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미즈 다카시(清水高志)2023년 저작 공해론/불교론(空海論/佛敎論)(以文社)의 1부 '대담'을 https://sarantoya12.tistory.com/160 https://sarantoya12.tistory.com/161 https://sarantoya12.tistory.com/163 https://sarantoya12.tistory.com/164 에 이어서 올려둔다. 이로써 1부 '대담'은 다 번역했다. 

오역이 있을 수 있으며 번역 자체가 거친 부분이 많다. 양해를 구합니다.

이 번역 작업 덕분에 올 무더운 여름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한편으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 공부의 과제를 조금 더 분명하게 다듬을 수 있었다.

 


 

오지논증(五支論證)과 귀추법(abduction)

 

시미즈: 인명(因明)(‘원인을 밝힌다는 뜻의 인도 논리학)을 연구하는 모로 선생이 계시지만, 인도의 논리학을 잠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표 1). 니야야 수트라(Nyāya Sūtras)[각주:1]에는 오지논증(五支論證)’이라는 독특한 로직이 설파됩니다. ‘오지논증을 언급한 불교 논리학자로는 디그나가(陳那)[각주:2]를 비롯해서 여럿이 있습니다. 디그나가는 표 1에서 오지(五支)’의 마지막 두 가지를 빼버리지만, 나는 오히려 본래의 오지논증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본래의 로직을 살펴보면 여기서부터 테트랄레마가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표 1. 오지논증(니야야 수트라에서) ‘수반(隨伴)’의 예

제안논증되어야 할 것을 서술하다.

주제 p는 성질 B를 가진다.

이유

성질 A를 가지므로

유례(喩例)’

성질 A를 가진 실례 d는 성질 B를 가진다.

적용

주제 p는 성질 A를 가진다.

결론

고로 주제 p는 성질 A를 가지므로 성질 B를 갖는다.

 

이 인도 논리학의 로직은 앞서도 다뤘다시피 사물의 속성을 문제시합니다. 그래서 처음에 논증되어야 할 것을 먼저 제안합니다. 이것은 예를 들어 주제 p는 성질 B를 가진다와 같은 것이죠. 그리고 이어서 이유성질 A를 가지므로가 되고 이때 성질 A는 성질 B를 수반한다라고 인도의 논리로서 사고하게 됩니다.

 

모로: 그렇습니다.

 

시미즈: 수반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면 유례(喩例)’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성질 A를 가진 실례 d는 성질 B를 가진다.’ 이것은 실물을 토대로 인도인이 생각하는 것이므로, 보통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실례를 내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르민(基體)과 다르마(屬性), 구체물과 속성이 분열하지 않는 모델이 모색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나아가 적용이 행해지고 주제 p는 성질 A를 가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수반의 발상에서 결론고로 주제 p는 성질 A를 가지므로 성질 B를 갖는다는 식이 됩니다. 이것이 오지논증입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인도인은 부정적 수반(배제)에 대해서도 사고합니다(표 2). 제안’ ‘주제 p는 성질 B를 가진다.’ 이유성질 A를 가지므로는 앞서와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른 유례(喩例)’를 내옵니다. 그것이 성질 A를 가지지 않은 실례 d는 성질 B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용에서는 주제 p는 성질 A를 가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 서술되고 결론으로서 고로 주제 p는 성질 A를 가지므로 성질 B를 갖는다라는 견해가 도출됩니다. 이때 ‘A를 가지지 않는 실례 not d는 성질 B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으로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나는 이것이 이상한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표 2. 오지논증(니야야 수트라에서) ‘부정적 수반의 예

제안논증되어야 할 것을 서술하다.

주제 p는 성질 B를 가진다.

이유

성질 A를 가지므로

유례(喩例)’

성질 A를 가지지 않은 실례 not d는 성질 B를 가지지 않는다.

적용

주제 p는 성질 A를 가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결론

고로 주제 p는 성질 A를 가지므로 성질 B를 갖는다.

 

모로: , 정말로 그렇네요.

 

시미즈: 애당초 배중률이 성립하는 대상이 아닌 것에 대해 구태여 배중률의 상황을 사고합니다. 이것은 이항대립을 억지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흥미롭지 않나요? 이 인도인의 로직을 서양 학자로서 백 년도 더 전에 언급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추론형식으로는 퍼스의 귀추법(abduction)입니다(그림 1).

그림 1. 귀추법의 추론형식_1

퍼스의 귀추법을 염두에 두면 오지논증은 연역도 귀납도 아닙니다. 그리고 일상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추론형식은 귀추법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그림 15에서와같이 집에서 연기가 난다고 합시다. 이것은 귀추법에서 아이콘(icon)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굳이 인도 논리학과 겹쳐놓으면 이것은 무언가의 사상(事象)이 일어나고 있다는 표식, 인도에서는 링가(linga)”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랬을 때 추론이 x에서 연기가 나고 있으므로 화재다로 나아갑니다. ‘연기가 나다화재라는 두 사상(事象).

 

모로: 수반이지요.

 

시미즈: , 수반입니다. 이것은 인덱스(index)라고 해서 퍼스 논리학의 추론에서 2단계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a는 화재다라는 추론이 도출됩니다. 이것은 집 가까이에서 확인하거나 능동적으로 접근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3단계는 상징(symbol)인데요, 인도식으로 말하면 적용입니다.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인도 논리학에서 이 적용을 행할 때 그것이 긍정되는 경우와 부정되는 경우의 양쪽을 가능성으로서 남겨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정은 부정적 배제의 부정이 아닙니다. 이 점이 아주 재밌습니다. 인도 논리학은 가류성(可謬性)[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모로: 정말로 그렇습니다.

 

시미즈: 이것은 확실히 귀추법입니다. 귀납법은 어떤 결과가 있고 그 결과에 대해 사실로서 이러저러한 것이 있다는 것으로부터 법칙이 도출됩니다. 예를 들어 콩이 있고 이 콩이 하얀경우 이 콩은 껍질이 벗겨져 있다는 사실이 확인됩니다. 그렇게 이 껍질 속 콩은 하얗다는 법칙성이 몇 가지 샘플로부터 도출됩니다. 이것이 귀납입니다. 예를 들어 이 집이 불타고 있다는 것에서 법칙성을 도출해낼 수 없습니다. 인도의 로직도 그렇잖아요.

 

모로: , 그렇지요. ‘이 사례가 이렇다는 결론을 낼 뿐입니다.

 

시미즈: 그리고 가류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확실히 귀추법입니다. 아니, 어쩌면 귀추법보다 더 나아간 것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추론이 실패하게 될지에 대한 정의가 상세하게 정해져 있으니까요.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그림 2). 예를 들어 비구름이 떠 있다는 것은 아이콘입니다. 그리고 비구름이 떠 있으므로 비가 내린다.’ 이것은 인덱스입니다. , 수반이지요. 그리고 우산을 가지고 가자라고 그 추론을 확장해서 세계에 훅을 넣습니다. 이것은 적용입니다. 3단계의 양상을 귀추법에서는 일차성, 이차성, 삼차성이라는 하는데, 삼차성에서 사상(事象) 혹은 상황이 바뀝니다. 추론이 행동으로 대체되고 나아가 새로운 상황으로 추론이 이어진다는 것이 귀추법입니다.

그림 2. 귀추법의 추론형식_2

이 귀추법은 시나 신화의 상상력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최초의 아이콘은 대상 하나와 연관된 기호이며 그 기호에 의해 그 현실 대상을 대표하게 합니다.

레비스트로스와 야콥슨이 보들레르의 시 고양이를 탁월하게 해석한 것으로 유명한데요, 야콥슨은 퍼스를 검토하면서 이 시에서 사용되는 메타포(은유)와 메토니미아(metonimia)(환유)를 분석합니다. 퍼스 자신이 이미지, 메타포, 다이어그램을 추론의 요소로서는 일차성이라고 말했는데, 예를 들어 동화에서 눈처럼 하얀 공주백설공주라고 하는 것은 메타포입니다. ‘백설공주하얀 것에 속하고 그것을 대표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두 번째의 인덱스는 최초의 기호가 또 다른 기호와 강하게 연결되기 때문에 그것들의 관계를 결부해서 규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나 신화에서 메토니미아로서 기능합니다. 이것도 동화를 예로 들어 설명하면 빨간 망토 아가씨는 빨갛지 않지만 빨간 망토와 강하게 연결되어 그렇게 불립니다. 빨간 망토가 수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대상이 무언가에 속하는, 어느 하나가 어떤 그룹을 대표하는 표식이 된다’(아이콘)는 것과 대상에 인접적으로 강하게 연결되는 것, 수반하는 것’(인덱스)을 더듬어가면 시적 표현은 온갖 것들을 유사성으로 포섭해서 회수하는 것이 아니라 틀린 것들을 하나하나 발견해내어 복잡하게 확장해갑니다. 레비스트로스와 야콥슨이 분석했듯이, 고양이라는 시 또한 노학자가 키우는 어느 고양이에서 시적 상상력이 우주적인 규모로 확장해가는 양상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의 상징아이콘인덱스에서 찾아낸 관계를 현실 대상과 결부함으로써 새로운 행동이 매개되거나 사실관계가 확정되는 것이며 이 추론이 틀렸을 때 로 되돌아가 추론을 수정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귀추법과 시·신화의 상상력이 깊이 연관된다는 것은 인도 논리학과 신화적 사고(또는 야생의 사고)가 같은 토양에서 싹틔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것들은 모두 회수하지 않고 제3항을 차례차례 내오며 대체해가거나 닫힌 고리와 같은 구조 속에 다양한 대립적인 사물을 심어놓고 그것들의 기원을 이야기한 축약 모델을 만들어 이를 통해 세계의 상징적인 의미를 대표하게 합니다.

 

 

숨겨진 것을 발견하다수반과 부정적 수반의 논리

 

시미즈: 이 제3항을 내오는 것에 대해서 조금 더 고찰해보겠습니다(표 3).

 

표 3. ‘수반부정적 수반에 의한 논증은 논리적으로 올바른가?

한 실례 d가 성질 A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성질 B를 수반한다. (동류(同類))

다른 실례 not d는 성질 A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성질 B를 수반하지 않는다. (이류(異類))

 

이때 동류’, ‘이류를 억지로 이항 대립적인 것으로 상정해서 성질 A를 가지고 있고 또한 성질 B를 가지고 있지 않은3항적인 것이 없음을 확실히 하는 것이 논증의 작법이 됩니다.

 

수반과 부정적 수반이라는 인도 논리학의 사고방식은 과연 맞는 걸까요? ‘한 실례 d가 성질 A를 가지고 있고 그것은 성질 B를 수반한다.’ 인도 논리학에서는 실례 d와 마찬가지로 성질 A를 가지며 성질 B를 수반해서 가지고 있는 것, 이것을 [실례 d] ‘동류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실례 not d가 성질 A를 가지고 있지 않고 또 성질 B를 수반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실례 d] ‘이류라고 합니다. 그래서 실례 d와 실례 not d가 배중률의 이항이 됩니다. 그 조건을 만족하는 것을 변충(遍充)’이라고 디그나가는 부르는데, 정말로 이것이 맞는 것일까요?

 

모로: , 이것은 이른바 연역적인 관계가 아니네요.

 

시미즈: . 개별 실례의 속성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배중률이 처음부터 성립하는 것이 아니고, 논의가 맞는지 안 맞는지는 실천적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실질적으로 동류이류를 활용한 이항대립의 발견법이 아닐까요? 이때 성질 A를 가지고 있고 또한 성질 B를 가지고 있지 않은 제3항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논증의 작법이 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논증이 부정되기도 합니다(표 4). ‘미혹의 이유라 불리는 것이 그러한 예입니다. 예를 들어 아트만(ātman)[절대 변치 않는 가장 내밀하고 초월적인 자아(영혼)]만질 수 없는것이며 항상적이다. ② 〈만질 수 없는것은 항상적이다라는 명제가 있을 때 의식은 만질 수 없는것이며 항상적이지 않다.여기서 두 개가 다른 수반 관계를 가지고 이에 따라 제3항적인 것이 나와서 이 논증은 실패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표 4. ‘미혹의 이유

아트만은 만질 수 없는것이며 항상적이다.

② 〈만질 수 없는것은 항상적이다

라는 명제가 있을 때,

의식은 만질 수 없는것이며 항상적이지 않다.

라는 제3항이 찾아지는 경우, 이 논증은 실패한다.

(‘꿀은 불을 통하지 않지만 먹을 수 있다’, ‘연초는 불을 통하지만 먹을 수 없다의 예시처럼)

 

모로: , 그렇네요.

 

시미즈: 이것이 예를 들어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에서 불을 통한 것은 먹을 수 있다라는 사고에 대해 꿀은 불을 통하지 않지만 먹을 수 있다’, ‘연초는 불을 통하지만 먹을 수 없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뭣이고 하면 인도인이 활용하는 수반부정적 수반의 논리학은 감성적이며 경험적인 사물들 사이에서 그에 수반하는 성질까지 포함한 이항대립의 양상을 일부러 상정해서 제3항적인 것을 배제해가려는 이론입니다. 3항 배제의 이론인 것이죠.

그런데 실질적으로 그것은 그러한 3을 발견하려는 방법이지 않을까요? 가류성이 그들의 논리학에서 중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발견된 3에도 동류의 로직 적용이 시도됩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이 세계를 복잡하게 변별해갑니다. 그 속에서 기능하는 것은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야생의 앎으로서의 무의식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인도인의 논리는 귀추법이면서 그와 동시에 야생의 앎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확인하는 하나의 방법이 되겠지요. 이것은 이른바 개인을 초월한 무의식의 논리학적인 표현입니다.

 

모로: 그렇군요. 인도인의 논리학에는 갖가지 사고방식이 있고, 그에 따라 불교에도 다양한 사고방식이 있을 수 있지요. 그렇지만 적어도 내가 봐왔던 범위에서 동아시아의 논리학에 관해 말하자면 오늘의 이 대화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 이유는 동아시아 사람들은 불교의 논의를 논리학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어서, 더욱 논리적으로 파고들면 좋으련만 그러지 않고 무언가의 행동을 취하는 쪽으로 빗나가 버립니다.

위에서 세 번째로 나오는 것은 결국 새로운 행동과 결부됩니다. 그래서 기껏 연구한 다음에 어째서 이런 것을 동아시아, 중국 사람들은 행한 것일까? 그래, 이 사람들에게는 실천적인 성격이 있기 때문이지라는 이유를 붙여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뭔가 달라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 로직이 가지는 성질 그리고 인도인이 생각한 독특한 논리학이 가지는 성질은 이른바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온 논리학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미즈: , 그렇습니다.

 

모로: 3항을 찾기 위한 것일까요? 마침 그러한 논문을 쓰고 있는데, 3항이고 하면, 예를 들어 숨겨진 것을 발견하기 위해 이론이 있다는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인명(因明)[‘원인을 찾는다라는 뜻의 인도 논리학]에서는 니르바나(열반)라든지 불성(佛性)이라든지 원인을 어디로도 돌려보낼 수 없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 이유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하면서 논의를 시작합니다. 물론 그 이전의 전통이 있지만요. 그 배경을 살펴보면, 인명(因明)은 보통 연역적으로 어떤 전제가 있어서 그에 따라 어떤 결과에 최종적으로 도달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야기한 것을 염두에 두고 인도 논리학 자체를 다시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부정적 수반이라는 것이 왜 필요한지의 문제는 예전부터 계속해서 이야기되어오긴 했습니다.

 

시미즈: 아포하(anyāpoha)[‘다른 것의 배제를 통해 의미를 설명하며 정의하는 불교 논리학의 논의] 때문인가요?

 

모로: 디그나가가 아포하에 대해 설명하기도 하는데요, 요컨대 이항대립을 찾아야 하니까, 예를 들어 부정적 수반만 있으면 그 외 긍정적 수반은 필요 없다는 의견이 나오는 것에 대해 아냐, 그건 다른 양쪽이 없으면 안 돼라고 논의하는 겁니다. 그래서 양쪽이 없으면 왜 안 되는지의 이유를 붙이는데요, 다양한 설명이 이뤄지지만 결국 인도인은 경험주의자이므로로 끝을 맺습니다.

 

시미즈, 카메야마: (웃음)

 

모로: 실제로 그런 측면도 있습니다. 3항을 발견해가기 위해, 정말로 그렇거든요. 맨 처음 제시한 주제가 긍정적 수반과 부정적 수반의 양쪽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라서. 그에 따라 맨 처음은 배중률이 절대 적용되지 않는 형태거든요. 다만 타당성이 발견되면 지금까지 그랬으니 이것도 그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지금까지 인도 논리학을 귀납적 이해로서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귀납적 이해라면 왜 모두가 이렇듯 필사적으로 사고한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지요. 앞서 귀추법에서도 나왔지만, 3항을 실천 중심으로 행하고자 한 것이 어쩌면 동아시아의 인명(因明)일 수 있겠습니다.

 

시미즈: 맞습니다. 서양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분절적이라고들 말합니다. 모순율과 배중률을 살펴보면, 그에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은 반드시 잡아내어 삼단논법 등으로 성립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의 로직에서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소피스테스에서 플라톤이 소피스트란 무엇인지를 논할 때 테크네(τέχνη)를 정의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기술이죠. 우선 기술에는 만드는 기술포획하는 기술이 있습니다. 소피스트들이 행하는 것은 어느 쪽일까 라며 논의를 열어갑니다. 그리고 가령 포획하는 기술이라고 답하면 그것을 또 둘로 나누어 포획하는 기술에 두 갈래가 있는데 그 어느 쪽인지를 묻습니다. 이런 식으로 문답을 이어갑니다. 이것을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가 인용합니다. 들뢰즈는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과 류()의 분류학이라고 말합니다. ‘분할이라는 또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라고요. 무턱대고 이항대립을 하나하나 집어내는 분할이라는 논법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차례차례 보편적인 것에서 개별적인 것을 회수해서 분류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예외적으로 나타난 형태입니다.

 

 

야콥슨의 음운론을 재고하다

 

시미즈: 이 이항대립의 이야기에서 왜 이항을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지금부터 설명해보겠습니다. 야콥슨의 음운론을 알고 계실지 모르겠네요.

 

모로: .

 

카메야마: 의외로 모두 모를 겁니다(웃음).

 

시미즈: 확실히 야콥슨의 음운론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세계를 변별하기 위해 왜 이항 대립적 사고와 대조(contrast)가 필요한가?’ 레비스트로스는 야콥슨의 음운론에서 이 질문의 해답의 실마리를 얻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유다계인 그들은 거의 동시에 뉴욕으로 망명합니다. 그래서 만납니다. 그 영향이 결정적이었어요. 야콥슨에 의하면 예를 들어 터키어에는 모음의 음소가 8개 있습니다. o, a, ö, e, u, y, ü, i입니다. 이때 8개의 모음에서 두 개를 뽑으면 모두 28종류의 조합[8C2 =8×7÷2=28]이 나오고 그렇게 조합된 쌍의 두 소리를 구별하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28종류의 차이를 마치 소믈리에[와인 담당 웨이터]가 와인의 향기를 구분하듯이 구분하게 될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야콥슨은 알았습니다. 청각적으로 음소는 분해 불가능한 단위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흔들리지 않는 출발점처럼 일견 생각되지만, 각각의 음이 실제로는 예를 들어 열린 음소’, ‘닫힌 음소등으로 나뉩니다. o, a, ö, e열린 음소이고, u, y, ü, i닫힌 음소입니다. 또 혀의 앞쪽에서 나는 전방 음소’ ö, e, u, i와 혀의 뒤쪽에서 나는 후방 음소’ o, a, u, y가 구별됩니다. 즉 반반씩 나뉩니다. 그리고 또 입술 모양이 동그란 원순 음소’ o, u, ö, ü와 동그랗지 않은 비원순 음소’ a, y, e, i의 차이가 있습니다. , 이러한 세종류의 이항대립을 조합시켜 8개의 모음(2의 세제곱)이 나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음소를 분석하면, 예를 들어 o라고 하면 열린 음소’, ‘후방 음소’, ‘원순 음소를 전부 겸하고, a라고 하면 열린 음소’, ‘후방 음소’, ‘비원순 음소를 겸합니다. 이렇듯 전부 겹치기의 존재가 됩니다.

 

모로: 그렇습니다. 변별특성의 다발이라는 것이지요.

 

시미즈: , 변별특성의 다발입니다. 무언가와 무언가를 대조(contrast)를 통해 부각시켜서 구별할 때 반대의 것이 필요하겠지요. 실제로 그렇게밖에 구별할 수 없고, 조금 더 조합해서 더 미묘하게 구별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근본적으로 다른 무엇이 있는가 하면, 가령 조금 더 복합하게 구별하는 데에서 문자로 말하면 표의문자와 표음문자가 있습니다. 표음문자처럼, 예를 들어 알파벳에서 26개 문자의 조합으로 온갖 다양성을 표현하는 경우와 한자처럼 문자를 무수히 만들어 다양성을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들 모두 다양성이 조합에 의해 생성하는 패턴을 가집니다. 그렇게 세계는 만들어진다고요. 이때 중요한 것이 정반대인 두 가지의 대조(contrast)입니다. 요컨대 요소를 엮어서 조합을 통해 다양성을 내오는 것에서 궁극의 형태는 디지털, 10입니다.

 

모로: 2의 거듭제곱이네요.

 

시미즈: 그렇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감성적으로 차이를 변별하거나 무의식으로 음소를 주의 깊게 듣고 구분하는 시점(時點)에서 이미 그렇게 됩니다.

 

카메야마: 이진법이 된다는 거네요.

 

시미즈: 따라서 신화소도 당연히 그런 식입니다. 그리고 먼저 이항대립에 착목한 다음 제3항을 내와서 그 제3항의 위치 또한 순회시켜 축약을 만듭니다. 그러면 언어나 신화적 상상력 자체가 복잡한 모습을 띠게 됩니다. 그만큼 그 한편으로 그것을 억압하거나 욕동(欲動)에 이끌리는 구조가 업()입니다. 혹은 근대철학과 같은 사상적 유형으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거죠. 해방된 곳, 불교식으로 말하면 테트랄레마적인 구조, 그곳에 구제[구원]가 있다고요.

 

모로: 여기서 조금 전의 논리 이야기로 돌아가면, 역시 인도의 논리학 혹은 인명(因明)이 다루는 것은 속성(屬性)입니다. 다르마(屬性)조합이라는 다양성과 제어에 초점을 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르마를 제어하고자 할 때 반드시 이항대립을 이용합니다. 어느 한 다르마와 그렇지 않은 다르마, 어느 한 속성과 그렇지 않은 것이라는 대비를 한 번 하고 나면 그것들의 조합에서 이건 들어맞네’, ‘이건 들어맞지 않네라는 논의를 끝없이 중첩해 가기 때문에, 그러한 의미에서의 변별일 수 있겠네요.

 

시미즈: 예를 들어 앞서 터키어의 모음 음소가 o라면 열린 음소후방 음소원순 음소인데, a의 경우에서와같이 원순 음소라는 속성이 들어맞지 않으면 다른 속성이 같아도 음소 자체가 같은 범위로 분류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가 경험적인 음미를 통해 비로소 이뤄지므로 바로 여기에 [퍼스의] 귀추법과 [야콥슨의] 음운론의 공통성이 있습니다. 속성은 구체물들의 포섭과 분류가 아니고, 오히려 속성들끼리 조합되어 다양한 구체물을 만듭니다. 그 때문에 이항대립, 이진법이 중요하고, 또 복수의 이항대립을 중첩하는 것, 구체적인 실례와 수반 등의 관계가 중요하고, 나아가 그것들이 한정된 요소로 고리를 만들고 축약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바이셰시카 학파[각주:3]라든가 불교 이외의 인도 사상 중에 엠페도클레스적인 사상이 역시 있습니다.

 

모로: 그렇습니다. 애당초 인명(因明)의 논리학 자체, 니야야 수트라등까지 포함해서 불교 밖에서 온 것이므로.

 

시미즈: 그것까지 포함해서 그 속에서 움직이는 야생의 사고를 사고하지 않으면 공해(空海) 등도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카메야마: 공해(空海)에 이르면 이항대립도 더욱 격해집니다. 태장계(胎藏界)[각주:4], 금강계(金剛界)[각주:5]의 두 만다라입니다. 그 이항대립을 통해 궁극의 자연궁극의 문화를 협상하는 곳이 금강경과 태장경의 만다라에 있습니다만. 그러니까 그러한 자연문화의 이항대립이 만다라에도 있습니다. 다른 것들도 그러한 접근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을까요? 야콥슨 등에 근거해서 한 번 더 만다라나 범어 실담(悉曇)[산스크리트 문자] 등을 사고하는 것을 지금부터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대원소와 장소(코라)

 

시미즈: 앞서 티마이오스를 논하면서 플라톤이 자신 이전에 더 훌륭한 앎이 있었다는 감각을 가진 것 같다고 이야기했는데요, 나는 그리스 문화가 당시 이미 르네상스, 곧 부흥이 아니었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아틀란티스 신화와 같은 선사 문명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야생의 사고와 그 앎을 회복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 속에서 성찰적인 사고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지 않았을까요? 야생의 사고는 인도적이기도 하며, 그래서 그들 또한 신화적, 종교적, 철학적, 논리적인 축약 모델을 훌륭하게 만들어냅니다.

 

모로: , 그때 주요 지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주어화하지 않는다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다르마를 알맹이들의 모임으로 생각할 수 있으므로 주어화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죠. 다르마가 바로 속성, 술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술어이기 때문이야말로 논리학의 언어로 말하면 경험이나 행위의 양태, 유식(唯識)의 언어로 말하면 식()과 이어질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실체, 불교적인 표현으로는 자성(自性)이 있는 것이 되는 순간 무한후퇴하거나, ‘물 자체와 같은 사고 불능의 것이 돼 버립니다. 오늘 우리의 대담에서도 이것이 큰 논점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시미즈: 양태군요. 니시다 기타로가 술어논리라는 것을 전개하고 있는데, 중요한 열쇠입니다. 티마이오스에서는 이데아 그 자체와 생성의 세계와 그 생멸이 일어나는 장소라는 세 개의 세계가 있다고 합니다. 이 논의의 첫 부분에서 사대원소가 언급됩니다. 사대원소는 상황에 따라 양태가 변하기 때문에, 술어적인 장소(코라, χώρα)로 이야기가 나아갑니다. , ‘~이다의 장소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직 물질적인(material)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데아, 형상이 각인된 부정형의 사물의 이미지이기도 해서 수용자라는 식으로도 불립니다. 장소라고 하면 무()인 것 같고 니시다가 장소의 개념을 말할 때도 그러한 인상이 강하지만, 본래 사대원소를 개량하는 형태로서 티마이오스는 장소(코라)를 말합니다. 그래서 약간 추상화돼 버린 부분이 있습니다. 본래 장소(코라)는 물질적이고 감성적인 양태와 그 변용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형상(figure)과 지면(ground)에서 지면에 해당합니다.

 

모로: 장소, 코라는 데리다식으로 말하면 무엇이든 떠맡은 근원적인 처녀성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만.

 

카메야마: 진여(眞如, tathatā).

 

모로: 나는 예전에 문자를 설명할 때에 문자는 코라다라는 표현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앞서 나온 화엄의 만다라, 라이프니츠의 네트워크에서 일부가 바뀌면 다른 모든 것이 바뀌듯이, 문자는 쓰면 쓸수록 새로운 문자가 삽입되거나 일방적으로 사용되지 않은 문자가 죽어가는 것처럼 전체의 구조가 변화해갑니다. 그러한 네트워크에서는 하나의 문자가 전체를 포함하고 있으며 전체가 하나의 문자를 성립시키고 있다는 관계를 설명할 때 코라(장소)라는 단어가 쓰일 수 있을까 싶었거든요.

 

시미즈: 이것은 매우 공해적입니다. 성자실상의(聲字實相義)적인. 그러한 상호 포섭과 조합에서 앞서 엠페도클레스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처럼 그것은 라이프니츠가 결합법론(結合法論)(De Arte Combinatoria)(1966)의 속표지에 실린 그대로입니다(그림 3). 결합법론은 라이프티츠가 스무 살 때 쓴 첫 저작입니다. 이 책도 퍼스와 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그는 관계에는 절대적 관계상대적 관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절대적 관계는 순서(ordo)라는 것으로 예를 들어 a, b, c, d 속에 b, c, d가 포함된다거나 a, c, d가 포함된다는 관계입니다. 이러한 일방적으로 포섭되는 관계가 있고, b, c, da, c, d 사이의 관계처럼 조금씩 공통항을 바꾸면서 같은 그룹 속에서 변화해가는 관계가 있어서 이러한 관계를 상대적 관계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인접성(vicinitas)이라고도 하는데요, 인접성의 관계에서 이것과 이것이 다른 경우에는 야콥슨의 음운론처럼 공통항을 가지고 있는 가운데 하나가 이진법적으로 변하는 가령 b, c, da, c, d에서 ba로 대체된다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림 3. 라이프니츠 『결합법론(結合法論)』(De Arte Combinatoria)(1666) 속표지

 

모로: 그 자체로 변별특성의 다발이네요.

 

시미즈: 라이프니츠는 여기서 출발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아닌 논리학을 만들고자 합니다. 그 이전에 라몬 룰(Raimon Llull, 1232~1315, 마요르카 왕국의 철학자이자 신학자)라는 사람이 거대한 술()’이라는 것을 고안합니다. 이것은 신을 형용하는 단어가 주어가 될 수도 술어가 될 수도 있으며 교체가 되는데, 일곱 개의 동심원 판에 그 기본 개념을 기호로 기록하고 판의 회전에 따라 각각의 명제를 도출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라이프니츠에게 힌트를 준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려 했지만 바로 이틀 전에 떠올랐던 터라 시간이 부족해서 아직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보색(補色)에 관하여

 

시미즈: 이항대립에 관해서 색의 보색 현상을 둘러싸고 시인 폴 발레리(1871~1945, 프랑스의 시인)가 주목했으며, 괴테가 색채론(민음사, 2003)에서 탐구한 것은 야콥슨이 음()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과 거의 비슷합니다. 빛과 어둠의 중간이 있는 것이 색채이고 빛에 가까운 황색을 한참 보고 있으면 보색으로서 청색이 보입니다. 왜 빛과 어둠의 중간이 색채이냐 하면, 예를 들어 스마트폰의 하얀 화면에 손을 대면 지문이 남고 더러운 그곳에 무지개색이 보이잖아요.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발레리가 말하기를, 같은 색을 보고 있으면 반대의 색이 나온다는 것은 경험을 무언가의 행위로 해소해 버리지 않도록 순수한 지각(知覺)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반전된 색이 떠오른다는 그러한 변별이 무의식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적함과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 소리라는 바쇼(芭蕉)의 시구가 있는데, 매미 소리는 느닷없이 크게 들립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보색(補色)처럼 한가함이 나옵니다. 그런 것이 많습니다. 이러한 감각이 작용할 때 , 애니미즘이 움직이는구나라는 생각이 샘솟습니다.

 

모로: 청색과 황색의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데요, 실은 아포하(anyāpoha)의 설명에서 나오는 것이 청색과 황색입니다. “청색이 청색임을 아는 것은 황색을 배제하듯이 안다라고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흑과 백이 아니라 동시에 보인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보인다는 것 속에 배제 관계를 도입해간다는 것이지요.

 

카메야마: 그것 역시 감각의 철학 같은데요.

 

모로: 보통 명상에서 청색과 황색이 함께 보이는 것을 그들은 보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왜 그럴까라는 의문에서 아포하가 비롯한 것이라서 단순히 이항대립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시미즈: 일전에 마츠오카 마사타케(松岡正剛) 씨와 대담했을 때 마츠오카 씨는 일본의 문화를 논하는 데에서 ()의 사고가 중요하고 또 일본인이 좋아하는 다양한 짝이 있다고 하더군요. 예를 들어, 감색과 금색. 이것이 때때로 다른 짝으로 교체되거나 또 다른 디자인으로 되살아나기도 합니다. 오가타 고린(尾形光琳, 1658~1716, 에도 시대의 화가이자 공예가)제비붓꽃병풍(燕子花図)도 그러합니다. 감색의 제비붓꽃이 있고 뒷배경이 금색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쌍을 의식한 이야기의 실마리로 일본 문화를 보지 않으면 가타카나와 한자라든가, 우아함과 촌스러움이라든가 그것들을 공존시키거나 바꿔치기하는 것을 바로 알지 못합니다.

 

모로: ()을 써넣는 감색의 천과 금박으로 해도 바로 그러하지요. ‘어쩐지 고급스러워서라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일종의 구조를 주워 올려야 한다고요.

 

시미즈: 실제로 하이쿠(俳句) 등도 “5월 장마 큰 강에 집 두 칸이라든지 그러한 대조가 많습니다. 이 다양한 표현형들이 문화로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것을 근원적으로 살펴보면 이진법이나 대조 그리고 제3항을 하나하나 취한다든지 하면서 변환되는 것이지요.

 

 

아뢰야식과 인과동시(因果同時)’

 

모로: 일본은 여하간 철학을 소비해버리는 경향이 있지만, 레비스트로스는 그러한 것을 넘어서서 고전이 된 느낌입니다.

 

시미즈: 프랑스 사상은 5, 10년 정도밖에 유행하지 않는듯합니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많은 사람이 여전히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은 최근 여러 사람과 대담해보고 피부로 알겠더라고요. 인류학자인 카스가 나오키(春日直樹) 씨도 학문을 레비스트로스처럼 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카메야마: 몇 번이나 레비스트로스는 끝났다라고 했지요, 1970년대부터.

 

모로: 전연 끝나지 않았지요.

 

시미즈: 레비스트로스가 무의식이라고 말한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사월의책, 2018)에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세계는 다양한 차이를 가지고 자신을 분절하거나 축약해간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정도 자율적으로 그러한 작용이 있습니다. 그 작용은 굳이 융이 아니더라도 개인을 넘어서 있습니다. 개인의 생육력(生育歷) 가운데 억압된 것은 무의식’과 전연 다릅니다.

 

카메야마: 레비스트로스는 사람이 신화를 사고한다가 아니라 신화가 신화를 사고한다라고 했지요.

 

시미즈: 레비스트로스는 라는 것은 그러한 합류점과 같은, 신화의 변환이 행해지는 장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모로: 그것은 내가 보기에 유식(唯識)’입니다.

 

시미즈: 맞습니다. 그런데 유식에서는 상분(相分)과 견분(見分)이 있고, 견분에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그 외 다양한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최근 어포던스(affordance) 이론에서 논하는 것과 비슷한 사고방식입니다. 감각이라는 것은 예를 들어 데카르트는 갖가지 감각을 뇌 속의 송과체(松果體)’가 통합해서 공통감각(common sense)을 만든다고 말합니다. 감각 레벨에서 변별이 아니라 통합이 있고 그 통합을 통해 사고한다는 것이지요. 그로부터 양식(良識, good sense)이 만인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포던스라는 인지의 존재 방식은 그것과는 명확히 다릅니다. 예를 들어 페트병을 만지는 것과 보는 것 각각의 감각은 통합되지 않은 채 존재합니다. 이렇듯 대상에 대한 접근이 촉각의 감각 모듈이거니와 시각의 감각 모듈 등으로 복수 있다는 것은 유식과 똑같습니다.

대상을 만지작거리면서 그 차이가 나오는 감각을 받아들임으로써 복잡한 정보를 얻고 있습니다. 이때 변하지 않는 대상을 불변항이라고 부른 것인데, 이것 덕분에 역으로 통합되지 않는 채 변화하는 감각의 제 요소의 차이가 변별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작용함으로써 피드백이 있고 그로부터 인지가 성립한다는 것이지요. 유식과 구조가 같습니다. 정법안장에서도 천수관음(千手觀音)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천수관음에는 손이 천 개 있고 그 각각의 손바닥에 하나씩 눈이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질문하면, ‘밤중에 자고 있고 베개를 손으로 더듬어 찾고 있고 라는 식으로 대답합니다. 이는 복수의 감각 모듈이 있고 그것과 대상 사이에 순환적인 피드백 작용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때 대상이 딱 하나 빠진 곳, 그것이 선()입니다. 바로 여기서 증대로부터 환멸문의 선회로 거꾸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카메야마: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사이버네틱스에 관해 묻고 싶어집니다. 통합된 것이 아닌, 복수의 모듈을 통해 밖에 있는 대상과 정보의 교환이 일어난다는 발상이 사이버네틱스잖아요.

 

모로: 상분(相分)이란 눈, , , , , 의지, 그에 따라 심소법(心所法)[객관적인 대상을 인식하는 정신작용] 전부에 흩어진 상분이라는 것이 발생하므로, 한 번에 얼마만큼의 식()이 발생하는지를 보자면, 가령 이 페트병에 대한 상분이 한순간에 파파팟 복수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다양한 형태로 피드백을 반복하면서 나의 경험으로 통합됩니다. 가 다양한 피드백 이전부터 있게 위장해가는 것이 유식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시미즈: 그것은 알겠습니다. 라투르는 외적 세계나 과학의 대상은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복수의 주체의 접근을 통해 누구의 의지나 예상과도 어긋나는 형태로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으며, 주체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 또한 피드백 이전부터 있는 것은 아니죠. 그러나 사후적으로 이것이 근원으로서 처음부터 있었다는 식으로 생각된다는 것이죠. 그것이 장식(藏識)[각주:6], 즉 아뢰야식입니다.

 

모로: 그러므로 인과(因果)는 동시(同時)입니다. 피드백을 시계열적으로 보면, 3 렘마를 끝으로 막혀버립니다.

 

카메야마: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제4 렘마가 아니라 태어나서 멸할 뿐인 것으로 아무 의미 없이 끝납니다.

 

시미즈: 상관성(相關性)이 아니라 이금(而今)(‘지금을 뜻하는 선불교 용어)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견분, 상분, 자증분에서 이뤄지는 식()도 다른 식에서는 상분으로 나타나며 모든 퍼스펙티브는 상호 포섭적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일방적으로 포섭하는 유일한 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이 모든 의미의 장을 일방적으로 포섭하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듯이, 이러한 상호 포섭을 공간적으로 직관할 수는 있겠으나, 이것 또한 순환하는 것이며 어느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일방적으로 흘러 지나가지 않는다는 것, 불래불거(不來不去)를 사고할 때 비로소 지금이 말해질 수 있습니다.

 

모로: 불교에서도 시계열적으로 흐른다는 이해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을 나가르주나까지 거슬러가서 제4 렘마까지 들여와서 생각해보는 것이 오늘의 결론일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매우 다양한 대화가 오갔고 명확하게 이해된 것들도 많았으며 또 숙제까지 한가득 받아안았습니다.

 

시미즈: 오늘 즐거웠고,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버렸네요. 수천 년간 인류가 사고하고 느끼긴 것들, 그리고 세계 자체가 그러한 우리에게 자신을 다양한 것으로 변별해가면서 개현해왔는지를 불교의 구조와 함께 꽤 명확하게 해부된 것 같습니다.

 

 

 

 

 

 

  1. 니야야 수트라는 고대 인도 철학의 니야야 학파의 기본 텍스트로서 인식론 및 형이상학에 관한 총 528개의 격언을 담고 있다.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총 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으로]
  2. [역주] 디그나가(480~540년 추정)는 유식(唯識)의 입장에서 인명학(因明學)이라는 새로운 불교 논리학을 확립한 불교 사상가다. 원효가 디그나가의 환생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본문으로]
  3. [역주] 인도 철학의 일파. 카나다(kaṇāda, 기원전 2~1c)가 창시한 학파로, 모든 현상은 실(), (), (), (), (), 화합(和合)의 육구의(六句義)에 의해 생성·소멸하며,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여섯 가지 원리를 이해하고 요가 수행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본문으로]
  4. [역주] 태장계는 중생의 마음에 태아처럼 감춰져 있는 진리의 세계를 뜻하며, 금강계와 더불어 밀교의 2대 법문 중 하나다. [본문으로]
  5. [역주] 금강계는 진언 밀교의 본존인 대일여래(大日如來)의 지덕의 세계를 나타낸다. 여래의 이성(理性)을 나타내는 태장계(胎藏界)에 대응하는 말로 여래의 지성(智性)의 본체인 금강지(金剛智)를 뜻한다. [본문으로]
  6. [역주] 아뢰야(阿賴耶)는 산스크리트어 ālaya의 한자의 음차표기이며 거주지, 저장, 집착을 뜻한다. ()은 산스크리트어 vijñāna의 번역어이다. 이것을 현장(玄奘)은 장식(藏識)이라 번역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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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미즈 다카시(清水高志)2023년 저작 공해론/불교론(空海論/佛敎論)(以文社)의 1부 '대담'을 https://sarantoya12.tistory.com/160 https://sarantoya12.tistory.com/161 https://sarantoya12.tistory.com/163 이어서 번역해 올려둔다. 

 


 

유출론(流出論)’을 넘어서

 

모로: 연기(緣起)에 관해 적어도 그 일부는 오늘날의 애니미즘과 오늘의 이 대화에서 어느 정도 분명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카메야마: 맞습니다. 오늘날의 애니미즘을 읽으면 좋겠네요.

 

모로: 그리고 내 생각에 시미즈 선생이 환멸문(還滅門)에 주목했다는 것이 참으로 대단한 점이 아닌가 합니다. 매우 중요한 논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는 무명(無明)에서 시작해서 행(), (), 명색(名色)을 거쳐 마지막에는 생(), (), () 등으로 이어지고, 얼핏 보면 직선적입니다.

 

카메야마: 그렇습니다.

 

모로: 그것을 거꾸로 돌리면 생(), (), ()의 원인은 이러저러하고 또 무언가의 원인은 이러저러하고, 그리고 마지막에 근본적인 무지(無知), 곧 무명(無明)으로 거슬러 가서 , 그렇네, 근본적인 무지가 문제였네!’가 됩니다.

 

시미즈, 카메야마: (큰 웃음)

 

모로: ‘알았다!’라는 느낌을 받기 쉽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카메야마: 맞아요.

 

시미즈: 그게 환원입니다. 거꾸로 환원해가는 겁니다.

 

모로: 그렇지만 십이지연기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환원으로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시미즈: 그래서 오늘날의 애니미즘에서 그 부분에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모로: 그래 보였어요.

 

카메야마: 반대로 많은 불자가 그 부분을 의식했는가 하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기이합니다.

 

모로: 아니, 평범하게 곧이곧대로 파악한 사람들이 있어요. 마음의 작용을 조금 전 이야기한 이항의 조합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평범하게 시간의 계열로 계속 흐르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어요. 이에 대해 아냐, 그건 틀렸어라고 지적한 이가 나가르주나입니다. 변화는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는 것을 중론에서 논합니다. 불교 전부가 변화라는 것을 직선으로 파악한 것이 아니거든요.

 

카메야마: 닫힌 체계랄까요, 고리 같은 것을 만드는 문제에 관해서인데요, 카마시키켄(上七軒) 문고에서 진행하고 있는 사상으로 바라보는 일본불교의 역사라는 강의에서 나는 계속해서 안넨(安然)[각주:1]을 이야기해왔습니다. 지금 여기서 오늘날의 애니미즘을 비롯해서 시미즈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한 것은 일본불교에 있어서 공해(空海) 이후 안넨(安然)과 같은 밀교 승려들이 어떻게든 말로 표현하려 한 진리의 세계가 이 순환, 닫힌 진리라는 것입니다. 환원하지 않는.

 

시미즈: 축약을 만드는 것이죠.

 

카메야마: 반대로 그것이 아닌 것이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대승불교의 논서]이지요. 이 책은 마음, 곧 진여(眞如)라는 것이 하나의 원천 같은 것으로서 언제나 존재하고, 그것으로부터 무언가가 나온다고 말하지만, 그 사이가.

 

시미즈: 유출론(流出論)입니다.

 

모로: 일원론이며 이즈츠 토시히코(井筒俊彦, 1914~1993, 일본의 언어학자이자 이슬람학자)의 이론에 가깝지요.

 

카메야마: 안넨(安然)의 저작을 읽어보면, 오히려 불변의 진여(眞如)라는 존재는 유출(流出)을 부정하는 것이며 유출 자체는 낮은 수준의 사상(事象)에 불과합니다. [대승기신론] ‘진여(眞如) 그 자체로서의 나진여(眞如)’ 사이의 닫힌 고리와 같은 것을 계속해서 표현하고자 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일방적으로 생성하는 측의 진여’, 다시 말해 중생심(衆生心)(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말하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마음)의 진여가 있어서 그로부터 생겨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지요. 생겨난 대상은 진여에서 나온 것일 뿐이고 대상과 진여는 그러한 관계라는 것이 기신론(起信論)’이라고 한다면, 안넨 등은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들이 마치 진여와의 사이에서 순환적인 작용을 하는 행위자인 것처럼 진여적인것이 된다고 합니다.

 

시미즈: 그러한 측면이 일본에서는 점차 강조되고 있지요. 그렇지만 분명 공해(空海) 또한 음소(音素)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엠페도클레스의 이야기에서 나온 사대원소에 식대(識大)와 공대(空大)가 추가된 그의 육대(六大)는 절대적으로 그것을 순환시키려 합니다.

 

카메야마: 그렇습니다. 그러나 일본불교, 특히 밀교 사상 연구에서는 유출론이 상당히 뿌리 깊은 주장이며, 게다가 그것이 완전한 착오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공해 또한 그렇게까지 철저하지 않았어요. 공해의 사상은 유출론과 가깝고, 오히려 안넨 이후에 환원주의를 철저히 전복해서 유출론을 부정해갑니다.

 

시미즈: 공해의 사상은 결국 성자실상의(聲字實相義)를 통해 접근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카메야마: , 그런가요.

 

시미즈: 저 책이 가장 화엄에 가깝지 않나요? 즉신성불의(卽身成佛義)등에도 있지만, 성자실상의에는 안과 밖이라는 형태로 상호 포섭을 말하는 부분안팎의 색()은 서로 의정(依正)으로 삼고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원론이 아니라 이항대립을 거쳐 축약을 만든 다음의 다원론입니다.

 

카메야마: 안넨의 교시문답(敎時問答)을 읽고 싶은데요, 완벽한 현대어 번역본이 아직 없습니다(웃음). 그렇지만 말씀하신 대로 성자실상의가 중요하고, 즉신성불의(卽身成佛義)에도 육대(六大) 이야기가 나옵니다. 육대는 생성하는 주체로 생각하기 쉽지만, 공해는 은근슬쩍 그런데 사실은 능소(能所)(능생과 소생), 즉 생성함과 생성됨이 별개가 아니라고 쓰고 있고, 이 구절을 읽는 사람은 모두 휙 넘길 겁니다. 그렇지만 사실 공해는 밀호(密號)를 써서 제자들에게 비밀의 말로 전달하려 했던 것이 바로 이 글귀입니다. 일단 육대(六大)가 있고 그것을 기본으로 세계의 성립을 설명하는데,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능생(能生)소생(所生)은 일방적이지 않다는 것이 그의 깊은 가르침입니다.

 

시미즈: 결국 사대원소도 이른바 주어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대원소는 능생이라는 형태로 정립된 것이 아닙니다. 원자론적 원소가 아니기에.

 

카메야마: 공해의 저작에 관한 최신 연구를 살펴보면, 역시 나라(奈良)[710~794년 나라 시대의 수도]의 도련님들에게 밀교가 무엇인지를 알기 쉽게 설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원자론적인 소위 옛 진여론적(眞如論的) 설명을 한 것인데요, 공해 자신은 결국에 시미즈 선생이 말한 대로 축약을 편성한, ‘진리우리사이의 순환 관계를 생각했고, 정말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시미즈: 일종의 상징입니다. 어쨌거나, 축약이고요.

 

카메야마: 그래서 상징과 같은 것을 아마도 수행자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매개로 활용한 것이겠지요.

 

 

불교는 초이론이 아니다

 

시미즈: 신화 이론은 어떤 의미에서는 성급합니다. 거의 모든 것을 자연의 언어로 설명해서 그것을 열어둔 채로미완의 논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거든요. 요컨대, 임의로 세계에 복잡한 의미를 부여하고 온갖 것을 변별하는 자재성(自在性)을 우선 얻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구조를 만들어 갑니다. 레비스트로스는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를 예로 드는데, 이 곡 또한 부풀어 오를 만큼 부풀어 올라 고리를 그리듯이 결말을 짓습니다. 같은 곳으로 돌아온다는 것이지요.

 

모로: 게다가 중요한 것은 More-Than-Human에서 말했다시피, 요컨대 나가르주나의 테트랄레마, 사구분별은 일종의 신비주의로 받아들여지는 면이 있습니다. 공해도 그러했고요. 길장은 어떻게 이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길장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게 문제지요.

 

시미즈: (웃음)

 

카메야마: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이 길장에 관심이 없습니다.

 

시미즈: 나는 삼론현의(三論玄義)를 읽고 길장 대단한 천재구먼. 300년에 한 번 나오는 천재!’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로, 카메야마: (큰 웃음)

 

모로: 나가르주나의 이렇듯 복잡한 논의가 해체주의(Deconstrution)와 결부되면 더는 닫히려 하지 않고 여하간 해체, 해체, 해체를 목적으로 해서 ()’을 파악하려 합니다. 그런데 작금의 시미즈 선생의 가장 큰 공헌의 하나는 아니, 그게 아니지라는 입장을 내온 것입니다. 물론 아직 일반인은 이해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오늘날의 애니미즘을 읽으면 지금 이야기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카메야마: 이제부터 읽을 수밖에요.

 

모로: , 앞서 인도의 논리학책에 쓰여 있다는 엄청난 수수께끼 같은 초항이며 중항이며 말항이며 등등 인도인이 쓴듯한 문장도.

 

시미즈: 티마이오스입니다.

 

모로: , 알지요.

 

카메야마: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모로: 중요한 것은 [불교가] 기이한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고, 적어도 이성적이랄까요, 논리적인 것으로서 불교의 이러한 논의가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학술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매우 큰 공헌이라고 생각합니다.

 

카메야마: 그럼요!

 

모로: 굳이 말하면 논리를 알면 훤히 보이거든요. 죽어도 모르겠는 의미를 서서히 알게 되고 오히려 깔끔하게 정리가 됩니다.

 

카메야마: 오늘날의 애니미즘은 두 번 이상 읽어야 합니다. 우선 공저자인 오쿠노 선생과의 대담까지 포함해서 읽고 그것을 머리에 집어넣은 다음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전부 봤다라는 느낌이 들어요.

 

모로: 요컨대 레비스트로스의 용어를 빌어 말하면 구조를 만들어 보여 준 것이 큽니다.

 

카메야마: 그렇습니다. ‘구조라는 말도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구조라 하면 역시 무언가 환원 가능한 토대라는 의미로 이해되거든요.

 

시미즈: 그 점에서 보면 구조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사고방식을 구조언어학 소쉬르의 발상과 혼동하고 있는 듯합니다.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는 소쉬르의 제자가 정리한 것인데, 경제학 모델의 영향이 큽니다. , 경제학에서 말하는 가치 형태론이 확실히 배어있어요. 상품의 가치형태란 공시적으로 화폐를 매개로 어느 한 상품과 다른 모든 상품이 간접적으로 교환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세세한 물가 변동에 따라 통시적인 축에서 가치형태가 변한다 해도 공시적으로는 일거에 그 차이가 체계로서 주어집니다.

 

카메야마: 그렇습니다.

 

시미즈: 레비스트로스는 그렇지 않습니다. 볼레로처럼 이항대립의 제3항이 빙빙 돌아서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비유하자면, 소쉬르의 구조 개념은 여러 개의 풍선을 하나로 묶어 손에 쥐고 있으면 반발하는 풍선들 사이의 그 차이의 체계입니다. 이 의미로 구조를 말하면 좀 더 통시적인 축에 의해 차이화 해야 한다는 논의가 반드시 나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말한 것이 포스트-구조주의입니다. 그렇지만 레비스트로스가 직관적으로 통찰한 구조에는 더욱 깊은 무언가가 있습니다.

 

 

주어성에서 속성으로

 

시미즈: 사실 순회시키는 가장 단순한 형태를 레비스트로스는 말했습니다. 이것은 숫자상으로 말하면 클라인 4원군이라는 것으로 두 종류의 이항대립을 조합시키는 방식입니다. 여기서는 알기 쉽게 이항대립을 색과 모양으로 하겠습니다. 하양과 검정이 있고 사각형과 원이 있다고 합시다. 이것을 조합해서 순회하는 구조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그림 1과 같습니다. 여기서 검은 사각형과 하얀 사각형에서 사각형을 축으로 보면, 사각형은 하양검정이라는 반대 성질을 겸하게 됩니다. , 사각형은 제3항인 것이지요. 그러나 예를 들어 하양을 축으로 보면 하얀 원과 하얀 사각형에서 하양은 사각형이라는 반대의 성질을 겸합니다. 이때 하양이 제3항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양’, ‘검정’, ‘’, ‘사각형은 모두 이항대립의 제3항의 위치를 점하며 그 역할이 순회합니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학에서 매우 복잡한 논의를 전개하지만 친족의 기본구조에서는 더욱 단순한 순회, 축약의 모델을 제시합니다.

그림 1. 클라인 4원군

잘 알려진 그림이 있지요(그림 2). 레비스트로스는 오스트레일리아 선주민 카리에라족의 혼인규칙이 클라인 4원군과 같은 구조임을 깨닫습니다. 이것을 프랑스인이 알기 쉽도록 파리와 보르도라는 지역의 이항과 뒤랑 성씨와 뒤퐁 성씨라는 가문의 이항을 조합해서 설명한 것이 이 그림입니다. 여기서 결혼하는 부계의 토지에 살며 성은 모계를 따르는 규칙이 있다고 하면, 보르도의 뒤랑 성씨의 여자가 파리의 뒤퐁 성씨의 남자에게 시집가면, 그 자식은 파리의 뒤랑 성씨가 됩니다. 또 파리의 뒤퐁 성씨의 여자가 보르도의 뒤랑 성씨와 결혼하면 그 자식은 보르도에 살면서 성은 뒤퐁이 됩니다. 이런 식으로 돌아 결혼 관계는 그림 2에서 점선 γ로 표시됩니다. α라는 화살표가 어머니와 자식. 파선 β는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가 됩니다.

그림 2. 카리에라유형 혼인규칙

기본적으로 이것이 바로 삼분법의 형태입니다. 이항대립을 겸하는 제3, 3 렘마에 모든 항이 걸리고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구조가 됩니다. 이것을 말한 시점(時點)에서 원인으로서 포함하는 것/포함되는 것의 이항대립도 풀립니다. 그 세 종류의 이항대립이 최소의 축약입니다. 이제 아시겠지만, 이러한 구조는 닭싸움 서열(picking order)’과 같습니다. 그림 3에서처럼 AB를 찌르고 BC를 찌르고 CD를 찌르고 DA를 찌릅니다. 마치 닭들이 서열 싸움하는 것 같죠. 신화의 구조는 이런 식이라는 것을 레비스트로스는 말합니다. 그런데 이항대립의 두 항을 그것들의 이중성으로 풀어내는 방식이라고 하면, 가령 이 그림의 위와 아래를 원 오퍼레이션(one operation)”[점원 혼자서 점포를 운영하는 것]으로 교체할 뿐이면 상관적인 것에 머뭅니다. 각각의 항을 다른 항에 일방적으로 환원하지 않는(포함하지 않는) 것으로서 완전히 분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분리하기 위해 비틀어야 합니다.

그림 3. 닭의 서열 싸움처럼 제3항의 위치가 대체된다. 이것이 '축약'을 만들어낸다.

모로: 이게 바로 비트는 것이군요.

 

시미즈: 그래서 이처럼 비틀었을 때 마침내 그 항 자체의 본래의 성질도 나옵니다. 애니미즘적 자연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모로: , 이제야 애니미즘이라는 말이 나왔네요.

 

카메야마: 전부 애니미즘의 이야기인데 말이죠.

 

모로: 맞습니다. 전부 애니미즘을 이야기하는데도, ‘이것이 애니미즘이야!’라는 프레임으로 말하는 것이 오늘날의 애니미즘이죠.

 

시미즈: 그렇습니다.

 

모로: 드디어 이 책에 도착했네요(웃음).

 

카메야마: 조금 전 친족의 기본구조가 나왔는데요, 그것은 사회 속에서의 혼인 관계와 금기를 이야기하고 있고, 또 그러한 혼인의 사회관계는 지금의 PC(정치적 올바름)와는 상응하지 않습니다. 여성의 교환 체계로서 이해하고 그로부터 금기의 문제 등을 재해석한 것입니다. 레비스트로스가 그 속에서 보여주려던 혼인 체계혼인 관계가 만들어지는 과정는 교환에 교환을 복잡하게 거듭하다 최종적으로는 말끔하게 닫아버리죠.

 

시미즈: 그 과정이 매우 복잡한데요, 모든 항이 다른 이항대립의 두 항의 성질을 겸한 제3항이 되며 그것이 순회한다는 클라인 4원군의 구조로 모델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화 구조, 즉 작용으로서의 신화소에 대한 무의식적 조작에서 찾아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신화학입니다. ‘이 나온다거나 연초가 나온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건 정말로 복잡해서 수습이 잘 안 되지만.

 

모로: 그런 것도 결국 불교로 바꿔보면, 예를 들어 중론2장이 되지 않을까요?

 

시미즈: 그렇습니다. 어떤 양태나 속성에 대해 그것이 속하는 주어를 내세워서 이해해 버리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주어를 내세우고 주어가 있으니까 당연히 그런 양태인 거지라며 그 양태의 원인을 주어 측에 돌려버리는 것은 항에 자성(自性)(자기 원인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로부터 바텀-업으로 사고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자성이 없다는 것이 무자성(無自性)으로 ()’이라는 겁니다.

 

모로: 맞습니다. 그래서 그 주어성을 양태나 술어로 가지고 와서. 그런데 그 술어라는 것은 다르마(속성)이고요. 조금 전에 이야기했지만, 대립하는 속성과 속성, 요컨대 항과 항의 바꿔 쓰기를 도입해야 합니다. 도입하지 않으면 막다른 길에 도달하고 만다고 지적한 것이 팔불(八不)’이며 중론입니다. 이것을 More-Than-Human에서 이야기하지요.

 

시미즈: 결국 중론에서는 사구분별(四句分別)을 논하면서도 그것을 전부 부정합니다. 이는 주어로서 내세워진 것에 대해 사구분별을 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구조 그 자체로 이야기하자면, 나가르주나는 네 종류로 충분할 것으로 보고 팔불로 짜냅니다. 내가 중론을 깊이 파고들기 시작한 것은 왜 사구분별이며 왜 테트랄레마인지 의문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모로: 나가르주나는 니힐리스트라고들 하지요. 즉 부정만을 이야기한다고요. 그렇지만 실은 부정이 들어가지 않으면 이항대립이 나오지 않습니다. A가 있으면 A를 가져와야 이항대립을 만들 수 있기에, 부정이 절대적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전연 아닙니다. 나가르주나는 붓다의 연기(緣起)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시미즈 선생 식으로 말하면 주어화 해서는 안 되므로 그 속성의 다시 쓰기를 복수로 준비해서 그것들을 순회하는 구조를 만들어놓으면 연기를 깔끔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에 따라 그것은 부정이 아닌 겁니다. 요컨대, 무한의 부정이라거나 무한의 해체가 아닙니다.

 

카메야마: 고정화된 이원론을 전제로 하면 그렇게 되겠지만 그런 얘기는 한마디도 안 했고요.

 

시미즈: 확실히 안 했습니다.

 

모로: 그래서 무한한 후퇴나 무한의 부정이 싫은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을 때 보통은 진여(眞如)’라고 말하지요. 거꾸로 말하면 궁극의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종결점이랄까요, 최후의 받침대 같은 것을 만들어서 이것만 있으면 전부 설명 가능하다는 식으로요. 불교적인 일원론이 돼 버립니다. ‘()’이란 그런 것으로 이해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하면 결국 설명하고 있지만 전연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시미즈: 초이론(超理論)이 된 것이지요.

 

모로: , 초이론. 그렇게 신비주의가 되었고요.

 

시미즈: 모든 이항대립의 분절 이전을 말하며, 요컨대 이원론을 하나로 뭉쳐버립니다. 그리하면 여럿이라는 문제가 숙제처럼 남게 됩니다. 하루속히 풀어야 하는 근원적인 이해대립의 문제를 뒷전으로 미루게 되고, 그것이 닫힌 고리로 거둬지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포스트모던의 끝나지 않는 상대주의와 똑같습니다.

 

카메야마: , 그렇네요.

 

모로: 그렇죠. 그리고 그것이 메이야수가 부정한 상대주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말로 메이야수는 길장(吉藏) 그 자체입니다.

 

시미즈: 무궁을 기피한 길장은 회의론적 상대주의를 부정한 메이야수와 통할 수 있겠네요. 유한성 이후를 보면 인류미생이전(人類未生以前)[선조이전성]을 논하는 데에서 자신의 사후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자신의 사후의 삶이 있을지 없을지를 묻고, 있으면서 또한 없다는 식의 제3 렘마적인 상대주의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제4 렘마적인 것이 단적으로 나오는데, 이야말로 사변적 철학자다운 로직이지요. 그래서 정말로 , 이건 나가르주나다라고 생각하면 읽었어요. 그레이엄 하먼도 매우 불교에 가깝습니다.

 

카메야마: 내가 밀교(密敎) 연구자라서 그런지 하먼이 밀교로 읽히더라고요. 사물을 그 자체를 구성하는 내부적 관계로 환원하는 하부채굴(undermining)과 외부적 관계로 환원하는 상부채굴(overmining)이라는 두 종류의 환원주의를 배제하고 사물 그 자체를 보고자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밀교에서 말하는 즉사이진(卽事而眞)’과 상당히 가깝습니다.

 

시미즈: 하먼은 장작과 불의 비유를 드는데요, 이것은 중론10장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거의 똑같습니다. 이슬람을 거쳐 전해진 비유를 하먼이 가져온 것이지요.

 

  1. [역주] 안넨(安然, 841~915 추정)은 헤이안 시대의 승려로서 천태종 밀교의 대성자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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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미즈 다카시(清水高志)2023년 저작 공해론/불교론(空海論/佛敎論)(以文社)의 1대담’을 사막여우 :: 시미즈 다카시_공해론/불교론_1 (tistory.com), 사막여우 :: 시미즈 다카시_공해론/불교론_2 (tistory.com) 에 이어서 번역해 올려둔다. 


 

연기(緣起)’이이변(離二邊)’의 근저에 있는 것

 

시미즈: 밀려드는 실재에서 철학에서의 줄기세포 같은 것을 생각하려고 했는데요, 그것이 종교에서는 애니미즘입니다. 엠페도클레스가 한 것은 무엇이고 하면, 대립하는 이항이 우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항의 속성양태를 꺼내어 근접한 별종의 이항대립을 도출합니다. 이것은 앞서 마름()’이나 습함()’과 같은 것입니다. ③ ②의 이항대립을 우선 분열시킵니다. , 최초의 이항대립에 그것들을 결합하면 제3항적인 그 항이 대립 이항을 겸합니다. 이것이 매개이며 제3 렘마입니다. 그리하여 3항의 역할을 모든 항이 맡게 되며 모든 이항대립에 대해 어떤 항도 원인이 환원되는곳이 아님이 증명됩니다(표 1 참조). 여기서 가 레비스트로스가 구조라고 말한 것인데요, ‘매개라는 형태로 조정하고자 하는 것 그리고 빙 돌아 제3항의 위치를 순환시킴으로써 축약하는 모델을 만드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리가 닫히는것입니다. 레비스트로스가 구조라고 말하는 것은 이 축약이라는 제4 렘마에 관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로써 야생의 사고는 비유적인 형태일지라도 세계를 환원적이지 않게 설명하는 모델을 만들어냅니다.

 

표 1.

대립하는 이항이 있다.

그 이항의 속성’ ‘양태를 꺼내어 근접한 별종의 이항대립을 도출한다. (이항대립의 분열)

그것들을 최초의 이항대립 항과 결합하면 제3항적인 그 항이 대립 이항을 겸한다. (매개, 3 렘마)

3항의 역할을 모든 항이 떠맡아 모든 대립 이항에 대해서 어떤 항도 원인이 환원되는곳이 아님이 증명된다. (축약, 4 렘마)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을 읽으면 신화의 사고가 왜 이런 형태를 취하는지, 왜 이렇게 생각한 것인지 어리둥절합니다. 그러나 확실히 신화 이론에서 나오는 대비 항, 곧 이행 대립하는 요소 사이에는 긴장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신화 속에서 긴장 관계가 있는 그것이 어찌 됐든 해결됩니다.

3항적인 것이 하나둘씩 나오고, 그것들이 순회함으로써 모두 해결됩니다. 예를 들어 문화라는 것에 대해 날것익힌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익힌 것먹을 수 있는 것이자 문화적이라는 사고가 생겨나고 익혔더라도 먹을 수 없는 연초(煙草)[담배]’라는 것이 나오고 익히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이것이 제3항을 만들어내는 방식입니다. 그 제3항인 연초가 나아가 신화 속에서 멧돼지의 기원과 결부되는 식으로. 그래서 무엇을 하려는가 하면 빙 도는 순회를 만들고자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항대립을 해결하고자 하며 한쪽으로 치우치지 못하게 하려 합니다.

 

카메야마: ,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시미즈: 이러한 방식은 복수의 이항대립 간의 일종의 비틀림입니다. 비틀어서 포함하는 것/포함되는 것과 같이 어느 한쪽도 자동으로 원인이 되지 않는 형태로 풀어내는 것입니다. 이데아가 그랬고요. 이에 따라 이항대립은 최소 3개가 되어야 합니다. 비틀기 위한 두 종류와 포함하는 것/포함되는 것까지 해서 세 종류. 표 1번 단계에서 그러면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서 테트랄레마가 나옵니다. , 어떤 항도 원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연기(緣起)의 문제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이이변(離二邊)의 중도(中道)’가 있고 그것이 풀려갈 때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부분에서 제4 렘마가 성립합니다. 불교가 사고한 것이 이것입니다.

따라서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이이변의 중도를 불교는 처음부터 사고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복잡한가 하면, 그것은 훨씬 오래전부터 야생의 사고의 철학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러한 이항대립을 복수 조작하는 것으로서 행위자 연결망 이론을 앞서 언급했는데요, 그것이 현재 제기된 비주류적인 사고방식인가 하면 전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잘 살펴보면, 과학기술론(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분야에서는 그러한 사고가 거의 패권을 장악해가고 있습니다.

 

카메야마: 행위자 연결망 이론 말씀이죠?

 

시미즈: . 그래서 라투르와 미셸 세르의 학문적 계보가 파리학파로 불리기도 하는 것 같더라고요. 과학은 인간의 사회적 합의로 만들어진다고 주장하는 사회구성주의 학파 그리고 그와 반대로 사물의 행위성(agency)을 주장하는 학파 등으로 크게 두 분파로 나뉘는 듯합니다. 이에 따라 사이언스, 철학, 인류학까지 융화하는 이론으로서 ANT는 전연 곁길이 아니에요.

 

카메야마: 사도(邪道)가 아니라 왕도(王道)이지요.

 

시미즈: 맞아요, 왕도입니다. “이것은 유식(唯識) 아닌가?”라고 앞서 말했던 것이 과학과 기술의 혁신방식을 고찰하는 사회학에서 광범위하게 왕도화해온 겁니다.

 

카메야마: 카마시키켄 문고에도 몇 번 나왔던 내 친척인 자연과학자가 있는데요, 그는 라투르를 아주 좋아해요. 그 자신의 본직은 생물학, 구조생물과학입니다. 그는 실험실에 관한 라투르의 논의에 전부 공감하고 연구대상이 가진 행위성 등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제 본류인 듯합니다.

 

시미즈: 본류가 되어가고 있죠. 그러한 입장이 아니라면, 인간집단이 모두 사회적 합의에 근거해 만든 것이 과학의 진리라는 해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로: 그것은 사회구성주의라고 불리는 것이죠.

 

시미즈: 사회구성주의를 밀어낼 수밖에 없어요. 오히려 사회구성주의 쪽이 과학에 대해 회의적인, 나쁜 의미에서 가치 상대론이라고 비판받고 있어요. 반면 행위자 연결망 이론에서 복수의 행위자(actor)가 합세해서 과학의 대상을 만든다는 것은, 실제로도 그렇지만 대상 측의 능동적인 작용에 의한 피드백 루프(feedback loop)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한 과학, 즉 사이언스가 가능한 상황을 살펴봐야 합니다. 덧붙이면 그 속에서 만들어진 무언가의 다양한 행위자의 작용 결절점이 되는 것이 또 다른 결절점을 만들기 위해 동원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과학 및 기술 전체를 조망하는 모델을 만들려면 이렇듯 거대한 네트워크를 사고해야 합니다. 이것은 오히려 라투르보다 더 앞서서 세르가 말한 것입니다. 결절점들이 대상에 대한 접근을 비트는 방법을 동원해가며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상호 간섭하는 것으로서 학문 전체가 있다고요. 이러한 사고방식은 세르보다 훨씬 오래전에 라이프니츠가 무궁무진한 단자(單子, monad)의 세계로서 논한 것입니다.

 

 

축약으로서의 삼분법

 

카메야마: 또 한 가지 인류학 등의 이른바 실천적인 사례에서 봤을 때, 브리콜라주(Bricolage)의 궁극은 이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미즈: 브리콜라주. 요컨대 라이프니츠는 관념이란 사물이 체현하는 사고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원뿔곡선이라는 관념이 있다고 한다면, 원뿔곡선의 사례를 하나하나 들어 그것들이 관념을 체현한다고 말하기에는 사례가 끝도 없이 나옵니다. 그래서 라이프니츠는 원뿔이라면 원뿔인 사물이 있고 그것을 절단한 단면의 둘레가 원뿔곡선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형태에서 그것이 관념으로서 모든 것을 포괄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연속체 합성의 미궁이라고 해서 라이프니츠가 오랫동안 고민한 문제에 대한 그 나름의 해결법이지요. 다시 말해 관념을 바텀-업으로 사고하면 끝이 없으므로, [각각의 원뿔이] 전체로서 모든 원뿔을 포괄하는 것으로 본다는 겁니다. 구체물(질료)이 이데아(형상)를 포함한다는 것을 라이프니츠는 그런 식으로 생각한 것이죠. 그리고 과학이라는 것 또는 세계라는 것은 구체물(질료)과 이데아(형상)가 포함하는/되는 관계에 있으며, 그 속에 다른 구체물(질료), 다른 이데아(형상)가 점점 빨려 들어가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거대한 네트워크를 이룹니다.

바텀-업의 발상이란 기원이 뚜렷한 원자론(atomism)입니다. 라이프니츠의 해결법은 그것이 아니라 질료가 형상을 포함하는 가운데 대상에의 접근 방법에서 상호 대체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피라미드와 장대의 관계를 들 수 있습니다. 장대의 높이와 그림자의 길이가 1:1이 되는 바로 그 시각에 피라미드의 그림자 길이가 곧 피라미드의 높이가 되겠지요.

 

카메야마: 그것은 사물끼리.

 

시미즈: , 사물끼리 같은 형상성을 공유하고 있으며 같은 형상성을 통해 서로에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형상성을 축으로 접근하면 피라미드와 장대라는 구체물이 서로 대체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장대 높이와 그림자 길이의 비가 1:1이 되는 그 시각에 피라미드의 그림자 길이를 측정함으로써 피라미드의 높이를 알 수 있습니다. 또 반대로 피라미드나 원뿔이라는 구체물에서 복수의 형상성을 따올 수 있습니다. 원뿔곡선에서 둥근 것이나 이차곡선에서 표현되는 것을 형상화할 수 있고, 원뿔이라는 구체물에서 형상성의 측면에서 미묘하게 다른 것들을 따올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질료와 형상, 하나와 여럿이라는 관계의 조합과 그 비틀림이 있습니다.

세계에 있는 무언가는 그림자를 드리우는 피라미드와 같이 서로 다른 것에 대해 무언가의 정보를 제공하는 형상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들이 서로에게 서로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라이프니츠의 단자론(Monadologie)이란 바로 그러한 사상입니다.

 

카메야마: . 그래서 지금 왜 브리콜라주가 떠올랐는가를 곰곰이 따져보면, 바로 선생이 이야기한 원자론과 그 정반대에 놓인 단자론의 대비가 브리콜라주를 둘러싼 레비스트로스의 논의에서 나온다는 것이죠. 레비스트로스는 공장적 사고, 즉 공장 안에서 원료로부터 생산라인을 거쳐 만들어진 것과 주변에 널린 것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브리콜라주를 대비하는데, 이 대비가 원자론과 단자론의 대비와 평행을 이루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시미즈: 결절점이자 초점이 되는 것이 다른 복수의 결절점을 동원하면서 또 다른 초점과 대체되어 옮겨갑니다. 특정한 시작점 없이 대상이 그런 식으로 하나둘씩 만들어진다는 것이 바로 브라콜라주입니다. 요컨대 신화학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관계(구조)와 그 항(요소)과의 관계가 평평한 것이 신화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그는 신화공식이라는 형태로 표현합니다. (요소)이 축적되어 관계(구조)가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관계(구조)만 남고 항(요소)이 바뀌는 일도 일어납니다. [브리콜라주에서] 재료가 주어지는 것도 그런 식입니다.

바텀-업이 아니라는 것, 즉 원자적이지 않은 그것에서 브리콜라주라는 기묘한 대상제작이 일어나고, 그 궁극이 단자론이라는 것은 흥미로운 지적입니다.

 

카메야마: 정말 흥분됩니다. 레비스트로스를 연구하는 데에서 큰 의문 중의 하나는 야생의 사고에서 신화학으로의 비약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였는데요, 레비스트로스가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 나아간 것이라는 해석도 있지요. 그런데 시미즈 선생은 그러한 해석을 다른 형태로 이야기하면서 인식론이자 존재론이기도 한 것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시미즈: 내 논의는 일관적이며, 레비스트로스에 관한 그러한 의문까지 포괄합니다. 조금 전 엠페도클레스 이야기를 하면서 그림을 하나 설명했지요. 그 그림을 응용해서 페르메니데스와 플라톤의 대화를 또 하나의 표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 전자와 후자가 같은 구조라는 겁니다.

 

표 2.

포함하는 것’(이데아, ‘보편’)포함되는 것’(감성적인 것, ‘개별’)의 이항대립이 있다. (이데아가 감성적인 사물에서 분리돼 버린다.)

포함하는 것’, ‘포함되는 것기능속성으로부터 각각 하나인 것여럿인 것이라는 이항대립이 도출된다.

그것을 질료’, ‘형상등 다른 이항대립의 항과 결부하면, 3항적인 그 항이 대립 이항을 겸한다. (매개, 3 렘마)

3항의 역할을 모든 항이 맡고, 모든 대립 이항에 대해 어떤 항도 원인이 환원되는것이 아님이 증명된다. (축약, 4 렘마)

 

포함하는 것’, 이것은 이데아입니다. 그것과 포함되는 것’, 즉 감성적이며 구체적인 것들 간의 이항대립과 괴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후기 플라톤에 있어서 난제가 됩니다. 그렇다면, 포함하는 것’, ‘포함되는 것기능속성으로부터 각각 하나인 것여럿인 것이라는 또 다른 이항대립이 도출되며 분열합니다. 이것은 엠페도클레스의 이야기와 똑같은 시나리오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의 이항대립을 다른 이항대립이것은 예를 들어 주체/대상일 수도, 의외의 다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앞서 살펴봤듯이 질료/형상이라는 이항대립에서 사고한 것이 라이프니츠입니다.의 항에 결합해서 비트는 조작을 하면 제3항적인 그 항이 대립 이항을 겸합니다. , 주체이면서 하나라든가, 대상이면서 여럿이든가 하는 식으로요.

그것은 또한 이 두 종류의 이항대립의 네 개의 항 어느 것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체로서 모든 대립 이항에 대해서 어떤 항도 원인이 환원되는것이 아님이 증명됩니다. , 3항의 위치가 순회해서 고리를 만드는 축약이 나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결국 삼분법에서 어째서 거기까지 구조를 만들려고 했는가 하면, 그렇게 해서 축약의 운동을 최단으로 순회시킨 것이지요.

 

모로: 그렇네요.

 

시미즈: , 오래전부터 인류와 함께한 사상을 [삼분법은] 최소단위에서 모델화한 것입니다.

 

 

상의성(相依性)’은 순회한다

 

시미즈: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입니다. 획획 읽으면 그 의미를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이것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신은 만유의 신체를 구성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을 불과 흙으로부터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제3의 것 없이는 잘 결합할 수 없다.’

 

카메야마: 아아. (웃음)

 

시미즈: 다음 그대로입니다. ‘양자의 중간에서 그것들을 결합하는 어떤 끈과 같은 것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상을 하는 겁니다. 완전히 야생의 사고지요.

 

카메야마, 모로: (웃음)

 

시미즈: ‘그러나 끈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끈은 그것이 연결하는 것을 자기 자신과 완전하게 하나로 만드는 것이며, 비례(比例)[라는 끈]가 그것을 본성상 가장 훌륭하게 잘 해낼 수 있다.’ 그래서 그다음에 이어지는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 개의 수 가운데 임의의 입법수(立法數)든 평방수(平方數)[제곱수]든 중간에 있는 중항(中項)이 있어서 초항:중항이 중항:말항과 같고, 반대로 말항:중항이 중항:초항과 같은 관계가 성립한다고 하면, 이때 중항은 초항도 말항도 되며 또 말항과 초항은 양쪽 모두 중항이 되며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은 반드시 같은 관계가 되며, 그렇지 않으면 모두는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입법수(立法數)나 평방수(平方數)라는 것은 너무 커서, 예를 들어 등비수열 2, 4, 8로 설명하면, “초항중항이 중항말항과 같다라는 것은 2448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항중항이 중항초항과 같다라는 것은 8442. “이때 중항은 초항도 말항도 되며도 성립합니다(4284). 그래서 말항과 초항은 양쪽 모두 중항이 됩니다”(4284). 이것이 방금 이야기한 겁니다.

이것은 순회해가는 야생의 사고그 자체입니다(웃음).

 

카메야마: 이거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이라고 재규어와 무언가가 대립하는 것이라든지 그 대립을 겸한 제3항이 나온다든지 또 그 제3항에 대립하는 것이 나온다든지. 결국 그것들의 구조가 닫히는 것이죠, 신화라는 것은.

 

시미즈: 고리를 만들고 닫는다. 바로 이겁니다. 그러함으로써 무한히 제3항이 이리저리 뻗어가는 것만이 아닌 이론이 만들어집니다.

 

카메야마: 그렇게 하는 것이 또한 환원주의를 넘어설 수 있을까요?

 

시미즈: , 넘어설 수 있습니다. 연기(緣起)에 대해 길장(吉藏)은 다른 원인에 의해 결과가 초래할 뿐이라면 연기가 무궁해지므로(원인이 무한소행(無限遡行)하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모로: 결국 무인(無因)이 되므로 안 된다는 거네요.

 

시미즈: 어떤 결과가 다른 무언가의 원인으로부터 생긴다고 말해버리면, 그 다른 원인은 무한소행(無限遡行)하게 되므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길장은 이것을 무궁해진다라고 표현하며 거부합니다. 그래서 어떤 것에 자성(自性)이 있다(자기원인이다)라고 하면, ()이 필요 없어져서 무인론(無因論)이 된다고요. 이에 따라 연기(緣起)가 무궁해지지 않기 위해 축약(縮約)이 생겨나야 합니다. 이러한 축약을 가장 간단하게 정의해서 AA만으로 만든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상의성(相依性)’입니다. ‘A가 있어서 A가 있다. A가 있어서 A가 있다’ ‘A가 없어서 A가 없다. A가 없어서 A가 없다.

 

카메야마: 오늘날의 애니미즘의 나가르주나의 해석에서 나온 것이지요.

 

시미즈: ,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티마이오스에서 플라톤은 현상세계가 세 갈래로 나뉜다고 말합니다. ‘이데아 그 자체생멸(生滅)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멸이 생겨나는 장소가 있습니다. 생멸이 생겨나는 장소란 이데아(형상성)를 수용하는 더욱 추상적인 토대입니다. 요컨대 원인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생멸의 세계, 곧 제3 렘마의 세계를 한번 경유하는 것이지요. 불교에서도 제3 렘마의 세계를 생겨나는 쪽과 사라지는 쪽의 양쪽으로 가르지요. 이를테면,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에서.

 

카메야마, 모로: 네네.

 

시미즈: 순관(順觀)과 역관(逆觀)(혹은 환멸문(還滅門))이 있어서 그 조작을 자세히 살펴보면, 순회해서 축약이 생겨나며, 이 논리는 상의성(相依性)이 되게 돼 있습니다.

 

카메야마: 그렇네요. 이 부분은 정말로 읽으면서 어라!’ 했어요.

 

시미즈: 야생의 사고를 한 번에 짧게 표현하면 상의성(相依性)이 됩니다. 그리스 시대 이후 유럽에서는 이것을 앞서 서술한 이중성의 논리에서 해결하고자 했고 닫히지 않는 형식을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시간은 흐름이 없다

 

모로: 위와 같은 식으로 유식(唯識)의 아뢰야식(阿賴耶識)과 연기(緣起)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순환을 만들어놓고 그것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을 논증합니다. 앞서 그림에서 위에서 아래로 다시 쓰는 것 같은, 그러한 관계를 상의성(相依性)으로 순환시키는 것이 연기(緣起)입니다. 이것은 아뢰야식에 대한 설명에서 잘 나오는데요, ‘항상 구르는 것, 폭류(暴流)[거친 흐름]와 같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흐름이라고 쓰여 있어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아니면 위에서 아래로 무언가가 시계열적으로 흘러간다고 상상할 수 있지만, 성유식론(成唯識論)이라는 문헌을 보면 오로지 흐르기만 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흐르는 게 아니라 그 현장에서 전체의 다시 쓰기가 일어난다는 것을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림. '동시(同時)'의 문제

아뢰야식은 항상 구르는 것, 폭류와 같다(恒轉如暴流). 폭류가 물밑에서는 고기를, 물 위에서는 수초 등을 띄우고 흐름에 놔둬도 놓치지 않듯이 아뢰야식도 마찬가지다. 내측의 잔기(殘氣)(습기(習氣))와 외기(外氣)의 접촉 등의 법(다르마)이 언제나 서로에게 야기하는 것(隨轉)이다.

 

카메야마: ‘다시 쓰기라는 것은 모로 선생이 유식을 말하는 데에서 핵심어군요.

 

모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세계 속의 행위, 세계의 주어진 네트워크 속에서 일어나는 행위에서 누군가의 무언가를 통해 세계 전체가 단번에 다시 쓰이는 것입니다.

 

카메야마: 파급해간다.

 

모로: 파급은 아닙니다. 단번에 다시 쓰인다. 동시(同時)이기 때문에.

 

카메야마: 그런가요? 파급이라고 하면 단계적이니까요?

 

모로: 그렇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일상적 감각에서는 단계적으로 주변의 영향이 침투해올지 모르지만, 누군가의 행위나 사물의 변화는 그것이 모든 세계의 부분이자 전체이기도 하므로 그것들이 단번에 [세계를] 다시 쓴다는 주장입니다. 그 변화를 흐름이라고 말해두면서 오히려 끝없이 순환적인 동시성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그것을 폭류(暴流)’라고 말하는 것은 흐른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물밑과 위의 이야기라는 것을 표현하는 겁니다. 강이 그 물 위에 수초를 띄우고 흐름에 놔둬도 놓치지 않듯이, 또 물밑에는 물고기가 헤엄치듯이, 그것과 마찬가지로 흐름 곧 변화의 안과 밖이라는 것이 동시에 그러한 변화를 지지하고 있다는 그러한 어투입니다. 이것이 처음은 무슨 뜻인지 잘 몰랐어요. 흐름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흐르는 거겠지 생각했거든요. 흘러가는 강을 상상하지 않겠습니까?

 

카메야마: 물결이죠.

 

모로: , 물결을 상상하게 되죠. 그러나 폭류는 상호순환을 말합니다.

 

카메야마: 폭류는 상의성(相依性)이네요.

 

시미즈: , 세계의 창조라는 것의 극점에서 네트워크의 결절점 하나하나가 이어진다고 생각하면 그러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로: 그렇습니다.

 

시미즈: 그것을 폭류와 같은 변화를 끼고 나아가 그 위와 아래에 있는 상의성으로서 파악합니다. 그것은 ()’의 수준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카메야마: , 그런가요? 업의 수준.

 

모로: 과연 이것은 업의 이야기군요.

 

시미즈: 그 업이 비대, 증대해진다는 것은 조금 전 교차 교환적으로 포함하는/되는 관계를 통해 이항대립을 능숙하게 돌려서 구체적 대상(질료성)을 바꿔가며 이데아(형상성)도 바꿔가는 형태를 만든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집착의 세계지요. 그래서 윤리적으로도 실천적인 수행이랄까 그러한 형태에서도 불교는 그것을 가시화해온 것입니다.

 

모로: 그래서 말인데요, 이 폭류가 멈춰지기 위해 불교의 사고방식에서는 환멸문(還滅門)이라고 해서 서로 바꿔 쓰기와 같은 것을 거꾸로 돌려버리지요. 거꾸로 돌린다는 표현이 약간 이상할지 모르지만, 증대에서 그 방향을 반대로 틀면 존재가 소멸하지요. 존재란 본래 이렇듯 서로 바꿔 쓰이는 것이며, 이 세계에 있는 것은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 세계에서 없애버리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는다면, 불교는 이 서로 바꿔 쓰기의 과정을 멈추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답하는 것이지요.

 

시미즈: , 그렇네요.

 

모로: 그것을 신체적으로 찾아낸 것이 붓다 아니겠습니까.

 

카메야마: 다들 머리가 좋으시네요(웃음).

 

시미즈: 아니 뭐, 붓다는 일만 년에 한 번 나오는 천재지요.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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