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미즈 다카시(清水高志)의 2023년 저작 『공해론/불교론(空海論/佛敎論)』(以文社)을 조금씩 나누어 번역해 올려둔다. 원서는 다음의 사이트를 참조(https://amzn.asia/d/3NqQiBj).이 책은 1부의 ‘대담’과 2부의 ‘공해론(空海論)’으로 구성된다. 시미즈 다카시는 2021년 『오늘날의 애니미즘』을 인류학자 오쿠노 카츠미와 공저로 출간한 후 대승불교와 21세기 존재론의 인류학을 접목한 그의 독특한 사상 세계가 여러 학계로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책은 『오늘날의 애니미즘』 보론의 성격을 갖는다.
그는 미셸 세르 연구에서 시작해, 세르의 사상을 계승해 과학기술학이라는 분야를 확립한 브뤼노 라투르와 그레이엄 하먼 등의 현대 철학자의 사상에 주목하고, 다시 세르에게 돌아와 라이프니츠로 더 거슬러 대승불교의 나가르주나를 파고든 후 자신의 학문적 원류인 일본 불교학으로 되돌아 나온다. 일본불교는 대승불교 중에서도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에만 남아있는 밀교(密敎) 계통인 ‘진언종(眞言宗)’의 계보를 따르는 정토진종(淨土眞宗)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진언종의 개조가 공해(空海, 774~835), 일본어로는 “쿠우카이”라는 이름의 승려다. 아마도 대승불교의 밀교적 전통이 일본에만 남아있는 것은 일본의 애니미즘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것은 특히 일본 불교학자가 존재론의 인류학에 가닿을 수 있었던 이유이지 않을까?
동아시아의 존재론이자 형이상학으로서 일본 불교학을 과감히 밀어붙이는 시미즈의 사상을 깊이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고자 이 책을 번역해둔다.
제1부 이변(二邊)을 떠나다 1
프롤로그
모로 시게키(師茂樹, 불교학자)(이하 모로): 우선 시미즈 선생의 소개 및 지금까지의 작업에 대해, 또 지금 대담의 계기가 된 시미즈 선생과 문화 인류학자 오쿠노 카츠미 선생과의 공저 『오늘날의 애니미즘』에 대해 간략하게 다루고자 합니다. 시미즈 선생의 연구를 아시는 분은 많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시미즈 선생은 여러 권의 저서, 번역서 등을 출간했습니다. 제가 지금 그 책들을 들고 있는데요, 무겁습니다. 카마시키켄(上七軒)[교토의 오래된 하나마치(花街: 게이샤 거리) 중 하나]에 올 때 란덴(嵐電) 2을 타고 오면서도 무거웠습니다. 철학자 미셸 세르에 관한 책도 있네요.
카메야카 타카히코(亀山隆彦, 불교사학자)(이하 카메야마): 그중에는 미셸 세르와 오치아이 요이치(落合陽一) 씨의 대담집(『탈근대선언(脫近代宣言)』)도 있습니다.
모로: 그 책은 오늘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세르, 창조의 모나드』, 『미셸 세르』, 『작가, 학자, 철학자는 세계를 여행한다』 등 시미즈 선생이 번역한 세르의 책을 주로 가져왔습니다.
시미즈 다카시(清水高志)(이하 시미즈): 세르 책의 번역에서 제가 각주를 400개 붙였습니다.
모로: 이처럼 많은 책을 쓰셨네요. 나 또한 시미즈 선생처럼 예전부터 불교를 철학적으로 사고하려 했고, 그러나 이때 정말로 무엇을 해야 좋을지 헤매며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습니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2, 영국의 철학자・수학자), 라이프니츠, 찰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 1839~1914, 미국의 철학자・논리학자)와 같은 철학자들의 책을 읽는 가운데 라이프니츠가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때마침 그때 시미즈 선생의 『세르, 창조의 모나드』를 읽었어요. 이 책은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도 논합니다. 이를 계기로 시미즈 선생의 트위터 계정을 팔로우했습니다. 내 생각에 가장 중요한 책은 『밀려드는 실재(実在への殺到)』입니다.
카메야마: 아, 영상 코멘트에도 있습니다. “『밀려드는 실재』 다음 책은 언제 나오나요? 읽고 싶습니다.”라고요.
모리: 트위터에서 시미즈 선생이 이러저러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아, 이것 참 재밌네‘라고 생각하고 봤더니, 시작은 브라질의 인류학자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의 퍼스펙티브주의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와, 이건 그냥 불교 이야기잖아!’라고 바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시미즈 선생의 트위터를 주욱 읽어가다가 퀑탱 메이야수를 소개하는 부분에서 ‘이건 완전히 길장(吉藏) 3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메이야수의 주요 저서들이 번역되어 잠깐 유행했지요.
시미즈: 『유한성 이후』(정지은 옮김, 도서출판b, 2024년 개정판)입니다.
모리: 네, 사놓고 읽지는 않았는데, 『밀려드는 실재』를 보고 ‘아, 메이야수를 읽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읽고 충격을 받았지요. 이것이 가장 큰 ‘나의 시미즈 체험’입니다.
시미즈: 그렇군요. 나 또한 애당초 불교 지향이 강했고, 소년 시절부터 불교를 좋아했습니다. 저의 두 번째 책인 『다가올 사상사(来るべき思想史)』의 후기에도 그렇게 썼습니다. 불교, 인도 철학이 좋다고.
카메야마: 신화에도 관심이 있지요? ‘바가바드 기타’ 4라든가, ‘라마야나’ 5라든가.
시미즈: ‘바가바드 기타’는 중학생 때 읽었으며, 매우 심오한 철학이라고 느꼈습니다. ‘라마야나’ 또한 초등학생 때 아베 도모지(阿部知二, 1903~1973, 일본의 소설가)의 번역으로 읽었고, 엄청 심취했어요. 라마 왕자가 태어난 이크슈바쿠 왕조의 왕 이름을 순서대로 말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카메야마, 모로: (웃음)
시미즈: 그래서 리그베다 찬가 또한 츠지 나오시로(辻直四郎, 1899~1979, 일본의 고대 인도학 연구자)의 번역으로 읽은 것을 외워보라 하면 외울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아무튼 뭐든지 읽었습니다. …(중략)…
카메야마: 열정이 대단하군요. 왕의 이름을 다 외운다니 대단합니다.
시미즈: 인류의 조상 마야에서 시작해서 마야, 이크슈바쿠, 쿠쿠시, 위쿠쿠시, 바나, 아나라냐, 토리수, 토리샨쿠…….
카메야마, 모로: 오!
시미즈: 그리고 이 왕들 각각의 기담(奇譚), 연기담(緣起譚)이 있습니다. 현세의 몸으로 천계로 올라가려다가 도중에 떨어진다거나 그러한 이야기 말이죠. 《바후발리 더 비기닝》, 《라이즈 로어 리볼트》 등 지금 인도 영화가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 치고 있지만, 인도는 예로부터 매우 매력적인 콘텐츠를 많이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꿈꾸듯이 좋아했는데, 인도의 매력에 한 번 빠지면 문학, 사상, 철학은 물론이고 인도학을 하게 되지요. 혼돈의 세계로서 그 자체가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루이 르누(Louis Renou, 1896~1966, 프랑스의 인도학자)의 『인도학 대사전』도 가지고 있네요. 이것은 프랑스의 인도학자가 편찬한 명저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에 치우쳐서 빠져 있으면 머리가 이상한 사람만 될 뿐입니다(웃음). 절간에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좋을까 생각해서, 그러면 이번에는 나 자신이 사고하는 개념과 용어를 유럽에 접목해보자 생각한 것이 열다섯 살 무렵입니다.
그렇게 해서 쇼펜하우어에서부터 서양 문헌을 읽어갔는데, 독일인은 인도를 참으로 많이 오해하고 있더군요. [인도] 문학은 그렇게 염세적이지 않습니다. 점차 문예 쪽으로 넓혀서 프랑스에 끌리게 되었고 그 후 다양하게 모색했습니다. 철학, 문학, 자연과학까지. 자연스레 현대 철학자 미셸 세르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스무 살 때입니다. 그 후 미셸 세르 자신의 박사 논문이 라이프니츠를 다루었기에 라이프니츠부터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라이프니츠 또한 교토학파의 니시다 기타로에 가까운 시모무라 토라타로(下村寅太郎, 1902~1995, 일본의 철학자・과학사가)의 해석과 상성이 좋았기에 그 부분에도 관심이 생기게 됐습니다.
니시다 기타로는 만년에 여하간 화엄적이면서 라이프니츠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는 동시대의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철저하게 맞부딪혀 대화를 시도한 사람인데, 그 대화는 대략 화엄까지입니다. 저로서는 화엄 불교와 그로부터 나아간 불교가 일본의 토속적인 것과 습합한 바로 그 지점까지 돌파하지 않으면 진실에 다가설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럽의 사상을 완전히, 그리고 그에 더해 애니미즘까지 융합하지 않으면 최종형태에 도달할 수 없다고요. 앞선 책에서는 그것까지 시도해보고 싶었습니다.
모로: 그러한 바람은 스무 살에 세르를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즉 비교적 이른 단계에서부터 있었다는 거지요? 아니면 세르를 연구하는 동안에….
시미즈: 세르를 연구하면서 20대 끝 무렵에는 이미 그러한 생각이 굳어졌습니다. 세르의 『오감─혼합체의 철학』이라는 저작에는 감각의 세계를 긍정하는 풍요로운 사고가 있는데요, 라이프니츠나 니시다에는 없습니다. 그의 글은 미술, 문예, 와인의 향기, 아름다운 풍경, 그러한 것을 돌아보는 사색이 모두 섞여서 독특한 철학을 자아냅니다.
모로: 그러한 감이 있지요. 그렇지만 나는 『오감』이라는 저 두꺼운 책을 읽어도 잘 모르겠던데요(웃음).
시미즈: 『오감』에는 『오늘날의 애니미즘』에 나오는 삼분법이라는 논의와 매우 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서두에 그가 젊을 때 바다에서 조난당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현창[뱃전에 낸 창문]에 겨우 몸이 반쯤 나온 상태에서 몸이 끼이고 맙니다. 배 내부는 화염에 휩싸이기 시작하고요. 그 내측과 외측의 중간 부분에 바로 나의 혼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에피소드로 『오감』은 시작합니다. 또 자신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피부를 누를 때에 눌린 대상으로서의 자신과 누른 주체로서의 자신이 함께 만지고 있는 그곳에 혼이 있다고 말합니다. 즉, 안과 밖이 양쪽으로 벌어진 곳에 주체와 대상이 상호 전환되는 지점이 있다는 겁니다.
유식(唯識), 이항대립, 삼항구조
시미즈: 그런데 앞서 모로 씨는 『밀려드는 실재』 1장 「비베이루스論」 이야기를 하셨죠. 실은 그 논문은 예전에 교토대학에 있은 학회 심포지엄에서 오사카대학의 히가키 타츠야(檜垣立哉) 씨와 나, 그리고 돌아가신 도쿄대학의 카나모리 오사무(金森修, 1954~2016, 일본의 철학연구자・사상평론가) 씨 3인이 ‘동물의 철학’이라는 주제로 발표할 기회가 있었고, 그에 기반한 것입니다. 그때 히가키 씨는 자크 데리다의 동물론을 이야기할 것이고 카나모리 씨는 동물기계론이나 17세기의 과학사와 사상사가 교착하는 주제로 이야기할 것으로 예상해서, 나는 금세기 문화인류학의 동향이 매우 흥미롭기도 하거니와 비베이루스의 퍼스펙티브주의(다자연론)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주제가 점차 변주되어 라투르와 세르, 라이프니츠가 섞이게 된 것입니다.
그 심포지엄 이후 나도 히가키 씨도 각각의 논의를 계속 전개하게 된 것입니다. 히가키 씨는 『동물의 철학』이라는 책을 낼 예정이며, 나는 애니미즘에 관한 책을 냈습니다. 20세기의 다문화론과는 다른 형태로 21세기에는 ‘다자연론’이라는 것이 인류학과 철학에서 ‘복수의 퍼스펙티브주의(multi-perspectivism)’라는 형태로 분명하게 그 전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자연론’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외적 세계는 객관적으로 하나인 것으로 처음부터 명백하게 존재한 것이 아니며, 다양한 생물종과 개개인조차 각각의 퍼스펙티브로 세계를 보고 있고 그 퍼스펙티브가 상호 포섭하고 있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이것은 모로 씨가 이야기했듯이 매우 불교적입니다. 불교에서는 오래전부터 ‘일수사견(一水四見)’을 이야기해왔습니다. 물은 물고기, 귀신, 인간에게 각각 다르게 보인다고요.
모로: 덧붙이면 ‘인인유식(人人唯識)’이라는 표현이 있는데요, 불교에서는 중생 한 사람 한 사람이 보는 것이 전부 다르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카메야마: 정말로 그렇습니다.
시미즈: ‘기세계(器世界)’로 불리는 세계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또 그 전부가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경애(境涯)[환경이나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기세계’, 곧 퍼스펙티브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고방식입니다. 불교의 사고방식에서 ‘유식(唯識)’은 어느 정도 공부해야 알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수한 사람들이 다양한 해설이나 입문서를 쓰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참조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오늘날의 애니미즘』에서도 다뤘는데요, 이른바 이원론의 문제를 어떻게 초극할 것인가가 인류에게는 매우 중대한 주제였습니다. 서양에서도 그것을 생각해왔고 일본에서도 불교에서도 늘 고민해왔습니다. 나 자신이 이 문제를 고민하는 가운데 깨달은 것은 이원론의 이원성, 이항 대립성이 생겨난 배경에는 다른 종류의 이원론이 복수로 얽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복수로 얽혀 있는 복수의 이원론]이 우성의 항, 열성의 항을 고정화하는 경향을 만들어내고 그에 의해 이원성이 해소되지 않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이렇게 무자각으로 얽히는 이원성을 정성껏 분리해가는 것이 예로부터 철학의 과제였다는 것입니다.
카메야마: 듣고 보니 그렇군요.
시미즈: 플라톤의 대화편을 봐도 소크라테스나 파르메니데스가 강론하는 것은 예를 들어 ‘하나인 것’이 있고 ‘여럿인 것’이 있다. ‘하나인 것’이란 실은 ‘같은’ ‘동(同)’이라는 것이 아닌가. ‘여럿인 것’이란 ‘다른’ ‘이(異)’가 아닌가? 이런 식입니다. ‘그럴 수 있다’라며 계속 수긍하며 음미해가면 미묘하게 다른 부분이 나타나고 이러한 개념을 또 다른 개념을 통해 구별합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분리돼 가면서 철학의 갖가지 개념이 생겨납니다.
또 서양철학에는 복수의 이항대립을 다루는 독특한 경향이 있으며, 그것[얽혀 있는 복수의 이항대립]에는 아직 분리되지 않은 부분 혹은 오랜 세월에 걸쳐 유착되어 온 부분이 있습니다. 이항대립을 해결할 것 같은 어느 한 이항대립이 있으면 그것에 [다른 이항대립을] ‘합승’시켜서 함께 묶어 풀어내고자 하므로 아무래도 유착돼 버리는 것이죠. 서양철학의 발상에는 가령 주체와 대상이라는 이항대립이 있다면, 주체와 하나라는 것의 성격이, 대상과 여럿이라는 것의 성격이 각각 유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체 측에는 대상 세계의 온갖 현상을 합리적으로 조정한다는 관계가 고정됩니다.
카메야마: 통합체로서의 주체군요.
시미즈: 한편 대상 세계가 그렇게 수동적으로 통합된 끝에 세계의 존재를 긍정하게 되고 이에 따라 객관적인 세계는 하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근대서양의 사고방식이며, 지금 서술한 불교와는 다릅니다. 그런데 지금 서양에서도 그 관계가 역전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상이 우선 있고 그것을 향한 주체의 접근이 복수이며, 대상이 복수인 주체를 통합한다는 구조에서 사물을 사고하기 시작했고, 이 사고방식은 실제로 사물의 능동성을 읽어냅니다. 이것이 브뤼노 라투르 등이 방법론적으로 제시한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입니다. 과학 혹은 기술의 대상이 생겨나는 데에서 사물의 행위성(agency), 그 능동적 작용이 어떻게 기능하는가, 그리고 또 복수의 주체와 [과학의 대상으로서의 사물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를 연결망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이 과학인류학의 방법론입니다. 이 속에서 하나와 여럿, 주체와 대상이라는 두 종류의 이항대립에서 각각의 관계가 역전합니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하나인 주체의 접근으로 환원되지 않는, 예상을 벗어나는 대상의 작용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주체와 하나, 대상과 여럿이 각각 결합했을 때 다양성은 점차 회수되는 요인일 뿐이었습니다. 다양성을 증가한다고 해도 이 구조가 새롭게 세팅될 뿐이며 주체성이 점점 강해져 버립니다. 이원성이 강해집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관계를 역전시키거나 전환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카메야마: 그래서 또다시 이항대립이 나오게 되는군요.
시미즈: 네, 그렇습니다. [관계를 역전시키거나 전환한] 다음에 다시 그 구조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불교의 구조도 실제로 저와 같습니다.
카메야마: 맞습니다.
모로: 물론 불교라고 해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카메야마: 적어도 일본불교는 비교적 그러한 부분[복수의 이항대립이 얽힌 구조]이 강한 느낌입니다.
모로: 그렇습니다.
시미즈: 유식(唯識) 등으로 말해지는 식(識)의 구조가 그러합니다. 자증분(自證分)이라는 것 속에 상분(相分)과 견분(見分)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습니다. 6상분이란 <그림 1>에서 산에 해당합니다. 한편 견분이라는 것은 보는 측으로 주체와 가깝습니다. 그것들[산과 그것을 보는 주체]을 에워싸듯이 자증분이라는 것이 삼항구조를 이루며 견분과 상분을 통틀어서 자각적으로 조망합니다. 그래서 유식에서 상분이란 요컨대 세계가 비쳐서 나타난 표현입니다. 그렇게 나타난 것으로서의 대상에 견분이라는 접근이 따라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감각 모듈로서의 식(識)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오감에 따라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등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복수로 접근하고 그로부터 피드백을 받아 상분을 더욱 분명한 것으로서 나타냅니다. 어느 한 대상에 복수의 주체가 접근하고 이를 통해 주체와 대상의 양측에서 피드백이 일어난다는 것은 오늘날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이 다루는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림 1>에서와같이 보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 또한 다른 사람의 퍼스펙티브에서는 상분으로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한 상호 맞물리는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포섭 관계의 최종 포섭자 같은 것은 상정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현대 철학에서 자주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서양에서도 그러한 논의가 나오고 있습니다. 독일의 천재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이 이야기하는 신실재론이 바로 그러합니다.
모로: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김희상 옮김, 열린책들, 2017)가 그렇지요.
시미즈: 그리고 이러한 상호 포섭의 논의에서 일즉다 다즉일로 유명한 화엄 사상이 자연스레 나옵니다. 불교는 물론 서양에서도 그러한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습니다. 그레이엄 하먼도 이와 비슷한 삼항 구조와 상호 포섭을 이야기합니다. 대상에 대한 각기 다른 여러 주체의 접근에서, 예를 들어 대상으로서의 공을 두고 여러 명의 선수가 경합할 때에 오히려 공 한 개의 능동성이 증가하듯이 역으로 대상의 행위성이 증가해간다고요.
모로: 이 그림(<그림 1>)은 복수의 중생이 하나의 같은 산을 동시에 보고 있다는 것이고, 각 원 안의 오른쪽 사람이 견분, 왼쪽의 산이 상분에 해당합니다. 이에 따라 하나의 산에 대해서도 복수의 퍼스펙티브 또는 식(識)이 관계하는 상황이 순간순간마다 일어난다는 느낌이랄까요?
시미즈: 이것은 현대의 다세계론(多世界論)이나 다자연론(多自然論) 모델과 같으며, 마르쿠스 가브리엘 또한 이것과 완전히 똑같은 것을 묘사합니다. 베수비오 화산을 예로 들어서요(웃음).
모로: 그렇습니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는 [일본에서] 크게 유행한 책이죠. 그 책을 보고 ‘야, 이거 보통이 아닌데’라고 생각했습니다. ‘보통’이라는 표현이 조금 이상하지만요(웃음).
시미즈: “(온갖 ‘의미의 장’의 상호 포섭만이 있으며 그것들 모두를 포섭하는 것으로서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불교적으로 말하면 ‘유식(唯識)’이라는 표현이 됩니다. 실제로는 복수의 세계가 있으며 복수의 기세계(器世界)가 있기에 객관적으로 유일한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유감스럽긴 하지만 유식(唯識)을 독일관념론과 비교하는 등의 작업도 적지 않습니다. 서양철학에서는 주체가 강하기 때문에 물 자체나 대상이 배제돼 버립니다, 실제로는.
카메야마: 알아요, 그겁니다. 또 후에 상세히 이야기할 테지만, 우선 서양에서 말하는 세계와 인간의 관계, 이 관계에서는 근대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이에 비해 불교는 정말로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치로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논합니다. 지금 유럽에서 포스트모던의 다음을 탐구하면서 이전의 사고를 뛰어넘으려는 것을 보면, ‘저건 또 뭐야, 유식(唯識)이라는 건가?’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시미즈: 불교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메이야수가 ‘인류가 태어나기 전’(선조이전성)에 관한 논의를 가지고 들어오는 것도, 요컨대 불교에서 말하는 ‘본인미생이전(本人未生以前)’이랄까 예로부터 공안(公案)에서 이야기된 것이지요.
카메야마: 아, 그렇네요.
시미즈: 포스트모던까지의 [근대유럽의] 사상은 대상 세계를 주체와 관여적인 것으로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원성조차 변별할 수 없다는 것이 메이야수의 비판인데요, 거기서 이야기되는 상관성의 문제라는 것도 예를 들어 선(禪)에서 양손을 맞부딪칠 때 ‘쌍수(雙手)의 음성을 들어라’(쌍수음성(雙手音聲): ‘양손을 칠 때 한쪽 손이 내는 소리를 들어라’)라는 공안(公案)을 생각해온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래서 나는 『밀려드는 실재』를 쓰기 전인 2013년 『미셸 세르』를 집필한 시점에서 메이야수의 용어[선조이전성]를 일부러 ‘인류미생이전(人類未生以前)’으로 번역한 것이지요. 어차피 불교로 올 것으로 생각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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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의 내용은 2022년 3월 2일에 카미시치켄 문고(上七軒文庫) 채널 in 시스템에서 배포한 “이변을 떠나다: 『오늘날의 애니미즘』을 둘러싼 정담(鼎談)”을 대폭 가필 수정한 것이다. [본문으로]
- [역주] 란덴(嵐電)은 케이후쿠(京福) 전철의 아라시야마선(嵐山線)의 줄임말로 교토 중심가에서 아라시야마까지 이어진 노선을 가리킨다. 이 노선은 100년 이상의 역사가 있으며 지금은 교토라는 도시의 역사를 말해주며 관광객에게는 교토의 명물 중 하나다. [본문으로]
- 길장(吉藏, 549~623)은 6~7세기에 활약한 삼론교학(三論敎學)의 대성자(大成者). 가상대사(嘉祥大師)라고 하며, 『삼론현의(三論玄義)』를 썼다. [본문으로]
- [역주] 고대 인도의 대서사시 중 하나이며, 후에 힌두교의 주요 경전에 포함되었다. 기원전 4~2세기경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700구절의 시로 이뤄져 있다. 『바가바드 기타: 자신의 내적 존재를 인식하는 길』(정창영 옮김, 무지개다리너머, 2019) 참조. [본문으로]
- [역주] 고대 인도의 대서사시 중 하나이며, 고전 산스크리트 문화의 최고봉을 이룬다. 비슈누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라마 왕의 일대기를 24,000구절의 시에 담았다. [본문으로]
- [역주] 유식학(唯識學)에서 모든 심식(心識)은 상분(相分), 견분(見分), 자증분(自證分), 증자증분(證自證分)의 사분으로 설명되는데, 오관을 통해 마음에 떠오르는 대상이 상분이며 그 상분에서 선악을 분별하는 작용을 견분이라고 한다. 또 견분을 자체적으로 증명하는 작용을 자증분이라고 하고 그것을 다시 증명하는 작용을 증자증분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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