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타 케이지(岩田慶治)의 애니미즘론
시미즈 타카시(清水高志)
키워드: 애니미즘, 이와타 케이지, 쇼보겐조(正法眼蔵), 상관주의, 원풍경
애니미즘은 만물에 영(anima)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원시적인 정령신앙을 가리키는 개념으로서 오랫동안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애니미즘의 세계관 자체를 서구근대의 그것과는 다른 존재론(ontology)으로 재정하려는 시도가 세계적으로 관찰되고 있다. 예를 들어 현대 프랑스에서 레비스트로스의 후계자로 주목받는 문화인류학자 필리프 데스콜라는 애니미즘을 내추럴리즘, 토테미즘, 아날로지즘이라는 유형과 더불어 유력한 세계관들 중 하나로 파악하고 있다.
데스콜라에 따르면, 애니미즘은 근대서구의 인간의 세계관을 나타내는 내추럴리즘과 특히 대조를 이룬다. 내추럴리즘이 인간의 정신과 문화들을 다종다양한 것으로 사고하는 한편으로 자연계 그 자체를 객관적인 법칙이 관통하는 하나의 존재로 파악하는 것에 반해, 애니미즘의 세계관에서는 인류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물이나 비인간 또한 각기 세계를 가치짓는 퍼스펙티브의 중심이 되며, 그 의미에서 그것들은 <인간>과 같다. 그러므로 세계 그 자체는 다양한 퍼스펙티브의 숫자만큼 존재한다. 한마디로 내추럴리즘이 다문화주의와 단자연주의인 반면, 애니미즘은 단문화주의(모든 것이 혼을 갖는다)와 다자연주의다.
단순한 문화상대론이나 가치상대론에 의한 이질적인 문화의 허용은 근대에서도 포스트모던에서도 크게 유행했다. 그러나 그러한 상대주의 자체를 뒤집지 않는 한, 근대적인 세계관의 연장선상으로밖에는 다른 문화를 이해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서구와 일본의 문명에 대해서도 근대 이전부터 이어져온 고층(古層), 그 핵심부에 도달할 수 없다. 21세기에 이르러 철학자 미셸 세르는 데스콜라의 작업을 채용하면서 서양문명 자체에 내추럴리즘 이외의 세계관이 실제로 짙게 남아있으며 켜켜이 뒤얽혀있음을 세밀히 검토한다. 이러한 태도는 애니미즘적인 문화 위에 대륙전래의 다양한 문화 그리고 서구에서 비롯된 근대문명을 받아들여 형성된 일본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매우 참고할만하다. 일본문화 속에 역사적으로 스며들어 있으면서 현대문명과 혼효하는 애니미즘의 세계관을 서구근대의 그것과 길항하는 <사상>으로서 조금이라도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우리[일본인]가 애니미즘에 대해 그 뉘앙스를 남김없이 음미하고자 한다면, 프랑스사람인 데스콜라가 고찰한 것보다 우리의 세계관에 내재한 접근법을 시도하는 것은 어떠할까?
전전(戰前)부터 전후에 걸쳐 교토학파의 학문의 흐름을 이어받은 특이한 인류학자 이와타 케이지의 애니미즘론은 여러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아 전후 교토의 지사인(慈済院)에서 하숙하면서 도원(道元, 1200~1253, 일본의 禪僧)의 『正法眼蔵』을 읽으며 청년시대를 보낸 이와타는 본래 지리학을 배우는 중에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코스모스』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이 책은 지층의 퇴적 및 조산활동, 기상, 식물의 수평・수직 분포 등이 모두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아름다운 질서를 가진 것으로 이 세계를 그리려는 시도다. 전일체(全一體)로서의 세계, <코스모스>를 다루는 과제를 이와타는 훔볼트에게서 이어받는다. 선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와 <코스모스>에 대한 강한 희구는 이와타가 후에 문화인류학으로 전환하여 애니미즘의 연구로 나아간 출발점이 되었다.
세계를 전일체로 파악하기 위해 훔볼트가 『코스모스』에서 탐구한 방법은 결국 상관학(Physiognomy)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현상이 복수의 층을 이루며 겹겹이 쌓여 관련되고 합쳐지는 모양을 손금을 읽듯이 읽어가는 것이다. 이때 전일체로서의 세계, 집대성된 코스모스를 통일하는 것은 그것과 대치하는 인간이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자의식이 미치는 한에서의 <끝없는 전세계>다. 현대 철학자 퀑탱 메이야수는 근대 이후의 철학이 인간에게 자연과 세계, 인간과 관련되는 (상관적인) 한에서만 고찰되어왔다는 것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인류 이전부터 있었던 세계로부터 출발해서 사물과 세계를 다시 생각할 수는 없을까? 그의 이러한 입장은 상관주의 비판으로 불리며 21세기 철학에 커다란 문제를 제기하는데, 이와타는 훔볼트의 <코스모스> 속에서 바로 상관주의적인 한계를 진작 알아채었다. 그리고 그 한계를 넘어 진정한 <코스모스>를 탐구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만년의 훔볼트는 카멜레온을 키웠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방문객에게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나는 카멜레온이 좋소. 카멜레온은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을 각기 다르게 움직일 수 있소. 오른쪽으로는 하늘을 우러르고 왼쪽으로는 땅을 볼 수가 있단 말이오. 그러나 인간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오.” <코스모스>와 대치하면서 그에 도전하는 인간의 자의식은 특권적이지만 <코스모스>의 외부에 놓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동시에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내려다보는’ 복수의 퍼스펙티브를 갖는 것은 통상 불가능하다.
<땅을 내려다보는> 것과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이 공존・교차해야만 진정한 전일체, 진정한 <코스모스>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이와타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아가 <땅을 내려다보는> 것을 통해, 동시에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까지 실현하는 것이 그의 학문의 목표였다. <땅을 내려다보는> 것은 그에게 로컬의 <문화의 내측>을 관찰하는 것이다. 또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은 그 문화가 <문화의 외측>의 퍼스펙티브를 더불어 포섭하는 것이다. 그러한 복수의 퍼스펙티브의 교차・공존이야말로 애니미즘 문화의 특징이라고 이와타는 주장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교차・공존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나타내주는 것일까? <문화의 내측>과 <문화의 외측>은 이와타에게 종종 각각의 <근경(近景)>과 <원경(遠景)>에 비유적으로 바꿔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전일체로서의 <코스모스>는 그 양자가 겹치는 곳에서 성립하는 <원풍경(原風景)>이다.
예를 들어 보르네오의 이반족에서는 벼의 탈곡에 사용하는 절구가 그대로 악기가 되고 그 소리가 그들의 일상생활에 구심력으로 작용한다고 이와타는 말한다. <근경>, 즉 <문화의 내측>을 형상화하는 힘은 그 자체로 사물 내지는 자연과 함께 한다. 그러나 그 절구소리는 벼의 혼을 불러들이는 것이기도 하며 <문화의 외측>에 있는 자연 그 자체에로, 그대로 땅과 연결된다. 일상생활 속에서 환경과 우리는 불가분하게 융화되어 있으며, 그것이 <근경>, <문화의 내측>을 형상화한다. 그 속에서 사람과 사물, 풍경은 말하자면 거울적이다. 그러나 또 그 풍경은 바로 거대한 풍경, 자연과도 저절로 연결된다. 주체⇔대상의 관계는 주체를 축으로 겹쳐 쌓이고 종합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세계, 즉 <원풍경>=<코스모스> 속으로 포섭되고 만다. 아니, 그렇지 않다. <문화의 내측>에서 일상적으로 접하는 사물과 자연 속에서 이미 <코스모스>는 생생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새가 하늘을 날 때, 새는 하늘과 일체가 된다. 그러나 본래 하늘은 무한의 하늘 그 자체와 일체이며 “비공(飛空)의 행리(行履)는 가늠할 수 없다.”(어디까지 날고 어떻게 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좌선잠’(坐禪箴)을 해석해서 도원은 말한다(『正法眼蔵』). <근경>과 <원경> 그리고 <원풍경>은 바로 그렇게 연결된다. 흔하디흔한 사물 혹은 자연과의 대면의 순간에 그 장면 자체를 포섭하는 더욱 큰 <원풍경>을 직접 느끼는 것. 그 놀라움과 함께 근대의 이원론을 뒤집고 그렇게 스며든 애니미즘의 사고를 본류로 되돌리고 나아가 전일체로서의 세계의 품에 다시금 안기는 것. 바로 이 의미에서 이와타의 바람은 애니미즘 사상의 회생이었다.
『Lexicon 現代人類学』 104-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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