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가을 그녀에게서 이 책을 받았으니 내 손에 들어온지 3년만에 읽은 것이 된다. 그녀는 니이가타(新潟)의 시바타(新発田)로 인터뷰 조사를 하러 온 내게 '뭐하러 제국주의자의 반동분자를 만나느냐'고 질타했더랬다. 니이가타는 재일코리안의 북송사업의 송환항구가 있었던 곳이며(주*), 일본제국의 패전 후 '외지'로부터 귀환한 일본인의 정착촌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니이가타 사람들에게는 정치적으로 묘한 분위기가 있다. 그녀는 물론 일본인이다. 일본인 중에는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해 과도할 만치 매우 비판적인 사람들이 아주 드물게 있는데, 그녀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내게 준 책이 『わが青春の朝鮮』[우리들 청춘의 조선]이라는 책이다. (주* 1959~1984년에 걸쳐 186차례 약 9만4천명의 재일코리안이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かぞくのくに>[가족의 나라](2012년, 양영희 감독)라는 영화를 보면 그 실상과 아픔을 알 수 있다. ) 

이 책의 저자인 이소가와 수에지는 1907년 시즈오카(静岡) 출생으로 1928년 보병으로 입대하면서 조선의 나남(羅南)으로 건너가 1930년 소집해제된 후 흥남공장의 노동자로서 <태평양노동조합사건>에 연루되어 약 10년간 복역하고 1947년 귀환한 일본인이다. 저자는 '귀환 후 소학교의 야간수위 일 등을 하다 현재는 무직'이라고 밝히고 있다(책이 출간된 1984년 시점에서). 무산자의 당당함이란!

전후 일본사회에서 패전 후 '외지'에서 귀환한 일본인은 "히키아게샤"(引揚者)로 통칭된다. 히키아게샤의 '고난의 귀환'의 자서전적 수기는 차고 넘친다. 이는 1968년 알제리의 독립 후 프랑스로 귀환한 "피에누아르"(주**)의 수필, 소설, 자서전 등의 수기가 1000편이 넘는 것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わが青春の朝鮮』[우리들 청춘의 조선]은 그것들과는 아주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은 조선에서 혁명운동에 종사한 일본인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주** pied-noir, 독립 이전의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인을 이르는 말, 알베르 카뮈, 데리다 등이 있다)

이 책은 흥남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노동운동의 초기 역사를 아주 소상하게 기술해놓았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이 가진 가치는 분명하다. 1927년 부임한 조선총독 우가키 카즈시게()는 산업개발정치를 표방하며 특히 북조선에서의 공장 건설과 발전소 개발을 주요 식민사업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 1930년 흥남공장에서는 약 6천명의 노동자가 있었고 흥남의 인구는 약 3만명에 달했으며, 1945년 패전 시 공장종업원은 4만5천여명, 흥남의 인구는 18만여명에 이르렀다. 1931년 상해에 본부를 둔 태평양노동조합비서부를 발기로 아시아 전역에 혁명적노동조합운동이 일어났을 때, 조선의 중심은 흥남의 노동자들이었다. 또 1927년 일본 본토에서 보통선거로 실시된 중의원선거에서 비밀조직으로 활동하던 일본공산당이 출마 대패한 후 대대적인 검거와 탄압을 맞이했을 때 일본공산당원의 다수가 조선의 흥남으로 모여들었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잠입한 일본공산당원과 조선공산당원--조선공산당은 1925년 창립--, 그리고 자발적인 흥남의 노동자들이 국제적 노동조합운동의 기치로 건설하고자 했던 것이 '태평양노동조합'이다. 이소가와 수에지는 1932년 제2차 태평양노동조합 사건 때 검거되었고 그 후 10년간 흥남교도소와 경성교도소에 복역했다. 경성교도소에서 정치범들은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되는 날에는 반드시 "적기의 노래"와 "공산당 만세"를 한번은 조선어로 또 한번은 일본어로 부르고 외쳤다고 한다. 그것은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일본인과 조선인 동지를 위한 배려였다고 한다.

이처럼 한국의 노동운동과 공산당의 초기 역사는 네이션의 시야를 넘어서는데, 네이션을 넘어선 아시아의 시야에서 그것을 해명한 논문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당시 그들이 추구했던 노동운동과 코뮌의 가치가 일국의 사회주의 혹은 아나키즘 혹은 민족주의로 귀결될 뿐이다. 이것은 시야를 갖추지 않으면 역사를 발굴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분야의 연구자들의 몫이고, 내가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따로 있다.

이소가와 수에지는 1945년 8월 15일 전쟁항복을 선언하는 "천황의 옥음"을 조선의 '혁명적 동지들'과 함께 들은 직후의 소감을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다. 

"방송이 끝난 후 나는 그 자리에 있던 조선인들의 표정을 한 사람씩 바라보았다. 어떤 사람은 안심하고, 어떤 사람은 어리둥절해하고, 또 어떤 사람은 기뻐했다. 그들 중 누구도 슬픔하거나 실망하는 사람은 없었다. ... 나는 사람들이 왁자지껄 목소리를 높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조용히 자리를 떴다. 나는 돌연 패전국의 국민이 되었다. ... 전형적인 침략전쟁의 귀결이며 자업자득의 비참한 결말이었다. ... 그런데 나의 상념에 스치는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일본의 식민지배의 총결산을 행해야 하는 날이 구체적 일정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pp.232-3)

제국주의에 맞섰던 코뮌주의 혁명가가 제국의 성원으로서 식민지배의 청산을 책임지는 위치로 전이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청산의 과제란 사상의 이념이 무엇이었든지간에 '외지'에 남겨진 일본인 모두의 생존을 모색하는 것이다. "투쟁의 대상=군국주의 국가 일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싸워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며, 동시에 이방의 땅에 버려진 패전 일본인이 지금이야말로 힘을 합쳐야만 하는 혼돈의 현실에의 항전이다."(p.258)

주지하다시피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북한을 점령한 소련은 조선의 일본인에 대한 '귀환'이 아닌 '억류'의 조치를 취했으며, 10만명 이상의 일본인이 아사하거나 전염병으로 죽었다. 이소가와 수에지는 북한의 공산주의 입장에 따라 식민지배자의 역사적 처벌을 감내할 것인가 동포의 구제를 모색할 것인가의 기로에서 후자를 선택한다. 그리고 조선의 '혁명적 동지들'의 협력을 얻어 야밤탈주를 감행한다. 그 또한 1947년 1월, 북조선에서 추위와 굶주림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9백여명의 일본인과 함께 일본으로 귀환한다.

조선의 '혁명적 동지들'에게 "기곡"(キコク)으로 불렸던 이소가와(磯谷)의 코뮌적 지향은 어떻게 해명될 수 있을까. "국가권력을 상실한 구식민지에서 고립무원의 상태에 놓인 이들"에 대한 "인간적 동정과 정치적 이해"에 충실했던 그의 행보에서 무엇을 읽어낼 것인가. 그러한 그의 행보를 이끌어내었던 시대의 사상적 구조는 무엇인가. 그래서 나는 "기곡"와 동일한 시대의 동일한 사상적 구조에 놓인 "제국주의의 반동적 분자"의 이야기도 놓칠 수 없다.

니이가타에서 소식이 왔다. 1918년생인 나의 가장 최고령의 제보자가 위독하다고 한다. 그가 내게 빌려준 자료를 돌려받고 싶다고 하고, 나는 그의 방 한가득한 자료를 얻고 싶다. 담판을 지러 가야한다. 

Posted by Sarantoy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