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식_콘도 히로시

번역글 2018. 7. 17. 14:05

포식 

콘도 히로시(近藤宏)

 

 

키워드: 폭력, 인척, 아마존, 정체성, 네이션

 

포식. 동물행동을 생각나게 하는 이 말을 인류학 용어로 다룬 논의는 다음의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아르준 아파두라이의 글로벌리제이션 론에서 정체성 개념으로서의 포식성이다. 또 하나는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 이후의 아마존 민족지학에서 관계개념으로서의 포식이다.

먼저 아파두라이 논의를 살펴보자. “집단이 자신의 정체성을 사회적으로 구축하고 또 그것을 동원하기 위해 그 자신에 근접하는 다른 사회적 범주를 말소해야 하는 정체성을 아파두라이는 포식성 정체성이라고 불렀다. 그 전형적인 예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나치즘인데, 인도에서 힌두교도가 이슬람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할 때에도 이와 동일한 타입의 정체성을 드러내었다고 그는 말한다. 후자의 경우 무슬림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면서 그 카테고리의 섬멸을 통해 자기 획정한다는 것이다.

아파두라이에 따르면, 이러한 정체성은 메이저리티 집단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메이저리티와 네이션이 집단적으로 일치하지 않을 때 불확실성의 불안을 메이저리티가 품는 경우가 생긴다. 마이너리티에 대한 공포라는 감정이 양성되면 그 사회적 카테고리를 말소하는 폭력을 긍정하면서 자기획정이 이뤄진다. 이 논의에서 포식이 의미하는 바는 섬멸의 역능이다.

아파두라이는 이러한 포식성을 불러들이는 조건을 소수자를 본질적 마이너리티집단으로 규정하는 것에서 찾는다. 마이너리티가 본질적으로 메이저리티로부터 구별된 집단이 된다는 것은 자기 동질적인 메이저리티로부터 계속해서 배제되어 잠재적인 위협이 된다는 뜻이다. 아울러 메이저리티 또한 자신의 특성을 본질화 한다. 아파두라이는 지배자집단이 수적으로 소수이면서 열등집단의 섬멸을 지향하는 사례가 역사적으로 종종 등장한다는 것을 의식하지만 수적으로 많고 적음이 절대적인 지표는 아니다. 오히려 국가적 사회 속에서 네이션이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집단과 선을 긋는 것이야말로 포식성 정체성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이 정체성 논의는 현대사회를 대상화하는 하나의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존 민족지에서 포식의 개념은 아파두라이 논의와는 대조적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아마존의 특유의 관계를 개념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전개된 논의의 성과를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인간과 신, 친구와 적, 친지와 외부자 등 대립물 간의 이음새로서 남미의 선주민이 생각하는 인척의 개념에 대한 비판적 분석에 기초하여, 브라질의 동업자들은 포식의 형이상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이끌어낸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레비스트로스 2000: 719). 즉 포식이란 인척이라는 고전적인 친족관계의 개념과 연결된다.

아마존에서 인척이란 혼인에 의해 결합된 관계만을 뜻하지 않는다. 인척이라는 개념은 혼인으로부터 해방된 형태로 관계성을 사고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으며, 죽은 자, , 동물, 신 등의 타자성을 띤 모든 존재 사이에서 생기는 관계까지 지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라우에테족에서는 티와라는 인척을 가리키는 말이 알게 모르게 백인, 친구 등 아직 인척관계가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그 가능성이 있는 자들까지 포괄한다. 나아가 죽인 적이나 신 등을 지시하는 경우에도 같은 말을 사용한다.

실제로 아마존에서는 혼인이 발생하게 되면 양의적인 상태에 있는 인물과의 관계는 혈연성을 띠게 된다. 아마존에서 혈연이란 생활을 공유함으로써 깊어지는 관계성, 즉 구축되는 것이다. 혼인에 의해 연결된 인척과의 관계는 혈연성을 점차 강화해간다. 이에 반해 순수한 인척이란 혼인에 의해 관계하지 않는 인격 사이에서 생긴다. 이에 따라 인척이란 외부성 혹은 타자성과의 관계이며 구축성과 연결되는 혈연성에 앞서서 소여로 주어지는 관계성이다. 다만 앞서 서술했듯이 그 타자가 반드시 인간적인 타자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인간적인 존재도 타자성을 띤 존재이므로 그것과의 또한 인척성을 띨 수 있다.

이러한 아마존적인 인척관계는 위험이나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오히려 타자성을 띠는 존재와의 관계는 사냥, 전쟁, 수렵, 카니발리즘 등의 활동과 친화적이다. 앞서 인용한 레비스트로스의 글처럼 바로 이것이 아마존적 포식의 특징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포식이란 단지 폭력의 대상으로서 타자성을 띤 존재의 위치를 매기는 관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타자성을 띤 존재와의 관계에는 외부의 내화라고 할 수 있는 사상(事象)이 수반된다. 히바로족의 수렵이나 투피남바족의 전쟁에서 적의 타자성을 자신에게 도입함으로써 자시변용이 일어난다. 아라우에테족에서 전자는 죽인 적의 시점에서 바라본 세계를 노래하며 그 노래를 통해 전사로서의 새로운 자기가 된다. 그 속에서 죽인 자는 적이라는 타자로의 변성을 이뤄낸다. 즉 위험한 타자로부터의 작용에 의해 자기가 생겨나는 것이다. 요컨대 불가결한 타자와의 관계성이 포식이다.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는 이러한 타자와의 관계의 특징을 타자의 절대적 필요성혹은 타자 없는 세계의 사고불가능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카스트루 2015b).

이 점에서 아마존적 포식관계는 아파두라이가 정체성이 기술하는 포식성의 정체성과는 정반대에 놓인다. 즉 아마존적 포식이란 스스로를 규정하는 데에 불가결한 타자성 그 자체와의 관계성이며 타자 없는 세계를 지향하지 않는다.

 

이 외에도 이 두 논의에서 포식이 의미하는 바의 차이는 몇 가지가 더 있다. 아파두라이의 논의에서 네이션과 그 타자를 둘러싼 사회적 카테고리의 문제와 연결된 포식성에서 타자는 섬멸 가능한 것으로 상상되며, 포식성의 정체성 속에서 자기 획정할 수 있는 집단은 섬멸이라는 행위의 동작주의 입장에 고정된다. 이 상상력의 기제 속에서 죽임을 당한 후의 타자를 위한 장소는 없다. 반면 아마존의 포식에서는 죽임을 당한 자와의 사이에서 생기는 관계가 문제시된다. 적의 시점이야말로 자기를 구성한다고 할 때 자기는 적으로부터 작용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성립될 수 있다. 에두아르도 콘은 송곳니가 육지거북이의 등껍질에 꽂혀 부서져서 더 이상 포식할 수 없게 되어 죽어버린 재규어가 썩은 고기를 좋아하는 육지거북이에 의해 포식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콘이 사냥을 통해 그려낸 포식성처럼, 아마존적 포식에서 드러난 관계성의 두 입장은 그 관계에 의해 연결된 이항 사이에서 쉽게 반전된다. 즉 동작주의 입장이 특정한 존재에 고정되지 않는 관계성이 아마존적 포식성의 관계성이다(2011).

동일한 용어를 둘러싼 두 논의의 차이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우선 포스트콜로니얼리즘과 존재론적 전회라는 인류학의 논의 흐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여기에는 포식이라는 용어의 다양성, 그 동형이의(同型異義)적인 어긋남 또한 볼 수 있다. 현대인류학에서 포식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크게 다른 두 세계를 연결해준다. 타자와의 폭력성을 띠는 관계성을 둘러싼 각기 다른 상상력의 연결을 받아들임으로써, “적이란 섬멸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적에 의해 우리는 상처 입어서는 안된다라고, 행위의 능력을 본질화하면서 자기 획정하는 네이션의 상상력 바로 옆에는 적을 통해야 비로소 우리가 변한다라며 타자와의 관계성을 찾아내는 아마존의 포식성이 있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처럼 이방인적 개념을 의식하면서 포식이라는 용어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는 세계를 떠올려봄으로써 타자와의 폭력성을 띠는 관계성이 네이션이 상상하는 모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는 않을까?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박이대승박수경 역) 식인의 형이상학, 후마니타스, 2018.

아라준 아파두라이(장희권 역) 소수에 대한 두려움: 분노의 지리학, 에코리브르, 2011.

에두아르도 콘(차은정 역) 숲은 생각한다, 사월의 책, 2018.

Lévi-Strauss, Claude (2000) “Postface”, L’Homme: 154-55.

 

 

 

Lexicon 現代人類学84-87.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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