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읽었던 세 권의 책에 관한 짧은 감상문을 쓴다. 코 앞에 닥친 일을 마무리하고 느긋하게 쓰려고 마음 먹었지만, 일은 조기 두름 엮이듯이 끊이지 않아 이러다 읽은 기억마저 잊을까 싶어 써두려고 한다.
『갱부(坑夫)』는 나츠메 소세키가 전업작가로 명성을 얻은 후 도쿄의 일명 "소세키산방"(漱石山屋)이라고 불린 집으로 이사한 그 이듬해에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소세키의 여느 소설이 그러하듯이 줄거리는 단순하다. 도쿄의 평범한 서생이었던 어느 젊은 청년이 어느날 두 여자를 동시에 사랑하게 된 번민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결심하며 집을 나온다. 그 가출길에 우연히 갱부를 모집하는 브로커를 만나 함께 광산으로 떠난다. 기차를 타고 강을 건너 산을 넘는 내용이 전반부. 후반부는 광산의 "함바"(飯場)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단 한번의 갱의 체험담으로 채워진다. 서생은 결국 갱부는 되지 못하고 경리로 5개월간 일하다 도쿄의 집으로 돌아온다.
사실 나는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에 몰입할 수가 없다. 가령 나는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읽노라면 소설의 현장에 있는 듯한 생생한 감각을 느낀다. 이와 반대로 소세키는 마치 독자로 하여금 몰입하지 말 것을 끊임없이 주문하는 것 같다. 소설의 어느 등장인물에게도 감정이입을 허하지 않는 그만의 독특한 서술기법은 참으로 묘하다. 언제나 등장인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이 다르고, 서로가 서로를 다르게 이해한다. 그러나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웃긴 것이고, 서로에게 웃긴 서로가 지나고 나면 스스로에게 웃긴 것이다. 이렇듯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 특유의 웃음은 삶이 갖는 진지함 그 자체의 웃음이다. 바보 이반만큼 진지한 이가 또 있겠는가.
이 소설은 나츠메 소세키의 아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소세키가 도쿄제일고의 교사 시절 그의 제자였던 후지무라 마사오가 자살한 사건이 있다. 후지무라 마사오의 자살은 메이지 시기 일본사회를 뒤흔들었던 사건으로, 게곤폭포에서 투신하기 직전 남긴 그의 유서는 지금도 유명하다. 세상은 이해할 수 없고 번민에 번민을 거듭한 끝에 죽음을 결정했다고 하는 내용. "커다란 비관과 커다란 낙관이 서로 같다는 것"이라는 유서의 마지막 문장.
『갱부』는 나츠메 소세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자신의 젊은 제자 후지무라 마사오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그래도 살아가야 하는 또 다른 후지무라 마사오에 보내는 편지이다. 소세키는 자살을 결심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길을 나섰던 『갱부』의 젊은 서생에게 번민과 고독과 무상의 틈새를 비집는 바보이반의 웃음을 선사한다.
이 책은 현암사에서 출간 중인 나츠메 소세키의 전집을 얻은 후 읽었다. 아니었으면 평생 읽지 못했을 것이다.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 중에서 비교적 널리 알려진 책이 아니고 그의 소설을 모조리 섭렵할 만큼 그의 소설세계에 빠진 것도 아니니까. 돌이켜보면 책이란 우연을 가장한 인연인 것 같다.
인연으로 읽은 두번째 책은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이다. 저자의 친필싸인이 담긴 이 책 역시 저자와의 인연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읽을 일은 없었을 책이다. 내게 "문학소년"으로 기억되는 저자는 어느덧 중년이 되었지만 그의 책에서는 여전히 "철학소년"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한편, 그의 책에서 그를 기억해낼만큼의 인연은 책의 주인공과의 대면을 가로막는다. 나는 라이프니츠를 읽은 것인가, 박제철을 읽은 것인가. 내가 알게 된 라이프니츠는 라이프니츠인가 박제철인가.
책은 너무 좋다. 철학이 이렇게 쉽고 재밌는 줄은 처음 알았다.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어렵고 지루하지 않다. 시간, 공간, 물질은 서로가 서로에 의해 존재하고 의식된다. 그러면서도 시간, 공간, 물질은 개체적 실체의 직관에 의해 서로를 지속시킨다. 이 책은 친절하게 수학의 가장 쉬운 도식으로 하나하나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들과 진리론과 시간론을 풀어놓는다. (이 책에 관해서는 프로젝트 일이 마무리되면, 라이프니츠 특집으로 다루련다!)
마지막으로 『일본전후정치사』를 짧게 언급하련다. 이 책과의 인연이라고 한다면, 어거지로 붙이는 것으로다, 위의 저자와의 약속장소가 이 책의 출판사가 운영하는 책다방이었다는 것이다. 2006년에 초판이 나왔을 당시, 일본인의 인명 표기가 상당부분 잘못되어서 초판 1쇄를 회수하고 다시 찍었다는 이야기를 그 전에 들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일본에서 공부한 사람이 번역을 했다는데 왜 그런 실수가 나왔을까 의아해했더랬다. 그런데 책을 보니 한 줄 건너 인명이 나온다. 그럴만한다. 전후 일본의 웬만한 정치인들은 다 거론된 것 같다.
이 책은 간단히 말하면 정치부 기자가 정리한 선거와 정당에 관한 '통계적 기록'이다. 사실관계를 위해 참조하기 좋은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느낀 점 하나는 정당이 있고 선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선거가 있고 정당이 있다는 것. 보통선거의 실시 이후 인류의 정치사를 되돌아보았을 때 역사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느낀 점 또 하나는 대권-지도자는 정말 우연히 탄생한다는 점이다. 누구도 누가 대권의 정치인이 될지를 모른다. 시대만이 안다.
일도 많고 공부할 것도 많은데 지난주는 이렇게 읽어버렸다, 인연에 따라. 이제 나는 죽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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