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본문에서 인용한 『중론』은 일본의 저명한 불교학자 나카무라 하지메의 번역본을 참조해서 시미즈 다카시가 현대일본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우리말로 바꾼 것이다. 『중론』의 몇몇 한국어 판본을 보면 알겠지만, 번역이 제각각이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중론』자체가 산스끄리뜨어 원문, 티벳어, 한문 등의 여러 판본과 다양한 해석의 주석서로 존재한다. 시미즈 다카시의 번역이 반드시 옳다고 할 수 없고, 다만 이러한 해석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그의 번역을 이해해야할 것 같다. 다음은 『중론』제1장 강론이다. 내용은 『오늘날의 애니미즘』, 『공해론/불교론』과 상당 부분 겹친다. 

 

 


 

 

【『중론』 귀경서(歸敬序): 팔불(八不)의 수수께끼】

 

귀경서

온갖 다르마(법)는 불생(不生)이며, 불멸(不滅)이며, 항상 불변(不變)하지도 않고, 단멸(斷滅)하는 것도 아니고,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고,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다. 모든 희론(戱論)이 적멸(寂滅)한 이 길상(吉祥)한 연기(緣起)를 설파한 부처, 여러 설교자 중 가장 뛰어난 그분에게 계수(稽首)의 예를 다하다.

 

『중론』을 처음 읽었을 때 잘 몰랐던 부분이 있습니다. 명제로서 ‘A’, ‘非A’, ‘A이자 非A’, ‘A도 아니고 非A도 아니다’가 열거되는, 사구분별 또는 테트랄레마라고 불리는 인도 특유의 논리입니다. 이 중 제4렌마의 ‘A도 아니고 非A도 아니다’는 ‘불생불멸’이라든지 ‘불상부단’과 같이, 말하자면 메타 수준의 안정된 세계관, 이상적인 결론을 말해주는데요, 현실에서는 ‘불생불멸’처럼 제4렌마가 긍정되는 경우가 거의 없고, 니르바나(열반)조차도 『중론』 안에서는 철저히 부정됩니다. 처음엔 왜 그런지를 잘 몰랐습니다.

제4렌마가 인정되는 것은 네 종류밖에 없습니다(귀경서의 팔불, 즉 불생불멸, 부단불상, 부동불이, 불래불거). 그것이 너무나 기이했습니다.

귀경서에는 팔불을 말한 다음에 바로 “모든 희론이 적멸한 이 길상한 연기를 설파한 부처”라고 하며 제4렌마의 그 독특한 취급을 ‘연기설’과 결부 짓고 ‘연기설을 완성한 이는 부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를 골몰하면서 나는 『중론』에 빠져들었습니다.

먼저 제1장을 보겠습니다.

 

【제1장 원인의 고찰: ‘사물의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원인은 어디에도 없었다’라는 놀라운 결론】

 

제1장 원인의 고찰

1. 온갖 다르마(법)는 어느 것에나 어느 쪽에서도 자기원인에 의해서도, 타인(他因)에 의해서도, 그 둘 다에 의해서도 생기는 것이 아니고, 무원인(無原因)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2. 네 종류의 연(緣)(pratyaya, 원인)이란 무엇인가? 인연(직접적인 타인(他因)과 보조인(補助因)), 소연연(所緣緣)(지각의 대상으로서 지각 주체를 생겨나게 하는 연), 등무간연(等無間緣)(지각의 주체로서의 마음이 차례차례 연속해가는 연), 증상연(增上緣)(연이 결실에 이르는 데 방해하지 않고 조력하는 연)이며, 제5의 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3. 온갖 다르마(법)를 그와 같은 것으로서 보이게 하는 자기원인(自性)은 모든 연(緣)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성(自性)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른 것의 자성으로서의] 타성(他性)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4. 작용(일)은 연(원인)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필요로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연(원인)은 작용(일)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필요로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5. 이것들의 연(A)에 의해 결과(B)가 생기므로, 이것들은 [결과 B의] 연(원인 A)이라고 한다. 그러나 결과가 생기지 않는 한, 그것들은 연이 아니다.

6. 결과적인 것이 아직 존재하지 않든 이미 존재하든 연을 상정하는 것은 이상하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면, 연은 무슨 연인가? 이미 존재한다면 연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7. 사물은 이미 존재하든 아직 존재하지 않든 생기(生起)하지 않으며, [동시에]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서도 생기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우에 ‘결과를 생기게 하는 원인’이 어떻게 성립할 것인가?

8. 이미 존재하는 다르마는 의지할 거처로서의 연을 가지고 있지 않다(無所緣)고 설파되고 있는데, 만약 의지할 거처로서의 연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소연연(所緣緣)이 성립될 것인가?

9. [결과로서의] 온갖 다르마(법)가 아직 생겨나지 않을 때 [원인이] 사라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온갖 다르마가 생기기 직전에] 무간연(無間緣)이 사라진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또 이미 무간연이 사라졌을 때 무엇이 온갖 다르마가 생기는 연(원인)이 될 것인가?

10. 자성(自性)이 없는 것에는 유성(有性)이 없다. 그러므로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11. 온갖 연의 각자 속에도, 온갖 연이 모두 합쳐진 속에도 결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온갖 연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어찌 그것들의 연에 의해 생기는 일이 있겠는가?

12. 만약 결과가 온갖 연 속에 존재하지 않는데도 그것들의 연에 의해 생긴다면, 연이 아닌 것에 의해서도 어찌 결과가 생기지 않겠는가?

13. 결과는 온갖 연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 연은 스스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연에 의해 결과가 이루어진다면, 그 결과는 어찌 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겠는가?

14. 그러므로 결과는 온갖 연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라고도, 연이 아닌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결과가 없기에, ‘온갖 연’도 ‘온갖 연이 아닌 것’도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우선 제1장은 ‘원인의 고찰’입니다. ‘연’에는 네 종류(인연, 소연연, 등무간연, 증상연)가 있습니다. ①‘인연’이 있고,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연(緣)인 ②‘소연연’이 있으며, 소연연’에는 친소연연(親所緣緣)과 소소연연(疎所緣緣)이라 불리는 것이 있습니다. 뭔가 복잡한 것 같지만 친소연연과 소소연연은 여하간 인식에 관한 것입니다. 또 ③‘등무간연’과 ④‘증상연’이라는 것이 있는데요, 그 각각의 의미에 대해서는 위의 번역을 참조해주세요.

【1-1】 애당초 어떤 것이든 사물(법・다르마)은 ‘자기원인에 의해서도 타인(他因)에 의해서도 그 둘 다에 의해서도 생기는 것이 아니고 무원인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라고 이야기되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여기서는 연기에 관해 느닷없이 제4렌마까지 부정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원인에 의해’가 부정됩니다. ‘자기원인’이라는 것은 앞서 말한 ‘불은 타오르는 것’이나 ‘돌은 떨어지는 것’이라는 ‘소박 목적론’(편계소집성)을 말합니다. 이것이 우선 부정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타인(他因)에 의해’가 부정됩니다. ‘의타기성(依他起性)’, 즉 타인(他因)으로부터 연이 점차 연결되는 것이 부정됩니다. 그림 4를 봐주세요.

그림 4. 『삼론현의』에서 『중론』의 해석

삼론교학(三論敎學)을 대성한 학승인 길장(吉藏, 549~623)이 이 부분을 매우 잘 정리해 놓았습니다. 사물이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은 ‘의타기성’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는 이 ‘의타기성’이 영원히 무한 역행하고 이로 인해 최종적인 정의가 불가능하다고 지적합니다. 초기 근대의 세계관[편집자주: 기계론]이 맥빠질 정도로 담담하게 부정됩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반대로 사물에 자성(자기원인성)이 있게 됩니다. 이것이 앞서 말한 제1렌마이며, 중세 스콜라의 ‘소박 목적론’의 실재론입니다. 그러나 자성은 애당초 연이 필요치 않으므로 무인론(無因論)(무원인)이 돼버리기에 불가하다는 것이지요. 타인(他因)과 자기원인을 조합한다고 해도 그 타인(他因) 자체에 자기원인성이 있거나 그리로 무한소행(無限溯行)하기 때문에 그 양쪽에 의해서 모든 것이 생긴다는 것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물론 무원인에서 사물이 생긴다는 것도 논외입니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하면, 연기라는 것이 성립한다면, 그것은 십이지(十二支)라든가 팔불과 같이 단순한 국소적인 상황에서의 연기 등을 생각해보면, 결국은 A와 非A가 루프(순환)하는 형태를 이루지 않으면 이상하지 않으냐고 길장(吉藏)은 말합니다. 그의 설명은 확실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 ‘A와 非A’의 루프(순환)하는 관계를 상의성(相依性)이라고 부릅니다. 나가르주나는 사물에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 그리고 이 상의성의 관계에 의해 모든 것이 성립한다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밝혀냅니다.

이렇게 루프(순환)하는 구조가 아니면 연기는 성립하지 않으며, 반대로 루프(순환) 구조를 말하는 것이 연기입니다. 이것이 인연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교란한다 해도 일방적으로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지적해두겠습니다. 지금 서술한 루프 구조를 나가르주나는 『중론』의 전편(全篇)에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 ‘작용’과 ‘작용하는 사물’의 관계, ‘인지의 주체’와 ‘인지의 대상’의 관계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 철저하게 고찰합니다. 나중에 상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자성(自性)이란 목적인(目的因)이다】

 

자 이제 중론』 제1장 【1-3을 봅시다. 여기서 문제는 무엇일까요? 

 

온갖 다르마(법)를 그와 같은 것으로서 보이게 하는 자기원인(自性)은 온갖 연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성(自性)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른 것의 자성으로서의] 타성(他性)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자성(自性)에 대해 자기목적성(자기원인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연(緣) 속에 있는 하나의 항으로서 그러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림 5를 참조해주세요. 여기서 ‘자성’이라는 것은 정성적으로 자연기술된 그 자체의 ‘존재 방식’으로부터 뒤집힌 ‘주어’이며, 유럽적으로는 중세의 소박 목적론에서의 ‘목적인’에 해당합니다.

그림 5. 정성적인 자연기술(아리스토텔레스)과 근대초기(데카르트, 홉스)

『중론』 제2장에서는 ‘가는 자가 가는 것은 이상하다’라는 논의가 전개됩니다. ‘가는 것’이 있고 이 ‘가는 것’은 ‘가는 자’라는 목적성을 가진 주체가 있어서 가는 것이라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운동부정(運動否定)이라고 이해하면, 절대로 저 논의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중론』은 목적성(소박 목적론)을 무엇보다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불교적으로는 ‘편계소집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어떤 ‘존재 방식’이 있고 그것을 ‘실체로서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미혹으로 설명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기계론적으로 부정한 것이 유럽의 문명을 구축한 근대적인 사고방식인데, 불교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과학적으로 발전시키지 않고 그냥 뛰어넘어 버립니다. 예를 들어 라이프니츠와 같이 사이언스를 사고한 사람은 개물(個物)이 다른 것과 상호 공존하도록 가장 다양한 존재 방식의 네트워크를 이루는 세계관을 제시하는데요, 라이프니츠와 유사한 것을 그보다 훨씬 앞서서 불교가 세계관으로서 직관했다는 것이지요. 요컨대 가령 상의성(相依性)이라는 것은 일종의 ‘구조’인데, 애당초 연기라는 것은 하나하나 쌓아 올리듯이 원인에서 결과가 일방향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무명(無明)에서 노사(老死)로 가면 다시 무명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윤회입니다. 게다가 순관(流轉門)・역관(還滅門)이라는 것이 있어서 집착이 증대해서 되돌아오는 것과 집착이 사라져서 되돌아오는 것의 양방향이 있습니다.

이로써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하면, 잠정적인 결론을 조금 앞질러 말하면, 상의성이야말로 테트랄레마의 구조적인 사고라는 것입니다. 인도인의 독특한 논법인 테트랄레마의 제4렌마는 ‘A도 아니고 非A도 아니다’라는 것인데, 이 로직이 맞는다면 ‘답은 어디에도 없다’라는 회의론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연기설(緣起說)은 ‘괴로움의 원인’을 묻지만 결국은 ‘원인은 어디에도 없다’라는 제4렌마의 통찰에 다다르기 위한 귀류법적인 사색이라는 것이죠. 예를 들어 붓다의 시대의 육사외도(六師外道, 기원전 500년경 인도에서 활동하던 6명의 자유 사상가) 중 한 사람인 산자야는 제4렌마를 끝까지 구사한 회의론자였습니다. 유명한 불제자 사리자(舍利子, Śāriputra)와 목련(目連, Maudgalyayana)도 산자야의 고제(高弟)였는데, 산자야는 석가를 만나고 나서 자신의 제자 250인을 데리고 석가에 귀의합니다. 알다시피 그들은 붓다의 십육나한(十六羅漢,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은 16인의 뛰어난 제자)의 필두가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붓다가 테트랄레마를 의식하면서 연기(緣起)의 사상을 통해 ‘괴로움의 원인’을 묻고 ‘괴로움의 원인은 어디에도 없다’라는 구조적 및 긍정적인 통찰에 다다랐다는 것을 방증하며, 바로 이로부터 불교의 사상이 전개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도 그러한데요, 구조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전체로부터 부분을 확정해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발상은 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문제였고, 소크라테스가 몇 번이나 제기한 바 있습니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는 ‘우리는 철자를 기억할 때 어떻게 기억하는가?’라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던집니다.

이것은 대화편에서 여섯, 일곱 번 나온 질문입니다. 철자의 본보기 같은 것이 있어서 그로부터 나오는 문자의 조합의 패턴과 변화를 우선 기억한다는 표음문자의 문제. 표음문자는 BOU라든가 GA와 같이 유한한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서 다양한 말을 만들어냅니다. 예를 들어 자음의 발명을 생각해보면, BA라든가 MA와 같이 자음 한 문자만으로는 발음할 수 없습니다. 즉 모음과 결합해서 복합체와 그 변이로부터 부분이 확정됩니다.

실제로 인간은 그런 식으로 인지하고 있고 색깔과 소리도 마찬가지로 식별합니다. 애당초 무언가의 성질이나 ‘정도’라는 것은 이를테면 ‘뜨겁다’에 대한 ‘차갑다’와 같이 반대되는 것들 사이에서 결정되고, 무언가(기체(基體), 다르민)에는 복수 종의 ‘정도’, 즉 성질(다르마)이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사물들끼리의 관계 또한 ‘멀다’라든가 ‘가깝다’와 같은 이항대립 사이에서의 ‘정도’로 인지됩니다. 수나 양화는 이 ‘정도’를 엄밀히 한 것인데요,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그러한 다양한 ‘정도’(성질, 다르마) 속에 살고 있습니다. 본능적으로 우리는 다양한 다르마의 상의성의 세계를 떠다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레시피를 따라 정량을 맞추지 않아도 경험적으로 요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인간은 세계의 다양성을 다양한 이항 대립적인 특징과 그것들의 여러 조합을 통해 인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이 세계를 신화적으로 이야기할 때에도 그러하며, 신화 속에서는 그러한 이항 대립성이 단일하지 않고 복수로 중첩되고 그리고 그 조합이 변이해감으로써 특정한 시점(始點)으로 환원되지 않는 세계의 구조가 이야기됩니다. 신화의 세계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대비되어 나옵니다. 그다음 제3렌마처럼 양쪽의 성질을 가진 양성구유자가 등장하고, 나아가 그와 정반대인 무성(無性)의 존재가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변이가 전개됩니다. 복수의 이항대립이 조합됨으로써 그러한 조작이 가능하게 되는데요,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논하겠습니다.

이러한 조작을 통해 무엇이 일어나는가 하면, 앞서도 서술했듯이 바텀업이 아니라 전체로부터 부분이 추출되고 부분과 부분의 관계와 그 변이가 의미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종합적인 사고와 해석(또는 분석)적인 사고가 과학에도 있고요, 그래서 근대 이후 과학이 발전해 간 것이지요. 물론 지각과 신화와 언어 또한 해석적(분석적)입니다. 종합적이자 해석적인 이 사고는 유징(有徵)・무징(無徵)의 유한한 요소의 조합을 통해 무한한 다양성을 만들어낸다는 바로 그러한 사고방식입니다.

사이언스가 전개됨에 따라 전체로부터 부분을 사고하는 방법은 더욱 정교해집니다. ‘언어’와 ‘인지’ 또한 마찬가지고요. 이를테면 색깔은 본래 삼원색(빨강, 녹색, 파랑)인데, 그 조합과 뉘앙스에 따라 온갖 색상이 무한대로 가능합니다. 그리고 ‘신화적 사고’ 또한 세계를 그런 식으로 변별합니다. 그러나 본래 전체로부터 부분으로 나아가는 사고는 단선적인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이기에, 지식이 늘어나면 도리어 인류는 그러한 음미의 태도를 놓치기 쉽습니다.

플라톤, 소크라테스가 가장 비판하는 것이 ‘억견(doxa、δόξα)’인데요, 억견은 근거가 박약한 지식, 즉 ‘생각 없음’을 의미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억견 아닌 지식이 인간의 올바른 앎이라고 말합니다. 이를테면 둘이서 대화를 하는데 벽에 부딪혀서 어느 쪽도 답을 낼 수 없는 난문(아포리아)에 맞닥뜨렸다고 합시다. 소크라테스는 그것이 억견보다 훨씬 낫다고 봅니다. 실제로 그렇게 나온 난문이 몇 세기에 걸쳐서 계속해서 고찰됩니다. 조금 이야기가 섞였는데요, 다시 『중론』으로 되돌아갑니다.

 

【1-4】

 

작용(일)은 연(원인)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필요로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연(원인)은 작용(일)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필요로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작용과 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또한 ‘의타기성(依他起性)’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5】를 봅시다.

 

이것들의 연(A)에 의해 결과(B)가 생기므로, 이것들은 [결과 B의] 연(원인 A)이라고 한다. 그러나 결과가 생기지 않는 한, 그것들은 연이 아니다.

 

이 또한 【1-4】와 같은 패턴입니다. 결과가 있는 곳에서부터 역산해서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 원인이 있으므로 결과가 나온다는 가정을 먼저 논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루프이지요. 【1-5】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를테면 A라는 기점에서 시작하는 바텀업으로는 사고할 수 없음을 줄곧 말하고 있습니다.

원인이 결과에 앞서며 인과 관계가 일방향이라는 것은 얼핏 맞는 말 같습니다만, 실제로는 과학에서도 예를 들어 뉴턴의 운동 제2법칙은 ‘힘=가속도×질량’이라고 정의하는데요, ‘힘’과 ‘가속도×질량’은 자연기술의 수식으로 같다는 것이고 어느 한쪽이 원인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기점이 되는 원인이 있다’라는 막연한 전제를 의심하고 상의성(相依性)의 구조로서 독해를 시도하려는 귀류법적 이해를 시도합니다.

 

 

【유식(唯識)에서의 식(識)의 구조에서 루프】

 

그리고 【1-8】입니다.

 

이미 존재하는 다르마는 의지할 거처로서의 연을 가지고 있지 않다(無所緣)고 설파되고 있는데, 만약 의지할 거처로서의 연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소연연(所緣緣)이 성립될 것인가?

 

이것도 무슨 말인가 싶지만, ‘현상(사물의 양상)에서부터 원인으로’라는 루프가 아니라, 유식(唯識)으로 말하자면 상분(相分)과 견분(見分)이라는 식(識)의 구조 속에서 대상 세계의 표현(상분)으로 나타나는 것에 관한 일반적인 이야기입니다. 이른바 신소연연(新所緣緣)[편집자주: 소연연 중에서 인식대상으로서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과 ‘견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점차 나타나는 것이 소소연연(疎所緣緣)[편집자주: 소연연 중에서 인식대상으로서 간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림 1-2를 봐주세요. 식(識)의 구조를 유식(唯識)에서는 이렇게 사고하는데요, 식(識) 속에는 주체와 대상에 해당하는 것(견분과 상분)이 있어서 현상의 대상적인 나타남(상분)에 주체(견분) 측의 느낌이 이런 식으로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통합되지 않습니다. 이것들의 상호작용이 중첩되면서, ‘이것은 확실한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이는 대상 하나하나에 다양한 접근이 있어서 경합적으로 대상에 접근하다 보면 대상이 리얼해진다는 모델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관계를 조감하는 시선에서 자각하는 ‘자증분(自證分)’이 있어서 식(識)이 성립하게 됩니다(그림 1-2).

그림 1-2.

불교라는 식(識)의 구조가 대체로 이러한데요, 이 유식(唯識)의 논의에서는 견분, 상분, 자증분이 삼항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나아가 삼항의 전체가 또 다른 식(識)의 상분에 포함돼 있습니다. 유식에서는 그리하여 공상종자(共相種子)[편집자주: 복수의 중생의 견분에 걸쳐서 인식대상이 되며 또 각각의 행위의 원인이 되는 것]와 같이 스스로 상호 포섭적이며 ‘일즉다(一卽多)’의 화엄으로 발전해갑니다. 단독의 식(識) 내부에서는 자신의 확신과 집착이 증강하도록 정념이 증대할 수 있지만, 그 또한 또 다른 식(識)의 상분에 포함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정념이 전체적으로 제각기 흩어지는 모델을 불교에서는 사고하고 있고, 거기까지 예기하는 것이 불교라고 생각합니다.

십이지연기와 단독의 식(識)뿐이면 쇼트서킷 루프처럼 되기 때문에, ‘하나와 여럿’이라는 이항대립에서도 테트랄레마가 성립한다는 것을 가능한 한 빨리 내놓아야겠지요. 그렇게 점점 상호 포섭적으로 되어가면 이번에는 ‘일즉다(一卽多)’의 세계가 되어서 개물끼리 서로 아무런 장애 없이 조화를 이루는 느낌의 세계관을 이룹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또한 ‘화엄’이겠지요. 물론 『중론』에서는 이미 부동불이(不同不異)의 구조를 이야기하고, 차이의 문제에 대해서도 고찰하고 있으며, 폐쇄적인 순환의 세계관이 아닌 그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예를 들어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오래된 게송(偈頌)조차 ‘허물을 벗어버리라’와 같은 구절들로 넘쳐납니다. 처음부터 불교는 화엄을 사고했습니다. 화엄에서 ‘하나’는 원래 ‘식(識)’이므로 대상적이고 물질적인 것의 상(相)(상분)도 주체(견분)도 그 안에 들어있고, 밀교란 거기까지 부활시켜서 식대(識大)와 오대(五大)[만물에 존재하는 물질의 구성요소이자 생성하는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의 상호 포섭 관계를 리얼하게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불교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이자면, 오대(五大)란 지수풍화(地水風火)의 사대(四大)에 공대(空大)를 더한 것인데요, 이 사대는 그리스에서 엠페도클레스가 말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예전 전국시대에 일본으로 포교하러 온 예수회 선교사들은 기독교 교리의 소박함으로 인해 고도로 발달한 불교의 세계관에 익숙한 일본인들에게 바보 취급을 당했더랬죠. 일본인이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사대원소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선교사들은 경악했다고 하지요(웃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형이상학』에서 “엠페도클레스는 불과 물, 땅과 바람 등 반대되는 것(이항대립)을 여러 개 가지고서 그것들 사이의 ‘정도’나 성질의 변화를 생각하지만, 그것들을 기점으로서의 ‘원소’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이상하다”라고 비판합니다. 그것들은 실제로 건조함(불과 흙을 겸함), 습함(흙과 물을 겸함), 차가움(물과 바람을 겸함), 뜨거움(물과 바람을 겸함)이라는 변화하는 구체적인 성질로서 다뤄져야 하며 이는 순환적・구조적으로 전체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그림 6-1).

그림 6-1. 엠페도클레스의 사대원소 모델

요컨대 ‘현상의 나타남으로부터 그 원인을 찾아내서 주어화하는 루프’의 구조 분석에서부터 ‘주객 관계의 루프’라는 일반적인 논의로 향하며 다양한 상의성을 인정하는 존재론으로 나아가는 것이 【1-8】입니다. 이 세계에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호작용의 구조뿐이며 일방적으로 무언가가 원인이 되어서 상황이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한 번 더 말해둡니다. 인지의 주체도 대상도 단독으로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말이죠, 【1-10】은 정말로 대단합니다.

 

자성(自性)이 없는 것에는 유성(有性)이 없다. 그러므로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연기 그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연기의 어떤 항을 기점 삼아 바텀업 하는 것이 아닌 관계’를 설파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연기임을 알고, 그렇지 않으면 논리가 어그러진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나가르주나의 통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1-11】을 봅시다.

 

온갖 연의 각자 속에도, 온갖 연이 모두 합쳐진 속에도 결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온갖 연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어찌 그것들의 연에 의해 생기는 일이 있겠는가?

 

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원래 ‘공(空)’도 ‘상의성(相依性)’도 ‘결과’가 아닙니다. 연기 각각의 항에 의해 구성되는 ‘총화’도 아닙니다. 그러한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위의 말이 나오는 것이지요.

 

 

【이항대립이 아닌, 전체로부터 부분의, 야생의 사고, 구조적・신화적 사고】

 

이번 우리 대회에서 ‘이항대립’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으므로 먼저 이항대립에 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전체로부터 부분을 사고하는 복합적인 사고방식이나 신화가 어떤 식으로 사물을 다루는지를 살펴봅시다. 그림 7의 클라인의 사원군(四元群)을 참조해주세요.

그림 7. 클라인의 사원군. α: 색의 이항대립. β: 모양의 이항대립. γ: α와 β.

이항대립이 있을 때, 예를 들어 흑과 백이 있을 때, 그러한 이항대립에서 흑이든 백이든 한쪽 극으로 문제를 단순화하는 것은 극단적인 사고라고 하지요. 좋지 않습니다. 복잡하고 미묘한 사고는 ‘회색이라는 중간에 있다’라고 하지요. 그렇지만 그 또한 매우 단순한 사고방식으로, 레비스트로스나 야콥슨은 그와 다른 사고방식을 모색하였고 마침내 구조주의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플라톤의 ‘파라디그마(paradigma)’의 발상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동시대의 프랑스가 메카였던 분자생물학의 영향을 받았고, 그에 따라 그는 다양성이 여러 이항대립의 조합과 그 변이를 통해 표현된다는 관점에서 신화를 다뤘습니다.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불에 구운 것은 먹을 수 있다. 불에 굽지 않은 것은 먹을 수 없다’라는 명제가 있다고 하면, 선주민들은 신화 속에서 약삭빠르게 ‘꿀’은 굽지 않아도 먹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 ‘담배’는 굽지만 먹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이항대립의 제3항에 적합한 것을 찾아내고자 합니다. 제3항을 경유함으로써 신화는 다종다양한 변이를 만들어내면서 복잡하게 짜여갑니다.

다양한 이항대립과 ‘정도’(성질, 다르마)가 중첩되는 그 관계가 변화무쌍한 세계를 만들어내고 우리는 그 세계를 떠다니고 있다는 것은 앞서 서술한 바입니다. 이러한 이항대립의 설정은 처음에는 자의적이지만 그것들의 조합은 더욱더 그 관계를 변화시킴으로써 복잡미묘하고 다양한 세계를 기술해갑니다. 표음문자의 알파벳이 다양한 조합을 통해 어떤 단어라도 기술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신화도 세계를 복잡하게 분절하고 까다로운 구조를 그리기 때문에,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과 같은 방대한 저술이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레비스르로스는 초기에 이른바 ‘카리에라족(Kariera族) 유형 혼인규정’처럼 세계 여러 부족의 혼인 법칙을 분석했을 때에 그것이 수학적으로 클라인의 사원군을 모델로 삼을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클라인의 사원군은 가장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운 모델입니다. 예를 들어 원과 네모라는 이항대립이 있고, 흑과 백이라는 이항대립이 있다고 치면, 그것들을 곱해봅니다. 그러면 흑을 축으로 하는 경우 흑은 네모와도 원과도 조합될 수 있습니다. 네모를 축으로 했을 때 네모는 흑과도 백과도 조합될 수 있습니다. 이항대립을 다른 이항대립과 맞붙여서 얽을 때, 이를테면 흑이면서 네모가 되는 것인데, 하나의 항이 반대 측의 이항대립을 초월하기 위한 ‘매개’가 될 수 있습니다(그림 7 참조).

신화의 사고란 바로 그런 식이어서 ‘불에 구운 것’과 ‘불에 굽지 않은 것’과 같은 이항대립에 대해 제3항으로서 ‘꿀’이 나오게 되면 ‘꿀’에 대립하는 ‘담배’가 등장하게끔 전개됩니다. ‘꿀’이나 ‘담배’와 같은 것이 제3항의 역할을 맡아서 순환하게 될 때, 이 세상에 넘쳐나는 다양한 성질(다르마)이 최고도로 복잡하게 그려집니다. 실은 세계의 인지 자체가 실제로 그렇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현재 인간 뇌의 신경망을 본뜬 컴퓨터에서 딥러닝을 실행하고 있는데요, 그것 또한 복수의 요소가 세로로 늘어선 ‘입력층’과 ‘출력층’ 사이에 ‘숨은 층’이라는 것이 있고 그에 노드(결절점)라고 불리는 것에 입력된 여러 정보가 묶이는데요, 그것은 어떤 성질을 (1,0)의 변이로 편성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출력층’에 나오는 것은 (1,0)으로 특징지어진 복수의 성질의 조합입니다.

예를 들어 자음의 표기를 발명하기 전에 NA와 NO처럼 자음과 모음이 합쳐진 복수의 음에서 출발하지만, 시작의 느낌이 비슷한 다른 소리가 몇 가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계에서 이항대립과 그 사이에 있는 ‘정도’, 즉 성질(다르마)은 겹쳐 있으며 상의성 속에서 무한합니다.

이러한 무시무종의 세계 속에서 테트랄레마가 성립합니다. ‘A이자 非A’라는 것은 클라인의 사원군 모델에서 각각의 항이 ‘제3렌마’가 된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구체적이고 감성적인 세계입니다. 그리고 이 제3렌마의 위치를 일순시키는 구조를 신화는 묘사하고 있으며,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매개’(제3렌마)의 직무는 한 바퀴 순환해서 ‘축약(縮約)’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바퀴 순환했을 때 기계론이나 소박 목적론이 문제 삼는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원인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가 됩니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변이가 제4렌마입니다.

이처럼 원인을 어디로도 환원하지 않는 모델, 말하자면 순환・축약 모델을 신화는 가지고 있으며, 또 연기의 통찰에서 인생의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인지를 묻는 가운데 제4렌마를 발견해낸 것이 붓다의 직관입니다. 나아가 연기가 구조적이라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바텀업의 사고를 철저하게 귀류법을 통해 논파한 것이 나가르주나가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그는 붓다의 깨달음의 핵심을 직각(直覺)하고 다시 사고한 것이 아닐까요?

나가르주나가 등장하기 전까지 불교는 다양한 번뇌와 정념이 증대하는 국면, 즉 정념의 심리학을 정밀하게 탐구했고, 그 자체로 엄청나게 거대한 교리체계를 완성했습니다. 그런데 나가르주나는 여기서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상의성(相依性)이라든가 무자성(無自性)으로서 공(空)이라든가 불교의 한복판을 차례차례 선명하게 척출해갑니다.

유식(唯識)은 유식으로서 주객의 상호작용 속에서 화엄과도 연결되는 세계관을 전개합니다. 그리하여 자기원인은커녕 무수한 식(識) 전체의 상의성 속에서의 존재 양상과 문자 그대로 만법(萬法)(온갖 다르마)의 무한한 다양성과 복잡성을 구현하며 현실성을 갖추게 됩니다. 화엄의 세계가 현실적으로 긍정되는 것이지요.

라이프니츠는 최선율(最善律)의 사상에서 화엄과 가까운 세계관을 직관했는데, ‘신에 의한 최선의 세계 선택’이라든지 ‘예정조화’와 같은 표현 때문에 얼빠진 느낌이 듭니다. 그렇지만 하늘의 섭리를 우리가 믿어야 하지 않는가 하고 최근 점점 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신앙이 나옵니다. 개(個)를 초월한 거대한 힘에 이끌리는 다원적인 세계가 있고, 그 세계를 통해 우리가 존재한다는 믿음. 정토진종(淨土眞宗)은 이 세계를 ‘구제’의 맥락에서 이야기합니다. 존재론 혹은 세계관으로서 불교는 과학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 형태로 매우 일찍부터 본질적이고 깊은 직관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완전히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

 

 

 

 

 

 

Posted by Sarantoya
,

시미즈 다카시의 최신서 『空の時代の『中論』について[공의 시대에서 『중론』을 말하다]』를 번역해 둔다. 이 책은 시미즈가 2023년 12월, 2024년 6월과 8월 세 차례에 걸쳐 모처에서 합숙으로 진행된 『중론』 강의를 정리한 책이다. 편집부의 사전 설명과 시미즈의 강의록이 담겨있다. 내가 시미지의 불교론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근대과학의 시대 너머에서 ‘불교’라는 형이상학에 대한 그의 현대철학적 이해가 너무나 탁월하기 때문이다. 그의 불교론은 우리가 불교를 알고 싶은 것은 진리에 다다르기 위한 것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제1회 대회

 

자료편 Le chemin de l’accumlation: 나가르주나를 만나기 위한 준비(IAAB 편집부)

 

【강사 및 텍스트】

 

시미즈 다카시(清水高志)

동양대학 교수. 프랑스 현대철학 전공. 대표적인 저서로는 『공해론/불교론』(이문사, 2023년), 『실재로의 쇄도』(수성사, 2017년), 『미셸 세르 보편학에서 행위자 네트워크까지』(백수사, 2013년)가 있고, 공저로는 『오늘날의 애니미즘』(오쿠노 카츠미와 공저, 2021년), 『탈근대 선언』(2018년), 역서로는 미셸 세르의 『작가, 학자, 철학자는 세계를 여행한다』(수성사, 2016년) 등이 있다.

 

기초 텍스트 『중론』 귀경서(歸敬序), 제1장, 제2장. ※이 책의 『중론』 텍스트는 저자 자신이 현대일본어를 통해 의미를 파악한 번역이다.

부교재 ① 시미즈 다카시 『공해론/불교론』(이문사, 2013년)

부교재 ②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 1912~1999, 일본의 인도철학자이자 불교학자)의 저서 『용수(龍樹)』에 수록된 『중론』(고단샤 학술문고, 2002년, 인류의 지적 유산 13 『나가르주나』가 대본(臺本)). 『중론』 텍스트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예를 들어 최근에는 카츠라 쇼류(桂紹隆)・고지마 키요타카(五島清隆)가 번역한 『용수의 『근본중송(根本中頌)』을 읽다』(춘추사, 2016년) 등), 나카무라 하지메의 번역이 원어의 과도한 해석을 지양하고 축어역(逐語譯)을 하였기에 이를 적절히 참조하였다. 이 책 127쪽에서 『중론』 제2장은 서양 학자가 생각하는 운동부정이 아니라 ‘법유(法有)’를 부정한 것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지혜의 바다에서 헤매지 않기 위한 개략 지도】

 

제1회 대회는 ‘사구분별(四句分別)’을 중심으로 하는데, 필연적인 전개로서 다음의 흐름으로 강의가 진행된다. 맥락이 이해되지 않을 때는 여기로 다시 돌아오도록 한다.

‘사구분별’이란 불교와 인도철학의 특유한 논리이며 서양에서는 ①‘A이다’라는 명제에 대해 ②‘非A이다’라는 부정명제만을 상정하지만, ③‘A이자 非A’ ④‘A도 아니고 非A도 아니다’라는 네 개의 명제를 열거한다. 이 강의에서는 이것들을 순서대로 ‘제1렌마’, ‘제2렌마’, ‘제3렌마’, ‘제4렌마’라고 부르며 불교사상에 있어서 그것들의 의의를 고찰한다.

①용수의 연기(緣起)와 이이변(離二邊)의 중도(中道)〔사구분별(테트랄레마)・팔불(八不)(불생불멸(不生不滅)・불상부단(不常不斷)・부동불이(不同不異)・불래불거(不來不去))〕. 연기는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어디에도 없다’라는 제4렌마를 내놓는 것이며, 이이변의 중도는 ‘돌고 돌아 원인이 어디에도 귀착되지 않는 구조’로서 이노우에 엔료(井上円了, 1858~1919, 일본의 철학자이자 교육자)(저자의 연구대상의 한 사람)의 표현으로는 ‘순화(循化)’를 말한다.

②팔불=『중론』에 있어서 테트랄레마의 제4렌마가 긍정되는 예는 실은 네 종류밖에 없다. ‘불상부단’(항상 있지도 않고 단멸(斷滅)하지도 않는다), ‘불래불거’(제2장에서 논하겠지만, ‘가는 자’가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불생불멸’(생기는 것도 멸하는 것도 아니다), ‘부동불이’(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의 네 가지이며, 한 명제에 이를테면 ‘생’과 ‘멸’이 부정되듯이 두 가지 사항이 부정되므로 네 가지 명제를 ‘팔불’이라고 한다. ‘팔불’은 『중론』 논의의 최대 수수께끼이며 핵심 개념이므로 요주의!

③상의성(相依性)=일(一)과 타(他)의 연기(緣起)(吉藏)

④상의성=주객 상호작용의 유식(唯識), ‘A가 있기에 非A가 있고, 非A가 있기에 A가 있다’와 같이 돌고 도는 회로의 관계를 ‘상의성’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애당초 회로의 상태 이전에 ‘A’, ‘非A’가 미리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의 표현이다.

⑤‘주객 상호작용’ב하나와 여럿의 겹겹이 무진장한 법계 연기’의 화엄(華嚴). 이것은 이노우에 엔료의 표현으로는 ‘상합(相合)’이라고 한다.

⑥‘상응섭입(相應涉入)’의 공해의 밀교. 용수(龍樹)・유식(唯識)・화엄(華嚴)이 담겨있다.

 

그리고 강의는 ‘용수의 사구분별은 무엇을 부정하고자 하는가’라는 것에서 시작해 현대철학과의 연관을 거쳐 다음의 전제를 논한다.

󰊈-1 서양 근대 초기의 단순한 ‘근대적 기계론’이나 서양 중세의 ‘소박한 목적론’을 라이프니츠가 부정한 것과 사구분별의 부정대상은 겹친다. 라이프니츠는 바텀업(Bottom-up)의 기계론이 아니라 전체로부터 부분을 사고하는 사고법이었다.

󰊈-2 제3렌마에서부터 제4렌마까지의 흐름은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에서부터 『신화학』에서 말하는 내용과 상통한다.

󰊈-3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플라톤(거기에 등장하는 이오니아의 자연 철학자 등 사대원소를 설파하는 철학자들)에 원류가 있다. 더 거슬러 가면 고대 인도의 우따라카 아루니(Uddālaka Āruṇi)의 ‘삼분결합설(三分結合說)’에 이른다. 이것은 ‘야생의 사고’라고 부를 만하다. 마찬가지로 라이프니츠는 플라톤의 ‘상기설(想起說)’ ‘혼의 불멸’을 의식해서 단자론을 말하고 있다.

 

【사전 확인 사항 1 유식삼성설(唯識三性說)과 시미즈의 논의】

 

바스반두(Vasubandhu, 5세기 인도 간다라 출신의 불교 승려이자 철학자, 한자명은 世親)의 삼자성설(三自性說)은 예를 들어,

①편계소집(遍計所執)(自)性……인연에 의해 분별된 사물.

②의타기(依他起)(自)性……인연에서 생긴 분별.

③원성실(円成實)(自)性……의타기(자)성이 편계소집(자)성을 멀리하는 것.

〔사이구사 미츠요시(三枝充悳)・요코야마 코우이츠(横山紘一), 『세친(世親)』(고단샤 학술문고, 2004, 인류의 지적 유산 14 『나가르주나』 1983년이 대본(臺本)〕으로 설명된다.

시미즈의 논의에서는 ①이 소박 목적론, ②가 무한소급・근대적 기계론(타인(他因)의 도미노적 연쇄), ③이 구조주의의 신화론적 세계에 대응한다는 참신한 설이 제기된다. 특히 ①과 ②를 명확히 부정하고 ③에 다다르는 것이다. 나가르주나 이전의 불교는 ①과 ②의 부정이 이론적으로 철저하지 않았으며 원자론적인 바텀업적 사고에 빠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시미즈의 강의에서 원자론에 대치되는 것이 단자론이다. 종래 삼성설(三性說)을 둘러싸고는 중관파(中觀派)와 유식파(唯識派)가 싸웠고, 현대에서는 나가오 가진(長尾雅人)과 우에다 요시후미(上田義文)의 논쟁이 있는데, 시미즈의 주장은 매우 독특하며 종래의 이해를 쇄신할 가능성이 있기에 미리 일러둔다. 삼성설의 어구설명에서 사이구사&요코야마의 설명은 미륵(弥勒)・무착(無著)의 삼성설을 열거하고 있으며 그 내용을 고찰할 수 있으므로 참고하는 데에 사용했다.

그리고 ③은 플라톤의 『메논』에서의 ‘상기설(想起)’, 『파이돈』에서의 ‘혼의 불사(不死)’,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과 연관해서 이해한다.

 

【사진 확인 사항 2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

 

무명(無名)・행(行)・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

상세한 어의는 생략하지만, 시미즈의 논의에서 이 십이지가 순환해서 (일(一)과 타(他)의 십일(十一)이 ‘A가 있을 때 非A가 있다’는 연기 관계에서) 집착과 정념의 증대를 불러오고 괴로움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것은 노사(老死)로부터 다시 무명(武名)으로 돌아오는 순환 구조이기도 하다. 이 정념을 증대하는 것을 순관(順觀), ‘A가 없다면 非A가 없다’라고 역회하는 것을 역관(逆觀)[還滅門]이라고 한다.

시미즈의 논의에서는 십이지연기와 연기가 완전히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미혹(순관)이 순환해서 무시무종이며 깨달음(환멸문)도 순환해서 무시무종임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도 참신하다.

 

【사전 확인 사항 3 플라톤의 저작 연대 구분 및 저작 순서】

 

★은 강의・좌담에 등장한 저작.

초기저작 소크라테스적 ‘대화편’ (30세경~40세/45세경)

『에우튀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카르미데스』 『라케스』 『루시스』 『에우튀데모스』 『프로타고라스』 『히피아스(대)』 『히피아스(소)』 등

『고르기아스』 ★『메논』 『크라튀로스』

중기저작 이데아론적 ‘대화편’ (40세/45세경~55세경)

『향연』 ★『파이돈』 『국가』 『파이도로스』

후기저작 (55세~80세)

★『파르메니데스』 『테아이테토스』

[60세~65세경 시케리아사건에 의해 저작 중단]

★『소피스테스』 ★『폴리티코스(정치가)』 ★『티마이오스』 『크리티아스』 『필레보스』 『법률』 『에피노미스(법률후편)』

 

【사전 확인 사항 4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원인론(四原因論)】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이번 테마의 전인 질문을 풀어가는 데에서 불교도에게는 귀에 익숙하지 않지만 철학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원인(四原因)은 서양적인 사고의 기초를 이루고 있으므로 확인해 둔다.

질료인(質料因, material) 물질적 원인, 재료.

형상인(形相因, formal) 본질, 정의.

동력인(動力因, efficient) 운동 변화의 원인.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중시된다.

목적인(目的因, final) 존재하며 운동 변화하는 목적. 고대에서 중세의 소박 목적론적 세계관에서 중시된다.

 

 


 

성가진 ‘소박 목적론’ ‘근대기계론’ 개설, 『중론』 제1장・제2장 강의

 

2023년 12월 16일 15:00~18:00

테마: 나가르주나의 『중론』을 펴 들고 ‘사구분별’과 ‘팔불’에 도전하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생사의 문제를 사고하다】

 

여러분 처음 뵙겠습니다, 시미즈 다카시라고 합니다. 나는 동양대학의 교수인데요, 현대철학을 계속 연구해 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실은 어릴 때부터 불교에 흥미가 있었고 열한 살, 열두 살 무렵부터는 불교에 강하게 이끌렸습니다. 이 책(『공해론/불교론』)에도 썼지만 인도 문화를 매우 좋아해서 인도의 2대 서사시 중 하나인 『라마야나(라마 왕의 일대기)』를 소학교 6학년 때에 아베 도모지(阿部知二, 1903~1973, 일본의 소설가)의 번역본으로 읽었고, 외우고 다닐 정도로 푹 빠졌습니다. 라마 왕자의 가문인 익슈바쿠 왕조의 왕 이름을 다 말할 수 있을 만큼 좋아했으며 꿈에 나타날 정도였습니다.

또 동시에 불교적・철학적으로 세계의 구조를 해명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때부터 주욱 있었습니다. 그것이 나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라고 그 무렵부터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경제학자이면서 늘 경제학적으로 사고하는 사람, 의학자이면서 늘 의학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 있듯이, 나는 이를테면 행복해지고자 한다면 행복관을 불교에 근거해야 하고 세계관 또한 불교적・철학적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괴짜’로 통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해서(웃음), 조금씩 궤도를 수정하면서 점차 독일 철학에 다가갔고 쇼펜하우어부터 읽어갔습니다. 나는 절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서양철학에 기대지 않으면 ‘이 사람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좀 이상한 사람 아니야?’라고 인식될 수도 있으며 누구도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우여곡절 끝에 스무 살 무렵부터 미셸 세르라는 남프랑스 출신의 현대철학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박람강기(博覽强記)의 사람으로 라이프니츠 철학 연구에서 시작해서 문학과 철학과 자연과학을 뒤섞어 연구한 사람입니다. 나는 그 사람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연구자가 되고자 스물한 살 무렵 혼자서 그의 원서를 읽어나갔습니다. 그러나 미셸 세르에 관한 연구는 비주류에 속했기 때문에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겠거니 싶었지만 어쩐 일인지 연구자로서 나는 끈질기게 살아남았습니다(웃음). 그럭저럭 이름도 알리고 여러 권의 저서도 출간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21세기에 출현한 새로운 철학에 주목하고 그러한 흐름이 나의 연구 대상인 미셸 세르의 제자 격인 사람들로부터 발전해왔다고 생각했기에, 문화인류학 및 철학의 최신동향을 흡수해서 일본인으로서 독창적인 철학을 만들어보고자 했습니다. 대체로 인류학이라고 하면 1960년대 ‘구조주의’를 창안한 레비스트로스의 학문으로 알고 있는데요, 인류학은 또한 서양 중심의 사회관을 전복하는 가치관을 선구적으로 제안해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류학자들과 공동연구를 몇 년간 해왔고, 릿쿄대학의 오쿠노 카츠미(奥野克巳) 선생을 비롯한 여러 연구자와 함께했습니다. 불교 이야기는 아직입니다….

그 연구에서 밝혀진 것은 20세기 학문과 달리 21세기 학문에서 세계관 변화의 두드러진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예전에는 ‘문화상대주의’라든가 ‘다문화주의’가 상식적이며 보편적인 가치관이었지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가 그러했으며 헤이세이(平成: 1989년부터 2019년까지의 일본의 연호)의 사회상이 그러했습니다. 그 시대에는 누구라도 ‘사람은 다 제각각이지’라든가 ‘사고방식이 사람마다 다르니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기본적인 태도였습니다. 어떤 유일하고 절대적인 가치관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1세기에 이르러 기류가 묘하게 달라졌습니다. 가치관은 각각 미묘하게 다르더라도, 예를 들어 중국이라 해도 러시아라고 해도 점차 민주화되고 경제적 합리성을 갖춘 사회로 향해간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렇지 않더라. 푸틴이 보고 있는 세계는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아닐까? 또 정보화가 진행됨에 따라 오히려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세계를 보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인류학은 문화상대주의의 입장에 서는 순간 그 자체로 끝나버리는 학문입니다. 그래서 인류학은 고군분투 끝에 새로운 이론을 제안합니다. 그것은 바로 ‘문화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세계 자체가 다양한 것’이라는 사고방식입니다. ‘단자연(單自然)’, 즉 단 하나의 객관적인 자연이 아니라, 다양한 것이 각기 다른 것으로서 세계를 보고 있다는 개념이 인류학에서 나옵니다(‘다자연(多自然)’).

인류학적으로 예를 들어 아마존에서는 재규어가 보는 세계와 인간이 보는 세계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며, 인류학은 이 아마존의 사고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다자연적인 상황에서 문화에 대한 진정한 자각이 이뤄지며, 오히려 ‘객관적인 단일한 자연이 있다’라는 서양적인 사고방식은 예외적이라는 것이 점차 명확해지고 있습니다. 다자연적이며 멀티퍼스펙티브한 세계라는 것이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단자론, 즉 라이프니츠의 다원론 철학에 얽힌 확고한 철학으로서 만들어내는 작업을 2017년경에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작업을 발표했을 때 가장 반응이 좋았던 곳이 실은 불교계였습니다.

불교계에서는 금세기에 인류학이나 철학에서 제출한 다자연론이 ‘축생도(畜生道)나 아귀도(餓鬼道)와 같은 다양한 것이 있다’라든가 ‘게다가 각각이 보는 세계는 다르다’라는 우리의 세계관과 너무나 흡사하다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고 하는데요, 귀신은 산 자와 전혀 다른 것을 보며, 산 자에게 영락(瓔珞)으로 보이는 것을 귀신은 피고름으로 보인다고 말합니다. 또한, 불교에서는 기세계(器世界), 기(器)의 세계를 말합니다. 다중의 다양한 세계가 있어서 붓다의 모공 속에도 불세계(佛世界)가 있고 그러한 복수의 세계가 마치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겹겹이 쌓여있다는, 이 불교의 세계관을 『공해론/불교론』이라는 책에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제 불교로 돌아왔네요….

그리하여 오랜 시간 도겐(道元)을 읽은 때가 있었는데요, 나는 불교에 끌린 처음부터 불교란 전적으로 이치에 합당한 ‘이론’이라고 생각했고, 이를테면 ‘불교는 초이론’이라는 사고방식을 완전히 부정해 왔습니다. 물론 불교는 신앙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세계관으로서 굉장히 올바른 것이며, 이 자리에서 그에 대해 다양하게 사고해나가고자 합니다.

이번 테마는 용수(龍樹), 나가르주나의 이야기입니다. 나가르주나의 『중론』이라는 책은 알다시피 전 인류가 아는 한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책의 하나인데요, 이 책을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의 문제를 먼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대승불교설’은 나가르주나(이이변의 중도와 연기)를 이해할 수 없다】

 

불교에 대해 우선 알아둘 것은 ‘대승불교설’이라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와 붓다의 설은 상당한 거리가 있으며 전혀 다르게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고입니다. 유럽의 불교학자는 대개 그렇게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성전이 정해져 있어서 여하간 내용이 바뀌지 않는다고 당연하게 생각하면서도요. 일본에서도 2010년 무렵부터 이러저러한 책이 나오고 ‘상좌부불교 이외는 불교가 아니다’라는 압력이 묘하게 행사되는 듯합니다. 아카데미즘의 사람은 이러한 흐름에 약하고 초기불교부터 대승불교까지 ‘일관되지 않다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리하여 상좌부불교의 사람을 불러냅니다. 동남아시아 승려에게 명상을 배운다거나 하는 그런 일들이 횡행하고 뭔가 이상한 풍조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본에는 쇼토쿠 타이시(聖德太子)라든가 불교를 도입한 맨 처음부터 대승불교를 중시해 온 기나긴 역사가 있으며 그로부터 개화한 농후한 문화가 있습니다. 신란(親鸞, 1173~1263, 정토진종의 개조) 등도 모두 대승불교의 흐름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풍부한 축적을 모두 도외시하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의 흐름 속에서 불교를 일관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어느 한 공회(公會)에서 정통(orthodox)의 판정이 행해지든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티즘이 어떤 견해차로 갈라지든 그때의 결정적인 모멘트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어디서 어떻게 변화했는지, 또 일관된 부분은 어디인지 등등. 이에 반해 불교학자들은 예를 들어 최초 붓다가 깨달은 후에 이야기한 『화엄경』을 제자들이 까무러칠 정도로 알아듣지 못했기에 간단한 곳부터 설하기 시작했다는 고대에 만들어진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곳이 어딘가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별개라고 깨끗이 인정해 버리고 핵심 부분의 일관성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이 점은 불교로서는 사활이 걸린 문제입니다. 나는 이 문제를 파고들고자 합니다.

내 생각에 우선 ‘이이변의 중도’를 살펴봐야 합니다. 요컨대 ‘세계는 항상적이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는다’라는 중도입니다. ‘A도 아니며 非A도 아니다’라는 제4렌마의 사고방식. 이 사고방식은 붓다 이전부터 있었으며 초기 불전의 『상응부(相應部)』에 이미 나타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것은 불교의 근본 명제로 봐야 합니다. 다음으로 ‘연기설’입니다. 이 두 가지 요소는 깊은 차원에서 연결됩니다. 연기설의 해석은 수차례 버전업 해왔고, 대승불교는 붓다의 통찰에 대한 이해의 심화를 통해 개화했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나가르주나는 그 하나의 모멘트, 매우 큰 모멘트이며, 그로부터 대승불교가 나왔습니다. 그와 더불어 유식(唯識)이 있지요. 단번에 화엄이 되었고 밀교가 되었습니다. 그림을 보고 설명을 이어가겠습니다. 먼저 유식에 대한 그림이 있습니다(그림 1-1).

그림 1.1 '식'의 구조

 

【정성적(定性的)인 자연기술(목적론)과 기계론적 세계관(타인론(他因論))】

 

조금 이상한 이야기이지만, 실은 ‘인과(因果)’나 ‘인연(因緣)’이나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있다’라는 관점은 유럽에서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집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어서 그것에 의해 결과가 생긴다’라는 사고를 둘러싸고 실은 몇 단계의 스텝업이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맨 처음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가 자연과학의 사고방식을 만들어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기서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돌’이라는 것은 ‘떨어진다’는 성질을 가지고 있고 ‘떨어지고자 한다’는 목적론이 있습니다. 씨앗이 자라나 ‘나무가 된다’는 목적인을 가지고 있듯이, 돌은 떨어져야 할 곳에 떨어지고 싶어서 떨어진다는 것이지요. 불은 위로 상승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불타오른다는, 이것은 중세 스콜라적 사고방식입니다(그림 2).

그림 2. 정성적인 자연기술(아리스토텔레스)

갈릴레오는 이 사고방식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피사의 사탑에서 철 구슬과 나무 구슬을 동시에 떨어뜨려서 ‘무거운 철 구슬 쪽에 떨어지는 기운이 더 많아서 철 구슬이 더 빨리 떨어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라는 것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근대과학의 여명기에는 그런 짓을 했더랬죠. 이에 반해 중세의 소박 목적론은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그러한 그릇된 취급방식, 즉 ‘미혹’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론』에서 언급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삼성설(三性說)로 말하자면 ‘편계소집성(遍計所執性)’입니다. 실체의 한 나타남이 있다면 그 나타남을 그 자체의 원인으로서 내세우는 것입니다. 불 자체가 불이 이렇게 되는 원인이고, 그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고방식(미혹①)입니다. 그림 2를 봅시다.

이 그림은 정성적인 성질에 주목해서 그 성질이 점점 성장해 간다는 발상이며, 옛날에는 이를 두고 자연기술(自然記述)을 했더랍니다.

그런데 근대에 이르게 되면 원인이 자기 자신은 이상하지 않으냐며, 원인은 다른 데 있다는 기계론적 세계관이 대두됩니다(그림 3). 이것은 불교식(삼성설)으로 말하자면 ‘의타기성(依他起性)’입니다. ‘타(他)’에 ‘의존해서’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이를 통해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미혹②).

그림 3. 근대초기(데카르트, 홉스)

이것은 언뜻 보면 매우 올바른 사이언스의 사고방식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연과학이 실제로 어떻게 진행해 왔는지를 보면 기계론적 세계관은 저 시기(근대 초기)에 한정됩니다. 근대 초기의 과학 및 기술은 예를 들어 기계라고 하면 톱니바퀴가 어떤 힘을 전달해 준다거나 도르래나 물레방아가 어떤 움직임을 전달해준다거나 주로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아무래도 어떤 운동이 있고 그것이 점점 확장해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만을 다루게 됩니다. 근대 초기에 홉스도 데카르트도 기계론이었지요. 그들은 이를테면 운동이라고 해도 관성운동 외에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같은 운동이 관성적으로 진전해 가는 과정. 실체로서의 물질의 성질에 대해 데카르트는 ‘연장(延長)’이라고 말합니다. 단지 뻗어 나가는 것만을 간신히 사고할 수 있었으니까요.

 

【라이프니츠의 정량적인 자연기술】

 

그런데 라이프니츠(1646~1716)가 데카르트(1596~1650) 50년 후 등장합니다. 그는 정량적인 자연기술이라는 것을 선대학자보다 깊이 직관했습니다. 단지 성질에 주목한 묘사가 아니라 ‘성질의 변화’를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양’에 착안하는 것이 요긴하다. 즉 ‘정량적인 자연기술’이라는 것을 그는 생각한 것입니다. 양적・대수적으로 기술함으로써 자연의 미묘한 변화의 모멘트를 포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물질의 성질을 가속도로 포착하고자 한다면, 등속이 아닌 가속으로 나아가는 것에서, 수직선 위를 똑바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미분의 사고법을 사용해서 속도가 곡선을 그리며 변화해 가는 부분의 접점을 수리적으로 기술해 갑니다.

라이프니츠는 양적인 세계관을 생각한 것인데, 그것은 전체로부터 부분을 좁혀가는 것입니다. 사고방식이 뒤집혔습니다. 전체와의 관계로부터 부분이 좁혀져 확정된다는 것이 양화(量化)의 사고방식인데…, 근대 초기의 사람들은 그것을 직관하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대수 또한 전체로부터 부분을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수식에서 x와 a가 있고 그 관계 속에서 부분의 의미가 확정됩니다. 그렇게 자연이 기술됩니다.

그런 식으로 사고했을 때, 그렇다면 이제 사이언스는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말하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만유인력을 발견했다고 합시다. 그때 인력의 원인은 무엇인가 하면 만유인력의 법칙은 거슬러 올라가지 않습니다. 아이작 뉴턴은 어떤 현상에 대해 A라면 B, B라면 A라는 식으로 정의하고, 양적으로 기술하고, 실험적으로 참이라면 그 법칙을 지지하는 형태를 취했습니다. 인과 관계를 거슬러 따지기보다는 양화를 가미한 상호작용이지요.

이 부분을 좀 더 파고 들어봅시다. 요컨대, 정성적인 자연묘사와 정량적인 자연묘사가 있고, 최초의 기계론에서는 소박한 목적론─불은 위로 올라가는 자체 성질을 가지고 있다든가─이 강하게 부정됩니다. (이 이야기는 『중론』과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다시 한번 기계론이 아닌 ‘기준’을 대답하게 도입합니다.

목적론, 기계론이라고 하면 추이나 영향 관계를 하나하나 따지는 것인데, 라이프니츠는 ‘정량적인 자연기술을 가장 다양한 형태로 가능하게 하는 세계를 신이 선택했다’라고 선언해 버립니다. 신에게 떠넘기며, 편향된 세계가 아닌 ‘가장 다양한 기술(記述)을 가능하게 하는 세계가 선택될 수밖에 없다’(최선률(最善律))라는 메타 기준을 가지고 와서 양화 혁명의 진전의 기준을 도입합니다. 기계론적으로 연결하지도 않으며 특정한 정성적인 경향을 끌고 오지도 않습니다. 그러한 목적론적인 기준을 새로운 형태로 도입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신에게 구태여 떠넘기지 않아도 확실히 그러한 세계야말로 실재적인 것임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정말로 대단합니다. 신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도 그러리라는 것은 역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게 되니까요.

그는 이러한 발상에서 ‘예정조화’ 등등의 여러 가지를 말합니다. 서양철학 이야기만을 하고 있군요, 죄송합니다(웃음). 300년도 더 된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서 그런지 말이 쓸데없이 길어지는군요. 목적론을 라이프니츠는 특정한 경향에 그대로 나아가는 존재 방식으로부터 완전히 탈색한 형태로 부활시켜서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전체가 가장 다양성을 가지고 조화롭도록 세계를 할 수 있다고 직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진화론이라든가 그 후의 분자생물학이나 현대과학에서는 라이프니츠의 저 사고를 따릅니다. 기계론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라마르크(1744~1829)의 논의는 소박 목적론이 아닙니다. 기계론과 소박 목적론의 양쪽을 회피하면서 어떻게 다양한 것의 창발과 공존을 생각할 것인가가 저 학문들에서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라이프니츠가 중세의 소박한 목적론도 근대 초기의 기계론도 동시에 회피한, 그 문제의식과 같은 것이 실은 『중론』과 불교에도 있습니다. 정량화라는 개념 없이도 나가르주나는 그것을 완전히 사고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이제 『중론』을 살펴봅시다. 먼저 「귀경서(歸敬序)」입니다.

 

Posted by Sarantoya
,

건강은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그러느라 몸이 나태해졌다. 공부하는 사람의 몸이 아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일상의 몸으로 되돌리기 위해 예열의 독서를 하기로 했다. 읽고 싶어서 샀으나 모셔놓기만 한 책들을 몇 권 일부러 몰아 읽었다. 그 짧은 감상을 남겨놓는다.

 

먼저 속삭이는 사회2(올랜도 파이지스 저, 김남섭 역, 2013[2007], 교양인)이다.

이 책 1권은 몇 년 전에 재밌게 읽어놓고 2권을 이번에 읽었다. 이 책은 영국의 역사학자가 소련의 스탈린 체제하에서 숙청당한 이들의 가족사를 구술 자료를 통해 재구성한 것이다. 알다시피 스탈린은 1928년부터 1953년 사망할 때까지 소련의 독재자로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총살하거나 수용소로 내몰았다. 그 수는 약 2500만 명에 달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수는 1941년에 약 2억 명에 달하는 소련 인구의 8분의 1에 해당한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이 숙청당하고도 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을까? 저자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위 소비에트 정신’,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1871년 파리코뮌의 최후의 정경을 노래한 바리케이드 위에서라는 시에서 정부군의 총살을 기꺼이 받아들인 한 소년의 공동체를 향한 무한한 헌신이, 아이러니하게도 이 공포정치의 시발이 된다.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수립한 소비에트 연방은 적어도 20세기 전반기에는 혁명적 대의라는 도덕률로 작동된 사회다. 그에 따라 소련 당국이 1920년대 후반 집단농장화 작업 가운데 부유한 자작농을 일컫는 쿨라크(kulak)’계급의 적으로 낙인찍어 탄압할 때에도 탄압당하는 측에서조차 자신의 수치스러운 출신 성분을 탓하며 당연한 조치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시작된 공포정치는 엔카베데(NKVD, 내무인민위원회)의 창설과 더불어 1937~38년의 대숙청을 거치며 밀고와 숙청이 인민의 일상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열렬한 볼셰비키였어도 당내 투쟁에서 밀려나거나 비판적인 언사를 조금이라도 내비쳤다가는 수용소로 끌려가 바로 총살당하거나 노역을 견디지 못해 병사하고 그 아이들은 부모를 잃고 보육원으로 보내졌다. 이 책은 바로 그 아이들, 1917년부터 1925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의 생애사를 다루고 있다.

나는 바리케이드 위에서라는 시에 나오는 열세 살 소년이 그 후에 어떻게 살았을지가 궁금했다. 역시나 속삭이는 사회1권에서는 그 놀라운 헌신성이 자세히 묘사된다. 그리고 그 헌신성의 궁극적 증명은 가족의 소멸로 나아간다. 소비에트의 새로운 정체성은 가족과의 단절에서부터 시작되고 가족을 버림으로써 완성된다. 그러나 1938년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2권에서는 그러한 소비에트 정신이 인간 본연의 연대와 정서를 가질 수 없게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1953년 스탈린의 죽음 이후 수용소에서 풀려난 사람들은 서로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내밀한 소통이 불가한 자들이다.

얼마 전 우연히 본 추방이라는 러시아 영화에서 느낀 그 소통 불가능성일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남부러울 것 없는 부부 사이에는 소통이 단절돼 있다. 임신한 아내는 소통할 수 없음에 절망하고 자신의 뱃속 아이가 이 절망 속에서 태어난들 사랑받지 못할 것으로 생각해서 남편에게 남편의 아이가 아니라고 말한다. 남편은 낙태를 시키고 불륜으로 의심되는 남자를 찾아가 응징하려 하지만, 아내는 죽고 그 모든 것은 소통하지 않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된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광과 대비되며 이 부부의 절망이 고요한 우울함 속에서 전개되는데, 이 독특한 우울함이 최근 러시아 영화의 특색 중 하나라고 한다.

이 책의 원제 속삭이는 사람들(The Whisperers)’은 러시아의 용법에서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된다고 한다. 하나는 누가 엿들을까 두려워 소곤거리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당국에 몰래 고자질하는 사람이다. 정치적 이념은 결코 친밀한 소통과 연대를 만들지 못한다는 이 당연한 사실을 소비에트 사회는 무를 수 없는 희생을 통해 깨달은 것이다.

 

 

다음으로 읽은 책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룰루 밀러 저, 정지인 역, 2021[2020], 곰출판)이다.

이 책은 워낙 베스트셀러로 잘 알려져서 오히려 별 기대를 안 했다가 엄청 재밌게 읽었다. ‘, 이래서, 이래야 베스트셀러구나!’ 감탄하면서. 무엇보다 독자를 끌고 가는 힘이 있어서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책의 내용을 전혀 몰랐고, 한국어 제목만 봐서는 내용을 짐작할 수 없었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니 무슨 말이지?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이 뭐 그런 건가? 그런데 원제가 “Why Fish Don’t Exist”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보니 원제에서 fish물고기보다는 어류의 뜻으로 해석되고, 직역하면 어류(라는 범주)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가 된다. 이 책에 따르면, 범주라는 세계의 질서 짓기는 무의미한 세계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의 궁여지책인데, 그것이 고착되는 순간 가장 나쁜 인식으로 작용한다. 여기서 나쁜 인식이란 타자(비인간을 포함해서)와 그 삶에 대한 일방적 가치 판단을 뜻한다. 세계의 의미란 그물망처럼 얽힌 다양한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지 어느 누군가의 범주화로 구획되는 것이 아니라고 이 책은 말한다.

좋은 책은 거창한 진리를 말하기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를 마음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것임을 다시 한번 느낀다.

 

 

그다음으로 읽은 책은 기학(氣學): 19세기 한 조선인의 우주론(최한기 처, 손병욱 역주 및 해제, 2004, 통나무)이다.

제목에서 보다시피 19세기 실학자 최한기(崔漢綺, 1803~1877)1857년 저서 기학의 한글 번역본이다. 내 연구 분야가 아니고 해서 꼼꼼하게 읽지는 않고 훑어 읽었다. 사실 잘 읽히지 않았다. 원서의 한문을 어련히 잘 번역했겠지만, 외국어 번역하는 것 이상으로 오역의 여지가 많은 것이 한문인 데다가 또 한문 그 자체가 다의적인 해석을 허용하는 언어라서 이 책에서 잘 이해되지 않을 때 한글 번역을 그대로 믿고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예전에도 읽다 만 것인데, 이번에는 건성으로라도 끝까지 읽었다. (물론 이렇게 번역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내가 이해한 바로 최한기의 기학에서 ()’는 천지 만물 인간 사회를 관통하는 일종의 생명 에너지의 흐름이다. 최한기는 이를 운화(運化)’로 표현했다. 그 흐름은 항상 어디나 똑같기에, 달리 말해 심기(心氣)는 천기(天氣)와 통하기에, 인간은 천지의 운하를 파악해서 그 운화를 따라 자신과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정신과 물질,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인문과학), 자연과 문화 등의 모든 이원론을 기()로 꿰어내는 최한기의 기일원론(氣一元論)은 솔직히 말해 그 논리가 내게는 분명하지 않았다.

여전히 궁금한 것은 최한기가 하필 기()로써 일원론을 구축하려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다. 천지 만물 인간 사회는 기()가 질()을 만나 각각의 형체를 이룬 것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 대목에서 불교 및 인도철학의 다르민[基體]과 다르마[屬性]가 떠오른다. 이를테면 불, , 바람, 흙 등은 다르민에 해당하고 뜨거운, 차가움, 습함, 건조함 등은 다르마에 해당한다. 불은 뜨겁거나 건조하고, 바람은 뜨겁거나 차갑다. 또 물은 차갑거나 습하고, 흙은 건조하거나 습하다. 이렇듯 불과 바람의 이항대립은 뜨거움이라는 매개로 조정되고, 물과 흙은 습함이라는 매개로 조정된다. (세계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이항대립과 제3항을 통해 그 이항대립을 조정한다는 이 존재의 논리는 오늘날의 애니미즘에서 논한 바다. 그것의 궁극적인 논리가 중론(中論)의 사구분별(四句分別)이며, 이를 통해 세계를 적멸해나가는 것이 대승불교의 지향이라고.) 그렇지만 최학기의 기학에서 기()와 질()은 다르마와 다르민에 대응되지 않는다. 게다가 기학은 불교와 달리 현세적이다. 이 책 뒷부분에 손병욱의 해제에 따르면, 최한기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난세에 맞서 서양의 근대과학과 동양의 유교·불교·도교를 아우르는 새로운 세계관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런데 왜 그것이 기학인 걸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마지막으로 쿠우카이(空海)삼교지귀(三敎指歸)(정천구 역, 2012, 도서출판 씨·아이·)를 읽었다.

쿠우카이(空海, 774~835)는 일본의 밀교 전통의 진언종(眞言宗)을 확립한 승려다. 그런 그가 스물네 살 되던 해인 797년에 쓴 책이 삼교지귀. 여기서 삼교란 유교와 불교와 도교를 가리키고 각각을 대표하는 구모(龜毛) 선생, 허망(虛亡) 은사, 가명(假名) 걸아가 토각공(兎角公)과 그의 조카 질아(蛭牙)를 상대로 자기 교리의 우월성을 설파한다. 서로 문답을 주고받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결국엔 가명 걸아의 불교가 가장 광대하고 심오함을 드러내며 유교와 불교를 아우른다. 우화 형식이라 어렵지 않다.

이 책에는 삼교지교뿐만 아니라 현교(顯敎)와 밀교(密敎)를 비교하는 변현밀이교론(辯顯密二敎論)이 수록되어 있다. 일본 불교가 밀교에 뿌리를 둔 것은 순전히 쿠우카이(空海)의 공이라 할 수 있는데, 그가 당시 일본에서 현교를 밀어내고 밀교를 확립하게 된 근거와 이유를 자세히 알 수 있다.

내가 이해한 바로 불교의 존재론은 최신 인류학으로 말하자면 다자연주의(multi-naturalism) 및 퍼스펙티브주의(perspectivism)에 가깝다. 이를 주창한 브라질의 인류학자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가 인간에게 피인 것이 독수리에게는 술이라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는 똑같은 물을 보더라도 천인은 유리로 된 대지로 보지만 귀신은 체액이나 혈액으로 보는 것과 같고, 똑같은 밤을 사람은 어둡다고만 여기는데 새는 밝게 보는 것과 같다.”(위의 책, 165)라고 말한다. 현교는 이러한 존재로부터 비롯된 인식에 안주한다. 이 책의 표현을 빌면, 현교는 화신(化身)이나 응신(應身)에 머무는 설법이다. 그것을 초월한 진리로서의 법신(法身)의 존재와 인식은 밀교의 가르침에서 얻을 수 있다. 인간이라는 화신(化身)을 넘어선 언어 너머의 깨달음으로서 밀교를 이야기한다.

 

 

그 외 파리코뮌(가쓰라 아키오 저, 정명희 역, 2007[1971], 고려대학교 출판부)을 읽었는데, 파리코뮌 100주년을 기념하여 출간한 이 책에서 저자는 파리코뮌을 인류 최초의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 규정하며 그 혁명성을 계승하자고 주창한다. 나는 사실 파리코뮌의 성격이 무엇이건 간에 모든 것을 내려놓으며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그 숭고한 인간성을 탐색하고자 했다. 혁명이란 정말로 벤야민이 말한 것처럼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이 가능한 메시아적 순간에서 억압받는 메시아에서 가장 투명하게 드러나는 듯하다.

 

모셔두기만 한 책들이 더 있지만, 그건 또 나중에 한 뭉텅이로 몰아 읽어보자. 최한기는 학자에 대해 공부를 남보다 많이 해서 남에게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자라고 정의했다. 공부해서 글을 쓰자.

Posted by Sarantoy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