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콜라는 서구의 철학에 대응하는 것이 비서구의 인류학이라고 했다. 달리 말하면 비서구의 인류학이 하는 것을 서구의 철학이 한다. 전회(turn), 그것이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의 전회이든, 칸트의 상관주의 혹은 구축주의를 넘어서는 사변적 실재론 혹은 신실재론으로의 전회이든, 그러한 철학이나 인류학에서 하는 이론적 실천은 비홀리즘적 사고로 나아가는 방향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 비홀리즘적 사고를 넘어서 다원적 사고를 찾아가려 하는지의 답은 이미 우리의 삶에서 충분히 감지되고 있기 때문에 말할 필요가 없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 ‘전회’라는 이론적 흐름이 우리가 충분히 감지하고 있는 그것을 우리 자신이 드러낼 수 있도록 앎의 힘으로 발휘되는지이다. 그것은 아마도 어떤 현실에 저항하고 그것을 밀어내는 힘이 되지 않을까 한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지난 2018년 일본에서 다음의 학술강연뿐만 아니라 대중강연을 수차례 행했다. 그 주제는 ‘욕망의 시대를 철학한다’였다. (이를 인류학적으로 표현하면 '카니발의 시대를 인류학한다'가 되지 않을까..?) 욕망 그 자체를 철학으로 대체하는 것, 아니면 욕망을 철학으로 전회하게 하는 것, 나는 그의 철학이 욕망을 끝까지 밀어붙이기를 응원하고 기대한다.
우주ㆍ세계ㆍ실재
마르쿠스 가브리엘(Markus Gabriel)
크게 두 가지를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는 네가티브한 것,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 진실에 관한 것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뒤에 이야기할 포지티브한 것입니다.
노무라 교수의 그림에 저는 철학적으로도 공감합니다. 저는 이것을 ‘초우주’(hyperverse)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초우주는 복수의 우주 시스템을 가리키며, 또한 철학적이며 이론적인 우주로서 그와 같은 형태를 띠고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왜 우연이 아닌지는 알지 못합니다. 아직은 억측의 성을 빠져나오지 못한 사고방식일 테지만, 이러한 우연의 일치가 보이는 것 자체는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 다중우주론의 전문가가 오셔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네가티브한 것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왜 네가티브라고 하는지는 곧 알 수 있습니다. 즉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야기하기 전에, 세계란 무엇이며 존재란 무엇에 대한 것인지를 이야기하겠습니다. not, 그러니까 부정형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테지만, 부정형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이러한 화제(話題) 자체가 트리키(tricky)한 것이며, ‘그렇지 않다’고 부정될 때에 부정형이 사용되기까지를 논하는 것입니다. 그 밖에 ‘세계란 무엇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철학자가 세계를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계란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세계란 모든 것입니다. 세계란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많은 철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이론은 매우 단순합니다. X는 X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이다, 나는 나, 도쿄는 도쿄, 글루온(gluon)은 글루온 등등. 그렇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사고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 말은 맞을까요? 틀릴까요? 틀릴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 자체와 동일하지 않다면―불교는 모든 것이 그 자체와 동일하다고 사고하기도 하지만―, 절대적으로 모든 것이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절대적으로 모든 것이라고 할 때 당신이 생각하는 대상은 세계입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이렇게 파고들어야 철학자가 왜 그러한 사고방식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이해해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약 3천 년 전 그리스나 중국이나 인도 등 다양한 장소에서 철학자가 이러한 사고방식을 발명하지 않았다면, 현대 과학은 없었을 겁니다. 다시 말해 현대 과학은 이러한 철학적인 사고실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도쿄는 일본에 있습니다. 일본은 지구 위에 있습니다. 지구는 태양계 속에 있습니다. 태양계는 하늘 위 은하수 속에 있습니다. 은하수는 은하단 속에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상한에 도달합니다. 우주(universe), 초우주(hyperverse), 그리고 그 상한에 도달한 곳이 세계라고 한다면, 세계를 정의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세계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세계는 ‘전체’입니다. 블랙홀 등의 hole(구멍)이 아니라 whole(전체) 말입니다. 즉 모든 것이 그의 일부인 전체, 그것이 세계의 정의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요? 후보가 셋 있습니다. 앞으로 이야기할 세 번째의 것이 ‘베스트’라고 설명하려 합니다. 실은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논하는 이론에서 따지고 들면, 세계는 존재하지 않게 되지만.
첫 번째의 사고방식, 이것은 매우 나이브한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세계는 대상물이 가득 모인 총체로서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세계를 용기로 봅니다. 세계는 용기이므로 그 용기 안에 많은 것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제 손도 그 안에 있으며, 도쿄의 지하철도 그 안에 있습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은 매우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이 강연장 밖에 있다 해도 강연장 안에는 가구가 있다는 식입니다. 이렇듯 세계란 사고와는 독립적인 대상의 총체가 됩니다. 가구가 강연장 안에 있듯이, 다양한 것들이 세계 안에 있습니다. 내지는 쿼크, 글루온, 렙톤(lepton), 뭐든지 좋습니다. 그러한 모든 대상이 모여 있는 것이 세계라고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정말로 그러한 총체라는 것이 있을까요? 지금 제 손안에 대상이 있냐고 하면, 한 자루의 펜이 있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로 세는 것일까요? 둘로 셀 수도 있는데 말이죠. 혹은 물리학자라면 어떤 스케일이나 척도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고 말할 겁니다. 매우 작은 스케일에서 보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대상이 있습니다. 양자의 수준에서 보면 펜이라는 동일성 있는 하나가 사라지고 맙니다. 원자ㆍ분자의 수준에서 보면 매우 큰 수가 나옵니다. 하나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저는 대체 몇 개의 대상을 손에 쥐고 있을까요?
이론과 독립적으로 이 물음에 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단일한 사고에서 독립한 대상의 총체라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신은 존재하지 않지만, 가령 기독교의 신이 있다고 해봅시다. 기독교의 신이라 해도 '대상의 총체, 모든 대상이 모인 것은 무엇일까?'라는 것에는 답할 수 없습니다. 신조차 무언가의 판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판단이라는 사고로부터 독립적으로 답할 수 없습니다. 세지 못하면서[이를테면 손안의 대상이 하나인지 둘인지 혹은 무수히 많은지 판단하지 않으면서], 하나하나를 개별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계가 존재한다고 할 때 그것은 대상의 총체일 수 없습니다. 대상의 총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너무 절망적입니다. 잊어야 합니다. 그러나 영어권 철학자의 95% 정도의 사람들이 이 사고방식을 믿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말의 문제일까요? 문화의 문제일까요? 영어권의 철학자가 왜 세계를 대상의 총체로 생각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현대의 과학과도 맞지 않는 사고방식인데 말입니다. 이제 이 사고방식을 접읍시다.
두 번째 사고방식입니다. 이것은 특히 비트겐슈타인이 제창한 사고방식인데, 그는 자신의 저 유명한 책의 첫 부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란 성립하는 상황의 총체이다. 그리고 세계는 사실의 총체이지 사물의 총체가 아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사실이란 성질의 구체화입니다. 나는 인간이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소립자에도 성질이 있습니다. 제게는 없는, 예를 들어 회전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회전한다는 생각은 할 수 있지만, 물리학적인 특질로서 회전할 수 없습니다. 대상은 이렇게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질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로서 관찰 가능한 우주는 대략 400억 광년 전부터 존재해왔다고 합니다. 교토는 부퍼탈(Wuppertal)[독일 서부의 공업도시]보다 깨끗한 도시입니다. 이는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찬성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틀렸습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사실이란 관계입니다. 대상과 대상 간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사실을 기술하는 것은 아주 간단한 명제라는 형태로 이뤄질 수 있습니다.
철학자는 그러한 형태로 사물을 제시하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가령 물질 a는 F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기본적인 원자의 사실입니다. 약간은 물리학처럼 들릴 수 있지만, 이것은 논리학입니다. 물리학의 언어를 가져와서 원자에 대한 명제로 말한 것입니다.
현실을 파악하는 제일 작은 단위를 생각해봅시다. 나는 여기에 있는 무언가의 방법으로 여기에 존재한다고 하면, 이것은 사실의 한 이해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사실의 총체라는 것이 있을까요? 비트겐슈타인은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또한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무한히 많은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한히 많이 있다고 해도 그 총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나는 두 인간보다 작다’, ‘나는 한 인간이다’, 혹은 ‘나는 3인 미만의 인간이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사실 또한 무한합니다. 또 제가 지금 노무라 교수와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아있는데, 이리저리 거리를 조정해가며 자리를 옮겨 무한히 많은 위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얼마만큼 세밀하게 공간을 측정하느냐에 따라 위치가 달라지고, 또 공간을 계속해서 측정한다는 것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공간적인 거리를 바꾸지 않는다고 해도 시간적으로 위치를 바꿀 수 있어서 위치는 무한히 나올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실은 무한히 많습니다. 그 전체라는 것이 혹시 있다면.
그렇다면 그 총체를 어떻게 구축할 수 있을까요? 다음의 문제를 생각해봅시다. 느낌만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강연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에. 만약 정말로 사실의 총체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 보일까요? 집합의 집합으로 보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실에 대한 명제를 집합으로 생각해봅시다. 그것은 대상과 그 성질로 이뤄집니다. 그러나 집합의 집합이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수학적인 문제입니다. 집합의 집합이 없다는 것이 첫 번째 문제입니다. 점점 어려워집니다. 그렇지만 수학적인 논리를 따라가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논리적인 시스템으로서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실이 시스템의 논리인 시스템은 없습니다. 어떤 시스템도 완결적이지 않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당시 이를 알지 못했지만, 사실이란 총체를 이루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입니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는 조금 더 직감적인 것입니다. 모든 영역의 영역입니다. 생각해봅시다. 한 유물론자―오래된 철학적인 입장입니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시다. “진짜 존재하는 것은 모두 물질=에너지적이다. 거기에는 정의 등은 없다. 물질=에너지적인 것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그리고 또 한사람이 “우주는 하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우주 공간 속에 들어있는 것, 물질=에너지적인 것의 총체가 우주다.”, “우주 속의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물(物)이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우주라는 것은 하나의 우주 안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우주 전체로 볼 때, 아인슈타인의 시공간에는 에너지가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주의 일부가 아닙니다. 나라는 인간은 우주의 일부지만, 우주 그 자체는 우주의 일부가 아닙니다. 존재하기 위해서 우주 속의 일부로서 존재해야 한다면, 그리고 우주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무엇도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존재하기 위해 물질=에너지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면, 전우주(全宇宙)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주가 존재해야 합니다. 그거야 괜찮습니다만, 그렇다면 우주 자체로서 있다는 것과 우주의 일부로서 있다는 것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깁니다. 부분과 전체의 관계는 우주의 경우 어떻게 될까요? 이것은 말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조금 분명하지 않은 방식으로 말하자면, 예부터 내려오는 간단한 사고실험을 해보겠습니다. 물리학은 이에 대해 흥미로운 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우주는 크지만 유한하다.”고 말했다고 합시다. 믿기지 않겠지만, 우주선으로 우주의 끝까지 여행한다고 상상해봅시다. 그리고 그 여행에 막대를 가지고 간다고 해봅시다. 우주 끝까지 가서 이 막대기를 우주선 밖으로 내밀면 그 막대는 어디까지 가게 될까요? 간다고 하면 거기는 어디일까요? 막대기를 내민 순간 막대기를 쥔 손은 우주의 끝에 간 것일까요? (물론 그 어딘가로 갈 수 없으며, 누구도 그러한 어딘가로 손을 내밀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고실험입니다.) 손을 우주선 밖으로 내밀 때 우주 밖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아니면 더 큰 전체의 일부에 우주가 존재하고 있을까요? 다중우주 혹은 초우주는 이와는 다른 것일까요? 초우주가 이와 다른 것이 아니라면, 그럼 초우주는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초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은하는 그러한 초우주의 일부일 수는 없습니다. 초우주로서 초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지금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것이 존재하지 않을까요? 모든 영역의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부터 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것을 볼 때 그것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 안의 몇몇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그 전부에 관해 의문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도쿄는 존재합니다. 물질도 존재합니다. 손도 존재합니다. 소수도 존재합니다. 소수, 숫자가 존재하고 도시, 정의, 아름다움, 물질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공존하지 않습니다. 즉 7이라는 숫자를 도쿄에서 발견할 수 없습니다. ‘7이라는 숫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봅시다. 그러면 ‘도쿄라고는 말할 수 없다.’, ‘어제는 뉴욕에 있었다.’, ‘오늘 7은 도쿄에 있다.’고 답할 수 있을까요? 7은 그러한 의미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의(正義)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숫자가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의 또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숫자는 하나의 영역에 있다는 것이 됩니다. 도쿄, 교토, 부퍼탈 등을 포함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주가 있습니다. 우주란 물리학의 대상영역입니다. 물리학을 통해 우주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그러한 대상영역입니다. 숫자는 특정 룰에 따릅니다. 도시는 다른 특정 룰에 따릅니다. 법적인 룰, 역사적인 룰, 정치적인 룰 등에 따릅니다. 그리고 우주는 수학적인, 자연법적인, 그 외 다양한 역학에 따릅니다. 숫자는 그러한 역학에 따르지 않습니다. 숫자 1과 숫자 2의 관계는 약한 상호작용(interaction) 혹은 중력에 의해 통제되어서 1과 2가 점점 가까워진다거나 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 법적인 룰과도 상관없습니다. 가령 천황이어도 ‘2는 1에 선행한다.’고 정할 수 없습니다. 1과 2의 관계를 누구도 바꿀 수 없습니다. 기본적인 산수인지만, 이것은 여하간 사실입니다. 천황은 도쿄와 교토를 하나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음, 천황의 법적인 권한이 거기까지 미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도쿄를 없애지는 못합니다. 도쿄를 다른 무엇으로 바꿀 수도 없습니다. 도쿄는 도쿄입니다. ‘도쿄는 도쿄’라는 사실은 몇몇 사람에 의해 바뀔 수 없습니다. 각각의 영역에 규칙이 있고, 그것들은 제각기 다릅니다.
이 룰에 관해 나는 ‘의미(sense)’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의미가 이 영역을 개별화합니다. 의미가 설명하는 것입니다. 왜 한 영역이 한 영역이고 다른 영역이 아닌지를 의미는 설명해줍니다. ‘의미를 부여한다’는 식으로 말이죠. 그리고 그 의미에 의해 어떤 것이 하나의 영역에 들어갑니다. 예를 들어 글루온은 우주의 영역에 있지만 숫자의 영역에는 없듯이. ‘모든 영역의 영역’이라 할 때도 의미를 부여하는 기능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것이 세계가 됩니다.
그러나 이 의미를 부여하는 기능이란 무엇일까요? 유물론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숫자에는 이러한 물질에너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숫자는 추상적 및 항구적입니다. 글루온은 시간에 의해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시간이라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절대적인 숫자와는 또 다릅니다. 도쿄는 추상적인 시간과 관계 없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한 모든 것이 도시는 아닙니다. 확실히 우주는 도시가 아닙니다. 물론 메타포로 사용할 수 있겠지만, 우주는 도시는 아닙니다. 7이라는 숫자 또한 도시의 일부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의미를 부여하는 기능이 어떠한 기능이길래 총체를 부여해주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해볼 수 있습니다. 조금 어렵기는 하지만요. 답이 없을 때는 있는 것처럼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철학이라고 말합니다. 철학적 작업을 해보겠습니다. 보여주는 작업입니다.
철학자는 존재라는 개념을 생각해왔습니다. 이것도 존재한다, 저것도 존재한다, 그럼 발명해보자, 큰 의미를 주는 존재라는 것을 만들면 좋겠다, 라고. 그러면 존재(existence)란 무엇일까요? 존재가 나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큰 오산입니다. 왜냐하면 답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존재가 문제에 대한 답이다.’라고도 할 수 있겠죠.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러한 해결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지 존재라고 부른다면 답은 될 수 없습니다.
철학의 역사에서 하이데거는 이것을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아닌 어떤 정신적인 말을 만들었습니다. 존재는 독일어로 ‘Sein’이라고 하는데요, 하이데거는 옛 19세기의 표기방식을 따라 ‘Seyn’이라고 했습니다. 혹은 ‘Sein’ 위에 엑스표를 덧붙였습니다. 그렇게 ‘존재’라는 것을 적절하게 표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도식적으로 표현된 넌센스에 불과합니다. 무엇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이데거는 그러나 이 일이 잘못임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설명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냥 모든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현실의 총체―숫자, 도시, 우주…―는 무엇도 아닌 곳으로부터 존재에 이르게 된다고, 즉 느닷없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빅뱅에 의해 우주가 존재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숫자나 도시에 대해서도 빅뱅이 있었다고 하이데거는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비약’이라고 불렀습니다. 독일어로는 ‘Satz’라고 씁니다. Satz라는 말은 비약을 의미하면서도 명제라는 것도 의미합니다. 그는 “Der Satz von Ground”라는 책을 썼습니다. 『근거율(根據律)』이라고 불리는 이 책에서 그는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된 데에는 이러한 비약이 있기 때문이라고 썼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무엇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론을 회피할 뿐입니다.
지금부터 포지티브한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은 잊어주세요. 총체, 절대적인 모든 것이 없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리고 영역이 현실 하에서 매핑(mapping)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국지적으로 함께 있을 뿐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도시, 숫자, 그리고 우주가 함께 있다면?
우주라는 관점에서 그것들의 연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주에서 보면, 도시의 스케일은 꽤 큽니다. 도시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큰 규모의 대상으로 파악될 수 있습니다. 도쿄는 그 역사까지 포함해서 도쿄의 전체로 생각할 수 있으며, 조금 더 작은 레벨에서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도쿄는 매우 복잡한, 국소적인 존재의 기능으로도 파악될 수 있습니다. 숫자는 조금 더 어렵습니다. 우주의 관점에서 파악된 숫자는 어쩌면 뇌 속에 있는 것의 표상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뇌 속에서 우주를 생각하는 것이라고요. 그리고 우주 속에 있는 것으로 환원함으로써 우주의 관점에서 숫자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도쿄 속에 있다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숫자는 대상에 대해 셀 수 있습니다. 도쿄를 제로라로 할 수 있을까요? 교토를 첫 번째, 부퍼탈을 세 번째로 순서를 정하는 것도 숫자가 하는 일입니다. 우주를 n이라는 숫자로 생각해봅시다. 여기서 n이라는 것은 매우 큰 숫자를 의미입니다.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죠. 이런 식으로 매핑할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많은 것들이 여기서 생략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해리포터는 어떻게 될까요? 해리포터에 대해 지금까지 쓰이지 않은 소설들은 어떻게 될까요? 이뿐만이 아닙니다. 위의 시도는 도시, 숫자, 우주 등의 무작위적인 목록을 제시한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이론이 할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대상을 하나의 영역에 담을 수 없습니다. 이론적으로 왜 그러한 결론에 이르는지를 지금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지난 3천 년간 서양의 철학은 다음과 같은 철학적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동양의 철학에서는 다른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예를 들어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니시타 기타로(西田幾多郎)의 철학에 매우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양의 철학에서는 제가 이야기하는 사고방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우선 절대적으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고방식을 접읍시다. 우주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주는 어쩌면 무한히 큰 것일지 모릅니다. 어떤 이해방식이 맞는지에 따라서는 무한에 가깝게 큰 것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모든 것보다 우주는 작습니다. 따라서 가령 다중우주일지언정 무한을 초월하는 상태에는 이르지 않으며,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대상은 우주 속에 있는 대상보다 많습니다.
어쩌면 우주는 무한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우주는 작습니다. 철학의 사고방식에서 보면 우주는 매우 작습니다. 모든 대상이 우주 안에 담기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숫자는 우주 안에 담기지 않습니다. 겹치는 부분은 있지만, 모든 것이 포함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고방식을 접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취해보겠습니다. 즉 현실은 마음으로부터 독립한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현대 과학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현실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제멋대로 생각하는 그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환상으로 이해하거나 꿈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내가 꿈을 꾸고 있다 해도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제멋대로 생각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꿈을 꾸고 있다 해도 그것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것입니다. 꿈을 꾸고 있는 것에 대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꿈을 꾸고 있다고 해도 꿈을 꾸지 않고서는 꿈을 꿀 수 없습니다. 꿈을 꾸고 있을 때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것은 꾸며낼 수 없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꾸며낼 수 없습니다. 즉 사실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매력적인, 몇천 년 전의 이해방식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우리가 꾸며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으로부터 독립하고 있으며 사고로부터도 독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하간 20세기 무렵까지 중심적인 사고방식은 '지성을 가진 생물이 없어도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현실이다'라는 생각입니다. 이 생각에서 사고는 주관적이며 현실은 객관적이기 때문에 현실을 잘못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성을 가진 생명체가 없어도 현실은 거기에 있습니다. 이에 따라 현실은 마음으로부터 독립한 것이라는 이해방식이 그러한 철학에 담기게 됩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렇게 말해도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이 마음으로부터 독립하고 있다면, 현실 속에 마음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요? 그런 식으로는 현실 속에 마음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골치 아프게 됐습니다.
의미는 현실 속에 어떻게 위치하고 있을까요? 뇌가 있습니다. 그러나 뇌는 어떻게 의식과 관계하고 있는 걸까요? 왜 뇌가 없으면 의식이 지원되지 않는 걸까요? 그리고 컴퓨터는 겉보기에는 지적인 작업을 수행하는데, 그렇다면 컴퓨터는 의식이 있는 걸까요?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전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나오는 부작용입니다. 현실은 마음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나쁜 사고방식의 부작용입니다. 현실은 반드시 마음에 의존한다고, 관념론자처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확실히 독일은 관념론적으로 흐르기 쉬운 전통이 있습니다. 저는 독일인이며 관념론적이지만 종래의 관념론자와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실은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있지 않을 뿐더러 마음에 의존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관념론자처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식이 없다고 기능하지 않는 것일까요? 왜 의식인 걸까요? 이것은 관찰자라는 말을 사용해서 혼란스럽게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은 마음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현실은 마음까지 포섭하고 있으며 포함하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의미의 장’이 됩니다. 특정 법칙이 있고 그로부터 의미의 장이 형태 지어집니다. 예를 들어 여기서는 숫자의 법칙이 있습니다. 저기서는 도시의 법칙이 있습니다. 도시의 법칙과 숫자의 법칙은 조금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도시는 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재 도시의 숫자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z라는 숫자만큼 도시가 있다고 해봅시다. 구체적인 숫자의 도시가 있으므로 수의 의미의 장과 도시의 의미의 장은 그 의미에서 중첩됩니다. 그리고 우주가 있습니다. 나아가 무언가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면서도 어떤 의미의 장 속에 존재합니다. 고래는 물속에 삽니다. 고래의 생활방식, 즉 수중생활을 그들이 어떻게 경험하고 어떤 커뮤니케이션을 하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의미의 장입니다. 현실이 그렇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제안하는 철학의 관념에서는 이런 식으로 현실이 존재합니다. 국소적으로 겹치는 의미의 장의 직물세공과 같은 것으로서 말이죠.
나아가 글로벌한 맥락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전체라는 맥락은 없고 로컬한 맥락밖에 없습니다. 로컬한 맥락뿐이므로 맥락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져서 그를 통해 구조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의 의미의 장에 대해, 혹은 의미의 장의 중첩에 대해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은 구조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이라는 관점에서 파악될 수 없습니다. 신의 관점은 없습니다.
여하간 우리가 현실에 대해 찾아낼 수 있는 것, 그것은 항상 예상 밖이며 놀라움을 동반합니다. 물리학은 경험적인 과학에서조차 항상 그렇게 다루고 있습니다. 우주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의 승려도 다중우주를 이해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히 그리고 때마침 운이 좋아서 그런 식으로 파악된 것일는지 모릅니다. 다른 승려는 다른 이해방식을 할테니까요. 다중우주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며, 다중우주 자체가 억측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요컨대 현실은 이론에 저항하는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다 해도, 심지어 신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신[서양의 전지전능한 유일신]의 존재는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하는데, 어느 누구도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로컬ㆍ스트럭처(local structure)입니다.
앞서 도시와 숫자의 부분은 겹쳐질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구조를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물리학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나는 물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다중우주 연구에 몰두하지 않습니다. 물리학자가 대체로 동의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에 대해 조금 이야기하겠습니다. 여하튼 제가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안을 해보겠습니다. 추론에 불과하지만,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우주에는 근본적인 레벨이 있어서 나머지는 그 근본적인 레벨의 어딘가에서 나온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나오는지는 모른다.' 예를 들어 바다의 파도나 입자의 움직임을 볼 때 입자의 움직임은 파도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종류의 파도로 보입니다. 입자의 움직임은 소위 보통의 파도의 움직임이 아니라 인간이 보면 마치 파도처럼 보이지만 진짜 파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파도는 인과의 법칙이 있습니다. 따라서 예를 들어 ‘파도가 고래를 죽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글루온이 다른 글루온을 흡수했다.’라거나 ‘고래를 죽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리학자는 ‘고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고래가 없다고 생각하는 철학자는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다릅니다. 고래는 고래입니다.
글루온과 고래는 이처럼 함께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함께 할까요? 우주의 세부조정이 없다면 원래 고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고래와 같은 동물과 우주의 연결은 어떠할까요? 이것은 물론 깔끔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작은 것이 있어서 큰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식으로는 안됩니다. 가령 물리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것은 작은 것으로부터 구성된다는 사고방식을 저는 ‘레고중심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말합니다. 레고라는 블록이 있지요. 우주는 그러한 레고처럼 구조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말이 맞다면, 우주에는 깔끔한 숫자가 있고 실제로 깔끔한 것이 되는 무엇인 것이 아니고, 그렇다면 존재론적으로 깔끔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요? 우주는 이미 있는 이론적인 거품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수많은 철학자, 물리학자, 또 과거에 철학자와 대화한 물리학자는 총체가 있다고 가정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우주를 사고할지에 대해, 즉 물리학 그 자체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총체가 없다면, 만약 그 총체라는 것이 틀렸다면 어떻게 될까요? 3천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동물에 관해 말한 것을 지금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총체에 대해 말한 것을 현재의 우리는 왜 받아들이는 걸까요? 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생물학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그가 말한 총체라는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는 걸까요? 우리는 좀 더 깊이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명제가 있습니다. ‘동시에 맞으면서 틀린 명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특히 그레이엄 프리스트(Graham Priest)라는 철학자에 의해 다른 논리학의 발전 속에서 그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프리스트는 이미 몇천 년 전에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말하지만 이 말은 맞지 않습니다. 어째서 특별히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고 이러한 사고를 방치할 수 있을까, 그리고 국소적인 문제라면 이 비모순에 의해 혼란이 어째서 일어나지 않는가를 저는 엄밀하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 말을 지지해서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이기에 받아들였습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이미 최악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약 이 논증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과 말을 하지 않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루카시에비치(Lukasiewicz)라는 폴란드의 논리학자는 19세기에 ‘그 모순이 진실이어도 문제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프리스트의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방 입구에서 나오고 있다고 해봅시다. 제 몸의 반은 밖에 나와 있고, 반은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방 밖에 있는 것일까요? 방 안에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애매합니다. 이 애매함은 사람의 사고나 말이 있는 모든 곳에 있습니다. 이 애매함은 모든 곳에서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는 방 안에도 없으며 방 밖에도 없지만, 방 안에도 있으며 방 밖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 명제는 틀렸습니다. 적어도 이 경우에는.
그래서 총체를, 이론의 총체를 접으면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이 가능해집니다. 제가 주장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총체에 반대하는 이론을 보여주려 합니다. 저는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이 제안을 두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매핑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지금 이야기한 논리를 우주와 현실에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에 대한 답을 간단한 결론과 함께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왜 이러한 현실성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가? 그것은 너무나 너저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식의 존재에 관해서는 완전히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 곧 의식은 그물망(mesh) 작업 속의 일부입니다. 의식 그 자체는 뇌와 같지 않습니다. 그에 관해서는 별도로 이야기해야 할 만큼 깁니다. 뇌가 없다면 의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지만, 뇌와 의식이 같다고 하는 것은 틀렸습니다. 물론 뇌는 의식이 존재하기 위한 전제로서 필요하지만, 동등하지는 않습니다. 이와 같이 최종적으로 틀린 이론을 접으면, 앞서와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틀린 이론은 유럽에서 3천 년 전부터 계속되고 있는 마이너스 유산입니다. 제 연구의 대체적인 경향은 3천 년 전의 옛 논리를 옹호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물리를 완전히 접었습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철학] 또한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의 남은 부분은 여러분들과의 대화 속에서 풀어가겠습니다.
マルクス・ガブリエル、「宇宙・世界・実在」『現代思想』2018年10月臨時増刊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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