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콜라는 서구의 철학에 대응하는 것이 비서구의 인류학이라고 했다. 달리 말하면 비서구의 인류학이 하는 것을 서구의 철학이 한다. 전회(turn), 그것이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의 전회이든, 칸트의 상관주의 혹은 구축주의를 넘어서는 사변적 실재론 혹은 신실재론으로의 전회이든, 그러한 철학이나 인류학에서 하는 이론적 실천은 비홀리즘적 사고로 나아가는 방향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 비홀리즘적 사고를 넘어서 다원적 사고를 찾아가려 하는지의 답은 이미 우리의 삶에서 충분히 감지되고 있기 때문에 말할 필요가 없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 전회라는 이론적 흐름이 우리가 충분히 감지하고 있는 그것을 우리 자신이 드러낼 수 있도록 앎의 힘으로 발휘되는지이다. 그것은 아마도 어떤 현실에 저항하고 그것을 밀어내는 힘이 되지 않을까 한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지난 2018년 일본에서 다음의 학술강연뿐만 아니라 대중강연을 수차례 행했다. 그 주제는 욕망의 시대를 철학한다였다. (이를 인류학적으로 표현하면 '카니발의 시대를 인류학한다'가 되지 않을까..?) 욕망 그 자체를 철학으로 대체하는 것, 아니면 욕망을 철학으로 전회하게 하는 것, 나는 그의 철학이 욕망을 끝까지 밀어붙이기를 응원하고 기대한다.

 

 

 

우주ㆍ세계ㆍ실재

 

 

마르쿠스 가브리엘(Markus Gabriel)

 

 

크게 두 가지를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는 네가티브한 것,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 진실에 관한 것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뒤에 이야기할 포지티브한 것입니다.

 

노무라 교수의 그림에 저는 철학적으로도 공감합니다. 저는 이것을 초우주’(hyperverse)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초우주는 복수의 우주 시스템을 가리키며, 또한 철학적이며 이론적인 우주로서 그와 같은 형태를 띠고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왜 우연이 아닌지는 알지 못합니다. 아직은 억측의 성을 빠져나오지 못한 사고방식일 테지만, 이러한 우연의 일치가 보이는 것 자체는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 다중우주론의 전문가가 오셔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네가티브한 것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왜 네가티브라고 하는지는 곧 알 수 있습니다.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야기하기 전에, 세계란 무엇이며 존재란 무엇에 대한 것인지를 이야기하겠습니다. not, 그러니까 부정형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테지만, 부정형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이러한 화제(話題) 자체가 트리키(tricky)한 것이며, ‘그렇지 않다고 부정될 때에 부정형이 사용되기까지를 논하는 것입니다. 그 밖에 세계란 무엇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철학자가 세계를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계란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세계란 모든 것입니다. 세계란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많은 철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이론은 매우 단순합니다. XX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이다, 나는 나, 도쿄는 도쿄, 글루온(gluon)은 글루온 등등. 그렇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사고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 말은 맞을까요? 틀릴까요? 틀릴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 자체와 동일하지 않다면불교는 모든 것이 그 자체와 동일하다고 사고하기도 하지만, 절대적으로 모든 것이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절대적으로 모든 것이라고 할 때 당신이 생각하는 대상은 세계입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이렇게 파고들어야 철학자가 왜 그러한 사고방식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이해해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3천 년 전 그리스나 중국이나 인도 등 다양한 장소에서 철학자가 이러한 사고방식을 발명하지 않았다면, 현대 과학은 없었을 겁니다. 다시 말해 현대 과학은 이러한 철학적인 사고실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도쿄는 일본에 있습니다. 일본은 지구 위에 있습니다. 지구는 태양계 속에 있습니다. 태양계는 하늘 위 은하수 속에 있습니다. 은하수는 은하단 속에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상한에 도달합니다. 우주(universe), 초우주(hyperverse), 그리고 그 상한에 도달한 곳이 세계라고 한다면, 세계를 정의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세계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세계는 전체입니다. 블랙홀 등의 hole(구멍)이 아니라 whole(전체) 말입니다. 즉 모든 것이 그의 일부인 전체, 그것이 세계의 정의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대체 어떤 것일까요? 후보가 셋 있습니다. 앞으로 이야기할 세 번째의 것이 베스트라고 설명하려 합니다. 실은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논하는 이론에서 따지고 들면, 세계는 존재하지 않게 되지만.

 

첫 번째의 사고방식, 이것은 매우 나이브한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세계는 대상물이 가득 모인 총체로서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세계를 용기로 봅니다. 세계는 용기이므로 그 용기 안에 많은 것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제 손도 그 안에 있으며, 도쿄의 지하철도 그 안에 있습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은 매우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이 강연장 밖에 있다 해도 강연장 안에는 가구가 있다는 식입니다. 이렇듯 세계란 사고와는 독립적인 대상의 총체가 됩니다. 가구가 강연장 안에 있듯이, 다양한 것들이 세계 안에 있습니다. 내지는 쿼크, 글루온, 렙톤(lepton), 뭐든지 좋습니다. 그러한 모든 대상이 모여 있는 것이 세계라고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정말로 그러한 총체라는 것이 있을까요? 지금 제 손안에 대상이 있냐고 하면, 한 자루의 펜이 있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로 세는 것일까요? 둘로 셀 수도 있는데 말이죠. 혹은 물리학자라면 어떤 스케일이나 척도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고 말할 겁니다. 매우 작은 스케일에서 보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대상이 있습니다. 양자의 수준에서 보면 펜이라는 동일성 있는 하나가 사라지고 맙니다. 원자ㆍ분자의 수준에서 보면 매우 큰 수가 나옵니다. 하나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저는 대체 몇 개의 대상을 손에 쥐고 있을까요?

 

이론과 독립적으로 이 물음에 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단일한 사고에서 독립한 대상의 총체라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신은 존재하지 않지만, 가령 기독교의 신이 있다고 해봅시다. 기독교의 신이라 해도 '대상의 총체, 모든 대상이 모인 것은 무엇일까?'라는 것에는 답할 수 없습니다. 신조차 무언가의 판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판단이라는 사고로부터 독립적으로 답할 수 없습니다. 세지 못하면서[이를테면 손안의 대상이 하나인지 둘인지 혹은 무수히 많은지 판단하지 않으면서], 하나하나를 개별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계가 존재한다고 할 때 그것은 대상의 총체일 수 없습니다. 대상의 총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너무 절망적입니다. 잊어야 합니다. 그러나 영어권 철학자의 95% 정도의 사람들이 이 사고방식을 믿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말의 문제일까요? 문화의 문제일까요? 영어권의 철학자가 왜 세계를 대상의 총체로 생각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현대의 과학과도 맞지 않는 사고방식인데 말입니다. 이제 이 사고방식을 접읍시다.

 

 

두 번째 사고방식입니다. 이것은 특히 비트겐슈타인이 제창한 사고방식인데, 그는 자신의 저 유명한 책의 첫 부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란 성립하는 상황의 총체이다. 그리고 세계는 사실의 총체이지 사물의 총체가 아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사실이란 성질의 구체화입니다. 나는 인간이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소립자에도 성질이 있습니다. 제게는 없는, 예를 들어 회전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회전한다는 생각은 할 수 있지만, 물리학적인 특질로서 회전할 수 없습니다. 대상은 이렇게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질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로서 관찰 가능한 우주는 대략 400억 광년 전부터 존재해왔다고 합니다. 교토는 부퍼탈(Wuppertal)[독일 서부의 공업도시]보다 깨끗한 도시입니다. 이는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찬성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틀렸습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사실이란 관계입니다. 대상과 대상 간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사실을 기술하는 것은 아주 간단한 명제라는 형태로 이뤄질 수 있습니다.

 

철학자는 그러한 형태로 사물을 제시하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가령 물질 aF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기본적인 원자의 사실입니다. 약간은 물리학처럼 들릴 수 있지만, 이것은 논리학입니다. 물리학의 언어를 가져와서 원자에 대한 명제로 말한 것입니다.

 

현실을 파악하는 제일 작은 단위를 생각해봅시다. 나는 여기에 있는 무언가의 방법으로 여기에 존재한다고 하면, 이것은 사실의 한 이해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사실의 총체라는 것이 있을까요? 비트겐슈타인은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또한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무한히 많은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한히 많이 있다고 해도 그 총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나는 두 인간보다 작다’, ‘나는 한 인간이다, 혹은 나는 3인 미만의 인간이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사실 또한 무한합니다. 또 제가 지금 노무라 교수와 조금 거리를 두고 앉아있는데, 이리저리 거리를 조정해가며 자리를 옮겨 무한히 많은 위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얼마만큼 세밀하게 공간을 측정하느냐에 따라 위치가 달라지고, 또 공간을 계속해서 측정한다는 것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공간적인 거리를 바꾸지 않는다고 해도 시간적으로 위치를 바꿀 수 있어서 위치는 무한히 나올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실은 무한히 많습니다. 그 전체라는 것이 혹시 있다면.

 

그렇다면 그 총체를 어떻게 구축할 수 있을까요? 다음의 문제를 생각해봅시다. 느낌만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강연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에. 만약 정말로 사실의 총체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 보일까요? 집합의 집합으로 보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실에 대한 명제를 집합으로 생각해봅시다. 그것은 대상과 그 성질로 이뤄집니다. 그러나 집합의 집합이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수학적인 문제입니다. 집합의 집합이 없다는 것이 첫 번째 문제입니다. 점점 어려워집니다. 그렇지만 수학적인 논리를 따라가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논리적인 시스템으로서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실이 시스템의 논리인 시스템은 없습니다. 어떤 시스템도 완결적이지 않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당시 이를 알지 못했지만, 사실이란 총체를 이루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입니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는 조금 더 직감적인 것입니다. 모든 영역의 영역입니다. 생각해봅시다. 한 유물론자오래된 철학적인 입장입니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시다. “진짜 존재하는 것은 모두 물질=에너지적이다. 거기에는 정의 등은 없다. 물질=에너지적인 것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그리고 또 한사람이 우주는 하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우주 공간 속에 들어있는 것, 물질=에너지적인 것의 총체가 우주다.”, “우주 속의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물()이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우주라는 것은 하나의 우주 안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우주 전체로 볼 때, 아인슈타인의 시공간에는 에너지가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주의 일부가 아닙니다. 나라는 인간은 우주의 일부지만, 우주 그 자체는 우주의 일부가 아닙니다. 존재하기 위해서 우주 속의 일부로서 존재해야 한다면, 그리고 우주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무엇도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존재하기 위해 물질=에너지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면, 전우주(全宇宙)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주가 존재해야 합니다. 그거야 괜찮습니다만, 그렇다면 우주 자체로서 있다는 것과 우주의 일부로서 있다는 것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깁니다. 부분과 전체의 관계는 우주의 경우 어떻게 될까요? 이것은 말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조금 분명하지 않은 방식으로 말하자면, 예부터 내려오는 간단한 사고실험을 해보겠습니다. 물리학은 이에 대해 흥미로운 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우주는 크지만 유한하다.”고 말했다고 합시다. 믿기지 않겠지만, 우주선으로 우주의 끝까지 여행한다고 상상해봅시다. 그리고 그 여행에 막대를 가지고 간다고 해봅시다. 우주 끝까지 가서 이 막대기를 우주선 밖으로 내밀면 그 막대는 어디까지 가게 될까요? 간다고 하면 거기는 어디일까요? 막대기를 내민 순간 막대기를 쥔 손은 우주의 끝에 간 것일까요? (물론 그 어딘가로 갈 수 없으며, 누구도 그러한 어딘가로 손을 내밀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고실험입니다.) 손을 우주선 밖으로 내밀 때 우주 밖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아니면 더 큰 전체의 일부에 우주가 존재하고 있을까요? 다중우주 혹은 초우주는 이와는 다른 것일까요? 초우주가 이와 다른 것이 아니라면, 그럼 초우주는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초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은하는 그러한 초우주의 일부일 수는 없습니다. 초우주로서 초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지금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것이 존재하지 않을까요? 모든 영역의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부터 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것을 볼 때 그것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 안의 몇몇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그 전부에 관해 의문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도쿄는 존재합니다. 물질도 존재합니다. 손도 존재합니다. 소수도 존재합니다. 소수, 숫자가 존재하고 도시, 정의, 아름다움, 물질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공존하지 않습니다. 7이라는 숫자를 도쿄에서 발견할 수 없습니다. ‘7이라는 숫자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봅시다. 그러면 도쿄라고는 말할 수 없다.’, ‘어제는 뉴욕에 있었다.’, ‘오늘 7은 도쿄에 있다.’고 답할 수 있을까요? 7은 그러한 의미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의(正義)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습니다. 숫자가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의 또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숫자는 하나의 영역에 있다는 것이 됩니다. 도쿄, 교토, 부퍼탈 등을 포함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주가 있습니다. 우주란 물리학의 대상영역입니다. 물리학을 통해 우주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그러한 대상영역입니다. 숫자는 특정 룰에 따릅니다. 도시는 다른 특정 룰에 따릅니다. 법적인 룰, 역사적인 룰, 정치적인 룰 등에 따릅니다. 그리고 우주는 수학적인, 자연법적인, 그 외 다양한 역학에 따릅니다. 숫자는 그러한 역학에 따르지 않습니다. 숫자 1과 숫자 2의 관계는 약한 상호작용(interaction) 혹은 중력에 의해 통제되어서 12가 점점 가까워진다거나 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 법적인 룰과도 상관없습니다. 가령 천황이어도 ‘21에 선행한다.’고 정할 수 없습니다. 12의 관계를 누구도 바꿀 수 없습니다. 기본적인 산수인지만, 이것은 여하간 사실입니다. 천황은 도쿄와 교토를 하나로 만들 수 있습니다. , 천황의 법적인 권한이 거기까지 미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도쿄를 없애지는 못합니다. 도쿄를 다른 무엇으로 바꿀 수도 없습니다. 도쿄는 도쿄입니다. ‘도쿄는 도쿄라는 사실은 몇몇 사람에 의해 바뀔 수 없습니다. 각각의 영역에 규칙이 있고, 그것들은 제각기 다릅니다.

 

이 룰에 관해 나는 의미(sense)’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의미가 이 영역을 개별화합니다. 의미가 설명하는 것입니다. 왜 한 영역이 한 영역이고 다른 영역이 아닌지를 의미는 설명해줍니다. ‘의미를 부여한다는 식으로 말이죠. 그리고 그 의미에 의해 어떤 것이 하나의 영역에 들어갑니다. 예를 들어 글루온은 우주의 영역에 있지만 숫자의 영역에는 없듯이. ‘모든 영역의 영역이라 할 때도 의미를 부여하는 기능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것이 세계가 됩니다.

 

그러나 이 의미를 부여하는 기능이란 무엇일까요? 유물론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숫자에는 이러한 물질에너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숫자는 추상적 및 항구적입니다. 글루온은 시간에 의해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시간이라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절대적인 숫자와는 또 다릅니다. 도쿄는 추상적인 시간과 관계 없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한 모든 것이 도시는 아닙니다. 확실히 우주는 도시가 아닙니다. 물론 메타포로 사용할 수 있겠지만, 우주는 도시는 아닙니다. 7이라는 숫자 또한 도시의 일부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의미를 부여하는 기능이 어떠한 기능이길래 총체를 부여해주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해볼 수 있습니다. 조금 어렵기는 하지만요. 답이 없을 때는 있는 것처럼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철학이라고 말합니다. 철학적 작업을 해보겠습니다. 보여주는 작업입니다.

 

철학자는 존재라는 개념을 생각해왔습니다. 이것도 존재한다, 저것도 존재한다, 그럼 발명해보자, 큰 의미를 주는 존재라는 것을 만들면 좋겠다, 라고. 그러면 존재(existence)란 무엇일까요? 존재가 나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큰 오산입니다. 왜냐하면 답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존재가 문제에 대한 답이다.’라고도 할 수 있겠죠.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러한 해결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지 존재라고 부른다면 답은 될 수 없습니다.

 

철학의 역사에서 하이데거는 이것을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아닌 어떤 정신적인 말을 만들었습니다. 존재는 독일어로 ‘Sein’이라고 하는데요, 하이데거는 옛 19세기의 표기방식을 따라 ‘Seyn’이라고 했습니다. 혹은 ‘Sein’ 위에 엑스표를 덧붙였습니다. 그렇게 존재라는 것을 적절하게 표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도식적으로 표현된 넌센스에 불과합니다. 무엇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이데거는 그러나 이 일이 잘못임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설명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냥 모든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현실의 총체숫자, 도시, 우주…―는 무엇도 아닌 곳으로부터 존재에 이르게 된다고, 즉 느닷없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빅뱅에 의해 우주가 존재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숫자나 도시에 대해서도 빅뱅이 있었다고 하이데거는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비약이라고 불렀습니다. 독일어로는 ‘Satz’라고 씁니다. Satz라는 말은 비약을 의미하면서도 명제라는 것도 의미합니다. 그는 “Der Satz von Ground”라는 책을 썼습니다. 근거율(根據律)이라고 불리는 이 책에서 그는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된 데에는 이러한 비약이 있기 때문이라고 썼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무엇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론을 회피할 뿐입니다.

 

 

지금부터 포지티브한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은 잊어주세요. 총체, 절대적인 모든 것이 없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리고 영역이 현실 하에서 매핑(mapping)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국지적으로 함께 있을 뿐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도시, 숫자, 그리고 우주가 함께 있다면?

 

우주라는 관점에서 그것들의 연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주에서 보면, 도시의 스케일은 꽤 큽니다. 도시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큰 규모의 대상으로 파악될 수 있습니다. 도쿄는 그 역사까지 포함해서 도쿄의 전체로 생각할 수 있으며, 조금 더 작은 레벨에서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도쿄는 매우 복잡한, 국소적인 존재의 기능으로도 파악될 수 있습니다. 숫자는 조금 더 어렵습니다. 우주의 관점에서 파악된 숫자는 어쩌면 뇌 속에 있는 것의 표상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뇌 속에서 우주를 생각하는 것이라고요. 그리고 우주 속에 있는 것으로 환원함으로써 우주의 관점에서 숫자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도쿄 속에 있다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숫자는 대상에 대해 셀 수 있습니다. 도쿄를 제로라로 할 수 있을까요? 교토를 첫 번째, 부퍼탈을 세 번째로 순서를 정하는 것도 숫자가 하는 일입니다. 우주를 n이라는 숫자로 생각해봅시다. 여기서 n이라는 것은 매우 큰 숫자를 의미입니다.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죠. 이런 식으로 매핑할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많은 것들이 여기서 생략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해리포터는 어떻게 될까요? 해리포터에 대해 지금까지 쓰이지 않은 소설들은 어떻게 될까요? 이뿐만이 아닙니다. 위의 시도는 도시, 숫자, 우주 등의 무작위적인 목록을 제시한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이론이 할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대상을 하나의 영역에 담을 수 없습니다. 이론적으로 왜 그러한 결론에 이르는지를 지금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지난 3천 년간 서양의 철학은 다음과 같은 철학적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동양의 철학에서는 다른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예를 들어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니시타 기타로(西田幾多郎)의 철학에 매우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양의 철학에서는 제가 이야기하는 사고방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우선 절대적으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고방식을 접읍시다. 우주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주는 어쩌면 무한히 큰 것일지 모릅니다. 어떤 이해방식이 맞는지에 따라서는 무한에 가깝게 큰 것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모든 것보다 우주는 작습니다. 따라서 가령 다중우주일지언정 무한을 초월하는 상태에는 이르지 않으며,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대상은 우주 속에 있는 대상보다 많습니다.

 

어쩌면 우주는 무한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우주는 작습니다. 철학의 사고방식에서 보면 우주는 매우 작습니다. 모든 대상이 우주 안에 담기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숫자는 우주 안에 담기지 않습니다. 겹치는 부분은 있지만, 모든 것이 포함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고방식을 접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취해보겠습니다. 즉 현실은 마음으로부터 독립한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현대 과학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현실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제멋대로 생각하는 그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환상으로 이해하거나 꿈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내가 꿈을 꾸고 있다 해도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제멋대로 생각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꿈을 꾸고 있다 해도 그것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것입니다. 꿈을 꾸고 있는 것에 대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꿈을 꾸고 있다고 해도 꿈을 꾸지 않고서는 꿈을 꿀 수 없습니다. 꿈을 꾸고 있을 때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것은 꾸며낼 수 없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꾸며낼 수 없습니다. 즉 사실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매력적인, 몇천 년 전의 이해방식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우리가 꾸며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으로부터 독립하고 있으며 사고로부터도 독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하간 20세기 무렵까지 중심적인 사고방식은 '지성을 가진 생물이 없어도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현실이다'라는 생각입니다. 이 생각에서 사고는 주관적이며 현실은 객관적이기 때문에 현실을 잘못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성을 가진 생명체가 없어도 현실은 거기에 있습니다. 이에 따라 현실은 마음으로부터 독립한 것이라는 이해방식이 그러한 철학에 담기게 됩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렇게 말해도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이 마음으로부터 독립하고 있다면, 현실 속에 마음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요? 그런 식으로는 현실 속에 마음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골치 아프게 됐습니다.

 

의미는 현실 속에 어떻게 위치하고 있을까요? 뇌가 있습니다. 그러나 뇌는 어떻게 의식과 관계하고 있는 걸까요? 왜 뇌가 없으면 의식이 지원되지 않는 걸까요? 그리고 컴퓨터는 겉보기에는 지적인 작업을 수행하는데, 그렇다면 컴퓨터는 의식이 있는 걸까요?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전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나오는 부작용입니다. 현실은 마음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나쁜 사고방식의 부작용입니다. 현실은 반드시 마음에 의존한다고, 관념론자처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확실히 독일은 관념론적으로 흐르기 쉬운 전통이 있습니다. 저는 독일인이며 관념론적이지만 종래의 관념론자와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실은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있지 않을 뿐더러 마음에 의존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관념론자처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식이 없다고 기능하지 않는 것일까요? 왜 의식인 걸까요? 이것은 관찰자라는 말을 사용해서 혼란스럽게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은 마음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현실은 마음까지 포섭하고 있으며 포함하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의미의 장이 됩니다. 특정 법칙이 있고 그로부터 의미의 장이 형태 지어집니다. 예를 들어 여기서는 숫자의 법칙이 있습니다. 저기서는 도시의 법칙이 있습니다. 도시의 법칙과 숫자의 법칙은 조금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도시는 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재 도시의 숫자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z라는 숫자만큼 도시가 있다고 해봅시다. 구체적인 숫자의 도시가 있으므로 수의 의미의 장과 도시의 의미의 장은 그 의미에서 중첩됩니다. 그리고 우주가 있습니다. 나아가 무언가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면서도 어떤 의미의 장 속에 존재합니다. 고래는 물속에 삽니다. 고래의 생활방식, 즉 수중생활을 그들이 어떻게 경험하고 어떤 커뮤니케이션을 하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의미의 장입니다. 현실이 그렇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제안하는 철학의 관념에서는 이런 식으로 현실이 존재합니다. 국소적으로 겹치는 의미의 장의 직물세공과 같은 것으로서 말이죠.

 

나아가 글로벌한 맥락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전체라는 맥락은 없고 로컬한 맥락밖에 없습니다. 로컬한 맥락뿐이므로 맥락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져서 그를 통해 구조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의 의미의 장에 대해, 혹은 의미의 장의 중첩에 대해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은 구조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이라는 관점에서 파악될 수 없습니다. 신의 관점은 없습니다.

 

여하간 우리가 현실에 대해 찾아낼 수 있는 것, 그것은 항상 예상 밖이며 놀라움을 동반합니다. 물리학은 경험적인 과학에서조차 항상 그렇게 다루고 있습니다. 우주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의 승려도 다중우주를 이해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히 그리고 때마침 운이 좋아서 그런 식으로 파악된 것일는지 모릅니다. 다른 승려는 다른 이해방식을 할테니까요. 다중우주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며, 다중우주 자체가 억측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요컨대 현실은 이론에 저항하는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다 해도, 심지어 신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신[서양의 전지전능한 유일신]의 존재는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하는데, 어느 누구도 모든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로컬ㆍ스트럭처(local structure)입니다.

 

 

앞서 도시와 숫자의 부분은 겹쳐질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구조를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물리학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나는 물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다중우주 연구에 몰두하지 않습니다. 물리학자가 대체로 동의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에 대해 조금 이야기하겠습니다. 여하튼 제가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안을 해보겠습니다. 추론에 불과하지만,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우주에는 근본적인 레벨이 있어서 나머지는 그 근본적인 레벨의 어딘가에서 나온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나오는지는 모른다.' 예를 들어 바다의 파도나 입자의 움직임을 볼 때 입자의 움직임은 파도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종류의 파도로 보입니다. 입자의 움직임은 소위 보통의 파도의 움직임이 아니라 인간이 보면 마치 파도처럼 보이지만 진짜 파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파도는 인과의 법칙이 있습니다. 따라서 예를 들어 파도가 고래를 죽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글루온이 다른 글루온을 흡수했다.’라거나 고래를 죽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리학자는 고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고래가 없다고 생각하는 철학자는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다릅니다. 고래는 고래입니다.

 

글루온과 고래는 이처럼 함께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함께 할까요? 우주의 세부조정이 없다면 원래 고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고래와 같은 동물과 우주의 연결은 어떠할까요? 이것은 물론 깔끔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작은 것이 있어서 큰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식으로는 안됩니다. 가령 물리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것은 작은 것으로부터 구성된다는 사고방식을 저는 레고중심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말합니다. 레고라는 블록이 있지요. 우주는 그러한 레고처럼 구조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말이 맞다면, 우주에는 깔끔한 숫자가 있고 실제로 깔끔한 것이 되는 무엇인 것이 아니고, 그렇다면 존재론적으로 깔끔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될까요? 우주는 이미 있는 이론적인 거품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수많은 철학자, 물리학자, 또 과거에 철학자와 대화한 물리학자는 총체가 있다고 가정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우주를 사고할지에 대해, 즉 물리학 그 자체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총체가 없다면, 만약 그 총체라는 것이 틀렸다면 어떻게 될까요? 3천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동물에 관해 말한 것을 지금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총체에 대해 말한 것을 현재의 우리는 왜 받아들이는 걸까요? 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생물학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그가 말한 총체라는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는 걸까요? 우리는 좀 더 깊이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명제가 있습니다. ‘동시에 맞으면서 틀린 명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특히 그레이엄 프리스트(Graham Priest)라는 철학자에 의해 다른 논리학의 발전 속에서 그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프리스트는 이미 몇천 년 전에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말하지만 이 말은 맞지 않습니다. 어째서 특별히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고 이러한 사고를 방치할 수 있을까, 그리고 국소적인 문제라면 이 비모순에 의해 혼란이 어째서 일어나지 않는가를 저는 엄밀하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 말을 지지해서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이기에 받아들였습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이미 최악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약 이 논증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과 말을 하지 않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루카시에비치(Lukasiewicz)라는 폴란드의 논리학자는 19세기에 그 모순이 진실이어도 문제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프리스트의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방 입구에서 나오고 있다고 해봅시다. 제 몸의 반은 밖에 나와 있고, 반은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방 밖에 있는 것일까요? 방 안에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애매합니다. 이 애매함은 사람의 사고나 말이 있는 모든 곳에 있습니다. 이 애매함은 모든 곳에서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는 방 안에도 없으며 방 밖에도 없지만, 방 안에도 있으며 방 밖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 명제는 틀렸습니다. 적어도 이 경우에는.

 

그래서 총체를, 이론의 총체를 접으면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이 가능해집니다. 제가 주장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총체에 반대하는 이론을 보여주려 합니다. 저는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이 제안을 두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매핑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지금 이야기한 논리를 우주와 현실에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에 대한 답을 간단한 결론과 함께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왜 이러한 현실성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가? 그것은 너무나 너저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식의 존재에 관해서는 완전히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 곧 의식은 그물망(mesh) 작업 속의 일부입니다. 의식 그 자체는 뇌와 같지 않습니다. 그에 관해서는 별도로 이야기해야 할 만큼 깁니다. 뇌가 없다면 의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지만, 뇌와 의식이 같다고 하는 것은 틀렸습니다. 물론 뇌는 의식이 존재하기 위한 전제로서 필요하지만, 동등하지는 않습니다. 이와 같이 최종적으로 틀린 이론을 접으면, 앞서와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틀린 이론은 유럽에서 3천 년 전부터 계속되고 있는 마이너스 유산입니다. 제 연구의 대체적인 경향은 3천 년 전의 옛 논리를 옹호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물리를 완전히 접었습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철학] 또한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의 남은 부분은 여러분들과의 대화 속에서 풀어가겠습니다.

 

 

 

 

 

 

マルクス・ガブリエル、「宇宙世界実在」『現代思想』2018年10月臨時増刊号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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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가 천문학자이기도 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퍼스펙티비즘이 17세기 광학의 발전에 힘입어 그것을 철학적으로 해명한 것이라는 것도 데스콜라가 주장한 바이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철학의 흐름을 천체물리학과 대질시킨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지난 2018610일 일본 도쿄대학에서는 칸트를 넘어선 새로운 실재론을 주창하는 마르쿠스 가브리엘과 천체물리학자의 강연과 대담이 있었고, 《현대사상》 201810월 임시증간호 마르쿠스 가브리엘 특집편에서는 이 강연록과 대담록을 실었다. 각각의 강연록과 대담록을 차례로 번역해서 올리도록 하겠다. 그 첫 번째로 일본의 천체물리학자인 노무라 야스노리의 강연록을 번역해서 올린다.

 

 

 

우리의 우주를 넘어서

 

 

노무라 야스노리(野村泰紀)

 

 

우리의 우주를 넘어서라는 테마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우리의 우주에 대해 사람들은 별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최근 알게 된 것은 우리가 우주라고 말하면서 말하고 있는 것보다 우리는 훨씬 더 큰 구조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중우주’(multiverse)라는 사고방식입니다. 이에 대해 이미 다른 곳에서 들은 분도 계실 테지만, 저는 그와는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이려고 합니다.

 

 

여기 있는 분들 중 적어도 몇몇은 어렸을 때 우주의 끝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라든지 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라는 의문을 품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보통은 어른이 되면 바쁜 일상 속에서 잊히게 되는 의문인데요,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사이언티스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문은 의문 자체로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우주의 끝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라고 할 때 우주가 무엇인지를 정해놓지 않으면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우주의 가장자리에 벽과 같은 이 있고 그 바깥에 무언가 젤리와 같은 것이 있다고 말이죠. 그러나 지금 이러한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해서 우주라고 하겠다고 하면, 말뜻 자체로 볼 때 우주의 끝이나 바깥 등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주의 끝을 이야기하려 할 때 우선 우주란 무엇인가를 꼼꼼하게 따져봐야겠습니다. 바깥이나 이전이라고 할 때 바깥은 공간적인 바깥이고 이전이란 시간적인 이전이 됩니다. 그렇다면 시간이나 공간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질문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 있습니다. 보통 시간은 시간이고 공간은 공간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질문의 경우 우주가 시작한 순간 등의 극한의 상황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때 시간이나 공간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듯이 그렇게 흐르고 있다는 보증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중우주의 이야기는 철학과 관련된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을 오늘 드디어 확인해보고자 합니다.

 

재밌는 것은 이를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우리가 생각하는 우주상과 전혀 다른 우주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중우주의 단서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다중우주와 같이 우주가 무수히 많다고 할 때 우리의 우주란 무엇인지를 정해놔야 합니다. 통상 우리가 우주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소립자 이론 표준모형으로 기술됩니다. 그것은 소립자의 쿼크가 있고 전자가 있고 질량이 얼마이고등등이 됩니다. 작금에 이르러 실험적으로 알게 된 것은 원자핵의 이론 내지는 원자가 모여 분자가 되고 생명이 된다는 주장이 기본적으로는 환원주의(reductionism)의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소립자 이론은 지구에서든 안드로메다에서든 그 외의 다른 곳에서든 같다는 것이고, 모든 관측에 들어맞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주는 그에 지배되고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재밌는 것은 이것이 20세기 최대의 발견이며 우주는 빅뱅이 시작된 이래 계속해서 팽창해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과학에 그다지 흥미가 없는 사람은 말로만 그렇다는 거 아님?’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주의 팽창은 직접 관찰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처음에 저 멀리 있던 은하가 더욱 급속히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이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 이상의 것이 발견되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빅뱅 자체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주가 현재 커지는 중이라면, 예전에는 그 속에 물질이 꾹꾹 담겨 있어서 고온고밀하기 때문에 번쩍번쩍 빛이 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실제로 지금 일만 년 전의 은하를 본다고 한다면, 빛의 속도가 유한하므로 일만 년 전에 나온 은하의 빛에 의해 일만 년 전의 그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100억 광년 떨어진 은하를 본다면, 100억 년 전에 나온 빛을 보고 있는 것이며 100억 년 전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주는 먼 옛날에는 빅뱅으로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기 때문에 하늘의 배경은 온통 빛으로 빛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밤하늘은 어둡습니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멀리 있는 것에서 나온 빛은 도플러 효과에 의해 희미해집니다. 이 효과에 의해 빅뱅 시대의 빛은 가시광의 영역에서 벗어나 전파영역에 있게 됩니다. 따라서 전파의 차원에서 밤하늘을 본다면 밤하늘은 전면에서 반짝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습니다.

 

우주는 현재 138억 살 정도인데, 우리는 전파영역의 빛까지 해서 38만 살 정도의 젊은 시절의 우주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전의 우주의 가장자리는 밀도가 너무 높아서 빛이 통과할 수 없고, 위의 방법으로는 보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늘에서 오는 빛의 전파를 관측함으로써 우주의 연령이 현재의 0.003%였을 무렵의 전체의 상세한 지도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우주는 어디서도 똑같았습니다. 밀도가 거의 동일한, 이를테면 수프 같은 상태였지요. 10만분의 1 정도 외에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10만분의 1 이라는 것은 대단한 것으로, 예를 들어 옥수수 수프를 아무리 저어도 1%는 덩어리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그것은 왜 현재 우리가 보는 우주가 항성도 있고 은하도 있으며 물질의 밀도가 일정하지 않은 우주인지를 말해줍니다. 이 초기의 10만분의 1의 흔들림이 증폭되었기 때문입니다. 중력은 인력이므로 밀도가 높은 곳에서는 더 강한 중력이 작용하고 점점 사물이 모이게 되며, 밀도가 낮은 곳에서는 점점 사물이 흩어지게 됩니다. 밀도가 높은 곳에서는 순식간에 물질이 모여 은하가 생기고. 이는 38만 살 무렵의 우주의 전체지도가 있으므로 그것을 컴퓨터에 넣어서 시뮬레이션하면 알 수 있습니다. 은하가 생기고 필라멘트가 생기고해서 현재의 관측과 맞아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를 고르게 펼치면 현재의 우주와 거의 같은 모양을 이루게 됩니다. 즉 우주는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거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과학자가 즐겨 그리는 그림으로 나타내면, 이렇게 될 것 같습니다(그림 1). 이것은 시간을 세로축으로, 공간을 가로축으로 한 시공도’(時空圖)로서, 물리학자들이 자주 그리는 그림입니다. 빛의 경로는 반드시 45도 사선으로 그리는 것이 룰입니다. 이 그림에서 우주가 어디서도 똑같다는 것은 가로 방향(공간 방향)의 어디서도 똑같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빅뱅은 밀도가 매우 높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밀도가 낮아진다는 것은 그림 1에서 가로 방향으로의 단계적 차이(gradation)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앞서 말했다시피 우주가 38만 살 때 나온 빛(우주배경복사라고 합니다.)을 약 138억 년 후의 우리가 보고 있다는 것은 45도 사선으로 기울어진 두 개의 화살로 나타납니다.

그림 1. 우주의 시공도

만약 이 그림상이 정말 맞다면 우주는 어디서도 똑같기 때문에 우주의 밖은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주에 관해 거의 완전히 알았다. 어디서도 우리가 알고 있는 소립자 물리를 적용할 수 있다.’가 되겠지요. 그런데 정말로 그러할까요?

 

실제로 관측결과는 그림 1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가 여러 번 경험했다시피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믿는 것은 위험합니다. 예를 들어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예가 있습니다. 지구입니다. 대지는 구()로 보이지 않습니다. 10킬로미터 사방에 사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지구가 둥글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압니다. 보이는 대로 믿는 것은 위험하다는 하나의 예입니다. 지구는 둥글다는 개념이 나왔을 당시 최첨단 과학자들의 반론은 지구가 둥글다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떨어져 버릴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교육의 힘 덕분에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곳(일본)과 이곳의 지구 정반대편에 있는 브라질에서 각각 상하반대로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아저씨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웃음).

 

물론 지구는 둥글다는 것에 대한 당시 반론의 어떤 것들이 문제인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아래라는 개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래는 모두에게 같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아래와,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 아래는 반대 방향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래는 만유인력에 의해 지구와의 관계에서 정의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일상생활에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사물을 떨어뜨리면 아래로 가기 때문에 아래는 아래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상에서 벗어나 개념적 변경을 수반할 때 비로소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맥락에 맞춰 이야기하자면, 무언가 개념적 변경을 수반하면 그때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겉으로 보이는 픽처우주는 무한히 확장한다가 틀릴 가능성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림 1과 같은 의미에서 우주는 어디서도 똑같다는 것은 틀렸다는 것이 다중우주론입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 요구되는 개념적 변경이란 무엇일까요? 그 하나가 시간입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같지 않습니다. 상대성 이론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텐데요, 아인슈타인이 말한 것은 빛의 속도가 누구에게나 같다는 것입니다. 19세기에 맥스웰이라는 사람이 전기와 자기의 방정식을 완성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자석, 즉 자기가 움직이며 전기가 생깁니다. 실제로 이것을 사용해서 수차나 터빈으로 자석을 움직이게 해서 발전(發電)을 합니다. 또 전기가 움직이면 자기가 생긴다는 것도 압니다. 좋은 예가 전자석입니다. 전기가 움직이면 자기가 생기고 자기가 생기면 전기가 생기며, 이를 통해 계속해서 파()와 같이 전달되는 해()가 방정식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리고 이 파()는 어째서인지 빛가시광에 한정되지 않고 X, 자외선, 적외선, 전파 등까지 포함하는 의미에서의 빛에 대응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아인슈타인은 이 파()의 속도가 계산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속도가 계산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차의 속도가 시속 100킬로미터일 때, 내 자신이 시속 30킬로미터로 차와 같은 방향으로 달린다고 하면 저 차의 속도는 내게 시속 70킬로미터로 보이게 됩니다. 더군다나 지구 자체가 자전하고 있기 때문에 시속 100킬로미터의 차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지구의 중심을 돌게 됩니다. 나아가 지구 자체도 엄청난 속도로 태양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즉 속도는 누구에 대한 속도인지를 말하지 않으면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보통 차의 속도가 시속 100킬로미터라고 말할 때는 땅에 대한 속도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빛의 경우는 무엇에 대한 속도인지를 지정하지 않고서도 계산할 수 있습니다. 빛은 1초 동안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돌 수 있습니다. 즉 빛은 초속 30만 킬로미터를 갑니다. 당초 이 속도는 우주에 대한 속도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지구가 우주에 대해 움직이고 있다면, 빛의 속도는 이 수치에서 미미하지만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대단한 것은 계산으로 그 속도가 나온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다른 부분, 예를 들어 시간이라든가 공간이라고 했던 부분에서 우리의 개념을 변경할 필요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움직이는 전차에 타고 있고, 빛을 위에서 아래로 쏘아서 바닥에서 튕겨내는 실험을 한다고 칩시다. 전차의 높이는 1미터입니다. 이야기를 간단히 만들기 위해 빛의 속도를 매초 2미터로 잡읍시다. 1미터의 높이에서 아래로 쏜 빛이 아래에서 튕겨 되돌아오면 2미터이기 때문에 1초 사이에 빛은 전차의 위아래를 왕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차 밖에 있는 사람이 보면, 이것은 달리는 전차의 이야기이므로, 위에서 아래로 쏜 빛이 아래에서 되돌아오기까지의 거리는 2미터가 아닙니다. 빛은 수직 방향이 아니라 사선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거리[밖에 있는 사람에게 보인 빛의 거리]4미터였다고 한다면, 빛의 속도는 누가 보아도 매초 2미터로 같기 때문에 빛이 아래로 튕겨서 되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은 전차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1초이지만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2초가 됩니다. 즉 시간은 보는 사람, 더 정확하게 말하면 관측계에 따라 달라집니다. 지금의 실험에서 이 효과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실험결과와 전혀 맞지 않을 것은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대기 위에서 소립자가 생겨서 내려온 것을 지상에서 본다고 합시다. 그러한 소립자 속에는 마이크로초[100만분의 1]의 수명을 가진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기 위에서 내려오는 데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소립자 측에서 보면 마이크로초의 수명을 갖는 것이 지상의 인간 측에서 보면 소립자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으므로 그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든 현상이 이와 같습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는 것이 아니며 매우 미묘한 것입니다.

그림 2. 시간에 의한 우주의 공간

여기에 중력까지 고려하면 시간을 더 깊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밀고 나가면 최종적으로 다중우주에 이르게 되고, 빛의 경로가 45도 기울어져 그림 1이 아닌 그림 2와 같은 우주의 묘상(描像)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 새로운 그림에서 우리의 지구는 중앙 윗부분의 작은 역삼각형 안쪽의 야구장과 같은 영역에 대응합니다. 지금 이 우주를 바깥에서, 다시 말해 큰 역삼각형의 밖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 사람에게 시간은 그림 속의 t로 나타나게 됩니다. 즉 이 사람에게 동시각은 수평으로 묘사되는 점선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우주가 거품처럼 생겨나서 보글보글 퍼져나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시간 1, 2, 3, 4의 우주의 사이즈는 이러한 점선 속에 역삼각형의 안쪽에 있는 부분의 길이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우주는 작게 태어났고 거의 빛의 속도로 커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주의 안쪽, 즉 그림 속 큰 역삼각형 안쪽에 있는 사람이 본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이 사람에게 시간은 그림 속의 t로 나타납니다. 즉 이 사람에게 동시각은 그림 속의 켜켜이 쌓인 곡선과 같습니다. 이것은 우주가 생긴 순간부터 무한히 크며 어디 가도 똑같이 보인다는, 즉 곡선의 어디라도 똑같은 밀도의 영역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보통 우주가 거품처럼 태어났다면 그렇다면 우주가 어디서도 똑같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거품이라면 벽이 있으며, 중심이라는 개념 또한 있으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밖에서 보면 거품이고 크지만, 안에서 보면 처음부터 무한히 크고 한결같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지구가 실제로는 둥글지만 아래를 오로지 아래라고 생각해서는 둥근 지구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의 성질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주의 끝의 가장자리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주가 시작하기 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라는 의문은 이 역삼각형 밖의 영역에 무엇이 있을까? 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이것은 밖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우주의 바깥에는 무엇이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 영역은 시간 제로 이전이 되므로, 우주가 시작하기 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라는 물음이 됩니다. 안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우주가 시작하기 전은 밖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우주의 거품의 밖과 완전히 같은 영역이고, 그러므로 거기에 무엇이 있었을까? 를 묻는 질문이 됩니다. 이와 같이 우주의 바깥이나 시작 이전이라는 것도 시간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하지 않으면 탐구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누가 보았을 때인지를 지정하지 않으면 질문 자체가 의미를 잃고 맙니다.

 

덧붙여 이 그림은 항상 빛의 속도를 45도 사선으로 그리는 룰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가 갈 수 있는 부분은 그림 속에 있는 사람을 정점으로 한 역삼각형의 부분뿐입니다. 왜냐하면 45도 보다 옆으로 더 달려나가는 순간 빛은 더 빨리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다중우주론을 논할 때 원칙적으로 갈 수 없는 영역을 논하는 것은 과학자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분명 우리의 우주 밖의 영역에 무엇이 있는지를 직접 가서 볼 수는 없습니다. 갈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안에 있는 사람이 보는 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이니까요. 누구도 과거로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을 탐구하는 것이 사이언스가 아니라면 공룡시대나 고고학은 전부 사이언스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과거로 갈 수 없다 해도 과거에서 시그널은 올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정밀한 측정을 하거나 이론의 여타 예언을 찾아보거나 해서 무슨 일인지를 검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중우주는 볼 수 없고 갈 수 없기 때문에라고 되묻는다면, 그것은 틀렸습니다. 갈 수 없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면 우리의 거품 우주의 바깥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이를 생각해보기 위한 힌트는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우주가 너무나 잘 생겨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잘 생겨나고 있다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점을 이야기하면, 우주가 가속 팽창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주는 팽창하고 있는데 그 팽창 속도가 빨라지고 있습니다. 이 발견은 1998년의 일로, 2011년에 나의 동료인 솔 펄머터(Saul Perlmutter) 등이 이 발견으로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이 발견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주가 팽창하고 있을 때 중력은 반드시 인력이므로 팽창 속도는 느려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빅뱅에 의해 은하들끼리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면 그 속도는 중력으로 인해 점점 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펄머터 등이 측정하고자 했던 것은 감속 매개변수(parameter)라는 것으로 팽창 속도가 얼마나 느려지는지를 알아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수치가 마이너스로 나타납니다. 즉 팽창이 가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주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가 보통의 물질이었다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입니다. 쿼크라거나 다크매터(dark matter)라거나 했다면 이렇게는 안됩니다. 가속 팽창하고 있다는 것은 물질 이외의 무엇이 있어야 하고, 그 무엇이 우주의 주요한 구성요소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정체가 바로 진공에너지’(vacuum energy)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팽창이 가속된다는 것은 아인슈타인 시대에서부터 이미 알려져 왔습니다. 진공에너지란 물질이 전부 사라져도 남는 에너지를 말합니다. 이 에너지는 부호에 따라 척력 같은 것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부호가 반대면 인력이 작용해서 우주가 으스러지고 맙니다). 펄머터 등은 이 진공에너지의 대부분이 non-zero로 측정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재밌는 것은 그 사이즈가 기적적인 사이즈였다는 것입니다. 진공에너지는 이론적으로 대략 어느 정도의 사이즈가 되어야 하는지 평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측정한 사이즈는 이 이론적인 평가치보다 120자리 배나 작았습니다. [진공에너지가 우주팽창의 가속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상의 수치가 있는데, 실제 측정치는 그보다 120자리 배나 작게 나왔다는 사실을 말한다.] 이것은 이론물리학 사상 가장 엇나간 예언 중 하나일까요? 게다가 불가사의하게도 우주에는 은하나 기타 물질도 있는데, 물질에너지 밀도와 진공에너지 밀도가 거의 같다는 것입니다. 두 배 정도 차이가 납니다. 100자리 배 정도 컸으면 좋으련만, 두 배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 불가사의하냐면 물질에너지 밀도는 질량÷부피로 주어지는데, 우주의 팽창에 의해 부피가 점점 커지기 때문에 물질에너지 밀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낮아집니다. 그런데 진공에 대해서는 아무리 팽창해도 진공은 어디까지나 진공이므로 진공에너지 밀도는 일정합니다. 그것이 지금 딱 두 배 정도라는 것입니다. 즉 우주가 태어난 직후의 먼 옛날에는 진공에너지가 물질에너지보다 몇 십 자리 배 작은 먼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지금은 거의 같게 되었습니다. 조금 지나면 진공에너지만이 남겠죠. 만약 우리의 우주가 한개 뿐이라면, 빅뱅의 때에 우주나 이론이 진공에너지를, 즉 은하가 생겨나고 생명체가 생겨나고 위성(satellite)을 쏘아 올려 진공에너지를 관측할 때쯤 물질에너지와 거의 같게 될 정도의 수치로 미리 정해놓지 않았다면 이렇게는 되지 않습니다. 신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관측적인 사실입니다.

 

실제로는 진공에너지가 1998년에 발견되기 전에, 당시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이론의 예언보다 110자리 이상 작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점차 정밀도가 높아지면서 1998년 무렵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110자리 배나 작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이론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110자리 이상 작은 것이라면 진공에너지는 아마도 제로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무언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메카니즘이 있어서 제로가 되고 있다고. 그러나 그에 대해 이론조차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표준모형을 만들어낸 사람 중 하나이고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한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라는 사람은 메카니즘이 없기 때문에 사고방식을 바꿔서 진공에너지가 상이한 우주가 있다면 무언가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1987년의 일입니다. 그 결과 진공에너지가 지금의 수치보다 조금 크다면, 은하나 모든 것이 탄생하기 전에 진공에너지가 지배적이었던 우주는 척력으로 팽창했으며 그 속에는 무엇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은하도 혹성도 인간도 무엇도 없는 것이지요. 진공에너지가 조금씩 다른 우주가 무수히 많다고 한다면, 그 대부분에서 진공에너지가 너무 커서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고, 어쩌다 딱 맞는 크기의 우주에만, 말하자면 딱 맞는 크기에 들어간 우주에만 은하나 인간 등의 복잡한 구조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인간이 우주를 관측할 때에 진공에너지는 반드시 딱 그만큼의 수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은 우주에는 우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우주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구는 숲도 있고 호수도 있으며 매우 아름답습니다. 슈뢰딩거 방정식이라는 기본방정식은 매우 간단한데, 왜 이렇게 풍부한 것일까요? 생각해보면 사막이나 얼음 혹성이 될 수도 있었으련만. 아니 실제로는 사막이나 얼음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지구는 때마침 체액의 물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리도 딱 맞아떨어진 것일까요? 그것은 혹성이 무수히 많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장소에는 우리가 없습니다. 때마침 딱 맞아떨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없었을 것이기에 우리가 있는 곳을 발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모두가 진공에너지를 제로로 만들고자 했지만, 그러한 이론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만약 우주가 무수히 많다면 진공에너지가 제로에 가까운 수치일 것이라는 이론은 우리의 우주 아닌 어딘가에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와인버그는 만약 진공에너지가 그러한 이유에서 작다고 한다면, 때마침 딱 좋은 범위에 들어앉은 우주의 진공에너지가 제로는 아니기 때문에 관측의 정밀도가 높아지면 언젠가는 진공에너지가 발견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두가 제로라고 생각할 때 말이죠. 그리고 11년 후에 발견됩니다. 현재 수많은 우주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진공에너지의 사이즈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입니다. 그것이 맞다는 증명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에게 호소하지 않고서도 신의 세계처럼 인간에 딱 알맞은 이곳의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이론입니다.

 

 

그렇다 해도 우주가 무수히 많다는 것은 매우 엄청난 가설입니다. 그리고 물론 거대한 가설에는 증거가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렇다면 우주가 무수히 많다는 증거는 진공에너지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뿐일까요? 아닙니다. 실은 이론물리의 법칙은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면 우주가 무수히 많다는 것을 일찍부터 드러내 왔습니다. 늦어도 1980년대 무렵부터입니다. 모두가 이러한 생각을 감지했고 돌이켜보면 그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는 전부 무시되었지만 말입니다.

 

그중 하나가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력과 전자역학을 통합한 이론의 거의 유일한 후보입니다. 공간의 한 점은 통상 가로, 세로, 높이를 지정받습니다. 공간이 가진 차원이 세 개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초끈이론에 따르면, 수학적으로 공간의 차원은 아홉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미치고 팔짝 뛰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공간은 어떻게 보아도 3차원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80년대 사람들은 어떻게 했냐면, 남은 여섯 개는 없다고 해도 될 만큼의 작은 것으로 미뤄두었습니다. 실은 이런 일은 물리에서 보통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얇은 종이를 생각해봅시다. 통상 우리는 종이를 2차원의 물체로서 다룹니다. X축과 Y축 각각의 수로 지면 위의 점들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면 위에 사는 작은 세균의 입장에서 보면 두께라는 세 번째 차원이 열립니다. 종이는 큰 스케일에서 보면 2차원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2차원의 모든 곳에서 작은 두께 방향의 차원이 달라붙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3차원의 공간에서도 모든 곳에서 6차원의 공간이 달라붙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분의 6차원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기 때문에 잊을 수 있다는 것이 80년대의 이야기입니다.

 

6차원 공간이라는 것은 꽤 복잡합니다. 일반적으로 복잡한 시스템에서 기본방정식은 간단해도 매우 복잡한 수의 해가 나옵니다. 예를 들어 단백질의 DNA 등의 유기질의 경우에 탄소와 질소와 산소만을 가지고 슈뢰딩거 방정식 하나에 넣어도 무수한 가능성이 나옵니다. 6차원 공간 또한 이와 같아서, 6차원의 모습을 이렇게도 저렇게도무수히 많은 종류가 나옵니다. 우리의 우주는 6차원을 평균화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6차원의 모습이 다르면 전혀 다른 우주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6차원 공간의 모습에 의해 3차원 방향의 우리 물질의 소립자의 질량이나 성질, 진공에너지 등이 전부 달라집니다. 즉 초끈이론에는 와인버그의 논의에 필요한 수많은 종류의 우주라는 장치가 자동적으로 들어있습니다. 80년대의 사람들은 앞서간 6차원이 나왔다는 것에 낙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보는 공간의 차원이, 이론이 예언하는 그것과 엇갈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여분의 6차원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다양한 종류의 우주를 만들어낼 수 있고 진공에너지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우주의 인플레이션(cosmic inflation)이라는 것입니다. 다양한 6차원의 모습을 가진 우주가 방정식의 해로서 존재한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그러한 우주가 실제로 생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생겼습니다. 우주가 하나 시작했다는 것은 양자 터널링이라는 효과에 의해 또 다른 6차원의 모습을 한 영역이 보글보글 거품처럼 생겨나서 그것이 커진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상전이(相轉移 phase transition)라고 불리는 현상의 일종으로 그것 자체는 희귀하지 않습니다. 물이 끓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물이 끓으면 증기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고 그 거품이 커져서 묶이고 마지막에는 물이 전부 수증기가 됩니다. 그러나 우주의 경우에는 항상 거품이 생기고 커지지만 거품과 거품 사이의 공간 또한 넓어지기 때문에 거품들끼리 전부 묶이지는 않는 과정이 계속 이어집니다. 게다가 이렇게 만들어지는 우주는 확률적으로 다양할 수 있습니다. 즉 우주 속에 또 다른 우주의 거품이 만들어지는 식으로 거품, 거품, 거품이 생겨나서 다양한 우주가 차츰 만들어집니다. 예전에는 이 성질, 즉 거품의 상전이(相轉移)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은 이론이 가진 난감한 성질 자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우주는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러한 인플레이션을 끝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와인버그의 설명에 필요한 다양한 우주를 생기게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우주는 자동적으로 생길 수 있습니다.

 

이는 매우 시사적입니다. 인간은 선입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론의 난감한 성질에 당면하면 방정식을 믿고 앞으로 돌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성질을 숨겨버립니다. 나중에 지나고 보면, ‘실은 난감한 성질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난감한 성질이라고 생각한 것이 실은 필요한 성질이었다는 것은 우리가 올바른 길을 나아가고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거품이 생기는 과정은 수학적으로 해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해보면실제로 풀린 것은 1970년대입니다, 우리가 전우주(全宇宙)라고 말하는 곳은 가장 크게 보글보글 생긴 거품의 내부라고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거품의 내부에는 6차원 공간이 때마침 있는 특징의 모습을 취하며, 우리가 알고 있는 소립자가 생기고 진공에너지 또한 있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전혀 다른 거품이 보글보글 계속에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앞서 그림 2에서 나타나듯이 이러한 거품은 밖에서 보면 작게 태어나 점점 커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에서 보면 처음부터 무한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많은 거품 속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0.0000……1 정도의 매우 작은 확률로 때마침 진공에너지가 작게 되어서 인간이 생기는 우주가 만들어집니다. 인간, 이랄까 여하간 생명체 같은 복잡한 것이 생기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럭키한 우주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역으로 고등생명 같은 것이 생겨서 우주를 관측했다고 한다면, 그때 우주는 그러한 고등생명에 딱 맞는 우주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다중우주라고 불리는 빅픽처로서 그림으로 표현하면 그림 3과 같습니다.

그림 3. 다중우주

다중우주라고 하면 우주는 무수히 많다는 것만을 어렴풋하게 말할 뿐이라고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뿐이라면 이미 수천 년 전에 인도에서 명상하는 사람들도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지금 여기서 그걸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묘상(描像)을 사이언스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주가 무수히 많다는 것을 일일이 직접 찾아가서 확인할 수 있냐고 하면, 앞서 말했듯이 그러한 영역은 일종의 과거에서조차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시그널이 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주끼리 부딪혔다고 한다면, 그 시그널이 발견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능성이 낮긴 하지만요.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런 식으로 이론즉 초끈이론에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보글보글 거품이 생긴다는 것이 정해지면 우주가 무수히 많다는 것 외에도 다른 귀결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귀결 중 몇 가지는 우리 우주 속에 대한 것으로 그것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를 설명하겠습니다. 만약 그림 2가 맞고 우리의 우주가 거품이라고 한다면, 우주의 곡률이 음이라는 예언이 나옵니다. 우주의 곡률이란 무엇일까요? 삼각형으로 생각해봅시다. 삼격형이란 세 점을 찍고 그것들을 최단거리로 연결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각도가 세 개 있습니다. 이것을 다 합하면 180도가 된다고 배웠습니다. 이것은 맞지만, 정확히 말하면 특별한 경우에만 맞습니다. 내각의 합이 180도가 아닌 공간을 얼마든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의 표면을 생각해봅시다. 그 위에 삼각형의 세 점을 찍어서 그것들을 최단거리로 이어봅시다. 그렇다면 부푼 삼각형과 같은 것이 되고 내각의 합은 분명 180도보다 큽니다. 이러한 공간을 양의 곡률을 가진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이 경우 양의 곡률을 가진 2차원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안으로 눌린 공간이면 이때 합은 180도보다 작게 됩니다. 이것을 음의 곡률을 가진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2차원 면의 경우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차원을 하나 높여서 3차원의 공간이라 해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우주에 세 점을 찍어 최단거리로 묶고 그 내각의 합을 측정함으로써 우주의 곡률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다중우주론은 이 합이 반드시 180도보다 작게 된다고 예언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우주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 아쉬운 것은 그것이 180도 보다 어느 정도로 작은지는 알 수 없습니다. 179.999……일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실험적으로는 그러한 작은 차이를 알지 못합니다. 우주에 실험상의 대삼각형을 만들어서 지금의 정밀도로 측정하면 180 플러스마이너스 1도 정도로 나옵니다. 앞으로 정밀도가 더 높아지고 그러한 정밀도로 측정해서 180도와 같게 나오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다중우주론에 유리한지 불리한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181 플러스마이너스 0.01도가 되면 곡률이 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다면 오늘 이야기한 것은 전부 묻히게 될 것이고 사이언스로서 퇴출되겠지요. 곡률에 대한 관측의 정밀도는 앞으로 20~30년 사이에 2자리 배 정도 좋아질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에, 그때 측정치가 양으로 나온다면 볼 장 다 본 것이지요. 적어도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다중우주는 끝장납니다. 이 이야기는 앨런 구스(Alan Harvey Guth)라는 사람이 말한 것입니다.

 

다중우주는 사이언스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간과하는 것은 이러한 다양한 방법으로 이론의 귀결을 내기 위한 수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직접 다른 우주에 갈 수 없다고 해서 사이언스가 아니다.’라고 판단한 후에 사고를 밀고 나간다면, 이러한 수단은 발견될 수 없습니다. 나와야 하는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사고에 사고를 거듭해서 사이언스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물론 앞으로 관측적으로 지금 이상의 증거가 모인다는 보증은 없지만, 적어도 여기서 이야기한 곡률과 같은 예언은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가 다중우주론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새롭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바로 공간과 시간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어려운 문제입니다. [다중우주론의] 연구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는 마지막에 조금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중우주의 관점에서도 우리가 공간ㆍ시간이라고 하는 것은이미 시간이 보는 사람에 의해 다르다.’는 관점에서 보아도 이 말은 이상하지만참으로 이상한 말입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앞서와 같이 모두가 동의하는 이야기가 아닐뿐더러 나 자신의 사색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일부 사이언티스트들 사이에서 조금씩 동의를 얻어가고 있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많은 사람에게서 미친놈 소리를 들은 이야기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만큼의 동의는 얻지 못할 것이며 나의 주관 또한 개입되어 있지만, 즐거운 이야기이므로 해보겠습니다.

 

다중우주를 생각하면 진공에너지의 이론적인 크기가 설명될 수 있고 초끈이론이나 다양한 것들이 무모순적이어서 기쁘기는 하지만, 다중우주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의미에서 존재하게 된다면 실은 조금 난감한 일이 일어납니다. 다중우주에서 거품 우주가 보글보글 생긴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무한히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 우주와 조금씩 다른 우주가 무한히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일본미래과학관에서 강연하고 있는데요, [] 어제 싸운 우주, 싫어하는 것이 있는 우주, 좋은 것이 있는 우주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른 우주들 중 어느 것이 일어나기 쉬운지를 생각해봅시다. 보통 확률의 계산이라는 것은 예를 들어 주사위를 흔들어 몇 번 던져서 어느 눈이 몇 번 나오는지와 같이, A라는 사건이 몇 번 일어나고 B라는 사건이 몇 번 일어나는지의 비율을 말합니다. B 쪽이 A 쪽의 3배로 일어난다면, A25%, B75%가 됩니다. 그런데 다중우주에서는 모든 것이 무한히 일어나기 때문에, AB도 무한히 일어납니다. 요컨대 확률의 계산이 불가능합니다. 무한÷무한을 약분해서 1로 해도 소용없고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론의 예언능력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문제 자체는 이전부터 알려져 왔습니다. 그것을 해명하려는 다양한 시도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우주가 앞으로 쭉 무한히 계속된다는 데에서 무한이라는 것이 나온 것이듯이, ‘시간에는 단락이 있고 한 시간보다 앞선 것은 없다등등으로 해명을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만족스럽지는 않았습니다. 나의 주장은 실은 이 답에 대해 우리가 어떤 의미로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다중우주일 때와 같이 물리학의 법칙은 그 해답을 이미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것은 아닌가 라는 것인데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자역학과 블랙홀을 설명해야 합니다.

 

이것은 요즘 잊고 있었던 호킹의 작업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블랙홀이란 무엇일까요? 지금 지구에서 물체를 탈출시킨다고 해봅시다. 물체를 위로 던지는 정도로는 택도 없습니다. 비행기도 소용없습니다. 로켓에 실어 로켓과 함께 대기 밖으로 내보냅니다. 일정 속도보다 빠르면 지구의 중력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태양처럼 지구보다 훨씬 더 무거운 곳에서는 초속(初速)을 더 키우지 않고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곳이 꽉꽉 차 있다면 그곳에서 물체를 빛의 속도로 던져도 그곳을 벗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블랙홀입니다. 빛보다 빠른 것은 없기 때문에 어떤 것도 그곳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블랙홀에서 지평면이라고 하는 것은 그 내측에서 빛을 확 던져보았을 때 일정 높이 이상을 갈 수 없다고 하는, 빛이 최대로 도달할 수 있는 지평을 말합니다. 이 내측으로부터 어떤 시그널도 올 수 없습니다. 지평면이라고 해도 거기에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러한 경계의 이름일 뿐입니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블랙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블랙홀입니다.

 

그 블랙홀에서 실험을 한다고 해봅시다. 어떤 블랙홀에 책 A를 떨어뜨려 봅시다. 지평면에 가까워지면 중력의 효과로 인해 시간이 느려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책은 블랙홀의 표면으로 자근자근 흡수되고 블랙홀 본래의 무게+A의 무게의 새로운 블랙홀이 생겨납니다. 호킹이 발견한 것은 블랙홀이 그 자체의 어떤 것이 아니라 증발해가는, 그것이 우리의 우주라면 빛의 알갱이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생긴 블랙홀도 마지막에는 증발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블랙홀에 책 A가 아니라 무게는 같지만 B라는 다른 책을 떨어뜨려 봅시다. B는 마찬가지로 블랙홀로 흡수될 것이며 조금 무거운 블랙홀이 생겨날 것이고, 그다음에 그것은 증발할 것입니다. 같은 무게의 책을 떨어뜨렸기 때문에 생겨난 블랙홀은 AB의 경우에서 같은 무게를 가집니다. 따라서 최종적인 호킹의 복사(輻射)도 계산하면 똑같은 것이 됩니다. 이것을 호킹의 블랙홀 정보문제라고 합니다. 원래 책이 A였는지 B였는지의 정보를 완전히 잃고 완전히 똑같은 최종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래서 뭐?’라고 되물을 수 있지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시간 발전이 11이 아니게 됩니다.

 

도대체 왜 물리는 가능할까요? 우리가 현재 상황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면, 뉴턴 방정식을 풀고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주왕복선(space shuttle)을 날려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가 예언될 수 있습니다. 한편 시간에 대해 반대로 풀어보면, 지금 이 장소를 이러한 속도로 공이 움직이고 있다면, 어디에서 얼마의 초속(初速)으로 던져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이언스가 시스템의 시간 발전을 해명해서 예언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양자역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슈뢰딩거 방정식으로도 시간을 앞에서 풀거나 뒤에서 풀어서 과거나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블랙홀의 정보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이를 풀 수 없습니다. 각기 다른 초기 상태에 대응하는 최종상태가 완전히 같아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서 생각하면 같은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간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사이언스가 틀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블랙홀의 패러독스입니다.

 

그러나 그 후 다양한 발전이 있었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호킹의 계산은 근사값을 사용하기 때문에, 양자역학적으로 계산을 해보면 책 A로부터 나온 호킹의 복사와 책 B로부터 나온 호킹의 복사는 조금 다릅니다. 조금 다르기 때문에 시간을 반대로 풀어보면 책 A로부터 나온 복사는 책 A를 재현하고 책 B로부터 나온 복사는 책 B를 재현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것은 완전히 우리네 일상과 같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정보는 실천적으로(pragmatically) 거의 항상 소실됩니다. 예를 들어 책 A를 태워도 책 B를 태워도 최종상태에서는 거의 같습니다. 오염된 공기와 재가 됩니다. 정보를 잃지 않는다는 의미는 최후의 공기와 재 전부의 분자의 위치와 속도를 완벽하게 알고 있어서 시간에 대해 방정식을 역으로 풀 때 한쪽의 경우에는 책 A가 되며 다른 한쪽의 경우에는 책 B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호킹이 최초에 말한 의미에서의 정보문제는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러나 중력이 재밌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앞서 행한 책을 떨어뜨리는 실험에서 떨어지는 책을 책과 함께 자유낙하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고 해봅시다. 자유낙하하고 있으면, 중력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이 든 엘리베이터의 예를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창이 없는 엘리베이터 안에 사람이 있고 사과가 있다고 해봅시다. 지금 엘리베이터를 매단 줄을 끊으면 사과도 인간도 엘리베이터 자체도 전부 같은 속도로 떨어집니다. 따라서 자유낙하하고 있는 사람은 중력을 느끼지 않습니다. 실제로 우주비행사는 이것을 사용해서 비행기를 타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거기서 자유낙하함으로써 무중력의 훈련을 합니다. 책과 함께 떨어지는 사람의 입장에서 떨어지는 책을 보면 책은 지평면으로 흡수되어 호킹 복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뚝 떨어질 것임을 의미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블랙홀의 지평면은 별도로 거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유낙하하는 책과 함께 그대로 떨어지게 됩니다. 책과 함께 떨어지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AB도 그대로 그 속에 있게 됩니다.

 

여기서 난감한 일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앞서 책이 우선 자근자근 지평면에 흡수되어 마지막에는 그 정보가 전부 밖으로 복사로 되돌아올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책의 정보랄까 책 그 자체는 전부 내측에 도달해서 그 안에 머문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대체 어느 쪽이 맞을까요? 바로 떠오르는 것은 정보가 둘로 복사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자역학에서는 정리(定理)가 있어서 정보의 완전한 복사는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복사기에서 복사가 가능한 이유는 양자역학적으로 말하면 극히 일부의 정보만이 복사되기 때문이며 정보의 완전한 복사는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패러독스입니다. 게다가 이 강론에서는 초끈이론 등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초끈이론이 틀렸다고 해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정보를 잃지 않는다는 것, 자유낙하 중에는 중력이 없어진다는 아인슈타인의 기본적 원리, 그리고 양자역학의 기본적인 성질 외에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이중 어떤 것이 결정적으로 틀렸을까요?

 

이 패러독스의 해답은 아직 암시(suggestion)에 불과하지만 제안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 묘상과 두 번째의 묘상 둘 다 맞지만 동시에 맞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지금 블랙홀을 밖에서 보면, 책이 지평면에 가까워질수록 느려지고 나중에 그 완전한 정보가 외측으로 되돌아옵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책이 떨어지는 일 따위는 모릅니다. 왜냐하면 지평면의 내측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블랙홀인 것이고, 밖에서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책이 표면에 도달해서 정보가 되돌아올 뿐입니다. 블랙홀의 내측은 없습니다.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있다고 간주해서 정보를 복사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것만 해도 다행입니다. 원리적으로 절대로 보이지 않으며 빛의 속도로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블랙홀의 내측은 없습니다. 그러나 없다고 말해도 떨어지고 있다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떨어지는 사람으로서는 떨어지면 확실히 책은 내측이 있어서 내측에는 공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으로서는 자신 또한 내측에 있기 때문에 지평면으로부터 밖을 향해서 나오는 호킹의 복사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에게도 복사는 없습니다.

 

요컨대 밖에서 볼 때 블랙홀의 내측은 없고 그 대신에 블랙홀의 복사가 있습니다. 떨어지는 사람에서 보면 확실히 블랙홀의 내측에 공간이 있지만 그 대신에 블랙홀의 복사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간은 무엇인가라는 것은 누구 보느냐에 따라서 어떤 때에는 공간으로 보이고 어떤 때에는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이며 완전히 다른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기술하느냐에 따라서 공간이거나 공간이 아니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블랙홀의 지평면과 같이 원리적으로 정보가 파악되지 않는 영역은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있다고 생각하면 이중적으로 카운팅되기 때문에. 호킹의 복사가 있다고 하니까 블랙홀의 내측도 있다고 생각한다는, 하나뿐인 정보를 두 번 카운팅하게 됩니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영역은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림 4. 우주의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것이 다중우주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어떤 가상적인 관측장치가 그림 4의 선이라고 해봅시다. 인간은 인간이기에 우주가 변하면 으깨져 죽기 때문에 더 강해지려 합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빛이 발하는 각도는 45도로 그려지기 때문에 이 관측기에서 점선으로 그려진 삼각형의 바깥 영역에서는 어떤 신호도 도달하지 않게 됩니다. 즉 이 영역은 블랙홀의 내측 같은 것으로 느껴지고 원리적으로 관측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영역은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바로 블랙홀의 경우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다중우주는 어떻게 될까요? 그림 3과 같이 다양한 우주가 무수히 많은 탓에 진공에너지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했는데, 실은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 해답은 양자역학에 의해 알 수 있습니다. 양자역학에서는 전부가 확률의 문제입니다. 소립자 실험 등을 하면, 예를 들어 가속기에서 전자와 그 반입자인 양전자를 부딪히게 합니다. 그러면 최종상태는 확률적으로 뮤(미크론) 입자가 되거나 다른 입자가 됩니다. 이것은 다양한 확률의 평행세계(parallel worlds)로 분기된다는 식으로 기술될 수 있습니다. 양자역학적인 다세계(多世界)라고 말이죠. 거품 우주가 생기는 과정도, 양자역학의 과정도 말입니다. 이런 거품이 생긴다, 저런 거품이 생긴다……라고 전부 확률적으로 정해집니다. 그리고 거품의 생성이 확률적인 것이고, 관측기에 대해 어떤 장소에 거품이 생기거나 조금 어긋난 다른 곳에서 생기거나, 아니면 다른 거품이 생기거나……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한 각각의 평행세계를 편의상 전부 하나의 그림에 겹쳐서 집어넣은 것이 그림 3의 다중우주의 빅피처인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으로 분기된 양자역학적인 세계에는 무한이 없습니다. 앞서 말했던 무한히 A가 나오고 무한히 B가 나오는 문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무한의 다중우주라는 것은 원래 확률공간 외에는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1%, 이것이 5%, 2%, 4% 등등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확률이기 때문에 무한은 나오지 않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세계에 다중우주 전부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무한이 나옵니다. 2, 3, 4중으로 카운팅되니까 무한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앞서의 블랙홀로 말하면, 내측의 공간도 있으며 동시에 외측의 공간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더블카운팅하게 됩니다. 그러한 구조는 없습니다. 이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모든 것이 완전하게 합의되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하나의 세계에는 삼각형의 내측밖에 없을 겁니다. 다른 세계에는 다른 삼각형의 내측밖에 없을 겁니다. 확률적으로 이것들을 전부 겹쳐서 그리면 이른바 일반상대성이론적인 다중우주의 묘상이 만들어집니다. 이것은 앞서의 무한대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참으로 불가사의합니다. 양자역학은 이유를 모르는 세계인데, 우리는 그 이유를 모르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양자역학은 엄청난 정밀도로 검증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거대한 세계로 확장해보면 위와 같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공간ㆍ시간이란 무엇인가? 라고 할 때, 어떤 사람에게는 공간으로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공간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간 또한 관측계에 의해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것들은 대체 무엇일까요? 그러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물이 있고 파()의 이러저러한 성질이 있다는 것을 조사한다고 해도 결국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물분자가 어떤 관측적인 움직임을 한다고 말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 기본적인 수준에서 공간이나 시간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이 방향의 연구는 최근 크게 진전하고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일본인 연구자 또한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 또한 지금까지 해온 연구입니다. 다중우주를 해왔다기보다는 그것을 통해 시간이나 공간의 성질을 깊이 배워서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요약하겠습니다. 예전에는 대지가 평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틀렸고, 지구는 둥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개념의 변경이 수반되었습니다. 나아가 지구도 태양계에 있는 8개의 혹성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교회가 들어와서 분란이 일어났고 사람이 죽기도 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손에 잡힌 것은 태양계라는 모델이며 태양계는 은하계에 엄청나게 많은 혹성계 중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20세기에 이르러 우리의 은하계조차 우주에 엄청나게 많은 은하 중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때마침 21세기에 우주라고 말하는, 표준모형이라고 불리는 것이 우주의 전부라고 말하기가 낯설어집니다. 다중우주론에 따르면 우리 우주도 무수한 거품 우주 중 하나입니다. 더욱 다양한 구조나 성질이 있습니다. 또 다중우주의 정의상 무언가가 일어나도 다중우주로 부르기로 했기 때문에 어쨌든 다중우주론이 마지막은 마지막입니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그때마다 얻은 깨달음은 우리가 정말로 하찮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지구표면의 극히 얇은 곳에 살고 있을 뿐이지만, 실은 그 지구 자체가 밤톨만하고 태양계 또한 밤톨만하고 은하계 또한 밤톨만하고 우주 또한 밤톨만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하찮은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사이언스를 통해 배워왔던 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작은 부분의 일부 표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위의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멋진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이언스의 힘입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면,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우리의 우주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합니다. 여기저기 글을 써왔지만, 다중우주가 맞다면 그것들 대부분이 틀렸습니다. 우선 우리의 은하계는 안드로메다 성운과 서로를 끌어당겨서 40억년 정도 지나면 하나의 은하로 합체됩니다. 다른 은하는 가속팽창하고 있기 때문에 멀리서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40억년 이후에는 천문학을 하는 사람에게 우주라는 것은 은하 하나를 말하는 것인가?’라고 되묻는 세계가 펼쳐질 것입니다. 그 은하 하나도 중력 때문에 10의 22승 억년 후에는 하나의 거대한 블랙홀이 될 것입니다. 그 시대에 천문학자가 있다면 우주라는 것은 하나의 블랙홀이라는 거군요라는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 블랙홀도 호킹에 의하면 점차 증발해갑니다. 10의 100승 년 후에는 증발해서 부슬부슬 가스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이 역사의 어딘가의 시점에서 우리의 우주 자체도 그 속에서 태어난 거품 우주에 잡아먹혀 다른 우주가 될 것입니다. 양자역학에서는 그것이 어떤 우주인지를 확률적으로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의 이론의 힘으로는 그 확률도 계산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러기까지 엄청난 시간이 걸릴 것이므로 그렇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웃음).

 

 

 

 

 

野村泰紀、「々の宇宙えて」『現代思想』2018年10月臨時増刊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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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부분만 조금 건드렸다가 추석연휴에 읽자고 미뤄두었던 집중과 영혼을 완독했다. 좋은 책이 그러하듯이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을 때는 울컥한 마음에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이 눈물은 우리 시대의 고전이 선사하곤 하는 어떤 경이로운 경지를 맛보았을 때의 감격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천하고 지질하고 악다구니로 남을 속여 제 잇속을 챙기는 범속한 인간들의 삶을 헤집은 후에 비로소 나타나는 야트막한 나무 등걸에 앉아 숨을 고르는 것이야말로 공부가 아닌가 하는 깨달음에서 오는 오만가지의 감정에서 나온 눈물이었다.

 

안그래도 요즘의 나는 내 공부의 전환을 맞이하고 싶었고 맞이해야 할 것 같았다. 요 몇 년간 내 공부는 내 글을 생산할 정도의 힘을 갖지 못했고 다만 남의 글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작업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나태한 생활방식이 결국 나약한 몸으로 증상화된 탓도 있지만, 갖가지 갈래의 공부가 제도권의 논리로 귀착되는 세태 속에서 그러나 그 제도권으로 진입할 수 없었던 내 공부가 길을 잃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부는 어렵고 힘들다. 돌이켜보니 한국의 저명한 학자들의 글이 외국 학자들의 글보다 훨씬 어렵게 느껴졌던 이유를 알겠다. 한국 학자들의 글은 내 삶을 이루는 모든 것들을 알짤 없이 건드려서 그 글을 이해하는 것은 내 삶을 이해하는 것과 같게 만든다. 그들의 글은 구성적인 관념에 머무를 수가 없다. 이제는 거꾸로 생각이 된다. 한국어로 쓰였는데도 아프지 않은 글은 상도를 모르는 장사치들의 상술에 불과하다고.

 

집중과 영혼을 읽으면서 내 삶을 자꾸 되돌아보게 되어서 괴로웠다. 그 중에서도 여러 번 시도했지만 흐지부지 끝나버리거나 내게 남는 것을 따지면서 서로를 아카데미즘(참으로 볼품없는 한국의 아카데미즘이라도)으로의 진입 혹은 활개의 발판으로 수단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며 동료들을 의심하고 그만큼 나를 의심하는 중에 공부가 번민이 되어버린 이런 저런 공부모임들이 떠올라 마음이 부대꼈다. 이 책의 저자인 김영민 선생에 비하면 나는 줄 것도 없고 그러한 경험도 미천한데도 말이다.

 

하지만 내 공부의 길을 찾는 것은, 얼마나 지리멸렬한지 스스로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꽤나 되는 줄 알 정도로 지리멸렬한 한국 아카데미즘을 바로 잡아야할 우리의 공부론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마치 일본의 (정치)사상사가 외래사상과 국학의 때로는 맞대결 속에서 또 때로는 상부상조 속에서 생성되는 지()의 연대기이듯이, 우리의 공부론은 한국 학자들에게서 젖줄을 댈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 서경덕, 정약용, 이능화, 이덕무 등의 공부론을 논한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느꼈던 내 공부가 정말 얕다’(‘아는 것이 없구나’)는 자각에 더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마구잡이로 공부해서는 승산이 없다. 내 공부를 선학들의 공부에 비추어 벼리고 벼려야 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과하게 느꼈던 부분, ‘학인’(學人)으로서의 정체성을 누누이 강조하는 부분은 한국 아카데미즘 체제에서 포지션을 찾을 수 없는 저자 자신의 자기단속으로 비춰지면서도 그렇게 과하게 읽어 들이는 나 자신의 비틀린 자의식의 투영일 수도 있겠다 싶다. 그리고 또 책 말미에 언급한 장소성’, 즉 장소의 의미화는 사람의 무늬로서의 인문’(人紋)을 논하면서도 그것을 인간에게서 안주시킬 수 없는 저자 자신의 인문학의 보루 같았지만, 나 또한 그러한 마무리에 안도할 수 있었다. 어차피 사물의 존재론(이를테면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의 객체-지향적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과 같은)이란 인간이 스스로를 단념한다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물론 위의 것들은 이 책의 흠으로 잡힌다 해도 이 책의 깊이는 그 흠마저 아우른다. 그 깊이는 하루하루를 번민으로 힘겨워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나 몰라라 하지 않는다.

 

 

김영민, 집중과 영혼 - 영도零度의 인문학과 공부의 미래, 글항아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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