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글은 프레데릭 켁(Frédéric Keck)의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출간한 Un monde grippé(2010)의 일본어판인 유감세계(流感世界)(2017)의 서론과 1장의 일부, 결론의 일부를 번역(중역)한 것이다. 켁은 1974년 프랑스 태생의 인류학자이고 20세기 프랑스 지성사(콩트, 레비-브뢸, 베르그송, 뒤르켐, 레비스트로스 등등)에 관한 중요한 저작을 다수 저술했다. 그 책들은 대부분 프랑스어로 쓰였고 또 영어로 번역되지 않아서 그의 학자적 명성은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레비스트로스 4세대를 대표하는, 21세기 존재론의 인류학을 이끄는 주요 학자로 꼽힌다.

이 책은 홍콩에서 발원한 조류 인플루엔자를 현장 연구해서 팬데믹을 신화론으로 다룬 것이다. 원제에서 “grippé”의 뜻은 독감이고, “유감(流感)”은 독감의 중국어 표현이다. 원제를 우리말로 직역하면 독감세상이다. 이 책은 동물 질병(인수 감염병)에 대한 참신한 접근과 이해가 돋보이지만, 무엇보다 그의 독특한 공부 이력 때문인지(프랑스고등사범학교를 나와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캠퍼스에서 문화인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편으로는 현상을 건조할 정도로 꼼꼼하게 기술하여 결론을 끌어내는 미국 인류학의 귀납적인 글쓰기 스타일이, 또 한편으로는 이론적 가설을 앞세워 논리적 추론을 해나가는 프랑스 사회철학의 연역적인 글쓰기 스타일이 엿보인다.

보다시피 20세기 이래 인류는 바이러스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다. 1917년 일명 스페인 독감이 약 5000만 명 추산의 사망자를 낸 이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변형을 거듭하면서 주기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심지어 최근에는 그 주기마저 짧아지고 있다. 특히 중국을 위시한 아시아에서 주로 발생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인구수와 그에 연동된 가축 수가 엄청나게 증가하여 밀집도가 높고(중국에서만 19671300만 마리였던 닭의 개체 수가 30년 만에 그의 1000배인 130억 마리로 늘어났고 돼지의 개체 수가 500만 마리에서 1억 마리로 늘어났다), 인간과 상품의 이동이 국경의 제한을 받지 않고 빈번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대로라면 아시아에서 언제든 또 다른 바이러스 질병이 대규모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켁의 관심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출현이 어떻게 생물학적 실재와 사회정치적 실재를 연결하며 그 결과 어떻게 정치적 파국으로 의미화되는가이다. 다음의 글에서도 나왔듯이, 가령 중세의 페스트는 신의 벌로 의미화되었고 19세기 콜레라는 위생적이지 못한 음료를 섭취할 수밖에 없는 빈곤층을 둘러싼 사회적 불평등으로 의미화되었다. 20세기 인플루엔자는 (유전학의 발전으로 알게 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그것(바이러스)이 생물에 대한 인간의 사회적, 역사적 관계를 반성하기를 촉구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파국을 맞지 않기 위해 생태적 파국을 막으려는 방역(bio-security)’이라는 감시장치는 인간을 포함한 생물들 간의 역사적 총체에 대한 성찰을 회피하고 더더욱 파국으로 치닫게 만든다.

켁은 이 파국을 전체화의 국면, 측 신화로 독해한다. 즉 신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의 실재를 표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실을 총체적으로 떠받치는 세계관을 구축하고 그 표현을 글로벌화한다. 예를 들어 팬데믹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을 현실화하고 인간이 세계를 지각하는 다양한 방식들의 공통분모를 추출해서 그것으로 모든 행위자를 집결시킨다. 요컨대 지구 규모로 전개되는 파국적 위협의 잠재적이고 가상적인 차원을 총체적으로 가시화하는 것이 팬데믹의 신화론이다. 그러나 켁은 인간과 비인간의 사회적, 역사적 관계에 기반한 팬데믹의 신화적 의미화는 끊임없이 변환되는 구조이며, 이 신화가 인간사회를 하나의 전체성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바로 그때 또 다른 신화로 변환한다고 말한다.

2010년에 출간된 책이니 이 책을 통해 조류 인플루엔자 이후 출현한 코로나바이러스의 더욱 강력하고 더욱 총체적인 팬데믹을 설명하기에는 미흡하다. 그러나 현세기의 팬데믹을 둘러싼 방역이라는 감시장치가 전쟁의 효과처럼 전체주의를 부추기는 한편으로 팬데믹의 신화가 전체화에 이른 순간 또 다른 전체화로 향해갈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되씹어보기에 충분하다.

 


 

서론. 동물 질병의 인류학

 

나는 2007년부터 2009년까지 홍콩에서 조류 인플루엔자에 관한 민족지적 현장연구를 했다. 내가 이해하려 한 것은 동물에서 사람으로 바이러스가 전이됐을 때 왜 세계는 인플루엔자 팬데믹에 빠지는가였다. 실제로 홍콩은 인플루엔자가 발생하여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는 전초기지와 같은 양상을 보여주었다. 또 홍콩에서는 1968년에 팬데믹 인플루엔자(H3N2)가 출현하여 전 세계적으로 100만 명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또 이곳에서 1997년에 A형 독감 바이러스(H3N2)가 검출되어 감염된 인간 중 3분의 2가 죽었다. 이 바이러스는 새에게서 인간으로 전이되는 것이었다. ‘세계의 아틀리에라 불리는 광저우 인근에 있어서 금융과 교통의 네트워크가 교차하는 연결망(‘허브’)으로 자리 잡은 홍콩은 다양한 상품이 세계 각지로 운반되기 위한 관문임과 동시에 그러한 상품과 함께 전파될지도 모를 병원체가 통과하는 관문이다. 공식적으로 홍콩은 아시아의 글로벌 도시라고 칭해진다. 경제적, 금융적 조건을 창출하고 상품판매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탓이다. 홍콩은 새로운 질병이 병원보유동물 속에 출현하여 지방의 생태학적 데이터에 따라 글로벌 사회로 퍼지는 양상을 살펴보는 데에는 최적의 장소이다.

그런데 20094월에 멕시코시티에 인플루엔자가 출현했다. 이 발생지 또한 북부와 남부 사이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이었다. 이 바이러스는 몇 주 전에 양돈장이 있는 베라크루스주(Veracruz)의 한 마을에 출현해서 전 세계로 번져갔다. 세계보건기구(WHO)의 담당자들은 611일 이 돼지 기원의 신형 바이러스를 팬데믹이라고 선언하였다. 이처럼 매우 위험하지만 전염력이 낮은 조류 인플루엔자바이러스인 H3N2에 전 세계의 위생 당국이 긴장하는 가운데 전염력이 매우 높지만 위험성은 낮은 돼지 인플루엔자바이러스인 H1N1이 등장한 것이다. 신형 바이러스의 움직임은 여전히 예측 불가능했다. 다만 새에게서 출현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돼지를 매개로 하여 인간에게 전이될 것이라는 거의 30년 전에 나온 과학적 시나리오가 확인됐을 뿐이다.

이 신형 바이러스가 출현했을 때 나는 연속 강의를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머물고 있었다. “분명 당신을 위해 일어난 일입니다.”라고 나를 초대한 사람 중 한 사람이 말했다. 나 자신의 조사를 계속하기 위해 바이러스를 가지고 왔다고 웃으면서 억지를 부리는 자도 있었다. 연구를 깊이 있게 진행할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아르헨티나에 체류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남아메리카에서 공포의 복합체가 형성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고 북아메리카와 아시아에서 이러한 복합체의 발생을 예측할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이 책을 쓰게 된 것이다. 당초에 나는 홍콩에서 인플루엔자 대책의 글로벌화를 이해하고자 했지만, 바이러스의 전이가 발생한 곳에 내가 우연히 있은 탓에 나는 이 전이를 추적할 수 있었다. 즉 나는 인플루엔자와 그것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준비된 장치를 둘러싼 세계 투어를 자원한 셈이다. 백과전서적인 연구 자세로 세계 전체를 아우른다는 것은 자만일 수 있고, 그러한 목표는 지금 돌이켜보면 접근 불가능한 것이지만, 역사의 우연이 여러 번 겹치면 멀리 떨어진 장소들을 직접 연결해서 단편적인 현상을 수미일관된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다.

나의 시선은 인류학자의 그것이다. 나는 인플루엔자의 궤적을 결정하는 메커니즘을 인식하려 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나타났을 때 각각의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반응하는지를 이해하려 한 것이다. 이 목적에는 현재 바이러스학이 발견한 핵심적인 사실이 결정적이다. 즉 병원체는 예측 불가능한 거동을 보이면서 종()의 장벽을 뛰어넘는 능력이 있다. 바이러스의 전이는 연속적인 생물학적 현상이라고 해도 바이러스에 횡단되는 유기체가 일으키는 반응은 비연속적이다. 똑같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자신의 유전자 코드를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전이시키면서 새나 돼지나 사람 사이를 통과해가는데, 각각의 종에 나타나는 병의 증상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전이 체제에서 이와 같은 변화를 기술하기 위해 통일된 용어를 사용한다. 그들은 DNA 바이러스와 RNA 바이러스(예를 들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구별한다. DNA에는 수복기구가 갖춰져 있지만 RNA는 복제 에러를 수정하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전이의 빈도는 후자가 전자보다 높다. 그리고 분절 RNA 바이러스와 그 외 비분절 RNA 바이러스가 구별된다. 전자는 한 번만 자기 복제하지만, 후자는 수많은 조각으로 분리되어 이 조각들이 복제 때마다 교환된다. 바이러스가 중간적 매체속에서 복수의 동물 종으로부터 요소를 빌려서 자기 복제하는 경우를 유전자 재집합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바이러스가 한 종으로부터 다른 종으로 직접 이동하는 경우에 보이는 유전자 단절(이는 시프트가 아니라 드리프트)과 구별된다. A형 인플루엔자는 동물로부터 사람으로 이동할 때가 있는데 이것과 구별되는 B형 인플루엔자는 보통은 사람들 사이를 순환한다. 마지막으로 A형 인플루엔자 가운데에서도 면역력이 없는 사람의 생체에 출현한 후에 전염할 가능성을 가진 팬데믹 바이러스(예를 들어 1918년에 2천만에서 5천만 명의 사망자를 낸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와 이러한 신형 바이러스가 사람 개체군에 적응한 결과 면역력이 약한 사람에게만 영향을 주는 계절성 인플루엔자(이것은 연간 20만에서 50만 명의 사망자를 내고 있다)가 구별된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은 당연하게도 전이한 바이러스가 위험한 것이 되고 또 게다가 파국적인 것이 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1918A형 바이러스(H1N1)염기배열결정도 특정한 유전자에 의한 그 예외적인 전염력을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이 바이러스의 원인은 그것이 나타난 환경에 귀속되어야 했다. 따라서 종의 장벽이라는 발상은 부분적으로는 확실치 않다. 그것은 동정(同定) 가능한 생물학적 메커니즘이라기보다 사회적 차원을 가진, 생물 사이의 여러 관계의 총체를 나타낸다.

인류학자들이 연구하는 것은 한 사회로부터 다른 사회로 순환하는 요소(기술, 이야기, 영상 등등)가 그것이 횡단하는 다양한 사회 속에서 어떻게 다른 해석을 불러일으키는가이다. 이렇듯 그들은 왜 어떤 환경에서는 병원체가 위험한 것으로서 지각되고 다른 환경에서는 그렇지 않은가에 관한 과학적인 검토를 수행할 수 있다. 인류학이 해명한 것에 의하면, 병의 의미는 그것이 사회적 질서와 신체적 질서를 전복시키는 방식에 의해 주어진다. 그렇다면 동물 질병은 인간이 자신의 환경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으로 작동되는 방법을 구축하듯이 인간과 동물의 여러 관계에서의 변환(transformation)을 표현한다. 이때 인류학은 다양한 생태학적 변화를 통합하도록 공중위생에 관한 문제들을 재구성하는 것에 공헌할 수 있다.

1970년대 말 세계보건기구는 인류가 경험한 가장 무서운 질병 중 하나인 천연두 대책 캠페인의 대성공에 고무되어 전염병의 근절을 선언했다. 이 병(천연두)은 동물에서 사람으로 전이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사람 개체군 전체에 백신 접종을 시행함으로써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앙아프리카 원숭이에서 신형 바이러스가 출현함에 따라(특히 에볼라는 매우 빨리 감염자를 죽이고 효과적으로 전파되고, 에이즈는 인간의 면역계에 비교적 오랜 기간 잠입하여 지구 전체로 확산하였다), 이러한 낙관적인 시나리오는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생물학적 연구는 새로운 병원체의 출현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이러한 병원체를 병원보유동물 안에 오래 묶어 두는 것을 목표로 삼아왔다. 여기서 병원체는 거의 발병하지 않은 상태로 순환하지만, 사람에게 도달하고 나면 높은 병원성을 보인다.

이러한 모든 신흥 감염증 중에 (신형 바이러스가 발견될 때마다 그 수는 계속해서 증가하는데) 인플루엔자는 중심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계절성 인플루엔자라는 형태로 인류에게 가장 흔히 발병하는 질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닭과 돼지라는, 인간이 가장 빈번하게 접촉하는 동물로부터 출현하기 때문이다. 인플루엔자는 주목할만한 동물 질병이 되었다. 즉 그것은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예상을 벗어나는, 우리 일상에 뿌리내리고 있으면서 그와 동시에 이 시대 최대의 파국을 일으키고 있다. 이렇듯 20세기에 인플루엔자가 보여준 중대함은 지금 이 세기에 생물 간의 여러 관계에서 어떤 변형이 일어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중세의 페스트는 신의 벌로서 해석되었지만, 19세기의 콜레라는 음료수에 대한 접근에서의 사회적 불평등을 통해 설명되었고, 바이러스의 전이는 지구상의 인구 증가와 상관적인, 가축의 수의 증대와 결부된다. 20세기가 인플루엔자 팬데믹으로 특징지어진다면(1918년의 A형 독감(스페인 독감)(H1N1), 1957년의 아시아 독감(H2N2), 1968년의 홍콩 독감(H3N3), 2007년의 인플루엔자(H1N1)) 그것은 20세기가 유전학의 시대임과 동시에 동물과 인간 각각의 개체군 간 이동의 시대라는 것을 말해준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유전자의 (헤마글루티닌을 나타내는 H 단백질과 뉴라미니다아제를 나타내는 N 단백질에 의한) 염기배열결정에 의해 글로벌한 수준에서 사람과 동물 각각의 개체군 속 분자적 수준에서 변이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팬데믹의 연속은 단지 과학적 탐색력의 개선의 효과뿐만 아니라 병원보유동물 수의 증가의 결과인 것이며, 따라서 동물 수가 증가함에 따라 바이러스가 전이되는 경우 또한 함께 증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967년부터 지금까지 중국에서 닭의 개체 수는 1300만 마리에서 130억 마리로 증가하였고 돼지 수는 500만 마리에서 일억 마리까지 증가하였다. ‘축산혁명’, 30년 만에 인간의 식량용으로 사육된 동물 수의 급격한 증가는 바이러스의 전이라는 사건의 증식을 일으켰다.

만약 인플루엔자를 글러벌화의 질병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이러스가 많든 적든 치밀한 교통 네트워크를 통해 급속하게 이동될 뿐만 아니라 인간세계에의 반응을 통해 전이를 가능하게 했던 여러 교통 관계를 돌연 정지시킬 가능성이 있음을 내비친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독특한 방식으로 글로벌화의 양의성을 해명한다. 즉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자기를 복제하기 위해 다른 유기체 간의 교류가 필요한데, 유기체 간의 차이가 잘 조정되지 않을 때 바이러스에 의해 유기체는 파괴될 수도 있다. 이 질병에 주어진 이름은 이러한 양의성을 나타내며, 그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불어로 독감을 뜻하는 ‘grippé’는 개인 간 상호이해의 양태를 의미한다. 그 와중에 개인은 자신의 이해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의심한다. ‘gripper’는 아마도 본래 뜻과 바뀐 뜻을 함께 파악한다를 뜻하는 ‘greifen’에서 유래할 것이다(‘누군가를 파악한다혹은 관념을 파악한다’). 영어에서 인플루엔자를 가리키는 말은 ‘flu’이다. 이 말은 이탈리아어의 ‘influenza’에서 유래하는데, 이 이탈리아어는 16세기에 질병과 우주적 영향을 결합한 점성술적 추론의 프레임 내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말은 점차 유출[flux]’의 병, 즉 통제가 풀린 상태에서 교역이 열려 동료들 간의 한정된 영역을 뚫어버리는 병과 결부된다. 중국인은 유감(流感)’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유통에 의한 감염을 가리킨다. ‘감염(contagion)’은 여기서 전염(infection)’과 구별된다. 중국에서 인플루엔자가 염려되는 때는 신년제(新年祭)와 같이 인간과 상품의 이동(‘인류(人流)와 물류(物流)’)이 특히 활발해지는 시기이다. 따라서 인플루엔자로 인한 충격적인 사태는 개인의 연이은 죽음이라는 스펙터클이라기보다는 교역을 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다. 혹은 오히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개인의 연이은 죽음의 의미는 인간적 활동이 스스로 과잉된 격화 때문에 종언을 맞이하게 된다는 지평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인플루엔자는 동물과 인간의 순환 속에 어떤 파국의 가능성을 도입한다. 그것은 생물학자들이 파국이라는 말에 부여하는 의미와 다르다. 파국이 연속적 과정에 불연속성을 도입하는 것이라면 그것에 의해 전복되는 것은 유전자적인 전이의 총체가 아니라 오히려 생물 동료의 역사적인 관계들의 총체이다. 신흥 감염증이 한 인류학자에게 제기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생물학적 수준에서 파국적인 전이 가운데 어떻게 해서 몇몇 전이가 정치적 파국으로 번지는가? 중요한 것은 단지 어떤 사회적 벡터가 바이러스의 출현을 설명하는지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이 출현이 총체화된 행위자들에 의한 정치적 파국이라는 지평 속에서 어떻게 해석되는지를 그려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복잡하게 얽힌 한 세트의 척도와 엮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물학적 변이와 예측할 수 없는 정치적 파국 사이에서 적확한 묘사가 가능한 사회적 수준을 어떻게 선택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소하는 하나의 방법은 파국적인 바이러스 전이 시기에 당장 눈에 띄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사람 개체군의 외부에 있는 병원체를 억압하기 위해 동물의 위생적 살처분을 시행하는 양태이다. 1996년의 BSE 위기 때 광우병에 걸린 소들, 1997년의 H3N2 출현 때 홍콩 인플루엔자에 걸린 닭들, 2003년의 광저우의 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위기 때의 사향고양이들은 무지막지하게 살처분되었다. 2009년의 인플루엔자 때는 사육장의 동물이 단순한 상품일 뿐만 아니라 살해되어야 하는 생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는 신석기 시대에 동물이 가축화된 조건을 되짚어보게 만든다. 동물을 돌봐주는 대신 인간은 소비물자(고기, , 가죽 등등)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을 자신의 거주공간에 들이는 대신 병원체를 받아들여야 했다. 인간은 동물과 함께 독이든 선물을 받았다. 인간과 미생물의 공진화에 의해 이러한 교환에 일시적인 균형이 생겼다 해도, 새로운 동물 질병은 인간이 가축 계약을 스스로 파기한 상황인간이 동물을 돌보지 않고 동물에게서 소비물자만 얻어가는 상황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기에 마치 동물들이 상품으로 변형된 것에 대한 복수를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조건에서 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동물 질병에 대한 공포는 새로운 의학적인 합리성에 의한 그 논리적 기능을 통해 설명된다. 동물은 이 합리성 속에서 교환에 적합한 상품임과 동시에 인간에게서 받은 처우의 복수를 행할 용의가 있는 생물이기도 하다는 양의적인 존재로서 나타난다. 이 긴장 관계는 사육 동물과 애완동물의 구별로 인해 더욱 고조된다. 이 긴장 관계는 이 구별(이 구별은 종종 도시와 농촌을 재구획한다) 하에서 인간이 동물을 보호해야 하는 것과 동물에게서 인간을 보호해야 하는 것 사이의 모순을 일으킨다. 병원체는 겉으로 보기에 양립 불가능한 동물의 두 측면을 명확히 드러낸다. 병원체는 동물로부터 인간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양자 사이의 생물학적인 연속성을 보여주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이 동물을 기르는 사육조건의 결과로서 병원체가 발생한 것이기에 양자는 분할된 정치적 조작이라는 것을 드러내기도 한다. 고대의 희생제의에서는 이 모순을 공동식사를 통해 해소하고자 했다면, 위생상의 살처분은 병원체가 침범한 종()의 장벽을 재설정하고 시장에서 소비에 적합하지 않은 고기를 회수함으로써 이 모순을 풀어내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살처분은 미디어의 시선 하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동물의 현행 사육조건을 가시화하게 되고 공포를 더욱 조장하게 된다.

이 책은 위생상의 살처분을 직접 다루지 않는다. 내가 시도하는 것은 바이러스와 가깝게 있는 과학자들의 추론을 따져 묻는 것이다. 실제로 위생 생물학자들이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감시와 백신 접종이라는 방법을 통해 살처분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병원보유동물로부터 신형 바이러스가 출현하면, 유전학적, 생리학적 특징에서 추적 가능한 형태를 추출하여 이름을 지어주는 것에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살처분에서와 마찬가지로, 전문가들은 동물의 두 측면에 담긴 모순을 해소하겠다고 주장하기는커녕 이 모순을 동물병원에 관한 모든 행위자 사이에 밀어 넣어서 증폭시키려 한다. 즉 전문가들은 매개자의 역할을 연행하는 것이기에 그들은 동물을 둘러싸고 대적하는 두 인식을 하나로 합치는 표상을 만들어내어, 자신들의 맥락 속에서 이 긴장 관계에 대처해야 하는 행위자들에 가까이 이동해간다. 그때 이 모순은 위기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그 속에서 위험의 개연성은 생산과 소비를 연결하는 연쇄 속에서 동물과 어떤 관계를 맺을지에 따라 평가될 것이며, 상품의 추적 가능성에 따라 이 연쇄의 통제에서 행위자 각각의 책임을 할당할 수 있다. 따라서 조사 기간 중 나는 행위자들이 이러한 긴장 관계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면서 그들의 대부분(축산업자, 동물보호단체, 식육판매업자, 수의사, 의사, 보건당국, 종교적 권위, 기자들)과 만나고자 노력했다. 행위자들 각각이 동물기원의 재화 생산과 소비를 연결하는 연쇄 속의 위치에 따라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탐구했다.

그림. 20세기 동물 질병을 둘러싼 인간과 가축의 관계

그리하여 이 책은 전문가라 불리는 사람들에게 중심적인 역할을 부여한다. 전문가들은 두 축에서 매개자의 기능을 담당한다는 것이 나의 가설이다. 즉 생물학적 변이와 위생상의 살처분과 닥쳐올 파국을 관통해서 생물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연결하는 수직축과 생산과 소비를 관통해서 동물과 인간을 연결하는 수평축이다(<그림> 참조). 바이러스를 추적하는 전문가들을 뒤쫓는 것은 인류학자로서는 전염이라는 직선적인 도식을 버리고, 그들이 이동해가는 여러 사회적 연망을 총체로서 보는 것이다. 바이러스는 자신이 출현하는 맥락에 따라 관계들의 구조에 갇히게 되는데, 이 구조는 생물적인 것-정치적인 것과 생산-소비의 두 축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각각의 맥락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병원체는 어떻게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가? 그리고 병원체는 자기로 인해 드러나는 음식물의 연쇄 속에 얼마만큼의 행위자를 집합시킬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을 통해 테러리스트의 습격, 파업, 제노사이드 등등 다양한 파국과 관련한 공공의 공간 속에서 바이러스가 어떻게 표상되는지를 알고자 했다. 이토록 중요하고 논쟁적인 현상들이 동물 질병이라는 겉보기에 기술적인 관점에서 다뤄지고 또 바이러스라는 미시적인 존재를 통해 파악된다는 것은 의외라고 생각할 독자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이 시도하는 것은 바로 동물 질병을 엄밀하게 생물학적인 처우의 밖으로 밀어내어 사회과학의 영역으로 들여온 다음 새로운 현상으로서 조명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바이러스의 출현 원인에 대한 생물학자들의 의문에 부분적으로 답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러한 문제를 더 큰 관계 도식 속에 재위치 시킴으로써 그들이 제기하지 않은 문제를 그들에게 제기하기 때문이리라.

이 책의 제1장에서 내가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관계의 총체가 방역(bio-security)이라는 용어로 정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용어는 각기 다른 본성을 가진 파국을 위기 평가라는 같은 형식 속에 다룰 수 있게 만든다. 나는 현지 조사를 통해 1997년의 홍콩에서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H3N2의 출현 이후, 어떻게 해서 방역 장치가 준비되었고 아시아 각지로 점차 확산되었으며 마지막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의 돼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H1N1의 출현을 통해 글로벌화한 것이 되었는지를 해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지리적인 확대는 동물과 인간의 보건 전문가부터 닭고기 생산자와 소비자에 이르기까지 행위자 수의 증대를 수반한다. 따라서 이 책은 종의 장벽가까이에 있는 전문가들의 추론과 실천에서 출발해서 어떻게 그들이 하나의 독감세상’으로 유입되는지, 또 그들의 추론을 통해 생물을 지각하는 행위자의 총체에 얽혀서 그러한 총체에 의해 변형되는지를 살펴본다. 동물 질병이 일으킨 위생 위기에서 출발하는 이 책은 농장, 시장, 실험실에서도 접할 수 있는, 돌봄과 물자가 맞교환되는 생물과의 일상적 관계로 되돌아온다. 이 과정에서 나는 방역 장치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과 몇 번이나 맞닥뜨렸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이 문제를 글로벌한 수준에서 다루지만 이 문제는 오직 로컬한 비판에서 출발하는 경우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로컬한 비판이라는 것은 독감세상의 편성을 관통하는 극단성(極端性)을 어떻게 지각하는지에 따른 행위자들의 문제 제기를 말한다.

 

1. 방역을 둘러싼 우회로

 

감시의 규범과 형태

 

인류학자의 연구는 하나의 필드로부터 시작된다. 즉 개인적 욕구, 금전적 제약, 지도교수의 조언 등으로 결정되는, 하나의 장소와 하나의 시간에서 시작된다. 반면 나의 작업은 철학적 우회로가 필요했으며, 그 후에야 처음으로 주목한 것을 기술할 수 있게 되었다. 1996년에 나는 철학적 탐구를 시작했는데, 그때 유럽의 농촌에서 자행된 소들의 대량살처분과 야외에서 불태워진 소들의 사체 산 영상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또한 중국에도 관심이 있었다. 중국어를 배웠고, 홍콩반환(1997) 전년에 처음으로 중국에 발을 들였다. 천안문 광장의 게시판은 당시 [홍콩반환이라는] 이 영광의 빛나는 사건까지의 일수를 표시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은 조류 인플루엔자의 억제를 위해 최초로 자행된 살아있는 닭의 살처분과 기묘하게 시기가 겹쳤다. 만약 내가 저 사건 현장에 있었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첫 허베이(華北) 여행에서 내가 얻은 것은 중국철학에 대한 열렬하지만 애매한 관심과 가장 이단적인 공산주의에서부터 가장 조야한 자본주의까지의 불연속성을 개의치 않고 이행할 가능성에 대한 마찬가지의 애매한 문제의식이었다. 처음 접한 중국은 실망스러웠다. 이 나라가 불러들이는 욕망은 너무나 거대하고 이 나라의 현실(reality)은 너무나 광대해서 유일한 적절한 대응은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무는 것이다. 이 첫 만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과 인류학의 교양이 필요했다. 중국으로의 홍콩 회귀를 준비하는 중국에서 목격한 것은 중국문화의 특이성뿐만 아니라 어떤 글로벌한 장치의 예비 단계였고, 그래서 나는 유럽에서 주목한 소의 대량살처분 영상이 이 장치의 또 다른 효과이며 이 장치에 대해 그것의 고유한 합리성을 연구할 필요를 느꼈다. 여행에서 느낀 철학적 사색에서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인류학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인류학에 관한 나의 교양은 두 개의 원천에서 유래한다. 하나는 프란츠 보아스, 알프레도 크뢰버, 클리퍼드 기어츠의 전통에 선 아메리카의 문화인류학이다. 나는 이것을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캠퍼스의 폴 라비노(Paul Rabinow)의 가르침을 통해 발견했다. 캘리포니아에는 당시 생명공학이 진출해 있었다. 실리콘밸리의 야자나무 그늘에 들어선 벤처기업들은 유전학적 방법을 통해 생물에 개입하고 있었다. 아메리카 합중국의 동부 연안 출신의, 유럽의 철학적 전통의 자장 하에 있었던 라비노는 이 장소를 자신의 필드로 삼았다.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캠퍼스의 인류학부에는 크뢰버가 연구한 최후의 인디언이쉬(Ishi)의 뇌가 자손들의 요청에 따라 안치되어 있었다. 이렇듯 소수파의 요구에 충실한 인류학자들은 문화의 개념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그들 역시 문화들의 공존에 관한 유기적 모델을 옹호할 능력이 없었고 프랑스 철학(“French Theory”)에 의존해서 자신들의 잠재적인 비판능력을 발휘해야 했다. 인류학 세미나는 문화와 주체성의 연관성에 관한 격렬한 논의가 오가는 장이 되었는데, 그때마다 라비노는 대화자들의 의중을 파고드는 방식으로 과학자들 자신이 문화들에 대해 중립적이지 않고 하나의 문화만을 고집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설파했다. 이러한 방식은 독일어로 교양이라는 뜻의 “Bildung”의 문화, 곧 자기 수양과 다름없었다. 그는 생명공학이 환기하는 다양한 논쟁을 연구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과학업계 내부에서 가치의 충돌을 일으키는지를 해명했다. 예를 들어, 질병 환자들 가족의 게놈지도를 작성하기 위해 아메리카의 어느 기업과 동맹 관계를 맺는 것에 프랑스인 연구자들이 반대하자 프랑스 수상은 프랑스인의 DNA’ 판매를 금지했고, 그 한편으로 지식인들이 제작한 장대한 가계도를 활용해서 아이슬란드 국민의 게놈지도를 작성하는 프로젝트가 의회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이렇듯 라비노는 과학적 활동이 역설적으로 현대사회에서 비판적인 기능을 수행한다고 주장했다. 과학적 활동이 아직은 질병 지도에 자리를 잡지 않은 DNA 절편과 같이, 지위가 확정되지 않은 생명 물질을 유통하기 때문이다.

나는 프랑스로 돌아와 이러한 문화와 주체성의 관계 그리고 비판적인 현대적 감성 속에서 이 관계가 체화되는 형태에 대해 고찰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인류학 교양에 관한 두 번째 원천으로서 심성(mentalité)’이라는 개념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개념은 프랑스 사회철학에서 오귀스트 콩트를 거쳐 에밀 뒤르켐까지, 그리고 심성사(心性史)’에 이르기까지 독일과 아메리카의 지적 전통에서 문화라는 개념의 활약에 대응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작업은 이데올로기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이 제기하는 철학적 문제로 향했다. 심성은 어떻게 해서 사회적 실천에서의 모순을 표현하는가? 그리고 어째서 심성에 실천적 유효성과 인간사회의 기만적인 속성이 동시에 담기는가? 당시 프랑스는 인지과학의 발전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뒤떨어진 것에 대한 죄책감과 뒤틀린 왜소화에 대한 초조함이 뒤섞여 있었다. 철학적 논쟁을 벌인 부분은 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심리학적인 것과 사회학적인 것의 연관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만약 심성 개념에 담긴 모순이 도덕적 감정을 통해 표현될 수 있다면, 심성 개념은 그러한 연관을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었다. 당시 피에르 마슈레(Pierre Macherey)가 교수로 근무한 릴 대학은 파리의 격렬한 지적 활동의 피난소와 관측소를 동시에 제공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인류학의 역사를 비난하면서도 끈질기게 계속되는 철학적 논쟁을 나는 바로 그곳에서 연구할 수 있었다.

미셸 푸코의 이름은 아메리카 문화인류학과 프랑스의 심성연구라는 겉으로 보기에 양립 불가능한 두 지적 교양을 결합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의 사후 간행물은 당시 분리되어 있었던 두 지적 환경 사이를 순환하면서 남다른 혁신적 힘을 발휘했다. 실제로 푸코의 연구는 심성모델에 영향을 준 과학사로부터 다양한 감시양식의 역사로 이행하면서 점차 주체성에 대한 고찰로 향해갔다. 사회적인 것이 가진 심적 일관성에 대한 질문은 푸코의 스승인 조르주 캉길렘(Georges Canguilhem)으로부터 그의 영향을 받은 푸코에게서 변환되어 사회적인 것에서 생명적인 것의 규범적 힘에 관한 것으로 발전했다. 이에 따라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사회적 역사 속의 논리적 모순을 조명하고, 인지과학은 그것이 도덕적 감정이라는 형태로 표출된다는 것을 해명했다. 이러한 모순이 사회적인 것과 심적인 것의 연관에 따른 것이라면 생명공학에서의 양식변화를 동반하게 된다. 이에 따라 심성과 사회적 모순의 긴장 관계는 감시장치라는 수준에서, 즉 생물의 변형으로 인해 만들어진 새로운 시각장치라는 수준에서 연구될 수 있었다.

이러한 감시장치는 당시 새로운 전쟁형태에 의해 변환되었다. 2001911, 나는 박사학위 논문 집필을 위해 다양한 논리적 심성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읽었다. 이 논문은 1917년의 시엔티아(scientia)잡지에 게재된 것으로 왜 독일인과 프랑스인이 같은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는지를 심리학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러한 문화주의적 논의는 종종 뉴욕의 쌍둥이 빌딩 습격 직후 일어난 테러리즘에 대한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이 논문은 그 점에 대해 참신한 접근을 보여준다. 테러리즘에 대한 전쟁이 이미 이해할 수 없는 국민정신을 가진 민족에 대한 또 다른 민족의 전쟁이 아니라면, 서로 다른 가치관에 각각 결합한 두 개의 정치시스템의 전쟁이 아니고 오히려 감시장치와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이며, 이 적이 이 장치에 이성을 잃을 정도의 확장을 부득이하게 가져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세기의 지식인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어느 한 심성을 비판하거나 어느 한 가치 시스템을 다른 가치 시스템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해도 이 새로운 감시장치의 내부에서 그것이 체화된 규범과 형태를 기술하는 것은 여전히 가능했다.

나는 감시장치의 내부로의 이동을 실행하는 방법을 역설적이게도 레비-브뢸의 1923년 저작인 원시인의 정신세계에서 찾아냈다. 레비-브뢸은 프랑스에서의 심성 개념의 창시자로 볼 수 있는데, 그는 1917년에 전쟁의 새로운 양상(Les aspects nouveaux de la guerre)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위의 논문이 실린 시엔티아같은 호에 발표하여 그때까지 거의 다뤄지지 않은 분쟁에서의 경제적 요인의 역할을 강조했다. 황색 세계의 동요(L’ébranlement du monde jaune)(1920)라는 제목의 다른 논문에서는 세계적 규모로 확장된 전쟁으로 인한 사회적 변형을 해명했다. 이처럼 레비-브뢸은 원시심성가운데 그 자신이 초자연적인 것의 지각이라고 부른 것을 분석하면서 전쟁이 창출한 새로운 상황에 대응하려 했다. ‘감시라는 개념 자체는 오늘날 관리사회를 묘사하는 데에서 매우 자주 언급되지만, 레비-브뢸의 분석에서처럼 자연적 존재에게 닥쳐올 위협의 징후를 감지하는, 세계와의 관계방식의 하나로도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감시는 그것을 작동시키는 테크놀로지에 직면했을 때의 유달리 강도 높은 지각양식을 함의한다. 1차 세계대전 직후 레비-브뢸은 유럽에 폭동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한 목적의 경계장치의 준비에 참여했다. 그러므로 원시심성에 대한 그의 기술은 새로운 심적 상태에 대한 고찰로 간주할 수 있다. 그의 저작의 명성은 원시심성이란 보로로족 인디언이 자신들을 아라라새[마코앵무]로 천명하듯이 인간과 인간답지 않은 것 사이의 모순을 지각하는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한 것에 있다. 가령 원시심성이 사회들 각각의 고유한 논리를 설명한다는 주장이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해도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자연재해를 동물이 알려주는 감시양식을 기술한다는 측면에서 이 테제는 허용되지 않는가? 이때 광우병에 걸린 소나 인플루엔자에 걸린 닭은 새로운 초자연적실체로서 나타나고, 이에 대한 감시장치는 전근대적인 지각양식에 대응한다.

여기서 나는 레비-브뢸의 참여(participation)’ 개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다. 21세기를 전후하여 이 말은 정치토론 가운데 어떤 테크놀로지적 변환에 관련된 행위자들의, 그 적용의 투명성과 정당성의 확인을 목표로 하는 집단적인 모임을 뜻하는 단어로 유통되었다. 그러나 나는 레비-브뢸로 되돌아가 그러한 테크놀로지적 변환이 논리적으로 모순된 형태의 표출 속에서 도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비가시적인 배경 속에서 가시화하는 양상을 분석할 것을 제안했다. 신학에서 유래한 참여 개념은 더 높은 수준의 선()이 어떻게 해서 자연적 인과성 속에 발휘되는지를 기술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이 개념은 특히 희생제의의 인류학적 합리성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말리노프스키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서태평양의 섬들에 발이 묶이면서 일정 기간 체류한 이후 참여는 인류학에서 민족지적 방법을 가리키게 되었다. 한 사회집단의 일상생활에 참여한다는 뜻은 위협에 상응하는 가치를 갖춘 징후로써 자연적 실체를 대한다는 것이며 이 징후가 집단적 주의의 방향을 결정지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에번스-프리처드는 레비-브뢸의 고찰을 재해석하면서 수단의 누에르 족에서 암소의 사용방법이 어떻게 분쟁을 해결하고 환경적인 불확실성을 제거하는지를 해명했다. ‘심성에 관한 철학사는 나를 현장연구와 멀어지게 했지만, 인류학의 참여연구는 나를 다시 현장으로 불러들였다. 즉 참여 관찰은 출발점이 아니라 내가 맞닥뜨린 문제의 해결책이었다.

 

결론. 팬데믹은 신화인가?

 

이 책에서 나는 인플루엔자를 사회적 사실로써 다루고자 했다. 그러나 인플루엔자를 사회적 구성물로 단언하고 그 생물학적 현실성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나는 생물학자들의 지식과 의견에 준거해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거동에 관한 불확실성을 파헤치고 다양한 맥락 속에서 그러한 불확실성에 대처해야 하는 행위자들의 다수성(multiplicity)을 기술하고자 했다. 나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웠다. 미생물학자들은 다양한 행위자들 사이를 매개하는 역할을 연행하는데, 그것은 단지 행위자들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와 싸우는 다양한 영역(농장, 자연보호지구, 시장, 병원, 미디어 등)에 그들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실험실 내부에서 바이러스에 의해 밝혀진, 생물에 대한 두 관계 간의 모순을 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생물은 소비를 위한 상품이면서도 복수할 위험을 감수하면서 돌봐줘야 하는 존재로서 상호지각된다. 그래서 실험실은 사회적 제조소와 같았다. 이 말은 실험실에서 뭔가가 발명되고 그 후 상당한 거래가 이뤄지는 사회의 다른 부분으로 보급된다는 뜻이 아니라, 실험실에서 어떤 긴장 관계가 발견되고 그 후 그와 관련해서 항상 불안정한 타협이나 조정을 강요하는 행위자들의 수와 규모가 커짐에 따라 이 긴장 관계가 또 다른 장소에서 변이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바이러스를 쫓는 미생물학자들을 추적함으로써 이 책의 경구로 인용된 보나르의 표현을 빌리면, ‘사회적 세계의 투어를 행했다. 나는 닥쳐올 파국에 시선을 향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 파국으로 인해 공통의 지평에 내던져지고 그러한 파국으로 인해 파국의 지도를 그를 수 있게 된 행위자들의 다수성을 바라보았다.

이 조사의 끝에서 사회과학이 인플루엔자와 같은 현상을 다룰 때 제기할 수밖에 없는 물음에 하나의 답을 제시할 수 있었다. 바이러스의 불확실성은 어떻게 전제주의적 권력을 불러오는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전이에 관한 추적조사는 어떻게 팬데믹의 지평으로 향해가는가? 어떤 점에서 그러한 전체화인류 전체를 뒤흔드는 팬데믹의 고지(告知)는 생물 가까이에서 이뤄지는 작업을 변형하는가? 사회과학이 보여주는 바에 의하면, 사회를 순환하는 실체는 불확실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어서 근대사회를 구성하는 예방정책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때문에 바이러스의 전염에는 항상 관념의 전염이 동반된다. 2009년 팬데믹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 접종 캠페인은 새로운 매체와 커뮤니케이션 기술, 정보의 홍수, 예방원칙에 대한 상호 모순된 해석 등등으로 인해 새로운 바이러스와 새로운 백신 사이의 긴장 관계에 있어서 소문과 같은 역할을 떠안았다. 그러나 팬데믹의 공포는 엄밀히 분석하면 사회적 현상에 관한 연구에서 관념의 전염이나 소문의 순환보다도 더 멀리 나아간다. 그것은 사회의 구성에서 전체화가 맡은 역할에 관한 문제 제기와 연결된다. 단순히 말하면, 왜 전염은 인류 전체를 겁주고 동원하는가? 이 조사 중에 우리가 여러 번 만난 대비라는 관념은 이 사태를 잘 보여준다. 즉 행위자들은 공통의 팬데믹을 대비함으로써 자신이 엮여있는 관계에 대해 말하게 되고 자신에게 닥쳐올 위험을 느끼게 된다. 이 전체화라는 지평 속에서 불확실성의 관리를 기술하기 위해 사회과학은 신화라는 관념을 도입한다. 이 관념은 보통의 일상 언어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저 경우에는 다른 의미를 가지며 해명하기보다는 비판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지금에서야 소박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학문적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요컨대 팬데믹은 신화인가?

계절성 인플루엔자보다도 인플루엔자 팬데믹이 위험성이 낮다고 세계보건기구가 공식화하기 전까지 이러한 질문은 도발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 최초의 의미에서 신화는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혹은 마침내 자신의 고유한 현실성을 만들어내는 무언가에 대한 사회적 표상을 지시한다. 예를 들어 입수 가능한 모든 서류에 기반해서 충분히 자세하게 조사하면 WHO가 어떻게 팬데믹의 정의를 수정해가며 심각도의 기준을 낮추고 지리적으로 다른 두 영역으로 확장의 정도 기준을 견지하는지를 해명할 수 있고 또 그에 따라서 바이러스의 위험성에 관한 불확실성이 커지고 제약산업의 활동이 감퇴한 시기에 어떻게 제약산업에 백신이 주문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팬데믹이라는 개념은 법적인 의미에서 수행적차원을 띤다. 즉 이 개념은 단지 역학적(疫學的) [전염병학적]으로 현전하는 상황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실제 효력으로서 기술적 장치의 총체를 만들어내며 이러한 장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의 현실성을 명시해준다. 그다음 이러한 분석을 이미 주어진 역학적 데이터에 확대 적용함으로써 파국적인 지평의 구축에서 생명 정보학적 모델이 맡는 역할을 고려하게 만든다. 공중위생의 최종결정 기관에서 이 뒤얽힌 수학적 모델에 어떠한 효력이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다음을 함의한다. 즉 이 모델이 어떻게 일상생활의 집단적 공포에 영향을 주고 동원력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지를 보기 위해서는 특히 이 모델이 제시한 양식을 추적해야 한다. 이렇게 숫자로 제시되는 사례와 도덕적 감정의 교점은 사회적 활동을 파국으로 조준하는 현대의 신화’(광우병과 조류 인플루엔자 등의 동물 유래의 역병, 인간 유래의 탄소가스에 의한 지구 온난화)가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

그렇지만 나는 이 의미에서 신화 개념을 팬데믹에 적용하지 않는다. 신화는 표상과 현실의 연관, 계산적인 합리성과 도덕적 감정의 연관보다 다음을 함의한다. 이 개념이 제시하는 것은 독일어의 ‘Weltanshauung’이라는 의미에서의 세계관이다. 즉 그것은 공통의 세계라는 지평에 포함된 모든 것을 지각하는 것이며, 이 세계가 언제나 위협을 받아왔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위협받기 전에 구축된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다. 바로 이 의미에서 신화 개념은 특히 독일 모델에 영향을 받은 아메리카의 인간 과학으로서의 문화연구에 도입되었다. 예를 들어 니콜라스 킹(Nicolas King)신흥 질병의 세계관을 묘사하고 신흥 감염증을 둘러싼 공중위생 장치의 일관성을 논했다. 그는 이 세계관을 다음과 같이 특징짓는다. “극도로 유연하고 수없이 엮어낼 수 있으며, 여러 부분을 재배치하면서 몇몇 요소를 부각하고, 반대로 그 외의 요소를 왜소화하여 행위자 각각의 목적에 부합하려 한다. 이 세계관은 행위자에 일관되고 자율적인 역병의 존재론을 제공한다. 이 존재론은 역병의 원인, 결과, 형태, 전망 등을 정의하고 이 세계관이 표현하는 위험의 배치나 이 위험을 예방하거나 처리하는 것에 가장 적절한 방법의 윤곽을 정해준다. 이 세계관은 도덕 경제와 역사적 서사를 갖추고 있다. 역사적 서사는 악인과 영웅을 동등하게 다루며 실수에 대한 비난이나 승리에 대한 상찬을 분배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그리고 왜 현재 상황에 부닥치는지를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인간과 미생물의 세계 사이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기 위한 보편적 모델이다. 이 세계관에 포함된 규칙과 전제는 글로벌에 적용될 수 있다”(N. King, “Security, Disease, Commerce: Ideological of Postcolonial Global Health,” Social Studies of Science, 32/ 5-6, 2002, p.767.). 니콜라스 킹은 세계관의 이 마지막 측면을 근거로 이 세계관을 이데올로기로써 비판하며, 이 일관성이 몇몇 행위자의 이해를 위해 이용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제약산업과 같은 행위자는 자신의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그가 글로벌 임상이라고 부르는 프레임 내의 새로운 위협에 대해서는 지방적 차원에서만 반응한다. “신흥 질병의 세계관은 중심에서 주변으로 지식의 전파와 나아가 의료제품의 글로벌한 유통에 관한 효율적인 관리와 관련된 것들이 비교적 적다는 점에서 식민지적 세계관과 다르다”(ibid., p.779).

중략

조르주 소렐(Georges Sorel, 1847~1922, 프랑스의 사회이론가이자 생디칼리슴 철학자)은 활동의 파국적 정지에 대한 대비가 사회적 전체화의 효과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하며, 신화의 강력한 사고방식을 제시했다. 소렐에 따르면, 파업이 사람들의 정신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총파업으로 나아가야 한다. 세부적인 논의는 지성의 움직임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부분에서 전체로 이행해야 노동자들 속에 운동의 관념이 자리 잡는다. 그리고 노동조합은 이 관념을 조직한다. “신화는 현재를 움직이게 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 신화를 역사에 현실적으로 적용하는 방법에 관한 모든 논의는 거의 의미가 없다. 그러나 중요한 한 가지는 전체화의 신화적 역할이다. 각 부분은 전체에 포함된 관념을 전체의 구도 속에서 떠올려야만 지적 흥미를 유발할 수 있다.” 총파업은 사람들을 일깨우는 신화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활동의 정지를 예비하는 사람들(노동자 계급)과 그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부르주아 계급)을 구별하기 때문이다. 소렐은 니체에게서 영감을 얻고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고방식을 이어받아 파업을 파국적 지평으로써 그려내었다. 이 파국적 지평은 그것을 믿는 사람들과 경계하는 사람들의 단절을 현재에 도입한다. 이러한 묘사는 사업 지속계획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성을 보여준다. 이 계획에 따르면, 기업과 국가는 조만간 닥쳐올 팬데믹을 대비해왔다. 그렇다면 팬데믹 와중에 초유동적인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의 신화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이 계급은 글로벌한 활동의 정지를 스스로 예비하는 가능성으로 표상할 수 있는데, 그에 직면하는 노동자 계급은 매우 불안정하며 너무나 지방적이어서 파업을 운동의 관념으로 사고할 수가 없다. 인플루엔자 대 파업. 이것들은 대적하는 두 계급이 담당하는 두 개의 신화이며, 전자에서는 그 침략적 본성에 의해, 후자에서는 집단적 노력을 통해 닥쳐올 파국을 표상하는 두 개의 각기 다른 버전이다.

그런데 소렐에 대해 그 자신이 생산의 신비라고 부르는 사태에서 출발하여 또 다른 독해를 해볼 수 있다. 활동의 정지를 상상함으로써 실제로는 노동자 계급은 자신들의 사회적 구조를 구성하는 반응을 총체로써 조사하게 된다. 이 계급은 자신을 일꾼으로 삼은 생산의 기원을 인식할 수 없기에 생산을 파국적인 미래에 내던지는 것 외에는 생산의 기원을 표상할 길이 없다. 따라서 노동자 계급의 입장에서는 생산활동이 각각의 사회적 집단의 독특한 위치를 가시화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산활동의 파국적 정지 또한 근로계급과 유한계급을 대립시키지는 않는다. 이때 거동 없는 자연과 마주 보는 생산활동이 상상적으로 그려지고 이 활동 속에 환경을 구성하는 존재자의 총체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렐을 비난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이의 제기는 소렐의 친구인 샤를 페기(Charles Péguy, 1873~1914, 시인이자 극작가)의 작품에서도 읽어낼 수 있다. 그는 같은 시기에 소렐이 파업에 적용한 파국 모델에 기초해서 인플루엔자에 대해 생각했다. 1900년 페기는 막 창간된 반달 수첩잡지에 인플루엔자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텍스트를 발표한다. 그는 그 글에서 적대적인 미생물들의 일개 연대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효과에 대해 말한다.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어] 침대에서 움직일 수 없었던 그는 지적 생산자라는 자신의 활동의 빈약성을 경험했다. 적대적인 미생물들은 그가 자신의 잡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파리에서 오를레앙으로 갈 수도 있는 커뮤니케이션 연쇄 위를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의인플루엔자에 관한 삽화를 읽은 페기는 매우 근거 있는 그의 가설에 대해 조사해보려고 했다. “나는 어렴풋이 그리고 확실히 내가 건강하다고 생각했다.” 즉 인플루엔자는 신비주의를 통해 그 사회적 메커니즘을 해명했다. 페기는 예언 개념에 준거해서 모든 활동이 정지해버리는 파국적 미래로의 투사를 묘사한다. “나는 병상에 누워 () 반달 수첩에 불운이 닥쳐올 것이라는 예언이 맞았음을 증명했다. 큰 회사는 한 인간에 기반하여 절대로 설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플루엔자는 그의 개인적 의지를 일반의지로 향해가도록 부추겼다. 그것은 위기의 순간에 사회를 구성하는 상호관계의 총체를 깨닫게 한다. 그 속에는 미생물도 포함된다. 미생물은 이미 배제되어야 할 적이 아니고 불확실한 세계 속에서 활동하기 위해서 타협해야만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로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인플루엔자와 파업에 대한 이러한 고찰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쓰였지만, 이 전쟁은 총파업에 관한 어떤 관념에 종지부를 찍음과 동시에 지구상을 이동하는 인간들의 불어나는 순환이 일으킨 파국적 귀결을 보여줌으로써 팬데믹이라는 개념이 새롭게 현실화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렇다면 총파업의 신화가 팬데믹의 신화로 대체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2009년에 H1N1 바이러스에 대한 세계적 동원에 실패한 후 지금 이 순간에 팬데믹이라는 신화의 붕괴에 직면하고 있는 것일까? 특히 중국에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전체화를 만들어낼지도 모를 파업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이 의미에서 나의 이야기는 한 신화의 탄생과 죽음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레비스트로스가 신화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라는 논문에서 행한, 신화는 죽는 것이 아니라 변환하는 것이라는 지적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 책에서 내가 시도한 것은 변환이라는 레비스트로스의 개념을 인플루엔자 팬데믹에 적용해보는 것이었다. 이 개념이 함의하는 것은 신화란 스스로 닫힌 전체성이 아니라 오히려 표층구조라는 것이다. 이 구조는 다른 사회의 다른 신화로부터 다양한 요소를 빌려 복수의 이론적 수준을 연관시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신화는 로컬의 수준에서만 전체화의 효과를 만들어내며, 신화의 전반적 총체는 단독의 맥락 속에서 변환된다는 것이다. “같은 한 신화의 변이와 다른 변이 사이에, 한 신화와 다른 신화 사이에, 같은 신화들 또는 각각의 다른 신화들에 대해 한 사회와 다른 사회 사이에 움직이는 이러한 변환 () 따라서 이러한 변환에서 신화의 소재 보존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충실히 지켜진다면, 또 다른 신화가 그 보존법칙에 따라서 다른 모든 신화를 바탕으로 해서 생겨날 수 있다”(Lévi-strauss, “Comment meurent les mythes,” Anthropologie structuale deux, Paris, Plon, 1996, p.301.).

이 책에서 내가 시도한 것은 신화의 대지는 둥글다.’라는 레비스트로스의 명언을 재검토하는 것이었다. 나는 미생물학자들을 쫓으면서 바이러스의 기원에 관한 그들의 신화를 공유하였다. 그들은 국경을 넘을 때는 이 신화의 변환에 주의를 기울였다. 미생물학자들은 바이러스가 국경을 모른다고 말하면서도, 바이러스에 대한 사회적 표상이 의미를 띠는 것은 역사가 만들어놓은 국경의 맥락에 의해서며, 바이러스가 국경을 넘을 때 이 표상이 변환되거나 반전되는 존재 방식에 의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홍콩으로 되돌아왔다. 홍콩에서 인플루엔자에 관한 사회적 표상은 매우 강도 높다. 이 표상은 홍콩의 중국 국경에 대한 관점을 숙고하는 순간에 구성되기 때문이다. 팬데믹 신화가 홍콩에서 비롯되어 이해되는 것은 이 신화의 기원이 홍콩에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바이러스의 기원은 수수께끼로 둘러싸여 있다, 홍콩의 생태학적 조건경제적, 정치적 이행기에서 동물과 인간의 높은 밀집도이 홍콩을 사람과 동물과 바이러스 사이의 관계들에 대해 생각하는 데에 특별히 풍부한 맥락에 놓여있다는 의미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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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2009년의 H1N1 팬더믹의 종결이 나의 책을 전체화의 한 형태에 이르게 하였고 내가 그것을 다루게 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팬데믹 신화의 죽음 자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신화는 지금까지 변환을 계속해왔고 그 파국적 지평이 일시적으로 완화되는 까닭에 이 신화가 자신의 신화적 가능성에서 벗어났다고 상정할 수도 있다. 인플루엔자 팬더믹이 밀어붙이는 인류 종말의 고지는 잠시 그 힘을 잃었지만, 전문가들은 사전에 신흥 바이러스를 알리기 위해 동물에 대한 감시를 계속하고 있다. 야생동물과 가축의 이동량 증가, 기후 온난화, 토양오염, 삼림파괴 등 바이러스의 출현과 관련된, 완만한 생태학적 파국은 절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홍콩이 조류 인플루엔자에 대한 전초기지의 임무 수행에 실패하고, 멕시코가 돼지 인플루엔자의 이 임무를 맡지 못한다면, 그 외 다른 장소에서 동물들이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재해를 사전에 알릴 수 있는 경계 태세를 갖춰야 할 것이다. 동물들의 감시를 둘러싼 이 변환은 파국에 관한 우리의 표상을 현실화한다. 이것을 추적하려면 또 다른 연구가 필요하다. 나는 여행하면서 그러한 변환의 몇 가지 형태를 파헤쳤을 뿐이다. 나는 논리적 가설을 도입하면서 이 여행의 선형성을 유지하려 했다. 영어권과 불어권의 민족지를 비교하자면, 프랑스의 민족지는 학술서와 문학서 두 장르의 책을 동시에 쓰는 것이다. 이 책의 재료가 된 여행 수첩은 때로는 성급하게, 또 때로는 어떤 후회 속에 쓰였다. 앞으로 필연적으로 그 증명을 요구받을 때 자료는 더 보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 팬데믹은 더욱 새로운 변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하나하나의 표정을 다루려고 할 것이고, 나의 새로운 세계 투어는 팬데믹의 신화를 재배치할 것이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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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잉골드의 주요 저작 중 하나인 『메이킹─인류학・고고학・예술・건축』의 일본어판 공역자로 참여한 카네코 유의 '잉골드론'이다. 그는 다음의 글에서 이야기한 대로 2019년 태국과 라오스의 경계 숲에서 수렵채집민으로 살고 있는 므라브리족에 관한 영상을 촬영했다(https://www.youtube.com/watch?v=5_pgz60dtqE). 다음의 글은 그러한 자신의 영상인류학적 활동과 접목해서 잉골드의 "메이킹(making)"과 "라인즈(lines)"를 논하고 있다.

 


 

생물과 물질의 댄스팀 잉골드에 관한 에세이

 

카네코 유(金子遊)[일본의 비평가, 영상작가, 1974~]

 

만들기란 무엇인가?

 

팀 잉골드(Tim Ingold)1947년 잉글랜드 남부의 버크셔주(Berkshire)의 레딩(Reading)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회인류학자다. 1970년대부터 핀란드 북동부의 라플란드(Lapland)에 사는 사미족을 현장 연구했다. 그는 전통적으로 순록의 사냥과 사육을 통해 생계를 이어온 사미족 사회가 현대에 이르러 어떻게 변용되었는지를 탐구했다. 그 후 맨체스터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1999년부터 애버딘 대학에서 인류학을 가르쳐 왔다.

내가 공역에 참여한 메이킹인류학고고학예술건축(원제 Making: Anthropology, Archaeology, Art and Architecture)2013(일본어 번역본은 2017)에 간행된 팀 잉골드의 저서이다. 집필의 경위에 관해서는 저 책의 서문과 1장에 자세히 나와 있다. 잉골드 자신의 말에 의하면, 그는 맨체스터대학에 있은 1990년대 후반부터 예술과 건축과 인류학의 접점을 찾기 위해 매달 연구회를 열었다. 그리고 메이킹(making)’을 속에서부터 알기 위해 연구자, 학생들과 함께 나뭇가지를 모아 말려서 바구니로 엮거나 자신들이 만든 가마에서 그릇을 구워내거나 화음을 맞춰 합창연습을 하거나 건축을 위한 설계도를 작성했다. 이 독특한 인류학적 탐구 방법은 처음 시도되는 것들이었다. 1999년 이후 애버딘 대학에 인류학과 설립에 관여한 잉골드는 인류학(Anthropology), 고고학(Archeology), 예술(Art), 건축(Architecture)이라는 알파벳의 ‘A’를 첫 글자로 하는 각각의 분야를 조합해서 <네 개의 A>라는 과정을 창설하고 학부생과 대학원생을 위한 강의를 열었다. 실습과 워크숍, 집단활동을 다양하게 편성한 이 매력적인 강의의 진행방식과 내용에 대해서는 메이킹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팀 잉골드는 저서 라인즈(Lines)(2007년 출간)에서 문자 기록, 음악의 기보법, 직물, 손금, 지도, 스토리텔링 등을 사례로 해서 인간 세계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며 끊이지 않고 운동하는 (lines)’을 풀어내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들뢰즈-가타리 철학의 도주선개념에서 착안한 것이다. 국가라는 권력 혹은 가족 모델에 의한 억압으로부터의 도주선을 보다 문화적이고 구체적인 지평에 펼쳐놓고 그로부터 풍부한 의 세계를 추출한 이 영역 횡단적인 책에 대해 잉골드는 이 연구를 통해 나 자신이 인류학과 결별한 것이 아닌가 자문한다.”라고 일본어판 서문에 썼다.

그런데 라인즈다음에 발표한 저서 살아있기(Being Alive)(2011)를 거쳐 출간한 메이킹에서는 원생인류의 주먹도끼, 성당의 고딕 건축양식, 회화와 소묘의 차이 등 인류학과 다른 학문 분야와의 각각의 접점을 탐지하는 시도에 깊이 천착하여 독자들에게 지적인 놀라움을 선사한다. 메이킹라인즈에서 광범위하게 확장된 인류학적인 지()의 문제를 자기 자신의 신체나 손을 사용해서 다시 배워가는 실천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잉골드는 인류학을 떠나 고고학, 예술, 건축 등과의 경계에서 자신의 사상과 연구 테마를 찾아낸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보면 메이킹1장을 중심으로 전개된, 인류학과 민족지에서의 작업 구별의 문제가 중요하다. 잉골드는 민족지를 깎아내릴 생각은 없다고 단언한 후에 민족지적 기술이란 만물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그 기록자료와 데이터의 작성을 목표로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에 반해 인류학의 본질은 참여 관찰 등을 통해 인생행로의 무언가를 배우면서 자기 자신을 생성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라 그에게는 민족지가 아닌 인류학이야말로 무기물이나 유기물의 생성 변화의 흐름에 조응하면서(correspond 상호작용, 응답, 조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인간의 만들기에 이바지할 수 있는 지혜의 원천이다.

물론 이 속에는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에의 깊은 공감이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저서 천의 고원에서는 얼핏 강고하고 불변의 물질로 보이는 무기물의 금속조차도 광맥에서 채굴된 광물로서 휘발하고 용해하고 제련하고 거푸집에 담기는 등의 흐름을 가진 비유기적 생명으로 파악한다. 잉골드가 말하는 만들기란 특정의 건축가나 예술가의 그것을 의미하기보다 금속의 물질-흐름에 따라 탐광자, 채굴자, 야금술의 장인이 다양한 배치배열을 입히는 것과 같은, 인간계에 널리 사용되는 기술적인 영위이며, 그것들을 인류학적으로 기술하려는 시도이다. 만약 인류학이라는 것을 한 인물의 직능적 전문성이나 연구의 기반을 제공하는 지()의 체계라고 생각한다면, 절대로 메이킹을 인류학 저서라고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잉골드가 주장하듯이 인류학이 주변 세계에 주의를 기울여서 지혜를 얻고 참신한 지적 공기를 흡수해서 점차 자신을 변화시켜 환경에 적응해가며 복잡한 자기 자신과 우주와 세계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해하기 위한 지()의 길이라고 한다면, 메이킹만큼 인류학적인 모험을 감행한 책이 없을 것이다.

 

예술과 인류학

 

나 자신은 팀 잉골드와 대면한 적이 없고, 시인이자 비교문학자인 스가 케이지로(管啓次郞)가 잉골드와 만났었다. 스가가 잉골드의 인상에 대해 굵은 팔뚝에 털이 무성한 야성적인 느낌의 사람이다.”라고 한 말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젊은 한때 200~300kg의 순록을 상대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자기 안에서 숙성되어 딱 감이 오는 기분이었다고.

팀 잉골드는 메이킹1속에서부터 아는 것(Knowing from the insid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순록 유목을 하는 사미족 사회에 들어가 참여 관찰의 방법을 가지고 그들과 함께 생활한 청년 시절의 일이다. 사미족 사람들이 전통의 지혜를 조금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분명 가르치는 일을 싫어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간 흐른 후에 알게 된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무언가를 알기위해서는 그 속에서 스스로 발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어로, 수렵, 혹은 순록 방목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말로 이야기해서는 가르칠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미족이 가진 이 지혜를 청년 잉골드가 깨달은 것이다.

나 또한 저 사회인류학자의 접근과는 다르지만, 그와 비슷한 것을 20대 후반의 젊은 시절에 경험했다. 볼렉스[카메라 제작회사 이름] 16mm 카메라를 짊어지고 시인 요시마스 고조(吉増剛造) 씨를 쫓아다닐 때의 일이다. 문화인류학자 이마후쿠 료타(今福龍太) 씨와 요시마스 씨가 삿포로의 한겨울 설경을 배경으로 니시오카(西岡) 저수지의 숲(이마후쿠 씨가 니시오카 월든(Walden)’이라고 부른 곳)을 걸으면서 대화를 나눈다고 해서 촬영하러 갔다. 저수지가 얼어서 눈이 쌓이고 그 위에 백로의 발자국이 띄엄띄엄 나 있었다. 거기에 눈길이 멈춘 시인은 저것은 눈의 바늘땀이라오.”라고 속삭였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아마미 자유대학(奄美自由大学)’[이마후쿠 료타의 주재로 아마미 군도(奄美群島)에서 진행하는 형식 없는 배움의 장]에 참가해서 도쿠노시마(徳之島)에서 소가 없는 투우장을 걷는 순례를 하는 중에 요시마스 씨가 웅크리고 앉아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는 소의 앞발이 파놓아 움푹 파인 구멍을 보고 저것은 투우장의 눈동자구먼.”이라고 중얼거렸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는 스스로 생물과 물질로 이뤄진 세계를 학습하고 있은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계는 시시각각 모습을 바꾼다. 그러한 세계를 탐구하는 기술은 타자에게서 그의 머릿속에 있는 어떤 관념이나 정보를 전달받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끊임없이 변용하는 생물과 물질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이 질문의 답은 스스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요시마스 고조 씨가 백로의 발자국을 바늘땀으로 파악한 것은 단지 시인의 감흥에 불과한 것인가? 잉골드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민달팽이가 납작돌 위에 남긴 흔적처럼 이리저리 감기는 선의 그물세공(meshwork)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선은 고리를 만들어 서로 얽히고 또 굽이굽이 꿰매듯이 나아간다.” 그물망(network)의 모든 선이 연결선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물세공의 선은 운동이자 성장의 선이며 생성 변화하는 선이다. 나는 내 주변에서 질적인 변화를 해나가는 생물과 무생물의 양상을 파악하는 방법을 시인에게서 배웠고, 잉골드는 그것을 살아있기(being alive)’ 혹은 만들기(making)’의 학습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예술과 인류학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는 선주민이 만든 회화, 건축, 조각, 민중예술을 연구하는 것을 의미해왔다. 한편으로 팀 잉골드는 예술과 인류학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여기서 /가 중요하다. ‘예술 인류학에서 감상자는 작품을 통해 제작자의 의도를 미루어 파악하고 작품의 배후에 있는 선행작품으로부터의 영향이나 그것이 제작된 시대가 드리운 그림자를 투시함으로써 작품을 해석한다. 그런데 예술과 인류학에서 감상자는 예술가(artist)의 길동무가 되어 작품이 세계에서 전개해가는 것을 작품과 함께 본다’. 왜냐하면 작품의 생명은 그 소재에 뿌리내리고 있으며 모든 작품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 후에도 계속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메이킹2생명의 소재(The Materials of Life)에 나온 도표를 참조해야 한다. 팀 잉골드는 의식의 흐름(flow of consciousness)’물질의 흐름(flow of materials)’을 두 개의 세로 선으로 나타낸다(<그림 1> 참조). 이 두 선은 위에서 아래로 시간이 흐른다. 앙리 베르그송이 말했듯이 시간의 흐름은 시계처럼 숫자로 계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컵에 담긴 물에 설탕을 넣으면 설탕이 서서히 녹듯이 시간의 흐름은 질적인 변화를 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신체도 물질이기 때문에 세월이 흐를수록 얼굴에 주름이 생긴다. 시간의 경과는 두 번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질적인 변화이다. 그리고 의식의 흐름의 세로 선에는 우리의 시각, 청각, 촉각 등의 다양한 감각이 뭉쳐 있는데, 한 장의 사진을 찍듯이 그것을 일순간 멈추게 하면 그것은 이미지가 된다.

그림 1. 의식, 물질, 이미지, 물체의 도표

그와 더불어 물질의 흐름인 세로 선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차 변화한다. 식물이나 동물과 같은 생물은 시간이 흐르면 성장한다. 실은 무생물도 마찬가지다. 단단하고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강가의 바윗돌도 장구한 세월 속에 이리저리 구르고 물에 씻기어 점차 둥글어진다. 철과 같은 물질도 녹이 슬거나 강도가 약해지거나 부서진다. 아무리 확고한 존재로 보이는 사물도 시간과 함께 시시각각 변하는 것은 생명체와 다를 바가 없다. 생물과 비교해서 질적인 변화의 간격이 길고 속도가 느릴 뿐이다. 즉 물질 또한 한계가 있는 생명을 가졌으며, 비유기적인 생명이다. 잉골드는 우리가 이러한 물질의 흐름이 정지하는 순간에 물체로서 그것을 지각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이미지에서 물체로, 물체에서 이미지로 변환하는 바로 이것을 잉골드는 만들기(making)’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로 방향뿐만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세로 방향으로 만드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메이킹에서는 “perdurance(연속, 영속)”이라는 조금은 생소한 용어를 사용한다. 물질의 영원한 지속을 뜻하는 것일까? 자신의 뇌리에 있는 이미지를 물질에 찍어누르는 것이 만드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관념은 틀렸다고 잉골드는 지적한다. 미리 디자인을 구상하고 설계도를 만들어 거기에 맞춰서 물질이나 소재를 조립해서 예술작품이나 건축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메이킹에서는 도기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도공은 찰흙을 소재로 사용한다. 도기를 만드는 사람은 원반대의 회전에 맞춰 정성스럽게 찰흙을 매만지고 조금씩 시간이 흐르면서 말라가는 흙과 춤을 추듯이 손가락으로 매만지는 동작을 반복하면서 소재의 속에서부터 모양을 만들어간다. 도공의 손가락과 소재인 찰흙 사이에 회전하는 원반대라는 제3항이 끼어들면서 생물과 무생물의 댄스는 가능해진다. 또 다른 예를 보자. 나무로 조작을 만드는 사람은 끌을 나뭇결에 따라 위로부터 아래로 밀어 깎는다. 끌의 칼끝은 그 나무가 성장해온 과거의 역사인 나뭇결에 저절로 이끌린다. 사전에 머리에 구상한 디자인을 물질에 찍어누르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질적으로 변화하는 흐름을 좇는 것. ‘만들기란 이렇듯 물질세계에 참여해서 사물과 힘을 합쳐 작품을 성장시키는 것이며 이에 따라 작품이 생성하는 것이라고 잉골드는 생각한다.

 

모뉴먼트와 마운드

 

메이킹에서는 클레어 투미(Clare Twomey)라는 예술가의 광기인가 아름다움인가(Is it Madness. Is it Beauty)라는 설치미술(installation art)을 소개한다. 옆으로 긴 탁자 위에 굽기 전 점토 상태의 하얀 도기를 한가득 진열해 놓는다. 투미는 물 주전자를 가지고 도기 안에 물을 붓는다. 그러면 당연히 감상자가 보는 앞에서 도기가 천천히 구부러지고 틈이 생기고 느린 그림처럼 무너져서 쪼개진 도기는 탁자나 마루 위에 물을 흘려보내게 된다. 이 작품에서 백색 점토로 만들어진 그릇은 하나의 완성형이 아니라 하나의 덧없는 생명을 가진 존재이다. 이렇듯 현대 예술작품에는 시간에 경과에 따라 물질이 변화해가는 과정 그 자체를 작품 속에 녹여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내가 아사히카와(旭川)의 가와무라 가네토(川村) 아이누 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정원에 더러운 큰 나무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관장인 가와무라 가네이치(川村兼一) 씨에게 저건 무엇인지 물었을 때 이렇게 답했다.

, 저것은 스나자와 빗키(砂澤ビッキ)[홋카이도 출신의 조각가]가 만든 토템 막대요.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겠지만, 빗키라면 그대로 둘 거라고 생각해서 내버려 두고 있소.”

스나자와 빗키는 주로 나무로 작품을 만든 예술가였는데, ‘눈보라라는 이름의 끌로 작품을 만들려고 생각해서, 작품이 자연적으로 풍화하고 썩고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작품 제작 속에 집어넣은 인물이다. 삿포로 예술의 숲 밖에서 상설전시되고 있는 네 개의 바람이라는 대작은 네 그루의 나무 기둥으로 만들어진 작품인데, 이미 그중 한 그루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조각작품 또한 언젠가 썩어 없어질 생명의 끝을 맞이한다는, 예술가의 사고방식이 구현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돌이나 금속에서 모뉴먼트(기념건조물)를 만들고 반영구적으로 그 모습을 유지하려는 사상과 대극을 이룬다. 바로 팀 잉골드가 생각하는 끊임없는 생성 변화의 작품에 가깝다.

지금 모뉴먼트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 용어는 팀 잉골드가 고고학에 대해 생각했을 때에 사용한 키워드이기도 하다. 메이킹6장은 원뿔형의 마운드가 주제이다. 잉골드는 자신이 촬영한 핀란드의 개밋둑 사진을 책 속에 게재하고, 그것이 마운드적인 존재 방식을 체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슬픈 열대에서 브라질의 적토로 만들어진 개밋둑을 언급한 것을 염두에 두었으리라. 개밋둑 외에도 마운드를 이룬 장소에는 고분의 흔적, 묘지, 퇴적물로서의 조개무지 등이 있다. 잉골드의 연속의 고고학에서 마운드는 지표면에 나타난 생명과 성장의 원천으로 간주된다.

이에 대해서는 모뉴먼트와 마운드의 성질의 차이를 비교하면 알기 쉽다. 모뉴먼트는 일정한 모습을 남기기 위해 돌이나 금속을 사용해서 기념될만한 인물이나 사건을 반영구적으로 보전하고자 한다. 그에 비해 마운드는 사람들이 순례를 행한다거나 이웃들이 그 주변을 걷는다거나 인근 논밭을 경작한다거나 인간이 행동하는 속에서 기억을 담지하는 장소로서 존재한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마운드는 신성한 장소이기도 하다. 미야코지마(宮古島)의 성지인 오타케(御嶽)[오키나와에서 조상신을 모시는 성지]”20여 개소 순례했을 때에도 그것이 평평한 토지에서 눈에 띄는 작은 둔덕인 경우가 있었고, 수목이 빽빽한 숲에 오타케가 들어선 경우도 많았다. 혼슈로 말하자면, 신사가 있는, 수호신을 모신 숲도 원래는 기암괴석이나 오래된 나무가 있는 높고 낮은 둔덕인 경우가 많다. 그러한 성지에는 애니미즘적 신령의 유래담이 전해오는데, 훗날 그것이 불교와 습합한다거나 근대에 이르러 신도와 불교 분리령(分離令)으로 제신(祭神)이 바뀐다거나 한다. 그렇지만 표면상의 종교나 제신이 바뀌어도 물질과 장의 힘을 가진 성지 자체는 불변한다. 모뉴먼트는 시간이 지나면 풍화하지만, 마운드는 풍화하지 않는다. 거기에 식물이나 곤충이 서식하고 흙이 퇴적하고 빗물이 표면을 씻기고 세월이 흘러도 마운드는 헐지 않는다. 이 지적은 팀 잉골드의 탁견이다. 마운드는 커지든지 작게 깎이든지 다양한 물질이 교체되면서도 둔덕으로서의 존재를 이어가는 비유기적인 생명의 존재 방식을 상징하는 것이다.

조금 화제를 바꾸면, 나는 2017년에 국제교류기금의 펠로우십을 받아 6주간 태국과 캄보디아를 여행했다. 그때 처음으로 태국의 난(Nan)에서 므라브리족(Mlabri) 사람들을 만났다. 태국 북부와 라오스 국경 주변 숲에서 살아온 그()들은 400명 남짓 규모의 민족이다. 오스트리아의 민족학자 휴고 아돌프 베르나직(Hugo Adolf Bernazik)1936년부터 1937년의 탐험에서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므라브리족과 접촉했다. 당시 그들은 정글 속에서 수렵채집 생활을 하고 있었고, 마을이나 가옥을 가지지 않은 완전한 노마드였다. 므라브리족은 타이족, 몽족, 라오족 등 주변 민족을 경계했기 때문에 주변 민족이 므라브리족을 접촉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바나나 잎으로 침상을 만든 흔적 외에는 좀처럼 접하기 힘들었기에 황색 잎의 정령이라는 뜻의 피 통 루앙(Phi Tong Luang)”이라고 불렸다. -크루메어계의 므라브리어를 말하는 이 소수민족은 197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 타이인에게 다시 발견되어 태국의 정책적 차원에서 숲을 나와 정주화를 진행하고 있다.

2017년에 므라브리족 마을을 방문했을 때 영상을 촬영해서 5분 가량의 황색 잎의 정령이라는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그 후 2018년부터 2019년까지 므라브리어를 연구하는 언어학자인 이토 유우마(伊藤雄馬)와 협력하여 라오스쪽 숲에서 노마드 생활을 하는 그룹을 찾아 숲의 므라브리(2019)라는 장편 민족지 영화를 제작했다. 처음으로 난(Nan) 지역의 마을을 방문했을 때는 대나무로 엮은 작은 오두막에 살면서 숯불로 조리하는 므라브리족의 간소한 생활방식에 놀랐다. 비스켓과 돼지고기를 선물로 들고 가면, 장로들이 대나무로 간단한 기둥을 만들고 바나나잎으로 지붕을 얹는 집 만드는 방법을 답례로 보여주어서, 그것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간소한 생활이라 해도 그것은 우리의 문명과 비교했을 때의 척도에 불과하며 원래 므라브리는 토지를 소유하지 않고 논밭을 경작하지 않으며 자기 집이 없이 정주하지도 않는 유동민(遊動民)의 생활을 견지해왔다. 보아하니 그()들은 손재주가 좋아서 허리춤에 달아놓은 손도끼 하나만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주변에 있는 것을 사용해서 불을 피우고 눈 깜짝할 사이에 바나나잎과 대나무로 냄비와 식기를 만든다. 그리고 대나무 통에 돼지고기를 잘라 넣어 대나무가 머금은 수분으로 쪄내는 전통적인 조리법을 가지고 있다. 종래의 문화 인류학자라면 므라브리족의 집 만들기나 조리법을 보았을 때 장로들과 이들을 돕는 아이들의 브리콜라주를 지적할 것이다.

그러나 메이킹을 읽은 후의 우리는 조금 더 다른 관점으로 다가갈 수 있다. 나 자신이 촬영한 영상을 돌려보면, 장로와 므라브리족의 소녀는 손도끼를 가지고 숲에서 대나무를 자르거나 그 잎과 줄기로 작은 오두막을 만들거나 그 대나무 줄기와 잎사귀로 화톳불을 피워서 조리한다. 집 만들기에서 대나무 줄기와 바나나 잎을 편물처럼 떠서 지붕을 강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리기구를 만들 때 장로는 도끼 칼을 대나무 결에 맞춰 세로로 쪼갠다. 대나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장한 그 방향과 흐름에 응답하듯이. 그가 다루는 손도끼 또한 물질의 흐름을 따른다. 잉골드의 사고방식으로 말하면 머릿속에 있는 디자인을 물질에 찍어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적인 만들기가 아니라 세계와 물질 속에 있는 성장과 지속의 방향에 따라 그것을 이용하면서 사물을 만드는 장인(artisan)의 손놀림이다.

 

쓰기와 드로잉

 

생물도 유기물도 아닌 작품에 생명을 느끼는 일은 나처럼 책이나 영상을 만드는 인간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다. 문장을 쓸 때 어떤 테마에 대해 쓸 것인가, 어떻게 구성할까, 사전에 어느 정도 디자인해둔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미생(未生)의 형태에 머문 구상에 불과하다. 책상 앞에 앉아 쓰기 시작하면, 머릿속 소재를 늘어놓을 때마다 생각지도 못한 형태가 나타난다. 손을 움직이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때로 뇌가 생각하는 것인가 손이 생각하는 것인가 모를 때가 있다. 그러한 소재를 익숙하게 만들어 지면상에서 다양한 모험과 실험을 반복하면, 무언가 나다운 형태로 정리된다. 써 내려간 문장을 다시 읽어보면 처음 생각한 지점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생전 처음 보는 생물을 보는 것처럼 나 자신이 썼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 소설, 평론, 수필, 저널 등 문장의 장르에 거의 관계 없이 쓰기라는 만들기과정에 어떤 창조행위의 비밀이 있는 것 같다.

그러한 만들기의 감촉은 다큐멘터리 영상을 제작할 때에도 여실히 느낀다. 세계나 사회 속에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들어갈 때 다양한 사람과 인터뷰를 하거나 여러 사건의 흐름 속에 몸을 맡긴다. 눈앞에서 조금씩 전개되는 사상(事象)에 직면해서 그 흐름을 따라가면서 그때마다 필요한 대응과 응답을 한다. 현실 세계로부터 움직이는 이미지의 단편을 끄집어내는 작업인 것인데, 각각의 단편을 가능한 한 자기 나름의 색깔이나 분위기가 풍기도록 애쓴다. 그렇게 해서 수집한 영상이나 음성의 이미지를 편집할 때는 소재가 가진 역능을 활성화해서 그것을 발휘하게 하면서 자르고 붙이면서 흐름을 만든다. 소재가 가진 힘을 강화하고 그것이 해방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영상의 편집작업은 촬영 전에 미리 정해진 대본을 쓰는 작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영상의 편집은 어디로 향해갈지를 모르는 가운데 소재와 대화를 계속하며 하나의 종합적인 형태로 결실을 이루는 여행이다.

메이킹8손은 말한다(Telling by Hand)를 읽으면 팀 잉골드는 손으로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손은 촉각 기관일 뿐만 아니라 손이 만들어내는 제스처, 문장어, 직물과 편물, 그림 그리기 등을 통해 이 세계의 다양한 스토리를 말할 수 있다. 그것을 손의 창조성(the creativity of the hand)’이라 하지 않고 손의 인간성(the humanity of the hand)’이라고 하는 부분이 흥미롭다. 손이 스스로 사물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제작이라는 것은 모두 소재와의 대화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앙드레 르루아 구랑(André Leroi-Gourhan)[프랑스의 선사학자, 1911~1986]은 망치질, 뜨개질, 스크래핑 등 수많은 기술적인 작업이 특정한 동작의 규칙적인 반복을 수반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장인의 마음속에 예술품의 최종 형태가 있든 없든, 실제 형태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리듬감 있는 동작의 패턴에서 나온다.” 이것을 이번에는 쓰기에 대해 살펴보자. 하이데거가 타자기 사용을 반대한 것도, 잉골드가 컴퓨터 키보드 사용하지 말라고 한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펜과 종이 사이의 대화에 귀를 기울여 소재의 반응을 끌어내고 소재에 조응하기 위해서는 역시 손의 움직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타자기를 사용해서 종이에 글자를 찍어 넣으면, ‘손의 운반(the ductus of the hand)’을 잃고 신체의 몸짓을 잃는다. 다시 말해 거기에 있는 인장 등 무한의 뉘앙스가 상실된다고 하이데거는 생각했다. 팀 잉골드는 그러한 생각에 동조하면서 손으로 쓴다는 것은 세계 속에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 속에 존재할 때에 우리는 참된 느낌을 느낄 수 있다.”라고 말한다. 잉골드에게 드로잉(소묘)은 작가가 머리에 그린 이미지의 실현이 아니라 손과 연필이 지면과 만나 상호작용을 일으킬 때의 신체 동작의 흔적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문자를 쓰는 것그림을 그리는 것의 경계 따위는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2018년 여름 토치기현(栃木県)의 아시카가(足利) 시립미술관에서 세상 끝의 시성(テノ詩声)이라는 전람회가 개최되었다. 손으로 직접 쓰는 것을 고민해온 시인 요시마스 고조 씨가 본인에게 영향을 준 료칸(良寛)[에도시대 후기의 선승이자 시인, 1758~1831], 아쿠다가와 료노스케(芥川龍之介)[일본의 소설가, 1892~1917], 야나기타 쿠니오(柳田国男)[일본의 민속학자, 1875~1962], 니시와키 준자부로(西脇順三郎)[일본의 근대 시인이자 영문학자, 1894~1982] 등의 책과 편지와 함께 자필 원고나 자작의 사진작품을 전시했다. 놀라운 것은 요시마스 씨의 페인팅 시리즈 불의 자수(刺繍)의 작품군이다(<그림 2> 참조). 원고용지의 괘선에서 삐져나오듯 빽빽하게 시편이 필사된 말이 친필로 써 있다. 대부분은 가타카나로 쓰여 있어서 어떤 주술문으로 보인다. 정성스럽게 쓴 그 노력을 지우려는 듯 그 위에 검정과 색색의 잉크가 덧칠해져 있고 일종의 추성화로서 완성된 모습이다. 잭슨 폴록(Jackson Pollock)[20세기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적 화가, 1912~1956]의 추상화처럼.

그림 2. 요시마스 고조의 불의 자수 (필자 촬영)

나아가 요시마스 고조 씨는 관중 앞에서 검은 안대를 하고 라이브 페인팅으로 제작하는 시도를 행했다. 빼곡히 문장을 써 내려간 원고용지 위에 잉크를 떨어뜨리는 것인데, 안대를 하고 있기에 어떤 모양이 될지는 본인조차도 알 수 없으며 오직 우연성에 이끌려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팀 잉골드처럼 예술의 인류학이 아닌 예술과 인류학을 지향한다면, 불의 자수의 배후에 있는 작가의 의도와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를 그렇게 적극적으로 고찰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감상자가 찾게 되는 것은 예술가의 손이 우주 공간에 그려 넣은 움직임의 흔적을 좇는 것이리라. 불의 자수를 문학작품이나 회화작품의 장르에 편입시키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드로잉이 회화보다도 댄스나 음악에 가깝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것은 잉골드가 말하는 시간의 흐름의 표면에 생기는 소용돌이를 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드로잉은 정지한 점과 점이 이어지는 네트워크와는 다른 어떤 것이다. 왜냐하면, 네트워크는 정지한 공간에 그려진 구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민달팽이가 이동한 후에 남겨진 선을 잉골드는 그물망(network)이 아닌 그물세공(meshwork)이라고 불렀다. 그 선은 띄엄띄엄 이어지며 여기저기 들르면서 고리를 만든다거나 서로 얽힌다거나 굽이굽이 바느질하듯이 나아간다. 즉 그물세공은 운동하는 선이며, 조금씩 성장하는 선이며 생성 변화의 선이다. 그 속에서 손과 신체는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선을 성장시킨다. 그러한 의미에서 불의 자수에 실린 잉크의 염료는 시인의 신체 행위의 흔적이며 그물세공이다. 역시 손의 인간성이 보여주는 활동에는 아직 무한의 가능성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金子遊、「生物物質のダンス」、『たぐいVol.3、202111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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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에 의하면, 파트리스 마니글리에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의 진정한 계승자이다. 말마따나 마니글리에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철학적, 기호학적인 측면에서 더 깊이 파고들었다. 베르그송에서 시작해서 소쉬르와 레비스트로스를 경유하여 마니글리에에 이른 가상성의 실천으로서 기호적 삶은 활력을 얻는다. 이 글의 원문은 Common Knowledge에 2016년에 실린 https://doi.org/10.1215/0961754X-3622260이며, Matthew H. Evans가 영어로 번역한 것을 번역한 것이다. 

 


 

 

기호와 관습: 레비스트로스, 실천적 철학자

 

파트리스 마니글리에

 

“우리는 왜 복종했는가?” 우리는 이런 질문을 거의 하지 않는다. 우리는 부모와 선생을 따르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다. 이와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앙리 베르그송은 사회과학의 철학에서 가장 위대한 작업 중 하나로 남은 것을 소개한다.[각주:1] 베르그송은 사회과학 분야, 대표적으로 에밀 뒤르켐의 작업이 의무의 문제를 철학보다 더 잘 보여준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즉 이론적 및 윤리적 관점에서 의무가 제기하는 진짜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좀처럼 인식할 수 없다는 점이며, 이 점을 사회과학이 철학보다 더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철학이 의무의 문제를 주체가 의식적으로 타자의 권위에 스스로 복종하는 합법적인 조건 중 하나로 다룬다면, 사회학이 구축한 사회 개념은 복종을 역설적으로 근거 없기에 더욱 만연한 것으로 묘사한다. 사회라는 바로 그 개념은 의무에 대한 우리의 무자각을 들추어낸다. “우리는 이것을 완전히 깨닫지 못했지만, 부모와 선생 뒤에서 부모와 선생을 통해 우리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거대하면서도 불투명한 무언가가 있음을 어렴풋이 알았다. 후에 우리는 그것이 사회였다고 말할는지 모른다.”[각주:2] 사회적인 것은 개인적이고 의식적인 행동의 인과관계로 환원할 수 없는 인과관계의 층위이며, 이는 의문―권위의 합법성―의 부재로 드러난다. 따라서 사회과학의 목적은 왜 개인이 자신의 이해 범위를 초과하는 이유에서 자신에게 부과되는 것들을 행하는지를 더 잘 이해하는 것이어야 한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을 뒤르켐과 마르셀 모스 그리고 프랑스 사회학파의 유산 상속자로 여겼다. 이것은 그를 의무의 문제에 관해 제각기 답변을 내놓을 3인조―뒤르켐, 모스, 레비스트로스―의 세 번째 회원으로 영입하게 만든다. 각자의 답변을 들어본다면, 뒤르켐은 집합 표상―원천적으로 개인의 표상과 다른―의 제약의 힘으로 돌렸을 것이고, 모스는 표상의 본질이 아니라 교환 메커니즘을 통한 시스템에의 참여로 돌렸을 것이다.[각주:3] 레비스트로스라면? 사람들은 그가 사회적 규범의 제약적 성격을 논리적 제약, 아니 어쩌면 인지적 제약으로 설명할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빈센트 데꽁브(Vincent Descombes)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1953)를 끌어와서 논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규칙을 제약으로 이해함으로써 규칙을 실체화하려는 시도는 아포리아로 끝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각주:4] (데꽁브는 레비스트로스에 종종 부과되는 이의제기를 일반화하면서, 사회과학의 이론가들은 대개 행위를 ‘이해하기’보다 ‘설명하기’를 더욱 열망한다고 비난한다.) ‘왜 사람들은 해야만 한다고 느끼는 것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실제 대답은 사람들이 항상 그 이유를 명확하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으며 그 말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가 속한 사회가 무엇이든지 개인은 이 규칙적 순응에 원인을 지정할 능력이 거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사태가 항상 이와 같았으며 사람들이 그 전에 한 일을 그가 한다는 것뿐이다.”[각주:5] 이에 따라 의무의 문제는 대체된다. 우리가 하는 일을 왜 하는지를 이해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해야만 할 일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하는지를 이해하는 문제이다. 문제는 통상적 실천, 습관 혹은 관습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아낼 것이며, 또 그 일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집합적 행위는 흔히 생각하듯이 안정된 관계를 유지하는 여러 개인에게 공통적으로 관찰 가능한 일련의 행동으로 정의 내릴 수 없다.

‘인지적’ 혹은 ‘상징적’ 차원에서 관찰 가능한 행위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제안은 구조주의가 사회과학에 공헌한 바가 아니다. 오히려 공헌은 언어학, 인류학, 역사학, 그 외 “문화 과학”에 있어서 기초적인 문제─데이터의 특성과 관련된 문제─를 드러낸 것에 있다. 구조주의는 문화적 실천의 단위(담화, 의례, 신화, 습관 등등)가 관찰 가능한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부정적이지만 심히 교훈적인 관측에서 시작한다. 문화적 실천의 세계는 필수적인 데다가 이중적인 가변성(variability)에 의해 정의된다. 다른 언어들 사이에서의 가변성뿐만 아니라 한 가지의 같은 언어를 말하는 방식에서의 가변성. 우리는 구조주의를 신(新) 엘레아 학파[각주:6]고 비난하며 자축했다. 그러나 구조주의는 정말로 우리에게 이 가변성이 우연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적 실천을 더불어 구성하는 단위들을 정하는 방식(mod) 속에 확고히 놓여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각주:7]

나는 여기서 레비스트로스가 『신화학』 시리즈에서 변환 개념을 통해 구조적 분석을 재정의하면서 기이하게도 원래 소쉬르의 문제였던 기호의 동일성(identity) 문제와 우연히 마주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려 한다. 그러나 나는 그뿐만 아니라 새로운 방법론의 구축, 즉 구조적 방법론―‘차이’와 ‘시스템’이라는 작동 개념을 고려해서―이 어째서 새로운 철학적 문제의 공식화를 통해 필수적으로 작동해야 했는지도 밝혀보려 한다. 차이 간의 상관관계를 통해 독특하게 구성되는 특정한 종류의 동일성 혹은 통일성,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존재론이라고 부르는 문제이다. 항간에는 소쉬르, 야콥슨, 트루베츠코이, 레비스트로스와 같은 저자를 독해하려는 움직임이 최근 다시 일고 있다. 이들은 모두 한동안 구조주의 운동과 분리되는 조건에서만 구조주의자로 인정받았고, 그렇게 구조주의 운동은 사라지는 지위로 강등될 수 있었다.[각주:8] 그러나 내게 필요한 것은 그 반대 절차이다. 즉 구조주의 운동을 위해 이 저자들을 되찾는 것, 그리고 ‘문화 과학’과 교차하는 순전한 철학적 문제의 유리한 지점으로부터 그렇게 하는 것. 구조주의라고 알려지게 된 무언가의, 누가 보아도 불확실하고 논쟁적인 일관성은 내부의 불균형 그리고 자신의 방법론에 있는 철학적 문제의 발견이 ‘실천의 이론’을 부추긴다는 과격한 주장에서 찾아야 한다. 기호학(semiology)은 새로운 이론적 영역을 위한 이름이기보다 다양한 학문 집단 내에서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철학적 문제를 지칭한다. (순전히 방법론적인) ‘좋은’ 구조주의를 가지고 철학적 사변론에 복무하는 ‘나쁜’ 구조주의를 막아봤자 얻는 것은 별로 없다. 방법론적인 프로젝트와 사변적인 구성물의 조합을 이해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구조주의가 제기하는 진짜 문제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철학이 제1 원리를 향해 되돌아가라고 영원히 비난받을 필요도 없고 (무관심 속에서 매우 흔하게 철학자가 밑바닥에서 무엇을 찾든지 간에) 철학은 어떤 새로운 지적 규율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의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무심코 보여준 것이 구조주의의 최대 장점이다.

 

소쉬르와 철학: 존재론적 문제로서 기호의 동일성

 

우리는 이제 겨우 소쉬르에 관해서 우리가 아무것도 혹은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구조주의로 가는 연구에서 묘사되는 소쉬르 그리고 소쉬르의 자료를 재개봉하는 것에 쉽게 낙담하는 비판적 편집과 학술적 비평에서의 소쉬르, 이 사이의 격차는 매우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쉬르의 노고에 대한 일관된 해석은 가능하다. 그가 기호만큼 의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면 말이다. 그의 야망은 결코 의미화(signification)의 일반 이론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기호를 가지고 모든 종류의 것을 할 수 있고 그 속에서 우리가 ‘의미화(signifying)’ 혹은 ‘소통(communicating)’이라고 부르는 것은 타자들 간의 게임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옳았다. 그러나 소쉬르의 질문은 더 간단하고 더 즉각적이다. 요컨대 우리는 기호의 조작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왜냐하면, 기호의 정체화(identification)는 엄청난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소쉬르는 다음과 같이 쓴다. “내가 여러분(messieurs)이라는 단어를 발화할 때마다 나는 그것의 물질적 존재를 새롭게 한다. 즉 새로운 발성 행위이고 새로운 심리학적 행위이다. 같은 단어의 두 가지 사용 사이의 연관성은 물질적 동일성이나 의미의 정확한 유사성에 기반하지 않고, 언어학자가 언어 단위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내는 어디에라도 접근하려면 반드시 발견해야 하는 사실에 기반한다.”[각주:9] 이해해야 하는 것은 매번 반복할 때마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단순한 변이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심지어 최소한의 ‘알맹이(kernel)’의 보존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호에서 우연적인 것(the accidental)과 본질적인 것(the essential)을 분리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기호가 실재한다면, 그때 그것은 관찰 불가능한 실재이다. 관찰 불가능하다는 것은 측정 불가능하고 경험적으로 증명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소쉬르 시대 이후 언어학의 역사는 기호의 경험적인 영역을 측정하기 위해 시행된 어떤 방책도 소용없음을 입증한 것일는지 모른다. 1943년 야콥슨이 뉴욕의 ‘신사회연구소(the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행한 “소리와 의미에 관한 여섯 개의 강연”의 첫 강연―레비스트로스는 이 강연의 매우 열렬한 청자였다―에서 야콥슨은 1930년대에 촬영된 음성장치의 방사선 필름이 발성 동작의 관찰 가능한 단위가 음운 인식의 단위와 일치하지 않음을 처음으로 입증한다고 설명했다.[각주:10]

그러나 소쉬르는 그의 관점을 실험적으로 검증하기 훨씬 전에 언어학은 단순한 이유로든 복잡한 이유로든 다른 어떤 경험과학과 같은 대상을 가지지 않는다고 가정했다. 빵(bread)이라는 소리는 예를 들어(“나는 약간의 빵을 원한다.”라고 구별되고 분류되는 문장에서) 소리의 경험적으로 독특한 특이성을 충분히 기록하지 않는다. 의미화는 하나 이상의 청각적 차이를 하나 이상의 청각적 차이와 완전히 다른 평면(차원)―거의, 적어도 처음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 바로 그 원래―에서 연합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시청각 평면(차원) 혹은 심리학적인 평면(차원)―예를 들어 우리는 이 평면(차원)을 의미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일 수 있다.) 문제는 두 개의 차이 혹은 두 개의 차이 시리즈의 병존 혹은 상관관계이다. 소쉬르는 단지 기호는 그것의 독특한 형태의 조합(set)으로 규정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나아가 그는 breaddread  사이에 발음상 차이가 있으므로 완전히 구별되는 질서의 또 다른 차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언어적인 문장에서 구조는, 어떤 진정한 구조주의자도 그렇게는 주장하지 않는 공식적인 규칙 시스템—다른 말로 통사론(syntax)—이 아니다. 오히려 구조는 두 개의 차이 시스템 간의 상호 규정에 의해 구축되는 시스템이다. 구조는 형식적인 시스템의 논리적인 감각에서, 노암 촘스키가 『통사 구조(Syntactic Structures)』(1957)에서 공개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물론 촘스키는 절대로 구조주의자가 아니었다. 언어학에서 인류학까지 그리고 이때 인류학에서 대개의 문화까지 움직이는 확장적이고 문제적인 운동이라고 우리가 구조주의를 의미한다면. “차이”와 “접평면”이라는 개념의 중심성은, 구조적 분석의 실제 실행에서 나타나는 어떤 것과도 거의 일치하지 않는 구조 개념을 갖는 자들에 의해 너무나 자주 과소평가되어왔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그들은 용어 규정을 위해 구조주의 저자들에서보다 어디서나 보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기호의 문제”를 둘러싸고 과학적 지식과 철학적 반성은 함께 해왔다. 게르만 신화에 관한 노트에서,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한 번 더 인용된 것이기도 한, 소쉬르는 다음과 같이 쓴다.

사물에 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는 이 분야에서 언어학 관련 분야에서만큼 사고의 모든 부조화(불일치)가 본성이나 동일성 혹은 동일성의 특성에 대한 부적절한 성찰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 우리는 말(words), 혹은 신화적 인물이나 알파벳의 편지, 즉 철학적 의미에서 기호의 다양한 형태인 것과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 개체를 다루게 된다.

따라서 언어적 사고가 빠지기 쉬운 교착상태를 지나가려면 철학적 해명이 필요하다. 즉 언어학이 제기한 문제들─철학적인 만큼 방법론적인 문제들─은 그 외 다수의 현상과 공통한다는 인식으로 나아가는 해명. 그러므로 기호학은 그 대상이 공통의 기능, 의미화의 기능을 공유한다는 가설에 따라 정의되지 않지만, 대신 저 대상들의 본성─길버트 시몬돈이 만들었고 최근 브뤼노 라투르에 의해 일반화된 저것들의 “존재 모드”─이 변이 없이는 반복될 수 없다는 계시 때문에 정의된다.

따라서 소쉬르의 노트는 계속된다.

그래픽 개인 그리고 그와 같은 의미에서 기호론적인 개인은 유기체적 개인과 달리 그것이 동일한 것으로 남을 수 있음을 증명할 수단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유로운 연합에 의해 그의 완전체가 지어지기 때문이다. 보시다시피 특정한 동일성을 유지할 능력 없음은 궁극적으로 시간의 영향─요컨대 기호에 관심이 있는 것들의 현저한 오류─으로 설명될 수 없고, 오히려 우리가 애지중지하고 유기체처럼 관찰하는 개체의 바로 그 구성 속에서 미리 폐기된다. 그때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두세 가지 관념의 덧없는 조합으로부터 나타나는 유령일 뿐이다. 그것은 정의의 모든 문제다. … 우리가 한 번에 한 편씩 보게 되는 것은, 신화가 이러한 개체들의 근본적인 본성 위에서 일반적으로 그 이유를 발동한다는 것이다.

소쉬르의 문제는 다양한 말하기 방식 이면에 있는 진정한 언어적 동일성을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에 있지 않았고, 오히려 어떻게 “비교문법의 인식론”을 얻을 것인가에 있었다. 비교문법이 하는 일이란, 라틴어, 고딕어, 산스크리트어처럼 겉보기에 달라 보이는 언어가 원래 “하나와 같은” 언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때, 우리가 하나의 언어를 말하려고 노력하는 속에서 또 다른 언어를 말하고 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불어는 라틴어에서 온 것이 아니고, 그것이 라틴어이다.” 라고 소쉬르는 제네바 대학의 취임회견에서 선언했다.

그의 발견은 언어적 기호의 반복이 언어적 기호의 변환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었다. 이 변환은, 공시적인 동일성은 그 자체로 보증되지 않는다는 것을 소쉬르가 소급해서 보여주게 한 것이다. 소쉬르의 편집자들이 『일반언어학 강의』에 부여한 형식은 소쉬르 사고의 가장 풍부한 측면 중 하나─언어적 가변성은 기호의 고유한 결정 방식에서 비롯된다는 관념─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언어적 가치 체계”라는 그의 개념은 변이로 운명지어진 것의 논리를 모델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소쉬르는 철학자들이 비교문법의 긍정적인 발견의 완전한 측정을 하도록 격려했다. “기호 이론에 관한 언어 연구의 중요한 대응 그리고 그것이 열어갈 완전히 새로운 지평은 … 저 이론에 기호의 완전히 새로운 측면을 부과할 것이다. 새로운 측면이란, 기호가 전달할 수 있는 어떤 것일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전달되고 수정될 수 있도록 운명지어진 어떤 것임을 이해할 때에만 기호를 진정으로 알기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철학적 일반화는 비교 방법론과 그것의 다른 영역으로의 확장 모두를 가능하게 한다. 민속연구, 신화, 전설, 관습 등등. 소쉬르 덕분에 우리는 본질적인 가변성을 “문화 과학”의 대상을 정의하는 속성으로서 간주하게 된다. 나아가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기호학을 “사회 안에서 기호의 삶을 연구하는 과학”, 달리 말해 기호가 “순환” 속에 있는 한 스스로 어떻게 변화하는지의 연구로서 정의하는 그의 정의와 병행한다.

구조적 방법이 될 것에 대한 소쉬르의 정교한 탐구는 따라서 한 쌍의 관련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한다. 첫 번째는 기호의 결정(해석이라기보다)에 관한 것이다. 말하게 된 무엇에 관한 결정. 두 번째는 말하게 된 무엇의 동일성이 장기적이든 단기적이든 어떻게 해서 기호의 변이를 일으키는 반복과 같은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원인과 이유를 넘어서: 행해진 것의 동일성

 

레비스트로스가 구조적 방식을 사회과학의 영역으로 확장하도록 동기부여 한 것은 이러한 이중의 문제와 의무의 문제 간의 관계이다. 소쉬르가 “우리의 전임자가 사람과 개를 말했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과 개를 말한다.”라고 한 것처럼, 레비스트로스는 “그는 사람들이 먼저 했기 때문에 한다.”라고 말한 것으로 파악했다. 만일 “왜?”라는 질문에 대한 이 응답이 레비스트로스에게 “완전히 진실하게” 보였다면, 그것은 행동의 원인이 그 정의만큼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쉬르에서와 마찬가지로 외국어를 배우는 문제는 문장을 파악하는 문제라기보다 그것을 지각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소쉬르에게 언어학의 핵심 문제가 의미의 문제가 아니라 기호과정(semiosis)의 문제라면, 레비스트로스에게 사회과학이 당면한 진짜 문제는 행동, 실천, 혹은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것의 경계를 표시하는 문제─『야생의 사고』에서 “의지적 실천(praxis)”(구식에 딱 어울리는)으로서 지정된 연속성 내에서─이다. 결국 “그게 우리 방식”은 유일한 명증한 답이다. 사실 무엇을 행하든─결혼하든, 시계를 보든, 철학 논문을 쓰든, 심지어 자살하든─, 그것은 문화적 동일성을 실현하는 것, 행해진 것을 하는 방식일 뿐인 어떤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군이라고 말하는 각각의 방식은 기호를 실현하는 한 방식이며, 만일 우리가 그 속의 잠재 가능성을 인식할 수 없다면 인지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행해진 무엇의 동일성은 따라서 기호의 동일성만큼 문제적이다. 게다가 그것은 뒤르켐의 자살론에 대한 재빠른 재해석이 포착하게 될, 사회과학에서의 근본적인 질문이다.

저 근본적인 텍스트의 서문에서 뒤르켐은 자살에 대해 객관적으로 작동하는 정의를 찾는다. 그가 저속한 사용법으로 간주한 “평범한” 의미를 무시하면서. 객관적인 정의는 뒤르켐이 옹호한 통계적 접근법의 보족 장치이다. 요점은 일반적인 사건의 발생으로서 개인의 자살은 통계적 수치를 위해 행위자 자체가 필연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질적인 다양성(각 자살이 수행되는 방식, 암시된 모든 동기, 행위자의 인격 등등)을 전적으로 무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심지어 나 자신의 자살은 유일한 자살인데도 여전히 또 다른 자살을 말하게 된다. 행위를 카테고리의 너무나 많은 인스턴스화로 줄이는 시선과 함께 수치에 다름 아닌 것으로 하나가 다른 하나와 구별된다. 뒤르켐은 이렇게 객관적 정의(자살=x의 공식)를 구축한다.

행위를 기록하기 쉽게 무언의 사실로서 접근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르켐의 수많은 독자가 곧 만나게 될 갖은 어려움을 제기한다. 결국, 뒤르켐 자신은 일부 의도적이고 주관적인 요소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고, 자살은 의식적인 동기부여로 정의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그 대신 죽음에 이르게 될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 저지르는 것으로 자살을 정의했다. 고귀한 군인의 경우든 불운한 사람의 경우든 기차 앞에 자신을 던지는 행위는 “사정을 잘 알고” 저지른 짓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주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리고 죽음의 정의는 자살의 정의만큼 저속하고 “평범하지” 않는가? 달리 말해 새로운 정의가 옛 정의만큼 모호해질 위험이 없는가? 둘째, 새로운 정의가 뒤르켐의 처리에서 통계적 데이터와 모순되는 것 같다. 민족학 방법론적 관점에서 잭 더글러스와 맥스웰 아트킨슨 혹은 하비 색과 같은 저자들은 통계가 개인이 자살을 저지른 횟수를 나타내지 않고 자살로 분류된 사망의 횟수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회학적 문제는 자살이라는 특정한 죽음의 분류를 담당하는 행위자를 알리는 제도적 혹은 인지적 절차이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문제시되는 것─즉 결정 가능한 계층에 속하거나 속하지 않는 것─의 본성을 가정하는 통계적 방법론을 부분적으로 사용했다. 따라서 만일 뒤르켐식 방법이 그 자체로 철학적 문제를 수반한다면, 그것은 일부 철학자들이 만족스러워했던 것처럼, 인간의 행위를 객관적인 원인으로 설명하는(이해하기보다) 척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뒤르켐이 저 행위들을 객관적으로 정의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마치 사건 그 자체가 총칭적 카테고리로 강등하기를 허용하는 관찰 가능한 표지판을 지겨워하는 것처럼.

그러나 이러한 자살의 정의와 함께 뒤르켐이 동질적인 “사회적 사태”를 식별한다고 주장한다거나 상대적으로 일정한 자살률이 독특한 사회적 원인을 나타낸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을 수 있다. 반대로 뒤르켐은 통계적 비율이 자살 사이의 질적 다양성을 감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 자신의 카테고리를 해체하려고 노력한다. 통계적 상관관계 연구에서 우리는 통계 시리즈의 의존성(공변량)이나 독립성에 초점을 두어야만 다양성을 밝힐 수 있다. “이제 하나의 결과가 우리의 조사에서 눈에 띄게 드러났습니다. 즉 … 다양한 자살 형태가 있습니다.” “에고이즘”, “이타주의”, “아노미” 유형. 뒤르켐의 야망은 개인이 자살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보다 자살을 분류하는 과학적 수단을 구축하는 것에 있었고, 인과관계에 의한 접근방식은 이 분류학상의 끝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실제로 분류가 요구하는 것은 “형태학상의” 분류보다 “병인적 분류”를 더 선호하는 “역전의 방법”이다. 달리 말해 각 행위의 내적인 성질 간의 질적인 차이에 근거해서 자살을 분류하는 것에 대한 거부 그리고 행위 그 자체(행위자가 직업, 연령대, 지역 등등에 속한다는 것)에 대한 외부적 환경 간의 통계적 상관관계에서만 유지되는 결정. 이 관점에서 상대적으로 임의적인 성격의 지표는 궁극적으로 균질적인 한에서 거의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목적은 자살률의 변이를 다른 매개변수와 관련하여 그려보는 것이고, 이 상관관계를 통해서 완전히 이질적인 통계적 경향과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 방법론은 우리가 “다양한 유형들을 동일화할 수 있는 능력 없이 유형의 다양성을 가정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존재와 수치를 증명할지라도 그 특수한 성격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 뒤르켐은 다른 한편으로 적어도 어느 정도는 자살의 양적인 분포를 통해 질적인 다양성을 회수할 목적이 있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자살(예를 들어 이타적 자살)이 그 자체로 다른 행위(이 경우에는 살인)의 변형임을 보여줄 수 있고, 일상적인 활동의 표면적인 다양성으로부터 맥락─즉, 사회적 영역을 만들어내는 개체 간의 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현실화하는 사회적 가상(“경향”)을 추출할 수 있다. 자살의 본질을 전제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객관적인” 정의는 한꺼번에 정리하고 변수로서 기능하도록 해서 인간의 현상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론적인 조건이다. 따라서 우리는 측정 불가에서 일반성으로, 양에서 질로, 수치에서 본질로, 원인에서 결과로, 설명에서 이해(comprehension)로 나아간다. 뒤르켐의 접근법이 제기한 문제는 그러므로 통계적 카테고리를 사회적 카테고리로 실체화하는 것보다 자살의 경험적 혹은 관찰 가능한 속성이 적어도 처음에는 객관적인 판단에 기초하여 그 외 수많은 행위와 더불어 행위를 식별할 수 있게 한다는 그의 추정을 포함한다.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에서 공식화된 구조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다. 이 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그 기원을 둔다. 레비스트로스가 『식사 예절의 기원(신화학 3)』에서 구조적 방법론과 역사적 방법론을 대조한 것은 그 결과이다.

어려움은 사실을 정의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어느 지점에서도 역사적 방법은 무엇이 민속학에서 사실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내러티브의 표면적 내용에 대한 관찰자의 주관적 이해가 그렇게 간주하는 어떤 사실적인 요소로서 받아들인다. 어떻게 둘 이상의 테마가 표면적으로 서로 다르며 서로와 변환적 관계에 있는지를 거의 또는 전혀 시도하지 않는다. 과학적 사실의 지위는 각각의 특정 테마 혹은 각각에 기인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스키마 자체는 잠복해 있다.

다른 한편 구조적 방법은 유사성에 대한 내러티브 간의 동일성에도 근거하지 않고 그 차이에도 근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저 유사성은 민족지학자에게만 명백하므로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수행한 작업은 매우 다르다. 그것은 비슷하지 않거나 유사성이 처음에는 우연으로 보이는 신화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구조를 표시하고 같은 변환 그룹에 속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공통된 형태(features)를 나열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증명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들 때문에 처음에는 유사점이 전혀 보이지 않는 듯한 신화들도 같은 원리에 따라 진행되고 단일한 작동 그룹에 기원한다.

그래서 한 지역에서 고슴도치로 보이는 것은 기호학적으로 다른 지역에서 논병아리로 나타나는 것일 수 있다. 사회과학 혹은 문화 과학에서 동일성은 구조적이어야 한다. 이것은 또한 비교 방법론을 통해서만 식별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관점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앞서 언급한 소쉬르의 원고를 인용하면서 소쉬르의 자료에서 기호의 동일성이 철학적 문제임을 주장한다. 이어서 만일 인류학이 더욱 일반적인 기호학에 참여한다면(“사회 인류학이 흥미로워할 모든 현상은 실제로 기호로서 특성화할 수 있다”라고 한다면), 그 참여는 언어적 현상이 취하는 부류의 소통적 기능이 있는 저 현상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환원 불가능한 동일한 철학적이고 방법론적인 문제들을 언어적 현상이 하듯이 저 현상들이 제기한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확실히 인류학적 현상과 마찬가지로 언어적 현상은 변이로서만 결정될 수 있고 개별화될 수 있고 독자화될 수 있다. 공유되는 관찰 가능한 속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데꽁브가 하듯이 소위 의미화(signification)의 구조주의적 개념을 비판하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구조주의의 실제 지분은 의미의 질문을 상대화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며, “문화 과학”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주요한 방법론적 문제─자신의 데이터를 어떻게 규정하는 가의 문제─에 직면하기 때문에 특정한 단위를 가지고 있다고 간주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 여전히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왜 방법론이 구조주의를 통해 이 문제가 “기호”로서 그 고유의 주제를 정의하는 구조주의자적 정의와 함께 하는 문제인지를 풀어가려 하는가이다. 우리는 더욱 상세히 언어학에서 인류학으로의 구조적 방법의 확장이 왜 레비스트로스의 유명한 명언─우리는 “상징주의의 사회 이론”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상징적 기원”을 찾아야 한다─을 통과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실천적 삶과 기호적 삶

 

구조적 방법의 핵심 문제는 정의와 관련될, 어떤 주어진 행동의 특징의 본성을 우리가 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조적 방법은 임기가 거의 끝나가는 뒤르켐의 방법과 모순된다. 뒤르켐은 자살에 대한 예비적이고 추상적인 정의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양적 시리즈 간의 관계를 조사하여 질적인 다양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반면 레비스트로스는 특정 신화에서 시작해서 다른 버전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질적 변이들이 상호 동시에 발생하는 방식을 분석한다. 레비스트로스의 관심은 내러티브 “모티프”의 변환, “홀로 발생하지 않고 언제나 다른 변화와 함께 연관되는” 변화에 있다. 이러한 상호관계된 변환은 “호환성 및 비호환성의 시스템”을 조명하는데, 그 시스템 덕분에 우리는 각 모티프를 실질적인 질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실현하는 대립들의 분포에 의해 정의할 수 있다. 형태 A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중요하지 않고, 형태 A가 긍정적일 때 형태 B가 부정적임을, 그 반대로 형태 A가 부정적일 때 형태 B가 긍정적임을 보여줄 수 있다. 소쉬르의 경우 특유의 음운 형태가 특유의 의미론적인(semantic) 형태와 연합되는 한에서만 관련성이 있다고 간주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레비스트로스의 경우 특유의 형태 간의 상관관계는 행위자들 자체와 관련된 형태를 추론할 수 있게 한다. 이어서 각 버전은 변환 시스템 내의 상대적인 위치에 따라 재정의될 수 있다. 그와 관련하여 저 항들은 치환될 수 있다. 또는 더 정확하게는 변환 시스템을 변환 시스템의 시스템 내에서만 정의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레비스트로스는 단계별로 구조 분석을 확장하고 개발하여 점점 더 많은 아메리카의 신화를 포괄한다. 그 결과 신화학의 첫 권을 열어가는 보로로 신화를 이해하게 된다.

이 채석장 탐사에서 특정 내용(이 신화적 내러티브 혹은 친족 공식)은 점진적으로 대수값으로 감소하고, 구조 내 위치에 따라 공식적인 항으로 규정된다. 변수(자살=x)의 본성을 가정할 필요 없고, 그 속에서 다양한 내용이 합산된다. 개별의 내용을 서로의 변종으로서 조명하는 저 변이 간의 상관관계를 연구함으로써, 변수가 단계마다 질적 변이와 함께 점진적으로 포착된다. 우리는 불확실한 것에서 다양한 것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것에서 구조적인 것으로 움직인다..

따라서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적 방법이 “갈릴리적(Galilean)”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목표가 변이의 법칙을 밝혀내는 것이고,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관점과 모순되며 주로 귀납적 상관관계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구조주의적 방법이 그 안에 위치하는 “질의 논리”는 형식주의적 방법만큼 통계적 방법과 구별된다.

형식주의와는 반대로 구조주의는 추상적인 것에 대항해서 구체적인 것을 놓기를 거부하고 후자에 특권적 가치를 인식하기를 거부한다. 형식(form)은 그 자체보다 물질적인 다른 것에 대립함으로써 규정된다. 그러나 구조는 고유의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내용 그 자체이며, 내용은 실재의 속성으로 인식되는 논리적인 조직 속에서 파악된다.

레비스트로스가 구조라고 부르는 것은 추상적인 변수(달리 말해 구조를 실체화할 수 있는 내용에 무관심한 변수)로 감소하는 항 간의 관계 도식이 아니다. 그보다 구조는 “변환 그룹”이며, 이 속에서 각각의 내용은 변종으로 결정된다. 따라서 만일 내용이 “구조화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것들이 마치 외부에서처럼 추상적인 형식을 부과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내용이 상호관계에서만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조는 적용에서 고립될 수 있는 규칙 집합이 아니다. 각 요소가 변종으로 등장하는 가상의 장이다. 그리하여 각 요소는 상대적인 가능성을 실현한다.

이 측면에서 구조 분석(신화적 내러티브, 의례적 행위, 복식 관습, 심지어 기술까지)의 실천적 단위는 기호로 간주할 수 있다. 여기서 기호는 찰스 퍼스가 정의하고 레비스트로스가 반복한 것에 따른 것이다. “무언가를 누군가 대신에 대체하는 것” ─혹은 다른 말로 시스템적으로 상호 관계된 몇몇 변환을 통해 또 다른 기호에 해당하는 것. 기호의 필수적인 속성은 잠재적으로 다른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돌도끼와 같은 도구가 기호라면, 레비스트로스가 콜라주드프랑스의 취임강연에서 말했듯이, 그것은 “주어진 맥락에서 사용법을 이해할 능력이 있는 관찰자에게는 그것이 다른 사회에서 같은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다른 장치를 대표하는” 한 그렇다.

행위는 우리가 그것에 “의미화”를 담는 선험적 기능을 부여했기 때문에 “상징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대체 가능한 행동에 의해서만 정의되기 때문에 “상징적인”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내가 지적했듯이 그것은 비교 방법론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가 인류학을 인간 정신(human mind)의 보편 법칙의 이론으로서 정의했을 때─그리고 저 법칙들을 이번에는 “상징적인 기능”과 동일시했을 때─, 그의 의도는 “정신적 제약(mental constraints)”을 조망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신적 제약이란 예를 들어, 주체들이 주어왔던 선물을 호혜적으로 주고받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주체가 “무형의” 단위나 동일성(소쉬르의 의미에서)을 구축하도록 하는 것─엄격하게 차별화된 매개변수와 일치하는 관찰 불가능한 단위에 예민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자 했다. 상징적 사고는 무엇보다 실질적인 불변에 해당하지 않는 표면적인 개체를 가져오게 함으로써 감각적 현실을 조직하는 방법의 하나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매개변수(높음/낮음, 날것/익힌 것 등등)의 값을 반대로 바꾸는 것은 동일한 기호를 생성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호 개념은 실천 이론의 구축을 어떻게 열어갈 수 있을까? 행동(예를 들어 신화의 서사화)은 순수하게 다른 개체의 실현 혹은 예시화인 한에서 행위자 자체에 의해서만 그 특이성이 파악될 수 있다. … 행위자가 삶의 가능성의 장으로서 인식되는 상징 시스템에 거한다면. (이러한 예로서 상징 시스템은 내러티브의 주어진 버전이 결정적인 내에서 “가상의 신화학적 시스템”일 수 있다.) 다른 추상적인 가치는 상관관계로서 어느 것도 바꾸지 않고 내러티브를 구조화하는 대립들로 지정될 수도 있다. 행동은 오직 관습의 가상 시스템으로 이해되는 실천(practice)의 맥락 내에서만 자리할 수 있다. 따라서 행하는 것은 항상 일반적으로 행해진 것을 하는 것이다. 즉 공통의 실천을 실현하는 것. 실천의 단위를 결정하는 다른 방법은 없다.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닌. 관습은 몇몇 개인들과 설명될 수 있는 사건(토큰)에 의해 반복되는 관찰 가능한 행동의 절차(경험적 유형)가 아니다. 그보다 관습은 순수하게 다른 가상성이다. 이 가상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실현되고 다른 관습과 식별될 때에만 정의될 수 있다. 그래서 만일 레비스트로스가 그러한 것처럼 우리가 행해온 것을 계속해서 행한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규범에 순종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행동이 항상 퍼포먼스이기 때문이다.─촘스키식 의미에서 경쟁을 정의하는 규칙의 적용에서가 아니라 실현될 수 있는 실현의 음악적 의미에서 그렇다. 심지어 자살도 퍼포먼스이다(그것은 공통의 실천이다). 그리고 자살의 인류학이 당면한 문제는 왜 행위자가 왜 행위(수많은 검토 없이 우리가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 행위)를 연행하는가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가 아니다. 문제는 반대로 어떻게─주어진 맥락과 관련된 특징을 조명하게 하는 상관적인 변화를 기반으로─ 행위를 규정하는 실천의 시스템을 재구축할 것인가이다.

우리가 실천 이론이 필요하고 그것의 습득이 방법론의 혁신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대로 “저들은 저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무지함은 그들을 용서하거나 심지어 그들을 원망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구조적 인류학을 실천할 이유이다. 그 방법론을 통해 우리는 다음을 발견한다. 뒤르켐의 동시대성에 있어서 죽을 운명의 군인의 행위는 아이를 낳을 운명의 여성의 행위와 동일시되는 반면, 우리에게 있어서 그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희망 없는 사람의 행위는 타자의 삶이 그의 손안에 있음을 잊는 운전자의 행위와 동일시된다. 이 사례들은 그것들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 아니라 대립하기 때문에 동일시될 수 있다. 게다가 동일시되게 보이는 항들은 구조적 관점에서 다르게 의미화되어서 자신을 스스로 드러낼 수도 있다. 중국에서 자살 행위는 프랑스에서의 자살과 같은 본성을 갖지 않는다. 삶과 죽음이 대립하는 한에서, 여성성과 남성성(과 등등)은 같은 방식으로 분배되지 않는다. 인류학적 탐구는 통계적 변이만큼 영속적인 특징도 설명할 것이다. 뒤르켐과 그 뒤를 잇는 수많은 다른 사회학자들이 결국 받아들이도록 강제한 심리적인 설명에 의존하지 않고.

그러므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에서 행동의 규칙은 소위 적용과 구별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드러낸 모순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이 통찰력에서 시작해서 그는 규칙에 따르는 것은 실천(관행)에 얽매일 뿐이고 실천(관행)은 필연적으로 집합적이라고 결론짓는다. 비트겐슈타인의 경향은 주어진 실천에 대한 익숙함의 관점에서 관습을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의 실천에 대한 환기는 잘 짜인 철학적 문제에 대한 응답이 아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보다 실천에 대한 그의 환기는 위조된(bogus) 철학적 문제(언어(language)의 일반적 정의를 공식화하는 문제)에 철학적 노출에 있다. 다른 한편 레비스트로스가 구조적 방법을 모든 문화 데이터로의 확장이 증명하는 것은 첫째, 실천이 물질적인 것의 일관된 활용도 아니고 행동의 반복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둘째, 우리 자신의 실천을 이론화하는 어떤 시도도 동일성, 통일성, 가상성 등등의 철학적 개념을 재구축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천을 정의하는 것은 그것을 연행하는 행위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며(우리가 부르디외에 합의하여 행위자 또한 서로와의 관계에서 구조적으로 정의된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실천 이론이 다루기 힘든 것은 그것에 적절한 존재 방식에 싸 매여 있기 때문이다. 관습은 그것의 동일성이 총칭적 개념으로 환원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변종과 공존하는 것을 협상할 수 있으므로 필수적으로 집합적이다..

구조적 접근방식의 또 다른 이점은 우리가 관습의 동일성을, 그것을 만들어내는 주체의 표상에 고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내면성이 없는 그것의 동일성은 주체 밖에서 다른 가능한 관습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들이 가치로 갈아타기에 충분하다. 정의로 말한다면 사용법을 변화로. 이 단순하지만 매우 복잡한 직관은, 우리가 그 안에서 알아채는 경향이 있는 유사성에 의존함으로써 실천의 본성을 추정할 수 없음에 따라, 모든 구조주의적 방법론의 핵심이다. 푸코가 『훈육과 처벌』에서 논쟁하게 한 것은 이 직관이 아니었다. 학교, 군대, 병원을 포괄하는 “훈육” 집합과 정렬되자마자 징벌 절차가 본성으로 바뀌게 되는. 우리가 규칙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우리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것은 같은 것이다. 상징적 실천은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서 놀고 있는 크로켓 게임은 핑크 플라밍고가 망치로, 고슴도치가 공으로 노는 것과 같은 어떤 유사성을 담고 있다. 그녀가 그들을 공격하려고 할 때 그들은 예기치 않게 고개를 들었고, 그러는 동안 다른 플레이어는 전진할 순간을 포착한다.

구조주의는 피할 수 없는 이론적으로 사변적인 질문을 제기해왔다. 행해온 것의 본질은 무엇인가? 만일 그렇게 시도하는 속에서 우리가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을 행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 질문은 다른 두 가지의 문제들을 결합했다. 어떻게 실천 이론을 구축할 것인가와 어떻게 관습의 존재론과 그 변이의 논리를 구축할 것인가. 누구는 이때 구조적 방법의 전개가 이미 푸코, 들뢰즈, 데리다가 논쟁한 역행이원론(renversement du platinism)과 함께 하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레비스트로스의 강점은 철학을 경유할 필요성을 인식해왔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우리는 철학을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그는 썼다.) 그와 동시에 그는 철학의 텔로스를 만들기를 거부했다. (“철학적 성찰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그렇다면 구조주의의 철학은 모든 측면에서 실천적인 철학이다.

 

 

Patrice Maniglier, “Signs and Customs: Lévi-strauss, Practical Philosopher,” trans. Matthew H. Evans, Common Knowledge 22(3), pp. 415-430.

 

 

 

 

 
  1. 앙리 베르그송(박종원 역), 1장 도덕적 의무」『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아카넷, 2015. [본문으로]
  2. 앙리 베르그송, 앞의 책. [본문으로]
  3. 다음을 참조. Bruno Karsenti, L’homme total: Sociologie, anthropologie, et philosophie chez Marcel Mauss,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97. [본문으로]
  4. Vincent Descombes, Objects of All Sorts: A Philosophical Grammar, trans. Jeremy Harding and Lorna Scott-Fox,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6, p.205. [본문으로]
  5. Claude Lévi-Strauss, Structural Anthropology, vol. 1, trans. Claire Jacobson and Brooke Grundfest Schoepf, New York: Basic Books, 1963, p.70. [본문으로]
  6. 엘레아 학파는 소크라테스 이전에 활동한 고대 그리스의 주요 학파이다. B.C. 5세기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식민지 엘레아에서 번성한 이 학파의 특징은 극단적 일원론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는 유한하고 무시간적이라고 주장했다.-옮긴이주 [본문으로]
  7. 다음을 참조. Patrice Maniglier, La vie énigmatique des signes: Saussure et la naissance du structuralisme, Paris: Scheer, 2006. [본문으로]
  8. 다음을 참조. Simon Bouquet, Introduction à la lecture de Saussure, Paris: Payot and Rivages, 1997; Johannes Fehr, Saussure entre linguistique et sémiologie,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2000; Lucien Scubla, Lire Lévi-Strauss: Le déploiement d’une intuition, Paris: Odile Jacob, 1998; and Patrick Sériot, Structure and the Whole: East, West, and Non- Darwinian Biology in the Origins of Structural Linguistics, trans. Amy Jacobs-Colas, Boston: Walter de Gruyter, 2014. [본문으로]
  9. Ferdinand de Saussure, Course in General Linguistics, trans. Roy Harris (1916; repr., London: Duckworth, 1983), pp. 12829. [본문으로]
  10. Roman Jakobson, Six leçons sur le son et sur le sens, Paris: Minuit, 197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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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탱 베르케는 1942년 모로코 출생의 프랑스인으로 일본사상 및 일본문화 연구자이다. 프랑스어와 일본어로 저술 활동을 전개해왔으며, 다음의 글은 일본어로 쓰였다. 다음의 글을 데스콜라의 「자연은 누구의 것인가?」(https://sarantoya12.tistory.com/153)와 같이 읽으면 동양(일본)과 서양(유럽)의 자연관에서의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과 주체성

 

오귀스탱 베르크(Augustin Berque)

 

1. ‘누구’란 어떤 것인가?

 

얼핏 보면 인류학자 데스콜라의 ‘자연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물음은 매우 인류학적이다. 이 질문에서 ‘누구’란 인류에 속하는 존재라는 것은 분명하다. ‘누구’라고 말하면 반드시 인물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 나오는 유명한 표현 ‘자연의 주인과 소유자인 듯이’에서 직접적으로 유래하는 사고방식일 것이라고 바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 자연을 (가진) 주인은 인간 주체 외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인상은 일본어의 세계 특유의 지적환경에서 비롯한 것일 수 있다. 일본어에서는 확실히 ‘누구’라고 말하면 반드시 인간을 뜻하며, 한자 ‘誰’의 구성요소 또한 인간존재를 전제한다. 이 글자의 의부(意符)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언어의 ‘言’이고 음부(音符)가 ‘隹’(새 추)이다. 이 글자는 “인간 특유의 옛 새점 풍속에서 누구라도 불특정한 자를 추측할 때 새점을 쳤다는 것을 보여준다”(白川靜, 『字通』, 平凡社, 1996). 이렇듯 ‘누구’는 인간존재의 대명사이다. 이에 반해 프랑스어 원문 제목 ‘À qui appartient la nature?’에 나오는 대명사 ‘qui’는 인간에 한정되지 않으며 생물 일반과 무생물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자연은 qui의 것인가?’라는 물음의 대답에서 자연을 ‘가지는’ 주인은 자연 자신도 포함되고 인간은 물론이고 삼라만상 가운데 어떤 것이라도 될 수 있다. 제목의 뜻을 이렇게 이해하고 데스콜라의 논문 내용을 읽기 시작하면 그가 확실히 이러한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논문의 결론에서 제안하는 관계보편주의(universalisme relatif)[각주:1]는 삼라만상과 인간의 관계성을 기본조건으로 한다. 이것은 분명 와쓰지 데쓰로(和辻哲郎)가 『풍토(風土)』에 썼듯이, ‘인간존재의 구조계기로서의 풍토성’이 인간의 주체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과 상통한다. 이 의미에서 데스콜라의 견해는 와쓰지의 그것과 비슷하다. 인류학자 데스콜라는 철학자 와쓰지와 달리 풍토성이라는 존재론적인 기본개념을 제시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데스콜라의 ‘자연의 인류학’은 와쓰지의 풍토론과 유사한 존재론을 기반으로 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사실 나 또한 일찍이 『지구와 존재의 철학』(1996)에서 시도한 바, 데스콜라도 환경윤리의 가능성을 인간존재의 주체성과 자연과의 관계성(즉 풍토성)을 기반으로 제시하려 한 것 같다.

 

2. 이원론의 재검토

 

이 장에서는 그러나 풍토성에 관한 인간존재의 주체성보다도 일반적인 의미에서 인간 풍토에 한정되지 않는 주체성, 즉 자연 그 자체의 주체성까지 고려하고자 한다. 이 문제 제기는 30년 전부터 나의 연구의 통저음(通低音)이었고, 그것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표현한 것은 아마도 1984년 여름에 쓴 (후에 『풍토의 일본─자연과 문화의 통태(通態)』(1992)라는 제목으로 일본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책의 결론을 ‘자연이라는 더없는 주체(La nature, ce sujet ultime)’로 내린 때였을 것이다.

나는 일본의 풍토성을 고찰한 저 책을 쓰면서 처음으로 자연과 인간존재의 관계에서 주체성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곰곰이 생각할 수 있었다. 실제로 당시 나는 오랜 고민 끝에 『풍토』의 첫 줄에서 ‘인간존재의 구조계기로서’ 정의된 와쓰지 데쓰로의 기본개념인 풍토성을 médiance라는 신조어로 만들어내었고 나의 풍토론의 또 하나의 기본개념인 trajection의 번역어를 새롭게 만들었다. 일본어본에서 그것을 ‘통태(通態)’로 번역했다. 간단히 말해 통태는 시간적인 과정이며 공간적인 구조계기인 풍토성을 발생시킨다. 이에 관해서는 후에 조금 더 상세히 서술하겠다.

지금까지의 문제군을 생각하기 시작한 계기는 분명 일본 풍토와의 만남이었고, 말할 것도 없이 문제 그 자체는 보편적이다. 일본 풍토의 특수성을 논하는 가운데 그 보편성을 발견하고 심화했다. 서양의 고전적 근대 범례의 이원론을 재검토하면서 그 두 개의 신성 축, 하나는 객체적인 동기로서의 nature이고, 다른 하나는 초월적인 cogito(근대 주체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자기 창조)인 주객(主客)의 절대적인 구별의 추상성에 불만을 자각하고 그를 대신한 풍토론의 입장에서 자연과 주체성의 관계 재구축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이 재구축은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자연’의 재검토이다. 자연은 주체의 자연환경이면서 그와 동시에 주체의 주체성 그 자체 속에서 활동하는 것이므로, 자연과 주체성은 나뉘지 않는다. 또 하나는 ‘주체’의 재검토이다. 주체는 자기동일성을 가지면서 그와 동시에 풍토 속에서 ‘자기발견’(와쓰지의 ‘자기발견성’이나 하이데거의 현존재(Dasin)에서 습득하는 사실)한다. 그러한 주체성의 장은 그 신체의 국소성(topicité)에 결코 한계지을 수 없다. 풍토(風土)에도 있는 바람(風)이 어느 정도 발산하고 있을 것이다. 나아가 자연도 살아가는 한, 기계와 다른 한 부류이며 어느 정도의 주체성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3. “Sujet”의 다양성과 위태로움

 

그리스어 hupokeimenon(밑에 깔려있는 것, 기저라는 뜻)의 라틴어 번역인 subjectum에서 유래하는 sujet, Subjeckt, subject 등등의 용어는 매우 다의적이고 모순적이기 때문에, 메이지 시대에 그것을 일본어로 번역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현대일본어에서 단 하나의 단어인 subject에 해당하는 용어는 여러 개이고, 그것들은 겉보기에 서로 관계없는 것 같고 또 경우에 따라 상반돼 보인다. 주어, 주체, 주관, 주제, 문제, 이유, 대상, 환자, 신하 등은 모두 저 하나의 단어에 해당한다. 여기서 가장 의아한 것은 논리학자에게 sujet(주어)가 물리학자에게는 object(대상 또는 객체)라는 것이다. 양쪽 모두에게 주제(subject)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다. 서양과의 접촉 이전 일본어에는 그에 상응하는 용어가 없었기 때문에 언어학자가 밝혔듯이(예를 들어 『근대 일본어의 사상』에서 “‘주어(主語)’는 번역 과정에서 만들어졌다.”라고 야나부 아키라(柳父章)가 썼듯이), 지금은 빈번하게 사용되는 주어, 주체, 주제라는 말들의 개념은 결국은 메이지 시대의 박래품(舶來品)이고 최근까지 그에 반발하여 「일본어는 주어가 필요 없다」라는 논문이 나올 정도로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확실히 서구의 주요 언어에서 발생하여 서양사상, 서양문명의 기본조건이 된 문법적 삼항구조 S-V-O(주어-동사-목적어)와 논리적 이항구조 S-P(주어-술어)가 일본어와는 맞지 않는다. 예를 들어 프랑스어에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구조임을 말해주는 저 유명한 문구인 ‘코끼리는 코가 길다’에서와 같이 두 개의 주어를 가진 문장을 일본어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여기서 ‘은/는’과 ‘이/가’가 보여주는 바, 명사 ‘코끼리’(주제)와 ‘코’(주어)의 문법적인 기능은 실제로 다르지만 그러한 구조는 서구의 주요 언어에서 문법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중국어의 구조 또한 일본어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코끼리는 코가 길다’와 같은 문장, 예를 들어 ‘那個人嘴大大的’(저 사람은 입이 크다)와 같은 예는 흔하다. 중국어에는 ‘은/는’과 ‘이/가’가 없으므로 중국의 문법학자는 그러한 구조를 간과하여 ‘主謂謂語句’(주어-술어 문장)’이라고 부른다. 주어는 술어에, 술어는 주어에 되먹임되는 구조인데 서구에서는 언어 문법뿐만 아니라 논리 그 자체가 전혀 인식되지 않는다. 일본어에서는 ‘은/는’과 ‘이/가’를 교환을 하려고 들면 간단하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베르케이다.’를 ‘내가 베르케이다.’로 바꿔도 구조는 바뀌지 않지만, 실제로는 주어와 술어의 관계가 역전하여 의미가 ‘베르케는 나다.’로 되기 때문에 S(주어)와 P(술어)에서 P가 S로 역전한다.

지금의 논의는 언어학자나 논리학자의 전문가들의 정연한 논리로 벌써 이야기되었을 것 같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현대문명의 원천, 즉 anthropocene(인류세)의 주요 요소인 서양사상의 역사에서 논리상의 주어(sujet)와 술어(prédicat)의 구조계기는 존재론상의 본질(substance)과 우유(偶有, accident)의 구조계기에 상응하는 것이므로 저와 같은 ‘역전’은 존재와 자기동일성에 관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을뿐더러 우리가 지금 당면한 인류세의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러한 구조계기를 재검토하는 것이 시급한 의무이기도 하다.

 

4. ‘자연’은 nature였던가?

 

현대일본어에서 ‘자연’이라는 용어는 원칙적으로 (적어도 과학에서) 서양의 고전적 근대 범례에 따라 주체와 상반된 객체화・기계화된 대상 nature에 대응하는데, 그것 역시 메이지의 번역 사상의 결과에 불과하며, ‘자연’이란 본래 도교의 저 유명한 표현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老子』 제25장)가 말해주듯이 인간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있는 것으로서, 바꿔 말하면 도가 그 자신과 똑같아지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자연’은 현대 문법에서 말하는 명사라기보다 오히려 부사에 가까우므로 전통적인 훈독 ‘스스로 있는’이 그것을 잘 번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스스로 있는’은 뜻밖에도 성경 출애굽기 3장 14절에 야훼가 호렙산 정상에서 모세에게 응답한 말씀(“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을 상기시키는데, 실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일신교의 야훼가 삼라만상을 절대적으로 초월하는 것에 반해 도교의 ‘스스로 있는’은 삼라만상에 내재하며 삼라만상의 자연, 자연의 더없는 주체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대 주체의 자기창립을 표현한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생각=존재라는 동일화를 설정하는데, 결국 호렙산 정상에서 발신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에 상응한다. 코기토는 우리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이므로 나는 그것을 ‘호렙산의 원리’라고 부르겠다. 왜냐하면, ‘스스로 있는 자’에서 ‘자’(근대 주체)의 주체성은 객체화된 삼라만상(근대 자연)의 기계성을 절대적으로 초월하기 때문이다. 『방법서설』에 쓰인 것처럼 “나는 하나의 실체이고, 그 본질 혹은 본성은 오직 생각하는 것이며, 존재하기 위해 하등의 장소도 필요 없고, 어떠한 물질적 사물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원론, 기계론, 공리주의, 유명론 등등의 그 무엇으로 불리더라도, 근대과학 곧 현대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이 호렙산의 원리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원리는 근거가 신비적이며, 합리적인 추론의 결과가 아니다. 주체성을 절대화하고 그것을 인간 주체의 독점적인 속성으로 규정하는 것이 합리적, 과학적이라고 증명된 바는 없다. 오히려 과학이 하루가 멀다고 밝힌 것은 인간 이외의 생물 또한 어떤 부류의 어느 정도의 주체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 물리학에서도 하이젠베르크가 분명히 표명했듯이 고전 근대과학과 달리 현대과학은 자연을 단순히 대상으로 삼지 않으며 자연과의 관계 자체를 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태도는 원리적으로 풍토론과 데스콜라의 관계보편주의와 호응한다.

그런데도 십계명에 정해진 법처럼 과학에 의한 자연의 기계화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그 적절한 예로서 학계는 이마니시 킨지(今西錦司, 1902~1992, 일본의 인류학자이자 생태학자)의 ‘분화이론(棲み分け理論)’[각주:2]을 언급한다.

 

5. 자연의 주체성 외폐(外閉)

 

몇 년 전 『진화론은 왜 철학의 문제가 되는가』(2010)라는 책을 우연히 발견하고 바로 입수한 적이 있다. 지금 이 책을 웹에서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소개 문구를 볼 수 있다. “생물학의 철학에서는 기존의 인문계와 철학계의 틀을 넘어서서 논의를 확장하고 있다. 이 책은 일본에서 생물학의 철학의 주요 연구자들이 진화론을 축으로 과학철학, 시스템 이론, 수학, 심리학, 역사학, 윤리학 등 다양한 분야와의 접점 속에서 다양한 과제를 전개한다. 원리적인 문제에서 개별적인 문제로 독자를 이끈다.” 이 과제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봐도 색인을 뒤져봐도 20세기 후반에 대대적으로 논의된 이마니시 진화론은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우선 철학 일반의 관점에서 이상하다. 왜냐하면, 이마니시 진화론이 틀렸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틀렸는지를 판단해야 하고 그것은 철학적, 인식론적, 존재론적, 방법론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생물학의 철학의 주요 연구자들’은 이마니시 진화론을 문제 제기에서부터 제외하고 폐쇄했다. 의식의 ‘밖(外)’으로 배제하고 의식의 문을 ‘닫은(閉)’ 것이다. 이마니시의 ‘분화이론’과 똑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분화이론’이 전적으로 무시될 만큼 이마니시 진화론이 어떤 규정을 어긴 것일까? 그것은 이마니시가 만년에 저술한 『주체성의 진화론』(1980)의 제목에서도 바로 알 수 있다. 즉 그는 기계일 수밖에 없는 자연에 주체성을 부여하고자 했고, 고전적 근대 범례의 두 개의 신성 축을 동시에 쓰러뜨리고자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생물학의 철학』의 ‘마을’로부터 외폐되고 말았다.

다만 저 ‘마을’은 개구리의 우물에 불과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과학철학의 입장과 다르다. 예를 들어 『과학』 2003년 12월호에는 「자연과학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가와이 하야오(河合隼雄, 1928~2007, 일본의 임상심리학자)가 이마니시 자연관의 기본적인 특징을 고찰했다. 이마니시가 연구하려 한 것은 근대적 자연 대신 ‘스스로 있는’ 자연이었다고 판단한다. “이마니시는 자연 현상에 대해 말하고 있다. 존재의 ‘스스로 있는’ 변화의 힘에서 진화의 모습을 보이고자 한다.” 가와이 하야오는 이에 머물지 않고 현대 자연과학이 우리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게 된, 지구 규모의 환경위기를 일으킨 제도의 본질적인 한 측면을 탐구한 이마니시의 자연학이라는 의미 그대로의 ‘자연학’의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동감한다. 기계로서의 자연으로부터 우리의 주체적 존재를 추상해온 나머지 서양의 고전적 근대 범례의 과학은 결국은 이 지구상에서 인간존재를 본격적으로 제거하고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드는 위험성을 띤 제도를 점차 구축해왔다. 이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초극(超克)해야 한다. 정말로 이마니시 자연학은 그러한 초극의 길을 걸었을까?

 

6. 아기는 정말로 ‘설 수 있어서 선’ 것일까?

 

알다시피 정통 진화론은 개체(지금은 유전자)를 단위로 하여 통계학적 합계(population)를 추정하고 자연도태에 의한 그 비율의 변화를 통해 생물이 진화해왔다고 생각한다. 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는 어떤 주체성도 활동하지 않으며 우연(돌연변이)과 필연(통계법)에 지배된 단지 기계적인 과정만 있을 뿐이다. 이마니시는 그러한 기계성을 부정하고 생물에 주체성을 인정했으며, 그것을 몇 가지 수준(개체, 종, 전체)에서 고찰했다. 그것은 자연의 무주체성이라는 서양의 고전적 근대 범례의 규정을 위반한 것일뿐더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립까지 소급 가능한 중세의 보편논쟁(querelle des universaaux)과 에밀 뒤르켐과 허버트 스펜서의 대립을 거쳐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유명한’ 발언 “사회와 같은 것은 없다(There is no such things as society).”에 이르기까지 모든 실재론(부류의 실재를 인정하는 파)과 유명론(개개의 실재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파)의 대립에 저도 모르게 말려든다. 이마니시의 기본 개념인 ‘종(種) 사회’와 ‘생물 전체 사회’는 근현대에 이르러 (특히 앵글로색슨족 문화권에서) 우세를 점한 근대과학의 지배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인데, 또 다른 신성한 규정을 신성 모독한 것이다. 이러한 이마니시를 벌하려 한 것인지, 그의 잘못을 인정하게 하고 회개하게 하려는 듯 영국에서 대처 급의 유명론자 비버리 할스테드(Beverly Holstead, 1993~1991, 영국의 고생물학자, 동물학자)가 도쿄를 방문하여 몇 주간의 짧은 체류 기간 후에 이마니시 진화론을 뒤집은 책까지 출간한다(『이미니시 진화론의 여행』, 1988). 원문 Kinji Imanishi: the view from the mountain top은 발간하지 않았고 다만 그 내용을 요약하여 논문으로 발표했다(Nature 317 : 587-589, 17 oct, 1985.).

사반세기가 지난 후 저명한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봐알(Frans de Waal)이 할스테드의 뻔뻔한 태도는 대단히 식민지적이었다고 강하게 비판한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드 봐알도 영장류학에서 거둔 이마니시의 거대한 성취와 패러다임 전환을 칭찬하면서도 이마니시 진화론의 중심가설인 (개체의 자연도태를 둘러싼) 종 전체의 동시 변화에 대해서는 난해한 사고라고 소극적으로 평가했다. 실은 이마니시 자신이 그 가설을 적극적으로 증명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만년의 『주체성의 진화론』에서 그는 결국 그러한 공동변화를 합리적으로 증명하기를 포기하고 아기가 “설 수 있어서 선” 것과 마찬가지로 진화 또한 “변할 수 있어서 변한” 것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의 진화론이 ‘할 수 있어서’가 멈춰선 것은 진화를 기계로서가 아니라 ‘과정’으로서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이마니시 진화론이 학회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한 것은 아마도 ‘과정’이 너무나 비과학적이고 신비적인 목적론과 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마니시 진화론의 ‘과정’은 일종의 목적론과 유사할지라도 그것을 그의 자연학 전체에서 주체의 문제 제기 속에서 생각하면 그리 간단하게 외폐(外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7. ‘할 수 있는’을 환세계론의 입장에서 재고하다

 

현대일본어에서 ‘べく(할 수 있는)’라는 조동사는 결의・의지와 의무・당연함을 뜻한다. 이 모두 주체성을 전제한다. 의무를 느끼고 의지를 갖추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결의하는 존재는 반드시 주체여야 한다. 실제로 주체성의 문제는 이마니시의 자연학을 시종일관 관통한다. 그는 『생물의 세계』(1941)에서 이미 정통 진화론의 사고방식인 자연도태에 의한 환경의 생물로의 일방적인 영향 또는 규정을 인정하지 않았고(이마니시는 그것을 ‘주체의 환경화’라고 부른다.), 오히려 주체의 환경화는 환경의 주체화이기도 하며 환경의 주체화는 주체의 환경화이기도 하다고 계속해서 주장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윅스퀼의 환세계론의 입장과 매우 가까운데, 적어도 내가 읽은 이미니지의 논문에서 그는 한 번도 윅스퀼의 환세계론을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환세계론과 완전히 같은 전제(단, 인간에 한정해서)를 가진 와쓰지 데쓰로의 풍토론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여하간 이마니시의 자연학도, 환세계론도, 풍토론도 개체든 사회든 종이든 생물 전체 사회든 우선 존재자의 주체성을 전제로 놓고 그 주체의 현실을 환경 일반(윅스퀼이 말하는 Umgebung, 와쓰지가 말하는 ‘자연환경’)으로 환원할 수 없음을 밝혔다. 주체와의 특수한 관계에서 환경 일반으로부터 특수한 환세계(와쓰지의 경우는 풍토)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생활의 장’과 같이 모호한 표현에 그친 이마니시는 환세계나 풍토라는 본격적인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의 ‘주체화된 환경’은 환세계나 풍토와 마찬가지로 명확하다. 그렇다면 와쓰지가 정의한 “인간존재의 구조계기로서의 풍토성” 혹은 더욱 일반적으로 말하면 “생물 존재의 구조계기로서의 환세계성”이라는 존재론적 개념은 이마니시 자연학에도 들어맞는다. 여기서 ‘구조계기’란 독일어 Strukturmoment의 번역어인데, 역학에서 파생한 개념이다. 통상적 의미에서는 ‘계기’와 ‘동기’의 동의어이고, 철학에서는 ‘사물을 조직, 구성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구조계기로서 ‘환세계성’이란 주체와 그 환세계의 동적인 관계를 가리키므로 이 양자를 어느 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여 어느 한 흐름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존재자를 어느 한뜻(趣)으로, 어느 한 방향으로 진화하게 만든다. 이렇게 보면, 그것은 이마니시 진화론의 ‘할 수 있는’의 뜻과 같다.

이제 이 추상적인 원리의 구체적인 예로서 이족보행을 이야기해보자. 다음의 논증은 이 문제를 연구한 크리스틴 타르디외(Christine Tardieu)의 저서 『우리는 어떻게 이족보행자가 되었는가?』(2012)를 참조한다. 예상외로 이족보행은 인간의 게놈에 기입되어 있지 않으며 결정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우연히 동물(예를 들어 늑대)에 길러진 인간 아이, 이른바 ‘늑대소년’은 실제 사례로도 보고된 바, 그들 대부분은 성장해도 언제까지나 사족보행의 상태 그대로 동물처럼 움직인다. 이족보행자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환세계(가족, 세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기는 어른을 닮아가고 어른으로 격려받으며 처음으로 일어서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장면의 필름을 몇 통이나 찍고 분석한 타르디외는 기묘한 것을 깨닫는다. 아이는 자신이 서는 순간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힐끗 돌아본다. 마치 [스스로] 그들의 의견과 칭찬을 구하듯이.

이러한 사례를 환세계론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인간 아이가 서기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특수한 유대관계가 필요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와쓰지는 『인간의 학으로서의 윤리학』에서 밝혔듯이 그 유대관계란 윤리학의 가능성 자체를 건립하는 기본 조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아기를 세우는 동기는 윤리감과 그 주요 요소인 의무감의 맹아라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그러한 의무감과 당연함을 가리키는 단어에 해당하는 것이 이마니시가 말한 ‘할 수 있는’이 아닐까? 추상적인 ‘자연환경’ 속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 속에서 아기는 설 수 있어서 선 것이다.

그런데 ‘할 수 있는’의 범위가 인간의 삶에 한정되는 것일까? 진화라는 현상의 규모에서 사정은 달라지지 않을까?

 

8. ‘과정’을 환세계론의 입장에서 재고하다

 

‘주체성’을 ‘주관성’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관(觀)’은 지각(시각과 의식), 즉 사물을 어떤 식으로 보는가에 머물지만, ‘체(體)’는 육체 전체이므로 지각만이 아닌, 몸의 행동과 작용까지 포함한다. 윅스퀼이 말하는 Funktionkreis(機能環)에서 동물의 지각범위와 작용범위는 상호작용 속에서 상호 일어난다. 나만의 환세계론에서 그러한 상기(想起)를 통태(通態, trajection)라고 부르며, 환세계성・풍토성이라는 존재의 구조계기를 낳는 과정으로 본다. 통태는 자연환경 일반(Umgebung)을 토대 또는 자원으로 해서 특수한 주체의 신체성과 그 특수한 환세계(Umwelt)라는 양쪽의 현실을 동시에 만드는 창조적인 과정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 과정의 창조성은 주체로서의 생물(인간을 포함하여)의 주체성을 전제로 한다.

이 통태라는 상기(想起, co-suscitataion)는 단지 주관성의 투영이 아니라 새로운 실체로서의 주체와 그 환세계를 동시에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인류학자 앙드레 레로와구랑(André Leroi-Gourhan, 1911~1986)의 해석에 따르면, 인류의 출현(사람화)은 삼중의 과정을 거친다. 앙드레는 기술체계에 의한 환경의 인공화(anthropisation)와 상징체계에 의한 환경의 인간화(humanisation)와 그 귀환작용(feedback)에 의한 사람화(homonisation)를 주장한다. 이 주장은 확실히 이마니시가 주장한 환경의 주체화, 주체의 환경화의 과정에 대응한다.

시간의 척도를 바꿔서 마찬가지의 과정이 진화 전체에서 일어나지 않을 리 없다. 모든 생물은 그 특수한 기능환(機能環)을 가지고 있고 주체적으로 그에 작용하고 다시 귀환작용에 작용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이 관점은 근본적, 존재론적으로 자연도태라는 결정론과 다르다. 자연도태에서는 우선 환경 일반이 있고 생물은 그에 적응해야 한다. 여기서는 어떤 주체적인 창조성이 없고 기계적이며 통계학적인 도태만이 있다. 따라서 정통 진화론은 진화의 창조성(즉 신종의 출현)을 설명할 수 없고 단지 종의 안정성을 가능하게 할 뿐이라는 판단(이마니시의 자연학은 이것만을 말하지 않는다)이 제기되어왔다. 재생산뿐만 아니라 창조성이 있으려면, 어느 한 부류의 어느 정도의 주체성이 있어야 한다.

진화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것이라면 그 속에서 종은 ‘변할 수 있어서 변하는’ 만큼, 바꿔 말하면 그 ‘과정’을 결정할 정도의 주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호렙산 원리의 광신자가 아니라면 그러한 가능성을 찾아 나서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진화가 단지 우연(돌연변이)의 결과였다면, 단백질의 가능한 조합의 수(10의 130승)를 고려한다면, 원 상태의 생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주의 나이가 영겁의 세월을 뛰어넘는, 말하자면 무한의 시간이 걸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특정 과정이 있어야 한다. 생명 전체의 각 수준(개체, 종, 전체)에서의 과정은 어느 흐름의 어느 정도로 결정된 주체성을 전제해야 한다.

이제 ‘과정’은 반드시 목적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또 반드시 목적론의 신비성이 필요하지 않다. 주체가 자신의 흔적을 되돌아보면─역사 세계에서 ‘자기발견’을 한다면─, 그 속에서 어떤 방향성, 어느 한 뜻이 스스로 발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치 안토니오 마차도(Antonio Machado, 1875~1939, 스페인의 시인)의 어느 유명한 시구인 “여행자여, 길은 없다 … 여행자여, 길은 너의 흔적 오직 그것뿐”인 것처럼, 생명과 그것을 육체화하는 생물 모두는 살아가는 한 자기 존재 의식, 즉 주체성을 가진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와 환경을 구별하고 그 구별을 견지할 수 없고 환경 속에 흩어져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자기의식을 갖기 위해서는 자존재(自存在)의 의식이 필요하다. 그 기억을 지금은 게놈이라고 부르지만, 원리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원리란 주체성이다. 말할 것도 없이 박테리아의 주체성은 데카르트의 코기토만큼 발달한 것은 아니지만 그 원리는 다르지 않다. 그것을 ‘마차도의 원리’라고 부른다면 바로 알 수 있다. “생물이여, 과정은 없다 … 생물이여 과정은 너가 걸어온 길(진화) 그 자체이므로 스스로 있으며 같아지는 오직 그것뿐.”

 
  1. 베르케의 원문에서는 ‘상대적 보편주의’라고 번역했으나, 프랑스어 ‘relatif’는 영어로 ‘relative’이고 데스콜라는 ‘관계대명사(relative pronoun)’의 ‘relative’라고 그 뜻을 명시했을 뿐더러 저 말에 관계(relation) 혹은 연결(connection)의 보편주의를 담아내고자 했으므로 ‘관계보편주의’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본문으로]
  2. 진화론의 입장에서 생물이 무리를 지어 주어진 주변 환경에 기계적으로 적응한다는 이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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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콜라주드프랑스에서 2007년부터 운영하는 지식사이트인 https://www.college-de-france.fr에 2008년에 실린 데스콜라의 짧은 논문이다. 사이트에 이 글은 프랑스어본(https://th3.fr/imagesThemes/docs/A_qui_appartient_la_nature_Philippe_Descola.pdf)과 영어본(https://laviedesidees.fr/IMG/pdf/20080121_descola_en.pdf)의 두 판본이 있다. 두 판본 모두 데스콜라가 쓴 것인데, 글의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또 이 글은 『交錯する世界 自然と文化の脱構築ーフィリップ・デスコラとの対話』의 제3부에 「自然は誰のものか」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실려 있다. 이 일본어본은 프랑스어본을 번역한 것이다. 다음의 번역문은 영어본과 일본어본에 기초해서 의역을 가한 것이다. 주요 개념어는 영어본에서 가져왔다. “애니미즘 모델(animist model)”과 “애니미즘 체제(régime animiste)”와 같이 영어본과 프랑스어본의 다른 예가 있음을 알려둔다.

글의 내용은 현재 국제기관이 주도하는 자연보호 정책이 ‘자연주의’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여러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음을 지적하고, 문제 해결의 사상적・정책적 전환으로서 ‘관계보편주의’를 제안한다. 데스콜라의 주저인 『자연과 문화를 넘어서』가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까닭에 이 글만으로는 그의 주장이 충분한 설득력을 갖는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그의 사상의 일단을 엿볼 수는 있다. 이 글의 반론에 가까운 논평으로서 어거스틴 베르케(Augustin Berque)가 쓴 「自然と主体性[자연과 주체성]」이라는 글이 『交錯する世界 自然と文化の脱構築ーフィリップ・デスコラとの対話』에 실려 있는데, 이 글은 다음에 곧 번역해 올려두겠다.

 


 

Who Owns Nature?

자연은 누구의 것인가?

 

필리프 데스콜라(Philippe Descola)

 

유네스코, 국제자연보존연맹(IUCN), 유엔환경계획(UNEP) 등과 같은 국제기관의 주도하에 ‘자연보존’이라는 이름으로 보호받는 구역은 최근 30년간 급속하게 증가했다. 대상 구역은 바다와 육지를 막론하고 10만 곳을 넘어 전체면적이 1,900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른다. 이것은 미국 본토와 캐나다를 합친 면적과 같다. 방목을 금하는 자연보호구역의 증가는 최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새로운 현상이다. 1973년 이후 그 면적이 네 배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보호구역의 위치가 흩어져 있고, 또 그만큼 보호 실태도 천차만별이다. 그런데 이러한 특별한 지역의 존재 탓에 전 세계 지표 가운데 약 12%라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 현재 일종의 공공자산(public asset)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사태가 발생했다. 문제는 이 ‘자산(asset)’이 정확히 누구의 것이며 누구의 이익을 위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실제로 이 공공자산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으며 그것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근대 최초의 자연보호구역인 북아메리카의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경우는 그 후에 다른 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872년 당시 로키산맥의 북부지역은 전통적으로 쇼쇼니족(the Shoshones), 바녹크족(the Bannocks), 네즈퍼스족(Nez Percés)의 사냥터였지만, 이곳에 들어선 옐로스톤 국립공원은 설립 당시 원주민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종종 소개된다. 공식적인 전승에 따르면, 이 공원에는 유명한 간헐천(間歇泉)이 많이 있었고 원주민들은 그 간헐천에 대해 미신적인 두려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까이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와전된 것이며 이 간헐천들은 세시의례의 무대로 활용되었다. 더구나 북부의 쇼쇼니족의 한 분파인 약 400명의 투쿠디카족(the Tukudikas)은 국립공원 일대에 대를 이어 살고 있었다. 이 부족은 공원설립 10년 후에 ‘군사적 수단을 통해’ 윈드리버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 내용은 미국 국립공원국 안내 책자에는 절대로 실리지 않을뿐더러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Navokov & Loendorf 2004). 한편에서 도시의 엘리트들은 생물다양성의 보호구역으로 개명된 지고지순한 야생의 풍광을 지키려고 하고, 다른 한편에서 그 안에서 몇 세기 전부터 살아온 부족민이기도 한 현지 주민들은 토지 사용을 엄격히 제한받거나 어쩔 수 없이 방치되기까지 한다. 이 양자 사이의 오랜 갈등은 하루도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세렝게티 국립공원(Serengeti National Park)은 기린이나 코끼리와 같은 야생동물을 촬영하는 사파리 투어의 장소가 되었고, 그 안에 살던 마사이족의 가축 방목은 금지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북서지역의 자워인족(the Jawoyns)은 닛밀룩 국립공원(Nitmiluk National Park)에서의 주권회복을 위해 지난한 법정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 외에도 치아파스 남부에 사는 수백 명의 라칸돈족(the Lacandóns)에 대해 보스턴과 카를스루에(Karlsruhe)의 생태운동가들은 몬테스 아줄스 생태 보호구역(Montes Azules Biosphere Reserve)이 위기에 빠지지 않도록 옥수수 화전농지에서의 화전농업을 포기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세계 각지에서 인간의 관리가 미치지 않는 환경 가운데 각 부분의 사용권을 둘러싸고 각 공동체가 공유해야 한다고 저마다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이익분쟁은 실제로 다음의 두 질문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좀처럼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그것은 곧 자연이 누구의 것이며 누구를 위해 보존되어야 하는가이다. 여기서는 두 질문을 하나씩 검토하면서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방도를 모색해보겠다.

 

첫 번째 질문, ‘자연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두 유형의 대조적인 답변을 내놓을 수 있다. 우선 다음을 주장할 수 있다. ‘자연은 자연에만 속할 수 있고, 인간을 위한 유용성과는 무관한 내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은 그 자체에 따르며 그 자체를 위해 보존해야 한다.’ 그러나 이 내재적 가치를 정의하는 것은 간단치 않으며, 그 내용 또한 시대에 따라 상이하다. 미국 최초의 국립공원 추진자들은 신의 섭리가 미국 국민에 허락한 풍광 그리고 미국 국민의 운명에 각별한 표식을 각인하는 웅대한 풍광을 유산으로 남기기를 희망했다. 실제로 로키산맥, 캘리포니아의 시에라네바다 산맥, 남서부의 불모지인 메사[꼭대기는 평평하고 등성이는 벼랑으로 된 언덕] 등등 ‘야만성(wilderness)’이라는 의미에서의 이 ‘자연’이 국민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또 국경확대를 정당화하면서, 국립공원은 매우 명확한 기능을 수행했다. 그것은 국립공원 설립 초기부터 투어리즘(tourism)의 활발한 프로모션을 통해 아메리카 자연이 다른 어느 곳보다 특별하다는 것, 그렇기에 신에게서 그 관리를 위탁받은 사람들 또한 특별하다는 것을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전시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내셔널리즘의 이정표로서 옥외의 대성당이 변모한 것 같은 이 자연은 단 하나의 내재적 가치만을 가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저 자연공원의 창설자들─그들 대부분은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1862, 미국의 시인)와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 미국의 시인이자 사상가)과 같은 초월주의 철학자들의 저작을 읽으면서 자란 이들이었다.─이 자연을 그 자체를 위해 보존하려 했다고 믿었을지라도 말이다.

세계의 다른 곳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로부터 얼마 후 영국과 프랑스가 각각 설립한 최초의 자연공원도 그랬다. 제국의 본토가 아닌 식민지에 들어선 이들 자연공원의 설립 이유는 미국에서 자연보호구역이 설치된 이유와 매우 비슷했다. 그것이 의도한 바는 식민지 열강에 의해 통치권을 박탈당한 자연환경, 특히 삼림이 원주민이 아닌 선량한 지배자의 손에 있다는 것을 국내외의 관광산업을 통해 증명해 보이는 것이었다. 유럽인은 일부 관습이 이러한 자연환경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그러한 관습을 선주민이 끊어내도록 교육하는 일을 스스로 도맡았다. 삼림지대의 화전식 원예농법이나 마을 주변의 성스러운 숲의 조성 등의 관습이 종종 고도의 생물다양성의 원천이 되었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농학자들과 삼림학자들은 이 고도의 생물다양성을 의식하면서도 그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다. 다양한 종과 생태계를 온대지역의 국유림 조성과 같은 관리법을 통해 합리적으로 보전하는 것은 식민주의 국가가 스스로 자임한 문명화라는 사명의 근거를 별도의 방식으로 표명하는 것과 같았다.

자연은 자체의 내재적 가치가 있다는 사상은 극히 최근의 것이다. 그것은 우선 멸종하지 않고 존속이 보장되는 종 서식지와 같은 특정한 자연환경을 보호한다는 형태로 나타난다. 발단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동물종이나 상징적인 투영능력을 가진 탓에 인간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동물종이었다. 이를테면 사천성 숲의 자이언트 판다(1963년 와룡(臥龍) 보호구역 지정), 벵갈 지방 델타 지대의 호랑이(1973년 순다르반스(Sundarbans) 보호구역 지정), 남아프리카의 코끼리(1979년 탄자니아의 웅고롱고로(Ngorongoro) 보존지구 지정)가 멸종한다면 이 세계는 상처를 받을 것이며 인류는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물론 이러한 사고방식은 유럽에서는 전혀 새롭지 않다. 그것은 중세 이후 자연신학에서 광범위하게 퍼진 관념이었다. 17세기 후반 영국의 법학자 매튜 해일 경(Sir Matthew Hale, 1609~1676)은 이 원리를 일목요연하게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천지창조의 부왕(副王)”인 인간은 “지구상의 표면을 그 아름다움, 유용함, 비옥함 속에서 보존하기 위해 권력, 권위, 권리, 제국, 책무, 배려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 여기서 지적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이러한 성경 속 창세기의 섭리주의적 독해에서 나온 원리가 세계적인 환경보호 정책으로 일반화될 때 그것이 다소 자신의 기독교적 기원을 흐트러뜨리는 경향이 있다 해도 결코 보편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헤일 경이 자연의 유용함뿐만 아니라 그 비옥함과 아름다움을 상기하면서 자연보호의 필요성을 정당화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자연의 내재적 가치와 도구적 가치를 혼동하지 않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인간만이 자연의 풍광을 보고 기뻐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름다움’은 유용성의 논의로 분류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인류’는 아마도 풍경 미학이 주로 발달한 유럽과 극동의 몇몇 문명에만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남은 것은 헤일 경이 ‘비옥함’이라고 부른 것이다. 실제로 비옥함은 자연의 내재성에 기반하여 자연보호를 주장하는 논의가 의거해온 최후의 보루이다. 오늘날 이 말 대신 ‘생물다양성(biodiversity)’이라는 용어가 더욱 선호되지만, 두 말이 의미하는 바는 같다. 즉 이 관념은 인간이 자신을 식별해낼 수 있는 종(種)이나 땅의 정령의 화신과 같은 종뿐만 아니라 자연의 모든 종이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유는 모든 종이 전체로서의 생명 형태의 거대한 번영에 공헌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제로 규범적 판단에 기초한 즉자적인 가치를 나타내며, 인류 전체가 한뜻으로 승인하는 규범적 판단인 만큼 그 자체를 일일이 정당화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 가치란 문화적으로 말하자면 다양성이 단일성보다 좋다는 사고방식이다. 필자는 이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이 견해는 모든 근본적인 윤리적 선택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선호에 속하는 주장이기도 하다. 이처럼 여러 선택지 중 하나를 선호한다는 것에 대해 논의하는 것 자체가 필자로서는 무의미하며 또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의적인 부분은 거의 숙고하지 않고 도리어 적반하장이다. 생물다양성을 최대한 유지하자는 사람들은 변명처럼 끝없이 이유를 늘어놓으며 자신의 견해를 정당화하고자 절치부심한다. 그러나 그 이유의 대부분은 결국 그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유익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가장 힘을 받는다는 사실은 다음을 말해준다. 아직 상세하게 알려지지 않았거나 거의 알려지지 않은 수십만의 종(種) 가운데 인간을 먹여 살리거나 치료하는 데에 유용한 분자(molecules)가 발견될 수도 있다. 따라서 그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호하는 것은 미래를 위한 정당한 투자이다. 나아가 좀 더 교묘한 주장은 다음의 사실을 강조한다. 극히 적은 개체 수의 극히 다수의 종을 아우르는 여러 생태계에서 이뤄지는 공생적 상리작용에 대해 우리가 너무나 무지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태계를 활성화하는 것이 기후인지, 물순환인지, 바라지 않는 생물의 번식인지를 우리는 전혀 모른다. 마지막으로 공리주의에 기대는 주장은 다음의 점을 강조한다. 특히 성별의 차이를 갖는 생물이 매우 다양한 생활조건에 적응하게 되면 유전적 다양성이 진화상의 이점을 갖게 되므로, 우리 행성을 특징짓는, 생명의 다양화 하는 잠재력의 영속과 증대를 보장하기 위해 다양한 종에 편성된 게놈 구조식을 되도록 많이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자연보호’라는 동기부여는 여기서 생명의 보호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얼핏 보기에 완전히 무욕적(無欲的)인 것 같다. 그렇지만 이 또한 자연계의 종들, 일종의 초월론적이고 목적론적인 원리, 거대한 인류공동체 등등의 것들을 동시에 대변하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따른 것일 뿐이다. 인류공동체가 올바른 지식을 갖지 못한다면, 이 논리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연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자연을 구성하는 각각의 종의 것’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를 제외한 저 종들의 무엇도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을 표명하지 않는 이상, 일부 구성원들[인간]의 의견이 필연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된다. 따라서 자연을 위한 모든 도덕은 그것이 반드시 인간이 옹호하는 가치를 표명한다는 점에서 규정상 인간에게서 유래한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제, ‘자연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공리주의적 답변을 살펴보자. 이 입장은 자연의 내재적 가치를 내세우는 견해 가운데 인간의 특권을 너무나 분명히 드러내는 것인 만큼 여기서는 그렇게 길게 논할 필요가 없다. 간단히 말해 자연은 미개발의 잠재적 자원을 가지므로 보호해야 하고 그 내적 균형의 위협은 인류를 파멸의 길로 이끈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하나 지적해두어야 하는 것은 생태중심적(ecocentric) 접근과 인간중심적(anthropocentric) 접근 모두 적어도 국제기관과 그 공인 미디어에서 표명되는 것들에서는 이 문제에 관한 다음의 ‘보편적인’ 관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보편성이란 곰의 출몰에 직면한 피레네의 축산농가와 포획할당량을 돌파한 노르웨이의 포경 사냥꾼들의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인 공리주의적 항의와 비교해서 인류와 자연의 이익 일반을 더 잘 대변해주는 관점이다. 그런데 공리주의적 논리는 어떤 종이나 어떤 지역의 보호에 저항하는 지역주민을 단죄하는 단계에 이르면 생태중심주의적 논리보다 더 잘 작동되기 쉽다. 즉 대다수의 환경보호주의 NGO가 하듯이, “아마존 숲의 파괴는 암 치료의 발견을 방해하거나 기호 온난화를 조장한다.”라고 말하는 쪽이 “파스타사(Pastaza) 강[에콰도르 동북부를 흐르는 강] 상류 유역을 이곳저곳 개간하게 되면 아마존 산간지대의 가장 풍부한 생태계 중 하나의 생물다양성을 감소시키고 말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기부금을 얻는 데에는 훨씬 더 유효하다. 요컨대, 더 높은 차원의 공공선과 관련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더 많은 인간과 비인간에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다른 자연관에 비해 더욱 고귀한 것으로 간주되는 도구적 개념의 자연관이 있다. 그렇다면 다수인 당사자들의 수가 자연의 사유화(私有化)를 정당화한다고 생각해야 할까? 어느 종, 어느 집단, 어느 생태계라는 자원을 유지하는 것이 더 많은 존재자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한다고 해서 그 최대다수에 최적으로 생물권 전체의 조건을 맞춘다면, 이러한 조건 유지에 손해를 입는 소수의 존재자는 그만큼 입지가 불리해질 것이다.

 

여기서 두 번째 질문, 즉 ‘누구를 위해 자연은 보존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당도한다. 물론 대답은 첫 번째 질문의 답변에서 주어지는데, 그것은 또 다른 이슈를 제기하기도 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가장 포괄적인 대답은 자연을 지구의 공유자산(common asset)으로써, 다시 말해 가장 높은 수준의 일반성에서 보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어느 한 종의 보존은 원칙적으로 그 종의 이익뿐만 아니라 생물다양성 전체에 이바지하는 한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또 어느 한 환경의 보존은 원칙적으로 그곳에 사는 다양한 종의 이익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태계 전체의 다양성 전체에 이바지하는 한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구적 차원에서 생물다양성의 보존은 원칙적으로 그것을 구성하는 다양한 종과 그것을 활용하는 인류의 이익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성이 지금까지 그 유일한 목격자로서 생명 그 자체의 번영에 이바지하는 한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존속의 위협을 선고받은 환경에 살아가는 원주민들은 지역의 이익보다 보편적 이익이 우선해야 한다는 논리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를 지금은 잘 이해하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은 그들 자신의 언어와 문자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추상개념인 ‘자연’의 담지자로서 스스로 등장한다. 이러한 자연환경은 그들의 관습적 실천을 통해 형성되어왔다는 것이 나날이 분명해지고, 국제사회는 그들에게 이 환경이 그들 자신에 맞는 방식임을 주시하는 임무를 위탁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권리요구의 작업은 영토침탈을 예방하기 위한 좋은 방법일뿐더러 그보다 더더욱 다음을 인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숲 태우기와 아마존과 동남아시아의 화전경작과 극지방의 이동 목축은 겉보기에는 인간에 의한 어떤 변경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양한 생태계 속에서 식물사회학적 구조와 동물군의 분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지역주민이 자신들의 일상식량을 얻고 있는 자연의 일정 구역에서 자치의 자유를 보존하는 방식으로서 보편적인 가치를 표방하는 것은 아니다. 알프스 지방에서는 늑대, 피레네 산에서는 곰, 보르도 지방에서는 산비둘기 각각에 관련한 사례를 살펴보면 프랑스에서 일반적인 것은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보편적인 것의 폭정을 피하는 방법으로서 지역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장 포괄적인 원칙을 되짚고 자연은 복수로 존재하며 그것을 보존하는 방법 또한 복수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까? 나누어 가진 복수의 세계들로 통하는 또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공공재라는 추상물을 떼 내어주기 위해? 저 모든 고유한 자연들을 만들어온 저 모든 민족을 잔학하게 다루지 않기 위해? 물론 계몽 철학이 인간 존엄의 지위 향상과 민족 해방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계몽주의가 설득을 통한 공존의 원리를 제안하는 다양한 방법의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다음도 인정해야 한다. 즉 자연 자산과 문화 자산의 보호라는 영역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가치를 정당화할 수 있는, 과학적으로 어떤 절대적인 기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지금 거의 대다수에게 받아들여지는 가치들을 규범적 행위로 승인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 사용언어를 포기하지 않고 존엄을 가지고 살아갈 권리, 공익의 이익에 관한 판단으로부터의 자유재량의 권리, 위생적인 환경에 살아갈 권리 등은 거의 모든 인류가 옹호할 수 있는 요구사항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가치들은 인간이라는 신분에 고유한 것들이 아니다. 이 가치들의 보편성이란 논쟁과 타협, 즉 공동의 결정에서 도출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이슈에 관한 의견을 표명할 권리는 어떤 관점에서건 주어지겠지만 그 무수한 관점이 다른 관점에 대해 공평하게 대표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공동의 결정이 집합적으로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다음의 사실을 고려하면 문제는 더한층 복잡해진다. 즉 저 가치들은 국제적인 자연보호 정책 안에 최근 수 세기 내에 유럽에서 출현해서 정착한 매우 독특한 우주론(cosmology)이 스며있다고 단정한다. 필자가 ‘자연주의(naturalism)’라고 부르는 이 우주론은 지구상의 모든 민족과 아직 공유되지 않았을뿐더러 많은 민족과 동떨어져 있다. 왜냐하면 ‘자연주의’란 세계를 조직하는 다양한 방법의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세계를 조직한다는 것은 모든 존재자(existing beings)에 성질을 부여하여 동일화(identification)를 행한다는 것인데, 그 조직은 무릇 인간이 경험하는 데에서 발견되는 것과의 비교 가능한 유사나 이질의 신체성(physicality)과 내면성(interiority)을 다른 불특정 대상에 부여할 수 있도록 다양한 가능성에서 출발한다. 그 결과 동일화는 네 개의 존재론적 공식으로 분류될 수 있다. 우선 존재하는 개체들(existing entities) 대부분이 유사한 내면성을 가지면서 그 신체성은 확실히 구별된다는 ‘애니미즘(animism)’이 있다. 아마존, 북아메리카, 시베리아 북부, 동남아시아 및 멜라네시아 일부 지역의 민족에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인간만이 내면성이라는 특권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물질적 성질(materiality)에 의해 비인간을 구성하는 연속체(continuum)에 속하게 된다는 ‘자연주의’가 있다. 고전주의 시대 이후의 유럽에서 나타난다. 그다음으로 어느 한 이름이 부여된 집단의 내부에는 인간과 비인간이 어느 한 원형에 기초한 동일한 물리적, 정신적 성질을 공유하며 같은 유형의 다른 집단과는 완전히 구별된다는 ‘토테미즘’이 있다. 토테미즘은 무엇보다도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에게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세계의 모든 요소는 존재론적으로 상호 구별되며 그러므로 그 요소들 사이에 안정된 대응 관계를 찾아낼 필요가 있다는 ‘유추주의(analogism)’가 있다. 유추주의는 중국, 르네상스 시기의 유럽, 서아프리카, 안데스 지방 및 중앙아메리카에서 나타난다.

 

바로 근대적 보편주의는 자연주의 존재론에서 직접적으로 유출되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다음의 원칙에 근거한다. 인간이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무수하고 잡다한 개별성(particularisms)의 이면에는 안심할 만큼 규칙적인 다양한 현실로부터 성립되는 진리의 장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진리의 장은 신뢰할 수 있는 이미 시도된 방법을 통해 알 수 있으며 내적 법칙으로 환원할 수 있고 그 법칙의 정확성은 발견과정에 의해서도 훼손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요컨대 문화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가 용인할 수 있으며 나아가 연구하려고 하는 그것은 자연보편주의(natural universalism)라는 거대한 배경을 뒤로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보편주의야말로 진리 추구자에게 피난처와 위로를 줄 수 있다. 습속, 관습, 기풍은 다양할 수 있지만, 탄소의 화학적 특성, 중력, DNA의 메커니즘은 모두에게 동일하다. 자연보호정책을 시행하는 국제기관의 보편주의는 본래 물질세계들에만 적용된 이러한 일반원리를 인간적 가치들의 영역으로 확장한 것이다. 이 보편주의는 오로지 근대인만이 자연에 대한 참된 지성에 이르는 특권적인 길을 이용할 수 있고 그에 반해 여타 문화들은 그 자연의 표상에만 도달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이 표상은 자애로운 자들에게는 허술하지만 관심을 가질만한 것이고, 실증주의자들에게는 그 불순한 영향력 탓에 오류투성이의 해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브뤼노 라투르가 ‘특수보편주의(particular universalism)’(Latour 1991)라고 부르는 이 인식론적 모델은 실증과학의 발전에서 비롯한 자연보호의 원칙이 불가피하게 모든 비근대인에게 부과될 수밖에 없음을 함의한다. 그런데 비근대인들은 경험적으로 우리와 같은 사고방식을 해야 할 필요가 없었고 더군다나 자연이 인류에게서 독립적인 영역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원칙의 필요성을 명확히 파악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아마존의 인디언들은 이런 말을 듣는다. ‘당신들은 한때 자연과의 공생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 당신들은 전기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고도의 생물다양성이라는 이유로 세계유산이 된 당신들의 숲이 더는 망가지지 않도록 당신들을 가르쳐야 한다.’

저 보편주의를 덜 제국주의적으로 만들기 위해 게다가 그 과정에서 세계의 빛나는 웅대함을 보존할 수 있는 생물다양성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가능한 방법으로서 필자가 이리저리 찾아낸 길은 ‘관계보편주의(relative universalism)’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관계(relative)는 ‘관계대명사(relative pronounce)’라고 할 때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고, 간단히 말해 ‘연결(connection)’을 뜻한다. 관계보편주의는 자연과 문화, 물질과 정신, 일차성질과 이차성질[일차성질은 물질 자체가 갖는 개체성이나 운동, 형상, 수 등의 실재적 성질을 말한다. 로크는 이 일차성질을 감각에 의존하는 색, 음 온도 등의 이차성질과 구별했다.]의 구분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성과 비연속성의 관계, 동일성과 차이의 관계, 닮음과 다름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인류는 언제 어디서나 계통발생(phylogenesis)에서 이어받은 수단을 통해 존재자들 사이에서 이러한 관계를 수립한다. 구체적으로는 어느 한 신체, 어느 한 의도, 특징적인 차이를 식별하는 어느 한 태도, 어느 한 타자와의 사이에서 애착이나 원한 관계, 지배와 종속 관계, 교환이나 전유 관계를 수립하는 능력 등이다. 관계보편주의는 만인을 위한 평등한 물질성과 개연적인 의미화를 선험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만사를 이해할 수 있고 또 그 현상의 비연속성을 승인하거나 연속성 속에서 그것의 효력을 무효화하는 데에 가장 쓰이기 적합한 유한한 공식만을 인정하는 메커니즘과 같은 사상(事象) 속에서 불연속성의 난입을 인식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관계보편주의가 어느 한 윤리, 다시 말해 각각의 모든 것이 자신이 성장한 세상의 가치를 거부감없이 따를 수 있는 세계의 관습적 규칙으로 이어지고 있다면, 이 윤리는 여전히 벽돌 위에 벽돌을, 연결 위에 연결을 쌓아가고 있다. 이 일은 우리가 못할 과제가 아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인간들 사이,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관계목록을 작성하는 것이고, 누구라도 비난의 대상으로 내몰리지 않도록 합의하는 것이다. 이 후자의 범주에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불평등한 관계가 포함될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아무 이유 없이 생명을 빼앗는 것이나 감각 능력을 갖춘 존재를 사물화하는 것이나 생활습관과 행동 양식을 획일화하는 것 등이다. 그리고 계속 유지해야 하는 연결을 선정하는 데에서 공감과 합의가 필요하므로, 어떤 관계라도 다른 관계보다 우위에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이에 따라 고유한 관습과 지식과 지혜와 땅에 부착된 가치들이 기댈 수 있는 연결은 우발적 정당성이나 협의의 이해타산에 안주하지 않고 활용될 수 있는 고유한 맥락에 뿌리내린 관계이다. 예를 들어 자연보호를 주장하는 데에서 인간은 비인간과 간주관적인(intersubjective) 관계를 맺는 것이 바람직하고 또 바라는 바라고 본다. 그러나 특수한 환경의 보존을 정당화하려면 그 환경에 고유한 생태계의 특질이 아니라 그곳의 동물들이 현지 주민에 의해 인격적으로 다뤄진다는 사실야말로 더욱 이야기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 동물들이 통상적으로 사냥의 대상일 수 있지만, 의례의 조심성을 가지고 동물들을 대할 수 있다. 이것은 아마존 유역, 캐나다, 시베리아, 말레이시아의 삼림 등의 ‘애니미즘 모델(animist model)’ 속에서 광범위하게 작동하는 보호구역 범주를 제안할 수도 있다. 또 가령 생물다양성의 극대화 혹은 탄소포집[화석연료 사용 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를 모으는 기술]과 같은 자연주의 유형의 연결들에 기반한 정당화의 요건이 덧붙여지는 것도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두 번째 유형의 연결들, 다시 말해 동떨어진 행위자들에 의해 도입된 연결들이 지역의 행위자들이 만들어낸 연결들의 실행조건을 과도하게 악화시키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몽생미셀 섬, 루손 섬 북부의 계단식 논의 세계유산화를 정당화하는 연결들은 완전히 별개의 것임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미 그곳에는 주체로서 보이는 비인간은 존재하지 않고 대우주(macrocosm)와 소우주(microcosm)를 연결하는 기획의 객관화가 구현되어 있다. 그러한 객관화의 흔적은 유추주의 문명이 번성한 곳에서만 남아 있다. 누구는 이것이 유토피아의 영역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고려하지 않은 해결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가상적 미래의 다중성이라는 더 좋은 의미로 유토피아를 이해한다면 당연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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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콜라의 네 편의 논문과 그 논점을 둘러싼 여러 일본인 연구자들의 논문들을 모아 출간한 『엇갈리는 세계, 자연과 문화의 탈구축 ─ 필리프 데스콜라와의 대화(交錯する世界 自然と文化の脱構築ーフィリプ・デスコラとの対話)』(京都大学学術出版会, 2018.03.30)의 서장을 번역해 올려둔다. 데스콜라, 윅스퀼, 베르케 등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을 지양하는 여러 논의를 잘 정리해놓았다. 윅스퀼의 '환세계(Umwelt)'는 칸트의 관점주의를 동물세계로 확장한 생태학적 버전으로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리고 데스콜라의 '우주론(cosmology)'은 그러한 신체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내면성'을 구조화한 것인데, 다음의 글에서는 그 '내면성'을 '주체성'으로 간주해버린다. 아마도 다음의 글의 필자가 생태인류학자이다 보니, 자연과 문화를 횡단하는 새로운 논의의 장으로서 생태학에 더욱 주목해서 그런 것 같다. 이 책에는 다양한 관점과 접근의 글들이 있으므로, 다음에는 데스콜라의 '내면성'을 조금 더 분석한 것을 번역해 올리겠다.

 


 

인문지(人文知)의 탈구축 ─ 세계인식의 대전환을 향하여

 

아키미치 도모야(秋道智彌)

 

이 책이 기반하는 필리프 데스콜라는 현재 콜레주드프랑스(college de France)의 인류학 주임교수이며,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후계자로 인정받고 있다. 데스콜라는 남아메리카 에콰도르의 아마존강 상류에 거주하는 화전 농경민인 아추아르(Achuar) 선주민 사회에서 3년간 현지 조사를 수행했고 그에 기초하여 수많은 인류학적 논고를 발표해왔다. 그 대표작이 『자연과 문화를 넘어서』(2005)이다. 그는 이 책에서 신체성(physicality)과 내면성(interiority)에 착목하여 모든 생물의 유사성과 이질성을 논했다. 그리고 유사성과 이질성을 축으로 하여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에서 비연속성을 강조하거나 아니면 비연속성을 최소화하거나(다시 말해 연속성을 강조하거나) 해서 사회 구조를 가늠함과 동시에 애니미즘, 토테미즘, 유추주의(analogism), 자연주의(naturalism)를 규정했다.

즉 토테미즘이란 신체성과 내면성 모두 인간과 비인간을 유사한 것으로 간주하는 패러다임이고, 인간과 비인간이 신체성은 유사하지만 내면성은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이 자연주의, 신체성은 이질적이지만 내면성은 유사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애니미즘, 신체성과 내면성 모두 이질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 유추주의이다(그림 4 참조). 이러한 네 개의 존재론(ontologies)을 통해 세계의 성립과정(worlding)의 사유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 데스콜라 사상의 골자이다. 그는 세계 속의 풍부한 역사・민족자료를 그 실례로서 제시한다.

지구상의 세계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을 둘러싸고 철학・사상사를 필두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수한 논의가 이뤄져 왔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인류학자로서 필자는 사변론이 아닌 실증적인 사례를 기초로 한 데스콜라의 논의에 찬동하는 만큼 데스콜라가 제시한 존재론 모델의 설득력에 관해 정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데스콜라의 주장은 자연과 문화 또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기반한 것이며 세계의 성립과정을 그 맥락에서 사고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서장에서는 데스콜라의 사유와 가설을 다루면서 그것과는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독자들은 서장의 논의를 염두에 두고 각 장의 다양한 관점에서의 참신한 논의를 접하기를 바란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사유하는 풍부한 관점과 새로운 인문지의 가능성을 예감할 수 있을 것이다.

 

1.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과 중심주의

 

⑴ 자연과 문화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필자는 『자연은 누구의 것인가?─‘커먼즈의 비극’을 넘어서』(秋道 편, 1999)라는 제목의 책을 간행했다. 이 책에서 자연과 문화를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사고방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인간은 자연계의 사물을 기술, 경제, 사회 등에 걸쳐있는 문화적 장치 및 수단을 통해 자신의 세계로 들여왔다. 그중 채집, 수렵, 어로에 의존한 선사시대 단계와 목축과 재배를 통한 가축화(domestication) 이후 단계에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크게 변화했다. 나아가 후대에 이르러 산업기술과 공업의 글로벌화, 정보산업의 발전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관계 자체가 지구 규모의 대변혁을 이뤘다. 이러한 인류사적 변화를 논하는 가운데 자연을 이용하여 문명을 건설한 것이 인간의 문화라는 역사관이 당연시되었다. 즉 자연과 문화를 상호 대립하는 것으로 보는 이원론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패러다임에서 자연과 문화의 관계를 새삼스레 논하는 따위는 시대착오적이었고, 인류의 역사를 다시금 파악하는 거대이론은 진부하며 지적인 생산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렇게 잘라 말할 수 있을까? 지구온난화와 환경파괴가 지구 규모에서 진행되고 있고, 인구가 폭발적으로 급증한 21세기에 이르러 육지와 바다를 불문하고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생존을 위협받고 있으며 이 모든 생물을 능가하는 인간존재에 의해 위기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도를 넘은 인간 활동에 대한 경종은 20세기에 이미 해로운 화학물질이 일으키는 환경기술에 대한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1962)이나 로마클럽의 ‘성장 한계론’(1972)을 필두로 수다한 보고서와 책에서 심각한 문제로서, 또 새로운 위기로서 자주 등장했다. 1997년 교토에서 개최된 COP3(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 ‘교토 의정서’가 발의되었고,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2015년 12월 마침내 COP12에서 ‘파리협정’이 채택되었다. 처음으로 지구온난화 방지를 목표로 국제적인 합의가 이뤄졌고, 그 후 2016년 4월에는 155개국이 그에 서명했으며 투발루(Tuvalu), 몰디브 등 저지대의 산호초 섬나라에서 해면 상승에 의한 위기상황에 처한 나라들도 비준했다. 그러나 2017년 6월 1일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파리협정 탈퇴를 선언하는 등 현재 상황은 여의치 않다.

우리는 지금 인간의 자연 지배가 어떻게 무력화되는지를 통렬하게 경험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꼽자면 2011년 3월 11일 동일본을 습격한 대지진과 쓰나미이다.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 원자력발전소에서 발생한 방사능 유출의 후유증은 지역주민과 생태계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고, 정부와 도쿄전력의 무책임한 대응은 미래의 불안을 부채질하고 있다. 2016년 4월에 발생한 구마모토 지진 또한 복구, 부흥에 사력을 다하는 지역 행정과 주민에게 과중한 과제를 부과했다. 구마모토 지진이 가고시마현의 센다이(川內)와 사가(佐賀)의 겐카이(玄海), 에히메(愛媛)현의 이카타(伊方)에 소재한 원자력발전소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 문제는 일본의 에너지 정책에 직결할 수밖에 없다. 원자력발전소 추진파에서 반대파까지 이 문제를 크게 생각해보면, 이 문제는 확실히 인간과 자연의 본원적인 관계에 다다른다. 우리는 삶의 절실한 문제로서 다시금 자연과 인간의 존재 양상을 근본적으로 되물어야 한다.

『자연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책은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이 가진 문제점을 드러내고자 했다. 예를 들어 현재 환경보전이 세계 각지에서 진행되고 있다. 2010년 나고야에서 개최된 COP10에서는 생물 다양성의 보존을 논했고, 2011년 리오+20(UN 지속 가능한 개발회의)에서는 생물 다양성에 반하는 지역주민의 생업에 책임을 묻고 삼림의 위법벌채이나 위법・무허가・무규칙의 어업 등을 범하는 개인과 단체를 강제적으로 검거하려는 움직임이 EU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을 ‘환경 제국주의’로 규정하는 논자도 적지 않다. 개발도상국에서 현장 주민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국제적인 원조를 추진해온 이들이 바로 서양의 어용학자들과 국제 원조 기관의 컨설턴트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와 동일한 모델과 조언을 바탕으로 개발도상국 정부의 주도하에 환경보전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겉으로는 방향이 다를 수 있지만 본질에서는 자연을 관리하고 이익을 창출하려는 것과 같다. 말하자면 서양적인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을 전제한다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환경보전이 우선한 나머지 지역주민의 토착적 문화관행과 관습, 사람들의 건강과 생존과 생활 향상이 무시되고 있다. 위로부터의 환경정책에 대한 뿌리 깊은 반발이 확산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지역주민에 의한 환경보전의 실천과 환경인지의 존재 양상을 충분히 살펴본다면, 사람들이 단지 생산효율이나 경제 목적에만 매달려서 자연과 관계해오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서구중심주의적 발상에서 민속지(民俗知)와 전통적인 생태학적 지식(Traditional Ecological Knowledge)을 무시한 환경의 보전 및 관리가 진행된다면, 인류가 억눌린 속박에서 해방되는 길은 요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은 도대체 어떤 한계와 문제가 있는 것일까? 다음 절에서 다룰 영국 인류학자 팀 잉골드는 자연과 문화의 관계를 그림 1과 같이 도식화했다(Ingold 1996). 그림에서 보듯이 자연과 문화의 대립 도식에서 자연의 개념은 ① 지리적・생태학적인 실체로서의 자연과 ② 문화적인 해석의 결과로서 인지된 자연으로 나뉜다. 마찬가지로 문화도 ①과 ②에 각각 대응하는 개념으로 위치한다. 즉 자연과 문화 개념은 항상 대립하는 관계에서만 파악될 수 있다. 

그림 1. 서양과 비서양에서 인지세계의 비교 - 서양의 이원적 존재론(자연과 문화 또는 물질과 인지 사이에서)을 기반으로 한 모델. C와 Cc는 결여성 대립관계에 있지만, N과 Nn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Ingold 1996을 기본으로 작성)

이 그림에서 주의해야 하는 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잉골드 자신도 언급했다시피 자연과 문화를 구분하지 않는 세계관이 파푸아뉴기니 고산지대의 하겐족(the Hagen)에 있다고 하는 인류학자 메릴린 스트래선의 보고이다(Strathern 1980). ‘No Nature No Culture’의 세계는 분명 이채롭다. 잉골드는 자연과 문화를 이원적으로 이해하는 사고방식은 서양 고유의 것이며 뉴기니의 사례는 비유럽적인 것으로 위치 짓는다. 또 하나는 이 책의 9장에서 주장하는 ‘자연이 주체성을 가진다.’라는 발상인데, 이 그림에서는 배제 내지는 간과되고 있다. 즉 그림 1에서 문화 개념은 ‘결여성 대립(privative opposition)’의 관계에 있고, 이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자연 개념은 문화와 같은 결여성 대립의 관계에 없다.

베르크는 자연에도 주체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새롭게 그림 2와 같은 도식을 상정할 수 있다. 이때 자연(N)은 가설적으로 주체적으로 인지하는 자연(Nn)과 그에 포함되지 않는 요소의 자연(non-Nn)으로 나뉘고, 이에 따라 자연 또한 결여성 대립으로부터 구성되는 개념이 된다. 즉 자연은 반드시 문화와 대립하는 개념은 아니라는 것이다.

스트래선이 찾아낸 ‘비자연・비문화’의 세계와 베르크의 ‘자연주체성론’은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을 넘어서는 것으로 위치 지을 수 있다. 이 지평에서 인간중심 또는 서구중심의 사상을 검토하는 것이 다음 과제이다. 우선 자연 속에서 인간을 세계의 중심으로 사고하는 인간중심주의를 검토해보자.

그림 2. 자연의 주체성론과 자연과 문화의 관계 - 자연에도 주체성이 있다는 가설에서 자연이 인지하는 세계(Nn)와 그 이외의 비자연(non-Nn)이 성립한다. C와 Cc와 함께 N과 Nn은 결여성 대립관계에 있다.

 

⑵ 인간중심주의

 

자연을 인간의 문화에 들여오는 모든 사고와 영위를 ‘자연의 문화화’라고 부르기로 한다. 인간이 (자연을) 받아들이는 것은 보통 영어에서 전유(appropriation)라고 말한다(Ingold 1987). 일본어의 ‘문화화’는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라는 뜻이다. 전유에는 ‘소유자가 없는 것을 사물화(私物化)한다.’라는 의미가 있으며 인간을 위해 자연을 이용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즉 자연의 문화화란 인간을 중심에 놓는 발상이다. 이것을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라고 부른다.

사회집단의 문화는 각각의 차이가 있지만, 그렇다 해도 그 사회에 인간중심주의적인 발상이 있다면 그 사회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세계의 중심에 놓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은 변함없다. 개개의 문화적인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세계에 수많은 세계관・자연관이 제각기 독자적인 의미화를 시도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피상적으로 표현하면 인류학은 무수한 인간중심주의의 정밀한 비교분석과 해석에 공헌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이 경우에 타문화와의 차이에 관한 정보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접근방식에는 두 입장이 있다. 문화상대주의 연구자들은 몇몇 타문화의 세계관・자연관을 기술한다 해도 그것은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에 반해 개별의 기술을 넘어서 인간 전체를 아우르는 일반성의 추구 자체가 본령이라고 주장하는 보편주의자의 입장이 있다. 보편적인 세계관의 추구를 강조하는 만큼 인간중심주의에 포박되어 그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필리프 데스콜라는 서양의 인류학자들이 암시적으로 전제하는 두 가지 사정이 있다고 주장한다(Descola 2013). 첫 번째는 무문자사회 사람들이 구축한 세계상은 서양의 과학이 상세하게 검토해서 그 법칙성을 분명하게 밝혀온 내용의 자연관과 동질적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는 자연과 문화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우주관이 그 외의 우주관을 이해하고 분석하기 위한 본보기가 된다는 점이다.

데스콜라에 의하면, 서양의 인류학자들은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에 대해 양자의 차이를 잘 조화시켜 대극에 위치하는 자연주의자와 문화주의자 쌍방이 서로에게 접근하는 해석론을 산출하려 한다고 지적한다. 자연주의자는 문화를 생물학적, 생태학적 제약에 대한 (문화적인) 적응에 불과하므로 자연과학 자체만이 자연의 구조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문화주의자는 문화의 구성내용과 자연(이를테면 생물로서의 인간의 기초대사량)의 관계는 단정할 수 없을뿐더러 실제로 양자의 관계는 완전히 이질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문화가 다르면 그 사회에 사는 사람의 기초대사량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다. 문화주의자는 자연을 어느 정도 가늠한다 해도 그것으로 인간문화를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적어도 19세기 후반까지 서양에서는 인간성이나 자연에 대한 몇몇 논쟁을 철학, 종교학, 신화학 등의 영역을 중심으로 전개해왔다. 이 과정에서 서구중심적으로 자연과 인간, 세계의 존재 양상에 대해 무수한 사색의 궤적이 축적되어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루이스 헨리 모건이 저술한 『고대사회』(1877)는 비서구 사회의 다양한 관습과 제도를 서구사회에 소개하여 서구중심적으로 구축되어온 세계관이 상대화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한편 모건의 영향을 받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84년에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저술하고 인류가 야만 시대(savagery)에서 미개 시대(barbarism)를 거쳐 문명 시대(civilization)로 사회 진화하는 도식을 제시한다. 이 도식에서 자연은 인간 사회가 진화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기술이나 생산의 기반을 담당한다. 실제로 인류는 야생식물의 채집, 수렵, 어로, 농경, 목축 등의 생산복합과 함께 불, 화살, 토기, 청동기, 철기 등의 기술문화와 문자 등을 자연을 이용해서 발명, 발전시켜왔다. 문명 시대의 도래라는 교의의 배경에는 자연의 개발이 있다. 그러나 이 사상을 인간중심주의의 원리라고 단정 짓는 것은 성급하다. 그보다 서구중심주의 또는 기독교 중심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동양이 아닌] 서양에서 인류사를 인간이 주(主)이고 자연이 종(從)이라는 배치 관계로 파악해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연과 문화는 상호 대립하는 존재로 간주해왔다.

 

⑶ 비인간중심주의─생태학과 신화학

 

그렇다면 그 대극으로서 인간을 중심에 놓지 않는 발상이 있다면 그 핵심은 무엇일까? 크게는 비인간중심주의(non-anthropocentrism) 혹은 자연(동식물)중심주의(nature-centrism)라고 부를 수 있는 틀이 그것이다. 이러한 틀의 저류에는 인간을 중심에서 배제하고 자연을 중심에 놓는 급진적인 사상이 있다. 이 사유는 많은 지식인의 비웃음을 살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논증해보겠다.

비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이 주체로서 자연을 복종시킬 수 있다는 혹은 지배할 수 있다는 관념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사상이다. 인간이 아닌 자연계의 존재를 중심에 놓는 이 사상에서는 자연이 주(主)이고 인간이 종(從)이라는 배치 관계가 성립한다. 다만 이 주종관계의 역전에는 명확한 근거가 필요하다. 여기서는 자연과학으로서의 생태학과 인문과학으로서의 신화학을 바탕으로 생각해보겠다.

본래 생태학의 사고방식에는 인간을 중심에 놓지 않는 원리가 존재한다. 자연계에서 식물과 동물 각각이 맡은 생태학적 역할에 주목해보자. 식물은 독립영양생물이며 일반적으로 탄소와 광합성에 의해 성장, 번식하고 무기화합물에 의해 증식한다. 한편 동물은 종속영양생물이며 다른 식물이나 동물 등의 유기화합물로부터 탄소와 에너지원을 획득한다. 동물인 인간도 종속영양생물이며 지구상에서 고차원의 소비자이다. 인간중심주의는 인간이 먹이사슬에서 질과 양 모두 지배적인 소비자라는 것을 암묵적인 전제로 삼는다. 즉 자연계에서 소비하는 측이 주(主)이며 소비되는 측이 종(從)이고, 소비하는 행위는 피소비자의 희생으로 성립하며, 소비자는 피소비자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먹고 먹히는 관계에서 보면 주종의 관계는 결코 고정적이지 않다. 동남아시아의 메콩강 유역에 사는 저지대 라오족(the Lao)에서는 다음과 같은 속담이 전해온다.

 

물이 솟아오르면 물고기가 개미를 먹는다. 물이 흘러내리면 개미가 물고기를 먹는다.

 

우기에 하천에 물이 불어 베짜기개미가 나무 위에 올라가 나뭇잎으로 공 모양의 집을 만든다. 이 개미집이 수면에 떨어져 집 속의 개미나 유충이 물고기에게 먹힌다. 건기에 물이 빠져 물고기가 바짝 말라버리면 개미가 죽은 물고기를 먹는다. 사람들은 환경의 극적인 변화에 따라 먹고 먹히는 관계의 먹이사슬이 역전한다는 것을 일상의 관찰로부터 익히 알고 있다.

자연계에서 먹이사슬의 소비자에게 더 높은 관계가치(공생・적대 등의 관계성에서의 가치관)를 부여하는 사고방식에 대해 생산자인 식물이야말로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보는 견해도 다른 한편으로 성립한다. 모든 동물은 존재 자체를 식물에 의존한다. 인간도 동물의 일종이므로 야생・재배종을 포함한 다양한 종류의 동식물에 의존한다. 인간이 소비의 대상으로 삼는 일부 동물도 식물에 의존한다. 즉 인간은 궁극적으로 식물의 은혜를 입는다. 결국, 생태학, 다시 말해 먹이의 소비와 연쇄의 관계성에서 보면 인간과 식물의 어느 한쪽을 중심이나 주변에 위치 짓는지에 따라 역전과 재역전이 가능하다.

이제 신화학(mythology)의 관점에서 중심주의를 고찰해보자. 세계에는 특정 동물을 숭고한 위치에 놓는 관념을 가진 사회가 무수히 많다. 동아프리카의 마사이족은 사자, 시베리아의 우데족(the Udé), 나나이족(the Nanai), 만주족은 시베리아호랑이(만주족은 “후린(Hu Lin)” 곧 ‘왕’으로 부른다.), 북아메리카 북서해안 부족들은 범고래, 북해도 아이누족은 불곰과 범고래와 올빼미, 아스테카 문명은 재규어, 중앙 안데스 문명은 콘도르 등이 그러한 존재들이다. 이 사례들에서는 특정 종의 동물이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동물이 주(主)가 되며 인간이 종(從)에 위치한다고 속단할 수 없다.

세계의 창조주가 인간과 동물, 식물, 물, 불을 창조했다는 신화를 가진 민족은 수없이 보고되었다. 예를 들어 북아메리카 선주민인 평원 인디언 수족(the Sious)은 세계의 모든 사정은 우주의 진리이며 창조주인 “와칸탕카(wakan tanka)에게서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와칸은 ‘신비’, 탕카는 ‘위대하다’는 뜻이다. 인간과 동물, 식물, 돌과 물, 나아가 몇몇 정령 등 모든 것은 평등하며 상하, 우열의 관계가 없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인간 이외의 것은 ‘나무의 사람들’, ‘돌의 사람들’, ‘새의 사람들’과 같이 불린다. 이처럼 인간과 그 이외의 존재는 평등성과 상호 ‘유대’를 특징으로 하며, 수족 사람들은 인간중심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창조주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하는 시원성(始原性)의 담론은 기독교, 불교 등의 기성종교와 비인간중심주의를 표방하는 많은 민족이 공유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창생신화(創生神話)의 사상이 역사 속에서 지속해서 견지되지 않고 어느샌가 인간을 중심에 놓는 사상으로 변질하는 예도 적지 않다. 이 점에서 유럽에서 켈트 민족의 신화는 이질적이다. 켈트 민족의 신화에서 우주는 물과 불이 교대로 지배하는, 시작도 끝도 없는 윤회의 세계이다. 그 어딘가 한 지점이 현재라고 하는 사고 또한 인간중심주의와는 완전히 별개이다. 지금까지 신화학에서 비인간중심주의의 사례를 살펴보았다.

 

⑷ 인간과 동물의 동일성론

 

다음으로 이러한 생태학과 신화학과는 전혀 다른 발상의 비인간주의를 논하겠다. 이 논점은 인간중심주의를 근저에서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동화하거나 자연과의 사이에서 동일성을 찾아내는 발상이다. 즉 자연과의 동화 혹은 공생을 통해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패러다임이며 동화(assimilation)와 동일화(identification)를 달성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데스콜라의 논문(2008a)이 소개하는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베트남 신화를 인용하겠다.  

데스콜라가 인용하는 신화는 1910년대 베트남 중부 고지대에 거주하는 롱가오족(the Reungao)과 함께 살았던 에밀 켐린(Emile Kemlin)이 채집한 설화이며 오이(Oih)라는 이름의 여성과 호랑이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느 날 저녁 오이가 집 베란다에서 쌀을 빻고 있을 때 목에 뼈가 걸린 호랑이 한 마리가 근처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호랑이는 목에 걸린 뼈를 빼내려고 껑충 뛰어오르다 베란다에 떨어지고 말았다. 공포에 질린 오이는 손에 든 소쿠리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그 소쿠리는 호랑이 머리 위에 떨어졌다. 호랑이는 놀라 하늘을 바라보고 생각지도 않게 뼈를 토해내 버렸다. 호랑이는 무사히 그 현장을 떠났다.
그날 밤 오이는 호랑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호랑이는 “우리는 아버지 세대에서 딸 세대까지 친구 관계를 맺게 되었소.”라고 말했다. 딸은 “안될 일이야. 누구라도 그런 감언이설에 넘어가지 않아.”라고 답했다. 호랑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요. 우리야말로 감언이설에 넘어간 것이 아닌가 두려움에 떨고 있소.”
다음 날 아침 오이는 숲에서 실물의 호랑이를 만났다. 호랑이는 큰 멧돼지를 안고 있었다. 호랑이가 오이를 보자마자 사냥감을 땅에 내려놓고 그 고기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오이에게 던져주고 남은 것은 자신이 가져갔다. 이런 일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오이는 이날 이후 호랑이에게서 먹고 남은 고기를 얻게 되었다. 오이는 숲에 가면 그녀의 숙부(=호랑이)가 남긴 사슴이나 노루의 고깃덩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켐린 신부에 의하면, 이오와 호랑이가 맺은 약속은 크라오 콘 바(krao con ba), 즉 롱가오 사람들과 다른 인간이나 비인간 사이의 공적인 동맹 관계를 기록하는 계약서를 말하며, 쌍방의 당사자는 특별한 의무를 지게 된다.

이러한 민족지와 자신의 조사에 기초해서 데스콜라는 세계 속의 수많은 민족은 보통 동물이나 식물이 인간적인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롱가오족 외의 경우에서도 예를 들어 콜롬비아의 마쿠나족(the Makuna)은 맥이 춤출 때 잇꽃나무의 염료로 몸을 물들인다고 생각하고 페커리는 의례 중에 카드놀이를 한다고 말한다. 브라질의 와리족(the Wari)에 의하면, 페커리는 마니옥 술을 만들고 재규어는 아내가 요리에 사용하는 먹이를 사냥해서 귀가한다고 한다. 이러한 사례는 과거의 신화일 뿐만 아니라 지금도 일어나는 일이라고 믿는다.

앞서 언급한 롱가오족의 예처럼 호랑이가 인간과 맹약을 맺고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유럽의 민화에서 동물을 인간처럼 묘사하는 것과 비슷한 수사학적인 은유(메타포)의 수법에 불과한 것일까? 메타포를 즐겨 사용하는 무문자사회 사람들은 단순히 메타포 능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실천지(實踐知)와 상징적인 사고를 겸하는 사고 양식에 친숙하다고 데스콜라는 평한다. 게다가 동물을 인간과 구별하지 않고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사고하는 관념이 발달한 사회에서는 주변의 자연환경에서 비인간적인 존재의 가시적인 현상이나 행동을 인간과 유사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이것은 인간중심주의와 다름없다. 롱가오족의 설화가 동물의 행동에 관한 자연과학적인 정보보다 더욱 타당하면서도 쉽게 기억되는 것은 이러한 인간중심의 관념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호랑이가 말을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롱가오 사람들이 이해할만한 이유를 자연과학자는 댈 수 없다.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는 보편적인 틀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환경과의 관계에서 오랜 세월 편성되어온 다원적으로 엮인 관계의 결과이며, 따라서 직감적이든 반직감적이든 실천적 지식과 상징적인 표상을 구별하지 않는다.

데스콜라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자연과 문화의 대립은 무문자사회에서 무의미하다고 단정한다. 이에 반해 현대의 인간중심주의자는 시공이 다른 지역의 문화를 해명하는 구조를 제기하는 따위는 안중에 없다. 기껏해야 자기와 비자기(타자)의 관계를 객관화하기 위한 일반적인 틀을 제기할 가능성만을 가진다. 

이처럼 인간중심주의의 틀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인간과 자연 간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유추하고 식별할 필요가 있다. 이때 인간과 자연이 동화하거나 동일화되는 측면에 역점을 두는 사고과정이 중요하다. 그래야 인간은 자연을 구성하는 여러 측면을 그 외관과 행동과 속성으로부터 유추하고 인간과의 차이점과 유사점에 대한 틀을 제시할 수 있다. 동화와 동일성은 애니미즘 및 토테미즘과 관련된 개념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식물중심주의와 (인간을 포함한) 동물중심주의가 성립할 수 있다. 다만 생존을 좁은 의미에 한정하면, 식물중심주의는 생명의 제공자로서, (인간을 포함한) 동물중심주의는 생명의 박탈자로서 생태학적인 위치에 있게 되어 완전히 정반대의 관계에 놓인다. 그렇다면 인간을 제외한 동물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은 없을까?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인문학에서의 비생태학적인 사상이다.

 

 

2. 애니미즘과 토테미즘

 

애니미즘(animism)과 토테미즘(totemism)은 모두 인문학, 특히 인류학과 종교학 분야에서 자주 언급되는 개념이다. 전자는 돌이나 물 등의 무생물과 생명체에 영혼이 깃들이 있다는 관념이며, ‘생명’, ‘숨’을 나타내는 라틴어의 아니마(anima)에서 유래한다. 자연물에서 영혼을 발견한다는 관념은 세계 각지에 존재한다. 멜라네시아의 솔로몬 제도와 뉴헤브리디스(New Hebrides) 제도에서는 돌에 마나(mana)라고 불리는 초자연적인 힘이 깃들어있다는 관념이 발달해 있다(Codrington 1891). 솔로몬 제도에서는 인간은 사후에 틴달로(tindalo)라고 불리는 사령(死靈)이 된다고 하고, 뉴헤브리디스 제도에서는 뷔(vui)라고 불리는 영이 된다고 하는 신앙이 있다. 모두 마나를 발휘해서 인간에게 은혜나 재앙을 내린다고 생각한다. 틴달로와 뷔 모두 영적인 존재이고 지역 고유의 애니미즘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토테미즘은 개인이나 집단이 특정의 동식물과 계보 상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는 관념이며, 18세기 북아메리카의 오지브와 선주민 사회에서 곰을 죽인 결과 곰을 선조라고 생각하는 집단으로부터 보복이 행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유럽인을 통해 서구에 소개되었다. 토템인 동물을 먹는 것이나 죽이는 것은 통상 금지된다. 같은 토템 동물을 이름으로 갖는 집단 내에서의 혼인도 금지되는 사회가 많다. 자신의 선조가 되는 동물을 먹는 것은 인육을 먹는 것과 같고 동일 토템 집단 간의 혼인은 근친상간과 다름없다는 규범이 정착된다.

그런데 데스콜라의 존재론에 관한 논의에서 서구중심적으로 전개된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은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시베리아 등의 민족지 사례에 의거해왔고(Descola 2013), 일본이나 중국의 사례를 바탕으로 한 분석은 거의 없다. 이 점에서 이 책에서 다루는 일본의 사례에 대한 비교 분석적 논의는 의의가 있다.

 

⑴ 자연신앙과 신의 세계

 

일본에는 애니미즘적 자연신앙이 풍부하게 존재한다. 즉 특정의 토템과 집단 간의 관계가 명시적인 세계 여러 지역과 달리 자연 속에서 신을 발견하는 신앙이나 관념을 나타내는 사례가 많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동북지방의 “마타기”[사냥꾼]는 수렵 동물, 씻은 쌀, 산나물 등의 모든 자연물이 산신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사냥꾼 마을에는 오오야마쓰미(大山祇 일본의 신)를 모시는 신사가 있으며 오오야마쓰미오오가미는 산의 신으로 여긴다. 게다가 사냥꾼의 수렵에서 다양한 금기와 의례 등은 수렵의 성공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자연을 지배하는 산신과의 관계를 지속하는 지혜라고 볼 수 있다. 사냥꾼은 인간이 죽은 후에 산에 잠든다고 생각하며 여기서 산상타계(山上他界) 관념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田口 2014).

북해도 아이누 사회에서 동물은 “카무이”라고 불리는 신의 세계로부터 나타나는 분장한 신이며, 인간에게 고기와 모피 등의 은혜를 내린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그에 감사하며 소비한 후에 술이나 공물을 갖춰서 동물의 영(靈)을 신의 나라에 되돌려 보내는 의례를 행한다. 곰을 보내주는 의례는 “이오만테”라고 불린다. 곰의 영이 신의 나라로 되돌아가는 여행에 앞서 곰이 다시금 인간계를 방문하도록 기원하며 “이나우”라고 불리는 제구(祭具)와 술과 떡 등을 바친다. 큰곰은 카무이의 나라에서 인간계로 내려온 키문 카무이(산신)이다. 큰곰과 더불어 “레푼 카무이”가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앞바다의 신’을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범고래를 가리킨다. 나아가 “코탄코르 카무이”는 ‘마을의 수호신’이라는 의미로 올빼미를 가리킨다. 범고래는 어획의 대상으로서 식용되지는 않지만, 범고래를 뒤쫓아가는 고래는 포획할 수 있다. 고래의 뼈는 해안가에 안치되어 보내는 의례의 대상이 되며, 그 의례는 “훈페사파아노미”, 올빼미를 보내는 의례는 “모시리코로카무이 오프니레”라고 불린다.

또 일본의 산신 신앙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야나기타 구니오는 그것을 죽은 자의 영이 산속에서 타계하는 관념의 예증으로 파악했다(柳田 1963). 한편 사쿠라이 도쿠나로(桜井徳太郎)는 영산신앙(靈山信仰)에 의한 산중타계관(山中他界觀)을 논했다(桜井 1986). 야나기타는 타계한 산신이 봄이 되면 마을에 내려와 밭의 신이 되고, 가을에 다시 산으로 돌아간다고 보았다. 그리고 산에는 야마미야(山宮 산신이 거처하는 신사)가, 마을에는 사토미야(里宮)가 제사 공간이 된다. 이 사고는 일본민족의 산신 신앙의 기본이다. 지금도 오쿠노토(奥能登, 혼슈 북서부의 동해에 접한 지역)에서 행해지는 아에노코토 신사가 그러하며, 오쿠노토 사람들은 수확 후 밭의 신을 맞이하여 음식과 술을 대접하고 해를 넘긴 후 다시금 밭의 신을 보낸다.

한편 사쿠라이는 산중의 산신에 대해 사람들이 산기슭에서 영산을 배례할 뿐만 아니라 산정상에 가까운 곳을 두려워하며 금기라고 생각한다고 보았다. 후에 밀교나 슈겐도(修験道)의 영향을 받아 산정상을 향해 등배(登拝)하는 것으로 변했다고 한다. 한편 사사키 코우메이(佐々木高明)는 야나키타, 사쿠라이 양쪽 모두 마을의 수전 경작민이 바라본 산에 대한 신앙을 논한 것이며 산속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산악신앙과는 별개라고 지적한다(佐々木 2006). 그러니까 평지에서 산지로 이주한 산주민 집단이 산지에 적응한 것인지 아니면 평지민과 산지민이 각각 독자적으로 살아온 것인지에 관한 역사적인 고찰은 시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여하간 이 문제는 생업의 측면뿐 아니라 정치 권력의 개입 정도와 그 영향을 감안해서 검토해야 할 과제이다(米家 1997).

지금도 이와쿠라(磐座, 岩倉)라고 불리는 자연숭배신앙이 각지에 분포하며, 산, 하늘, 천둥 등의 영혼 혹은 신이 강림해서 돌, 큰돌, 나무의 요리시로(依代 빙의체)에 빙의된다고 한다. 요리시로의 영역은 성스러운 공간으로서 그 주변은 시메나와(注連縄 금줄)가 둘러쳐져 있다. 교토의 가미가모 천둥신(上賀茂雷神)이 빙의하는 장소에는 모래 둔덕이 조성되어 있다. 이러한 장소를 히모로기(神籬)라고 한다.

토테미즘에 관해 현재 일본에 전해지는 예는 그리 많지 않다. 교토의 미시마(三嶋) 신사에서는 뱀장어를 신성시하여 우지코(氏子)나 안전한 출산과 자식의 점지를 기원하러 오는 사람들은 소청을 빌기 전까지 뱀장어를 금식하는 풍습이 있다. 미시마 신사의 제신은 오오야마쓰미오오가미(大山祇大神), 아마쓰히다카히코호노니니기노미코토(天津日高彦火瓊瓊杵尊), 코노하나사쿠야히메오미코토(木之花咲耶姫命)인데, 오오야마쓰미오오가미의 심부름꾼이 바로 뱀장어이다. 뱀장어는 토템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것으로 위치지을 수 있다(友田 2016).

데스콜라도 『자연과 문화를 넘어서』에서 일본의 산 신앙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산신이 밭의 신이 된다는 이야기는 전술한 바이다. 또 ‘산’이라는 개념에는 본래 ‘산’, ‘숲’,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라는 중층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데, 이러한 중층적인 의미화가 전후(戰後) 인공림의 확장으로 인해 사라졌다는 것도 지적한다(Descola 2013). 다만 상세한 기술에는 오류가 있고, 뒷산과 깊은 산, 야마미야(山宮)와 사토미야(里宮), 산악신앙과 평지민의 산 신앙을 구별해서 논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일본의 여러 사례를 보여줌으로써 기존의 애니미즘론과 토테미즘론에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다. 더욱 중요한 점은 비인간주의의 사상이 일본의 자연사상에 뿌리 깊게 남아있다는 것이다. 일본만이 아니다. 북아메리카의 선주민과 오스트레일리아 선주민에게도 인간적 존재를 넘어선 영혼과 창조주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다. 즉 영혼과 창조주가 세계의 중심에 있으며 인간은 어디까지나 그 주변에 있는 존재였다. 그에 따라 인간은 신을 경외하고 영혼이나 창조주로부터 받은 은혜를 누릴 수 있었다.

 

⑵ 인간중심주의의 동요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인간중심주의와 비인간중심주의는 근대적인 사고와 학문 속에서 정의되어왔으며, 그 대립적인 구도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19세기 이후이다. 본래 인간중심주의는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사고라고도 볼 수 있다. 어느 한쪽을 주(主) 내지는 종(從)의 입장에 놓는 가정은 교조적인 도식론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이 중심인가, 자연이 중심인가 혹은 식물인가 동물인가 하는 논의는 어느 쪽이든 중심세계와 주변 혹은 종속적인 세계의 관계를 표상하는 것에 불과하다. 본 절에서는 인간을 중심에 놓고 동물과의 관계성을 보여주는 사례를 소개하고, 인간중심주의에 기초한 동물을 다루는 방식이 다양하며 단순 모델로 정의될 수 없음을 보여주겠다.

그림 3은 영국 인류학자 에드먼드 리치가 제시한 동물의 가식성(可食性)과 혼인 금기에 관한 모델이다(Leach 1964). 이 모델은 인간 전체를 중심에 놓고 동물과의 관계를 논한 것인데, 혼인 관계는 개인을 중심에 놓는 자아 중심적인 발상에서 다뤄진다. 이 모델이 반드시 합리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덧붙인다.

그림 3. 인간과 동물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인간중심주의의 동심원 모델 (Leach 1964를 기본으로 작성)

그림 3은 중심에 인간을 배치하고 동물과의 관계성을 거리로 표시하고 있다. 리치는 잉글랜드의 농촌지대를 염두에 두고 이 모델을 만든 것 같은데, 암묵적으로 영국의 왕실림(王室林, Royal Forest)을 상기시킨다(秋道 2016). 여하간 인간에 가장 가까운 것은 집안에서 활용되는 개, 고양이, 새 등의 반려동물이다. 그 외측에는 소, 양, 염소, 말, 돼지, 닭 등의 가축동물이 배치된다. 그리고 그 외부에는 수렵의 대상이 되는 야생동물이 위치한다. 이 속에 사슴, 여우, 야생토끼, 멧돼지 등이 포함된다. 야생동물 생식 지역의 더 바깥에는 여태껏 본 적 없는 동물이 존재한다. 이 도식은 인간을 중심에 놓고, 다양한 동물 종을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서열화한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인간이 주(主)이고 동물이 종(從)인 것은 변함없다. 리치의 논의에 의하면, 인간과의 관계는 우호(반려동물), 순화와 서비스(가축), 적대관계(수렵 동물), 미지의 관계(야생동물)로 정리된다. 리치는 인간-동물의 거리를 혼인문제와 연결하기 위해 이 사례를 제기한 감이 있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는 지금까지의 사례만큼 단순명쾌해야 한다. 두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다.

첫 번째는 일본의 사례이다. 일본의 민속학에서는 노모토 가이이치(野本寛一)가 『생태와 민속』이라는 책에서 인간과 동물과의 상호교섭을 검토하면서 인간과 적대적인 동물이 그와 동시에 영성을 가진 것으로 신격화된다는 것을 밝혔다(野本 2008). 예를 들어 사슴은 가스가 신사(春日神社), 이쓰쿠시마 신사(厳島神社), 가시마 신사(鹿児島神社) 등에서 신의 심부름꾼(神鹿)으로서 보호받는다. 그러나 사슴이 항상 신수(神獣)였던 것은 아니다. 덴무 천황(天武天皇, 631-686) 675년, 소, 말, 개, 원숭이, 닭의 육식이 벼농사 기간(4~9월)에만 금지되었는데, 이 때에도 사슴과 멧돼지의 수렵과 육식은 허용되었다. 벼농사에 유익한 동물을 보호하고 농작물을 망치는 사슴과 멧돼지는 유해동물로 간주한 탓이다. 흥미로운 점은 현대 민속행사로서도 사슴사냥 제의가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며, 보리 짚, 잣나무 가지와 잎이나 오동나무 등을 가지고 실물 크기의 암수 두 마리의 사슴 모형을 만들어 농경의 풍요를 기원한다. 이 제의는 노토세노시카우치(能登瀬諏訪) 신사와 도우에이마치(東栄町)의 신사에서 행해지고 있다. 사슴이 유해동물이면서도 오곡 풍요를 위해 기원하는 소재라는 발상은 미카와(三河), 시나노(信濃), 도오토우미(遠江) 지방에 짙게 남아있다. 나아가 사슴사냥에 사용되는 모형 짐승을 사용한 의례는 일본 서남부에 뚜렷하게 남아있고 사슴을 포함한 야생동물을 유익한 사냥감, 유해동물, 영험한 짐승으로 간주하는 사고는 역사적으로도 중층화되어 있다(背古 1992). 일본 늑대는 “오오카미(大神)”라고 하며 『만요슈(万葉集)』에는 “오오쿠치노마카미(大口真神)”라고도 한다. 한편 늑대는 인간이나 가축을 습격하는 맹수로서 두려움의 대상이고, 인간이 늑대에게 잡아먹힌 사례는 고대로부터 문헌에 수없이 나온다.

사슴과 늑대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자연계의 동물과 일본인과의 관계는 일원적이지 않다. 노모토는 유익한 영성이 있으면서도 해로운 측면을 가진 동물을 양의성의 문제로서 다룬다. 그리고 양의성을 가진 동물과의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현대일본에서 늑대가 멸종하고 사슴이 유해동물로서 다뤄지고 있는 현실을 주의 깊게 성찰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미크로네시아의 사례이다. 미크로네시아의 중앙 캐롤라인 제도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물고기가 이용된다. 중독을 일으키는 복어를 제외하면 모든 물고기가 이용된다. 다만 그 모든 것이 유용하고 식용되는 것은 아니다. 섬 주민들은 상어, 가오리, 곰치, 고래, 돌고래 등은 ‘나쁜 물고기’로서 식용하지 않는다. ‘나쁜 물고기’는 물고기이기도 인간이기도 한 양의적인 존재이다. 또 여성이 섬의 토란밭에 물고기를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나 남성이 고기잡이에 나가기 전날 밤 성행위를 하는 것은 금기로 되어있다. 큰양놀래기, 대형 능성어, 바다거북의 대가리는 추장에 우선 상납된다. 임산부나 월경 중의 여성은 참치, 농어 등을 먹으면 넓적다리가 붓는 증상이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배 목수는 몸통에 줄무늬 모양이 있는 쥐돔, 쏨뱅이, 청줄돔 등을 먹으면 건조한 카누가 파손된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인간의 범주(추장, 젠더, 임신부, 월경 중의 여성, 전문기술의 배 목수)와 물고기 종류에 따른 음식물 금기가 통용되며 사회규범으로 규정되고 있다(秋道 1981).

이처럼 일본과 미크로네시아의 예에서 보시다시피 인간을 중심에 놓고 동물과의 관계를 정리해도 리치의 동심원적인 모델만으로는 거의 설명되지 않는다. 캐롤라인 제도의 사례는 자연(=물고기)과 문화(=물고기의 가식성)의 이원적인 해석이 가능하지만, 상어나 돌고래를 포함한 ‘나쁜 물고기’와 일본의 영험한 짐승과 유해동물의 양의적인 위상은 자연과 문화의 대립을 넘어선다. 그리하여 몇몇 논제로부터 양자의 대립을 넘어서는 사상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3.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을 넘어서

 

⑴ 동물문화론

 

총합지역환경학 연구소의 초대의장인 히다카 도니타카(日高敏隆)는 일찍이 『동물이라는 문화』라는 저서를 간행했다(日高 1988). 아마도 대개의 인류학자는 ‘동물에 문화 따위는 없다, 문화를 가진 것은 인간뿐이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 귀결은 ‘동물은 자연’이고 ‘인간은 문화’이다. 백번 양보해도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인간(호모 사피엔스) 이전의 문화원형(protoculture)을 간직한 존재이고, 침팬지 등이 나뭇가지로 개미집을 쑤셔서 흰개미를 끄집어내어 섭식하는 ‘도구사용’ 행위는 하위문화(subculture)에 속한다. 인류 진화의 도식에서 문화는 우월한 인간이 가진 속성이며, 유인원이나 원시인은 그보다 열등한 원초적인 문화를 가진 존재로 간주된다.

그러나 히다카는 이것을 완전히 뒤집는 사상적인 의미를 제기한다. 히다카는 한 강연에서 말미잘의 사례를 다룬다. 말미잘은 자포동물(刺胞動物)이며 음식을 빨아들이는 위수관(胃水管)을 가지고 있는데, 노폐물을 체외로 빼내는 배설기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즉 외부의 것을 빨아들이는 입과 배출하는 입이 같다. 입과 항문을 각각 가진 인간과 비교해서 말미잘은 상당히 다르다. 또 연골어류, 양생류, 파충류, 조류, 그리고 오리너구리 등의 일부 포유류는 항문, 배뇨구, 생식구가 구별되지 않고 하나의 배출구가 그것들의 기능을 겸하고 있다. 이러한 체내기관의 분화의 차이에서 우리는 인간이 개구리, 도마뱀, 펭귄 등보다 우월하며, 이와 마찬가지로 상어, 거북, 악어, 제비 등은 말미잘이나 해파리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히다카의 발상은 어떤 생물이라 해도 독자적인 생존방식을 구사한다는 관점으로 일관한다. 따라서 형태나 기능의 차이로부터 동물의 우열이나 진화상의 위치를 구별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어떤 동물도 살아가는 하에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육식동물은 날카로운 이빨과 민첩한 운동능력이 있는데, 인간은 치아와 운동능력 대신에 도구를 제작하고 사용함으로써 육식동물과 같은 능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동물은 신체의 형태와 기능을 발달, 분화시켜서 진화, 적응해왔던 것이며, 인간은 외재화한 도구를 통해 적응을 수행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⑵ 환세계론

 

히다카의 발상은 독일의 야콥 폰 윅스퀼(Jakob von Uexküll, 1864-1944)의 환세계론을 발전시킨 것이다. 동물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지각하는 것이 아니다. 외계를 감지하기 위해서는 후각, 시각, 청각, 촉각, 피부감각 등의 수용기관을 매개로 하며, 그 기능과 정밀도는 식물, 동물의 종류마다 다르다. 예를 들어 곤충 중에서 배추흰나비는 이성과 교배할 때 독특한 지각능력을 구사한다고 알려져 있다. 암컷 날개 뒷면에 있는 인분(鱗粉)에는 자외선을 반사하는 성분을 포함하고 있으며 수컷이 그 정보를 받아서 예를 들어 양배추밭을 탐색해서 교미 상대를 발견한다. 이미 교미를 끝낸 암컷은 날개를 펼쳐서 수컷에게 날개 뒷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자외선을 감지할 수 없는 인간은 이런 정보를 알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오감을 가진다는 점에서는 어떤 사회집단도 같은 감각적 수준에 있지만, 생활 체험이나 거주환경 등에 의해 특정 수용기관이 발달한다. 에스키모가 얼음과 눈의 하얀 세계에서 사냥감의 그림자를 찾아내는 시각 능력, 콩고나 뉴기니의 숲에 사는 사람들이 새소리를 민감하게 분간해내는 청각 능력은 도시에 사는 인간에게는 어림도 없다. 게다가 미지의 물체가 무엇인지를 탐색할 때 냄새를 중시하는 경향, 시각에만 의존하는 경향, 촉각으로 우선 감정하려는 경향 등 문화적으로 다 다를 수 있다. 이처럼 생명체가 환경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종에 따라 때로는 개체에 따라 상대적일 수 있음을 정립한 것이 윅스퀼의 환세계론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환경(環境)’이라는 말은 본래 중국어이며 당나라 시대의 『신당서(新唐書)』(1060)에 처음 등장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이후 영어의 environment의 번역어로서 주체인 인간과 객체로서의 주변 세계를 구별하는 의미로 도입되었다. 영어의 전신은 프랑스어의 밀리유(mileu)이다.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는 “모든 유기체의 존재에 필요한 외부조건의 전체”로서 밀리유를 정의해서 생물학에 도입했다. 환경을 뜻하는 독일어는 움게붕(Umgebung)이다. 움(Um)은 ‘주위’, 게붕(Gebung)은 ‘주어져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윅스퀼은 환경을 이해할 때 몸 주위에 단지 존재하는 환경(umgebung)만이 아니라 각각의 동물이 주어진 것으로서 의미를 구축하는 세계, 즉 움벨트(Umwelt)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벨트(Welt)는 ‘세계’를 의미한다. 모든 생물에 공통하는 환경은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생물 종에 의한 환경 세계이다. 히다카 도니타카(日高敏隆)는 이것을 ‘환세계(環世界)’라고 칭했다.

동물의 문화론과 환세계론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론이다. 문화인류학자 이와타 게이지(岩田慶治)는 문화를 통해 세계를 본다는 것이란 인간이 색안경을 끼고 세계를 보는 것이라는 ‘비유’를 들었지만, 환세계론은 동물도 자기만의 눈으로 세계를 본다는 것을 강하게 제창한다. 그리고 인간은 생물로서의 ‘색안경’을 벗고 세계를 볼 수 없다. 여기서 인간을 중심에 놓고 자연과 문화를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관점은 와해한다. 자연이어야 했던 동식물에게 환경과 상대하는 고유의 문화가 있으며 따라서 문화의 범위가 인간의 독점적인 영역이 아니라 생물 또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⑶ 주체성론

 

오귀스탱 베르크(Augustin Berque)는 와쓰지 데쓰로(和辻哲郎)의 『풍토론』에 의거하여 “풍토성에 관한 인간존재의 주체성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인간 풍토의 그것에는 한계가 없는 주체성, 즉 자연 그 자체의 주체성도 고려해야 한다.”라고 말한다(Berque 1992). 즉 주체성이란 자기동일성을 가지면서 풍토 속에서 ‘자기발견’하는 것이고, 그 주체성의 장은 절대적으로 그 주체의 국소성(topicité)에 한정되지 않는다. 자연도 살아가는 한 어느 정도의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서술한 윅스퀼의 환세계론은 생물을 대상으로 한 주체성인 것에 반해 와쓰지 데쓰로는 인간에게도 풍토는 단순한 주변 세계가 아니라 주체적인 세계인식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베르크는 자연이 가진 주체성에 대해 와쓰지 데쓰로의 ‘자기발견성’과 하이데거의 현존재(Dasein)에 해당하는 개념을 위치 짓는다.

자연을 인식하는 인간의 주체성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근대지(近代知)의 토대이다. 그러나 베르크는 자연에도 주체성이 있다고 말한다. 이 관점에서 데스콜라가 제창한 신체성과 내면성의 전개 논리는 크게 바뀐다. 데스콜라가 인간을 중심으로 자연과의 유사성과 이질성을 정리했다고 한다면(그림 4의 A),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내면성의 위상이다. 즉 베르크 식으로 말하면 자연과 인간은 주체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유사한 존재이다(그림 4의 B). 그렇다면 자연은 내면성에서도 인간과 유사한 특징을 가질까? 신체성에 관해 베르크는 언급하지 않는다. 데스콜라는 신체성에서 인간과 유사한 경우를 ‘토테미즘’, 유사하지 않은 경우를 ‘애니미즘’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베르케에게 자연의 주체성론의 배경에는 토테미즘이나 애니미즘을 넘어선 자연 인식이 있다. 이에 따라 베르케의 세계에서 데스콜라의 신체성과 내면성은 변별적인 의미가 없다.

한편 윅스퀼의 환세계론은 가시화된 신체성에 관한 논의에 유익한 관점을 준다. 윅스퀼이 지적한 바에 의하면, 인간이 보는 자연은 객관적이지도 보편적이지도 않고 만능도 아니다. 인간이 자연물을 인간과 대비해서 유사한가 이질적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그림 4의 C). 그렇다면 데스콜라가 규정한 신체성은 인간중심적인 판단이다.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자연에 의한 환세계를 참조한 것은 아니다. 데스콜라의 세계관은 인간중심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신체성에 관해서도 인간이 본 자연은 유사성과 이질성을 겸하고 있고, 환세계론에서 차이화는 변별적인 요소가 아니다.

요약하면 신체성과 내면성의 이원적인 구별 자체를 가정하면 데스콜라의 논의로 귀결하지만, 자연 주체성을 인정하는 견해나 환세계론에서 논하면 신체성과 내면성의 이항대립 도식은 상대화된다. 베르크와 윅스퀼의 사상을 관통하는 것은 비인간중심주의이다. 이 발상이 미래의 철학 그리고 지구에서 인간의 위치를 사유하는 데에서 크게 시사하는 바가 있으리라는 것이 이 책 전체의 주장이다.

 

 

4. 공생과 커먼즈론

 

앞 절에서 인간과 동물이나 식물의 중심성에 관한 논의에서는 인간과 개개의 생물 종과의 관계성을 문제 삼지 않았다. 이를테면 인간과 동물의 관계성은 피포식, 포식, 반려, 오락, 가축화, 순화, 무관심 등의 구체적인 관계로서 생각할 수 있다.

인간중심주의에서 유용성의 관점에서 인간과 동물의 관계성을 정리하면 유용한 동물과 해로운 동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동물 종은 어느 쪽도 아닌 ‘단지 생명체’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인간과 동물, 나아가 인간과 식물과의 상대적인 관계를 논하는 데에서 우선 두 가지 관점이 중요하다. 첫 번째는 생명체와의 공생에 관한 이해방식이며, 두 번째는 공생의 사상과 관련한 커먼즈의 관점이다. 그리하여 공생과 커먼즈론이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선 논의를 환기하는 가능성을 검토해보겠다.

 

⑴ 공생이란 무엇인가?

 

자연과 문화는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공생해서 생존하는 것이라는 사고는 지금도 제기되고 있다. 이 사상은 적어도 종래의 기독교적인, 자연을 문화(인간)에 종속시킨다는 발상과 결별하는 획기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이 공생 개념은 한번은 정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무엇을 공생이라고 생각해왔는지를 말하지 않은 채 애매한 과학용어를 빌리기만 한다면, 공생을 은신처로 삼은 경제우선주의의 담론이 석권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세계에 미치는 오류는 이루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즉시 기각해야 한다.

공생이라는 개념은 본래 생태학 용어였고, 정치학, 철학, 교육학, 사회학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어왔다. 나는 공생 개념을 채택하는 데에서 자연계의 자원을 이용하는 인간이 동식물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깊게 고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생은 영어로 symbiosis라고 한다. symbiosis는 그리스어 유래의 단어로 ‘함께 산다’는 뜻이고 이종(異種)이 상호작용을 통해 함께 살아가는 것을 나타낸다. 다만 이 속에는 쌍방이 이익을 얻는 상리공생(相利共生 mutualism), 한쪽은 많은 이익을 얻지만 다른 쪽은 이익과는 무관한 편리공생(片利共生 commensalism), 한쪽만이 이익을 얻고 다른 쪽은 부정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종속적으로 타자에 의존하는 관계라는 뜻의 기생(parasitism)으로 나뉠 수 있다. 이외에 편해공생(片害共生 antagonism)이 있으며, 이는 일시적으로 한쪽이 이익을 얻지만 그 이익도 결국 허사가 되는 예를 가리킨다. 즉 공생은 두 종 간의 관계성에 주목한 일반개념이며 예전에는 상리공생만을 진정한 공생이라고 주장했지만, 생태계 전체를 고려하면 앞서 서술한 다양한 공생관계가 하나의 종 안에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또 생물의 진화나 변이를 염두에 두고 생태계까지 확장한다면 상리적(相理的) 관계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과 생물의 공생관계는 symbiosis의 개념뿐만 아니라 보다 쉬운 개념인 공존, 즉 co-existence의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공존은 ‘함께 존재한다’라는 의미에서는 symbiosis와 유사하지만, 이해관계가 명확하게 의미화된 개념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어느 쪽이든 애매한 의미 그대로 공생 개념이 광범위하게 사회과학의 분야에서 자의적으로 사용되어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 배경에는 ‘어부지리’의 발상이 있다.

철학 분야에서는 이반 일리치(Ivan Illich, 1926~2002)가 conviviality의 개념에 공생을 포함해서 제시한다. 이 용어는 본래 ‘주연(酒宴)’ ‘양기(陽氣)’, ‘연회기분(宴會氣分)’을 뜻하는데, 개인이 주위의 환경이나 공동체와 주체적으로 관계하는 가운데 창조성과 주체성을 유지하면서 집단과 공생하는 모습을 가리킨다. 일리치의 이 개념은 인간의 공생을 개인 수준을 넘어서서 개인과 집단의 상호작용으로 파악하여 개인이 집단의 희생이 된다기보다 상호이해, 상호협조 등의 과정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인류집단에 있어서 공생의 실태에 근접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일리치는 인간의 개인과 집단의 공생을 논하고 있으며 인간 이외의 생물 종과의 공생까지 언급하지 않는다.

물론 인간 이외의 생물 종 간의 공생관계에는 에너지, 물질, 정보에 관한 어떤 상호작용이 개입된다. 특히 정보의 교환, 즉 커뮤니케이션은 공생의 중요한 요소이다. 인간이 인간 이외의 생물 종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고자 할 때는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는 동작이나 신체표현을 매개로 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반려동물이나 가축에 대해서는 언어나 신체표현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이 일부 실행되지만, 보통은 자연계의 생물과 사람 사이에 그러한 언어적 커뮤니케이션 관계는 발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공생이란 인간의 선입견에 불과한 것일까? 그래서 의례나 기도를 통한 이종(異種)과의 커뮤니케이션, 가령 영적인 교감과 교류를 하는 것의 적극적인 의의를 생각해본다. 영적 존재나 생명체와의 상호교섭은 실체화할 수 없다는 유물론의 관점에서는 교감, 즉 sympathy는 부정된다. 그러나 샤먼이나 무당의 공수 등으로 잘 알려진 영매자의 존재는 이종(異種)이나 영적 존재와의 교류가 완전히 무위의 행위가 아님을 가르쳐 준다. 애니미즘이나 토테미즘을 신앙의 하나로 거론하는 지역이나 문화는 물론이거니와 그러한 형태의 신앙이 주류를 이루는 지역에서 사령(死靈)을 포함한 인간 이외의 존재와의 교섭은 오히려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영매자에 의한 초자연 세계와의 교류는 의례 속에서 실천되는데, 이 외에 인간과 이종 간의 교류를 보여주는 소재는 수없이 존재한다. 신화, 이야기 등의 구술 전승 분야와 조각이나 회화 등으로 표상되는 물질문화의 한 분야이다. 어떤 민족도 신화 속에서는 초자연적 존재와 인간의 관계가 뚜렷하게 나타나며 동물 조각을 선조로 숭배하는 양상은 무엇보다도 그 증좌(證佐)이다. 인간과 이종 간의 공생 사상이 세계를 넘어 전승되며, 조각이나 회화 등의 물질문화로서 사람들의 기억과 이미지의 세계에 정착한다. 공생론을 신화・전승, 조형물, 의례의 세 위상에서 고찰함으로써 새로운 지평이 열리지 않을까?

 

⑵ 커먼즈론과 생명체

 

커먼즈(the commons)는 공유재산을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공유지나 입회지에 있어서 공동의 이용 관행을 가리킨다. 커먼즈가 전 세계에 광범위하게 분포한 것은 논할 필요가 없다. 커먼즈는 그것을 준수하는 인간의 범위에서 보자면, 한 지역의 성원에만 한정된 로컬 커먼즈, 도시나 공원 등과 같이 일정한 규칙을 준수한다면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는 퍼블릭 커먼즈, 지구 규모에서 인류가 공생해서 보존하거나 이용상의 조정을 기획하는 글로벌 커먼즈로 나뉠 수 있다. 지금까지는 로컬 커먼즈에 관한 연구가 대부분이었다. 그것은 지역의 공유림이나 입회 어장 등 관리와 운용 주체가 지역공동체의 성원에 한정되며 개발도상국의 비교연구에서 로컬 커먼즈의 중요성은 현대 사회에서도 그 중요성을 잃지 않는다(Feeny et al. 1990).

공유는 복수의 이해관계자가 자원을 상호 나눠 가지는 제도 내지는 관행을 뜻한다. 그러나 인간들뿐만 아니라 인간 이외의 이종들 사이에서 자원을 나누어 가지는 것 또한 시야에 넣어 논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예를 들어 국내 각지에서는 사슴, 곰, 원숭이, 멧돼지 등의 야생동물에 의한 피해 보고가 점차 늘고 있다. 인간 측에서 보면, 야생동물은 농작물이나 나무에 피해를 주는 해로운 존재이다. 곰이 인간을 습격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예도 찾을 수 있다. 반달곰의 경우 먹이인 너도밤나무 과일을 찾아 마을 산에 출몰하기도 하고, 마을 산에 목탄제조 등의 연료 전환으로 인해 인간 활동이 뜸해지고 곰이 출몰하기 쉬워진 것 등이 피해의 주된 원인이다. 사슴의 경우 인공림에 있어서 식재목이나 천연 나무의 가지, 편백 등의 나무껍질, 하층 식생의 식해(食害)나 고산식물 군락의 감소 등이 일어나고 있다. 사슴에 의한 피해는 삼림 피해 전체의 7할 이상 상당하며 토양유출이나 삼림의 보수기능 저하 등의 생태계 악화에 심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멧돼지나 원숭이는 농작물, 과수, 표고버섯 등 직접 인간이 이용하는 작물에의 식해(食害)가 현저하다. 이 속에서도 야생의 생명체와 인간의 공생을 탐구하는 활동이 계속되고 있다.

북해도 아이누족에게 큰곰은 중요한 식료를 제공하는 야생동물이며 “키문 카무이”(산신)의 신성성을 가지고 있다. 곰을 식용, 모피용으로 이용한 후에는 곰의 뼈를 신의 나라에 되돌려 보내는 “이오만테”의 의례가 행해지는데, 다른 지방에서 꽃사슴은 그러한 의례의 대상이 아니다. 꽃사슴은 아이누어로 식료를 뜻하는 “유쿠”라고 하며, 아이누 사람들은 “유쿠코로 카무이”(사슴을 사육하는 신)가 자신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지상에 사슴을 풀어주었다고 믿는다. 또 인간을 위해 연어를 바다와 강에 풀어주는 “체부코로 카무이”가 있다. “코로”는 ‘사육한다’, “체부”는 ‘물고기, 특히 연어’, “카무이”는 ‘신’을 의미한다. 즉 곰, 사슴, 연어 등의 자연계 생명체를 인간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세계를 매개하는 존재로 여기는 세계관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의 제1장에서 고래론을 육식과의 연관에서 논술하고 일본의 역사 속에서 육식 금지령이 발동되는 상황에서도 멧돼지나 사슴, 고래가 식용된 것의 의미를 논할 것인데, 여기서는 그와 다른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이와테현(岩手県) 카미헤이군(上閉伊郡)에 있는 오오쓰치쵸(大槌町)에서는 연안의 충적평양부에 180개소의 용수정(湧水井)이 있다(谷口 2016). 이 마을에는 2011년 3월 11일에 발생한 지진과 쓰나미에 의해 파멸적인 피해를 보았다. 부흥 과정에서 제방을 높이고 성토를 조성하는 공사가 진행되었다. 당연히 용수정 일부가 성토 밑에 파묻히게 되었다. 또 강 입구에서는 수문을 건설하는 공사의 영향으로 지하가 굴착되어 지하 수위가 크게 내려가게 되었다. 한편 오오쓰치의 용수지대에는 민물 가시고시가 생식한다(森 2011). 가시고기는 빈영양의 용수에만 생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흥 시기에 지역의 자연, 역사, 문화 등을 고려한 마을 만들기가 중요했지만, 행정적인 측면에서 그것은 거의 인식되지 않는다. 용수는 사람들의 식수, 생활용수, 산업용으로 광범위하게 상용되어왔는데, 자연의 은혜인 용수는 인간의 독점적 영역이 아니다. 용수 환경에만 생존할 수 있는 가시고기를 포함해서 용수를 생명체들과 공유하는 발상이 불가결하다.

오오쓰치의 용수는 산, 강, 지하를 지나 바다로 순환하는데, 인간이 그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없다. 용수의 은혜를 입는 것은 인간이나 가시고기뿐이 아니다. 해저에서 솟아 나오는 용수 덕에 풍부한 조장(藻場)이 연안에 형성됨으로써 다양한 바다 생물의 생명이 유지될 수 있었다. 용수를 ‘지역의 보물’ 혹은 ‘향토재(鄕土財)’로서 보전하는 것은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秋道 2016a). 지역의 커먼즈로서 용수를 파악하지 않고서 새로운 부흥의 모습을 만들 수 있을까?

수렵 인구의 감소, 중산간(中山間) 지역의 과밀화와 피폐화 등에 의해 야생동물과 인간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본래 거리를 두고 ‘각자도생’해왔던 것을 이제는 공존이나 공생이라는 문구로 정리할 수 없게 되었다. 가시고시는 인간에게 유용하거나 해로운 생물이 아니지만, 유해동물이 된 대형 짐승과 인간의 상호작용에 또 다른 관점을 도입하고 그로부터의 새로운 논의가 필요하다. 적어도 커먼즈의 사상을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적인 존재와 환경까지 포함해서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현대적인 과제라는 것을 명기해둔다.

 

 

5. 새로운 지(知)의 구축을 향하여

 

서장의 마지막에 이 책의 구성과 의의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이 책은 2014년에 ‘코스모스 국제상’(공익재단법인 국제화와 연대의 박람회 기념협회)을 수상한 필리프 데스콜라의 몇몇 논의로 촉발된, 일본인을 중심으로 한 연구자들이 인간존재를 자연과 문화를 연결하는 것으로서 논하고자 한 것이다. 데스콜라 자신이 선택한 주요 논문 네 편을 참조하면서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을 넘은 새로운 인문지의 구축을 목표로 8편의 논문이 작성되었다.

이 책은 서장, 종장과 4부로 구성된다.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서장에서는 서양에 있어서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적인 사고를 상대화하고 인간중심주의의 탈구축을 위한 전망을 보여주었다. 비인간중심주의의 관점에서 인문지에서 자연숭배와 신의 사상을 조명하고,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관계성에 주목하여 지금까지 생태학과 철학에 걸쳐서 다뤄왔던 공생 개념과 공유사상으로서의 커먼스론을 재검토했다.

제1부에서 제4부까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각각 문제 제기가 되는 주제를 설정했다. 제1부 ‘자연은 인간에게 복수할까?’, 제2부 ‘자연은 인간의 친구인가?’, 제3부 ‘자연은 주체성이 있는가?’, 제4부 ‘자연은 경계를 넘어설 수 있을까?’로 했다. 이 책의 관점은 인간과 자연을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교류하고 포식, 피포식, 상극, 호혜성, 증여 등의 관계를 실현해온 존재로 파악한다.  

제1부에서는 데스콜라의 「친절한 포획물들」(1999)을 참고하면서 일본 및 세계의 구체적인 사례에 기초하여 ‘동물과 자연관’에 대해 고찰한다. 하나는 고래를 둘러싼 문제로부터 신 관념을 매개로 한 일본인의 자연관의 특질을 지적한다. 또 하나는 새와 인간의 속성을 겸비한 조인(鳥人 birdman)의 형상을 일본을 포함한 세계의 여러 사례로부터 다루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로부터 자연이 인간에 복수하는 것 그리고 인간이 죄악감을 가지면서 동물을 죽이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제2부에서는 데스콜라의 논문 「‘야생적인 것(le sauvage)’과 ‘순화된 것(le domestique)’」(2004)에 기반해서 인간에 의한 가축화 과정에서 공생관계와 자연의 조작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한 생태 인류학의 입장과 임상의학의 견해를 고찰한다. 여기서는 자연이 인간에게 친구인지 또 야생생물과 재배화, 순화된 생물, 실험에 제공된 생물에 대해 포괄적으로 생각한다.

제3부에서는 데스콜라의 「자연은 누구의 것인가」(2008b)에 기반하여 데스콜라가 설파하는 자연관을 철학 분야에서 다면적으로 고찰한다. 우선 신화학의 입장에서 존재론에서 애니미즘의 위치를 밝히고 자연에 대한 관념에 대해 재고한다. 그다음으로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이 20세기 이후 과학의 발달 때문에 왜곡되어왔다는 것을 논한다. 제3부에서는 자연에 주체성이 있는지를 둘러싼 논의를 다룬다.

제4부에서는 데스콜라의 「형상화의 아틀리에」(2006)을 기본으로 미학과 예술 인류학의 관점에서 이미지로서 표상된 자연이 어떤 의미와 메시지를 주어왔는지를 논한다. 예술 인류학의 관점에서 가면으로 나타나는 자연의 표상을, 서양과 비서양 사회에서 형상화・표상화의 어긋남에 대해 미학적인 관점에서 해명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형상화의 문제로부터 자연은 인간의 세계에 경계를 넘어 움직일 수 있는지를 주제로 다룬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새로운 지식과 견해가 생성되리라 기대한다.

데스콜라는 과거 거대이론이 성행한 시대를 방불케 하는 보편성이 강한 ‘존재론’을 제창해왔다. 과학의 발전을 통해 발달하여 세계를 지배하게 된 서양의 편향된 자연주의를 상대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베르크가 지적한 것처럼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나타나는 현대적 경향에 반성을 촉구한다. 다만 데스콜라가 주장하는 내면성은 동식물에 대한 ‘의인주의(擬人主義)’로 이행하는 경향이 있으며 철학에서 말하는 즉자성(an sich)과 대자성(für sich)을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베르케가 주장하는 ‘주체’ 개념은 이마니시 긴지(今西錦司)의 『생물의 세계』론과 상통한다(今西 1972). 무엇보다 서양에서는 윅스퀼에 의한 환세계 관념으로서의 움벨트가 있다. 이러한 비교까지 포함해서 이 책은 세계에 분포한 자연관의 약식도를 제시한다. 이것이 이 책의 첫 번째 의의이다.

두 번째 의의는 자연과 문화의 이원론 극복이라는 논의에 일본이나 중국 등 동양의 자연사상으로부터의 관점을 추가한다는 것이다. 원래 데스콜라의 논의에는 동양의 자연사상이 거의 없다. 고래를 둘러싼 신앙이나 공양의 의미, 조인의 형상을 둘러싼 세계의 여러 사례 가운데 일본의 조인 신앙에는 소위 애니미즘론, 토테미즘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본의 풍부한 자연관이 있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동양이나 비서양 사회의 사례에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성을 파악하는 더욱 넓은 지평을 열 가능성이 숨겨져 있다.

셋째로 이 책에서 보여주는 논의의 많은 부분은 문헌연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야외조사에 기초한 전문분야로부터의 현대적인 과제에 대한 문제 제기라는 것이다. 복제기술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자연의 조작 가능성, 가축화론을 축으로 하는 새로운 자연과 문화의 의미론 등 현실의 사건에 기초한 새로운 계획을 골자로 자연과 문화의 횡단이 편성된 이 책의 논의는 많은 분야에 지적인 자극을 선사할 것이다.

데스콜라는 최근 미술과 자연, 문화의 관계에 흥미를 느끼면서 2008년 하버드 대학 강연에서는 ‘이미지의 창조—인류학적 접근’을 주제로 삼았다. 인류학과 미술사, 예술과의 관련 분야로서 형상화와 아이콘(기호)을 고찰한 그의 논의는 솔직하게 말하면 존재론에 적합한 사례만을 다룬 혐의가 있다. 즉 그것만으로는 인류학을 미술사 장르에 삽입한 것에 불과하고 광대한 표상학에 대한 방법으로는 미숙하다고 말할 수 있다. 오히려 검증해야 하는 것은 각각의 시대적, 문화적 배경 속에 응축된 코드와 메시지를 읽어 들이는 것이 아닐까? 이 점에서 이 책 제1부의 조인론과 제4부의 가면과 회화에 주목한 역사적, 민족학적 고찰은 앞으로 이 분야에 있어서 학문적인 발전에 큰 자극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것이 이 책의 네 번째 의의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데스콜라의 논고에는 인류학의 역사를 다루는 논술이 곳곳에 있으며, 특히 래드클리프 브라운, 에밀 뒤르켐, 말리노프스키, 포르테스, 레비스트로스 등의 업적을 철학, 논리학 등의 맥락에서 논하고 있어서 학사적인 의의가 높다. 최근 십수 년 동안 이른바 거대이론이 배출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자연과 문화의 상호작용에 관한 인류학적 연구는 결코 방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향후 연구의 큰 발전의 계기가 되는 몇 가지 요소를 갖고 있다. 이 책의 각 논문에는 그러한 최신 연구가 풍부하게 담겨 있다. 이 속에서 보고(寶庫)를 찾아내어 미래에의 연구를 진행하는 데에서 특히 젊은 연구자들에게 큰 자극이 될 것이다.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존재물이 가진 특성과 동일화의 메커니즘, 존재물 간의 관계성에 초점을 둔 데스콜라의 분석은 분명 우리의 자연 인식과 세계관의 대전환을 촉구하는 기본 작업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던진 물음에 인류학뿐만 아니라 철학, 미학, 심리학, 사상사, 사회학, 커먼즈론을 포함한 다양한 인문, 사회학의 영역은 어떻게 응해야 할까? 이 책이 그 응답의 계기가 되리라 기대한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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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재산도 11표도 폐지: 34세의 미국 학자가 그리는 변혁_글렌 웨일 인터뷰

진행자: 에부치 다카시(江渕崇)

 

 

사유재산도 11표도 폐지하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나라미국에서 34세의 학자가 그 전제와 상식에 의문을 던지며 세계적으로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성장이 둔화하고 빈부격차만이 날로 커지는 자본주의를 넘어 디지털 시대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래디컬한’(근본적·급진적인) 처방전이란 무엇인가? 미국의 정치경제학자 글렌 웨일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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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부치: ‘래디컬한변혁이 필요할 정도로 세계는 병들었습니까?

 

웨일: 지난 30~40년간 세계 속에 파고들어 사람들을 갈라놓은 신자유주의 질서에 사람들은 깊은 불만과 위기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업률이 낮다 해도 사람들은 장래에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직업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술의 진보를 사회제도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맞는 제도로 혁신해야 합니다.

 

에부치: 당신은 이러한 현상을 스테그인이퀄러티(stagnequality)’라고 부르며 문제 삼습니다. 저성장(스태그네이션)과 격차확대(inequality)가 동거하는 상태라고요.

 

웨일: 추악한 조어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더 추악합니다. 한 줌만이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문제의 근원입니다. 미국은 과거 널리 생산거점이 흩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실리콘밸리와 뉴욕 등 몇몇 도시에 경제가 집중하고 부동산 급등으로 그런 대도시로의 이주 또한 어렵습니다. 토지 소유자와 기업가가 이익을 독점하고 인프라 투자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지방에서는 아마존 창고나 월마트가 압도적인 고용주가 됐습니다. 그러나 그 외 직장이 없기 때문에 경쟁 상대가 없어서 급료가 억제되고 있습니다. ‘매수자 독식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값싼 임금으로는 일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사람들의 능력이 헛되이 낭비되고 있습니다.

 

에부치: 시장에 맡기는 것이 나쁘다는 것인가요?

 

웨일: 학생 때 월가에서 인턴을 한 적이 있습니다. 파생금융상품으로 돈을 벌었는데, 실제로 한 일은 유해한 금융상품을 뿌렸을 뿐입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금융 위기가 터졌습니다. 시장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잘못된 방향으로 소수의 전횡을 허용하는 지금의 구조가 문제입니다.

 

에부치: 독점이 극에 달해 사회 불안이 고조됐던 19세기 후반 황금시대혹은 대공황 이후의 1930년대 등 과거의 전환기와 맞먹습니까?

 

웨일: 역사는 되풀이되지는 않지만 운()을 맞춘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자유 방임의 자본주의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는 점에서 그 시대들과 비슷합니다. 그때에도 새로운 비전을 마련해야 했고 뉴딜정책 등을 통해 상당 부분 비전이 실현되었습니다.

대외적인 긴장도 그때와 비슷합니다. 1930년대 당시 미국은 독일이나 일본과 대립했고, 지금은 중국이나 인공지능(AI)과의 장래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내거는 사회는 지금 안팎으로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에부치: 트럼프 정권은 사람들의 불만을 에너지로 삼고 있습니다.

 

웨일: 다른 나라와 긴장 관계를 만들고, 기업에 이익을 유도하여 고용을 늘리도록 하겠다.이 정책은 전쟁 전의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 시행한 정책의 온건한 재탕입니다. 전혀 생산적이지 않습니다. 트럼프 당선은 미국과 세계에 좋은 일이었다고까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현상 유지와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일깨워줬기 때문입니다.

 

에부치: 그렇다면 좌파는 어떻습니까?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자 지명을 목표로 하는 샌더스 상원의원 등 부유층에 대한 증세와 전국민 보험을 내거는 후보들이 젊은이들에게 인기입니다. (*이 인터뷰는 샌더스의 민주당 후보자 지명 운동이 한창인 20201월에 진행되었음.)

 

웨일: 문제 해결을 국가에 맡기는 부분이 근본적으로 취약합니다. 좌파가 기피하는 독점기업만큼이나 국가도 문제투성이입니다. 애당초 국가는 다수파를 따릅니다. 그 다수파가 트럼프를 선택한 겁니다. 좌파가 주창하는 바를 따져보면, 그들이 지금보다 더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해야 합니다. 지난해 유행한 현대화폐이론(MMT)은 국가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좌파의 좋은 사례로서 정부가 신이 아닌 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에부치: ‘3의 길을 주창한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정권 등 과거 서구의 중도좌파 정권이 국가와 시장 사이의 물꼬를 트려고 시도했습니다.

 

웨일: 현실은 두 시스템[국가와 시장]나쁜 점만 취하기였습니다. 미국 클린턴 행정부가 그 전형입니다. 증세로 경제를 왜곡하고 금융의 규제 완화로 경제위기의 씨앗을 뿌렸고, 민주주의의 열화를 초래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찾아내야 할 것은 어정쩡한 반반이 아닙니다. 밀턴 프리드먼의 자유주의보다 시장의 이점을 추구하는 동시에 칼 맑스의 사회주의보다 평등과 협동을 지향하는 사회입니다.

 

부동산, 공장, 통신에 필요한 주파수 등을 사회에서 공유하다

 

에부치: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웨일: 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방책을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사유재산의 폐지입니다. 어휘의 본원적인 의미에서 사유재산은 독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자산이라도 소유자가 높은 가격을 매겨 그것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도쿄에서 고층 빌딩들 사이에 단독주택이 있다고 했을 때, 이에 대한 제 의견을 말하자면 소유자에게 절대적인 권리를 인정한 나머지 토지가 유용하게 사용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동산과 공장, 통신에 필요한 주파수 등 자산의 대부분을 사회 전체가 공유해야 하는 겁니다.

 

에부치: 공산주의 말입니까?

 

웨일: 공산주의 아닙니다. 기업이나 개인은 그 자산의 이용권을 시장에서 사고팝니다. 그런 제도를 통해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하는 대립을 넘어선 새로운 경제가 가능해집니다. 이미 싱가폴에서는 부동산이 그렇게 취급되고 있어요. 앱 등의 기술을 활용해서 대상이 되는 자산을 널리 확산시키는 겁니다.

 

에부치: 어떻게 사고팝니까?

 

웨일: 내가 내 자신에게 이용권이 있는 자산의 가격을 마음대로 설정할 수 있도록 합니다. 공유자산이기 때문에 이용료로서 가격을 기준으로 매년 정률의 세금을 부과합니다. 그러면 가격 인상을 막을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 가격에 사고 싶은 사람이 나올 수 있으므로 반드시 매도 규정을 마련해야 합니다. 너무 낮은 가격으로 매매할 수 없고 자산에 대한 평가가 가격에 적절하게 반영되어야 합니다.

 

에부치: 그렇게 해서 격차를 줄이고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이지요?

 

웨일: 예를 들어 세율을 7%로 설정하면 앞으로 전망할 수 있는 수익이 그만큼 계속 줄어듭니다. 그래서 계산상 자산의 현재가치는 3분의 1로 줄어듭니다. 재산의 대부분이 사라지므로 격차는 줄어듭니다. 공유자산의 이용료로서 모은 세금을 기본소득 등의 형태로 전원에게 환원함으로써 한층 더 평등해질 수 있습니다. 토지와 자산이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유연하게 이동하고 성장도 가속화됩니다. 세율만 고안하면 투자 의욕은 유지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시장경제입니다.

 

에부치: 시장경제의 높은 불확실성 또한 사람들이 국가에 보호를 요구하는 요인입니다. 시장 기능의 강화는 사회를 더욱 불안정하게 하지 않을까요?

 

웨일: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부동산 소유자 등 가진 자만이 매우 안정되어 있고 그 반면에 노동자와 세입자 등 못 가진 자는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불안정합니다. 새로운 구조에서는 누구나 사회의 전 자산에 대해 부분적인 소유자가 되어 그 이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모두가 같은 수준으로 안정될 것입니다.

정말로 소중하고 양도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으면, 그만큼 가치를 높이 평가해서 많은 세금을 지불하면 됩니다. 보험과 똑같습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을 분단하고 고독으로 몰아넣었던 시장 시스템을 사람들을 이어주는 것으로 다시 디자인하자는 겁니다.

 

에부치: 이제는 독점이라면 디지털 공간입니다.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거대 플랫폼을 분할해야 합니까?

 

웨일: 정치 권력으로서의 왕을 용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산과 판매에서도 왕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이 독점 금지의 원칙입니다. 다만 왕을 죽여 버리지 않고 민주주의 안에서 설명가능하게 놓아두는 방법이 있습니다. 거대 플랫폼을 분할하면 편리함이 손상되는 등 불이익도 큽니다. 그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 민주주의를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에부치: 어떻게 말입니까?

 

웨일: 지금의 디지털 경제는 봉건제와 같습니다. 이용자는 소작인입니다. 플랫폼이라는 영주의 토지에 살면서 꾸준히 경작합니다. 데이터라고 하는 수확은 영주가 삼켜버립니다. 문제는 소작인에게는 다른 곳으로 이동할 자유도 없고 구조를 개선시킬 동기도 없다는 것입니다.

데이터 제공을 노동으로 위치짓고 플랫폼이 그 대가를 지불하게 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봉건제를 벗어나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이용자는 가격 등의 협상력이 없으므로 노동조합을 참고로 하는 데이터 조합과 같은 조직으로 대항합니다. 생산한 데이터에 대한 컨트롤을 되찾자는 겁니다.

 

에부치: 근무처인 마이크로소프트(MS)로서도 심상치 않은 이야기 아닌가요?

 

웨일: 만약 존재 가치를 드러내는 길을 찾지 못한다면 내 제안의 상당 부분은 MS에도 파괴적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MS는 테크놀로지를 구사해서 미래를 개척하는 것을 선호하는 회사입니다. 저는 자유롭게 연구하고 있습니다.

 

관심과 절실함에 따르는 복수의 표

 

에부치: 당신은 민주주의의 대원칙으로 생각되는 11표도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웨일: 민주주의의 원리는 정부가 사람들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11표의 다수결에서는 소수파의 이해가 반영되지 않습니다. 동성결혼이 쉽게 허용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재판관이라는 제한된 사람들에게 판단을 맡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에부치: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웨일: 여기서도 시장의 힘을 이용합니다. 유권자에게 일정한 포인트를 나누어 주고, 그것을 밑천으로 표를 사는구조입니다. 관심과 절실함에 따라 특정 의제에 복수의 표를 던질 수 있도록 합니다. 동성결혼 의제에 무관심한 다수파는 적게 투표하는 반면 절실한 당사자는 최대한 많은 표를 던지려고 할 겁니다.

표를 많이 던질수록 한 표당 가격이 비싸지도록 설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표에 1포인트가 필요하다면 2표에는 4포인트, 3표는 9포인트. 표 수의 제곱의 값을 매기면, 가령 10표를 사려면 100포인트나 필요합니다. ‘2차 투표라면 강한 선호를 가진 소수자에 의한 극단적인 매점을 막으면서 그 이익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습니다. 미국 콜로라도주 의회는 예산의 우선순위를 둘러싼 의원들의 신경전을 반영하기 위해 이 시스템을 실천했습니다.

 

에부치: 그렇지만 역으로 업계 단체의 압력 등 목소리 큰 소수자도 문제 아닙니까?

 

웨일: 사회는 순수한 다수결의 원리만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의회에서의 대표제, 로비, 단체 교섭을 통해서도 소수자의 목소리가 전달됩니다. 그러나 ‘2차 투표는 훨씬 투명한 형태로 소수자의 이익을 반영할 수 있고 이익 유도와 부패를 막아낼 수 있습니다.

 

래디컬한 구상으로 사람들을 촉발하다

 

에부치: 당신은 일반 시민이 이민자의 신원을 가져와서 이익을 얻는 구조 혹은 기관투자가의 지배력을 무너뜨리는 기업통치개혁 등 폭넓고 참신한 제언을 하고 있습니다.

 

웨일: 그렇듯 다양한 제언의 기저에 공통으로 흐르는 것은 사회제도를 개량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로서 다뤄야 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전보에서 전화를 거쳐 텔레비전으로 진화한 것처럼 제도도 발명이나 비약적인 개량이 가능합니다. 또 민주주의와 시장이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생각도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기업과 시장을 민주화하는 것과 더불어 투표를 시장화해야 합니다.

 

에부치: 독점금지법, 노조 강화, 세제 개편 등 기존 제도를 점진적으로 개선해 나가는 방법도 있겠습니다. 너무 급진적인 제안은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해서 반대로 현상 유지에 가담하지 않나요?

 

웨일: 폭넓은 변혁의 일환이라면 그러한 정책에 찬성합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위기에 당면해서는 급진적인 구상을 통해 사회가 목표로 해야 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사람들을 촉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단기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사람들을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존을 창업한 제프 베이조스(Jeff Bezos) 씨를 보세요. 전 산업을 변혁하는 지극히 급진적인 비전이 있기 때문에 거기까지 이르는 구체적인 방안을 착실히 밀고 나갈 수 있는 겁니다.

 

에부치: 독점이 일꾼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경제학자가 주목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또 좌우 양 정파 모두 경제학자의 대세는 급진적인 제안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웨일: 경제학자들은 기업합병 컨설팅이나 정부 업무를 맡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세밀하고 세련된 분석 모델을 만드는 데에 몰두합니다.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와 격투하려 하지 않습니다. 경제학자가 기술 관료의 일부가 돼 버렸습니다.

 

에부치: 당신은 세계 지도자들이 모이는 세계경제포럼 연차총회(다보스 회의)에 등판합니다.

 

웨일: 그들은 자본주의의 본질을 재고하기 시작했지만, 충분히 창조적이지 않다는 것이 걱정입니다. 나의 역할은 그들의 사고를 멀리까지 보내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압력이 충분히 높아질 때에 실제로 변혁을 일으키는 것은 종종 엘리트이니까요.

 

私有財産11廃止 34米学者変革〉 《朝日新聞2020121.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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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 신문에서 코로나 이후의 세계를 말하다: 현대 지성들의 시선이라는 기획으로 진행되는 코너에서 마르쿠스 가브리엘과 글렌 웨일의 인터뷰 기사를 번역해 둔다. 코로나 팬데믹은 뜻밖의 사태라기보다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낼 따름이다. 그래서 코로나는 우리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활발히 논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가브리엘은 도덕 없는 테크놀로지에 대해 인류가 보편적인 도덕성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웨일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혁을 이야기한다. 글렌 웨일의 논의는 경쾌할 정도로 참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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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체주의에 정신의 백신을: 마르쿠스 가브리엘 인터뷰

진행자: 다카쿠 준(高久潤)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우리를 새로운 전체주의로 이끌지도 모른다. 독일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코로나 사태의 세계를 그렇게 독해한다. 디지털화가 전체주의와 연결된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밝은 미래를 찾아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다카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감염 확대가 일어나기 전에는 AI 기술의 발전이 인간과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는 논의가 유행했습니다.

 

가브리엘: 우리는 최근까지 엄청난 잘못을 믿어왔다는 것이 명백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테크놀로지의 진보 그 자체에 의해 세계가 더 좋은 곳으로 바뀐다거나 우리 사회가 해방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기술 발전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새로운 전체주의라고도 부를만한 상황입니다. 디지털 권위주의 체제라고 말해도 되겠습니다. 다만 국가가 전체주의적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감시의 주체는 정부가 아닙니다.

 

다카쿠: 국가가 아니라면, 무엇이 전체주의화하고 있다는 것입니까? 디지털화가 전체주의와 연결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가브리엘: 저는 전체주의의 특징 중 하나를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구별 상실로 보고 있습니다. 20세기 역사를 되돌아보면, 일본도 과거에 그랬지만 전체주의화하면 국가가 사적인 영역을 파괴합니다. 사적 영역이란 좀 더 알기 쉽게 말하면 개인의 속마음입니다. 국가는 감시를 통해 그것을 찾아서 통제하려고 했습니다. 반면 현대는 그와 다릅니다. 감시와 통제의 주체는 정부가 아니고 구글이나 트위터 등으로 대표되는 테크놀로지 기업입니다.

우리는 지금 SNS 등을 통해 사적인 정보를 스스로 온라인에 올리고 테크놀로지 기업은 그 정보를 기반으로 해서 우리를 지배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자발적으로 정보를 기업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국가는 이러한 기업을 규제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수수방관합니다. 바꿔 말하면, 테크놀로지 발전이 도덕적 진보와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민주적으로도 정당화(legitimate)되지 않는 일부 테크놀로지 기업이 사회와 경제의 많은 부분을 좌지우지합니다. 게다가 시민 스스로가 그에 대한 자발적인 종속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전체주의는 바로 이러한 상황입니다.

 

디스토피아 소설이 현실로

 

다카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세계적인 감염 확산과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가브리엘: 몇 가지 짚어야 할 점들이 있습니다. 우선 미증유의 바이러스 위기로 인해, 감염이 본격적으로 확대하기 반년 전만 해도 시민들이 상당히 반발했을 정책이 현실화하고 있습니다.

감염 확대를 억제하기 위한 앱의 개발과 도입이 그러합니다. 이 자체의 옳고 그름은 일단 접어두면, 그것은 테크놀로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의 구별을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지는 기술적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코로나 사태에서 경제 전체는 수축하는 경향을 띱니다. 일이나 커뮤니케이션의 온라인화가 진행됨에 따라 테크놀로지 기업은 수익을 올리고 영향력을 확대해갑니다. 코로나 이전부터 제기된 문제이지만, 그러한 상황이 지금 더욱 노골화되고 있습니다.

 

다카쿠: 감염 억제를 위해 일정 기간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구별되지 않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 않을까요?

 

가브리엘: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우리는 이동의 자유와 내면과 관련된 자유를 제약받는 것에 대해 크게 반발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권위주의 체제라는 말을 사용하면, 러시아의 푸틴 체제나 중국의 시진핑 체제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확실히 저 자신 또한 이 두 나라와 같은 권위주의 체제를 전체주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수차례 언급되었다시피 중국은 기술과 자본주의 발전을 결합한 디지털 감시체제를 만들어왔습니다. 20세기에 쓰인 디스토피아 소설의 대표작인 조지 오웰의 1984의 세계가 그대로 실현되는 듯합니다. 물론 조지 오웰이 이 책을 쓸 당시에는 구소련의 스탈린 체제 따위를 염두에 두었을 테지만, 오히려 기술이 발전한 21세기의 오늘날에 이르러 저 세계가 본격적으로 가동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전체주의는 국가만으로 실현되지 않고 기술 발전의 악한 측면이 큰 역할을 수행합니다.

 

다카쿠: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고요.

 

가브리엘: 현실은 확실히 반민주주의적인 무기가 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테크놀로지는 우리의 일상생활의 행동 데이터의 집적을 통해 행동 패턴을 예측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의식주에 강한 영향을 줍니다. 지난 미국 대통령선거가 분명히 보여주었듯이, 이러한 기술 발전은 우리가 존중해야 할 정치적인 의사결정을 좌지우지하고 지정학적인 리스크를 만들어냅니다. 미국의 테크놀로지 기업이 그것을 바라든 바라지 않든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테크놀로지의 비민주적인 힘에 의해 트럼프 정권이라는 정치적 악몽이 생겨난 것이지요. 미국 사회가 존중해 온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도전과 공격인 것입니다.

 

다카쿠: 꿈도 희망도 없는 이야기네요. 다만 기술 발전이 불러온 경제발전은 세계적으로 보면 선진국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켜 왔습니다. 기술적 발전이 장밋빛 미래를 가져오지 않는다 해도 사회를 좋게 만들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요?

 

가브리엘: 저는 무슨 비관적인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도덕적으로도 지난 200년간 발전해왔습니다. 확실히 역사적으로 대량 학살이나 폭력의 응수도 있었지만, 극복하려고 노력해왔습니다. 기술 자체보다 우리는 지금 현대에서의 도덕적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다카쿠: 도덕이 기술 발전의 방향성을 바꿀 수 있을까요?

 

가브리엘: 저는 장기적으로 보면 낙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의료 물자 등을 둘러싸고 국가 간 대립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문제가 보편적이고 국경을 넘은 문제라고 하는, 말하자면 인류 공통의 과제라는 의식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각국 정부의 정책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정치체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런 의식이 생겼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도덕적 의식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문제에 그치지 말고 대재앙을 초래하는 기후변동 등 더 큰 문제로 확산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하기 나름입니다.

 

다카쿠: 올가을 <아사히 지구회의 2020>(2020.10.11~15)에서 가브리엘 선생이 문제 삼는 새로운 전체주의의 행방을 논의합니다.

 

가브리엘: 지금 요구되는 것은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미래에 대한 더 높은 수준에서의 연대와 협력입니다. 그것은 물론 서구만으로 실현될 수 없습니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보면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자신의 독자적인 방법으로 국제질서에 참여하여 매우 인상적인 적응을 했습니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그 후의 전쟁에서 비참한 결과를 얻었지만, 일본은 전쟁이 끝난 후 한층 더 독자성을 발전시켰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유럽과 일본이 협력해서 지속 가능하며 윤리적으로 깊이 있는 미래를 열어가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일본 사회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타자의 마음을 읽는 것에 능숙하고, 게다가 이러한 경향을 독자적인 비즈니스에 접목해서 무수한 성공을 거뒀습니다. 타자에 대한 배려 그리고 타인과의 강한 정신적 유대는 보편주의적 도덕철학과 접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조합의 아이디어는 국경 너머의 보편을 생각하는 데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보편주의적 가치에 기반합니다. 국민, 계급, 혹은 세대 등 다양한 분단을 넘어설 수 있는 보편적인 정신의 백신을 만드는 데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논의해봅시다.

 

 

新全体主義精神のワクチンを〉 《朝日新聞202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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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태는 장래를 비추는 시연’: 글렌 웨일(Glen Weyl) 인터뷰

진행자: 에부치 다카시(江渕崇)

 

정치도 경제도 극소수가 지배하는 이 세계는 래디컬한(급진적·근본적) 변혁을 필요로 한다.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소속 정치경제학자 글렌 웨일 씨(35)는 디지털 기술과 시장의 힘을 활용해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사람들의 손에 되찾아오기 위한 아이디어를 연일 쏟아내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팬데믹으로 권력의 집중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해지고 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 것인가?

 

에부치: 부와 권력의 집중을 벗어나고자 사유재산을 없애고 공유로 하여 그 이용권을 경매에 부친다는 참신한 제안을 거듭 제기해왔습니다. 팬데믹의 한가운데에서 래디컬하게 시장을 디자인한다는 사고 태도는 어디까지 유효할까요?

 

웨일: 코로나 대책에 성공한 곳은 그러한 사고방식을 세계에서 가장 깊이 실천해온 국가나 지역이었습니다. 그중 한 곳이 대만입니다. 마스크를 나눠주거나 감염자를 추적하는 앱 개발 등에 정부가 적극 나서서 희생자도 경제 타격도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대책을 이끈 디지털 담당 각료인 오드리 탕(唐鳳) 씨는 제가 창설한 단체인 <래디컬 익스체인지>의 이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대만의 사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참가형의 디지털 민주주의를 희구하는 사람들의 에토스(기풍, 습성)입니다. 그것이 시민사회에서 보텀업(bottom-up)으로 만들어진 기술에 대한 신뢰로 이어져 대책에 정통성을 부여했습니다.

 

에부치: 또 다른 성공 사례가 있을까요?

 

웨일: (전자정부를 일찍부터 확립했다고 알려진) 에스토니아입니다. 대만이나 일본과 달리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경험이 없어서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사태가 악화일로였습니다. 하지만 대만을 본뜬 대책을 하나하나 공유해서 결과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잘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트럼프가 문제가 아니다

 

에부치: 감염자와 사망자가 세계 최다이고 경제 침체도 심한 미국은 분명히 실패한 사례입니다. 트럼프 정권은 무엇을 근본적으로 잘못한 걸까요?

 

웨일: 저는 트럼프와 그의 정권이 무조건 비난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권에 주된 책임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잘못은 관료조직, 굳이 트럼프의 말을 빌리면 딥 스테이트”(그림자 정부; 정부 내 정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일관되게 공중을 오도하고 정치 지도자들의 의사결정을 어지럽혔습니다.

민주당이 자주 칭찬하는 CDC(질병대책센터)에서도 처음에는 마스크 착용을 권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규모의 검사가 필요한지도 대통령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검사와 감염자 추적, 격리 태세를 확충하지 않으면 록다운을 몇 번이나 해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에부치: 그렇다고 해도 팬데믹을 경시하는 트럼프의 자세는 끔찍합니다.

 

웨일: 물론 트럼프도 책임을 회피하고 문제를 정치화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늘 그렇듯 분단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우리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인물이 아니라 차이를 넘어 서로 정직하게 대화하는 것을 막고 있는 깊은 분단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CDC의 불성실함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들은 정치 지도자도 공중도 신뢰하지 않고, 급기야 스스로에게 불신을 강요했습니다. 양쪽 다 잘못을 인정해야 비로소 우리는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가는 최고치를 경신하고, 고용악화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에부치: 선진국에서는 예전부터 저성장(스태그네이션)과 격차확대(inequality)가 동시에 진행되는 어려움을 겪어 왔습니다. 당신이 스테그인이퀄러티(stagnequality)’라고 부르는 문제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이것이 더욱 노골화되었습니다.

 

웨일: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일찍이 파산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대개는 서서히 그리고 갑자기 찾아온다고요. 글로벌화한 자본주의에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서구식 정치경제 시스템에 대한, 특히 젊은 세대의 신뢰는 계속해서 하락해왔습니다. 그러다 코로나 사태로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75%는 지금 형태의 자본주의가 보통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믿지 않습니다.

 

에부치: 미국에서는 수천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진 한편, 제한된 플레이어의 시장 독점이 더욱더 진행됐습니다.

 

웨일: 세계 공황 이후 고용 위기가 닥치는 와중에도 주가는 계속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습니다. 그사이 인종이나 지역 분단을 둘러싼 사회 불안이 고조되고 때로 폭동으로 발전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사회 시스템을 근본부터 뜯어고치지 않으면 사태는 악화될 뿐입니다.

가장 있을 수 있는 대안은 중국 공산당 같은 기술주의적 권위주의 체제입니다. 서구에 맞는 방식으로는 실리콘밸리식의 알고리즘(컴퓨터 프로그램의 계산 순서)에 의한 지배로 형태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좀 더 인간적이고 다원적인 선택지를 가질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합니다.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지키고 싶다면 말입니다.

 

부족한 전문가들의 상호 이해

 

에부치: 팬데믹의 타격을 완화하고자 미국 정부가 전대미문의 엄청난 규모의 재정지출을 단행했습니다. 실업보험 대폭 확충 등 좌파가 주장해온 정책도 속속 실시했습니다.

 

웨일: 전 세계 정부와 중앙은행의 경제위기 대처는 어떤 면에서는 매우 괄목할 만하고 신속하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좌파가 선호하는 것을 포함한 전통적인 정책 수단이 얼마나 쓸모없는지도 그 어느 때보다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재정정책과 금융정책의 대대적인 부양책은 팬데믹의 핵심 문제에 대처할 수 없었습니다. 검사, 추적, 격리 그리고 마스크 착용. 감염을 막기 위한 공공 공간 재조합. 이러한 대책을 통해 감염병을 통제하는 데 실패한 겁니다.

 

에부치: 원래 경제대책 그 자체는 감염 방지를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경제가 붕괴하지 않도록 전통적인 수단을 동원하면서 그와 동시에 착실히 방역대책을 진행하는 것이 상식적인 길 아닌가요?

 

웨일: 미국의 경우 경제 전문가들은 팬데믹이 심대한 타격을 초래할 것이라는 전제 아래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한편으로 공중위생 보건 관계자들은 정권이나 재정 당국으로부터 별다른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범위의 방역책에 집중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전제가 현실이 되었습니다.

원래는 감염병을 억제하는 데 필요한 수단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도록 경제자원을 푸는 방법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양측 전문가들은 서로 의사소통하고 조정하는 데 실패한 겁니다.

 

에부치: 그 점은 나라마다 차이가 큽니다.

 

웨일: 감염병 대책을 착실히 실행한 곳은 대규모 부양책 없이 경제를 회복시키고 많은 생명을 지켰습니다. 실패한 국가는 전염병 대응에 필요한 금액을 훨씬 웃도는 현격한 지출을 단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도 생명도 지킬 수 없었습니다. 대신 주식시세를 끌어올려 부자들에게 부를 재분배 해버렸습니다.

 

기계가 사람을 무가치하게 만드는가?

 

에부치: 많은 국가에서 가계에 직접 현금을 지급함으로써 모두에게 일정한 돈을 주는 기본소득(BI)이 극히 부분적으로나마 실현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웨일: 코로나 사태는 디지털 경제의 미래상을 비추는 시연과 같은 것입니다. 기본소득 도입이 사회에 무엇을 가져오는지를 이번 자극책의 결과가 보여주고 있다면 어떨까요? 기본소득 등 테크놀로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소리높여 제창하는 미래상은 매우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공공재를 더 효율적으로 나눌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에부치: 인공지능(AI)이나 자동화의 진전과 기본소득은 강하게 관련되어왔습니다.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목소리는 코로나 사태로 오히려 강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웨일: 정책 수단의 하나로서 지금처럼 이따금 사용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의 전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돼 혼란스럽습니다.

 

에부치: 무슨 말인가요?

 

웨일: 우선 기계가 사람의 일자리를 뺏는다는 논의에 대한 것입니다. 경제와 사회에 대한 수많은 사람들의 공헌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방향으로 디지털 경제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무가치해지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논의는 이를 보강할 뿐입니다. 기본소득을 둘러싼 담론은 문제에 대한 합리적 대처가 아니라 (근거 없는 예언이라도 사람들이 그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예언이 실현되는) ‘예언의 자기 성취에 빠져 있을 따름입니다.

 

에부치: 사람들이 힘을 되찾는 계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웨일: ‘완벽한 시장경제라는 판타지에 산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기본소득은 독점기업이 사람들을 착취하고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처할 수 없습니다. 기본소득이 독점기업에 대한 과세에 의존한다면 사람들의 효율성을 더 떨어뜨려 사태는 점점 악화될 것입니다.

 

에부치: 10월로 예정된 <아사히 지구회의 2020>에 온라인으로 등단합니다. 포스트코로나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해 청중에게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웨일: 우리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각자 개별적으로 행동하면 그만이고 통상적인 시장 프로세스에 의해서만 조정된다.지금까지 자본주의는 그것을 전제로 삼아왔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는 고도의 자본주의가 기능하려면 더 다양하고 복잡한 형태의 집합적인 행위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만약 열린 사회와 시장을 계속 원한다면 독점기업이 아닌 민주적인 메커니즘을 통해 필요한 것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제도의 근본적인 재고가 필요합니다.

수십 년 혹은 몇 세기 동안 국경 혹은 선거민이 바뀌지 않는 국민국가의 틀은 지금 우리가 직면한 문제에 대처하기에는 대단히 경직되어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에서의 무역과 여행의 붕괴를 보십시오. 국민국가에서 민주주의와 국제시장의 유연성을 통합한 새로운 메커니즘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가까운 장래에 우리의 미래를 중앙에서 계획하려는 세력에게 패배하게 될 것입니다.

 

 

コロナ将来像映試写」〉 《朝日新聞202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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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태생의 독일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2013년, 한국어번역본은 2017년)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신실존주의』(2018년)는 가브리엘이 ‘마음의 철학’에 대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고, 그에 대해 조슬랭 마크뤼르,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 1931~, 영미 철학자), 조슬랭 브누아(Jocelyn Benoist 1968~, 프랑스 철학자), 안드레아 케른(Andrea Kern 1968~, 독일 철학자) 등 4인의 철학자가 각각의 입장에서 응답한 책이다(그들의 논의가 꼭 들어맞지는 않는 듯싶다─가브리엘의 두 편의 논문과 서두의 도입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크게 두 가지를 집어보겠다.

 

1. 가브리엘은 원래 구성주의(constructivism)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신실재론’을 내세우면서 이름을 알렸다. 구성주의란 극히 단순화해서 말하면, 현실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다양한 해석이나 표상이 현실을 이리저리 다루도록 하는 사회적 작용(앎, 미디어, 역사 등등)이 있을 뿐이라는 사고방식이며, 어찌어찌해서 반세기 가까이 큰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예를 들어 개 짖는 소리라는 불변의 현실은 존재하지 않고, 사람들은 단지 “왈왈”이나 “멍멍”이라는 다양한 해석을 현실로 착각할 뿐이다─이 입장에 선 인문학 연구자들은 소위 ‘언어론적 전회’라는 이름으로 언어적으로 구축된 괄호 쳐진 ‘현실’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갔다. 현실 자체는 실재하지 않고 다만 임의의 퍼스펙티브에서 이뤄지는 해석의 연쇄밖에 없으므로 현실처럼 행세하는 언어에 대해 사고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가짜뉴스나 미디어 포퓰리즘 혹은 역사 수정주의가 판을 치는 것을 보더라도, 구성주의는 “목소리 가장 큰 놈이 그때마다 괄호 쳐진 ‘현실’을 구축해서 그것을 기정사실화하는” 상황을 추인하는 꼴이 아닐까? 애당초 언어 너머의 현실이란 정말로 ‘실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구성주의에 반한다 해도 실재성에 접근하기 위한 철학을 다시 조직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문제의식을 좇아 최근 십수 년간 실재론[신실재론]과 유물론[신유물론]이 급속히 각광 받기 시작했다(※). 가브리엘은 이 조류의 유력한 선두주자이며, 복수의 ‘의미의 장’의 객관적인 실재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책 『신실존주의』에서는 구성주의와는 또 다른 비판 대상을 새롭게 조준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자연주의다.

  가브리엘에 따르면, 자연주의란 마음을 물리적인 메커니즘으로 환원하려는 선택을 말한다. 즉 뇌과학이나 신경과학을 파고들면 결국 마음은 낱낱이 해명될 수 있다는 입장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의 생각에는 이러한 ‘자연주의적 세계관’은 이미 막다른 골목에 와 있다. 가브리엘은 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David John Chalmers 1966~, 언어철학자)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마음이든 의식이든 정신이라는 것은 뇌의 메커니즘으로 결코 환원할 수 없다고 본다. 물론 뇌에 기반하지 않고서도 마음이 어디선가 기적적으로 나타난다는 신비주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뇌가 없다면 마음도 생기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뇌의 반응을 완벽하게 기술한다고 해서 마음이 해명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뇌로부터 마음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질적인 도약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분의 총화는 반드시 전체와 같지 않다는 흔한 논법을 상기시킨다. (잘 알려진 것으로는 루소의 ‘일반 의지’가 있다─인민의 특수 의지를 모두 합친다 해도 일반 의지에 도달하지 않는다.) 가브리엘은 그것을 ‘자전거와 사이클링’ 간의 관계에 비유한다. 자전거=뇌는 사이클링=마음에 있어서 필요 불가결하지만, 자전거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사이클링에 충분하지 않다. 자전거로부터 사이클링에 도달하려면 질적인 도약이 필요하다. 이 도약을 무시하고 자전거에 대해 아무리 해석한다 해도 사이클링을 알 수 없다…. 이와 같이 가브리엘은 마음을 뉴런(뇌)의 반응으로 환원하려는 자연주의를 인간 정신에 대한 몰이해의 발로로서 철저하게 비판하고자 한다.

 

2. 그 연장선상에서 가브리엘은 두 차원을 병치시킨다. 하나는 자연종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이다. 예를 들어 가브리엘이 생각하기에, 인간은 동물의 일종(자연종)이며 그만큼 동물과 마찬가지로 과학이나 의학의 대상일 수 있지만, 그 차원에만 환원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또 다른 차원, 즉 “우리라는 신체가 모습을 보이는 차원, 인간이라는 ‘의미의 장’의 차원”과 이어지는 ‘정신’(Geist)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정신의 차원에서 인간은 인간 이외의 것과 구별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연종이면서도 그것과는 다른 차원으로 도약할 수 있다. 여기서도 또한 인간이기 위해서는 동물적 신체=자전거가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정신=사이클링에 이를 수 없다는 논법이 관통된다.

  나아가 가브리엘은 “심적인 것의 존재론”도 언급한다. 즉 작가의 정신이 만들어낸 가공의 등장인물(예를 들면 맥베스)에 대해서도 실재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혹은 마음속에 떠오른 허망도 설령 분명히 헛된 것이라 해도 그것이 현실을 바꿀 수 있음을 가브리엘은 강조한다. “보스 입자(boson)에 대한 나 자신의 이해가 틀렸다고 해서 그 입자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허망은 자기 자신을 바꿔버린다. 게다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꿔 놓는 경우도 많다.” 자연종이 아닌 정신(허구/허망)이 현실을 바꾸는 사례는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 세상은 온통 코로나바이러스로 난리다. 윌리엄 버로스(William Burroughs 1914~1997, 미국 소설가. 자신의 마약중독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마약 환자의 환각과 공포를 소설과 시로 다루었다.)의 “언어바이러스설”을 그대로 옮긴 것처럼 지금 세계는 코로나바이러스에 더해 마치 바이러스인 것처럼 숙주=미디어에 잠입해서 증식하는 바이러스 관련 유언비어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는 바이러스를 모방하듯이 바이러스에 대해 “열광적으로” 말하며, 그 이야기에 타자를 ‘감염’시키고 있다. 가브리엘의 용어로 말하면, 바이러스에는 자연종으로서의 바이러스와 정신(이 만들어낸 허구/허망)으로서의 바이러스가 있으며 이 모두가 사회에 영향을 끼칠 만큼 실재성을 갖추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바이러스가 퍼진 크루즈선의 내부사정에 대해 객관적인 보도도 하지 않고 해외전송의 정확한 정보 발신에도 기여하지 않은 채로 날로 증가하는 확진자 수를 선정적으로 보고하는 일본의 매스미디어는 확실히 나쁜 바이러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승객의 트위터를 인용할 뿐이라면 저널리즘은 필요치 않다.)

 

*

 

그런데 자연주의를 비판하면서 정신의 고유성을 강조할 때, 신실존주의는 “신실재론”이라는 가브리엘의 간판이 과연 필요한 것일까? 가브리엘은 구성주의(=현실은 해석으로 환원될 수 있다)에 대해서는 실재론(=해석 너머에 ‘의미의 장’이 있다)를 내걸고, 자연주의(=마음은 뇌로 환원될 수 있다)에 대해서는 관념론(=뇌 너머에 마음이 있다)를 내거는 것처럼 보인다.─물론 이렇게 설명하는 데에는 약간의 왜곡이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이 설명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다. (덧붙이면 가브리엘의 지적 출발점은 독일 관념론[특히 피히테의 관념론을 내재적으로 비판한 셸링 철학]에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의 철학은 정체가 불분명하고 그다지 칭찬받을 만하지 않다.

 한 가지 말해둘 것은 자연주의에 대한 이 책의 비판 자체는 결코 이상한 논의가 아니다. 사실 마음이나 의식에 관한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다 기술할 수 없으며, 지금의 뉴런 중심주의는 사악한 이데올로기로 전화될 위험성 또한 있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논문에는 다양한 논점이 잘 정리되어 있어서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하다. 다만 철학에 대해서는 구경꾼의 입장인 나로서는 이 책의 논의가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전체적으로 문제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세 가지로 간단히 적어둔다.

 

1. 팬데믹을 포함한 여러 문제에 간단하게 적용되는 이론은 이론으로서 별거 아닐 수 있다. 이 책을 포함해서 가브리엘의 저작은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위험한 것이 아니라 비교적 온건하고 상식적이다(이 점은 약 10년 전에 한창 붐을 일으킨 마이클 샌델의 공동체주의와 비슷하다). 적어도 가브리엘은 과거 공저(『신화, 광기 그리고 웃음―독일 관념론의 주체성』, 2011년, 인간사랑)를 함께 낸 슬라보예 지젝과 같은 악마적 재주를 파는 타입은 아니다. 철학 스타가 출현하기를 고대하는 분위기 속에서 가브리엘의 사상이 과대평가된 면도 부정할 수 없다. 그야말로 일부 출판인과 언론인의 ‘마음’속에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이 팽창하고 있을 뿐이 아닌가.

 

2. 자연주의가 인간을 뉴런(신경)으로 환원한다면, 신실존주의는 인간의 인간다운 이유를 푸쉬케(심적인 것)로 환원한다. 하지만 이 중요한 마음(정신)의 움직임에 대해서 가브리엘은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허구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다양한 능력”을 꼽을 정도여서 분명하게 말하면 평범하기 그지없다. 자연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좋지만 하찮은 인간주의로 돌아서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후퇴일 수 있다. 게다가 ‘정신’의 유무를 통해 인간을 규정하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신체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태아는 어떻게 다룰 것인가? 태아는 인간이 아닌가? 혹은 반대로 동물에게는 마음은 없는가? 의문은 끝이 없다. 이 책은 부분부분 “인간 이외”라고 간주되는 것들을 부당하게 경시하는 것 같다.

 

3. 제2차 세계대전 후, 하이데거라는 거성을 만들어내면서도 나치즘에 이른 독일을 대신해서 프랑스가 오랫동안 철학의 거점이 되어 왔다. 전후 독일의 사상은 주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학문을 잇는 사회학이나 정치사상에 의해 명성을 유지해왔다. 그 가운데 가브리엘은 독일에서 오랜만에 나온 철학의 신예임에 틀림없고, ‘신실존주의’라고 명명한 것에서도 그 야심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브리엘은 신실존주의가 샤르트르의 실존주의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에 대해 거의 다루지 않는다(서두에서 가브리엘이 약간 언급하는 정도). 생각해보면 ‘인간’을 다루는 방식에서 신실존주의가 실존주의보다 진전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대작 『사르트르의 세기』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고 말한 사르트르에게서 굳이 ‘실존주의는 반휴머니즘이다’라는 또 다른 급진적인 측면을 읽어내려 한다. 메를로-퐁티 또한 유아의 세계에 관한 뛰어난 통찰을 남겨주었다. 이런 깊이를 솔직히 인간주의에 바탕을 둔 신실존주의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여하간 최근의 유물론[신유물론]이나 실재론, 또는 인지과학이나 유전자공학은 철학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그로 인해 유통기한이 끝날 뻔한 ‘인간’에 대해 가브리엘은 자연주의를 적으로 삼으면서 다시 한번 새로운 위치를 설정해주려고 한다. 이 신실존주의의 시도 자체는 흥미롭다. 하지만 그 싸우는 방식에 대해서는 납득하기 어렵다. 결국 지금은 과도기일 것이다.

 

 

(※) 이 점에 대해서는 『현대사상』 2018년 10월 임시증간호에 실린 마우리치오 페라리스(Maurizio Ferraris 1956~, 이탈리아 철학자)의 논고인 「새로운 실재론」에서 자세하게 언급된다. 덧붙여 이 호의 좌담회에서 미야자키 유스케(宮崎裕助)가 지적하듯이, 가브리엘이 포스트모던 사상을 ‘구성주의’의 이름으로 한데 묶는 것은 이상하다. 왜냐하면 프랑스의 포스트 구조주의자들은 오히려 그러한 현실의 구성작업이 모순을 내포하며, 이른바 내재적인 오류에 직면하는 데에서 유물론적인 계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의 포스트모던 비평에도 해당한다. 하스미 시게히코(蓮實重彦), 가라타니 고진, 나카자와 신이치, 아사다 아키라(浅田彰), 아즈마 히로키 등은 각각 다루는 대상도 이론도 크게 다르지만, 대체로 유물론을 자신의 사상에 수용해 왔다. 예를 들어 아즈마 히로키의 『존재론적, 우편적』은 주체의 균열(=존재론적/지젝적/독일 관념론적)뿐만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의 실패(=우편적/데리다적/유물론적)로부터 ‘불가능한 것’을 사고한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더구나 그들은 실재론(유물론)이 관념론보다 낫다고 하지도 않는다. 가라타니는 1984년 예리한 평론 「비평과 포스트모던」에서 알튀세르를 끌어와 “관념론이 혁명적인 ‘의미’를 갖는 시기와 장소가 있고, 유물론이 보수적인 ‘의미’를 갖는 시기와 장소가 있다”고 서술하고, 니체를 참조하면서 “주관에 물어야 하며 주관에 물어서는 안된다”는 패러독스를 이끌어낸다. 우리는 결국 이런 패러독스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아가 가라타니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아도르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판적 사상의 목적은 과거 주관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버려진 왕좌에 객관을 앉히려는 것이 아니고─왕좌에 모셔진 객관 또한 하나의 우상일 뿐이다─, 이러한 계층 질서를 폐기하려는 것이다”(『부정변증법』). 실재론이냐 관념론이냐, 객관이냐 주관이냐, 둘 중 하나를 ‘왕좌’에 앉히려는 것이 잘못이다.

 

 

출처: https://realsound.jp/book/2020/02/post-51006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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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의 글은 마르쿠스 가브리엘 욕망의 시대를 욕망한다』(2018년 12월 출간)라는 책을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마르쿠스 가브리엘이 지난 20186월 일본을 일주일 방문한 중에 NHK에서 방송한 그의 강연 및 일본의 인공지능연구자인 이시구로 히로시(石黒浩)와의 대담의 기록, 그에 더해 일본 철학자인 마루야마 슌이치(丸山俊一)의 해설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일본방문의 행적을 다큐멘터리로 담은 다음의 영상을 보면 일본 내에서 그의 인기는 엄청난 것 같다(https://www.youtube.com/watch?v=H9J19m4ey8g). 다음의 강연 또한 대단한 호평을 받은 모양이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에게서 책을 어렵게도 쓰고 쉽게도 쓰며 대중강연도 능수능란한 21세기 철학자의 또 하나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다음의 글은 쉬우면서도 깊다. 그리고 20세기의 근 100년간의 철학사를 일목요연하게 논하면서 자신의 관점과 이론으로 끌고 오는 힘은 정말로 대단하다. '신실재론'의 의의와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하는 이 글은 '신실재론'의 입문으로 읽힌대도 좋겠다 싶다. 

 

 

 

 

철학은 현대와의 격투다가브리엘의 전후철학사강좌

 

 

유럽의 새로운 세대의 지성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철학의 역사를 개관한다. 과연 얼마나 광대한 관점이 만들어질까? 실존주의, 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그다음은? 스테레오타입의 역사의 이야기를 일단 접어놓으면, 피상적으로 끝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철학사가 시작된다.

 

 

  1. 모든 것은 철학에서 시작되었다

 

  인식론을 빼고서 철학을 말할 수 없다

 

  지금 왜 철학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일까? 왜 갑자기 많은 사람들에게서 요청이 오는 것일까? 이제까지 많은 일반인들도 철학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분명하다.

 

  철학이란 결국 대체 무엇일까? 지금부터 설명할 매우 단순한 문제를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당신 눈에 물방울이 들어갔다고 하자. 그때 눈동자를 살짝 누르면, 내가 둘로 보이지 않을까? 누구라도 경험했을 것이다. 내가 이중으로 보일 텐데, 어째서 보통 눈으로 믿고 있는 현실이 왜곡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진짜 현상의 복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어떻게 그렇게 판단해버리는 것일까? 이것은 단순히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은 정보사회 전체를 괴롭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오늘날 숙고해야 할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가장 심각하고 시급한 문제는 사실과 그 표현, 즉 그러한 사실과 이미지와의 격차와 얽혀 있다.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지금 나는 주사위를 손에 들고 있다. (카메라를 향해) 보입니까? 지금 내가 몇 개의 물체를 가지고 있는지 여러분에게 물어보겠다.

  세상의 극히 일반적으로 세는 방법을 적용하면, 내 손에는 주사위 두 개가 있다. 나는 지금 두 개의 주사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물체가 몇 개냐를 묻는 질문에 모두가 일제히 이라고 답할까?

  각을 세어도 된다. 주사위의 면에 있는 숫자를 세어도 된다. 혹은 주사위를 구성하는 소립자를 세어도 된다.어째서 소립자나 면, 주사위의 이미지가 아니라, 주사위라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나아가 내 손안에 정말로 실제로 주사위가 두 개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 강연은 방송프로그램이고 내가 단지 당신 모두를 속이기 위해 이 프로그램 제작팀이 만든 홀로그램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어째서 모두가 두 개라고 답할까? 정말로 자신의 머리에서 그렇게 생각한 것일까?

  이것은 가장 철학적인 물음 중 하나다. 아니 가장 근본적인 철학적인 물음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철학적인 문제는 인식론이라고 불리는, 앎의 논리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질문에 답하지 않고서는 철학 자체가 현실과 유리되고 말 것이다.

 

  컴퓨터도 철학자의 구상에서 시작되었다 

 

  이렇게 일단 철학의 중요성은 알았다.

  다음으로 우선 현실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을까?’ 그리고 현실이 나타나는 방식과는 별도로 현실의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라는 물음에 답하는 단계를 밟지 않으면, ‘글로벌화를 추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무엇인가?’ 등의 물음에 절대로 답할 수 없다. 애초부터 근본적인 인식에 관한 물음은 현대 사회, 오늘날의 삶에 관한 모든 물음과 근본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철학은 특히 우리 시대에 이르러 더욱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신이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물음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지금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컴퓨터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컴퓨터 게임을 한다. 예를 들어 당신은 이 방송도 컴퓨터 기술이 탑재된 TV에서 보고 있고, 스마트폰도 늘 곁에 두고 있다. 컴퓨터는 당신이 살고 있는 상황 속에 항상 있는 매체 중 하나다. 당신에게 매우 중요한 현실의 하나다.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컴퓨터란 무엇일까? 놀랍게도 누가 벌써 답해놓았다. 만약 그 인물이 그에 대해 생각해놓지 않았더라면 컴퓨터 같은 것은 없었을지 모른다.

  1950년대 이전 컴퓨터라는 말은 계산한다(compute)라는 어원에서 비롯된 계산하는 사람(computer)을 가리켰다. 인간이 간단한 산수 문제를 푸는 느낌, 그것이 컴퓨터였다. 그랬던 것이 현재의 컴퓨터가 된 데에는 천재 컴퓨터 과학자인 앨런 튜링이라는 사람의 존재가 크다. 그가 천재성을 발휘하여 제2차 세계대전 중 암호를 해독한 덕에 영국이 독일에 승리할 수 있었다. 앨런 튜링은 컴퓨터를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컴퓨터가 무엇인지를 해명했다. 그 후 컴퓨터는 과학이 되었다. 그 근본에 있는 주요 사고방식을 확인해보자. 컴퓨터란 논리적인 시스템과 다름없다.

  그렇다면 논리란 무엇인가? 복잡한 것 같지만 실은 간단하다. 예를 들어보겠다.

  지금 내 손안에 물체 두 개가 있다. 주사위 두 개가 있다. 이 물체를 왼손에 놓으면 하나하나 확인하지 않고서도, 나는 왼손에 두 개의 물체가 있으며 오른손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 양손에 하나씩 물체를 가지고 있다가 가지고 있는 물체를 왼손에 옮기면 왼손에는 물체가 두 개 있게 된다. 그것은 계산가능하다. 그렇게 간단하게 인식할 수 있는 순서가 있기 때문이다.

  알고리즘(계산순서)은 대략 이러한 느낌이다. ‘1 더하기 12’. 아니면 일반적으로 말해서 ‘A 더하기 BC’. 모두가 알고 있다, 이 구조를. 그것이 하나의 알고리즘이다. 컴퓨터는 일종의 하드웨어에 내장된 논리와 다름없다. 전자기의 정보의 변환에 의해 나타나는 논리 말이다. 그것이 컴퓨터다. 컴퓨터는, 그 근본적인 논리의 구조를 밝힌 튜링이라는 철학자에 의해 발명되고 구상되었다.

 

  모든 이데아는 철학에서 시작되어 연결된다

 

  플라톤의 동굴의 은유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지금 당신은 나의 이미지를 보고 있다. 그리고 내 뒤에 이미지의 이미지가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직 그 무엇도 복사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이것이미지의 이미지을 현실이라고 알까? 플라톤은 바로 이 상황을 고찰했다.

  플라톤은 이렇게 말했다. “동굴에 사람들이 벽을 보고 앉아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들 뒤에는 불이라는 투영장치가 있다. 누군가가 사각형의 주사위나 손 등의 다양한 모양을 불에 비춘다. 그러면 동굴 벽에 그림자가 생긴다. 그들이 벽밖에 보지 못한다면, 그림자가 진실의 세계가 된다. 그러나 진실의 세계=이데아의 세계는 동굴 밖에 있다. 이것은 저 유명한 플라톤의 철학인데, 시네마의, 영상에 대한 최초의 이론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시네마라는 개념을 발명했을 뿐만 아니라 인터넷까지 발명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플라톤은 사람들 각각이 가지고 있는 이데아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여러분은 내가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이데아를 가지고 있다. 여러분은 내가 말하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도 화면 자막의 일본어를 읽을 수 있다. 자막은 당신에게 보이지만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그것[당신의 이데아]을 알 수 있는 것은 당신의 이데아에 대해 내 나름의 이데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 또한 나의 이데아에 대한 이데아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 대략 해온 일은 이데아에 대한 이데아를 가지는 일이다. 이처럼 모든 이데아는 연결되어 있다. 그 때문에 나는 이 방에서 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주사위가 있는 곳에서 스튜디오의 저편에 있는 바비인형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고, 그리고 앞으로 이야기할 과일이 있는 곳으로도 갈 수 있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 방을 둘러보면서 방에 있는 것들을 연결할 수 있다. 이 방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일종의 정보구조에 의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그것을 이데아라고 했다. 그것이 인터넷의 유래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플라톤은 이데아는 연결되어 있다라는 이데아를 알려주었다. 이데아의 이데아, 플라톤의 유명한 말이다. 그는 이데아라는 용어까지 만들었다.

  정보시대, 컴퓨터 시대, 그리고 우리를 괴롭히는 근본적인 질문의 상당수는 실은 근본적으로 따지고 들면 철학의 문제에 당도한다. 이를테면 정치민주주의와 같은 용어 또한 처음에는 철학적인 표현이었다. 현실에서 실행된 철학적인 사고였다. 물론 마르크스주의나 자본주의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철학적 사고다. 즉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인류 세계에서 기본적인 구조의 상당수는 철학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와 동시에 이러한 사고에 부착된 많은 문제들, 그에 대한 답들 중 상당수는 실은 종종 틀리기도 했다. 세상일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현실에 대한 철학적인 개념을 업데이트해야 한다. 지금 이 스튜디오에서부터 시작해보자.

  더 기본적인 철학의 물음에서 시작해보자. 그것은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가장 어려운 철학적인 문제일지 모른다. 그것은 바로 시간이라는 개념이다.

 

  ‘시간의 경과는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시간을 이야기하기 전에 다른 문제를 이야기했다. 현실과 그 표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을 이야기한 후 지금 시간을 이야기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조금 전 순간이 어떻게 지금 이 순간이 되었을까? 이에 대해 생각해보자. 어제 당신은 무엇인가를 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은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다.

  어제의 장면에 있는 동안 무언가가 일어났을 것이다. 당신의 머릿속에도, 다른 어딘가에도. 그리고 당신은 이 둘을 연결했다. 어제 일어난 장면은 어떻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것, 즉 당신이 이것을 보고 있는 순간과 연결될까? 그 커넥션, 관계성이란 무엇일까? 커넥션을 성립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두 개의 장면을 머릿속에서 떠올려서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비교하고 있는 이 지금, 세 번째 장면이 생겨났다. 어제 일어난 것, 지금 보고 있는 것, 그리고 세 번째의 장면, 그 세 개를 연결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제 일어난 것, 지금 보고 있는 것, 그리고 이 둘의 연상 상의 비교다. 이 둘을 연결하는 것은 무엇일까? , 세 번째의 장면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래, 이 셋의 장면을 연결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제, 지금, 그리고 당신이 어제와 지금을 연결해서 상상하고 있는 그것. 그리고 이것들을 연결하는 네 번째의 장면이 곧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결국 모든 장면을 연결하는 것은 실은 어떤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시간이란 아이가 던지는 주사위다. 시간은 뛰노는 아이다이렇게 바꿔 말해도 무방하리라. 이것이 그에 의한 시간의 정의다. 여기에 아이가 있다고 해보자. 아이는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냥 놀고 있을 뿐이다. 아이는 주사위를 던진다. 그래서 나온 무작위적인 결과, 계속해서 던진 결과그것이 시간이다. 그것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이 아이는 당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아이도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럼 이번에는 이렇게 시간을 느껴보자. 틈과 다음의 틈과 그다음의 틈이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고. 신경과학과 심리학을 통해 이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음을 안다. 지금 당신은 나의 의식에 대한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의식에 대한 어떤 이미지는 항상 변한다.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나를 보고 있기 때문에.

  눈이 움직이고, , 생체나 뇌 속에도 다양한 일들이 일어난다. 이 일들이 일어나는 동안 의식에 대한 어떤 하나의 이미지로부터 다음의 이미지로 이행한다. 이러한 이미지의 전체적인 연결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가진 의식에 대한 어떤 이미지의 배후에는 모든 것을 연결하는 의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스냅사진의 연속이다. 시간이라는 것도 하나의 스냅복사에서 다음의 스냅복사로 보이지 않는 추이(推移).

  시간 그 자체는 근본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해도 시간을 볼 수 없다.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무언가를 볼 수 있어도 시간의 경과는 볼 수 없다. 이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것이 매우 심오한 미스터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수많은 상황이 매우 중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결국 시간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은 실은 아무것도 없다. 혹은 많은 철학자가 말했듯이 현실에는 고유의, 본래부터 있는 이미지 구조가 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있는 나를 볼 수도 있다. 이미지의 층(layer) 위에는 더한 이미지의 층이 있다. 앞서 증명했듯이 그것 또한 현실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 다음에 대해 생각해보자. 역사에서 가장 큰 이미지를 분류해보는 것이다.

 

 

  2. 현대철학을 되돌아보다

 

  역사란 숨겨진 상상성의 통일’?

 

  역사란 무엇일까? 가장 흥미진진한 질문 중 하나일 것이다. 시간이 환상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시 그 이야기로 되돌아갈 테지만, 지금은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역사란 무엇일까? 시간과 역사는 확실히 연결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역사라는 것이 주요한 이벤트에 의해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것은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다.

  역사의 어느 시점(時點)에서도 무언가 큰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어제(2018612) 도널드 트럼프와 김정은이 만났다. 그러나 왜 그것이 역사인 것일까? 어째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구조를 부여하는 주요한 사건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내 생각에 그에 대한 적절한 설명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모든 사건을 연결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시간을 통일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특정 사건에 숨겨진 통일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건에 숨겨진 통일성이 있다는 생각은 metaphysic=‘형이상학이라고 한다. ‘넘는다는 의미의 ‘meta’‘physics’=물리학이 조합된 말이다. 물리적인 세계를 넘어서 물리적인 세계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다른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매우 추상적으로 들리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물리학넘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형이상학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역사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도널드 트럼프와 김정은의 회담 등 중요한 이벤트가 있다고 믿는 한편, 이러한 이벤트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도 왠지 모르게 생각한다.

  역사에 대한 가장 단순한 이해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옳다고 믿고 있는데, ‘중요한 이벤트의 연쇄라는 사고다. 유럽인에게는 제1차 세계대전, 많은 사람들에게는 제2차 세계대전, 냉전, 1989년의 베를린 장벽의 붕괴 등등그리고 그 후에 일어난 어떤 일들. 많은 철학자가 그것들을 믿었다. 역사가 중요한 이미지의 연쇄이며, 그것이 구조를 부여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시간의 전체적인 구조를 보증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왜 역사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를 염두에 두고 최근의 철학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부터 철학 자체의 주요한 전환, 중요한 이벤트를 살펴보고, 그것들이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철학자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사건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보자.

 

  제2차 세계대전의 반성에서 시작된 실존주의

 

  현대철학에서 지적인 사고를 자극하는 하나의 큰 장면으로는 역시 제2차 세계대전을 들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직후에 다양한 국가들에서 실존주의라는 운동이 번져나갔다. 안타깝지만 오늘날에 그 사실은 거의 잊혀졌다.

  실존주의라는 것은 다음의 매우 훌륭한 사고방식이다. 그것은 결국 틀렸지만. 실존주의의 가장 큰 성과는 다음의 말로 집약될 수 있다.

  “자신의 인생 이외에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주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이 의의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후에 사람들은 이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기독교도가 믿는 일신교의 신이 인생의 의미를 밝혀주지 않는다고 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은 20세기의 공포와 사리가 맞지 않았다. 신은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주지 못하고, 만약 신이 있다 해도 그것이 왜 공포가 아닌 의미의 원천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힘이 세고 전지전능의 누군가가 있다고 해보아도, 그것은 의미의 원천보다는 공포의 근원으로 다가왔다. 당시 전쟁의 비참함을 직접 목도한 수많은 사람들은 신이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다음의 문제가 도출된다. 인생은 애당초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실존주의자의 답은 인생에 의미를 가지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에게 투기’(投企)라고 불리는 것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 좋다. ‘투기란 무엇인가? 사람은 자신이 놓인 상황을 살펴보면 전체적인 구조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의미를 찾는다. 의미를 던지고’ ‘꾀한다’, 투기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넘어서서 자신의 인생에 의미가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즉 인생에는 의미가 있지만, 그것은 당신 인생의 의미에 대한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론 인류의 시간성(일시성)에서, 즉 인간에 의한 시간의 경험에서 역사의 역할에 대한 설명이 바로 만들어진다. 역사가 있고 중요한 이벤트가 있다는 생각은 우리의 모든 것에 투기를 통해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근대성이나 민주주의 등에 대한 전체적인 투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역사라는 이 프로젝트는 우리의 작은 투기를 위한 투기이다. 이것이 실존주의에 있어서 기본적인 사고다. 실존주의는 하나의 거대한 슬로건으로 정리할 수 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요컨대 이 의미다. 우선 당신이 존재한다. 그리고 인생에 의미를 준다.

  자신의 존재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태어난 것은 자신에게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 삶은 의미의 원천이 아니라, 실존주의자에 의하면 투입’(投入)에 불과하다. 현실에 던져졌을 뿐이다. 그것은 별로 인생에 의미가 되지 못한다. 따라서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 인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실존주의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많은 국가들의 많은 도시에서처럼 모든 의미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의미가 사라지게 되면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이렇게 생겨난 훌륭한 사고방식인 실존주의이지만 동시에 문제도 있었다. 인간적인 활동에서 철학자가 말하는 주체라는 근본적인 개념이 중심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체라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일종의 구조를 부여하는 중심이 존재한다는 사고방식이다. 실존주의의 경우 그것은 자신이 자신의 인생에 부여하는 구조다.

 

  ‘실존주의에서 구조주의

 

  그러나 만약 자신이 자신의 인생에 주는 구조가 어떤 이유에서 외부의 요소에 의한 결과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질문을 통해 유럽을 중심으로 1960년대에 실존주의구조주의라는 사고방식으로 대체되어 간다.

  구조주의 또한 훌륭한 사고방식이다. 구조주의에 의하면 자신의 주관성’, 즉 자신이 자신에 대해 느끼는 방식은 구조의 네트워크의 하나의 결절점, 교차점과 같은 것이다. 구조의 요소에는 가족, 자라난 장소, 최근이나 과거에 대한 기억, 나아가 경험한 것에 대한 담론, 문화적인 가치관등등 다양한 것들이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요소로부터 생겨난 구조가 인생에 의미를 준다. 그것이 구조주의에서 기본적인 사고다.

  구조주의자는 신화학 등의 연구 성과 속에서 만들어졌다. 놀랍게도 세계 속에 유사한 구조의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저 유명한 프랑스의 인류학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주의의 선조다. 그는 인간에 의한 모든 이야기의 화술에 근본적인 구조가 있다는 가설을 가지고 들어온다. 그것은 가령 일본의 연극도 고대 그리스의 연극도 비슷한 구조가 있는데 그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에서 만들어진다. 어느 국가의, 어느 문화의 연극도 그러한 구조와 맞아떨어지며, 모든 연극의 표현양상에 공통하는 기본적인 구조가 있다. 시 혹은 컴퓨터 게임에도 맞아떨어지는, 그러한 보편적인 구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요컨대 인간의 투기의 외측으로부터 다른 무엇이 인생에 구조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구조주의는 그것을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그러한 구조란 무엇인지를 찾아내고자 한다.

  그러나 구조주의 또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1960년대 말에 작은 문제가 떠올랐다.

  1960년대가 끝나갈 무렵은 또 다른 파탄과 시기가 겹친다. 20세기의 공포 후에 사회의 재구축은 간단한 일이라는 사고가 파탄을 맞았다.

  전쟁에 책임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엄청난 권력을 여전히 쥐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의 재구축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사람들은 역사와의 더한 과격한 분리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역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자고. 이러한 복잡한 이유가 있었고, 그것이 중국의 문화대혁명으로 표출되고, 그러한 흐름이 유럽의 학생운동을 계기로 모아지게 되었다.

  또 그것은 철학의 풍조를 바꾸었다. 주목해야 할 다음의 단계로의 돌파구를 찾아낸 것이다.

 

  그리하여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에 의한다.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단순하고도 멋진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언어를 떠올려보자.

  언어는 특히 글에 의해 구성된다. 예를 들어 지금 나는 이 스튜디오에서 영어로 말하고 있고, TV를 보고 있는 당신은 아마도 화면 밑에 표시된 일본어 자막을 읽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일본어를 읽는 동안, 그리고 내가 영어를 말하는 동안, 일어나는 것의 구조는 더 작은 단위로 분리될 수밖에 없다. 문장, 문학, , 어조, 표현 등등으로.

  이것들은 극히 작은 구조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어째서 애당초 이러한 작은 요소를 포함하는 언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영어라는 언어의 존재를 믿는 어떤 적절한 이유가 있을까? 우선 언어는 변한다. 어느 시점(時點)에서도 안정적인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는 항상 변한다.

  그리고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생각해보자.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 지금 입 밖에 내고 있는 문장은 아마도 높은 확률로 지금까지 이야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일상생활의 많은 이야기들은 당신에 의해 처음으로 이야기된 것들이다. 즉 언어는 이미 존재하거나 연결되어 있는 일련의 표현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언어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연결되어 있는 작은 구조가 아니라, 그것은 더 큰 전체의 존재를 암시한다.

  그러나 왜 그러한 더 큰 전체의 구조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일본어라는 하나가 있다고 말한 것은 누구?

데리다의 가설에서는 하나의 언어 대신 차연’(差延)이라는 것이 항상 존재한다. ‘차연은 유명한 개념으로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미룬다는 지연’(遲延)과 다르다는 차이. ‘이와 지’. ‘차연은 불어에서는 일종의 말놀이로 이 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언어는 미래에서 과거로 흐른다

 

  차연이란 아직 없지만 미래에 있을 것과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 사이에서 요소 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글을 끝내고 있다. 이것으로 끝났다. 글의 시작을 입 밖에 내는 것은 글을 끝내려고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글을 입 밖에 내기 시작할 때 글은 아직 끝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글의 끝을 생각하지 않고서 글을 입 밖에 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글의 끝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 글의 끝은 존재하지 않지만 글에 구조를 부여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 즉 미래가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에 구조를 부여한다.

  데리다 이전의 많은 철학자, 그리고 당시의 과학도 사건은 모두 과거에서 미래로 흐른다고 이해했다. 현실은 현재에 있다고. 그러나 결국 언어의 현실에서조차 이 가정은 사리가 맞지 않는다. 언어라는 것은 과거에서 현재를 통해 미래로 흐르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미래에서 현재를 통해 과거로 흐른다. 언어는 역 시간방향을 가진다. 자신의 생각은 언제나 말로 표현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자신의 인생 또한 역방향으로 거슬러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생은 사고하는 생물체로서 삶에서 죽음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삶으로 향해간다. 데리다에 의하면 역방향인 것이다.

  미래가 현재에, 그리고 현재가 과거에 구조를 부여한다. 여기에 고려하지 않으면 안될 거대한 패러독스가 있다.

 

  과거, 현재, 미래에 선을 그을 수 있을까?

 

  그런대로 재밌을 것이므로 생각해보자. 시간에 세 부분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그럴듯하다. 어제는 무엇을 했고, 지금은 하고 있는 것을 하고 있고, 내일은 아직 무엇을 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어제, 오늘, 내일이 있다고. 그러나 물론 오늘도 시간에 의해 구성된다. 오늘은 아침, 점심, 그리고 맞이하면 좋을 밤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실이 그때까지 파괴되지 않는다면 다행이다.

  그런데 지금 순간에도 이 세 부분으로 이뤄지는 시간 구성이 있다. 1분을 살펴보자. 1분 사이도 과거, 현재, 미래에 의해 구성된다.

  과거, 현재, 미래가 없는 현재에 도달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현재에 도달한다면 어떻게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흐른다고 한다면, 현재가 없다면 어떻게 시간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어떻게 과거와 미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어라, 현재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현재는 점점 더 분해된다. 그것이 포스트구조주의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구조라고 말할 수 있다.

  포스트구조주의는 또한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작에 대응한다. 그것은 무언가를 가르쳐준다. 예를 들어보자. 이것을 당신이 가지고 있는 시간에 대한 개념의 하나라고 해보자. 당신의 모든 인생이라도 다른 무엇이라도 좋다. 앞서 말했듯이 이 시간 개념 속에는 더 작은 시간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인생의 최초의 5년간이랄지, 그렇게 기억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더 작은 개념을 살펴보자. 예를 들어 과거 두 달간이랄지. 시간의 최소구조, 최소단위라는 것에는 도달할 수 없으며, 그것은 항상 더 작게 분해된다.

  현재라는 것은 항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이것이 시간의 문제를 설명한 데리다의 논점이다. 이것은 대단히 심오한 통찰이기도 하지만,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다음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문제는 더욱 큰 사고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근대성, 계몽주의, 민주주의 등의 베이스에 있는 것은 앞으로 더 잘할 수 있다는 사고다. 인류의 진보’, 과학과 기술의 진보등과 같이 진보를 믿는 사고방식이다. 우리는 이 진보의 현실에서 살아간다.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 구조, 나아가 시간이 필요하다.

  자크 데리다가 한 것처럼 구조, 시간, 역사의 개념을 무너뜨리면, 즉 이 전체구조를 무너뜨리면 어떻게 무언가의 형태로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데리다의 사고방식을 밀고 나가면 때때로 일종의 현실 괴리가 일게 된다. 현실을 파악하려 들면 다른 현실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현실은 항상 빠져나가고, 이 손에 쥘 수 없다.

데리다가 말했듯이 현실은 도망친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을 빌면 시간을 파악하려 들면 시간은 도망친다.”

  마찬가지로 사실 또한 도망치고 도망치고 계속해서 도망친다우리는 영원히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해결해야 하는 심각한 상황에도 영향을 준다. 즉 사실을 일찌감치 알 수 없게 만든다. 사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면 사실이란 본래 무엇인가?

 

  시간의 흐름과는 무관계하게 확실히 존재한다라는 것

 

  이제 우리가 지금 있는 현대로 옮겨오자.

  간단한 질문을 하겠다. 여기에 과일이 몇 개 있을까? 세 보자.

  하나, , 다섯. 바나나가 다섯 개 있다. 그리고 딸기가 세 개 있다. 산수를 사용해서 3 더하기 58. 과일이 여덟 개. 과일바구니에 여덟 개의 물체가 있다. 좋다. 이 물체들은 어떤 사실에 짜 맞춰진 것들이다. 과일이 여덟 개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과일이 여덟 개 있다는 것이 옳지 않다면, 특별히 무엇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과일이 여덟 개 있다는 것이 철학자가 말하는 사실이다. 물체의 구조를 이룬다. 사실에는 물체가 있다. 즉 과일바구니 안에 무엇이 있다는 것에 더해 이 상황의 구조를 보증하는 사실도 있다.

  그러나 만약 데리다가 옳다면, 사실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것들의 위치조차 특정할 수 없다. 결국 여기서 일어나는 것에 당신이 접근할 수 있는 현재=이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구조 없이는 변동과 변화도 없다.

  그리하여 이러한 상황인식은 포스트구조주의라고 불리게 된다. 구조는 이미 사라졌고 잡을 수도 없다. 즉 과일바구니에 과일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실이 필요하다. 이것은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생각해보자.

  사실은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중요한 포인트이기 때문에 한번 더 반복하겠다. 사실은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떤 의미인가 하면 이 과일바구니에 과일이 여덟 개 있다는 것은 진짜다. 그리고 이 여덟 개의 과일은 항상 붕괴하고 있다. 썩어가고 있다.

  일년 후 혹은 10년 후에 돌아와 보면 과일은 이미 없을 것이다. 즉 거기에 있는 것은 열역학의 제2법칙에 따라 수많은 것들이 붕괴하고 있는 물질과 에너지다. 과일에 손대지 않아도 10년 후에는 없어질 것이다. 붕괴가 엄청나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과일이 여덟 개 있다는 사실은 붕괴하지 않는다. 그것은 옳다. 특정 시점(時點)에서 과일이 여덟 개 있다는 것은 항상 옳다.

  과일이 여덟 개 있다는 사실은아직 과일은 여덟 개 있다. 그 사실 자체는 붕괴하지 않는다. 즉 지금 살아 있는 현실은 단지 붕괴하지 않는 물체만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당신을 포함해서 온갖 붕괴하는 물체로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지금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에도 자기 자신이 붕괴하고 있는데도.

  그러나 데리다가 옳다면, 파악하기 어려운, 붕괴하는 물체라는 현실 레벨에 더해 사실이라는 레벨이 있게 된다.

  사실이라는 레벨은 시간을 완전히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강조해야 하는 것은 시간의 경과를 수반하지 않는 영원의 차원에서 특정 시점, 결정적인 시점에서 과일이 여덟 개 있다는 것이다. 해석을 통해 이것은 우리가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근대물리학의 진상(眞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근대물리학에 의하면 물리적인 현실조차 붕괴하고 있는 물질만으로 구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시공(時空)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을 설명한 후에 내가 권장하려는 현대철학인 신실재론에 들어가겠다. 그리로 가기 전에 우선 공간과 시간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자.

 

  현실은 실제로 보이는 것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여기서 매우 간단한 질문을 해보겠다. 지금 여기에 영상이 있다. 유니콘, 질주하는 뿔 달린 짐승의 영상이 있다. 이것이 유니콘이 아니라면 유니콘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모두 유니콘이라는 생물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다시 그러나 유니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유니콘을 볼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신실재론은 당신에게 이렇게 설명할 것이다. 유니콘은 정말로 존재한다, 이를테면 이 동영상 안에 있다, .

, 이 유니콘은 시부야의 교차로에서는 볼 수 없다. 이 유니콘은 절대로. 이 영상 속에 있기 때문이다. 유니콘은 이 영상 속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유니콘인 것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질문을 해보자. 이것이 유니콘 모습을 하고 있는, 교묘하게 변장한 망아지라고 한다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가령 이것이 뿔 달린 말이라면? 그럴 리 없다, 이것은 진짜로 유니콘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 영상 속에 유니콘이 있다고 다들 생각한다. 유니콘이 있다는 것만이 사실은 아니다. 다른 수많은 기묘한 것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이 유니콘은 존재한다. 그리고 이 유니콘에 대한 당신의 이미지, 당신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도 존재한다.

  당신은 자신의 시점에서 유니콘을 보고 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시점에서 같은 유니콘을 보고 있다.

  이 유니콘에다가 유니콘에 대한 관점이라는 것이 있다. 그렇다면 유니콘뿐만 아니라 손과 손의 이미지, 카메라, 인터넷 등등도, 그 속에 존재한다. 숫자도 존재한다. 여덟 개의 과일에 대해 더 이야기하자면, 8이라는 숫자가 없다면 여덟 개의 과일도 존재하지 않는다. 8이라는 수는 과일이 몇 개 있는지를 드러내는 숫자이며 그것은 유니콘의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이미지다.

  따라서 현실은 우리가 보는 사물에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물의 이미지에서도 구성된다. 그 이미지에도, 현실 자체에도 어떤 성질이 있다.

 

 

  3. 철학에서 본 전후사

 

  세계사의 전환점이란?

 

  세계사라고 불리는 큰 흐름 속에 가장 중요한 최근 사건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그 종결이 있다. 그것은 확실히 20세기의 끔찍한 경험이었다. 그것은 수많은 철학적 사고를 발동시켰다. 그로부터 근대사상의 큰 전환점을 이룬 것이 1968년의 학생운동이다. 그 후에도 동서 냉전의 긴장의 고조가 있었으며 베트남 전쟁도 있었고 세계 속의 다양한 일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큰 전환점으로 다뤄야 하는 사건은 1989년의 일이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그 뒤로 이어진 독일의 재통일. 또 그것은 소련의 붕괴로 이어졌다. 모든 이들에게 많은 희망을 준 자유민주주의가 마침내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선택지가 되었다.

  그리고 철학에서 보면, 나로 대표되는 운동인 신실재론이 태어났다. 그 주요 계기는 2001년과 2008년에 있다. ‘신실재론2008년의 경제위기, 그 원인인 2001년의 동시다발테러, 세계적인 테러의 시작과 연결된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까지 이어진다. 우리는 이 경제체제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 이 둘이 담고 있는 심각한 위기의 여파 속에 있다.

  그 의미를 지금부터 하나씩 보여주겠다.

 

  ‘물질주의에서 인생의 의미에 도달할 수 있을까?

 

  제2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세계질서가 등장했다. 지금도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는 세계질서다. 이 세계질서의 기반은 총체적인 세계평화를 안정화시키려는 시도에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전 세계가, 즉 국제사회의 구조가 일체화를 지향한 최초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각국, 각 사회의 시스템이 전체의 안정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왜냐하면 글로벌파워가 생겨나고, 영향을 주고받는 새로운 틀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로켓과 비행기가 중요한 기술이 되고, 그리고 이는 일단 전쟁이라는 사태가 발발하면 전쟁이 지상ㆍ해상을 막론하고 공중전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과학기술이 인간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틀이 되었다. 그리고 이 구조가 기본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새로운 세계질서의 시작을 결정지었다.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진 적어도 2자의 주요한 플레이어가 존재했기 때문에, 곧 붕괴할 수도 있다는 공포가 담긴 질서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에는 물론 아메리카와 그 동맹국이 있다. 아메리카는 인간의 진보에 대한 완전히 물질주의적인 개념을 대표한다. 인간의 진보에 대한 이 완전히 물질주의적인 개념에 의하면, 자본주의와 과학적ㆍ기술적인 진보라 말할 수 있는 변화의 프로세스가 인간을 구제할 수 있다. 따라서 인류는 드디어,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지상에서의 최종목표를 가지게 되었다. 과학적ㆍ기술적인 프로세스가 인류의 궁극적인 구제를 불러온다는 이데아 하에서 우리는 모두 단결하였다.

  그러나 그 속에는 역설이 숨어있다. 왜냐하면 다른 한편으로 완전히 물질주의적으로 보이는 것이 있고즉 물품의 생산과 돈이다., 그와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그 모든 것이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물음에 의미 있는 해답을 약속한다. 그런데 완전히 물질주의적인 프로세스로부터 어떻게 하면 인생의 의미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냉전체제에서는 주로 소련에 의해, 그 후에는 중국이나 다른 해당국에 의해 대표되는 공산권이 존재했다. 공산주의적인 세계관은 역사적ㆍ변증법적 유물론을 제공한다. 역사적ㆍ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하면이것은 매우 철학적인 관점인데,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과학적ㆍ기술적 진보뿐만 아니라 특히 인간의 진보이기도 하다. 이 세계관에 의하면 인간의 진보는 사회적 현실에 관해 우리가 어디까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가와 관련된다. 그 의미에서 결국 소련의 기초과학은 자연과학, 즉 물질세계의 틀의 과학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사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세계관에서는 단지 부와 돈의 분배 말고 중요한 것이 대두된다. 미소[미국과 소련]라는 이 둘의 세계관을 가진 국가가 냉전이라는 이름으로 실제로 충돌한 것은 매우 큰 사건이었다.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로 세계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까부터 계속해서 전후 세계의 사상의 역사를 말하고 있지만, 나 자신이 역사가가 아닌 데다 이것은 말하자면 세계가 아니라 철학사다. ‘세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세계가 있다고 믿을 턱이 없다(웃음). 이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 하는 것으로 하겠다.

 

  전후의 질서는 현실에 대한 두 개의 총합적인 철학적 견해에 의해 규정되었다. 아메리카와 소련이라는 두 개의 강국이 서로 다투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그것들은 개념의 레벨에서도 싸웠다.

  두 강국은 그 역사와 현실에 대해 각기 다른 방법으로 설명을 시도했다. 전후의, 현실의 전체적인 설명으로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은 보기와는 달리 실은 매우 철학적인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두 개의 이론이 있다. 현실 전반에 대한 철학적인 이론이다. 자연적 현실(natural reality)과 사회적 현실(social reality)이 특정 방법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 둘의 세계관이 부딪히기 시작했다. 세계관의 충돌은 많은 철학적인 이론의 성분변경을 일으킨다. 가장 현저하게는 프랑스와 독일의 철학에서 두 이론이 조합되게 된다.

  요컨대 한쪽은 마르크스주의이고 다른 한쪽은 정신분석학이다. 이것이 냉전이 일으킨 또 하나의 효과라는 표현도 가능하겠다.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의 발전에 대한 하나의 설명이다. 역사를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해설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분업에 의해 특정한 사회적인 이익이 형성되고 서로가 대립하기 시작하는 상황을 뜻한다.

  정신분석학은 계급투쟁이 일으킨 정신적 질환을 설명하는 이론을 제공한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을 조합하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입장에 설 가능성이 생긴다.

  이 조합은 아메리카의 물질주의적인 세계이미지가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소련의 세계이미지인 역사적ㆍ변증법적 유물론이 제공하는 것도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1960년대의 유망한 개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매우 문제적인 개념이었다. 왜냐하면 비평가에 의하면 이 개념은 세계질서 자체가 안정되고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가 그 무엇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설명하고 있다는 인식 자체가 위기를 심화한다.

 

  라캉의 거울단계

 

  냉전 시대,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을 연결하는, 아마도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철학자 두 사람을 꼽으라면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알렉산더 코제브 그리고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을 들 수 있다. 역사상 가장 중요한 철학자라는 것에는 거의 이견이 없을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의 철학에서 유래한, 그들을 이끈 기본적인 개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헤겔은 사회와 주관성의 관계, 사회 전체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헤겔의 가장 중요한 사고방식의 하나다.

  내가 나인 이유는 내가 당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나, 너는 너, 어째서 이렇게 인식할 수 있을까?

  내가 나라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너가 너인 것은 어떠한 것일까? 모두 제각각의 타자와의 비교에서 자기를 인식하는 것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너를 보고 너가 여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너는 나를 보고 남성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너가 나이를 얼마나 먹었는지를 생각하고, 너는 내가 나이를 얼마나 먹었는지를, 어떤 옷을 어떻게 입었는지를, 어떤 행동습관이 있는 사람인지를 생각할 것이다. 예를 들어 너는 내가 독일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며 나는 너가 일본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너를 보면서 나는 내게 어떤 특징이 있는지를 판단할 것이며, 너도 나를 보면서 너에게 어떤 특징이 있는지를 판단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특징들을 비교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나는 너의 관점에서 어떻게 자기 자신을 인식할까? 나는 너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를 모르며, 너도 내가 너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모른다.

  이러한 까닭에 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우리는 스테레오타입의 일정한 시퀀스를 고안한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조금도 상상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이 누구인지도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 실은 그 속에 있다.

  따라서 나와 타자는 서로가 서로에게 누구인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투영하기 시작한다. 알렉산더 코제브에 의하면 이것이 역사의 발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헤겔에 대한 그의 유명한 해석이다. 그리고 이 개념은 자크 라캉에게 이어져 누가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를 주제로 하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이론을 형성하는 자극제가 된다.

  라캉에 의하면, 특히 1960년대에 이런 식으로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이 교차한다. 이것은 대략 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 걸쳐 일어나는데, 우리는 모두 그가 거울단계라고 부르는 이론을 제창한 것을 알고 있다. ‘거울단계에서 유아는 생후 6개월부터 한 살 반까지의 시기에 자신을 동물로 여긴다. 그리고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라캉에 의하면, 인간은 태어날 때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다.’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다.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한다. 세계는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가족이 보호해주기 때문에 그것은 확실하다. 완전히 보호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울 속의 무력하고 조그마하며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아가로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자마자, 자신은 전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즉 라캉에 의하면, 아가는 자신은 신이다.’라고 생각했지만 거울에서 자신을 보는 순간 자신은 신이 아니라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아가라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이 주변의 모든 이들과의 비교에서 무력하다는 바로 그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을 돌봐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라캉에 의하면, 이것이 그들의 셀프이미지를 산산조각낸다. 거울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거울은 부서진다는 것이다.

  라캉에 의하면, 그러한 까닭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타자가 확인하는 것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타자가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한 공상을 타인에게 투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라캉에 의하면 자신이 무력하고 자그마한 아기라는 인상을 극복할 수 있도록 나는 당신에게 특정한 방법으로 나를 보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정신분석학의 전형적인 설명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설명은 당신이 어른으로서 가지는 정신생활의 모든 것을 유년기에 일어난 것으로 회수시키고 만다. 이것이 기본구조다.

 

  ‘물질주의유물론이 싸울 때

 

  라캉의 거울단계의 이론은 실존주의의 창시자인 장 폴 샤르트르와 실존주의를 둘러싼 이론을 계승한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사회와 역사가 헤겔이 말한 바의 승인을 둘러싼 투쟁을 배경으로 하여 진화해왔다는 기본적인 개념에 찬동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것은 참된 셀프이미지가 없는 장소에서의 셀프이미지를 위한 투쟁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 모든 것을 꾸며내고 있다. 그리고 이 아이디어는 겉으로 보기에는 기묘하게 생각되지만, 실은 매우 개방적으로도 들린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유럽에서 성 혁명을 일으킨다. 계속해서 이 투영의 메카니즘이 작동하고 있고 그 근저에는 어떤 현실도 없으며 그것이 바로 타자의 곁에 있는 거울이라는 것, 1960년대에 이러한 의문을 사람들이 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해되는가?

  어떤 의미에서 인생이 집합적인 꿈이라면, 사회생활에도 그 집합적인 꿈의 구조가 있다면, 그것이 진실이라면, 왜 우리는 룰을 변경하지 않는 것일까? 1960년대의 새로운 양상의 카타스트로피, 특히 베트남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냉전(冷戰)이 열전(熱戰)이 되는 그러한 대참사를 일으킨 억압적인 사회를 경험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그리고 이제 조금 전 다루었던 두 개의 세계관, 순수한 물질주의와 역사적ㆍ변증법적 유물론이 실제로 전화(戰火)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살해되고, 핵을 이용한 제3차 세계대전과 인류전멸에 대한 심각한 위협을 느끼고 있다.

  이것은 중요한 물음을 던진다. 모두가 해방되어 자유롭게 되기 위해 우리는 근본적으로 그리고 아마도 영원히 어떻게 사회를 변화시켜야 하는가? 이것이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철학의 정신, 그리고 아마도 1980년대의 철학의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당시 사람들에게 많은 희망, 많은 낙관을 주었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4. 포스트모던이란 무엇인가?

 

  네오리버럴리즘은 왜 대두했나?

 

  1960년대, 그리고 특히 1970년대 초기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지구상의 정치지도자와 사회시스템이 지금의 네오리버럴리즘(신자유주의)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종류의 경제체제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두의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를 만들어내었다.

  네오리버럴리즘은 특히 당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영국의 마가렛 대처 수상에 의해 확산된 사고방식이다. 이 조류는 극단적으로 상황을 변화시켰다. 레이건과 대처가 상징하는 네오리버럴리즘은 철학적으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은 개념이 된다.

  실존주의자, 구조주의자, 포스트구조주의자는 기본적으로는 무엇인가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그것은 사회구조라는 것은 꿈과 같은 것이고 거기에는 더 깊은 현실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공동행위를 통해 그것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에 대한 더 깊은 근거는 없다. 그것은 매우 표면적인 가면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네오리버럴리즘은 이러한 철학적 이론화에 대항해서 자기 나름의 철학적 이론화의 수단을 행사하기 위해 철학자에 도전할 수 있는 괜찮은 경제적인 개념을 생각해낸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악한 측면이 경제적으로 실행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대략의 짜임새는 이와 같다.

  만약 정말로 사회영역이 실제로 이미지의 투영을 중심으로 조직된다면, 그 투영의 메카니즘을 자신의 것으로 해서 그에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기 위해 그것을 이용할 수 있다. 커뮤니티에서 셀프이미지의 구축을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다면 계급투쟁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다. 따라서 네오리버럴리즘은 역설적으로 철학자들에 의해 해석되었듯이 초기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의 이론적인 가르침을 완전히 받아들여서 그것을 거대한 광고산업으로 변화시켰다. 왜냐하면 광고산업이라는 것은 이미지와 셀프이미지의 투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도 도쿄의 지하철을 타면 끊임없이 더 좋은 셀프이미지에 대한 제안을 받는다. 더 아름다워집시다. 먹는 것을 참아라. 더 먹어라. 더 부자가 됩시다. 대출을 합시다. 새로운 곳으로 이사갑시다 등등. 이제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유의 가능성으로부터 공격받고 조롱당한다. 그것들은 이미지를 투영해서 말한다. 이것은 당신이 바란다면 이뤄진다고.

  그리고 그것들은 당신의 마음에 스며든다. 광고산업은 당신의 마음에 스며들어서 당신을 조작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 아이디어는 당신이 결국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들 모두 환상의 산물이기 때문에. 대표적인 예시인 할리우드 등의 환상 업계 또한 당신의 마음에 스며들어 당신이 자신에 대해 가지는 셀프이미지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어느새 인간들 사이에서 구축될 뿐만 아니라 제3의 행위자(actor), 3의 주체에 의해서도 구축된다. 저 유명한 이미지의 철학자인 테오도르 아도르노가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함께 쓴 계몽의 변증법에서 문화산업이라고 부른 것이 그러하다. 문화산업은 광고산업과 함께 철학에 대한 통찰을 실행함으로써 그 대상을 조절하고 통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느닷없이 해방의 철학이 그 자신과 싸우기 시작하고, 이 싸움은 철학의 세계 자체에 심각한 충격을 주며 철학의 세계를 움직이게 하는 전체의 이론화의 수정을 재촉한다. 이것이 네오리버럴리즘의 본질이다.

 

  ‘승인을 둘러싼 투쟁헤겔의 이론

 

  이제 그 다음 단계로 가자. 지금 내가 포스트모더니즘 비평을 위해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겠다. 이는 우리 철학자에게 다음의 중요한 지혜를 선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철학의 이론화를 하면서 현실을 해석하는 방법은 사회적 현실 그 자체에 좋든 싫든 영향을 준다. 왜냐하면 철학자는 현실에 대한 매우 일반적인 개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 개념을 다른 종류의 모델이나 이론으로 전환할 수 있다. 사람들을 조정하기 위해 철학적인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완전히 가능하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철학은 요컨대 그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내가 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하나의 사고를 입 밖에 내는 것만이 아니다. 나는 당신이 내가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가 헤겔의 승인을 둘러싼 투쟁의 이론에서 얻은 지혜다. 즉 나는 이 글을 입 밖에 내면서 당신이 생각하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이는 내가 실제로 생각하는 모든 생각에 해당된다. 내가 실제로 생각하는 어떤 생각도 수많은 생각 중 하나다. 지금 이 모든 것에는 앞서 말한 대로 구조가 있다.

  철학은 사상의 구조 자체를 연구한다. 사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안다면, 물론 이 통찰은 사람들을 조정하기 위해 사용될 수도 있다. 네오리버럴리즘은 이 의미에서 어떤 깊은 철학적인 통찰을 경제 시스템에 집어넣은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철학이 사람 발목을 잡기 시작한다. 철학자들이 이를 의도하지는 않는다. 마치 철학적인 모략이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희망

 

  내가 알기로 로널드 레이건과 마가렛 대처는 철학자와 이야기하는 것에 열성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철학자가 왕이나 여왕이 되는 일 따위는 일어난 적이 없다. 정반대다. 그때 우리와 대립했던 사람들은 우리의 아이디어에서 권력을 얻고 바로 그 아이디어에 대항해서 사용해왔다. 이는 특히 70년대와 80년대 초에 프랑스의 위대한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미셸 푸코와 관련한 철학적 이론화에 있어서 일종의 아이러니한 계기를 마련했다고 말할 수 있다.

  미셸 푸코의 저작에서 얻을 수 있는 지견(知見)은 어떤 의미에서 철학이 어떻게 현실에서 소외되는지에 대한 해설이다. 푸코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에 입각하여 사회의 발전을 본다. 그래서 그는 모더니티’=‘근대성’, 나아가 그가 보고 있는 역사 전체를 억압적인 전략의 결과로서 사고한다. 그 억압적인 전략은 모두 철학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 때문에 푸코에 의하면, 철학의 사상, 즉 사상에 대해 사고하는 것은 사회적 현실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타인과의 교류방법을 갈고 닦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 역사를 절망적이고 아이러니한 것으로 기술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도 저항할 수 없다, 언제나 그들이 성공한다, .

  어떤 의미에서 미셸 푸코의 저작은 극히 비관적이다. 반격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 이제 우리는 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셸 푸코의, 그가 당시 참가한 학생운동의 실패에 대한 리액션이다. 즉 왜 당시 학생운동이 실패했는지에 대한 그의 설명이다. 지금 나는 당시 학생운동의 실패 후에 에둘러온 1980년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절망적인 상황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때는 네오리버럴리즘이라고 불리는 순수자본주의의 다크시스템(dark system)이 완전히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독일에서 평화적인 혁명이라고 불리는 또 하나의 혁명이 일어났다. 그 평화적인 혁명은 독일의 재통일로 완성된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고, 그 결과 소련도 붕괴하기 시작한다. 물론 이 역사적 사건에 영향을 준 수많은 요소들이 있다. 그리고 유명한 영화 스타워즈의 타이틀을 빌어 말하면, 그것은 새로운 희망의 때이기도 했다.

  이 새로운 희망은 어떻게 무엇으로 구성되었을까? 이 새로운 희망을 떠오르게 한 것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맥락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해보겠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자유민주주의가 전세계의 질서를 받아들인다는 개념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가 새로운 이상의 현실을 펼칠 것이라고. 그 배경의 하나는 특히 중대한 변화가 없어도 역사의 방향성을 보존하게 하는 영원의 평화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한 글로벌한 세계질서완전히 개방적인는 그와 동시에 아이러니한 것이었다.

 

  《사인펠드(Seinfeld)가 가르쳐준 모든 것은 표층에 있다는 것

 

  80년대 후반과 90년대의 여러 지적 풍조를 어떻게 볼 것인지를 고찰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으로 TV프로 하나가 있다. 사인펠드(NBC 1989~1998 방송)라는, 미국인 네 명 중 한 명이 봤다는 국민적 인기를 얻은 드라마다.

  이 드라마에는 다양한 아파트에서, 특히 이 프로의 주인공인 제리 사인펠드가 사는 아파트에서 각각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여러 뉴요커가 등장한다. 그들은 모두 완전히 자유롭다. 그들은 사회적 제약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있다. 그들의 생활에는 어떤 억압도 없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단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 그들이 경제적인 압력이나 무언가로 고민에 빠지는 일은 결코 없다. 그들은 그저 자유롭다, 마치 극중에 있는 것처럼.

  이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소위 완벽한 실존주의다. 모두가 해방되어서 자기 자신의 셀프이미지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은 타인과 잘 지내지 못한다. 그들은 사랑에 빠지는 방법이나 좀더 깊은 관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깊이라는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표면적이다. 무엇도 남지 않는다.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좋다. 우리는 인간이고, 그저 그 속에 있을 뿐이다. 이 프로의 유명한 캐치프레이즈처럼, 현실은 a show about nothing=“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쇼. 이것은 유명한 대사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쇼”.

  《사인펠드의 상징적인 에피소드의 한 장면을 소개하겠다.

  등장인물들은 어느 날 TV프로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드라마 속의 등장인물들이 어느 날 TV프로가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 기획을 큰 방송국에 팔아넘긴다.

  방송국 관계자가 이것이 무엇에 대한 쇼인지를 묻는다. 어떤 쇼를 해보고 싶은지를 주인공들에게 묻는다.

  “이 쇼로 무엇을 할 생각이죠?”

  주인공은 답한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쇼에요.”

  조지 코스탄자라는 등장인물이 이 아이디어를 생각해내었다. 그것은 그 무엇에 관한 것도 아닌 쇼다.

  방송국 관계자는 매우 당황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쇼라는 게 뭐죠?”

  “, 단지 우리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쇼에요.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거죠. 그저 빈둥거리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심각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이것은 단지 우리에 대한 쇼에요. 그 의미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쇼입니다.”

  이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본적으로 현실 그리고 사회적 현실, 과학적 현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쇼라고 알려주는 이론적인 조류다. 아무것도 될 수 없으며, 뭐든 어떤 의미도 없고 어떤 구조도 없으며 어떤 존재도 없고 현실도 진실도 없다.

  이것이 권력과 싸운다는 아이디어 후에 찾아온, 그다음 단계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파괴하면 니힐리즘이 찾아오고, 절대적인 니힐리즘을 선택하면 결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완전한 자유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마음에 품고 모든 것을 파괴하면 네오리버럴리즘도 제거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문화산업 모두를 일소할 수 있으며, 자신이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것만 같다.

  그러한 이유에서 이 배우들은 자신의 TV프로 제작을 시작한다. 그들은 미디어를 다시 한번 조절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미디어를 통해 보여준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쇼다. 여기에 엄청난 아이러니가 숨어있다.

  “완전한 자유라는 희망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파괴하자.”

 

  ‘포스트모던을 이용한 트럼프

 

  안타깝게도 포스트모더니즘은 당시 생각한 만큼 해방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미디어 공간의 새로운 관념을 불러일으켰다고는 말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리얼리티 프로의 풍조 가운데 나타나는 창조의 일부다. 그리고 여기에 간단하게 답할 수 있는 매우 단순한 질문이 있다. 최근 미국의 어떤 대통령이 리얼리티 프로를 가지고 있었을까?

  도널드 트럼프가 분명하게 답했다. 트럼프는 포스트모던 이론을 정치에 완벽하게 집어넣은 예다. 여기에 우리의 새로운 철학적인 적이 존재한다. 트럼프는 신자유주의의 다음 라운드일 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현명하다. 실제로 그는그 자신이 즐겨 강조하는 바정말로 천재다. 그는 포스트모던적인 천재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통찰을 경제적인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초적인 개념은, 앞서 말한 것을 기억하겠지만, 이 모든 것을 추동한 것은 우리가 현실을 볼 수 없고 사회적 현실 따위도 없고 영상 밖의 현실도 없고 다만 하나의 거울만이 또 하나의 거울 옆에 있다는 개념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좀더 확실히 거울을 던져버리고 새로운 단계를 시작할 때다.

 

  ‘시뮬레이션 속에 산다는 환상

 

  김정은과 도널드 트럼프의 회담이 행해졌다. 사람들은 이 회담을 SF영상처럼 볼 것이라고 앞서 지적했다. 그리고 회담 영상을 실제로 보면 확실히 매우 초현실적으로 보인다. 그냥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리고 실제로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틀렸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냐고 묻는다면 바로 현실의 계층의 근본적인 변화라고 답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만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포스트진실의 포스트모던 레벨에 이르렀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이 거대한 세계의 포스트진실을 볼 수 있는지 설명해보겠다. 인터넷 시대에는 정말이지 뉴스를 믿지 못하겠다. 많은 가짜뉴스, 혐오 발언, 그리고 현실의 부당한 허위 사진들이 있다.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는 이것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완전히 알고 있다. 그는 인터넷 시대의 개념을 통해 만들어진 공간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으며, 이것을 전혀 다른 새로운 플랫폼으로서 사람들을 통치하기 위해, 그리고 경제적인 부를 만들어내기 위해 이용한다.

  그것이 그가 트위터를 사용하는 이유다. 그가 우리에 대해 소셜미디어의 구조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왜냐하면 소셜미디어란 완벽한 포스트모던 플랫품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상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이를테면 누군가가 비디오 게임 속에서 죽임을 당한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디오 게임에 불과하니까. 무슨 일로 당신이 인터넷상에서 누군가에 대해 혐오 발언을 했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실로 생각되지 않으므로.

  따라서 우리는 이미 컴퓨터 시뮬레이션 속에 혹은 SF영화 속에 살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것이야말로 김정은을 보고 사람들이 이것은 SF영화다.’라는 인상을 받는다고 지적할 수 있는 이유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김정은과 도널드 트럼프 이 둘은 SF영화의 대본에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가 모두 디지털의 컴퓨터 시뮬레이션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이용하고 있다. 그들은 그러한 속단의 사실을 우리에 대해 이용한다.

 

 

  5. 신실재론

 

  ‘상대주의에서 신실재론으로

 

  여기에 우리에 반응해서 행사되는 포스트모던 이론이 있다. 그것은 새로운 무대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의 무대 위에는 완전히 새로운 생산물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광고는 이제 필요 없다. 어느 날 갑자기 혐오나 폭력은 유료가 된다. 우리는 실제의혐오나 폭력을 위해 돈을 지불한다. 호러영화를 위해서가 아니다. 트럼프가 취하는 행동은 호러영화이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보기 위해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 당신은 혐오나 폭력을 보기 위해 돈을 낸다. 혐오나 폭력은 사고파는 물건이 되었다. 그것은 공포와 무지의 정치를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것을 산다, 결과적으로. 왜냐하면 우리는 그에 반응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바로 여기서 신실재론이 등장한다.

 

  ‘신실재론이 몇몇 이론화와 함께 실제로 시작된 것은 약 10년 전이다. 내가 신실재론이라고 부른 데에는 유명한 제창자 둘이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퀑탱 메이야수와 미국의 철학자 폴 보고시안(Paul Boghossian)이다. 같은 해에 그들은 우리가 서 있는 위치와 우리가 어떻게 시대의 개념적 공간을 새롭게 창조할 것인지에 대해 알려주는 두 권의 매우 중요한 철학서를 출간했다. 메이야수와 보고시안은 상대주의와 사회구성주의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말해보겠다.

  여기서 상대주의의 정의는 모든 의견은 다른 의견과 마찬가지로 좋다.’는 개념을 지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각기 다른 의견을 항상 가지고 있다. 우리의 의견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의견의 차이가 있다면 통상 우리 중 누군가는 항상 틀림없이 옳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내 손가락의 수로 의견의 차이를 보인다면, ‘누가 제대로 말해주는지를 분명히 하면 된다.

  사물의 사실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상대주의는 사물의 사실 따위는 없다고 논한다. 이때 도덕적 상대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겠다. 많은 사람은 안타깝게도 도덕적 상대주의가 옳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도덕적 상대주의란 다양한 도덕관이 있다는 관념이다. 일본의 도덕관이 있고 러시아의 도덕관이 있고 서양의 도덕관이 있고 당신이 가르쳐준 도덕관이 있다.

 

  ‘서양’ ‘동양을 넘어서서 보편성을 추구하라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다. 당신은 서양의 도덕관이 종교를 넘어 과학, 계몽, 발전에 기반하여 완벽히 비종교적인 사회를 가져야 한다.’는 개념으로부터 성립되었다고 배웠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각각의 인생과 각각의 권리를 가지기를 바라고 이를 실현하려고 한다.’는 사회적 개인주의와 연결된다. 이 설명에 따르면, 서양의 도덕관은 보편적인 인권을 믿는다.

  그런데 도덕적 상대주의에 의하면 실제로 인권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특정 인권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것은 서양의 인간들뿐이기 때문이다. 가령 인권, 예를 들어보면 공격받지 않는 인권, 아파트에 홀로 생활할 수 있는 인권 등이다. 상대주의는 러시아인, 일본인, 혹은 인도인의 사고방식이 각기 다르다고 생각한다. 서양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양의 많은 사람들은 그다지 개인주의적이지 않다.’고 믿는다. 요컨대 러시아인은 가정의 가치를 중시하는 반면 서양 사람들은 가정의 가치를 중시하지 않으며 어쩌면 돈을 더 중시할 모른다. 그리고 상대주의자는 이러한 도덕관의 선악을 결정짓는 기반 따위는 없다.’고 말한다. 단지 이다지도 다른 도덕관이 존재할 뿐이라고.

  확실히 사람들은 매우 다르며 각기 다른 문화가 있다. 일본인은 젓가락으로 밥을 먹고, 서양인은 포크와 나이프로 밥을 먹는다. 그러나 그뿐이다. 단지 작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누가 옳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실이다. 포크와 나이프 혹은 젓가락으로 먹어야 하는 이유는 없다. 선택일 뿐이며, 기호에 불과하다. 그리고 만약 도덕관이 취향의 문제일 뿐이라면, 하우스 오브 카드(넷플릭스 2013~방송)에서 프랭크 언더우드를 연기한 저명한 배우가 말하듯이 만약 그것이 진실이라면 정의 따위는 없고 있는 것은 정복뿐이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모든 정치적 상황은 각기 다른 도덕관이 있으며 서로 맞부딪힐 뿐이다. 이를테면 서양의 도덕관에 대해 러시아의 도덕관이 그저 맞부딪힐 뿐이다. 따라서 사회적 현실에서진실이 없다면순수한 다툼이 생긴다. 그것이 도널드 트럼프의 세계관이다. 결국 정의는 없고 있는 것은 정복뿐이다. 그것이 그의 비즈니스 모델이다.

  그리고 포스트모던에서 확고한 신념의 상대주의가 이 상황을 추동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사태를 믿고 있다. 당신은 이슬람 국가들은 예를 들어 코란에 기초한 완전히 다른 도덕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리고 기독교 국가들은 성서에 기초한 도덕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누가 옳은지를 결정하는 방법은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입장이 도덕적 상대주의다. ‘신실재론은 이 모든 것에 이의를 제기한다.

 

  아이를 고문해도 될 이유는 없다

 

  한가지 여기서 유념해야 하는 것은 상대주의가 항상 일반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당신이 내 손이 다섯 개 있다고 믿고 있고 나는 내 손이 두 개 있다고 믿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둘 다 옳다. 내게 손이 두 개 있거나 다섯 개 있거나 둘 중 하나니까.

  설명해보겠다. 두 개 있다. 그래서 나는 내 손이 두 개 있다고 믿고 있다면 내가 옳다. 그리고 누군가가 지금 내게 두 개보다 많거나 적은 손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 사람은 단지 다를 뿐이다!

  상대주의는 일반적으로 진실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약 상대주의가 일반적으로 진실이라고 한다면, 잘 알다시피 그것은 그 자신에 적용된다.

  즉 만약 상대주의가 진실이며 당신이 상대주의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단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즉 당신은 상대주의가 옳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만약 상대주의가 진실이라면 그것을 믿을 필요가 없다. 알겠는가? 만약 상대주의 자신이 상대주의에 대해 상대적이라면 그것을 믿을 이유는 전혀 없다. 따라서 그것은 무작위적이고 자의적인 선택이며, 이론이 아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옳다.

  그렇다면 도덕의 게임을 살펴보자. 다양한 도덕관은 정말로 존재할까? 요리에는 다양한 양상이 있다. 다양한 먹는 방식이 있다. 의문의 여지는 없다. 그런데 다양한 도덕관은 존재할까? 다음의 간단한 예를 들어보겠다.

  나는 절대적으로 대다수의 인간이 러시아인이든 일본인이든 인도인이든 독일인이든 아이를 고문해도 될까요?’라는 질문에 대해 아니요!”라고 답할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당연하지 않나? “아이를 고문해도 될까요?”

  답은 “NO”! 아이를 고문해도 될 이유는 없다.

  아이를 본 적이 있는가? 아이를 고문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단지 절대적인 공포다. 아이를 고문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도덕관은 없다. 그것은 선택지가 아니다. 그것은 도덕관의 결여다.

  그것은 아이를 고문해서는 안된다!’와 같은 절대적인 도덕적 사실이 있다는 것을 바로 증명한다. 그런데 만약 하나의 도덕적 사실이 있다고 한다면지금 제시한 대로, 절대적인 도덕적 사실(moral fact)이 존재한다는 것, 도덕적 상대주의는 옳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도덕적 사상(事象)에 선택지를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지 않다.

 

  ‘과학도덕의 사이에서

 

  그렇다면 더 파고들어서 이 개념을 일반화해보자. 도덕적 상대주의에 대해 좀더 과격해 보자.

  우리는 이미 절대적인 도덕적 사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이를 고문하지 마라. 최악의 부모가 아니라면, 사람들은 부모를 공경한다. 싫은 자가 아니라면, 이웃과도 잘 지낼 것이다. 많은 사실이 있다, 분명한 도덕적 사실이. 지금 제시한 매우 단순한 것들이다. 사람을 죽이지 마라, 이러한 도덕적 사실들이 있다.

  그렇다면 도덕적 사실이란 무엇일까? 이것이 내 대답이다. ‘신실재론에 의한 우리의 시대에 있어서 중요한 물음에 대한 전반적인 답이다.

  도덕적 사실은 타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본 때에 알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당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상상해보라. 그리고 이 경우의 도덕적 의문은 나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것을 받고 싶어할까?’라는 것이다.

  나는 종종 무엇인가를 하고자 한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이 그것을 내게 해주기를 원치 않는다. 당신이 지금 매우 화가 나서 누군가를 때려눕히고 싶다고 상상해보라. 어쩌면 정당한 이유에서 그럴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은 자신이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당신 인생에서 처음으로.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와 동시에 상대방이 되는 것을 상상해보라. 당신은 상대방을 때려눕히고 싶을까? 대답은 NO. 상대방은당신이 이 상대방의 입장에 되어 그러한 대우를 받고 싶지 않다는 사실은당신이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당신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도덕적 사실의 의미를 이해한다. 그런데 당신이 상대방의 입장에 있는 것만을 상상해보라. 그리고 이 관점에서 당신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당신은 자신이 처한 상황의 도덕적 사실에 의해서 판단한다.

  그리고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모든 사실을 데스크에 의제로 올리면 당신에게 다름을 제기하지 않는다. 당신이 상황을 완전히 설명하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지식이 매우 중요한 이유다. 지식과 과학은 도덕관을 형성하는 데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만약 우리가 지식과 과학을 공격하면, 그에 따라서 우리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혹은 더 어렵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현대의 권위주의적 인물이 과학을 공격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트럼프와 같이 기후변동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실제의 지식을 의심하기 위해 과학적 전문가를 공격한다. 이것은 다음의 구조로 정리할 수 있다.

 

  스스로의 아는 능력을 의심해서는 안된다

 

  포스트모던의 독재자우리 시대의 많은 유감스러운 반민주주의자, 포스트모던의 악한 이용을 꾀하는 반계몽활동가에게는 다음의 계획이 있다.

  그들은 당신을, 당신이 아는 것을 정말로 알지 못한다고 믿게 만든다. 그것은 새로운 레벨의 난감한 계획이다.

  당신은 실제로 무엇인가를 알고 있지만, 정치의 짜임새가 당신에게 현실을 모른다고 믿게 만든다. 그들은 당신에게 두 개의 손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게 만든다. 기후변동이 정말로 있는지 없는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시리아의 내전도 기본적으로는 문제가 없고, 그 속에서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신은 시리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완벽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는 당신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다.

  요컨대 당신은 당신 스스로 아는 능력을 의심한다는 것. 만약 당신이 아는 능력을 스스로 공격하게 된다면, 그에 따라서 당신은 당신 자신의 도덕관을 공격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도덕관은 우리의 아는 능력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이 현실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그에 따라서 당신은 바로 도덕관을 이해하는 것도 어렵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도덕적 잘못을 범할 가능성을 높인다.

 

  ‘위기의 시대에 당신이 알았으면 하는 것

 

  우리는 지금 심각한 위기의 시대 속에 살고 있다. 민주주의, 기후변동, 중동의 파멸의 가능성 등등의 위기다. 위기의 시대다. 위기의 시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말할 수 있으려면 새로운 관념이 필요하다. 우리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할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마도 우리 쪽으로 향해가는 것들조차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파괴되고 말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공공의 철학적인 내적 성찰을 해야 할 때다.

  방금 들은 것에 입각해서 당신은 지금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지금 당신에게 이해를 시키고 싶은 철학적 결론은 대략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지금 당장 진짜 사실을 찾아내기 위해 인류 전체로서 힘을 모아야 한다. 경제적 사실, 우주에 관한 사실, 그리고 도덕적 사실. 만약 우리가 무엇이 사실인지, 무엇이 분명한 사실인지를 알 수조차 없다면, 민주주의가 나설 차례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란 거칠게 요약하면, 내가 명백한 사실의 정치라고 부르는 것에 기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지켜야 할 가치다. 민주주의는 사람들이 실제로 알고 있는 것을 모아서,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점과 점을 연결하여, 현실의 계통적 해석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리고 현실의 계통적 해석에 발 딛어야만, 현실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다.’라는 환상을 뛰어넘는 해석에 기초해야만 비로소 우리 시대의 커다란 의문에 답해나갈 수 있다.

 

  인간은 모두 동물, 바로 그렇기 때문에

 

  포스트진실의 위기에 직면하는 순간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나의 답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간과한다. 만약 포스트진실의 위기에 직면했다면, 진실을 다시 한번 시도하는 것은 어떨까? 진실은 이해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이해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도덕적 사실을 포함해서 사실은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보편적이다. 그것들은 모든 인간에게 열려 있다. 우리가 같은 종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이에 심대한 차이는 없다. 지역적인 문화의 차이가 있기는 해도 그것은 그렇게 심대하지 않다.

  나와 당신은 근본적으로 같다. 현실과 도덕적 사실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능력을 가진 인간이자 동물이다. 인간이며 동물이라는 것의 합리성에 관한 이 통찰을 우리 교육 시스템에 편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드디어 우리가 끊임없이 직면하는 거짓이나 가짜뉴스를 의심하기 시작할 수 있다.

  철학은 이를 도울 수 있다. 왜냐하면 철학의 의무는 임마누엘 칸트가 이미 18세기에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말을 인용하여 말한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Sapere Aude, 용기를 내어 알고자 하라!

 

 

 

哲学時代との格闘」、『マルクス・ガブリエル 欲望時代哲学する』、201812NHK出版親書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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