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상 2019년 7월 고현학 특집호에 실린 대담글을 번역해서 올린다. 곤 와지로가 어떤 문제의식으로 고현학을 시작했는지, 또 민속학과 건축학 사이에서 고현학의 방법론적 의의는 무엇인지, 21세기 현재 고현학이 다시금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대략적으로 이야기해준다. 특히 사물의 문제에서 신의 문제로 옮겨가는 고현학의 학문적 지형이 매우 흥미롭다.
마치 수천 년 후의 시선처럼
: 고현학(考現學)과 사물에 대한 물음
오늘은 고현학 특집으로서, 오카세가와 겐페이(赤瀬川原平, 1937~2014 소설가 및 미술가), 아라마타 히로시(荒俣宏, 1947~ 박물학자 및 소설가)와 함께 노상관찰학(路上觀察學) 활동을 주도해왔고 또 곤 와지로(今和次郎)의 저작 해설 등에도 관여하고 있는 후지모리 데루노부(藤森照信) 씨 그리고 곤 와지로가 방문한 일본의 민가를 재방문하는 프로젝트 등을 이끌어온 나카타니 노리히토(中谷礼仁) 씨 이렇게 두 분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곤 와지로와 야나기타 구니오
후지모리: 나카타니 씨의 최근 저서인 『未来のコミューン[미래의 코뮌]』(2019년)을 읽고 예리하다고 생각한 것은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민가 혹은 모노 1일반에 대한 곤 와지로와 야나기타 구니오 간의 관점의 차이를 논한 부분 때문입니다. 원래 민가라는 것은 유럽에서도 일본에서도 기본적으로 건축가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로지 민속학이 민가를 다뤄왔습니다. 유럽에서는 지금도 그렇습니다. 즉 민가 속에 스며든 생활의 무의식이라고 할까요? 말로 표현되지 않는, 보통 사람들의 상념을 모노에서 탐구하는 것이 그들의 관심사였으며 야나기타는 그것을 일본에서 행한 것이지요. 그때 야나기타는 당연히 카메라맨과 함께 가는 것이 가장 좋았겠지만, 당시 카메라기술로는 실내를 잘 담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곤 와지로를 비롯한 건축가들이 스케치를 하거나 집의 도면도 수집을 담당했습니다. 거기까지는 두 사람의 관심사가 일치했는데, 이내 야나기타가 민가에 흥미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곤 와지로는 그 후로도 계속해서 민가를 탐구했고 1922년에 『日本の民家[일본의 민가]』를 출간하기까지 약 5년간 거의 혼자서 조사했습니다. 야나기타 구니오가 어째서 민가연구에 흥미를 잃었는지, 곤 와지로는 왜 민가연구를 계속했는지 궁금했지만, 저는 그 의문을 깊이 파고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카타니 씨는 바로 야나기타와 와지로가 각각 적어두었던 죽음의 한 에피소드를 통해 그 점을 논했습니다. 즉 곤 와지로가 『일본의 민가』에서 석유통 위에 놓인 죽은 여자아이의 나막신과 위패로부터, 누구라도 인상에 남을 에피소드(“내가 들판 한가운데에 있는 어떤 집을 방문했을 때 집안에서 속사정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한 광경을 목격한 바 있다. 집 한구석에 석유통이 있었고 여자아이의 깨끗한 나막신이 그 위에 놓여있었으며 바로 뒤에는 만든 지 얼마 안 된 위폐가 있었다.”[『日本の民家[일본의 민가]』岩波書店, 1989년, 53쪽])를 썼습니다. 야나기타 구니오는 메이지 37년(1904년)에 발생한 실제 사건을 토대로 아이가 현관 문턱에 머리를 갖다 대어 아버지로부터 죽임을 당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山の人生』)를 썼습니다. 나카타니 씨는 이 사건에 대한 두 버전의 이야기를 함께 논함으로써, 야나기타 구니오와 곤 와지로의 관계에 대해 내가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래서 무릎을 ‘탁’ 치면서 나카타니 씨에게 바로 제 감상을 전했던 것입니다.
나카타니: 저야말로 후지모리 씨로부터 감상의 글을 받고 감격했습니다. 모노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야나기타 구니오와 곤 와지로 간의 차이와 상호 영향 관계를 생각해보고자 그것을 제 책의 프롤로그에 썼습니다. 저 사건에 대한 야나기타의 서술에는 몇 가지 버전이 있는데, 우치다 류조(內田隆三) 씨의 작업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야나기타가 처음으로 이 사건을 소개한 『山の人生』은 사건이 일어나고 20년 이상 흐른 후인 1926년에 나온 책입니다. 거기서는 사건이 일어난 계절이 발생 당시 취조한 조서의 내용과 다릅니다. 야나기타는 사건이 발생한 계절을 봄의 이른 아침에서 가을의 저녁 무렵으로 바꿉니다. 즉 무대를 가을 해질녘으로 옮깁니다. 또 야나기타는 1959년에 출간한 책인 『故郷七十年[고향70년]』에서 아이들이 머리를 갖다 댄 곳이 허물어가는 집의 문턱이었다는, 참으로 인상 깊은 그 장소를 꼭 집어 말해줍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사건 발생 당시의 기록에는 불분명하게 남아있습니다. 다시 말해 인상 깊은 이 사건이 야나기타의 마음에 계속 남아서 이야기로 만들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세기 이상의 시간이 흘러 이 사건은 야나기타를 거쳐 가을 해질녘에 아이들이 문턱에 머리를 갖다 댄다는 인상적인 이야기 구성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사실이 의식적으로 날조되었다기보다 야나기타의 마음속에 이 사건이 계속해서 살아남아 선명한 광경으로 되살아난 것이지요.
후지모리: 문턱이라는 것은 요컨대 이승과 저승의 경계입니다. 거기에 머리를 갖다 대었다는 이야기는 야나기타의 머릿속에서 50년을 삭힌 후 자연스레 만들어진 것이죠.
나카타니: 확실히 집의 부자재와의 구체적인 관련 속에서 이야기가 구성되기까지 야나기타 씨의 경우는 매우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에 비해 곤 와지로는 모노의 구성을 통해 소녀의 죽음을 독자들이 선명하게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능력은 그만의 후각적인 기민함을 느끼게 합니다. 이 차이는 꽤 크다고 생각합니다. 모노를 통해 집을 쓰는 곤 와지로의 방식은 시간상의 변화를 품은 야나기타의 집에 대한 구체적인 이미지의 기초를 제공한 것이라고까지 생각됩니다.
후지모리: 그렇군요. 실은 내 안에서 저 두 버전의 이야기는 어느새 하나가 되었고, 현관 문턱에서 머리가 잘린 아이의 나막신과 위폐가 석유통 위에 놓인 장면을 떠올리게 되는데, 실제의 전후 관계를 살펴보면 오히려 와지로의 묘사가 야나기타의 머릿속에서 이미지의 결정화를 촉진했을 가능성이 있겠네요.
야나기타 구니오는 역시나 시인입니다. 그래서 말로써 마지막을 말끔하게 정리합니다. 그에 반해 와지로의 문장은 절대로 말로 끝나지 않고, 그렇다고 단순히 모노 자체의 기록에 다다르지도 않습니다. 그 점이 흥미롭습니다. 예를 들어 야나기타 씨가 기술한 저 사건의 이야기로는 현장에 가고 싶다는 호기심이 일지 않습니다. 사건이 글로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현장에 가봤자 글에서와 달리 현장이 볼품없으리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와지로의 문장은 그곳에 가고 싶게 만듭니다. 현장에 가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석유통 위에 나막신 이야기도 그러하며, 판잣집의 함석판에 뚫린 구멍을 페인트칠로 가려놓은 이미지를 묘사한 문장 또한 여전히 생동감이 넘칩니다.
또 하나 빼먹지 말아야 할 것이 곤 와지로의 문장은 창작 의욕을 부채질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타인의 문장에서 창작 의욕을 느낀 것은 단 한 번인데, 그것은 곤 와지로가 아니라 그의 애제자인 요시자카 타카마사(吉阪隆正 1917~1980 일본의 건축가)가 중국 동북부의 진흙집에 관해 쓴 문장이었습니다. 제가 처음 건축 설계를 맡아 일이 잘 풀리지 않았을 때 그의 감동적인 글을 읽고 마음을 다잡았던 적이 있습니다. 와지로 씨와 요시자카 씨가 모노를 보고 무언가를 쓸 때 그 글에는 어딘가 모르게 “여유”라고 할까요, 완성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 독자를 자극하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해 야나기타 씨의 글은 문학작품으로서 완성되어 있습니다. 그의 글은 한 구절 한 구절에 정성이 깃들어있기 때문에, 요시모토 다카아키(吉本隆明 1924~2012 일본의 평론가)가 말했듯이 그의 글에는 방법론이 없습니다. 그렇게 완결되어 있으므로, 말하자면 “종자”가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나기타 씨에게는 제자가 없습니다. 아니, 제자가 없다기보다, 야나기타 씨 본인이 절정을 맞이한 후로 점차 쇠퇴해버렸지요. 하지만 곤 와지로는 파종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언젠가 곤 와지로의 영향을 받은 세 개의 학회가 한자리에 모여서 심포지엄을 연 적이 있습니다. 학회 하나는 가와조에(川添) 씨를 비롯한 와세다 사람들 중심의 생활학회. 이 학회는 말하자면 곤 와지로 학문의 적통입니다. 또 하나는 타다 미치타로우(多田道太郎 1924~2007, 일본의 프랑스 문학자이자 평론가) 씨를 중심으로 하는 교토의 현대풍속연구회. 두 학회만으로 충분할 텐데 두 학회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노상관찰학회를 불렀습니다(웃음). 그때 놀랐던 점은 노상관찰학회가 반드시 혼쭐날 것이라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갔는데, 오히려 그쪽―아마도 생활학회였던 것 같습니다―에서 감사를 표명한 것입니다. 노상관찰학회 덕분에 곤 와지로가 우리 시대에 살아 돌아왔다고. 그렇지만 우리는 곤 와지로를 되살리거나 계승하려고 노력한 적도 없고 다만 곤 와지로의 씨앗이 우리를 자극했기 때문에 그쪽으로 나아간 것뿐입니다. 그저 한 톨의 보리 씨앗이 땅에 떨어진 것입니다. 야나기타 씨의 경우에는 물론 개별적으로 쓰인 책들이 많지만, 그렇게까지 여러 학문 분야를 넘나들며 퍼지지는 않았습니다.
나카타니: 분명 야나기타 씨에게서 ‘교조(敎祖)’의 인상을 완전히 씻어내기는 어렵습니다. 최근 가라타니 고진의 『世界史の実験[세계사의 실험]』(岩波新書, 2019년)은 그로부터 약간 멀어진 느낌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야나기타의 ‘교전(敎典)’이 있고 후학들은 그에 대해 어떤 태도―반발이든 찬성이든―를 표명해야 한다는 의무가 매우 강하다는 인상입니다. 그에 비해 곤 와지로는 교조 되기를 의식적으로 거부합니다. 문장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모노의 묘사라는 단편적인 힌트만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렇게 해서 “관념은 모노와의 관계 안에서 나온다”라는 것을 끊임없이 전달합니다. 그것이 곤 와지로의 작업 세계가 가진 보기 드문 독자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노의 안정성과 이방성(異邦性)
나카타니: 그런데 이것은 제가 후지모리 씨를 존경하는 이유이기도 한데요, 후지모리 씨는 그러한 모노라는 존재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 같습니다. 모노가 없다면 인간은 관념만을 무한정 부풀려서 결국은 해파리와 같은 이상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러한 예들을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후지모리: 확실히 현재 많은 사람이 모노나 건축에 관심을 두는 것은 언어에 의한 사상을 믿을 수 없게 된 탓도 있겠지요.
나카타니: 가령 모노에서 받는 인상이나 관념은 사람마다 제각각이라 해도 그 모노와 직접 대면하는 경험은 그 사람에게 유의미한 한계를 설정합니다. 그 한계가 자신의 관념과 어긋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사고회로는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후지모리: 모노가 가진 안전성에 대한 감성은 확실히 곤 와지로에게 주요했다고 생각합니다.
나카타니: 곤 와지로의 작업이 매력적인 것은 그러면서도 사물이 자신과 기본적으로는 소원하다고 생각한 부분도 동시에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는 모노를 직접 파악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더불어 통감합니다. 그러한 절망이, 그런데도 모노와 대면하는 안정감과 교차하는 감각이 고현학에 심대한 깊이를 가져다준 것이 아닐까요? 예를 들어 곤 와지로는 「고현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의 서두에서 고현학과 고고학을 대비시키는데, 다만 다루는 사물의 신구(新舊)의 차이만을 서술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종종 단순하게 해석되기 쉬워서 제대로 말해두어야겠다고 생각한 부분입니다. 곤 와지로의 고현학에서 문제의식은 요컨대 현재를 사고하는 학문에서 고고학적인 수법이 부재하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 와지로는 사물과 대면하는 고고학의 사고법을 직시하고 그것을 가져다 현재를 사고하고자 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를 고고학적으로 본다는 것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져보면, 예를 들어 여기에 캔커피가 있습니다. 이것이 수천 년 후에 출토된다면, 미래의 존재들은 이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둘러싸고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세계 여기저기서 같은 것이 같은 시대에 대량으로 발견된다면 말이죠. 구리방울(동탁銅鐸)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중등역사 교과서에 동탁에 대한 서술이 있다면, 아마도 ‘어떤 종교적 의례’에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쓰여 있을 겁니다. 한마디로 ‘모른다’는 말입니다(웃음). 고고학이라는 것은 모노로부터 출발해서 그 의미를 묻는 것인데, 출토물에는 ‘이것은 접시입니다’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문헌학이란 요컨대 꼬리표학입니다. 꼬리표가 붙어 있지 않다면 역으로 모노의 용도는 절대로 확신할 수 없으므로, 몇몇 가능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릇일지도 모르고, 모자일지도 모르며, 슬리퍼일지도 모르는 복수의 관점이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유사한 모노들의 계열을 밝혀내고 거기에 집의 부엌 부근에서 나왔다는 출토상황을 겹쳐 놓음으로써 이것은 ‘대개 접시’일 것이라는 카테고리를 점차 구축해가는 것이 고고학의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고현학은 유사 고고학처럼 항간의 모노로부터 꼬리표를 굳이 떼어내어 평소의 의미를 잘라냄으로써 오히려 존재의 본질을 재미있게 드러냅니다. 이것이 고현학의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휴대폰을 예로 들어보면, 먼 후대에는 ‘어떤 종교적 의례에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휴대폰이라는 통신수단을 조금 멀리 떨어져 냉정하게 바라보면 ‘필연성을 초월한 비기(祕技)’라고도 말할 수 있는 독특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휴대폰에 접근하면, 전철 안의 거의 모든 사람이 몸을 앞으로 구부리고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는 독특한 자세가 정말로 종교적이라는 것을 통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꼬리표(의미)가 떼어진 모노를 수천 년 후에 누군가 발굴했을 때 그 누구는 모노에서 어떤 가능성을 찾아낼까를 생각해봄으로써 사물의 한계치를 어느 정도 넓힐 수 있다는 것이 고현학의 기본사고입니다. 고현학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면 바로 이 점 때문이지 않을까 합니다.
후지모리: 저와 오카세가와 겐페이(赤瀬川原平) 씨가 노상관찰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하야시 죠우지(林丈二, 1947~ 삽화가 및 메이지 문화 연구가) 씨를 만난 것인데, 모노에 대한 그의 관점은 확실히 우리와 다릅니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얼마나 사물을 보지 않는가? 우리는 이해한 것 외에는 보지 않습니다. 이해하지 않는 사물은 보이지 않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하야시 씨는 그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맨홀 뚜껑이던가 벽 블록의 구멍이던가 누구도 제대로 보지 않는 것에 대해 어느 한 사람이 ‘이렇게 보면 재밌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듣는 쪽이 부하가 치밀지요(웃음). 어쨌든 예술계에 걸쳐 있는, 나름 사물을 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분합니다. 그래서 ‘그러면 버스 정류장에 멈춰 서 있을 때는 어떻게 해요?’라고 묻습니다. 걷지 않을 때는 보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이죠. 그런데 하야시 씨는 ‘괜찮습니다. 길을 지나는 차 번호판의 숫자로 구구단을 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합니다. 즉 네 개의 숫자로 구구단을 만들면서 ‘아직 이 구구단이 나오지 않았네’라고 말합니다(웃음).
나카타니: 하하하(웃음)!
후지모리: 하야시 씨의 그 말에 오카세가와 씨는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사물을 봐온 눈에는 눈꺼풀이 덮여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는 바로 노상관찰학회를 시작했습니다. 곤 와지로는 말하자면 하야시 씨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보통 사람이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을 제대로 본 사람입니다. 곤 와지로는 히로사키(弘前, 에도 시대 아오모리현의 지방 번주) 명가 출신으로 어려서는 낙제생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근처 마치야(町家) 2의 격자(格子)를 계속해서 그렸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사물을 보는 눈이 처음부터 있었던 셈이지요. 그가 그린 민가 그림은 매우 훌륭합니다. 그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구체적인 세계상을 표현해주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무언가 인간에게 중요한 것을 전달해주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앞서 저는 수천 년 후의 사람들이 휴대폰을 보고 종교적인 의례 도구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는데요, 우주인이 지금의 지구를 보아도 아마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말하자면 우주인의 눈으로 사물을 본다는, 그러한 관점을 제기한 이가 곤 와지로입니다.
나카타니: 곤 와지로가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과 사고방식에는 어떤 중심축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해서, 당시 그의 주변에서 유행한 사상 등을 조사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그의 관점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것이 후설의 현상학이었습니다. 특히 ‘현상학적 판단중지’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즉 의미를 일절 부여하지 않고―보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주목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 말입니다. 일본어 번역은 너무 거창합니다(그 나름대로 재미가 없지 않지만). 원어를 따져보면 에포케(ἐποχή epoché)라는 그리스어인데, 이 발음이 먼저 신경 쓰인다면 바로 앞서 이야기한 하야시 죠우지 씨처럼 시치미를 떼고 3사물을 보면 됩니다. 이것은 위대한 의성어(onomatopoeia)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 외의 그리스어를 예로 들면, 귀신이나 혼에 관한 것을 누스(νου nous)라고 하는데, 그처럼 귀신은 누-하고 오지요. 모노로부터 현재 유통되고 있는 의미를 일단 벗겨내면, 이렇듯 재밌는 복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물에 다 맡기고 세상을 “폿토미루(ぽっと見る)[딱 본다]”는 사고법이 고대부터 있었습니다. 그것을 곤 와지로 씨와 하야시 죠우지 씨, 그리고 후지모리 씨가 각각의 방식으로 각자의 시대에서 전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후지모리: 물리학에서 관측의 문제와도 통하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보기 위해서는 그것에 빛을 비춰야 하는데, 극미한 세계에서는 빛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세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나카타니: 실제로 「고현학이란 무엇인가」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곤 와지로라는 사람은 고고학 외에도 민속학과 사회학 등 당시 최첨단 학문과 사상을 속속들이 살폈습니다. 게다가 그러한 학문을 모두 집결시켜서 모노를 보는 방법으로 전개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확신범이라는 기분이 듭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역시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후지모리: 한편으로 분명 극히 냉정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다이쇼기에 주류였던 분리파 건축협회라는 그룹으로부터 비판을 받았을 때 곤 와지로는 “부디 모두 건전한 길을 걸어가 주세요, 나는 귀퉁이에 달팽이처럼 땅을 기어가면서 살겠습니다.”라는 식으로 응대했습니다(웃음). 저 냉정함은 뭐라고 해야 할까요? 여하간 멋집니다!
나카타니: 자신의 위치를 정하는 데에도 전략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분리파의 건축전이 니혼바시(日本橋)의 시로키야(白木屋)에서 열린 반면, 와지로가 고현학 최초의 전람회를 신주쿠의 키노쿠니야(紀伊國屋)에서 연 것부터 고현학 활동을 당시의 신진 모던 건축의 대립항으로서 전개하려 한 의도가 엿보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日本の民家[일본의 민가]』초판(鈴木書店, 1922년)에는 그 후 사라진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전원생활자의 주택’이라는 부제인데, 이것은 도시인의 이상적인 교외 생활을 목표로 하는 분리파 모던 전원주택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기도 했습니다.
후지모리: 그 전람회를 몇 년이나 계속했다는 것은 무엇보다 그것을 즐겼다는 거고요.
요시다 켄키치(吉田謙吉 1897~1982)의 “현학(現學)”, 그리고 영화예술로의 계승
나카타니: 오늘은 요시다 켄키치에 대해 후지모리 씨와 꼭 이야기해보고 싶었습니다. 즉 최초의 『モデルノロジオ[모델의 골목길]』(1930년)은 곤 와지로와 요시다 켄키치의 공동작업이었는데, 그 후의 역사적인 흐름을 보면 곤 와지로만이 남고 요시다 켄키치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책을 보면 요시다 켄키치 쪽이 더 많이 썼으며 오히려 작업의 성과를 보면 곤 와지로 쪽보다 흥미롭습니다.
후지모리: 고현학적인 관찰을 시작한 것은 실은 요시다 씨 쪽이 빨랐습니다. 요시다 씨가 욧가이치(四日市 미에현 북부의 항만도시) 어딘가의 길거리 장식을 스케치한 것을 곤 와지로에게 보여준 것이 고현학의 시초인데, 요시다 씨는 곤 와지로에 비해 무의미하게 접근한 부분이 있습니다. 앞선 이야기와도 연결되는데요, 곤 와지로는 세상의 짜임새(얼개)를 기본적으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웃음). 그렇기 때문에 분리파 일당도 곤 와지로가 무언가 말하면 그것을 비판해주는 상대로 나섰던 것이고요. 그런데 요시다 씨에게는 그런 부분이 전혀 없었습니다. 예전에 요시다 씨의 아내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요시다 씨가 만년에 찍었던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주구장창 여성의 꽁무니만을 찍었습니다. 그것도 성적인 의도는 전혀 없고 단지 찍기만 했습니다. 매우 독특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하야시 죠우지에 가깝네요.
나카타니: 예를 들어 「本所深川貧民窟附近風俗採集[혼죠후카가와 4빈민굴 부근 풍속채집]」 등에서도 이 책의 전반부를 곤 와지로 씨가 맡았고 후반부를 요시다 씨가 담당했는데, 곤 와지로는 ‘채집’ ‘조사’ ‘통계’ ‘고찰’ 중에서 ‘통계’와 ‘고찰’을 그때까지만 해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표와 그래프를 통해 풍속 연구를 더 잘해보고자 했습니다.
후지모리: 생활학회 등은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나카타니: 맞습니다. 그런데 요시다 켄키치의 경우는 더욱 모노 자체로 접근해갑니다. 오로지 모노를 그리기만 할 뿐이고, 글로 소개는 하지만 고찰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묘사된 모노의 변이형태를 관찰함으로써 그것이 가진 가능성의 범위를 대강 알 수 있습니다. 즉 모노가 자기 모습 그대로 말하게 하는 것입니다. 『日本の民家[일본의 민가]』의 도회판(都會版)은 실은 요시다 씨가 했습니다. 그 책에 명작이 아닌 것이 없지만, 알기 쉬운 예로 몇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얇고 잘 부서지는 당시의 ‘유리가 깨지는 방식’(그림 1)과 고가이기 때문에 갈아 끼우지 않고 고쳐서 사용한 당시의 ‘유리 수선법’(그림 2) 세트는 실로 대단합니다. 처음부터 예측되지 않는 유리의 이런저런 깨지는 방식과 깨진 유리를 수선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방법이 양쪽으로 채집되었습니다. 형태의 변화가 중복되면서 나타나는 다양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의미를 띠는 곤 와지로의 작품은 ‘깨진 밥그릇 다수’(그림 3)가 아닐까요? 이것은 식기를 함부로 다루는 손님과 밥그릇을 밥그릇이 아니게 되기까지 잔금이 나도 사용하는 식당 측의 의도가 겹쳐져서 밥그릇의 한계, 밥그릇이 조건이 모노에 멋지게 나타납니다.
후지모리: 말하자면 “고(考)”를 뺀 “현학(現學)”이지요(웃음). 곤 와지로의 통계적인 부분을 저는 그렇게 재밌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자신이 하는 일을 학문 세계에 들여오려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요시다 씨는 순도가 더 높지요.
나카타니: 요시다 켄키치에게는 그런 의지가 있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습니다.
후지모리: 요시다 씨는 결국 무대의 사람입니다. 그는 도쿄미술학교를 나온 후 츠키지(築地) 소극장 등에서 줄곧 무대미술을 담당했습니다. 무대에 펼쳐진 그의 순수한 고현학적 사고는 무대에서만 사회와의 접점을 가졌습니다. 무대는 ‘리얼’에 관한 다양한 지식이 있어야 만들 수 있습니다. 또 무대이기 때문에 당연히 사라질 수밖에 없고요.
나카타니: 고현학과 무대미술의 관계는 확실히 중요합니다.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의 <도데스카덴>(1970년)입니다. 그것은 전후(戰後) 빈민굴을 묘사한 작품인데요, 판자 세트가 매우 정교합니다. 정말로 곤 와지로가 스케치한 것 같은 판잣집들입니다. 예를 들어 집 입구의 함석 문에 열쇠가 걸린 쇠 장식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잘 보면 그 밑에 또 하나 별도의 열쇠가 달린 쇠 장식의 흔적이 있습니다. 요컨대 별도로 걸린 쇠 장식의 존재는 이 문이 재이용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보통은 그렇게 세세하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디자인의 인위적인 경지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멋집니다. 어떻게 이런 디자인이 가능한지 궁금하던 차에 구로사와 영화의 미술감독과의 인터뷰집인 『무라키 요시로(村木与四郎)의 영화미술―「듣고 쓰기」구로사와 영화의 디자인』(1998)이라는 책에서 매립지의 진짜 쓰레기장을 촬영지로 해서 그곳에 있는 거칠고 엉성한 쓰레기로 세트장을 만들었다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정말로 놀라웠습니다. 쓰레기장에서 주운 건축자재에 새롭게 열쇠를 만들어 달았던 것이지요. 그것은 곤 와지로가 감동한 것과 같은, 관동대지진 후에 사람들이 깨진 기와 조각들 틈에서 바로 그 장소에 있는 모노를 사용해서 다시 한번 생활공간을 만들고자 한 정진정명(正眞正銘)의 재실험이었습니다. 이 미술 주담당은 그의 아내인 무라키 시노부(村木忍)였는데, 무라키 요시로 씨가 맡은 전쟁 직후의 밥집이나 빠의 스케치도 특히 멋집니다. 완전히 고현학이지요.
후지모리: 그렇군요. 그러고 보면 곤 와지로의 아들 또한 도에이(東映 일본의 영화제작배급회사)에서 영화 세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더럽힘’의 명인으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즉 영화 세트라는 것은 인위적으로 세월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인데, 곤 와지로의 아들의 손을 거치면 완전히 인위를 넘어서 마치 우연히 쌓이고 쌓인 더러움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나카타니: 멋지네요. 역시 무대든 영화든 사물의 단편을 사용해서 현실의 생활 전체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곤 와지로와 요시다는 ‘생활의 구성’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는데요,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추상 작업을 통해 오히려 생활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조에서 중력을 제거한 것이 구성. 그러한 의미에서 고현학을 직통으로 전개하는 것이 실은 무대와 영화미술이지 않나 싶습니다.
후지모리: 일반적으로 모노를 만든다는 것은 인간이 의도적으로 손을 움직인다는 것인데, 역시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의도한 것만으로는 표현에 진정한 깊이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계획도시의 거리가 재미없는 것도 그렇게 거대한 것을 모두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만들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것을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것은 브라질리아에 갔을 때입니다. 브라질리아는 오스카 니마이어(Oscar Niemeyer 1907~2012, 브라질의 건축가)와 루초 코스타(Lúcio Costa 1902~ 1998, 브라질의 건축가)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 스위스의 건축가)의 사고에 기초해서 만든 도시인데, 첫날은 엄청나게 감격했거든요. 그런데 다음 날 다시 한번 갔을 때는 정말로 어처구니없이 보지도 않고 돌아왔습니다(웃음). 즉 그곳은 한 사람의 머리로만 만들어졌어요. 그런데 사람의 생활이라는 것은 의도에서 벗어난 것들이 겹치고 겹치는 현장이고, 곤 와지로 등은 그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보통 사람이 거의 신경 쓰지 않는 것을 스케치한 것이고요. 아마도 영화나 무대장치에서도 설계한 사람의 의도를 어떻게 숨길 수 있는지가 중요하겠죠. 그들은 스케치 등을 통해 그러한 노력을 하며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왔다고 생각합니다.
모노의 문제에서 신의 문제로
나카타니: 그런데 후지모리 씨에게서 받은 감상의 글은 그다음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신’의 문제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후지모리: 인간은 성교하고 태어나고 죽고 또 이것을 끊임없이 반복합니다. 윤회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인데요, 이것은 기독교나 불교가 성립하기 이전 인류의 가장 오래된 세계관이자 인생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삶과 죽음의 순환은 땅과의 관계에서 생겨납니다. 나카자와 신이치(中沢新一) 식으로 말하면 수평적인 순환의 세계입니다. 이것은 곤 와지로의 민가연구에서 방 배치의 문제와도 관련되며,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네 개의 방 배치에서 객실 뒤의 침실 혹은 숨은 공간과 관련됩니다. 그곳은 곤 와지로도 썼듯이 창도 없고 캄캄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거기에 이불이나 돗자리 같은 것을 깔고 그 안에 기어들어 가서 잠을 자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민가의 경우는 아주 최근까지도 이렇게 살았고, 오래전에는 천황도 “누리고메(塗籠)”라고 불리는 작은 창고 같은 방에서 잤습니다. 게다가 나카타니 씨가 재밌는 부분이라고 언급한 것처럼 그곳에서 출산도 했으며 또 그곳을 죽음의 장소로도 이용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저는 바로 그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소학교 2학년 때까지 살았던 곳은 에도 시대에 만들어진 오래된 집으로 그 집의 불단 뒤편, 붙박이장 옆에 “오헤야(お部屋[방])”이라고 불리는―어째서인지 “오”를 붙여 말했습니다.―어두운 작은 방이 있었습니다. 보통은 절대로 들어가지 않는 그 방에서 출산이 이뤄지고 제가 태어난 것입니다. 이윽고 출산과 죽음은 현대 주택에서 제외되고 성교만이 남게 되었는데, 한때는 삶과 성교와 죽음이 모두 그 수수께끼의 캄캄한 방 안에서 행해졌습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조몬(縄文) 시대 5의 주택이 왜 마루를 깊이 팠을까의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보통은 추위에 대한 대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 깊게 파인 곳이 있습니다. 물론 시베리아 등지에서는 영구동토 밑까지 파 들어가지 않으면 살 수 없었겠지요. 하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예를 들어 가고시마현과 같이 비교적 온난한 장소에서도 미묘하게 파 들어갑니다. 어쩌면 숨은 공간과 마찬가지로 그것 또한 동굴과 같은 어두운 장소의 이미지를 갖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삶과 죽음의 순환적 세계가 땅속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것에서 구멍을 판 것이 아닌가, 나카타니 씨의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윽고 그 순환에서 벗어난 사상이 출현합니다. 수평적 순환 세계를 벗어나 하늘이라는 발상이 나타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에 대해 나카타니 씨는 인도네시아의 주거를 예로 들어 ‘새’라는 모티브의 문제와 함께 논합니다. 저는 거기에 태양의 문제를 덧붙이고자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일부 사람들은 태양의 문제를 확실히 인식했습니다. 아마도 신석기 시대 이후 농업을 시작한 것과 관련되어 있을 겁니다. 즉 자연의 혜택 속에서 수렵이나 채집을 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태양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지만, 농업을 시작하면 뿌린 씨앗이 자라는 것은 전적으로 태양 덕분이고 반대로 무언가 조금이라도 태양에 이변이 있으면 큰일이 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태양이야말로 지상의 다양한 자연의 수평 순환을 관할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한편 아시아와 같은 습윤 지대에 사는 사람들보다 태양을 더 많이 생각해야 하는 이들이 있다면 역시 유럽과 같은 건조지대의 사람들이겠죠. 그들은 흙과 물의 지상적・수평적 순환 세계와는 다른 절대적인 세계의 것으로서 태양을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게다가 태양은 똑바로 쳐다볼 수 없습니다. 태양이 존재하는 것은 알지만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절대신입니다.
수평적인 세계가 건축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 또 신석기 시대 이후 수직적인 신의 세계를 표현하는 건축―구체적으로는 신이 사는 곳인 신단―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 나카타니 씨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나카타니: 그렇군요. 저는 숨은 수납공간에 놓인 모노의 상태, 즉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 상태로 변모하는 인간을 “케모노(化モノ[귀신])” 6라는 관념으로 논한 적이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생각한 것이 영(靈)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인격이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사체는 “마른 자”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산 자가 인간 세계로부터 이탈해갈 때는 모노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모두가 그자를 공유하고 존경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령과 영의 차이입니다.
후지모리: 대표적인 마른 자는 뼈이지요.
나카타니: 맞습니다. 따라서 영이라는 추상이 확실히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유품이 뼈와 같이 뻣뻣하고 딱딱하며 구체적인 모노로 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케모노”의 끝판이 아닌가 합니다. 지금 후지모리 씨가 이야기한 것은 거기서 더 나아가 마른 자가 최종적으로 다다르는 곳이 하늘이라는 것이지요.
후지모리: 말라가며 빠져나가는 자가 있는 곳입니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는 하늘로 되돌아가는 자로서 ‘혼(魂)’과 땅으로 되돌아가는 자로서 ‘백(魄)’을 구별하는데, 수평적 세계에서는 마른 후에 빠져나간 영은 여전히 지상 부근에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다락에 있다고 하고, 일본의 신도(神道)에서는 산에 있다고 하며, 그보다 위로는 올라가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신이 사는 집의 문제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리하여 무언가가 쏙 빠져나간 순간을 건축이나 모노를 통해 좇을 필요가 있습니다.
나카타니: 지모(地母) 신앙의 세계에서는 음침한 움 속에서 삶과 죽음을 반복하지요. 그러다 병도 생기고 싫증이 나면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마루가 확장됩니다. 사체는 높은 마루의 “모가리야(殯屋)”에서 말라가고 뼈만 남게 되어 객체(object)로서 영이 되는데, 그때 ‘혼’의 부분―즉 어떤 씨앗의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곳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곳이 하늘입니다. 새가 영(靈)을 운반하고, 그 너머에는 태양이 있으며, 태양은 모노를 마르게 하는 매우 직접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알기 쉽게 정리하면 이와 같습니다. 그다음의 문제는 향후 과제로 꼭 고민해보겠습니다.
후지모리: 신의 문제와 관련해서 제가 『未来のコミューン[미래의 코뮌]』을 읽고 다시 한번 감탄한 것은 아돌프 로오스(Adolf Loos 1870~1933, 오스트리아의 건축가)의 「Ornament und Verbrechen(장식과 범죄)」(1908년) 논문을 떠올리게 한 때문입니다. 건축에서 장식을 제거하자는 20세기 주장의 시발점이 된 이론을 제공한 이 논문에 대해, 저 책은 새로운 이론을 제시합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그저 어떻게 ‘장식을 하지 말 것인가’뿐만 아니라 왜 ‘범죄’ 따위의 강한 단어를 사용했는가를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과격한 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거기에는 ‘원죄’라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나카타니 씨는 로오스의 장식론을 통해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즉 아담과 이브가 지혜의 사과를 나눠 먹고―요컨대 그것은 성교를 했다는 것이지요.―자신들이 나체인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잎사귀로 중요 부위를 가린다고 하는, 수치심의 문제를 가져와 로오스의 ‘장식과 범죄’를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해석을 처음 접해서 놀라울 따름입니다.
나카타니: 기독교의 원죄라는 것은 요컨대 자유의지와 부끄러움입니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여하간 위험한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그것과 대비될 정도로 중요한 위치에 부끄러움이 오는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유럽의 논의를 보면 부끄러움은 말하자면 인간이 커뮤니케이션(접촉)에 의해 태어난다는 것에서 생기는 감정으로서 문화 일반을 형태 짓는 원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모든 문화는 인류가 어떻게 서로 만나고 또 거리를 두는지에 대한 것이며, 그것을 위한 가장 비근한 수단이 복장이고 그것의 상징적 기능이 장식이라고 로오스는 말합니다.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저도 모르게 무화과 잎사귀로 제 몸은 가립니다. 그것이 바로 장식의 시원입니다. 장식은 기능적으로 아무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귀족이나 성직자의 복장도, 여자들의 드레스도 모두 부끄러움=무화과 잎사귀를 과잉으로 확장한 것입니다. 그 연장선에서 건축 장식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에 진정 그만두어야 하지만, 그러나 원죄인 한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후지모리: 그렇게 생각하면 로오스를 통해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것과 근대건축의 성립을 연결할 수 있겠네요.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유럽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근대건축의 성립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거의 거론된 것이 없습니다. 산업혁명으로 철과 유리와 콘크리트가 일반화되고 시민사회가 생겨났습니다. 산업혁명은 기능성에 기초한 합리적인 사상이라는 이론으로 설명될 뿐, 신과 관련해서는 거의 이야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그때까지 건축은―서두에 말했듯이 민가는 유럽에서 원래 건축가의 대상이 아니므로 여기서는 오로지 공공건축을 말합니다.―신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공공건축은 기본적으로 신단을 대신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무엇을 원리로 삼아야 하는지의 문제가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아마도 과학기술을 신으로 삼지 않았나 생각하는데, 그것을 유럽에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나카타니: 확실히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고 끝내버리면 건축을 추구하는 소실점이 사라지는 인상을 받습니다. 근대에서 신에 대항하는 것, 반기를 드는 것은 건축을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지만, 처음부터 어떤 신적인 것을 상정하지 않는 건축은 뭔가 건축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로오스의 원죄로서의 장식론과 유사한 구조가 어딘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후지모리: 로오스의 「장식과 범죄」가 신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그 속에서 건축의 사상과 근대사상사 일반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니체는 ‘신은 죽었다’는 것을 차라투스트라, 즉 조로아스터교의 입을 통해 말하게 합니다. 하필 조로아스터교인가 생각해보면 재밌습니다. 조로아스터교는 조장(鳥葬) 7을 합니다. 즉 새에게 사체를 먹임으로써 대지를 오염시키지 않고 혼을 하늘로 떠나보냅니다.―앞서 말했듯이 혼을 하늘로 ‘빼내는’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나카타니: 그렇군요. 거기까지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제가 플레이트 경계 지역의 주거문화를 고찰하는 여행 중에 이란에 갔을 때(『動く大地、住まいのかたち―プレート境界を旅する[움직이는 대지, 살아가는 모습―플레이트 경계를 여행하다]』岩波書店, 2017년), 조로아스터교의 매장장소로 유명한 야즈드 8에 있는 침묵의 탑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그 탑은 완전히 인공적인 것이 아니라 산 정상부를 개조한 것으로, 말하자면 화산암첨(火山岩尖, volcanic spine) 9의 꼭대기였습니다(그림 4). 다른 마을에 남아있는 풍장 장소의 흔적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현재 이란 당국은 표면상으로는 조장이나 풍장을 금지하고 있지만, 어쩌면 아직 행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고 느꼈습니다. 배화교(拜火敎) 10의 원래 매장장소가 대지로부터 분출한 용암 덩어리의 정상부라는 것을 보고 다시금 놀랐습니다. 그 위에서 영혼이 하늘로 날아 올라간다는 것을 그들은 강렬하게 느꼈을 겁니다.
* * *
곤 와지로의 고현학에 대해 고찰하면서 드디어 본래 의미의 고고학적인 영역을 다루었고 마지막에는 신의 문제까지 거론하는, 매우 큰 스케일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고현학적 사유의 놀라운 광활함을 맛보았습니다.
나카타니: 고현학의 광범위함에 대해서는 부족하나마 논할 수 있었습니다. 이 논의에 기반해서 수직적인 구조에서 모노의 위상이라는 부분까지 논할 수 있어서 매우 좋았습니다.
후지모리: 곤 와지로가 어디까지 명확하게 생각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러나 수직의 문제에 접근하는 단서는 확실히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현대 사회의 거의 모든 모노, 곧 “상품”입니다. 조형이나 장식의 문제에 가장 민감한 이들도 상품―특히 패션―에 몸담은 사람들입니다. 건축가는 이에 대해 둔감해지고 있지요(웃음). 이것은 로오스의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곤 와지로가 지금을 생각해본다면, 패션을 비롯한 상품 혹은 그것을 파는 상점 등을 주목했겠지요. 그것들을 둘러싼 사고를 곤 와지로의 고현학이 계속해서 자극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나카타니: 지금 이야기를 듣고 갑자기 떠오른 것인데요, 곤 와지로와 요시다 켄키치가 지금 살아있다면 아마도 타투를 조사하지 않았을까요? 로오스는 타투를 가장 야만적인 장식으로서 치부했지만, 타투가 이렇게까지 대중화되리라 생각 못 했겠죠. 게다가 지금 타투는 추상적인 문양보다 매우 키치해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부끄러움의 각인을 자신의 몸에 그려 넣는 것이 왜 지금까지 대중화되고 있는지, 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고현학적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후지모리 데루노부 건축사/건축가
나카타니 노리히토 건축사/생환경구축사
2019년 5월 13일, 에도도쿄박물관에서
「あたかも数千年後のまなざして」 『現代思想』 47(9): 8-20, 2019년 7월 1일.
- 모노(モノ)는 物의 일본어 훈독 표기로서, 이 글에서는 사물 일반이라기보다 특히 인공물(artifact)을 가리킨다. 모노에는 또한 일본문화의 광범위한 용례가 함축되어 있으므로 우리말로 번역하지 않고 음차표기하기로 한다. [본문으로]
- ‘마치야(町家)’는 민가의 일종으로 상점이 딸린 도시형 주택을 가리킨다. 큰길 양쪽으로 집들이 일렬로 늘어선 점이 특징이다. 에도 시대에 형성되었고, 메이지 시대 이후 상인들이 자본을 축적하면서 건물이 크고 화려해졌고, 그에 따라 특유의 마치야 거리 풍경이 조성되었다. [본문으로]
- ‘시치미를 떼다’라는 뜻의 일본어가 “포켓토호우케루(ポケーっと呆ける)”라고 해서 에포케와 발음이 비슷하다. [본문으로]
- 혼죠후카카와(本所深川)는 도쿄도 스미다구(東京都墨田区)의 남쪽 절반을 가리키는 지역명으로 에도 및 도쿄의 변두리 지역 중 하나였다. [본문으로]
- 조몬 시대는 일본의 신석기 시대를 가리킨다. 보통 기원전 13000년부터 300년까지에 해당한다. 이 시기의 주요한 특징으로는 벼농사를 시작했으며 각지에 ‘쿠니’(国)가 생겨난 것이다. [본문으로]
- 일본어로 ‘귀신’을 뜻하는 ‘오바케(お化け)’ 혹은 ‘바케모노(化け物)’를 변형하여 만들어낸 조어다. [본문으로]
- 사체를 산꼭대기 등에 가져다 놓고 매 따위의 새가 사체를 파먹게 하는 장례 유형을 말한다. [본문으로]
- 이란 중부에 위치한 야즈드 주의 주요 도시이다. [본문으로]
- 화산활동의 마지막 단계에서 솟은 용암이 그 자리에 굳어버린 상태로 만들어진 용암 기둥을 말한다. [본문으로]
- 조로아스터교처럼 불을 숭상하는 종교 일반을 통칭하는 용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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