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미즈 다카시(清水高志)의 2023년 저작 『공해론/불교론(空海論/佛敎論)』(以文社)의 1부 '대담'을 https://sarantoya12.tistory.com/160 https://sarantoya12.tistory.com/161 https://sarantoya12.tistory.com/163 이어서 번역해 올려둔다.
‘유출론(流出論)’을 넘어서
모로: 연기(緣起)에 관해 적어도 그 일부는 『오늘날의 애니미즘』과 오늘의 이 대화에서 어느 정도 분명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카메야마: 맞습니다. 『오늘날의 애니미즘』을 읽으면 좋겠네요.
모로: 그리고 내 생각에 시미즈 선생이 환멸문(還滅門)에 주목했다는 것이 참으로 대단한 점이 아닌가 합니다. 매우 중요한 논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는 무명(無明)에서 시작해서 행(行), 식(識), 명색(名色)을 거쳐 마지막에는 생(生), 노(老), 사(死) 등으로 이어지고, 얼핏 보면 직선적입니다.
카메야마: 그렇습니다.
모로: 그것을 거꾸로 돌리면 생(生), 노(老), 사(死)의 원인은 이러저러하고 또 무언가의 원인은 이러저러하고…, 그리고 마지막에 근본적인 무지(無知), 곧 무명(無明)으로 거슬러 가서 ‘아, 그렇네, 근본적인 무지가 문제였네!’가 됩니다.
시미즈, 카메야마: (큰 웃음)
모로: ‘알았다!’라는 느낌을 받기 쉽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카메야마: 맞아요.
시미즈: 그게 환원입니다. 거꾸로 환원해가는 겁니다.
모로: 그렇지만 십이지연기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환원으로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시미즈: 그래서 『오늘날의 애니미즘』에서 그 부분에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모로: 그래 보였어요.
카메야마: 반대로 많은 불자가 그 부분을 의식했는가 하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기이합니다.
모로: 아니, 평범하게 곧이곧대로 파악한 사람들이 있어요. 마음의 작용을 조금 전 이야기한 이항의 조합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평범하게 시간의 계열로 계속 흐르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어요. 이에 대해 ‘아냐, 그건 틀렸어’라고 지적한 이가 나가르주나입니다. 변화는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는 것을 『중론』에서 논합니다. 불교 전부가 변화라는 것을 직선으로 파악한 것이 아니거든요….
카메야마: 닫힌 체계랄까요, 고리 같은 것을 만드는 문제에 관해서인데요, 카마시키켄(上七軒) 문고에서 진행하고 있는 〈사상으로 바라보는 일본불교의 역사〉라는 강의에서 나는 계속해서 안넨(安然) 1을 이야기해왔습니다. 지금 여기서 『오늘날의 애니미즘』을 비롯해서 시미즈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한 것은 일본불교에 있어서 공해(空海) 이후 안넨(安然)과 같은 밀교 승려들이 어떻게든 말로 표현하려 한 진리의 세계가 이 순환, 닫힌 진리라는 것입니다. 환원하지 않는….
시미즈: 축약을 만드는 것이죠….
카메야마: 반대로 그것이 아닌 것이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대승불교의 논서]이지요. 이 책은 마음, 곧 진여(眞如)라는 것이 하나의 원천 같은 것으로서 언제나 존재하고, 그것으로부터 무언가가 나온다고 말하지만, 그 사이가….
시미즈: 유출론(流出論)입니다.
모로: 일원론이며 이즈츠 토시히코(井筒俊彦, 1914~1993, 일본의 언어학자이자 이슬람학자)의 이론에 가깝지요.
카메야마: 안넨(安然)의 저작을 읽어보면, 오히려 불변의 진여(眞如)라는 존재는 유출(流出)을 부정하는 것이며 유출 자체는 낮은 수준의 사상(事象)에 불과합니다. [『대승기신론』은] ‘진여(眞如) 그 자체로서의 나’와 ‘진여(眞如)’ 사이의 닫힌 고리와 같은 것을 계속해서 표현하고자 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일방적으로 생성하는 측의 ‘진여’, 다시 말해 중생심(衆生心)(『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말하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의 진여가 있어서 그로부터 생겨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지요. 생겨난 대상은 진여에서 나온 것일 뿐이고 대상과 진여는 그러한 관계라는 것이 ‘기신론(起信論)’이라고 한다면, 안넨 등은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들이 마치 ‘진여’와의 사이에서 순환적인 작용을 하는 행위자인 것처럼 ‘진여적인’ 것이 된다고 합니다….
시미즈: 그러한 측면이 일본에서는 점차 강조되고 있지요. 그렇지만 분명 공해(空海) 또한 음소(音素)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엠페도클레스의 이야기에서 나온 사대원소에 식대(識大)와 공대(空大)가 추가된 그의 육대(六大)는 절대적으로 그것을 순환시키려 합니다.
카메야마: 그렇습니다. 그러나 일본불교, 특히 밀교 사상 연구에서는 유출론이 상당히 뿌리 깊은 주장이며, 게다가 그것이 완전한 착오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공해 또한 그렇게까지 철저하지 않았어요. 공해의 사상은 유출론과 가깝고, 오히려 안넨 이후에 환원주의를 철저히 전복해서 유출론을 부정해갑니다.
시미즈: 공해의 사상은 결국 『성자실상의(聲字實相義)』를 통해 접근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카메야마: 아, 그런가요.
시미즈: 저 책이 가장 화엄에 가깝지 않나요? 『즉신성불의(卽身成佛義)』 등에도 있지만, 『성자실상의』에는 안과 밖이라는 형태로 상호 포섭을 말하는 부분─“안팎의 색(色)은 서로 의정(依正)으로 삼고”─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원론이 아니라 이항대립을 거쳐 축약을 만든 다음의 다원론입니다.
카메야마: 안넨의 『교시문답(敎時問答)』을 읽고 싶은데요, 완벽한 현대어 번역본이 아직 없습니다(웃음). 그렇지만 말씀하신 대로 『성자실상의』가 중요하고, 또 『즉신성불의(卽身成佛義)』에도 육대(六大) 이야기가 나옵니다. 육대는 ‘생성하는 주체’로 생각하기 쉽지만, 공해는 은근슬쩍 ‘그런데 사실은 능소(能所)(능생과 소생), 즉 생성함과 생성됨이 별개가 아니’라고 쓰고 있고, 이 구절을 읽는 사람은 모두 휙 넘길 겁니다. 그렇지만 사실 공해는 밀호(密號)를 써서 제자들에게 비밀의 말로 전달하려 했던 것이 바로 이 글귀입니다. 일단 육대(六大)가 있고 그것을 기본으로 세계의 성립을 설명하는데,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능생(能生)・소생(所生)은 일방적이지 않다는 것이 그의 깊은 가르침입니다.
시미즈: 결국 사대원소도 이른바 주어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대원소는 능생이라는 형태로 정립된 것이 아닙니다. 원자론적 원소가 아니기에.
카메야마: 공해의 저작에 관한 최신 연구를 살펴보면, 역시 나라(奈良)[710~794년 나라 시대의 수도]의 도련님들에게 밀교가 무엇인지를 알기 쉽게 설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원자론적인 소위 옛 진여론적(眞如論的) 설명을 한 것인데요, 공해 자신은 결국에 시미즈 선생이 말한 대로 축약을 편성한, ‘진리’와 ‘우리’ 사이의 순환 관계를 생각했고, 정말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시미즈: 일종의 상징입니다. 어쨌거나, 축약이고요.
카메야마: 그래서 상징과 같은 것을 아마도 수행자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매개로 활용한 것이겠지요.
불교는 ‘초이론’이 아니다
시미즈: 신화 이론은 어떤 의미에서는 성급합니다. 거의 모든 것을 자연의 언어로 설명해서 그것을 ‘열어둔 채로’ 미완의 논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거든요. 요컨대, 임의로 세계에 복잡한 의미를 부여하고 온갖 것을 변별하는 자재성(自在性)을 우선 얻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구조를 만들어 갑니다. 레비스트로스는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를 예로 드는데, 이 곡 또한 부풀어 오를 만큼 부풀어 올라 고리를 그리듯이 결말을 짓습니다. 같은 곳으로 돌아온다는 것이지요.
모로: 게다가 중요한 것은 『More-Than-Human』에서 말했다시피, 요컨대 나가르주나의 테트랄레마, 사구분별은 일종의 신비주의로 받아들여지는 면이 있습니다. 공해도 그러했고요. 길장은 어떻게 이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길장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게 문제지요….
시미즈: (웃음)
카메야마: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이 길장에 관심이 없습니다.
시미즈: 나는 『삼론현의(三論玄義)』를 읽고 ‘길장 대단한 천재구먼. 300년에 한 번 나오는 천재!’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로, 카메야마: (큰 웃음)
모로: 나가르주나의 이렇듯 복잡한 논의가 해체주의(Deconstrution)와 결부되면 더는 닫히려 하지 않고 여하간 ‘해체, 해체, 해체…’를 목적으로 해서 ‘공(空)’을 파악하려 합니다. 그런데 작금의 시미즈 선생의 가장 큰 공헌의 하나는 ‘아니, 그게 아니지’라는 입장을 내온 것입니다. 물론 아직 일반인은 이해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오늘날의 애니미즘』을 읽으면 지금 이야기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카메야마: 이제부터 읽을 수밖에요.
모로: 네, 앞서 인도의 논리학책에 쓰여 있다는 엄청난 수수께끼 같은 초항이며 중항이며 말항이며 등등 인도인이 쓴듯한 문장도….
시미즈: 《티마이오스》입니다.
모로: 네, 알지요.
카메야마: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모로: 중요한 것은 [불교가] 기이한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고, 적어도 이성적이랄까요, 논리적인 것으로서 불교의 이러한 논의가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학술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매우 큰 공헌이라고 생각합니다.
카메야마: 그럼요!
모로: 굳이 말하면 논리를 알면 훤히 보이거든요. 죽어도 모르겠는 의미를 서서히 알게 되고 오히려 깔끔하게 정리가 됩니다.
카메야마: 『오늘날의 애니미즘』은 두 번 이상 읽어야 합니다. 우선 공저자인 오쿠노 선생과의 대담까지 포함해서 읽고 그것을 머리에 집어넣은 다음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전부 봤다’라는 느낌이 들어요.
모로: 요컨대 레비스트로스의 용어를 빌어 말하면 ‘구조’를 만들어 보여 준 것이 큽니다.
카메야마: 그렇습니다. ‘구조’라는 말도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구조라 하면 역시 무언가 환원 가능한 토대라는 의미로 이해되거든요.
시미즈: 그 점에서 보면 구조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사고방식을 구조언어학 소쉬르의 발상과 혼동하고 있는 듯합니다.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는 소쉬르의 제자가 정리한 것인데, 경제학 모델의 영향이 큽니다. 즉, 경제학에서 말하는 가치 형태론이 확실히 배어있어요. 상품의 가치형태란 공시적으로 화폐를 매개로 어느 한 상품과 다른 모든 상품이 간접적으로 교환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세세한 물가 변동에 따라 통시적인 축에서 가치형태가 변한다 해도 공시적으로는 일거에 그 차이가 체계로서 주어집니다.
카메야마: 그렇습니다.
시미즈: 레비스트로스는 그렇지 않습니다. 볼레로처럼 이항대립의 제3항이 빙빙 돌아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비유하자면, 소쉬르의 구조 개념은 여러 개의 풍선을 하나로 묶어 손에 쥐고 있으면 반발하는 풍선들 사이의 그 차이의 체계입니다. 이 의미로 구조를 말하면 좀 더 통시적인 축에 의해 차이화 해야 한다는 논의가 반드시 나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말한 것이 포스트-구조주의입니다. 그렇지만 레비스트로스가 직관적으로 통찰한 ‘구조’에는 더욱 깊은 무언가가 있습니다.
주어성에서 속성으로
시미즈: 사실 순회시키는 가장 단순한 형태를 레비스트로스는 말했습니다. 이것은 숫자상으로 말하면 ‘클라인 4원군’이라는 것으로 두 종류의 이항대립을 조합시키는 방식입니다. 여기서는 알기 쉽게 이항대립을 색과 모양으로 하겠습니다. 하양과 검정이 있고 사각형과 원이 있다고 합시다. 이것을 조합해서 순회하는 구조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그림 1과 같습니다. 여기서 검은 사각형과 하얀 사각형에서 사각형을 축으로 보면, 사각형은 ‘하양’과 ‘검정’이라는 반대 성질을 겸하게 됩니다. 즉, 사각형은 제3항인 것이지요. 그러나 예를 들어 ‘하양’을 축으로 보면 하얀 원과 하얀 사각형에서 하양은 ‘원’과 ‘사각형’이라는 반대의 성질을 겸합니다. 이때 하양이 제3항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양’, ‘검정’, ‘원’, ‘사각형’은 모두 이항대립의 제3항의 위치를 점하며 그 역할이 순회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학』에서 매우 복잡한 논의를 전개하지만 『친족의 기본구조』에서는 더욱 단순한 순회, 축약의 모델을 제시합니다.
잘 알려진 그림이 있지요(그림 2). 레비스트로스는 오스트레일리아 선주민 카리에라족의 혼인규칙이 ‘클라인 4원군’과 같은 구조임을 깨닫습니다. 이것을 프랑스인이 알기 쉽도록 파리와 보르도라는 지역의 이항과 뒤랑 성씨와 뒤퐁 성씨라는 가문의 이항을 조합해서 설명한 것이 이 그림입니다. 여기서 결혼하는 부계의 토지에 살며 성은 모계를 따르는 규칙이 있다고 하면, 보르도의 뒤랑 성씨의 여자가 파리의 뒤퐁 성씨의 남자에게 시집가면, 그 자식은 파리의 뒤랑 성씨가 됩니다. 또 파리의 뒤퐁 성씨의 여자가 보르도의 뒤랑 성씨와 결혼하면 그 자식은 보르도에 살면서 성은 뒤퐁이 됩니다. 이런 식으로 돌아 결혼 관계는 그림 2에서 점선 γ로 표시됩니다. α라는 화살표가 어머니와 자식. 파선 β는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가 됩니다.
기본적으로 이것이 바로 삼분법의 형태입니다. 이항대립을 겸하는 제3항, 제3 렘마에 모든 항이 걸리고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구조가 됩니다. 이것을 말한 시점(時點)에서 원인으로서 ‘포함하는 것/포함되는 것’의 이항대립도 풀립니다. 그 세 종류의 이항대립이 최소의 축약입니다. 이제 아시겠지만, 이러한 구조는 ‘닭싸움 서열(picking order)’과 같습니다. 그림 3에서처럼 A가 B를 찌르고 B가 C를 찌르고 C가 D를 찌르고 D가 A를 찌릅니다. 마치 닭들이 서열 싸움하는 것 같죠. 신화의 구조는 이런 식이라는 것을 레비스트로스는 말합니다. 그런데 이항대립의 두 항을 그것들의 이중성으로 풀어내는 방식이라고 하면, 가령 이 그림의 위와 아래를 “원 오퍼레이션(one operation)”[점원 혼자서 점포를 운영하는 것]으로 교체할 뿐이면 상관적인 것에 머뭅니다. 각각의 항을 다른 항에 일방적으로 환원하지 않는(포함하지 않는) 것으로서 완전히 분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분리하기 위해 비틀어야 합니다.
모로: 이게 바로 비트는 것이군요.
시미즈: 그래서 이처럼 비틀었을 때 마침내 그 항 자체의 본래의 성질도 나옵니다. 애니미즘적 자연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모로: 오, 이제야 애니미즘이라는 말이 나왔네요.
카메야마: 전부 애니미즘의 이야기인데 말이죠.
모로: 맞습니다. 전부 애니미즘을 이야기하는데도, ‘이것이 애니미즘이야!’라는 프레임으로 말하는 것이 『오늘날의 애니미즘』이죠.
시미즈: 그렇습니다.
모로: 드디어 이 책에 도착했네요(웃음).
카메야마: 조금 전 『친족의 기본구조』가 나왔는데요, 그것은 사회 속에서의 혼인 관계와 금기를 이야기하고 있고, 또 그러한 혼인의 사회관계는 지금의 PC(정치적 올바름)와는 상응하지 않습니다. 여성의 교환 체계로서 이해하고 그로부터 금기의 문제 등을 재해석한 것입니다. 레비스트로스가 그 속에서 보여주려던 혼인 체계─혼인 관계가 만들어지는 과정─는 교환에 교환을 복잡하게 거듭하다 최종적으로는 말끔하게 닫아버리죠.
시미즈: 그 과정이 매우 복잡한데요, 모든 항이 다른 이항대립의 두 항의 성질을 겸한 제3항이 되며 그것이 순회한다는 ‘클라인 4원군’의 구조로 모델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화 구조, 즉 작용으로서의 신화소에 대한 무의식적 조작에서 찾아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신화학』입니다. ‘꿀’이 나온다거나 ‘연초’가 나온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건 정말로 복잡해서 수습이 잘 안 되지만.
모로: 그런 것도 결국 불교로 바꿔보면, 예를 들어 『중론』 제2장이 되지 않을까요?
시미즈: 그렇습니다. 어떤 양태나 속성에 대해 그것이 속하는 주어를 내세워서 이해해 버리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주어를 내세우고 주어가 있으니까 당연히 그런 양태인 거지라며 그 양태의 원인을 주어 측에 돌려버리는 것은 항에 자성(自性)(자기 원인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로부터 바텀-업으로 사고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자성이 없다는 것이 무자성(無自性)으로 ‘공(空)’이라는 겁니다.
모로: 맞습니다. 그래서 그 주어성을 양태나 술어로 가지고 와서…. 그런데 그 술어라는 것은 다르마(속성)이고요. 조금 전에 이야기했지만, 대립하는 속성과 속성, 요컨대 항과 항의 ‘바꿔 쓰기’를 도입해야 합니다. 도입하지 않으면 막다른 길에 도달하고 만다고 지적한 것이 ‘팔불(八不)’이며 『중론』입니다. 이것을 『More-Than-Human』에서 이야기하지요.
시미즈: 결국 『중론』에서는 사구분별(四句分別)을 논하면서도 그것을 전부 부정합니다. 이는 주어로서 내세워진 것에 대해 사구분별을 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구조 그 자체로 이야기하자면, 나가르주나는 네 종류로 충분할 것으로 보고 ‘팔불’로 짜냅니다. 내가 『중론』을 깊이 파고들기 시작한 것은 왜 사구분별이며 왜 테트랄레마인지 의문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모로: 나가르주나는 니힐리스트라고들 하지요. 즉 부정만을 이야기한다고요. 그렇지만 실은 부정이 들어가지 않으면 이항대립이 나오지 않습니다. A가 있으면 非A를 가져와야 이항대립을 만들 수 있기에, 부정이 절대적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전연 아닙니다. 나가르주나는 붓다의 연기(緣起)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시미즈 선생 식으로 말하면 주어화 해서는 안 되므로 그 속성의 다시 쓰기를 복수로 준비해서 그것들을 순회하는 구조를 만들어놓으면 연기를 깔끔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에 따라 그것은 부정이 아닌 겁니다. 요컨대, 무한의 부정이라거나 무한의 해체가 아닙니다.
카메야마: 고정화된 이원론을 전제로 하면 그렇게 되겠지만 그런 얘기는 한마디도 안 했고요.
시미즈: 확실히 안 했습니다.
모로: 그래서 무한한 후퇴나 무한의 부정이 싫은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을 때 보통은 ‘진여(眞如)’라고 말하지요. 거꾸로 말하면 궁극의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종결점이랄까요, 최후의 받침대 같은 것을 만들어서 이것만 있으면 전부 설명 가능하다는 식으로요. 불교적인 일원론이 돼 버립니다. ‘공(空)’이란 그런 것으로 이해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하면 결국 설명하고 있지만 전연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시미즈: 초이론(超理論)이 된 것이지요.
모로: 네, 초이론. 그렇게 신비주의가 되었고요.
시미즈: 모든 이항대립의 분절 이전을 말하며, 요컨대 이원론을 ‘하나’로 뭉쳐버립니다. 그리하면 ‘여럿’이라는 문제가 숙제처럼 남게 됩니다. 하루속히 풀어야 하는 근원적인 이해대립의 문제를 뒷전으로 미루게 되고, 그것이 닫힌 고리로 거둬지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포스트모던의 끝나지 않는 상대주의와 똑같습니다.
카메야마: 아, 그렇네요.
모로: 그렇죠. 그리고 그것이 메이야수가 부정한 상대주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말로 메이야수는 길장(吉藏) 그 자체입니다.
시미즈: 무궁을 기피한 길장은 회의론적 상대주의를 부정한 메이야수와 통할 수 있겠네요. 『유한성 이후』를 보면 인류미생이전(人類未生以前)[선조이전성]을 논하는 데에서 자신의 사후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자신의 사후의 삶이 있을지 없을지를 묻고, 있으면서 또한 없다는 식의 제3 렘마적인 상대주의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제4 렘마적인 것이 단적으로 나오는데, 이야말로 사변적 철학자다운 로직이지요. 그래서 정말로 ‘아, 이건 나가르주나다’라고 생각하면 읽었어요. 그레이엄 하먼도 매우 불교에 가깝습니다.
카메야마: 내가 밀교(密敎) 연구자라서 그런지 하먼이 밀교로 읽히더라고요. 사물을 그 자체를 구성하는 내부적 관계로 환원하는 하부채굴(undermining)과 외부적 관계로 환원하는 상부채굴(overmining)이라는 두 종류의 환원주의를 배제하고 사물 그 자체를 보고자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밀교에서 말하는 ‘즉사이진(卽事而眞)’과 상당히 가깝습니다.
시미즈: 하먼은 장작과 불의 비유를 드는데요, 이것은 『중론』 제10장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거의 똑같습니다. 이슬람을 거쳐 전해진 비유를 하먼이 가져온 것이지요.
- [역주] 안넨(安然, 841~915 추정)은 헤이안 시대의 승려로서 천태종 밀교의 대성자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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