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하는 현대사상과 문화인류학

 

시미즈 타카시(清水高志)

 

키워드: 상관주의 비판, 도구, 사물, 배치, 교차교환

 

문화인류학과 현대철학이라는 두 영역에서 21세기에 이르러 새롭게 부상하는 경향의 하나로 인간과 자연(및 사물)의 관계 자체를 근저에서부터 다시 묻는 움직임이 있다. 예를 들어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는 서양문명이 문화들을 상대주의적으로 다루는 관점임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객관적인 자연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것에 다름이 있음을 주창하고 있다. -인간의 퍼스펙티브에서 파악된 세계가 다종다양하게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철학에서도 대상세계를 인간주체와 상관적인 형태로만 파악한다는 퀑탱 메이야수의 비판(상관주의 비판)이 관심을 모으고 있는데, 이 또한 인류부재의 세계가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를 문제로 삼는다. 물론 근대적 주체에 대한 비판이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20세기에도 있었지만, 다양한 비-인간이 세계를 파악하는 중심적 위치를 점할 수 있고 나아가 사물이 일정한 퍼스펙티브를 가질 수 있다는 기묘한 논점은 최근에 등장한 것이다.

객체지향의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을 주창한 그레이엄 하만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하이데거의 도구분석이라는 논의를 발전시켜 사물과 사물이 상호 절대적으로 독립하고 있음을 특히 강조한다. 마르틴 하이데거에게서 세계는 무언가의 목적을 가진 <도구>가 연관되면서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이 연관에 불확정함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스스로의 실존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갖는 인간이다. 인간의 수발을 들 때 <도구>는 불확정한 존재가 된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이에 반해 하만은 각각의 <도구>나 사물 자체가 인간존재를 떠나 이미 <모조리 퍼 올릴 수 없는> 불확정성의 축이라고 주장한다.

온갖 사물, 대상, 혹은 <도구>를 생각해낸다 해도 이제까지는 그것들을 연결하는 중심적인 매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주체였다. 대상세계가 아무리 다양성과 차이를 품는다 해도 그것들을 무언가의 정합성 속으로 회수하는 것은 주체의 움직임이며, 그 과정에서 주체 자체가 변질된다 해도 주체의 대상에 대한 이 특권적인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대상세계가 차이와 다양성으로 가득 차 있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러한 특권적인 주체가 본 잉여, 외부로서 그렇다. 포스트구조주의까지의 사상은 그러한 의미에서 차이성에 대해 열린 여지를 주체에 남겨주기 위한 이론이었다. 기존 철학에서는 대상세계가 주체로부터 진정 독립한 것으로 파악하지 않았으며 주체와 대상을 상관적으로만 다루었다는 메이야수의 작금의 비판 또한 그러한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주체와는 별도로 대상이나 <도구>를 매체로 함으로써 이러한 구도를 뒤집으려는 것이 현대철학에서 대두되고 있는 새로운 경향이다. 하만이 말하는 오브젝트(object) 또한 그러하며, 인간부재의 세계로부터 사고를 출발시키는 메이야수 또한 그러한 경향을 공유하고 있다.

사물 그 자체는 그것을 지각하는 인간들이 <모조리 퍼 올릴 수 없는> 외부다. 근대 이후의 철학이 어디까지나 인간이라는 주체에게 나타나는 한에서의 사물=대상만을 다루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사물과 사물 또한 서로 그러한 관계에 있음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어떤 사물로부터 보고 다른 사물은 표면적인 그 나타남(감각적 오브젝트)으로밖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라고 하만은 말한다. 사물에는 그 숨겨진(탈각한) 외부(실재적 오브젝트의 일부분)가 있다는 것이다. 사물과 사물의 부정확한 상호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간주체에 의한 퍼스펙티브뿐만 아니라 사물로부터 본 사물, <사물의 퍼스펙티브>로부터 보이는 사물을 고찰해야 한다. 사물이나 비인간을 매체로 복수의 사물과 사물의 관계를 생각하는 발상이 현대철학에서 점차 중요해지고 있다.

사물이나 <도구>에 대한 이러한 착상, 그리고 그를 통해 기존의 방법론을 비판하려는 태도는 인류학에서도 메릴린 스트래선의 논의에 전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포스트모던의 사회학이나 비평이론의 인류학버전인 재귀인류학에서는 타문화 속에 몸을 던지고 그 문화의 내측을 체현해서 말하는 특권적인 <화자>를 부정했다. 그러나 여전히 여행자로서의 <화자>는 복수의 문화들에 동시에 몸을 던지고 자문화조차 상대화하며 그것들을 연결하는 결여항적인 매체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기능하고 있다. 이러한 류의 문화상대주의는 문화들을 단지 단편적인 형태로만 제시할 뿐이라고 스트래선은 비판한다.

이에 반해 그녀가 중시하는 것은 <도구>=사물이라는 매체다. 한 집단을 특정의 배치(, ) 하에서 연결하는 것은 매체로서의 <도구>. 즉 그 <도구>를 통해 무언가의 해석을 하고 특정의 관계(배치)를 그려내는 것이다. 이때 동일한 <도구>가 인접하는 다른 사회집단 하에서는 다른 해석이 내려지고 다른 배치가 묘사되기도 한다. 이 경우에 <도구>는 그러한 동료집단들의 문화를 상대화하면서 연결하는 매체가 된다. 이때 각각의 인간집단이 읽어 들이는 용도에 앞서서 그러한 <도구>=매체는 이미 존재한다. <도구>나 사물의 <모조리 퍼 올릴 수 없음>도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무언간의 <도구>는 한 집단에서는 중심적인 기능을 맡지만 다른 집단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듯이 또 다른 식으로 기능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그 다른 집단에서 중심적인 기능을 맡는 또 다른 <도구>가 존재할 것이다. <도구>는 집단이 그리는 배치()와 다른 집단이 그리는 배치()를 부분적으로 연결하며, 그 한편으로 배치() 자체 또한 이미 다른 <도구>를 포함하는 매체가 된다. 이러한 구조에 의해 매체로서의 <도구>와 배치()는 고정되지 않고 각각 다양한 모습을 띤다. 문화들은 배치()의 배치()인 최대의 구조로 회수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재귀인류학처럼 단지 단편이 되는 것도 아니며, 어디까지나 부분적으로 연결되어 간다. 최대의 구조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어떤 부분에도 복잡한 사물=<도구>와 배치()의 교차교환의 복잡한 관계가 발견된다는 것이며, 도처에 그것이 예시(豫示)된다는 것이다.

<도구>=사물이 다양한 인간집단의 행위를 상대화하는 기축이 됨과 동시에 그러한 사물 자체가 복수로 나타난다는 스트래선의 논의와 그 방법론은 주체중심의 발상 그리고 세계의 다양성을 인간주체와의 상관성을 벗어나는 잉여로만 보는 사고방식을 진작 넘어서고 있다. 철학이 마침내 근대서구의 사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탐색하기 시작한 오늘날, 인류학으로부터 얻는 시사점은 매우 풍부하다. 현대사상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이제까지의 주체중심의 상대주의를 넘어서서 사물을 중심적 매체로 편성하는 이론을 지역적인 문화사상에 머물지 않고 보편화하는 것이며 또 그러한 시야로부터 자연과학 자체를 파악하는 것이다

 

 

 

 

Lexicon 現代人類学148-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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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타 케이지(岩田慶治)의 애니미즘론

 

시미즈 타카시(清水高志)

 

키워드: 애니미즘, 이와타 케이지, 쇼보겐조(正法眼蔵), 상관주의, 원풍경

 

애니미즘은 만물에 영(anima)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원시적인 정령신앙을 가리키는 개념으로서 오랫동안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애니미즘의 세계관 자체를 서구근대의 그것과는 다른 존재론(ontology)으로 재정하려는 시도가 세계적으로 관찰되고 있다. 예를 들어 현대 프랑스에서 레비스트로스의 후계자로 주목받는 문화인류학자 필리프 데스콜라는 애니미즘을 내추럴리즘, 토테미즘, 아날로지즘이라는 유형과 더불어 유력한 세계관들 중 하나로 파악하고 있다.

데스콜라에 따르면, 애니미즘은 근대서구의 인간의 세계관을 나타내는 내추럴리즘과 특히 대조를 이룬다. 내추럴리즘이 인간의 정신과 문화들을 다종다양한 것으로 사고하는 한편으로 자연계 그 자체를 객관적인 법칙이 관통하는 하나의 존재로 파악하는 것에 반해, 애니미즘의 세계관에서는 인류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물이나 비인간 또한 각기 세계를 가치짓는 퍼스펙티브의 중심이 되며, 그 의미에서 그것들은 <인간>과 같다. 그러므로 세계 그 자체는 다양한 퍼스펙티브의 숫자만큼 존재한다. 한마디로 내추럴리즘이 다문화주의와 단자연주의인 반면, 애니미즘은 단문화주의(모든 것이 혼을 갖는다)와 다자연주의다.

단순한 문화상대론이나 가치상대론에 의한 이질적인 문화의 허용은 근대에서도 포스트모던에서도 크게 유행했다. 그러나 그러한 상대주의 자체를 뒤집지 않는 한, 근대적인 세계관의 연장선상으로밖에는 다른 문화를 이해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서구와 일본의 문명에 대해서도 근대 이전부터 이어져온 고층(古層), 그 핵심부에 도달할 수 없다. 21세기에 이르러 철학자 미셸 세르는 데스콜라의 작업을 채용하면서 서양문명 자체에 내추럴리즘 이외의 세계관이 실제로 짙게 남아있으며 켜켜이 뒤얽혀있음을 세밀히 검토한다. 이러한 태도는 애니미즘적인 문화 위에 대륙전래의 다양한 문화 그리고 서구에서 비롯된 근대문명을 받아들여 형성된 일본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매우 참고할만하다. 일본문화 속에 역사적으로 스며들어 있으면서 현대문명과 혼효하는 애니미즘의 세계관을 서구근대의 그것과 길항하는 <사상>으로서 조금이라도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우리[일본인]가 애니미즘에 대해 그 뉘앙스를 남김없이 음미하고자 한다면, 프랑스사람인 데스콜라가 고찰한 것보다 우리의 세계관에 내재한 접근법을 시도하는 것은 어떠할까?

 

전전(戰前)부터 전후에 걸쳐 교토학파의 학문의 흐름을 이어받은 특이한 인류학자 이와타 케이지의 애니미즘론은 여러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아 전후 교토의 지사인(慈済院)에서 하숙하면서 도원(道元, 1200~1253, 일본의 禪僧)正法眼蔵을 읽으며 청년시대를 보낸 이와타는 본래 지리학을 배우는 중에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코스모스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이 책은 지층의 퇴적 및 조산활동, 기상, 식물의 수평수직 분포 등이 모두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아름다운 질서를 가진 것으로 이 세계를 그리려는 시도다. 전일체(全一體)로서의 세계, <코스모스>를 다루는 과제를 이와타는 훔볼트에게서 이어받는다. 선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와 <코스모스>에 대한 강한 희구는 이와타가 후에 문화인류학으로 전환하여 애니미즘의 연구로 나아간 출발점이 되었다.

세계를 전일체로 파악하기 위해 훔볼트가 코스모스에서 탐구한 방법은 결국 상관학(Physiognomy)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현상이 복수의 층을 이루며 겹겹이 쌓여 관련되고 합쳐지는 모양을 손금을 읽듯이 읽어가는 것이다. 이때 전일체로서의 세계, 집대성된 코스모스를 통일하는 것은 그것과 대치하는 인간이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자의식이 미치는 한에서의 <끝없는 전세계>. 현대 철학자 퀑탱 메이야수는 근대 이후의 철학이 인간에게 자연과 세계, 인간과 관련되는 (상관적인) 한에서만 고찰되어왔다는 것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인류 이전부터 있었던 세계로부터 출발해서 사물과 세계를 다시 생각할 수는 없을까? 그의 이러한 입장은 상관주의 비판으로 불리며 21세기 철학에 커다란 문제를 제기하는데, 이와타는 훔볼트의 <코스모스> 속에서 바로 상관주의적인 한계를 진작 알아채었다. 그리고 그 한계를 넘어 진정한 <코스모스>를 탐구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만년의 훔볼트는 카멜레온을 키웠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방문객에게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나는 카멜레온이 좋소. 카멜레온은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을 각기 다르게 움직일 수 있소. 오른쪽으로는 하늘을 우러르고 왼쪽으로는 땅을 볼 수가 있단 말이오. 그러나 인간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오.” <코스모스>와 대치하면서 그에 도전하는 인간의 자의식은 특권적이지만 <코스모스>의 외부에 놓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동시에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내려다보는복수의 퍼스펙티브를 갖는 것은 통상 불가능하다.

<땅을 내려다보는> 것과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이 공존교차해야만 진정한 전일체, 진정한 <코스모스>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이와타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아가 <땅을 내려다보는> 것을 통해, 동시에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까지 실현하는 것이 그의 학문의 목표였다. <땅을 내려다보는> 것은 그에게 로컬의 <문화의 내측>을 관찰하는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은 그 문화가 <문화의 외측>의 퍼스펙티브를 더불어 포섭하는 것이다. 그러한 복수의 퍼스펙티브의 교차공존이야말로 애니미즘 문화의 특징이라고 이와타는 주장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교차공존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나타내주는 것일까? <문화의 내측><문화의 외측>은 이와타에게 종종 각각의 <근경(近景)><원경(遠景)>에 비유적으로 바꿔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전일체로서의 <코스모스>는 그 양자가 겹치는 곳에서 성립하는 <원풍경(原風景)>이다.

예를 들어 보르네오의 이반족에서는 벼의 탈곡에 사용하는 절구가 그대로 악기가 되고 그 소리가 그들의 일상생활에 구심력으로 작용한다고 이와타는 말한다. <근경>, <문화의 내측>을 형상화하는 힘은 그 자체로 사물 내지는 자연과 함께 한다. 그러나 그 절구소리는 벼의 혼을 불러들이는 것이기도 하며 <문화의 외측>에 있는 자연 그 자체에로, 그대로 땅과 연결된다. 일상생활 속에서 환경과 우리는 불가분하게 융화되어 있으며, 그것이 <근경>, <문화의 내측>을 형상화한다. 그 속에서 사람과 사물, 풍경은 말하자면 거울적이다. 그러나 또 그 풍경은 바로 거대한 풍경, 자연과도 저절로 연결된다. 주체대상의 관계는 주체를 축으로 겹쳐 쌓이고 종합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세계, <원풍경>=<코스모스> 속으로 포섭되고 만다. 아니, 그렇지 않다. <문화의 내측>에서 일상적으로 접하는 사물과 자연 속에서 이미 <코스모스>는 생생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새가 하늘을 날 때, 새는 하늘과 일체가 된다. 그러나 본래 하늘은 무한의 하늘 그 자체와 일체이며 비공(飛空)의 행리(行履)는 가늠할 수 없다.”(어디까지 날고 어떻게 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좌선잠’(坐禪箴)을 해석해서 도원은 말한다(正法眼蔵). <근경><원경> 그리고 <원풍경>은 바로 그렇게 연결된다. 흔하디흔한 사물 혹은 자연과의 대면의 순간에 그 장면 자체를 포섭하는 더욱 큰 <원풍경>을 직접 느끼는 것. 그 놀라움과 함께 근대의 이원론을 뒤집고 그렇게 스며든 애니미즘의 사고를 본류로 되돌리고 나아가 전일체로서의 세계의 품에 다시금 안기는 것. 바로 이 의미에서 이와타의 바람은 애니미즘 사상의 회생이었다.

 

Lexicon 現代人類学104-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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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미즘

 

오쿠노 가츠미(奥野克巳)

 

키워드: 에드워드 타일러, 종교기원론, 인지진화, 데카르트주의, 서구이원론, 인간과 비인간

 

생물학자 야콥 폰 윅스퀼은 생물의 인지능력이 만들어낸 세계를 환경세계로 파악했다. 진드기가 진드기의 인지능력을 통해 환경세계를 만들어내듯이, 인간은 인간의 인지능력을 통해 환경세계를 살아간다. 그런데 인간은 지금과 여기를 넘어서 물리적인 환경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감지하는 능력까지 갖고 있다. 현실뿐만 아니라 초현실의 영역으로 뻗어가는 지각이야말로 인간의 인지능력이며 인간의 환경세계의 특징이다.

그러한 인지능력을 인간은 어떻게 해서 갖게 된 것일까? 19세기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타일러는 원초의 인간이 꿈이나 죽음을 통해 평소 머무는 신체로부터 이탈할 수 있는 인격적인 실체로서의 혼이 존재한다는 관념을 가지게 되었다고 추론한다. 타일러는 인간 이외의 존재에도 혼이나 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고방식을 애니미즘이라고 이름 붙였고 그것을 종교의 원초형태로 규정했다. 애니미즘이란 움직이는’ ‘이라는 뜻이며 여러 장의 그림을 연속해서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애니메이션이라는 말에도 그 뜻이 이어지고 있다.

애니미즘이 다신교로, 나아가 일신교로 진화한다는 주장에서 알 수 있듯이 타일러는 종교의 기원론에도 관심이 컸다. 타일러와 동시대 학자인 제임스 프레이저, 20세기에 들어선 후에는 에밀 뒤르켐 등이 이끈 종교의 기원을 둘러싼 연구는 문화인류학의 주요한 토픽이었다. 20세기 후반에는 문화진화론이 비판받으면서 문화인류학은 종교의 기원이라는 테마를 더 이상 다루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20세기 후반이 되면 동물행동학과 영장류학, 진화론과 인지과학등의 영향을 받은 심리학과 고고학 등이 종교의 기원을 둘러싼 연구를 행하였다.

인지고고학자 스티븐 마이슨에 의해 제기된 종교의 기원을 둘러싼 가설에 의하면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6~3만년 전에 종교가 출현했다. 네안데르탈인의 뇌에는 언어영역, 사회영역, 기술영역, 박물영역 등의 영역들이 분리되어 있었고 그래서 사물 그 자체로밖에 파악할 수 없었다. 반면 현생인류의 뇌에서는 각각의 영역을 분리한 벽이 무너지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신경조직이 형성되며 그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회로를 통해 영역들을 횡단하는 유동적인 지능이 작동할 수 있게 되었다. 현생인류는 비유나 상징을 조작해서 인간 이외의 존재에도 의식과 같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파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현생인류는 지금과 여기를 초월한 영역으로 뻗어가는 인지능력을 손에 넣게 되었고 종교를 만들어내었다. 이는 또한 타일러가 애니미즘이라고 부른 현상과 동일하다.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애니미즘은 인류학 내부에서 다시금 조명받기 시작한다. 남미 선주민 사회에 대한 조사에 기반하여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는 남미 선주민이 인간, 동물, 정령이라는 존재자에 대해 각각의 스스로가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간주하며 동물이나 정령들은 자신들에게도 사회가 있다고 본다고 말한다. 인간과 동물 등 인간이외의 존재들 간의 차이는 몸에 두르는 것(의상과 장식)에 있다. 그 점에서 인간, 동물, 정령은 내면적으로는 동일한 존재이며 다른 것은 신체적인 면일 뿐이다.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에 의하면 애니미즘은 인간, 동물, 정령 등의 존재들이 자신들에 대해 가지는 재귀적인 관계가 논리적으로 동등하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필리프 데스콜라는 남미 선주민 사회에 대한 조사에 기반하여 인간과 비인간(인간 이외의 존재)이 서로 유사한 내면성과 각기 다른 신체성을 가지는 양태를 애니미즘으로 고찰했다. 그의 애니미즘에서는 인간이 동식물 및 그 외의 환경적 요소들에게 주체성을 부여한다. 이 속에서 인간은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비인간들 사이에서 그것들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타일러의 애니미즘은 인간과 비인간을 확연히 구분한 후에 인간만이 혼이나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파악하는 데카르트주의적인 서구이원론에 기초한다. 인간 이외의 생물이나 사물에 대해서는 인간이 가진 혼이나 정신을 투영하는 프로세스를 거쳐야 한다. 이에 반해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 등의 애니미즘의 새로운 정의는 데카르트주의적인 이원론에서 벗어나 보다 본질적인 이해에 기반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레인 윌러스레브(Rane Willerslev)의 애니미즘론 또한 데카르트주의적인 주객이원론의 탈중심화를 지향한다. 서구가 잃어버린 세계를 상정하고 그 속에서 세계와 다른 존재자들 간의 차이를 흡수해서 연결함으로써 성장하는 것이 애니미즘이라고 파악한 누리트 버드-데이비드(Nurit Bird-David)를 비판하고 인간과 비인간이 이거냐 저거냐가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라는 모호함의 존재양태를 가지는 것이 애니미즘이라고 주장한다. 월러스레비의 애니미즘은 또한 팀 잉골드의 애니미즘과 공명한다. 잉골드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분할선 이전의 사물의 끊김 없는 삶의 흐름 그 자체를 지향하며 살아가는 것’(animacy)이 정신과 물질의 존재론적 분할에 앞서는 애니미즘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나무는 바람의 흐름과 어울리고 그 움직임 속에서 바람가운데나무로서 살고 있다. 잉골드가 말하는 애니믹한 존재론’(animic ontology)이란 존재들이 한 몸이 되어 생성과 운동을 부단하게 반복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19세기의 철학자 뤼시앙 레비브뢸의 참여의 원리’(principe de participation) 또한 데카르트주의적인 이원론을 넘어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참여란 원초의 인간이 가지는 심성을 뜻한다. 미개인의 심성에게 일()과 다(), 같음과 다름 등의 대립은 한쪽을 긍정하는 것이 다른 한쪽을 부정하는 필연을 포함하지 않는다. 양자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민속학자 오리구치 시노부(折口信夫)는 인간이 가진 비교의 능력을 유사점을 직관하는 동화[類化]성능순간적으로 차이점을 느끼는 구별화[別化]성능으로 나누었다. 동화성능이란 표면적으로 다른 것들 간에 공통성과 동질성을 찾아내는 사고법이며, 구별화성능이란 차이에 기초해서 구성되는, ‘AA’ 라는 과학사고의 기본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리를 포함하는 사고법이다. 오리구치는 고대인의 마음이 동화성능에 기초한다고 생각했다. 애니미즘이란 동화성능적인 사고에 대한 것이다. 이 사고는 또한 오늘날의 애니미즘론을 선취한다. 인간과 비인간, 정신과 물질, 주체와 객체라는 서구이원론의 사고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주의적인 이원론의 비판의 입장에서 철학자 오모리 쇼조(大森荘藏)는 인간이 인간 이외의 존재와 인격적 관계를 맺을 때 인간 이외의 존재가 마음 있는 것으로 등장하는 상황에 착목하고, 이 지점에서 애니미즘의 본질을 발견한다. 시인 야모오 산세이(山尾三省)가 도쿄에서 이주한 야쿠시마(屋久島)에서 애니미즘을 발견한 것은 특기할만하다. 애니미즘은 과학합리주의와는 대극에 있는 자연에 대한 낭만주의와 결합될 가능성을 언제나 품고 있다. 바람과 공기를 포함한 자연이 힘을 가지고 있었던 옛 애니미즘으로부터 숨이 모음으로 알파벳 속에 불어넣어짐으로써 외부의 자연에 잠재된 영력이 인간의 머릿속에 스며든 덕분에 인간에만 적용되는 자기재귀적인 애니미즘으로서 화현했다고 주창한 데이비드 아브람(David Abram)의 애니미즘론은 이색적이다. 마지막으로 이와타 케이지(岩田慶治)의 애니미즘에 대해서 언급해두고자 한다. 이와타는 서구이원론의 사고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거쳐 지리학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와 도원(道元)의 사상에 이끌려 독자의 풍부한 애니미즘론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Abram, David (1997) The Spell of the Sensuous Perception and Language in a More-Than-Human World. Vintage Books.

Bird-David, Nurit (1999) “Animism Revisited: Personhood, Environment, and Related Epistemology”, Current Anthropology 40(S1): S67-S91.

Descola, Philippe (2006) “Beyond Nature and Culture”, Proceedings of the British Academy 139: 137-155.

Ingold, Tim (2000) The Perception of the Environment: Essays on livelihood, Dwelling and Skill. Routledge.

--------- (2011) Being Alive: Essays on Movement, Knowledge and Description. Routledge.

Viveiros de Castro, Eduardo (1998) “Cosmology Deixis and Ameridian Perspectivism”, Journal of the Royal Anthropological Institute, n.s. 4(3): 469-88.

Willerslev, Rane (2007) Soul Hunter: Hunting, Animism, and Personhood Among the Siberian Yukagir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Lexicon 現代人類学3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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