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덴마크의 인류학자 레인 윌러스레브(Rane Willerslev)영혼 사냥꾼(Soul Hunters)(2007)4종과 인격성의 관념의 번역본이다. 필자가 덴마크 학자인데다가 시베리아 동북부지역의 수렵민인 유카기르족의 우주론을 다룬 책이다 보니, ‘존재론적 전회의 주요핵심을 선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뒤늦게 주목받았다. 그렇지만 콘과 카스트루 등이 다룬 아마존 인디오의 우주론과 상당부분 공명하는 것은 물론, 그 내용이 매우 흥미롭다. 특히 애니미즘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이 책을 뛰어넘는 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 앞으로 한 장씩 이 책을 번역해 올리겠다.

 

 

 

4. ()과 인격성의 관념

 

인격의 카테고리

 

앞서 살펴본 것처럼 유카기르족(Yukaghir)의 세계에서는 인간과 동물은 물론이거니와 생명 없는 것까지 포함해서 이 모든 것들이 아이비, 즉 영혼 혹은 생의 본질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된다. 유카기르족에게 세계전체는 이처럼 타일러적인 애니미즘의 의미에서 살아있는 영혼에 의해 활성화된다. 모든 것은 살아있다고 이해되는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의식 있는 존재와 의식 없는 존재를 구별한다. 개념적인 수준에서 이 구분은 적어도 대체로 생명 있는 것과 생명 없는 것으로 구분하는 우리의 범주에 대응한다. 연로한 유카기르족 사냥꾼인 와시리 샤루긴은 동물과 수목과 하천은 움직이고 성장하며 호흡하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사람들”(lyudi kak my)이라고 내게 말해주었다. 그런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것들은 살아있지만 움직이지 않는 돌과 스키와 식료 등의 생명 없는 것과 구별된다. 그는 이어서 정적인 것은 단 하나의 영혼, 즉 그림자의 아이비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아닌 반면 동적인 것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그림자에 더해 두 개의 혼령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었다. 두 개의 혼령이란 움직이게 하고성장시키는마음의 아이비호흡시키는머리의 아이비. 사냥꾼은 그것들[두 개의 혼령]이 인간으로 인정한 생명 있는 존재자들과의 사회적인 공유관계에 그저 얽혀있을 뿐이라고 귀띔하면서 움직일 수 있는 것만이 [꿈속에서] 우리 있는 곳으로 찾아와서 선물을 준다.”고 말하며 그는 이야기를 끝맺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것과 살아있으면서그와 동시에 인간인것에 대한 샤루긴의 구별이 엄밀하지 않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냥꾼들이 인식하는 인격의 카테고리는 인간 종에만 결코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다양한 생명 있는 존재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격성의 연속체가 끊어지는 특정 포인트가 있다(Descola 1996: 324). 우선은 인격의 지위가 모든 생명 있는 존재에 동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냥꾼은 이 분류를 곰, 늑대, 울버린, 여우를 포함한 육식의 포유류와 마찬가지로 엘크와 순록을 포함한 사냥감의 주요 종들에 대해서도 할당하는 것 같다. 조류의 어떤 종, 특히 큰까마귀 또한 인간으로 간주된다. 곤충, 물고기, 식물을 포함한 그 외의 생명 있는 존재들은 언어와 의지능력을 갖춘 의식 있는 존재로 이야기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개 기계적이고 보잘 것 없는 삶을 영위하는 것들로 간주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가 이해하는 자연은 유카기리족에게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통합적이고 단일한 영역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존재방식에서 고도로 인격화된 세계의 여기저기서 조우하는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균열의 연속으로 지각된다(Pedersen 2001: 416).

나아가 특정한 동물 종이 인간이라고 생각되는 한편으로, 인간 종과 동물 사이에는 인격이 감지되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 잉골드가 지적한 것처럼 북방수렵민은 인간 종에 대해서는 단일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고유명[이름]을 사용해서 언급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동물은 개체라기보다 그 종의 타입으로 간주된다. 즉 동물의 인격화되는 것은 그 현현이라기보다 오히려 타입”(Ingold 1986a: 247 강조는 잉골드)이다. 유카기르족 신화에서 이러한 출현은 식별가능하다. 신화적인 인간 종의 등장인물들이 개개의 이름을 가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동물들은 -남자’. ‘산토끼-남자혹은 여우-여자와 같이 종종 남자여자라는 접속사를 수반해서 자신의 종의 이름을 갖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북방수렵민이 동물 그 자체가 아닌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영적인 소유자만을 인간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잉골드는 지적한다(1986a: 247). 그러나 그의 논의는 유카기르족과는 맞지 않다. 일반적으로 사냥꾼은 한 동물과 그것과 연결된 영적인 존재를 구별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나와 이야기를 나눈 사냥꾼들은 동물이 항상 단지 그 주재자의 영(master spirit)으로부터 인격성을 얻는 것이 아니고 양자가 공히 그 자체로 인간임을 주장했다. 요헤르손 또한 유카기르족에 대한 고전적 연구에서 이를 유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유카기르족의 견해에서 사냥의 행운은 동물의 수호령의 선의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동물 자신의 그것에도 의존한다. 그 때문에 그들은 만약 순록이 사냥꾼이 하는 일을 탐탁치 않아하면 그는 순록을 죽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Jochelson 1926: 146).

따라서 동물의 인격은 단지 그 주재자의 영의 인격의 연장일 수만은 없다. 오히려 동물들은 그 자신이 인격이다. 다음 장에서 유카기르족에서 동물의 인격성 개념개별의 속성이라기보다 그 종의 타입으로서은 사냥꾼이 모방의 실천을 통해 사냥감과 관계하는 경향 속에 있는 그 특유의 방식에 상당부분 유래함을 보여줄 것이다.

인간 종이라는 카테고리를 제외하면 인격으로서의 실체가 갖는 지위는 유한하지도 않으며 고유하지도 않다는 것을 지적해두어야 한다. 사냥꾼의 일상생활에서 실체는 상황에 따라 인격성을 들락거리며 움직인다. 이것은 인간 다음으로 전형적인 생명 있는 존재로 인정되는 대형 포유류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현지에서 나도 모르게 무례를 저지른 적이 있는데, 그것은 마을에서 인터뷰를 하는 동안 스피리돈 노인에게 엘크와 곰과 순록이 인간인지 아닌지를 물은 것이었다. 그는 내 질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심한 모욕을 받은 것처럼 아들아, 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반문했다. 그런데 다른 기회에 내가 그와 사냥에 나갔을 때 못보던 엘크의 발자국을 따라간 적이 있다. 나는 그것을 가리키며 오호, 이 동물을 궁지로 몰아 숨통을 끊는 데에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겠군.”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스피리돈 노인은 스키 막대로 나를 세게 후려치며 엄숙한 목소리로 그런 말은 입 밖에 내는 것이 아니야!”라고 말했다. “그들[엘크들]은 서로 대화를 나눠. 만약 누가 한 마리라도 자네 말을 들었다면 나머지 것들에게 전해주어 모두 어디론가 도망가 버린다고!”

왜 사냥꾼이 어떤 상황에서는 동물을 의식 있는 존재로 보고 또 어떤 때에는 그렇지 않은가라는 난제에 대해서는 다음 장의 마지막에서 언급하겠다. 여기서는 인간으로서의 동물이라는 유카기르족의 관념을 그들의 경제 및 영적인 신념에서 가장 중요한 종과의 관계에 기초해서 묘사한 후에 그 속에서 인격성에 관한 그들의 사고가 의거하는 근본적인 원리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유카기르족 사냥꾼들은 곰과 순록, 엘크를 포함한 몇몇 동물을 도덕적 가치와 행동규칙의 측면에서 자신들과 매우 닮았다고 본다. 그들의 신화는 엘크를 항상 빈틈없고 동료들 간의 협력을 마다하지 않는 것으로 그린다. 그런데 이 성격의 특징은 단지 신화적 사고의 표현만이 아니라 그 동물의 행동특성에 관한 경험적 지식의 반영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냥꾼이 내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여우, 검은담비, 울버린은 더럽고 냄새나는 장소에 꼬이고 그래서 그것들의 소굴은 냄새가 심하지만, 그와 달리 엘크는 그런 장소에서는 살 수 없다. 만약 버려진 기름통으로 인해 강물이 오염된다거나 악취가 생기면 엘크는 그 곳을 떠날 것이다. 그는 또한 한 엘크가 포식자에게 쫓겨 지치게 되면 종종 동료 엘크의 큰 무리 속으로 뛰어들고 그 무리는 사방팔방으로 흩어짐으로써 그 엘크가 도망치도록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되면 포식자는 지친 엘크의 발자국이 어떤 것인지를 찾기 어려워진다. 마찬가지로 눈이 두껍게 쌓일 때에 엘크는 교대로 길을 만들어 약한 것들이 뒤처지지 않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각각의 엘크에는 고유한 성격이 있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끝맺었다. “멍청한 것도 있고 똑똑한 것도 있고 신경질적인 것도 있고 자신감에 넘치는 것도 있어. 그러나 그것들 모두는 언제나 서로를 챙겨주고 걱정해주는 것 같아.” 이러한 이상적인 모습은 젠더의 관점으로 관념화된다. 즉 대체로 엘크는 남성 사냥꾼에 대한 성적 욕망 때문에 스스로를 바치는여성으로 지각된다. 후에 살펴볼 것처럼 사냥꾼들의 언어는 엘크사냥과 성적유혹 간의 상징적인 유사함으로 넘쳐난다.

개는 다른 비인간적인 인격과 확실히 구별된다. 개는 유카기르족에서 유일하게 기르는 동물이며 이 때문에 인간과 비인간의 영역 사이에서 기묘한 위치를 점한다. 어떤 점에서 개는 다른 비인간적인 생명체보다 인간존재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사냥꾼은 종종 자신의 개들을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개들은 주인인 인간에게 경고하고 인간을 보호한다. 예를 들어 봄이 오면 곰들이 먹을거리를 찾아 캠프에 접근하는데, 그때 개들은 심하게 짖어서 사람들의 주의를 모은다. 나아가 사냥꾼은 사냥뿐만 아니라 운송에서도 개들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한다. 지금은 스노모빌이 월등해서 중요한 운송수단으로 부상했지만 썰매 끄는 개 무리는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실제로 스노모빌의 구입과 유지, 연료보급에 드는 고비용이 소련 붕괴 이후 사냥꾼들이 연달아 현금부족에 빠진 것과 맞물려 최근 10년간 개 무리의 부활을 촉진했다. 개는 충실한 근무태도와 위험한 상황에서의 유용성 측면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러한 개들조차 더럽다고 간주된다. 개들과 같이 있으면 깨끗한 사냥감 동물들도 곧 더러워진다. 또 개들에게 엘크, 순록, 곰의 중요한 장기(심장과 장)를 먹이는 것은 터부시된다. 사냥꾼들은 개의 부정함, 성적난교를 즐기는 것, 배설물 따위를 먹는 기호성, 그리고 불쾌하고 강렬한 체취 등등의 점에서 개를 엘크의 멋진 행태 및 편안하고 온화한 몸 냄새와 대비한다.

늑대, 검은담비, 여우, 울버린 등 포식성의 동물 또한 더럽다고 간주되는데, 여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사냥꾼들은 이 동물들의 부정함을 그것들이 가진 억제되지 않는 살생의 즐거움과 살해된 먹잇감에 대한 모욕적인 행위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한 사냥꾼은 늑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놈들이 엘크를 죽여서 몸을 처리하는 방식은 아주 부끄러워. 고기를 나눠먹을 때 특히 가장 강한 놈이 가장 먼저 먹고 최고로 좋은 부분을 모두 제 것으로 취하거든.” 그러나 반사회적인 것의 권력화로 간주되는 놈은 따로 있다. 울버린은 모든 비인간적 인격 중에서 가장 탐욕이 세고 쩨쩨하며, 다른 놈으로부터 빼앗은 먹잇감을 먹으면서 살아간다. 죽은 동물을 발견하면 사체에 구석구석 오줌을 뿌려놓아 다른 포식자들이 건들지 못하게 한다. 그들은 내게 울버린과 맞닥뜨리면 반드시 죽이라고 가르쳐주었다. “왜냐하면 울버린은 아나키스트라서 자신의 행복만을 생각하기 때문이야.”라고 어느 사냥꾼은 말했다.

그런데 유카기르족에게 중요한 것은 계층의 사고가 아니라 차이의 사고이며, 또 지위적인 계층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이것을 깨달은 것은 울버린이 내가 숨통을 끊어놓은 엘크의 사체를 끌고 가버렸을 때였다. 고기를 가지고 돌아가기 위해 내가 스피리돈과 함께 살해현장에 도착했을 때 동물의 사체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대신에 우리가 맞닥뜨린 것은 울버린의 오줌에서 풍기는 악취였다. “이런 빌어먹을 도둑놈!”이라고 나는 욕을 내뱉었다. 스피리돈이 응대했다. “, 그런 식으로 울버린을 보지 말게. 우리가 먹는 고기는 선물과 다를 바 없듯이 울버린 또한 자기가 찾은 고기를 하지아인[영적인 주재자]에게서 받은 선물로 본다네. 누가 먹어버리든 하지아인은 모든 아이들과 똑같이 울버린에게도 먹을 것을 준다네. 그러니까 울버린은 자기가 하는 짓을 도둑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걸세. 그러기는커녕 울버린의 마음속에는 훔쳤다는 이유로 울버린을 죽이려는 우리야말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걸세.”

스피리돈이 지적한 것은 유카기르족의 세계에서 선한행동과 악한행동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채택된 퍼스펙티브에 의거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조금 후에 퍼스펙티브주의’(Viveiros de Castro 1998)라고 불리는 관점으로 이 관념을 논할 것이다. 지금 단계에서 이해 가능한 중요 지점은 사냥꾼은 일반적으로 울버린을 적으로 보고 일 있을 때마다 죽이려 하면서도 울버린이 본질적인 선한다른 종과 대조되는 사악한 종을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모든 종은 각각에 고유한 독자의 사회적 및 도덕적인 코드에 따라 행동한다고 여긴다. 따라서 울버린은 자신의 종의 습관에 따를 뿐이며, 사냥꾼에게서 도둑질을 한다 해도 반드시 사악한 의지로 그리 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카테고리에는 자연의생명체뿐만 아니라 동물의 지도령(spirit guide), 인간의 혼을 먹는 식인령(cannibal spirit)(유카기르어에서는 ku’lku’l인데, 사람들은 대개 사하어에서 채용한 아바쉬랄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및 다른 수많은 정령 등 우리로 치면 초자연적이라고 이름붙일 만한 존재까지 포함된다. 이 존재들은 보통 깨어있을 때에는 눈에 지각되지 않고, 냄새, 소리, 감각만으로 감지된다. 따라서 유카기르족은 초자연적인 것을 자연에서 분리된 현실성의 수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관점에서 신비한 존재들도 인간이나 동물처럼 물리세계의 주인이며, 그것들은 적어도 어떤 상황 하에서는 즉각 현실에서 존재하는 자들로 경험된다.

 

 

동물을 죽여서 먹는 것에 대한 도덕적 불안

 

사냥감을 죽여서 그 고기를 먹는 것은 유카기르족에게는 생의 본질이다. 1930년대에 소규모의 온실재배가 도입되었는데 짧은 여름철을 이용해서 감자, 토마토, 오이 들을 재배한 이들은 네렘노예(Nelemnoye)의 러시아인들이다. 많은 유카기르인들, 특히 옛날 세대의 사람들은 야채에서 나무같은 맛이 난다며 야채 먹기를 완강히 거부한다. 대신에 그들의 정열은 고기로 향한다. 특히 빨갛고 지방이 많은 고기는 그 어떤 음식물보다 중요시되고 그런 고기 없는 식사는 제대로 된 식사가 아니라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한다. 고기는 가장 열띤 교환의 대상이기도 하다. 앞서 설명했듯이 가족은 친족관계의 유대의 중요한 표현으로서 고기를 나눈다. 또 남자들은 고기를 연인에게서 성적인 봉사를 확실히 받기 위한 선물로서 활용하거나 지방소재지인 지리안카에서 연료와 교환된다.

그런데 고기가 아주 중요한 한편으로, 동물을 죽이는 것과 먹는 것에는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이것은 식재료로 가장 선호되는 동물인 엘크, 순록, 곰이 도덕적 가치와 행동규칙의 측면에서 인간과 가장 유사하다고 이해된다는 사실에 크게 기인한다. 어느 젊은 사냥꾼이 말했다시피 엘크나 곰을 죽였을 때 인간 누군가를 죽인 것처럼 느낀 적이 있어. 그렇지만 그런 생각을 쫓아내야해. 그렇지 않으면 수치심으로 이상해진다고.” 동물들을 죽이는 것에서 유래하는 이 도덕적 딜레마는 사냥과정의 모든 국면에서 발견된다. 후에 사냥꾼이 어떻게 해서 사냥감에게 위험한 사랑의 감정을 발전시켜 그로 인해 사냥감을 죽이지 못하게 되는지를 보여주겠다. 나아가 살해 후에 이어지는 의례에서 사냥꾼은 자신이 그 동물의 죽음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고자 한다. 그리고 고기가 마을에서 나눠질 때 샤먼의 주술이 사용될 만큼 도덕적으로 부적절한 방식으로 동물을 죽였다고 느끼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각자 할당된 몫을 거부할 것이다. 실제로 나는 곰이 인간과 매우 유사하다는 이유로 곰을 먹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는 사람들을 만난 적도 있다. 그러니까 곰을 먹는 것은 일종의 식인에 관여하는 것이다.

아마존의 일부 민족 집단에서 샤먼은 주술을 통해 원래는 문제 있던 고기를 문제가 되지 않는 음식물로 바꿀 수 있다(Hugh-Jones 1996; Descola 1996: 91-92; Fausto 2007). 그러나 유카기르인은 그와 달리 사냥감을 죽여서 먹음으로써 발생하는 도덕적 딜레마를 완전히 해결할 수단을 찾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의 관점에서 동물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동물이 정확히 인간처럼 독자의 마음과 사고를 가진 것으로 간주됨과 동시에 타자로서도 상정된다는 사실이다. 덧붙이자면 죽임을 당한 동물의 영혼이 환생한다는 유카기르의 사고 또한 죄의 감정을 완화시키는 데 일조한다. 그렇지만 사냥꾼이 사냥감을 죽일 때 종종 현실적인 도덕적 불안을 자각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더구나 유카기르족은 평상시에는 육식을 즐기고 육식할 때에 죄 혹은 갈등을 경험하게 되는 분명한 징후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인의 문제는 그들 사냥의 우주론의 가장 중심에 위치하는 도덕적 패러독스이다. 따라서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아바쉬랄이 식인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냥감 동물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식인자라고 유카기르인들은 말한다.

 

 

신체와 냄새

 

유카기르족에서 인격성은 정신적인 특성뿐만 아니라 생리적인 특성까지 포괄한다. 신체와 냄새는 유카기르족에게 인격성의 관념의 일부이며 지금 당장 그들 자신이 어떤 부류의 종과 왕래하고 있는지를 확정하는 데에 중요하다. 냄새에 관해 가장 중요한 구분은 이레예(ile’ye)페이옐(pe’yel)이다. 부패, 질병, 죽음을 의미하는 후자는 다양한 악의 속성이다. 예를 들어 어떤 질병의 영은 언제든지 눈에 보인다고는 할 수 없고 어디에 있는지는 다만 그 불쾌한 냄새로 알 수 있다고 한다. “아바쉬랄이 사냥감을 찾는 동안에는 언제나 냄새가 나지.”라고 어느 늙은 여인네가 말해주었다. “그것들은 틀림없이 악취를 풍긴다네.” 사람이 죽을 때에 그 유체는 페이옐이 되어 가까운 친척을 오염시킨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이것은 친척 남성이 그 후로 일 년이 지날 때까지 동물을 잡는 데 순탄치 못할 것임을 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음의 냄새를 몸에 두르게 되어 그것이 사냥감 동물을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겁주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레예는 달콤함, 즐거움, 기쁨을 의미하고 특히 맛있는 음식의 냄새, 아이나 여성의 냄새를 묘사하는 데에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여성과 아이에 대한 애정은 입맞춤보다 냄새를 맡음으로써 표현된다. 아주 좋은 냄새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은 목덜미나 턱의 냄새를 맡는다. 실제로 사냥꾼들은 여성의 성적매력은 겉모습보다 냄새의 문제이며, ‘딸기꽃이나 산초냄새가 나면 좋다고 말한다.

예로부터 냄새는 한 인물이 어떤 민족에 귀속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징표로 간주되어왔다. 요헤르손은 유카기르인이 에벤인을 그들이 내뿜는 다람쥐와 썩은 순록고기 냄새로 식별하고 또 사하인을 그들이 내뿜는 썩은 생선 간과 소똥 냄새로 식별한다고 했다(Jochelson 1926: 23). “그렇지만 지금은...”이라고 어느 연로한 여성은 말했다. “누구에게라도 많던 적던 똑같은 냄새가 나. 사람들이 서로 결혼하고 같은 것을 먹기 때문이야.” 그렇지만 나는 사람들, 특히 사하인이 러시아인의 냄새에 대해 드러내는 강한 혐오감에 놀란 적이 종종 있다. 예를 들어 아들이 러시아여성과 결혼한 네렘노예(Nelemnoye) 출신의 사하 여성과 함께 저녁식사 테이블에 둘러앉은 적이 있다. 아들이 자신의 아이를 모친에게 안아보라고 건네주었을 때 러시아인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그녀는 그 아이를 안는 것을 거부했다.

비인간의 인격이 내뿜는 냄새는 유카기르어에서는 별도의 어휘, “코에 관계되다라는 의미를 가진 요로라(yo’rola)에 의해 지시된다. 이 말은 강한 향기를 발산하는 포유동물에 대해 특히 사용된다. 즉 여우, 울버린, 엘크, (특히 발정기의) 순록 수컷 및 유럽족제비를 말하며, 이 중에서도 유럽족제비는 유달리 강한 냄새를 풍긴다. 나는 사냥꾼들이 울창한 타이가 숲에 숨어 지내는 엘크와 곰을 냄새만으로 찾아내는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다. 마찬가지로 동물의 똥은 사냥감 동물의 은신처를 드러내는데, 그 냄새로 알아챌 수 있다. 많은 사냥꾼이 이 일에 숙련되어 있으며, 똥의 강도나 냄새를 기초로 그 동물의 성별, 연령, 건강상태까지 정확하게 판정할 수 있다. 또 사냥꾼이 말하기를 각각의 장소의 영적인 지배자는 자신의 영역을 냄새의 흔적으로 보여주는데, 그것은 동물이 냄새자국과 영역표시의 지점을 확정해서 활동영역을 나타내는 것과 거의 유사한 행동방식이다. 실제로 어느 사냥꾼은 한 정령의 영역을 통과해서 다른 정령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냄새만으로 알 수 있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그러나 강조해야하는 것은 유카기르족 사냥꾼들이 후각을 중요시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시각이 중요치 않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냥꾼이 엘크의 냄새를 몸에 묻히고 그 몸짓을 모방해서 엘크를 흉내 낼 때 그들의 목적은 그 동물을 가시화해서 공격할 수 있도록 열린 공간으로 불러내는 데에 있다. 뉴기니 숲의 우메다족(Umeda)(Gell 1996: 233-54)이나 아마존의 수야족(Suya)(Classen 1993: 8-9)처럼 시각을 경시하고 억압한다고 보고된 문화에서조차 그들의 생업활동에서 특히 사냥감을 공격하는 순간에는 확실히 시력에 의존하려 한다. 실제로 나는 무문자사회를 반시각적으로 정형화하는 경향을 조금 의심스럽게 생각한다. 유카기르에서 나 자신의 경험은 스미스의 경험(Smith 1998: 412)과 공명한다. 그는 치페완족(Chipewan)의 사냥꾼들(데네족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숲의 감성이 강조하는 것은 가능한 한 많은 감각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것, 그리고 나아가 한층 강력하게 그것들의 감각이 상호작용하고 독자의 의식수준을 만들어내듯이 그 모든 감각에 주의를 기울일 것, 이다.” 이 언명이 분명히 드러내는 것은 다음의 사실이다. 즉 여러 감각을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과 감각의 명확한 계층구조를 구축하는 것에 저항함으로써 수렵민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냥에 나설 때에는 사람의 모든 감각이 가동되어야 하고 지각의 전체적인 구성 속에서 각각의 감각이 협동해서 투입되어 분리가 거의 불가능한 채로 뒤섞여야 한다.

사례를 들어보면, 사냥꾼의 머리는 그의 시각, 청각 및 후각에게 공통의 장이다. 사냥꾼이 사냥감 동물의 소리를 듣기 위해 들리는 쪽으로 머리를 기울이면 필연적으로 눈과 코를 그와 같은 방향으로 돌리게 되며, 그러한 행동은 동일한 정보원에 대해 방향지어진다. 따라서 분리된 지각의 회로를 통해 사냥감을 감지한다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는다라기보다, 이러한 각기 다른 감각들은 기능에 따라 그 겹쳐짐을 현시하는 것이며 신체적인 방향지움이라는 전체시스템 하에서 편성되는 것이다(Merleau-Ponty 1998: 317-18; Ingold 2000: 262). 랑거(Langer 1989: 49)가 제시한 사례도 이와 같다. “예를 들어 만약 나의 시선이 책상 위 꽃병에 꽂히면, 나의 눈이 그것을 훑어서 움직이는 방식은 내 손가락이 그것을 만지작거리는 방식을 미리 지시한다.” 그녀가 지적하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대상을 느끼는 이상으로 대상을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눈으로 대상을 느끼고 손으로 대상을 본다. 그리하여 우리의 실제 경험에서 각기 다른 감각들의 현시는 단 하나의 것으로서, 감지하는 신체 그 자체로 상승작용 하는 시스템 속으로 휘감긴다. 그 때문에 그 감각들을 지적으로 구분하려는 시도는 거의 무의미한 작업이 된다.

유카기르족 언어에는 신체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정신에 해당하는 말이 없지만,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냥꾼들은 확실히 알고 있다. ‘사람들에게 이성적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와시리 샤루긴에게 물었을 때, 그는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머릿속 아이비의 움직임이라고 답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인격과 비인간의 인격 그 어느 쪽도 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단언했다. 그런데 그는 또한 다른 부류의 인격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한다고도 주장했다. “물론 인간과 엘크, 곰은 다른 사고를 하지. 그것들은 각각이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야.”라고 그는 논했다. 이처럼 아이비와 생각하는 능력 사이에는 분명히 연결되고, 그것은 인간의 인격에서도 비인간의 인격에서도 형태상으로는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은 다른 모습으로 생각한다. 이 차이의 근원은 내게는 신체의 특이성인 것처럼 생각된다. 아이비가 이성의 능력을 일으키는 것에 반해, 신체는 사고와 세계를 연결하는 기본적인 매개점이 된다. 바꿔 말하면, 비인간의 인격이 인간이나 다른 비인간의 인격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아이비 혹은 영혼 때문이 아니다. 아이비가 동일한 이성적 능력을 인간과 비인간에 부여하는데도 그것들의 인격이 다른 모습으로 사고하는 것은 각각의 종이 특정한 신체적 존재이며, 세계에 대한 지향성을 일으키는 독자의 육체적 자연메를로 퐁티의 말을 빌리면 특정한 신체의식’(1998: 317-8)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특유의 신체를 가진 결과로서 각각의 종은 세계를 독자의 방식으로 지각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인간과 완전히 다르지 않다. 와시리 샤루긴은 인간의 포식행위와 아바쉬랄의 그것을 비교함으로써 이 점을 설명해주었다. “우리 사냥꾼들이 엘크사냥에 나가는 것처럼 아바쉬랄도 사냥을 한다. 그러나 아바쉬랄들에게는 우리의 아이비가 엘크다. 여자 아이비를 볼 때 그것들에게 암컷 엘크가 보인다. 남자 아이비를 볼 때 그것들에게 수컷 엘크가 보인다. 그리고 아이의 아이비를 볼 때 정말이지 작은 엘크가 보인다. 마찬가지로 뚱뚱한 사람들, 마른 사람들, 늙은 사람들 혹은 젊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아바쉬랄에는 그것들이 각기 다른 크기와 연령의 엘크로 보일 것이다. 아바쉬랄은 바로 우리와 같은 사냥꾼이지만 무엇이 엘크로 보이는지는 우리와 다르다.”

아바시(abasy)가 인간 종의 아이비를 죽이고 먹는 것에 성공하면 해당 인간은 병에 걸려 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루긴은 내게 아바쉬랄은 자신들의 공동체 속에서는 당연히 선량한 사람들이라고 힘겹게 설명해주었다. 그것들은 인간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살아간다. 캠프를 가지고 있으며 개썰매로 여행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갖는다. 아바쉬랄은 그 자체로 사악한 생명체라고 말할 수는 없고 단지 인간존재의 관점에서 보는 한에서 인간의 아이비를 죽여서 먹는 것은 나쁜 행위가 된다. 인간 또한 사냥감이 되는 동물의 눈에서 보면 아바쉬랄이다. 내가 이를 깨달은 것은 사냥감 동물이 인간 사냥꾼을 무서워하는지 니콜라이 리하체프에게 물었을 때였다. “물론 무서워하지라고 그는 답했다. “우리는 그 몸을 먹어. 그래서 동물에게 우리는 악마야.” 그리고 그는 그래서 동물은 우리에게 질병이나 그 외의 액을 보내지. 죽여서 먹는 우리를 벌하기 위해서 말야.”라고 덧붙였다.

포식자와 먹잇감의 관계성의 동태에 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후술하기로 하고, 지금 단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은 유카기르인에게 아이비는 다양한 존재를 연결하고, 그것들을 잠재적인 인격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 그 한편으로 이러한 존재의 각기 다른 부류의 인격으로서의 독자성은 각각이 가진 신체의 특이성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즉 특정한 형상이나 움직임, 냄새를 풍기는 신체의 육체적 특질이란 바로 종별의 각기 다른 정체성이 창발하는 장이다. 사냥꾼이 자기를 인간 종의 사회적도덕적인 척도에 맞추어 사고하는 인간의 인격으로 인정하고 타자로부터 그렇게 인식되는 것은 그의 신체가 인간존재의 신체이기 때문이며, 순록이나 아바시 또는 그 외 비인간적인 인격의 신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종의 공동체 내부에서 사냥꾼에게 특정한 사회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그 자의 신체가 아니라 아이비. 한편 종들 사이에 걸친 관계에서 그것은 역전한다. 이 관계에서 어떤 부류의 인격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신체다. 한 인격의 종으로서 정체성은 신체에 귀속되거나 혹은 신체에 접합된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당신이 누구인지, 또 어떻게 세계를 지각하며 구축하는지는 당신이 가진 신체의 종류에 의한다.

 

 

상황으로서의 인간성

 

유카기르족에서 인간의 인격과 비인간의 인격 사이의 기본적인 관계성을 해명하는 것으로서 포괄적 및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창조신화는 요헤르손도 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기독교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유카기르인이 성서의 창조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마치 그들은 인간의 출현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인간이 출현하게 되었는지를 집요하게 묻는 내게 연로한 여성 아크리나 샤루기나는 다음과 같이 답해주었다.

 

먼 옛날, 아주 작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세계는 매우 더웠다.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었지만 우리는 그들을 매우 작아서 다람쥐 모피로 한사람분의 옷을 지어 입을 수 있다고 부른다. 그들은 벌거벗었고 날고기를 먹었으며 불 피우는 법을 몰랐다. 세계가 추워지기 시작하자 작은 사람들은 다람쥐를 죽여 그 모피를 입었다. 그래도 너무 추웠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로부터 횃불을 들고 강림했다. 예수는 그것을 작은 사람들에게 내려주었고 그래서 그들은 불을 사용하게 되었다. 불 연기가 작은 사람들을 키 크게 만들었고 그들은 인간이 되었다.

 

불이 자연의 물질을 문화적 용도로 전화시키는 원형적인 수단이라는 것은 틀에 박힌 양식 중 하나이다. 요리란 그 가장 명백한 사례다. 그러나 유카기르인에게 불은 또한 사람들을 변용시키기도 한다. 사람들은 캠프파이어 연기에 쐼으로써 한 인격의 종으로부터 다른 인격의 종으로 변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설명해보자. 유카기르인에게 좋은 사냥꾼은 자신의 인간 냄새를 억누르는 기술에 숙달된 자다.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사냥꾼이 숙련된 탈인간화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그들의 일반이론이다. 즉 한 인간이 가진 인간 신체의 성질을 사냥감 동물의 신체의 그것으로 바꿔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사냥꾼은 숲에 나가기 전날 밤에 바냐(banya 사우나)를 하러 간다. 그들은 비누를 사용하는 대신 마른 자작나무의 묶음으로 온몸을 문지른다. 엘크는 자작나무 잎의 향기를 맡으면 도망가지 않고 사냥꾼 옆으로 가까이 다가온다고 그들은 말한다. 나아가 특히 강한 인간의 냄새가 난다는 아이는 사냥꾼에 가까이 가서는 안된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집 안에서 아이들에 대한 애정은 냄새를 맡음으로써 표현된다. 부모는 아이들의 목덜미에 코를 가까이 대고 냄새를 맡는다. 그러나 사냥꾼이 숲으로 출발할 때에는 아이의 냄새에 의해 오염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식이나 손자를 안아서도 안된다. 사냥에 성공하기 위해서 중요한 또 하나의 전제조건은 성적인 절제다. 적어도 사냥에 나가기 전날 사냥꾼은 성교를 참아야 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사냥꾼이 성교를 참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성적인 관심이 사냥감 동물 및 그것과 결부되는 영적 존재에게 향한다는 데 있다. 그런데 그것은 또한 성적접촉이 그의 신체에 명명백백한 인간의 악취를 남기는 때문이기도 하다. 사냥꾼들은 내게 사냥감 동물을 매료하는 이들은 오직 인간 체액의 냄새가 없는 이들뿐이라고 단언한다.

따라서 유카기르족은 사냥하는 동안 숲의 세계나 잡힌 동물들에게 이질적인 외부자의 신체이기를 정지시킨다. 그들에게 사냥의 본질은 사냥감 신체의 움직임과 냄새를 모방함으로써 사냥감과 동일화하고 그 지각과 행동 모드를 알아내려는 시도에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캠프가 있는 땅은 인간의 냄새, 특히 나무연기 냄새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실제로 사냥꾼들은 담배든 캠프파이어든 연기야말로 동물의 냄새를 중화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숲과 캠프의 경계는 어떤 물리적인 표지에 의해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 캠프파이어의 연기가 도달하지 않는 곳의 위치로 그어진다. 따라서 나무연기는 인간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사냥꾼이 사냥에서 돌아올 때 그에게서 타자성을 쫓아내고 그를 인간화한다는 현실적인 감각을 준다. 유카기르족에게 나무연기와 인간성은 같은 개념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인간성이라는 상태가 인간존재에만 귀속되지 않고 모든 인격 종에 머문다는 것이다. 동물이나 그 외 비인간은 인간의 삶과 유사한 삶을 영위한다고 한다. 그것들은 숲을 돌아다닐 때 혹은 강을 헤엄칠 때 물고기나 사냥감 동물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정령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숲의 어딘가 혹은 강과 호수 깊은 곳에 있는 그 자신의 땅에 들어갈 때 그것들은 인간의 모습을 취하며 인간과 마찬가지로 집에서 산다고 한다. 비인간의 집은 인간의 집과 완전히 똑같다. 집 한가운데에 난로가 있고 난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숲에서 돌아오는 그것들을 인간화한다. 다만 그 변용은 결코 완전하지 않다. 변용한 상태가 되어도 동물이나 다른 비인간은 변용 전의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인 특징을 어느 정도 유지한다고 하며, 이러한 특징에 의해 그것들은 인간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는 특별한 집단의 존재로서 부류가 결정된다. 다음 장에서 언급할 이야기에는 한 사냥꾼이 순록인간과 만난다. 그것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천막에 머무는데,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대신 신음소리를 내고 고기 내신 이끼를 먹는다. 마찬가지로 여우인간은 강렬한 냄새를 풍기고 교활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더러운 집에 산다. ‘엘크인간은 일반적으로 우호적이고 배려심이 있으며 집을 깨끗이 한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거나 이전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행동들은 다음의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동물은 인간 종의 사냥꾼과 만날 때가 아니라 자신의 땅에 있을 때만 인간으로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숲속에서 그것들은 동물의 모습을 하고 문화적인 속성을 잃는데, 이 과정을 통해 카니발리즘을 범하리라는 두려움 없이 담담하게 동물을 죽여서 소비할 수 있다. 실제로 이것은 크리족(Cree)에 대해 탄너(Tanner 1979)가 제시한 해석이다. 사냥감 동물이 동물의 눈을 하고 있는지 인간의 외견을 띠고 있는지는 숲을 돌아다니는지 자기 집에 머무르는지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고방식은 크리족과 유카기르족이 공유하는 사고방식이다. 크리족에게 사냥감 동물은 두 수준의 현실에 동시에 참여한다. 하나는 자연적 수준이고, 또 하나는 문화적 수준이다.”(Tanner 1979: 137)라고 탄너는 주장한다. 자연적 수준에서 만나는 그것들은 죽임을 당해 소비되는 단지 물질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문화적 수준에서는 사회적문화적 조직에 대한 전통적인 크리족의 양식을 모델로 하는”(1979: 137) 영역에 참여하는 의인적(擬人的) 존재로서 재-해석된다.

그러나 이미 잉골드(Ingold 2000: 48-52)와 브라이트만(Brightman 1993: 176-77) 등의 논자가 지적했듯이, 동물의 출현을 한편으로는 영적/문화적’,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적/자연적으로 나눠서 사고하는 것에는 큰 문제가 있다. 첫째, 유카기르족에서 인격으로서의 사냥감의 지위는 실제 사냥 전후에 이뤄지는 이야기로서 인류학자가 상징적 활동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서만 표명되지 않는다. 사냥꾼이 숲에 있는 동안 실질적으로 모든 행동에서 사냥감의 지위는 인격으로서 언급된다. 잡힌 동물의 인격은 단지 이야기하는 중에 부가되는것이 아니라 사냥 자체의 실천적인 행위에 침투한다. 유카기르인이 사냥의 성공을 종종 사냥꾼에 대한 동물의 사랑으로 되돌린다는 사실은 이 점을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고방식은 상호 응답하는 <타자>를 전제로 하는”(Brightman 1993: 177) 것이며 살아있는 것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짜여진행동프로그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잡힌 동물은 단순한 사물로 환원되지 않고, 사냥꾼은 그것을 마음 없는 고기 이상으로 본다.

나아가 유카기르족은 동물을 그들 자신의 이미지로서 개념화할 뿐만 아니라 사냥꾼 자신을 사냥감의 이미지로서 개념화한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이것은 잡힌 동물의 움직임과 냄새를 모방하는 것을 포함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대화를 절제하는 것도 이에 포함된다. 일련의 덫을 점검할 때 사냥꾼은 홀로 잘 다닌다. 그런데 가령 엘크나 곰을 사냥하기 위해 집단으로 이동할 때도 무엇보다 말을 하는 법이 없다. 소리를 내는 경우 그 소리는 동물을 유혹하려고 동물의 소리를 모방할 때뿐이다. 그러나 사냥꾼들은 동물의 소리나 신체 모습을 모방하는 것이 문화적인 것에 대치되는 자연적인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유카기르어에는 우리의 자연에 대응하는 말이 없으며 인간고유의 속성으로서의 문화에 상당하는 말도 없다.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사냥꾼이 사냥감과 비슷한 모습으로 자신을 변화시킬 때, 그 동물의 기분과 감각 및 감수성과 어떤 형태로든 공명하는 퍼포먼스를 만들어냄으로써 동물을 유혹하고 동물이 자신을 바치도록유도한다. 따라서 동물의 정체성을 몸에 두르는 것은 탈주체화의 프로세스가 아니라 오히려 타자화의 프로세스로 생각할 수 있다. 사냥꾼은 동물의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신체적 경험 혹은 네겔이 말한 경험의 주관적 성격’(Nagel 1997: 166)을 도입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유카기르족에게 인격성(personhood)은 인간 종의 증거가 되는 양식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란 인격의 수많은 외견 중 하나에 불과하다. 따라서 엘크나 순록이 자신의 집에 돌아갈 때 인간의 겉모습을 띤다고 유카기르인이 주장할 때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두 개의 영역[문화와 자연]을 횡단해서 비유적인 유사함을 끌어내는 것과는 전혀 다르며, 오히려 [인간과 비인간의] 차이화의 전제가 되는 참된 단일성을 지시하는 것이다”(Ingold 2000: 50). 나는 이 단일성을 상황으로서의 인간성’(Descola 1986: 120)으로 제시하겠다. 동물이나 그 외 비인간의 인격은 인간에게 어떻게 보인다 해도 인간의 행동과 유사하거나 완전히 동일한 행동양식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자신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유카기르인은 믿는다. 이것은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Viveiros de Castro 1998)가 전대미문의 혁신적인 논문에서 퍼스펙티브주의로 명명한 것이다. 그 사고에 따르면, “세계는 인간과 비인간으로부터 다양한 부류의 인격들이 살고 있으며, 그것들은 각기 다른 관점에서 현실을 지각한다”(1998: 469). 이것들은 동일한 세계에 대한 각기 다른 관점이 아니라 동일한 관점을 각기 다른 현실에 들여온 결과이다. 따라서 모든 부류의 종은 각각 독자의 영역에 있으며 세계를 인간과 동일한 방식으로 지각한다. 그러나 각각이 무엇을 보는지는 그 신체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인간 종은 인간을 인간으로서, 동물을 동물로서, 또 정령을 (만약 보인다면) 정령으로서 본다. 그렇지만 (포식) 동물과 정령은 인간을 동물(사냥감)로서 본다. 마찬가지로 (사냥감으로서의) 동물은 인간을 정령으로서 아니면 (포식) 동물로서 본다. 마찬가지로 동물과 정령은 자신을 인간으로서 본다. 그것들은 자신의 집이나 마을에 있을 때에는 자신을 의인적(擬人的) 존재로서 (혹은 의인적 존재가 된다고) 지각하며, 자신의 관습과 특징을 문화의 형식으로 경험한다”(Viveiros de Castro 1998: 470).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의 퍼스펙티브주의는 대략적으로 유카기르의 사고와 공명한다고 나는 믿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서로 다른 두 개의 종의 존재자가 동일한 대상에 대해 전혀 다른 지각경험을 하는지의 사례를 살펴보았다. 아바쉬랄이 인간의 아이비를 엘크로서 보는 반면, 인간존재는 아이비를 영혼 혹은 생명의 본질로 본다. 인간에 관해 말하자면, 엘크를 사냥감으로 보는 반면, 엘크는 인간을 아바쉬랄로 본다. 따라서 정령과 인간 양자 모두는 사냥감을 보고 그것을 사냥하기 위해 나서지만 무엇을 사냥감으로 지각하지는 다르다. 그리고 누구를 악령으로 생각하는지는 어떤 신체의 퍼스펙티브를 채택하는지에 달려있다.

덧붙이면 특정한 종이 다른 종에 대해 가지는 퍼스펙티브는 그것이 자신의 양식과 실천을 지각하는 방식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냥꾼은 울버린을 탐욕이 강하고 부도덕하다고 보지만, 울버린의 퍼스펙티브에서 보면 그 반대다. 스피리돈이 지적했듯이 울버린은 자신을 도덕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반면, 인간 사냥꾼이 울버린을 죽이려 할 때에는 부도덕한 행동규칙을 시인하는 자로서 울버린을 본다. 이처럼 다양한 인격의 종들 각각은 말을 사육하고 불을 소유하며 발화능력을 활용하고 도덕규범에 맞추어 일상생활을 꾸려가는 인간주체로서 정도의 차는 있지만 동일한 조건에서 자신을 지각한다.

나의 이 관찰에 비춰보면, 유카기르족에게 인간성의 유래를 설명하는 포괄적인 기원신화가 없는 것은 그렇게 기묘한 일이 아니다. 결국 인간성이란 모든 종의 인격이 제각기 고유한 자연을 경험하는 형식이다(Viveiros de Castro 1998: 477). 다양한 부류의 종의 인격의 차이는 주로 개별의 퍼스펙티브의 처소인 특유의 외적특징 혹은 신체에 존재한다. 따라서 동물의 기원에 얽힌 유카기르족의 무수한 신화가 바로 이 점다른 부류의 동물들이 어떻게 각각의 신체적인 외견을 입수했는가에 관련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Jochelson 1926: 241-98: 1900; Zokova, Nikolaeva, and Demila 1989; Spindonov 1996[1930]: 46-57).

그러나 조금 불가사의한 것은 동물이 자신의 땅에 있을 때조차 인간과 완전히 같아지지 않고 동물의 특질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실제로 모든 종의 인격이 해부학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인간이 자신을 보듯이 자신을 본다고 한다면, 동물들이 자신의 숨겨진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데도 자신을 동물의 생리적 및 행동적 특질까지 갖춘 것으로 본다는 패러독스는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난제를 풀기 위해서는 신체의 문제 그리고 동일성과 타자성의 동태에 대해 신체가 맺는 관계의 문제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Rane Willerslev (2007) “Chapter 4. Ideas of Species and Personhood”, Soul Hunters: Hunting, Animism, and Personhood Among the Siberian Yukaghir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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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하는 현대사상과 문화인류학

 

시미즈 타카시(清水高志)

 

키워드: 상관주의 비판, 도구, 사물, 배치, 교차교환

 

문화인류학과 현대철학이라는 두 영역에서 21세기에 이르러 새롭게 부상하는 경향의 하나로 인간과 자연(및 사물)의 관계 자체를 근저에서부터 다시 묻는 움직임이 있다. 예를 들어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는 서양문명이 문화들을 상대주의적으로 다루는 관점임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객관적인 자연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것에 다름이 있음을 주창하고 있다. -인간의 퍼스펙티브에서 파악된 세계가 다종다양하게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철학에서도 대상세계를 인간주체와 상관적인 형태로만 파악한다는 퀑탱 메이야수의 비판(상관주의 비판)이 관심을 모으고 있는데, 이 또한 인류부재의 세계가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를 문제로 삼는다. 물론 근대적 주체에 대한 비판이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20세기에도 있었지만, 다양한 비-인간이 세계를 파악하는 중심적 위치를 점할 수 있고 나아가 사물이 일정한 퍼스펙티브를 가질 수 있다는 기묘한 논점은 최근에 등장한 것이다.

객체지향의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을 주창한 그레이엄 하만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하이데거의 도구분석이라는 논의를 발전시켜 사물과 사물이 상호 절대적으로 독립하고 있음을 특히 강조한다. 마르틴 하이데거에게서 세계는 무언가의 목적을 가진 <도구>가 연관되면서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이 연관에 불확정함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스스로의 실존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갖는 인간이다. 인간의 수발을 들 때 <도구>는 불확정한 존재가 된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이에 반해 하만은 각각의 <도구>나 사물 자체가 인간존재를 떠나 이미 <모조리 퍼 올릴 수 없는> 불확정성의 축이라고 주장한다.

온갖 사물, 대상, 혹은 <도구>를 생각해낸다 해도 이제까지는 그것들을 연결하는 중심적인 매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주체였다. 대상세계가 아무리 다양성과 차이를 품는다 해도 그것들을 무언가의 정합성 속으로 회수하는 것은 주체의 움직임이며, 그 과정에서 주체 자체가 변질된다 해도 주체의 대상에 대한 이 특권적인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대상세계가 차이와 다양성으로 가득 차 있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러한 특권적인 주체가 본 잉여, 외부로서 그렇다. 포스트구조주의까지의 사상은 그러한 의미에서 차이성에 대해 열린 여지를 주체에 남겨주기 위한 이론이었다. 기존 철학에서는 대상세계가 주체로부터 진정 독립한 것으로 파악하지 않았으며 주체와 대상을 상관적으로만 다루었다는 메이야수의 작금의 비판 또한 그러한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주체와는 별도로 대상이나 <도구>를 매체로 함으로써 이러한 구도를 뒤집으려는 것이 현대철학에서 대두되고 있는 새로운 경향이다. 하만이 말하는 오브젝트(object) 또한 그러하며, 인간부재의 세계로부터 사고를 출발시키는 메이야수 또한 그러한 경향을 공유하고 있다.

사물 그 자체는 그것을 지각하는 인간들이 <모조리 퍼 올릴 수 없는> 외부다. 근대 이후의 철학이 어디까지나 인간이라는 주체에게 나타나는 한에서의 사물=대상만을 다루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사물과 사물 또한 서로 그러한 관계에 있음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어떤 사물로부터 보고 다른 사물은 표면적인 그 나타남(감각적 오브젝트)으로밖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라고 하만은 말한다. 사물에는 그 숨겨진(탈각한) 외부(실재적 오브젝트의 일부분)가 있다는 것이다. 사물과 사물의 부정확한 상호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간주체에 의한 퍼스펙티브뿐만 아니라 사물로부터 본 사물, <사물의 퍼스펙티브>로부터 보이는 사물을 고찰해야 한다. 사물이나 비인간을 매체로 복수의 사물과 사물의 관계를 생각하는 발상이 현대철학에서 점차 중요해지고 있다.

사물이나 <도구>에 대한 이러한 착상, 그리고 그를 통해 기존의 방법론을 비판하려는 태도는 인류학에서도 메릴린 스트래선의 논의에 전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포스트모던의 사회학이나 비평이론의 인류학버전인 재귀인류학에서는 타문화 속에 몸을 던지고 그 문화의 내측을 체현해서 말하는 특권적인 <화자>를 부정했다. 그러나 여전히 여행자로서의 <화자>는 복수의 문화들에 동시에 몸을 던지고 자문화조차 상대화하며 그것들을 연결하는 결여항적인 매체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기능하고 있다. 이러한 류의 문화상대주의는 문화들을 단지 단편적인 형태로만 제시할 뿐이라고 스트래선은 비판한다.

이에 반해 그녀가 중시하는 것은 <도구>=사물이라는 매체다. 한 집단을 특정의 배치(, ) 하에서 연결하는 것은 매체로서의 <도구>. 즉 그 <도구>를 통해 무언가의 해석을 하고 특정의 관계(배치)를 그려내는 것이다. 이때 동일한 <도구>가 인접하는 다른 사회집단 하에서는 다른 해석이 내려지고 다른 배치가 묘사되기도 한다. 이 경우에 <도구>는 그러한 동료집단들의 문화를 상대화하면서 연결하는 매체가 된다. 이때 각각의 인간집단이 읽어 들이는 용도에 앞서서 그러한 <도구>=매체는 이미 존재한다. <도구>나 사물의 <모조리 퍼 올릴 수 없음>도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무언간의 <도구>는 한 집단에서는 중심적인 기능을 맡지만 다른 집단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듯이 또 다른 식으로 기능할 수 있다. 이와 동시에 그 다른 집단에서 중심적인 기능을 맡는 또 다른 <도구>가 존재할 것이다. <도구>는 집단이 그리는 배치()와 다른 집단이 그리는 배치()를 부분적으로 연결하며, 그 한편으로 배치() 자체 또한 이미 다른 <도구>를 포함하는 매체가 된다. 이러한 구조에 의해 매체로서의 <도구>와 배치()는 고정되지 않고 각각 다양한 모습을 띤다. 문화들은 배치()의 배치()인 최대의 구조로 회수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재귀인류학처럼 단지 단편이 되는 것도 아니며, 어디까지나 부분적으로 연결되어 간다. 최대의 구조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어떤 부분에도 복잡한 사물=<도구>와 배치()의 교차교환의 복잡한 관계가 발견된다는 것이며, 도처에 그것이 예시(豫示)된다는 것이다.

<도구>=사물이 다양한 인간집단의 행위를 상대화하는 기축이 됨과 동시에 그러한 사물 자체가 복수로 나타난다는 스트래선의 논의와 그 방법론은 주체중심의 발상 그리고 세계의 다양성을 인간주체와의 상관성을 벗어나는 잉여로만 보는 사고방식을 진작 넘어서고 있다. 철학이 마침내 근대서구의 사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탐색하기 시작한 오늘날, 인류학으로부터 얻는 시사점은 매우 풍부하다. 현대사상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이제까지의 주체중심의 상대주의를 넘어서서 사물을 중심적 매체로 편성하는 이론을 지역적인 문화사상에 머물지 않고 보편화하는 것이며 또 그러한 시야로부터 자연과학 자체를 파악하는 것이다

 

 

 

 

Lexicon 現代人類学148-151.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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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타 케이지(岩田慶治)의 애니미즘론

 

시미즈 타카시(清水高志)

 

키워드: 애니미즘, 이와타 케이지, 쇼보겐조(正法眼蔵), 상관주의, 원풍경

 

애니미즘은 만물에 영(anima)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원시적인 정령신앙을 가리키는 개념으로서 오랫동안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애니미즘의 세계관 자체를 서구근대의 그것과는 다른 존재론(ontology)으로 재정하려는 시도가 세계적으로 관찰되고 있다. 예를 들어 현대 프랑스에서 레비스트로스의 후계자로 주목받는 문화인류학자 필리프 데스콜라는 애니미즘을 내추럴리즘, 토테미즘, 아날로지즘이라는 유형과 더불어 유력한 세계관들 중 하나로 파악하고 있다.

데스콜라에 따르면, 애니미즘은 근대서구의 인간의 세계관을 나타내는 내추럴리즘과 특히 대조를 이룬다. 내추럴리즘이 인간의 정신과 문화들을 다종다양한 것으로 사고하는 한편으로 자연계 그 자체를 객관적인 법칙이 관통하는 하나의 존재로 파악하는 것에 반해, 애니미즘의 세계관에서는 인류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물이나 비인간 또한 각기 세계를 가치짓는 퍼스펙티브의 중심이 되며, 그 의미에서 그것들은 <인간>과 같다. 그러므로 세계 그 자체는 다양한 퍼스펙티브의 숫자만큼 존재한다. 한마디로 내추럴리즘이 다문화주의와 단자연주의인 반면, 애니미즘은 단문화주의(모든 것이 혼을 갖는다)와 다자연주의다.

단순한 문화상대론이나 가치상대론에 의한 이질적인 문화의 허용은 근대에서도 포스트모던에서도 크게 유행했다. 그러나 그러한 상대주의 자체를 뒤집지 않는 한, 근대적인 세계관의 연장선상으로밖에는 다른 문화를 이해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서구와 일본의 문명에 대해서도 근대 이전부터 이어져온 고층(古層), 그 핵심부에 도달할 수 없다. 21세기에 이르러 철학자 미셸 세르는 데스콜라의 작업을 채용하면서 서양문명 자체에 내추럴리즘 이외의 세계관이 실제로 짙게 남아있으며 켜켜이 뒤얽혀있음을 세밀히 검토한다. 이러한 태도는 애니미즘적인 문화 위에 대륙전래의 다양한 문화 그리고 서구에서 비롯된 근대문명을 받아들여 형성된 일본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매우 참고할만하다. 일본문화 속에 역사적으로 스며들어 있으면서 현대문명과 혼효하는 애니미즘의 세계관을 서구근대의 그것과 길항하는 <사상>으로서 조금이라도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우리[일본인]가 애니미즘에 대해 그 뉘앙스를 남김없이 음미하고자 한다면, 프랑스사람인 데스콜라가 고찰한 것보다 우리의 세계관에 내재한 접근법을 시도하는 것은 어떠할까?

 

전전(戰前)부터 전후에 걸쳐 교토학파의 학문의 흐름을 이어받은 특이한 인류학자 이와타 케이지의 애니미즘론은 여러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아 전후 교토의 지사인(慈済院)에서 하숙하면서 도원(道元, 1200~1253, 일본의 禪僧)正法眼蔵을 읽으며 청년시대를 보낸 이와타는 본래 지리학을 배우는 중에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코스모스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이 책은 지층의 퇴적 및 조산활동, 기상, 식물의 수평수직 분포 등이 모두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아름다운 질서를 가진 것으로 이 세계를 그리려는 시도다. 전일체(全一體)로서의 세계, <코스모스>를 다루는 과제를 이와타는 훔볼트에게서 이어받는다. 선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와 <코스모스>에 대한 강한 희구는 이와타가 후에 문화인류학으로 전환하여 애니미즘의 연구로 나아간 출발점이 되었다.

세계를 전일체로 파악하기 위해 훔볼트가 코스모스에서 탐구한 방법은 결국 상관학(Physiognomy)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현상이 복수의 층을 이루며 겹겹이 쌓여 관련되고 합쳐지는 모양을 손금을 읽듯이 읽어가는 것이다. 이때 전일체로서의 세계, 집대성된 코스모스를 통일하는 것은 그것과 대치하는 인간이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자의식이 미치는 한에서의 <끝없는 전세계>. 현대 철학자 퀑탱 메이야수는 근대 이후의 철학이 인간에게 자연과 세계, 인간과 관련되는 (상관적인) 한에서만 고찰되어왔다는 것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인류 이전부터 있었던 세계로부터 출발해서 사물과 세계를 다시 생각할 수는 없을까? 그의 이러한 입장은 상관주의 비판으로 불리며 21세기 철학에 커다란 문제를 제기하는데, 이와타는 훔볼트의 <코스모스> 속에서 바로 상관주의적인 한계를 진작 알아채었다. 그리고 그 한계를 넘어 진정한 <코스모스>를 탐구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만년의 훔볼트는 카멜레온을 키웠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방문객에게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나는 카멜레온이 좋소. 카멜레온은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을 각기 다르게 움직일 수 있소. 오른쪽으로는 하늘을 우러르고 왼쪽으로는 땅을 볼 수가 있단 말이오. 그러나 인간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오.” <코스모스>와 대치하면서 그에 도전하는 인간의 자의식은 특권적이지만 <코스모스>의 외부에 놓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동시에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내려다보는복수의 퍼스펙티브를 갖는 것은 통상 불가능하다.

<땅을 내려다보는> 것과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이 공존교차해야만 진정한 전일체, 진정한 <코스모스>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이와타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아가 <땅을 내려다보는> 것을 통해, 동시에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까지 실현하는 것이 그의 학문의 목표였다. <땅을 내려다보는> 것은 그에게 로컬의 <문화의 내측>을 관찰하는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은 그 문화가 <문화의 외측>의 퍼스펙티브를 더불어 포섭하는 것이다. 그러한 복수의 퍼스펙티브의 교차공존이야말로 애니미즘 문화의 특징이라고 이와타는 주장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교차공존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나타내주는 것일까? <문화의 내측><문화의 외측>은 이와타에게 종종 각각의 <근경(近景)><원경(遠景)>에 비유적으로 바꿔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전일체로서의 <코스모스>는 그 양자가 겹치는 곳에서 성립하는 <원풍경(原風景)>이다.

예를 들어 보르네오의 이반족에서는 벼의 탈곡에 사용하는 절구가 그대로 악기가 되고 그 소리가 그들의 일상생활에 구심력으로 작용한다고 이와타는 말한다. <근경>, <문화의 내측>을 형상화하는 힘은 그 자체로 사물 내지는 자연과 함께 한다. 그러나 그 절구소리는 벼의 혼을 불러들이는 것이기도 하며 <문화의 외측>에 있는 자연 그 자체에로, 그대로 땅과 연결된다. 일상생활 속에서 환경과 우리는 불가분하게 융화되어 있으며, 그것이 <근경>, <문화의 내측>을 형상화한다. 그 속에서 사람과 사물, 풍경은 말하자면 거울적이다. 그러나 또 그 풍경은 바로 거대한 풍경, 자연과도 저절로 연결된다. 주체대상의 관계는 주체를 축으로 겹쳐 쌓이고 종합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세계, <원풍경>=<코스모스> 속으로 포섭되고 만다. 아니, 그렇지 않다. <문화의 내측>에서 일상적으로 접하는 사물과 자연 속에서 이미 <코스모스>는 생생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새가 하늘을 날 때, 새는 하늘과 일체가 된다. 그러나 본래 하늘은 무한의 하늘 그 자체와 일체이며 비공(飛空)의 행리(行履)는 가늠할 수 없다.”(어디까지 날고 어떻게 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좌선잠’(坐禪箴)을 해석해서 도원은 말한다(正法眼蔵). <근경><원경> 그리고 <원풍경>은 바로 그렇게 연결된다. 흔하디흔한 사물 혹은 자연과의 대면의 순간에 그 장면 자체를 포섭하는 더욱 큰 <원풍경>을 직접 느끼는 것. 그 놀라움과 함께 근대의 이원론을 뒤집고 그렇게 스며든 애니미즘의 사고를 본류로 되돌리고 나아가 전일체로서의 세계의 품에 다시금 안기는 것. 바로 이 의미에서 이와타의 바람은 애니미즘 사상의 회생이었다.

 

Lexicon 現代人類学104-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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