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적 전회'가 한국인류학계에 진작에 받아들여지지 못한 큰 이유 중 하나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에 대한 이해가 일천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또한 프랑스 지성사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 그 맥락에서 비로소 파악되는 레비스트로스의 학문적 의의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지식의 주변부에서 번역은 주요한 학문활동이다.) 그래서 프레데릭 켁의 레비스트로스에 관한 논문을 번역해올리고자 한다. 켁은 레비스트로스 구조주의의 4세대 인류학자이다. 주로 불어로 책과 논문을 집필하는 탓에, 불어번역을 할 수 있는 인류학자가 희소한 한국에서 그의 한국어 번역본은 아직까지 나와있지 않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의 책의 영어번역본도 거의 없고, 특이하게도 일본어로 번역된 책과 논문은 다수 있다. 그중에서 2008년과 2013년 사상지에 게재된 두 편의 논문 중 전자를 번역(중역)했다. 후자는 한국어 번역본(중역)이 있다(http://multitude.co.kr/607).  이 일본어 번역본의 역자는 이미 고인이 된, 일본에서 상당히 저명한 레비스트로스 연구자이자 인류학자이다. 학문의 세계에서 그런 것들이 뭐 중요하겠냐만 30대 초반의 젊은 프랑스 인류학자의 글을 한갑의 일본인 노학자가 번역했다는 사실이 한국학계의 '중요하겠냐만'의 토를 달면서도 언급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부끄럽게 한다. 그 노학자의 '해제'가 있어 이 논문에 대해 따로 부연설명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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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트로스에 있어서 주체의 해체와 생태적 카타스트로피

 

프레데릭 켁(Frédéric Keck)

일어본 번역 와타나베 코우조(渡辺公三, 1949~2017, 인류학자)

 

[일어본 역자 해설]

이 글은 프레데릭 켁이 본지 특집호를 위해 특별히 투고한 논문을 번역한 것이다.

프레데릭 켁은 국립과학연구소(CNRS) 교수로서 고등사범학교 강사를 겸임하고 있다. 그는 프랑스에서 레비스트로스를 계승한 가장 젊은 4세대 인류학자를 대표한다. 이미 레비스트로스에 관한 두 권의 저작을 저술했으며, 20세기 전반의 프랑스철학에서 인류학적 성찰의 대표주자라 할 만한 뤼시앙 레비브뢸에 관한 한 권의 책을 간행했다. 또 레비스트로스 저작집의 편집을 담당한 4인의 젊은 연구자 중 한 사람으로서 오늘날의 토테미즘, 야생의 사고, ‘소신화학가면의 길, 질투심 많은 여 도공, 살쾡이 이야기등을 소개하고 상세한 평주(評註)를 붙이는 작업에 참여했다. 레비스트로스의 주요 업적이 세상에 낱낱이 알려지고 소위 구조주의의 붐도 지난 이 마당에 켁은 새삼스레 레비스트로스의 저작을 텍스트로서 읽어내고 21세기의 세계 현실에 비추어 그 의의를 재고하는 작업을 이끌고 있다. 켁은 원저자에게 저작의 배경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 희귀한 경험은 레비스트로스가 천수를 누린 덕분이다.

20085월 레비스트로스의 저작집 간행을 계기로 몇몇 잡지에서 레비스트로스 특집을 꾸몄고, 켁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Le Nouvel Observateur)주간지의 인터뷰에서 레비스트로스의 탐구 궤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구조주의의 탄생을 알린 친족의 기본구조(1949)사이버네틱스에 의해 변신하게 된 뒤르켐 사회학이다. 사회는 일종의 유기체로서 혼인연대와 출자(出自 descent)의 보편적인 법을 통해 성 관계를 통제하고 인간고유의 질서를 생성시킨다.

그의 필생의 사업인 신화학(1964~71)생태학으로 확장된 마르크스주의이다. 한 사회의 신화 혹은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생산의 조건과 관계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 그 조건에서 동물과 식물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고 야생의 사고(1962)는 위의 둘 사이의 휴지기에 해당한다. 사회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인간정신의 수준에 진입해야 한다. 이 저작의 주제는 토테미즘과 공희(供犧)라는 인류학의 고전적인 문제를 1960년대 사상의 대주제인 역사와 변증법의 철학논쟁에 도입하는 것이었다.

 

이는 뛰어난 지적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간결하여 독단적인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에 관한 켁의 저작을 읽으면 그가 폭넓은 시야로 대상을 깊게 파고들어 읽어내었음을 납득할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와 야생의 사고(2004)레비스트로스하나의 서론(2005) 이 두 저작은 모두 젊은 독자를 염두에 두고 간단명료한 문장으로 레비스트로스의 난해한 업적을 명쾌하게 논하고 있다. 나아가 켁은 레비스트로스의 작품전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음은 물론2005년의 저작에서는 레비스트로스가 신화연구에 사용한 텍스트군을 상호 공명시킨 수법을 레비스트로스 작품군을 독해하는 데에 적용했다고 서술한다., 프랑스에서의 철학, 사회학, 인류학의 조류를 두루 살피고 있으며, 특히 2005년 저작의 후반부의 논쟁과 응용에서는 동시대의 인문과학분야와 인류학에서 레비스트로스가 어떻게 평가되고 있으며 그 쟁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문학연구에 어떻게 적용되었는지(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등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여주고 있다. 알튀세르의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호의적 평가에서부터 비판에 이르는 전개과정, 푸코에 대한 영향, 들뢰즈의 독자적인 레비스트로스 독해 등의 소개는 프랑스 철학사상의 지적 중심인 고등사범학교(École normale supérieure)에서 레비스트로스가 어떻게 읽혀왔는지를 짐작케 하는데, 이는 젊고 뛰어난 지식인들 간의 일종의 비의적인 전승의 분위기마저 느끼게 한다. 모리스 고들리에 등의 2세대에 이어 3세대의 브뤼노 라투르, 룩 볼탄스키(Luc Boltanski), 필리프 데스콜라 등이 레비스트로스 작품을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인문사회과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왔는지에 대한 소개 또한 매우 흥미롭다.

이러한 저작들과 병행해서 20048-9월호의 레탕모데른(Les Temps Modernes)지 기고문 「『야생의 사고에 있어서 개체와 사건, 그리고 2004엘느(Elne)지 레비스트로스 특집호(82)에 게재된 「『벌거벗은 인간』 「에필로그에서 인간의 해체를 통합한 것이 본 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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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해체는 1960년대 구조주의의 가장 큰 테마군 중 하나였다. 미셸 푸코는 말과 사물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의 죽음이라는 제목 하에서 이 테마를 다뤘다. 푸코는 여기서 근대서구의 인간이 그것들[생명, 노동, 언어] 가운데 하나의 특이한 습곡에 불과한, 생명과 노동과 언어의 다양한 형태의 연구영역을 개척했다. 스피노자의 목적론에 대한 공격을 재현한 이 테마는 윤리적인 차원을 갖는다. 즉 주체 비판은 존재와 사물에 깊은 경의를 품은 관계의 조건이다. 스피노자에게서 이와 마찬가지로 해체라는 부정적인 처사가 긍정적인 의식화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어떤 수준에서 부정된 것이 다른 수준에서는 긍정된다는 변증법의 새로운 버전으로서, 환상의 부정으로서의 주체의 해체가 어떻게 해서 그 자체로 참다운 긍정성을 열어주는가를 설파하기 위해 레비스트로스는 종종 불교를 언급했다. 그러나 불교와 변증법은 그의 저작 내부로 흡수되지 않았고, ‘이러한 부정의 역전이 레비스트로스의 사고에서 어떻게 실행되었는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나는 이 주체의 해체라는 테마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에게서 자연에 관한 끊임없는 사고와 연결된다는 것,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사고 속에서 점차 명확해지는 생태적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파국]라는 테마와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나는 또한 이 연결이 야생의 사고의 다양한 형태를 기점으로 야생의 사고신화학에서 각기 다른 형태를 취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자연 속에서 주체는 카타스트로피로서, 즉 테마의 연속성 속의 불연속으로서, 그 외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레비스트로스의 가장 깊은 직관이다. 이러한 카타스트로피적인 존재는 바로 생태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책임을 내포한다. 이것이 그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인데, 우리의 성찰을 요구하는 그 가르침의 의미는 아직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주체의 해체와 생태적 카타스트로피를 두 방식으로 연결해볼 수 있다. 즉 근대적 주체의 출현을 생태적 카타스트로피와 연결하는 하나의 카타스트로피로서 다룰 것인지, 아니면 현재진행중인 카타스트로피에 대한 주체적인 응답의 방식으로서 해체를 다룰 것인지 이다. ‘생태적 카타스트로피라는 표현의 한쪽 의미로부터 다른 쪽 의미로 이행하는 것이 주체의 해체에 대한 새로운 성찰에서 제기되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주체주의적인 철학에 대항해서 인문과학의 객관성을 주제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가 갈수록 우리의 이 세계를 더욱더 특징짓고 있는 생태적 카타스트로피의 도전에 정면으로 맞부딪히기 위해서는 다시금 주체의 해체의 의미를 되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체의 해체가 야생의 사고(1962)의 핵심을 이룬다면, 생태적 카타스트로피는 슬픈 열대(1955)의 핵심을 이룬다. 열대가 슬프다는 것은 정복하는 주체성이 전개하는 연속된 선을 따라 구세계로부터 신세계로 이동하는 따위는 이미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여행이란 것을 싫어하며, 또 탐험가들도 싫어한다”(슬픈 열대한국어번역본 105). 이 책머리의 선언은 인류학자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타지에서 집으로 돌아온 날 이러저러한 경험이 가득 담긴 여행 사진들 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과시하기 위해 가는 곳마다 주체성을 가지고 다니는 정복자에게도 향한다. 인류학자는 세계를 통일하기 위해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여행한다. “만약 서양세계가 민족학자를 만들어내었다면 그것은 하나의 깊은 회한이 서양세계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서양세계는 어쩔 수 없이 그 자신의 모습을 다른 사회의 모습과 마주보게 하여 다른 사회로부터 그와 같은 결점이 비치지는 않는지, 어떻게 해서 그 결점이 서양세계에서 자라나고 심해졌는지를 해명하기 위해 다른 사회가 서양사회를 도와줘야 한다는 바람을 품고 있다”(한국어번역본 698, 전면수정).

슬픈 열대에서도 레비스트로스에게 아메리카로의 망명을 강권한 1940년대의 카타스트로피가 근대의 주체성의 출발점이었다는 것, 그리고 구세계와 신세계를 구분한 훨씬 더 근저적인 카타스트로피의 귀결이었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것이 이 저작에 20세기의 목격증언으로서의 성격을 부여함과 동시에 이 세기의 관심의 양상과 간극을 벌려놓았다. 이야기는 1934년 레비스트로스가 브라질로 출발하는 데에서, 그리고 1941년 뉴욕으로 망명하는 데에서 상호 중첩되며 시작된다. 인류학자와 인디오는 진행 중인 카타스트로피에서 살아남은 자로서 한순간 동일시된다. 학자와 야만인이 공통적으로 문화의 차이를 넘어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 것은 존재와 사물을 파괴의 위협에 노출시키는 카타스트로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주체화하는 바로 그 방식이다. 레비스트로스가 신석기 시대의 인간의 지능이라고 자인한 것은 아이와 같은 정동에 사로잡힌 더딘 지성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과는 정반대로 들이닥친 굶주림이나 가뭄을 이겨내려고 개척한 땅을 버리고 떠난 다른 환경에서도 동일한 도구를 사용해서 브리콜라주로서 헤쳐갈 수 있는 상징을 탐하는 야심에 들끓는지성을 뜻한다. 원시적 생활의 지성이 아니라 야만적인 환경에서 살아남는 지성이다.

 

야생의 사고슬픈 열대의 문학적 명상에 대한 과학적인 대응물로서 쓰였다. 자신의 경험으로 되돌아간 민족학자의 우울은 모든 사회에 공통하는 지성에 닿으려는 인류학자의 즐거움으로 반전한다. 근대의 시작을 표지한 카타스트로피는 모든 현상을 기호로 받아들이는 야생의 사회와 기호를 현상으로 고찰하는 근대 학자와의 만남으로 변환된다. 이 책은 다음의 말로 끝맺는다. “가장 현대적인 모습의 과학 정신은 그 자신만이 예견할 수 있었던 야생의 사고와의 만남을 통해서 야생의 사고의 원리를 정당화하고 그 원리를 회복하는 데 공헌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을 터득하는 것은 곧 야생의 사고의 정신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다”(야생의 사고한국어번역본 382-83, 부분수정). 레비스트로스는 모든 현상을 복수의 결정의 수준에서 파악하려는 야생의 사고와 각각의 현상에 단 하나의 결정의 수준을 지정하려는 과학적 사고에 공통하는 언어의 발견을 목표로 삼았다. 인류학이 바로 그 공통언어다. 왜냐하면 인류학은 현상이 주어지는 사회적자연적 장일뿐더러, 실제 일어나고 있는 분류체계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지각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슬픈 열대는 지각의 층의 착종된 축적에 의해 기억이 구성되는 만화경의 논리로 되돌아간다. 다른 한편으로 야생의 사고는 감각적인 것에 추상적인 카타스트로피를 투사하지 않고 감각적인 것 그 자체에서 기호를 만들어내는 감각적인 논리의 이론으로서 제시된다.

그러나 야생의 사고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주체성의 환상을 비판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것은 슬픈 열대에서 인류학자가 문명의 조건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앞선 탐험가들을 비판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야생의 사고의 경우 주체의 환상은 두 가지 형태를 띤다. 즉 민족학에 있어서 토테미즘의 환상, 그리고 철학에 있어서 사건의 환상이다. 이 환상을 비판하기 위해 1962년의 레비스트로스가 두 권의 저작(야생의 사고오늘날의 토테미즘)을 필요로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날의 토테미즘은 집합적 주체, 즉 사회의 환상을 해체한다. 집합적인 주체를 통해, 인간과 인간 이외의 것 간의 동일성을 긍정하는 사회조직, 음식물 금기, 신앙체계의 총체가 의미를 획득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여기서 종교생활의 원시형태에서 뒤르켐이 제시한 이론을 표적으로 삼는다. 뒤르켐의 이론에 따르면, 토테미즘은 사회가 그 집단적 비등상태(沸騰狀態)에서 스스로를 표상하는 증표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사회학적 관념론을, 영국류의 경험론에 의거하면서 이 관념론이 통일적인 이론을 토대로 모아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민족지적 사실이 실은 제각각이라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뒤집어버린다. 레비스트로는 극히 칸트적으로 경험론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고 쌍분적인 구조의 사실에서 지성으로향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보편적인 현상을 찾아낸다. 뒤르켐이 사회학적 방법의 규준의 서문에서 보여준 초월적인 예감에 따른다면, 지성은 새로운 종류의 구조적 상관관계가 관찰되는 현상의 영역이다. 그 영역은 폴 리쾨르의 표현에 의하면 초월론적 주체 없는 칸트주의이며, 들뢰즈의 표현에 의하면 초월론적 경험론이다. 그리고 야생의 사회에서 관찰되는 분류는, 분류의 미개형태에서 뒤르켐과 모스가 보여준 길을 따라가면, 이 지성의 영역이 원초적으로 현현(顯現)하는 장이다.

민족학에서 주체의 해체가 토테미즘 비판과 뒤르켐에 대한 논박에 의해 행해졌다면, 철학에서 그것은 사건의 비판과 샤르트르에 대한 논박으로 행해졌다. 샤르트르는 그 자신이 후설을 탁월하게 독해한 논문 자아의 초월에서 주체 없는 초월의 영역 탐구의 기초를 닦은 것 같다. 그러나 존재와 무를 기점으로 실존주의의 정식화를 통해 샤르트르는 자기의 자유의 의식화를, 주체성의 기초를 이루는 사건이라는 소여를 무화하는 것으로 다루게 된다. 그리고 샤르트르는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 혁명적 실천의 사건에 의해 역사의 운동에 접근할 수 있는 변증법적 이성과 실천적 타성태(pratico-inerte)에 주목하고, 이러한 재구축의 길을 닫아버린 분석적 이성을 준별하기 위해 야생의 사회에 견주어 사건을 고려하는 가능성을 부정한다. 야생의 사고에서 레비스트로스가 하나의 사건으로부터 데이터를 전체화하는 힘을 가진 변증법적 이성이 야생의 사회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논증함으로써 이러한 대비를 논박하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 생각에 인간에 관한 것(나아가 살아있는 것)이라면 어느 하나도 배제됨을 용납지 않는 야생의 사고에 대한 강경한 거부에서 [샤르트르가 말하는] 변증법적 이성의 참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변증법적 이성에 대한 나의 견해는 샤르트르와는 완전히 다르다”(한국어 번역본 352쪽 부분수정). 그래서 레비스트로는 샤르트르의 휴머니즘에 대항하여 인문과학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용해하는 것”(354)이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겼다.

그리하여 야생의 사고의 논증 전체는 샤르트르가 제기한 문제에 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현상을 분류체계에 끼어 맞추기 위해 분류하는 일에서 이렇게나 즐거움을 찾아내는 사고는 사건을 위한 장을 갖추고 있을까? 왜냐하면 사건이란 외부로부터 도래하여 또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을 강권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레비스트로스는 샤르트르에게서 그의 주요한 착상 가운데 하나를 채용한다. 그것은 전체화라는 착상이다. 그것은 전체화를 총합적인 방식으로 선취하여 실현하는 주체를 전제로 삼는 착상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경험 내부에 복수의 전체성이 출현하는가?’를 기술할 수 있게 만드는 착상으로서, 확실히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 가장 흥미로운 착상 가운데 하나이다. 샤르트르에 의하면, 사건이 현상의 희소성을 의식화한다는 사실로 인해 사건이야말로 이 전체화의 과정을 현실화한다. 혁명적 주체를 만들어낸 1789년의 바스티유 요새 탈취는 그에 앞선 몇 년의 기아와 연결되고 그와 동시에 궁정의 추문과도 연결된다. 정치적 경험만이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감정적 등등 경험의 장의 모든 차원을 관통하는 경험의 장을 전도(轉倒)하는 사건.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경험의 모든 차원이 필연적으로 상호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한다. 자전거 기아를 바꾼다고 해서 반드시 속도가 오르는 것이 아니다. 기아가 체인에 제동을 걸 듯이 그 사이에 제동의 작용이 이뤄져야 한다. 어떤 수준에서 전체화는 다른 수준에서 탈전체화를 수반하며 복수의 수준에서 현실화하는 또 다른 전체화를 계산에 넣지 않고, 그와 반대로 서로를 지워버린다고 레비스트로스는 말한다. 따라서 역사적 사고는 그 기원의 산출력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사건을 또 다시 가열하기보다 오히려 역으로 사건이 복수의 수준에서 지각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서 냉각하는 사고이다. 사회에서 의미작용 하는 존재와 사물의 총체를 탐지하면서 원천에서 벌어지는 투쟁으로 되돌아감으로써 현상을 설명하는 근대사회의 신화적 사고는 새로운 주체성을 기초짓는 것에 의의를 두는 철학자에게서 실행되지 않고 고문서의 경험적인 풍요성을 존중하는 역사연구자에게서 실행되는 만큼 근대사회의 역사적 사고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가 곧이곧대로 변증법적 이성비판에 의해 제기된 문제는 결국 프랑스혁명이라는 신화는 어떤 조건에서 가능했는가?’라는 문제로 요약된다”(한국어번역본 364, 부분수정)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샤르트르의 착오는 프랑스혁명을 전체화작용의 한 형태로 분석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새로운 코기토의 원천으로 변경한 것, 그렇게 해서 존재와 사물의 다양성을 그렸건만 전통적으로 폐쇄사회의 특징인 왜소성을 드러낸”(357) 것에 있다.

야생의 사고에서 레비스트로스가 실행한 조작은 원천으로서의 사건이 아니라 카타스트로피이다. 도덕적으로 부정적인 함의를 품은 것이 아닌 연속성의 내부의 불연속이라는 수학적인 의미에서의 카타스트로피이며, 이 카타스트로피로 프랑스혁명을 기술하는 것이다. 확실히 구조주의적 방법은 인간의 정신이 현상적인 연속성을 지각하는 다양한 과정을 불연속의 격자를 통해 분석하면서 정신적인 것 본래의 연속성을 재구축하는 데에 있다. 최초의, 그리고 그로부터 다른 모든 것이 파생되는 카타스트로피가 언어의 출현이며, 그렇게 생성된 의미하는 것과 의미되는 것 간의 어긋남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아마도 레비스트로스의 가장 대범하면서도 사변적인 텍스트인 마르셀 모스의 작품에 대한 서론을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레비스트로스가 이 전체화 작용을 가진 자아의 연속성”(야생의 사고367, 부분수정)을 비판하면서, 의미를 산출하려고 복수의 카타스트로피를 관계 짓기 위해 그로부터 이끌어낸 귀결이다. 레비스트로스의 분석에 따르면, 실상 프랑스혁명을 새로운 주체성의 기초로 삼을 이유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기술하려고 사용한 격자에 의해, 이 사건은 이를테면 물리-화학적 작용이라거나 경제적 원인에서 일어났다거나 정치적 슬로건의 효과라거나 등등 각기 다른 의미작용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사건이 다른 사건과 관련짓는 이러한 다양한 수준의 각각에 의해 사건은 의미를 달리 하는데 그 의미가 올바른 의미라고는 할 수 없다”(364). 따라서 정신적인 고유한 의미를 가진 카타스트로피 자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의 정신과 그것이 고려하는 장과의 관계를 서로 비쳐주는 카타스트로피의 계열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관계는 언제나 국소적인 편성의 산물이다.

 

야생의 사고의 마지막 장에 대한 나의 이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이 책 전체를 재독하여 불확정한 것을 찾아낼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의 분석은 분류체계가 대립한다고 간주되는 두 개의 현상 사이의 모순을 대립하는 이항 사이에 중간적인 항을 도입함으로써 해결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간적인 항은 분류의 내부에서 다른 존재와 관계 짓고 의미를 부여받는다. 바꿔 말하면, 개인 혹은 집단에 의해 카타스트로피적인 것으로 경험된 상황(구덩이에 숨어서 매를 사냥하는 히다차 족의 사냥꾼과 같은)은 야생의 사고의 안정적인 분류체계 내에서 카타스트로피가 의미를 획득한다는 것을 드러내고(예를 들어 히다차족은 오소리와 여성의 월경을 관계 짓는다) 카타스트로피를 순화한다. 그런데 분류체계는 다른 방향으로도 향할 수 있다. 토템적 분류에 있어서 자연의 종으로 향할 것인가, 혹은 카스트 체계에 있어서 문화적 직능으로 향할 것인가 이듯이. 자연과 문화의 대립은 방법적가치만을 가질 뿐이다. 자연의 카타스트로피도 문화의 카타스트로피도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카타스트로피의 사고의 방향이 자연으로 방향지어질 것인지, 문화로 방향지어질 것인지의 문제만이 문제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야생의 사고의 분석에서 보편과 개별의 대립 또한 확고하지 않다. 그것은 분류가 보다 추상적인 대상을 향해 열릴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보다 구체적인 존재를 향해 졸라맬 것인지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야생의 사고는 자연으로부터 문화로, 그리고 개별로부터 보편으로, 복수의 수준에서 전개되는 분류의 동력학이다. 자연과 문화, 구체와 추상은 존재들을 양극성으로서 보족하며 다양한 수준에서 또 다른 양극성과 관계 짓는 분류도식이 이동하는 수평축과 수직축을 이룬다.

생각해보면 분류의 모든 수준에는 하나의 공통된 성질이 있다. 고찰대상 사회가 어느 수준을 내세운다 해도 그것은 다른 수준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하며 오히려 그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특별히 선택된 수준도 다른 수준과 형식면에서는 같은 것으로서 그 차이는 일반과 특수, 자연과 문화라는 한 쌍의 대비에 근거하여 작용하는 총괄적 좌표에서 상대적 위치의 차이일 뿐이다.

토테미즘을 논하는 논자의 잘못은 자연종에 기초를 두고 구성된 수준이라고 하는 하나의 분류 수준만을 자의적으로 분리시켜 취급하여 그것에 제도의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그 수준도 다른 여러 수준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수준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 만큼 그것만을 끄집어내어 가령 추상적 범주나 명사적 분류를 사용하여 작동하는 다른 분류의 수준보다 그것을 특히 중요시할 이유는 전혀 없다. 중요한 것은 수준의 존재 여부라기보다 말하자면 조절장치가 있는분류의 존재이다.

그것을 수용한 집단은 지적 도구를 다른 것과 바꾸지 않고 가장 추상적인 면에서 가장 구체적인 면까지 또 가장 문화적인 면에서 가장 자연적인 면에 이르는 모든 면에 초점을 맞추는수단을 갖는 셈이다”(212, 부분수정).

민족학자의 잘못은 분류의 역동학의 부푼부분을 정상적인 제도, 즉 토템으로 잘못 잡은 것이다. 주체가 기초지어질 수 있기 위해서는 자연과 문화, 추상과 구체가 매우 안정된 혼합체, 즉 제도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야생의 사고는 그물코가 막힌 중심부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주변으로 향하고 그 주변에서 카타스트로피가 생성한다. 야생의 사고는 소쉬르가 묘사한 언어의 움직임과는 정반대의 과정을 밟는다. 즉 자의적인 것으로부터 동기지어진 것으로 향해가는 것이 아니라 동기지어진 것으로부터 자의적인 것으로 향해간다. 분류체계가 현실적인 것의 전체를 정상상태로 만들기 위해서 그물망을 끊임없이 확장시켜야 하는 까닭은 사건이 반드시 체계의 외부로부터 도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류의 이 불확정한 확장은 한계에 도달하면, 즉 사고가 더는 그 이상으로 분류할 수 없고 지시만 가능한 한계에 도달하면 정지(停止)한다. 거기서는 야생의 사고와, 그에 저항하여 야생의 사고로서는 포섭될 수 없는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포섭할 수밖에 없는 요소와의 만남 가운데 현실적인 것의 요소가 순수상태로 존재한다. 레비스트로스에게 현실적인 것은 분류적 사고의 핵심부분, 주체와 객체의 대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한계에, 정상상태가 된 분류의 내부에서는 의미를 획득할 수 없는 카타스트로피와의 만남 가운데 위치한다.

그리하여 다음의 귀결을 견지해야 한다. 즉 현실적인 것은 가장 구체적인 극과 더불어 가장 추상적인 극에 존재한다. “종 조작매체의 논리적 효력은 이밖에도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에 힘입어서 상호 간에 상당히 다른 여러 분야를 분류도식 내에 통합할 수 있게 되며 이렇게 해서 분류법은 그 한계를 넘어서는 수단, 즉 보편화에 의해서 초기의 집합 밖의 분야로 진출하거나 특수화에 의해서 분류작업을 그 자연의 한계 너머, 즉 개별화까지 연장한다”(247-48, 부분수정). 레비스트로스가 보편화의 극은 질병이 발병하거나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출현했을 때 무대로 올라온다는 것을 언급하는 데에 그치고 거의 분석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은 의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분류체계 내에서 아직 장소를 찾지 못한 새로운 개체가 등장하는, 특수화의 극에 대해서는 훨씬 많은 분석을 행하고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개체화의 문제를 두 장에 걸쳐 자크 데리다와 에드먼드 리치와 같은 노련한 평론가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고유명 체계에 관한 훌륭한 분석을 전개하고 있다. 보편화에 대한 분석을 한 번도 행하고 있지 않은 이유에는 가능성이 풍부하다.

왜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의 특수화의 형태를 중시하고 보편화의 형태를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사건에 관한 샤르트르와의 논쟁을 염두에 두었던 탓이 아닐까? 실제로 고유명 분석은 야생의 사회가 사람의 탄생이라는 사건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대한 기술을 가능하게 만든다. “단지 새로운 사람, 즉 태어나는 아이들만이 문제가 된다. 아이들은 현재 존재한다. 그런데 개별화를 하나의 분류로 취급하는 어떤 체계이든지(어떤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은 지금까지 보아온 것과 같다) 새로운 구성원이 들어올 때마다 그 구조가 새삼스레 문제시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289) 이러한 사회가 취하는 해결은 신생아를 두 개의 요소로 분류하는 것이다. 즉 환원할 수 없는 잔여로서 분류의 체계 외부에 머무르는 개체와, 개인이 사회의 무대에서 알려져 인식되기 위해 장착하는, 가면과도 같은 인격이라는 두 개의 요소이다. 근대의 주체의 탄생이란 개체와 인격이 유일한 실체로서 일치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사회적 분류에 저항하는 무언가로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현상의 인식을 기초지은 자로서 자기를 노정한다. “서양문화[civilization]에 있어서는 마치 개인이 각각 자기의 개성을 토템으로 하고 있는 것같이 느껴진다. 개인의 존재를 기표라 하면 개성은 기의가 된다”(312). 좀 더 파보면, 놀라운 역전에 의해 개인이 사회에게 가장 인식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사회야말로 가장 인식되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는 사회성을 간주관성으로부터 설명하려는 후설이 직면한 어려움이나 집렬성(集列性, série)으로부터 집단을 고찰하려 한 샤르트르가 직면한 어려움에 의해 드러난다.

이 분석이 얼마나 훌륭하다 해도 그것은 주체의 해체라는 테마가 가진 차원 중 하나를 상실시키는 것처럼 내게는 생각된다. 근대의 주체의 출현은 인식과 세계의 관계를 전도시킨다. 그것은 인식이 주체에 빌붙어 방출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축으로 회전하도록 강제한다는 의미에서 카타스트로피로서 다뤄질 수 있다. 이 지적인 혁명은 신기한 것이 분류적 사고로부터 그 수단을 잃게 만드는 놀라운 현상으로 출현하는 대신 모든 사고의 원천으로서 신기한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삼았던 르네상스시기에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로서 스스로를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해체라는 테마는 비판적인 차원을 잃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보수주의적인 것처럼 보이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근대인이 아닌 야만인으로서 사고하는 것을 장려하는 것처럼 보이는 위험을 띠게 된다. 레비스트로스가 보여준 교훈은 이와 다르다. 카타스트로피는 신기한 것을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근대적 주체가 창출된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살아있는 장으로서 이 가치부여를 일으킨 귀결이라는 점에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카타스트로피는 야생의 사고가 인격으로서 자기를 노정하는, 새롭게 태어난 자와 조우하는 특수화의 극이 아니라 질병으로서 스스로를 노정하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과 조우하는 보편화의 극에서 탐구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속에는 근대의 주체를 창출함으로써 인식의 흐름을 바꾼 서구의 장과는 다른, 서구의 정복자와의 만남에서 살아남은 아메리카 인디오들의 사회의 장이라는 제2의 근대에서 장이 존재하게 된다. 그렇다면 보편화의 극을 공백인 채로 남겨둠으로써 레비스트로스는 아메리카 인디오 사회에서 고유의 주체화의 형태를 분석하기 위한 여지를 열어두고 그것을 신화학으로서 제기했듯이 사태는 진행하게 된다. 이리하여 벌거벗은 인간에필로그를 기점으로 주체의 해체라는 테마를 해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야생의 사고(1962)신화학(1964-71)에는 방법의 차이가 있다. 1962년의 책에서는 철학적 증명의 필요성에 대응하여 오스트레일리아,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사회들을 비교한 반면, 신화학의 사부작은 변환의 관계를 보이는 신화군을 비교함으로써 남북아메리카의 사회들을 연구한다. 그 결과로서 레비스트로스는 토테미즘 사회로부터 데스콜라가 애니미즘 사회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행하며 야생의 사고와는 또 다른 주체화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즉 토템적인 주체에게는 미분차이적으로 배분된 질()의 전체를 통해 개체를 집합적인 주체로 귀속시키는 것이 문제인 반면, 애니미즘적 주체에게는 신체의 불연속성을 통해 혼의 연속성을 지각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야생의 사고의 분석은 개체가 선조와 연결되기 위한 매개체인 성스러운 대상으로서의 추링가의 표상에 이르러 종결된다. 신화학의 분석은 새의 둥지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주인공이 요리의 불에 의해 구분된 영역을 활보한다. 야생의 사고가 분류와 명명의 문제들을 분석하는 반면, 신화학은 식도락과 작법과 존재들 간의 적절한 거리를 분석한다. 야생의 사고에서 생태적 카타스트로피는 자연이 발하는 기호를 사용하여 브리콜라주하는 대신에 자연에 스스로의 관념을 밀어 넣는 기술자의 사고를 창출하지만, 신화학에서 그것은 수천 년간 변환을 통해 천천히 세련되게 마감된 존재들 간의 적절한 거리를 폐절시키는 정복자의 도래를 다룬다. 식탁작법의 기원의 논증의 마지막은 다음의 성찰로 마무리된다. “우리가 사고하듯이 주체의 내적인 청정함을 존재와 사물의 외적인 부정함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의례작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야만인에게는 주체의 부정함으로부터 존재와 사물의 청정함을 보호하기 위해 의례작법이 있다.” 주체는 야생의 사고가 점차 편협한 것이 되어가는 역사의 단계가 아니라 신화가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부정’(不淨)이다.

이 차이는 벌거벗은 인간에필로그에서 주체의 해체라는 테마의 의미를 바꿔놓는다. 이 또한 다시금 논쟁적인 텍스트가 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논쟁의 하나는 리쾨르처럼 신화분석에서 주체에 충분한 장소를 부여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는 철학자에 향해 있고, 또 하나는 에드먼드 리치처럼 의례와 감정성(憾情性)을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민족학자에 향해 있다. 그렇지만 이 텍스트의 입장은 야생의 사고의 마지막장과 완전히 다르다. 야생의 사고의 논증전체가 사건과 관련해서 샤르트르를 논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반면, 신화학의 궤적은 에필로그에서 중단하지 않고 제한 없이 뻗어간다. 실제로 신화의 구조분석은 스스로 서로 사고하는신화의 변천에 따라 순수하게 내재적인 형태로 산출되어야 하는 것에 대해, 레비스트로스는 이 속에서 이러한 변천을 사고한 주체의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변천의 연쇄를 조감하는 어떤 위치를 취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본서의 주체는 익명적인 사고에 내밀어진 실체 없는 장소가 되려는 것이다. 이때 익명적인 사고는 이 실체 없는 장을 가득 채우며 자기 자신과 거리를 두고 스스로 참된 의지를 되찾아 실현하고 스스로의 유일무이한 본성에 고유한 제약을 배려하면서 자기편성을 취하기”(신화학4 벌거벗은 인간) 위한 것이다. 이 텍스트는 레비스트로스가 행한 신화에 대한 코멘트이며 분석을 재개하면서 각각의 장의 서두에 색다른 에피그라프(épigraphe)를 붙이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허용한 수많은 여담 중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신화들의 변천의 연속하는 계보를 분절하지 않고 오히려 신화가 자신 안에 편성해서 자신과 수직으로 교차시키며 신화들 간의 차이로 충전한 의미작용을 밝히기 위한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것들은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잠시잠깐 주체가 스스로를 위임한 자유로운 몽상이며, 자신의 임무로부터 해방된 주체는 그 속에서 어떤 몽상 속에서 자신이 해체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주체의 해체라는 테마는 여기서 간주관성과 타자성의 쟁점을 극복하기 위해 호출되고 있다. 질문은 두 주체성 간의 관계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신화적 사고의 고유성이란 바로 그것이 주체 없는 사고에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개인적인 작품이든 집합적인 구술전승의 작품이든 신화는 주체보다 더 먼 장소, 특정한 신화를 말하는 개인에 구조적인 속박을 부과하고 신화들의 성운으로부터 도래한다는 시차적인 특성을 가진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방법론적이라고도 부를 만한 차원에서 주체의 말소가 필연적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주체의 말소야말로 신화를 오로지 신화에 의해서만 설명하는 것에 대한 세심한 주의, 그에 따라 신화를 외부로부터 검토함으로써 그 외부요인을 발견하는 경향을 가진 판정자의 시점을 배제하는 것에 대한 세심한 배려에 따르기 때문이라고 레비스트로스는 말한다. 따라서 인류학자라는 주체는 다른 주체와 관련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접근불가능한 채로 멈춰있는 다른 대상과 관련되지도 않는다. 이렇듯 레비스트로스는 라캉적인 시점을 암묵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실제로 레비스트로스는 이에 대해 루소, 마르크스, 뒤르켐, 소쉬르, 프로이트 등의 선학들을 따라서 구조주의가 완수하려는 것은 다른 객체의 모습을 의식 속에서 개시하는 것이다. [] 다만 의식한다는 표현은 이 정도까지는 아니고 여전히 머리로 생각되는 차원에 머물러 있다. 바꿔 말하면, 의식은 스스로가 적응하는 현실과 실체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만 구비되는 특성조차도 몸에 두르는 현실 그 자체이다. 이 때문에 현실이라는 또 하나의 외관 하에서는 의식에 주체를 다시금 인도할 필요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다. [] 자아를 한편에서는 익명적인 타자로, 다른 한편에서는 개별화된 욕망(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존재)으로 바꿔 놓는다 해도 이 두 개를 재차 붙여서 그 전체를 뒤집는 것만으로, 그 폐기가 큰 소리로 선언된 해당 자아를 이면에서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은폐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다. 따라서 주체를 그로부터 영원히 도주시키는 타자의 존재를 향한 욕망에 의해 운반되는 주체로서 이해할 수 없다. 그림자에 들이치는 빛처럼 주체는 그에 용모를 맞추는 객관성의 체제에 참여하는데, 주체는 자신이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한다. 자신 이외의 것인 땅 위에서 출현한다. 주체는 언제나 종말 없는 운동 속에서 자신을 의식화하는 현실적인 것의 총체이다. 이 주체에 대해 레비스트로스는 현실적인 것을 구성하는 광선이 상()을 형성하는 탓에 교차하는 허초점’(virtual focus)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이 주체의 해체를 다루는 데에는 하나의 결론이 아니라 음악적인 의미에서의 에필로그가 더 적합한 형식임을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분석을 구성하는 스스로 닫힌 주체를 재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일시적인 소실을 확인하고 레비스트로스가 자아라고 부르는 잔재가 환원 불가능한 방식으로 현존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자아가 다시금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작품을 다 쓴 후일뿐이다. 그때까지 시종일관 그 장에서 배제된 자아는 이제야 작품전체를 조감하는 권리와 의무를 갖게 된다.”라고 레비스트로스는 말한다. 따라서 저작의 중단만이 주체의 해체를 정지시킨다. 주체를 소멸시킬 수도 있는 저작의 다른 장소에서 도래하는 광선의 허초점으로서의 주체는 잠시잠깐 현실의 자아가 된다. 오케스트라는 그것을 지휘한다. 그리고 그 순간 이전까지 오케스트라의 화음을 이뤘던 경험적인 개체에 장소를 내준다. 주체란 하나의 동일한 유기체를 통과하는 감정적인 반향의 총체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

그러나 이 음악적 형식이 가진 위기는 스스로에게 닫힌 경험적 주체의 형상을 다시금 설립한다는 데에 있다. 실제로 신화학의 통일성의 유일한 보증은 신화들 간의 변천이 인류학자의 정신이라는 동일한 정신을 통해 생성된다는 것이다. 이 인류학자의 정신은 경험적으로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고들이 교차하는 경험의 장으로 간주된다. 여기서 주체는 궤적의 형태를 띤다. 신화들 간의 불연속성은 음악적 감동의 형식 하에서 변천을 경험하는 자아의 연속성 속에서 폐절된다. “음악의 청자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은 작품이 실제로 완수되어 어려움(이라고 청자만이 느껴지는 것)을 떼어내고 성공에 이르는 그 도정에 대한 것이다. 발명의 재능을 혜택 받아 음악의 세계에 잠재된 가능성을 탐구하려는 작곡가라면, 그는 어려움뿐만 아니라 그 어려움에 부과되는 갖가지 해답들을 겹겹이 쌓아올려 보여주었을 것이다.” 여기서 카타스트로피는 신화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와중에 신화학자가 경험하는 단순한 어려움으로 되돌아간다. 여기서 신화학의 독자가 이 저작에게서 받은 유별난 신화적인 경험과 레비스트로스가 자신의 정신 그 자체에 부여한 경험을 분리해야하는 어려움이 발생한다. 레비스트로스 자신은 에필로그에서 이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의미로 넘쳐난다고 내게 생각되는 어떤 저작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의미 없는 형식이 발전한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에필로그에서는 이 경험적 주체의 막다른 길을 신화에서 음악으로의 이행에 대한 대범한 가설을 설정함으로써 성공리에 우회하고 있다. 즉 신화가 그 형식적 가능성을 고갈시켰을 때, 음악이 신화를 대신한다. 이것은 악극을 통해 신화체계의 잠재적인 힘을 재발견한 바그너에게서 음악이 정점을 이루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때 신화의 변환을 자신 속에서 전체화하는 경험적 주체를 통과하는 것은 이미 필요치 않게 되고, 음악의 청취를 종결시키는 침묵이 과거 형태의 잠재적 힘과 그것을 지워버리는 카타스트로피를 함께 표출하도록 놓아두면 된다. 에필로그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수학과 달리 음악은 주체에 있어서 공허한 형식에 육체를 끼어 맞출 수 있다면서 머뭇거리는 듯하다. 그러나 에필로그의 마지막 페이지에서는 문명의 파괴적인 카타스트로피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에 의해 무언가 분명히 생성된것을 증언하는 능력을 갖춘 이 공허한 형식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하나의 혹성의 표면으로부터 인간이 분명히 사라져가고 그와 동시에 대립하는 현실 또한 소멸하고 있다. 인간의 노동, 고통, 기쁨, 희망, 작품 또한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질 것이라는 저편의 확실함을 한순간도 놓쳐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 잠시잠깐의 현상에 관한 기억을 보존하고자 하는 의식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지상의 이미 무감각한 표층으로부터 머지않아 사라진다 해도 잠시잠깐의 몇몇 현상은 예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음을 소소한 증거로 남기겠지만, 결국 무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 글은 조제프 아르튀르 고비노(Joseph-Arthur Gobineau, 1816-82, 인종주의를 주창한 프랑스의 민족학자)오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 1842-98, 프랑스의 시인)의 구조이기도 하며 푸코의 말과 사물의 마지막 부분을 상기시킨다. 레비스트로스는 공허한 형식의 작품이란 일어난 것임에 주목한다. 주체는 이러한 형식이 파괴되도록 운명 지어진 이 지구의 표면에 남겨진 궤적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

 

신화학에필로그는 주체의 두 모델, 즉 카타스트로피가 남긴 형식을 자신 속에 통합할 수 있는 카타스트로피의 증인으로서의 주체, 그리고 존재들과 사물들의 복수성에 대해 열린 카타스트로피의 산물로서의 주체 사이에 주저함을 보여준다. 그것은 레비스트로스가 주체 없는 초월론주의의 틀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감각적인 것의 논리에서부터 형태의 논리로, 그리고 명제의 논리(이것들은 각각 신화학의 최초의 세 권에 담겨있다)로 이행하면서 그는 하나의 ’, 칸트의 정식화에 따르면 모든 표상과 함께 하는이 공허한 형식에 도달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내가 순수한 사고 속에서 나 자신에 대해서 갖는 의식 속에서 나는 존재 그 자체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이 존재의 무엇도 나에게 사고해야 하는 것으로서는 주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칸트의 주체를 그 외의 다른 사회에서 행사되는 인간적 사고의 총체로까지 확장함으로써 레비스트로스는 칸트가 비판서와 현실적 견지에 있어서 인간학사이를 파고든 깊은 틈, 초월론적 주체와 경험적 주체 사이를 파고든 깊은 틈을 메우려 했다. 나아가 그는 주체의 위치지움을 칸트가 비판력 비판에서 행한 것과 상당히 유사한 방식으로 나는 생각한다’(코기토)를 다시 파악하고 차이의 게임에서의 산출로 이동시키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체에 관한 서구적인 사고를 강력하게 형태지우는 칸트주의에 특이한 뒤틀림을 부과하면서도 그 틀의 내부에 머물러 있다.

많은 점에서 소신화이론가운데 벌거벗은 인간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살쾡이 이야기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주체의 해체에 대한 자신의 사고에 대해서 칸트가 아닌 몽테뉴를 참고하고 있다. “우리는 존재와 어떤 의사소통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몽테뉴의 말은 존재를 공허한 형식으로 보는 칸트의 사고보다 과격하다. 그것은 몽테뉴가 칸트처럼 근대성을 순수주체의 형식 속에서 내면화 해버린 것이 아니라 근대성의 기점이 된 카타스로피의 진정한 증인이기 때문이다. 몽테뉴의 사고는 자신들이 인류의 모든 전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들이 인류의 반만을 형성한 데 불과하다는 명백한 사실에 직면했을 때의 최초의 응답이다. 이 사고는 이성이 예비한 다른 형태의 사고를 흡수해버릴 가능성에 대한 근저적인 비판이며 그로부터 시론(에세이)과 단편의 형태로 금욕적인 문장을 이끌어내고 있다. “내가 나의 책을 썼다기보다 나의 책이 나를 만들었다.”는 몽테뉴의 말은 레비스트로스에 쉽게 적용할 수 있다.

살쾡이 이야기에서는 몽테뉴를 언급한 후에 주체 철학에 대한 새로운 비판이 이어진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적 사고의 보편적인 형식을 순수주체에서 찾아낸 일반신화학의 연구를 비판하고 있다. “어느 특정한 문화의 집합에 속할 뿐더러 지리적인 지역과 시대구분에 한정된 신화들의 비교대조에는 멈추지 않는 위험이 없지 않지만, 이 운동에 의해 신화적 사고가 점차 자신의 형식으로 환원되어 간다는 것을 자각하지만 한다면 결코 쓸데없지는 않다. 문제는 이제 신화가 말해준 것을 아는 것이 아니다. 가령 이 수준에서 파악할 때 신화가 점차 무엇도 말하지 않게 된다 해도 신화가 어떻게 말했을까를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이다. 이때 구조분석에 기대되는 바는 구조분석이 그 외에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탓에 공허한 담론만을 발산하면서 그 동작 메카니즘을 샅샅이 드러내어 노골적인 정신의말하자면 순수상태에서움직임을 해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허한 상태에 있는 인간정신, ‘벌거벗은 인간은 이미 형식적 연산의 주체가 아니라 어떤 금욕의, 자신과의 적절한 거리를 두는 작업의 성과이다. 이 작업은 각각의 신화를 민족적인 맥락으로 되돌려놓음을 함의하며 자연 속의 산책에 가깝다.

살쾡이 이야기는 무엇보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대륙이 그 정도로 닫힌 것레비스트로스가 신화학에서 주장했듯이 신화의 대지는 둥글다이 아니라 타자성에 대해 스스로를 열어두며, 그것이 역사속에 기입되어 있음을 증명한다. 초기 쌍분제(双分制) 사회를 재차 고찰하면서 안개와 바람의 테마 분석과 뒤섞음으로써 레비스트로스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사고에 특징적인 쌍분관(双分觀)가령 그것이 일본에서도 발견된다 해도은 근본적인 불균형 하에 성립되었고 새로운 존재의 여지를 남기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캐나다의 몇몇 신화는 초기 유럽인 탐험가들과의 접촉으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해석된다. 새둥지 잡이 신화의 모티브인 요리의 불의 출현 등 기원의 카타스트로피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는 신화학적인 주체성의 구축을 통해 이에 응답한다로부터 시작되는 대신, 살쾡이 이야기는 살쾡이와 코요테라는 쌍둥이 이야기를 통해 불가능한 주체성에서 시작해서 아메리카 인디언의 사고가 항상 예견해온 카타스트로피로 열려간다. 주체는 존재들과 사물들에 장소를 내어주기 때문에 해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래적으로 타자성에게 장소를 예비해두었기 때문에 역사에 의해 해체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의 모든 사고를 지배하는 주체의 해체라는 이 기획은 1999년에 비평지가 바친 찬사에 대한 응답에서 특히 감동을 주었다. 고령에 이른 레비스트로스는 몽테뉴를 언급하면서 책을 쓰고 싶어 하는 잠재적인 자아와 그것을 할 수 없는 현실의 자아 사이에서 무너진 홀로그램의 감각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현실의 자아는 마지막 해체에 이르기까지 용해되어간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손을 뻗는 동안 그것과는 다른 고마움의 감각을 준 것에 감사하고 싶습니다.” 의사소통하는 개체가 존재하는 한 주체는 존재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해체로부터 잠시잠깐 피해있는 것에 불과하다. 신체의 죽음은 정신이 자기와 자기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설정함으로써 준비된 물리적인 카타스트로피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사상은 근대의 시작을 기록한 카타스트로피가 자신과 화해한 주체의 형상으로서 닫혀버리지 않고 다른 일련의 카타스트로피와 연관지어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의 게으름 피우지 않는 자연에 대한 고찰자연은 야생의 사고의 실습의 장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의 생태적 조건에 대한 배려는 근대의 주체의 해체로부터 비로소 형태의 생명이 출현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카타스트로피, 그리고 다른 형태의 주체성에 대한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レヴィストロースにおける主体解体生態的カタストロフィー」 『思想No. 1016200812岩波書店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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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xicon 現代人類学, 이 책은 일본에서 출간된, 존재론적 전회의 이론적 흐름에 기반한 인류학 해설서이다. 50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각각 4쪽 분량의 간단한 해설과 더불어 주요문헌을 달아놓았다강의 교재라기보다 강의자를 위한 교안으로 만들어진 느낌이다.

편저자인 오쿠노 카츠미(奥野克巳)와 이시쿠라 토시아키(石倉敏明)가 쓴 이 책의 서문을 보면, 27명에 달하는 이 책의 저자들이 21세기 현대사상의 새로운 리더로서 인류학의 부상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만 놓고 보면 제2차 세계대전 후 아카데미즘을 이끈 학문은 정치학과 경제학이었다. 고도성장기에 안착하면서 철학과 사회비평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 이후 대학생과 고급교양대중을 중심으로 뉴아카데미즘이 대두했다. 이 즈음에 인류학에서는 구조주의와 기호학이 발흥하였고 80년대와 90년대의 안팎의 진통을 거쳐 21세기 새로운 지의 세계를 탈/재구축하기에 이르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지성사에 관해서는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모리스 고들리에 등의 2세대, 브뤼노 라투르, 필리프 데스콜라 등의 3세대, 켁 자신을 포함하는 4세대까지)을 중심으로 재평가한 프레데릭 켁의 2008년 글을 참조할 수 있다.)

21세기 지의 생성으로 향하는 지적 운동은 이 책에서 50개의 항목으로 주제화된다. 그것들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재귀인류학(Reflexive Anthropology)

2.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3. 존재론을 둘러싼 논쟁

4. 퍼스펙티비즘

5. 오늘날의 민족지

6. 오늘날의 브리콜라쥬

7. 대칭성 인류학

8. 애니미즘

9. 자연/인간

10. 인류세

11. 자연의 인류학

12. 다종민족지(Multispecies Ethnography)

13. 타성(otherness)

14. 야생의 사고와 포켓몬

15. 에두아르도 콘의 자기들의 생태학

16. 아나 칭의 민족지

17. 야생생물관리와 인류학

18. 케어(care)

19. 포식

20. 가식성(可食性)의 인류학

21. 생명

22. 점균(粘菌)

23. 지역

24. 이와타 케이지(岩田慶治)의 애니미즘론

25. 현대의 민속학

26. 고고학과 인류학

27. ‘사물의 인류학

28. 페티시/페티시즘

29. 가치와 윤리

30.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부채론

31. 아나키즘과 증여

32. 주권

33. 액티비스트 인류학

34. 교차하는 현대사상과 문화인류학

35. 허구와 실재

36. 특이점(singularity)

37. 언어의 존재론

38. 기호학과 인류학

39. 민족지 영상의 혁신

40. 감각 매체(Sensory Media)

41. 소리와 신체

42. 예술제작의 인류학

43. 신화학의 현재

44. 심리학과 인류학

45. 암묵지식(tacit knowledge)과 꿈

46. 장소와 창조성

47. 환경인문학

48. 영장류학과 인류학

49. 복잡한 인간 진화

50. 호모 사피엔스

 

이분샤(以文社), 20182월 출간.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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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전반부(http://sarantoya12.tistory.com/84)에 이어 후반부를 번역했다. 이 논문은 1998년의 「Cosmological deixis and Amerindian perspectivism」을 조금 수정해서 2005년 『The land within: indigenous territory and the perception of the environment』에 실린 것이다. 본문의 내용은 세부적인 차이만 있을뿐 전체적으로는 거의 같다. 다만 1998년 논문에서는 우주론(cosmology)에 기반해서 아메리카인디언의 퍼스펙티비즘을 중점적으로 논했다면, 2005년의 논문에서는 퍼스펙티비즘과 다자연주의의 논리(적 연관)을 좀더 부각시켰다. 

 

실은 지난 전반부를 번역했을 때에는 무척 고되었다. 반면 이번에 후반부는 즐겁게 번역했다. 그동안 카스트로의 그외의 글들의 번역과 강의준비와 리뷰를 통해 공부가 늘은 탓이다.

 

카스트로의 이론이 워낙 압축된 논문이라 결코 혼자 독해될만한 것 같지는 않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읽고 서로 파악한 내용을 교환하고 토론해야만 습득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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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민족중심주의

 

이제는 매우 유명해진 데스콜라의 레비-스트로스는, 야만인에게는 인간성이 집단의 경계에서 소멸한다는 것, ‘진짜 인간’을 의미하는 대자적인 민족 명칭이 광범위하게 나타난다는 것으로부터 예증된 사고, 바꿔 말하면, 어떤 방식을 통해 외지인을 인간-외의 영역에 속하는 자로 규정하는 것까지 다루는 사고를 논하고 있다. 즉 자민족중심주의는 서양의 가련한 특권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집합적인 생활 본래의 자연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태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태도의 보편적인 상호성을 어떤 일화를 통해 그려내고 있다.

 

아메리카가 발견된 수년 후 대앤틸리스제도[서인도제도의 주요섬군]에서 스페인인은 선주민이 혼을 가지고 있는지를 조사하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한 반면, 선주민들은 그들 백인의 사체가 부패하는지를 긴 시간에 걸쳐 확인하기 위해 백인의 포로를 수장하고자 했다(Lévi-Strauss 1952: 329).

 

이 우화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주지하다시피 모순적인 결론을 이끌어낸다. “야만인이란 무엇보다 우선 야만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수년 후 앤틸리스의 사례를 재인용할 때, 레비-스트로스는 퍼스펙티브의 비대칭성을 강조한다. <타자>의 인간성에 대해 조사할 때에 백인은 사회과학에, 인디오는 자연과학에 의지하였고, 백인은 인디오가 동물이라고 결론내린 반면 인디오는 유럽인이 신이 아닌가 의심했다((Lévi-Strauss 1955a: 82-83). ‘동일한 무지에서’ 저자는 후자의 태도 쪽이 보다 더 인간에 적합한 것으로 결론짓는다.

 

여기에서 본 것처럼 이 우화는 이와는 별도의 것을 보여준다. 우선 전체를 아우르는 것은 하나다. 즉 유럽인침략자와 마찬가지로 인디오는 자신이 속한 집단만이 인간성을 구현한다고 생각한다. 외지인은 인간을 동물이나 정령으로부터, 문화를 자연이나 초자연으로부터 구분하는 경계의 반대쪽에 위치한다. 자민족중심주의가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자 매트릭스로서 자연/문화의 대립은 사회적 통각이라는 보편으로서 나타난다. 즉 스페인침략자들에 의한 질문의 해답은 긍정형으로 나타난다. 확실히 야만인은 혼을 가지고 있다.

 

레비-스트로스가 이 글을 썼을 때, 우리가 만든 것과 동일한 구분을 야만인도 만들어낸다고 논증한 것에는 그들의 충분한 인간성을 옹호하기 위한 전략이 숨어있다. 야만인이 그들만이 진정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그들이 진정한 인간임을 증명한다. 우리처럼 그들도 문화를 자연으로부터 구분하고 자연민족(Naturvolke)이 항상 타자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자연과 문화 간의 문화적 구분의 보편성은 인간적인 <자연>으로서의 <문화>의 보편성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제 사태는 크게 변하고 있다. 야만인은 이미 자민족중심적인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우주론적인 중심을 점하고 있다. 야만인은 동물로부터 구분되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우리가 증명해야 하는 대신에 그들이 결코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인간과 비-인간을 대립시키기 위해 이제는 우리가 얼마나 사람이 아닌 사람인지를 드러내야한다. 그들에게 자연과 문화는 동일한 사회-우주적인 영역의 일부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은 인간성과 동물성을 분리하는 데카르트적인 <거대한 분할>을 우회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견해는 생태학의 기본적인 교훈을 예언하고 있으며, 우리는 지금 바로 그것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Raichel-Dolmatoff 1976; Wagner 1977). 이전에는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이 인간적인 속성을 다른 인간에 귀속시키는 것을 거부한 것에 대해 피와 살이 거론되었다. 이제는 우리에 의한 대상화의 한계가 허용되는 한에서 습득해야 하는 ‘생태학적 예지’를 그들이 표할 때에 그러한 속성이 자신의 종의 경계를 저 멀리 뛰어넘어 확장된다는 것을 우리는 강조한다(Århem 1993). 일찍이 야생의 사고를 내추럴리즘의 유아단계인 자기도취적인 애니미즘으로 동화한 것에 반론하기 위해 토테미즘이 인간과 자연 간의 인지적인 구분을 명확히 하는 것임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오늘날 애니미즘은 다시 야만인에 귀속되고, 또 (서둘러 강조하건대 데스콜라뿐만 아니라) 광범위하게 주장되고 있다. 그 속에서 애니미즘은 이분법적으로 생각한다는, 순진하다고는 하지 않더라도 어리석은 탓에 우리 근대인이 항상 시선을 보낼 수 없는, 주체와 객체, 인간과 비-인간의 보편적인 혼교를 둘러싼 진정한 혹은 적어도 ‘유효한’ 지(知)가 되고 있다. 근대적인 오만에서 우리를 구해주는 것은 미개와 포스트모던의 하이브리드(hybrid)다.

 

따라서 두 개의 이율배반은 실은 하나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은 인간성의 관념을 확장하기 위해 자민족중심주의자답게 소극적으로 대처하면서 자연과 문화를 토테미즘에서처럼 대립시킨다. 혹은 그들은 그러한 구분을 표명시키지 않고 우주중심적으로 애니미즘적이기에, 세계에 있는 관점의 다원성을 받아들이는 상대주의적인 관용성의 모델이 된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기-폐쇄적인 것일까? 아니면 오히려 그와 완전히 대조적으로 근본적으로 ‘타자에 열려 있는’ 것일까(Levi-Strauss 1991:ⅹⅶ)?

 

내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이율배반의 해법은 예를 들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태도를 논한 최신버전이 정당하다고 단언하며 그 외의 버전을 전근대-포스트모던의 그늘로 쫓아내자고 하듯이 한 쪽을 선별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테제와 안티테제가 함께하는 진실이지만(양자 모두 견실한 민족지적인 통찰과 일치한다), 동일한 현상을 각기 다른 양상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덧붙이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우주론에는 적합하지 않는 자연과 문화라는 카테고리의 실체론적인 이해를 조정한다는 점에서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으며 양자 모두 부정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점은 저 자민족중심적인 자기언급을 만들어내는, 보통 ‘인간’으로 번역되는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용어는 자연종으로서의 인간을 지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용어가 지시하는 것은 오히려 인격성의 사회적 조건이며, 특히 ‘진정한’, ‘실제’, ‘진짜’ 등의 강조말로 수사되는 경우 체계적이지 않을지라도 용어 논리상으로는 실명사(實名詞, noun substantive)라기보다 대명사로서 기능한다. 그것은 주체의 위치를 지시한다. 언명의 표지라 해도 이름은 아니다. 이 용어는 (‘사람’을 민족명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보통명사가 고유명사가 되는 의미론적인 감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방향으로 (‘사람’을 ‘인간’이라는 집합적인 대명사로 이용함으로써) 명사에서 퍼스펙티브로 나아간다. 이 때문에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집합적인 동일성의 카테고리에는 한 에고의 근친에서부터 인류 전체, 나아가 의식의 모든 존재까지 맥락적ㆍ대조적으로 표시하는 대명사에 특징적인 시야의 특출난 가능성이 부착된다. ‘민족명’으로 응고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민족지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물처럼 생각된다. 문헌에 기록된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민족명의 상당수는 자기언급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민족으로부터 지명된 경우(그 대부분이 멸칭(蔑稱)이다)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민족명에 의해 대상화되는 자는 기본적으로 주체의 위치에 있는 자가 아니라 타자로 격하되는 자다(Urban 1996: 32-44). 민족명은 제3자의 이름이며, ‘우리’라는 카테고리가 아니라 ‘그들’이라는 카테고리에 속한다. 그런데 이것들 간에 일관성이 있다. 그것은 개인적인 고유명사학의 수준에 있는 자기언급의 기피다. 이름은 그것을 운반하는 자나 그 인물 앞에서 발설되지 않는다. 이름 짓기는 외재시키는 것, 주체를 분리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라는 집합적인 자기언급은 ‘사람이라는 종의 성원’이 아니라 ‘인격’을 의미한다. 그것은 발화하는 주체의 관점을 기록하는 인칭대명사며, 고유명이 아니다. 다시 말해 동물이나 영령을 사람이라고 서술하는 것은 그것들이 인격이라고 서술하는 것이며, 비-인간에 주체라는 언표행위의 위치를 점하는 의식적인 지향성과 행위의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은 이 비-인간들이 내려주는 혼과 정령으로서 대상화된다. 주체란 혼을 가진 자이며, 혼을 가진 자는 누구라도 관점을 가질 수 있다. 아메리카 선주민적인 혼과 주체성이란 인간적이든 비-인간적이든 퍼스펙티브와 관련한 카테고리이며, 우주론적인 지시사(指示詞)이기도 하다. 그 분석에 필요한 것은 실체적인 심리학보다도 기호의 용어론이다(Viveiros de Castro 1992b: Taylor 1993b: 1996).

 

이처럼 관점이 부여되는 모든 존재는 주체일 수 있다. 혹은 더 정확성을 기하자면, 관점이 있는 곳에 주체의 위치가 있다. 우리의 구축주의적 인식론이 소뤼르의 정식—‘관점이 대상을 창조하는’ 주체적인 존재는 원초적으로 관점이 그로부터 발생되는 고정된 상태다—에 의해 요약 가능한 반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브주의는 관점이 주체를 창조한다는 선을 따라 전개된다. 관점에 의해 활성화된 것이나 행위능력을 가진 것은 우선 주체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와리(Vilaça 1992), 테네(McDonnell 1984), 마세(Århem 1993) 등은 ‘사람’을 의미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존재의 계층을 표하기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 존재들에 의해 사용될 수 있다. 인간이 사용할 때에는 이 말들은 인간을 지시한다. 그러나 이 말이 멧돼지(peccary)나 원숭이(howler monkey), 비버(beaver)에 의해 사용될 때에는 멧돼지, 원숭이, 비버로 자기 언급된다.

 

그러나 이 비-인간들이 자신을 ‘사람’이라고 부르는 주체적인 퍼스펙티브에 선다, 라는 것만이 생겨날 이유는 없다. 샤먼의 설명 혹은 보통 사람들이 광범위하게 공언하는 바에 따르면, 비-인간들은 자신을 형태학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인간으로 간주한다. 동물을 상징적으로 영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러한 사람화와 문화화를 함의한다. 즉 선주민적인 사고의 인간중심적인 성격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여기서 완전히 다른 것이 문제시된다. 자신에 관한 일인 것처럼(vicariously) 참조항의 관점에 서는 모든 존재는 주체의 위치에 서기 때문에 자신을 사람이라는 종의 구성원으로 본다. 인간적인 신체의 형태와 인간적인 문화—특수한 배치에 ‘신체화되는’ 지각과 행위의 도식—는 앞서 논한 자기-지시와 동일한 타입의 대명사적인 속성이다. 그것들은 재귀적 혹은 통각적인 도식(스트래선(1988)이 말한 의미에서는 ‘물상화’)이며, 이를 통해 모든 주체는 스스로를 파악한다. 즉 축어적이며 구성적인 인간적인 속성이 예를 들어 부적절하게도 비-인간에게 비유적으로 투영될 수는 없다. 이 속성들은 관점에 내재되어 있으며, 관점과 더불어 이동한다. 인간은—태어날 때부터—바로 그 특권(prerogative)을 향유한다. 그리고 헷갈리기 쉬운 형용모순을 바엘이 제시한 것처럼(Baer 1994: 350) “자신을 자신으로서 본다”.

 

확실히 해두자. 혼을 받은 동물이나 다른 존재물은 그것들이 (변장한) 인간이기 때문에 주체인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그것들은 (잠재적으로) 주체이기 때문에 인간이다. 다시 말해 <문화>는 <주체>의 본성이다. 주체는 모든 행위자가 자신의 본성을 경험할 때의 형상이다. 애니미즘은 실체적이며 인간적인 질(質)을 비-인간에게 비유적으로 투영하는 것이 아니다. 애니미즘이 표현하는 것은 인간과 비-인간에 의한 대자적인 관계의 실제적인 등가성이다. 이리는 이리를, 인간이 인간을 보는 것처럼—인간으로서—본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이리’가 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이리는 이리에게 인간이다. 왜냐하면 앞서 보여준 것처럼 인간과 동물에 공통하는 조건은 동물성이 아니라 인간성이기 때문이며, 인간성이란 <주체>가 띠는 일반적인 형상을 표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신체적 형태 혹은 문화적 관습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타입의 의식과 지향성을 비-인간적인 존재에 부여하는 것은 통상 중립적으로 ‘인간중심주의’ 혹은 ‘의인화’로 불린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두 라벨은 대립하는 우주론적인 태도를 지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서양에 광범위하게 보급된 진화론은 어마무시하게 인간중심적이지만 내게는 특별히 의인화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반대로 선주민의 애니미즘은 의인화로 특징지을 수 있지만 분명 인간중심적이지는 않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인간을 제외한 수많은 존재가 ‘인간적’이라고 한다면, 우리 인간은 그렇게 특별한 존재일 수 없다. 구래의 ‘미개의 나르시시즘’은 풍문이 아니다. 나르시시즘의 진짜 사례를 찾아보자면, 근대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예를 들어 청년마르크스가 우리의 종에 대해 기술한 일설을 살펴보자.

 

대상적 세계의 실천적인 산출, 비유기적 자연의 가공은 인간이 의식하는 존재임을 확증한다. (중략) 그렇다, 동물 또한 생산한다. (중략) 그러나 동물은 단지 자신 혹은 그 존재를 위해 직접 필요로 하는 것만을 생산한다. 즉 동물은 일면적으로 생산한다. 그러나 인간은 보편적으로 생산한다. (중략) 동물은 다만 그에 속한 종의 기준과 욕구에 따라 형상을 만들어내지만 인간은 다른 종의 기준에 따라서 생산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Marx 1961[1844]: 75-76 in Sahlins 1996).

 

인간이 “보편적으로 생산한다”는 이 명제를 통해 마르크스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든지 간에 나는 이것을 인간이 보편적인 동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읽힌다. 흥미로운 생각이다. (만약 인간이 동물이라면 다른 동물종 각각은 특수한 인간성인 것은 아닐까?) 인간성은 행위자의 보편적인 형상이라는 점에서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관념 사이를 관통하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마르크스의 판단을 실은 그 순수한 반전이다. 그것은 모든 종들 이상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반대로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이 말한 바에 따르면, 어떤 동물 속에서 지각되는 이상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모든 동물은 인간이 될 수 있다. 완전히 다른 두 의미에서 인간은 보편적 동물이다. 마르크스의 경우에 보편성은 인간중심적인 반면, 선주민의 경우에 보편성은 의인화다.

 

지금까지 내가 논한 것은 인간을 포함한 각각의 종의 대자적이고 재귀적인 관계와 논리적인 등가물을 표현한 것으로서 애니미즘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북미북서부해안의 츠므시족(Tsimshian族)의 우주론에 관한 구절을 살펴보자.

 

주요 신화에 따르면, 인간이 보기에 세계에는 영적인 영역에 둘러싸인 인간적인 공동체라는 틀이 있으며 그 영적인 영역은 모든 존재가 각각의 특징에 따른 삶을 영위하며 상호 존재에 간섭하는 동물의 왕국을 포함한다. 그러나 우리가 동물로—예를 들어 연어로—변신한다면, 연어인간에게 자신은 우리에게서의 인간인 것으로서, 인간은 나스노크[정령] 혹은 연어를 탐하는 곰으로 나타난다. 이 번역의 과정은 몇몇 차원을 횡단한다. 예를 들어 스키나 강에 떨어진 목화 잎사귀는 연어인간에게는 연어다. 잎사귀에게는 연어가 무엇인지를 나는 모르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연어인 것처럼 나타난다고 나는 생각한다—곰처럼 보이지 않는다면(Guédon 1984: 141-42).

 

즉 연어는 인간이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처럼 연어에게 나타나는 것이라면—이것이 애니미즘이다—, 연어는 인간에게는 인간으로서 나타나지 않으며 인간 또한 연어에게 인간으로서 나타나지 않는다—이것이 퍼스펙티브주의다.

 

아마도 애니미즘과 퍼스펙티비즘에서는 데스콜라의 모델에서 예견되는 것보다 더욱 근원적인 관계가 토테미즘과의 사이에 놓여있다. 왜 동물들(이나 그 외의 자들)은 스스로를 인간으로 보는 것일까? 내 생각에 단적으로 말하면, 인간이 그들을 동물로 보기 때문에 자신을 인간으로 보는 것이리라. 멧돼지가 자신을 멧돼지로 보는 것(그리고 인간이나 그 외의 존재가 그 특징적인 의복 밑에 멧돼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으로부터 보일 때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스스로를 인간으로 간주하며, 비-인간으로부터는 비-인간으로—동물이나 정령으로—간주된다면, 동물은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인간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 퍼스펙티비론적인 애니미즘의 비대칭적인 비틀림은 토테미즘이 노정하는 대칭성과 매우 흥미로운 콘트라스트를 보여준다. 전자에서 (인간은 자신에 대해 특수한 동물이라는) 재귀적인 동일성의 상관이 인간적인 계열과 동물적인 계열의 관계에 대한 기초가 된다. 후자에서 (한 인간은 한 동물에게, 다른 인간이 다른 동물에 대해서 그러한 것처럼 존재한다는) 차이의 상관이 두 계열을 분절한다. 차이의 상관이 대칭적이고 가역적인 구조를 산출하는 반면, 동일성의 상관은 애니미즘이라는 비대칭적이고 유사투영적인 구조를 산출한다. 내 생각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도 결국은 애니미즘이 주장하는 것이 동물이 인간과 유사하다는 생각이라기보다 동물들은—우리처럼—자기 자신과 다르다는 사고이기 때문이다. 차이는 밖에 있는 외연적인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내포적인 것이다. 모든 것에 혼이 있다면, 이로부터 어떤 분류도 확정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인간일 수 있다면, 틀림없이 인간적인 것은 그 무엇도 아니다. <존재의> 기저에 있다는 인간성은 시사적으로 종 특유의 표상으로서의 인간성을 문제시한다.

 

 

다자연주의

 

주체적인 위치의 다원성을 아우른 세계라는 사고방식은 즉각 상대주의의 관념을 상기시킨다. 분명 상대주의에 대한 직접적 내지는 간접적인 언급은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우주론에서 종종 나타난다. 마쿠나족(makuna族)의 민족지학자인 카이 오렌이 전경으로 밀어낸 다음과 같은 판단을 생각해보자. 오렌은 아마존의 북서부 사람들의 퍼스펙티브적인 우주를 서술한 후에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마쿠나에 관해 말하자면, 현실에 대해 다원적인 관점이 있다는 사고를 포함하는 바, “모든 지각은 동등하게 유효하며 또한 진실하”고 “세계에 대한 진실하고 정확한 하나의 표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Århem 1993: 124).

 

오렌은 확실히 옳다. 다만 제한된 의미에서 그렇다. 인간에 관해 말하자면, 완전히 그 반대로 세계에는 진실로 정당한 하나의 표상만이 존재한다고 마쿠나 사람들은 말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우리가 유체에 들끓는 구더기를 어망 속에 타버린 물고기로서, 독수리에게 보이듯이 본다면, 우리에게 무언가 이상한 일이 생긴 것이라고 결론지을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독수리로 변신하고 있다는 것, 즉 보통 때라면 누구의 평면에도 기재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병 들을 불운의 전조다. 퍼스펙티브는 분리한 채로 있어야 한다. 샤먼만이 종에 관해 양성구유적인 것처럼 각기 다른 종들을 교신시킬 수 있는데, 그것도 특수하고 제약된 조건하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층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의 이론은 오렌이 논한 것처럼 동일한 세계에 대한 표상의 다원성을 상정한 것일까? 민족지학자의 논의를 수용함에 따라 일어나는 것들을 반대로 취하는 것은 여기까지 해두자. 모든 존재는 세계를 동일한 비법으로 본다(표상한다)—바뀐 것은 그것들이 보는 세계다. 동물은 인간과 동일한 카테고리와 가치를 이용한다. 우리 세계처럼 그들의 세계는 어로와 수렵, 요리와 발효주, 교차사촌혼과 전쟁, 의례와 입사식, 샤먼과 추장, 정령을 중심으로 움직인다(Guédon 1984: 142). 달과 뱀, 재규어가 인간을 맥이나 야생돼지로서 본다면, 그것은 우리처럼 그들이 맥이나 야생돼지를, 즉 인간에 적합한 식량을 먹기 때문이다. 이 이외에는 있을 수 없으며 비-인간은 고유의 구역에서 인간이며, 그들은 사물을 인간이 보듯이 본다. 그러나 그들이 보는 곳의 것들은 별개다. 우리에게 피인 것은 재규어에게 발효주다. 죽은 자의 영(靈)에게 부패한 유체인 것은 우리에게 발효된 카사바다. 우리가 진흙탕으로 보는 것은 맥에게는 거대한 의례용 건물이다….

 

얼핏 보면, 이러한 사고방식은 매우 반직관적인 것처럼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면, 지도와 땅의 반전으로서 널리 알려진 착시도처럼 그 자체가 반대물로 변형하듯이 생각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제라드 웨이스(Gerard Weiss)는 캄파족(campa族)의 세계를 “다른 타입의 존재가 동일한 것을 다른 방식으로 보는, 상대적인 외견의 세계”로서 기술하고 있다(1972: 120). 여기서도 부분적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웨이스가 간과하는 것은 다른 타입의 존재가 같은 사물을 다른 방식으로 본다는 사실은 다른 타입의 존재가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물을 본다는 사실의 단순한 귀결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같은 사물’로 간주된다는 것일까? 누군가에 대한 관계에서 무언가의 종과의 관계에 있어서 같다는 것일까? 웨이스의 정식은 물(物) 자체의 망령이 덧씌워져 있다.

 

퍼스펙티비즘은 상대주의가 아니라 다자연주의다. 문화상대주의는 일종의 다문화주의가 전제하는 주관적이고 부분적인 표상의 다양성이며 각각은 외재적으로 통일된 자연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인데, 자연은 그것들의 표상과는 완전히 무관계한 것으로 남게 된다. 아메리카대륙 원주민은 그 반대물을 제시한다. 실재하는 다양성으로 골고루 적응되는 순수하게 대명사적인, 현상학적 혹은 표상의 통일체다. 유일한 ‘문화’와 다원적인 ‘자연’, 즉 불변의 인식론과 가변적인 존재론—퍼스펙티비즘은 다자연주의다. 퍼스펙티비즘은 표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하다.

 

퍼스펙티브가 표상하지 않는 이유는 표상이 정신의 재산인 반면 퍼스펙티브는 신체에 거하기 때문이다. 관점에 설 수 있는 능력이란 의심할 여지없이 혼의 잠재능력이며, 그래서 비-인간은 정신을 가진(혹은 정령인) 한에서 주체다. 그러나 관점 간의 차이—그리고 어떤 관점은 차이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니다—는 혼에 없다. 혼은 형식적으로는 모든 종을 관통하는 동일자며, 모든 곳에서 같은 사물을 인식할 뿐이다. 그렇다면 차이는 신체의 특수성에 부여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앞서 제기한 질문에 대한 응답이 가능해진다. 만약 비-인간이 인격이며 혼을 가지고 있다면 무엇에 의해 인간으로부터 구분될 수 있을까? 그리고 인간이라면 왜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것일까?

 

동물들이 우리가 다른 사물을 보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보는 것은 그것들의 신체가 우리의 신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언급하는 것은 물리학적인 차이—이 점이 제기되는 한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은 신체의 기본적인 단일성을 인식한다—가 아니라 각각의 종들의 신체를 특이한 것으로 만드는 정태, 경향성, 역능이다. 즉 먹는 것, 교신하는 방법, 사는 곳, 군집성이라든지 단독성이라든지 등등. 신체의 형태학은 정태로서의 이것들의 차이에 대한 힘으로 넘쳐나는 기호지만, 그것은 눈을 속이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인간적인 외견은 재규어적인 정태(jaguar-affect)를 숨기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신체로 부르는 것은 변별적인 신체적인 실질이나 특징 있는 해부학적 구조와 무관하다. 아비투스를 구성하는 정태와 존재의 양태의 집합체다. 혼이라는 형상적인 주체와 유기체라는 실질적인 물질성 사이를 정태와 역능의 다발로서 신체가 점거하고 있으며, 그곳에 퍼스펙티브의 원천이 있는 중핵적인 평면이 존재한다. 퍼스펙티비즘은 상대주의라는 정신적인 본질주의와는 전혀 동떨어진 신체적인 매너리즘(maniérisme)이다.

 

그러나 신체 간의 차이는 외재적인 관점의 타자만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대자적으로 모든 부류의 존재는 동일한 형상(인간이라는 총칭적인 형상)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신체는 타성(他性)이 그 자체로 파악되는 양태다. 통상의 양태에서 우리가 동물을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그 반대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우리의 신체가 각각(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퍼스펙티비즘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만약 <문화>가 혼의 관념에 의해 대상화된, 주체의 재귀적인 퍼스펙티브라면, <자연>이란 다른 신체적 정태에 대한 행위자의 관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문화>가 <주체>의 본성이라면, <자연>은 신체인 한에서, 즉 다른 누군가에 대한 무언가인 한에서, <타자>의 형상이다. <문화>는 ‘나’라는 대명사의 자기참조적인 형상을 띤다. 반면 자연은 비인칭적인 대명사인 ‘그것’에 의해 드러난다. 객체의 특히 ‘비-인격적’인 형상이다(Banveniste 1966a: 256).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시선에서 신체가 차이를 만들어낸다면, 레비-스트로스가 전한 일화 속 스페인 사람과 앤틸리스 주민이 취한 타자의 인간성을 탐사하는 방법이 그처럼 비대칭적이었다는 이유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유럽인에게 타자를 혼을 가진 자인지 아닌지로 판단하고자 했다. 반면 선주민의 목적은 타자가 어떤 부류의 신체를 가지고 있는지를 확정하는 것이었다. 유럽인에게 우월하고 변별적인 것, 즉 퍼스펙티브의 차이화 장치(=微粉機)는 혼이다(인디오는 인간인가, 동물인가?). 인디오에게 그것은 신체다(유럽인은 인간인가, 정령인가?). 유럽인은 인디오가 신체를 가지고 있음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동물 또한 신체를 가지고 있다. 인디오는 유럽인이 혼을 가지고 있음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동물 또한 혼을 가지고 있다. 인디오가 알고자 했던 것은 이것들의 ‘혼’의 신체가 그들 자신과 동일한 정태를 가지고 있는지—유럽인이 인간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는지, 그럼에도 부패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변환할 수 있는 영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는지—였다. 정리해보자. 유럽적인 자민족중심주의는 타자의 신체에 스스로가 가진 것과 동일한 혼이 있는 것을 부인함으로써 성립된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자민족중심주의는 타자의 혼이 동일한 신체를 가지고 있는지를 의심함으로써 성립된다.

 

잉골드가 강조한 것처럼(Ingold 1994: 1996), 서양적인 사고에서 인간의 지위는 본질적으로 양의적이다. 한편으로 사람이라는 종은 그 외의 것들과 동일한 동물종이며, 동물성이라는 영역에는 인간도 포함된다. 반면 인간성은 동물을 배제하는 도덕적인 조건이다. 이 두 가지 지위는 ‘인간의 본성’(human nature)이라는 문제와 이접적인 이념으로서 양립한다. 바꿔 말하면, 우리[근대인]의 우주론은 인간과 동물 간에 형이하학의 연속성과 형이상학의 불연속성을 가정한다. 전자는 자연과학의 대상으로서의 ‘인류’를 만들어내며, 후자는 인문학의 대상이 된다. 정신은 우리의 중요한 차이화 장치다. 정신은 우리를 동물이나 물질 일반보다 상위에 위치 지으며 우리 동료들에 대해 개별의 인간을 특이화 한다. 정신은 집합의식과 시대정신 등의 어휘를 통해 문화와 시대를 구분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신체는 주요한 융화장치(=집적회로)이며, ‘근대적인 융합’의 매체다. (DNA, 탄소화합물 등) 보편적인 기질(에 의해 융화된) 다른 생물에게 우리를 접속시킨다. 달리 말하면 모든 물질적 ‘신체’라는 궁극적인 자연에 연결시킨다. 한편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은 우주의 존재들 간에 형이상학의 연속성과 형이하학의 불연속성을 조정한다. 전자는 애니미즘—예를 들어 ‘미개의 융합’—으로, 후자는 퍼스펙티비즘으로 귀결된다. 정신과 혼—비물질적인 실질이라기보다 재귀적인 형상으로서—은 융화하고, 신체—물질적인 유기체가 아니라 활성화하고 있는 정태의 체계로서—는 차이화 한다.

 

퍼스펙티비즘은 상대주의가 아니라 관계론이다. 아마존의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다른 논의를 살펴보자. 르나르-카즈비츠의 마치겡가족의 신화론에 대한 저작(Renard-Casevitz 1991)을 검토해보자. 인간인 주창자가 외부자의 마을을 방문하면 그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먹는 뱀과 박쥐, 불덩어리를 ‘물고기’, ‘아구티’, ‘마코앵무’(인간의 식량)라고 부른다. 저자는 이렇게 불리게 된 신화를 해설하면서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이 문화상대주의 그 자체는 아님을 깨닫는다.

 

신화는 모든 국면에서 유효한, 문화횡단적이고 민족횡단적인 규범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 규범은 동일한 기쁨과 혐오, 음식에 관한 동일한 가치나 동일한 금지와 기피를 규정한다. (중략) 신화가 불러일으키는 오해는 야만적인 선호나 부적절한 언어의 이용이 아니라 견해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바에 있다(Renard-Casevitz 1991: 25-26).

 

그러나 이것은 저자가 더할 나위 없는 평범함을 인정해버렸다는 사실을 방어할 수 없었다.

 

퍼스펙티브에 몸을 두는 것은[mise en perspective] 보편적인 사회적 실천의 적응과 전조에 불과하며 X의 어머니 혹은 아버지는 Y의 시부모라는 사실과 같은 것이다. (중략) 점유된 장소에 따른 이름의 가변성은 어떻게 A가 동시에 X에게서 물고기이며 Y에게서 뱀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Renard-Casevitz 1991: 29).

 

사회생활에 고유한 위치에 기반한 상대성의 일반화는 종들 간 혹은 세대 간의 차이에 적응함으로써 인간적인 문화를 자연에, 즉 절대적인 것으로 바꾸어버리는 모순으로 가득 찬 귀결에 이른다는 것이 문제시된다. 누구라도 ‘물고기’를 먹게 되고, ‘뱀’을 먹는 자가 사라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나르-카즈비츠가 말한 친족에서 위치잡기와 존재의 상이한 유형에 따라 물고기 혹은 뱀으로 알려진다는 것 간의 아날로지는 매우 흥미롭다. 사고실험을 해보자. 친족용어는 열려진 관계사로서 논리를 조작한다. 다시 말해 다른 사물에 대한 관계를 통해 무언가를 규정하는 명칭의 계층에 속한다. (물론 언어학에서는 이러한 용어를 나타내는 라벨이 있다. ‘이항술어’ 혹은 그렇다고 생각되는 것.) ‘물고기’나 ‘나무’ 등의 개념은 닫힌 혹은 명확하게 경계를 긋는 ‘고유’ 명사이며,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특성에 의해 어떤 대상에 끼어 맞춰진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에서 생겨나는 것, 곧 ‘물고기’, ‘뱀’, ‘해먹’, ‘카누’ 등의 명사에 의해 지명되는 실질은 관계사로서 명사와 대명사 간에, 실사(實詞)와 직시(直示) 간에 있는 무언가로서 사용된다. (‘물고기’ 등의 자연종의 이름과 ‘해먹’ 등의 인공물의 이름에는 차이가 있다—다음을 참조할 것.) 한 인물은 그 인물을 아버지로 두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한에서 아버지다. 즉 부성과 관계한다는 것인 반면, ‘물고기성’ 혹은 ‘뱀성’은 물고기나 뱀 본래의 특성이다. 그러나 퍼스펙티비즘에서 생겨나는 것은 어떤 사물 또한 이 사물을 물고기로 두는 다른 누군가가 존재하는 한에서 물고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진짜로 귀뚜라미가 죽은 자의 물고기이며 물웅덩이가 맥의 해먹이라고 말하는 것이 나의 누이인 이사벨의 딸 니나가 나의 조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면, 어떤 상대주의도 관여하지 않는다. 통상 표현이 의미하는 한에서 주관론적인 니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사벨은 니나에게서의 어머니가 아니다. 이사벨은 니나의 어머니고 이사벨은 바로 객관적으로 니나 어머니며 나도 니나의 외삼촌이다. 관계는 내적으로 속격(屬格)—이처럼 산자의 귀뚜라미가 죽은 자의 물고기인 것처럼 나의 누이는 누군가의 어머니며, 그리고 나는 그 인물의 외삼촌이다—이며, ‘그 자체’가 무엇이든지간에 단지 물고기로서 표상된다는 것을 함의하는 “X는 누군가에게서의 물고기다”라고 하는 부류의, 외적이고 표상적인 연결이 아니다. 니나는 이사벨의 딸이지만 내 딸은 아니기 때문에 니나는 내게서의 ‘딸’이 아니다—왜냐하면 니나는 실제로 정확하게는 나의 누이의 딸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부조리할 것이다. 『과정과 실재』에서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실세계(real world)>라는 어구는 서 있는 위치를 통해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바꿔내는 <어제>나 <내일>과 같은 것이다”(Whitehead 1929: 65, in Latour 1994: 197). 즉 관점은 주관적인 의견이 아니다. ‘어제’나 ‘내일’이라는 관념에 주관적인 것은 그 무엇도 없다. ‘나의 어머니’나 ‘너의 형’이라는 관념도 그와 마찬가지다. 각기 다른 종의 현실세계는 그 관점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세계’는 각기 다른 종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세계는 관점에 의해 각각의 종 동료들이 분기하는 추상적인 공간이다. 사물에 대한 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사물과 존재야말로 관점이다(Deleuze 1969: 203). 즉 여기서 문제는 ‘원숭이는 세계를 어떻게 보는가’(Chency&Seyfarth 1990)가 아니라 원숭이를 통해 어떤 세계가 표현되는가, 원숭이는 어떤 세계에 대한 관점에 있는가이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신체적 실질’은 이러한 타입에 관한 것이라고 상상해보자. 동일한 양친을 둔 두 개인이 형제인 것과 마찬가지로, 같은 물고기, 같은 뱀, 같은 카누 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종이라고 상정해보자. 그렇다면 아마존 지역의 우주론에서 인간과 인척관계를 통해 맺어지는 것들로서 종종 동물들이 사고된다는 것이 더 잘 이해될 것이다. 나의 누이는 나의 처형의 아내인 것처럼—그리고 마찬가지의 이유로—, 인간의 피는 재규어의 발효주다. 종들 간의 혼인을 이야기하는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신화는 실로 무수히 많다. 인간인 의리의 형제 및 의리의 자식이 동물인 의리의 형제 및 의리의 부모와의 어려운 관계를 설명함으로써 행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개의 아날로지를 하나의 아날로지로 묶는 그 자체다. 이렇듯 퍼스펙티비즘이 교환들과의 사이에서 어떻게 밀접한 관계를 갖는지를 알 수 있다. 퍼스펙티비즘의 교환의 양태(서두의 인용문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퍼스펙티브의 상호성)로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교환 자체가 이 용어에 의해—퍼스펙티브의 교환으로서—규정되어야 한다(Strathern 1988, 1992a, b).

 

이제 우리는 관계적인 존재론을 입수했다. 그 존재론에서는 개별의 신체적 실질과 실체적인 형태는 궁극적 실재가 아니다. 여기서는 일차성질과 이차성질—철학에서의 전통적인 대비를 불러온다면—사이에는, 혹은 ‘삶의 사실’과 ‘제도적 사실’—셜의 최근 저작(Searl 1995)에서 제시된 이원성을 불러온다면—사이에는 어떤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셜의 이 저작에 대해 간단하게 논해보겠다. 저자는 의식이란 독립된 실재성에 있는, 그가 삶의 사실과 객체라고 한 것—중력과 산, 나무와 동물(모든 자연종은 이 계층에 속한다)—을 그 존재, 동일성, 목적이, 인간이 그것들에 부여하는 특정의 문화적인 의미에서 유래하는, 제도적이라고 불리는 사실과 객체—혼인과 화폐, 도끼와 컴퓨터 등—에 대치한다. 문제가 되는 이 저작은 베르크(Peter Berger)와 루크만(Thomas Luckmann)의 『현실의 사회적 구성(The Social Construction of Reality)』이 아니라 『사회적 현실의 구성』이라 불리는 것에 주의하자. (삶의 사실에 대한 언명을 포함한) 제도적 사실이 구축된다고 하지만, 삶의 사실은 구축되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부터 어떤 자연/문화의 이원론의 현대화된 버전에서 문화상대주의는 자연의 보편주의가 자연인 객체에 적합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문화적인 객체에 대해 유효하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의 논의를 셜이 우연히 착목했다면 아마도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에게 모든 사실은 정신 내지는 제도적인 타입에 관한 것이며 모든 객체는 나무와 물고기조차 화폐와 카누와 동일한 것이라는 것(나무토막이나 종이조각으로서가 아니라 화폐나 카누로서)이며, 이 또한 특수한 실재성은 인간이 그것들에 부여하는 의미와 이용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라고 나는 말하고자 한다, 라고. 이것은 상대주의에 다름 아니며, 그것도 극단적이며 절대적인 모습을 띠는 상대주의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애니미즘적인 퍼스펙티비즘의 존재론이 함의하는 하나는 자율적인 자연적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서의 ‘자연’이 다른 자에게서의 ‘문화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제정적인 규칙, 혹은 제도적 사실을 표하는 정식이 “맥락 C에 있어서 X는 Y로 간주된다”(Searle 1959: 51-52)라고 한다면, 우리의 흥미를 끄는 선주민적 사실은 바로 이 타입에 관한 것이다. “재규어의 맥락에 있어서 피는 발효주로 간주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도적 사실(셜의 정식에서 Y)은 보편적인 것의, 삶의 사실이 보편적이고 제도적 사실이 특수하다는 셜의 대안을 피해가는 어떤 것이다. 퍼스펙티비즘을 (모든 사실을 제도적이라고 규정하고 그것들에는 문화적인 가변성이 있다고 결론내릴) 구축론자의 상대주의로 감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수중에 있는 것은 그 반대물로서 자연상대주의문화보편주의(이 표현은 라투르로부터 빌려왔다) 혹은 내가 부르기 좋아하는 방식으로는 다자연주의의 하나의 사례다.

 

 

야생의 신체

 

아마존의 우주론에서 신체가 우수한 사회적 장치로서 나타난다는 관념—즉 다른 것으로부터 구별되는 한에서 동일한 타입의 존재를 통합하는 것—은 이 지역의 민족학에서 고전적인 질문을 새로운 조망 하에 재고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아마존의 사회들에서 신체성의 의의라는, 지금은 고풍스럽게 울려 퍼지는 이 주제(Seeger, DaMatta&Viveiros de Castro 1979)는 우주론적인 근거를 갖고 있다. 이 주제를 통해 예를 들어 동일성의 카테고리—개별적이든 집합적이든, 민족적이든 우주론적이든—가 빈번하게 특히 식사의 실천과 신체장식 등의 신체적인 성구를 통해 표현되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식량이나 요리 제도의 상징적인 함축은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레비-스트로스의 “익힌 것과 날 것”에서부터 피로족 사람들을 백인과 문자 그대로 차이화하며 피로족을 피로족으로 만드는 ‘진짜’ 음식(Gow 1991a)까지. 중앙브라질에서 ‘신체적인 실질 집단’을 규정하는 음식기피(Seeger 1980)에서부터 식습관에 연관된 존재의 기본적인 분류(Baer 1994: 88)까지. 공식성(共食性)과 식생활의 유사성과 먹이-객체와 포식자-주체라는 상대적인 조건의 개념적인 생산성(Vilaça 1992)으로부터 혼인, 식사, 전쟁 등과 관련한 타자와의 모든 관계의 ‘술어적’ 평면으로서의 카니발리즘의 편재성(Viveiros de Castro 1993)까지. 이 보편성은 신체를 구성하는 습관과 과정이 바로 동일성과 차이가 출현하는 장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인격적인 동일성의 확정과 사회적 가치의 유통의 경우 신체를 기호론적으로 정력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Turner 1995). 아마존 사회체에서 관계성의 토대로서 기능할 수 있는 사물의 자원적 제약—사회적 교환이 증여경제나 상품경제처럼 물질적인 객체화에 의해 매개되지는 않는 상황—과 (특히 그 가시적인 표면에서) 신체의 중층결정 간의 연결에 대해서는 터너가 깔끔하고 정확하게 정리했으며, 인간적인 신체가 사회적인 객체의 원형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러나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이 신체의 사회적 구축을 강조하는 것은 자연적인 기질의 문화화라기보다 시차적(示差的)으로 인간적인, 이른바 인간적인 신체의 산출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이 표현하는 것은 문화적으로 특징지어짐으로써 신체를 ‘탈-동물화’하려는 갈망이 아니다. 오히려 여태껏 아무 특징도 없는 신체를 다른 인간적인 집단과 그 외의 종으로부터 차이화함으로써 특수화하고자 하는 갈망이다. 차이를 낳는 퍼스펙티브의 장으로서 신체는 그 퍼스펙티브를 충분히 표현하기 위해 최대한으로 차이화되어야 한다.

 

인간적 신체는 인간성과 동물성의 계보투쟁의 장으로 간주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본성에 의해 본질적으로 동물적이며 문화에 의해 은폐되고 제어될 필요 때문이 아니다(Riviére 1994). 신체는 주체가 표현하기 위한 근원적인 도구임과 동시에 타자의 시야에 던져진 특단의 대상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신체가 사회적으로 최대한 객체화된다는 것, 즉 장식과 의례적 피로(披露)를 통해 표현되는 최대한의 특수화가 동시에 최대한의 동물화의 기회가 되는 이유다(Goldman 1975: 178; S. Huge-Jones 1979: 141-142; Seeger 1987 ch. 1&2; Turner 1991; 1995). 그때 신체는 깃털, 채색, 도안, 가면, 그 외의 동물적인 보철들로 덮인다. 의례적인 동물로 치장하는 인간은 초자연적으로 벌거벗은 자신의 신체의 ‘자연적인’ 특수성을 자신에게 드러낸다. 이 인간은 외적인 형상으로부터 해방되어 인간으로 나타남으로써 정신의 ‘초자연적’ 유사성을 드러낸다. 정신 모델은 인간적인 정신인 반면, 신체 모델은 동물적인 신체다. 그리고 주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문화가 <나>의 총칭이 되는 형상을 띠고 자연이 <그것>의 형상을 띤다면 주체자신의 대상화에는 신체의 특이화—문화의 자연화 곧 문화의 신체화—를 요하게 되는 한편, 객체의 주체화는 정신의 수준에서 의사소통—자연의 문화화 곧 자연의 초자연화—을 요하게 된다. 이 때문에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자연/문화의 구분의 문제계는 인간-동물이 공유하는 애니미즘적 사회성의 이름하에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퍼스펙티비즘의 광명 하에 재독되어야 한다.

 

‘신체 모델은 동물적 신체’라는 사고를 지지하기 위한 중요한 논거는 아마존 민족지와 신화론에서 인간으로 ‘치장하는’ 동물, 즉 인간의 신체를 의복처럼 몸에 두르는 사례가 사실상 하나도 발굴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인간적인 신체까지 포함해서 모든 신체는 의복에 싸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동물이 인간적인 의복과 장식을 몸에 두른 모습은 결코 보이지 않는다. 인간이 동물적인 의복을 몸에 두르고 동물이 되는 것인가, 동물이 동물적인 의복을 벗고 인간으로 나타나는가, 이 둘 중 하나다. 인간적인 형상은 신체의 내부의 신체며, 원초적인 벌거벗은 신체—신체의 ‘혼’—다.

 

이러한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신체는 여건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으로 사고된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신체의 계속적인 제작이라는 수법이 강조된다(Viveiros de Castro 1979). 신체적, 성적, 영양적인 유체의 공유를 통해—물질적인 본질(substantial essence)의 수동적인 유전이 아니라—개인을 적극적으로 동화하는 과정으로서의 친족 관념(Gow 1989; 1991a), ‘고기’로 기재되는 기억 이론(Viveiros de Castro 1992a: 201-207), 나아가 더 일반적으로는 신체에 위치지어진 지식 이론(Mc Callum 1996).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형성은 정신보다도 신체에서 이뤄진다. 신체의 변태, 즉 정태와 역능을 규정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뛰어넘는 정신적인 변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건이라기보다 행위수행적인 신체의 특징, 즉 신체가 ‘자연적으로’ 차이화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문화적’으로 신체를 차이화시켜야 한다는 사고에는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우주론에서 항상 그 가능성이 표명된다. 종들 간의 변신(metamorphose)과 분명히 연계되어 있다. 신체를 탁월한 차이화 장치로서 조정함과 동시에 그 변신가능성을 확립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그들의 사고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우주론에서는 특이성이 정신의 특징으로 상정되지만, 이를 통해 (이를테면 독아론은 항상 문제시된다 해도) 의사소통의 불가능성이 표명되는 것도 아니라면, 교육이나 종교적인 회심 등의 과정에 더 잘 일어나는 심적 내지는 정신적인 변태가 부인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그것은 바로 정신이 심적이 필요로 하는 차이의 장이기 때문이다(서양인은 인디오를 변화시키기 위해 그들이 혼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자 했다). 신체적인 변신은 영적인 회심이라는 유럽적인 주제인 반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에게는 그 반대물이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샤머니즘이라는 복합체에서 영적빙의라는 양의성 없는 사례가 상대적으로 희귀한 것도 신체의 변신이 우세하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선주민의 종교적 회심이라는 문제도 이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다. 선주민의 ‘문화적응’ 경험은 정신적인 동화라는 사고보다도 서양의 신체적인 습관의 수용과 신체화—음식물, 의복, 민족 간의 섹스, 육체적인 능력으로서의 언어 등—쪽에 초점을 둔다. 사회문화적인 변용에 관한 인류학의 이론은 혼혈이나 인종적 동화가 민족-문화적 구분의 상실과 연결된다는, 서양의 민족발생론적인 사고를 거부한다. 여기에 이유가 있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와 반대로 문화적응 과정은 이데올로기의 변화, 즉 무엇보다도 현지의 ‘신념’에 악영향을 미치는, 본질적으로 정신적인 과정으로서 규정된다. 문화적응은 딱 문화가 종교의 이미지를 가지고 생각되는 것처럼, 종교적 회심의 이미지를 가지고 생각된다. 결과적으로 그리고 이러한 경향에 더욱 세밀한 채색을 가하는 것 같은 아비투스의 개념조차 문화적응에 휘말린 신체의 변화는 그 원인보다도 ‘집합적 표상’의 수준에서의 그 효과로서 이해된다. 생각해보면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사고방식이 다른 이유는 그들의 사고가 다른 방식으로 신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의할 것은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변신이 평온한 과정이 아니라면 사회적으로 가치가 부여된 목적일 필요도 없다는 점이다. 만약 독아론이 우리의 우주론을 위협하는 환영(幻影)—동종의 동료들이 인식할 수 없다는 공포의 확장, 잠재적으로 절대적인 정신의 특이성을 고려해둔다면 실은 그들이 우리와 같지 않다는 것—이라면, 변신의 가능성이 표현하는 것은 그 대극에 있는 공포, 동물로부터 인간을 이미 차이화할 수 없다는 공포, 나아가 자신이 먹은 동물 신체에 잠재된 인간적인 것을 보는 공포다(Goldman 1975: 183; Brightman 1993: 206ff; Erikson 1997: 223). 이것은 퍼스펙티비즘의 더욱 중요한 민족지적 반복 속에서 번역된다. 동물들의 옛 인간성이 가시적인 형상에 숨겨진 현재의 영성(靈性)에 부가되기 때문에 신화적으로는 인간과 동일 실체인 몇몇 동물은 식용에 적합하지 않다고 표명된다면, 특정 동물을 먹기 전에 샤먼에 의한 탈주체화가 필요하다는, 식량금기 혹은 예방책으로서 성립되는 복합이 산출된다. 샤먼에 의한 탈주체화는 동물의 영을 무력화하고 그 고기를 식물로 구체화하든지 덜 인간적인 다른 동물로 의미론적으로 환원한다—이 모든 것은 사람을 먹는 보복의 포식으로서 이해되는, 질병의 모습을 취하는 복수의 위협 하에 있다. 이것을 수행하는 것은 포획물의 영, 인간을 동물로 변태시키는 퍼스펙티브의 치명적인 전치를 통해 포식자가 되는 것이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에게 독아론이라는 문제와 동등한 것이 카니발리즘이라는 망령이다. 독아론이라는 문제가 신체적인 유사성이 정신 사이에 실재하는 공동성을 보증하는 것인지에 대한 염려에서 유래하는 것이라면, 카니발리즘이라는 망령은 정신의 유사성이 실재하는 신체적인 차이에 우월한지를, 그리고 먹힌 동물이, 가령 샤먼에 의한 탈주술화의 시도가 있다 해도 인간으로 머물러 있을지를 위태로워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어느 정도는 근원적인 독아론자가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세련되거나 문자 그대로 식인적인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이 부정될 이유는 없지만.

 

아마존의 카니발리즘이 의도하는 것은 적의 주체적인 상(相)을 흡수하는 것이며, 그 목적을 위해 적(敵)은 동물의 신체의 사례에서 보이듯이 탈주체화되는 것이 아니라 과도하게 주체화된다(Viveiros de Castro 1992a; Fausto 2001 참조). 앞서 서술한 것처럼 샤먼의 움직임 속에 선량한 부분은 죽은 동물을 탈주술화해서 먹기 위해 어떤 위험도 존재하지 않도록 순수하게 자연의 사체로 변신시킨다는 점이다. 반대로 정령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것들이 궁극적으로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그것들은 한층 더 탁월한 대식가, 즉 사람을 잡아먹는 자가 된다. 따라서 탁월한 동물적 포식자는 정령들이 즐겨 나타나는 형상이 된다. 나아가 왜 먹잇감인 동물은 인간을 정령으로 보는가, 포식자는 우리를 먹인감인 동물로 보는가, 왜 먹히지 않는다고 이해되는 동물은 정령과 관계하는 경우가 많은가를 이해할 수 있다.

 

변신의 관념은 이미 몇 번이나 언급한 동물적인 의복이라는 교리와 직접적으로 결부된다. ‘신체는 차이를 발생시키는 퍼스펙티브의 장’이라는 사고와 애니미즘과 퍼스펙티비즘을 해석할 때에 상기되는 외견본질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양립시켜야 하는 것일까? 내 생각에 여기에는 중요한 오인이 있는 것 같다. 즉 신체적인 ‘외견’을 비활성적이고 허위인 것으로서, 정신적 ‘본질’이 활성 있는 진정한 것으로서 받아들이는 오인이다(골드만의 결정적인 견해를 참조할 것. Goldman 1975: 63, 124-145, 200).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이 의복과의 관계로 신체에 대해 말할 때의 사고에서 그리 멀리 갈 것도 없다. 신체가 특정 종의 의복이라기보다 의복이 특정 종의 신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피부에 효과적인 의미가 새겨진다. 그리고 적절한 의례적 맥락에서 이용된다면, 몸에 둘러진 인물의 동일성을 형이상학적으로 변태시키는 힘을 저장한 동물의 가면이 사용된다(혹은 적어도 그 원리가 알려져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가면-의복을 두르는 것은 동물적인 외형 밑에 인간적인 본질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신체의 힘들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우주를 여행하기 위해 샤먼이 사용하는 동물적인 의복은 코스프레가 아닌 도구다. 그것은 카니발 의복이 아니라 다이빙용품이나 우주복에 가깝다. 잠수복을 몸에 두를 때의 지향은 수중에서 숨을 쉬게 하는 것, 물고기처럼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를 기묘한 덮개 밑에 은폐시키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동물 사이에서 인간적인 타입의 내적인 ‘본질’을 씌우는 의복은 단순한 변장이 아니라 동물 각각을 규정하는 정태와 역능을 품고 있는 변별적인 장비다. “외견은 속일 수 있다”(Hallowell 1960; Riviére 1994). 물론이다. 그러나 내 인상으로는 동물적인 의복이라는 주제로 다뤄지는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이야기의 관심은 그것이 숨기는 것보다도 이 의복이 이루는 것에 있다. 게다가 존재와 그 외견 사이에 있는 것이 신체다. 그리고 그 신체는 단지 그것인 이상의 것이다—이야기 그 자체는 어떻게 외견과 일관되지 않는 신체적인 제스처에 의해 항상 외견이라는 ‘가면이 새겨지는’ 것일까를 이야기한다. 즉 다음과 같다. 신체는 처분가능 및 교환가능하며 그 ‘배후’에는 형상의 측면에서 인간으로 확정 가능한 ‘주체성’이 있다. 이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관념이 외견과 본질 사이에서 우리가 품는 대비와 동일하지는 않다. 그 관념은 신체의 객체적인 교환가능성이 정신의 주체적인 동등성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이 틀에서 해석될 수 있는 남미 민족지학의 또 하나의 주제는 산자와 죽은 자 간의 사회학적 불연속성이다(Carneiro da Cunha 1978). 산자와 죽은 자 간의 근본적인 구분은 정신이 아닌 신체에 의해 만들어진다. 죽음은 신체적인 파국이며, 산자와 죽은 자 사이를 교통하는 ‘활력’을 억누르는 차이화 장치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우주론은 동물의 시야로 향하는 만큼, 아니 그 이상의 관심을 죽은 자의 세계를 보는 양태로 향한다. 그것은 산자의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를 강조한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체로부터 결정적인 순간까지 분리되므로 죽은 자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적인 신체와의 분리에 의해 규정되는 영(靈)으로서 죽은 자는 논리적으로 동물의 신체로 옮아간다. 이것은 왜 죽은 자가 동물로 변태하는지, 또 그와 마찬가지로 왜 인척이나 적대자 등의 다른 신체적인 타성의 형상으로 변태하는지가 설명된다. 이렇게 해서 애니미즘은 인간과 동물 간의 주체적이고 사회적인 연속성을 끌어내고, 그 육체적인 보완물인 퍼스펙티비즘은 살아있는 인간과 죽은 인간 사이의 객체적이고 그만큼 사회적인 불연속성을 확립한다. (조상숭배에 기초한 종교는 그 정반대를 가정한다. 즉 정신적 동일성이 죽음이라는 신체적인 장벽을 뛰어넘으므로 산자와 죽은 자는 동일한 정신을 표하는 만큼 동일하다—이렇듯 한편에서는 초인적인 조상의 영의 빙의가, 다른 한편에서는 죽은 자의 동물화와 신체적인 변신이 있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이 내포하는 다양한 논점들을 이제까지 검토해왔다. 이제 남은 것은 정신의 종-횡단적인 균일성에 부여된 우주론적인 역할이다. 내 생각으로 이 속에서 특정 카테고리의 관계론적인 정의를 제시할 수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는 악평일색이었고 유용성은 거의 거론되지 않았던 <초자연>이라는 카테고리다. ‘천체 이상’의 유형이 속하는 우주지(宇宙誌)의 영역으로 라벨링되거나 선주민의 우주론에서 지향성을 가진 존재의 제3의 유형—인간도 동물도 아닌 존재(내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정령’이다)—을 규정하는 것 등 잘 알려진 사용례와는 별도로 초자연의 관념은 특정한 관계적인 맥락과 특수한 현상학적인 질을 지시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다. 그 맥락과 질은 사회적인 세계를 규정하는 간주관적인 관계로부터도 동물의 신체화의 ‘간-객체적 관계’로부터도 마찬가지로 구별된다.

 

대명사적인 계열과의 유사(Benvenisete 1996a, b)에 따라 (혼이나 정신이라는 관념을 만들어내는) 문화라는 재귀적인 <나>와 (신체적 타성과의 관계를 기록하는) 자연이라는 비인격적인 <그것> 사이에는 간과된 입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너>라는 2인칭이며, 그 관점이 <나>의 관점의 잠복된 메아리인 것처럼, 다른 주체로서 받아들여진 타자에 관한 것이다. 나는 이 관념이 초자연적인 맥락을 규정하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주체가 우주론적으로 우세한 다른 관점에 포획된다는 예외적인 맥락, 그가 비-인간적인 퍼스펙티브의 <너>인 맥락에서는 <초자연>은 <주체>로서의 <타자>의 형상이다. 인간적인 나를 이 <타자>에게서 <너>로 대상화하는 것, 바로 이것이 그 의미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상황의 전형은 처음에는 단순히 동물이 인간으로 보이지만 그로부터 정령이나 죽은 자로서 나타나 인간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존재를, 인간이 숲 속에서 마주친다는 것이다. (타일러의 텍스트에서는 이 의사소통의 역동성이 정교하게 분석되어 있다(Taylor: 1993b). 이 만남은 응답자에게 치명적인 경우가 많다. 비-인간적인 주체성에게 정복되면 그것들 쪽으로 옮겨가서 발신자와 동일한 부류의 존재—죽은 자, 정령, 동물—로 변태해버리기 때문이다. 비-인간에게서 <너>라고 불려 그에 응답한 자는 그 존재의 ‘2인칭’의 조건, 즉 그에게서의 <나>의 위치에 이미 담겨 있는 비-인간적인 조건을 받아들인 자다. (정의상 혹은 공식적으로 다자연적인 존재인 샤먼만이 여러 퍼스펙티브를 왕래할 수 있고 자신의 주체의 조건을 잃지 않고 동물 혹은 영적인 주체로부터 <너>로 불릴 수 있으며 또 그것들을 <너>라고 부를 수 있다.) 이처럼 초자연적인 만남의 기준형식은 타자가 ‘인간적’임을 서둘러 발견하는 것, 즉 <그것>이 자동적으로 응답자를 탈인간화하고 소외시켜서 먹잇감—동물—으로 변신시키는, 인간이라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것이 외견의 배후에 숨겨진 것으로서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이 품고 있는 염려가 진정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외견이 속일 수 있다는 것은 어떤 무엇과의 상호작용에서 어느 쪽이 지배적인 관점인지, 즉 어느 쪽의 세계가 작동하는지가 결코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위험하다. 특히 모든 것이 인간이며 우리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때에는.

 

 

맺음말을 대신해서

 

서로 대조해본 두 개의 우주론적인 관점—내가 ‘서양적’이라고 부르는 것과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관점에서는 통약불가능하다. 컴퍼스라는 것은 한쪽의 다리를 고정하고 다른 한 쪽의 다리가 그 주변을 돌아서 움직여야 한다. 우리는 자연에 대응하는 다리를 우리의 기준으로 선택하고 다른 다리가 문화적인 다양성의 축을 그려내도록 하고 있다.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은 우주론적인 컴퍼스의 기준이 되는 다리로서 우리가 ‘문화’라 부르는 것에 대응하는 쪽을 선택함으로써 우리의 ‘자연’을 계속적인 변화와 변이에 위탁하고 있다. 양쪽 다리가 동시에 움직일 수 있는 컴퍼스—상대주의의 극단—는 기하학적으로 성립되지 않으며 철학적으로도 불안정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컴퍼스의 끝이 어디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은 다리가 머리 부분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자연과 문화의 구분은 이 구분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머리 부분의 끝 주변을 배회한다. 라투르(Latour 1991)가 정교하게 논한 것처럼 <이론>이 실천이라는 ‘중간세계’를 실태나 원리 등의 대치된 영역으로 분리하고 순화하는 움직임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 끝에 있는 점은 우리의 근대에서 이론-외적인 실천에서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자연>과 <문화>처럼.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사고—아마도 모든 신화적 사고—는 그 정반대의 궤적을 선회한다. 왜냐하면 신화론의 대상은 <자연>과 <문화>의 분리가 아직 순수한 잠재성이라는, 바로 머리 부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퍼스펙티비의 잠세적인 원천에서 절대적인 운동과 제한 없는 다원성은 경직된 부동성과 형용할 수 없는 통일성을 구분불가능하게 만든다.

 

두 번째,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점을 이야기해보겠다. 선주민이 옳다고 한다면 두 관점 간의 차이는 문화적인 문제도 아니고, 하물며 ‘정신성’의 문제도 아니다. 상대주의와 퍼스펙티비즘, 혹은 다문화주의와 다자연주의 간의 대조성이 우리의 다문화적 상대주의가 아닌 선주민의 학설 하에서 독해될 수 있다면,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려야 한다. 퍼스펙티비의 상호성은 상호성 그 자체로 적합하다. 그리고 차이는 세계 속에 존재하며 사고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우리 중 몇몇은 신화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에서 작동하는 논리가 실은 동일한 것이라는 것, 그리고 인간은 똑같이 언제나 잘 사고해왔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진보는 아마도—가령 이 용어가 그 경우에 더 적합하다면—의식이 아닌 세계를 무대로 하고 있으며 항상적 능력을 부여받은 인류는 그 긴 역사를 통해 이 세계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대상과 엮여왔을 것이다(Levi-Strauss 1955b: 255)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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