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귀스탱 베르케는 1942년 모로코 출생의 프랑스인으로 일본사상 및 일본문화 연구자이다. 프랑스어와 일본어로 저술 활동을 전개해왔으며, 다음의 글은 일본어로 쓰였다. 다음의 글을 데스콜라의 「자연은 누구의 것인가?」(https://sarantoya12.tistory.com/153)와 같이 읽으면 동양(일본)과 서양(유럽)의 자연관에서의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과 주체성

 

오귀스탱 베르크(Augustin Berque)

 

1. ‘누구’란 어떤 것인가?

 

얼핏 보면 인류학자 데스콜라의 ‘자연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물음은 매우 인류학적이다. 이 질문에서 ‘누구’란 인류에 속하는 존재라는 것은 분명하다. ‘누구’라고 말하면 반드시 인물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 나오는 유명한 표현 ‘자연의 주인과 소유자인 듯이’에서 직접적으로 유래하는 사고방식일 것이라고 바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 자연을 (가진) 주인은 인간 주체 외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인상은 일본어의 세계 특유의 지적환경에서 비롯한 것일 수 있다. 일본어에서는 확실히 ‘누구’라고 말하면 반드시 인간을 뜻하며, 한자 ‘誰’의 구성요소 또한 인간존재를 전제한다. 이 글자의 의부(意符)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언어의 ‘言’이고 음부(音符)가 ‘隹’(새 추)이다. 이 글자는 “인간 특유의 옛 새점 풍속에서 누구라도 불특정한 자를 추측할 때 새점을 쳤다는 것을 보여준다”(白川靜, 『字通』, 平凡社, 1996). 이렇듯 ‘누구’는 인간존재의 대명사이다. 이에 반해 프랑스어 원문 제목 ‘À qui appartient la nature?’에 나오는 대명사 ‘qui’는 인간에 한정되지 않으며 생물 일반과 무생물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자연은 qui의 것인가?’라는 물음의 대답에서 자연을 ‘가지는’ 주인은 자연 자신도 포함되고 인간은 물론이고 삼라만상 가운데 어떤 것이라도 될 수 있다. 제목의 뜻을 이렇게 이해하고 데스콜라의 논문 내용을 읽기 시작하면 그가 확실히 이러한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논문의 결론에서 제안하는 관계보편주의(universalisme relatif)[각주:1]는 삼라만상과 인간의 관계성을 기본조건으로 한다. 이것은 분명 와쓰지 데쓰로(和辻哲郎)가 『풍토(風土)』에 썼듯이, ‘인간존재의 구조계기로서의 풍토성’이 인간의 주체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과 상통한다. 이 의미에서 데스콜라의 견해는 와쓰지의 그것과 비슷하다. 인류학자 데스콜라는 철학자 와쓰지와 달리 풍토성이라는 존재론적인 기본개념을 제시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데스콜라의 ‘자연의 인류학’은 와쓰지의 풍토론과 유사한 존재론을 기반으로 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사실 나 또한 일찍이 『지구와 존재의 철학』(1996)에서 시도한 바, 데스콜라도 환경윤리의 가능성을 인간존재의 주체성과 자연과의 관계성(즉 풍토성)을 기반으로 제시하려 한 것 같다.

 

2. 이원론의 재검토

 

이 장에서는 그러나 풍토성에 관한 인간존재의 주체성보다도 일반적인 의미에서 인간 풍토에 한정되지 않는 주체성, 즉 자연 그 자체의 주체성까지 고려하고자 한다. 이 문제 제기는 30년 전부터 나의 연구의 통저음(通低音)이었고, 그것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표현한 것은 아마도 1984년 여름에 쓴 (후에 『풍토의 일본─자연과 문화의 통태(通態)』(1992)라는 제목으로 일본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책의 결론을 ‘자연이라는 더없는 주체(La nature, ce sujet ultime)’로 내린 때였을 것이다.

나는 일본의 풍토성을 고찰한 저 책을 쓰면서 처음으로 자연과 인간존재의 관계에서 주체성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곰곰이 생각할 수 있었다. 실제로 당시 나는 오랜 고민 끝에 『풍토』의 첫 줄에서 ‘인간존재의 구조계기로서’ 정의된 와쓰지 데쓰로의 기본개념인 풍토성을 médiance라는 신조어로 만들어내었고 나의 풍토론의 또 하나의 기본개념인 trajection의 번역어를 새롭게 만들었다. 일본어본에서 그것을 ‘통태(通態)’로 번역했다. 간단히 말해 통태는 시간적인 과정이며 공간적인 구조계기인 풍토성을 발생시킨다. 이에 관해서는 후에 조금 더 상세히 서술하겠다.

지금까지의 문제군을 생각하기 시작한 계기는 분명 일본 풍토와의 만남이었고, 말할 것도 없이 문제 그 자체는 보편적이다. 일본 풍토의 특수성을 논하는 가운데 그 보편성을 발견하고 심화했다. 서양의 고전적 근대 범례의 이원론을 재검토하면서 그 두 개의 신성 축, 하나는 객체적인 동기로서의 nature이고, 다른 하나는 초월적인 cogito(근대 주체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자기 창조)인 주객(主客)의 절대적인 구별의 추상성에 불만을 자각하고 그를 대신한 풍토론의 입장에서 자연과 주체성의 관계 재구축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이 재구축은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자연’의 재검토이다. 자연은 주체의 자연환경이면서 그와 동시에 주체의 주체성 그 자체 속에서 활동하는 것이므로, 자연과 주체성은 나뉘지 않는다. 또 하나는 ‘주체’의 재검토이다. 주체는 자기동일성을 가지면서 그와 동시에 풍토 속에서 ‘자기발견’(와쓰지의 ‘자기발견성’이나 하이데거의 현존재(Dasin)에서 습득하는 사실)한다. 그러한 주체성의 장은 그 신체의 국소성(topicité)에 결코 한계지을 수 없다. 풍토(風土)에도 있는 바람(風)이 어느 정도 발산하고 있을 것이다. 나아가 자연도 살아가는 한, 기계와 다른 한 부류이며 어느 정도의 주체성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3. “Sujet”의 다양성과 위태로움

 

그리스어 hupokeimenon(밑에 깔려있는 것, 기저라는 뜻)의 라틴어 번역인 subjectum에서 유래하는 sujet, Subjeckt, subject 등등의 용어는 매우 다의적이고 모순적이기 때문에, 메이지 시대에 그것을 일본어로 번역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현대일본어에서 단 하나의 단어인 subject에 해당하는 용어는 여러 개이고, 그것들은 겉보기에 서로 관계없는 것 같고 또 경우에 따라 상반돼 보인다. 주어, 주체, 주관, 주제, 문제, 이유, 대상, 환자, 신하 등은 모두 저 하나의 단어에 해당한다. 여기서 가장 의아한 것은 논리학자에게 sujet(주어)가 물리학자에게는 object(대상 또는 객체)라는 것이다. 양쪽 모두에게 주제(subject)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다. 서양과의 접촉 이전 일본어에는 그에 상응하는 용어가 없었기 때문에 언어학자가 밝혔듯이(예를 들어 『근대 일본어의 사상』에서 “‘주어(主語)’는 번역 과정에서 만들어졌다.”라고 야나부 아키라(柳父章)가 썼듯이), 지금은 빈번하게 사용되는 주어, 주체, 주제라는 말들의 개념은 결국은 메이지 시대의 박래품(舶來品)이고 최근까지 그에 반발하여 「일본어는 주어가 필요 없다」라는 논문이 나올 정도로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확실히 서구의 주요 언어에서 발생하여 서양사상, 서양문명의 기본조건이 된 문법적 삼항구조 S-V-O(주어-동사-목적어)와 논리적 이항구조 S-P(주어-술어)가 일본어와는 맞지 않는다. 예를 들어 프랑스어에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구조임을 말해주는 저 유명한 문구인 ‘코끼리는 코가 길다’에서와 같이 두 개의 주어를 가진 문장을 일본어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여기서 ‘은/는’과 ‘이/가’가 보여주는 바, 명사 ‘코끼리’(주제)와 ‘코’(주어)의 문법적인 기능은 실제로 다르지만 그러한 구조는 서구의 주요 언어에서 문법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중국어의 구조 또한 일본어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코끼리는 코가 길다’와 같은 문장, 예를 들어 ‘那個人嘴大大的’(저 사람은 입이 크다)와 같은 예는 흔하다. 중국어에는 ‘은/는’과 ‘이/가’가 없으므로 중국의 문법학자는 그러한 구조를 간과하여 ‘主謂謂語句’(주어-술어 문장)’이라고 부른다. 주어는 술어에, 술어는 주어에 되먹임되는 구조인데 서구에서는 언어 문법뿐만 아니라 논리 그 자체가 전혀 인식되지 않는다. 일본어에서는 ‘은/는’과 ‘이/가’를 교환을 하려고 들면 간단하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베르케이다.’를 ‘내가 베르케이다.’로 바꿔도 구조는 바뀌지 않지만, 실제로는 주어와 술어의 관계가 역전하여 의미가 ‘베르케는 나다.’로 되기 때문에 S(주어)와 P(술어)에서 P가 S로 역전한다.

지금의 논의는 언어학자나 논리학자의 전문가들의 정연한 논리로 벌써 이야기되었을 것 같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현대문명의 원천, 즉 anthropocene(인류세)의 주요 요소인 서양사상의 역사에서 논리상의 주어(sujet)와 술어(prédicat)의 구조계기는 존재론상의 본질(substance)과 우유(偶有, accident)의 구조계기에 상응하는 것이므로 저와 같은 ‘역전’은 존재와 자기동일성에 관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을뿐더러 우리가 지금 당면한 인류세의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러한 구조계기를 재검토하는 것이 시급한 의무이기도 하다.

 

4. ‘자연’은 nature였던가?

 

현대일본어에서 ‘자연’이라는 용어는 원칙적으로 (적어도 과학에서) 서양의 고전적 근대 범례에 따라 주체와 상반된 객체화・기계화된 대상 nature에 대응하는데, 그것 역시 메이지의 번역 사상의 결과에 불과하며, ‘자연’이란 본래 도교의 저 유명한 표현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老子』 제25장)가 말해주듯이 인간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있는 것으로서, 바꿔 말하면 도가 그 자신과 똑같아지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자연’은 현대 문법에서 말하는 명사라기보다 오히려 부사에 가까우므로 전통적인 훈독 ‘스스로 있는’이 그것을 잘 번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스스로 있는’은 뜻밖에도 성경 출애굽기 3장 14절에 야훼가 호렙산 정상에서 모세에게 응답한 말씀(“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을 상기시키는데, 실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일신교의 야훼가 삼라만상을 절대적으로 초월하는 것에 반해 도교의 ‘스스로 있는’은 삼라만상에 내재하며 삼라만상의 자연, 자연의 더없는 주체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대 주체의 자기창립을 표현한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생각=존재라는 동일화를 설정하는데, 결국 호렙산 정상에서 발신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에 상응한다. 코기토는 우리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이므로 나는 그것을 ‘호렙산의 원리’라고 부르겠다. 왜냐하면, ‘스스로 있는 자’에서 ‘자’(근대 주체)의 주체성은 객체화된 삼라만상(근대 자연)의 기계성을 절대적으로 초월하기 때문이다. 『방법서설』에 쓰인 것처럼 “나는 하나의 실체이고, 그 본질 혹은 본성은 오직 생각하는 것이며, 존재하기 위해 하등의 장소도 필요 없고, 어떠한 물질적 사물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원론, 기계론, 공리주의, 유명론 등등의 그 무엇으로 불리더라도, 근대과학 곧 현대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이 호렙산의 원리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원리는 근거가 신비적이며, 합리적인 추론의 결과가 아니다. 주체성을 절대화하고 그것을 인간 주체의 독점적인 속성으로 규정하는 것이 합리적, 과학적이라고 증명된 바는 없다. 오히려 과학이 하루가 멀다고 밝힌 것은 인간 이외의 생물 또한 어떤 부류의 어느 정도의 주체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 물리학에서도 하이젠베르크가 분명히 표명했듯이 고전 근대과학과 달리 현대과학은 자연을 단순히 대상으로 삼지 않으며 자연과의 관계 자체를 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태도는 원리적으로 풍토론과 데스콜라의 관계보편주의와 호응한다.

그런데도 십계명에 정해진 법처럼 과학에 의한 자연의 기계화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그 적절한 예로서 학계는 이마니시 킨지(今西錦司, 1902~1992, 일본의 인류학자이자 생태학자)의 ‘분화이론(棲み分け理論)’[각주:2]을 언급한다.

 

5. 자연의 주체성 외폐(外閉)

 

몇 년 전 『진화론은 왜 철학의 문제가 되는가』(2010)라는 책을 우연히 발견하고 바로 입수한 적이 있다. 지금 이 책을 웹에서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소개 문구를 볼 수 있다. “생물학의 철학에서는 기존의 인문계와 철학계의 틀을 넘어서서 논의를 확장하고 있다. 이 책은 일본에서 생물학의 철학의 주요 연구자들이 진화론을 축으로 과학철학, 시스템 이론, 수학, 심리학, 역사학, 윤리학 등 다양한 분야와의 접점 속에서 다양한 과제를 전개한다. 원리적인 문제에서 개별적인 문제로 독자를 이끈다.” 이 과제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봐도 색인을 뒤져봐도 20세기 후반에 대대적으로 논의된 이마니시 진화론은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우선 철학 일반의 관점에서 이상하다. 왜냐하면, 이마니시 진화론이 틀렸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틀렸는지를 판단해야 하고 그것은 철학적, 인식론적, 존재론적, 방법론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생물학의 철학의 주요 연구자들’은 이마니시 진화론을 문제 제기에서부터 제외하고 폐쇄했다. 의식의 ‘밖(外)’으로 배제하고 의식의 문을 ‘닫은(閉)’ 것이다. 이마니시의 ‘분화이론’과 똑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분화이론’이 전적으로 무시될 만큼 이마니시 진화론이 어떤 규정을 어긴 것일까? 그것은 이마니시가 만년에 저술한 『주체성의 진화론』(1980)의 제목에서도 바로 알 수 있다. 즉 그는 기계일 수밖에 없는 자연에 주체성을 부여하고자 했고, 고전적 근대 범례의 두 개의 신성 축을 동시에 쓰러뜨리고자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생물학의 철학』의 ‘마을’로부터 외폐되고 말았다.

다만 저 ‘마을’은 개구리의 우물에 불과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과학철학의 입장과 다르다. 예를 들어 『과학』 2003년 12월호에는 「자연과학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가와이 하야오(河合隼雄, 1928~2007, 일본의 임상심리학자)가 이마니시 자연관의 기본적인 특징을 고찰했다. 이마니시가 연구하려 한 것은 근대적 자연 대신 ‘스스로 있는’ 자연이었다고 판단한다. “이마니시는 자연 현상에 대해 말하고 있다. 존재의 ‘스스로 있는’ 변화의 힘에서 진화의 모습을 보이고자 한다.” 가와이 하야오는 이에 머물지 않고 현대 자연과학이 우리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게 된, 지구 규모의 환경위기를 일으킨 제도의 본질적인 한 측면을 탐구한 이마니시의 자연학이라는 의미 그대로의 ‘자연학’의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동감한다. 기계로서의 자연으로부터 우리의 주체적 존재를 추상해온 나머지 서양의 고전적 근대 범례의 과학은 결국은 이 지구상에서 인간존재를 본격적으로 제거하고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드는 위험성을 띤 제도를 점차 구축해왔다. 이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초극(超克)해야 한다. 정말로 이마니시 자연학은 그러한 초극의 길을 걸었을까?

 

6. 아기는 정말로 ‘설 수 있어서 선’ 것일까?

 

알다시피 정통 진화론은 개체(지금은 유전자)를 단위로 하여 통계학적 합계(population)를 추정하고 자연도태에 의한 그 비율의 변화를 통해 생물이 진화해왔다고 생각한다. 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는 어떤 주체성도 활동하지 않으며 우연(돌연변이)과 필연(통계법)에 지배된 단지 기계적인 과정만 있을 뿐이다. 이마니시는 그러한 기계성을 부정하고 생물에 주체성을 인정했으며, 그것을 몇 가지 수준(개체, 종, 전체)에서 고찰했다. 그것은 자연의 무주체성이라는 서양의 고전적 근대 범례의 규정을 위반한 것일뿐더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립까지 소급 가능한 중세의 보편논쟁(querelle des universaaux)과 에밀 뒤르켐과 허버트 스펜서의 대립을 거쳐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유명한’ 발언 “사회와 같은 것은 없다(There is no such things as society).”에 이르기까지 모든 실재론(부류의 실재를 인정하는 파)과 유명론(개개의 실재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파)의 대립에 저도 모르게 말려든다. 이마니시의 기본 개념인 ‘종(種) 사회’와 ‘생물 전체 사회’는 근현대에 이르러 (특히 앵글로색슨족 문화권에서) 우세를 점한 근대과학의 지배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인데, 또 다른 신성한 규정을 신성 모독한 것이다. 이러한 이마니시를 벌하려 한 것인지, 그의 잘못을 인정하게 하고 회개하게 하려는 듯 영국에서 대처 급의 유명론자 비버리 할스테드(Beverly Holstead, 1993~1991, 영국의 고생물학자, 동물학자)가 도쿄를 방문하여 몇 주간의 짧은 체류 기간 후에 이마니시 진화론을 뒤집은 책까지 출간한다(『이미니시 진화론의 여행』, 1988). 원문 Kinji Imanishi: the view from the mountain top은 발간하지 않았고 다만 그 내용을 요약하여 논문으로 발표했다(Nature 317 : 587-589, 17 oct, 1985.).

사반세기가 지난 후 저명한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봐알(Frans de Waal)이 할스테드의 뻔뻔한 태도는 대단히 식민지적이었다고 강하게 비판한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드 봐알도 영장류학에서 거둔 이마니시의 거대한 성취와 패러다임 전환을 칭찬하면서도 이마니시 진화론의 중심가설인 (개체의 자연도태를 둘러싼) 종 전체의 동시 변화에 대해서는 난해한 사고라고 소극적으로 평가했다. 실은 이마니시 자신이 그 가설을 적극적으로 증명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만년의 『주체성의 진화론』에서 그는 결국 그러한 공동변화를 합리적으로 증명하기를 포기하고 아기가 “설 수 있어서 선” 것과 마찬가지로 진화 또한 “변할 수 있어서 변한” 것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의 진화론이 ‘할 수 있어서’가 멈춰선 것은 진화를 기계로서가 아니라 ‘과정’으로서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이마니시 진화론이 학회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한 것은 아마도 ‘과정’이 너무나 비과학적이고 신비적인 목적론과 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마니시 진화론의 ‘과정’은 일종의 목적론과 유사할지라도 그것을 그의 자연학 전체에서 주체의 문제 제기 속에서 생각하면 그리 간단하게 외폐(外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7. ‘할 수 있는’을 환세계론의 입장에서 재고하다

 

현대일본어에서 ‘べく(할 수 있는)’라는 조동사는 결의・의지와 의무・당연함을 뜻한다. 이 모두 주체성을 전제한다. 의무를 느끼고 의지를 갖추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결의하는 존재는 반드시 주체여야 한다. 실제로 주체성의 문제는 이마니시의 자연학을 시종일관 관통한다. 그는 『생물의 세계』(1941)에서 이미 정통 진화론의 사고방식인 자연도태에 의한 환경의 생물로의 일방적인 영향 또는 규정을 인정하지 않았고(이마니시는 그것을 ‘주체의 환경화’라고 부른다.), 오히려 주체의 환경화는 환경의 주체화이기도 하며 환경의 주체화는 주체의 환경화이기도 하다고 계속해서 주장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윅스퀼의 환세계론의 입장과 매우 가까운데, 적어도 내가 읽은 이미니지의 논문에서 그는 한 번도 윅스퀼의 환세계론을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환세계론과 완전히 같은 전제(단, 인간에 한정해서)를 가진 와쓰지 데쓰로의 풍토론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여하간 이마니시의 자연학도, 환세계론도, 풍토론도 개체든 사회든 종이든 생물 전체 사회든 우선 존재자의 주체성을 전제로 놓고 그 주체의 현실을 환경 일반(윅스퀼이 말하는 Umgebung, 와쓰지가 말하는 ‘자연환경’)으로 환원할 수 없음을 밝혔다. 주체와의 특수한 관계에서 환경 일반으로부터 특수한 환세계(와쓰지의 경우는 풍토)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생활의 장’과 같이 모호한 표현에 그친 이마니시는 환세계나 풍토라는 본격적인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의 ‘주체화된 환경’은 환세계나 풍토와 마찬가지로 명확하다. 그렇다면 와쓰지가 정의한 “인간존재의 구조계기로서의 풍토성” 혹은 더욱 일반적으로 말하면 “생물 존재의 구조계기로서의 환세계성”이라는 존재론적 개념은 이마니시 자연학에도 들어맞는다. 여기서 ‘구조계기’란 독일어 Strukturmoment의 번역어인데, 역학에서 파생한 개념이다. 통상적 의미에서는 ‘계기’와 ‘동기’의 동의어이고, 철학에서는 ‘사물을 조직, 구성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구조계기로서 ‘환세계성’이란 주체와 그 환세계의 동적인 관계를 가리키므로 이 양자를 어느 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여 어느 한 흐름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존재자를 어느 한뜻(趣)으로, 어느 한 방향으로 진화하게 만든다. 이렇게 보면, 그것은 이마니시 진화론의 ‘할 수 있는’의 뜻과 같다.

이제 이 추상적인 원리의 구체적인 예로서 이족보행을 이야기해보자. 다음의 논증은 이 문제를 연구한 크리스틴 타르디외(Christine Tardieu)의 저서 『우리는 어떻게 이족보행자가 되었는가?』(2012)를 참조한다. 예상외로 이족보행은 인간의 게놈에 기입되어 있지 않으며 결정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우연히 동물(예를 들어 늑대)에 길러진 인간 아이, 이른바 ‘늑대소년’은 실제 사례로도 보고된 바, 그들 대부분은 성장해도 언제까지나 사족보행의 상태 그대로 동물처럼 움직인다. 이족보행자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환세계(가족, 세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기는 어른을 닮아가고 어른으로 격려받으며 처음으로 일어서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장면의 필름을 몇 통이나 찍고 분석한 타르디외는 기묘한 것을 깨닫는다. 아이는 자신이 서는 순간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힐끗 돌아본다. 마치 [스스로] 그들의 의견과 칭찬을 구하듯이.

이러한 사례를 환세계론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인간 아이가 서기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특수한 유대관계가 필요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와쓰지는 『인간의 학으로서의 윤리학』에서 밝혔듯이 그 유대관계란 윤리학의 가능성 자체를 건립하는 기본 조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아기를 세우는 동기는 윤리감과 그 주요 요소인 의무감의 맹아라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그러한 의무감과 당연함을 가리키는 단어에 해당하는 것이 이마니시가 말한 ‘할 수 있는’이 아닐까? 추상적인 ‘자연환경’ 속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 속에서 아기는 설 수 있어서 선 것이다.

그런데 ‘할 수 있는’의 범위가 인간의 삶에 한정되는 것일까? 진화라는 현상의 규모에서 사정은 달라지지 않을까?

 

8. ‘과정’을 환세계론의 입장에서 재고하다

 

‘주체성’을 ‘주관성’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관(觀)’은 지각(시각과 의식), 즉 사물을 어떤 식으로 보는가에 머물지만, ‘체(體)’는 육체 전체이므로 지각만이 아닌, 몸의 행동과 작용까지 포함한다. 윅스퀼이 말하는 Funktionkreis(機能環)에서 동물의 지각범위와 작용범위는 상호작용 속에서 상호 일어난다. 나만의 환세계론에서 그러한 상기(想起)를 통태(通態, trajection)라고 부르며, 환세계성・풍토성이라는 존재의 구조계기를 낳는 과정으로 본다. 통태는 자연환경 일반(Umgebung)을 토대 또는 자원으로 해서 특수한 주체의 신체성과 그 특수한 환세계(Umwelt)라는 양쪽의 현실을 동시에 만드는 창조적인 과정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 과정의 창조성은 주체로서의 생물(인간을 포함하여)의 주체성을 전제로 한다.

이 통태라는 상기(想起, co-suscitataion)는 단지 주관성의 투영이 아니라 새로운 실체로서의 주체와 그 환세계를 동시에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인류학자 앙드레 레로와구랑(André Leroi-Gourhan, 1911~1986)의 해석에 따르면, 인류의 출현(사람화)은 삼중의 과정을 거친다. 앙드레는 기술체계에 의한 환경의 인공화(anthropisation)와 상징체계에 의한 환경의 인간화(humanisation)와 그 귀환작용(feedback)에 의한 사람화(homonisation)를 주장한다. 이 주장은 확실히 이마니시가 주장한 환경의 주체화, 주체의 환경화의 과정에 대응한다.

시간의 척도를 바꿔서 마찬가지의 과정이 진화 전체에서 일어나지 않을 리 없다. 모든 생물은 그 특수한 기능환(機能環)을 가지고 있고 주체적으로 그에 작용하고 다시 귀환작용에 작용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이 관점은 근본적, 존재론적으로 자연도태라는 결정론과 다르다. 자연도태에서는 우선 환경 일반이 있고 생물은 그에 적응해야 한다. 여기서는 어떤 주체적인 창조성이 없고 기계적이며 통계학적인 도태만이 있다. 따라서 정통 진화론은 진화의 창조성(즉 신종의 출현)을 설명할 수 없고 단지 종의 안정성을 가능하게 할 뿐이라는 판단(이마니시의 자연학은 이것만을 말하지 않는다)이 제기되어왔다. 재생산뿐만 아니라 창조성이 있으려면, 어느 한 부류의 어느 정도의 주체성이 있어야 한다.

진화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것이라면 그 속에서 종은 ‘변할 수 있어서 변하는’ 만큼, 바꿔 말하면 그 ‘과정’을 결정할 정도의 주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호렙산 원리의 광신자가 아니라면 그러한 가능성을 찾아 나서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진화가 단지 우연(돌연변이)의 결과였다면, 단백질의 가능한 조합의 수(10의 130승)를 고려한다면, 원 상태의 생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주의 나이가 영겁의 세월을 뛰어넘는, 말하자면 무한의 시간이 걸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특정 과정이 있어야 한다. 생명 전체의 각 수준(개체, 종, 전체)에서의 과정은 어느 흐름의 어느 정도로 결정된 주체성을 전제해야 한다.

이제 ‘과정’은 반드시 목적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또 반드시 목적론의 신비성이 필요하지 않다. 주체가 자신의 흔적을 되돌아보면─역사 세계에서 ‘자기발견’을 한다면─, 그 속에서 어떤 방향성, 어느 한 뜻이 스스로 발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치 안토니오 마차도(Antonio Machado, 1875~1939, 스페인의 시인)의 어느 유명한 시구인 “여행자여, 길은 없다 … 여행자여, 길은 너의 흔적 오직 그것뿐”인 것처럼, 생명과 그것을 육체화하는 생물 모두는 살아가는 한 자기 존재 의식, 즉 주체성을 가진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와 환경을 구별하고 그 구별을 견지할 수 없고 환경 속에 흩어져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자기의식을 갖기 위해서는 자존재(自存在)의 의식이 필요하다. 그 기억을 지금은 게놈이라고 부르지만, 원리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원리란 주체성이다. 말할 것도 없이 박테리아의 주체성은 데카르트의 코기토만큼 발달한 것은 아니지만 그 원리는 다르지 않다. 그것을 ‘마차도의 원리’라고 부른다면 바로 알 수 있다. “생물이여, 과정은 없다 … 생물이여 과정은 너가 걸어온 길(진화) 그 자체이므로 스스로 있으며 같아지는 오직 그것뿐.”

 
  1. 베르케의 원문에서는 ‘상대적 보편주의’라고 번역했으나, 프랑스어 ‘relatif’는 영어로 ‘relative’이고 데스콜라는 ‘관계대명사(relative pronoun)’의 ‘relative’라고 그 뜻을 명시했을 뿐더러 저 말에 관계(relation) 혹은 연결(connection)의 보편주의를 담아내고자 했으므로 ‘관계보편주의’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본문으로]
  2. 진화론의 입장에서 생물이 무리를 지어 주어진 주변 환경에 기계적으로 적응한다는 이론 [본문으로]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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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콜라의 네 편의 논문과 그 논점을 둘러싼 여러 일본인 연구자들의 논문들을 모아 출간한 『엇갈리는 세계, 자연과 문화의 탈구축 ─ 필리프 데스콜라와의 대화(交錯する世界 自然と文化の脱構築ーフィリプ・デスコラとの対話)』(京都大学学術出版会, 2018.03.30)의 서장을 번역해 올려둔다. 데스콜라, 윅스퀼, 베르케 등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을 지양하는 여러 논의를 잘 정리해놓았다. 윅스퀼의 '환세계(Umwelt)'는 칸트의 관점주의를 동물세계로 확장한 생태학적 버전으로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리고 데스콜라의 '우주론(cosmology)'은 그러한 신체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내면성'을 구조화한 것인데, 다음의 글에서는 그 '내면성'을 '주체성'으로 간주해버린다. 아마도 다음의 글의 필자가 생태인류학자이다 보니, 자연과 문화를 횡단하는 새로운 논의의 장으로서 생태학에 더욱 주목해서 그런 것 같다. 이 책에는 다양한 관점과 접근의 글들이 있으므로, 다음에는 데스콜라의 '내면성'을 조금 더 분석한 것을 번역해 올리겠다.

 


 

인문지(人文知)의 탈구축 ─ 세계인식의 대전환을 향하여

 

아키미치 도모야(秋道智彌)

 

이 책이 기반하는 필리프 데스콜라는 현재 콜레주드프랑스(college de France)의 인류학 주임교수이며,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후계자로 인정받고 있다. 데스콜라는 남아메리카 에콰도르의 아마존강 상류에 거주하는 화전 농경민인 아추아르(Achuar) 선주민 사회에서 3년간 현지 조사를 수행했고 그에 기초하여 수많은 인류학적 논고를 발표해왔다. 그 대표작이 『자연과 문화를 넘어서』(2005)이다. 그는 이 책에서 신체성(physicality)과 내면성(interiority)에 착목하여 모든 생물의 유사성과 이질성을 논했다. 그리고 유사성과 이질성을 축으로 하여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에서 비연속성을 강조하거나 아니면 비연속성을 최소화하거나(다시 말해 연속성을 강조하거나) 해서 사회 구조를 가늠함과 동시에 애니미즘, 토테미즘, 유추주의(analogism), 자연주의(naturalism)를 규정했다.

즉 토테미즘이란 신체성과 내면성 모두 인간과 비인간을 유사한 것으로 간주하는 패러다임이고, 인간과 비인간이 신체성은 유사하지만 내면성은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이 자연주의, 신체성은 이질적이지만 내면성은 유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애니미즘, 신체성과 내면성 모두 이질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 유추주의이다(그림 4 참조). 이러한 네 개의 존재론(ontologies)을 통해 세계의 성립과정(worlding)의 사유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 데스콜라 사상의 골자이다. 그는 세계 속의 풍부한 역사・민족자료를 그 실례로서 제시한다.

지구상의 세계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을 둘러싸고 철학・사상사를 필두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수한 논의가 이뤄져 왔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인류학자로서 필자는 사변론이 아닌 실증적인 사례를 기초로 한 데스콜라의 논의에 찬동하는 만큼 데스콜라가 제시한 존재론 모델의 설득력에 관해 정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데스콜라의 주장은 자연과 문화 또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기반한 것이며 세계의 성립과정을 그 맥락에서 사고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서장에서는 데스콜라의 사유와 가설을 다루면서 그것과는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독자들은 서장의 논의를 염두에 두고 각 장의 다양한 관점에서의 참신한 논의를 접하기를 바란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사유하는 풍부한 관점과 새로운 인문지의 가능성을 예감할 수 있을 것이다.

 

1.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과 중심주의

 

⑴ 자연과 문화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필자는 『자연은 누구의 것인가?─‘커먼즈의 비극’을 넘어서』(秋道 편, 1999)라는 제목의 책을 간행했다. 이 책에서 자연과 문화를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사고방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인간은 자연계의 사물을 기술, 경제, 사회 등에 걸쳐있는 문화적 장치 및 수단을 통해 자신의 세계로 들여왔다. 그중 채집, 수렵, 어로에 의존한 선사시대 단계와 목축과 재배를 통한 가축화(domestication) 이후 단계에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크게 변화했다. 나아가 후대에 이르러 산업기술과 공업의 글로벌화, 정보산업의 발전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관계 자체가 지구 규모의 대변혁을 이뤘다. 이러한 인류사적 변화를 논하는 가운데 자연을 이용하여 문명을 건설한 것이 인간의 문화라는 역사관이 당연시되었다. 즉 자연과 문화를 상호 대립하는 것으로 보는 이원론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패러다임에서 자연과 문화의 관계를 새삼스레 논하는 따위는 시대착오적이었고, 인류의 역사를 다시금 파악하는 거대이론은 진부하며 지적인 생산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렇게 잘라 말할 수 있을까? 지구온난화와 환경파괴가 지구 규모에서 진행되고 있고, 인구가 폭발적으로 급증한 21세기에 이르러 육지와 바다를 불문하고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생존을 위협받고 있으며 이 모든 생물을 능가하는 인간존재에 의해 위기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도를 넘은 인간 활동에 대한 경종은 20세기에 이미 해로운 화학물질이 일으키는 환경기술에 대한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1962)이나 로마클럽의 ‘성장 한계론’(1972)을 필두로 수다한 보고서와 책에서 심각한 문제로서, 또 새로운 위기로서 자주 등장했다. 1997년 교토에서 개최된 COP3(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 ‘교토 의정서’가 발의되었고,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2015년 12월 마침내 COP12에서 ‘파리협정’이 채택되었다. 처음으로 지구온난화 방지를 목표로 국제적인 합의가 이뤄졌고, 그 후 2016년 4월에는 155개국이 그에 서명했으며 투발루(Tuvalu), 몰디브 등 저지대의 산호초 섬나라에서 해면 상승에 의한 위기상황에 처한 나라들도 비준했다. 그러나 2017년 6월 1일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파리협정 탈퇴를 선언하는 등 현재 상황은 여의치 않다.

우리는 지금 인간의 자연 지배가 어떻게 무력화되는지를 통렬하게 경험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꼽자면 2011년 3월 11일 동일본을 습격한 대지진과 쓰나미이다.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 원자력발전소에서 발생한 방사능 유출의 후유증은 지역주민과 생태계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고, 정부와 도쿄전력의 무책임한 대응은 미래의 불안을 부채질하고 있다. 2016년 4월에 발생한 구마모토 지진 또한 복구, 부흥에 사력을 다하는 지역 행정과 주민에게 과중한 과제를 부과했다. 구마모토 지진이 가고시마현의 센다이(川內)와 사가(佐賀)의 겐카이(玄海), 에히메(愛媛)현의 이카타(伊方)에 소재한 원자력발전소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 문제는 일본의 에너지 정책에 직결할 수밖에 없다. 원자력발전소 추진파에서 반대파까지 이 문제를 크게 생각해보면, 이 문제는 확실히 인간과 자연의 본원적인 관계에 다다른다. 우리는 삶의 절실한 문제로서 다시금 자연과 인간의 존재 양상을 근본적으로 되물어야 한다.

『자연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책은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이 가진 문제점을 드러내고자 했다. 예를 들어 현재 환경보전이 세계 각지에서 진행되고 있다. 2010년 나고야에서 개최된 COP10에서는 생물 다양성의 보존을 논했고, 2011년 리오+20(UN 지속 가능한 개발회의)에서는 생물 다양성에 반하는 지역주민의 생업에 책임을 묻고 삼림의 위법벌채이나 위법・무허가・무규칙의 어업 등을 범하는 개인과 단체를 강제적으로 검거하려는 움직임이 EU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을 ‘환경 제국주의’로 규정하는 논자도 적지 않다. 개발도상국에서 현장 주민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국제적인 원조를 추진해온 이들이 바로 서양의 어용학자들과 국제 원조 기관의 컨설턴트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와 동일한 모델과 조언을 바탕으로 개발도상국 정부의 주도하에 환경보전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겉으로는 방향이 다를 수 있지만 본질에서는 자연을 관리하고 이익을 창출하려는 것과 같다. 말하자면 서양적인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을 전제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환경보전이 우선한 나머지 지역주민의 토착적 문화관행과 관습, 사람들의 건강과 생존과 생활 향상이 무시되고 있다. 위로부터의 환경정책에 대한 뿌리 깊은 반발이 확산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지역주민에 의한 환경보전의 실천과 환경인지의 존재 양상을 충분히 살펴본다면, 사람들이 단지 생산효율이나 경제 목적에만 매달려서 자연과 관계해오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서구중심주의적 발상에서 민속지(民俗知)와 전통적인 생태학적 지식(Traditional Ecological Knowledge)을 무시한 환경의 보전 및 관리가 진행된다면, 인류가 억눌린 속박에서 해방되는 길은 요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은 도대체 어떤 한계와 문제가 있는 것일까? 다음 절에서 다룰 영국 인류학자 팀 잉골드는 자연과 문화의 관계를 그림 1과 같이 도식화했다(Ingold 1996). 그림에서 보듯이 자연과 문화의 대립 도식에서 자연의 개념은 ① 지리적・생태학적인 실체로서의 자연과 ② 문화적인 해석의 결과로서 인지된 자연으로 나뉜다. 마찬가지로 문화도 ①과 ②에 각각 대응하는 개념으로 위치한다. 즉 자연과 문화 개념은 항상 대립하는 관계에서만 파악될 수 있다. 

그림 1. 서양과 비서양에서 인지세계의 비교 - 서양의 이원적 존재론(자연과 문화 또는 물질과 인지 사이에서)을 기반으로 한 모델. C와 Cc는 결여성 대립관계에 있지만, N과 Nn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Ingold 1996을 기본으로 작성)

이 그림에서 주의해야 하는 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잉골드 자신도 언급했다시피 자연과 문화를 구분하지 않는 세계관이 파푸아뉴기니 고산지대의 하겐족(the Hagen)에 있다고 하는 인류학자 메릴린 스트래선의 보고이다(Strathern 1980). ‘No Nature No Culture’의 세계는 분명 이채롭다. 잉골드는 자연과 문화를 이원적으로 이해하는 사고방식은 서양 고유의 것이며 뉴기니의 사례는 비유럽적인 것으로 위치 짓는다. 또 하나는 이 책의 9장에서 주장하는 ‘자연이 주체성을 가진다.’라는 발상인데, 이 그림에서는 배제 내지는 간과되고 있다. 즉 그림 1에서 문화 개념은 ‘결여성 대립(privative opposition)’의 관계에 있고, 이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자연 개념은 문화와 같은 결여성 대립의 관계에 없다.

베르크는 자연에도 주체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새롭게 그림 2와 같은 도식을 상정할 수 있다. 이때 자연(N)은 가설적으로 주체적으로 인지하는 자연(Nn)과 그에 포함되지 않는 요소의 자연(non-Nn)으로 나뉘고, 이에 따라 자연 또한 결여성 대립으로부터 구성되는 개념이 된다. 즉 자연은 반드시 문화와 대립하는 개념은 아니라는 것이다.

스트래선이 찾아낸 ‘비자연・비문화’의 세계와 베르크의 ‘자연주체성론’은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을 넘어서는 것으로 위치 지을 수 있다. 이 지평에서 인간중심 또는 서구중심의 사상을 검토하는 것이 다음 과제이다. 우선 자연 속에서 인간을 세계의 중심으로 사고하는 인간중심주의를 검토해보자.

그림 2. 자연의 주체성론과 자연과 문화의 관계 - 자연에도 주체성이 있다는 가설에서 자연이 인지하는 세계(Nn)와 그 이외의 비자연(non-Nn)이 성립한다. C와 Cc와 함께 N과 Nn은 결여성 대립관계에 있다.

 

⑵ 인간중심주의

 

자연을 인간의 문화에 들여오는 모든 사고와 영위를 ‘자연의 문화화’라고 부르기로 한다. 인간이 (자연을) 받아들이는 것은 보통 영어에서 전유(appropriation)라고 말한다(Ingold 1987). 일본어의 ‘문화화’는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라는 뜻이다. 전유에는 ‘소유자가 없는 것을 사물화(私物化)한다.’라는 의미가 있으며 인간을 위해 자연을 이용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즉 자연의 문화화란 인간을 중심에 놓는 발상이다. 이것을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라고 부른다.

사회집단의 문화는 각각의 차이가 있지만, 그렇다 해도 그 사회에 인간중심주의적인 발상이 있다면 그 사회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세계의 중심에 놓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은 변함없다. 개개의 문화적인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세계에 수많은 세계관・자연관이 제각기 독자적인 의미화를 시도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피상적으로 표현하면 인류학은 무수한 인간중심주의의 정밀한 비교분석과 해석에 공헌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이 경우에 타문화와의 차이에 관한 정보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접근방식에는 두 입장이 있다. 문화상대주의 연구자들은 몇몇 타문화의 세계관・자연관을 기술한다 해도 그것은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에 반해 개별의 기술을 넘어서 인간 전체를 아우르는 일반성의 추구 자체가 본령이라고 주장하는 보편주의자의 입장이 있다. 보편적인 세계관의 추구를 강조하는 만큼 인간중심주의에 포박되어 그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필리프 데스콜라는 서양의 인류학자들이 암시적으로 전제하는 두 가지 사정이 있다고 주장한다(Descola 2013). 첫 번째는 무문자사회 사람들이 구축한 세계상은 서양의 과학이 상세하게 검토해서 그 법칙성을 분명하게 밝혀온 내용의 자연관과 동질적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는 자연과 문화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우주관이 그 외의 우주관을 이해하고 분석하기 위한 본보기가 된다는 점이다.

데스콜라에 의하면, 서양의 인류학자들은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에 대해 양자의 차이를 잘 조화시켜 대극에 위치하는 자연주의자와 문화주의자 쌍방이 서로에게 접근하는 해석론을 산출하려 한다고 지적한다. 자연주의자는 문화를 생물학적, 생태학적 제약에 대한 (문화적인) 적응에 불과하므로 자연과학 자체만이 자연의 구조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문화주의자는 문화의 구성내용과 자연(이를테면 생물로서의 인간의 기초대사량)의 관계는 단정할 수 없을뿐더러 실제로 양자의 관계는 완전히 이질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문화가 다르면 그 사회에 사는 사람의 기초대사량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다. 문화주의자는 자연을 어느 정도 가늠한다 해도 그것으로 인간문화를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적어도 19세기 후반까지 서양에서는 인간성이나 자연에 대한 몇몇 논쟁을 철학, 종교학, 신화학 등의 영역을 중심으로 전개해왔다. 이 과정에서 서구중심적으로 자연과 인간, 세계의 존재 양상에 대해 무수한 사색의 궤적이 축적되어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루이스 헨리 모건이 저술한 『고대사회』(1877)는 비서구 사회의 다양한 관습과 제도를 서구사회에 소개하여 서구중심적으로 구축되어온 세계관이 상대화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한편 모건의 영향을 받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84년에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저술하고 인류가 야만 시대(savagery)에서 미개 시대(barbarism)를 거쳐 문명 시대(civilization)로 사회 진화하는 도식을 제시한다. 이 도식에서 자연은 인간 사회가 진화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기술이나 생산의 기반을 담당한다. 실제로 인류는 야생식물의 채집, 수렵, 어로, 농경, 목축 등의 생산복합과 함께 불, 화살, 토기, 청동기, 철기 등의 기술문화와 문자 등을 자연을 이용해서 발명, 발전시켜왔다. 문명 시대의 도래라는 교의의 배경에는 자연의 개발이 있다. 그러나 이 사상을 인간중심주의의 원리라고 단정 짓는 것은 성급하다. 그보다 서구중심주의 또는 기독교 중심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동양이 아닌] 서양에서 인류사를 인간이 주(主)이고 자연이 종(從)이라는 배치 관계로 파악해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연과 문화는 상호 대립하는 존재로 간주해왔다.

 

⑶ 비인간중심주의─생태학과 신화학

 

그렇다면 그 대극으로서 인간을 중심에 놓지 않는 발상이 있다면 그 핵심은 무엇일까? 크게는 비인간중심주의(non-anthropocentrism) 혹은 자연(동식물)중심주의(nature-centrism)라고 부를 수 있는 틀이 그것이다. 이러한 틀의 저류에는 인간을 중심에서 배제하고 자연을 중심에 놓는 급진적인 사상이 있다. 이 사유는 많은 지식인의 비웃음을 살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논증해보겠다.

비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이 주체로서 자연을 복종시킬 수 있다는 혹은 지배할 수 있다는 관념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사상이다. 인간이 아닌 자연계의 존재를 중심에 놓는 이 사상에서는 자연이 주(主)이고 인간이 종(從)이라는 배치 관계가 성립한다. 다만 이 주종관계의 역전에는 명확한 근거가 필요하다. 여기서는 자연과학으로서의 생태학과 인문과학으로서의 신화학을 바탕으로 생각해보겠다.

본래 생태학의 사고방식에는 인간을 중심에 놓지 않는 원리가 존재한다. 자연계에서 식물과 동물 각각이 맡은 생태학적 역할에 주목해보자. 식물은 독립영양생물이며 일반적으로 탄소와 광합성에 의해 성장, 번식하고 무기화합물에 의해 증식한다. 한편 동물은 종속영양생물이며 다른 식물이나 동물 등의 유기화합물로부터 탄소와 에너지원을 획득한다. 동물인 인간도 종속영양생물이며 지구상에서 고차원의 소비자이다. 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이 먹이사슬에서 질과 양 모두 지배적인 소비자라는 것을 암묵적인 전제로 삼는다. 즉 자연계에서 소비하는 측이 주(主)이며 소비되는 측이 종(從)이고, 소비하는 행위는 피소비자의 희생으로 성립하며, 소비자는 피소비자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먹고 먹히는 관계에서 보면 주종의 관계는 결코 고정적이지 않다. 동남아시아의 메콩강 유역에 사는 저지대 라오족(the Lao)에서는 다음과 같은 속담이 전해온다.

 

물이 솟아오르면 물고기가 개미를 먹는다. 물이 흘러내리면 개미가 물고기를 먹는다.

 

우기에 하천에 물이 불어 베짜기개미가 나무 위에 올라가 나뭇잎으로 공 모양의 집을 만든다. 이 개미집이 수면에 떨어져 집 속의 개미나 유충이 물고기에게 먹힌다. 건기에 물이 빠져 물고기가 바짝 말라버리면 개미가 죽은 물고기를 먹는다. 사람들은 환경의 극적인 변화에 따라 먹고 먹히는 관계의 먹이사슬이 역전한다는 것을 일상의 관찰로부터 익히 알고 있다.

자연계에서 먹이사슬의 소비자에게 더 높은 관계가치(공생・적대 등의 관계성에서의 가치관)를 부여하는 사고방식에 대해 생산자인 식물이야말로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보는 견해도 다른 한편으로 성립한다. 모든 동물은 존재 자체를 식물에 의존한다. 인간도 동물의 일종이므로 야생・재배종을 포함한 다양한 종류의 동식물에 의존한다. 인간이 소비의 대상으로 삼는 일부 동물도 식물에 의존한다. 즉 인간은 궁극적으로 식물의 은혜를 입는다. 결국, 생태학, 다시 말해 먹이의 소비와 연쇄의 관계성에서 보면 인간과 식물의 어느 한쪽을 중심이나 주변에 위치 짓는지에 따라 역전과 재역전이 가능하다.

이제 신화학(mythology)의 관점에서 중심주의를 고찰해보자. 세계에는 특정 동물을 숭고한 위치에 놓는 관념을 가진 사회가 무수히 많다. 동아프리카의 마사이족은 사자, 시베리아의 우데족(the Udé), 나나이족(the Nanai), 만주족은 시베리아호랑이(만주족은 “후린(Hu Lin)” 곧 ‘왕’으로 부른다.), 북아메리카 북서해안 부족들은 범고래, 북해도 아이누족은 불곰과 범고래와 올빼미, 아스테카 문명은 재규어, 중앙 안데스 문명은 콘도르 등이 그러한 존재들이다. 이 사례들에서는 특정 종의 동물이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동물이 주(主)가 되며 인간이 종(從)에 위치한다고 속단할 수 없다.

세계의 창조주가 인간과 동물, 식물, 물, 불을 창조했다는 신화를 가진 민족은 수없이 보고되었다. 예를 들어 북아메리카 선주민인 평원 인디언 수족(the Sious)은 세계의 모든 사정은 우주의 진리이며 창조주인 “와칸탕카(wakan tanka)에게서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와칸은 ‘신비’, 탕카는 ‘위대하다’는 뜻이다. 인간과 동물, 식물, 돌과 물, 나아가 몇몇 정령 등 모든 것은 평등하며 상하, 우열의 관계가 없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인간 이외의 것은 ‘나무의 사람들’, ‘돌의 사람들’, ‘새의 사람들’과 같이 불린다. 이처럼 인간과 그 이외의 존재는 평등성과 상호 ‘유대’를 특징으로 하며, 수족 사람들은 인간중심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창조주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하는 시원성(始原性)의 담론은 기독교, 불교 등의 기성종교와 비인간중심주의를 표방하는 많은 민족이 공유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창생신화(創生神話)의 사상이 역사 속에서 지속해서 견지되지 않고 어느샌가 인간을 중심에 놓는 사상으로 변질하는 예도 적지 않다. 이 점에서 유럽에서 켈트 민족의 신화는 이질적이다. 켈트 민족의 신화에서 우주는 물과 불이 교대로 지배하는, 시작도 끝도 없는 윤회의 세계이다. 그 어딘가 한 지점이 현재라고 하는 사고 또한 인간중심주의와는 완전히 별개이다. 지금까지 신화학에서 비인간중심주의의 사례를 살펴보았다.

 

⑷ 인간과 동물의 동일성론

 

다음으로 이러한 생태학과 신화학과는 전혀 다른 발상의 비인간주의를 논하겠다. 이 논점은 인간중심주의를 근저에서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동화하거나 자연과의 사이에서 동일성을 찾아내는 발상이다. 즉 자연과의 동화 혹은 공생을 통해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패러다임이며 동화(assimilation)와 동일화(identification)를 달성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데스콜라의 논문(2008a)이 소개하는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베트남 신화를 인용하겠다.  

데스콜라가 인용하는 신화는 1910년대 베트남 중부 고지대에 거주하는 롱가오족(the Reungao)과 함께 살았던 에밀 켐린(Emile Kemlin)이 채집한 설화이며 오이(Oih)라는 이름의 여성과 호랑이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느 날 저녁 오이가 집 베란다에서 쌀을 빻고 있을 때 목에 뼈가 걸린 호랑이 한 마리가 근처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호랑이는 목에 걸린 뼈를 빼내려고 껑충 뛰어오르다 베란다에 떨어지고 말았다. 공포에 질린 오이는 손에 든 소쿠리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그 소쿠리는 호랑이 머리 위에 떨어졌다. 호랑이는 놀라 하늘을 바라보고 생각지도 않게 뼈를 토해내 버렸다. 호랑이는 무사히 그 현장을 떠났다.
그날 밤 오이는 호랑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호랑이는 “우리는 아버지 세대에서 딸 세대까지 친구 관계를 맺게 되었소.”라고 말했다. 딸은 “안될 일이야. 누구라도 그런 감언이설에 넘어가지 않아.”라고 답했다. 호랑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요. 우리야말로 감언이설에 넘어간 것이 아닌가 두려움에 떨고 있소.”
다음 날 아침 오이는 숲에서 실물의 호랑이를 만났다. 호랑이는 큰 멧돼지를 안고 있었다. 호랑이가 오이를 보자마자 사냥감을 땅에 내려놓고 그 고기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오이에게 던져주고 남은 것은 자신이 가져갔다. 이런 일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오이는 이날 이후 호랑이에게서 먹고 남은 고기를 얻게 되었다. 오이는 숲에 가면 그녀의 숙부(=호랑이)가 남긴 사슴이나 노루의 고깃덩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켐린 신부에 의하면, 이오와 호랑이가 맺은 약속은 크라오 콘 바(krao con ba), 즉 롱가오 사람들과 다른 인간이나 비인간 사이의 공적인 동맹 관계를 기록하는 계약서를 말하며, 쌍방의 당사자는 특별한 의무를 지게 된다.

이러한 민족지와 자신의 조사에 기초해서 데스콜라는 세계 속의 수많은 민족은 보통 동물이나 식물이 인간적인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롱가오족 외의 경우에서도 예를 들어 콜롬비아의 마쿠나족(the Makuna)은 맥이 춤출 때 잇꽃나무의 염료로 몸을 물들인다고 생각하고 페커리는 의례 중에 카드놀이를 한다고 말한다. 브라질의 와리족(the Wari)에 의하면, 페커리는 마니옥 술을 만들고 재규어는 아내가 요리에 사용하는 먹이를 사냥해서 귀가한다고 한다. 이러한 사례는 과거의 신화일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는다.

앞서 언급한 롱가오족의 예처럼 호랑이가 인간과 맹약을 맺고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유럽의 민화에서 동물을 인간처럼 묘사하는 것과 비슷한 수사학적인 은유(메타포)의 수법에 불과한 것일까? 메타포를 즐겨 사용하는 무문자사회 사람들은 단순히 메타포 능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실천지(實踐知)와 상징적인 사고를 겸하는 사고 양식에 친숙하다고 데스콜라는 평한다. 게다가 동물을 인간과 구별하지 않고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사고하는 관념이 발달한 사회에서는 주변의 자연환경에서 비인간적인 존재의 가시적인 현상이나 행동을 인간과 유사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이것은 인간중심주의와 다름없다. 롱가오족의 설화가 동물의 행동에 관한 자연과학적인 정보보다 더욱 타당하면서도 쉽게 기억되는 것은 이러한 인간중심의 관념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호랑이가 말을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롱가오 사람들이 이해할만한 이유를 자연과학자는 댈 수 없다.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는 보편적인 틀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환경과의 관계에서 오랜 세월 편성되어온 다원적으로 엮인 관계의 결과이며, 따라서 직감적이든 반직감적이든 실천적 지식과 상징적인 표상을 구별하지 않는다.

데스콜라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자연과 문화의 대립은 무문자사회에서 무의미하다고 단정한다. 이에 반해 현대의 인간중심주의자는 시공이 다른 지역의 문화를 해명하는 구조를 제기하는 따위는 안중에 없다. 기껏해야 자기와 비자기(타자)의 관계를 객관화하기 위한 일반적인 틀을 제기할 가능성만을 가진다. 

이처럼 인간중심주의의 틀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인간과 자연 간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유추하고 식별할 필요가 있다. 이때 인간과 자연이 동화하거나 동일화되는 측면에 역점을 두는 사고과정이 중요하다. 그래야 인간은 자연을 구성하는 여러 측면을 그 외관과 행동과 속성으로부터 유추하고 인간과의 차이점과 유사점에 대한 틀을 제시할 수 있다. 동화와 동일성은 애니미즘 및 토테미즘과 관련된 개념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식물중심주의와 (인간을 포함한) 동물중심주의가 성립할 수 있다. 다만 생존을 좁은 의미에 한정하면, 식물중심주의는 생명의 제공자로서, (인간을 포함한) 동물중심주의는 생명의 박탈자로서 생태학적인 위치에 있게 되어 완전히 정반대의 관계에 놓인다. 그렇다면 인간을 제외한 동물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은 없을까?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인문학에서의 비생태학적인 사상이다.

 

 

2. 애니미즘과 토테미즘

 

애니미즘(animism)과 토테미즘(totemism)은 모두 인문학, 특히 인류학과 종교학 분야에서 자주 언급되는 개념이다. 전자는 돌이나 물 등의 무생물과 생명체에 영혼이 깃들이 있다는 관념이며, ‘생명’, ‘숨’을 나타내는 라틴어의 아니마(anima)에서 유래한다. 자연물에서 영혼을 발견한다는 관념은 세계 각지에 존재한다. 멜라네시아의 솔로몬 제도와 뉴헤브리디스(New Hebrides) 제도에서는 돌에 마나(mana)라고 불리는 초자연적인 힘이 깃들어있다는 관념이 발달해 있다(Codrington 1891). 솔로몬 제도에서는 인간은 사후에 틴달로(tindalo)라고 불리는 사령(死靈)이 된다고 하고, 뉴헤브리디스 제도에서는 뷔(vui)라고 불리는 영이 된다고 하는 신앙이 있다. 모두 마나를 발휘해서 인간에게 은혜나 재앙을 내린다고 생각한다. 틴달로와 뷔 모두 영적인 존재이고 지역 고유의 애니미즘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토테미즘은 개인이나 집단이 특정의 동식물과 계보 상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는 관념이며, 18세기 북아메리카의 오지브와 선주민 사회에서 곰을 죽인 결과 곰을 선조라고 생각하는 집단으로부터 보복이 행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유럽인을 통해 서구에 소개되었다. 토템인 동물을 먹는 것이나 죽이는 것은 통상 금지된다. 같은 토템 동물을 이름으로 갖는 집단 내에서의 혼인도 금지되는 사회가 많다. 자신의 선조가 되는 동물을 먹는 것은 인육을 먹는 것과 같고 동일 토템 집단 간의 혼인은 근친상간과 다름없다는 규범이 정착된다.

그런데 데스콜라의 존재론에 관한 논의에서 서구중심적으로 전개된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은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시베리아 등의 민족지 사례에 의거해왔고(Descola 2013), 일본이나 중국의 사례를 바탕으로 한 분석은 거의 없다. 이 점에서 이 책에서 다루는 일본의 사례에 대한 비교 분석적 논의는 의의가 있다.

 

⑴ 자연신앙과 신의 세계

 

일본에는 애니미즘적 자연신앙이 풍부하게 존재한다. 즉 특정의 토템과 집단 간의 관계가 명시적인 세계 여러 지역과 달리 자연 속에서 신을 발견하는 신앙이나 관념을 나타내는 사례가 많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동북지방의 “마타기”[사냥꾼]는 수렵 동물, 씻은 쌀, 산나물 등의 모든 자연물이 산신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사냥꾼 마을에는 오오야마쓰미(大山祇 일본의 신)를 모시는 신사가 있으며 오오야마쓰미오오가미는 산의 신으로 여긴다. 게다가 사냥꾼의 수렵에서 다양한 금기와 의례 등은 수렵의 성공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자연을 지배하는 산신과의 관계를 지속하는 지혜라고 볼 수 있다. 사냥꾼은 인간이 죽은 후에 산에 잠든다고 생각하며 여기서 산상타계(山上他界) 관념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田口 2014).

북해도 아이누 사회에서 동물은 “카무이”라고 불리는 신의 세계로부터 나타나는 분장한 신이며, 인간에게 고기와 모피 등의 은혜를 내린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그에 감사하며 소비한 후에 술이나 공물을 갖춰서 동물의 영(靈)을 신의 나라에 되돌려 보내는 의례를 행한다. 곰을 보내주는 의례는 “이오만테”라고 불린다. 곰의 영이 신의 나라로 되돌아가는 여행에 앞서 곰이 다시금 인간계를 방문하도록 기원하며 “이나우”라고 불리는 제구(祭具)와 술과 떡 등을 바친다. 큰곰은 카무이의 나라에서 인간계로 내려온 키문 카무이(산신)이다. 큰곰과 더불어 “레푼 카무이”가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앞바다의 신’을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범고래를 가리킨다. 나아가 “코탄코르 카무이”는 ‘마을의 수호신’이라는 의미로 올빼미를 가리킨다. 범고래는 어획의 대상으로서 식용되지는 않지만, 범고래를 뒤쫓아가는 고래는 포획할 수 있다. 고래의 뼈는 해안가에 안치되어 보내는 의례의 대상이 되며, 그 의례는 “훈페사파아노미”, 올빼미를 보내는 의례는 “모시리코로카무이 오프니레”라고 불린다.

또 일본의 산신 신앙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야나기타 구니오는 그것을 죽은 자의 영이 산속에서 타계하는 관념의 예증으로 파악했다(柳田 1963). 한편 사쿠라이 도쿠나로(桜井徳太郎)는 영산신앙(靈山信仰)에 의한 산중타계관(山中他界觀)을 논했다(桜井 1986). 야나기타는 타계한 산신이 봄이 되면 마을에 내려와 밭의 신이 되고, 가을에 다시 산으로 돌아간다고 보았다. 그리고 산에는 야마미야(山宮 산신이 거처하는 신사)가, 마을에는 사토미야(里宮)가 제사 공간이 된다. 이 사고는 일본민족의 산신 신앙의 기본이다. 지금도 오쿠노토(奥能登, 혼슈 북서부의 동해에 접한 지역)에서 행해지는 아에노코토 신사가 그러하며, 오쿠노토 사람들은 수확 후 밭의 신을 맞이하여 음식과 술을 대접하고 해를 넘긴 후 다시금 밭의 신을 보낸다.

한편 사쿠라이는 산중의 산신에 대해 사람들이 산기슭에서 영산을 배례할 뿐만 아니라 산정상에 가까운 곳을 두려워하며 금기라고 생각한다고 보았다. 후에 밀교나 슈겐도(修験道)의 영향을 받아 산정상을 향해 등배(登拝)하는 것으로 변했다고 한다. 한편 사사키 코우메이(佐々木高明)는 야나키타, 사쿠라이 양쪽 모두 마을의 수전 경작민이 바라본 산에 대한 신앙을 논한 것이며 산속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산악신앙과는 별개라고 지적한다(佐々木 2006). 그러니까 평지에서 산지로 이주한 산주민 집단이 산지에 적응한 것인지 아니면 평지민과 산지민이 각각 독자적으로 살아온 것인지에 관한 역사적인 고찰은 시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여하간 이 문제는 생업의 측면뿐 아니라 정치 권력의 개입 정도와 그 영향을 감안해서 검토해야 할 과제이다(米家 1997).

지금도 이와쿠라(磐座, 岩倉)라고 불리는 자연숭배신앙이 각지에 분포하며, 산, 하늘, 천둥 등의 영혼 혹은 신이 강림해서 돌, 큰돌, 나무의 요리시로(依代 빙의체)에 빙의된다고 한다. 요리시로의 영역은 성스러운 공간으로서 그 주변은 시메나와(注連縄 금줄)가 둘러쳐져 있다. 교토의 가미가모 천둥신(上賀茂雷神)이 빙의하는 장소에는 모래 둔덕이 조성되어 있다. 이러한 장소를 히모로기(神籬)라고 한다.

토테미즘에 관해 현재 일본에 전해지는 예는 그리 많지 않다. 교토의 미시마(三嶋) 신사에서는 뱀장어를 신성시하여 우지코(氏子)나 안전한 출산과 자식의 점지를 기원하러 오는 사람들은 소청을 빌기 전까지 뱀장어를 금식하는 풍습이 있다. 미시마 신사의 제신은 오오야마쓰미오오가미(大山祇大神), 아마쓰히다카히코호노니니기노미코토(天津日高彦火瓊瓊杵尊), 코노하나사쿠야히메오미코토(木之花咲耶姫命)인데, 오오야마쓰미오오가미의 심부름꾼이 바로 뱀장어이다. 뱀장어는 토템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것으로 위치지을 수 있다(友田 2016).

데스콜라도 『자연과 문화를 넘어서』에서 일본의 산 신앙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산신이 밭의 신이 된다는 이야기는 전술한 바이다. 또 ‘산’이라는 개념에는 본래 ‘산’, ‘숲’,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라는 중층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데, 이러한 중층적인 의미화가 전후(戰後) 인공림의 확장으로 인해 사라졌다는 것도 지적한다(Descola 2013). 다만 상세한 기술에는 오류가 있고, 뒷산과 깊은 산, 야마미야(山宮)와 사토미야(里宮), 산악신앙과 평지민의 산 신앙을 구별해서 논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일본의 여러 사례를 보여줌으로써 기존의 애니미즘론과 토테미즘론에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다. 더욱 중요한 점은 비인간주의의 사상이 일본의 자연사상에 뿌리 깊게 남아있다는 것이다. 일본만이 아니다. 북아메리카의 선주민과 오스트레일리아 선주민에게도 인간적 존재를 넘어선 영혼과 창조주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다. 즉 영혼과 창조주가 세계의 중심에 있으며 인간은 어디까지나 그 주변에 있는 존재였다. 그에 따라 인간은 신을 경외하고 영혼이나 창조주로부터 받은 은혜를 누릴 수 있었다.

 

⑵ 인간중심주의의 동요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인간중심주의와 비인간중심주의는 근대적인 사고와 학문 속에서 정의되어왔으며, 그 대립적인 구도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19세기 이후이다. 본래 인간중심주의는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사고라고도 볼 수 있다. 어느 한쪽을 주(主) 내지는 종(從)의 입장에 놓는 가정은 교조적인 도식론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이 중심인가, 자연이 중심인가 혹은 식물인가 동물인가 하는 논의는 어느 쪽이든 중심세계와 주변 혹은 종속적인 세계의 관계를 표상하는 것에 불과하다. 본 절에서는 인간을 중심에 놓고 동물과의 관계성을 보여주는 사례를 소개하고, 인간중심주의에 기초한 동물을 다루는 방식이 다양하며 단순 모델로 정의될 수 없음을 보여주겠다.

그림 3은 영국 인류학자 에드먼드 리치가 제시한 동물의 가식성(可食性)과 혼인 금기에 관한 모델이다(Leach 1964). 이 모델은 인간 전체를 중심에 놓고 동물과의 관계를 논한 것인데, 혼인 관계는 개인을 중심에 놓는 자아 중심적인 발상에서 다뤄진다. 이 모델이 반드시 합리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덧붙인다.

그림 3. 인간과 동물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인간중심주의의 동심원 모델 (Leach 1964를 기본으로 작성)

그림 3은 중심에 인간을 배치하고 동물과의 관계성을 거리로 표시하고 있다. 리치는 잉글랜드의 농촌지대를 염두에 두고 이 모델을 만든 것 같은데, 암묵적으로 영국의 왕실림(王室林, Royal Forest)을 상기시킨다(秋道 2016). 여하간 인간에 가장 가까운 것은 집안에서 활용되는 개, 고양이, 새 등의 반려동물이다. 그 외측에는 소, 양, 염소, 말, 돼지, 닭 등의 가축동물이 배치된다. 그리고 그 외부에는 수렵의 대상이 되는 야생동물이 위치한다. 이 속에 사슴, 여우, 야생토끼, 멧돼지 등이 포함된다. 야생동물 생식 지역의 더 바깥에는 여태껏 본 적 없는 동물이 존재한다. 이 도식은 인간을 중심에 놓고, 다양한 동물 종을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서열화한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인간이 주(主)이고 동물이 종(從)인 것은 변함없다. 리치의 논의에 의하면, 인간과의 관계는 우호(반려동물), 순화와 서비스(가축), 적대관계(수렵 동물), 미지의 관계(야생동물)로 정리된다. 리치는 인간-동물의 거리를 혼인문제와 연결하기 위해 이 사례를 제기한 감이 있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지금까지의 사례만큼 단순명쾌해야 한다. 두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다.

첫 번째는 일본의 사례이다. 일본의 민속학에서는 노모토 가이이치(野本寛一)가 『생태와 민속』이라는 책에서 인간과 동물과의 상호교섭을 검토하면서 인간과 적대적인 동물이 그와 동시에 영성을 가진 것으로 신격화된다는 것을 밝혔다(野本 2008). 예를 들어 사슴은 가스가 신사(春日神社), 이쓰쿠시마 신사(厳島神社), 가시마 신사(鹿児島神社) 등에서 신의 심부름꾼(神鹿)으로서 보호받는다. 그러나 사슴이 항상 신수(神獣)였던 것은 아니다. 덴무 천황(天武天皇, 631-686) 675년, 소, 말, 개, 원숭이, 닭의 육식이 벼농사 기간(4~9월)에만 금지되었는데, 이 때에도 사슴과 멧돼지의 수렵과 육식은 허용되었다. 벼농사에 유익한 동물을 보호하고 농작물을 망치는 사슴과 멧돼지는 유해동물로 간주한 탓이다. 흥미로운 점은 현대 민속행사로서도 사슴사냥 제의가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며, 보리 짚, 잣나무 가지와 잎이나 오동나무 등을 가지고 실물 크기의 암수 두 마리의 사슴 모형을 만들어 농경의 풍요를 기원한다. 이 제의는 노토세노시카우치(能登瀬諏訪) 신사와 도우에이마치(東栄町)의 신사에서 행해지고 있다. 사슴이 유해동물이면서도 오곡 풍요를 위해 기원하는 소재라는 발상은 미카와(三河), 시나노(信濃), 도오토우미(遠江) 지방에 짙게 남아있다. 나아가 사슴사냥에 사용되는 모형 짐승을 사용한 의례는 일본 서남부에 뚜렷하게 남아있고 사슴을 포함한 야생동물을 유익한 사냥감, 유해동물, 영험한 짐승으로 간주하는 사고는 역사적으로도 중층화되어 있다(背古 1992). 일본 늑대는 “오오카미(大神)”라고 하며 『만요슈(万葉集)』에는 “오오쿠치노마카미(大口真神)”라고도 한다. 한편 늑대는 인간이나 가축을 습격하는 맹수로서 두려움의 대상이고, 인간이 늑대에게 잡아먹힌 사례는 고대로부터 문헌에 수없이 나온다.

사슴과 늑대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자연계의 동물과 일본인과의 관계는 일원적이지 않다. 노모토는 유익한 영성이 있으면서도 해로운 측면을 가진 동물을 양의성의 문제로서 다룬다. 그리고 양의성을 가진 동물과의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현대일본에서 늑대가 멸종하고 사슴이 유해동물로서 다뤄지고 있는 현실을 주의 깊게 성찰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미크로네시아의 사례이다. 미크로네시아의 중앙 캐롤라인 제도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물고기가 이용된다. 중독을 일으키는 복어를 제외하면 모든 물고기가 이용된다. 다만 그 모든 것이 유용하고 식용되는 것은 아니다. 섬 주민들은 상어, 가오리, 곰치, 고래, 돌고래 등은 ‘나쁜 물고기’로서 식용하지 않는다. ‘나쁜 물고기’는 물고기이기도 인간이기도 한 양의적인 존재이다. 또 여성이 섬의 토란밭에 물고기를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나 남성이 고기잡이에 나가기 전날 밤 성행위를 하는 것은 금기로 되어있다. 큰양놀래기, 대형 능성어, 바다거북의 대가리는 추장에 우선 상납된다. 임산부나 월경 중의 여성은 참치, 농어 등을 먹으면 넓적다리가 붓는 증상이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배 목수는 몸통에 줄무늬 모양이 있는 쥐돔, 쏨뱅이, 청줄돔 등을 먹으면 건조한 카누가 파손된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인간의 범주(추장, 젠더, 임신부, 월경 중의 여성, 전문기술의 배 목수)와 물고기 종류에 따른 음식물 금기가 통용되며 사회규범으로 규정되고 있다(秋道 1981).

이처럼 일본과 미크로네시아의 예에서 보시다시피 인간을 중심에 놓고 동물과의 관계를 정리해도 리치의 동심원적인 모델만으로는 거의 설명되지 않는다. 캐롤라인 제도의 사례는 자연(=물고기)과 문화(=물고기의 가식성)의 이원적인 해석이 가능하지만, 상어나 돌고래를 포함한 ‘나쁜 물고기’와 일본의 영험한 짐승과 유해동물의 양의적인 위상은 자연과 문화의 대립을 넘어선다. 그리하여 몇몇 논제로부터 양자의 대립을 넘어서는 사상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3.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을 넘어서

 

⑴ 동물문화론

 

총합지역환경학 연구소의 초대의장인 히다카 도니타카(日高敏隆)는 일찍이 『동물이라는 문화』라는 저서를 간행했다(日高 1988). 아마도 대개의 인류학자는 ‘동물에 문화 따위는 없다, 문화를 가진 것은 인간뿐이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 귀결은 ‘동물은 자연’이고 ‘인간은 문화’이다. 백번 양보해도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인간(호모 사피엔스) 이전의 문화원형(protoculture)을 간직한 존재이고, 침팬지 등이 나뭇가지로 개미집을 쑤셔서 흰개미를 끄집어내어 섭식하는 ‘도구사용’ 행위는 하위문화(subculture)에 속한다. 인류 진화의 도식에서 문화는 우월한 인간이 가진 속성이며, 유인원이나 원시인은 그보다 열등한 원초적인 문화를 가진 존재로 간주된다.

그러나 히다카는 이것을 완전히 뒤집는 사상적인 의미를 제기한다. 히다카는 한 강연에서 말미잘의 사례를 다룬다. 말미잘은 자포동물(刺胞動物)이며 음식을 빨아들이는 위수관(胃水管)을 가지고 있는데, 노폐물을 체외로 빼내는 배설기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즉 외부의 것을 빨아들이는 입과 배출하는 입이 같다. 입과 항문을 각각 가진 인간과 비교해서 말미잘은 상당히 다르다. 또 연골어류, 양생류, 파충류, 조류, 그리고 오리너구리 등의 일부 포유류는 항문, 배뇨구, 생식구가 구별되지 않고 하나의 배출구가 그것들의 기능을 겸하고 있다. 이러한 체내기관의 분화의 차이에서 우리는 인간이 개구리, 도마뱀, 펭귄 등보다 우월하며, 이와 마찬가지로 상어, 거북, 악어, 제비 등은 말미잘이나 해파리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히다카의 발상은 어떤 생물이라 해도 독자적인 생존방식을 구사한다는 관점으로 일관한다. 따라서 형태나 기능의 차이로부터 동물의 우열이나 진화상의 위치를 구별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어떤 동물도 살아가는 하에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육식동물은 날카로운 이빨과 민첩한 운동능력이 있는데, 인간은 치아와 운동능력 대신에 도구를 제작하고 사용함으로써 육식동물과 같은 능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동물은 신체의 형태와 기능을 발달, 분화시켜서 진화, 적응해왔던 것이며, 인간은 외재화한 도구를 통해 적응을 수행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⑵ 환세계론

 

히다카의 발상은 독일의 야콥 폰 윅스퀼(Jakob von Uexküll, 1864-1944)의 환세계론을 발전시킨 것이다. 동물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지각하는 것이 아니다. 외계를 감지하기 위해서는 후각, 시각, 청각, 촉각, 피부감각 등의 수용기관을 매개로 하며, 그 기능과 정밀도는 식물, 동물의 종류마다 다르다. 예를 들어 곤충 중에서 배추흰나비는 이성과 교배할 때 독특한 지각능력을 구사한다고 알려져 있다. 암컷 날개 뒷면에 있는 인분(鱗粉)에는 자외선을 반사하는 성분을 포함하고 있으며 수컷이 그 정보를 받아서 예를 들어 양배추밭을 탐색해서 교미 상대를 발견한다. 이미 교미를 끝낸 암컷은 날개를 펼쳐서 수컷에게 날개 뒷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자외선을 감지할 수 없는 인간은 이런 정보를 알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오감을 가진다는 점에서는 어떤 사회집단도 같은 감각적 수준에 있지만, 생활 체험이나 거주환경 등에 의해 특정 수용기관이 발달한다. 에스키모가 얼음과 눈의 하얀 세계에서 사냥감의 그림자를 찾아내는 시각 능력, 콩고나 뉴기니의 숲에 사는 사람들이 새소리를 민감하게 분간해내는 청각 능력은 도시에 사는 인간에게는 어림도 없다. 게다가 미지의 물체가 무엇인지를 탐색할 때 냄새를 중시하는 경향, 시각에만 의존하는 경향, 촉각으로 우선 감정하려는 경향 등 문화적으로 다 다를 수 있다. 이처럼 생명체가 환경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종에 따라 때로는 개체에 따라 상대적일 수 있음을 정립한 것이 윅스퀼의 환세계론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환경(環境)’이라는 말은 본래 중국어이며 당나라 시대의 『신당서(新唐書)』(1060)에 처음 등장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이후 영어의 environment의 번역어로서 주체인 인간과 객체로서의 주변 세계를 구별하는 의미로 도입되었다. 영어의 전신은 프랑스어의 밀리유(mileu)이다.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는 “모든 유기체의 존재에 필요한 외부조건의 전체”로서 밀리유를 정의해서 생물학에 도입했다. 환경을 뜻하는 독일어는 움게붕(Umgebung)이다. 움(Um)은 ‘주위’, 게붕(Gebung)은 ‘주어져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윅스퀼은 환경을 이해할 때 몸 주위에 단지 존재하는 환경(umgebung)만이 아니라 각각의 동물이 주어진 것으로서 의미를 구축하는 세계, 즉 움벨트(Umwelt)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벨트(Welt)는 ‘세계’를 의미한다. 모든 생물에 공통하는 환경은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생물 종에 의한 환경 세계이다. 히다카 도니타카(日高敏隆)는 이것을 ‘환세계(環世界)’라고 칭했다.

동물의 문화론과 환세계론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론이다. 문화인류학자 이와타 게이지(岩田慶治)는 문화를 통해 세계를 본다는 것이란 인간이 색안경을 끼고 세계를 보는 것이라는 ‘비유’를 들었지만, 환세계론은 동물도 자기만의 눈으로 세계를 본다는 것을 강하게 제창한다. 그리고 인간은 생물로서의 ‘색안경’을 벗고 세계를 볼 수 없다. 여기서 인간을 중심에 놓고 자연과 문화를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관점은 와해한다. 자연이어야 했던 동식물에게 환경과 상대하는 고유의 문화가 있으며 따라서 문화의 범위가 인간의 독점적인 영역이 아니라 생물 또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⑶ 주체성론

 

오귀스탱 베르크(Augustin Berque)는 와쓰지 데쓰로(和辻哲郎)의 『풍토론』에 의거하여 “풍토성에 관한 인간존재의 주체성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인간 풍토의 그것에는 한계가 없는 주체성, 즉 자연 그 자체의 주체성도 고려해야 한다.”라고 말한다(Berque 1992). 즉 주체성이란 자기동일성을 가지면서 풍토 속에서 ‘자기발견’하는 것이고, 그 주체성의 장은 절대적으로 그 주체의 국소성(topicité)에 한정되지 않는다. 자연도 살아가는 한 어느 정도의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서술한 윅스퀼의 환세계론은 생물을 대상으로 한 주체성인 것에 반해 와쓰지 데쓰로는 인간에게도 풍토는 단순한 주변 세계가 아니라 주체적인 세계인식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베르크는 자연이 가진 주체성에 대해 와쓰지 데쓰로의 ‘자기발견성’과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에 해당하는 개념을 위치 짓는다.

자연을 인식하는 인간의 주체성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근대지(近代知)의 토대이다. 그러나 베르크는 자연에도 주체성이 있다고 말한다. 이 관점에서 데스콜라가 제창한 신체성과 내면성의 전개 논리는 크게 바뀐다. 데스콜라가 인간을 중심으로 자연과의 유사성과 이질성을 정리했다고 한다면(그림 4의 A),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내면성의 위상이다. 즉 베르크 식으로 말하면 자연과 인간은 주체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유사한 존재이다(그림 4의 B). 그렇다면 자연은 내면성에서도 인간과 유사한 특징을 가질까? 신체성에 관해 베르크는 언급하지 않는다. 데스콜라는 신체성에서 인간과 유사한 경우를 ‘토테미즘’, 유사하지 않은 경우를 ‘애니미즘’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베르케에게 자연의 주체성론의 배경에는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을 넘어선 자연 인식이 있다. 이에 따라 베르케의 세계에서 데스콜라의 신체성과 내면성은 변별적인 의미가 없다.

한편 윅스퀼의 환세계론은 가시화된 신체성에 관한 논의에 유익한 관점을 준다. 윅스퀼이 지적한 바에 의하면, 인간이 보는 자연은 객관적이지도 보편적이지도 않고 만능도 아니다. 인간이 자연물을 인간과 대비해서 유사한가 이질적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그림 4의 C). 그렇다면 데스콜라가 규정한 신체성은 인간중심적인 판단이다.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자연에 의한 환세계를 참조한 것은 아니다. 데스콜라의 세계관은 인간중심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신체성에 관해서도 인간이 본 자연은 유사성과 이질성을 겸하고 있고, 환세계론에서 차이화는 변별적인 요소가 아니다.

요약하면 신체성과 내면성의 이원적인 구별 자체를 가정하면 데스콜라의 논의로 귀결하지만, 자연 주체성을 인정하는 견해나 환세계론에서 논하면 신체성과 내면성의 이항대립 도식은 상대화된다. 베르크와 윅스퀼의 사상을 관통하는 것은 비인간중심주의이다. 이 발상이 미래의 철학 그리고 지구에서 인간의 위치를 사유하는 데에서 크게 시사하는 바가 있으리라는 것이 이 책 전체의 주장이다.

 

 

4. 공생과 커먼즈론

 

앞 절에서 인간과 동물이나 식물의 중심성에 관한 논의에서는 인간과 개개의 생물 종과의 관계성을 문제 삼지 않았다. 이를테면 인간과 동물의 관계성은 피포식, 포식, 반려, 오락, 가축화, 순화, 무관심 등의 구체적인 관계로서 생각할 수 있다.

인간중심주의에서 유용성의 관점에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성을 정리하면 유용한 동물과 해로운 동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동물 종은 어느 쪽도 아닌 ‘단지 생명체’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인간과 동물, 나아가 인간과 식물과의 상대적인 관계를 논하는 데에서 우선 두 가지 관점이 중요하다. 첫 번째는 생명체와의 공생에 관한 이해방식이며, 두 번째는 공생의 사상과 관련한 커먼즈의 관점이다. 그리하여 공생과 커먼즈론이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선 논의를 환기하는 가능성을 검토해보겠다.

 

⑴ 공생이란 무엇인가?

 

자연과 문화는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공생해서 생존하는 것이라는 사고는 지금도 제기되고 있다. 이 사상은 적어도 종래의 기독교적인, 자연을 문화(인간)에 종속시킨다는 발상과 결별하는 획기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이 공생 개념은 한번은 정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무엇을 공생이라고 생각해왔는지를 말하지 않은 채 애매한 과학용어를 빌리기만 한다면, 공생을 은신처로 삼은 경제우선주의의 담론이 석권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세계에 미치는 오류는 이루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즉시 기각해야 한다.

공생이라는 개념은 본래 생태학 용어였고, 정치학, 철학, 교육학, 사회학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어왔다. 나는 공생 개념을 채택하는 데에서 자연계의 자원을 이용하는 인간이 동식물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깊게 고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생은 영어로 symbiosis라고 한다. symbiosis는 그리스어 유래의 단어로 ‘함께 산다’는 뜻이고 이종(異種)이 상호작용을 통해 함께 살아가는 것을 나타낸다. 다만 이 속에는 쌍방이 이익을 얻는 상리공생(相利共生 mutualism), 한쪽은 많은 이익을 얻지만 다른 쪽은 이익과는 무관한 편리공생(片利共生 commensalism), 한쪽만이 이익을 얻고 다른 쪽은 부정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종속적으로 타자에 의존하는 관계라는 뜻의 기생(parasitism)으로 나뉠 수 있다. 이외에 편해공생(片害共生 antagonism)이 있으며, 이는 일시적으로 한쪽이 이익을 얻지만 그 이익도 결국 허사가 되는 예를 가리킨다. 즉 공생은 두 종 간의 관계성에 주목한 일반개념이며 예전에는 상리공생만을 진정한 공생이라고 주장했지만, 생태계 전체를 고려하면 앞서 서술한 다양한 공생관계가 하나의 종 안에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또 생물의 진화나 변이를 염두에 두고 생태계까지 확장한다면 상리적(相理的) 관계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과 생물의 공생관계는 symbiosis의 개념뿐만 아니라 보다 쉬운 개념인 공존, 즉 co-existence의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공존은 ‘함께 존재한다’라는 의미에서는 symbiosis와 유사하지만, 이해관계가 명확하게 의미화된 개념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어느 쪽이든 애매한 의미 그대로 공생 개념이 광범위하게 사회과학의 분야에서 자의적으로 사용되어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 배경에는 ‘어부지리’의 발상이 있다.

철학 분야에서는 이반 일리치(Ivan Illich, 1926~2002)가 conviviality의 개념에 공생을 포함해서 제시한다. 이 용어는 본래 ‘주연(酒宴)’ ‘양기(陽氣)’, ‘연회기분(宴會氣分)’을 뜻하는데, 개인이 주위의 환경이나 공동체와 주체적으로 관계하는 가운데 창조성과 주체성을 유지하면서 집단과 공생하는 모습을 가리킨다. 일리치의 이 개념은 인간의 공생을 개인 수준을 넘어서서 개인과 집단의 상호작용으로 파악하여 개인이 집단의 희생이 된다기보다 상호이해, 상호협조 등의 과정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인류집단에 있어서 공생의 실태에 근접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일리치는 인간의 개인과 집단의 공생을 논하고 있으며 인간 이외의 생물 종과의 공생까지 언급하지 않는다.

물론 인간 이외의 생물 종 간의 공생관계에는 에너지, 물질, 정보에 관한 어떤 상호작용이 개입된다. 특히 정보의 교환, 즉 커뮤니케이션은 공생의 중요한 요소이다. 인간이 인간 이외의 생물 종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고자 할 때는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는 동작이나 신체표현을 매개로 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반려동물이나 가축에 대해서는 언어나 신체표현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이 일부 실행되지만, 보통은 자연계의 생물과 사람 사이에 그러한 언어적 커뮤니케이션 관계는 발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공생이란 인간의 선입견에 불과한 것일까? 그래서 의례나 기도를 통한 이종(異種)과의 커뮤니케이션, 가령 영적인 교감과 교류를 하는 것의 적극적인 의의를 생각해본다. 영적 존재나 생명체와의 상호교섭은 실체화할 수 없다는 유물론의 관점에서는 교감, 즉 sympathy는 부정된다. 그러나 샤먼이나 무당의 공수 등으로 잘 알려진 영매자의 존재는 이종(異種)이나 영적 존재와의 교류가 완전히 무위의 행위가 아님을 가르쳐 준다. 애니미즘이나 토테미즘을 신앙의 하나로 거론하는 지역이나 문화는 물론이거니와 그러한 형태의 신앙이 주류를 이루는 지역에서 사령(死靈)을 포함한 인간 이외의 존재와의 교섭은 오히려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영매자에 의한 초자연 세계와의 교류는 의례 속에서 실천되는데, 이 외에 인간과 이종 간의 교류를 보여주는 소재는 수없이 존재한다. 신화, 이야기 등의 구술 전승 분야와 조각이나 회화 등으로 표상되는 물질문화의 한 분야이다. 어떤 민족도 신화 속에서는 초자연적 존재와 인간의 관계가 뚜렷하게 나타나며 동물 조각을 선조로 숭배하는 양상은 무엇보다도 그 증좌(證佐)이다. 인간과 이종 간의 공생 사상이 세계를 넘어 전승되며, 조각이나 회화 등의 물질문화로서 사람들의 기억과 이미지의 세계에 정착한다. 공생론을 신화・전승, 조형물, 의례의 세 위상에서 고찰함으로써 새로운 지평이 열리지 않을까?

 

⑵ 커먼즈론과 생명체

 

커먼즈(the commons)는 공유재산을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공유지나 입회지에 있어서 공동의 이용 관행을 가리킨다. 커먼즈가 전 세계에 광범위하게 분포한 것은 논할 필요가 없다. 커먼즈는 그것을 준수하는 인간의 범위에서 보자면, 한 지역의 성원에만 한정된 로컬 커먼즈, 도시나 공원 등과 같이 일정한 규칙을 준수한다면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는 퍼블릭 커먼즈, 지구 규모에서 인류가 공생해서 보존하거나 이용상의 조정을 기획하는 글로벌 커먼즈로 나뉠 수 있다. 지금까지는 로컬 커먼즈에 관한 연구가 대부분이었다. 그것은 지역의 공유림이나 입회 어장 등 관리와 운용 주체가 지역공동체의 성원에 한정되며 개발도상국의 비교연구에서 로컬 커먼즈의 중요성은 현대 사회에서도 그 중요성을 잃지 않는다(Feeny et al. 1990).

공유는 복수의 이해관계자가 자원을 상호 나눠 가지는 제도 내지는 관행을 뜻한다. 그러나 인간들뿐만 아니라 인간 이외의 이종들 사이에서 자원을 나누어 가지는 것 또한 시야에 넣어 논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예를 들어 국내 각지에서는 사슴, 곰, 원숭이, 멧돼지 등의 야생동물에 의한 피해 보고가 점차 늘고 있다. 인간 측에서 보면, 야생동물은 농작물이나 나무에 피해를 주는 해로운 존재이다. 곰이 인간을 습격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예도 찾을 수 있다. 반달곰의 경우 먹이인 너도밤나무 과일을 찾아 마을 산에 출몰하기도 하고, 마을 산에 목탄제조 등의 연료 전환으로 인해 인간 활동이 뜸해지고 곰이 출몰하기 쉬워진 것 등이 피해의 주된 원인이다. 사슴의 경우 인공림에 있어서 식재목이나 천연 나무의 가지, 편백 등의 나무껍질, 하층 식생의 식해(食害)나 고산식물 군락의 감소 등이 일어나고 있다. 사슴에 의한 피해는 삼림 피해 전체의 7할 이상 상당하며 토양유출이나 삼림의 보수기능 저하 등의 생태계 악화에 심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멧돼지나 원숭이는 농작물, 과수, 표고버섯 등 직접 인간이 이용하는 작물에의 식해(食害)가 현저하다. 이 속에서도 야생의 생명체와 인간의 공생을 탐구하는 활동이 계속되고 있다.

북해도 아이누족에게 큰곰은 중요한 식료를 제공하는 야생동물이며 “키문 카무이”(산신)의 신성성을 가지고 있다. 곰을 식용, 모피용으로 이용한 후에는 곰의 뼈를 신의 나라에 되돌려 보내는 “이오만테”의 의례가 행해지는데, 다른 지방에서 꽃사슴은 그러한 의례의 대상이 아니다. 꽃사슴은 아이누어로 식료를 뜻하는 “유쿠”라고 하며, 아이누 사람들은 “유쿠코로 카무이”(사슴을 사육하는 신)가 자신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지상에 사슴을 풀어주었다고 믿는다. 또 인간을 위해 연어를 바다와 강에 풀어주는 “체부코로 카무이”가 있다. “코로”는 ‘사육한다’, “체부”는 ‘물고기, 특히 연어’, “카무이”는 ‘신’을 의미한다. 즉 곰, 사슴, 연어 등의 자연계 생명체를 인간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세계를 매개하는 존재로 여기는 세계관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의 제1장에서 고래론을 육식과의 연관에서 논술하고 일본의 역사 속에서 육식 금지령이 발동되는 상황에서도 멧돼지나 사슴, 고래가 식용된 것의 의미를 논할 것인데, 여기서는 그와 다른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이와테현(岩手県) 카미헤이군(上閉伊郡)에 있는 오오쓰치쵸(大槌町)에서는 연안의 충적평양부에 180개소의 용수정(湧水井)이 있다(谷口 2016). 이 마을에는 2011년 3월 11일에 발생한 지진과 쓰나미에 의해 파멸적인 피해를 보았다. 부흥 과정에서 제방을 높이고 성토를 조성하는 공사가 진행되었다. 당연히 용수정 일부가 성토 밑에 파묻히게 되었다. 또 강 입구에서는 수문을 건설하는 공사의 영향으로 지하가 굴착되어 지하 수위가 크게 내려가게 되었다. 한편 오오쓰치의 용수지대에는 민물 가시고시가 생식한다(森 2011). 가시고기는 빈영양의 용수에만 생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흥 시기에 지역의 자연, 역사, 문화 등을 고려한 마을 만들기가 중요했지만, 행정적인 측면에서 그것은 거의 인식되지 않는다. 용수는 사람들의 식수, 생활용수, 산업용으로 광범위하게 상용되어왔는데, 자연의 은혜인 용수는 인간의 독점적 영역이 아니다. 용수 환경에만 생존할 수 있는 가시고기를 포함해서 용수를 생명체들과 공유하는 발상이 불가결하다.

오오쓰치의 용수는 산, 강, 지하를 지나 바다로 순환하는데, 인간이 그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없다. 용수의 은혜를 입는 것은 인간이나 가시고기뿐이 아니다. 해저에서 솟아 나오는 용수 덕에 풍부한 조장(藻場)이 연안에 형성됨으로써 다양한 바다 생물의 생명이 유지될 수 있었다. 용수를 ‘지역의 보물’ 혹은 ‘향토재(鄕土財)’로서 보전하는 것은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秋道 2016a). 지역의 커먼즈로서 용수를 파악하지 않고서 새로운 부흥의 모습을 만들 수 있을까?

수렵 인구의 감소, 중산간(中山間) 지역의 과밀화와 피폐화 등에 의해 야생동물과 인간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본래 거리를 두고 ‘각자도생’해왔던 것을 이제는 공존이나 공생이라는 문구로 정리할 수 없게 되었다. 가시고시는 인간에게 유용하거나 해로운 생물이 아니지만, 유해동물이 된 대형 짐승과 인간의 상호작용에 또 다른 관점을 도입하고 그로부터의 새로운 논의가 필요하다. 적어도 커먼즈의 사상을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적인 존재와 환경까지 포함해서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현대적인 과제라는 것을 명기해둔다.

 

 

5. 새로운 지(知)의 구축을 향하여

 

서장의 마지막에 이 책의 구성과 의의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이 책은 2014년에 ‘코스모스 국제상’(공익재단법인 국제화와 연대의 박람회 기념협회)을 수상한 필리프 데스콜라의 몇몇 논의로 촉발된,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연구자들이 인간존재를 자연과 문화를 연결하는 것으로서 논하고자 한 것이다. 데스콜라 자신이 선택한 주요 논문 네 편을 참조하면서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을 넘은 새로운 인문지의 구축을 목표로 8편의 논문이 작성되었다.

이 책은 서장, 종장과 4부로 구성된다.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서장에서는 서양에 있어서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적인 사고를 상대화하고 인간중심주의의 탈구축을 위한 전망을 보여주었다. 비인간중심주의의 관점에서 인문지에서 자연숭배와 신의 사상을 조명하고,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성에 주목하여 지금까지 생태학과 철학에 걸쳐서 다뤄왔던 공생 개념과 공유사상으로서의 커먼스론을 재검토했다.

제1부에서 제4부까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각각 문제 제기가 되는 주제를 설정했다. 제1부 ‘자연은 인간에게 복수할까?’, 제2부 ‘자연은 인간의 친구인가?’, 제3부 ‘자연은 주체성이 있는가?’, 제4부 ‘자연은 경계를 넘어설 수 있을까?’로 했다. 이 책의 관점은 인간과 자연을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교류하고 포식, 피포식, 상극, 호혜성, 증여 등의 관계를 실현해온 존재로 파악한다.  

제1부에서는 데스콜라의 「친절한 포획물들」(1999)을 참고하면서 일본 및 세계의 구체적인 사례에 기초하여 ‘동물과 자연관’에 대해 고찰한다. 하나는 고래를 둘러싼 문제로부터 신 관념을 매개로 한 일본인의 자연관의 특질을 지적한다. 또 하나는 새와 인간의 속성을 겸비한 조인(鳥人 birdman)의 형상을 일본을 포함한 세계의 여러 사례로부터 다루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로부터 자연이 인간에 복수하는 것 그리고 인간이 죄악감을 가지면서 동물을 죽이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제2부에서는 데스콜라의 논문 「‘야생적인 것(le sauvage)’과 ‘순화된 것(le domestique)’」(2004)에 기반해서 인간에 의한 가축화 과정에서 공생관계와 자연의 조작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한 생태 인류학의 입장과 임상의학의 견해를 고찰한다. 여기서는 자연이 인간에게 친구인지 또 야생생물과 재배화, 순화된 생물, 실험에 제공된 생물에 대해 포괄적으로 생각한다.

제3부에서는 데스콜라의 「자연은 누구의 것인가」(2008b)에 기반하여 데스콜라가 설파하는 자연관을 철학 분야에서 다면적으로 고찰한다. 우선 신화학의 입장에서 존재론에서 애니미즘의 위치를 밝히고 자연에 대한 관념에 대해 재고한다. 그다음으로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이 20세기 이후 과학의 발달 때문에 왜곡되어왔다는 것을 논한다. 제3부에서는 자연에 주체성이 있는지를 둘러싼 논의를 다룬다.

제4부에서는 데스콜라의 「형상화의 아틀리에」(2006)을 기본으로 미학과 예술 인류학의 관점에서 이미지로서 표상된 자연이 어떤 의미와 메시지를 주어왔는지를 논한다. 예술 인류학의 관점에서 가면으로 나타나는 자연의 표상을, 서양과 비서양 사회에서 형상화・표상화의 어긋남에 대해 미학적인 관점에서 해명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형상화의 문제로부터 자연은 인간의 세계에 경계를 넘어 움직일 수 있는지를 주제로 다룬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새로운 지식과 견해가 생성되리라 기대한다.

데스콜라는 과거 거대이론이 성행한 시대를 방불케 하는 보편성이 강한 ‘존재론’을 제창해왔다. 과학의 발전을 통해 발달하여 세계를 지배하게 된 서양의 편향된 자연주의를 상대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베르크가 지적한 것처럼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나타나는 현대적 경향에 반성을 촉구한다. 다만 데스콜라가 주장하는 내면성은 동식물에 대한 ‘의인주의(擬人主義)’로 이행하는 경향이 있으며 철학에서 말하는 즉자성(an sich)과 대자성(für sich)을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베르케가 주장하는 ‘주체’ 개념은 이마니시 긴지(今西錦司)의 『생물의 세계』론과 상통한다(今西 1972). 무엇보다 서양에서는 윅스퀼에 의한 환세계 관념으로서의 움벨트가 있다. 이러한 비교까지 포함해서 이 책은 세계에 분포한 자연관의 약식도를 제시한다. 이것이 이 책의 첫 번째 의의이다.

두 번째 의의는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 극복이라는 논의에 일본이나 중국 등 동양의 자연사상으로부터의 관점을 추가한다는 것이다. 원래 데스콜라의 논의에는 동양의 자연사상이 거의 없다. 고래를 둘러싼 신앙이나 공양의 의미, 조인의 형상을 둘러싼 세계의 여러 사례 가운데 일본의 조인 신앙에는 소위 애니미즘론, 토테미즘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본의 풍부한 자연관이 있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동양이나 비서양 사회의 사례에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성을 파악하는 더욱 넓은 지평을 열 가능성이 숨겨져 있다.

셋째로 이 책에서 보여주는 논의의 많은 부분은 문헌연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야외조사에 기초한 전문분야로부터의 현대적인 과제에 대한 문제 제기라는 것이다. 복제기술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자연의 조작 가능성, 가축화론을 축으로 하는 새로운 자연과 문화의 의미론 등 현실의 사건에 기초한 새로운 계획을 골자로 자연과 문화의 횡단이 편성된 이 책의 논의는 많은 분야에 지적인 자극을 선사할 것이다.

데스콜라는 최근 미술과 자연, 문화의 관계에 흥미를 느끼면서 2008년 하버드 대학 강연에서는 ‘이미지의 창조—인류학적 접근’을 주제로 삼았다. 인류학과 미술사, 예술과의 관련 분야로서 형상화와 아이콘(기호)을 고찰한 그의 논의는 솔직하게 말하면 존재론에 적합한 사례만을 다룬 혐의가 있다. 즉 그것만으로는 인류학을 미술사 장르에 삽입한 것에 불과하고 광대한 표상학에 대한 방법으로는 미숙하다고 말할 수 있다. 오히려 검증해야 하는 것은 각각의 시대적, 문화적 배경 속에 응축된 코드와 메시지를 읽어 들이는 것이 아닐까? 이 점에서 이 책 제1부의 조인론과 제4부의 가면과 회화에 주목한 역사적, 민족학적 고찰은 앞으로 이 분야에 있어서 학문적인 발전에 큰 자극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것이 이 책의 네 번째 의의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데스콜라의 논고에는 인류학의 역사를 다루는 논술이 곳곳에 있으며, 특히 래드클리프 브라운, 에밀 뒤르켐, 말리노프스키, 포르테스, 레비스트로스 등의 업적을 철학, 논리학 등의 맥락에서 논하고 있어서 학사적인 의의가 높다. 최근 십수 년 동안 이른바 거대이론이 배출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자연과 문화의 상호작용에 관한 인류학적 연구는 결코 방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향후 연구의 큰 발전의 계기가 되는 몇 가지 요소를 갖고 있다. 이 책의 각 논문에는 그러한 최신 연구가 풍부하게 담겨 있다. 이 속에서 보고(寶庫)를 찾아내어 미래에의 연구를 진행하는 데에서 특히 젊은 연구자들에게 큰 자극이 될 것이다.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존재물이 가진 특성과 동일화의 메커니즘, 존재물 간의 관계성에 초점을 둔 데스콜라의 분석은 분명 우리의 자연 인식과 세계관의 대전환을 촉구하는 기본 작업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던진 물음에 인류학뿐만 아니라 철학, 미학, 심리학, 사상사, 사회학, 커먼즈론을 포함한 다양한 인문, 사회학의 영역은 어떻게 응해야 할까? 이 책이 그 응답의 계기가 되리라 기대한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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