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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12.30 자연은 누구의 것인가?_필리프 데스콜라

이 글은 콜라주드프랑스에서 2007년부터 운영하는 지식사이트인 https://www.college-de-france.fr에 2008년에 실린 데스콜라의 짧은 논문이다. 사이트에 이 글은 프랑스어본(https://th3.fr/imagesThemes/docs/A_qui_appartient_la_nature_Philippe_Descola.pdf)과 영어본(https://laviedesidees.fr/IMG/pdf/20080121_descola_en.pdf)의 두 판본이 있다. 두 판본 모두 데스콜라가 쓴 것인데, 글의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또 이 글은 『交錯する世界 自然と文化の脱構築ーフィリップ・デスコラとの対話』의 제3부에 「自然は誰のものか」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실려 있다. 이 일본어본은 프랑스어본을 번역한 것이다. 다음의 번역문은 영어본과 일본어본에 기초해서 의역을 가한 것이다. 주요 개념어는 영어본에서 가져왔다. “애니미즘 모델(animist model)”과 “애니미즘 체제(régime animiste)”와 같이 영어본과 프랑스어본의 다른 예가 있음을 알려둔다.

글의 내용은 현재 국제기관이 주도하는 자연보호 정책이 ‘자연주의’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여러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음을 지적하고, 문제 해결의 사상적・정책적 전환으로서 ‘관계보편주의’를 제안한다. 데스콜라의 주저인 『자연과 문화를 넘어서』가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까닭에 이 글만으로는 그의 주장이 충분한 설득력을 갖는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그의 사상의 일단을 엿볼 수는 있다. 이 글의 반론에 가까운 논평으로서 어거스틴 베르케(Augustin Berque)가 쓴 「自然と主体性[자연과 주체성]」이라는 글이 『交錯する世界 自然と文化の脱構築ーフィリップ・デスコラとの対話』에 실려 있는데, 이 글은 다음에 곧 번역해 올려두겠다.

 


 

Who Owns Nature?

자연은 누구의 것인가?

 

필리프 데스콜라(Philippe Descola)

 

유네스코, 국제자연보존연맹(IUCN), 유엔환경계획(UNEP) 등과 같은 국제기관의 주도하에 ‘자연보존’이라는 이름으로 보호받는 구역은 최근 30년간 급속하게 증가했다. 대상 구역은 바다와 육지를 막론하고 10만 곳을 넘어 전체면적이 1,900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른다. 이것은 미국 본토와 캐나다를 합친 면적과 같다. 방목을 금하는 자연보호구역의 증가는 최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새로운 현상이다. 1973년 이후 그 면적이 네 배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보호구역의 위치가 흩어져 있고, 또 그만큼 보호 실태도 천차만별이다. 그런데 이러한 특별한 지역의 존재 탓에 전 세계 지표 가운데 약 12%라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 현재 일종의 공공자산(public asset)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사태가 발생했다. 문제는 이 ‘자산(asset)’이 정확히 누구의 것이며 누구의 이익을 위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실제로 이 공공자산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으며 그것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근대 최초의 자연보호구역인 북아메리카의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경우는 그 후에 다른 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872년 당시 로키산맥의 북부지역은 전통적으로 쇼쇼니족(the Shoshones), 바녹크족(the Bannocks), 네즈퍼스족(Nez Percés)의 사냥터였지만, 이곳에 들어선 옐로스톤 국립공원은 설립 당시 원주민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종종 소개된다. 공식적인 전승에 따르면, 이 공원에는 유명한 간헐천(間歇泉)이 많이 있었고 원주민들은 그 간헐천에 대해 미신적인 두려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까이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와전된 것이며 이 간헐천들은 세시의례의 무대로 활용되었다. 더구나 북부의 쇼쇼니족의 한 분파인 약 400명의 투쿠디카족(the Tukudikas)은 국립공원 일대에 대를 이어 살고 있었다. 이 부족은 공원설립 10년 후에 ‘군사적 수단을 통해’ 윈드리버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 내용은 미국 국립공원국 안내 책자에는 절대로 실리지 않을뿐더러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Navokov & Loendorf 2004). 한편에서 도시의 엘리트들은 생물다양성의 보호구역으로 개명된 지고지순한 야생의 풍광을 지키려고 하고, 다른 한편에서 그 안에서 몇 세기 전부터 살아온 부족민이기도 한 현지 주민들은 토지 사용을 엄격히 제한받거나 어쩔 수 없이 방치되기까지 한다. 이 양자 사이의 오랜 갈등은 하루도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세렝게티 국립공원(Serengeti National Park)은 기린이나 코끼리와 같은 야생동물을 촬영하는 사파리 투어의 장소가 되었고, 그 안에 살던 마사이족의 가축 방목은 금지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북서지역의 자워인족(the Jawoyns)은 닛밀룩 국립공원(Nitmiluk National Park)에서의 주권회복을 위해 지난한 법정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 외에도 치아파스 남부에 사는 수백 명의 라칸돈족(the Lacandóns)에 대해 보스턴과 카를스루에(Karlsruhe)의 생태운동가들은 몬테스 아줄스 생태 보호구역(Montes Azules Biosphere Reserve)이 위기에 빠지지 않도록 옥수수 화전농지에서의 화전농업을 포기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세계 각지에서 인간의 관리가 미치지 않는 환경 가운데 각 부분의 사용권을 둘러싸고 각 공동체가 공유해야 한다고 저마다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이익분쟁은 실제로 다음의 두 질문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좀처럼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그것은 곧 자연이 누구의 것이며 누구를 위해 보존되어야 하는가이다. 여기서는 두 질문을 하나씩 검토하면서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방도를 모색해보겠다.

 

첫 번째 질문, ‘자연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두 유형의 대조적인 답변을 내놓을 수 있다. 우선 다음을 주장할 수 있다. ‘자연은 자연에만 속할 수 있고, 인간을 위한 유용성과는 무관한 내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은 그 자체에 따르며 그 자체를 위해 보존해야 한다.’ 그러나 이 내재적 가치를 정의하는 것은 간단치 않으며, 그 내용 또한 시대에 따라 상이하다. 미국 최초의 국립공원 추진자들은 신의 섭리가 미국 국민에 허락한 풍광 그리고 미국 국민의 운명에 각별한 표식을 각인하는 웅대한 풍광을 유산으로 남기기를 희망했다. 실제로 로키산맥, 캘리포니아의 시에라네바다 산맥, 남서부의 불모지인 메사[꼭대기는 평평하고 등성이는 벼랑으로 된 언덕] 등등 ‘야만성(wilderness)’이라는 의미에서의 이 ‘자연’이 국민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또 국경확대를 정당화하면서, 국립공원은 매우 명확한 기능을 수행했다. 그것은 국립공원 설립 초기부터 투어리즘(tourism)의 활발한 프로모션을 통해 아메리카 자연이 다른 어느 곳보다 특별하다는 것, 그렇기에 신에게서 그 관리를 위탁받은 사람들 또한 특별하다는 것을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전시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내셔널리즘의 이정표로서 옥외의 대성당이 변모한 것 같은 이 자연은 단 하나의 내재적 가치만을 가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저 자연공원의 창설자들─그들 대부분은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 미국의 시인)와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 미국의 시인이자 사상가)과 같은 초월주의 철학자들의 저작을 읽으면서 자란 이들이었다.─이 자연을 그 자체를 위해 보존하려 했다고 믿었을지라도 말이다.

세계의 다른 곳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로부터 얼마 후 영국과 프랑스가 각각 설립한 최초의 자연공원도 그랬다. 제국의 본토가 아닌 식민지에 들어선 이들 자연공원의 설립 이유는 미국에서 자연보호구역이 설치된 이유와 매우 비슷했다. 그것이 의도한 바는 식민지 열강에 의해 통치권을 박탈당한 자연환경, 특히 삼림이 원주민이 아닌 선량한 지배자의 손에 있다는 것을 국내외의 관광산업을 통해 증명해 보이는 것이었다. 유럽인은 일부 관습이 이러한 자연환경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그러한 관습을 선주민이 끊어내도록 교육하는 일을 스스로 도맡았다. 삼림지대의 화전식 원예농법이나 마을 주변의 성스러운 숲의 조성 등의 관습이 종종 고도의 생물다양성의 원천이 되었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농학자들과 삼림학자들은 이 고도의 생물다양성을 의식하면서도 그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다. 다양한 종과 생태계를 온대지역의 국유림 조성과 같은 관리법을 통해 합리적으로 보전하는 것은 식민주의 국가가 스스로 자임한 문명화라는 사명의 근거를 별도의 방식으로 표명하는 것과 같았다.

자연은 자체의 내재적 가치가 있다는 사상은 극히 최근의 것이다. 그것은 우선 멸종하지 않고 존속이 보장되는 종 서식지와 같은 특정한 자연환경을 보호한다는 형태로 나타난다. 발단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동물종이나 상징적인 투영능력을 가진 탓에 인간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동물종이었다. 이를테면 사천성 숲의 자이언트 판다(1963년 와룡(臥龍) 보호구역 지정), 벵갈 지방 델타 지대의 호랑이(1973년 순다르반스(Sundarbans) 보호구역 지정), 남아프리카의 코끼리(1979년 탄자니아의 웅고롱고로(Ngorongoro) 보존지구 지정)가 멸종한다면 이 세계는 상처를 받을 것이며 인류는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물론 이러한 사고방식은 유럽에서는 전혀 새롭지 않다. 그것은 중세 이후 자연신학에서 광범위하게 퍼진 관념이었다. 17세기 후반 영국의 법학자 매튜 해일 경(Sir Matthew Hale, 1609~1676)은 이 원리를 일목요연하게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천지창조의 부왕(副王)”인 인간은 “지구상의 표면을 그 아름다움, 유용함, 비옥함 속에서 보존하기 위해 권력, 권위, 권리, 제국, 책무, 배려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 여기서 지적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이러한 성경 속 창세기의 섭리주의적 독해에서 나온 원리가 세계적인 환경보호 정책으로 일반화될 때 그것이 다소 자신의 기독교적 기원을 흐트러뜨리는 경향이 있다 해도 결코 보편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헤일 경이 자연의 유용함뿐만 아니라 그 비옥함과 아름다움을 상기하면서 자연보호의 필요성을 정당화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자연의 내재적 가치와 도구적 가치를 혼동하지 않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인간만이 자연의 풍광을 보고 기뻐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름다움’은 유용성의 논의로 분류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인류’는 아마도 풍경 미학이 주로 발달한 유럽과 극동의 몇몇 문명에만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남은 것은 헤일 경이 ‘비옥함’이라고 부른 것이다. 실제로 비옥함은 자연의 내재성에 기반하여 자연보호를 주장하는 논의가 의거해온 최후의 보루이다. 오늘날 이 말 대신 ‘생물다양성(biodiversity)’이라는 용어가 더욱 선호되지만, 두 말이 의미하는 바는 같다. 즉 이 관념은 인간이 자신을 식별해낼 수 있는 종(種)이나 땅의 정령의 화신과 같은 종뿐만 아니라 자연의 모든 종이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유는 모든 종이 전체로서의 생명 형태의 거대한 번영에 공헌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제로 규범적 판단에 기초한 즉자적인 가치를 나타내며, 인류 전체가 한뜻으로 승인하는 규범적 판단인 만큼 그 자체를 일일이 정당화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 가치란 문화적으로 말하자면 다양성이 단일성보다 좋다는 사고방식이다. 필자는 이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이 견해는 모든 근본적인 윤리적 선택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선호에 속하는 주장이기도 하다. 이처럼 여러 선택지 중 하나를 선호한다는 것에 대해 논의하는 것 자체가 필자로서는 무의미하며 또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의적인 부분은 거의 숙고하지 않고 도리어 적반하장이다. 생물다양성을 최대한 유지하자는 사람들은 변명처럼 끝없이 이유를 늘어놓으며 자신의 견해를 정당화하고자 절치부심한다. 그러나 그 이유의 대부분은 결국 그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유익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가장 힘을 받는다는 사실은 다음을 말해준다. 아직 상세하게 알려지지 않았거나 거의 알려지지 않은 수십만의 종(種) 가운데 인간을 먹여 살리거나 치료하는 데에 유용한 분자(molecules)가 발견될 수도 있다. 따라서 그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호하는 것은 미래를 위한 정당한 투자이다. 나아가 좀 더 교묘한 주장은 다음의 사실을 강조한다. 극히 적은 개체 수의 극히 다수의 종을 아우르는 여러 생태계에서 이뤄지는 공생적 상리작용에 대해 우리가 너무나 무지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태계를 활성화하는 것이 기후인지, 물순환인지, 바라지 않는 생물의 번식인지를 우리는 전혀 모른다. 마지막으로 공리주의에 기대는 주장은 다음의 점을 강조한다. 특히 성별의 차이를 갖는 생물이 매우 다양한 생활조건에 적응하게 되면 유전적 다양성이 진화상의 이점을 갖게 되므로, 우리 행성을 특징짓는, 생명의 다양화 하는 잠재력의 영속과 증대를 보장하기 위해 다양한 종에 편성된 게놈 구조식을 되도록 많이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자연보호’라는 동기부여는 여기서 생명의 보호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얼핏 보기에 완전히 무욕적(無欲的)인 것 같다. 그렇지만 이 또한 자연계의 종들, 일종의 초월론적이고 목적론적인 원리, 거대한 인류공동체 등등의 것들을 동시에 대변하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따른 것일 뿐이다. 인류공동체가 올바른 지식을 갖지 못한다면, 이 논리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연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자연을 구성하는 각각의 종의 것’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를 제외한 저 종들의 무엇도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을 표명하지 않는 이상, 일부 구성원들[인간]의 의견이 필연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된다. 따라서 자연을 위한 모든 도덕은 그것이 반드시 인간이 옹호하는 가치를 표명한다는 점에서 규정상 인간에게서 유래한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제, ‘자연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공리주의적 답변을 살펴보자. 이 입장은 자연의 내재적 가치를 내세우는 견해 가운데 인간의 특권을 너무나 분명히 드러내는 것인 만큼 여기서는 그렇게 길게 논할 필요가 없다. 간단히 말해 자연은 미개발의 잠재적 자원을 가지므로 보호해야 하고 그 내적 균형의 위협은 인류를 파멸의 길로 이끈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하나 지적해두어야 하는 것은 생태중심적(ecocentric) 접근과 인간중심적(anthropocentric) 접근 모두 적어도 국제기관과 그 공인 미디어에서 표명되는 것들에서는 이 문제에 관한 다음의 ‘보편적인’ 관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보편성이란 곰의 출몰에 직면한 피레네의 축산농가와 포획할당량을 돌파한 노르웨이의 포경 사냥꾼들의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인 공리주의적 항의와 비교해서 인류와 자연의 이익 일반을 더 잘 대변해주는 관점이다. 그런데 공리주의적 논리는 어떤 종이나 어떤 지역의 보호에 저항하는 지역주민을 단죄하는 단계에 이르면 생태중심주의적 논리보다 더 잘 작동되기 쉽다. 즉 대다수의 환경보호주의 NGO가 하듯이, “아마존 숲의 파괴는 암 치료의 발견을 방해하거나 기호 온난화를 조장한다.”라고 말하는 쪽이 “파스타사(Pastaza) 강[에콰도르 동북부를 흐르는 강] 상류 유역을 이곳저곳 개간하게 되면 아마존 산간지대의 가장 풍부한 생태계 중 하나의 생물다양성을 감소시키고 말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기부금을 얻는 데에는 훨씬 더 유효하다. 요컨대, 더 높은 차원의 공공선과 관련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더 많은 인간과 비인간에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다른 자연관에 비해 더욱 고귀한 것으로 간주되는 도구적 개념의 자연관이 있다. 그렇다면 다수인 당사자들의 수가 자연의 사유화(私有化)를 정당화한다고 생각해야 할까? 어느 종, 어느 집단, 어느 생태계라는 자원을 유지하는 것이 더 많은 존재자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한다고 해서 그 최대다수에 최적으로 생물권 전체의 조건을 맞춘다면, 이러한 조건 유지에 손해를 입는 소수의 존재자는 그만큼 입지가 불리해질 것이다.

 

여기서 두 번째 질문, 즉 ‘누구를 위해 자연은 보존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당도한다. 물론 대답은 첫 번째 질문의 답변에서 주어지는데, 그것은 또 다른 이슈를 제기하기도 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가장 포괄적인 대답은 자연을 지구의 공유자산(common asset)으로써, 다시 말해 가장 높은 수준의 일반성에서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어느 한 종의 보존은 원칙적으로 그 종의 이익뿐만 아니라 생물다양성 전체에 이바지하는 한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또 어느 한 환경의 보존은 원칙적으로 그곳에 사는 다양한 종의 이익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태계 전체의 다양성 전체에 이바지하는 한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구적 차원에서 생물다양성의 보존은 원칙적으로 그것을 구성하는 다양한 종과 그것을 활용하는 인류의 이익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성이 지금까지 그 유일한 목격자로서 생명 그 자체의 번영에 이바지하는 한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존속의 위협을 선고받은 환경에 살아가는 원주민들은 지역의 이익보다 보편적 이익이 우선해야 한다는 논리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를 지금은 잘 이해하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은 그들 자신의 언어와 문자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추상개념인 ‘자연’의 담지자로서 스스로 등장한다. 이러한 자연환경은 그들의 관습적 실천을 통해 형성되어왔다는 것이 나날이 분명해지고, 국제사회는 그들에게 이 환경이 그들 자신에 맞는 방식임을 주시하는 임무를 위탁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권리요구의 작업은 영토침탈을 예방하기 위한 좋은 방법일뿐더러 그보다 더더욱 다음을 인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숲 태우기와 아마존과 동남아시아의 화전경작과 극지방의 이동 목축은 겉보기에는 인간에 의한 어떤 변경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양한 생태계 속에서 식물사회학적 구조와 동물군의 분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지역주민이 자신들의 일상식량을 얻고 있는 자연의 일정 구역에서 자치의 자유를 보존하는 방식으로서 보편적인 가치를 표방하는 것은 아니다. 알프스 지방에서는 늑대, 피레네 산에서는 곰, 보르도 지방에서는 산비둘기 각각에 관련한 사례를 살펴보면 프랑스에서 일반적인 것은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보편적인 것의 폭정을 피하는 방법으로서 지역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장 포괄적인 원칙을 되짚고 자연은 복수로 존재하며 그것을 보존하는 방법 또한 복수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까? 나누어 가진 복수의 세계들로 통하는 또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공공재라는 추상물을 떼 내어주기 위해? 저 모든 고유한 자연들을 만들어온 저 모든 민족을 잔학하게 다루지 않기 위해? 물론 계몽 철학이 인간 존엄의 지위 향상과 민족 해방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계몽주의가 설득을 통한 공존의 원리를 제안하는 다양한 방법의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다음도 인정해야 한다. 즉 자연 자산과 문화 자산의 보호라는 영역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가치를 정당화할 수 있는, 과학적으로 어떤 절대적인 기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지금 거의 대다수에게 받아들여지는 가치들을 규범적 행위로 승인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 사용언어를 포기하지 않고 존엄을 가지고 살아갈 권리, 공익의 이익에 관한 판단으로부터의 자유재량의 권리, 위생적인 환경에 살아갈 권리 등은 거의 모든 인류가 옹호할 수 있는 요구사항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가치들은 인간이라는 신분에 고유한 것들이 아니다. 이 가치들의 보편성이란 논쟁과 타협, 즉 공동의 결정에서 도출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이슈에 관한 의견을 표명할 권리는 어떤 관점에서건 주어지겠지만 그 무수한 관점이 다른 관점에 대해 공평하게 대표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공동의 결정이 집합적으로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다음의 사실을 고려하면 문제는 더한층 복잡해진다. 즉 저 가치들은 국제적인 자연보호 정책 안에 최근 수 세기 내에 유럽에서 출현해서 정착한 매우 독특한 우주론(cosmology)이 스며있다고 단정한다. 필자가 ‘자연주의(naturalism)’라고 부르는 이 우주론은 지구상의 모든 민족과 아직 공유되지 않았을뿐더러 많은 민족과 동떨어져 있다. 왜냐하면 ‘자연주의’란 세계를 조직하는 다양한 방법의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세계를 조직한다는 것은 모든 존재자(existing beings)에 성질을 부여하여 동일화(identification)를 행한다는 것인데, 그 조직은 무릇 인간이 경험하는 데에서 발견되는 것과의 비교 가능한 유사나 이질의 신체성(physicality)과 내면성(interiority)을 다른 불특정 대상에 부여할 수 있도록 다양한 가능성에서 출발한다. 그 결과 동일화는 네 개의 존재론적 공식으로 분류될 수 있다. 우선 존재하는 개체들(existing entities) 대부분이 유사한 내면성을 가지면서 그 신체성은 확실히 구별된다는 ‘애니미즘(animism)’이 있다. 아마존, 북아메리카, 시베리아 북부, 동남아시아 및 멜라네시아 일부 지역의 민족에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인간만이 내면성이라는 특권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물질적 성질(materiality)에 의해 비인간을 구성하는 연속체(continuum)에 속하게 된다는 ‘자연주의’가 있다. 고전주의 시대 이후의 유럽에서 나타난다. 그다음으로 어느 한 이름이 부여된 집단의 내부에는 인간과 비인간이 어느 한 원형에 기초한 동일한 물리적, 정신적 성질을 공유하며 같은 유형의 다른 집단과는 완전히 구별된다는 ‘토테미즘’이 있다. 토테미즘은 무엇보다도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에게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세계의 모든 요소는 존재론적으로 상호 구별되며 그러므로 그 요소들 사이에 안정된 대응 관계를 찾아낼 필요가 있다는 ‘유추주의(analogism)’가 있다. 유추주의는 중국, 르네상스 시기의 유럽, 서아프리카, 안데스 지방 및 중앙아메리카에서 나타난다.

 

바로 근대적 보편주의는 자연주의 존재론에서 직접적으로 유출되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다음의 원칙에 근거한다. 인간이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무수하고 잡다한 개별성(particularisms)의 이면에는 안심할 만큼 규칙적인 다양한 현실로부터 성립되는 진리의 장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진리의 장은 신뢰할 수 있는 이미 시도된 방법을 통해 알 수 있으며 내적 법칙으로 환원할 수 있고 그 법칙의 정확성은 발견과정에 의해서도 훼손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요컨대 문화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가 용인할 수 있으며 나아가 연구하려고 하는 그것은 자연보편주의(natural universalism)라는 거대한 배경을 뒤로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보편주의야말로 진리 추구자에게 피난처와 위로를 줄 수 있다. 습속, 관습, 기풍은 다양할 수 있지만, 탄소의 화학적 특성, 중력, DNA의 메커니즘은 모두에게 동일하다. 자연보호정책을 시행하는 국제기관의 보편주의는 본래 물질세계들에만 적용된 이러한 일반원리를 인간적 가치들의 영역으로 확장한 것이다. 이 보편주의는 오로지 근대인만이 자연에 대한 참된 지성에 이르는 특권적인 길을 이용할 수 있고 그에 반해 여타 문화들은 그 자연의 표상에만 도달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이 표상은 자애로운 자들에게는 허술하지만 관심을 가질만한 것이고, 실증주의자들에게는 그 불순한 영향력 탓에 오류투성이의 해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브뤼노 라투르가 ‘특수보편주의(particular universalism)’(Latour 1991)라고 부르는 이 인식론적 모델은 실증과학의 발전에서 비롯한 자연보호의 원칙이 불가피하게 모든 비근대인에게 부과될 수밖에 없음을 함의한다. 그런데 비근대인들은 경험적으로 우리와 같은 사고방식을 해야 할 필요가 없었고 더군다나 자연이 인류에게서 독립적인 영역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원칙의 필요성을 명확히 파악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아마존의 인디언들은 이런 말을 듣는다. ‘당신들은 한때 자연과의 공생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 당신들은 전기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고도의 생물다양성이라는 이유로 세계유산이 된 당신들의 숲이 더는 망가지지 않도록 당신들을 가르쳐야 한다.’

저 보편주의를 덜 제국주의적으로 만들기 위해 게다가 그 과정에서 세계의 빛나는 웅대함을 보존할 수 있는 생물다양성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가능한 방법으로서 필자가 이리저리 찾아낸 길은 ‘관계보편주의(relative universalism)’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관계(relative)는 ‘관계대명사(relative pronounce)’라고 할 때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고, 간단히 말해 ‘연결(connection)’을 뜻한다. 관계보편주의는 자연과 문화, 물질과 정신, 일차성질과 이차성질[일차성질은 물질 자체가 갖는 개체성이나 운동, 형상, 수 등의 실재적 성질을 말한다. 로크는 이 일차성질을 감각에 의존하는 색, 음 온도 등의 이차성질과 구별했다.]의 구분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성과 비연속성의 관계, 동일성과 차이의 관계, 닮음과 다름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인류는 언제 어디서나 계통발생(phylogenesis)에서 이어받은 수단을 통해 존재자들 사이에서 이러한 관계를 수립한다. 구체적으로는 어느 한 신체, 어느 한 의도, 특징적인 차이를 식별하는 어느 한 태도, 어느 한 타자와의 사이에서 애착이나 원한 관계, 지배와 종속 관계, 교환이나 전유 관계를 수립하는 능력 등이다. 관계보편주의는 만인을 위한 평등한 물질성과 개연적인 의미화를 선험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만사를 이해할 수 있고 또 그 현상의 비연속성을 승인하거나 연속성 속에서 그것의 효력을 무효화하는 데에 가장 쓰이기 적합한 유한한 공식만을 인정하는 메커니즘과 같은 사상(事象) 속에서 불연속성의 난입을 인식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관계보편주의가 어느 한 윤리, 다시 말해 각각의 모든 것이 자신이 성장한 세상의 가치를 거부감없이 따를 수 있는 세계의 관습적 규칙으로 이어지고 있다면, 이 윤리는 여전히 벽돌 위에 벽돌을, 연결 위에 연결을 쌓아가고 있다. 이 일은 우리가 못할 과제가 아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인간들 사이,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관계목록을 작성하는 것이고, 누구라도 비난의 대상으로 내몰리지 않도록 합의하는 것이다. 이 후자의 범주에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불평등한 관계가 포함될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아무 이유 없이 생명을 빼앗는 것이나 감각 능력을 갖춘 존재를 사물화하는 것이나 생활습관과 행동 양식을 획일화하는 것 등이다. 그리고 계속 유지해야 하는 연결을 선정하는 데에서 공감과 합의가 필요하므로, 어떤 관계라도 다른 관계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이에 따라 고유한 관습과 지식과 지혜와 땅에 부착된 가치들이 기댈 수 있는 연결은 우발적 정당성이나 협의의 이해타산에 안주하지 않고 활용될 수 있는 고유한 맥락에 뿌리내린 관계이다. 예를 들어 자연보호를 주장하는 데에서 인간은 비인간과 간주관적인(intersubjective) 관계를 맺는 것이 바람직하고 또 바라는 바라고 본다. 그러나 특수한 환경의 보존을 정당화하려면 그 환경에 고유한 생태계의 특질이 아니라 그곳의 동물들이 현지 주민에 의해 인격적으로 다뤄진다는 사실야말로 더욱 이야기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 동물들이 통상적으로 사냥의 대상일 수 있지만, 의례의 조심성을 가지고 동물들을 대할 수 있다. 이것은 아마존 유역, 캐나다, 시베리아, 말레이시아의 삼림 등의 ‘애니미즘 모델(animist model)’ 속에서 광범위하게 작동하는 보호구역 범주를 제안할 수도 있다. 또 가령 생물다양성의 극대화 혹은 탄소포집[화석연료 사용 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를 모으는 기술]과 같은 자연주의 유형의 연결들에 기반한 정당화의 요건이 덧붙여지는 것도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두 번째 유형의 연결들, 다시 말해 동떨어진 행위자들에 의해 도입된 연결들이 지역의 행위자들이 만들어낸 연결들의 실행조건을 과도하게 악화시키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몽생미셀 섬, 루손 섬 북부의 계단식 논의 세계유산화를 정당화하는 연결들은 완전히 별개의 것임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미 그곳에는 주체로서 보이는 비인간은 존재하지 않고 대우주(macrocosm)와 소우주(microcosm)를 연결하는 기획의 객관화가 구현되어 있다. 그러한 객관화의 흔적은 유추주의 문명이 번성한 곳에서만 남아 있다. 누구는 이것이 유토피아의 영역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고려하지 않은 해결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가상적 미래의 다중성이라는 더 좋은 의미로 유토피아를 이해한다면 당연히 그렇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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