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기획한 박동환의 철학과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간의 교차 읽기를 아직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 기획은 전적으로 나의 인류학적 탐구가 존재론적 전회라는 사상적 흐름에 가담하기 위한 기초작업이다. 숲은 생각한다, 부분적인 연결들, 식인의 형이상학, 자연과 문화를 넘어서 등등 존재론적 전회를 대표하는 주요 저작들을 읽고 나도 그와 같은 연구 작업을 하고 싶었다. 구태의연하고 지루하고 그저 학자라는 직업군의 생활적 윤활유로 전락한 20세기 인류학과 단절하는 데에서 나아가 산 것뿐 아니라 죽은 것까지도 살아있는 것으로 다루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인류학을 할 수 있는 길을 찾은 듯했다. 그러나 그 길은 여전히 그들의 길이었고, ‘사고의 탈식민화’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만난 것이 ‘x의 존재론’이었다. ‘x의 존재론’은 나의 인류학에 숨을 불어넣어 주었다. ‘x의 존재론’의 관점을 통해 비로소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과 그로부터 비롯된 후학들의 문제의식과 탐구 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해는 관점에서 나온다.)
『야생의 진리: 불타는 자아의 경계 위에 살다』는 말하자면 『x의 존재론』의 보론이다. 이 책은 2020년 12월 22일 한국연구원 학술심포지엄 <x의 존재론을 되묻다>를 계기로 조직된 ‘x의 존재론’을 둘러싼 여러 논의에 대한 ‘친절한’ 답변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답변이 ‘친절한’ 첫 번째 이유는 저 논의 대부분이 ‘x의 존재론’을 이해하지 못한 무지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지까지도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저 논자 중 누가 ‘x의 존재론’에 대해서 사용한 ‘해석의 무덤’이라는 수사는 해석할 수 없는 그 자신의 무지를 드러낸다. 아니라면, 저 수사가 죽음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보아서도 해석이란 곧 산 것을 죽은 것으로 만들어 묻어버리는 것일 수 있으며, ‘x의 존재론’은 애초에 그러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레비스트로스를 ‘해석’하는 글을 본 적이 없다. 레비스트로스에 관한 글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한 무지를 드러내거나 이해한 것을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두 번째 이유는 저 논자들에게 ‘x의 존재론’에 이르는 맞춤식 길 안내를 해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브뤼노 라투르, 들뢰즈-가타리 등의 곁길을 알려준다.
박동환의 책은 슬프다. 철학이 시학과 가깝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철학이 사라져갈 인류의 운명을 알아서이지 않을까? 인류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사라질까? 박동환이 말한 대로,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온갖 고난을 감내해야 하는 나무의 지혜보다 못해서 차라리 숨(인간사고)을 스스로 서서히 거둬 가게 되는 걸까? 지구상에 영원히 썩지 않길 바라는 폐기물로 자신의 흔적을 대신하면서. 『야생의 진리』는 사라져갈 인류의 진혼곡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진혼곡은 인류의 지성에 숨을 불어 넣는다.
그래서 박동환×레비스트로스의 기획은 인류학에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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