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미즈 다카시(清水高志)의 2023년 저작 『공해론/불교론(空海論/佛敎論)』(以文社)의 1부 '대담'을 https://sarantoya12.tistory.com/160 https://sarantoya12.tistory.com/161 https://sarantoya12.tistory.com/163 https://sarantoya12.tistory.com/164 에 이어서 올려둔다. 이로써 1부 '대담'은 다 번역했다.
오역이 있을 수 있으며 번역 자체가 거친 부분이 많다. 양해를 구합니다.
이 번역 작업 덕분에 올 무더운 여름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한편으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 공부의 과제를 조금 더 분명하게 다듬을 수 있었다.
오지논증(五支論證)과 귀추법(abduction)
시미즈: 인명(因明)(‘원인을 밝힌다’는 뜻의 인도 논리학)을 연구하는 모로 선생이 계시지만, 인도의 논리학을 잠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표 1). 《니야야 수트라(Nyāya Sūtras)》 1에는 ‘오지논증(五支論證)’이라는 독특한 로직이 설파됩니다. ‘오지논증’을 언급한 불교 논리학자로는 디그나가(陳那) 2를 비롯해서 여럿이 있습니다. 디그나가는 표 1에서 ‘오지(五支)’의 마지막 두 가지를 빼버리지만, 나는 오히려 본래의 ‘오지논증’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본래의 로직을 살펴보면 여기서부터 테트랄레마가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표 1. 오지논증(《니야야 수트라》에서) ‘수반(隨伴)’의 예
① ‘제안’ 논증되어야 할 것을 서술하다.
주제 p는 성질 B를 가진다.
② ‘이유’
성질 A를 가지므로
③ ‘유례(喩例)’
성질 A를 가진 실례 d는 성질 B를 가진다.
④ ‘적용’
주제 p는 성질 A를 가진다.
⑤ ‘결론’
고로 주제 p는 성질 A를 가지므로 성질 B를 갖는다.
이 인도 논리학의 로직은 앞서도 다뤘다시피 사물의 속성을 문제시합니다. 그래서 처음에 ① 논증되어야 할 것을 먼저 ‘제안’합니다. 이것은 예를 들어 ‘주제 p는 성질 B를 가진다’와 같은 것이죠. 그리고 이어서 ② 그 ‘이유’는 ‘성질 A를 가지므로’가 되고 이때 ‘성질 A는 성질 B를 수반한다’라고 인도의 논리로서 사고하게 됩니다.
모로: 그렇습니다.
시미즈: 그 ‘수반’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면 ③의 ‘유례(喩例)’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성질 A를 가진 실례 d는 성질 B를 가진다.’ 이것은 실물을 토대로 인도인이 생각하는 것이므로, 보통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실례를 내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르민(基體)과 다르마(屬性), 구체물과 속성이 분열하지 않는 모델이 모색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나아가 ④의 ‘적용’이 행해지고 ‘주제 p는 성질 A를 가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수반’의 발상에서 ⑤의 ‘결론’은 ‘고로 주제 p는 성질 A를 가지므로 성질 B를 갖는다’는 식이 됩니다. 이것이 ‘오지논증’입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인도인은 부정적 수반(배제)에 대해서도 사고합니다(표 2). ①의 ‘제안’ ‘주제 p는 성질 B를 가진다.’ ② ‘이유’인 ‘성질 A를 가지므로’는 앞서와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른 ③ ‘유례(喩例)’를 내옵니다. 그것이 ‘성질 A를 가지지 않은 실례 d는 성질 B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④ ‘적용’에서는 ‘주제 p는 성질 A를 가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 서술되고 ⑤ ‘결론’으로서 ‘고로 주제 p는 성질 A를 가지므로 성질 B를 갖는다’라는 견해가 도출됩니다. 이때 ‘A를 가지지 않는 실례 not d는 성질 B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으로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나는 이것이 이상한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표 2. 오지논증(《니야야 수트라》에서) ‘부정적 수반’의 예
① ‘제안’ 논증되어야 할 것을 서술하다.
주제 p는 성질 B를 가진다.
② ‘이유’
성질 A를 가지므로
③ ‘유례(喩例)’
성질 A를 가지지 않은 실례 not d는 성질 B를 가지지 않는다.
④ ‘적용’
주제 p는 성질 A를 가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⑤ ‘결론’
고로 주제 p는 성질 A를 가지므로 성질 B를 갖는다.
모로: 아, 정말로 그렇네요.
시미즈: 애당초 배중률이 성립하는 대상이 아닌 것에 대해 구태여 배중률의 상황을 사고합니다. 이것은 이항대립을 억지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흥미롭지 않나요? 이 인도인의 로직을 서양 학자로서 백 년도 더 전에 언급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추론형식으로는 퍼스의 귀추법(abduction)입니다(그림 1).
퍼스의 귀추법을 염두에 두면 ‘오지논증’은 연역도 귀납도 아닙니다. 그리고 일상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추론형식은 귀추법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그림 15에서와같이 ‘집에서 연기가 난다’고 합시다. 이것은 귀추법에서 아이콘(icon)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굳이 인도 논리학과 겹쳐놓으면 이것은 무언가의 사상(事象)이 일어나고 있다는 표식, 인도에서는 “링가(linga)”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랬을 때 추론이 ‘집 x에서 연기가 나고 있으므로 화재다’로 나아갑니다. ‘연기가 나다’와 ‘화재’라는 두 사상(事象)이….
모로: 수반이지요.
시미즈: 네, 수반입니다. 이것은 인덱스(index)라고 해서 퍼스 논리학의 추론에서 2단계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집 a는 화재다’라는 추론이 도출됩니다. 이것은 집 가까이에서 확인하거나 능동적으로 접근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3단계는 상징(symbol)인데요, 인도식으로 말하면 ‘적용’입니다.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인도 논리학에서 이 ‘적용’을 행할 때 그것이 긍정되는 경우와 부정되는 경우의 양쪽을 가능성으로서 남겨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정은 부정적 배제의 부정이 아닙니다. 이 점이 아주 재밌습니다. 인도 논리학은 가류성(可謬性)[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모로: 정말로 그렇습니다.
시미즈: 이것은 확실히 귀추법입니다. 귀납법은 어떤 결과가 있고 그 결과에 대해 사실로서 이러저러한 것이 있다는 것으로부터 법칙이 도출됩니다. 예를 들어 콩이 있고 ‘이 콩이 하얀’ 경우 ‘이 콩은 껍질이 벗겨져 있다’는 사실이 확인됩니다. 그렇게 ‘이 껍질 속 콩은 하얗다’는 법칙성이 몇 가지 샘플로부터 도출됩니다. 이것이 귀납입니다. 예를 들어 ‘이 집이 불타고 있다’는 것에서 법칙성을 도출해낼 수 없습니다. 인도의 로직도 그렇잖아요.
모로: 네, 그렇지요. ‘이 사례가 이렇다’는 결론을 낼 뿐입니다.
시미즈: 그리고 가류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확실히 귀추법입니다. 아니, 어쩌면 귀추법보다 더 나아간 것일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추론이 실패하게 될지에 대한 정의가 상세하게 정해져 있으니까요.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그림 2). 예를 들어 ‘비구름이 떠 있다’는 것은 아이콘입니다. 그리고 ‘비구름이 떠 있으므로 비가 내린다.’ 이것은 인덱스입니다. 즉, 수반이지요. 그리고 ‘우산을 가지고 가자’라고 그 추론을 확장해서 세계에 훅을 넣습니다. 이것은 적용입니다. 이 3단계의 양상을 귀추법에서는 일차성, 이차성, 삼차성이라는 하는데, 삼차성에서 사상(事象) 혹은 상황이 바뀝니다. 추론이 행동으로 대체되고 나아가 새로운 상황으로 추론이 이어진다는 것이 귀추법입니다.
이 귀추법은 시나 신화의 상상력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① 최초의 ‘아이콘’은 대상 하나와 연관된 기호이며 그 기호에 의해 그 현실 대상을 대표하게 합니다.
레비스트로스와 야콥슨이 보들레르의 시 〈고양이〉를 탁월하게 해석한 것으로 유명한데요, 야콥슨은 퍼스를 검토하면서 이 시에서 사용되는 메타포(은유)와 메토니미아(metonimia)(환유)를 분석합니다. 퍼스 자신이 이미지, 메타포, 다이어그램을 추론의 요소로서는 일차성이라고 말했는데, 예를 들어 동화에서 ‘눈처럼 하얀 공주’를 ‘백설공주’라고 하는 것은 메타포입니다. ‘백설공주’는 ‘하얀 것’에 속하고 그것을 대표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② 두 번째의 ‘인덱스’는 최초의 기호가 또 다른 기호와 강하게 연결되기 때문에 그것들의 관계를 결부해서 규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나 신화에서 메토니미아로서 기능합니다. 이것도 동화를 예로 들어 설명하면 ‘빨간 망토 아가씨’는 빨갛지 않지만 빨간 망토와 강하게 연결되어 그렇게 불립니다. 빨간 망토가 수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대상이 무언가에 속하는, 어느 하나가 어떤 그룹을 대표하는 표식이 된다’(아이콘)는 것과 ‘대상에 인접적으로 강하게 연결되는 것, 수반하는 것’(인덱스)을 더듬어가면 시적 표현은 온갖 것들을 유사성으로 포섭해서 회수하는 것이 아니라 틀린 것들을 하나하나 발견해내어 복잡하게 확장해갑니다. 레비스트로스와 야콥슨이 분석했듯이, 〈고양이〉라는 시 또한 노학자가 키우는 어느 고양이에서 시적 상상력이 우주적인 규모로 확장해가는 양상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③ 세 번째의 ‘상징’은 ‘아이콘’과 ‘인덱스’에서 찾아낸 관계를 현실 대상과 결부함으로써 새로운 행동이 매개되거나 사실관계가 확정되는 것이며 이 추론이 틀렸을 때 ②로 되돌아가 추론을 수정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귀추법과 시·신화의 상상력이 깊이 연관된다는 것은 인도 논리학과 신화적 사고(또는 야생의 사고)가 같은 토양에서 싹틔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것들은 모두 회수하지 않고 제3항을 차례차례 내오며 대체해가거나 닫힌 고리와 같은 구조 속에 다양한 대립적인 사물을 심어놓고 그것들의 기원을 이야기한 축약 모델을 만들어 이를 통해 세계의 상징적인 의미를 대표하게 합니다.
‘숨겨진 것’을 발견하다─수반과 부정적 수반의 논리
시미즈: 이 제3항을 내오는 것에 대해서 조금 더 고찰해보겠습니다(표 3).
표 3. ‘수반’과 ‘부정적 수반’에 의한 논증은 논리적으로 올바른가?
① 한 실례 d가 성질 A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성질 B를 수반한다. (동류(同類))
② 다른 실례 not d는 성질 A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성질 B를 수반하지 않는다. (이류(異類))
이때 ‘동류’, ‘이류’를 억지로 이항 대립적인 것으로 상정해서 ‘성질 A를 가지고 있고 또한 성질 B를 가지고 있지 않은’ 제3항적인 것이 없음을 확실히 하는 것이 논증의 작법이 됩니다.
수반과 부정적 수반이라는 인도 논리학의 사고방식은 과연 맞는 걸까요? ‘한 실례 d가 성질 A를 가지고 있고 그것은 성질 B를 수반한다.’ 인도 논리학에서는 실례 d와 마찬가지로 성질 A를 가지며 성질 B를 수반해서 가지고 있는 것, 이것을 [실례 d의] ‘동류’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실례 not d가 성질 A를 가지고 있지 않고 또 성질 B를 수반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실례 d의] ‘이류’라고 합니다. 그래서 실례 d와 실례 not d가 배중률의 이항이 됩니다. 그 조건을 만족하는 것을 ‘변충(遍充)’이라고 디그나가는 부르는데, 정말로 이것이 맞는 것일까요?
모로: 아, 이것은 이른바 연역적인 관계가 아니네요.
시미즈: 네. 개별 실례의 속성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배중률이 처음부터 성립하는 것이 아니고, 논의가 맞는지 안 맞는지는 실천적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실질적으로 ‘동류’와 ‘이류’를 활용한 이항대립의 발견법이 아닐까요? 이때 성질 A를 가지고 있고 또한 성질 B를 가지고 있지 않은 제3항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논증의 작법이 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논증이 부정되기도 합니다(표 4). ‘미혹의 이유’라 불리는 것이 그러한 예입니다. 예를 들어 ① 아트만(ātman)[절대 변치 않는 가장 내밀하고 초월적인 자아(영혼)]은 ‘만질 수 없는’ 것이며 항상적이다. ② 〈‘만질 수 없는’ 것은 항상적이다〉라는 명제가 있을 때 ③ 의식은 ‘만질 수 없는’ 것이며 항상적이지 않다.─여기서 두 개가 다른 수반 관계를 가지고 이에 따라 제3항적인 것이 나와서 이 논증은 실패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표 4. ‘미혹의 이유’
① 아트만은 ‘만질 수 없는’ 것이며 항상적이다.
② 〈‘만질 수 없는’ 것은 항상적이다〉
라는 명제가 있을 때,
③ 의식은 ‘만질 수 없는’ 것이며 항상적이지 않다.
라는 제3항이 찾아지는 경우, 이 논증은 실패한다.
(‘꿀은 불을 통하지 않지만 먹을 수 있다’, ‘연초는 불을 통하지만 먹을 수 없다’의 예시처럼)
모로: 아, 그렇네요.
시미즈: 이것이 예를 들어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에서 ‘불을 통한 것은 먹을 수 있다’라는 사고에 대해 ‘꿀은 불을 통하지 않지만 먹을 수 있다’, ‘연초는 불을 통하지만 먹을 수 없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뭣이고 하면 인도인이 활용하는 ‘수반’과 ‘부정적 수반’의 논리학은 ① 감성적이며 경험적인 사물들 사이에서 그에 수반하는 성질까지 포함한 이항대립의 양상을 일부러 상정해서 제3항적인 것을 배제해가려는 이론입니다. 제3항 배제의 이론인 것이죠.
그런데 ② 실질적으로 그것은 그러한 ‘제3항’을 발견하려는 방법이지 않을까요? 가류성이 그들의 논리학에서 중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③ 발견된 ‘제3항’에도 동류의 로직 적용이 시도됩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이 세계를 복잡하게 변별해갑니다. 그 속에서 기능하는 것은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야생의 앎’으로서의 무의식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인도인의 논리는 귀추법이면서 그와 동시에 ‘야생의 앎’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확인하는 하나의 방법이 되겠지요. 이것은 이른바 개인을 초월한 무의식의 논리학적인 표현입니다.
모로: 그렇군요. 인도인의 논리학에는 갖가지 사고방식이 있고, 그에 따라 불교에도 다양한 사고방식이 있을 수 있지요. 그렇지만 적어도 내가 봐왔던 범위에서 동아시아의 논리학에 관해 말하자면 오늘의 이 대화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 이유는 동아시아 사람들은 불교의 논의를 논리학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어서, 더욱 논리적으로 파고들면 좋으련만 그러지 않고 무언가의 ‘행동’을 취하는 쪽으로 빗나가 버립니다.
위에서 세 번째로 나오는 것은 결국 새로운 ‘행동’과 결부됩니다. 그래서 기껏 연구한 다음에 ‘어째서 이런 것을 동아시아, 중국 사람들은 행한 것일까? 그래, 이 사람들에게는 실천적인 성격이 있기 때문이지’라는 이유를 붙여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뭔가 달라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 로직이 가지는 성질 그리고 인도인이 생각한 독특한 논리학이 가지는 성질은 이른바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온 논리학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미즈: 네, 그렇습니다.
모로: 제3항을 찾기 위한 것일까요? 마침 그러한 논문을 쓰고 있는데, 제3항이고 하면, 예를 들어 ‘숨겨진 것’을 발견하기 위해 이론이 있다는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인명(因明)[‘원인을 찾는다’라는 뜻의 인도 논리학]에서는 니르바나(열반)라든지 불성(佛性)이라든지 원인을 어디로도 돌려보낼 수 없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 이유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하면서 논의를 시작합니다. 물론 그 이전의 전통이 있지만요. 그 배경을 살펴보면, 인명(因明)은 보통 연역적으로 어떤 전제가 있어서 그에 따라 어떤 결과에 최종적으로 도달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야기한 것을 염두에 두고 인도 논리학 자체를 다시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부정적 수반이라는 것이 왜 필요한지의 문제는 예전부터 계속해서 이야기되어오긴 했습니다.
시미즈: 아포하(anyāpoha)[‘다른 것의 배제’를 통해 의미를 설명하며 정의하는 불교 논리학의 논의] 때문인가요…?
모로: 디그나가가 아포하에 대해 설명하기도 하는데요, 요컨대 이항대립을 찾아야 하니까, 예를 들어 부정적 수반만 있으면 그 외 긍정적 수반은 필요 없다는 의견이 나오는 것에 대해 ‘아냐, 그건 다른 양쪽이 없으면 안 돼’라고 논의하는 겁니다. 그래서 ‘양쪽이 없으면 왜 안 되는지’의 이유를 붙이는데요, 다양한 설명이 이뤄지지만 결국 ‘인도인은 경험주의자이므로’로 끝을 맺습니다.
시미즈, 카메야마: (웃음)
모로: 실제로 그런 측면도 있습니다. 제3항을 발견해가기 위해, 정말로 그렇거든요. 맨 처음 제시한 주제가 긍정적 수반과 부정적 수반의 양쪽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라서. 그에 따라 맨 처음은 배중률이 절대 적용되지 않는 형태거든요. 다만 타당성이 발견되면 지금까지 그랬으니 이것도 그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지금까지 인도 논리학을 귀납적 이해로서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귀납적 이해라면 왜 모두가 이렇듯 필사적으로 사고한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지요. 앞서 귀추법에서도 나왔지만, 제3항을 실천 중심으로 행하고자 한 것이 어쩌면 동아시아의 인명(因明)일 수 있겠습니다.
시미즈: 맞습니다. 서양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분절적이라고들 말합니다. 모순율과 배중률을 살펴보면, 그에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은 반드시 잡아내어 삼단논법 등으로 성립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의 로직에서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소피스테스》에서 플라톤이 소피스트란 무엇인지를 논할 때 테크네(τέχνη)를 정의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기술이죠. 우선 기술에는 ‘만드는 기술’과 ‘포획하는 기술’이 있습니다. 소피스트들이 행하는 것은 어느 쪽일까 라며 논의를 열어갑니다. 그리고 가령 ‘포획하는 기술’이라고 답하면 그것을 또 둘로 나누어 ‘포획하는 기술’에 두 갈래가 있는데 그 어느 쪽인지를 묻습니다. 이런 식으로 문답을 이어갑니다. 이것을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가 인용합니다. 들뢰즈는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종(種)과 류(類)의 분류학’이라고 말합니다. ‘분할’이라는 또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라고요. 무턱대고 이항대립을 하나하나 집어내는 ‘분할’이라는 논법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차례차례 보편적인 것에서 개별적인 것을 회수해서 분류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예외적으로 나타난 형태입니다.
야콥슨의 ‘음운론’을 재고하다
시미즈: 이 이항대립의 이야기에서 왜 이항을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지금부터 설명해보겠습니다. 야콥슨의 음운론을 알고 계실지 모르겠네요.
모로: 아….
카메야마: 의외로 모두 모를 겁니다(웃음).
시미즈: 확실히 야콥슨의 음운론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세계를 변별하기 위해 왜 이항 대립적 사고와 대조(contrast)가 필요한가?’ 레비스트로스는 야콥슨의 음운론에서 이 질문의 해답의 실마리를 얻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다계인 그들은 거의 동시에 뉴욕으로 망명합니다. 그래서 만납니다. 그 영향이 결정적이었어요. 야콥슨에 의하면 예를 들어 터키어에는 모음의 음소가 8개 있습니다. o, a, ö, e, u, y, ü, i입니다. 이때 8개의 모음에서 두 개를 뽑으면 모두 28종류의 조합[8C2 =8×7÷2=28]이 나오고 그렇게 조합된 쌍의 두 소리를 구별하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28종류의 차이를 마치 소믈리에[와인 담당 웨이터]가 와인의 향기를 구분하듯이 구분하게 될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야콥슨은 알았습니다. 청각적으로 ‘음소는 분해 불가능한 단위’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흔들리지 않는 출발점처럼 일견 생각되지만, 각각의 음이 실제로는 예를 들어 ‘열린 음소’, ‘닫힌 음소’ 등으로 나뉩니다. o, a, ö, e가 ‘열린 음소’이고, u, y, ü, i가 ‘닫힌 음소’입니다. 또 혀의 앞쪽에서 나는 ‘전방 음소’ ö, e, u, i와 혀의 뒤쪽에서 나는 ‘후방 음소’ o, a, u, y가 구별됩니다. 즉 반반씩 나뉩니다. 그리고 또 입술 모양이 동그란 ‘원순 음소’ o, u, ö, ü와 동그랗지 않은 ‘비원순 음소’ a, y, e, i의 차이가 있습니다. 즉, 이러한 세종류의 이항대립을 조합시켜 8개의 모음(2의 세제곱)이 나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음소를 분석하면, 예를 들어 o라고 하면 ‘열린 음소’, ‘후방 음소’, ‘원순 음소’를 전부 겸하고, a라고 하면 ‘열린 음소’, ‘후방 음소’, ‘비원순 음소’를 겸합니다. 이렇듯 전부 겹치기의 존재가 됩니다.
모로: 그렇습니다. 변별특성의 다발이라는 것이지요.
시미즈: 네, 변별특성의 다발입니다. 무언가와 무언가를 대조(contrast)를 통해 부각시켜서 구별할 때 반대의 것이 필요하겠지요. 실제로 그렇게밖에 구별할 수 없고, 조금 더 조합해서 더 미묘하게 구별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근본적으로 다른 무엇이 있는가 하면, 가령 조금 더 복합하게 구별하는 데에서 문자로 말하면 표의문자와 표음문자가 있습니다. 표음문자처럼, 예를 들어 알파벳에서 26개 문자의 ‘조합’으로 온갖 다양성을 표현하는 경우와 한자처럼 문자를 무수히 만들어 다양성을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들 모두 다양성이 ‘조합’에 의해 생성하는 패턴을 가집니다. 그렇게 세계는 만들어진다고요. 이때 중요한 것이 정반대인 두 가지의 대조(contrast)입니다. 요컨대 요소를 엮어서 ‘조합’을 통해 다양성을 내오는 것에서 궁극의 형태는 디지털, 즉 1과 0입니다.
모로: 2의 거듭제곱이네요.
시미즈: 그렇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감성적으로 차이를 변별하거나 무의식으로 음소를 주의 깊게 듣고 구분하는 시점(時點)에서 이미 그렇게 됩니다.
카메야마: 이진법이 된다는 거네요.
시미즈: 따라서 신화소도 당연히 그런 식입니다. 그리고 먼저 이항대립에 착목한 다음 제3항을 내와서 그 제3항의 위치 또한 순회시켜 축약을 만듭니다. 그러면 언어나 신화적 상상력 자체가 복잡한 모습을 띠게 됩니다. 그만큼 그 한편으로 그것을 억압하거나 욕동(欲動)에 이끌리는 구조가 업(業)입니다. 혹은 근대철학과 같은 사상적 유형으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거죠. 해방된 곳, 불교식으로 말하면 테트랄레마적인 구조, 그곳에 구제[구원]가 있다고요.
모로: 여기서 조금 전의 논리 이야기로 돌아가면, 역시 인도의 논리학 혹은 인명(因明)이 다루는 것은 속성(屬性)입니다. 다르마(屬性)의 ‘조합’이라는 다양성과 제어에 초점을 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르마를 제어하고자 할 때 반드시 이항대립을 이용합니다. 어느 한 다르마와 그렇지 않은 다르마, 어느 한 속성과 그렇지 않은 것이라는 대비를 한 번 하고 나면 그것들의 ‘조합’에서 ‘이건 들어맞네’, ‘이건 들어맞지 않네’라는 논의를 끝없이 중첩해 가기 때문에, 그러한 의미에서의 변별일 수 있겠네요.
시미즈: 예를 들어 앞서 터키어의 모음 음소가 o라면 ‘열린 음소’와 ‘후방 음소’와 ‘원순 음소’인데, a의 경우에서와같이 ‘원순 음소’라는 속성이 들어맞지 않으면 다른 속성이 같아도 음소 자체가 같은 범위로 분류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가 경험적인 음미를 통해 비로소 이뤄지므로 바로 여기에 [퍼스의] 귀추법과 [야콥슨의] 음운론의 공통성이 있습니다. 속성은 구체물들의 포섭과 분류가 아니고, 오히려 속성들끼리 ‘조합’되어 다양한 구체물을 만듭니다. 그 때문에 이항대립, 이진법이 중요하고, 또 복수의 이항대립을 중첩하는 것, 구체적인 실례와 수반 등의 관계가 중요하고, 나아가 그것들이 한정된 요소로 고리를 만들고 축약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바이셰시카 학파 3라든가 불교 이외의 인도 사상 중에 엠페도클레스적인 사상이 역시 있습니다.
모로: 그렇습니다. 애당초 인명(因明)의 논리학 자체, 《니야야 수트라》 등까지 포함해서 불교 밖에서 온 것이므로.
시미즈: 그것까지 포함해서 그 속에서 움직이는 ‘야생의 사고’를 사고하지 않으면 공해(空海) 등도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카메야마: 공해(空海)에 이르면 이항대립도 더욱 격해집니다. 태장계(胎藏界) 4, 금강계(金剛界) 5의 두 만다라입니다. 그 이항대립을 통해 ‘궁극의 자연’ 대 ‘궁극의 문화’를 협상하는 곳이 금강경과 태장경의 만다라에 있습니다만…. 그러니까 그러한 ‘자연’ 대 ‘문화’의 이항대립이 만다라에도 있습니다. 다른 것들도 그러한 접근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을까요? 야콥슨 등에 근거해서 한 번 더 만다라나 범어 실담(悉曇)[산스크리트 문자] 등을 사고하는 것을 지금부터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대원소와 장소(코라)
시미즈: 앞서 《티마이오스》를 논하면서 플라톤이 자신 이전에 더 훌륭한 앎이 있었다는 감각을 가진 것 같다고 이야기했는데요, 나는 그리스 문화가 당시 이미 르네상스, 곧 부흥이 아니었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아틀란티스 신화와 같은 선사 문명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야생의 사고’와 그 앎을 회복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 속에서 성찰적인 사고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지 않았을까요? 그 ‘야생의 사고’는 인도적이기도 하며, 그래서 그들 또한 신화적, 종교적, 철학적, 논리적인 축약 모델을 훌륭하게 만들어냅니다.
모로: 네, 그때 주요 지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주어화하지 않는다’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다르마를 ‘알맹이들의 모임’으로 생각할 수 있으므로 주어화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죠. 다르마가 바로 속성, 술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술어이기 때문이야말로 논리학의 언어로 말하면 경험이나 행위의 양태, 유식(唯識)의 언어로 말하면 식(識)과 이어질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실체, 불교적인 표현으로는 자성(自性)이 있는 것이 되는 순간 무한후퇴하거나, ‘물 자체’와 같은 사고 불능의 것이 돼 버립니다. 오늘 우리의 대담에서도 이것이 큰 논점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시미즈: 양태군요. 니시다 기타로가 술어논리라는 것을 전개하고 있는데, 중요한 열쇠입니다. 《티마이오스》에서는 이데아 그 자체와 생성의 세계와 그 생멸이 일어나는 장소라는 세 개의 세계가 있다고 합니다. 이 논의의 첫 부분에서 사대원소가 언급됩니다. 사대원소는 상황에 따라 양태가 변하기 때문에, 술어적인 장소(코라, χώρα)로 이야기가 나아갑니다. 즉, ‘~이다’의 장소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직 물질적인(material)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데아, 형상이 각인된 부정형의 사물의 이미지이기도 해서 수용자라는 식으로도 불립니다. 장소라고 하면 무(無)인 것 같고 니시다가 장소의 개념을 말할 때도 그러한 인상이 강하지만, 본래 사대원소를 개량하는 형태로서 《티마이오스》는 장소(코라)를 말합니다. 그래서 약간 추상화돼 버린 부분이 있습니다. 본래 장소(코라)는 물질적이고 감성적인 양태와 그 변용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형상(figure)과 지면(ground)에서 지면에 해당합니다.
모로: 장소, 코라는 데리다식으로 말하면 ‘무엇이든 떠맡은 근원적인 처녀성’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만….
카메야마: 진여(眞如, tathatā).
모로: 나는 예전에 문자를 설명할 때에 ‘문자는 코라다’라는 표현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앞서 나온 화엄의 만다라, 라이프니츠의 네트워크에서 일부가 바뀌면 다른 모든 것이 바뀌듯이, 문자는 쓰면 쓸수록 새로운 문자가 삽입되거나 일방적으로 사용되지 않은 문자가 죽어가는 것처럼 전체의 구조가 변화해갑니다. 그러한 네트워크에서는 하나의 문자가 전체를 포함하고 있으며 전체가 하나의 문자를 성립시키고 있다는 관계를 설명할 때 코라(장소)라는 단어가 쓰일 수 있을까 싶었거든요.
시미즈: 이것은 매우 공해적입니다. 『성자실상의(聲字實相義)』적인. 그러한 상호 포섭과 ‘조합’에서 앞서 엠페도클레스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처럼 그것은 라이프니츠가 『결합법론(結合法論)』(De Arte Combinatoria)(1966)의 속표지에 실린 그대로입니다(그림 3). 『결합법론』은 라이프티츠가 스무 살 때 쓴 첫 저작입니다. 이 책도 퍼스와 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그는 관계에는 ‘절대적 관계’와 ‘상대적 관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절대적 관계’는 순서(ordo)라는 것으로 예를 들어 a, b, c, d 속에 b, c, d가 포함된다거나 a, c, d가 포함된다는 관계입니다. 이러한 일방적으로 포섭되는 관계가 있고, b, c, d와 a, c, d 사이의 관계처럼 조금씩 공통항을 바꾸면서 같은 그룹 속에서 변화해가는 관계가 있어서 이러한 관계를 ‘상대적 관계’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인접성(vicinitas)이라고도 하는데요, 인접성의 관계에서 이것과 이것이 다른 경우에는 야콥슨의 음운론처럼 공통항을 가지고 있는 가운데 하나가 이진법적으로 변하는 가령 b, c, d와 a, c, d에서 b가 a로 대체된다는 것이 기본입니다.
모로: 그 자체로 변별특성의 다발이네요.
시미즈: 라이프니츠는 여기서 출발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아닌 논리학을 만들고자 합니다. 그 이전에 라몬 룰(Raimon Llull, 1232~1315, 마요르카 왕국의 철학자이자 신학자)라는 사람이 ‘거대한 술(術)’이라는 것을 고안합니다. 이것은 신을 형용하는 단어가 주어가 될 수도 술어가 될 수도 있으며 교체가 되는데, 일곱 개의 동심원 판에 그 기본 개념을 기호로 기록하고 판의 회전에 따라 각각의 명제를 도출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라이프니츠에게 힌트를 준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려 했지만 바로 이틀 전에 떠올랐던 터라 시간이 부족해서 아직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보색(補色)에 관하여
시미즈: 이항대립에 관해서 색의 보색 현상을 둘러싸고 시인 폴 발레리(1871~1945, 프랑스의 시인)가 주목했으며, 괴테가 『색채론』(민음사, 2003년)에서 탐구한 것은 야콥슨이 음(音)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과 거의 비슷합니다. 빛과 어둠의 중간이 있는 것이 색채이고 빛에 가까운 황색을 한참 보고 있으면 보색으로서 청색이 보입니다. 왜 빛과 어둠의 중간이 색채이냐 하면, 예를 들어 스마트폰의 하얀 화면에 손을 대면 지문이 남고 더러운 그곳에 무지개색이 보이잖아요.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발레리가 말하기를, 같은 색을 보고 있으면 반대의 색이 나온다는 것은 경험을 무언가의 행위로 해소해 버리지 않도록 순수한 지각(知覺)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반전된 색이 떠오른다는 그러한 변별이 무의식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적함과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 소리”라는 바쇼(芭蕉)의 시구가 있는데, 매미 소리는 느닷없이 크게 들립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보색(補色)처럼 ‘한가함’이 나옵니다. 그런 것이 많습니다. 이러한 감각이 작용할 때 ‘아, 애니미즘이 움직이는구나’라는 생각이 샘솟습니다.
모로: 청색과 황색의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데요, 실은 아포하(anyāpoha)의 설명에서 나오는 것이 청색과 황색입니다. “청색이 청색임을 아는 것은 황색을 배제하듯이 안다”라고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흑과 백이 아니라 동시에 보인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보인다는 것 속에 배제 관계를 도입해간다는 것이지요.
카메야마: 그것 역시 감각의 철학 같은데요.
모로: 보통 명상에서 청색과 황색이 함께 보이는 것을 그들은 보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왜 그럴까’라는 의문에서 아포하가 비롯한 것이라서 단순히 이항대립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시미즈: 일전에 마츠오카 마사타케(松岡正剛) 씨와 대담했을 때 마츠오카 씨는 일본의 문화를 논하는 데에서 ‘대(對)의 사고’가 중요하고 또 일본인이 좋아하는 다양한 짝이 있다고 하더군요. 예를 들어, 감색과 금색. 이것이 때때로 다른 짝으로 교체되거나 또 다른 디자인으로 되살아나기도 합니다. 오가타 고린(尾形光琳, 1658~1716, 에도 시대의 화가이자 공예가)의 《제비붓꽃병풍(燕子花図)》도 그러합니다. 감색의 제비붓꽃이 있고 뒷배경이 금색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쌍을 의식한 이야기의 실마리로 일본 문화를 보지 않으면 가타카나와 한자라든가, 우아함과 촌스러움이라든가 그것들을 공존시키거나 바꿔치기하는 것을 바로 알지 못합니다.
모로: 경(經)을 써넣는 ‘감색의 천과 금박’으로 해도 바로 그러하지요. ‘어쩐지 고급스러워서’라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일종의 구조를 주워 올려야 한다고요.
시미즈: 실제로 하이쿠(俳句) 등도 “5월 장마 큰 강에 집 두 칸”이라든지 그러한 대조가 많습니다. 이 다양한 표현형들이 문화로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것을 근원적으로 살펴보면 이진법이나 대조 그리고 제3항을 하나하나 취한다든지 하면서 변환되는 것이지요.
아뢰야식과 ‘인과동시(因果同時)’
모로: 일본은 여하간 철학을 소비해버리는 경향이 있지만, 레비스트로스는 그러한 것을 넘어서서 고전이 된 느낌입니다.
시미즈: 프랑스 사상은 5년, 10년 정도밖에 유행하지 않는듯합니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많은 사람이 여전히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은 최근 여러 사람과 대담해보고 피부로 알겠더라고요. 인류학자인 카스가 나오키(春日直樹) 씨도 학문을 레비스트로스처럼 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카메야마: 몇 번이나 ‘레비스트로스는 끝났다’라고 했지요, 1970년대부터.
모로: 전연 끝나지 않았지요.
시미즈: 레비스트로스가 ‘무의식’이라고 말한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사월의책, 2018)에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세계는 다양한 차이를 가지고 자신을 분절하거나 축약해간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정도 자율적으로 그러한 작용이 있습니다. 그 작용은 굳이 융이 아니더라도 개인을 넘어서 있습니다. 개인의 생육력(生育歷) 가운데 억압된 것은 ‘무의식’과 전연 다릅니다.
카메야마: 레비스트로스는 ‘사람이 신화를 사고한다’가 아니라 ‘신화가 신화를 사고한다’라고 했지요.
시미즈: 레비스트로스는 ‘나’라는 것은 그러한 합류점과 같은, 신화의 변환이 행해지는 장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모로: 그것은 내가 보기에 ‘유식(唯識)’입니다.
시미즈: 맞습니다. 그런데 유식에서는 상분(相分)과 견분(見分)이 있고, 견분에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그 외 다양한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최근 어포던스(affordance) 이론에서 논하는 것과 비슷한 사고방식입니다. 감각이라는 것은 예를 들어 데카르트는 갖가지 감각을 뇌 속의 ‘송과체(松果體)’가 통합해서 공통감각(common sense)을 만든다고 말합니다. 감각 레벨에서 변별이 아니라 통합이 있고 그 통합을 통해 사고한다는 것이지요. 그로부터 양식(良識, good sense)이 만인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포던스라는 인지의 존재 방식은 그것과는 명확히 다릅니다. 예를 들어 페트병을 만지는 것과 보는 것 각각의 감각은 통합되지 않은 채 존재합니다. 이렇듯 대상에 대한 접근이 촉각의 감각 모듈이거니와 시각의 감각 모듈 등으로 복수 있다는 것은 유식과 똑같습니다.
대상을 만지작거리면서 그 차이가 나오는 감각을 받아들임으로써 복잡한 정보를 얻고 있습니다. 이때 변하지 않는 대상을 ‘불변항’이라고 부른 것인데, 이것 덕분에 역으로 통합되지 않는 채 변화하는 감각의 제 요소의 차이가 변별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작용함으로써 피드백이 있고 그로부터 인지가 성립한다는 것이지요. 유식과 구조가 같습니다. 『정법안장』에서도 천수관음(千手觀音)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천수관음에는 손이 천 개 있고 그 각각의 손바닥에 하나씩 눈이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질문하면, ‘밤중에 자고 있고 베개를 손으로 더듬어 찾고 있고 …’라는 식으로 대답합니다. 이는 복수의 감각 모듈이 있고 그것과 대상 사이에 순환적인 피드백 작용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때 대상이 딱 하나 빠진 곳, 그것이 선(禪)입니다. 바로 여기서 증대로부터 환멸문의 선회로 거꾸로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카메야마: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사이버네틱스에 관해 묻고 싶어집니다. 통합된 것이 아닌, 복수의 모듈을 통해 밖에 있는 대상과 정보의 교환이 일어난다는 발상이 사이버네틱스잖아요.
모로: 상분(相分)이란 눈, 귀, 코, 혀, 몸, 의지, 그에 따라 심소법(心所法)[객관적인 대상을 인식하는 정신작용] 전부에 흩어진 상분이라는 것이 발생하므로, 한 번에 얼마만큼의 식(識)이 발생하는지를 보자면, 가령 이 페트병에 대한 상분이 한순간에 파파팟 복수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다양한 형태로 피드백을 반복하면서 ‘나의 경험’으로 통합됩니다. 이 ‘나’가 다양한 피드백 이전부터 있게 위장해가는 것이 유식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시미즈: 그것은 알겠습니다. 라투르는 외적 세계나 과학의 대상은 처음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복수의 주체의 접근을 통해 누구의 의지나 예상과도 어긋나는 형태로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으며, 주체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 또한 피드백 이전부터 있는 것은 아니죠. 그러나 사후적으로 이것이 근원으로서 처음부터 있었다는 식으로 생각된다는 것이죠. 그것이 장식(藏識) 6, 즉 아뢰야식입니다.
모로: 그러므로 인과(因果)는 동시(同時)입니다. 피드백을 시계열적으로 보면, 제3 렘마를 끝으로 막혀버립니다.
카메야마: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제4 렘마가 아니라 태어나서 멸할 뿐인 것으로 아무 의미 없이 끝납니다.
시미즈: 상관성(相關性)이 아니라 이금(而今)(‘지금’을 뜻하는 선불교 용어)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견분, 상분, 자증분에서 이뤄지는 식(識)도 다른 식에서는 상분으로 나타나며 모든 퍼스펙티브는 상호 포섭적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일방적으로 포섭하는 유일한 식(識)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이 모든 의미의 장을 일방적으로 포섭하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듯이, 이러한 상호 포섭을 공간적으로 직관할 수는 있겠으나, 이것 또한 순환하는 것이며 어느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일방적으로 흘러 지나가지 않는다는 것, 불래불거(不來不去)를 사고할 때 비로소 ‘지금’이 말해질 수 있습니다.
모로: 불교에서도 시계열적으로 흐른다는 이해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을 나가르주나까지 거슬러가서 제4 렘마까지 들여와서 생각해보는 것이 오늘의 결론일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매우 다양한 대화가 오갔고 명확하게 이해된 것들도 많았으며 또 숙제까지 한가득 받아안았습니다.
시미즈: 오늘 즐거웠고,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버렸네요. 수천 년간 인류가 사고하고 느끼긴 것들, 그리고 세계 자체가 그러한 우리에게 자신을 다양한 것으로 변별해가면서 개현해왔는지를 불교의 구조와 함께 꽤 명확하게 해부된 것 같습니다.
- 《니야야 수트라》는 고대 인도 철학의 니야야 학파의 기본 텍스트로서 인식론 및 형이상학에 관한 총 528개의 격언을 담고 있다.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총 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으로]
- [역주] 디그나가(480~540년 추정)는 유식(唯識)의 입장에서 인명학(因明學)이라는 새로운 불교 논리학을 확립한 불교 사상가다. 원효가 디그나가의 환생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본문으로]
- [역주] 인도 철학의 일파. 카나다(kaṇāda, 기원전 2~1c)가 창시한 학파로, 모든 현상은 실(實), 덕(德), 업(業), 동(同), 이(異), 화합(和合)의 육구의(六句義)에 의해 생성·소멸하며,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여섯 가지 원리를 이해하고 요가 수행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본문으로]
- [역주] 태장계는 중생의 마음에 태아처럼 감춰져 있는 진리의 세계를 뜻하며, 금강계와 더불어 밀교의 2대 법문 중 하나다. [본문으로]
- [역주] 금강계는 진언 밀교의 본존인 대일여래(大日如來)의 지덕의 세계를 나타낸다. 여래의 이성(理性)을 나타내는 태장계(胎藏界)에 대응하는 말로 여래의 지성(智性)의 본체인 금강지(金剛智)를 뜻한다. [본문으로]
- [역주] 아뢰야(阿賴耶)는 산스크리트어 ālaya의 한자의 음차표기이며 거주지, 저장, 집착을 뜻한다. 식(識)은 산스크리트어 vijñāna의 번역어이다. 이것을 현장(玄奘)은 장식(藏識)이라 번역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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