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미즈 다카시(清水高志)2023년 저작 공해론/불교론(空海論/佛敎論)(以文社)의 1대담’을 사막여우 :: 시미즈 다카시_공해론/불교론_1 (tistory.com), 사막여우 :: 시미즈 다카시_공해론/불교론_2 (tistory.com) 에 이어서 번역해 올려둔다. 


 

연기(緣起)’이이변(離二邊)’의 근저에 있는 것

 

시미즈: 밀려드는 실재에서 철학에서의 줄기세포 같은 것을 생각하려고 했는데요, 그것이 종교에서는 애니미즘입니다. 엠페도클레스가 한 것은 무엇이고 하면, 대립하는 이항이 우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항의 속성양태를 꺼내어 근접한 별종의 이항대립을 도출합니다. 이것은 앞서 마름()’이나 습함()’과 같은 것입니다. ③ ②의 이항대립을 우선 분열시킵니다. , 최초의 이항대립에 그것들을 결합하면 제3항적인 그 항이 대립 이항을 겸합니다. 이것이 매개이며 제3 렘마입니다. 그리하여 3항의 역할을 모든 항이 맡게 되며 모든 이항대립에 대해 어떤 항도 원인이 환원되는곳이 아님이 증명됩니다(표 1 참조). 여기서 가 레비스트로스가 구조라고 말한 것인데요, ‘매개라는 형태로 조정하고자 하는 것 그리고 빙 돌아 제3항의 위치를 순환시킴으로써 축약하는 모델을 만드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리가 닫히는것입니다. 레비스트로스가 구조라고 말하는 것은 이 축약이라는 제4 렘마에 관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로써 야생의 사고는 비유적인 형태일지라도 세계를 환원적이지 않게 설명하는 모델을 만들어냅니다.

 

표 1.

대립하는 이항이 있다.

그 이항의 속성’ ‘양태를 꺼내어 근접한 별종의 이항대립을 도출한다. (이항대립의 분열)

그것들을 최초의 이항대립 항과 결합하면 제3항적인 그 항이 대립 이항을 겸한다. (매개, 3 렘마)

3항의 역할을 모든 항이 떠맡아 모든 대립 이항에 대해서 어떤 항도 원인이 환원되는곳이 아님이 증명된다. (축약, 4 렘마)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을 읽으면 신화의 사고가 왜 이런 형태를 취하는지, 왜 이렇게 생각한 것인지 어리둥절합니다. 그러나 확실히 신화 이론에서 나오는 대비 항, 곧 이행 대립하는 요소 사이에는 긴장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신화 속에서 긴장 관계가 있는 그것이 어찌 됐든 해결됩니다.

3항적인 것이 하나둘씩 나오고, 그것들이 순회함으로써 모두 해결됩니다. 예를 들어 문화라는 것에 대해 날것익힌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익힌 것먹을 수 있는 것이자 문화적이라는 사고가 생겨나고 익혔더라도 먹을 수 없는 연초(煙草)[담배]’라는 것이 나오고 익히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이것이 제3항을 만들어내는 방식입니다. 그 제3항인 연초가 나아가 신화 속에서 멧돼지의 기원과 결부되는 식으로. 그래서 무엇을 하려는가 하면 빙 도는 순회를 만들고자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항대립을 해결하고자 하며 한쪽으로 치우치지 못하게 하려 합니다.

 

카메야마: ,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시미즈: 이러한 방식은 복수의 이항대립 간의 일종의 비틀림입니다. 비틀어서 포함하는 것/포함되는 것과 같이 어느 한쪽도 자동으로 원인이 되지 않는 형태로 풀어내는 것입니다. 이데아가 그랬고요. 이에 따라 이항대립은 최소 3개가 되어야 합니다. 비틀기 위한 두 종류와 포함하는 것/포함되는 것까지 해서 세 종류. 표 1번 단계에서 그러면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서 테트랄레마가 나옵니다. , 어떤 항도 원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연기(緣起)의 문제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이이변(離二邊)의 중도(中道)’가 있고 그것이 풀려갈 때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부분에서 제4 렘마가 성립합니다. 불교가 사고한 것이 이것입니다.

따라서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이이변의 중도를 불교는 처음부터 사고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복잡한가 하면, 그것은 훨씬 오래전부터 야생의 사고의 철학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러한 이항대립을 복수 조작하는 것으로서 행위자 연결망 이론을 앞서 언급했는데요, 그것이 현재 제기된 비주류적인 사고방식인가 하면 전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잘 살펴보면, 과학기술론(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분야에서는 그러한 사고가 거의 패권을 장악해가고 있습니다.

 

카메야마: 행위자 연결망 이론 말씀이죠?

 

시미즈: . 그래서 라투르와 미셸 세르의 학문적 계보가 파리학파로 불리기도 하는 것 같더라고요. 과학은 인간의 사회적 합의로 만들어진다고 주장하는 사회구성주의 학파 그리고 그와 반대로 사물의 행위성(agency)을 주장하는 학파 등으로 크게 두 분파로 나뉘는 듯합니다. 이에 따라 사이언스, 철학, 인류학까지 융화하는 이론으로서 ANT는 전연 곁길이 아니에요.

 

카메야마: 사도(邪道)가 아니라 왕도(王道)이지요.

 

시미즈: 맞아요, 왕도입니다. “이것은 유식(唯識) 아닌가?”라고 앞서 말했던 것이 과학과 기술의 혁신방식을 고찰하는 사회학에서 광범위하게 왕도화해온 겁니다.

 

카메야마: 카마시키켄 문고에도 몇 번 나왔던 내 친척인 자연과학자가 있는데요, 그는 라투르를 아주 좋아해요. 그 자신의 본직은 생물학, 구조생물과학입니다. 그는 실험실에 관한 라투르의 논의에 전부 공감하고 연구대상이 가진 행위성 등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제 본류인 듯합니다.

 

시미즈: 본류가 되어가고 있죠. 그러한 입장이 아니라면, 인간집단이 모두 사회적 합의에 근거해 만든 것이 과학의 진리라는 해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로: 그것은 사회구성주의라고 불리는 것이죠.

 

시미즈: 사회구성주의를 밀어낼 수밖에 없어요. 오히려 사회구성주의 쪽이 과학에 대해 회의적인, 나쁜 의미에서 가치 상대론이라고 비판받고 있어요. 반면 행위자 연결망 이론에서 복수의 행위자(actor)가 합세해서 과학의 대상을 만든다는 것은, 실제로도 그렇지만 대상 측의 능동적인 작용에 의한 피드백 루프(feedback loop)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한 과학, 즉 사이언스가 가능한 상황을 살펴봐야 합니다. 덧붙이면 그 속에서 만들어진 무언가의 다양한 행위자의 작용 결절점이 되는 것이 또 다른 결절점을 만들기 위해 동원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과학 및 기술 전체를 조망하는 모델을 만들려면 이렇듯 거대한 네트워크를 사고해야 합니다. 이것은 오히려 라투르보다 더 앞서서 세르가 말한 것입니다. 결절점들이 대상에 대한 접근을 비트는 방법을 동원해가며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상호 간섭하는 것으로서 학문 전체가 있다고요. 이러한 사고방식은 세르보다 훨씬 오래전에 라이프니츠가 무궁무진한 단자(單子, monad)의 세계로서 논한 것입니다.

 

 

축약으로서의 삼분법

 

카메야마: 또 한 가지 인류학 등의 이른바 실천적인 사례에서 봤을 때, 브리콜라주(Bricolage)의 궁극은 이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미즈: 브리콜라주. 요컨대 라이프니츠는 관념이란 사물이 체현하는 사고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원뿔곡선이라는 관념이 있다고 한다면, 원뿔곡선의 사례를 하나하나 들어 그것들이 관념을 체현한다고 말하기에는 사례가 끝도 없이 나옵니다. 그래서 라이프니츠는 원뿔이라면 원뿔인 사물이 있고 그것을 절단한 단면의 둘레가 원뿔곡선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형태에서 그것이 관념으로서 모든 것을 포괄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연속체 합성의 미궁이라고 해서 라이프니츠가 오랫동안 고민한 문제에 대한 그 나름의 해결법이지요. 다시 말해 관념을 바텀-업으로 사고하면 끝이 없으므로, [각각의 원뿔이] 전체로서 모든 원뿔을 포괄하는 것으로 본다는 겁니다. 구체물(질료)이 이데아(형상)를 포함한다는 것을 라이프니츠는 그런 식으로 생각한 것이죠. 그리고 과학이라는 것 또는 세계라는 것은 구체물(질료)과 이데아(형상)가 포함하는/되는 관계에 있으며, 그 속에 다른 구체물(질료), 다른 이데아(형상)가 점점 빨려 들어가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거대한 네트워크를 이룹니다.

바텀-업의 발상이란 기원이 뚜렷한 원자론(atomism)입니다. 라이프니츠의 해결법은 그것이 아니라 질료가 형상을 포함하는 가운데 대상에의 접근 방법에서 상호 대체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피라미드와 장대의 관계를 들 수 있습니다. 장대의 높이와 그림자의 길이가 1:1이 되는 바로 그 시각에 피라미드의 그림자 길이가 곧 피라미드의 높이가 되겠지요.

 

카메야마: 그것은 사물끼리.

 

시미즈: , 사물끼리 같은 형상성을 공유하고 있으며 같은 형상성을 통해 서로에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형상성을 축으로 접근하면 피라미드와 장대라는 구체물이 서로 대체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장대 높이와 그림자 길이의 비가 1:1이 되는 그 시각에 피라미드의 그림자 길이를 측정함으로써 피라미드의 높이를 알 수 있습니다. 또 반대로 피라미드나 원뿔이라는 구체물에서 복수의 형상성을 따올 수 있습니다. 원뿔곡선에서 둥근 것이나 이차곡선에서 표현되는 것을 형상화할 수 있고, 원뿔이라는 구체물에서 형상성의 측면에서 미묘하게 다른 것들을 따올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질료와 형상, 하나와 여럿이라는 관계의 조합과 그 비틀림이 있습니다.

세계에 있는 무언가는 그림자를 드리우는 피라미드와 같이 서로 다른 것에 대해 무언가의 정보를 제공하는 형상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들이 서로에게 서로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라이프니츠의 단자론(Monadologie)이란 바로 그러한 사상입니다.

 

카메야마: . 그래서 지금 왜 브리콜라주가 떠올랐는가를 곰곰이 따져보면, 바로 선생이 이야기한 원자론과 그 정반대에 놓인 단자론의 대비가 브리콜라주를 둘러싼 레비스트로스의 논의에서 나온다는 것이죠. 레비스트로스는 공장적 사고, 즉 공장 안에서 원료로부터 생산라인을 거쳐 만들어진 것과 주변에 널린 것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브리콜라주를 대비하는데, 이 대비가 원자론과 단자론의 대비와 평행을 이루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시미즈: 결절점이자 초점이 되는 것이 다른 복수의 결절점을 동원하면서 또 다른 초점과 대체되어 옮겨갑니다. 특정한 시작점 없이 대상이 그런 식으로 하나둘씩 만들어진다는 것이 바로 브라콜라주입니다. 요컨대 신화학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관계(구조)와 그 항(요소)과의 관계가 평평한 것이 신화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그는 신화공식이라는 형태로 표현합니다. (요소)이 축적되어 관계(구조)가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관계(구조)만 남고 항(요소)이 바뀌는 일도 일어납니다. [브리콜라주에서] 재료가 주어지는 것도 그런 식입니다.

바텀-업이 아니라는 것, 즉 원자적이지 않은 그것에서 브리콜라주라는 기묘한 대상제작이 일어나고, 그 궁극이 단자론이라는 것은 흥미로운 지적입니다.

 

카메야마: 정말 흥분됩니다. 레비스트로스를 연구하는 데에서 큰 의문 중의 하나는 야생의 사고에서 신화학으로의 비약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였는데요, 레비스트로스가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 나아간 것이라는 해석도 있지요. 그런데 시미즈 선생은 그러한 해석을 다른 형태로 이야기하면서 인식론이자 존재론이기도 한 것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시미즈: 내 논의는 일관적이며, 레비스트로스에 관한 그러한 의문까지 포괄합니다. 조금 전 엠페도클레스 이야기를 하면서 그림을 하나 설명했지요. 그 그림을 응용해서 페르메니데스와 플라톤의 대화를 또 하나의 표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 전자와 후자가 같은 구조라는 겁니다.

 

표 2.

포함하는 것’(이데아, ‘보편’)포함되는 것’(감성적인 것, ‘개별’)의 이항대립이 있다. (이데아가 감성적인 사물에서 분리돼 버린다.)

포함하는 것’, ‘포함되는 것기능속성으로부터 각각 하나인 것여럿인 것이라는 이항대립이 도출된다.

그것을 질료’, ‘형상등 다른 이항대립의 항과 결부하면, 3항적인 그 항이 대립 이항을 겸한다. (매개, 3 렘마)

3항의 역할을 모든 항이 맡고, 모든 대립 이항에 대해 어떤 항도 원인이 환원되는것이 아님이 증명된다. (축약, 4 렘마)

 

포함하는 것’, 이것은 이데아입니다. 그것과 포함되는 것’, 즉 감성적이며 구체적인 것들 간의 이항대립과 괴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후기 플라톤에 있어서 난제가 됩니다. 그렇다면, 포함하는 것’, ‘포함되는 것기능속성으로부터 각각 하나인 것여럿인 것이라는 또 다른 이항대립이 도출되며 분열합니다. 이것은 엠페도클레스의 이야기와 똑같은 시나리오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의 이항대립을 다른 이항대립이것은 예를 들어 주체/대상일 수도, 의외의 다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앞서 살펴봤듯이 질료/형상이라는 이항대립에서 사고한 것이 라이프니츠입니다.의 항에 결합해서 비트는 조작을 하면 제3항적인 그 항이 대립 이항을 겸합니다. , 주체이면서 하나라든가, 대상이면서 여럿이든가 하는 식으로요.

그것은 또한 이 두 종류의 이항대립의 네 개의 항 어느 것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체로서 모든 대립 이항에 대해서 어떤 항도 원인이 환원되는것이 아님이 증명됩니다. , 3항의 위치가 순회해서 고리를 만드는 축약이 나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결국 삼분법에서 어째서 거기까지 구조를 만들려고 했는가 하면, 그렇게 해서 축약의 운동을 최단으로 순회시킨 것이지요.

 

모로: 그렇네요.

 

시미즈: , 오래전부터 인류와 함께한 사상을 [삼분법은] 최소단위에서 모델화한 것입니다.

 

 

상의성(相依性)’은 순회한다

 

시미즈: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입니다. 획획 읽으면 그 의미를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이것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신은 만유의 신체를 구성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을 불과 흙으로부터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제3의 것 없이는 잘 결합할 수 없다.’

 

카메야마: 아아. (웃음)

 

시미즈: 다음 그대로입니다. ‘양자의 중간에서 그것들을 결합하는 어떤 끈과 같은 것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상을 하는 겁니다. 완전히 야생의 사고지요.

 

카메야마, 모로: (웃음)

 

시미즈: ‘그러나 끈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끈은 그것이 연결하는 것을 자기 자신과 완전하게 하나로 만드는 것이며, 비례(比例)[라는 끈]가 그것을 본성상 가장 훌륭하게 잘 해낼 수 있다.’ 그래서 그다음에 이어지는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 개의 수 가운데 임의의 입법수(立法數)든 평방수(平方數)[제곱수]든 중간에 있는 중항(中項)이 있어서 초항:중항이 중항:말항과 같고, 반대로 말항:중항이 중항:초항과 같은 관계가 성립한다고 하면, 이때 중항은 초항도 말항도 되며 또 말항과 초항은 양쪽 모두 중항이 되며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은 반드시 같은 관계가 되며, 그렇지 않으면 모두는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입법수(立法數)나 평방수(平方數)라는 것은 너무 커서, 예를 들어 등비수열 2, 4, 8로 설명하면, “초항중항이 중항말항과 같다라는 것은 2448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항중항이 중항초항과 같다라는 것은 8442. “이때 중항은 초항도 말항도 되며도 성립합니다(4284). 그래서 말항과 초항은 양쪽 모두 중항이 됩니다”(4284). 이것이 방금 이야기한 겁니다.

이것은 순회해가는 야생의 사고그 자체입니다(웃음).

 

카메야마: 이거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이라고 재규어와 무언가가 대립하는 것이라든지 그 대립을 겸한 제3항이 나온다든지 또 그 제3항에 대립하는 것이 나온다든지. 결국 그것들의 구조가 닫히는 것이죠, 신화라는 것은.

 

시미즈: 고리를 만들고 닫는다. 바로 이겁니다. 그러함으로써 무한히 제3항이 이리저리 뻗어가는 것만이 아닌 이론이 만들어집니다.

 

카메야마: 그렇게 하는 것이 또한 환원주의를 넘어설 수 있을까요?

 

시미즈: , 넘어설 수 있습니다. 연기(緣起)에 대해 길장(吉藏)은 다른 원인에 의해 결과가 초래할 뿐이라면 연기가 무궁해지므로(원인이 무한소행(無限遡行)하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모로: 결국 무인(無因)이 되므로 안 된다는 거네요.

 

시미즈: 어떤 결과가 다른 무언가의 원인으로부터 생긴다고 말해버리면, 그 다른 원인은 무한소행(無限遡行)하게 되므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길장은 이것을 무궁해진다라고 표현하며 거부합니다. 그래서 어떤 것에 자성(自性)이 있다(자기원인이다)라고 하면, ()이 필요 없어져서 무인론(無因論)이 된다고요. 이에 따라 연기(緣起)가 무궁해지지 않기 위해 축약(縮約)이 생겨나야 합니다. 이러한 축약을 가장 간단하게 정의해서 AA만으로 만든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상의성(相依性)’입니다. ‘A가 있어서 A가 있다. A가 있어서 A가 있다’ ‘A가 없어서 A가 없다. A가 없어서 A가 없다.

 

카메야마: 오늘날의 애니미즘의 나가르주나의 해석에서 나온 것이지요.

 

시미즈: ,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티마이오스에서 플라톤은 현상세계가 세 갈래로 나뉜다고 말합니다. ‘이데아 그 자체생멸(生滅)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멸이 생겨나는 장소가 있습니다. 생멸이 생겨나는 장소란 이데아(형상성)를 수용하는 더욱 추상적인 토대입니다. 요컨대 원인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생멸의 세계, 곧 제3 렘마의 세계를 한번 경유하는 것이지요. 불교에서도 제3 렘마의 세계를 생겨나는 쪽과 사라지는 쪽의 양쪽으로 가르지요. 이를테면,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에서.

 

카메야마, 모로: 네네.

 

시미즈: 순관(順觀)과 역관(逆觀)(혹은 환멸문(還滅門))이 있어서 그 조작을 자세히 살펴보면, 순회해서 축약이 생겨나며, 이 논리는 상의성(相依性)이 되게 돼 있습니다.

 

카메야마: 그렇네요. 이 부분은 정말로 읽으면서 어라!’ 했어요.

 

시미즈: 야생의 사고를 한 번에 짧게 표현하면 상의성(相依性)이 됩니다. 그리스 시대 이후 유럽에서는 이것을 앞서 서술한 이중성의 논리에서 해결하고자 했고 닫히지 않는 형식을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시간은 흐름이 없다

 

모로: 위와 같은 식으로 유식(唯識)의 아뢰야식(阿賴耶識)과 연기(緣起)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순환을 만들어놓고 그것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을 논증합니다. 앞서 그림에서 위에서 아래로 다시 쓰는 것 같은, 그러한 관계를 상의성(相依性)으로 순환시키는 것이 연기(緣起)입니다. 이것은 아뢰야식에 대한 설명에서 잘 나오는데요, ‘항상 구르는 것, 폭류(暴流)[거친 흐름]와 같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흐름이라고 쓰여 있어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아니면 위에서 아래로 무언가가 시계열적으로 흘러간다고 상상할 수 있지만, 성유식론(成唯識論)이라는 문헌을 보면 오로지 흐르기만 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흐르는 게 아니라 그 현장에서 전체의 다시 쓰기가 일어난다는 것을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림. '동시(同時)'의 문제

아뢰야식은 항상 구르는 것, 폭류와 같다(恒轉如暴流). 폭류가 물밑에서는 고기를, 물 위에서는 수초 등을 띄우고 흐름에 놔둬도 놓치지 않듯이 아뢰야식도 마찬가지다. 내측의 잔기(殘氣)(습기(習氣))와 외기(外氣)의 접촉 등의 법(다르마)이 언제나 서로에게 야기하는 것(隨轉)이다.

 

카메야마: ‘다시 쓰기라는 것은 모로 선생이 유식을 말하는 데에서 핵심어군요.

 

모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세계 속의 행위, 세계의 주어진 네트워크 속에서 일어나는 행위에서 누군가의 무언가를 통해 세계 전체가 단번에 다시 쓰이는 것입니다.

 

카메야마: 파급해간다.

 

모로: 파급은 아닙니다. 단번에 다시 쓰인다. 동시(同時)이기 때문에.

 

카메야마: 그런가요? 파급이라고 하면 단계적이니까요?

 

모로: 그렇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일상적 감각에서는 단계적으로 주변의 영향이 침투해올지 모르지만, 누군가의 행위나 사물의 변화는 그것이 모든 세계의 부분이자 전체이기도 하므로 그것들이 단번에 [세계를] 다시 쓴다는 주장입니다. 그 변화를 흐름이라고 말해두면서 오히려 끝없이 순환적인 동시성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그것을 폭류(暴流)’라고 말하는 것은 흐른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물밑과 위의 이야기라는 것을 표현하는 겁니다. 강이 그 물 위에 수초를 띄우고 흐름에 놔둬도 놓치지 않듯이, 또 물밑에는 물고기가 헤엄치듯이, 그것과 마찬가지로 흐름 곧 변화의 안과 밖이라는 것이 동시에 그러한 변화를 지지하고 있다는 그러한 어투입니다. 이것이 처음은 무슨 뜻인지 잘 몰랐어요. 흐름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흐르는 거겠지 생각했거든요. 흘러가는 강을 상상하지 않겠습니까?

 

카메야마: 물결이죠.

 

모로: , 물결을 상상하게 되죠. 그러나 폭류는 상호순환을 말합니다.

 

카메야마: 폭류는 상의성(相依性)이네요.

 

시미즈: , 세계의 창조라는 것의 극점에서 네트워크의 결절점 하나하나가 이어진다고 생각하면 그러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로: 그렇습니다.

 

시미즈: 그것을 폭류와 같은 변화를 끼고 나아가 그 위와 아래에 있는 상의성으로서 파악합니다. 그것은 ()’의 수준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카메야마: , 그런가요? 업의 수준.

 

모로: 과연 이것은 업의 이야기군요.

 

시미즈: 그 업이 비대, 증대해진다는 것은 조금 전 교차 교환적으로 포함하는/되는 관계를 통해 이항대립을 능숙하게 돌려서 구체적 대상(질료성)을 바꿔가며 이데아(형상성)도 바꿔가는 형태를 만든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집착의 세계지요. 그래서 윤리적으로도 실천적인 수행이랄까 그러한 형태에서도 불교는 그것을 가시화해온 것입니다.

 

모로: 그래서 말인데요, 이 폭류가 멈춰지기 위해 불교의 사고방식에서는 환멸문(還滅門)이라고 해서 서로 바꿔 쓰기와 같은 것을 거꾸로 돌려버리지요. 거꾸로 돌린다는 표현이 약간 이상할지 모르지만, 증대에서 그 방향을 반대로 틀면 존재가 소멸하지요. 존재란 본래 이렇듯 서로 바꿔 쓰이는 것이며, 이 세계에 있는 것은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 세계에서 없애버리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는다면, 불교는 이 서로 바꿔 쓰기의 과정을 멈추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답하는 것이지요.

 

시미즈: , 그렇네요.

 

모로: 그것을 신체적으로 찾아낸 것이 붓다 아니겠습니까.

 

카메야마: 다들 머리가 좋으시네요(웃음).

 

시미즈: 아니 뭐, 붓다는 일만 년에 한 번 나오는 천재지요.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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