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서의 저자, 다케우치 요우(竹内洋)는 1942년생으로 역사사회학 및 교육사회학 분야의 연구자이다. 그는 2003년『教養主義の没落』[교양주의의 몰락]이라는 책을 펴낸 후 마루야마 마사오를 중심으로 한 戰後일본사회론과 '범형지식인'[규범형 지식인]의 관계를 그려내고자 했고, 그 결과물이 본서라고 한다. 그래서 [교양주의의 몰락]을 함께 읽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본서를 이해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은 없다.

  무엇보다 본서는 읽기 쉽다. 다케우치의 주장에 따려면, 어렵게 쓰인 책들의 상당수는 책의 저자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때문이다. 다케우치 본인 또한 그렇게 많이 당해왔다면서. 어떻게 하면 책을 쉽게 쓸 수 있는가. 이에 대해 다케우치는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본서를 읽은 후의 소감으로 말하자면, 시대와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론은 이론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시대와 끊임없이 교감함으로써 생명력을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론을 소개하거나 그 이론을 디뎌 자신의 사유체계를 구축할 때에 시대적 실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죽은 이론이거나 이론을 사체화하는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이론이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것은 그의 사유체계야말로 시대적 공명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마루야마가 생성("なる")이 아닌 제작("つくる")의 민주주의를 주장했던 것처럼. 

  그렇다고 해서 본서의 내용이 간단한 것은 아니다. 다케우치는 193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학사회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의 동태를 주도면밀하게 그려내는 한편, 여러 변수를 엮어내어 사회학적으로 분석해낸다. 우선 다케우치에 따르면, 다이쇼 시대의 구제고교(5년제의 중학교 과정 이후 대학진학을 위한 2년제의 고등교육과정)에서 탄생한 교양주의는 독서를 통해 습득한 지식으로부터 인격의 고양과 사회변혁을 꾀하는 인생관을 가리킨다. 1930년대 이후 1970년대까지 대학사회에서 이러한 교양주의는 사회에 대한 사상적(좌익 혹은 우익의) 개입으로 실천된다. 그리고 저자는 그 바로미터에 마루야마 마사오를 위치짓는다. 

  그것은 마루야마 마사오의 사상 때문이 아니라 "법학부적인 실천활동의 여지도 있으면서 문학부적인 아카데미즘의 향기도 나는 절표한 포지셔닝" 때문이다. 다케우치는 대학장(大學場)의 기능적 측면을 권력장의 지향과 순수아카데미즘의 배양이라는 두 가지로 구분하고, 법학부와 문학부가 각각 전자와 후자를 담당해왔다고 한다. 이것은 일본의 "제국대학"의 역사적 특수성일 터인데, 어쨌거나 테크노그라시를 양산한 법학부와 인문지식인을 배출한 문학부는 각각 대학이 가진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을 상징한다. 그리고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 양자를 횡단하는 "상징교환"을 통해 자신의 사상에 활력을 얻고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을 오가며 이상주의=정치주의의 현실화라는 실험을 감행해왔다. 

  다케우치에 따르면, 마루야마 마사오가 "지식인의 지식인"으로 대중적으로 명성을 얻은 것은, 1946년 그의 나이 33세에 발표한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로 인한 것이 아니다. 물론 이 논문은 전후 일본의 정치사상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기념비적인 저작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마루야마 마사오의 사상이 시대적 힘을 얻은 것은 과거에 대한 비평에서가 아니라 미래에의 예감에서이다.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 이후 몇년간 이렇다할 논문이 없었고, 마루야마의 첫 저서인 『일본정치사상사연구』(1952년)의 판매고는 1000부에 그쳤다. 실제로 이 기간동안 마루야마는 폐결핵으로 폐의 한쪽을 떼어내는 대수술을 받았다. 그가 대중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1956~57년)의 출간 이후이다. 이 시기 일본의 대학사회는 미일안보조약의 개정을 두고 전학련을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세력이 점차 세를 키워갈 때였다. 이들 학생운동세력이 마루야마의 저술을 돌려읽으면서 인텔리의 교양으로서 마루야마가 위치짓게 되었던 것이다. 마루야마는 지식인을 본래의 인텔리와 유사인텔리의 두 층위로 나누고 후자의 유사인텔리가 파시즘의 선봉이 되어왔음을 비판하며 본래의 인텔리로서 지식인에게 대중을 계몽하는 역할을 부여했다. 그런데 그의 "계몽"의 방식은 지식인의 대중에 대한 교화가 아니라 대중의 스스로 지식인 되기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마루야마가 과거를 통해 미래를 그려내는 방식으로 정치를 말하는 그의 화법이다. 다시 말해 그의 글에서 과거에 그러했다는 것은 미래에 그래야한다라는 것으로 읽힌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케우치에 따르면, 마루야마의 "새로운 정치주체로서의 국민을 그려내는 계몽활동"이며 "대중의 시민화"에 대한 예감이다.

  1960년대 이후 요시모토 다카아키(吉本隆明)의 마루야마 마사오에 대한 비판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지식인 세대의 등장은 바로 마루야마가 예감한 "대중 인텔리화"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인계에 있어서 세대투쟁"은 사회경제적 맥락을 담고 있다. 그것은 대학이 더 이상 소수의 특권층의 출세를 보장하지 않으며, 대졸인구의 팽창이 대졸 학력자의 노동시장에서의 지위의 하락으로 이어지는 현실을 가리킨다. 1960년대 이후 학원투쟁의 중심세력은 대학지식인을 범형으로 하는 문화적 쁘띠부르조아에 동일시하지 않고, 문화부르조아를 가혹하게 비판했던 요시모토 다카하키의 주장에 공감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루야마는 "대학해체론"과 같이 제도론을 기피하고 정신론을 고집하는 전공투의 대학론과 그 좌익적 언설에서 전전(戰前) "제국대학"의 우익학생세력의 일본국가주의로의 회귀를 읽어낸다. 마루야마는 전전 자신이 혐오하고 공포스러워했던 "국가주의"가 전후 정치적 교양주의의 새로운 유행으로 재등장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루야마는 "제국대학"의 우익학생세력이 그러했던 것처럼 전공투의 파국을 예감했다. 마루야마는 정년 5년을 앞두고 1971년 교수직을 사직한 이후 더이상 "계몽"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만년의 마루야마는 생리적 혐오과 공포의 대상이었던 전전의 "원리일본사"(原理日本社)적인 것을 정면으로 다루었다. 이것은 일본정치사상의 고층(古層), 즉 '집요저음'이며, 전후의 좌익학생세력에게서 또 다시 나타나는 파시즘의 원류이기도 하다.  

  다케우치는 교양주의를 세 층위로 구분한다. 정치적 교양주의의 신층, 인격적 교양주의=다이쇼 교양주의의 중층, 인생론적 교양주의=번민문화의 고층. 그런데 이 교양주의의 실현의 장으로서 대학은 1990년대 이후 점차 문화자본의 총량을 잃어감에 따라 제 역할을 더이상 하지 못하는 시대를 맞이했다. 다케우치에 따르면, 이제 대학은 학생의 프롤레타리아를 넘어서 지식노동자의 프롤레타리아화에 이르렀다. 마루야마라면 이 시대의 대학에 대해 무엇을 말했을까. 그리고 "대학인"은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했을까. 

 

『丸山眞男の時代―大学・知識人・ジャーナリズム』, 中公新書,  2005년 11월.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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