), 다르민)에는 복수 종의 ‘정도’, 즉 성질(다르마)이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사물들끼리의 관계 또한 ‘멀다’라든가 ‘가깝다’와 같은 이항대립 사이에서의 ‘정도’로 인지됩니다. 수나 양화는 이 ‘정도’를 엄밀히 한 것인데요,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그러한 다양한 ‘정도’(성질, 다르마) 속에 살고 있습니다. 본능적으로 우리는 다양한 다르마의 상의성의 세계를 떠다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레시피를 따라 정량을 맞추지 않아도 경험적으로 요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인간은 세계의 다양성을 다양한 이항 대립적인 특징과 그것들의 여러 조합을 통해 인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이 세계를 신화적으로 이야기할 때에도 그러하며, 신화 속에서는 그러한 이항 대립성이 단일하지 않고 복수로 중첩되고 그리고 그 조합이 변이해감으로써 특정한 시점(始點)으로 환원되지 않는 세계의 구조가 이야기됩니다. 신화의 세계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대비되어 나옵니다. 그다음 제3렌마처럼 양쪽의 성질을 가진 양성구유자가 등장하고, 나아가 그와 정반대인 무성(無性)의 존재가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변이가 전개됩니다. 복수의 이항대립이 조합됨으로써 그러한 조작이 가능하게 되는데요,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논하겠습니다.
이러한 조작을 통해 무엇이 일어나는가 하면, 앞서도 서술했듯이 바텀업이 아니라 전체로부터 부분이 추출되고 부분과 부분의 관계와 그 변이가 의미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종합적인 사고와 해석(또는 분석)적인 사고가 과학에도 있고요, 그래서 근대 이후 과학이 발전해 간 것이지요. 물론 지각과 신화와 언어 또한 해석적(분석적)입니다. 종합적이자 해석적인 이 사고는 유징(有徵)・무징(無徵)의 유한한 요소의 조합을 통해 무한한 다양성을 만들어낸다는 바로 그러한 사고방식입니다.
사이언스가 전개됨에 따라 전체로부터 부분을 사고하는 방법은 더욱 정교해집니다. ‘언어’와 ‘인지’ 또한 마찬가지고요. 이를테면 색깔은 본래 삼원색(빨강, 녹색, 파랑)인데, 그 조합과 뉘앙스에 따라 온갖 색상이 무한대로 가능합니다. 그리고 ‘신화적 사고’ 또한 세계를 그런 식으로 변별합니다. 그러나 본래 전체로부터 부분으로 나아가는 사고는 단선적인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이기에, 지식이 늘어나면 도리어 인류는 그러한 음미의 태도를 놓치기 쉽습니다.
플라톤, 소크라테스가 가장 비판하는 것이 ‘억견(doxa、δόξα)’인데요, 억견은 근거가 박약한 지식, 즉 ‘생각 없음’을 의미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억견 아닌 지식이 인간의 올바른 앎이라고 말합니다. 이를테면 둘이서 대화를 하는데 벽에 부딪혀서 어느 쪽도 답을 낼 수 없는 난문(아포리아)에 맞닥뜨렸다고 합시다. 소크라테스는 그것이 억견보다 훨씬 낫다고 봅니다. 실제로 그렇게 나온 난문이 몇 세기에 걸쳐서 계속해서 고찰됩니다. 조금 이야기가 섞였는데요, 다시 『중론』으로 되돌아갑니다.
【1-4】
작용(일)은 연(원인)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필요로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연(원인)은 작용(일)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필요로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작용과 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또한 ‘의타기성(依他起性)’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5】를 봅시다.
이것들의 연(A)에 의해 결과(B)가 생기므로, 이것들은 [결과 B의] 연(원인 A)이라고 한다. 그러나 결과가 생기지 않는 한, 그것들은 연이 아니다.
이 또한 【1-4】와 같은 패턴입니다. 결과가 있는 곳에서부터 역산해서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원인이 있으므로 결과가 나온다는 가정을 먼저 논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루프이지요. 【1-5】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를테면 A라는 기점에서 시작하는 바텀업으로는 사고할 수 없음을 줄곧 말하고 있습니다.
원인이 결과에 앞서며 인과 관계가 일방향이라는 것은 얼핏 맞는 말 같습니다만, 실제로는 과학에서도 예를 들어 뉴턴의 운동 제2법칙은 ‘힘=가속도×질량’이라고 정의하는데요, ‘힘’과 ‘가속도×질량’은 자연기술의 수식으로 같다는 것이고 어느 한쪽이 원인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기점이 되는 원인이 있다’라는 막연한 전제를 의심하고 상의성(相依性)의 구조로서 독해를 시도하려는 귀류법적 이해를 시도합니다.
【유식(唯識)에서의 식(識)의 구조에서 루프】
그리고 【1-8】입니다.
이미 존재하는 다르마는 의지할 거처로서의 연을 가지고 있지 않다(無所緣)고 설파되고 있는데, 만약 의지할 거처로서의 연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소연연(所緣緣)이 성립될 것인가?
이것도 무슨 말인가 싶지만, ‘현상(사물의 양상)에서부터 원인으로’라는 루프가 아니라, 유식(唯識)으로 말하자면 상분(相分)과 견분(見分)이라는 식(識)의 구조 속에서 대상 세계의 표현(상분)으로 나타나는 것에 관한 일반적인 이야기입니다. 이른바 신소연연(新所緣緣)[편집자주: 소연연 중에서 인식대상으로서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과 ‘견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점차 나타나는 것이 소소연연(疎所緣緣)[편집자주: 소연연 중에서 인식대상으로서 간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림 1-2를 봐주세요. 식(識)의 구조를 유식(唯識)에서는 이렇게 사고하는데요, 식(識) 속에는 주체와 대상에 해당하는 것(견분과 상분)이 있어서 현상의 대상적인 나타남(상분)에 주체(견분) 측의 느낌이 이런 식으로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통합되지 않습니다. 이것들의 상호작용이 중첩되면서, ‘이것은 확실한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이는 대상 하나하나에 다양한 접근이 있어서 경합적으로 대상에 접근하다 보면 대상이 리얼해진다는 모델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관계를 조감하는 시선에서 자각하는 ‘자증분(自證分)’이 있어서 식(識)이 성립하게 됩니다(그림 1-2).

불교라는 식(識)의 구조가 대체로 이러한데요, 이 유식(唯識)의 논의에서는 견분, 상분, 자증분이 삼항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나아가 삼항의 전체가 또 다른 식(識)의 상분에 포함돼 있습니다. 유식에서는 그리하여 공상종자(共相種子)[편집자주: 복수의 중생의 견분에 걸쳐서 인식대상이 되며 또 각각의 행위의 원인이 되는 것]와 같이 스스로 상호 포섭적이며 ‘일즉다(一卽多)’의 화엄으로 발전해갑니다. 단독의 식(識) 내부에서는 자신의 확신과 집착이 증강하도록 정념이 증대할 수 있지만, 그 또한 또 다른 식(識)의 상분에 포함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정념이 전체적으로 제각기 흩어지는 모델을 불교에서는 사고하고 있고, 거기까지 예기하는 것이 불교라고 생각합니다.
십이지연기와 단독의 식(識)뿐이면 쇼트서킷 루프처럼 되기 때문에, ‘하나와 여럿’이라는 이항대립에서도 테트랄레마가 성립한다는 것을 가능한 한 빨리 내놓아야겠지요. 그렇게 점점 상호 포섭적으로 되어가면 이번에는 ‘일즉다(一卽多)’의 세계가 되어서 개물끼리 서로 아무런 장애 없이 조화를 이루는 느낌의 세계관을 이룹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또한 ‘화엄’이겠지요. 물론 『중론』에서는 이미 부동불이(不同不異)의 구조를 이야기하고, 차이의 문제에 대해서도 고찰하고 있으며, 폐쇄적인 순환의 세계관이 아닌 그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예를 들어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오래된 게송(偈頌)조차 ‘허물을 벗어버리라’와 같은 구절들로 넘쳐납니다. 처음부터 불교는 화엄을 사고했습니다. 화엄에서 ‘하나’는 원래 ‘식(識)’이므로 대상적이고 물질적인 것의 상(相)(상분)도 주체(견분)도 그 안에 들어있고, 밀교란 거기까지 부활시켜서 식대(識大)와 오대(五大)[만물에 존재하는 물질의 구성요소이자 생성하는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의 상호 포섭 관계를 리얼하게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불교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이자면, 오대(五大)란 지수풍화(地水風火)의 사대(四大)에 공대(空大)를 더한 것인데요, 이 사대는 그리스에서 엠페도클레스가 말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예전 전국시대에 일본으로 포교하러 온 예수회 선교사들은 기독교 교리의 소박함으로 인해 고도로 발달한 불교의 세계관에 익숙한 일본인들에게 바보 취급을 당했더랬죠. 일본인이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사대원소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선교사들은 경악했다고 하지요(웃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형이상학』에서 “엠페도클레스는 불과 물, 땅과 바람 등 반대되는 것(이항대립)을 여러 개 가지고서 그것들 사이의 ‘정도’나 성질의 변화를 생각하지만, 그것들을 기점으로서의 ‘원소’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이상하다”라고 비판합니다. 그것들은 실제로 건조함(불과 흙을 겸함), 습함(흙과 물을 겸함), 차가움(물과 바람을 겸함), 뜨거움(물과 바람을 겸함)이라는 변화하는 구체적인 성질로서 다뤄져야 하며 이는 순환적・구조적으로 전체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그림 6-1).

요컨대 ‘현상의 나타남으로부터 그 원인을 찾아내서 주어화하는 루프’의 구조 분석에서부터 ‘주객 관계의 루프’라는 일반적인 논의로 향하며 다양한 상의성을 인정하는 존재론으로 나아가는 것이 【1-8】입니다. 이 세계에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호작용의 구조뿐이며 일방적으로 무언가가 원인이 되어서 상황이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한 번 더 말해둡니다. 인지의 주체도 대상도 단독으로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말이죠, 【1-10】은 정말로 대단합니다.
자성(自性)이 없는 것에는 유성(有性)이 없다. 그러므로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연기 그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연기의 어떤 항을 기점 삼아 바텀업 하는 것이 아닌 관계’를 설파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연기임을 알고, 그렇지 않으면 논리가 어그러진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나가르주나의 통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1-11】을 봅시다.
온갖 연의 각자 속에도, 온갖 연이 모두 합쳐진 속에도 결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온갖 연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어찌 그것들의 연에 의해 생기는 일이 있겠는가?
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원래 ‘공(空)’도 ‘상의성(相依性)’도 ‘결과’가 아닙니다. 연기 각각의 항에 의해 구성되는 ‘총화’도 아닙니다. 그러한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위의 말이 나오는 것이지요.
【이항대립이 아닌, 전체로부터 부분의, 야생의 사고, 구조적・신화적 사고】
이번 우리 대회에서 ‘이항대립’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으므로 먼저 이항대립에 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전체로부터 부분을 사고하는 복합적인 사고방식이나 신화가 어떤 식으로 사물을 다루는지를 살펴봅시다. 그림 7의 클라인의 사원군(四元群)을 참조해주세요.

이항대립이 있을 때, 예를 들어 흑과 백이 있을 때, 그러한 이항대립에서 흑이든 백이든 한쪽 극으로 문제를 단순화하는 것은 극단적인 사고라고 하지요. 좋지 않습니다. 복잡하고 미묘한 사고는 ‘회색이라는 중간에 있다’라고 하지요. 그렇지만 그 또한 매우 단순한 사고방식으로, 레비스트로스나 야콥슨은 그와 다른 사고방식을 모색하였고 마침내 구조주의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플라톤의 ‘파라디그마(paradigma)’의 발상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동시대의 프랑스가 메카였던 분자생물학의 영향을 받았고, 그에 따라 그는 다양성이 여러 이항대립의 조합과 그 변이를 통해 표현된다는 관점에서 신화를 다뤘습니다.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불에 구운 것은 먹을 수 있다. 불에 굽지 않은 것은 먹을 수 없다’라는 명제가 있다고 하면, 선주민들은 신화 속에서 약삭빠르게 ‘꿀’은 굽지 않아도 먹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 ‘담배’는 굽지만 먹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이항대립의 제3항에 적합한 것을 찾아내고자 합니다. 제3항을 경유함으로써 신화는 다종다양한 변이를 만들어내면서 복잡하게 짜여갑니다.
다양한 이항대립과 ‘정도’(성질, 다르마)가 중첩되는 그 관계가 변화무쌍한 세계를 만들어내고 우리는 그 세계를 떠다니고 있다는 것은 앞서 서술한 바입니다. 이러한 이항대립의 설정은 처음에는 자의적이지만 그것들의 조합은 더욱더 그 관계를 변화시킴으로써 복잡미묘하고 다양한 세계를 기술해갑니다. 표음문자의 알파벳이 다양한 조합을 통해 어떤 단어라도 기술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신화도 세계를 복잡하게 분절하고 까다로운 구조를 그리기 때문에,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과 같은 방대한 저술이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레비스르로스는 초기에 이른바 ‘카리에라족(Kariera族) 유형 혼인규정’처럼 세계 여러 부족의 혼인 법칙을 분석했을 때에 그것이 수학적으로 클라인의 사원군을 모델로 삼을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클라인의 사원군은 가장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운 모델입니다. 예를 들어 원과 네모라는 이항대립이 있고, 흑과 백이라는 이항대립이 있다고 치면, 그것들을 곱해봅니다. 그러면 흑을 축으로 하는 경우 흑은 네모와도 원과도 조합될 수 있습니다. 네모를 축으로 했을 때 네모는 흑과도 백과도 조합될 수 있습니다. 이항대립을 다른 이항대립과 맞붙여서 얽을 때, 이를테면 흑이면서 네모가 되는 것인데, 하나의 항이 반대 측의 이항대립을 초월하기 위한 ‘매개’가 될 수 있습니다(그림 7 참조).
신화의 사고란 바로 그런 식이어서 ‘불에 구운 것’과 ‘불에 굽지 않은 것’과 같은 이항대립에 대해 제3항으로서 ‘꿀’이 나오게 되면 ‘꿀’에 대립하는 ‘담배’가 등장하게끔 전개됩니다. ‘꿀’이나 ‘담배’와 같은 것이 제3항의 역할을 맡아서 순환하게 될 때, 이 세상에 넘쳐나는 다양한 성질(다르마)이 최고도로 복잡하게 그려집니다. 실은 세계의 인지 자체가 실제로 그렇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현재 인간 뇌의 신경망을 본뜬 컴퓨터에서 딥러닝을 실행하고 있는데요, 그것 또한 복수의 요소가 세로로 늘어선 ‘입력층’과 ‘출력층’ 사이에 ‘숨은 층’이라는 것이 있고 그에 노드(결절점)라고 불리는 것에 입력된 여러 정보가 묶이는데요, 그것은 어떤 성질을 (1,0)의 변이로 편성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출력층’에 나오는 것은 (1,0)으로 특징지어진 복수의 성질의 조합입니다.
예를 들어 자음의 표기를 발명하기 전에 NA와 NO처럼 자음과 모음이 합쳐진 복수의 음에서 출발하지만, 시작의 느낌이 비슷한 다른 소리가 몇 가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계에서 이항대립과 그 사이에 있는 ‘정도’, 즉 성질(다르마)은 겹쳐 있으며 상의성 속에서 무한합니다.
이러한 무시무종의 세계 속에서 테트랄레마가 성립합니다. ‘A이자 非A’라는 것은 클라인의 사원군 모델에서 각각의 항이 ‘제3렌마’가 된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구체적이고 감성적인 세계입니다. 그리고 이 제3렌마의 위치를 일순시키는 구조를 신화는 묘사하고 있으며,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매개’(제3렌마)의 직무는 한 바퀴 순환해서 ‘축약(縮約)’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바퀴 순환했을 때 기계론이나 소박 목적론이 문제 삼는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원인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가 됩니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변이가 제4렌마입니다.
이처럼 원인을 어디로도 환원하지 않는 모델, 말하자면 순환・축약 모델을 신화는 가지고 있으며, 또 연기의 통찰에서 인생의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인지를 묻는 가운데 제4렌마를 발견해낸 것이 붓다의 직관입니다. 나아가 연기가 구조적이라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바텀업의 사고를 철저하게 귀류법을 통해 논파한 것이 나가르주나가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그는 붓다의 깨달음의 핵심을 직각(直覺)하고 다시 사고한 것이 아닐까요?
나가르주나가 등장하기 전까지 불교는 다양한 번뇌와 정념이 증대하는 국면, 즉 정념의 심리학을 정밀하게 탐구했고, 그 자체로 엄청나게 거대한 교리체계를 완성했습니다. 그런데 나가르주나는 여기서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상의성(相依性)이라든가 무자성(無自性)으로서 공(空)이라든가 불교의 한복판을 차례차례 선명하게 척출해갑니다.
유식(唯識)은 유식으로서 주객의 상호작용 속에서 화엄과도 연결되는 세계관을 전개합니다. 그리하여 자기원인은커녕 무수한 식(識) 전체의 상의성 속에서의 존재 양상과 문자 그대로 만법(萬法)(온갖 다르마)의 무한한 다양성과 복잡성을 구현하며 현실성을 갖추게 됩니다. 화엄의 세계가 현실적으로 긍정되는 것이지요.
라이프니츠는 최선율(最善律)의 사상에서 화엄과 가까운 세계관을 직관했는데, ‘신에 의한 최선의 세계 선택’이라든지 ‘예정조화’와 같은 표현 때문에 얼빠진 느낌이 듭니다. 그렇지만 하늘의 섭리를 우리가 믿어야 하지 않는가 하고 최근 점점 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신앙이 나옵니다. 개(個)를 초월한 거대한 힘에 이끌리는 다원적인 세계가 있고, 그 세계를 통해 우리가 존재한다는 믿음. 정토진종(淨土眞宗)은 이 세계를 ‘구제’의 맥락에서 이야기합니다. 존재론 혹은 세계관으로서 불교는 과학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 형태로 매우 일찍부터 본질적이고 깊은 직관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완전히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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