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히토츠바시대학의 연구원으로 있을 때, 누군가 내게 시라이 사토시의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괴물같은 책"이라면서. 그래서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 말 그대로 '훑어보았다". 괴물은 무슨..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국가와 혁명? 나 대학 때 이골이 나도록 듣고 보았던 것들이다. 2학년이 끝나갈 즈음, 선배들은 학생회활동과 시위에 열심인 사람들 중에서 조직운동을 할 사람들을 선별하여 합숙세미나를 했다. 레닌의 혁명론과 국가론은 운동과 조직에 대한 충성도를 가늠하는 리트머스임과 동시에 조직운동원의 이념적 잣대였다. 그래서 레닌의 책들은 조직운동을 정리하고 조직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처분대상 1호이기도 했다 . 내게 레닌은 너무나도 익숙하다. 내게 레닌은 지리멸렬한 날들의 한가운데에서 희망없는 부채의식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레닌을 다시 마주할 이유가 무언가. 책의 서두와 1부를 읽었다.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의 레닌의 표상 그리고 레닌론에 관한 선행연구를 논한다. 무언가 아련하면서도 익숙한 레닌.. 재밌네.. 그리고 책을 덮었다. 

  최근 페친의 권유로 가입한 "소련 역사 공부 모임"이라는 페이지에 레닌의 현재적 의미를 묻는 글이 올라왔다. 이 책을 권했다. 이 책이 떠올랐을 뿐이다. 그런데 댓글로 말이 오가는 중에 권유한 자의 책임의식때문인지 괜한 오지랖이 발동해서인지 나는 이 책의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다시 읽었다. 아니 끝까지 읽었다.

  시라이 사토시는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히토츠바시대학에서 석박사과정을 마쳤다. 이 책은 2007년도에 나온 것이다. 아무도 레닌을 돌아보지 않을 때.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리고 2013년 시라이 사토시는 일본의 사회사상계를 평정했다, 『永続敗戦論戦後日本核心』[영속패전론: 전후일본의 핵심]이라는 단 한권의 저술로. 괴물이군.

  <미완의 레닌>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의 개요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이고, 2부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으로 규명해낸다. 레닌이라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프로이트의 의식/무의식의 인류사의 틀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3부는 <국가와 혁명>을 통해 '힘'의 정치를 논한다. 이제서야 나는 이 책에 놀란다. "괴물같은 책"이군.

  아시다시피 레닌은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제국주의 전쟁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으로 전화할 것'을 주창하며, 잘 나가던 러시아의 사회민주노동당을 분열시킨다(맨셰비키와 볼셰비키). 농민과 노동자 등의 약자의 편에 섰던 러시아의 '양심적이고 전통적인' 인텔리겐차들을 떨구어내고 경제주의자, 조합주의자 등의 개량주의자들을 축출한다. 이 와중에 당 내부의 분란에 진저리치던 유대인 분트가 집단 탈당한다. 예전에 나는 러시아혁명사를 공부하면서 이 부분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때 선배들은 지식인의 브나르도 운동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고 개량주의의 비과학성을 논했을 것이다. 이를 준거로 레닌의 당내투쟁의 정당성을 역설했을 것이다. 1905년 당내 투쟁에서 마키아벨리즘의 화신과도 같았던 볼셰비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글이 바로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핵심은 '계급의식의 외부주입설'이다. 자연발생적인 노동운동과 농민반란으로는 혁명을 이룰 수 없다. 그래서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민주집중제의 조직원리를 갖는 전위정당이 필요하다.

  시라이 사토시는 이 '사상의 외부성'을 프로이트의 의식/무의식의 정신분석학으로 설명해낸다. 레닌(1870~1924)과 프로이트(1856~1939)는 개인적으로 교류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입장이 전혀 다르다. 다만 이 둘은 같은 시대를 살았을 뿐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를 통해 레닌을 분석하고 다시 분석해낸 레닌에 의해 프로이트를 해석하는 이 방법론적 비교연구는 누구 누구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등의 지성사의 재구성과는 거리가 멀다. 한 시대의 인류사, 자본주의의 모순을 꿰뚫어본 사상가로서 레닌과 프로이트를 위치지는 것이며, 그들을 통해 '근대'를 논파해내는 것이다.

  이 두 사상가의 문제의식은 어디에서 연원하는가? 레닌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를 해방시키고자 했고,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억압을 논했다. 이 두 사상가는 궁극적으로 '억압된 자의 해방'을 겨냥한다. 여기서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독해해보자. 레닌은 '자연발생적인' 노동자투쟁과 농민반란으로는 혁명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다. 왜 그러한가? 자본주의라는 '근대'는 정치로부터 경제를 분리해내며, 계급적·정치적 의식을 경제투쟁의 외부로 밀어낸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내발적 투쟁은 경제주의·조합주의에 머물며 상대적으로 착취를 완화하는 투쟁으로 귀결되고 만다.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직격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객관화'('현실화')해야 하는데, 이 '객관화'는 경제투쟁으로 해소되는 욕망에 의거해서는 다다를 수 없고 의식의 영역에서는 알 수 없는 무의식의 영역에서 일종의 이데올로기의 외부성으로 주입되어야 한다. 그런데 시라이 사토시가 여기서 논의를 멈추었다면, 그의 논의는 근대정당론의 저차원적인 아류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객관화'를 '죽음의 충동'으로 밀어붙인다.

  막스 베버가 즉물적인 다신교에 비해 일신교인 유대교가 인류의 구원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외부성을  강하게 견지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일신교가 감각성을 초월하는 정신성의 승리를 담보하기 때문이다. 즉 '원부'(原父)를 살해하고 근친상간을 금기하여 족외혼이라는 사회적 규범을 만들내고 '원부'와 동일시된 토템동물을 숭배함으로써 다시는 원부살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그 욕망을 단념한 인류의 다신교적 신앙으로는 그 살해의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없다. 다만 무의식적인 '죽음의 충동'(공격충동)으로 억압될 뿐이며 신경증적인 강박반복으로 회귀될 뿐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예수는 아버지의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아들의 욕망의 재현이며, 그렇게 아버지가 된 아들을 또 다시 살해함으로써 성립된 기독교는 원부살해의 반복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기독교는 유대교라는 일신교에서 토테미즘으로의 퇴행을 뜻한다. 무의식은 의식되지 않는 의식이 아니라 다만 의식으로는 예측되지 않는 부지불식간 분출하는 에너지라는 점에서 의식의 외부에 있다. 그리고 일신교는 이 충동의 에너지를 신경증적으로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승화시킨다'는 점에서 '감각성을 초월하는 정신성의 승리'이다. 다시 말해 일신교는 '죽음의 충동'의 방향을 전환시킨다. 

  레닌의 혁명은 자본주의가 외부에서 주입한 '죽음의 충동'(일상적 착취에 의한 보편적 트라우마)을 밖으로 투사하는 것이다. 레닌은 이를 위해 우상(토템이라는 다신교: 경제주의적 보상) 숭배를 금한다. 우리가 타자의 사랑을 상실할 때 느끼는 불안은 우리앞에 세워둔, 우리와 동일시된 토템에 대한 심성에 다름 아니다. 그 토템은 우월한 타자이기도 하고 우리 내면의 초자아에 대한 자아 자신의 공격충동의 대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토템의 심성에서 사랑은 죽음과 양면을 이룬다. 이 주체화의 문제에서 레닌은 일신교의 이미지, 즉 강박적으로 '죽음의 충동'을 '쾌감원칙의 피안'으로 밀어내는 일신교의 이미지를 빌어 '죽음의 충동'의 반전을 개시한다.

  시라이 사토시는 3부에서 <국가와 혁명>을 통해 '죽음의 충동'을 둘러싼 힘의 동학을 논한다. 자본주의의 계급 간의 직접적인 대립과 그 모순을 은폐하는 국가(이런 의미에서 국가는 본질적으로 법치국가를 지향하는 '중성국가'이다), 그러나 그 근대국가는 계급적 대립의 힘의 총량과 방향에 구속된다. 다시 말해 근대국가의 법치는 부르조아 계급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도 동등하게 적용되면서도, 사유재산의 보호와 시장경제의 원리의 보장이라는 부르조아의 계급적 이해에 기반한다. 그러므로 국가의 힘―"공권력"―은 계급관계에서 역사적으로 산출되는 '특수한 힘'이다. 레닌은 다수에 의한 다수의 무장에 이르러서야 '보편적 힘'이 출현한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근대국가가 부르조아 계급의 이익에 충실한 나머지 국민국가라는 개념적 규정을 스스로 부정하면서 제국주의화로 나아갈 때에 그와 동시에 전인민을 무장시킨다("총동원체제"). 레닌이 제국주의 전쟁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으로 전화하자고 한 것은 '특수한 힘'에서 '보편적 힘'으로 양질변화를 두고 한 말이다. 레닌에게 혁명의 힘―'죽음의 충동'이라는 에너지―은 이미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혁명의 현실성"이며, <무엇을 할 것인가>와 <국가와 혁명>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레닌 사상의 핵심이다.      

  레닌의 혁명으로 건설된 사회주의 국가는 이미 지구상에 없다. 이제 자본주의는, 시라이 사토시가 표현한 바에 따르면, 지표면을 장악했다. 그러나 지구상에 자본주의가 전면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외부성, 즉 또 다른 사회구축의 원리가 강박적으로 도래한다면, 레닌의 "혁명의 현실성"은 '죽음의 충동'처럼, 현재에 투사된 미래처럼 강박적으로 반복될 것이다. 그렇게 '죽음의 충동'을 은폐하고 억압하는, 정치가 품고있는 거대한 비밀은 인류를 광기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인류는 "말과 사물의 일치"라는 자연상태―"자유"―를 진짜 현실로 늘 탐구하는 것이다. 

 

白井聡, 2007,未完のレーニン<>思想』, 講談社.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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