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저명한 평론가인 카사이 키요시(笠井清) 그리고 『永続敗戦論』[영속패전론]이라는 책 한권으로 일본지성계를 강타한 시라이 사토시(白井聡), 이 둘의 대담집인 『日本劣化論』[일본열화론]은 기존의 세계사 인식의 틀을 검토하며 일본의 근현대사를 재구성한다. 이로써 그들은 제국일본의 군국주의와 패전, 전후일본의 민주주의로 이어지는 일본 내 자국의 역사인식의 틀을 완전히 뒤집는다. 이 논의는 순전히 시라이 사토시의 "영속패전론"에서 촉발된 것이다. 『永続敗戦論』[영속패전론]은 2013년 3월 초판발행한 이래 2015년 현재 20쇄를 넘겨 출간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1977년생으로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사를 이렇게 자유자재로 사유할 수 있는 시라이 사토시의 천재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오사와 마사치, 사카이 나오키 등이 논했던 내셔널리즘에 관한 논의를 이렇게 간단하게 넓은 지평으로 펼쳐보이다니.. 본 글은 『日本劣化論』[일본열화론](筑摩書房, 2014년)의 4장과 5장의 내용을 요약정리한 것이다. (* 필자의 관점에서 독해하여 오사와 마사치와 사카이 나오키의 논의를 가져와 재구성한 것이므로 오해의 여지가 있음을 일러둔다. * 카사이 키요시와 시라이 사토시 각각의 논의를 구별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내용을 개략했다.)

 

  4장. 좌우 모두 점차 약화되는 이유

  아마도 20세기의 세계정세에 대한 '상식적인' 이해 속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파시즘 국가와 그들의 침략전쟁을 저지하여 세계평화를 지키려는 연합국 간의 충돌로 설명될 것이다. 1945년 태평양전쟁의 종결은 연합국의 승리, 곧 파시즘 국가의 패배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20세기의 세계전쟁이란 '선과 악의 대결'에 다름 아닌가? 칼 슈미트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이 '절멸전'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음을 역설했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결성된 국제연맹과 파리부전조약(不戰條約, 1928.8.27)은 전쟁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의 인식을 바꾸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전쟁은 "정당한 적"과의 절도 있는 싸움이 아니라, "악한 적" 즉 범죄국가의 절멸이라는 무제한적인 폭력을 뜻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예언대로 '악을 절멸시키는 선의 실현'이라는 구도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1945년 이윽고 파시즘 국가는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미소 냉전체제라는 새로운 세계질서가 구축되었다.

  일본의 전후민주주의는 제국일본이 패망하고 패전국일본이 냉전체제로 편입되면서 미국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수용한 결과이다. 그런데 왜 일본은 전후민주주의의 "55년체제"를 거치고서도 우경화 혹은 보수화되고 있는가? "헌법 9조"로 상징되는 이른바 평화헌법의 개헌논의가 갈수록 힘을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베정권은 파시스트의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호시탐탐 침략전쟁을 노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문제는 기존의 세계사적 인식의 틀로는 이 질문들에 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카이 나오키는 유럽의 내셔널리즘이란 국민국가 구축의 조건을 빌미로 식민지배를 정당화한 것에 다름 아니라고 했다. 다시 말해, 비서구에서 '서구화'란 국민국가(nation-state)를 구축하지 않으면 서구의 식민지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비서구의 '근대화'란 서구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1930년대 유럽과 아시아에서 등장한 파시즘은 유럽의 내셔널리즘의 공법질서에 의한 식민지 획득 과정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심지어 제국일본의 파시즘은 유럽을 넘어서려는 "근대의 초극"에 의해 지지되었다.    

  그래서 카사이 키요시는 근대 세계를 1930년대를 전후하여 '구세계'와 '신세계'로 나눈다. '구세계'는 '열강'이라 불리는 주권국가가 '비서구사회'를 분할하여 식민지를 건설한 근대국가의 세계를 가리키고, '신세계'는 이러한 세계질서를 돌파해서 새로운 '세계국가'의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대중적 혁명운동의 세계를 가리킨다. 이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은 '세계국가'를 석출하기 위한 이념/운동/국가 간의 전쟁이 된다.  '세계국가'를 목표로 하는 이념/운동/국가는 세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볼셰비즘이며 또 하나는 파시즘이고 마지막 하나는 아메리카니즘이다. 요컨대 제2차 세계대전은 이들 간의 각축전에 다름 아니다. 제국일본이 태평양전쟁에 돌입하면서 '동아신질서'라는 슬로건을 주창한 것은 자신이 바로 이 이념/운동/국가의 한 부류라는 것을 웅변한다. 

  역사적 가정으로서, 기타 잇키(北一輝)의 사상으로 대변되는 육군황도파의 쇼와(昭和) 유신세력이 2.26 사건(1936년 2월 26일 일본 육군의 황도파 청년장교들이 일으킨 반란사건)으로 권력을 잡았더라면, '동아신질서'는 육군통제파가 주도했던 '전시천황제 국가'와는 다른 모습으로 출현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제국일본에서 실현되지 못한 기타 잇키의 국가개조플랜은 패전 후 GHQ의 미군정기에 의해 실현된다. 기타 잇키의 '사회주의적' 정책은 GHQ에 의한 전후 일본의 개혁정책의 7할과 겹친다. 냉전체제의 한 축인 아메리카니즘이 패전국 일본과의 '공모'로 성립되었다고 한다면, 기타 잇키의 사상은 냉전체제에 질서적 기초를 상당부분 제공한 것과 같다.   

  냉전체제를 고찰하기에 앞서 유럽의 내셔널리즘의 현재를 진단하자면 한마디로 배외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다. 배외주의적 내셔널리즘은 국민국가의 고질병이다. 국민국가는 태생적으로 배외주의를 품고 있다. 유럽에서 이민자를 둘러싼 인종주의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반면 일본에서 배외주의적 내셔널리즘은 2000년대 이후에 출현한다. 유럽과 달리 일본은 배외주의의 경제적 근거가 희박하고, 전후 "55년체제"의 정치적 차원에서 민간우익집단의 활약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일본에서 배외주의는, 197,80년대의 고도성장기를 거쳐 1990년대 그 거품이 사라진 후 2000년대 신자유주의적인 격차사회화와 복지소멸과 함께 출현했다. 일본에서 "네토우요"(ネトウヨ)[넷우익]와 재특회로 대변되는 민간우익집단은 비정규직, 불완전 노동자의 상대적 박탈감이 '자이니치'에 대한 적의로 표출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민자가 전체 인구규모의 상당수에 이르고 본토인과 이민자와의 위계질서가 고착화된 유럽과 달리, 일본에서 극우인종주의는 1990년대 이후 '중류사회'가 급속히 붕괴되면서 '중류'로부터 탈락될 수 있다 혹은 탈락되었다는 공포감에서 비롯되었다.   

  나아가 "네토우요"의 니힐리즘, 달리 말해 정체성의 불안정화와 승인처의 부재는 냉전체제의 종언과 연관된다. 전후 일본에서 냉전체제는 국내의 정치지형을 떠받쳐왔다. 전후 일본에서 '보수(자민당)와 혁신(사회당)의 대립'이라는 구도는 미소 냉전체제에 의해 규정되었다. 자민당은 아메리카의, 사회당은 소련의 아젠다를 그대로 가져왔을 따름이며, 냉전체제에서 태평양의 최선전에 위치한 일본은 1952년 미군정기의 종결 이후에도 자신의 정치적 독자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시라이 사토시는 자민당이 아메리카의 괴뢰라고 불러도 무방하다고까지 말한다. 그는 사회당과 공산당 또한 애초부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실현할 힘도 의지도 없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패전 직후 사람들은 "제국일본에 속았다"고 했다. "속았다"는 감정은 책임지지 않겠다는 의지표명에 다름 아니며, 따라서 기만적이다. 시라이 사토시에 의하면, 이 감정은 대미종속구조로 패전국 일본이 재편되었음을 은폐한다. "헌법 9조"는 바로 이러한 대미종속구조에 대한 아메리카와 일본의 '합작품'이다. '국가 간의 전쟁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하는 국가는 범죄국가로서 처벌한다'는 국제규범은 사실상 그 집행의 주체로서 아메리카라는 세계국가를 전제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시대에서 아메리카와 소련은 반(半)세계국가로서 세계를 분할지배했다. 아메리카의 속국이었던 일본은 아메리카라는 (반)세계국가 하에서 전쟁을 포기해야했다. 이 속에서 "헌법 9조"는 미일안보조약을 상호보완한다. 

  이 은폐된 대미종속의 구조 하에서 냉전 그 자체를 "대타자"로 연명해온 일본의 정치구조는 냉전의 붕괴와 함께 그 실체 없음을 드러내었다. 

  냉전체제의 종언 이후 일본에서는 사회당, 공산당, 신좌익 할 것 없이 모든 좌익이 퇴조했다. 1960년대의 신좌익 운동을 원류로 하는 새로운 사회운동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유럽과 비교하면, 일본의 좌익은 파멸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쇠퇴한 유럽에서 여전히 좌익운동이 여전히 강력한 것을 볼 때, 일본의 좌익운동의 소멸은 마르크스주의의 쇠퇴 탓으로 돌리기도 어렵다.

  카사이 키요시는 일본의 좌익운동의 소멸의 이유로 우선 6,70년대의 경제호황의 "주어진 20년'과 그 이후의 "잃어버린 20년"에서 드러나는 경제구조와 고용구조의 단절적 변화를 지적한다. "주어진 20년"의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의 포디즘 자본주의의 황금기에서는 기업별 노동조합이 노사의 적대성을 완화하는 가운데 근대주의자의 이상이 실현되는 듯이 보였다. 그외 지역 커뮤니티, 조합, 종교단체 등은 재분배와 상호부조의 조직으로서 승인욕구의 기능을 담당해왔다. 

  한편, 20세기 마르크스주의로서 일본에 유입된 "볼셰비즘"은 후쿠모토 카즈오(福本和夫 1894~1983,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를 통해 "후쿠모토이즘"(福本イズム)으로 번안되어 사회운동의 기초사상으로 유통되어 '메이지국가의 근대성'을 속성재배했다. 메이지 국가의 근대성은 지식인들에게는 입신출세주의와 동일한 정신구조를 양산했는데, "후쿠모토이즘"은 바로 그 정신구조를 좌익업계에서 재생산한다. 루카치주의(과학적 사회주의)를 최고의 철학적 테제로 삼은 "후쿠모토이즘"은 일본의 초기사회주의운동의 흐름과 '결별'하고 사회주의를 마르크스주의로 교리화했으며 사회변혁의 이론에 도착적인 윤리주의를 이식했다. 그 결과 일본의 좌익은 19세기 사회주의가 갖는 이상사회에 대한 탐구로서의 종교성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래서 전시체제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오히려 누구보다도 먼저 천황제로 전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후쿠모토이즘"은 일본 좌익에 코민테른의 극좌 섹트주의 노선을 도입하여 도착적 윤리주의에 대한 저항조차도 봉쇄했다. 이를테면 유럽의 신좌익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정신분석과 프로이드 좌파조차 일본의 학생운동 내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상 유럽에서 인간의 진보에 대한 믿음, 즉 '문명'이라는 근대정신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붕괴되었으며, 러시아의 볼셰비즘으로 이양되었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을 "강건너 불구경"으로 보았던 일본의 지식세계에서는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에 무자각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사회주의 운동을 형애화된 당내투쟁(폭력이 수반된 당파투쟁)으로 구현할 수밖에 없었다. 1972년 아사마 산장 사건은 그 당연한 역사적 결과이다.

  1990년대 이후 "잃어버린 20년" 동안 고용구조가 비정규직화하고 노동조건이 악화되는 가운데 경제불황의 '불이익'이 세대 간 격차로 표출되었다. "잃어버린 세대"의 '하류사회화'는 좌로든 우로든 그들의 내발적인 동기를 약화시켰다. 결국 냉전 이후 상징적인 차원에서 좌우익의 정치적 판도는 해체되고 말았던 것이다.  

 

  5장. 반지성주의의 원류

  1989년 사회주의 붕괴를 기점으로 좌익과 우익이라는 정치적 이분법은 최종적으로 그 실체를 잃었다. 그러나 정치적 경향으로서 좌와 우의 대립구도는 여전히 유효하다. 현재 일본의 좌와 우의 정치적 스탠스는 반지성주의와 계몽주의(교양주의)의 대립으로 도식화될 수 있다. 

  반지성주의는 지성의 부재가 아니라 지성에 대한 증오이다. 반지성주의는 교양이나 지성의 대립물이 아니라 그 전복이다. 전후 일본에서 "교양"(敎養)은 "수양"(修養)과 대치되는 개념이었다. 패전 직후 대중일반의 학력 상승과 교양에의 욕구는 "시민적 주체"를 양산했다면, "잃어버린 20년" 동안 중류사회의 하류사회로의 몰락은 반지성주의의 계급적 기반을 재생산해왔다. 이제 대학의 세계에서 대학교수조차 생활상의 실리만을 취할 뿐 학문의 정점을 향해 자기형성을 계속해간다는 "교양"이라는 신념을 급속히 상실했다. 푸코와 데리다의 이론은 대학원생의 페이퍼의 활자장치로 전락되었고, 학계에서는 계량수법이 급속이 확산되는 가운데 개별적 삶과 그 내면에 대한 관심보다는 집단적 경향에 대한 분석만을 추구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대학사회에서 학문은 교양주의의 몰락과 함께 기술학으로 대체되었다. 교양주의 내지는 인문주의는 역사성에 의거하여 인간관을 상대화하는 존재의식이다. 그런데 일본의 대학은 점차 체계적인 지의 건축물을 세우기보다 유아적인 자기긍정에 안주하고 있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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