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미즈 다카시(清水高志)의 2023년 저작 『공해론/불교론(空海論/佛敎論)』(以文社)의 1부 ‘대담’을 사막여우 :: 시미즈 다카시_공해론/불교론_1 (tistory.com)에 이어서 번역해 올려둔다.
육도윤회(六道輪迴)와 다자연론(多自然論)
모로: 앞서 이야기했듯이 철학을 일본의 토착적 사상으로 가지고 와야 한다는 것인데요, 『밀려드는 실재』를 읽고 생각한 것은 반대로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육도윤회 등을 진지하게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일종의 기호랄까요, 조작 가능한 기호와 같은 것으로서 지옥, 아귀, 축생이 있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전연 생각하지 않고 ‘이숙(異熟)이네. 이숙은 지옥, 아귀, 축생으로 태어나는 것이라네’로 끝내버리고 그것이 가지는 철학적 함의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뢰야식(阿賴耶識) 1과 같은 것을 다루게 되면 ‘이것이 바로 철학이지요. 생각해봅시다. 인식론이지요?’라며 끝내버립니다. 정말로 육도윤회 혹은 특히 아귀도(餓鬼道)와 같은 것은 “세가키(施餓鬼)” 2나 “오봉(お盆)” 3과 직결하는데도 역으로 바로 그러하기에 인류학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죠. 이 책을 읽었을 때 ‘그래,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지’라는 반성이 컸습니다. 그래서 트위터 등에서 “모두 이 책을 읽으세요!”라고 말하고 다녔어요.
카메야마: 모두 읽었나요? 그래서?
모로: 내 지인들은 읽었습니다. 지인이 많거든요. 읽은 사람이 꽤 됩니다.
카메야마: 잘됐네요.
모로: 이 책을 읽은 사람 중에서 “읽었습니다!”라고 말해주는 이도 있습니다. 다만 불교를 직접 다루는 부분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뭐 때문에 모로 선생은 이 책을 읽으라고 한 건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마침 그때 내가 고민한 문제는 어째서 아귀도(餓鬼道)를 우리 세계가 뒤집어써야 하는가였습니다. 『아귀초지(餓鬼草紙)』 등을 읽은 후로 줄곧 생각했습니다.
길장(吉藏)이 그래서 그랬나 생각하면서 그 중첩된 방법에 어떤 패턴이 있겠지라는 식으로 정리했지만요. 그렇지만 이 정리된 생각을 어떻게 이야기할지는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밀려드는 실재』를 보고 ‘그래, 맞아!’라며 무릎을 친 거죠. 이 의미에서 이 책과의 만남은 앞서 말했듯이 가장 큰 ‘시미즈 체험’이었습니다.
카메야마: 좋네요. 최고! 행복한 만남 아닙니까?
시미즈: 지옥을 거쳐서.
카메야마, 모로: (폭소)
시미즈: 나도 분명 모로 씨가 이야기한 그러한 의문이 있었고, ‘아, 그래서 그런 거였나’라며 [일본의 토착 사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해 [내 연구와] 연결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경위를 통해 『오늘날의 애니미즘』에서는 불교에 더욱 가까워져 ‘이제는 불교 말고는 사고할 수 없어!’라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모로: 『밀려드는 실재』 이후지요? 앞서 이름이 언급된 다종연구회에서 『밀려드는 실재』 서평회가 있었어요. 그때 나도 불러줘 참가했는데요, 아귀도(餓鬼道) 등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다만 그때는 아직 내 안에서 정리가 다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심도 깊은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More-Than-Human』이라는 인터뷰집이 간행되었죠. 책 제목도 좋았고 내용도 최고였습니다. 『오늘날의 애니미즘』과 마찬가지로 이문사(以文社)에서 나왔습니다. 이 책은 인류학 서적으로서 에두아르도 콘의 인터뷰를 비롯해 여러 인류학자와 철학자, 문학자들의 글을 모은 문집(anthology)이라 할 수 있으며, ÉKRITS의 홈페이지 ÉKRITS / エクリ (ekrits.jp) 에 먼저 부분부분 공개되었더랬죠.
시미즈: 나는 도겐(道元)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카메야마: 네, 맞아요.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모로: 내가 시미즈 선생의 이야기를 듣는 청자(聽者)의 역할을 맡아 진행한 “불교 철학의 진원을 재구축하다─나가르주나와 도겐(道元)이 본 것” 清水高志, 師茂樹「仏教哲学の真源を再構築する ― ナーガールジュナと道元が観たもの」 | ÉKRITS / エクリ (ekrits.jp) 도 그 안에 있지요. 뭔가 두들겨 맞은 듯한 인터뷰였습니다.
시미즈: (웃음)
모로: 그래서 오늘 “이변(二邊)을 떠나다”라는 주제로 매우 분명하게 불교의 맥락에서 이야기될 것으로 기대하고, 또 이 대담이 매우 압축적이고 알찬 내용으로 가득할 것이기에 나는 너무나 좋습니다. 물론 ‘잘 모르겠다!’라는 의견도 낼 테지만….
시미즈: 하하(웃음).
모로: 저 때도 이미 시미즈 선생이 불교계에 자주 왕래했더랬지요. 그다음에 나온 것이 이 책입니다, 『오늘날의 애니미즘』.
카메야마: 조금 보충해서 카마시키켄(上七軒) 문고 활동의 연장선에서 이야기하자면, 나는 시미즈 선생의 저작을 모로 선생처럼 진작부터 알지는 못했습니다. 카마시키켄 문고를 시작한 것이 3년 전인데요, 그즈음 나는 불교학이 전공인 데다 인류학적 논의를 매우 좋아해서 당시 여러 사람이 좋다고 말하는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의 『식인의 형이상학』(박이대승, 박수경 옮김, 후마니타스, 2018)과 『인디오의 변덕스러운 혼』(존재론의 자루 옮김, 포도밭출판사, 2022)을 찾아 읽었습니다. 그 속에서 퍼스펙티브주의와 다자연주의라는 사고가 나오는데요, ‘아, 이것은 불교잖아?’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카마시키켄 문고를 시작한 이래 ‘이것은 정말로 도전해봐야 하지 않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불교사 수업에서 ‘퍼스펙티브’이라는 말을 쓴다든지 멀티-퍼스펙티브주의와 불교라는 테마로 강의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러한 내 생각을 모로 선생에게 전하니까 모로 선생은 벌써 내 의중을 아는 듯이 ‘사실은 말이야’라고 말을 꺼냈고, 그렇게 나 또한 시미즈 선생의 활동을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책도 찾아보고요.
오늘 모로 선생이 『오늘날의 애니미즘』에 이르기까지 시미즈 선생의 연구 흐름을 잘 정리해주었는데요, 나 또한 모로 선생과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고, 또 그것이 카마시키켄 문고의 지금 실천과 상응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속성(屬性)’의 논리학─배중률(排中律)을 넘어서
시미즈: 『오늘날의 애니미즘』이나 『More-Than-Human』이 어렵다고들 해서요, 오늘 카마시키켄 문고에서의 강의를 기회로 좀 더 열어놔야겠습니다. 하지만 본래 이항대립의 문제는 어렵습니다. 이른바 배중률이 무조건 성립한다고 할 때, 예를 들어 둥근 개물(個物)이 ‘둥근 것’이라는 그룹에 속한다고 하면 ‘네모난 것’에는 속하지 않겠죠. 다시 말해, 어느 한쪽에 속해버리면 중간이 배제됩니다. 『More-Than-Human』에서 내 논의도 이러한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이때 논리적이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그러한 것이어야 하냐고 하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보편적, 일반적인 것에 개별적인 것이 포함된다는 방향에서 생각했을 때는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것이 또 다른 보편적인 성질을 가질 수 있다면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인도의 논리학에서는 이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후자로 향합니다. 가령 부정형을 생각해봅시다. 배중률을 따르면, 반대의 것이 긍정되는 부정(상대적 부정)과 단지 부정될 뿐인 부정(절대적 부정)이 있습니다. ‘이것은 항아리다’라는 것과 ‘항아리가 있다’라는 것에서 부정형은 다릅니다. 각각의 부정형을 보면, 전자(‘이것은 항아리가 아니다’)는 상대적 부정, 후자(‘항아리가 없다’)는 절대적 부정이 됩니다. ‘백합은 꽃이다’와 같이 개별의 것을 일반의 것에 포함해 가는 분류적인 ‘판단’을 논리적인 것으로 삼는 서양과는 반대로, 인도의 논리학은 일반적인 성질을 개물(個物)의 속성이라는 형태로 개물(個物)에 포함시키는 입장을 채택합니다.
모로: 다르민(Dharmin, 基體)이라고 하지요.
시미즈: 네, 다르마(Dharma, 屬性)와 다르민(Dharmin, 基體)입니다. 앞선 문제를 다르마, 즉 개물(個物)의 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하는 것이 인도의 사고방식입니다. 서양의 철학자 중에도 이러한 사고방식을 채택한 학자가 가끔 있습니다. 가브리엘 타르드(Gabriel Tarde, 1843~1904, 프랑스의 사회학자・범죄학자)나 셸링(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 1775~1854, 독일의 철학자)이 그렇습니다. 실은 소크라테스도 그러합니다. 후기 플라톤에서는 이러한 배중률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데아라는 것은 ‘대(大) 그 자체’나 ‘소(小)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보통의 것은 대(大)라고도 소(小)라고도 말할 수 있는 중도반단(中途半端)[어중간한 것]이 돼버려 이것을 어찌할지 되묻습니다. 또 예를 들어 ‘대(大) 그 자체’의 이데아는 구체적이고 감성적인 것에서 분리돼 버리는 난제가 생깁니다. 플라톤의 대화편 중 《파르메니데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개물(個物)이 일반적인 ‘대(大) 그 자체’와 ‘소(小) 그 자체’를 분유(分有)하는 것이라면 ‘대(大) 그 자체’와 ‘소(小) 그 자체’ 둘 다 가능하다”라고 제안합니다.
모로: 과연 다르마와 다르민이군요.
시미즈: 네, 소크라테스는 그쪽으로 가려 합니다. 그런데 파르메니데스는 소크라테스가 분유(分有)(μέθξις, 라틴어로는 participátĭo)라고 하니까 “그러면 대(大) 그 자체에 그 개물(個物)도 포함되지 않는가”라고 말하며 일반적인 것에 개물을 가지고 들어옵니다. 결국, 파르메니데스는 자신이 보편적으로 삼는 ‘하나인 것’밖에 남지 않는다는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지요.
카메야마: 그렇군요.
시미즈: 《파르메니데스》는 토가 쏠릴 만큼 무척 어렵습니다. 특히 후반부는 착종이 거듭됩니다. 그것을 차근차근 생각해야 합니다. 플라톤의 『향연』을 읽으면 ‘인류의 여명에 이런 소박한 대화를 나누다니’라고 느끼지만, 후기 플라톤은 악몽을 꾸듯이 어렵습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아요! 정말로 소피스트가 나와서 기교 끝판왕의 논의를 펼치면, 인도 논리학의 얼치기 논자가 그리스와 대결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카메야마: 맞습니다. (웃음)
‘야생의 사고’와 테트랄레마
시미즈: 그래서 내가 무엇을 사고하고자 했는가(표 참조). 우선 ‘표. 삼분법과 이이변’을 이야기할 텐데요, 이것은 세 종류의 이항대립을 조합해서 각각을 변화시킴으로써 그것들의 이원성을 조정한다는 방법론입니다…. 우선 세 가지를 표로 정리해두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이변(離二邊)의 중도(中道)’라는 형태로 설파되는 테트랄레마라는 발상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사구분별(四句分別)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요, 인도에서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해온 독특한 논리 양태입니다.
표. 삼분법과 이이변(離二邊)
① 삼분법은 세 종류의 이항대립을 조합해서 그 연결을 변화시킴으로써 그것들의 이원성을 조정한다는 방법론이다.
② 불교에서 ‘이이변의 중도’로 설파되는 사상인 테트랄레마(‘A’, ‘非A’, ‘A 그리고 非A’, ‘A도 아니고 非A도 아니다’)가 삼분법에 의해 정의된다.
③ ‘포함하는 것(밖)’과 ‘포함되는 것(안)’, ‘하나인 것’과 ‘여럿인 것’, ‘주체’와 ‘대상’이라는 세 종류의 이항대립이 그 속에서 다뤄진다.
사구분별이란 ‘A이다’, ‘非A이다’, ‘A이고 非A이다’, ‘A도 아니고 非A도 아니다’라는, 한 명제 A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 네 명제를 열거한 것입니다. 이것은 순서대로 제1, 제2, 제3, 제4 렘마라고 합니다. 서양에서는 제1 렘마와 그 부정인 제2 렘마를 사고하며, 제3 렘마는 배중률에 의해 부정됩니다. 그런데 인도에서는 제3 렘마로는 모자란 지 ‘A도 아니고 非A도 아니다’라는 제4 렘마까지 정의하고자 합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과 같이 불교에서는 그러한 것이 가장 안정적인 형태라고 이야기하는데, 『오늘날의 애니미즘』에서 내가 제시한 삼분법(三分法, trichotomy)이라는 이론은 복수의 이항대립을 결합하는 가운데 더욱 얽힌 형태로 [삼분법] 이론이 순회해서 모두가 제4 렘마, 곧 이항대립의 어느 한쪽[의 극]도 아니라는 구조를 만들어내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얽히는 중요한 이항대립의 요소로 선택한 것이 ‘하나인 것/여럿인 것’, ‘주체/대상’, ‘안/밖’입니다. ‘주체/대상’은 『오늘날의 애니미즘』이 인간과 자연의 문제, 애니미즘의 문제를 다루는 것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 생각에 ‘포함하는 것/포함되는 것’의 관계, 바꿔 말해 ‘안/밖’의 이항대립은 매우 본질적입니다. 이 관계는 소크라테스와 파르메니데스의 대화에서도 최대의 아포리아(난제)가 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그리스인들이 알지 못한 부분으로,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이데아 계와 감성적 세계가 분리된 채로 있게 됩니다.
이것은 인류 전체의 문제로서 레비스트로스 또한 이에 대해 말합니다. 문화와 자연의 분리라는 주제를 둘러싸고 다양한 문화권 사람들의 사고를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포함하는 것’과 ‘포함되는 것’이 분리되거나 교체된다는 이야기는 예를 들어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 2권에 잘 나와 있습니다. 신화는 그러한 주제를 반복적으로 드러내며 그것이 변형되는 변이(variation)를 차례차례 이야기합니다. 이 ‘포함하는 것/포함되는 것’에서 ‘포함하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라고 하는데─이데아라고도 합니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그렇다고 그것을 직접 대놓고 표현하는 것은 섣부릅니다.
그러므로 그것[‘포함하는 것/포함되는 것’]과 흡사하면서 더 구체적으로 연결하기 쉬운 또 다른 이항대립에 그 주제를 분열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개념을 세밀하게 해부합니다. 그리하여 《파르메니데스》에서 나오는 것이 ‘하나’와 ‘여럿’이라는 또 다른 이항대립입니다. 그러나 ‘하나인 것/여럿인 것’이라는 이항대립만으로는 역부족이고 그것을 다시 별종의 이항대립과 결합해 얽히게 하는 구조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실은 그리스인들은 그러한 것을 줄곧 생각한 것 같습니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김유석 옮김, 아카넷, 2019)를 보면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인 엠페도클레스 4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후대 사람들은 소크라테스 등의 철학자들이 등장하기 전에는 굉장히 소박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카메야마: 맞습니다.
시미즈: 플라톤이 등장하기 전에 몇몇 ‘소박한 철학자들’이 있었다는 식이지만, 사실 그들은 정말로 중요한 것을 사고했습니다. 후기 플라톤에 등장하는 이탈리아에서 온 자객과 같은 논자가 고도의 놀라운 논의를 전개합니다. 그 사람들이 사고한 것은 실은 매우 심오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읽어보면, 지금 삼분법에서 논하는 사고가 수두룩합니다.
이것은 잘 알려진 사대원소(四大元素)라는 것입니다(그림 참조). 이 사대원소는 가령 공해(空海)의 사상과도 연결되는데요, 이 사대원소에 식대(識大)와 공대(空大)를 더하면 공해의 육대(六大) 사상이 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들은 서로 조정됩니다. 예를 들어 불(火)과 물(水)은 정반대의 요소로서 이항 대립적입니다. [바람(風)과 흙(土), 공(空)과 식(識)도 마찬가지]
카메야마: 삼각의 대립 쌍이군요.
시미즈: 쌍을 이루지요. 이렇듯 흙(土)과 바람(風) 또한 정반대의 요소입니다.
카메야마: [사대원소(불, 물, 바람, 흙)는] 사각형의 대립 향을 이루네요.
시미즈: 그렇습니다. 이렇듯 해소 불능한 반대의 것이 있으면 이 이항대립을 우선 비슷한 형태의 이항대립으로 분열시키는 겁니다. 이러한 조정의 해법이 고대로부터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카메야마: 그렇네요.
시미즈: ‘불(火)’, ‘물(水)’과 같은 주어적인 것이 아니라 더욱 구체적인 ‘기능’으로 바꿔서 이항대립을 다른 것으로 분열시킵니다. 기능이라는 것은 앞서 인도의 논리에서 말하는 다르마입니다. 그렇게 하면 ‘뜨거움(熱)’과 ‘차가움(冷)’이라는 이항대립이 나옵니다. <그림>을 보면, 그 반대편에 ‘마름(乾)’과 ‘습함(濕)’이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물(水), 불(火), 바람(風), 흙(土)의 사각형에 ‘뜨거움(熱)’, ‘차가움(冷)’, ‘마름(乾)’, ‘습함(濕)’의 내접 사각형이 배치됩니다. 이것은 요컨대 이항대립을 더욱 감성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앞서 ‘안/밖’이라는 이항대립, 곧 ‘포함하는 것/포함되는 것’을 ‘하나’와 ‘여럿’이라는 이항대립으로 바꿔놓듯이, 구체물과 결합하기 쉬운 별도의 이항대립으로 분열시킵니다. 그렇게 하면 제3항이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야생의 사고’ 입니다. ‘마름(乾)’은 ‘불(火)’과 ‘흙(土)’의 쌍방의 기능일 수 있으며, ‘뜨거움(熱)’은 ‘불(火)’과 ‘바람(風)’의 쌍방의 기능일 수 있습니다. ‘불(火)’과 ‘물(水)’, ‘바람(風)’과 ‘흙(土)’과 같은 대각선이 아니라 이것들의 중간항을 매개해서 사각형의 변을 순회하면 모두가 서로 조정된다는 것이지요.
세계가 사대원소와 사랑과 증오에서 만들어진다는 엠페도클레스의 이야기는 얼핏 보면 ‘소박한 신화를 이야기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지만….
카메야마: 이거 되게 영리하네요.
시미즈: 요컨대, 이것이 바로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에서 분석한 것입니다.
카메야마: 네, 네.
시미즈: 레비스트로스가 아메리카 선주민의 신화를 독해하면서 논했듯이, 완전히 분열해버린 대립 이항의 요소를 다시 조합해서 게다가 모든 것이 연결되면 고리가 닫힙니다. 이것을 엠페도클레스는 ‘사랑’이나 ‘증오’로 부른 것이지요.
모로: 그것밖에 표현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군요.
카메야마: 이는 레비스트로스가 연구대상으로 삼은 브라질의 보로로족이나 남비콰라족이 이른바 추상개념은 없지만 숲의 동물들이 가진 성질을 대립시키거나 그 대립을 조정해서 범주를 만들어내고 감성의 철학을 만들어낸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지요.
시미즈: 그렇습니다. 『야생의 사고』에서 처음부터 레비스트로스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개념을 주어화해서 범주를 만들어 그것들을 조정, 분류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존의 선주민은 기능의 세세한 차이에 매우 정통해서 그것들을 비교해간다고요. 레비스트로스는 이것을 ‘야생의 사고’라고 말합니다.
카메야마: 조작자(operator)라는 것이네요.
시미즈: 여기서 엠페도클레스와 ‘야생의 사고’가 한 것은 무엇이냐라고 하면, 우선 이항대립이 있습니다. 그 이항대립을 다른 이항대립으로 분열시킵니다. 그것을 감성적인 것에 접근시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전체로서의 고리를 묘사하듯 조정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매개의 제3항이 나와서 결과적으로 어디에도 ‘시작점’이 없는 구조가 생성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테트랄레마입니다.
카메야마: 아, 그렇네요.
시미즈: 요컨대, 제3항의 위치가 순회하면, 그 속에서 ‘원인은 어떤 항도 아니다’라는 제4 렘마가 이야기될 수 있습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스스로 구조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사이언스(학문)─여기서 그는 불어의 Science, 곧 ‘학문’이라는 뜻으로 말한 듯합니다─에서 환원적 방법은 구조적인 방법의 두 갈래뿐이라고 말합니다. 구조적인 방법이란 레비스트로스의 경우에는 제3항적인 것, 다시 말해 이항대립을 우선 만들어놓고 그것들을 공존시키는 구체물─‘매개’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을 단지 뒤로 미뤄두는 것이 아니라[뒤로 미뤄두거나] 차례차례 바꿔가며 순회시킴으로써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한 형식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항대립의 고정화는 왜 일어나는가?
카메야마: 지금 선생은 ‘환원’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애니미즘』을 읽은 것을 전제하고 있는데요, 잠시 ‘환원(reduction)’이라는 것, 환원한다는 것의 문제성에 대해 정리하겠습니다. 『오늘날의 애니미즘』에서 시미즈 선생은 유럽의 사고에서 이원론적인 것이 왜 문제인지를 지적하면서 삼분법의 논의를 전개합니다. 유럽의 이원론이 문제적인 이유는 결국 복수의 이항대립 관계가 고정된다는 것인데요, 그래서 그 관계가 닫히지 않는 단순한 열린 과정을 묘사하는 것으로 끝나거나 이항대립의 한쪽에 다른 한쪽이 환원되는 형태가 돼 버린다는 것이죠….
시미즈: 어느 한쪽의 방향으로 회수돼 간다는 겁니다. 이것은 ‘포함하는 것/포함되는 것’의 관계가 일방적이라는 것입니다.
카메야마: 예를 들어 앞서 주객의 이항대립에서 자연은 어디까지나 주체의 대상이라는 존재 방식으로 회수돼 버린다는 겁니다.
시미즈: 그것이 환원입니다. 이원론이 초극하는 방법에 대해 유럽에서도 이미 몇몇이 논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개로서의 제3항을 통해 순환시키는 형태가 아니라, 가령 이중성 속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이었습니다. 정신이 주체로서 대상을 사고하는 데에서 그 주체가 사고하는 자신을 다시 사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듯이, 이항대립을 이중성으로 해소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중성을 통합하는 것은 [하나인] 주체이며 대상 세계는 있는 그대로 다양한[여럿인] 현상으로서 존재한다는 식으로 그 이중성에 ‘하나인 것/여럿인 것’의 이항대립을 겹쳐서 연쇄적으로 풀어가고자 합니다. 피히테 등의 독일관념론은 모두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방식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아라비아를 거쳐 스콜라철학이 계승한 그리스풍의 변증법입니다. 이것은 플라톤의 《소피스테스》에 등장하는 논의에 기반합니다. 인도유럽어의 ‘~이다’와 ‘~가 있다’의 이중성을 사용한 것입니다. 구체적인 개물(個物)에 복수의 각기 다른 이데아를 분유시킨다는 소크라테스의 아이디어를 파르메니데스가 몰아붙여 허투루 만들고, 이에 따라 모두를 포섭하는 ‘하나인 것’만이 존재하게 됩니다. 이에 반해 ‘~가 있다(有)’라는 것의 역은 ‘~가 있지 않다(無)’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지 않다(異)’라고요. 그리고 ‘~이지 않은 것이 있다’라는 구조를 만들고자 합니다. 이것이 《소피스테스》 식의 해결법입니다. 즉 ‘~이지 않다’라는 것은 술어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이지 않은 것’, 곧 ‘다른 것’이 되면 ‘다른 것’으로서 주어가 되어 순환하는 논리를 만들어냅니다. 파르메니데스가 ‘하나인 것’에 존재를 모두 회수하는 것에 반해, ‘여럿인 것’을 만들어내는 순환 속에서 모두를 회수해갑니다.
모로: 그렇군요. 과연 『중론』 제2장이네요(웃음).
시미즈: 네. 『중론』 제2장에서 철저하게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럽은 그쪽으로 돌진합니다. 이것은 얼핏 보면 제3항과 같지만 약간 다릅니다. 예를 들어 ‘하이케이타스(hæccéĭtas)[개성(個性)]’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아비켄나(Avicenna) 5나 둔스 스코투스 6가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데요, 각기 다른 ‘마성(馬性)’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이항대립에 대해서는 중립무기적(中立無記的)’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대(大)’여도 ‘소(小)’여도 어느 쪽도 좋다는 논의입니다. 이 논리에서 감성계와 이데아 계, 지상 세계와 신을 분리하지 않고 연결하려는 이론이 중세에 성행합니다. 하나(一)에도 회수되지 않고 다양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러면 된 거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이 논리는 같은 곳을 빙빙 돌 뿐입니다. 그리고 다른 것, ‘~이지 않은 것’도 의무처럼 점점 늘려가야 합니다. 이러한 사고가 들뢰즈의 이른바 차이의 철학에까지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야마우치 시로(山内志朗, 1957~, 일본의 철학자)가 밝혔고, 나는 쉽게 납득했습니다. 이것은 이항대립을 이중성으로 순환시켜서 쥐 모양의 자동장난감이 빙글빙글 돌며 모래성을 허물듯이 허물어뜨리는 것이며, 니체의 영겁회귀(永劫回歸) 또한 이와 같습니다. 들뢰즈는 [이항대립을 이중성으로 순환시키는] 이 논리로 니체의 영겁회귀를 읽어냅니다. 이것은 불교적으로 말하면 정말로 나쁜 의미에서의 윤회, 삼사라(saṃsāra)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웃음).
모로: 무한후퇴, 논리적 과실로 끝나고 마는 것이지요.
시미즈: 그래서 악몽과 같은 것인데요, 그 ‘~이지 않는 것’이 ‘시뮬라크르(simulacre)로서의 세계’라든가 저 현대의 소비사회의 양상에까지 전부 치닫기 때문에 완전히 그쪽으로 가버린 것이 유럽이라는 것입니다.
카메야마: 그 전에 서양에서는 이항대립, 이원론에서의 대립 항이라는 관계성이 바뀌지 않거나 바뀔 수 없다는 것에 대해 그 전제를 의심하지 않았나 보네요.
시미즈: 이러한 불가역의 순환과 이원성을 전제함으로써, 복수의 이항대립 간의 관계를 뒤집거나 바꾸는 것이 점점 더 불가능해집니다. 마치 달리는 자전거의 앞바퀴와 뒷바퀴를 각기 다른 방향으로 회전시킬 수 없듯이 그렇게 관계가 고정된 채로 ‘발전’해가는 겁니다.
모로: 그 속에서 강렬한 것이 역시 주관과 객관이랄까 주체와 객체인데요, 주객이 아무래도 가장 강하지요. ‘하나/여럿’ 또는 ‘포섭되는 것(안)/포섭하는 것(밖)’ 가운데 주체가 강하게 있어서 그것이 온전한 듯한 느낌이랄까요? 이를테면 관념론처럼.
시미즈: 이중성의 순환 속에서 이항대립을 허물어뜨리고 해소하고자 한다면, 또 다른 이항대립을 그 순환에 합승시켜서 해소하고자 한다면, 그 프로세스는 언제까지나 닫히지 않고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같은 프로세스에 다른 이항대립을 회수한 환원론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어떻게든 그것을 막는 형태를 만들고 싶어 합니다. 아니면 그것들의 이항대립을 삼각형과 같은 구조로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여럿’의 문제를 그 구조 속에 재빨리 비틀어 넣어 ‘보로메오 고리’처럼 이항대립을 풀어내고자 합니다.
카메야마: 그렇군요. 이에 따라 주체와 대상(자연), 하나와 여럿의 관계가 고정된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고, 이 잘못에서 시미즈 선생의 『오늘날의 애니미즘』 논의가 시작되는군요.
- [역주] 아뢰야식(阿頼耶識, Alaya-Vijnana: 아라야-비즈나나)이란 말은 불교 용어로, 불교의 유심론(唯心論)에서 말하는 인간의 근본 의식을 말한다. 불교에서 인간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는 육감으로 이루어진 존재인데, 육감 중 6번째 의식(意識)은 세 가지로 나뉜다. 제6 의식과 제7 마나스식(Manas識),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이 중에서 아뢰야식은 무의식인 마나스식과 더불어 마나스식보다 더 심연의 무의식를 뜻한다. [본문으로]
- [역주] 불교 법회(法會)의 하나. 아귀도(餓鬼道)에 빠지거나 연고자가 없는 죽은 자의 영을 위한 공양. [본문으로]
- [역주] 백중맞이. 음력 7월 보름. [본문으로]
- [역주] 엠페도클레스(Ἐμπεδοκλῆς, 기원전 493~430년 추정)는 시칠리아섬 태생의 그리스 철학자다. 만물은 불, 물, 흙, 공기라는 네 가지 불변의 요소로 이루어졌으며, 이것들이 사랑과 증오라는 두 힘에 의해 분리되고 결합해서 만물이 생성, 소멸한다고 주장했다. [본문으로]
- [역주] 아비켄나는 이븐 시나의 라틴명이다. 이븐 시나(980~1037년)는 페르시아 제국의 철학자이자 의학자다. 아라비아 철학의 최고봉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플라톤을 가미한 철학으로 이슬람 신앙을 해석하였고, 이러한 그의 학문 활동은 유럽에서 아리스토텔레스 부흥 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본문으로]
- [역주] 둔스 스코투스 (Duns Scotus, 1266~1308)는 영국 스코틀랜드의 스콜라 철학자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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