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존재론의 자루> 일본어논문 강독팀에서 함께 읽고 번역한 것이다. 이 글의 필자인 시미즈 다카시는 불교학자이며 미셸 세르 연구자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대승불교의 창시자인 나가르주나(龍樹), 일본 헤이안 시대의 승려 구카이(空海, 773~835), 가마쿠라 시대의 승려 도겐(道元, 1200~1253) 등의 불교철학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작년부터 관심을 가지고 그의 글을 찾아 읽고 있는데, 너무나도 훌륭해서 많이 배우고 있다. 

시미즈 다카시를 알게 된 것은 오쿠노 카츠미를 경유해서다. 일본에서 전개되는 '존재론의 인류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오쿠노 카츠미를 알 것이다. 오쿠노는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의 채집수렵민에 관한 민족지적 연구를 해왔으며 '존재론의 인류학'의 주요 이론서를 번역했을 뿐더러 그 자신 또한 여러 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5년 전 그의 공개 세미나에 참석한 이후 그의 연구를 한국에 소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면서 오쿠노의 연구활동을 살펴보다가 오쿠노의 동료인 시미즈 다카시를 '발견'하게 되었다. '존재론의 인류학'의 학자들도 그러하거니와 이런 대단한 학자를 만난 것 자체가 내게는 행운 같고, 그래서 그러한 학자들이 감사하다. 

시미즈 다카시는 인류학자는 아니지만 '존재론의 인류학'이 여타 학문과 만났을 때 어떤 시너지를 갖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불교철학 그 자체만으로는 지금의 시미즈의 사상으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존재론의 인류학'에서 보자면 시미즈의 사상은 분명 그 문제의식을 한 단계 밀고 나갔다. 미셸 세르가 '한 연구영역은 다른 연구영역에 의해 풍요로워진다'고 말한 것처럼, 또 데스콜라가 근대의 학문적 세분화는 이제 거의 학문적 효용성이 다했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 인류학자가 어떤 인류학을 해야하는지를 모색할 때에 시미즈의 사상은 훌륭한 본보기를 제공해줄 것이다. 

21세기 학문의 재편성(재구성)은 경쟁적 구도에서 보자면 누가 '게임체인저'가 되는지에 따라 결정되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겉보기에 근대과학(사이언스)의 상대화와 사물의 행위자적 위상을 둘러싼 논쟁들이 과학기술학 또는 과학사회학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 같지만, '결정적인 한방'이 나오기에는 그 태생적 한계가 있다. 다시 말해 안에 있으려 하면서 밖을 보려 하면 그 복잡한 논리에 얽매이기 쉽다. 작금의 학문의 시대적 전환기에서 인류학이 빛을 발하는 것도 안에 있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서양의 우리가 저 안에도 없으면서 저 논리를 따라가게 되면 스스로 변방에 머물게 된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형이상학이자 '게임체인저'로서 과감히 불교철학을 논하는 시미즈의 행보가 주목된다.

다음의 글은 브뤼노 라투르의 사상을 미셸 세르의 그물망 이론을 거쳐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으로 끌어올린다. 이것은 신유물론 등의 논의를 신단자론으로 풀어내기 위한 서설이다. 시미즈의 사상에서 신단자론은 대상적 세계 그 자체인데, 이 글에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대승불교의 화엄적 세계, 곧 만다라로 통한다. 우리 인간에게 그 세계는 정념으로 다가온다. 최근 생태적 연구에서는 그러한 정념을 'sentient'로 이야기하는 것 같다. '생태적 감수성'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것 같다. 불교에서 이 말에 대응되는 용어는 유정(有情)이다.  

 


 

세계의 ‘웅성거림’에 귀 기울이다

: 브뤼노 라투르의 사상적 계보와 그 비전

 

시미즈 다카시(清水高志)

 

브뤼노 라투르는 철학, 인류학, 사회학, 환경론, 현대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진 현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귀재다. 또한, 그는 수많은 논쟁에 참여한 만만찮은 논객이기도 하다. 그는 논객으로서 근대 이래 인간의 뿌리 깊은 어떤 태도에 대한 거절과 기피 등의 형태로 그 자신의 의견을 심심찮게 표명해왔다. 잘 알려졌다시피 그의 의견이란 우리가 과학의 대상을 인간의 관여와는 별개의 외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며 그에 따라 객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Out-there-ness)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이다.[각주:1] 과학적인 지(知)의 대상이 발견되는 과정에서 실제로 인간 주체가 이러저러하게 개입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러한 관여가 사후적으로 은폐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철저하고 집요하게 폭로해왔다.

그의 비판이 향하는 또 다른 표적은 과학적 지식의 입장을 사회학적으로 고찰하는 가운데 주창된 ‘사회구성주의(Social Constructionism)’라고 불리는 입장이다.[각주:2] 이는 앞서 서술한 근대적인 실재론과는 반대로 과학적인 지식 및 기술이 인간집단의 요구와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 그때그때 공유되는 해석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며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던의 근대비판이나 문화상대주의의 말하자면 과학사회학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라투르의 방법론인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 이하 ANT)은 근대인의 가치관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임과 동시에 언뜻 [근대인의 가치관과] 정반대로 보이는 문화상대주의적인 근대비판에 대한 진일보한 비판이다.

본론에서는 후자를 우선 검토하고 그다음 라투르 사상이 어떤 문제의식과 구조를 가지는지를 해명하고자 한다. 또한, 주체와 대상이 환원하는 상호작용 그리고 그 양극에 있는 ‘다수성’과 그 속에서 부상하는 주제군을 미셸 세르의 초기 라이프니츠주의적인 인식론과 비교하고 세르의 인식론을 철학사적인 맥락에 위치 짓고자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대상(질료)으로서의 존재 방식과 형상(형식)으로서의 존재 방식 사이에서 작용체(operator)의 순환, 모듈과 관념의 다극적인 교차교환 등 신단자론적인 세계상으로 이끌리게 될 것이다.

 

1. 비환원의 원칙이란?

 

‘사회구성주의’의 견해를 이론적으로 확립한 트레버 핀치[각주:3]와 비베 비이커[각주:4]의 연구를 예로 들어보겠다. 이 연구 사례는 자전거 기술이 개발되는 과정을 분석하면서 기술개발에 관한 문제뿐만 아니라 인간[사회]의 관여 없이 그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인위적인 요인이 어떻게 그 성립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지가 분석되고 검증될 필요가 있다. ‘사회구성주의’ 입장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상세한 분석에 기반한다.[각주:5] 그들은 ‘자전거’라는 도구가 그 개발과정에서 어떤 것으로 ‘해석’되는지에 따라 현재의 모습과는 딴판이었을 수도 있고 또 최종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으로 진화했을 수도 있음을 강조한다. 즉, 그것은 [당시] 신사들에게 고속주행을 위한 거대한 앞바퀴와 높은 안장이 있는, 무엇보다 위험을 감수하며 스포츠로서 즐겨 탄 도구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과 아이들까지 포함해서 누구나 안전하고 쉽게 이용하는 이동수단의 가능성이 있었다. 현재의 모습으로 ‘자전거’가 진화해온 것은 반드시 필연적이지 않다. 있을 법한 다양한 ‘자전거’ 가운데 그 모습과 기능이 선택된 사회적 요인과 ‘해석’이 기술의 방향을 크게 좌우한다는 것을 핀치와 비이커는 정밀하게 검증한다.

라투르에 의하면, 근대적인 과학관은 지식이 참인 요인을 소박하리만치 그것이 다루는 외재적인 대상에 귀속시키며 인간의 관여를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사회구성주의’는 오히려 그것[지식이 참인 요인]을 인간집단과 그에 의한 ‘해석’이라는 요인에 일방적으로 귀속시킨다. ‘외재적인 대상’인가 아니면 ‘인간집단’인가에 따라 방향성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양쪽 요인의 작용을 단지 어느 한쪽으로 귀속시킨다는 의미에서 두 입장 모두 환원주의다. 이러한 환원주의 모두를 부정하는 라투르의 태도는 ‘어느 쪽도 아니다(neither)’라는 의미에서 ‘비환원주의’라고 할 수 있다.[각주:6] 자연과학이 다루는 대상이 발견될 때, 기술혁신이 일어날 때, 실제로는 양쪽 요인은 항상 줄다리기하듯이 서로 작용한다. 라투르가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양쪽 요인을 시야에 넣은 다음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순환적인 작용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과학적 지식의 대상을 외재적으로 상정하지 않으며 인간 주체의 작용을 고려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한 대상이 찾아지고 발견되기까지는 다양한 종류의 인간 주체의 관여가 있으며 기술적 대상에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그러한 다양한 양상과 연관(association) 자체는 그 대상이 발견된 후에는 망각되고 만다. 대상과 인간 주체의 순환적인 작용에 대한 분석은 그러한 여러 관계의 경합과 연관까지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어야 한다. 대상이 최종적으로 특정 형태로 수렴되는 데에서 주체의 접근이 복수로 나타난다는 점을 유의해보자.

 

2. ‘다수성’의 문제

 

이 ‘다수성’이라는 주제는 라투르의 접근방법에서 정말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앞서 ‘자전거’의 사례로 말하면 그 있을 법한 모습과 기능에는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더욱 안전한 ‘자전거’를 구현하기 위해 도입된 ‘고무 타이어’가 의외로 고속주행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안 덕분에 현재와 같은 자전거로 안착하였다. 부녀자를 포함해서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손쉽게 이동 가능한 수단이라는 ‘해석’과 스포츠로 즐겨 타는 도구로서의 ‘해석’은 타협점으로서 중간적인 ‘해석’을 포함하며, 실제로 지금 모습의 ‘자전거’가 성립하기까지 다수의 ‘해석’이 경합해왔다. 각각의 ‘해석’을 채택한 인간집단 간의 상호 타협은 사전에 그들 내에서 합의가 성립했기 때문이 아니다.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고무 타이어’라는 객체=매체였고 그것이 초래한 고속주행이라는 부산물에 의해 사후적으로 복수의 ‘해석’ 간의 납득할만한 착지점이 찾아진 것이다.

이렇듯 매체로서의 중심적인 대상이 행위체(actant)[각주:7]로 작용함으로써 다양한 행위자(actor)가 결합하고 또 그것들이 다양한 배치를 채택하는 것(네트워크)이 밝혀지는데, 이것이 곧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의 특징이다. 이 중심적인 대상은 기술적인 지(知)가 수렴하는 [해석의] 절충안 혹은 과학적인 지(知)의 대상인데, 그것과 결합해서 작용하는 행위자들의 ‘다수성’과 그 관계는 단지 대상에 대응되는 사회와 같은 것만이 아니다. 19세기 파스퇴르가 젖산발효 효소를 발견한 것을 예로 들어보자. 당시에는 발효 현상을 무언가의 미생물에 의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이단적이었다. 오히려 화학적인 반응으로 보는 것이 대다수였다. 파스퇴르 자신도 처음에는 발효를 촉발하는 요인으로 어떤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했다. 그러나 젖산발효라는 현상이 수반하는 ‘회색 물질의 점들’이 관찰되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파스퇴르는 이 ‘대상 x’가 어떤 ‘작용’을 할 수 있는지를 연구실 내 행위자를 동원해서 검증해갔다. 그것은 물을 탁하게 하거나 석회를 소실시키거나 결정 또는 침전을 일으킨다. ‘대상 x’는 이 무수한 행위, ‘작용’에 이름 붙여진 것이며 행위체가 된다.[각주:8]

파스퇴르는 이 ‘대상 x’를 알코올 발효를 일으키는 양조효모와 비교하고 발효 현상과 관련해서 그 ‘작용’의 유사성과 차이를 밝히고 나아가 학계의 다른 성원들에 의해서도 그것이 어떤 행위체인지를 검증해간다. 중심적인 행위체로서 젖산발효 효소는 이렇듯 독립적이고 능동적인 행위체로서 차츰 분리되고 객관적인 것이 되는데, 그 과정에서 파스퇴르에 의한 인적 관여, 다른 학계 성원에 의한 관여, 다른 물적 행위자(석회, 물, 결정 등)와의 관계 맺음이 반복적으로 행해지며 그것들이 중심적인 행위자를 둘러싸고 분절화되고 의미화된다.

중심적인 행위체와 여러 행위자의 작용은 전자가 능동적인 행위체라는 것이 검증되는 과정에서 그야말로 순환하듯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지만, 인간 주체에 의한 접근은 그때마다 중심적인 행위체인 객체를 경유해서 행해진다. 그러나 그러한 객체가 지식의 대상으로서 객관적이고 자율적인 것으로 일단 확립되고 나면 순환적인 작용은 자각되지 않고 인간의 관여와는 별개로 그것이 처음부터 존재해왔다고 생각하게 된다. 파스퇴르의 발견 이전부터 젖산발효 효소는 존재한 것이 된다. 그렇지만 그에 따라 우리는 그러한 외재적인 지(知)의 대상과 그것을 언어화하는 주체가 처음부터 서로 분리된 것으로서 ‘일대일 대응’하고 있다는 근대적인 과학관에 함몰된다.

과학적인 지의 대상에 대한 인간 주체의 다양한 접근은 객체를 매체로 다루지만, ANT가 무엇보다 해명한 것은 그러한 접근과 그에 동원되는 주변적인 행위자의 다양성이다. 이때 인간 주체의 존재 양식으로서 그 속에서 구체적으로 분석되는 것은 객체의 능동적인 작용을 맞아 비로소 결합해가는 갖가지의 주체적인 접근이며, 그러한 작용을 빼놓아도 혹은 그러한 작용을 개입해도 낱낱이 흩어진 그 ‘다수성’이다. 그 의미에서 라투르가 행한 것은 실제로 인적인 행위자가 과학의 대상에 과도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해 유일하게 가능한 참된 회의라고도 말할 수 있다.

 

3. 질료에서 형상으로, 형상에서 질료로─순환하는 작용체

 

라투르는 『판도라의 희망』에서 아마존의 삼림토양 조사를 예로 들면서 앞서 서술한 ‘일대일 대응’의 과학 모델을 비판한다.[각주:9] ANT에서는 일반적으로 중심적인 행위체는 매개항으로서 단독의 객체이며 인간 주체에 의한 접근 측에 ‘다수성’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은데, 매개항으로서 객체가 복수로 한꺼번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라투르가 제시하는 모델은 ANT가 과학적인 지의 발견보다 보편적인 구조에 대한 해석으로 파악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식이라는 것이 어느 하나의 정신이 어느 하나의 대상과 일대일로 대응하는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참조(Reference)라는 것이 어느 한 사실이 그 사실에 의해 참이 증명된 문장에 의해 특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반대로 우리는 각각의 단계에서 한쪽 끝에 질료(객체), 다른 한쪽 끝에 형상(형식)을 가진 공통의 작용체(Operator)를 인식해왔다. 이 작용체는 유사성으로는 결코 메울 수 없는 단절에 의해 다른 단계와 떨어져 있다. 또 [작용체는] 객체와 언어 사이의 차이를 전달받아, 시대착오적인 언어철학에 의한 이 양자의 고정을 해체하고, 재분배해가는 구슬처럼 잇듯이 연결된다. […] 이 연쇄의 본질적인 특징은 가역적이며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한 정신이 어느 한 대상과 일대일로 대응한다”라는 ‘일대일 대응’ 모델은 “한 사실이 그 사실에 의해 참이 증명된 문장”에 따라 역으로 참으로 간주되는 것과 같다. 대상과 정신(주체)은 이 경우 단지 서로를 긍정하는 루프를 표현할 뿐이라고 라투르는 말한다. 이러한 합선(short circuit)에 빠지는 것은 스스로 만들어낸 물신(fetishism)을 숭배하는 우상숭배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여기서는 또한 객체와 주체의 관계가 ‘대상과 정신’, ‘질료와 형상’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중심적인 행위자와 주체의 접근 간의 순환적인 관계는 그러한 양자를 왕복 순환하는 “한쪽 끝에 질료(객체), 다른 한쪽 끝에 형상(형식)을 가진 작용체”로서 파악된다. 그리고 바로 앞서 서술한 루프에 빠지지 않은 데 필요한 것은 이 ‘작용체’가 그 왕복 순환의 과정을 통해 “결코 메울 수 없는 단절에 의해 다른 단계와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사 과정에서 ‘작용체’ 또는 참조항은 질료(객체)로서의 존재 방식으로서도 형상(형식)으로서의 존재 방식으로서도 점차 원형을 남기지 않게 된다. 라투르는 처음에 삼림과 초원이 찍힌 사진을 예로 들어 ‘토양조사기’라 불리는 바둑판 모양으로 늘어놓은 입방체에 수납된 미묘하게 색조가 차이나는 토양 사진, 식물표본을 채집하는 식물학자 사진 등을 차례차례 보여주는데, 그 변형과정은 매우 뚜렷하다. 이러한 갈지자 순환과 변환의 과정을 경유함으로써 그것들은 어떤 의미로도 복잡화하며 구체화한다. 이러한 순서에 대해 “각각의 단계는 후속하는 것에게는 질료이며 선행하는 것에게는 형상이다. 또 말로서 열거되는 것과 사물로서 열거되는 것 사이의 거리와 똑같은 폭의 단절에 의해 각각의 단계는 다른 단계와 떨어져 있다”라고 라투르는 말한다.

ANT는 대부분 매개항으로서의 중심적 행위자를 고정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적극적으로 변형되고 대체된다. 아니 오히려 그 속에는 매개항과 매개항을 연결 짓고 공존시키는 단절을 내포한 ‘번역’이 있다.[각주:10] ‘일대일 대응’의 과학 모델은 주체적 접근의 ‘다수성’에 의해 부정될 뿐 아니라 매개항=객체 측의 ‘다수성’에 의해서도 부정되어야 한다. 앞서 논한 neither의 ‘비환원주의’는 이러한 양극에서의 ‘다수성’ 또는 그러한 ‘교체’라는 절차를 따라야만 성립한다. 과학적인 지의 대상이 발견되거나 기술혁신이 일어나는 시점에서는 확실히 무언가의 대상으로 수렴이 일어나는데, 인류에 의한 지의 생성 그 전체의 양상 자체를 생각하면 특정의 실재적 대상으로부터의 구성이라는 관점에서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요컨대, ‘사회구성주의’를 부정하는 데에서 인적, 주체적 행위자가 단지 ‘해석의 합의형성’을 위한 성원으로 파악되고 또 그것을 출발점으로 과학적인 지의 대상의 발견이나 기술혁신이 설명되는 것이 논파되듯이, 그와 완전히 마찬가지로 실재적인 객체의 극에서 그것들 속에 특정의 출발점을 설정하고 거기에 원인을 귀속시키는 ‘구성주의’는 논파되어야 한다.

질료와 형상 간의 가역적 및 교차 교환적인 ‘비환원주의’가 과학적 지의 생성 현장에서 이뤄지는 엄정한 회의라고 한다면, 협의의 ANT가 중심적인 행위체에 복수의 주체적인 접근(이 접근에는 연구실 내 다양한 개별 종의 객체까지 동원된다)이 결부된, 말하자면 결절점을 가진 방사선 모양의 구조를 통해 이미지화되는 것과 달리, 그것[비환원주의]이 초래하는 매개항=객체의 ‘다수성’은 그러한 결절점=매개항이 무수히 존재하는 그물망의 총체를 이루게 된다. 그것은 앞서 서술한 “메울 수 없는 단절”을 내포함과 동시에 특정한 출발점이나 중심을 가지지 않는 느슨한 연계로서의 구조를 묘사한다. 실제로 여러 학문의 총체가 엮어내는 것을 그러한 구조체로 이야기한 선각자가 미셸 세르이다. 라이프니츠 학문의 분기 양상을 고찰하는 것에서 발전해 동시대의 인식론을 그러한 그물망의 형상=질료적이며 다극적인 총체─그 자체로 단자론적인 총체─로 파악한 미셸 세르의 초기텍스트가 여기서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낸다.

 

4. 그물망 모델

 

라투르의 사상형성에 있어서 미셸 세르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언급도 많이 돼 있고, 예를 들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에서는 ANT의 방법론 그 자체를 이론화하기 위해 세르의 준-객체론이 원용되고 있으며, 『근대의 〈물신사실〉 숭배에 대하여』의 주해에서는 세르가 『루크레티우스에 있어 물리학의 탄생(La Naissance de la physique dans le texte de Lucrèce)』(1977)에서부터 『동상(Status)』(1987)에 이르기까지 ‘모범적인 과학인류학’을 ‘밀고 나갔다’라고 평하고 있다.

앞서 ‘일대일 대응’의 과학 모델의 부정은 매개항=객체끼리의 단절을 내포한 번역─게다가 중간항끼리의 연계에 의해 이뤄지는 설명과는 다른 비연역적이며 상호적인 번역─에 의한 지(知)의 점진적인 생성이라는 모델로 우리를 불가피하게 이끌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매개항=객체와 매개항=객체와의 상호번역, 상호간섭에 의해 성립하는 그물망의 엔치클로페디(Enzyklopädie)의 전체상을 세르의 초기텍스트 『간섭』은 그려내고 있다. 이 논저는 본래 라이프니츠를 논한 그의 박사 논문의 부 논문으로 쓰인 것으로, 바로크 시대의 천재에 대한 사색에서 제재를 바꾸어 동시대의 여러 학문의 상황에 관한 논의를 처음으로 전개한 기념비적인 저작이다. 또한, 이 논고는 고등사범학교에서 그의 지도교수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의 과학사 연구(신과학적 정신)와 대비하는 형태로 자신의 입장을 제출한 것이며 물의를 일으켰다고 한다.

무엇이 양자의 입장을 그 정도로 가른 것일까? 세르는 동시대의 여러 과학이 이미 특권적인 참조항으로서의 ‘여왕-과학’의 지위를 상실해 상호참조(inter-férence)의 체계로 있을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이론적 우주의 법칙으로서의 교환, 개념들의 수송과 그 착종, 영역들이 교차해 뒤덮이는 것, 참조항 없는 사색 속에서의 의미의 제한 없는 대조가 지금부터 모방하고 묘사하고 표현하고 재현하는 것이 될 터인데 이것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 물 자체인 것들이 담겨있는 그물망 그 자체, 상호-정보화의 터무니없이 착종한 세계의 그물망이다. 이론을 가닿게 하는 순환이라는 의미에서 커뮤니케이션은 다시금 불가결한 것이 된다.

 

학문의 영역들이 여기서는 이미 ‘그물망’의 결절점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자기 참조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영역에서 발견되는 지(知) 속에 틀어박히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상 학문 영역의 분할은 이제 별로 의미가 없다. 오히려 “한 연구영역이 다른 연구영역에 의해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연구자가 아니라고까지 세르는 말한다. 예를 들어 무기화학은 물리학에서 그 고유한 방법을 가져와 크게 변모했으며 배위화합물을 다루는 데에서 분자 유기화학을 본보기로 삼았다. 천체물리학을 예로 들면, 그것은 끊임없이 광학, 분광학, 화학, 전기학, 전자파이론 등의 도움을 얻고 있다. 라투르와 카롱이 중시한 ‘번역’ 개념은 여기서 결절점=매개항끼리의 상호-정보화, 커뮤니케이션, 그것들의 간접적인 대화라는 형태로 일반화되며 엔치클로페디의 바로 그 총체에서 지(知)가 만들어지는 상황으로 다뤄지고 있다. 다극적인 객체들 속에서 행해지는 대화로서 성립하는 엔치클로페디의 이 단계를 세르는 ‘대상-대상’적 단계라고 부르고 있다.

앞서 살펴봤듯이 라투르는 근대인의 과학적 실천에 있어서 지(知)의 대상과 그 연구자, 곧 언어 기술자가 ‘일대일 대응’하고 있음이 전제돼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주체-대상’ 간 일종의 합선(short circuit)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석했다. 이러한 대응 관계의 전제는 가령 그것[대응 관계]이 착각이나 기만이었다 해도 이미 엔치클로페디와 과학적 실천이라는 방향성의 본질적인 차이(相違)를 나타내며 그 패러다임 간의 대비를 가능하게 한다. 세르는 이러한 대응 관계를 『간섭』에서 세 종류로 분류하고 있으며, 제3단계인 ‘대상-대상’적 단계에 앞서서 제1의 ‘주체-주체’적 단계, 제2의 ‘주체-대상’적 단계가 있다고 말한다.

이것들의 다양한 관계 맺음에 대해 세르는 과학사가로서의 입장에서 역사적・단계적으로 논하는데, 여기서는 관계 맺음 그 자체의 존재 양상을 과학적 실천의 문제로서 다뤄보겠다. 라투르가 과학인류학적 분석에서 반복해서 검증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문제다. 세르에 의하면, 수리과학의 진보는 그로 인해[진보에 따라서] 이론의 ‘기원’이 위치 지어지는 여과기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어느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옮겨감에 따라 그 이론은 형식적으로 세련되고 ‘순화’돼 가는데, 그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이전의 이론은 경험적이고 기술적인 것이 된다. 실제로 형식적으로 ‘순수한 것’과 ‘기술적인 것’은 둘 다 ‘기원’일지언정 “그것들의 양 극한에 삽입된 운동이 불가결하다”라는 것이다.

수리과학에도 두 개의 ‘기원’이 있으며 그것들을 섞바꾸어 경유함으로써 발전해간다.─『판도라의 희망』에서 라투르가 말한 ‘작용체(operator)’가 질료와 형상(형식) 사이에서 셔틀처럼 순환하듯이─그렇다면, 이때 과학적 실천은 주체와 대상의 대화로서 다뤄지는 것일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물론 물리학처럼 분야 자체가 실험을 가능하게 하는 대상에 의해 조건 지어지는 학문을 중심으로 세팅해보면, 과학적 실천은 연구하는 주체와 대상의 끝없는 대화로 다뤄지기 쉽다. 그러나 이 대화는 어디까지나 합리적 지성에 의한 ‘순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대상은 계속해서 필요해지는 매체이지만 여기서는 일종의 잔류물, 불순물이다. “자, 그때마다 불순물은 문자 그대로 또 대상적인 의미에서 실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는 의미가 있다.─과용해(過溶解) 등의 잘 알려진 현상을 운운하는 데까지 갈 필요도 없고, 촉매란 정말로 그것이 없으면 화학반응이 일어나지 않는 불순물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주체-대상’적 단계는 그 대화가 이러한 과정에 있는, “기술적이고 점진적이며, 또 가공되고 수정되는 경험”으로서의 과학의 존재 방식이며, 실증적이고 실험적인 과학적 실천을 중심으로 하는 과학관이다. 바슐라르의 과학적 논의 또한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거기서는 ‘주체→대상’ ‘대상→주체’라는 관계 맺음이 성립한다. 이러한 관계 맺음은 그러나 자연과학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경험이라는 것을 수동적인 대상에 대한 나(주체)의 개입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수동적인 나의 오성(悟性)에 대한 사물의 개입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서 각각은 실재론, 경험론 등의 철학적인 입장을 대표하게 된다. 글자를 써넣는 타블라 라사(tabula rasa)[백지]에 해당하는 것이 그때그때 대상 측에 상정되거나 주체 측에 상정된다는 것이다(그림 참조).

 

5. 사물들의 웅성거림

 

그러나 여기서는 또한 하나의 합선, 루프가 성립할 때가 있다고 세르는 말한다. 그 루프에서 다른 단계가 생긴다.

 

주체를 주체로서 구출할 수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주체를 모범적인 대상으로 존재시키는 것에 의해서다. 관념론이란 주체에서 대상으로 또는 대상에서 주체로 향하는 정보 회로의 합선이다. 이 합선이 대상을 회로에서 빼버린다(에포케(epohkē); 판단중지). 나는 대상에 정보를 주고, 대상은 내게 정보를 주며, 나는 나 스스로 자기에게 정보를 준다.

 

‘주체-주체’적 단계는 이러한 합선의 대각선상에 있어서 이미 대상이 불순물이기도 한 것을 의식하지 않게 된 바로 그 상태다. 라투르의 표현으로 말하면 이것은 정말로 매개항으로서 대상의 존재 방식이 망각되고 이미 명확히 규정된 중간항만을 연결한 것으로 대상이 이해되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근대인의 과학관의 전제 자체다. 라투르가 ‘순화’라는 용어에서 종종 지적하는 조작과 그 구조는 세르에게는 ‘주체-주체’적 단계라는 형태로 주제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대상의 망각과 그 기만에 대해, 그러나 세르는 ‘주체-대상’적인 존재 방식에 구애되어 저항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가 제시하는 것은 다른 대각선이다.

 

주체-대상, 혹은 대상-주체라는 대화는 실험적인 해독의 대화였다. 이 대화는 수학적인 매체에 의거한 관념론에서 보면 나-타자의 대화(플라톤), 나-나의 대화(데카르트)에 대각화된다. 이제야 이러한 대화들 속에서 전달되는 정보의 개념을 보편화하고 추상화함에 따라서 새로운 대화를 사유하는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대각화 혹은 합선의 절차를 역전시켜야 한다. 그리하면 이 역전이 인식의 이론의 불변항으로서 대상을 등장시킨다.

 

주체는 정보의 이상적인 보유자이며 그 때문에 지금까지는 그 발신자, 수신자로서 안정돼 있었다. 그 속에서 앞서 서술한 합선이 생기는데, 그러나 대상 또한 다양한 형상(morphé)을 받아들여 다른 대상에 건네는 수용자(porte-empreinte)라고 세르는 말한다. ‘주체-대상’적 단계에서 대상은 합리적 이성에서 보면 일종의 필요불가결한 불순물이고 거기서 물리현상이 일어나는 매질(milieu) 혹은 촉매와 같은 것이었다. ‘대상-대상’적 단계에서는 어느 한 현상이 특정 대상(질료)을 떼어내 다른 대상(질료)과 결합해간다. 그 의미에서 대상(질료)은 적극적으로 다른 것이 되어가는데, 세르는 그것을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의 ‘형상(形相)의 수송’이라고 부른다.

『판도라의 희망』에서 라투르는 과학적 실천을 질료와 형상 사이를 섞바꾸어 순환하면서 그 양극을 변환하며 차츰 다른 것으로 ‘호환’해가는 조작으로 묘사했다. 거기서는 매개항=객체는 무언가의 형상(형식)을 모델화하는 것으로서 나타나고 더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것으로서 단계적으로 변환돼 간다. 라투르는 이러한 변환 과정을 앞서 살펴봤듯이 단절과 변화를 강조해가며 말하는데, 세르는 오히려 대상과 다른 대상의 ‘커뮤니케이션’의 성립, ‘형상의 수송’이라는 형태로 파악했다.

“커뮤니케이션의 그물망으로서 세계는 질료 형상적인 극 혹은 정점에서 이뤄지는 그물망”이라고 세르가 적절히 말했듯이, ‘대상-대상’적 단계에 있는 세계는 서로 연결해가는 질료와 형상을 변화시키면서 다극화하고 그물망을 계속해서 짜며 뒤섞여간다.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의 ‘형상의 운송’이란 그러한 형상을 통해 서로 다른 대상=극끼리 서로를 표출해간다는 것이다. ANT에서 분석된 상황이 철저하게 탈중심적으로 엔치클로페디의 총체로 확장된다면, 또 그것이 대상 세계와 그 속에서 성립하려는 온갖 지(知)의 존재 방식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질료 형상적인 실체’인 모나드와 모나드 간 상호표출의 철학에 있어서 라이프니츠가 직관한 것을 현재적으로 재정의한 것이다. 본래 특정의 실재적 대상으로부터의 구성이라는 발상은 라투르의 입장에서 기피될 수밖에 없었는데, 라이프니츠가 모나드를 말한 것도 원자론에 대한 강력한 안티테제로서였다.─복합에 앞서 있는 단순체라는 모나드의 유명한 정의는 구성이라는 것을 끝까지 거절하기 위한 로직이었다. ‘대상-대상’의 대화로서 성립하는 여러 학문의 그물망이 그려내는 것은 특정의 출발점을 갖지 않는 혹은 그것이 편재하는 단자론적인 상호-참조의 공간이다.

라이프니츠가 「관념에 대해서」라는 짧은 글에서 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나를 사물로 이끌 뿐만 아니라 사물을 표현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다”라고 쓴 것을 상기해보자. “사물을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속에 표현될 수밖에 없는 사물의 양태에 대응하는 양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계의 모듈은 기계 그 자체를 표현하고 있으며 입체 투영도는 입체를 표현하고 있으며 언어는 사상이나 진리를, 숫자는 수를, 대수 방정식은 원이나 그 외 도형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그는 표현하는 것이 표현되는 것과 유사할 필요는 없지만 무언가의 유추(analogy)가 있으면 좋다고 말한다. 관념을 얻는다는 것은 그것을 표현하는 다른 무언가를 기호든지 객체로서 가진다는 것이다. 일찍이 탈레스[각주:11]가 피라미드의 높이를 재기 위해 막대의 길이와 그 그림자의 길이가 같게 될 때를 기다려 피라미드의 그림자 길이를 쟀듯이, 무언가의 매개항으로 바꿔놓는 것을 경유함으로써 한 관념은 명확해지고 전용되며 전송된다. 대상=매개항은 그 전형적인 존재 방식으로서 노몬(gnomon)[해시계의 바늘] 또는 모듈이며, 지질학자들이 다루는 ‘토양조사기’ 또한 그러한 것이다.

대상(질료)이 형상(형식)을 표현하며 포함하는 것으로서 있다는 것[각주:12], 그리고 형상 또한 다른 대상들 사이를 매개하는 유추(아날로지)로서 기능한다는 것. 라투르가 분석했듯이 그러한 대상을 몇 번이고 [각기] 다른 형태로 매개항으로 삼아야만 과학적 실천 자체가 성립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를 직관하기 어렵다.─우리는 그에 대해 한 보편적인 형상 속에 개별의 대상(질료)이 포함된다는 쪽으로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주체-주체’의 대화는 이렇게 해서 대상(질료)을 회로에서 빼버리고, ‘주체-대상’의 대화에서도 대화를 주체에 대응시키는 것만으로 그것들의 양극이 항상 ‘교체’되어 탈중심적으로 다극화해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았다. 반대로 말하면 일단 이를 인정하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단자론의 세계관으로 이끌리지 않을 수 없다.

세르가 『간섭』에서 이야기한 ‘대상-대상’적 단계로서 엔치클로페디의 그물망은 라이프니츠 학문의 현재성을 재고하며 그것[그물망]을 통해 근대 이후의 과학관을 뛰어넘어 새로운 형이상학(méta-physique)을 확립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여러 학문의 역사의 총체를 이야기하려는 터무니없는 시도이기도 해서 그것을 더 응용해서 발전시키는 것은 당시로선 어렵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라투르가 그의 과학인류학에서 실험한 것은 구체적이고 한정된 상황의 분석이면서 세르의 신-라이프니츠주의의 핵심을 훌륭하게 다룬 집요한 검증이다. 주체 관계에 있어서 ‘비환원의 원칙’, 다수성을 어떻게 다룰지 등등 그의 사고를 형성하는 근본적인 몇몇 문제는 이 지적계보에 위치 지울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대상=모듈로 넘쳐나는 세계의 웅성거림에 귀 기울이는 것. 라투르가 행한 것은 바로 그 경건한 실천임이 틀림없다.

             

「世界の《ざわめき》に耳を傾ける」、『たぐい』 Vol.3、93‐106、2021年2月11日。

 

 

     

  1. 브뤼노 라투르, 스티브 울거, 『실험실 생활: 과학적 사실의 구성』, 이상원 옮김, 한울아카데미, 2019. [본문으로]
  2. 앨런 소칼(Alan David Sokal)이 2000년대 초엽 프랑스 현대사상의 저술가들과 당시 과학론자들을 겨냥해 그들이 사용하는 과학용어의 자의적인 남용 그리고 자연과학을 왜곡하는 태도를 비판하며 반향을 일으킨 소위 “과학 전쟁”에서 라투르는 이러한 ‘사회구성주의자 그룹’과 동일시되었다. 그래서 더더욱 사회구성주의 입장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회의로부터 라투르 사상이 확립되었다는 것을 밝혀둘 필요가 있다. [본문으로]
  3. [역주] 트레버 핀치(Trevor J. Pinch, 1952~2021)는 영국의 사회학자이다. 북아일랜드에서 태어났으며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에서 물리학 학사를, 바스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문으로]
  4. [역주] 비베 비이커(Weibe E. Bijker, 1951~)는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 대학교 사회과학기술학과 명예교수이다. 암스테르담대학에서 철학 학사를, 트벤터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문으로]
  5. Trevor J. Pinch and Wiebe E. Bijker, 1987, “The Social Construction of Facts and Artefacts: or How the Sociology of Science and the Sociology of Technology might Benefit Each Other,” In The Social Construction of Technological System: New Direction in the Sociology and History of Technology, edited W. E. Bijker, T. P. Hughes and T. J. Pinch, MIT Press, pp. 17-50, p.18. [본문으로]
  6. Bruno Latour, 2005, Reassembling the Social: An Introduction to Actor-network-theo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본문으로]
  7. 라투르는 actor보다 actant가 물적 대상까지 아우를 수 있다는 이유로 actant라는 말을 행위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본문으로]
  8. 브뤼노 라투르, 『판도라의 희망: 과학기술학의 참모습에 관한 에세이』, 홍성욱, 장하원 옮김, 휴머니스트, 2018. [본문으로]
  9. 여기서 라투르는 아마존 강가의 숲과 초원의 경계에서 숲-초원의 전이 상황에 대한 토양학자와 박물학자의 조사에 관해 상세히 보고하고 있다. 여기서는 토양 표본이 ‘토양조사기’로서의 입방체 속에 분류, 정리되고 식물 또한 표본으로서 다양하게 채집되는데, 물론 그것은 숲 전체가 아닌 일부를 참조항(reference)로서 가져와 서로 관계짓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표본은 에어컨이 작동하는 식물연구실의 다른 데이터와 비교되거나 기호처럼 그것들을 서로 교체한다. 이러한 참조항을 만들어내는 행위는 “유사성보다도 통제된 일련의 변환, 변성, 번역에 의해 확실성을 증대한다.” 이렇듯 본래의 숲에서 분리된 것이 됨으로써 숲-초원의 상황은 구체적으로 분석되고 조사 자체도 진전해간다. [본문으로]
  10. 이 ‘번역’ 개념을 ANT에 도입하는 데에서 라투르는 미셸 세르의 초기 인식론에서 많은 시사점을 얻었음을 인정한다. 매개항과 매개항 사이에는 ‘간격’과 형상-질료 간의 순환적인 상호작용이 있는데, 객관적인 기성 사실로서 분리되며 받아들여진 것들을 연결해서 설명할 때에 라투르는 그러한 것을 매개항과 구별해서 ‘중간항’으로 부른다. 매개항은 중간항처럼 확정적이지 않다. 바꿔 말해 매개항은 앞서 이야기한 순환적인 상호작용을 거치면서 나아가 그 불확실성 속에서 새로운 앎이 발견되는 상태에 놓여있다. [본문으로]
  11. [역주] 탈레스(Thales of Miletus, B.C.624?~546?)는 그리스의 ‘7현인’ 중 1인이며,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주장했다. 자연현상을 신화 속 신들의 괴력으로 설명하는 대신 자연 그 자체에서 원인을 찾고자 했다. [본문으로]
  12. ‘질료와 그 운동 속에야말로 형상이 있다’라는 주장은 라이프니츠에게서 매우 이른 시기에 발견되는 것으로, 17세의 나이에 은사 토마지우스(Thomasius, Christian, 1655-1728, 독일 계몽주의의 선구자로서 자연법 사상을 주장함)에게 보낸 편지에서 라이프니츠는 그러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는 ‘무언가’가 2분의 1 또는 4분의 1로 분할된다는 것은 ‘2분의 1이 두 개의 4분의 1과 같다’와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관계에 불과하다고 서술한다. 이때 추상적인 전체로서의 선(線) 또한 관계이기에 오히려 ‘합성은 구체적인 것 속에, 즉 이 추상적인 선이 표하는 관계에 있는 물질의 덩이 속에만 있다.’ 그러한 추상적인 관계=형상을 조작적으로 찾아내는 것이 그에게는 수학이다. 데카르트의 수학관이 기하학적인 것에 대해 라이프니츠의 수학관은 대수적이라고 이본 벨라발(Yvon Belaval, 1908~1988 라이프니츠 연구자)이 평한 것은 잘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형상성(形相性)의 위와 같은 조작과 파악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조작은 개념적으로는 무한히 반복할 수 있지만 무한소를 아무리 더한다 해도 결코 전체가 합성될 수는 없다. 이것이 ‘연속체합성의 미궁’이라고 불리는 라이프니츠가 제시한 역설이다. 형상과 질료의 상호포섭과 교차교환을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제논의 역설과도 유사한 이 미궁의 출구를 발견할 수 있다. [본문으로]
Posted by Sarantoy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