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성

 

콘도 히로시(近藤宏)

 

키워드: 통약불가능성, 이방인적 개념, 민족지 이론, 비교, 다문화주의

 

 

인류학이라는 학지(學知)는 궁지에 몰렸다. 무엇보다 주요한 분석 개념을 철학에 기대는 상황이 연출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 진단 하에 2011민족지적 이론을 위한 학술지로서 하우(HAU)가 창간되었다. 이 잡지를 발기한 데이비드 그레이버와 지오바니 다 콜(Giovani da Col)에 따르면 현재 인류학은 초창기 인류학과 역전의 관계에 있다. 즉 토템, 포틀래치, 터부 등 현지의 여러 개념들이 타 분야에 영향을 준 시대는 이미 끝났다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오늘날의 인류학이 놓인 상황을 만들어낸 요인 중 하나는 다음의 딜레마에 있다.

초창기와 비교하면 서구의 권위가 추락한 한편으로 서구 외의 세계를 둘러싼 지()가 더욱더 복잡해지고 있다. 그러한 상황 하에서 전개된 1980년대 인류학의 자기비판은 기존의 모든 인류학이 서구중심적인 것임을 자각조차 못했다는 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적인 논의 틀이 철학으로 옮겨갔다. 이 속에서 서구의 개념사를 거슬러 검토하는 비판 작업이 전개되었고 서구 외의 개념들이 비판의 도구로 활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현대의 민족지가 [기존 인류학을 포함한 서구사상 전반에] 비판적이기 때문에 민족지적 사상(事象)[기존 인류학의] 기술분석 개념에 의거하면 의거할수록 그 개념적 의의가 인정되지 않는 대상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는 역설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타개를 염두에 두면서 하우에서는 모든 민족지적 통찰의 이론적 잠세력(潛勢力)을 받아들일 것을 호소하였다. 그들이 제창하는 민족지 이론에서 이방인적 개념’(stranger-concept)은 이형동의어(異型同義語)를 스스로 민족지에서 찾아내는 방식으로 이해되며 그렇게 찾아낸 이형동의어가 각기 다른 세계들 간에 조화를 이루기보다 동형이의어(同型異義語)처럼 이해되는 것에 무게를 둔다. 같은 용어들 사이에서 틈이 생기도록 사고를 놓아두어야 기존의 개념과 이해를 변화시킬 수 있는 비판의 여지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나아가 타자성을 비판적 사고와 연결시키는 사고의 전개를 호소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학술지가 조직 가능했던 현실이 보여주듯이, 타자성을 비판적 사고와 연결시키려는 사고가 인류학에 부재했던 것은 아니다. 하우의 창간 이전부터 현대 인류학에서 타자성이라는 논점의 중요성은 계속해서 부각되어왔다. 실제로 그레이버 등은 민족지 이론의 재구축을 목표로 하는 움직임이 단일한 이름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개별적으로 있어왔다고 말한다. 그중 하나가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의 착오의 논의를 들 수 있다. 인류학이라는 지()를 활성화하기 위해 타자성에 다시금 주목한다는 점은 잡지명 및 그 특유의 논조에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하우는 마오리족의 개념으로 마르셀 모스는 증여론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하우에서는 인류학/민족지의 고전적 논고가 재록되고 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민족지란 쓰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읽히는 것이라는 이해일 것이다. 물론 독해는 기술에 의해 대상을 표상하는 저자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사고를 촉발시키는 이방인적 개념그리고 그것들을 만들어내는 사람의 영위에 달려있다.

2001년에 인류학연보(Annual Review of Anthropology)에 게재된 엘리자베스 포비넬리(Elizabeth Povineli)의 논문 주제는 근원적 타자성이다. 이 주제는 자유주의 사회에서 통약가능성이라는 문제를 둘러싼 쟁점을 다룬다. 우선 포비넬리는 각기 다른 해석이나 의견이 통양가능한 방식에 의해 어떻게 이론화되고 있는가를 묻기 위해 언어인류학의 성과를 가져온다. 겉으로 보기에는 순수하게 언어학으로 생각되는 문법언어적인 문제라고 해도 사회관계의 권력성을 띤다. 그 권력관계에 의해 문제 그 자체가 규정될 수 있음을 언급하면서 포비넬리는 자유주의 철학에 기초한 사회적인 통약가능성을 만들어내는 문법논의를 문제화한다. 이 논의에서 통약가능성은 한쪽 세계로 다른 쪽 세계가 합쳐지도록 한쪽 세계가 다른 쪽 세계를 교정하는 가능성에 다름 아니다. 다문화주의에서 승인또한 그 하나로 말할 수 있다. 동시대에서 목격되는 통약가능성에는 이러한 한계가 있다. 여기서 타자성을 둘러싼 인류학적 연구인도 뭄바이의 노숙자들, 기독교원리주의자들과 이슬람원리주의자들, 퀴어 활동가들, 브라질의 선주민권리활동가 등에 관한 인류학이 참조되고 있다가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근원적 세계와 마주하기 위해서는 교정의 가능성을 은폐시키는 통약가능성과도 비판적으로 마주할 필요성이 있다. 타자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대상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휘감는 상황, 어쩌면 우리도 그 일부일 수 있는 상황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비넬리는 근원적 타자성이라는 논점을 자유주의가 확장하는 20세기 말의 동시대적 상황에서 찾아내었지만 이것은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에게도 다른 맥락에서 문제시된다. 카스트루가 논한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 또한 다문화주의 비판의 성격을 갖는다. 20세기 말에 이르러 비판적인 사고를 이끌어내기 위해 다문화주의적인 승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타자성을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통약불가능성이라는 논점은 하우창간호 서문에서도 언급되었다. ‘민족지적 이론이 찾아내려는 것은 필드에서 바로 이해될 수 없는 과잉민족지적 번역이다. 그 번역은 통약불가능성과 관계가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낭만주의적으로 문화적 통약불가능성을 말할 것도 아니다. 오히려 언어학적 통약불가능성을 받아들인 번역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 통약불가능성을 받아들임으로써 비교불가능성이 아니라 생성중인 비교가능성의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통약불가능성의 교정의 연장선상에 있는 타자성에 대한 태도와는 결정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러나 타자성에 대한 감수성은 여전히 현대인류학의 민족지 이론에 스며들어 있다. 예를 들어 그레이버는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 등으로 대표되는 존재론적 전회를 비판하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어떤 현실에 대해 (적어도 부분적으로) 통약 불가능한 이론적 퍼스펙티브가 다양성을 풍부하게 전개시킨다는 점에서 가치를 두지만, 실재가 그것들 중 어느 것에도 포위되지는 않는다고 믿고 있다”(Graeber 2015: 31). 그레이버에게 근원적 타자성이란 완전하게 파악되지 않는 실재이며 논의의 사정 밖에 머물러 있다. 한편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의 논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산 하게(Ghassan Hage)는 근원적 타자성을 통해 비판적 인류학을 논하고 있다. 하게는 타자성이라는 가능성에 우리를 내놓음으로써 우리의 삶에 힘을 창출시키고 타자성을 우리 세계에 빙의시키는 것이 현대적인 인류학 비판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는 교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을 타자성에 기대하고 있다.

루카스 베시레(Lucas Bessire)는 남미파라과이의 선주민이 직면한 외부사회와의 접촉상황 하에서 존재론적 타자성, 즉 통약불가능성에 주목하는 논의는 현실비판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한편으로 마리오 블라세(Mario Blaser)와 마리솔 데 라 카데나(Marisol de la Cadena) 등은 자원개발과 환경보존이라는 현대적인 상황을 문제화하기 위해서는 근원적 타자성이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통약불가능성을 받아들인다면, 그것과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 현대인류학이 직면한 이 질문에 과연 일반화할 수 있는 해답이 있을까? 인류학이 설정하는 상황은 더욱더 복잡해지고 있다. 그 상황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사고, 그 속에서 생기는 타자성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상황에 대한 이해와 판단, 진단이 요구되어야 한다. 각각의 상황에 대한 진단과 함께 타자성을 사고한다면 그 속에는 다각적인 독해가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통약불가능성으로 향해갈 것인가? 마주하는 각각의 방식은 무엇을 고려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 속에서 축적된 논의와 대화를 병행함으로써 인류학은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Bessire, Lucas (2015) Behold the Black Caiman: A Chronicle of Ayoreo Life. The Chicago University Press.

Blaser, Mario (2010) Storytelling Globalization from the Chaco and Beyond. Duke University Press.

de la Cadena, Marisol (2015) Earth Beings: Ecologies of Practice across Andean Worlds. Duke University Press.

Greaber, David (2015) “Radical alterity is just another way of saying “reality”: A reply to Eduardo Viveiros de Castro”, HAU: Journal of Ethnographic Theory 5(2): 1-41.

Greaber, David and Giovani da Col (2011) “Foreward: The return of ethnographic theory’, HAU: Journal of Ethnographic Theory1: -XXXV.

Hage, Ghassan (2015) Alter-Politics: Critical Anthropology and the Radical Imagination. Melbourne University Press.

Povineli, Elizabeth (2011) “Radical worlds: the anthropology of incommensurability and inconceivability”, Annual Review of Anthropology 30: 319-334.

Viveiros de Castro, Eduardo (2016) The relative native. Hau book.

 

 

 

 

Lexicon 現代人類学5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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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식_콘도 히로시

번역글 2018. 7. 17. 14:05

포식 

콘도 히로시(近藤宏)

 

 

키워드: 폭력, 인척, 아마존, 정체성, 네이션

 

포식. 동물행동을 생각나게 하는 이 말을 인류학 용어로 다룬 논의는 다음의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아르준 아파두라이의 글로벌리제이션 론에서 정체성 개념으로서의 포식성이다. 또 하나는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 이후의 아마존 민족지학에서 관계개념으로서의 포식이다.

먼저 아파두라이 논의를 살펴보자. “집단이 자신의 정체성을 사회적으로 구축하고 또 그것을 동원하기 위해 그 자신에 근접하는 다른 사회적 범주를 말소해야 하는 정체성을 아파두라이는 포식성 정체성이라고 불렀다. 그 전형적인 예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나치즘인데, 인도에서 힌두교도가 이슬람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할 때에도 이와 동일한 타입의 정체성을 드러내었다고 그는 말한다. 후자의 경우 무슬림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면서 그 카테고리의 섬멸을 통해 자기 획정한다는 것이다.

아파두라이에 따르면, 이러한 정체성은 메이저리티 집단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메이저리티와 네이션이 집단적으로 일치하지 않을 때 불확실성의 불안을 메이저리티가 품는 경우가 생긴다. 마이너리티에 대한 공포라는 감정이 양성되면 그 사회적 카테고리를 말소하는 폭력을 긍정하면서 자기획정이 이뤄진다. 이 논의에서 포식이 의미하는 바는 섬멸의 역능이다.

아파두라이는 이러한 포식성을 불러들이는 조건을 소수자를 본질적 마이너리티집단으로 규정하는 것에서 찾는다. 마이너리티가 본질적으로 메이저리티로부터 구별된 집단이 된다는 것은 자기 동질적인 메이저리티로부터 계속해서 배제되어 잠재적인 위협이 된다는 뜻이다. 아울러 메이저리티 또한 자신의 특성을 본질화 한다. 아파두라이는 지배자집단이 수적으로 소수이면서 열등집단의 섬멸을 지향하는 사례가 역사적으로 종종 등장한다는 것을 의식하지만 수적으로 많고 적음이 절대적인 지표는 아니다. 오히려 국가적 사회 속에서 네이션이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집단과 선을 긋는 것이야말로 포식성 정체성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이 정체성 논의는 현대사회를 대상화하는 하나의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존 민족지에서 포식의 개념은 아파두라이 논의와는 대조적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아마존의 특유의 관계를 개념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전개된 논의의 성과를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인간과 신, 친구와 적, 친지와 외부자 등 대립물 간의 이음새로서 남미의 선주민이 생각하는 인척의 개념에 대한 비판적 분석에 기초하여, 브라질의 동업자들은 포식의 형이상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이끌어낸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레비스트로스 2000: 719). 즉 포식이란 인척이라는 고전적인 친족관계의 개념과 연결된다.

아마존에서 인척이란 혼인에 의해 결합된 관계만을 뜻하지 않는다. 인척이라는 개념은 혼인으로부터 해방된 형태로 관계성을 사고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으며, 죽은 자, , 동물, 신 등의 타자성을 띤 모든 존재 사이에서 생기는 관계까지 지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라우에테족에서는 티와라는 인척을 가리키는 말이 알게 모르게 백인, 친구 등 아직 인척관계가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그 가능성이 있는 자들까지 포괄한다. 나아가 죽인 적이나 신 등을 지시하는 경우에도 같은 말을 사용한다.

실제로 아마존에서는 혼인이 발생하게 되면 양의적인 상태에 있는 인물과의 관계는 혈연성을 띠게 된다. 아마존에서 혈연이란 생활을 공유함으로써 깊어지는 관계성, 즉 구축되는 것이다. 혼인에 의해 연결된 인척과의 관계는 혈연성을 점차 강화해간다. 이에 반해 순수한 인척이란 혼인에 의해 관계하지 않는 인격 사이에서 생긴다. 이에 따라 인척이란 외부성 혹은 타자성과의 관계이며 구축성과 연결되는 혈연성에 앞서서 소여로 주어지는 관계성이다. 다만 앞서 서술했듯이 그 타자가 반드시 인간적인 타자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인간적인 존재도 타자성을 띤 존재이므로 그것과의 또한 인척성을 띨 수 있다.

이러한 아마존적인 인척관계는 위험이나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오히려 타자성을 띠는 존재와의 관계는 사냥, 전쟁, 수렵, 카니발리즘 등의 활동과 친화적이다. 앞서 인용한 레비스트로스의 글처럼 바로 이것이 아마존적 포식의 특징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포식이란 단지 폭력의 대상으로서 타자성을 띤 존재의 위치를 매기는 관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타자성을 띤 존재와의 관계에는 외부의 내화라고 할 수 있는 사상(事象)이 수반된다. 히바로족의 수렵이나 투피남바족의 전쟁에서 적의 타자성을 자신에게 도입함으로써 자시변용이 일어난다. 아라우에테족에서 전자는 죽인 적의 시점에서 바라본 세계를 노래하며 그 노래를 통해 전사로서의 새로운 자기가 된다. 그 속에서 죽인 자는 적이라는 타자로의 변성을 이뤄낸다. 즉 위험한 타자로부터의 작용에 의해 자기가 생겨나는 것이다. 요컨대 불가결한 타자와의 관계성이 포식이다.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는 이러한 타자와의 관계의 특징을 타자의 절대적 필요성혹은 타자 없는 세계의 사고불가능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카스트루 2015b).

이 점에서 아마존적 포식관계는 아파두라이가 정체성이 기술하는 포식성의 정체성과는 정반대에 놓인다. 즉 아마존적 포식이란 스스로를 규정하는 데에 불가결한 타자성 그 자체와의 관계성이며 타자 없는 세계를 지향하지 않는다.

 

이 외에도 이 두 논의에서 포식이 의미하는 바의 차이는 몇 가지가 더 있다. 아파두라이의 논의에서 네이션과 그 타자를 둘러싼 사회적 카테고리의 문제와 연결된 포식성에서 타자는 섬멸 가능한 것으로 상상되며, 포식성의 정체성 속에서 자기 획정할 수 있는 집단은 섬멸이라는 행위의 동작주의 입장에 고정된다. 이 상상력의 기제 속에서 죽임을 당한 후의 타자를 위한 장소는 없다. 반면 아마존의 포식에서는 죽임을 당한 자와의 사이에서 생기는 관계가 문제시된다. 적의 시점이야말로 자기를 구성한다고 할 때 자기는 적으로부터 작용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성립될 수 있다. 에두아르도 콘은 송곳니가 육지거북이의 등껍질에 꽂혀 부서져서 더 이상 포식할 수 없게 되어 죽어버린 재규어가 썩은 고기를 좋아하는 육지거북이에 의해 포식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콘이 사냥을 통해 그려낸 포식성처럼, 아마존적 포식에서 드러난 관계성의 두 입장은 그 관계에 의해 연결된 이항 사이에서 쉽게 반전된다. 즉 동작주의 입장이 특정한 존재에 고정되지 않는 관계성이 아마존적 포식성의 관계성이다(2011).

동일한 용어를 둘러싼 두 논의의 차이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우선 포스트콜로니얼리즘과 존재론적 전회라는 인류학의 논의 흐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여기에는 포식이라는 용어의 다양성, 그 동형이의(同型異義)적인 어긋남 또한 볼 수 있다. 현대인류학에서 포식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크게 다른 두 세계를 연결해준다. 타자와의 폭력성을 띠는 관계성을 둘러싼 각기 다른 상상력의 연결을 받아들임으로써, “적이란 섬멸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적에 의해 우리는 상처 입어서는 안된다라고, 행위의 능력을 본질화하면서 자기 획정하는 네이션의 상상력 바로 옆에는 적을 통해야 비로소 우리가 변한다라며 타자와의 관계성을 찾아내는 아마존의 포식성이 있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처럼 이방인적 개념을 의식하면서 포식이라는 용어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는 세계를 떠올려봄으로써 타자와의 폭력성을 띠는 관계성이 네이션이 상상하는 모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는 않을까?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박이대승박수경 역) 식인의 형이상학, 후마니타스, 2018.

아라준 아파두라이(장희권 역) 소수에 대한 두려움: 분노의 지리학, 에코리브르, 2011.

에두아르도 콘(차은정 역) 숲은 생각한다, 사월의 책, 2018.

Lévi-Strauss, Claude (2000) “Postface”, L’Homme: 154-55.

 

 

 

Lexicon 現代人類学8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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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종민족지(multispecies ethnography)

 

오쿠노 가츠미(奥野克巳)

 

키워드: 복수종, 함께 살다, 반려종, 종들간의 관계성, 뒤엉킴

 

인류학은 새로운 세기에 진입한 이래 문화표상을 둘러싼 논의로부터 동식물과 사물 등을 포함한 자연과 인간이 뒤엉켜서 살아가는 세계에 관한 학문으로 그 연구 방향을 전환시키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작금의 인류학은 인간만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너머에서 인간을 말하는 학문으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한 흐름의 중심에 있는 것들 중 하나가 이종들 간의 창발적인 만남을 다루면서 인류학을 인간 너머의 영역으로 확장시키려는 다종민족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동물을 사고하기에 적당하다고 파악한 것에 대해, 마빈 해리스는 먹기에 적당하다고 파악했다. 그러나 동물을 포함한 그 밖의 생물종은 인간에게 단지 상징적 혹은 물질주의적인 관심대상만이 아니다. 타종(他種)은 인간 및 다른 생물종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뒤엉켜 살아왔다. 도나 해러웨이가 착목했듯이 동물을 비롯한 다른 생물종들은 인간에게 함께 살아가는존재이기도 하다. 이 아이디어는 해러웨이의 반려종에 유래한다. 해러웨이는 반려종 선언에서 의미 있는 타자성을 새롭게 파악하면서 다른 생물종들과의 공생과 협동의 윤리의 존재방식을 탐구했다. 다종민족지는 복수종의 만남을 다룸으로써, 인간만을 주체로 인정하고 아프리오리에 인간존재를 설정하는 기존 인류학의 개념적 틀을 재검토하며 인류학에 내포된 인간중심주의적인 경향에 도전하고자 한다.

로라 오그던(Laura Ogden 2013) 등에 따르면, “다종민족지란 행위주체인 존재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아상블라주(assemblage)의 내부에서 생명의 창발을 통한 민족지 조사 및 기술이다. 그것은 서구중심주의적인 특유의 인간상을 탈중심화로 향하는 포스트휴머니즘의 흐름에 위치하는 새로운 학문적 장르이다. 톰 반 두렝(Thom Van Dooren 2010)에 의하면 다종인류학은 타종을 단순한 상징, 자원, 인간 생활의 배경으로 간주하는 것을 넘어서서 종들 간 및 복수종들 간에 구성되는 경험세계, 존재양식, 그 외의 생물종의 생물문화적 조건에 관한 두터운 기술을 목표로 한다.

이 글에서는 다종민족지의 몇 가지 사례를 다뤄보겠다. 우선 절멸의 위기에 놓인 독수리의 고통에 관한 톰 반 두레의 연구를 소개한다. 인도에서는 연간 수백만 마리의 소가 죽는다. 그 소들은 신성시되기 때문에 사람이 먹지 않는다. 소가 죽으면 유체처리장으로 운반된다. 그것을 30분만에 깨끗이 먹어치우는 것이 독수리다. 그러나 오늘날 독수리는 소를 먹으면 죽게 된다는 역설적 상황에 놓여 있다. 빈곤층이 소와 일을 하기 위해 우족의 질병, 유선증, 출산곤란 등에 대한 처치로 비 스테로이드계의 값싼 항생제인 디클로페낙(diclofenac)을 소에게 투여한다. 그 약이 독수리에게 신장병을 일으키기 때문에 소를 먹은 독수리는 고통 속에서 죽는 것이다. 인도에서는 현재 소를 먹는 독수리가 감소하는 대신 소를 먹는 개가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개는 독수리처럼 짧은 시간에 남김없이 동물의 사체를 먹어치우지 못한다. 또 그 부작용으로 개가 사람을 습격하고 광견병에 걸리는 일이 잦다. 독수리가 없으면 인간과 동물의 건강에 심각한 해가 올 수 있다. 개체란 관계론적인 존재이다. 그렇다면 삶과 죽음을 포함한 복수종의 맥락에서 타자인 독수리가 느끼는 고통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어떤 종이 멸종하면 많은 유기체가 의존하는 상호작용 또한 사라지게 되므로 복수종의 뒤엉킴은 중요하다. 반 두렝에 의하면 독수리의 고통은 모든 생명이 얽혀있는 뒤엉킴 속에서 증폭된다.

함께 살아가는것의 기초는 해러웨이가 강조하는 사랑만이 아니다. 다종민족지는 나방이나 진드기 등을 포함한 혐오스러운 것들’(해충이나 유해동물)까지 시야에 넣는다. 데보라 버드 로즈(Debora Bird Rose 2011)에 따르면 오스트레일리아의 과수원 경영자에게 큰박쥐는 유해동물이다. 역으로 큰박쥐의 식재료였던 원시림을 인간이 벌채해서 큰박쥐가 먹을 것이 없어지자 큰박쥐는 어쩔 수 없이 과수원을 습격하게 되었다. 과수원에서는 전기울타리를 설치해서 큰박쥐 무리가 식재료를 구하러 과수원으로 날아올 때 전기울타리에 감전시켜 큰박쥐의 목숨을 끊어놓는다. 큰박쥐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굶어죽던지 전기충격이라는 죽음의 블랙홀에 빠지던지 둘 중 하나다. 큰박쥐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독성이 강한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복수종의 네트워크에서 그것은 더욱 나쁜놈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로즈는 말한다.

다종민족지의 리더격인 아나 칭에 의하면, 소나무, 송이버섯, 균근균, 농가는 서로 얽히면서 생존가능성을 만들어내고 있다. 메마른 땅에서 소나무와 송이버섯이 공존하며, 그 속에서 균근균이 키워낸 것이 송이버섯이다. 인간은 땔감이나 비료를 구하기 위해 소나무 숲으로 들어간다. 이로 인해 소나무 숲은 유지될 수 있고 소나무로서는 적당히 교란된 상황이 만들어지게 된다. 소나무, 균근균, 농가 사람들이라는 우연한 만남에 의해 송이버섯이 자라난다. 칭은 여기서 인간과 자연이 복수로 얽혀 있으며 의존하는 다종적인 관계를 고찰한다. 칭은 인간의 자연은 종들 간의 관계성에 있다.”라고 말한다. 이 아이디어는 앞서 말한 해러웨이의 반려종 개념과 함께 다종민족지의 핵심 개념이기도 하다.

다종민족지의 기본은 민족지 기술 및 조사이지만, 그 조사는 특정 장소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지는 문화인류학의 장기조사에 얽매이지 않는다. 복수의 장소에서 행해지는 다종민족지인 경우도 많다. 또 다종민족지는 바이오아트나 예술실천 등과도 관계가 깊다. 2008년의 아메리카인류학회의 연례대회의 하나로 개체된 다종 살롱이 그것을 웅변한다. ‘바이러스와 사이 좋아지려는 시도라는 제목 하에서 C형간염에 감염된 예술가의 혈액을 그것에서 아무 해를 입지 않는 민들레에게 주고 예술가는 민들레 뿌리를 약으로 섭취하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이 점에서 다종민족지를 주창하는 에덴 커크시(Eden Kirksey 2014)의 논고가 문화연구의 거점인 학술잡지에 게재된 일은 새삼스럽지 않다.

다종민족지는 또한 최근 발흥하고 있는 환경인문학내에도 자리하고 있다. 환경인문학은 1970년대에 등장한 환경철학, 1980년대의 환경사, 1990년대의 에코크리티시즘 등의 학문을 토대로 발전해온, 환경을 둘러싼 새로운 학제적 영역이다. 우르술라 하이즈(Ursula K. Heise)는 최근 환경인문학의 인류세를 둘러싼 논의에서 다종민족지는 생산적인 장르이며 탈인간중심주의를 시야에 넣은 분야라고 평가하였다. “인류학자들은 인류학에서 이제까지 연구대상으로 삼아온 인간사회를 복수종에 의해 구성되는 코뮤니티로서 다루고자 한다. 복수종에는 예를 들어 인간의 위장에 사는 미생물, 감염증을 일으키는 바이러스, 식용으로 재배되는 식물, 식용동물이나 애완용 동물 등이 포함된다.”

 

Kerksey, Eden (2014) The Multispecies Salon. Duke University Press.

Ogeden, L., Hall, B., & Tanita, K (2013) "Animals, Plants, People, and Things: A Review of Multispecies Ethnography", Environment and Society: Advances in Research 40(1): 5-14.

Rose, Deborah Bird (2011) "Flying Fox: Kin, Keystone, Kontaminant", Australian Humanities Review 50: 119-136.

Tsing, A. (2015) 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 On the Possibiling of Life in Capitalist Ruins. Prinston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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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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