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기획한 박동환의 철학과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간의 교차 읽기를 아직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이 기획은 전적으로 나의 인류학적 탐구가 존재론적 전회라는 사상적 흐름에 가담하기 위한 기초작업이다. 숲은 생각한다, 부분적인 연결들, 식인의 형이상학, 자연과 문화를 넘어서 등등 존재론적 전회를 대표하는 주요 저작들을 읽고 나도 그와 같은 연구 작업을 하고 싶었다. 구태의연하고 지루하고 그저 학자라는 직업군의 생활적 윤활유로 전락한 20세기 인류학과 단절하는 데에서 나아가 산 것뿐 아니라 죽은 것까지도 살아있는 것으로 다루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인류학을 할 수 있는 길을 찾은 듯했다. 그러나 그 길은 여전히 그들의 길이었고, ‘사고의 탈식민화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만난 것이 x의 존재론이었다. ‘x의 존재론은 나의 인류학에 숨을 불어넣어 주었다. ‘x의 존재론의 관점을 통해 비로소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과 그로부터 비롯된 후학들의 문제의식과 탐구 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해는 관점에서 나온다.)

야생의 진리: 불타는 자아의 경계 위에 살다는 말하자면 x의 존재론의 보론이다. 이 책은 20201222일 한국연구원 학술심포지엄 <x의 존재론을 되묻다>를 계기로 조직된 x의 존재론을 둘러싼 여러 논의에 대한 친절한답변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답변이 친절한첫 번째 이유는 저 논의 대부분이 x의 존재론을 이해하지 못한 무지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무지까지도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저 논자 중 누가 x의 존재론에 대해서 사용한 해석의 무덤이라는 수사는 해석할 수 없는 그 자신의 무지를 드러낸다. 아니라면, 저 수사가 죽음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보아서도 해석이란 곧 산 것을 죽은 것으로 만들어 묻어버리는 것일 수 있으며, ‘x의 존재론은 애초에 그러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레비스트로스를 해석하는 글을 본 적이 없다. 레비스트로스에 관한 글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한 무지를 드러내거나 이해한 것을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두 번째 이유는 저 논자들에게 x의 존재론에 이르는 맞춤식 길 안내를 해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브뤼노 라투르, 들뢰즈-가타리 등의 곁길을 알려준다.

박동환의 책은 슬프다. 철학이 시학과 가깝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철학이 사라져갈 인류의 운명을 알아서이지 않을까? 인류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사라질까? 박동환이 말한 대로,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온갖 고난을 감내해야 하는 나무의 지혜보다 못해서 차라리 숨(인간사고)을 스스로 서서히 거둬 가게 되는 걸까? 지구상에 영원히 썩지 않길 바라는 폐기물로 자신의 흔적을 대신하면서. 야생의 진리는 사라져갈 인류의 진혼곡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진혼곡은 인류의 지성에 숨을 불어 넣는다.

그래서 박동환×레비스트로스의 기획은 인류학에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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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천정부지로 치솟는 부동산 가격과 제집이 없는 이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대한민국 현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부채질하며 그 위선을 깨우치는 요즈음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그와 더불어 내가 이 책을 손에 잡은 것은 어느 블로그에서 이 책을 마르크스주의와 고현학의 만남으로 소개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고현학이 마르크스주의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또 만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궁금해하며 이 책을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에서 시도한 도시공간에 대한 계급적 분석은 매우 흥미로웠고 참신했다. 그러나 이 책 어디에서도 고현학은 찾을 수 없었다. 3장에서 고현학을 표면적으로 정의하고 고현학의 창시자인 곤 와지로의 도쿄 채집조사 내용을 소개한 것과 5장에서 저자 자신이 도쿄 거리 곳곳을 스케치하듯 기술한 것을 고현학이라고 한다면 고현학이겠지만, 그렇다면 왜 곤 와지로가 고현학이라는 독자적인 방법론과 이론을 구축하려 했으며 지금까지도 생활학, 현대풍속학, 노상관찰학 등으로 발전해왔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 여하간 이 책은 고현학과는 거리가 멀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현대 사회의 계급적 분화양상을 도시사회학의 관점에서 서술한 부분이다. 20세기 자본주의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는 고임금 노동자의 소비능력을 향상시켰고, 이러한 노동자의 향상된 소비능력은 자동차산업뿐만 아니라 건축업과 부동산산업을 견인했다. 그 결과 도시는 소비능력에 의한 생활방식에 따라 거주지 분화가 일어나고, 계급 구조는 도시공간을 구획한다. 저자가 계급 사회에 천착한 사회학자이기도 해서, “자본주의의 동학과 계급 간 대립이 도시를 만든다”(74)는 앙리 르페브르의 도시론, 소비의 물적 환경(‘건조환경’)으로서 건설업과 부동산에 대한 자본주의적 이해를 논한 데이비드 하비의 도시분화론, 도시사회학자들의 도시 생태론,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과 부르디외의 아비투스까지 다양한 학자들의 논의를 계급도시론 안에 잘 녹여내었다.

 

또 하나는 일본 도시, 특히 도쿄의 공간 구성에 대한 역사적 접근이다. 에도시대에 옛 도쿄를 가로지르는 스미다가와(隅田川)를 경계로 야마노테()와 시타마치(下町) 각각의 공간 구성의 특색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야마노테 지역에는 사무라이들이 주로 살았고, 시타마치에는 조닌(町人 도시에 거주한 상공계급)이 주로 살았으며, 이러한 신분에 따른 도쿄의 거주지 분리는 지금까지도 도쿄의 독특한 경관을 자아내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에도시대에 다이묘(大名)가 고지대에 살았고 조닌은 저지대에 살았던 패턴이 도쿄에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미다가와보다는 고도 20m를 기준으로 도쿄 도시공간의 계급적 분리가 서북과 동남으로 분리된다고 한다. 저자는 이러한 양상을 이중도시라고 명명했는데, 과연 야마노테와 시타마치 각각의 생활문화가 그럴 정도로 이질적인지는 책을 읽어도 잘 모르겠다.

 

이중도시란 내가 알기로 식민지 도시분석에서 나온 용어다. 예를 들어 일제식민지기 옛 서울(경성)은 청계천을 기준으로 북쪽의 조선인과 남쪽의 일본인으로 거주지가 분리되었다. 일본인이 서울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880년 한성에 일본공사관이 들어서고 남산(진고개) 일대가 일본인 거류지로 지정된 이후다. 1910년 한일합방을 계기로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으며 1930년대에 이미 서울의 일본인 인구수는 서울 전체 인구수의 약 30%에 달했고, 청계천을 경계로 각각의 이질적인 생활문화가 식민지 서울의 경관을 만들어내었다. 명동과 충무로 일대(식민지기에는 혼마치(本町)”라고 불렸다)는 주로 일본인들이 드나드는 상업지역이었으며, 조선인들이 드나드는 상업지역은 종로 일대였다. 언어, 의복, 주거, 음식 등등에서 혼종의 문화가 만들어지기는 했지만(박태원의 천변풍경은 식민지기 언어의 혼종화를 잘 보여준다), 식민지 서울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은 각각의 생활세계를 구축했다. 덧붙이면, 강남이 개발되기 시작한 때는 1941년으로, 그때 '강남(江南)'은 상도동 일대를 가리켰다. 1930년대 중반 용산과 이태원 일대에 일본회사의 사택이 들어서면서 신중간층(회사원, 상인, 총독부 중간관료 등)의 일본인들이 그곳에 살기 시작했고, 1940년을 전후해서 여의도 건너편의 한강 이남에서 일본인을 위한 단독주택이 하나둘 지어지면서 “코우난(江南)이라는 지역 명칭이 일본인들 사이에 통용되기 시작했다.

 

도쿄에서 신분에 따른 거주지 분리는 20세기에 이르러 계급에 따른 거주지 분리로 이어진다. 20세기 자본주의는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각각에서 내적인 분화를 가속화 한다. 노동자 계급 안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화는 자본가 계급 내에서의 분화만큼이나 격차사회를 만들어낸다. 또 가내경영의 구중간계급에서 나아가 조직의 운영이나 사업 기획을 전담하는 신중간계급이 출현”(12)한다. 소위 엘리트계층은 자신들만의 생활환경을 조성하고 그 속에서 자녀교육을 통해 자신의 계급을 재생산하고자 하는데, 이것은 그들만의 거주 공간을 구획한다. 도쿄에서 다양한 계급적 분화의 공간적 구획은 기존의 공간적 분리를 기반으로 한다. 그래서 부자 동네는 야마노테 쪽에 많고, 가난한 동네는 시타마치 쪽에 많다. 그렇다고 생활세계가 분리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마지막 하나는 저자가 도시를 산책하며 기술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우선 번역자들이 세세한 지명을 번역하느라 고생했을 것이라 짐작될 만큼 도쿄의 구석구석이 소개된다. 그리고 번역자들이 독자들을 위해 직접 현지를 탐방하고 촬영해서 사진을 책에 실어 놓았다. 그런데 이 부분이 책의 앞선 논의의 분석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오히려 이 책의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이중도시의 도시 공간적 분리를 드러내기보다는 명소의 흔적을 찾는다거나 지명의 유래를 설명한다거나 거리의 인상을 스케치한다. 역시 학자는 자기가 잘 모르는 분야를 잘 아는 분야에 물타기 하려 해서는 안된다. 학자는 연구취미를 분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인지 결론 부분이 황당하다. ‘혼종도시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그리고 여러 계급의 주거지를 섞어놓는 것으로 혼종도시를 설명하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이 결론은 마르크르주의적이지도 않고 고현학적이지도 않다. 곤 와지로가 시타마치(혼죠후카가와)의 채집조사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당시 부자들보다 가난한 자들의 생활풍습이 훨씬 더 다양하다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의 생활이 묻은 물건들은 자본주의의 상품보다 다양하다. 이 다양성을 곤 와지로는 과거 혹은 전통에서 찾으려는 인류학이나 민속학과는 달리 현재의 삶 속에서 찾아내고자 했다. 만약에 곤 와지로가 지금 시타마치에서 삶의 다양성을 말하고자 한다면, 그곳에 누가 살았으며 그 흔적이 어떤 경관을 자아내고 있는지가 아니라 지금 사는 사람들의 집과 물건을 하나하나 파고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곤 와지로의 채집조사는 산책자의 스케치로 환원할 수 없다.

 

빼앗긴 것을 되찾아온다는 계급적 투쟁이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의 다양성을 찾아야 하는지, 찾는다면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요즘 나의 이러한 고민을 풀어갈 단서를 얻지는 못했다. 다만 하시모토 겐지 저자의 현대 자본주의 계급 사회에 대한 통찰력은 주목할만하고, 그런 의미에서 2018년에 출간된 언더클래스: 새로운 하층계급의 출현(アンダークラスたな下層階級出現)을 읽어보고 싶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특히 빈곤율이 38.7%에 이르고 풀타임의 판매직과 서비스직에 종사하면서도 결혼해서 가족을 이루는 것이 어렵고 어두운 어린 시절을 보내 건강 상태가 나쁜 사람이 많은, 소위 일본 사회의 언더클래스에 대해 그가 어떻게 분석했는지가 궁금하다.

 

이 책은 오탈자가 조금 있다. 눈에 띄는 오탈자를 정리해 놓았다.

 

100쪽 야마토네 야마노테

121쪽 센가와千川 센카와千川

123쪽 다키 렌타로滝廉太郎 다키 렌타로瀧廉太郎 : 인명의 한자표기는 약자를 쓰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약자를 쓰지 않는다.

132환상의 마을幻景》 → 《환영의 거리幻景: 덧붙이면, 이 책의 부제가 文学都市[문학의 도시를 거닐다]’이다.

132쪽 각주 43 진나이 히데노부가 도쿄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년도는 1990년이 아니라 1983.

133쪽 모리 오가이森鴎外 모리 오가이森鷗外 : 이 경우에는 정자 표기가 원칙이나 약자 표기가 통용되기도 한다.

163쪽 토요타 데쓰야豊田哲也 토요다 데쓰야豊田哲也 : 아마도 자동차 회사인 토요타의 창업주의 성이 豊田이기에 인명에 쓰이는 豊田의 독음을 토요타로 잘못 알 수 있다. ‘토요타회사 또한 처음에는 토요다였다가 토요타로 바꾼 것이다.

180쪽 오나오치大縄地 오나와치大縄地

181쪽 이쿠라카타마치飯倉片町 이구라카타마치飯倉片町 : “이이구라(飯倉)”라는 지명은 관동지방에서 이세신궁(伊勢神宮)에 바칠 곡물을 저장하는 창고였다는 것에서 유래하는데, 점차 발음의 편의상 이이구라보다는 이이쿠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이구라카타마치(飯倉片町)는 옛 지명의 발음 그대로 통용된다.

184쪽 지도 미타오마야초 미타오야마초

189쪽 히오로 히로오

190쪽 구와하라자카桑原坂 구와하라사카桑原坂

200, 201, 203쪽 도미자카富阪 도미사카富阪

203쪽 세쓰쇼노미야摂政宮 셋쇼노미야摂政宮

204쪽 마쓰하라松平 마쓰다이라松平

206쪽 하쿠산고덴초白山御殿町 하쿠산고텐마치白山御殿町

히카와시타초氷川下町 히카와시타마치氷川下町

207쪽 고마고메니시카타초駒込西片町 고마고메니시카타마치駒込西片町

210쪽 이쿠토쿠엔신지育徳園心字池 이쿠토쿠엔신지이케育徳園心字池

213쪽 각주 19 우치다 핫켄의 출신은 후쿠오카가 아니라 오카야마.

214쪽 네즈초根津町 네즈마치根津町

215쪽 게이힌도호쿠선 게이힌토호쿠선 : 전철이나 기차의 노선명을 고유명사로 보고 현지의 발음대로 표기한다면 ()’까지도 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어 신간선이라고 하든지 신칸센이라고 하든지. “신칸선이 적절한 표기인지는 모르겠다. 이와 마찬가지로 게이힌토호쿠센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216쪽 다바다田端 다바타田端

221쪽 가타구치 야스키치片口安吉 가타구치 야스요시片口安吉 : 보통 인명에서 安吉야스요시로 발음된다.

222쪽 지은이 주 이케노하다池之端 이케노하타池之端

226쪽 신 가시가와 신가시가와 : 지명이므로 붙여서 쓴다. 신주쿠新宿에서 주쿠를 띄어 쓰지 않듯이.

243쪽 슈큐바宿場 슈쿠바宿場

252쪽 하야시 후미코林芙美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 : 탈자

263쪽 각주 45 오카사카 마리 아카사카 마리

바이브레이타バイブレーター》 → 《바이브레이타ヴァイブレータ

284-285쪽 우지코초카이氏子町会 우지코마치회氏子町会

 

 

 

하시모토 겐지, 계급사회: 격차가 거리를 침식한다(김영진, 정예지 번역), 킹콩북,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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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부분만 조금 건드렸다가 추석연휴에 읽자고 미뤄두었던 집중과 영혼을 완독했다. 좋은 책이 그러하듯이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을 때는 울컥한 마음에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이 눈물은 우리 시대의 고전이 선사하곤 하는 어떤 경이로운 경지를 맛보았을 때의 감격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천하고 지질하고 악다구니로 남을 속여 제 잇속을 챙기는 범속한 인간들의 삶을 헤집은 후에 비로소 나타나는 야트막한 나무 등걸에 앉아 숨을 고르는 것이야말로 공부가 아닌가 하는 깨달음에서 오는 오만가지의 감정에서 나온 눈물이었다.

 

안그래도 요즘의 나는 내 공부의 전환을 맞이하고 싶었고 맞이해야 할 것 같았다. 요 몇 년간 내 공부는 내 글을 생산할 정도의 힘을 갖지 못했고 다만 남의 글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작업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나태한 생활방식이 결국 나약한 몸으로 증상화된 탓도 있지만, 갖가지 갈래의 공부가 제도권의 논리로 귀착되는 세태 속에서 그러나 그 제도권으로 진입할 수 없었던 내 공부가 길을 잃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부는 어렵고 힘들다. 돌이켜보니 한국의 저명한 학자들의 글이 외국 학자들의 글보다 훨씬 어렵게 느껴졌던 이유를 알겠다. 한국 학자들의 글은 내 삶을 이루는 모든 것들을 알짤 없이 건드려서 그 글을 이해하는 것은 내 삶을 이해하는 것과 같게 만든다. 그들의 글은 구성적인 관념에 머무를 수가 없다. 이제는 거꾸로 생각이 된다. 한국어로 쓰였는데도 아프지 않은 글은 상도를 모르는 장사치들의 상술에 불과하다고.

 

집중과 영혼을 읽으면서 내 삶을 자꾸 되돌아보게 되어서 괴로웠다. 그 중에서도 여러 번 시도했지만 흐지부지 끝나버리거나 내게 남는 것을 따지면서 서로를 아카데미즘(참으로 볼품없는 한국의 아카데미즘이라도)으로의 진입 혹은 활개의 발판으로 수단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며 동료들을 의심하고 그만큼 나를 의심하는 중에 공부가 번민이 되어버린 이런 저런 공부모임들이 떠올라 마음이 부대꼈다. 이 책의 저자인 김영민 선생에 비하면 나는 줄 것도 없고 그러한 경험도 미천한데도 말이다.

 

하지만 내 공부의 길을 찾는 것은, 얼마나 지리멸렬한지 스스로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꽤나 되는 줄 알 정도로 지리멸렬한 한국 아카데미즘을 바로 잡아야할 우리의 공부론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마치 일본의 (정치)사상사가 외래사상과 국학의 때로는 맞대결 속에서 또 때로는 상부상조 속에서 생성되는 지()의 연대기이듯이, 우리의 공부론은 한국 학자들에게서 젖줄을 댈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 서경덕, 정약용, 이능화, 이덕무 등의 공부론을 논한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느꼈던 내 공부가 정말 얕다’(‘아는 것이 없구나’)는 자각에 더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마구잡이로 공부해서는 승산이 없다. 내 공부를 선학들의 공부에 비추어 벼리고 벼려야 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과하게 느꼈던 부분, ‘학인’(學人)으로서의 정체성을 누누이 강조하는 부분은 한국 아카데미즘 체제에서 포지션을 찾을 수 없는 저자 자신의 자기단속으로 비춰지면서도 그렇게 과하게 읽어 들이는 나 자신의 비틀린 자의식의 투영일 수도 있겠다 싶다. 그리고 또 책 말미에 언급한 장소성’, 즉 장소의 의미화는 사람의 무늬로서의 인문’(人紋)을 논하면서도 그것을 인간에게서 안주시킬 수 없는 저자 자신의 인문학의 보루 같았지만, 나 또한 그러한 마무리에 안도할 수 있었다. 어차피 사물의 존재론(이를테면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의 객체-지향적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과 같은)이란 인간이 스스로를 단념한다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물론 위의 것들은 이 책의 흠으로 잡힌다 해도 이 책의 깊이는 그 흠마저 아우른다. 그 깊이는 하루하루를 번민으로 힘겨워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나 몰라라 하지 않는다.

 

 

김영민, 집중과 영혼 - 영도零度의 인문학과 공부의 미래, 글항아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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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xicon 現代人類学, 이 책은 일본에서 출간된, 존재론적 전회의 이론적 흐름에 기반한 인류학 해설서이다. 50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각각 4쪽 분량의 간단한 해설과 더불어 주요문헌을 달아놓았다강의 교재라기보다 강의자를 위한 교안으로 만들어진 느낌이다.

편저자인 오쿠노 카츠미(奥野克巳)와 이시쿠라 토시아키(石倉敏明)가 쓴 이 책의 서문을 보면, 27명에 달하는 이 책의 저자들이 21세기 현대사상의 새로운 리더로서 인류학의 부상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만 놓고 보면 제2차 세계대전 후 아카데미즘을 이끈 학문은 정치학과 경제학이었다. 고도성장기에 안착하면서 철학과 사회비평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 이후 대학생과 고급교양대중을 중심으로 뉴아카데미즘이 대두했다. 이 즈음에 인류학에서는 구조주의와 기호학이 발흥하였고 80년대와 90년대의 안팎의 진통을 거쳐 21세기 새로운 지의 세계를 탈/재구축하기에 이르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지성사에 관해서는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모리스 고들리에 등의 2세대, 브뤼노 라투르, 필리프 데스콜라 등의 3세대, 켁 자신을 포함하는 4세대까지)을 중심으로 재평가한 프레데릭 켁의 2008년 글을 참조할 수 있다.)

21세기 지의 생성으로 향하는 지적 운동은 이 책에서 50개의 항목으로 주제화된다. 그것들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재귀인류학(Reflexive Anthropology)

2.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3. 존재론을 둘러싼 논쟁

4. 퍼스펙티비즘

5. 오늘날의 민족지

6. 오늘날의 브리콜라쥬

7. 대칭성 인류학

8. 애니미즘

9. 자연/인간

10. 인류세

11. 자연의 인류학

12. 다종민족지(Multispecies Ethnography)

13. 타성(otherness)

14. 야생의 사고와 포켓몬

15. 에두아르도 콘의 자기들의 생태학

16. 아나 칭의 민족지

17. 야생생물관리와 인류학

18. 케어(care)

19. 포식

20. 가식성(可食性)의 인류학

21. 생명

22. 점균(粘菌)

23. 지역

24. 이와타 케이지(岩田慶治)의 애니미즘론

25. 현대의 민속학

26. 고고학과 인류학

27. ‘사물의 인류학

28. 페티시/페티시즘

29. 가치와 윤리

30.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부채론

31. 아나키즘과 증여

32. 주권

33. 액티비스트 인류학

34. 교차하는 현대사상과 문화인류학

35. 허구와 실재

36. 특이점(singularity)

37. 언어의 존재론

38. 기호학과 인류학

39. 민족지 영상의 혁신

40. 감각 매체(Sensory Media)

41. 소리와 신체

42. 예술제작의 인류학

43. 신화학의 현재

44. 심리학과 인류학

45. 암묵지식(tacit knowledge)과 꿈

46. 장소와 창조성

47. 환경인문학

48. 영장류학과 인류학

49. 복잡한 인간 진화

50. 호모 사피엔스

 

이분샤(以文社), 20182월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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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의 형이상학』에 관한 짧은 소회를 적어놓는다. 이 책은 최근 인류학에서 거대한 폭풍처럼 일고 있는 ‘존재론적 전회’라는 이론적 흐름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그래서 소회라는 것은 이 책에 당연히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깊이 파고들어서 논리적으로 정리해내기에는 내가 아직 이 책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 작업은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그 작업에 단초가 될 만한 피상적인 생각의 편린들을 생각나는 대로 간략하게 언급해두고자 한다.

무엇보다 내가 이 책에 매료되었던 것은 이 책의 저자인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독특한 글쓰기 양식이다. 대학원에 진학한 후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내가 받은 학문적 훈련의 정신은 한마디로 말하면 ‘상식에 준하기’이다. 즉 학문을 상식화하는 것, 상식을 학문화하는 것이다. 상식은 상식적으로 대다수가(혹은 대체로) 동의할 수 있는 어떤 것들을 가리킨다. 어떤 대상에 관한 상식들의 관계형식을 설정하고 그 설정된 관계형식으로 그 대상에 관한 상식들을 차곡차곡 쌓아올려서 결국에 그 대상을 총체적으로 규정하는 것,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내가 이해하고 실행한 학문이 그랬다. 그러나 나는 한편 이러한 ‘상식 쌓아올리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지루했고 너무나도 고루했기 때문이다. 다만 ‘상식 쌓아올리기’의 미덕이라고 한다면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겠다. 그것은 달리 말해 돌이 ‘상처’를 주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러한 학문의 실행방식이 나만의 방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학회지 논문들을 읽지 않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돌이 어떻게 재미를 주겠는가? (돌이 재미를 준다면 그것은 돌을 형상화하는 사고의 능력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학회지 논문들, 그 논문들이 논하는 무엇들은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표현을 빌면 이미 ‘응고된 행위’로서 사물화된 것들에 불과하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대체로 그렇다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오게 된 과정을 유추해볼 수 있다. 지식의 주변부에서 중심부의 지식을 ‘진리’로 수입해오던 한국 학계의 관행, 그에 안주하고 이권을 챙겨온 유학파 출신의 기득권 교수집단, 그에 편승하고 굴복한 무수한 석박사과정생들, 그리고 나처럼 그러한 기득권집단과 대학 언저리의 떡고물로 연명하는 준-학자집단, 이들의 살아가는 방식의 총합, 즉 ‘정신의 식민화’가 작금의 이 사태를 불러들였다. 

그렇다면 학문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상식에 반하는 것이다. 상식을 비판하고 상식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학문이 상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학문은 새로운 상식을 만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학문은 사방을 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적들과 상식을 논하지는 않는다). 이 상황을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유연관계‘론’을 아날로지적으로 가져와서 묘사해보겠다. 카스트로는 생산과 생성을 친족체계의 출자(出自)관계(부모-자식관계, 즉 혈연관계)와 유연(類緣)관계(인척관계)에 각각 대응시켰다. 카스트로에 의하면, 레비-스트로스의 친족의 구조주의에서 친족의 존재방식은 생산으로서의 출자관계를 끊임없이 부정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생성으로서의 유연관계를 구조화한다. 그러면서도 친족은 유연관계를 출자관계로 끌어당기려 한다. 이를테면 한 남성은 그의 아내의 남동생과 매형-처남관계(많은 부족사회에서 이러한 관계는 “의리의 형제”로 불린다)가 되는 한편, 그 남성의 처남은 그 남성의 자식의 삼촌이라는 출자관계의 선을 따라 설명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출자관계의 선을 끊어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완벽한 유연관계, 즉 처남-매형만의 순수한 인척관계로 남는 방법)은 유연관계의 매형-처남을 잠재적인 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카스트로는 브라질 남단의 투피남바 족의 카니발리즘 의례를 통해 이를 설명해낸다. 투피남바 족은 전쟁의 상대편을 의도적으로 생포한 후 생포한 포로를 집단 내의 여성과 결혼시키고 일년이라는 일정 기간 매형-처남관계로 지낸다. 그리고 일년 후 포로를 죽이는 의례를 행한다. 이 의례의 절정에서 죽임 당한 포로의 신체는 집단 내의 성원들에게 음식으로 제공된다. 이때 의례의 집행자이자 포로의 대리자인 샤먼과 포로의 아내는 그 음식을 먹지 않는다. 샤먼과 포로의 아내를 제외한 집단성원들은 포로의 신체를 ‘의례적으로’ 먹음으로써 포로의 퍼스펙티브를 얻는다. 이처럼 생산을 끊어내고 생성을 얻는 대가는 죽음이다. 생성으로서의 학문은 유연관계로서의 적을 둘 뿐이며, 그때의 생성은 죽음의 이면에 다름 아니다.

『식인의 형이상학』의 토해내듯 정곡을 찌르는 긴장감, 어디에도 기대지 않는 독아청정의 독자성, 어떤 인과관계의 상식을 허용하지 않는 서슬 퍼런 청량감, 이것들로 한번에 독자를 저격하는 그의 글쓰기 양식은 투피남바 족의 카니발리즘을 충실하게 재현한다. 사냥과 전쟁, 음식과 카니발리즘 사이를 위태롭게 유영하면서 말이다.

에두아르도 콘이 말했듯이 막스 베버에 의한 근대성은 탈주술화로 요약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가 들뢰즈를 인용한 표현에 따르면, 개념을 얻는 대신 내재평면을 잃은 것이다. 신이라는 개념과 인간이라는 개념은 성스러운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을 파멸적으로 분리해내었고, 근대적 인간은 인간이라는 개념의 식민화에 지배되고 말았으며 역설적이게도 식민지(=대지)에 종속되고 말았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형이하학의 토대를 갖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정한 형이상학은 식민지(=대지)에서 탈식민화하는 것이다. 그의 학문은 근대가 식민화한 형이상학을 죽음의 생성으로서 되살려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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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수이세이샤(水声社)"에서 출간하고 있는 '존재론적 전회' 문헌 목록

다음의 사이트에서 번역해 올립니다.

http://www.suiseisha.net/blog/?p=4803

 

 

《총서 인류학의 전회》

 

일찍이 세계 각지의 이국적인 사물을 기록하고 비교ㆍ분석하는 학문으로 자리매김한 문화ㆍ사회 인류학은 198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흐름과 함께 현저한 변모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 인류학의 현대적 양상은 이제까지 일부 전문가 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본 총서는 그러한 변화를 주도해온 인류학자들을 소개함으로써, 국내의 지적공백을 메우고 사상철학의 세계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려는 야심찬 기획입니다.

 

 

나카자와 신이치(中沢新一) 인류학자

 

오늘날 사상, 철학, 예술, 실천의 현장에서 요구되고 있는 지성의 형태는 대범하게 변화하고 있는 인류학자의 ‘다음의 인류학’과 기이한 공명을 이루고 있다. 인류학은 다시금 현대사상의 최전선으로 도약하고 있다. 이 총서는 지금 인류학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태동을 세계 최초로 소개하려고 한다.

 

 

『부분적인 연결』 원제: Partial Connections (2005[1991])

메를린 스트래선 저

오늘날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류학자 중 한 사람인 스트래선의 이론적 주저이며, 저서로서는 첫 번역. 스트래선은 전통적인 인류학에 대한 (자기)비판을 근거로 ‘우리’와 ‘그들’의 실천의 끝없는 착종 속에서 새로운 민족지적 가능성을 찾아내어 독자적인 텍스트를 만들어내었다. 논의의 단선적인 흐름을 수많은 주름으로 의도적으로 분단하는 그 실험적인 스타일은 독자들을 때로는 당혹스럽게 만들고 또 때로는 독자들에게 도발한다. 초판 간행에서 이십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새로운 사고를 자극하는 기념비적인 책.

 

 

『인디오의 변덕스러운 영혼』 원제: The Inconstancy of the Indian Soul: The Encounter of Catholics and Cannibals in Sixteenth-century Brazil(2011)

에두아르도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 저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를 주도해온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대표작으로 저자 스스로가 “가장 좋아하는 논문 중 하나”라고 부르는 화제작. 16세기 브라질 해안가에 거주한 투피남바족은 당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는 대하기 어렵고 견디기 힘든 사람들이었다. 바로 그들이 보여주는 ‘변덕’ 때문에 ....... 이 책은 선교사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그들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투피남바족의 변덕을 사고함으로써 선교사의 설명을 넘어서서 투피남바족의 사회철학 혹은 <존재론>을 해명해간다.

 

 

『변형하는 신체』 원제: Body Transformations Evolutions And Atavisms In Culture (2005)

알폰소 링기스 저

경쾌하고 색채가 풍부한 인류학 에세이 여행. 서양철학뿐만 아니라 정신분석·문화인류학·진화생물학 등 학문의 여러 영역들을 섭렵하면서 우리의 ‘몸’의 윤곽을 그려나간다. 동물과 인간, 남성과 여성, 서양과 비서양, 고대사회와 현대사회 등 기존의 분류법을 교묘하게 넘나들면서 현대의 윤리적 행위의 방식까지도 근본적으로 질문한다. 철학적 고찰에 시적인 상상력을 혼합한 링기스의 문체는 독서의 즐거움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일관되게 ‘인류’되기의 질문을 우리 안에 불러일으킨다.

 

 

『모방과 타자성』 원제: Mimesis and Alterity: A Particular History of the Senses (1992)

마이클 터시그(Michael Taussig) 저

타문화와 만날 때 발생하는 화학반응에 대해 발터 벤야민의 ‘모방’에 관한 통찰력에 영감을 받아 독자의 방식으로 논한 미국의 인류학자 터시그의 저서이며, 그의 첫 번역물. 무대는 콜롬비아와의 국경을 접한 다리엔. 거기에 거주하는 인디언과 조우한 유럽인은 이윽고 ‘표상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것과의 관계로부터 이탈한다. ‘모방과 공명하는 마술’이라고 기술한 터시그는 ‘타자(모방)’에 비치는 ‘모방(타자)’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독자들에게 그 어지러움을 선사한다.

 

 

『발터 벤야민의 묘비』 원제: Walter Benjamin's Grave (2007)

마이클 터시그 저

중남미 지역을 주요 무대로, 식민주의와 자본주의의 현혹적인 경험을 그려낸 인류학자 터시그는 그와 동시에 민족지학, 자전적 기술, 문화 비평을 교묘하게 교차시키는, 현대의 가장 중요한 ‘이동수필가’이기도하다. 비평가 벤야민이 나치독일에서 벗어나고자 자살을 선택한 스페인의 국경마을을 방문해 경계와 묘지에 대한 사색을 둘러싼 표제작 「발터 벤야민의 묘비」등 총 여덟 편을 수록한 터시그의 대표적인 에세이집.

 

 

『다(多)로서의 신체』 원제: The Body Multiple: Ontology in Medical Practice (2002)

안네마리에 몰(Annemarie Mol) 저

네덜란드 대학병원에서 동맥경화의 진단ㆍ치료를 사례로, 의학, 철학, 인류학 사이를 대담하게 횡단하는 실험적인 민족지. 몰은 민족지과 이론적 고찰이라는 두 가지 텍스트를 병치하는 특이한 구성을 통해 죽상동맥경화증이라는 <하나의> 병이 다양한 행위, 장소, 진료, 치료와의 상호작용 속 에서 본질적으로 복수의 성(性)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설득력있게 논한다. ‘실천적 존재론’의 방향성을 보여줌으로써,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에 큰 영향을 준 명저.

 

 

『아트와 에이전시』

알프레드 제리

제리의 유작 『아트와 에이전시』는 우리에게 상식을 버리라고 한다. 예술작품과 우리와의 관계는 예술과 감상자가 아니라 덫과 먹이의 중층적인 상호관계에 있다. 예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혹은 그것에 행위주체가 어떻게 매개되는지를 문제로 삼는다. 파푸아뉴기니의 방패에서 뒤샹의 ‘큰 유리’까지 다양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전개하는 예술을 ‘행위주체(에이전시)’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는 급진적인 이론서.

 

 

『자연과 문화를 넘어』

필리프 데스콜라 저

프랑스인류학에서 레비-스트로스의 계승자로서 현대인류학에서 가장 주목받는 이론가 데스콜라의 저서. 그는 이 책을 통해 ‘자연’과 ‘문화’라는 이원론에 의문을 던지고, 인간과 비인간(동식물)이 지속적으로 맞부딪치는 생태학의 다양한 집합체로서 인간사회를 파악하는 새로운 방법인 ‘자연의 인류학’을 제창한다. 이것은 이제까지 인류학의 영역을 넘어 심신이원론, 나아가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사회와 과학기술의 존재양식을 재고하려는 시도이다.

 

 

(2018.08. 보충)

 

『법이 만들어질 때: 근대행정재판의 인류학적 고찰』 원제: La fabrique du droit : une ethnographie du Conseil d'État

브뤼노 라투르 저

 

『비장소: 초근대성의 인류학을 향하여』 원제: Non-lieux : introduction à une anthropologie de la surmodernité

마르크 오제 저

※ 한국어번역본 『비장소: 초근대성의 인류학 입문』(2017년 9월 아카넷)

 

『경제인류학: 인간의 경제를 향하여』 원제: Economic anthropology : history, ethnography, critique

크리스 한, 케이스 하트 저

 

『유감세계: 판데믹은 신화인가?』 원제: Un monde grippé

프레데릭 켁 저

 

『작가, 학자, 철학자는 세계를 여행한다』 원제: Écrivains, savants et philosophes font le tour du monde

미셸 세르 저

 

『프레이머 프레임드』 원제: Framer framed

트린, T. 민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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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책에 빠져 들었다. 아니, 이렇게 느긋하게 책을 읽은 게 얼마만인가 싶다. 대학원 과정을 밟은 이후로 책은 늘 내 논문을 위한 인용문 창고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논문을 많이 쓴 것도 아니다. 석박사 학위논문과 소논문 두어편, 잡다한 보고서들이 내가 공식적으로 써낸 글들의 전부이다. 대학원에 들어오기 전, 오히려 그때 책이 즐거웠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때 느낀 독서의 즐거움이 생각났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독서가 주는 흡족함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잠들면 안돼, 거기 뱀이 있어』(Don't sleep, there abe snakes)는 어느 인류학자가 아마존의 '피다한'이라는 부족의 언어세계를 30년 넘게 관찰한 민족지(ethnography)이다. 아마존의 '원시부족'(primitive society)은 인류학의 오랜 단골손님이다. 그것은 유럽의 근대적 인간관의 반증으로서 20세기 인류학의 가장 훌륭한 보고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문자도 없고 국가도 없으며 수렵채집의 소집단 생활을 영위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문명인'보다 행복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1977년 피다한 사람들을 처음 만났을 때 '얼굴마다 웃음이 가득한' 그들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는다. 내가 석사논문을 위해 고비사막에 갔을 때 유목민의 첫인상도 그랬다. 그들은 정말 웃음이 많았다. 피다한 사람들처럼 아무 때나 웃었다. 내가 자라온 사회에서는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그들은 웃었다. 반면에 말은 지나치게 직설적이었다. '고맙다' '미안하다' '안녕' 등의 친교적인 소통어 없이 바로 하고 싶은 말을 꺼낸다. 저자가 그 맥락을 궁금해했던 것처럼, 나도 궁금했다. 

피다한 마을, 아마존의 깊은 숲속에 '고립된' 이곳에서 저자는 '근대인'과 완전히 다른 삶을 본다. 우선 피다한 마을에는 밤낮이 없다. 그러니까 그들은 낮에 일하고 밤에 자지 않는다. 그들은 낮이든 밤이든 쪽잠을 자고, 그 쪽잠은 두시간을 넘지 않는다. 늘 밤새 이야기하고 새벽 3시에도 물고기를 잡으로 강가로 나간다. 저자는 이에 대해 아마존의 자연을 누리는 대가로 외부의 적들을 경계해야 하는 그들의 자구책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그들의 밤인사는 "잠들면 안돼, 거기 뱀이 있어"이다.

3세대의 친족관계를 기본으로 집단을 구성하는 피다한 사람들에게 '리더'는 없다. 그런데도 그들의 공동체는 평화롭다. 물론 이 '평화'는 '근대인'의 '박애정신'을 뜻하지 않는다.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고 그 질서의 냉혹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과 함께 피다한 마을에 들어간 아내와 아이가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맨 경험을 예로 든다. 아내와 아이가 설사와 구토와 환각에 시달릴 때 저자는 처음에 그것이 무슨 병인지도 모르고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애를 쓰지만, 피다한 사람들은 그 병이 말라리아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수수방관한다. 저자는 후에 그들이 그들 자신에 대해서도 그러한 태도를 견지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느날 저자는 병에 걸려 거의 죽기 직전의 엄마 없는 피다한의 아이를 보살핀다. 그런데 잠깐 저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 친부와 와서 그 아이에게 술을 먹여 안락사시킨다. 어차피 죽을 아이는 죽게 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삶의 원칙이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죽음의 어떠한 의례도 없다. 그들에게 사후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살아있는 현재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그들의 세계관은 언어에 그대로 반영된다. 저자가 '경험의 직접성 원칙'(the Immediacy of Experience principle)으로 설명한 그들의 언어에서 복문이나 중문과 같은 간접구문은 존재하지 않으며 완료시제 또한 없다. 그들은 직접 경험한 것 외에는 말하지 않는다. "피다한 문화에서는 원칙적으로 직접 보고 설명하는 사람보다 더 높은 권위는 존재하지 않는다"(432쪽).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오랫동안 외부로부터 폐쇄적으로 살아온 탓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웃'간 남다른 친밀감을 갖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 친밀감은 거의 모든 이웃과 섹스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녀간의 결혼 혹은 이혼의 의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미혼의 남녀가 섹스를 하고 서로 마음에 들면 2~3일 마을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함께 살 뿐이다. 기혼의 남녀가 섹스를 하고 서로 마음에 들면 마찬가지로 2~3일 마을을 떠났다가 기존의 '배우자'와 살던 집을 버리고 다시 집을 지으면 된다. 물론 섹스 파트너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본래의 '배우자'와 살던 집으로 돌아오면 그뿐이다. 연령도 중요하지 않다. 초경 혹은 첫몽정 이후면 된다. 실질적으로 파다한 마을에서 젖을 뗀 3살 이후로는 공동체의 동등한 성원이다. '아이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이는 귀기울일 대상일 뿐이지 돌볼 대상이 아니다.  피다한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은 '가족'이다. 친족용어는 다섯 개뿐인데,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를 구분하지 않고 '마이히'로 부르며 때로 '마이히'는 윗사람을 부를 때도 사용된다. 그 외에 형제자매를 부르는 '하하이기'와 아들을 가리키는 '호아기/호이아시', 딸을 가리키는 '까이', 한부모 아이나 고아를 가리키는 '삐이히'가 있다. 이러한 '가족'-집단 속에서 추상적인 언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으며, 말로 무엇을 설명할 상황도 거의 생기지 않는다.  

추상적인 언어가 부재한, 이를테면 숫자 개념이 없는 피다한 사람들에게서 언어는 의사소통의 기능에 충실하다. 3개의 모음과 8개의 자음뿐인 그들의 음성언어는 복잡한 담화구조를 기피하는 대신에 다양한 채널을 가지고 있다. 저자가 '담화채널'이라고 명명한 속에는 콧노래, 휘파람, 외침, 노래 등이 있다. 아마존 밀림에서 사냥을 할 때, 비가 쏟아지는 우기일 때, 일반적인 음성언어보다 그외의 '담화채널'이 효과적으로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피다한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임무를 띠고 피다한 마을에 들어왔다가 숫자, 색깔 등의 추상적 언어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8개월간 피다한 사람들에게 숫자를 가르쳐보지만 어떠한 진전도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독특한' 언어문법의 구조가 촘스키로 대표되는 '보편문법'에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촘스키의 '보편문법'은 간단하게 말해 인간의 언어는 인간이 말을 습득하기 전에 이미 추상적인 문법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 문법구조는 세계의 어떤 언어에든지 동일하게 적용되며 다만 각각의 사회적, 문화적, 자연적 환경에 따라서 '변형'될 뿐이다. 

그런데 저자는 피다한의 언어에서 추상적 구조를 발견할 수 없었다. 또 피다한 사람들은 사진이나 그림처럼 이차원적 대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저자에 따르면,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추상적인 인식을 발전시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낚는 즉시 많든 적든 저장하지 않으며 모두 먹어버리고 먹을 거리가 없으면 굶는다. 배고픔은 그들에게 인간의 존재조건 중 하나이다. 그들에게 앎이란 삶의 조건에 다름 아니다. 아마존 밀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야생동물들의 종속과목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길들이는 것이다. 

저자는 기독교 선교를 하기 위해 아마존에 들어갔다가 결국은 피단한 사람들의 삶에 흔들리어 기독교 신자이기를 그만둔다. 종교와 진리가 망상임을 깨닫고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을 집중하는 '신이 없는 유쾌한 세상'에 눈을 뜬 것이다.

나 또한 그런 기억이 있다. 고비사막에서 현지연구를 끝내갈 즈음에 '진리 또한 문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세상의 모든 '진리'를 얻은 듯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고비사막에 더 머물렀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3개월간 묵으면서 사막의 일교차와 밤마다 설치는 쥐들과 몸 구석구석을 파고드는 벌레들을 못견뎌했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로 접어들 때에 혹한의 날씨의 실외에서 대소변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만 스케치를 하고 돌아간 후에 더 자료조사로 해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역사인류학'으로 관심을 돌린 것인데.. '현장에서 연구를 행한다'라는 기본적인 자세와 인식을 갖추지 못했고, 그래서 하다 만 연구가 되어버렸다.

인류학자에게 연구실은 현장인데, 지금의 나는 연구실을 너무 오랫동안 떠나있다.  

 

다니엘 에버렛 저(윤영삼 번역), 『잠들면 안돼, 거기 뱀이 있어』, 2009년[2008년], 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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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저명한 평론가인 카사이 키요시(笠井清) 그리고 『永続敗戦論』[영속패전론]이라는 책 한권으로 일본지성계를 강타한 시라이 사토시(白井聡), 이 둘의 대담집인 『日本劣化論』[일본열화론]은 기존의 세계사 인식의 틀을 검토하며 일본의 근현대사를 재구성한다. 이로써 그들은 제국일본의 군국주의와 패전, 전후일본의 민주주의로 이어지는 일본 내 자국의 역사인식의 틀을 완전히 뒤집는다. 이 논의는 순전히 시라이 사토시의 "영속패전론"에서 촉발된 것이다. 『永続敗戦論』[영속패전론]은 2013년 3월 초판발행한 이래 2015년 현재 20쇄를 넘겨 출간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1977년생으로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사를 이렇게 자유자재로 사유할 수 있는 시라이 사토시의 천재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오사와 마사치, 사카이 나오키 등이 논했던 내셔널리즘에 관한 논의를 이렇게 간단하게 넓은 지평으로 펼쳐보이다니.. 본 글은 『日本劣化論』[일본열화론](筑摩書房, 2014년)의 4장과 5장의 내용을 요약정리한 것이다. (* 필자의 관점에서 독해하여 오사와 마사치와 사카이 나오키의 논의를 가져와 재구성한 것이므로 오해의 여지가 있음을 일러둔다. * 카사이 키요시와 시라이 사토시 각각의 논의를 구별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내용을 개략했다.)

 

  4장. 좌우 모두 점차 약화되는 이유

  아마도 20세기의 세계정세에 대한 '상식적인' 이해 속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파시즘 국가와 그들의 침략전쟁을 저지하여 세계평화를 지키려는 연합국 간의 충돌로 설명될 것이다. 1945년 태평양전쟁의 종결은 연합국의 승리, 곧 파시즘 국가의 패배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20세기의 세계전쟁이란 '선과 악의 대결'에 다름 아닌가? 칼 슈미트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이 '절멸전'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음을 역설했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결성된 국제연맹과 파리부전조약(不戰條約, 1928.8.27)은 전쟁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의 인식을 바꾸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전쟁은 "정당한 적"과의 절도 있는 싸움이 아니라, "악한 적" 즉 범죄국가의 절멸이라는 무제한적인 폭력을 뜻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예언대로 '악을 절멸시키는 선의 실현'이라는 구도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1945년 이윽고 파시즘 국가는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미소 냉전체제라는 새로운 세계질서가 구축되었다.

  일본의 전후민주주의는 제국일본이 패망하고 패전국일본이 냉전체제로 편입되면서 미국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수용한 결과이다. 그런데 왜 일본은 전후민주주의의 "55년체제"를 거치고서도 우경화 혹은 보수화되고 있는가? "헌법 9조"로 상징되는 이른바 평화헌법의 개헌논의가 갈수록 힘을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베정권은 파시스트의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호시탐탐 침략전쟁을 노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문제는 기존의 세계사적 인식의 틀로는 이 질문들에 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카이 나오키는 유럽의 내셔널리즘이란 국민국가 구축의 조건을 빌미로 식민지배를 정당화한 것에 다름 아니라고 했다. 다시 말해, 비서구에서 '서구화'란 국민국가(nation-state)를 구축하지 않으면 서구의 식민지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비서구의 '근대화'란 서구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1930년대 유럽과 아시아에서 등장한 파시즘은 유럽의 내셔널리즘의 공법질서에 의한 식민지 획득 과정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심지어 제국일본의 파시즘은 유럽을 넘어서려는 "근대의 초극"에 의해 지지되었다.    

  그래서 카사이 키요시는 근대 세계를 1930년대를 전후하여 '구세계'와 '신세계'로 나눈다. '구세계'는 '열강'이라 불리는 주권국가가 '비서구사회'를 분할하여 식민지를 건설한 근대국가의 세계를 가리키고, '신세계'는 이러한 세계질서를 돌파해서 새로운 '세계국가'의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대중적 혁명운동의 세계를 가리킨다. 이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은 '세계국가'를 석출하기 위한 이념/운동/국가 간의 전쟁이 된다.  '세계국가'를 목표로 하는 이념/운동/국가는 세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볼셰비즘이며 또 하나는 파시즘이고 마지막 하나는 아메리카니즘이다. 요컨대 제2차 세계대전은 이들 간의 각축전에 다름 아니다. 제국일본이 태평양전쟁에 돌입하면서 '동아신질서'라는 슬로건을 주창한 것은 자신이 바로 이 이념/운동/국가의 한 부류라는 것을 웅변한다. 

  역사적 가정으로서, 기타 잇키(北一輝)의 사상으로 대변되는 육군황도파의 쇼와(昭和) 유신세력이 2.26 사건(1936년 2월 26일 일본 육군의 황도파 청년장교들이 일으킨 반란사건)으로 권력을 잡았더라면, '동아신질서'는 육군통제파가 주도했던 '전시천황제 국가'와는 다른 모습으로 출현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제국일본에서 실현되지 못한 기타 잇키의 국가개조플랜은 패전 후 GHQ의 미군정기에 의해 실현된다. 기타 잇키의 '사회주의적' 정책은 GHQ에 의한 전후 일본의 개혁정책의 7할과 겹친다. 냉전체제의 한 축인 아메리카니즘이 패전국 일본과의 '공모'로 성립되었다고 한다면, 기타 잇키의 사상은 냉전체제에 질서적 기초를 상당부분 제공한 것과 같다.   

  냉전체제를 고찰하기에 앞서 유럽의 내셔널리즘의 현재를 진단하자면 한마디로 배외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다. 배외주의적 내셔널리즘은 국민국가의 고질병이다. 국민국가는 태생적으로 배외주의를 품고 있다. 유럽에서 이민자를 둘러싼 인종주의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반면 일본에서 배외주의적 내셔널리즘은 2000년대 이후에 출현한다. 유럽과 달리 일본은 배외주의의 경제적 근거가 희박하고, 전후 "55년체제"의 정치적 차원에서 민간우익집단의 활약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일본에서 배외주의는, 197,80년대의 고도성장기를 거쳐 1990년대 그 거품이 사라진 후 2000년대 신자유주의적인 격차사회화와 복지소멸과 함께 출현했다. 일본에서 "네토우요"(ネトウヨ)[넷우익]와 재특회로 대변되는 민간우익집단은 비정규직, 불완전 노동자의 상대적 박탈감이 '자이니치'에 대한 적의로 표출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민자가 전체 인구규모의 상당수에 이르고 본토인과 이민자와의 위계질서가 고착화된 유럽과 달리, 일본에서 극우인종주의는 1990년대 이후 '중류사회'가 급속히 붕괴되면서 '중류'로부터 탈락될 수 있다 혹은 탈락되었다는 공포감에서 비롯되었다.   

  나아가 "네토우요"의 니힐리즘, 달리 말해 정체성의 불안정화와 승인처의 부재는 냉전체제의 종언과 연관된다. 전후 일본에서 냉전체제는 국내의 정치지형을 떠받쳐왔다. 전후 일본에서 '보수(자민당)와 혁신(사회당)의 대립'이라는 구도는 미소 냉전체제에 의해 규정되었다. 자민당은 아메리카의, 사회당은 소련의 아젠다를 그대로 가져왔을 따름이며, 냉전체제에서 태평양의 최선전에 위치한 일본은 1952년 미군정기의 종결 이후에도 자신의 정치적 독자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시라이 사토시는 자민당이 아메리카의 괴뢰라고 불러도 무방하다고까지 말한다. 그는 사회당과 공산당 또한 애초부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실현할 힘도 의지도 없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패전 직후 사람들은 "제국일본에 속았다"고 했다. "속았다"는 감정은 책임지지 않겠다는 의지표명에 다름 아니며, 따라서 기만적이다. 시라이 사토시에 의하면, 이 감정은 대미종속구조로 패전국 일본이 재편되었음을 은폐한다. "헌법 9조"는 바로 이러한 대미종속구조에 대한 아메리카와 일본의 '합작품'이다. '국가 간의 전쟁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하는 국가는 범죄국가로서 처벌한다'는 국제규범은 사실상 그 집행의 주체로서 아메리카라는 세계국가를 전제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시대에서 아메리카와 소련은 반(半)세계국가로서 세계를 분할지배했다. 아메리카의 속국이었던 일본은 아메리카라는 (반)세계국가 하에서 전쟁을 포기해야했다. 이 속에서 "헌법 9조"는 미일안보조약을 상호보완한다. 

  이 은폐된 대미종속의 구조 하에서 냉전 그 자체를 "대타자"로 연명해온 일본의 정치구조는 냉전의 붕괴와 함께 그 실체 없음을 드러내었다. 

  냉전체제의 종언 이후 일본에서는 사회당, 공산당, 신좌익 할 것 없이 모든 좌익이 퇴조했다. 1960년대의 신좌익 운동을 원류로 하는 새로운 사회운동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유럽과 비교하면, 일본의 좌익은 파멸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쇠퇴한 유럽에서 여전히 좌익운동이 여전히 강력한 것을 볼 때, 일본의 좌익운동의 소멸은 마르크스주의의 쇠퇴 탓으로 돌리기도 어렵다.

  카사이 키요시는 일본의 좌익운동의 소멸의 이유로 우선 6,70년대의 경제호황의 "주어진 20년'과 그 이후의 "잃어버린 20년"에서 드러나는 경제구조와 고용구조의 단절적 변화를 지적한다. "주어진 20년"의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의 포디즘 자본주의의 황금기에서는 기업별 노동조합이 노사의 적대성을 완화하는 가운데 근대주의자의 이상이 실현되는 듯이 보였다. 그외 지역 커뮤니티, 조합, 종교단체 등은 재분배와 상호부조의 조직으로서 승인욕구의 기능을 담당해왔다. 

  한편, 20세기 마르크스주의로서 일본에 유입된 "볼셰비즘"은 후쿠모토 카즈오(福本和夫 1894~1983,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를 통해 "후쿠모토이즘"(福本イズム)으로 번안되어 사회운동의 기초사상으로 유통되어 '메이지국가의 근대성'을 속성재배했다. 메이지 국가의 근대성은 지식인들에게는 입신출세주의와 동일한 정신구조를 양산했는데, "후쿠모토이즘"은 바로 그 정신구조를 좌익업계에서 재생산한다. 루카치주의(과학적 사회주의)를 최고의 철학적 테제로 삼은 "후쿠모토이즘"은 일본의 초기사회주의운동의 흐름과 '결별'하고 사회주의를 마르크스주의로 교리화했으며 사회변혁의 이론에 도착적인 윤리주의를 이식했다. 그 결과 일본의 좌익은 19세기 사회주의가 갖는 이상사회에 대한 탐구로서의 종교성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래서 전시체제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오히려 누구보다도 먼저 천황제로 전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후쿠모토이즘"은 일본 좌익에 코민테른의 극좌 섹트주의 노선을 도입하여 도착적 윤리주의에 대한 저항조차도 봉쇄했다. 이를테면 유럽의 신좌익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정신분석과 프로이드 좌파조차 일본의 학생운동 내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상 유럽에서 인간의 진보에 대한 믿음, 즉 '문명'이라는 근대정신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붕괴되었으며, 러시아의 볼셰비즘으로 이양되었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을 "강건너 불구경"으로 보았던 일본의 지식세계에서는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에 무자각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사회주의 운동을 형애화된 당내투쟁(폭력이 수반된 당파투쟁)으로 구현할 수밖에 없었다. 1972년 아사마 산장 사건은 그 당연한 역사적 결과이다.

  1990년대 이후 "잃어버린 20년" 동안 고용구조가 비정규직화하고 노동조건이 악화되는 가운데 경제불황의 '불이익'이 세대 간 격차로 표출되었다. "잃어버린 세대"의 '하류사회화'는 좌로든 우로든 그들의 내발적인 동기를 약화시켰다. 결국 냉전 이후 상징적인 차원에서 좌우익의 정치적 판도는 해체되고 말았던 것이다.  

 

  5장. 반지성주의의 원류

  1989년 사회주의 붕괴를 기점으로 좌익과 우익이라는 정치적 이분법은 최종적으로 그 실체를 잃었다. 그러나 정치적 경향으로서 좌와 우의 대립구도는 여전히 유효하다. 현재 일본의 좌와 우의 정치적 스탠스는 반지성주의와 계몽주의(교양주의)의 대립으로 도식화될 수 있다. 

  반지성주의는 지성의 부재가 아니라 지성에 대한 증오이다. 반지성주의는 교양이나 지성의 대립물이 아니라 그 전복이다. 전후 일본에서 "교양"(敎養)은 "수양"(修養)과 대치되는 개념이었다. 패전 직후 대중일반의 학력 상승과 교양에의 욕구는 "시민적 주체"를 양산했다면, "잃어버린 20년" 동안 중류사회의 하류사회로의 몰락은 반지성주의의 계급적 기반을 재생산해왔다. 이제 대학의 세계에서 대학교수조차 생활상의 실리만을 취할 뿐 학문의 정점을 향해 자기형성을 계속해간다는 "교양"이라는 신념을 급속히 상실했다. 푸코와 데리다의 이론은 대학원생의 페이퍼의 활자장치로 전락되었고, 학계에서는 계량수법이 급속이 확산되는 가운데 개별적 삶과 그 내면에 대한 관심보다는 집단적 경향에 대한 분석만을 추구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대학사회에서 학문은 교양주의의 몰락과 함께 기술학으로 대체되었다. 교양주의 내지는 인문주의는 역사성에 의거하여 인간관을 상대화하는 존재의식이다. 그런데 일본의 대학은 점차 체계적인 지의 건축물을 세우기보다 유아적인 자기긍정에 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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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사와 마사치의 『自由という牢獄』[자유라는 감옥] 은 1998년부터 2002년까지 발표한 세 편의 논문과 책을 펴내면서 새롭게 쓴 한 편의 논문을 모은 것이다. 20세기의 리버럴리즘[자유주의]의 본질을 탐색하고 '자유'의 개념을 이론적으로 검토한 본서는 2015년에 출간되었다. 아마도 '신자유주의'의 "거침없는 행보"라는 전세계적인 흐름에 '자유주의'에 관한 오사와 마사치의 비판적 탐구가 다시금 주목받을만하기 때문이리라. 자유, 책임, 공공성, 진보 각각을 키워드로 하여 구성된 네 개의 장 중에서 '자유'를 논한 1장의 내용을 간추려보겠다. 

  1989년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1991년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는 냉전체제를 종결지었다. 세계체제론자인 이매뉴얼 월러스틴에 따르면, 냉전체제의 종결은 자유주의의 인류사적 승리를 뜻한다. 월러스틴은 1789년 프랑스혁명에 의해 상징되는 인류사의 전환점으로서 '근대'가 세 개의 이데올로기를 창출했다고 말한다. '근대사회'란 정상성으로부터 일정한 일탈을 통해 정상성을 유지하는 사회를 말하며, 이 정상성과 일탈―'변화의 상태화(常態化)'로 규정되는― 가운데 세 개의 대척점으로서 보수주의, 사회주의, 리버럴리즘이 탄생했다. 사회주의가 이 변화를 의식적으로 촉진하는 이데올로기라고 한다면, 보수주의는 그 제동을 거는 이데올로기이다. 리버릴리즘은 변화를 억제하지도 않으면서 설계하지도 않는 이데올로기이다. 프랑스혁명이 주창했던 '근대'의 원리는 개인의 자유와 개인 간의 평등이었다. 월러스틴은 '근대'의 인류사는 사회주의와 보수주의가 리버럴리즘으로 흡수되는 과정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보수주의는 계몽주의, 즉 리버럴한 보수주의로 변모해왔으며, 사회주의는 의회를 통해 개혁을 달성하는 리버럴한 사회주의로 정리되어왔다. 그리고 1990년을 전후하여 사회주의권이 몰락하고 냉전체제가 종결됨으로써 이 세 이데올로기 중 리버럴리즘이 최종적으로 승리했다는 것이다. 오사와 마사치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자유'의 개념을 논한다.

  오사와 마사치는 근대의 인류사에서 리버럴리즘이 최종적으로 승리했다는 월러스틴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비로소 '자유'의 개념의 곤란함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자유란 도대체 무엇인가? 1990년대 이후 '애프터 리버럴리즘'의 시대에 이르렀다는 그의 진단은 인류가 속박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닌 자유 그 자체에서 자유를 규명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음을 말해준다. 

  오사와에 따르면, 근대의 인류사에서 자유의 이념은 사회 구성원들의 동일성(아이덴티티)을 환원·해소해버리는 상태―원시상태―에서 각 구성원들이 사회의 역할을 선택하고 배분하는 궁극의 메타적인 관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의 이념은 이제까지 확고한 지위를 유지해왔다. 그것은 에스노 내셔널리즘(민족주의·민족공동체)과 그에 깊이 연동된 종교적 원리주의에 의해 지지되어왔다. 다시 말해, 리버럴리즘은 개인 간의 차이에 대한 무관심을 특징으로 하며 그 무관심으로부터 각 개인 간의 평등한 추상적 자유를 이끌어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의 '초기상태'에서 선택의 전제로서 공통의 가치를 지닌 공동체가 상정될 수 있는 것은 그 공동체들 간의 가치와 목표의 차이를 승인하는 에스노 내셔널리즘이 상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셔널리즘은 리버럴리즘으로서는 정당화되지 않는 태도를 요청한다. 

  한편 오사와는 6,70년대에 제기된 환경문제와 생태주의에 주목한다. 이산화탄소 배출 등에 의한 지구온난화, 공해, 오염문제의 전인류적 제기는 무한한 자유의 결과이다. 다시 말해, 지구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광의의 리버럴리즘의 결과이다. 그리고 1990년대 지구환경문제의 급부상은 생태주의가 사회주의권의 몰락 후 사회주의의 공석을 차지하며 리버럴리즘의 새로운 라이벌로 등장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자유'가 자신의 외부에 '속박'을 두는 것은 자유 그 자체가 속박을 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존 로크에 따르면, 노동의 산물에 대한 소유권이 정당화되는 것은 그 노동하는 신체가 개인에 속한다는 것이 자명한 사실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개인은 자기 신체의 소유자로서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을 행할 수 있다. 신체야말로 개인의 소유물이다. 신체가 사적으로 소유된다면, 그 신체의 죽음 역시 자기결정권 내에 속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장기매매와 성매매, 자살 등과 같은 자기결정권이 수반된 신체의 '사용'에 대해 공리적인 전제를 단서로 달아두고자 한다. 이때 자기의 신체는 자기에 완전히 소속되지 않을 뿐더러 '타자'의 시선―공리적인 전체―으로 응시된다. 이 역설을 오사와 마사치는 '제3자의 심급'을 통해 풀어내고자 한다. 

  '제3자의 심급'이란 자유로운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타자의 승인이 불가피함을 가리킨다. 인간은 어떻게 책임을 지는 주체로 성숙해가는가? 한 인간이 인생의 시발점에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에는 책임이 없다'는 "이노센스"의 상태에 머물러서는 그 후의 인과적 조건으로 부여되는 후속의 행위에 대해서도 책임을 질 수 없다. 나의 탄생은 나의 선택이 아닌데 나의 탄생의 후속적 행위가 나의 선택일 수 있겠는가? 이렇듯 인간은 본원적으로 수동적이다. 여기서 자유로운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이노센스"의 상태에서 책임지는 주체로 역전되어야 한다.  

  자, 이 역전의 순간은 부모-자식관계에서 포착되고, 양부모-자식관계에서 극적으로 표출된다. 오사와는 독일의 어느 정신과 의사의 정신분석집에서 읽고 쓰지를 못해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온 "프레드릭"이라는 일곱살 된 아이의 사례를 인용한다. 이 아이는 입양된 후 자신의 이름뿐만 아니라 입양되기 전의 자신의 이름 그 어느 것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의사는 이 아이를 바라보지 않고 허공에 대고 혹은 책상 밑에 대고 아이의 입양되기 전의 이름을 불러본다. "아르만, 아르만.." 그러자 그 아이는 비로소 자신의 입양되기 전 이름의 호명에 반응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아이가 자신의 외부로부터 자신이 승인됨에 따라 자신을 긍정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이가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이 아닌 허공에서 불리는 이름에 반응한 것은 자신을 승인하는 타자가 마치 영화 밖에서 들려오는 나레이션처럼 자신의 시공간 밖에 있는 타자이어야했기 때문이다. 오사와는 주체의 승인은 초월적이며 추상적인 '제3자의 심급'을 요청한다고 말한다. 이 '제3자의 심급'은 '자신'의 경험적인 공간 어디에도 존재의 장을 확보할 수 없는 타자이어야 하며, 이에 따라 '자기' 그 자체의 내적인 계기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타자이어야 한다. 즉 '제3자의 심급'은 '자기'의 내적인 타자성을 탈환함으로써 존립하며, '제3자의 심급'에 의해 인간은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주체로 성숙한다.  

  이와 같이 자유는 타자로부터의 구속을 조건으로 한다. 구속 없는 상태야말로―즉 완전한 자유야말로―자유의 부정이다. 인간은 자유의 무한한 확장에서 참을 수 없는 구속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아무런 선택지도 없다면 아무 것도 선택할 수 없다. 순수한 자유는 역설적으로 최악의 구속을 초래한다. 리버럴리즘은 초월적 타자(신)에 의존하지 않는 자율적인 의지를 지향하지만, 그 지향은 언제나 해방의 수단으로서 에스노 내셔널리즘 혹은 생태주의로 귀속된다. 에스노 내셔널리즘이 문화적으로 구성된 상상의 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리버럴리즘에 의해 역사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감각되는 것은 그것이 주체의 승인처로서 선택되어야 할 대상이자 선택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리버럴리즘은 언제나 자신의 라이벌을 필요로 하며, 그 라이벌을 불가결한 동지로 전환한다. 

 

大澤真幸『自由という牢獄』岩波書店、2015年3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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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히토츠바시대학의 연구원으로 있을 때, 누군가 내게 시라이 사토시의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괴물같은 책"이라면서. 그래서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 말 그대로 '훑어보았다". 괴물은 무슨..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국가와 혁명? 나 대학 때 이골이 나도록 듣고 보았던 것들이다. 2학년이 끝나갈 즈음, 선배들은 학생회활동과 시위에 열심인 사람들 중에서 조직운동을 할 사람들을 선별하여 합숙세미나를 했다. 레닌의 혁명론과 국가론은 운동과 조직에 대한 충성도를 가늠하는 리트머스임과 동시에 조직운동원의 이념적 잣대였다. 그래서 레닌의 책들은 조직운동을 정리하고 조직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처분대상 1호이기도 했다 . 내게 레닌은 너무나도 익숙하다. 내게 레닌은 지리멸렬한 날들의 한가운데에서 희망없는 부채의식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레닌을 다시 마주할 이유가 무언가. 책의 서두와 1부를 읽었다.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의 레닌의 표상 그리고 레닌론에 관한 선행연구를 논한다. 무언가 아련하면서도 익숙한 레닌.. 재밌네.. 그리고 책을 덮었다. 

  최근 페친의 권유로 가입한 "소련 역사 공부 모임"이라는 페이지에 레닌의 현재적 의미를 묻는 글이 올라왔다. 이 책을 권했다. 이 책이 떠올랐을 뿐이다. 그런데 댓글로 말이 오가는 중에 권유한 자의 책임의식때문인지 괜한 오지랖이 발동해서인지 나는 이 책의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다시 읽었다. 아니 끝까지 읽었다.

  시라이 사토시는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히토츠바시대학에서 석박사과정을 마쳤다. 이 책은 2007년도에 나온 것이다. 아무도 레닌을 돌아보지 않을 때.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리고 2013년 시라이 사토시는 일본의 사회사상계를 평정했다, 『永続敗戦論戦後日本核心』[영속패전론: 전후일본의 핵심]이라는 단 한권의 저술로. 괴물이군.

  <미완의 레닌>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의 개요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이고, 2부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으로 규명해낸다. 레닌이라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프로이트의 의식/무의식의 인류사의 틀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3부는 <국가와 혁명>을 통해 '힘'의 정치를 논한다. 이제서야 나는 이 책에 놀란다. "괴물같은 책"이군.

  아시다시피 레닌은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제국주의 전쟁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으로 전화할 것'을 주창하며, 잘 나가던 러시아의 사회민주노동당을 분열시킨다(맨셰비키와 볼셰비키). 농민과 노동자 등의 약자의 편에 섰던 러시아의 '양심적이고 전통적인' 인텔리겐차들을 떨구어내고 경제주의자, 조합주의자 등의 개량주의자들을 축출한다. 이 와중에 당 내부의 분란에 진저리치던 유대인 분트가 집단 탈당한다. 예전에 나는 러시아혁명사를 공부하면서 이 부분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때 선배들은 지식인의 브나르도 운동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고 개량주의의 비과학성을 논했을 것이다. 이를 준거로 레닌의 당내투쟁의 정당성을 역설했을 것이다. 1905년 당내 투쟁에서 마키아벨리즘의 화신과도 같았던 볼셰비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글이 바로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핵심은 '계급의식의 외부주입설'이다. 자연발생적인 노동운동과 농민반란으로는 혁명을 이룰 수 없다. 그래서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민주집중제의 조직원리를 갖는 전위정당이 필요하다.

  시라이 사토시는 이 '사상의 외부성'을 프로이트의 의식/무의식의 정신분석학으로 설명해낸다. 레닌(1870~1924)과 프로이트(1856~1939)는 개인적으로 교류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입장이 전혀 다르다. 다만 이 둘은 같은 시대를 살았을 뿐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를 통해 레닌을 분석하고 다시 분석해낸 레닌에 의해 프로이트를 해석하는 이 방법론적 비교연구는 누구 누구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등의 지성사의 재구성과는 거리가 멀다. 한 시대의 인류사, 자본주의의 모순을 꿰뚫어본 사상가로서 레닌과 프로이트를 위치지는 것이며, 그들을 통해 '근대'를 논파해내는 것이다.

  이 두 사상가의 문제의식은 어디에서 연원하는가? 레닌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를 해방시키고자 했고,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억압을 논했다. 이 두 사상가는 궁극적으로 '억압된 자의 해방'을 겨냥한다. 여기서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독해해보자. 레닌은 '자연발생적인' 노동자투쟁과 농민반란으로는 혁명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다. 왜 그러한가? 자본주의라는 '근대'는 정치로부터 경제를 분리해내며, 계급적·정치적 의식을 경제투쟁의 외부로 밀어낸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내발적 투쟁은 경제주의·조합주의에 머물며 상대적으로 착취를 완화하는 투쟁으로 귀결되고 만다.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직격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객관화'('현실화')해야 하는데, 이 '객관화'는 경제투쟁으로 해소되는 욕망에 의거해서는 다다를 수 없고 의식의 영역에서는 알 수 없는 무의식의 영역에서 일종의 이데올로기의 외부성으로 주입되어야 한다. 그런데 시라이 사토시가 여기서 논의를 멈추었다면, 그의 논의는 근대정당론의 저차원적인 아류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객관화'를 '죽음의 충동'으로 밀어붙인다.

  막스 베버가 즉물적인 다신교에 비해 일신교인 유대교가 인류의 구원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외부성을  강하게 견지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일신교가 감각성을 초월하는 정신성의 승리를 담보하기 때문이다. 즉 '원부'(原父)를 살해하고 근친상간을 금기하여 족외혼이라는 사회적 규범을 만들내고 '원부'와 동일시된 토템동물을 숭배함으로써 다시는 원부살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그 욕망을 단념한 인류의 다신교적 신앙으로는 그 살해의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없다. 다만 무의식적인 '죽음의 충동'(공격충동)으로 억압될 뿐이며 신경증적인 강박반복으로 회귀될 뿐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예수는 아버지의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아들의 욕망의 재현이며, 그렇게 아버지가 된 아들을 또 다시 살해함으로써 성립된 기독교는 원부살해의 반복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는 유대교라는 일신교에서 토테미즘으로의 퇴행을 뜻한다. 무의식은 의식되지 않는 의식이 아니라 다만 의식으로는 예측되지 않는 부지불식간 분출하는 에너지라는 점에서 의식의 외부에 있다. 그리고 일신교는 이 충동의 에너지를 신경증적으로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승화시킨다'는 점에서 '감각성을 초월하는 정신성의 승리'이다. 다시 말해 일신교는 '죽음의 충동'의 방향을 전환시킨다. 

  레닌의 혁명은 자본주의가 외부에서 주입한 '죽음의 충동'(일상적 착취에 의한 보편적 트라우마)을 밖으로 투사하는 것이다. 레닌은 이를 위해 우상(토템이라는 다신교: 경제주의적 보상) 숭배를 금한다. 우리가 타자의 사랑을 상실할 때 느끼는 불안은 우리앞에 세워둔, 우리와 동일시된 토템에 대한 심성에 다름 아니다. 그 토템은 우월한 타자이기도 하고 우리 내면의 초자아에 대한 자아 자신의 공격충동의 대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토템의 심성에서 사랑은 죽음과 양면을 이룬다. 이 주체화의 문제에서 레닌은 일신교의 이미지, 즉 강박적으로 '죽음의 충동'을 '쾌감원칙의 피안'으로 밀어내는 일신교의 이미지를 빌어 '죽음의 충동'의 반전을 개시한다.

  시라이 사토시는 3부에서 <국가와 혁명>을 통해 '죽음의 충동'을 둘러싼 힘의 동학을 논한다. 자본주의의 계급 간의 직접적인 대립과 그 모순을 은폐하는 국가(이런 의미에서 국가는 본질적으로 법치국가를 지향하는 '중성국가'이다), 그러나 그 근대국가는 계급적 대립의 힘의 총량과 방향에 구속된다. 다시 말해 근대국가의 법치는 부르조아 계급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도 동등하게 적용되면서도, 사유재산의 보호와 시장경제의 원리의 보장이라는 부르조아의 계급적 이해에 기반한다. 그러므로 국가의 힘―"공권력"―은 계급관계에서 역사적으로 산출되는 '특수한 힘'이다. 레닌은 다수에 의한 다수의 무장에 이르러서야 '보편적 힘'이 출현한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근대국가가 부르조아 계급의 이익에 충실한 나머지 국민국가라는 개념적 규정을 스스로 부정하면서 제국주의화로 나아갈 때에 그와 동시에 전인민을 무장시킨다("총동원체제"). 레닌이 제국주의 전쟁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으로 전화하자고 한 것은 '특수한 힘'에서 '보편적 힘'으로 양질변화를 두고 한 말이다. 레닌에게 혁명의 힘―'죽음의 충동'이라는 에너지―은 이미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혁명의 현실성"이며, <무엇을 할 것인가>와 <국가와 혁명>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레닌 사상의 핵심이다.      

  레닌의 혁명으로 건설된 사회주의 국가는 이미 지구상에 없다. 이제 자본주의는, 시라이 사토시가 표현한 바에 따르면, 지표면을 장악했다. 그러나 지구상에 자본주의가 전면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외부성, 즉 또 다른 사회구축의 원리가 강박적으로 도래한다면, 레닌의 "혁명의 현실성"은 '죽음의 충동'처럼, 현재에 투사된 미래처럼 강박적으로 반복될 것이다. 그렇게 '죽음의 충동'을 은폐하고 억압하는, 정치가 품고있는 거대한 비밀은 인류를 광기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인류는 "말과 사물의 일치"라는 자연상태―"자유"―를 진짜 현실로 늘 탐구하는 것이다. 

 

白井聡, 2007,未完のレーニン<>思想』, 講談社.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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