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상> 마루야마 특집호에 실린 논문 한편의 내용을 간추려 정리한다. 이 논문은 1960년대 후반 '대학분쟁'의 와중에 일어난 마루야마 마사오와 전공투(전학공투회의) 간의 갈등과 논쟁을 다룬다.

 

「銀杏並木の向こうのジャングル」

시미즈 야스히자(清水靖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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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말해두고 싶은 것은 마루야마니까 당시 학생운동세력과 대면하고 이 정도로 논쟁을 이끌었다는 점이다. 대학의 기득권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교수들의 대부분은 대학의 모순과 그 표면화에 대해 회피하거나 '뒷담화'로만 즐길 뿐 시대의 전면에 등장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역사의 장에 기록하지 못하며 후대의 누군가의 손을 거쳐 그들의 삶을 설명해내는 에피소드로서 발굴되기를 기다릴 뿐이다. 스스로가 역사의 장을 구성하는 것과 누군가에 의해 비로소 스스로의 삶이 역사의 장으로 끌려들어가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특히 사상가가 역사의 장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그의 사상이 '살아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며 마루야마는 바로 그런 사상가를 예시한다. 

동경대학에서는 1968년부터 부당처분에 항의하는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해왔다. 1969년 2월 학교당국에서는 "수업재개"를 결정했고 "기동대"의 공권력을 허용하여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들을 탄압했으며, 전공투를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세력에서는 이에 항의하는 "수업분쇄"에 돌입했다. "수업분쇄"는 강의실을 봉쇄하는 물리적인 분쇄뿐만 아니라 전공투가 강의에 직업 참여하여 교수에게 질문하고 논쟁함으로써 강의를 분쇄하는 것을 의미했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정치사상사 강의는 "수업분쇄"의 주요 대상의 하나였다. 그것은 마루야마의 『日本の思想』[일본의 사상]이 60년대 동경대 수험생의 필독서였으며 마루야마의 강의가 법대 필수과목이었기 때문이다. 또 주요일간지가 마루야마의 "수업재개"를 주목했던 터라 전공투는 마루야마의 강의를 "분쇄커리큘럼"의 시간표의 주요과목으로 선정했다.

1969년 2월 21일부터 3월 7일까지 5회 진행된 마루야마의 수업재개는 마루야마의 사상의 역사에서도 중대한 경험이었고, 이 경험에서 대학과 폭력, 학문과 형식, 자유와 타자 등을 둘러싸고 마루야마 자신도 사상적 전기를 맞이했다.  

1969년 2월 21일, 수업재개된 마루야마의 강의실에는 200여명의 학생들로 만원이었다. 마루야마는 수업재개의 객관적 역할, '동대분쟁'의 책임 등을 묻는 전공투의 질문에 '나는 동대분쟁 전체에 중대한 책임을 느낀다', '양심은 강요할 수 없다' 등의 입장을 피력하며 학생들의 논리적 근거를 되묻고 그 주장의 근거없음을 논파했다. 그리고 110분의 수업을 채운 후 '여하튼 강의는 시작되었다'라는 말과 함께 수업을 끝냈다. 

이에 법투위(법대투쟁위원회) 측에서는 "수업재개를 강행한 마루야마 교수의 추궁집회 개최"를 결정했다. 2월 24일 두번째 수업을 위해 법학부 강의실로 들어가는 마루야마를 4,50명의 학생들이 문학부의 대형강의실로 끌고갔다. 이 학생들은 "혁마르"(혁명적 마르크스주의파)와 "프론트"(사회주의학생전선)과 "SFL"(학생해방전선)의 학생들이었다. 마루야마와 이들 간에 벌어진 논쟁은 매우 격렬했다고 한다. 이 모습을 지켜본 어느 학생의 기록에 따르면, "마루야마 교수는 형식적 원칙을 고집하여 우리들의 추궁의 실질적 대답을 회피한다!"는 학생의 추궁에 마루야마는 "인생은 형식입니다"라고 답했고, "형식주의자!"라는 고성에 마루야마 역시 목소리를 높여 "인생은 형식입니다!"라고 응했다. 그의 목소리는 대형강의실을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했고, 일순 정적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마루야마가 형식주의로 전공투에 맞선 것에는 그 유래가 있다. 마루야마는 1930년대 일본제국의 파시즘의 발흥을 지켜보면서 파시즘의 진행에 기여한 비합리적 생명주의, 즉 짐멜이 말한 '생명의 형식에 반하는 반역'을 경계했다. 전후 개인의 자유를 국가권력의 '형식적 타당성'으로 의식하는 입장에서 일본의 초국가주의를 비판했던 마루야마는 생명전체를 기획하는 '실질적 자유'보다도 사상언론의 자유 등의 '형식적 자유'를 존중했다. 나아가 그는 1960년대 '비근대적'이면서도 '과근대적'인 일본의 '미성숙한 민주주의'가 '생명주의'와 상통하는 '내용주의'에 의해 이끌리고 있으며, 1930년대와 같이 생의 철학이 다시금 유행하게 될 것을 예감했다. 그래서 그는 수업재개를 '정상화'가 아닌 '일상화'로 의식했고, 대학의 형식을 지켜내고자 했다. 

그러나 제도로서 일상을 회복하고자 했던 마루야마의 수업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2월 24일의 수업 다음날 마루야마를 비난하는 전공투의 유인물이 배포되었다. 2월 28일 세 번째 수업에서 마루야마는 전공투 학생에게 '2월 25일 강제납치'의 반성과 사과를 요구했고, 전공투 학생은 마루야마의 '자유주의적 대학관'의 입장을 비판했다.   

당시 동경대에는 "기동대"의 공권력뿐만 아니라 학생운동세력의 각 분파 간에 폭력이 끊이질 않았다. 대표적으로 1968년 11월 일공계(일본공산당계열)과 반일공계 간에 벌어진 "격돌"은 1000여명의 규모에 500여명 이상의 부상자를 낼 정도였다. 이러한 대학 내 폭력에 대해 마루야마는 '자살적 행동'으로 맹비난했고, "수업분쇄" 또한 그 폭력의 연장선상으로 보았다.   

3월 3일 수업재개 후 네 번째 수업이 진행될 예정의 강의실은 100여명의 법학부 학생들에 의해 봉쇄되었고 마루야마는 급히 메이지문고로 강의실을 옮겨 소수의 학생들을 데리고 수업을 진행했다. 3월 7일 다섯 번째 수업에서도 전공투 학생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 수업 후 마루야마는 심전도 이상으로 병원에 입원했으며, 이로써 그의 "수업재개"는 중단되었다.

4월 18일 마루야마는 병실에서 "밤중에 문득 눈을 뜨면 동경대 분쟁 외에는 생각나는 꿈이 없다"고 적어놓았다. 1969년 마루야마의 "수업재개"는 형식주의적 자유주의자로 마루야마의 사상을 몰고간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는 한편, 마루야마에게 사상적 단층을 남겨주었다. 

마지막으로 올해 마루야마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지난 7월 NHK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인 「民主主義を求めて 政治学者丸山真男」에서 "동대분쟁"에 관한 몇 가지의 사진을 올려놓는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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