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잉골드의 주요 저작 중 하나인 『메이킹─인류학・고고학・예술・건축』의 일본어판 공역자로 참여한 카네코 유의 '잉골드론'이다. 그는 다음의 글에서 이야기한 대로 2019년 태국과 라오스의 경계 숲에서 수렵채집민으로 살고 있는 므라브리족에 관한 영상을 촬영했다(https://www.youtube.com/watch?v=5_pgz60dtqE). 다음의 글은 그러한 자신의 영상인류학적 활동과 접목해서 잉골드의 "메이킹(making)"과 "라인즈(lines)"를 논하고 있다.

 


 

생물과 물질의 댄스팀 잉골드에 관한 에세이

 

카네코 유(金子遊)[일본의 비평가, 영상작가, 1974~]

 

만들기란 무엇인가?

 

팀 잉골드(Tim Ingold)1948년 잉글랜드 남부의 버크셔주(Berkshire)의 레딩(Reading)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회인류학자다. 1970년대부터 핀란드 북동부의 라플란드(Lapland)에 사는 사미족을 현장 연구했다. 그는 전통적으로 순록의 사냥과 사육을 통해 생계를 이어온 사미족 사회가 현대에 이르러 어떻게 변용되었는지를 탐구했다. 그 후 맨체스터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1999년부터 애버딘 대학에서 인류학을 가르쳐 왔다.

내가 공역에 참여한 메이킹인류학고고학예술건축(원제 Making: Anthropology, Archaeology, Art and Architecture)2013(일본어 번역본은 2017)에 간행된 팀 잉골드의 저서이다. 집필의 경위에 관해서는 저 책의 서문과 1장에 자세히 나와 있다. 잉골드 자신의 말에 의하면, 그는 맨체스터대학에 있은 1990년대 후반부터 예술과 건축과 인류학의 접점을 찾기 위해 매달 연구회를 열었다. 그리고 메이킹(making)’을 속에서부터 알기 위해 연구자, 학생들과 함께 나뭇가지를 모아 말려서 바구니로 엮거나 자신들이 만든 가마에서 그릇을 구워내거나 화음을 맞춰 합창연습을 하거나 건축을 위한 설계도를 작성했다. 이 독특한 인류학적 탐구 방법은 처음 시도되는 것들이었다. 1999년 이후 애버딘 대학에 인류학과 설립에 관여한 잉골드는 인류학(Anthropology), 고고학(Archeology), 예술(Art), 건축(Architecture)이라는 알파벳의 ‘A’를 첫 글자로 하는 각각의 분야를 조합해서 <네 개의 A>라는 과정을 창설하고 학부생과 대학원생을 위한 강의를 열었다. 실습과 워크숍, 집단활동을 다양하게 편성한 이 매력적인 강의의 진행방식과 내용에 대해서는 메이킹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팀 잉골드는 저서 라인즈(Lines)(2007년 출간)에서 문자 기록, 음악의 기보법, 직물, 손금, 지도, 스토리텔링 등을 사례로 해서 인간 세계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며 끊이지 않고 운동하는 (lines)’을 풀어내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들뢰즈-가타리 철학의 도주선개념에서 착안한 것이다. 국가라는 권력 혹은 가족 모델에 의한 억압으로부터의 도주선을 보다 문화적이고 구체적인 지평에 펼쳐놓고 그로부터 풍부한 의 세계를 추출한 이 영역 횡단적인 책에 대해 잉골드는 이 연구를 통해 나 자신이 인류학과 결별한 것이 아닌가 자문한다.”라고 일본어판 서문에 썼다.

그런데 라인즈다음에 발표한 저서 살아있기(Being Alive)(2011)를 거쳐 출간한 메이킹에서는 원생인류의 주먹도끼, 성당의 고딕 건축양식, 회화와 소묘의 차이 등 인류학과 다른 학문 분야와의 각각의 접점을 탐지하는 시도에 깊이 천착하여 독자들에게 지적인 놀라움을 선사한다. 메이킹라인즈에서 광범위하게 확장된 인류학적인 지()의 문제를 자기 자신의 신체나 손을 사용해서 다시 배워가는 실천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잉골드는 인류학을 떠나 고고학, 예술, 건축 등과의 경계에서 자신의 사상과 연구 테마를 찾아낸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보면 메이킹1장을 중심으로 전개된, 인류학과 민족지에서의 작업 구별의 문제가 중요하다. 잉골드는 민족지를 깎아내릴 생각은 없다고 단언한 후에 민족지적 기술이란 만물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그 기록자료와 데이터의 작성을 목표로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에 반해 인류학의 본질은 참여 관찰 등을 통해 인생행로의 무언가를 배우면서 자기 자신을 생성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라 그에게는 민족지가 아닌 인류학이야말로 무기물이나 유기물의 생성 변화의 흐름에 조응하면서(correspond 응답, 조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인간의 만들기에 이바지할 수 있는 지혜의 원천이다.

물론 이 속에는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에의 깊은 공감이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저서 천의 고원에서는 얼핏 강고하고 불변의 물질로 보이는 무기물의 금속조차도 광맥에서 채굴된 광물로서 휘발하고 용해하고 제련하고 거푸집에 담기는 등의 흐름을 가진 비유기적 생명으로 파악한다. 잉골드가 말하는 만들기란 특정의 건축가나 예술가의 그것을 의미하기보다 금속의 물질-흐름에 따라 탐광자, 채굴자, 야금술의 장인이 다양한 배치배열을 입히는 것과 같은, 인간계에 널리 사용되는 기술적인 영위이며, 그것들을 인류학적으로 기술하려는 시도이다. 만약 인류학이라는 것을 한 인물의 직능적 전문성이나 연구의 기반을 제공하는 지()의 체계라고 생각한다면, 절대로 메이킹을 인류학 저서라고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잉골드가 주장하듯이 인류학이 주변 세계에 주의를 기울여서 지혜를 얻고 참신한 지적 공기를 흡수해서 점차 자신을 변화시켜 환경에 적응해가며 복잡한 자기 자신과 우주와 세계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해하기 위한 지()의 길이라고 한다면, 메이킹만큼 인류학적인 모험을 감행한 책이 없을 것이다.

 

예술과 인류학

 

나 자신은 팀 잉골드와 대면한 적이 없고, 시인이자 비교문학자인 스가 케이지로(管啓次郞)가 잉골드와 만났었다. 스가가 잉골드의 인상에 대해 굵은 팔뚝에 털이 무성한 야성적인 느낌의 사람이다.”라고 한 말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젊은 한때 200~300kg의 순록을 상대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자기 안에서 숙성되어 딱 감이 오는 기분이었다고.

팀 잉골드는 메이킹1속에서부터 아는 것(Knowing from the insid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순록 유목을 하는 사미족 사회에 들어가 참여 관찰의 방법을 가지고 그들과 함께 생활한 청년 시절의 일이다. 사미족 사람들이 전통의 지혜를 조금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분명 가르치는 일을 싫어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간 흐른 후에 알게 된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무언가를 알기위해서는 그 속에서 스스로 발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어로, 수렵, 혹은 순록 방목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말로 이야기해서는 가르칠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미족이 가진 이 지혜를 청년 잉골드가 깨달은 것이다.

나 또한 저 사회인류학자의 접근과는 다르지만, 그와 비슷한 것을 20대 후반의 젊은 시절에 경험했다. 볼렉스[카메라 제작회사 이름] 16mm 카메라를 짊어지고 시인 요시마스 고조(吉増剛造) 씨를 쫓아다닐 때의 일이다. 문화인류학자 이마후쿠 료타(今福龍太) 씨와 요시마스 씨가 삿포로의 한겨울 설경을 배경으로 니시오카(西岡) 저수지의 숲(이마후쿠 씨가 니시오카 월든(Walden)’이라고 부른 곳)을 걸으면서 대화를 나눈다고 해서 촬영하러 갔다. 저수지가 얼어서 눈이 쌓이고 그 위에 백로의 발자국이 띄엄띄엄 나 있었다. 거기에 눈길이 멈춘 시인은 저것은 눈의 바늘땀이라오.”라고 속삭였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아마미 자유대학(奄美自由大学)’[이마후쿠 료타의 주재로 아마미 군도(奄美群島)에서 진행하는 형식 없는 배움의 장]에 참가해서 도쿠노시마(徳之島)에서 소가 없는 투우장을 걷는 순례를 하는 중에 요시마스 씨가 웅크리고 앉아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는 소의 앞발이 파놓아 움푹 파인 구멍을 보고 저것은 투우장의 눈동자구먼.”이라고 중얼거렸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는 스스로 생물과 물질로 이뤄진 세계를 학습하고 있은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계는 시시각각 모습을 바꾼다. 그러한 세계를 탐구하는 기술은 타자에게서 그의 머릿속에 있는 어떤 관념이나 정보를 전달받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끊임없이 변용하는 생물과 물질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이 질문의 답은 스스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요시마스 고조 씨가 백로의 발자국을 바늘땀으로 파악한 것은 단지 시인의 감흥에 불과한 것인가? 잉골드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민달팽이가 납작돌 위에 남긴 흔적처럼 이리저리 감기는 선의 그물망(meshwork)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선은 고리를 만들어 서로 얽히고 또 굽이굽이 꿰매듯이 나아간다.” 연결망(network)의 모든 선이 연결선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물망의 선은 운동이자 성장의 선이며 생성 변화하는 선이다. 나는 내 주변에서 질적인 변화를 해나가는 생물과 무생물의 양상을 파악하는 방법을 시인에게서 배웠고, 잉골드는 그것을 살아있기(being alive)’ 혹은 만들기(making)’의 학습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예술과 인류학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는 선주민이 만든 회화, 건축, 조각, 민중예술을 연구하는 것을 의미해왔다. 한편으로 팀 잉골드는 예술과 인류학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여기서 /가 중요하다. ‘예술 인류학에서 감상자는 작품을 통해 제작자의 의도를 미루어 파악하고 작품의 배후에 있는 선행작품으로부터의 영향이나 그것이 제작된 시대가 드리운 그림자를 투시함으로써 작품을 해석한다. 그런데 예술과 인류학에서 감상자는 예술가(artist)의 길동무가 되어 작품이 세계에서 전개해가는 것을 작품과 함께 본다’. 왜냐하면 작품의 생명은 그 소재에 뿌리내리고 있으며 모든 작품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 후에도 계속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메이킹2생명의 소재(The Materials of Life)에 나온 도표를 참조해야 한다. 팀 잉골드는 의식의 흐름(flow of consciousness)’물질의 흐름(flow of materials)’을 두 개의 세로 선으로 나타낸다(<그림 1> 참조). 이 두 선은 위에서 아래로 시간이 흐른다. 앙리 베르그송이 말했듯이 시간의 흐름은 시계처럼 숫자로 계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컵에 담긴 물에 설탕을 넣으면 설탕이 서서히 녹듯이 시간의 흐름은 질적인 변화를 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신체도 물질이기 때문에 세월이 흐를수록 얼굴에 주름이 생긴다. 시간의 경과는 두 번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질적인 변화이다. 그리고 의식의 흐름의 세로 선에는 우리의 시각, 청각, 촉각 등의 다양한 감각이 뭉쳐 있는데, 한 장의 사진을 찍듯이 그것을 일순간 멈추게 하면 그것은 이미지가 된다.

그림 1. 의식, 물질, 이미지, 물체의 도표

그와 더불어 물질의 흐름인 세로 선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점차 변화한다. 식물이나 동물과 같은 생물은 시간이 흐르면 성장한다. 실은 무생물도 마찬가지다. 단단하고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강가의 바윗돌도 장구한 세월 속에 이리저리 구르고 물에 씻기어 점차 둥글어진다. 철과 같은 물질도 녹이 슬거나 강도가 약해지거나 부서진다. 아무리 확고한 존재로 보이는 사물도 시간과 함께 시시각각 변하는 것은 생명체와 다를 바가 없다. 생물과 비교해서 질적인 변화의 간격이 길고 속도가 느릴 뿐이다. 즉 물질 또한 한계가 있는 생명을 가졌으며, 비유기적인 생명이다. 잉골드는 우리가 이러한 물질의 흐름이 정지하는 순간에 물체로서 그것을 지각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이미지에서 물체로, 물체에서 이미지로 변환하는 바로 이것을 잉골드는 만들기(making)’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로 방향뿐만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세로 방향으로 만드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메이킹에서는 “perdurance(연속, 영속)”이라는 조금은 생소한 용어를 사용한다. 물질의 영원한 지속을 뜻하는 것일까? 자신의 뇌리에 있는 이미지를 물질에 찍어누르는 것이 만드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관념은 틀렸다고 잉골드는 지적한다. 미리 디자인을 구상하고 설계도를 만들어 거기에 맞춰서 물질이나 소재를 조립해서 예술작품이나 건축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메이킹에서는 도예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도공은 점토를 소재로 사용한다.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은 물레의 회전에 맞춰 정성스럽게 점토를 매만지고 조금씩 시간이 흐르면서 말라가는 흙과 춤을 추듯이 손가락으로 매만지는 동작을 반복하면서 소재의 내부에서부터 모양을 만들어간다. 도공의 손가락과 소재인 점토 사이에 회전하는 물레라는 제3항이 끼어들면서 생물과 무생물의 댄스는 가능해진다. 또 다른 예를 보자. 나무로 조작을 만드는 사람은 끌을 나뭇결에 따라 위로부터 아래로 밀어 깎는다. 끌의 칼끝은 그 나무가 성장해온 과거의 역사인 나뭇결에 저절로 이끌린다. 사전에 머리에 구상한 디자인을 물질에 찍어누르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질적으로 변화하는 흐름을 좇는 것. ‘만들기란 이렇듯 물질세계에 참여해서 사물과 힘을 합쳐 작품을 성장시키는 것이며 이에 따라 작품이 생성하는 것이라고 잉골드는 생각한다.

 

모뉴먼트와 마운드

 

메이킹에서는 클레어 투미(Clare Twomey)라는 예술가의 광기인가 아름다움인가(Is it Madness. Is it Beauty)라는 설치미술(installation art)을 소개한다. 옆으로 긴 탁자 위에 굽기 전 점토 상태의 하얀 도기를 한가득 진열해 놓는다. 투미는 물 주전자를 가지고 도기 안에 물을 붓는다. 그러면 당연히 감상자가 보는 앞에서 도기가 천천히 구부러지고 틈이 생기고 느린 그림처럼 무너져서 쪼개진 도기는 탁자나 마루 위에 물을 흘려보내게 된다. 이 작품에서 백색 점토로 만들어진 그릇은 하나의 완성형이 아니라 하나의 덧없는 생명을 가진 존재이다. 이렇듯 현대 예술작품에는 시간에 경과에 따라 물질이 변화해가는 과정 그 자체를 작품 속에 녹여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내가 아사히카와(旭川)의 가와무라 가네토(川村) 아이누 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정원에 더러운 큰 나무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관장인 가와무라 가네이치(川村兼一) 씨에게 저건 무엇인지 물었을 때 이렇게 답했다.

, 저것은 스나자와 빗키(砂澤ビッキ)[홋카이도 출신의 조각가]가 만든 토템 막대요.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겠지만, 빗키라면 그대로 둘 거라고 생각해서 내버려 두고 있소.”

스나자와 빗키는 주로 나무로 작품을 만든 예술가였는데, ‘눈보라라는 이름의 끌로 작품을 만들려고 생각해서, 작품이 자연적으로 풍화하고 썩고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작품 제작 속에 집어넣은 인물이다. 삿포로 예술의 숲 밖에서 상설전시되고 있는 네 개의 바람이라는 대작은 네 그루의 나무 기둥으로 만들어진 작품인데, 이미 그중 한 그루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조각작품 또한 언젠가 썩어 없어질 생명의 끝을 맞이한다는, 예술가의 사고방식이 구현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돌이나 금속에서 모뉴먼트(기념건조물)를 만들고 반영구적으로 그 모습을 유지하려는 사상과 대극을 이룬다. 바로 팀 잉골드가 생각하는 끊임없는 생성 변화의 작품에 가깝다.

지금 모뉴먼트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 용어는 팀 잉골드가 고고학에 대해 생각했을 때에 사용한 키워드이기도 하다. 메이킹6장은 원뿔형의 마운드가 주제이다. 잉골드는 자신이 촬영한 핀란드의 개밋둑 사진을 책 속에 게재하고, 그것이 마운드적인 존재 방식을 체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슬픈 열대에서 브라질의 적토로 만들어진 개밋둑을 언급한 것을 염두에 두었으리라. 개밋둑 외에도 마운드를 이룬 장소에는 고분의 흔적, 묘지, 퇴적물로서의 조개무지 등이 있다. 잉골드의 연속의 고고학에서 마운드는 지표면에 나타난 생명과 성장의 원천으로 간주된다.

이에 대해서는 모뉴먼트와 마운드의 성질의 차이를 비교하면 알기 쉽다. 모뉴먼트는 일정한 모습을 남기기 위해 돌이나 금속을 사용해서 기념될만한 인물이나 사건을 반영구적으로 보전하고자 한다. 그에 비해 마운드는 사람들이 순례를 행한다거나 이웃들이 그 주변을 걷는다거나 인근 논밭을 경작한다거나 인간이 행동하는 속에서 기억을 담지하는 장소로서 존재한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마운드는 신성한 장소이기도 하다. 미야코지마(宮古島)의 성지인 오타케(御嶽)[오키나와에서 조상신을 모시는 성지]”20여 개소 순례했을 때에도 그것이 평평한 토지에서 눈에 띄는 작은 둔덕인 경우가 있었고, 수목이 빽빽한 숲에 오타케가 들어선 경우도 많았다. 혼슈로 말하자면, 신사가 있는, 수호신을 모신 숲도 원래는 기암괴석이나 오래된 나무가 있는 높고 낮은 둔덕인 경우가 많다. 그러한 성지에는 애니미즘적 신령의 유래담이 전해오는데, 훗날 그것이 불교와 습합한다거나 근대에 이르러 신도와 불교 분리령(分離令)으로 제신(祭神)이 바뀐다거나 한다. 그렇지만 표면상의 종교나 제신이 바뀌어도 물질과 장의 힘을 가진 성지 자체는 불변한다. 모뉴먼트는 시간이 지나면 풍화하지만, 마운드는 풍화하지 않는다. 거기에 식물이나 곤충이 서식하고 흙이 퇴적하고 빗물이 표면을 씻기고 세월이 흘러도 마운드는 헐지 않는다. 이 지적은 팀 잉골드의 탁견이다. 마운드는 커지든지 작게 깎이든지 다양한 물질이 교체되면서도 둔덕으로서의 존재를 이어가는 비유기적인 생명의 존재 방식을 상징하는 것이다.

조금 화제를 바꾸면, 나는 2017년에 국제교류기금의 펠로우십을 받아 6주간 태국과 캄보디아를 여행했다. 그때 처음으로 태국의 난(Nan)에서 므라브리족(Mlabri) 사람들을 만났다. 태국 북부와 라오스 국경 주변 숲에서 살아온 그()들은 400명 남짓 규모의 민족이다. 오스트리아의 민족학자 휴고 아돌프 베르나직(Hugo Adolf Bernazik)1936년부터 1937년의 탐험에서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므라브리족과 접촉했다. 당시 그들은 정글 속에서 수렵채집 생활을 하고 있었고, 마을이나 가옥을 가지지 않은 완전한 노마드였다. 므라브리족은 타이족, 몽족, 라오족 등 주변 민족을 경계했기 때문에 주변 민족이 므라브리족을 접촉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바나나 잎으로 침상을 만든 흔적 외에는 좀처럼 접하기 힘들었기에 황색 잎의 정령이라는 뜻의 피 통 루앙(Phi Tong Luang)”이라고 불렸다. -크루메어계의 므라브리어를 말하는 이 소수민족은 197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 타이인에게 다시 발견되어 태국의 정책적 차원에서 숲을 나와 정주화를 진행하고 있다.

2017년에 므라브리족 마을을 방문했을 때 영상을 촬영해서 5분 가량의 황색 잎의 정령이라는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그 후 2018년부터 2019년까지 므라브리어를 연구하는 언어학자인 이토 유우마(伊藤雄馬)와 협력하여 라오스쪽 숲에서 노마드 생활을 하는 그룹을 찾아 숲의 므라브리(2019)라는 장편 민족지 영화를 제작했다. 처음으로 난(Nan) 지역의 마을을 방문했을 때는 대나무로 엮은 작은 오두막에 살면서 숯불로 조리하는 므라브리족의 간소한 생활방식에 놀랐다. 비스켓과 돼지고기를 선물로 들고 가면, 장로들이 대나무로 간단한 기둥을 만들고 바나나잎으로 지붕을 얹는 집 만드는 방법을 답례로 보여주어서, 그것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간소한 생활이라 해도 그것은 우리의 문명과 비교했을 때의 척도에 불과하며 원래 므라브리는 토지를 소유하지 않고 논밭을 경작하지 않으며 자기 집이 없이 정주하지도 않는 유동민(遊動民)의 생활을 견지해왔다. 보아하니 그()들은 손재주가 좋아서 허리춤에 달아놓은 손도끼 하나만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주변에 있는 것을 사용해서 불을 피우고 눈 깜짝할 사이에 바나나잎과 대나무로 냄비와 식기를 만든다. 그리고 대나무 통에 돼지고기를 잘라 넣어 대나무가 머금은 수분으로 쪄내는 전통적인 조리법을 가지고 있다. 종래의 문화 인류학자라면 므라브리족의 집 만들기나 조리법을 보았을 때 장로들과 이들을 돕는 아이들의 브리콜라주를 지적할 것이다.

그러나 메이킹을 읽은 후의 우리는 조금 더 다른 관점으로 다가갈 수 있다. 나 자신이 촬영한 영상을 돌려보면, 장로와 므라브리족의 소녀는 손도끼를 가지고 숲에서 대나무를 자르거나 그 잎과 줄기로 작은 오두막을 만들거나 그 대나무 줄기와 잎사귀로 화톳불을 피워서 조리한다. 집 만들기에서 대나무 줄기와 바나나 잎을 편물처럼 떠서 지붕을 강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리기구를 만들 때 장로는 도끼 칼을 대나무 결에 맞춰 세로로 쪼갠다. 대나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장한 그 방향과 흐름에 응답하듯이. 그가 다루는 손도끼 또한 물질의 흐름을 따른다. 잉골드의 사고방식으로 말하면 머릿속에 있는 디자인을 물질에 찍어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적인 만들기가 아니라 세계와 물질 속에 있는 성장과 지속의 방향에 따라 그것을 이용하면서 사물을 만드는 장인(artisan)의 손놀림이다.

 

쓰기와 드로잉

 

생물도 유기물도 아닌 작품에 생명을 느끼는 일은 나처럼 책이나 영상을 만드는 인간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다. 문장을 쓸 때 어떤 테마에 대해 쓸 것인가, 어떻게 구성할까, 사전에 어느 정도 디자인해둔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미생(未生)의 형태에 머문 구상에 불과하다. 책상 앞에 앉아 쓰기 시작하면, 머릿속 소재를 늘어놓을 때마다 생각지도 못한 형태가 나타난다. 손을 움직이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때로 뇌가 생각하는 것인가 손이 생각하는 것인가 모를 때가 있다. 그러한 소재를 익숙하게 만들어 지면상에서 다양한 모험과 실험을 반복하면, 무언가 나다운 형태로 정리된다. 써 내려간 문장을 다시 읽어보면 처음 생각한 지점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생전 처음 보는 생물을 보는 것처럼 나 자신이 썼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 소설, 평론, 수필, 저널 등 문장의 장르에 거의 관계 없이 쓰기라는 만들기과정에 어떤 창조행위의 비밀이 있는 것 같다.

그러한 만들기의 감촉은 다큐멘터리 영상을 제작할 때에도 여실히 느낀다. 세계나 사회 속에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들어갈 때 다양한 사람과 인터뷰를 하거나 여러 사건의 흐름 속에 몸을 맡긴다. 눈앞에서 조금씩 전개되는 사상(事象)에 직면해서 그 흐름을 따라가면서 그때마다 필요한 대응과 응답을 한다. 현실 세계로부터 움직이는 이미지의 단편을 끄집어내는 작업인 것인데, 각각의 단편을 가능한 한 자기 나름의 색깔이나 분위기가 풍기도록 애쓴다. 그렇게 해서 수집한 영상이나 음성의 이미지를 편집할 때는 소재가 가진 역능을 활성화해서 그것을 발휘하게 하면서 자르고 붙이면서 흐름을 만든다. 소재가 가진 힘을 강화하고 그것이 해방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영상의 편집작업은 촬영 전에 미리 정해진 대본을 쓰는 작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영상의 편집은 어디로 향해갈지를 모르는 가운데 소재와 대화를 계속하며 하나의 종합적인 형태로 결실을 이루는 여행이다.

메이킹8손은 말한다(Telling by Hand)를 읽으면 팀 잉골드는 손으로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손은 촉각 기관일 뿐만 아니라 손이 만들어내는 제스처, 문장어, 직물과 편물, 그림 그리기 등을 통해 이 세계의 다양한 스토리를 말할 수 있다. 그것을 손의 창조성(the creativity of the hand)’이라 하지 않고 손의 인간성(the humanity of the hand)’이라고 하는 부분이 흥미롭다. 손이 스스로 사물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제작이라는 것은 모두 소재와의 대화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앙드레 르루아 구랑(André Leroi-Gourhan)[프랑스의 선사학자, 1911~1986]은 망치질, 뜨개질, 스크래핑 등 수많은 기술적인 작업이 특정한 동작의 규칙적인 반복을 수반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장인의 마음속에 예술품의 최종 형태가 있든 없든, 실제 형태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리듬감 있는 동작의 패턴에서 나온다.” 이것을 이번에는 쓰기에 대해 살펴보자. 하이데거가 타자기 사용을 반대한 것도, 잉골드가 컴퓨터 키보드 사용하지 말라고 한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펜과 종이 사이의 대화에 귀를 기울여 소재의 반응을 끌어내고 소재에 조응하기 위해서는 역시 손의 움직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타자기를 사용해서 종이에 글자를 찍어 넣으면, ‘손의 운반통로(the ductus of the hand)’를 잃고 신체의 몸짓을 잃는다. 다시 말해 거기에 있는 인장 등 무한의 뉘앙스가 상실된다고 하이데거는 생각했다. 팀 잉골드는 그러한 생각에 동조하면서 손으로 쓴다는 것은 세계 속에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 속에 존재할 때에 우리는 참된 느낌을 느낄 수 있다.”라고 말한다. 잉골드에게 드로잉(소묘)은 작가가 머리에 그린 이미지의 실현이 아니라 손과 연필이 지면과 만나 상호작용을 일으킬 때의 신체 동작의 흔적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문자를 쓰는 것그림을 그리는 것의 경계 따위는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2018년 여름 토치기현(栃木県)의 아시카가(足利) 시립미술관에서 세상 끝의 시성(テノ詩声)이라는 전람회가 개최되었다. 손으로 직접 쓰는 것을 고민해온 시인 요시마스 고조 씨가 본인에게 영향을 준 료칸(良寛)[에도시대 후기의 선승이자 시인, 1758~1831], 아쿠다가와 료노스케(芥川龍之介)[일본의 소설가, 1892~1917], 야나기타 쿠니오(柳田国男)[일본의 민속학자, 1875~1962], 니시와키 준자부로(西脇順三郎)[일본의 근대 시인이자 영문학자, 1894~1982] 등의 책과 편지와 함께 자필 원고나 자작의 사진작품을 전시했다. 놀라운 것은 요시마스 씨의 페인팅 시리즈 불의 자수(刺繍)의 작품군이다(<그림 2> 참조). 원고용지의 괘선에서 삐져나오듯 빽빽하게 시편이 필사된 말이 친필로 써 있다. 대부분은 가타카나로 쓰여 있어서 어떤 주술문으로 보인다. 정성스럽게 쓴 그 노력을 지우려는 듯 그 위에 검정과 색색의 잉크가 덧칠해져 있고 일종의 추성화로서 완성된 모습이다. 잭슨 폴록(Jackson Pollock)[20세기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적 화가, 1912~1956]의 추상화처럼.

그림 2. 요시마스 고조의 불의 자수 (필자 촬영)

나아가 요시마스 고조 씨는 관중 앞에서 검은 안대를 하고 라이브 페인팅으로 제작하는 시도를 행했다. 빼곡히 문장을 써 내려간 원고용지 위에 잉크를 떨어뜨리는 것인데, 안대를 하고 있기에 어떤 모양이 될지는 본인조차도 알 수 없으며 오직 우연성에 이끌려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팀 잉골드처럼 예술의 인류학이 아닌 예술과 인류학을 지향한다면, 불의 자수의 배후에 있는 작가의 의도와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를 그렇게 적극적으로 고찰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감상자가 찾게 되는 것은 예술가의 손이 우주 공간에 그려 넣은 움직임의 흔적을 좇는 것이리라. 불의 자수를 문학작품이나 회화작품의 장르에 편입시키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드로잉이 회화보다도 댄스나 음악에 가깝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것은 잉골드가 말하는 시간의 흐름의 표면에 생기는 소용돌이를 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드로잉은 정지한 점과 점이 이어지는 네트워크와는 다른 어떤 것이다. 왜냐하면, 네트워크는 정지한 공간에 그려진 구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민달팽이가 이동한 후에 남겨진 선을 잉골드는 연결망(network)이 아닌 그물망(meshwork)이라고 불렀다. 그 선은 띄엄띄엄 이어지며 여기저기 들르면서 고리를 만든다거나 서로 얽힌다거나 굽이굽이 바느질하듯이 나아간다. 즉 그물세공은 운동하는 선이며, 조금씩 성장하는 선이며 생성 변화의 선이다. 그 속에서 손과 신체는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선을 성장시킨다. 그러한 의미에서 불의 자수에 실린 잉크의 염료는 시인의 신체 행위의 흔적이며 그물망이다. 역시 손의 인간성이 보여주는 활동에는 아직 무한의 가능성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金子遊、「生物物質のダンス」、『たぐいVol.3、202111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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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에 의하면, 파트리스 마니글리에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의 진정한 계승자이다. 말마따나 마니글리에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철학적, 기호학적인 측면에서 더 깊이 파고들었다. 베르그송에서 시작해서 소쉬르와 레비스트로스를 경유하여 마니글리에에 이른 가상성의 실천으로서 기호적 삶은 활력을 얻는다. 이 글의 원문은 Common Knowledge에 2016년에 실린 https://doi.org/10.1215/0961754X-3622260이며, Matthew H. Evans가 영어로 번역한 것을 번역한 것이다. 

 


 

 

기호와 관습: 레비스트로스, 실천적 철학자

 

파트리스 마니글리에

 

“우리는 왜 복종했는가?” 우리는 이런 질문을 거의 하지 않는다. 우리는 부모와 선생을 따르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다. 이와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앙리 베르그송은 사회과학의 철학에서 가장 위대한 작업 중 하나로 남은 것을 소개한다.[각주:1] 베르그송은 사회과학 분야, 대표적으로 에밀 뒤르켐의 작업이 의무의 문제를 철학보다 더 잘 보여준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즉 이론적 및 윤리적 관점에서 의무가 제기하는 진짜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좀처럼 인식할 수 없다는 점이며, 이 점을 사회과학이 철학보다 더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철학이 의무의 문제를 주체가 의식적으로 타자의 권위에 스스로 복종하는 합법적인 조건 중 하나로 다룬다면, 사회학이 구축한 사회 개념은 복종을 역설적으로 근거 없기에 더욱 만연한 것으로 묘사한다. 사회라는 바로 그 개념은 의무에 대한 우리의 무자각을 들추어낸다. “우리는 이것을 완전히 깨닫지 못했지만, 부모와 선생 뒤에서 부모와 선생을 통해 우리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거대하면서도 불투명한 무언가가 있음을 어렴풋이 알았다. 후에 우리는 그것이 사회였다고 말할는지 모른다.”[각주:2] 사회적인 것은 개인적이고 의식적인 행동의 인과관계로 환원할 수 없는 인과관계의 층위이며, 이는 의문―권위의 합법성―의 부재로 드러난다. 따라서 사회과학의 목적은 왜 개인이 자신의 이해 범위를 초과하는 이유에서 자신에게 부과되는 것들을 행하는지를 더 잘 이해하는 것이어야 한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을 뒤르켐과 마르셀 모스 그리고 프랑스 사회학파의 유산 상속자로 여겼다. 이것은 그를 의무의 문제에 관해 제각기 답변을 내놓을 3인조―뒤르켐, 모스, 레비스트로스―의 세 번째 회원으로 영입하게 만든다. 각자의 답변을 들어본다면, 뒤르켐은 집합 표상―원천적으로 개인의 표상과 다른―의 제약의 힘으로 돌렸을 것이고, 모스는 표상의 본질이 아니라 교환 메커니즘을 통한 시스템에의 참여로 돌렸을 것이다.[각주:3] 레비스트로스라면? 사람들은 그가 사회적 규범의 제약적 성격을 논리적 제약, 아니 어쩌면 인지적 제약으로 설명할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빈센트 데꽁브(Vincent Descombes)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1953)를 끌어와서 논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규칙을 제약으로 이해함으로써 규칙을 실체화하려는 시도는 아포리아로 끝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각주:4] (데꽁브는 레비스트로스에 종종 부과되는 이의제기를 일반화하면서, 사회과학의 이론가들은 대개 행위를 ‘이해하기’보다 ‘설명하기’를 더욱 열망한다고 비난한다.) ‘왜 사람들은 해야만 한다고 느끼는 것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실제 대답은 사람들이 항상 그 이유를 명확하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으며 그 말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가 속한 사회가 무엇이든지 개인은 이 규칙적 순응에 원인을 지정할 능력이 거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사태가 항상 이와 같았으며 사람들이 그 전에 한 일을 그가 한다는 것뿐이다.”[각주:5] 이에 따라 의무의 문제는 대체된다. 우리가 하는 일을 왜 하는지를 이해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해야만 할 일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하는지를 이해하는 문제이다. 문제는 통상적 실천, 습관 혹은 관습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아낼 것이며, 또 그 일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집합적 행위는 흔히 생각하듯이 안정된 관계를 유지하는 여러 개인에게 공통적으로 관찰 가능한 일련의 행동으로 정의 내릴 수 없다.

‘인지적’ 혹은 ‘상징적’ 차원에서 관찰 가능한 행위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제안은 구조주의가 사회과학에 공헌한 바가 아니다. 오히려 공헌은 언어학, 인류학, 역사학, 그 외 “문화 과학”에 있어서 기초적인 문제─데이터의 특성과 관련된 문제─를 드러낸 것에 있다. 구조주의는 문화적 실천의 단위(담화, 의례, 신화, 습관 등등)가 관찰 가능한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부정적이지만 심히 교훈적인 관측에서 시작한다. 문화적 실천의 세계는 필수적인 데다가 이중적인 가변성(variability)에 의해 정의된다. 다른 언어들 사이에서의 가변성뿐만 아니라 한 가지의 같은 언어를 말하는 방식에서의 가변성. 우리는 구조주의를 신(新) 엘레아 학파[각주:6]고 비난하며 자축했다. 그러나 구조주의는 정말로 우리에게 이 가변성이 우연이 아니라 우리의 문화적 실천을 더불어 구성하는 단위들을 정하는 방식(mod) 속에 확고히 놓여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각주:7]

나는 여기서 레비스트로스가 『신화학』 시리즈에서 변환 개념을 통해 구조적 분석을 재정의하면서 기이하게도 원래 소쉬르의 문제였던 기호의 동일성(identity) 문제와 우연히 마주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려 한다. 그러나 나는 그뿐만 아니라 새로운 방법론의 구축, 즉 구조적 방법론―‘차이’와 ‘시스템’이라는 작동 개념을 고려해서―이 어째서 새로운 철학적 문제의 공식화를 통해 필수적으로 작동해야 했는지도 밝혀보려 한다. 차이 간의 상관관계를 통해 독특하게 구성되는 특정한 종류의 동일성 혹은 통일성,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존재론이라고 부르는 문제이다. 항간에는 소쉬르, 야콥슨, 트루베츠코이, 레비스트로스와 같은 저자를 독해하려는 움직임이 최근 다시 일고 있다. 이들은 모두 한동안 구조주의 운동과 분리되는 조건에서만 구조주의자로 인정받았고, 그렇게 구조주의 운동은 사라지는 지위로 강등될 수 있었다.[각주:8] 그러나 내게 필요한 것은 그 반대 절차이다. 즉 구조주의 운동을 위해 이 저자들을 되찾는 것, 그리고 ‘문화 과학’과 교차하는 순전한 철학적 문제의 유리한 지점으로부터 그렇게 하는 것. 구조주의라고 알려지게 된 무언가의, 누가 보아도 불확실하고 논쟁적인 일관성은 내부의 불균형 그리고 자신의 방법론에 있는 철학적 문제의 발견이 ‘실천의 이론’을 부추긴다는 과격한 주장에서 찾아야 한다. 기호학(semiology)은 새로운 이론적 영역을 위한 이름이기보다 다양한 학문 집단 내에서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철학적 문제를 지칭한다. (순전히 방법론적인) ‘좋은’ 구조주의를 가지고 철학적 사변론에 복무하는 ‘나쁜’ 구조주의를 막아봤자 얻는 것은 별로 없다. 방법론적인 프로젝트와 사변적인 구성물의 조합을 이해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구조주의가 제기하는 진짜 문제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철학이 제1 원리를 향해 되돌아가라고 영원히 비난받을 필요도 없고 (무관심 속에서 매우 흔하게 철학자가 밑바닥에서 무엇을 찾든지 간에) 철학은 어떤 새로운 지적 규율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의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무심코 보여준 것이 구조주의의 최대 장점이다.

 

소쉬르와 철학: 존재론적 문제로서 기호의 동일성

 

우리는 이제 겨우 소쉬르에 관해서 우리가 아무것도 혹은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구조주의로 가는 연구에서 묘사되는 소쉬르 그리고 소쉬르의 자료를 재개봉하는 것에 쉽게 낙담하는 비판적 편집과 학술적 비평에서의 소쉬르, 이 사이의 격차는 매우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쉬르의 노고에 대한 일관된 해석은 가능하다. 그가 기호만큼 의미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면 말이다. 그의 야망은 결코 의미화(signification)의 일반 이론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기호를 가지고 모든 종류의 것을 할 수 있고 그 속에서 우리가 ‘의미화(signifying)’ 혹은 ‘소통(communicating)’이라고 부르는 것은 타자들 간의 게임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옳았다. 그러나 소쉬르의 질문은 더 간단하고 더 즉각적이다. 요컨대 우리는 기호의 조작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왜냐하면, 기호의 정체화(identification)는 엄청난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소쉬르는 다음과 같이 쓴다. “내가 여러분(messieurs)이라는 단어를 발화할 때마다 나는 그것의 물질적 존재를 새롭게 한다. 즉 새로운 발성 행위이고 새로운 심리학적 행위이다. 같은 단어의 두 가지 사용 사이의 연관성은 물질적 동일성이나 의미의 정확한 유사성에 기반하지 않고, 언어학자가 언어 단위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내는 어디에라도 접근하려면 반드시 발견해야 하는 사실에 기반한다.”[각주:9] 이해해야 하는 것은 매번 반복할 때마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단순한 변이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심지어 최소한의 ‘알맹이(kernel)’의 보존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호에서 우연적인 것(the accidental)과 본질적인 것(the essential)을 분리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기호가 실재한다면, 그때 그것은 관찰 불가능한 실재이다. 관찰 불가능하다는 것은 측정 불가능하고 경험적으로 증명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소쉬르 시대 이후 언어학의 역사는 기호의 경험적인 영역을 측정하기 위해 시행된 어떤 방책도 소용없음을 입증한 것일는지 모른다. 1943년 야콥슨이 뉴욕의 ‘신사회연구소(the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행한 “소리와 의미에 관한 여섯 개의 강연”의 첫 강연―레비스트로스는 이 강연의 매우 열렬한 청자였다―에서 야콥슨은 1930년대에 촬영된 음성장치의 방사선 필름이 발성 동작의 관찰 가능한 단위가 음운 인식의 단위와 일치하지 않음을 처음으로 입증한다고 설명했다.[각주:10]

그러나 소쉬르는 그의 관점을 실험적으로 검증하기 훨씬 전에 언어학은 단순한 이유로든 복잡한 이유로든 다른 어떤 경험과학과 같은 대상을 가지지 않는다고 가정했다. 빵(bread)이라는 소리는 예를 들어(“나는 약간의 빵을 원한다.”라고 구별되고 분류되는 문장에서) 소리의 경험적으로 독특한 특이성을 충분히 기록하지 않는다. 의미화는 하나 이상의 청각적 차이를 하나 이상의 청각적 차이와 완전히 다른 평면(차원)―거의, 적어도 처음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 바로 그 원래―에서 연합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시청각 평면(차원) 혹은 심리학적인 평면(차원)―예를 들어 우리는 이 평면(차원)을 의미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일 수 있다.) 문제는 두 개의 차이 혹은 두 개의 차이 시리즈의 병존 혹은 상관관계이다. 소쉬르는 단지 기호는 그것의 독특한 형태의 조합(set)으로 규정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나아가 그는 breaddread  사이에 발음상 차이가 있으므로 완전히 구별되는 질서의 또 다른 차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언어적인 문장에서 구조는, 어떤 진정한 구조주의자도 그렇게는 주장하지 않는 공식적인 규칙 시스템—다른 말로 통사론(syntax)—이 아니다. 오히려 구조는 두 개의 차이 시스템 간의 상호 규정에 의해 구축되는 시스템이다. 구조는 형식적인 시스템의 논리적인 감각에서, 노암 촘스키가 『통사 구조(Syntactic Structures)』(1957)에서 공개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물론 촘스키는 절대로 구조주의자가 아니었다. 언어학에서 인류학까지 그리고 이때 인류학에서 대개의 문화까지 움직이는 확장적이고 문제적인 운동이라고 우리가 구조주의를 의미한다면. “차이”와 “접평면”이라는 개념의 중심성은, 구조적 분석의 실제 실행에서 나타나는 어떤 것과도 거의 일치하지 않는 구조 개념을 갖는 자들에 의해 너무나 자주 과소평가되어왔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그들은 용어 규정을 위해 구조주의 저자들에서보다 어디서나 보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기호의 문제”를 둘러싸고 과학적 지식과 철학적 반성은 함께 해왔다. 게르만 신화에 관한 노트에서, 레비스트로스에 의해 한 번 더 인용된 것이기도 한, 소쉬르는 다음과 같이 쓴다.

사물에 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는 이 분야에서 언어학 관련 분야에서만큼 사고의 모든 부조화(불일치)가 본성이나 동일성 혹은 동일성의 특성에 대한 부적절한 성찰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 우리는 말(words), 혹은 신화적 인물이나 알파벳의 편지, 즉 철학적 의미에서 기호의 다양한 형태인 것과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 개체를 다루게 된다.

따라서 언어적 사고가 빠지기 쉬운 교착상태를 지나가려면 철학적 해명이 필요하다. 즉 언어학이 제기한 문제들─철학적인 만큼 방법론적인 문제들─은 그 외 다수의 현상과 공통한다는 인식으로 나아가는 해명. 그러므로 기호학은 그 대상이 공통의 기능, 의미화의 기능을 공유한다는 가설에 따라 정의되지 않지만, 대신 저 대상들의 본성─길버트 시몬돈이 만들었고 최근 브뤼노 라투르에 의해 일반화된 저것들의 “존재 모드”─이 변이 없이는 반복될 수 없다는 계시 때문에 정의된다.

따라서 소쉬르의 노트는 계속된다.

그래픽 개인 그리고 그와 같은 의미에서 기호론적인 개인은 유기체적 개인과 달리 그것이 동일한 것으로 남을 수 있음을 증명할 수단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유로운 연합에 의해 그의 완전체가 지어지기 때문이다. 보시다시피 특정한 동일성을 유지할 능력 없음은 궁극적으로 시간의 영향─요컨대 기호에 관심이 있는 것들의 현저한 오류─으로 설명될 수 없고, 오히려 우리가 애지중지하고 유기체처럼 관찰하는 개체의 바로 그 구성 속에서 미리 폐기된다. 그때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두세 가지 관념의 덧없는 조합으로부터 나타나는 유령일 뿐이다. 그것은 정의의 모든 문제다. … 우리가 한 번에 한 편씩 보게 되는 것은, 신화가 이러한 개체들의 근본적인 본성 위에서 일반적으로 그 이유를 발동한다는 것이다.

소쉬르의 문제는 다양한 말하기 방식 이면에 있는 진정한 언어적 동일성을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에 있지 않았고, 오히려 어떻게 “비교문법의 인식론”을 얻을 것인가에 있었다. 비교문법이 하는 일이란, 라틴어, 고딕어, 산스크리트어처럼 겉보기에 달라 보이는 언어가 원래 “하나와 같은” 언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때, 우리가 하나의 언어를 말하려고 노력하는 속에서 또 다른 언어를 말하고 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불어는 라틴어에서 온 것이 아니고, 그것이 라틴어이다.” 라고 소쉬르는 제네바 대학의 취임회견에서 선언했다.

그의 발견은 언어적 기호의 반복이 언어적 기호의 변환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었다. 이 변환은, 공시적인 동일성은 그 자체로 보증되지 않는다는 것을 소쉬르가 소급해서 보여주게 한 것이다. 소쉬르의 편집자들이 『일반언어학 강의』에 부여한 형식은 소쉬르 사고의 가장 풍부한 측면 중 하나─언어적 가변성은 기호의 고유한 결정 방식에서 비롯된다는 관념─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언어적 가치 체계”라는 그의 개념은 변이로 운명지어진 것의 논리를 모델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소쉬르는 철학자들이 비교문법의 긍정적인 발견의 완전한 측정을 하도록 격려했다. “기호 이론에 관한 언어 연구의 중요한 대응 그리고 그것이 열어갈 완전히 새로운 지평은 … 저 이론에 기호의 완전히 새로운 측면을 부과할 것이다. 새로운 측면이란, 기호가 전달할 수 있는 어떤 것일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전달되고 수정될 수 있도록 운명지어진 어떤 것임을 이해할 때에만 기호를 진정으로 알기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철학적 일반화는 비교 방법론과 그것의 다른 영역으로의 확장 모두를 가능하게 한다. 민속연구, 신화, 전설, 관습 등등. 소쉬르 덕분에 우리는 본질적인 가변성을 “문화 과학”의 대상을 정의하는 속성으로서 간주하게 된다. 나아가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기호학을 “사회 안에서 기호의 삶을 연구하는 과학”, 달리 말해 기호가 “순환” 속에 있는 한 스스로 어떻게 변화하는지의 연구로서 정의하는 그의 정의와 병행한다.

구조적 방법이 될 것에 대한 소쉬르의 정교한 탐구는 따라서 한 쌍의 관련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한다. 첫 번째는 기호의 결정(해석이라기보다)에 관한 것이다. 말하게 된 무엇에 관한 결정. 두 번째는 말하게 된 무엇의 동일성이 장기적이든 단기적이든 어떻게 해서 기호의 변이를 일으키는 반복과 같은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원인과 이유를 넘어서: 행해진 것의 동일성

 

레비스트로스가 구조적 방식을 사회과학의 영역으로 확장하도록 동기부여 한 것은 이러한 이중의 문제와 의무의 문제 간의 관계이다. 소쉬르가 “우리의 전임자가 사람과 개를 말했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과 개를 말한다.”라고 한 것처럼, 레비스트로스는 “그는 사람들이 먼저 했기 때문에 한다.”라고 말한 것으로 파악했다. 만일 “왜?”라는 질문에 대한 이 응답이 레비스트로스에게 “완전히 진실하게” 보였다면, 그것은 행동의 원인이 그 정의만큼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쉬르에서와 마찬가지로 외국어를 배우는 문제는 문장을 파악하는 문제라기보다 그것을 지각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소쉬르에게 언어학의 핵심 문제가 의미의 문제가 아니라 기호과정(semiosis)의 문제라면, 레비스트로스에게 사회과학이 당면한 진짜 문제는 행동, 실천, 혹은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것의 경계를 표시하는 문제─『야생의 사고』에서 “의지적 실천(praxis)”(구식에 딱 어울리는)으로서 지정된 연속성 내에서─이다. 결국 “그게 우리 방식”은 유일한 명증한 답이다. 사실 무엇을 행하든─결혼하든, 시계를 보든, 철학 논문을 쓰든, 심지어 자살하든─, 그것은 문화적 동일성을 실현하는 것, 행해진 것을 하는 방식일 뿐인 어떤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군이라고 말하는 각각의 방식은 기호를 실현하는 한 방식이며, 만일 우리가 그 속의 잠재 가능성을 인식할 수 없다면 인지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행해진 무엇의 동일성은 따라서 기호의 동일성만큼 문제적이다. 게다가 그것은 뒤르켐의 자살론에 대한 재빠른 재해석이 포착하게 될, 사회과학에서의 근본적인 질문이다.

저 근본적인 텍스트의 서문에서 뒤르켐은 자살에 대해 객관적으로 작동하는 정의를 찾는다. 그가 저속한 사용법으로 간주한 “평범한” 의미를 무시하면서. 객관적인 정의는 뒤르켐이 옹호한 통계적 접근법의 보족 장치이다. 요점은 일반적인 사건의 발생으로서 개인의 자살은 통계적 수치를 위해 행위자 자체가 필연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질적인 다양성(각 자살이 수행되는 방식, 암시된 모든 동기, 행위자의 인격 등등)을 전적으로 무시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심지어 나 자신의 자살은 유일한 자살인데도 여전히 또 다른 자살을 말하게 된다. 행위를 카테고리의 너무나 많은 인스턴스화로 줄이는 시선과 함께 수치에 다름 아닌 것으로 하나가 다른 하나와 구별된다. 뒤르켐은 이렇게 객관적 정의(자살=x의 공식)를 구축한다.

행위를 기록하기 쉽게 무언의 사실로서 접근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르켐의 수많은 독자가 곧 만나게 될 갖은 어려움을 제기한다. 결국, 뒤르켐 자신은 일부 의도적이고 주관적인 요소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고, 자살은 의식적인 동기부여로 정의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그 대신 죽음에 이르게 될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 저지르는 것으로 자살을 정의했다. 고귀한 군인의 경우든 불운한 사람의 경우든 기차 앞에 자신을 던지는 행위는 “사정을 잘 알고” 저지른 짓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주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리고 죽음의 정의는 자살의 정의만큼 저속하고 “평범하지” 않는가? 달리 말해 새로운 정의가 옛 정의만큼 모호해질 위험이 없는가? 둘째, 새로운 정의가 뒤르켐의 처리에서 통계적 데이터와 모순되는 것 같다. 민족학 방법론적 관점에서 잭 더글러스와 맥스웰 아트킨슨 혹은 하비 색과 같은 저자들은 통계가 개인이 자살을 저지른 횟수를 나타내지 않고 자살로 분류된 사망의 횟수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회학적 문제는 자살이라는 특정한 죽음의 분류를 담당하는 행위자를 알리는 제도적 혹은 인지적 절차이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문제시되는 것─즉 결정 가능한 계층에 속하거나 속하지 않는 것─의 본성을 가정하는 통계적 방법론을 부분적으로 사용했다. 따라서 만일 뒤르켐식 방법이 그 자체로 철학적 문제를 수반한다면, 그것은 일부 철학자들이 만족스러워했던 것처럼, 인간의 행위를 객관적인 원인으로 설명하는(이해하기보다) 척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뒤르켐이 저 행위들을 객관적으로 정의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마치 사건 그 자체가 총칭적 카테고리로 강등하기를 허용하는 관찰 가능한 표지판을 지겨워하는 것처럼.

그러나 이러한 자살의 정의와 함께 뒤르켐이 동질적인 “사회적 사태”를 식별한다고 주장한다거나 상대적으로 일정한 자살률이 독특한 사회적 원인을 나타낸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을 수 있다. 반대로 뒤르켐은 통계적 비율이 자살 사이의 질적 다양성을 감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 자신의 카테고리를 해체하려고 노력한다. 통계적 상관관계 연구에서 우리는 통계 시리즈의 의존성(공변량)이나 독립성에 초점을 두어야만 다양성을 밝힐 수 있다. “이제 하나의 결과가 우리의 조사에서 눈에 띄게 드러났습니다. 즉 … 다양한 자살 형태가 있습니다.” “에고이즘”, “이타주의”, “아노미” 유형. 뒤르켐의 야망은 개인이 자살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보다 자살을 분류하는 과학적 수단을 구축하는 것에 있었고, 인과관계에 의한 접근방식은 이 분류학상의 끝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실제로 분류가 요구하는 것은 “형태학상의” 분류보다 “병인적 분류”를 더 선호하는 “역전의 방법”이다. 달리 말해 각 행위의 내적인 성질 간의 질적인 차이에 근거해서 자살을 분류하는 것에 대한 거부 그리고 행위 그 자체(행위자가 직업, 연령대, 지역 등등에 속한다는 것)에 대한 외부적 환경 간의 통계적 상관관계에서만 유지되는 결정. 이 관점에서 상대적으로 임의적인 성격의 지표는 궁극적으로 균질적인 한에서 거의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목적은 자살률의 변이를 다른 매개변수와 관련하여 그려보는 것이고, 이 상관관계를 통해서 완전히 이질적인 통계적 경향과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 방법론은 우리가 “다양한 유형들을 동일화할 수 있는 능력 없이 유형의 다양성을 가정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존재와 수치를 증명할지라도 그 특수한 성격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 뒤르켐은 다른 한편으로 적어도 어느 정도는 자살의 양적인 분포를 통해 질적인 다양성을 회수할 목적이 있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자살(예를 들어 이타적 자살)이 그 자체로 다른 행위(이 경우에는 살인)의 변형임을 보여줄 수 있고, 일상적인 활동의 표면적인 다양성으로부터 맥락─즉, 사회적 영역을 만들어내는 개체 간의 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현실화하는 사회적 가상(“경향”)을 추출할 수 있다. 자살의 본질을 전제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객관적인” 정의는 한꺼번에 정리하고 변수로서 기능하도록 해서 인간의 현상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론적인 조건이다. 따라서 우리는 측정 불가에서 일반성으로, 양에서 질로, 수치에서 본질로, 원인에서 결과로, 설명에서 이해(comprehension)로 나아간다. 뒤르켐의 접근법이 제기한 문제는 그러므로 통계적 카테고리를 사회적 카테고리로 실체화하는 것보다 자살의 경험적 혹은 관찰 가능한 속성이 적어도 처음에는 객관적인 판단에 기초하여 그 외 수많은 행위와 더불어 행위를 식별할 수 있게 한다는 그의 추정을 포함한다.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에서 공식화된 구조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다. 이 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그 기원을 둔다. 레비스트로스가 『식사 예절의 기원(신화학 3)』에서 구조적 방법론과 역사적 방법론을 대조한 것은 그 결과이다.

어려움은 사실을 정의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어느 지점에서도 역사적 방법은 무엇이 민속학에서 사실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내러티브의 표면적 내용에 대한 관찰자의 주관적 이해가 그렇게 간주하는 어떤 사실적인 요소로서 받아들인다. 어떻게 둘 이상의 테마가 표면적으로 서로 다르며 서로와 변환적 관계에 있는지를 거의 또는 전혀 시도하지 않는다. 과학적 사실의 지위는 각각의 특정 테마 혹은 각각에 기인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스키마 자체는 잠복해 있다.

다른 한편 구조적 방법은 유사성에 대한 내러티브 간의 동일성에도 근거하지 않고 그 차이에도 근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저 유사성은 민족지학자에게만 명백하므로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수행한 작업은 매우 다르다. 그것은 비슷하지 않거나 유사성이 처음에는 우연으로 보이는 신화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구조를 표시하고 같은 변환 그룹에 속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공통된 형태(features)를 나열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증명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들 때문에 처음에는 유사점이 전혀 보이지 않는 듯한 신화들도 같은 원리에 따라 진행되고 단일한 작동 그룹에 기원한다.

그래서 한 지역에서 고슴도치로 보이는 것은 기호학적으로 다른 지역에서 논병아리로 나타나는 것일 수 있다. 사회과학 혹은 문화 과학에서 동일성은 구조적이어야 한다. 이것은 또한 비교 방법론을 통해서만 식별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관점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앞서 언급한 소쉬르의 원고를 인용하면서 소쉬르의 자료에서 기호의 동일성이 철학적 문제임을 주장한다. 이어서 만일 인류학이 더욱 일반적인 기호학에 참여한다면(“사회 인류학이 흥미로워할 모든 현상은 실제로 기호로서 특성화할 수 있다”라고 한다면), 그 참여는 언어적 현상이 취하는 부류의 소통적 기능이 있는 저 현상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환원 불가능한 동일한 철학적이고 방법론적인 문제들을 언어적 현상이 하듯이 저 현상들이 제기한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확실히 인류학적 현상과 마찬가지로 언어적 현상은 변이로서만 결정될 수 있고 개별화될 수 있고 독자화될 수 있다. 공유되는 관찰 가능한 속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데꽁브가 하듯이 소위 의미화(signification)의 구조주의적 개념을 비판하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구조주의의 실제 지분은 의미의 질문을 상대화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며, “문화 과학”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주요한 방법론적 문제─자신의 데이터를 어떻게 규정하는 가의 문제─에 직면하기 때문에 특정한 단위를 가지고 있다고 간주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 여전히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왜 방법론이 구조주의를 통해 이 문제가 “기호”로서 그 고유의 주제를 정의하는 구조주의자적 정의와 함께 하는 문제인지를 풀어가려 하는가이다. 우리는 더욱 상세히 언어학에서 인류학으로의 구조적 방법의 확장이 왜 레비스트로스의 유명한 명언─우리는 “상징주의의 사회 이론”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상징적 기원”을 찾아야 한다─을 통과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실천적 삶과 기호적 삶

 

구조적 방법의 핵심 문제는 정의와 관련될, 어떤 주어진 행동의 특징의 본성을 우리가 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조적 방법은 임기가 거의 끝나가는 뒤르켐의 방법과 모순된다. 뒤르켐은 자살에 대한 예비적이고 추상적인 정의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양적 시리즈 간의 관계를 조사하여 질적인 다양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반면 레비스트로스는 특정 신화에서 시작해서 다른 버전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질적 변이들이 상호 동시에 발생하는 방식을 분석한다. 레비스트로스의 관심은 내러티브 “모티프”의 변환, “홀로 발생하지 않고 언제나 다른 변화와 함께 연관되는” 변화에 있다. 이러한 상호관계된 변환은 “호환성 및 비호환성의 시스템”을 조명하는데, 그 시스템 덕분에 우리는 각 모티프를 실질적인 질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실현하는 대립들의 분포에 의해 정의할 수 있다. 형태 A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중요하지 않고, 형태 A가 긍정적일 때 형태 B가 부정적임을, 그 반대로 형태 A가 부정적일 때 형태 B가 긍정적임을 보여줄 수 있다. 소쉬르의 경우 특유의 음운 형태가 특유의 의미론적인(semantic) 형태와 연합되는 한에서만 관련성이 있다고 간주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레비스트로스의 경우 특유의 형태 간의 상관관계는 행위자들 자체와 관련된 형태를 추론할 수 있게 한다. 이어서 각 버전은 변환 시스템 내의 상대적인 위치에 따라 재정의될 수 있다. 그와 관련하여 저 항들은 치환될 수 있다. 또는 더 정확하게는 변환 시스템을 변환 시스템의 시스템 내에서만 정의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레비스트로스는 단계별로 구조 분석을 확장하고 개발하여 점점 더 많은 아메리카의 신화를 포괄한다. 그 결과 신화학의 첫 권을 열어가는 보로로 신화를 이해하게 된다.

이 채석장 탐사에서 특정 내용(이 신화적 내러티브 혹은 친족 공식)은 점진적으로 대수값으로 감소하고, 구조 내 위치에 따라 공식적인 항으로 규정된다. 변수(자살=x)의 본성을 가정할 필요 없고, 그 속에서 다양한 내용이 합산된다. 개별의 내용을 서로의 변종으로서 조명하는 저 변이 간의 상관관계를 연구함으로써, 변수가 단계마다 질적 변이와 함께 점진적으로 포착된다. 우리는 불확실한 것에서 다양한 것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것에서 구조적인 것으로 움직인다..

따라서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적 방법이 “갈릴리적(Galilean)”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목표가 변이의 법칙을 밝혀내는 것이고,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관점과 모순되며 주로 귀납적 상관관계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구조주의적 방법이 그 안에 위치하는 “질의 논리”는 형식주의적 방법만큼 통계적 방법과 구별된다.

형식주의와는 반대로 구조주의는 추상적인 것에 대항해서 구체적인 것을 놓기를 거부하고 후자에 특권적 가치를 인식하기를 거부한다. 형식(form)은 그 자체보다 물질적인 다른 것에 대립함으로써 규정된다. 그러나 구조는 고유의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내용 그 자체이며, 내용은 실재의 속성으로 인식되는 논리적인 조직 속에서 파악된다.

레비스트로스가 구조라고 부르는 것은 추상적인 변수(달리 말해 구조를 실체화할 수 있는 내용에 무관심한 변수)로 감소하는 항 간의 관계 도식이 아니다. 그보다 구조는 “변환 그룹”이며, 이 속에서 각각의 내용은 변종으로 결정된다. 따라서 만일 내용이 “구조화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것들이 마치 외부에서처럼 추상적인 형식을 부과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내용이 상호관계에서만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조는 적용에서 고립될 수 있는 규칙 집합이 아니다. 각 요소가 변종으로 등장하는 가상의 장이다. 그리하여 각 요소는 상대적인 가능성을 실현한다.

이 측면에서 구조 분석(신화적 내러티브, 의례적 행위, 복식 관습, 심지어 기술까지)의 실천적 단위는 기호로 간주할 수 있다. 여기서 기호는 찰스 퍼스가 정의하고 레비스트로스가 반복한 것에 따른 것이다. “무언가를 누군가 대신에 대체하는 것” ─혹은 다른 말로 시스템적으로 상호 관계된 몇몇 변환을 통해 또 다른 기호에 해당하는 것. 기호의 필수적인 속성은 잠재적으로 다른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돌도끼와 같은 도구가 기호라면, 레비스트로스가 콜라주드프랑스의 취임강연에서 말했듯이, 그것은 “주어진 맥락에서 사용법을 이해할 능력이 있는 관찰자에게는 그것이 다른 사회에서 같은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다른 장치를 대표하는” 한 그렇다.

행위는 우리가 그것에 “의미화”를 담는 선험적 기능을 부여했기 때문에 “상징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대체 가능한 행동에 의해서만 정의되기 때문에 “상징적인”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내가 지적했듯이 그것은 비교 방법론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가 인류학을 인간 정신(human mind)의 보편 법칙의 이론으로서 정의했을 때─그리고 저 법칙들을 이번에는 “상징적인 기능”과 동일시했을 때─, 그의 의도는 “정신적 제약(mental constraints)”을 조망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신적 제약이란 예를 들어, 주체들이 주어왔던 선물을 호혜적으로 주고받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주체가 “무형의” 단위나 동일성(소쉬르의 의미에서)을 구축하도록 하는 것─엄격하게 차별화된 매개변수와 일치하는 관찰 불가능한 단위에 예민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자 했다. 상징적 사고는 무엇보다 실질적인 불변에 해당하지 않는 표면적인 개체를 가져오게 함으로써 감각적 현실을 조직하는 방법의 하나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매개변수(높음/낮음, 날것/익힌 것 등등)의 값을 반대로 바꾸는 것은 동일한 기호를 생성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호 개념은 실천 이론의 구축을 어떻게 열어갈 수 있을까? 행동(예를 들어 신화의 서사화)은 순수하게 다른 개체의 실현 혹은 예시화인 한에서 행위자 자체에 의해서만 그 특이성이 파악될 수 있다. … 행위자가 삶의 가능성의 장으로서 인식되는 상징 시스템에 거한다면. (이러한 예로서 상징 시스템은 내러티브의 주어진 버전이 결정적인 내에서 “가상의 신화학적 시스템”일 수 있다.) 다른 추상적인 가치는 상관관계로서 어느 것도 바꾸지 않고 내러티브를 구조화하는 대립들로 지정될 수도 있다. 행동은 오직 관습의 가상 시스템으로 이해되는 실천(practice)의 맥락 내에서만 자리할 수 있다. 따라서 행하는 것은 항상 일반적으로 행해진 것을 하는 것이다. 즉 공통의 실천을 실현하는 것. 실천의 단위를 결정하는 다른 방법은 없다.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닌. 관습은 몇몇 개인들과 설명될 수 있는 사건(토큰)에 의해 반복되는 관찰 가능한 행동의 절차(경험적 유형)가 아니다. 그보다 관습은 순수하게 다른 가상성이다. 이 가상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실현되고 다른 관습과 식별될 때에만 정의될 수 있다. 그래서 만일 레비스트로스가 그러한 것처럼 우리가 행해온 것을 계속해서 행한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규범에 순종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행동이 항상 퍼포먼스이기 때문이다.─촘스키식 의미에서 경쟁을 정의하는 규칙의 적용에서가 아니라 실현될 수 있는 실현의 음악적 의미에서 그렇다. 심지어 자살도 퍼포먼스이다(그것은 공통의 실천이다). 그리고 자살의 인류학이 당면한 문제는 왜 행위자가 왜 행위(수많은 검토 없이 우리가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 행위)를 연행하는가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가 아니다. 문제는 반대로 어떻게─주어진 맥락과 관련된 특징을 조명하게 하는 상관적인 변화를 기반으로─ 행위를 규정하는 실천의 시스템을 재구축할 것인가이다.

우리가 실천 이론이 필요하고 그것의 습득이 방법론의 혁신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대로 “저들은 저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무지함은 그들을 용서하거나 심지어 그들을 원망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구조적 인류학을 실천할 이유이다. 그 방법론을 통해 우리는 다음을 발견한다. 뒤르켐의 동시대성에 있어서 죽을 운명의 군인의 행위는 아이를 낳을 운명의 여성의 행위와 동일시되는 반면, 우리에게 있어서 그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희망 없는 사람의 행위는 타자의 삶이 그의 손안에 있음을 잊는 운전자의 행위와 동일시된다. 이 사례들은 그것들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 아니라 대립하기 때문에 동일시될 수 있다. 게다가 동일시되게 보이는 항들은 구조적 관점에서 다르게 의미화되어서 자신을 스스로 드러낼 수도 있다. 중국에서 자살 행위는 프랑스에서의 자살과 같은 본성을 갖지 않는다. 삶과 죽음이 대립하는 한에서, 여성성과 남성성(과 등등)은 같은 방식으로 분배되지 않는다. 인류학적 탐구는 통계적 변이만큼 영속적인 특징도 설명할 것이다. 뒤르켐과 그 뒤를 잇는 수많은 다른 사회학자들이 결국 받아들이도록 강제한 심리적인 설명에 의존하지 않고.

그러므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에서 행동의 규칙은 소위 적용과 구별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드러낸 모순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이 통찰력에서 시작해서 그는 규칙에 따르는 것은 실천(관행)에 얽매일 뿐이고 실천(관행)은 필연적으로 집합적이라고 결론짓는다. 비트겐슈타인의 경향은 주어진 실천에 대한 익숙함의 관점에서 관습을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의 실천에 대한 환기는 잘 짜인 철학적 문제에 대한 응답이 아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보다 실천에 대한 그의 환기는 위조된(bogus) 철학적 문제(언어(language)의 일반적 정의를 공식화하는 문제)에 철학적 노출에 있다. 다른 한편 레비스트로스가 구조적 방법을 모든 문화 데이터로의 확장이 증명하는 것은 첫째, 실천이 물질적인 것의 일관된 활용도 아니고 행동의 반복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둘째, 우리 자신의 실천을 이론화하는 어떤 시도도 동일성, 통일성, 가상성 등등의 철학적 개념을 재구축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천을 정의하는 것은 그것을 연행하는 행위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며(우리가 부르디외에 합의하여 행위자 또한 서로와의 관계에서 구조적으로 정의된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실천 이론이 다루기 힘든 것은 그것에 적절한 존재 방식에 싸 매여 있기 때문이다. 관습은 그것의 동일성이 총칭적 개념으로 환원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변종과 공존하는 것을 협상할 수 있으므로 필수적으로 집합적이다..

구조적 접근방식의 또 다른 이점은 우리가 관습의 동일성을, 그것을 만들어내는 주체의 표상에 고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내면성이 없는 그것의 동일성은 주체 밖에서 다른 가능한 관습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들이 가치로 갈아타기에 충분하다. 정의로 말한다면 사용법을 변화로. 이 단순하지만 매우 복잡한 직관은, 우리가 그 안에서 알아채는 경향이 있는 유사성에 의존함으로써 실천의 본성을 추정할 수 없음에 따라, 모든 구조주의적 방법론의 핵심이다. 푸코가 『훈육과 처벌』에서 논쟁하게 한 것은 이 직관이 아니었다. 학교, 군대, 병원을 포괄하는 “훈육” 집합과 정렬되자마자 징벌 절차가 본성으로 바뀌게 되는. 우리가 규칙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우리를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것은 같은 것이다. 상징적 실천은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서 놀고 있는 크로켓 게임은 핑크 플라밍고가 망치로, 고슴도치가 공으로 노는 것과 같은 어떤 유사성을 담고 있다. 그녀가 그들을 공격하려고 할 때 그들은 예기치 않게 고개를 들었고, 그러는 동안 다른 플레이어는 전진할 순간을 포착한다.

구조주의는 피할 수 없는 이론적으로 사변적인 질문을 제기해왔다. 행해온 것의 본질은 무엇인가? 만일 그렇게 시도하는 속에서 우리가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을 행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 질문은 다른 두 가지의 문제들을 결합했다. 어떻게 실천 이론을 구축할 것인가와 어떻게 관습의 존재론과 그 변이의 논리를 구축할 것인가. 누구는 이때 구조적 방법의 전개가 이미 푸코, 들뢰즈, 데리다가 논쟁한 역행이원론(renversement du platinism)과 함께 하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레비스트로스의 강점은 철학을 경유할 필요성을 인식해왔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우리는 철학을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그는 썼다.) 그와 동시에 그는 철학의 텔로스를 만들기를 거부했다. (“철학적 성찰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그렇다면 구조주의의 철학은 모든 측면에서 실천적인 철학이다.

 

 

Patrice Maniglier, “Signs and Customs: Lévi-strauss, Practical Philosopher,” trans. Matthew H. Evans, Common Knowledge 22(3), pp. 415-430.

 

 

 

 

 
  1. 앙리 베르그송(박종원 역), 1장 도덕적 의무」『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아카넷, 2015. [본문으로]
  2. 앙리 베르그송, 앞의 책. [본문으로]
  3. 다음을 참조. Bruno Karsenti, L’homme total: Sociologie, anthropologie, et philosophie chez Marcel Mauss,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97. [본문으로]
  4. Vincent Descombes, Objects of All Sorts: A Philosophical Grammar, trans. Jeremy Harding and Lorna Scott-Fox,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6, p.205. [본문으로]
  5. Claude Lévi-Strauss, Structural Anthropology, vol. 1, trans. Claire Jacobson and Brooke Grundfest Schoepf, New York: Basic Books, 1963, p.70. [본문으로]
  6. 엘레아 학파는 소크라테스 이전에 활동한 고대 그리스의 주요 학파이다. B.C. 5세기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식민지 엘레아에서 번성한 이 학파의 특징은 극단적 일원론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는 유한하고 무시간적이라고 주장했다.-옮긴이주 [본문으로]
  7. 다음을 참조. Patrice Maniglier, La vie énigmatique des signes: Saussure et la naissance du structuralisme, Paris: Scheer, 2006. [본문으로]
  8. 다음을 참조. Simon Bouquet, Introduction à la lecture de Saussure, Paris: Payot and Rivages, 1997; Johannes Fehr, Saussure entre linguistique et sémiologie,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2000; Lucien Scubla, Lire Lévi-Strauss: Le déploiement d’une intuition, Paris: Odile Jacob, 1998; and Patrick Sériot, Structure and the Whole: East, West, and Non- Darwinian Biology in the Origins of Structural Linguistics, trans. Amy Jacobs-Colas, Boston: Walter de Gruyter, 2014. [본문으로]
  9. Ferdinand de Saussure, Course in General Linguistics, trans. Roy Harris (1916; repr., London: Duckworth, 1983), pp. 12829. [본문으로]
  10. Roman Jakobson, Six leçons sur le son et sur le sens, Paris: Minuit, 197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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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탱 베르케는 1942년 모로코 출생의 프랑스인으로 일본사상 및 일본문화 연구자이다. 프랑스어와 일본어로 저술 활동을 전개해왔으며, 다음의 글은 일본어로 쓰였다. 다음의 글을 데스콜라의 「자연은 누구의 것인가?」(https://sarantoya12.tistory.com/153)와 같이 읽으면 동양(일본)과 서양(유럽)의 자연관에서의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과 주체성

 

오귀스탱 베르크(Augustin Berque)

 

1. ‘누구’란 어떤 것인가?

 

얼핏 보면 인류학자 데스콜라의 ‘자연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물음은 매우 인류학적이다. 이 질문에서 ‘누구’란 인류에 속하는 존재라는 것은 분명하다. ‘누구’라고 말하면 반드시 인물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 나오는 유명한 표현 ‘자연의 주인과 소유자인 듯이’에서 직접적으로 유래하는 사고방식일 것이라고 바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 자연을 (가진) 주인은 인간 주체 외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인상은 일본어의 세계 특유의 지적환경에서 비롯한 것일 수 있다. 일본어에서는 확실히 ‘누구’라고 말하면 반드시 인간을 뜻하며, 한자 ‘誰’의 구성요소 또한 인간존재를 전제한다. 이 글자의 의부(意符)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언어의 ‘言’이고 음부(音符)가 ‘隹’(새 추)이다. 이 글자는 “인간 특유의 옛 새점 풍속에서 누구라도 불특정한 자를 추측할 때 새점을 쳤다는 것을 보여준다”(白川靜, 『字通』, 平凡社, 1996). 이렇듯 ‘누구’는 인간존재의 대명사이다. 이에 반해 프랑스어 원문 제목 ‘À qui appartient la nature?’에 나오는 대명사 ‘qui’는 인간에 한정되지 않으며 생물 일반과 무생물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자연은 qui의 것인가?’라는 물음의 대답에서 자연을 ‘가지는’ 주인은 자연 자신도 포함되고 인간은 물론이고 삼라만상 가운데 어떤 것이라도 될 수 있다. 제목의 뜻을 이렇게 이해하고 데스콜라의 논문 내용을 읽기 시작하면 그가 확실히 이러한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논문의 결론에서 제안하는 관계보편주의(universalisme relatif)[각주:1]는 삼라만상과 인간의 관계성을 기본조건으로 한다. 이것은 분명 와쓰지 데쓰로(和辻哲郎)가 『풍토(風土)』에 썼듯이, ‘인간존재의 구조계기로서의 풍토성’이 인간의 주체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과 상통한다. 이 의미에서 데스콜라의 견해는 와쓰지의 그것과 비슷하다. 인류학자 데스콜라는 철학자 와쓰지와 달리 풍토성이라는 존재론적인 기본개념을 제시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데스콜라의 ‘자연의 인류학’은 와쓰지의 풍토론과 유사한 존재론을 기반으로 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사실 나 또한 일찍이 『지구와 존재의 철학』(1996)에서 시도한 바, 데스콜라도 환경윤리의 가능성을 인간존재의 주체성과 자연과의 관계성(즉 풍토성)을 기반으로 제시하려 한 것 같다.

 

2. 이원론의 재검토

 

이 장에서는 그러나 풍토성에 관한 인간존재의 주체성보다도 일반적인 의미에서 인간 풍토에 한정되지 않는 주체성, 즉 자연 그 자체의 주체성까지 고려하고자 한다. 이 문제 제기는 30년 전부터 나의 연구의 통저음(通低音)이었고, 그것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표현한 것은 아마도 1984년 여름에 쓴 (후에 『풍토의 일본─자연과 문화의 통태(通態)』(1992)라는 제목으로 일본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책의 결론을 ‘자연이라는 더없는 주체(La nature, ce sujet ultime)’로 내린 때였을 것이다.

나는 일본의 풍토성을 고찰한 저 책을 쓰면서 처음으로 자연과 인간존재의 관계에서 주체성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곰곰이 생각할 수 있었다. 실제로 당시 나는 오랜 고민 끝에 『풍토』의 첫 줄에서 ‘인간존재의 구조계기로서’ 정의된 와쓰지 데쓰로의 기본개념인 풍토성을 médiance라는 신조어로 만들어내었고 나의 풍토론의 또 하나의 기본개념인 trajection의 번역어를 새롭게 만들었다. 일본어본에서 그것을 ‘통태(通態)’로 번역했다. 간단히 말해 통태는 시간적인 과정이며 공간적인 구조계기인 풍토성을 발생시킨다. 이에 관해서는 후에 조금 더 상세히 서술하겠다.

지금까지의 문제군을 생각하기 시작한 계기는 분명 일본 풍토와의 만남이었고, 말할 것도 없이 문제 그 자체는 보편적이다. 일본 풍토의 특수성을 논하는 가운데 그 보편성을 발견하고 심화했다. 서양의 고전적 근대 범례의 이원론을 재검토하면서 그 두 개의 신성 축, 하나는 객체적인 동기로서의 nature이고, 다른 하나는 초월적인 cogito(근대 주체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자기 창조)인 주객(主客)의 절대적인 구별의 추상성에 불만을 자각하고 그를 대신한 풍토론의 입장에서 자연과 주체성의 관계 재구축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이 재구축은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자연’의 재검토이다. 자연은 주체의 자연환경이면서 그와 동시에 주체의 주체성 그 자체 속에서 활동하는 것이므로, 자연과 주체성은 나뉘지 않는다. 또 하나는 ‘주체’의 재검토이다. 주체는 자기동일성을 가지면서 그와 동시에 풍토 속에서 ‘자기발견’(와쓰지의 ‘자기발견성’이나 하이데거의 현존재(Dasin)에서 습득하는 사실)한다. 그러한 주체성의 장은 그 신체의 국소성(topicité)에 결코 한계지을 수 없다. 풍토(風土)에도 있는 바람(風)이 어느 정도 발산하고 있을 것이다. 나아가 자연도 살아가는 한, 기계와 다른 한 부류이며 어느 정도의 주체성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3. “Sujet”의 다양성과 위태로움

 

그리스어 hupokeimenon(밑에 깔려있는 것, 기저라는 뜻)의 라틴어 번역인 subjectum에서 유래하는 sujet, Subjeckt, subject 등등의 용어는 매우 다의적이고 모순적이기 때문에, 메이지 시대에 그것을 일본어로 번역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현대일본어에서 단 하나의 단어인 subject에 해당하는 용어는 여러 개이고, 그것들은 겉보기에 서로 관계없는 것 같고 또 경우에 따라 상반돼 보인다. 주어, 주체, 주관, 주제, 문제, 이유, 대상, 환자, 신하 등은 모두 저 하나의 단어에 해당한다. 여기서 가장 의아한 것은 논리학자에게 sujet(주어)가 물리학자에게는 object(대상 또는 객체)라는 것이다. 양쪽 모두에게 주제(subject)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다. 서양과의 접촉 이전 일본어에는 그에 상응하는 용어가 없었기 때문에 언어학자가 밝혔듯이(예를 들어 『근대 일본어의 사상』에서 “‘주어(主語)’는 번역 과정에서 만들어졌다.”라고 야나부 아키라(柳父章)가 썼듯이), 지금은 빈번하게 사용되는 주어, 주체, 주제라는 말들의 개념은 결국은 메이지 시대의 박래품(舶來品)이고 최근까지 그에 반발하여 「일본어는 주어가 필요 없다」라는 논문이 나올 정도로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확실히 서구의 주요 언어에서 발생하여 서양사상, 서양문명의 기본조건이 된 문법적 삼항구조 S-V-O(주어-동사-목적어)와 논리적 이항구조 S-P(주어-술어)가 일본어와는 맞지 않는다. 예를 들어 프랑스어에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구조임을 말해주는 저 유명한 문구인 ‘코끼리는 코가 길다’에서와 같이 두 개의 주어를 가진 문장을 일본어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여기서 ‘은/는’과 ‘이/가’가 보여주는 바, 명사 ‘코끼리’(주제)와 ‘코’(주어)의 문법적인 기능은 실제로 다르지만 그러한 구조는 서구의 주요 언어에서 문법적으로 올바르지 않다.  

중국어의 구조 또한 일본어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코끼리는 코가 길다’와 같은 문장, 예를 들어 ‘那個人嘴大大的’(저 사람은 입이 크다)와 같은 예는 흔하다. 중국어에는 ‘은/는’과 ‘이/가’가 없으므로 중국의 문법학자는 그러한 구조를 간과하여 ‘主謂謂語句’(주어-술어 문장)’이라고 부른다. 주어는 술어에, 술어는 주어에 되먹임되는 구조인데 서구에서는 언어 문법뿐만 아니라 논리 그 자체가 전혀 인식되지 않는다. 일본어에서는 ‘은/는’과 ‘이/가’를 교환을 하려고 들면 간단하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베르케이다.’를 ‘내가 베르케이다.’로 바꿔도 구조는 바뀌지 않지만, 실제로는 주어와 술어의 관계가 역전하여 의미가 ‘베르케는 나다.’로 되기 때문에 S(주어)와 P(술어)에서 P가 S로 역전한다.

지금의 논의는 언어학자나 논리학자의 전문가들의 정연한 논리로 벌써 이야기되었을 것 같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현대문명의 원천, 즉 anthropocene(인류세)의 주요 요소인 서양사상의 역사에서 논리상의 주어(sujet)와 술어(prédicat)의 구조계기는 존재론상의 본질(substance)과 우유(偶有, accident)의 구조계기에 상응하는 것이므로 저와 같은 ‘역전’은 존재와 자기동일성에 관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을뿐더러 우리가 지금 당면한 인류세의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러한 구조계기를 재검토하는 것이 시급한 의무이기도 하다.

 

4. ‘자연’은 nature였던가?

 

현대일본어에서 ‘자연’이라는 용어는 원칙적으로 (적어도 과학에서) 서양의 고전적 근대 범례에 따라 주체와 상반된 객체화・기계화된 대상 nature에 대응하는데, 그것 역시 메이지의 번역 사상의 결과에 불과하며, ‘자연’이란 본래 도교의 저 유명한 표현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老子』 제25장)가 말해주듯이 인간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있는 것으로서, 바꿔 말하면 도가 그 자신과 똑같아지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자연’은 현대 문법에서 말하는 명사라기보다 오히려 부사에 가까우므로 전통적인 훈독 ‘스스로 있는’이 그것을 잘 번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스스로 있는’은 뜻밖에도 성경 출애굽기 3장 14절에 야훼가 호렙산 정상에서 모세에게 응답한 말씀(“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을 상기시키는데, 실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일신교의 야훼가 삼라만상을 절대적으로 초월하는 것에 반해 도교의 ‘스스로 있는’은 삼라만상에 내재하며 삼라만상의 자연, 자연의 더없는 주체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대 주체의 자기창립을 표현한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생각=존재라는 동일화를 설정하는데, 결국 호렙산 정상에서 발신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에 상응한다. 코기토는 우리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이므로 나는 그것을 ‘호렙산의 원리’라고 부르겠다. 왜냐하면, ‘스스로 있는 자’에서 ‘자’(근대 주체)의 주체성은 객체화된 삼라만상(근대 자연)의 기계성을 절대적으로 초월하기 때문이다. 『방법서설』에 쓰인 것처럼 “나는 하나의 실체이고, 그 본질 혹은 본성은 오직 생각하는 것이며, 존재하기 위해 하등의 장소도 필요 없고, 어떠한 물질적 사물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원론, 기계론, 공리주의, 유명론 등등의 그 무엇으로 불리더라도, 근대과학 곧 현대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이 호렙산의 원리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원리는 근거가 신비적이며, 합리적인 추론의 결과가 아니다. 주체성을 절대화하고 그것을 인간 주체의 독점적인 속성으로 규정하는 것이 합리적, 과학적이라고 증명된 바는 없다. 오히려 과학이 하루가 멀다고 밝힌 것은 인간 이외의 생물 또한 어떤 부류의 어느 정도의 주체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 물리학에서도 하이젠베르크가 분명히 표명했듯이 고전 근대과학과 달리 현대과학은 자연을 단순히 대상으로 삼지 않으며 자연과의 관계 자체를 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태도는 원리적으로 풍토론과 데스콜라의 관계보편주의와 호응한다.

그런데도 십계명에 정해진 법처럼 과학에 의한 자연의 기계화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그 적절한 예로서 학계는 이마니시 킨지(今西錦司, 1902~1992, 일본의 인류학자이자 생태학자)의 ‘분화이론(棲み分け理論)’[각주:2]을 언급한다.

 

5. 자연의 주체성 외폐(外閉)

 

몇 년 전 『진화론은 왜 철학의 문제가 되는가』(2010)라는 책을 우연히 발견하고 바로 입수한 적이 있다. 지금 이 책을 웹에서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소개 문구를 볼 수 있다. “생물학의 철학에서는 기존의 인문계와 철학계의 틀을 넘어서서 논의를 확장하고 있다. 이 책은 일본에서 생물학의 철학의 주요 연구자들이 진화론을 축으로 과학철학, 시스템 이론, 수학, 심리학, 역사학, 윤리학 등 다양한 분야와의 접점 속에서 다양한 과제를 전개한다. 원리적인 문제에서 개별적인 문제로 독자를 이끈다.” 이 과제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봐도 색인을 뒤져봐도 20세기 후반에 대대적으로 논의된 이마니시 진화론은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우선 철학 일반의 관점에서 이상하다. 왜냐하면, 이마니시 진화론이 틀렸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틀렸는지를 판단해야 하고 그것은 철학적, 인식론적, 존재론적, 방법론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생물학의 철학의 주요 연구자들’은 이마니시 진화론을 문제 제기에서부터 제외하고 폐쇄했다. 의식의 ‘밖(外)’으로 배제하고 의식의 문을 ‘닫은(閉)’ 것이다. 이마니시의 ‘분화이론’과 똑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분화이론’이 전적으로 무시될 만큼 이마니시 진화론이 어떤 규정을 어긴 것일까? 그것은 이마니시가 만년에 저술한 『주체성의 진화론』(1980)의 제목에서도 바로 알 수 있다. 즉 그는 기계일 수밖에 없는 자연에 주체성을 부여하고자 했고, 고전적 근대 범례의 두 개의 신성 축을 동시에 쓰러뜨리고자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생물학의 철학』의 ‘마을’로부터 외폐되고 말았다.

다만 저 ‘마을’은 개구리의 우물에 불과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과학철학의 입장과 다르다. 예를 들어 『과학』 2003년 12월호에는 「자연과학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가와이 하야오(河合隼雄, 1928~2007, 일본의 임상심리학자)가 이마니시 자연관의 기본적인 특징을 고찰했다. 이마니시가 연구하려 한 것은 근대적 자연 대신 ‘스스로 있는’ 자연이었다고 판단한다. “이마니시는 자연 현상에 대해 말하고 있다. 존재의 ‘스스로 있는’ 변화의 힘에서 진화의 모습을 보이고자 한다.” 가와이 하야오는 이에 머물지 않고 현대 자연과학이 우리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게 된, 지구 규모의 환경위기를 일으킨 제도의 본질적인 한 측면을 탐구한 이마니시의 자연학이라는 의미 그대로의 ‘자연학’의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동감한다. 기계로서의 자연으로부터 우리의 주체적 존재를 추상해온 나머지 서양의 고전적 근대 범례의 과학은 결국은 이 지구상에서 인간존재를 본격적으로 제거하고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드는 위험성을 띤 제도를 점차 구축해왔다. 이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초극(超克)해야 한다. 정말로 이마니시 자연학은 그러한 초극의 길을 걸었을까?

 

6. 아기는 정말로 ‘설 수 있어서 선’ 것일까?

 

알다시피 정통 진화론은 개체(지금은 유전자)를 단위로 하여 통계학적 합계(population)를 추정하고 자연도태에 의한 그 비율의 변화를 통해 생물이 진화해왔다고 생각한다. 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는 어떤 주체성도 활동하지 않으며 우연(돌연변이)과 필연(통계법)에 지배된 단지 기계적인 과정만 있을 뿐이다. 이마니시는 그러한 기계성을 부정하고 생물에 주체성을 인정했으며, 그것을 몇 가지 수준(개체, 종, 전체)에서 고찰했다. 그것은 자연의 무주체성이라는 서양의 고전적 근대 범례의 규정을 위반한 것일뿐더러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립까지 소급 가능한 중세의 보편논쟁(querelle des universaaux)과 에밀 뒤르켐과 허버트 스펜서의 대립을 거쳐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유명한’ 발언 “사회와 같은 것은 없다(There is no such things as society).”에 이르기까지 모든 실재론(부류의 실재를 인정하는 파)과 유명론(개개의 실재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파)의 대립에 저도 모르게 말려든다. 이마니시의 기본 개념인 ‘종(種) 사회’와 ‘생물 전체 사회’는 근현대에 이르러 (특히 앵글로색슨족 문화권에서) 우세를 점한 근대과학의 지배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인데, 또 다른 신성한 규정을 신성 모독한 것이다. 이러한 이마니시를 벌하려 한 것인지, 그의 잘못을 인정하게 하고 회개하게 하려는 듯 영국에서 대처 급의 유명론자 비버리 할스테드(Beverly Holstead, 1993~1991, 영국의 고생물학자, 동물학자)가 도쿄를 방문하여 몇 주간의 짧은 체류 기간 후에 이마니시 진화론을 뒤집은 책까지 출간한다(『이미니시 진화론의 여행』, 1988). 원문 Kinji Imanishi: the view from the mountain top은 발간하지 않았고 다만 그 내용을 요약하여 논문으로 발표했다(Nature 317 : 587-589, 17 oct, 1985.).

사반세기가 지난 후 저명한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봐알(Frans de Waal)이 할스테드의 뻔뻔한 태도는 대단히 식민지적이었다고 강하게 비판한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드 봐알도 영장류학에서 거둔 이마니시의 거대한 성취와 패러다임 전환을 칭찬하면서도 이마니시 진화론의 중심가설인 (개체의 자연도태를 둘러싼) 종 전체의 동시 변화에 대해서는 난해한 사고라고 소극적으로 평가했다. 실은 이마니시 자신이 그 가설을 적극적으로 증명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만년의 『주체성의 진화론』에서 그는 결국 그러한 공동변화를 합리적으로 증명하기를 포기하고 아기가 “설 수 있어서 선” 것과 마찬가지로 진화 또한 “변할 수 있어서 변한” 것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의 진화론이 ‘할 수 있어서’가 멈춰선 것은 진화를 기계로서가 아니라 ‘과정’으로서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이마니시 진화론이 학회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한 것은 아마도 ‘과정’이 너무나 비과학적이고 신비적인 목적론과 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마니시 진화론의 ‘과정’은 일종의 목적론과 유사할지라도 그것을 그의 자연학 전체에서 주체의 문제 제기 속에서 생각하면 그리 간단하게 외폐(外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7. ‘할 수 있는’을 환세계론의 입장에서 재고하다

 

현대일본어에서 ‘べく(할 수 있는)’라는 조동사는 결의・의지와 의무・당연함을 뜻한다. 이 모두 주체성을 전제한다. 의무를 느끼고 의지를 갖추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결의하는 존재는 반드시 주체여야 한다. 실제로 주체성의 문제는 이마니시의 자연학을 시종일관 관통한다. 그는 『생물의 세계』(1941)에서 이미 정통 진화론의 사고방식인 자연도태에 의한 환경의 생물로의 일방적인 영향 또는 규정을 인정하지 않았고(이마니시는 그것을 ‘주체의 환경화’라고 부른다.), 오히려 주체의 환경화는 환경의 주체화이기도 하며 환경의 주체화는 주체의 환경화이기도 하다고 계속해서 주장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윅스퀼의 환세계론의 입장과 매우 가까운데, 적어도 내가 읽은 이미니지의 논문에서 그는 한 번도 윅스퀼의 환세계론을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환세계론과 완전히 같은 전제(단, 인간에 한정해서)를 가진 와쓰지 데쓰로의 풍토론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여하간 이마니시의 자연학도, 환세계론도, 풍토론도 개체든 사회든 종이든 생물 전체 사회든 우선 존재자의 주체성을 전제로 놓고 그 주체의 현실을 환경 일반(윅스퀼이 말하는 Umgebung, 와쓰지가 말하는 ‘자연환경’)으로 환원할 수 없음을 밝혔다. 주체와의 특수한 관계에서 환경 일반으로부터 특수한 환세계(와쓰지의 경우는 풍토)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생활의 장’과 같이 모호한 표현에 그친 이마니시는 환세계나 풍토라는 본격적인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의 ‘주체화된 환경’은 환세계나 풍토와 마찬가지로 명확하다. 그렇다면 와쓰지가 정의한 “인간존재의 구조계기로서의 풍토성” 혹은 더욱 일반적으로 말하면 “생물 존재의 구조계기로서의 환세계성”이라는 존재론적 개념은 이마니시 자연학에도 들어맞는다. 여기서 ‘구조계기’란 독일어 Strukturmoment의 번역어인데, 역학에서 파생한 개념이다. 통상적 의미에서는 ‘계기’와 ‘동기’의 동의어이고, 철학에서는 ‘사물을 조직, 구성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구조계기로서 ‘환세계성’이란 주체와 그 환세계의 동적인 관계를 가리키므로 이 양자를 어느 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여 어느 한 흐름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존재자를 어느 한뜻(趣)으로, 어느 한 방향으로 진화하게 만든다. 이렇게 보면, 그것은 이마니시 진화론의 ‘할 수 있는’의 뜻과 같다.

이제 이 추상적인 원리의 구체적인 예로서 이족보행을 이야기해보자. 다음의 논증은 이 문제를 연구한 크리스틴 타르디외(Christine Tardieu)의 저서 『우리는 어떻게 이족보행자가 되었는가?』(2012)를 참조한다. 예상외로 이족보행은 인간의 게놈에 기입되어 있지 않으며 결정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우연히 동물(예를 들어 늑대)에 길러진 인간 아이, 이른바 ‘늑대소년’은 실제 사례로도 보고된 바, 그들 대부분은 성장해도 언제까지나 사족보행의 상태 그대로 동물처럼 움직인다. 이족보행자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환세계(가족, 세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기는 어른을 닮아가고 어른으로 격려받으며 처음으로 일어서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장면의 필름을 몇 통이나 찍고 분석한 타르디외는 기묘한 것을 깨닫는다. 아이는 자신이 서는 순간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힐끗 돌아본다. 마치 [스스로] 그들의 의견과 칭찬을 구하듯이.

이러한 사례를 환세계론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인간 아이가 서기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특수한 유대관계가 필요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와쓰지는 『인간의 학으로서의 윤리학』에서 밝혔듯이 그 유대관계란 윤리학의 가능성 자체를 건립하는 기본 조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아기를 세우는 동기는 윤리감과 그 주요 요소인 의무감의 맹아라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그러한 의무감과 당연함을 가리키는 단어에 해당하는 것이 이마니시가 말한 ‘할 수 있는’이 아닐까? 추상적인 ‘자연환경’ 속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 속에서 아기는 설 수 있어서 선 것이다.

그런데 ‘할 수 있는’의 범위가 인간의 삶에 한정되는 것일까? 진화라는 현상의 규모에서 사정은 달라지지 않을까?

 

8. ‘과정’을 환세계론의 입장에서 재고하다

 

‘주체성’을 ‘주관성’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관(觀)’은 지각(시각과 의식), 즉 사물을 어떤 식으로 보는가에 머물지만, ‘체(體)’는 육체 전체이므로 지각만이 아닌, 몸의 행동과 작용까지 포함한다. 윅스퀼이 말하는 Funktionkreis(機能環)에서 동물의 지각범위와 작용범위는 상호작용 속에서 상호 일어난다. 나만의 환세계론에서 그러한 상기(想起)를 통태(通態, trajection)라고 부르며, 환세계성・풍토성이라는 존재의 구조계기를 낳는 과정으로 본다. 통태는 자연환경 일반(Umgebung)을 토대 또는 자원으로 해서 특수한 주체의 신체성과 그 특수한 환세계(Umwelt)라는 양쪽의 현실을 동시에 만드는 창조적인 과정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 과정의 창조성은 주체로서의 생물(인간을 포함하여)의 주체성을 전제로 한다.

이 통태라는 상기(想起, co-suscitataion)는 단지 주관성의 투영이 아니라 새로운 실체로서의 주체와 그 환세계를 동시에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인류학자 앙드레 레로와구랑(André Leroi-Gourhan, 1911~1986)의 해석에 따르면, 인류의 출현(사람화)은 삼중의 과정을 거친다. 앙드레는 기술체계에 의한 환경의 인공화(anthropisation)와 상징체계에 의한 환경의 인간화(humanisation)와 그 귀환작용(feedback)에 의한 사람화(homonisation)를 주장한다. 이 주장은 확실히 이마니시가 주장한 환경의 주체화, 주체의 환경화의 과정에 대응한다.

시간의 척도를 바꿔서 마찬가지의 과정이 진화 전체에서 일어나지 않을 리 없다. 모든 생물은 그 특수한 기능환(機能環)을 가지고 있고 주체적으로 그에 작용하고 다시 귀환작용에 작용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이 관점은 근본적, 존재론적으로 자연도태라는 결정론과 다르다. 자연도태에서는 우선 환경 일반이 있고 생물은 그에 적응해야 한다. 여기서는 어떤 주체적인 창조성이 없고 기계적이며 통계학적인 도태만이 있다. 따라서 정통 진화론은 진화의 창조성(즉 신종의 출현)을 설명할 수 없고 단지 종의 안정성을 가능하게 할 뿐이라는 판단(이마니시의 자연학은 이것만을 말하지 않는다)이 제기되어왔다. 재생산뿐만 아니라 창조성이 있으려면, 어느 한 부류의 어느 정도의 주체성이 있어야 한다.

진화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것이라면 그 속에서 종은 ‘변할 수 있어서 변하는’ 만큼, 바꿔 말하면 그 ‘과정’을 결정할 정도의 주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호렙산 원리의 광신자가 아니라면 그러한 가능성을 찾아 나서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진화가 단지 우연(돌연변이)의 결과였다면, 단백질의 가능한 조합의 수(10의 130승)를 고려한다면, 원 상태의 생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주의 나이가 영겁의 세월을 뛰어넘는, 말하자면 무한의 시간이 걸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특정 과정이 있어야 한다. 생명 전체의 각 수준(개체, 종, 전체)에서의 과정은 어느 흐름의 어느 정도로 결정된 주체성을 전제해야 한다.

이제 ‘과정’은 반드시 목적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또 반드시 목적론의 신비성이 필요하지 않다. 주체가 자신의 흔적을 되돌아보면─역사 세계에서 ‘자기발견’을 한다면─, 그 속에서 어떤 방향성, 어느 한 뜻이 스스로 발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치 안토니오 마차도(Antonio Machado, 1875~1939, 스페인의 시인)의 어느 유명한 시구인 “여행자여, 길은 없다 … 여행자여, 길은 너의 흔적 오직 그것뿐”인 것처럼, 생명과 그것을 육체화하는 생물 모두는 살아가는 한 자기 존재 의식, 즉 주체성을 가진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와 환경을 구별하고 그 구별을 견지할 수 없고 환경 속에 흩어져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 자기의식을 갖기 위해서는 자존재(自存在)의 의식이 필요하다. 그 기억을 지금은 게놈이라고 부르지만, 원리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원리란 주체성이다. 말할 것도 없이 박테리아의 주체성은 데카르트의 코기토만큼 발달한 것은 아니지만 그 원리는 다르지 않다. 그것을 ‘마차도의 원리’라고 부른다면 바로 알 수 있다. “생물이여, 과정은 없다 … 생물이여 과정은 너가 걸어온 길(진화) 그 자체이므로 스스로 있으며 같아지는 오직 그것뿐.”

 
  1. 베르케의 원문에서는 ‘상대적 보편주의’라고 번역했으나, 프랑스어 ‘relatif’는 영어로 ‘relative’이고 데스콜라는 ‘관계대명사(relative pronoun)’의 ‘relative’라고 그 뜻을 명시했을 뿐더러 저 말에 관계(relation) 혹은 연결(connection)의 보편주의를 담아내고자 했으므로 ‘관계보편주의’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본문으로]
  2. 진화론의 입장에서 생물이 무리를 지어 주어진 주변 환경에 기계적으로 적응한다는 이론 [본문으로]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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