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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8.06 시미즈 다카시_공해론/불교론_2
  2. 2024.08.03 시미즈 다카시_공해론/불교론_1

시미즈 다카시(清水高志)2023년 저작 공해론/불교론(空海論/佛敎論)(以文社)의 1대담’을 사막여우 :: 시미즈 다카시_공해론/불교론_1 (tistory.com)에 이어서 번역해 올려둔다. 


 

육도윤회(六道輪迴)와 다자연론(多自然論)

 

모로: 앞서 이야기했듯이 철학을 일본의 토착적 사상으로 가지고 와야 한다는 것인데요, 밀려드는 실재를 읽고 생각한 것은 반대로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육도윤회 등을 진지하게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일종의 기호랄까요, 조작 가능한 기호와 같은 것으로서 지옥, 아귀, 축생이 있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전연 생각하지 않고 이숙(異熟)이네. 이숙은 지옥, 아귀, 축생으로 태어나는 것이라네로 끝내버리고 그것이 가지는 철학적 함의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뢰야식(阿賴耶識)[각주:1]과 같은 것을 다루게 되면 이것이 바로 철학이지요. 생각해봅시다. 인식론이지요?’라며 끝내버립니다. 정말로 육도윤회 혹은 특히 아귀도(餓鬼道)와 같은 것은 세가키(施餓鬼)”[각주:2]오봉()”[각주:3]과 직결하는데도 역으로 바로 그러하기에 인류학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않은 것이죠. 이 책을 읽었을 때 그래,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지라는 반성이 컸습니다. 그래서 트위터 등에서 모두 이 책을 읽으세요!라고 말하고 다녔어요.

 

카메야마: 모두 읽었나요? 그래서?

 

모로: 내 지인들은 읽었습니다. 지인이 많거든요. 읽은 사람이 꽤 됩니다.

 

카메야마: 잘됐네요.

 

모로: 이 책을 읽은 사람 중에서 읽었습니다!”라고 말해주는 이도 있습니다. 다만 불교를 직접 다루는 부분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뭐 때문에 모로 선생은 이 책을 읽으라고 한 건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마침 그때 내가 고민한 문제는 어째서 아귀도(餓鬼道)를 우리 세계가 뒤집어써야 하는가였습니다. 아귀초지(餓鬼草紙)등을 읽은 후로 줄곧 생각했습니다.

길장(吉藏)이 그래서 그랬나 생각하면서 그 중첩된 방법에 어떤 패턴이 있겠지라는 식으로 정리했지만요. 그렇지만 이 정리된 생각을 어떻게 이야기할지는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밀려드는 실재를 보고 ‘그래, 맞아!’라며 무릎을 친 거죠. 이 의미에서 이 책과의 만남은 앞서 말했듯이 가장 큰 시미즈 체험이었습니다.

 

카메야마: 좋네요. 최고! 행복한 만남 아닙니까?

 

시미즈: 지옥을 거쳐서.

 

카메야마, 모로: (폭소)

 

시미즈: 나도 분명 모로 씨가 이야기한 그러한 의문이 있었고, ‘, 그래서 그런 거였나라며 [일본의 토착 사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해 [내 연구와] 연결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경위를 통해 오늘날의 애니미즘에서는 불교에 더욱 가까워져 이제는 불교 말고는 사고할 수 없어!’라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모로: 밀려드는 실재이후지요? 앞서 이름이 언급된 다종연구회에서 밀려드는 실재서평회가 있었어요. 그때 나도 불러줘 참가했는데요, 아귀도(餓鬼道) 등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다만 그때는 아직 내 안에서 정리가 다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심도 깊은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More-Than-Human이라는 인터뷰집이 간행되었죠. 책 제목도 좋았고 내용도 최고였습니다. 오늘날의 애니미즘과 마찬가지로 이문사(以文社)에서 나왔습니다. 이 책은 인류학 서적으로서 에두아르도 콘의 인터뷰를 비롯해 여러 인류학자와 철학자, 문학자들의 글을 모은 문집(anthology)이라 할 수 있으며, ÉKRITS의 홈페이지 ÉKRITS / エクリ (ekrits.jp) 에 먼저 부분부분 공개되었더랬죠.

 

시미즈: 나는 도겐(道元)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카메야마: , 맞아요.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모로: 내가 시미즈 선생의 이야기를 듣는 청자(聽者)의 역할을 맡아 진행한 불교 철학의 진원을 재구축하다나가르주나와 도겐(道元)이 본 것清水高志, 師茂樹「仏教哲学の真源を再構築する ― ナーガールジュナと道元が観たもの」 | ÉKRITS / エクリ (ekrits.jp) 도 그 안에 있지요. 뭔가 두들겨 맞은 듯한 인터뷰였습니다.

 

시미즈: (웃음)

 

모로: 그래서 오늘 이변(二邊)을 떠나다라는 주제로 매우 분명하게 불교의 맥락에서 이야기될 것으로 기대하고, 또 이 대담이 매우 압축적이고 알찬 내용으로 가득할 것이기에 나는 너무나 좋습니다. 물론 잘 모르겠다!’라는 의견도 낼 테지만.

 

시미즈: 하하(웃음).

 

모로: 저 때도 이미 시미즈 선생이 불교계에 자주 왕래했더랬지요. 그다음에 나온 것이 이 책입니다, 오늘날의 애니미즘.

 

카메야마: 조금 보충해서 카마시키켄(上七軒) 문고 활동의 연장선에서 이야기하자면, 나는 시미즈 선생의 저작을 모로 선생처럼 진작부터 알지는 못했습니다. 카마시키켄 문고를 시작한 것이 3년 전인데요, 그즈음 나는 불교학이 전공인 데다 인류학적 논의를 매우 좋아해서 당시 여러 사람이 좋다고 말하는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의 식인의 형이상학(박이대승, 박수경 옮김, 후마니타스, 2018)인디오의 변덕스러운 혼(존재론의 자루 옮김, 포도밭출판사, 2022)을 찾아 읽었습니다. 그 속에서 퍼스펙티브주의와 다자연주의라는 사고가 나오는데요, ‘, 이것은 불교잖아?’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카마시키켄 문고를 시작한 이래 이것은 정말로 도전해봐야 하지 않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불교사 수업에서 퍼스펙티브이라는 말을 쓴다든지 멀티-퍼스펙티브주의와 불교라는 테마로 강의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러한 내 생각을 모로 선생에게 전하니까 모로 선생은 벌써 내 의중을 아는 듯이 사실은 말이야라고 말을 꺼냈고, 그렇게 나 또한 시미즈 선생의 활동을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책도 찾아보고요.

오늘 모로 선생이 오늘날의 애니미즘에 이르기까지 시미즈 선생의 연구 흐름을 잘 정리해주었는데요, 나 또한 모로 선생과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고, 또 그것이 카마시키켄 문고의 지금 실천과 상응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속성(屬性)’의 논리학배중률(排中律)을 넘어서

 

시미즈: 오늘날의 애니미즘이나 More-Than-Human이 어렵다고들 해서요, 오늘 카마시키켄 문고에서의 강의를 기회로 좀 더 열어놔야겠습니다. 하지만 본래 이항대립의 문제는 어렵습니다. 이른바 배중률이 무조건 성립한다고 할 때, 예를 들어 둥근 개물(個物)둥근 것이라는 그룹에 속한다고 하면 네모난 것에는 속하지 않겠죠. 다시 말해, 어느 한쪽에 속해버리면 중간이 배제됩니다. More-Than-Human에서 내 논의도 이러한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이때 논리적이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그러한 것이어야 하냐고 하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보편적, 일반적인 것에 개별적인 것이 포함된다는 방향에서 생각했을 때는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것이 또 다른 보편적인 성질을 가질 수 있다면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인도의 논리학에서는 이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후자로 향합니다. 가령 부정형을 생각해봅시다. 배중률을 따르면, 반대의 것이 긍정되는 부정(상대적 부정)과 단지 부정될 뿐인 부정(절대적 부정)이 있습니다. ‘이것은 항아리다라는 것과 항아리가 있다라는 것에서 부정형은 다릅니다. 각각의 부정형을 보면, 전자(‘이것은 항아리가 아니다’)는 상대적 부정, 후자(‘항아리가 없다’)는 절대적 부정이 됩니다. ‘백합은 꽃이다와 같이 개별의 것을 일반의 것에 포함해 가는 분류적인 판단을 논리적인 것으로 삼는 서양과는 반대로, 인도의 논리학은 일반적인 성질을 개물(個物)의 속성이라는 형태로 개물(個物)에 포함시키는 입장을 채택합니다.

 

모로: 다르민(Dharmin, 基體)이라고 하지요.

 

시미즈: , 다르마(Dharma, 屬性)와 다르민(Dharmin, 基體)입니다. 앞선 문제를 다르마, 즉 개물(個物)의 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하는 것이 인도의 사고방식입니다. 서양의 철학자 중에도 이러한 사고방식을 채택한 학자가 가끔 있습니다. 가브리엘 타르드(Gabriel Tarde, 1843~1904, 프랑스의 사회학자범죄학자)나 셸링(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 1775~1854, 독일의 철학자)이 그렇습니다. 실은 소크라테스도 그러합니다. 후기 플라톤에서는 이러한 배중률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데아라는 것은 () 그 자체()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보통의 것은 대()라고도 소()라고도 말할 수 있는 중도반단(中途半端)[어중간한 것]이 돼버려 이것을 어찌할지 되묻습니다. 또 예를 들어 () 그 자체의 이데아는 구체적이고 감성적인 것에서 분리돼 버리는 난제가 생깁니다. 플라톤의 대화편 중 파르메니데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개물(個物)이 일반적인 () 그 자체() 그 자체를 분유(分有)하는 것이라면 () 그 자체() 그 자체둘 다 가능하다라고 제안합니다.

 

모로: 과연 다르마와 다르민이군요.

 

시미즈: , 소크라테스는 그쪽으로 가려 합니다. 그런데 파르메니데스는 소크라테스가 분유(分有)(μέθξις, 라틴어로는 participátĭo)라고 하니까 그러면 대() 그 자체에 그 개물(個物)도 포함되지 않는가라고 말하며 일반적인 것에 개물을 가지고 들어옵니다. 결국, 파르메니데스는 자신이 보편적으로 삼는 하나인 것밖에 남지 않는다는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지요.

 

카메야마: 그렇군요.

 

시미즈: 파르메니데스는 토가 쏠릴 만큼 무척 어렵습니다. 특히 후반부는 착종이 거듭됩니다. 그것을 차근차근 생각해야 합니다. 플라톤의 향연을 읽으면 인류의 여명에 이런 소박한 대화를 나누다니라고 느끼지만, 후기 플라톤은 악몽을 꾸듯이 어렵습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아요! 정말로 소피스트가 나와서 기교 끝판왕의 논의를 펼치면, 인도 논리학의 얼치기 논자가 그리스와 대결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카메야마: 맞습니다. (웃음)

 

 

야생의 사고와 테트랄레마

 

시미즈: 그래서 내가 무엇을 사고하고자 했는가(참조). 우선 . 삼분법과 이이변을 이야기할 텐데요, 이것은 세 종류의 이항대립을 조합해서 각각을 변화시킴으로써 그것들의 이원성을 조정한다는 방법론입니다. 우선 세 가지를 표로 정리해두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이변(離二邊)의 중도(中道)’라는 형태로 설파되는 테트랄레마라는 발상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사구분별(四句分別)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요, 인도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해온 독특한 논리 양태입니다.

 

. 삼분법과 이이변(離二邊)

삼분법은 세 종류의 이항대립을 조합해서 그 연결을 변화시킴으로써 그것들의 이원성을 조정한다는 방법론이다.

불교에서 이이변의 중도로 설파되는 사상인 테트랄레마(‘A’, ‘A’, ‘A 그리고 A’, ‘A도 아니고 A도 아니다’)가 삼분법에 의해 정의된다.

포함하는 것()’포함되는 것()’, ‘하나인 것여럿인 것’, ‘주체대상이라는 세 종류의 이항대립이 그 속에서 다뤄진다.

 

사구분별이란 ‘A이다’, ‘A이다’, ‘A이고 A이다’, ‘A도 아니고 A도 아니다라는, 한 명제 A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 네 명제를 열거한 것입니다. 이것은 순서대로 제1, 2, 3, 4 렘마라고 합니다. 서양에서는 제1 렘마와 그 부정인 제2 렘마를 사고하며, 3 렘마는 배중률에 의해 부정됩니다. 그런데 인도에서는 제3 렘마로는 모자란 지 ‘A도 아니고 A도 아니다라는 제4 렘마까지 정의하고자 합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과 같이 불교에서는 그러한 것이 가장 안정적인 형태라고 이야기하는데, 오늘날의 애니미즘에서 내가 제시한 삼분법(三分法, trichotomy)이라는 이론은 복수의 이항대립을 결합하는 가운데 더욱 얽힌 형태로 [삼분법] 이론이 순회해서 모두가 제4 렘마, 곧 이항대립의 어느 한쪽[의 극]도 아니라는 구조를 만들어내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얽히는 중요한 이항대립의 요소로 선택한 것이 하나인 것/여럿인 것’, ‘주체/대상’, ‘/입니다. ‘주체/대상오늘날의 애니미즘이 인간과 자연의 문제, 애니미즘의 문제를 다루는 것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 생각에 포함하는 것/포함되는 것의 관계, 바꿔 말해 /의 이항대립은 매우 본질적입니다. 이 관계는 소크라테스와 파르메니데스의 대화에서도 최대의 아포리아(난제)가 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그리스인들이 알지 못한 부분으로,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이데아 계와 감성적 세계가 분리된 채로 있게 됩니다.

이것은 인류 전체의 문제로서 레비스트로스 또한 이에 대해 말합니다. 문화와 자연의 분리라는 주제를 둘러싸고 다양한 문화권 사람들의 사고를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포함하는 것포함되는 것이 분리되거나 교체된다는 이야기는 예를 들어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2권에 잘 나와 있습니다. 신화는 그러한 주제를 반복적으로 드러내며 그것이 변형되는 변이(variation)를 차례차례 이야기합니다. 포함하는 것/포함되는 것에서 포함하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라고 하는데이데아라고도 합니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그렇다고 그것을 직접 대놓고 표현하는 것은 섣부릅니다.

그러므로 그것[‘포함하는 것/포함되는 것’]과 흡사하면서 더 구체적으로 연결하기 쉬운 또 다른 이항대립에 그 주제를 분열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개념을 세밀하게 해부합니다. 그리하여 파르메니데스에서 나오는 것이 하나여럿이라는 또 다른 이항대립입니다. 그러나 하나인 것/여럿인 것이라는 이항대립만으로는 역부족이고 그것을 다시 별종의 이항대립과 결합해 얽히게 하는 구조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실은 그리스인들은 그러한 것을 줄곧 생각한 것 같습니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김유석 옮김, 아카넷, 2019)를 보면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인 엠페도클레스[각주:4]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후대 사람들은 소크라테스 등의 철학자들이 등장하기 전에는 굉장히 소박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카메야마: 맞습니다.

 

시미즈: 플라톤이 등장하기 전에 몇몇 소박한 철학자들이 있었다는 식이지만, 사실 그들은 정말로 중요한 것을 사고했습니다. 후기 플라톤에 등장하는 이탈리아에서 온 자객과 같은 논자가 고도의 놀라운 논의를 전개합니다. 그 사람들이 사고한 것은 실은 매우 심오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읽어보면, 지금 삼분법에서 논하는 사고가 수두룩합니다.

그림. 엠페도클레스의 사대원소 모델

이것은 잘 알려진 사대원소(四大元素)라는 것입니다(그림 참조). 이 사대원소는 가령 공해(空海)의 사상과도 연결되는데요, 이 사대원소에 식대(識大)와 공대(空大)를 더하면 공해의 육대(六大) 사상이 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들은 서로 조정됩니다. 예를 들어 불()과 물()은 정반대의 요소로서 이항 대립적입니다. [바람()과 흙(), ()과 식()도 마찬가지]

 

카메야마: 삼각의 대립 쌍이군요.

 

시미즈: 쌍을 이루지요. 이렇듯 흙()과 바람() 또한 정반대의 요소입니다.

 

카메야마: [사대원소(, , 바람, )] 사각형의 대립 향을 이루네요.

 

시미즈: 그렇습니다. 이렇듯 해소 불능한 반대의 것이 있으면 이 이항대립을 우선 비슷한 형태의 이항대립으로 분열시키는 겁니다. 이러한 조정의 해법이 고대로부터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카메야마: 그렇네요.

 

시미즈: ‘()’, ‘()’과 같은 주어적인 것이 아니라 더욱 구체적인 ‘기으로 바꿔서 이항대립을 다른 것으로 분열시킵니다. 기능이라는 것은 앞서 인도의 논리에서 말하는 다르마입니다. 그렇게 하면 뜨거움()’차가움()’이라는 이항대립이 나옵니다. <그림>을 보면, 그 반대편에 마름()’습함()’이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물(), (), 바람(), ()의 사각형에 뜨거움()’, ‘차가움()’, ‘마름()’, ‘습함()’의 내접 사각형이 배치됩니다. 이것은 요컨대 이항대립을 더욱 감성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앞서 /이라는 이항대립, 포함하는 것/포함되는 것하나여럿이라는 이항대립으로 바꿔놓듯이, 구체물과 결합하기 쉬운 별도의 이항대립으로 분열시킵니다. 그렇게 하면 제3항이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야생의 사고’ 입니다. ‘마름()’()’()’의 쌍방의 기능일 수 있으며, ‘뜨거움()’()’바람()’의 쌍방의 기능일 수 있습니다. ‘()’()’, ‘바람()’()’과 같은 대각선이 아니라 이것들의 중간항을 매개해서 사각형의 변을 순회하면 모두가 서로 조정된다는 것이지요.

세계가 사대원소와 사랑과 증오에서 만들어진다는 엠페도클레스의 이야기는 얼핏 보면 소박한 신화를 이야기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지만.

 

카메야마: 이거 되게 영리하네요.

 

시미즈: 요컨대, 이것이 바로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에서 분석한 것입니다.

 

카메야마: , .

 

시미즈: 레비스트로스가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를 독해하면서 논했듯이, 완전히 분열해버린 대립 이항의 요소를 다시 조합해서 게다가 모든 것이 연결되면 고리가 닫힙니다. 이것을 엠페도클레스는 사랑이나 증오로 부른 것이지요.

 

모로: 그것밖에 표현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군요.

 

카메야마: 이는 레비스트로스가 연구대상으로 삼은 브라질의 보로로족이나 남비콰라족이 이른바 추상개념은 없지만 숲의 동물들이 가진 성질을 대립시키거나 그 대립을 조정해서 범주를 만들어내고 감성의 철학을 만들어낸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지요.

 

시미즈: 그렇습니다. 야생의 사고에서 처음부터 레비스트로스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개념을 주어화해서 범주를 만들어 그것들을 조정,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존의 선주민은 기능의 세세한 차이에 매우 정통해서 그것들을 비교해간다고요. 레비스트로스는 이것을 야생의 사고라고 말합니다.

 

카메야마: 조작자(operator)라는 것이네요.

 

시미즈: 여기서 엠페도클레스와 야생의 사고가 한 것은 무엇이냐라고 하면, 우선 이항대립이 있습니다. 그 이항대립을 다른 이항대립으로 분열시킵니다. 그것을 감성적인 것에 접근시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전체로서의 고리를 묘사하듯 조정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매개의 제3항이 나와서 결과적으로 어디에도 시작점이 없는 구조가 생성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테트랄레마입니다.

 

카메야마: , 그렇네요.

 

시미즈: 요컨대, 3항의 위치가 순회하면, 그 속에서 원인은 어떤 항도 아니다라는 제4 렘마가 이야기될 수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스스로 구조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사이언스(학문)여기서 그는 불어의 Science, 학문이라는 뜻으로 말한 듯합니다에서 환원적 방법은 구조적인 방법의 두 갈래뿐이라고 말합니다. 구조적인 방법이란 레비스트로스의 경우에는 제3항적인 것, 다시 말해 이항대립을 우선 만들어놓고 그것들을 공존시키는 구체물매개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을 단지 뒤로 미뤄두는 것이 아니라[뒤로 미뤄두거나] 차례차례 바꿔가며 순회시킴으로써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한 형식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항대립의 고정화는 왜 일어나는가?

 

카메야마: 지금 선생은 환원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애니미즘을 읽은 것을 전제하고 있는데요, 잠시 환원(reduction)’이라는 것, 환원한다는 것의 문제성에 대해 정리하겠습니다. 오늘날의 애니미즘에서 시미즈 선생은 유럽의 사고에서 이원론적인 것이 왜 문제인지를 지적하면서 삼분법의 논의를 전개합니다. 유럽의 이원론이 문제적인 이유는 결국 복수의 이항대립 관계가 고정된다는 것인데요, 그래서 그 관계가 닫히지 않는 단순한 열린 과정을 묘사하는 것으로 끝나거나 이항대립의 한쪽에 다른 한쪽이 환원되는 형태가 돼 버린다는 것이죠.

 

시미즈: 어느 한쪽의 방향으로 회수돼 간다는 겁니다. 이것은 포함하는 것/포함되는 것의 관계가 일방적이라는 것입니다.

 

카메야마: 예를 들어 앞서 주객의 이항대립에서 자연은 어디까지나 주체의 대상이라는 존재 방식으로 회수돼 버린다는 겁니다.

 

시미즈: 그것이 환원입니다. 이원론이 초극하는 방법에 대해 유럽에서도 이미 몇몇이 논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개로서의 제3항을 통해 순환시키는 형태가 아니라, 가령 이중성 속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이었습니다. 정신이 주체로서 대상을 사고하는 데에서 그 주체가 사고하는 자신을 다시 사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듯이, 이항대립을 이중성으로 해소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중성을 통합하는 것은 [하나인] 주체이며 대상 세계는 있는 그대로 다양한[여럿인] 현상으로서 존재한다는 식으로 그 이중성에 하나인 것/여럿인 것의 이항대립을 겹쳐서 연쇄적으로 풀어가고자 합니다. 피히테 등의 독일관념론은 모두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방식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아라비아를 거쳐 스콜라철학이 계승한 그리스풍의 변증법입니다. 이것은 플라톤의 소피스테스에 등장하는 논의에 기반합니다. 인도유럽어의 ‘~이다‘~가 있다의 이중성을 사용한 것입니다. 구체적인 개물(個物)에 복수의 각기 다른 이데아를 분유시킨다는 소크라테스의 아이디어를 파르메니데스가 몰아붙여 허투루 만들고, 이에 따라 모두를 포섭하는 하나인 것만이 존재하게 됩니다. 이에 반해 ‘~가 있다()’라는 것의 역은 ‘~가 있지 않다()’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지 않다()’라고요. 그리고 ‘~이지 않은 것이 있다라는 구조를 만들고자 합니다. 이것이 소피스테스식의 해결법입니다. ‘~이지 않다라는 것은 술어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이지 않은 것’, 다른 것이 되면 다른 것으로서 주어가 되어 순환하는 논리를 만들어냅니다. 파르메니데스가 하나인 것에 존재를 모두 회수하는 것에 반해, ‘여럿인 것을 만들어내는 순환 속에서 모두를 회수해갑니다.

 

모로: 그렇군요. 과연 중론2장이네요(웃음).

 

시미즈: . 중론2장에서 철저하게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럽은 그쪽으로 돌진합니다. 이것은 얼핏 보면 제3항과 같지만 약간 다릅니다. 예를 들어 하이케이타스(hæccéĭtas)[개성(個性)]’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아비켄나(Avicenna)[각주:5]나 둔스 스코투스[각주:6]가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데요, 각기 다른 마성(馬性)’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이항대립에 대해서는 중립무기적(中立無記的)’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여도 ()’여도 어느 쪽도 좋다는 논의입니다. 이 논리에서 감성계와 이데아 계, 지상 세계와 신을 분리하지 않고 연결하려는 이론이 중세에 성행합니다. 하나()에도 회수되지 않고 다양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러면 된 거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이 논리는 같은 곳을 빙빙 돌 뿐입니다. 그리고 다른 것, ‘~이지 않은 것도 의무처럼 점점 늘려가야 합니다. 이러한 사고가 들뢰즈의 이른바 차이의 철학에까지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야마우치 시로(山内志朗, 1957~, 일본의 철학자)가 밝혔고, 나는 쉽게 납득했습니다. 이것은 이항대립을 이중성으로 순환시켜서 쥐 모양의 자동장난감이 빙글빙글 돌며 모래성을 허물듯이 허물어뜨리는 것이며, 니체의 영겁회귀(永劫回歸) 또한 이와 같습니다. 들뢰즈는 [이항대립을 이중성으로 순환시키는] 이 논리로 니체의 영겁회귀를 읽어냅니다. 이것은 불교적으로 말하면 정말로 나쁜 의미에서의 윤회, 삼사라(saṃsāra)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웃음).

 

모로: 무한후퇴, 논리적 과실로 끝나고 마는 것이지요.

 

시미즈: 그래서 악몽과 같은 것인데요, ‘~이지 않는 것시뮬라크르(simulacre)로서의 세계라든가 저 현대의 소비사회의 양상에까지 전부 치닫기 때문에 완전히 그쪽으로 가버린 것이 유럽이라는 것입니다.

 

카메야마: 그 전에 서양에서는 이항대립, 이원론에서의 대립 항이라는 관계성이 바뀌지 않거나 바뀔 수 없다는 것에 대해 그 전제를 의심하지 않았나 보네요.

 

시미즈: 이러한 불가역의 순환과 이원성을 전제함으로써, 복수의 이항대립 간의 관계를 뒤집거나 바꾸는 것이 점점 더 불가능해집니다. 마치 달리는 자전거의 앞바퀴와 뒷바퀴를 각기 다른 방향으로 회전시킬 수 없듯이 그렇게 관계가 고정된 채로 발전해가는 겁니다.

 

모로: 그 속에서 강렬한 것이 역시 주관과 객관이랄까 주체와 객체인데요, 주객이 아무래도 가장 강하지요. ‘하나/여럿또는 포섭되는 것()/포섭하는 것()’ 가운데 주체가 강하게 있어서 그것이 온전한 듯한 느낌이랄까요? 이를테면 관념론처럼.

 

시미즈: 이중성의 순환 속에서 이항대립을 허물어뜨리고 해소하고자 한다면, 또 다른 이항대립을 그 순환에 합승시켜서 해소하고자 한다면, 그 프로세스는 언제까지나 닫히지 않고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같은 프로세스에 다른 이항대립을 회수한 환원론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어떻게든 그것을 막는 형태를 만들고 싶어 합니다. 아니면 그것들의 이항대립을 삼각형과 같은 구조로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여럿의 문제를 그 구조 속에 재빨리 비틀어 넣어 보로메오 고리처럼 이항대립을 풀어내고자 합니다.

 

카메야마: 그렇군요. 이에 따라 주체와 대상(자연), 하나와 여럿의 관계가 고정된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고, 이 잘못에서 시미즈 선생의 오늘날의 애니미즘논의가 시작되는군요.

 

 

  1. [역주] 아뢰야식(阿頼耶識, Alaya-Vijnana: 아라야-비즈나나)이란 말은 불교 용어로, 불교의 유심론(唯心論)에서 말하는 인간의 근본 의식을 말한다. 불교에서 인간은 안·····(眼耳鼻舌身意)라는 육감으로 이루어진 존재인데, 육감 중 6번째 의식(意識)은 세 가지로 나뉜다. 6 의식과 제7 마나스식(Manas), 8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이 중에서 아뢰야식은 무의식인 마나스식과 더불어 마나스식보다 더 심연의 무의식를 뜻한다. [본문으로]
  2. [역주] 불교 법회(法會)의 하나. 아귀도(餓鬼道)에 빠지거나 연고자가 없는 죽은 자의 영을 위한 공양. [본문으로]
  3. [역주] 백중맞이. 음력 7월 보름. [본문으로]
  4. [역주] 엠페도클레스(Ἐμπεδοκλς, 기원전 493~430년 추정)는 시칠리아섬 태생의 그리스 철학자다. 만물은 불, , , 공기라는 네 가지 불변의 요소로 이루어졌으며, 이것들이 사랑과 증오라는 두 힘에 의해 분리되고 결합해서 만물이 생성, 소멸한다고 주장했다. [본문으로]
  5. [역주] 아비켄나는 이븐 시나의 라틴명이다. 이븐 시나(980~1037)는 페르시아 제국의 철학자이자 의학자다. 아라비아 철학의 최고봉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플라톤을 가미한 철학으로 이슬람 신앙을 해석하였고, 이러한 그의 학문 활동은 유럽에서 아리스토텔레스 부흥 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본문으로]
  6. [역주] 둔스 스코투스 (Duns Scotus, 1266~1308)는 영국 스코틀랜드의 스콜라 철학자다. [본문으로]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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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미즈 다카시(清水高志)2023년 저작 공해론/불교론(空海論/佛敎論)(以文社)을 조금씩 나누어 번역해 올려둔다. 원서는 다음의 사이트를 참조(https://amzn.asia/d/3NqQiBj).이 책은 1부의 대담2부의 공해론(空海論)’으로 구성된다. 시미즈 다카시는 2021오늘날의 애니미즘을 인류학자 오쿠노 카츠미와 공저로 출간한 후 대승불교와 21세기 존재론의 인류학을 접목한 그의 독특한 사상 세계가 여러 학계로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책은 『오늘날의 애니미즘』 보론의 성격을 갖는다. 

그는 미셸 세르 연구에서 시작해, 세르의 사상을 계승해 과학기술학이라는 분야를 확립한 브뤼노 라투르와 그레이엄 하먼 등의 현대 철학자의 사상에 주목하고, 다시 세르에게 돌아와 라이프니츠로 더 거슬러 대승불교의 나가르주나를 파고든 후 자신의 학문적 원류인 일본 불교학으로 되돌아 나온다. 일본불교는 대승불교 중에서도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에만 남아있는 밀교(密敎) 계통인 진언종(眞言宗)’의 계보를 따르는 정토진종(淨土眞宗)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진언종의 개조가 공해(空海, 774~835), 일본어로는 쿠우카이라는 이름의 승려다. 아마도 대승불교의 밀교적 전통이 일본에만 남아있는 것은 일본의 애니미즘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것은 특히 일본 불교학자가 존재론의 인류학에 가닿을 수 있었던 이유이지 않을까?

동아시아의 존재론이자 형이상학으로서 일본 불교학을 과감히 밀어붙이는 시미즈의 사상을 깊이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고자 이 책을 번역해둔다. 

 

 


 

1부 이변(二邊)을 떠나다[각주:1]

 

프롤로그

 

모로 시게키(師茂樹, 불교학자)(이하 모로): 우선 시미즈 선생의 소개 및 지금까지의 작업에 대해, 또 지금 대담의 계기가 된 시미즈 선생과 문화 인류학자 오쿠노 카츠미 선생과의 공저 오늘날의 애니미즘에 대해 간략하게 다루고자 합니다. 시미즈 선생의 연구를 아시는 분은 많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시미즈 선생은 여러 권의 저서, 번역서 등을 출간했습니다. 제가 지금 그 책들을 들고 있는데요, 무겁습니다. 카마시키켄(上七軒)[교토의 오래된 하나마치(花街: 게이샤 거리) 중 하나]에 올 때 란덴(嵐電)[각주:2]을 타고 오면서도 무거웠습니다. 철학자 미셸 세르에 관한 책도 있네요.

 

카메야카 타카히코(亀山隆彦, 불교사학자)(이하 카메야마): 그중에는 미셸 세르와 오치아이 요이치(落合陽一) 씨의 대담집(탈근대선언(脫近代宣言))도 있습니다.

 

모로: 그 책은 오늘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세르, 창조의 모나드, 미셸 세르, 작가, 학자, 철학자는 세계를 여행한다등 시미즈 선생이 번역한 세르의 책을 주로 가져왔습니다.

 

시미즈 다카시(清水高志)(이하 시미즈): 세르 책의 번역에서 제가 각주를 400개 붙였습니다.

 

모로: 이처럼 많은 책을 쓰셨네요. 나 또한 시미즈 선생처럼 예전부터 불교를 철학적으로 사고하려 했고, 그러나 이때 정말로 무엇을 해야 좋을지 헤매며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습니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2, 영국의 철학자수학자), 라이프니츠, 찰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 1839~1914, 미국의 철학자논리학자)와 같은 철학자들의 책을 읽는 가운데 라이프니츠가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때마침 그때 시미즈 선생의 세르, 창조의 모나드를 읽었어요. 이 책은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도 논합니다. 이를 계기로 시미즈 선생의 트위터 계정을 팔로우했습니다. 내 생각에 가장 중요한 책은 밀려드는 실재(実在への殺到)입니다.

 

카메야마: , 영상 코멘트에도 있습니다. “밀려드는 실재다음 책은 언제 나오나요? 읽고 싶습니다.”라고요.

 

모리: 트위터에서 시미즈 선생이 이러저러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 이것 참 재밌네라고 생각하고 봤더니, 시작은 브라질의 인류학자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의 퍼스펙티브주의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 이건 그냥 불교 이야기잖아!’라고 바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시미즈 선생의 트위터를 주욱 읽어가다가 퀑탱 메이야수를 소개하는 부분에서 이건 완전히 길장(吉藏)[각주:3]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메이야수의 주요 저서들이 번역되어 잠깐 유행했지요.

 

시미즈: 유한성 이후(정지은 옮김, 도서출판b, 2024년 개정판)입니다.

 

모리: , 사놓고 읽지는 않았는데, 밀려드는 실재를 보고 , 메이야수를 읽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읽고 충격을 받았지요. 이것이 가장 큰 나의 시미즈 체험입니다.

 

시미즈: 그렇군요. 나 또한 애당초 불교 지향이 강했고, 소년 시절부터 불교를 좋아했습니다. 저의 두 번째 책인 다가올 사상사(るべき思想史)의 후기에도 그렇게 썼습니다. 불교, 인도 철학이 좋다고.

 

카메야마: 신화에도 관심이 있지요? ‘바가바드 기타[각주:4]라든가, ‘라마야나[각주:5]라든가.

 

시미즈: ‘바가바드 기타는 중학생 때 읽었으며, 매우 심오한 철학이라고 느꼈습니다. ‘라마야나또한 초등학생 때 아베 도모지(阿部知二, 1903~1973, 일본의 소설가)의 번역으로 읽었고, 엄청 심취했어요. 라마 왕자가 태어난 이크슈바쿠 왕조의 왕 이름을 순서대로 말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카메야마, 모로: (웃음)

 

시미즈: 그래서 리그베다 찬가 또한 츠지 나오시로(辻直四郎, 1899~1979, 일본의 고대 인도학 연구자)의 번역으로 읽은 것을 외워보라 하면 외울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아무튼 뭐든지 읽었습니다. (중략)

 

카메야마: 열정이 대단하군요. 왕의 이름을 다 외운다니 대단합니다.

 

시미즈: 인류의 조상 마야에서 시작해서 마야, 이크슈바쿠, 쿠쿠시, 위쿠쿠시, 바나, 아나라냐, 토리수, 토리샨쿠…….

 

카메야마, 모로: !

 

시미즈: 그리고 이 왕들 각각의 기담(奇譚), 연기담(緣起譚)이 있습니다. 현세의 몸으로 천계로 올라가려다가 도중에 떨어진다거나 그러한 이야기 말이죠. 바후발리 더 비기닝, 라이즈 로어 리볼트등 지금 인도 영화가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 치고 있지만, 인도는 예로부터 매우 매력적인 콘텐츠를 많이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꿈꾸듯이 좋아했는데, 인도의 매력에 한 번 빠지면 문학, 사상, 철학은 물론이고 인도학을 하게 되지요. 혼돈의 세계로서 그 자체가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루이 르누(Louis Renou, 1896~1966, 프랑스의 인도학자)인도학 대사전도 가지고 있네요. 이것은 프랑스의 인도학자가 편찬한 명저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에 치우쳐서 빠져 있으면 머리가 이상한 사람만 될 뿐입니다(웃음). 절간에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좋을까 생각해서, 그러면 이번에는 나 자신이 사고하는 개념과 용어를 유럽에 접목해보자 생각한 것이 열다섯 살 무렵입니다.

그렇게 해서 쇼펜하우어에서부터 서양 문헌을 읽어갔는데, 독일인은 인도를 참으로 많이 오해하고 있더군요. [인도] 문학은 그렇게 염세적이지 않습니다. 점차 문예 쪽으로 넓혀서 프랑스에 끌리게 되었고 그 후 다양하게 모색했습니다. 철학, 문학, 자연과학까지. 자연스레 현대 철학자 미셸 세르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스무 살 때입니다. 그 후 미셸 세르 자신의 박사 논문이 라이프니츠를 다루었기에 라이프니츠부터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라이프니츠 또한 교토학파의 니시다 기타로에 가까운 시모무라 토라타로(下村寅太郎, 1902~1995, 일본의 철학자과학사가)의 해석과 상성이 좋았기에 그 부분에도 관심이 생기게 됐습니다.

니시다 기타로는 만년에 여하간 화엄적이면서 라이프니츠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는 동시대의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철저하게 맞부딪혀 대화를 시도한 사람인데, 그 대화는 대략 화엄까지입니다. 저로서는 화엄 불교와 그로부터 나아간 불교가 일본의 토속적인 것과 습합한 바로 그 지점까지 돌파하지 않으면 진실에 다가설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럽의 사상을 완전히, 그리고 그에 더해 애니미즘까지 융합하지 않으면 최종형태에 도달할 수 없다고요. 앞선 책에서는 그것까지 시도해보고 싶었습니다.

 

모로: 그러한 바람은 스무 살에 세르를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즉 비교적 이른 단계에서부터 있었다는 거지요? 아니면 세르를 연구하는 동안에.

 

시미즈: 세르를 연구하면서 20대 끝 무렵에는 이미 그러한 생각이 굳어졌습니다. 세르의 오감혼합체의 철학이라는 저작에는 감각의 세계를 긍정하는 풍요로운 사고가 있는데요, 라이프니츠나 니시다에는 없습니다. 그의 글은 미술, 문예, 와인의 향기, 아름다운 풍경, 그러한 것을 돌아보는 사색이 모두 섞여서 독특한 철학을 자아냅니다.

 

모로: 그러한 감이 있지요. 그렇지만 나는 오감이라는 저 두꺼운 책을 읽어도 잘 모르겠던데요(웃음).

 

시미즈: 오감에는 오늘날의 애니미즘에 나오는 삼분법이라는 논의와 매우 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서두에 그가 젊을 때 바다에서 조난당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현창[뱃전에 낸 창문]에 겨우 몸이 반쯤 나온 상태에서 몸이 끼이고 맙니다. 배 내부는 화염에 휩싸이기 시작하고요. 그 내측과 외측의 중간 부분에 바로 나의 혼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에피소드로 오감은 시작합니다. 또 자신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피부를 누를 때에 눌린 대상으로서의 자신과 누른 주체로서의 자신이 함께 만지고 있는 그곳에 혼이 있다고 말합니다. , 안과 밖이 양쪽으로 벌어진 곳에 주체와 대상이 상호 전환되는 지점이 있다는 겁니다.

 

 

유식(唯識), 이항대립, 삼항구조

 

시미즈: 그런데 앞서 모로 씨는 밀려드는 실재1비베이루스이야기를 하셨죠. 실은 그 논문은 예전에 교토대학에 있은 학회 심포지엄에서 오사카대학의 히가키 타츠야(檜垣立哉) 씨와 나, 그리고 돌아가신 도쿄대학의 카나모리 오사무(金森修, 1954~2016, 일본의 철학연구자사상평론가) 3인이 동물의 철학이라는 주제로 발표할 기회가 있었고, 그에 기반한 것입니다. 그때 히가키 씨는 자크 데리다의 동물론을 이야기할 것이고 카나모리 씨는 동물기계론이나 17세기의 과학사와 사상사가 교착하는 주제로 이야기할 것으로 예상해서, 나는 금세기 문화인류학의 동향이 매우 흥미롭기도 하거니와 비베이루스의 퍼스펙티브주의(다자연론)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주제가 점차 변주되어 라투르와 세르, 라이프니츠가 섞이게 된 것입니다.

그 심포지엄 이후 나도 히가키 씨도 각각의 논의를 계속 전개하게 된 것입니다. 히가키 씨는 동물의 철학이라는 책을 낼 예정이며, 나는 애니미즘에 관한 책을 냈습니다. 20세기의 다문화론과는 다른 형태로 21세기에는 다자연론이라는 것이 인류학과 철학에서 복수의 퍼스펙티브주의(multi-perspectivism)’라는 형태로 분명하게 그 전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자연론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외적 세계는 객관적으로 하나인 것으로 처음부터 명백하게 존재한 것이 아니며, 다양한 생물종과 개개인조차 각각의 퍼스펙티브로 세계를 보고 있고 그 퍼스펙티브가 상호 포섭하고 있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이것은 모로 씨가 이야기했듯이 매우 불교적입니다. 불교에서는 오래전부터 일수사견(一水四見)’을 이야기해왔습니다. 물은 물고기, 귀신, 인간에게 각각 다르게 보인다고요.

 

모로: 덧붙이면 인인유식(人人唯識)’이라는 표현이 있는데요, 불교에서는 중생 한 사람 한 사람이 보는 것이 전부 다르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카메야마: 정말로 그렇습니다.

 

시미즈: ‘기세계(器世界)’로 불리는 세계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또 그 전부가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경애(境涯)[환경이나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기세계’, 곧 퍼스펙티브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고방식입니다. 불교의 사고방식에서 유식(唯識)’은 어느 정도 공부해야 알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수한 사람들이 다양한 해설이나 입문서를 쓰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참조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오늘날의 애니미즘에서도 다뤘는데요, 이른바 이원론의 문제를 어떻게 초극할 것인가가 인류에게는 매우 중대한 주제였습니다. 서양에서도 그것을 생각해왔고 일본에서도 불교에서도 늘 고민해왔습니다. 나 자신이 이 문제를 고민하는 가운데 깨달은 것은 이원론의 이원성, 이항 대립성이 생겨난 배경에는 다른 종류의 이원론이 복수로 얽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복수로 얽혀 있는 복수의 이원론]이 우성의 항, 열성의 항을 고정화하는 경향을 만들어내고 그에 의해 이원성이 해소되지 않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이렇게 무자각으로 얽히는 이원성을 정성껏 분리해가는 것이 예로부터 철학의 과제였다는 것입니다.

 

카메야마: 듣고 보니 그렇군요.

 

시미즈: 플라톤의 대화편을 봐도 소크라테스나 파르메니데스가 강론하는 것은 예를 들어 하나인 것이 있고 여럿인 것이 있다. ‘하나인 것이란 실은 같은’ ‘()’이라는 것이 아닌가. ‘여럿인 것이란 다른’ ‘()’가 아닌가? 이런 식입니다. ‘그럴 수 있다라며 계속 수긍하며 음미해가면 미묘하게 다른 부분이 나타나고 이러한 개념을 또 다른 개념을 통해 구별합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분리돼 가면서 철학의 갖가지 개념이 생겨납니다.

또 서양철학에는 복수의 이항대립을 다루는 독특한 경향이 있으며, 그것[얽혀 있는 복수의 이항대립]에는 아직 분리되지 않은 부분 혹은 오랜 세월에 걸쳐 유착되어 온 부분이 있습니다. 이항대립을 해결할 것 같은 어느 한 이항대립이 있으면 그것에 [다른 이항대립을] ‘합승시켜서 함께 묶어 풀어내고자 하므로 아무래도 유착돼 버리는 것이죠. 서양철학의 발상에는 가령 주체와 대상이라는 이항대립이 있다면, 주체와 하나라는 것의 성격이, 대상과 여럿이라는 것의 성격이 각각 유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체 측에는 대상 세계의 온갖 현상을 합리적으로 조정한다는 관계가 고정됩니다.

 

카메야마: 통합체로서의 주체군요.

 

시미즈: 한편 대상 세계가 그렇게 수동적으로 통합된 끝에 세계의 존재를 긍정하게 되고 이에 따라 객관적인 세계는 하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근대서양의 사고방식이며, 지금 서술한 불교와는 다릅니다. 그런데 지금 서양에서도 그 관계가 역전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상이 우선 있고 그것을 향한 주체의 접근이 복수이며, 대상이 복수인 주체를 통합한다는 구조에서 사물을 사고하기 시작했고, 이 사고방식은 실제로 사물의 능동성을 읽어냅니다. 이것이 브뤼노 라투르 등이 방법론적으로 제시한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입니다. 과학 혹은 기술의 대상이 생겨나는 데에서 사물의 행위성(agency), 그 능동적 작용이 어떻게 기능하는가, 그리고 또 복수의 주체와 [과학의 대상으로서의 사물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를 연결망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이 과학인류학의 방법론입니다. 이 속에서 하나와 여럿, 주체와 대상이라는 두 종류의 이항대립에서 각각의 관계가 역전합니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하나인 주체의 접근으로 환원되지 않는, 예상을 벗어나는 대상의 작용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주체와 하나, 대상과 여럿이 각각 결합했을 때 다양성은 점차 회수되는 요인일 뿐이었습니다. 다양성을 증가한다고 해도 이 구조가 새롭게 세팅될 뿐이며 주체성이 점점 강해져 버립니다. 이원성이 강해집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관계를 역전시키거나 전환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카메야마: 그래서 또다시 이항대립이 나오게 되는군요.

 

시미즈: , 그렇습니다. [관계를 역전시키거나 전환한] 다음에 다시 그 구조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불교의 구조도 실제로 저와 같습니다.

 

카메야마: 맞습니다.

 

모로: 물론 불교라고 해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카메야마: 적어도 일본불교는 비교적 그러한 부분[복수의 이항대립이 얽힌 구조]이 강한 느낌입니다.

 

모로: 그렇습니다.

 

시미즈: 유식(唯識) 등으로 말해지는 식()의 구조가 그러합니다. 자증분(自證分)이라는 것 속에 상분(相分)과 견분(見分)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습니다.[각주:6] 상분이란 <그림 1>에서 산에 해당합니다. 한편 견분이라는 것은 보는 측으로 주체와 가깝습니다. 그것들[산과 그것을 보는 주체]을 에워싸듯이 자증분이라는 것이 삼항구조를 이루며 견분과 상분을 통틀어서 자각적으로 조망합니다. 그래서 유식에서 상분이란 요컨대 세계가 비쳐서 나타난 표현입니다. 그렇게 나타난 것으로서의 대상에 견분이라는 접근이 따라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감각 모듈로서의 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오감에 따라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등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복수로 접근하고 그로부터 피드백을 받아 상분을 더욱 분명한 것으로서 나타냅니다. 어느 한 대상에 복수의 주체가 접근하고 이를 통해 주체와 대상의 양측에서 피드백이 일어난다는 것은 오늘날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이 다루는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림 1. '동시'의 문제 인인유식

아마도 <그림 1>에서와같이 보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 또한 다른 사람의 퍼스펙티브에서는 상분으로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한 상호 맞물리는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포섭 관계의 최종 포섭자 같은 것은 상정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현대 철학에서 자주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서양에서도 그러한 논의가 나오고 있습니다. 독일의 천재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이 이야기하는 신실재론이 바로 그러합니다.

 

모로: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김희상 옮김, 열린책들, 2017)가 그렇지요.

 

시미즈: 그리고 이러한 상호 포섭의 논의에서 일즉다 다즉일로 유명한 화엄 사상이 자연스레 나옵니다. 불교는 물론 서양에서도 그러한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습니다. 그레이엄 하먼도 이와 비슷한 삼항 구조와 상호 포섭을 이야기합니다. 대상에 대한 각기 다른 여러 주체의 접근에서, 예를 들어 대상으로서의 공을 두고 여러 명의 선수가 경합할 때에 오히려 공 한 개의 능동성이 증가하듯이 역으로 대상의 행위성이 증가해간다고요.

 

모로: 이 그림(<그림 1>)은 복수의 중생이 하나의 같은 산을 동시에 보고 있다는 것이고, 각 원 안의 오른쪽 사람이 견분, 왼쪽의 산이 상분에 해당합니다. 이에 따라 하나의 산에 대해서도 복수의 퍼스펙티브 또는 식()이 관계하는 상황이 순간순간마다 일어난다는 느낌이랄까요?

 

시미즈: 이것은 현대의 다세계론(多世界論)이나 다자연론(多自然論) 모델과 같으며, 마르쿠스 가브리엘 또한 이것과 완전히 똑같은 것을 묘사합니다. 베수비오 화산을 예로 들어서요(웃음).

 

모로: 그렇습니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일본에서] 크게 유행한 책이죠. 그 책을 보고 , 이거 보통이 아닌데라고 생각했습니다. ‘보통이라는 표현이 조금 이상하지만요(웃음).

 

시미즈: “(온갖 의미의 장의 상호 포섭만이 있으며 그것들 모두를 포섭하는 것으로서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불교적으로 말하면 유식(唯識)’이라는 표현이 됩니다. 실제로는 복수의 세계가 있으며 복수의 기세계(器世界)가 있기에 객관적으로 유일한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유감스럽긴 하지만 유식(唯識)을 독일관념론과 비교하는 등의 작업도 적지 않습니다. 서양철학에서는 주체가 강하기 때문에 물 자체나 대상이 배제돼 버립니다, 실제로는.

 

카메야마: 알아요, 그겁니다. 또 후에 상세히 이야기할 테지만, 우선 서양에서 말하는 세계와 인간의 관계, 이 관계에서는 근대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이에 비해 불교는 정말로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치로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논합니다. 지금 유럽에서 포스트모던의 다음을 탐구하면서 이전의 사고를 뛰어넘으려는 것을 보면, ‘저건 또 뭐야, 유식(唯識)이라는 건가?’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시미즈: 불교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메이야수가 인류가 태어나기 전’(선조이전성)에 관한 논의를 가지고 들어오는 것도, 요컨대 불교에서 말하는 본인미생이전(本人未生以前)’이랄까 예로부터 공안(公案)에서 이야기된 것이지요.

 

카메야마: , 그렇네요.

 

시미즈: 포스트모던까지의 [근대유럽의] 사상은 대상 세계를 주체와 관여적인 것으로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원성조차 변별할 수 없다는 것이 메이야수의 비판인데요, 거기서 이야기되는 상관성의 문제라는 것도 예를 들어 선()에서 양손을 맞부딪칠 때 쌍수(雙手)의 음성을 들어라’(쌍수음성(雙手音聲): ‘양손을 칠 때 한쪽 손이 내는 소리를 들어라’)라는 공안(公案)을 생각해온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래서 나는 밀려드는 실재를 쓰기 전인 2013미셸 세르를 집필한 시점에서 메이야수의 용어[선조이전성]를 일부러 인류미생이전(人類未生以前)’으로 번역한 것이지요. 어차피 불교로 올 것으로 생각했거든요.

 

  1. 1부의 내용은 202232일에 카미시치켄 문고(上七軒文庫) 채널 in 시스템에서 배포한 이변을 떠나다: 오늘날의 애니미즘을 둘러싼 정담(鼎談)”을 대폭 가필 수정한 것이다. [본문으로]

  2. [역주] 란덴(嵐電)은 케이후쿠(京福) 전철의 아라시야마선(嵐山線)의 줄임말로 교토 중심가에서 아라시야마까지 이어진 노선을 가리킨다. 이 노선은 100년 이상의 역사가 있으며 지금은 교토라는 도시의 역사를 말해주며 관광객에게는 교토의 명물 중 하나다. [본문으로]
  3. 길장(吉藏, 549~623)6~7세기에 활약한 삼론교학(三論敎學)의 대성자(大成者). 가상대사(嘉祥大師)라고 하며, 삼론현의(三論玄義)를 썼다. [본문으로]
  4. [역주] 고대 인도의 대서사시 중 하나이며, 후에 힌두교의 주요 경전에 포함되었다. 기원전 4~2세기경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700구절의 시로 이뤄져 있다. 바가바드 기타: 자신의 내적 존재를 인식하는 길(정창영 옮김, 무지개다리너머, 2019) 참조. [본문으로]
  5. [역주] 고대 인도의 대서사시 중 하나이며, 고전 산스크리트 문화의 최고봉을 이룬다. 비슈누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라마 왕의 일대기를 24,000구절의 시에 담았다. [본문으로]
  6. [역주] 유식학(唯識學)에서 모든 심식(心識)은 상분(相分), 견분(見分), 자증분(自證分), 증자증분(證自證分)의 사분으로 설명되는데, 오관을 통해 마음에 떠오르는 대상이 상분이며 그 상분에서 선악을 분별하는 작용을 견분이라고 한다. 또 견분을 자체적으로 증명하는 작용을 자증분이라고 하고 그것을 다시 증명하는 작용을 증자증분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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