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적 전회'가 한국인류학계에 진작에 받아들여지지 못한 큰 이유 중 하나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에 대한 이해가 일천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또한 프랑스 지성사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 그 맥락에서 비로소 파악되는 레비스트로스의 학문적 의의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지식의 주변부에서 번역은 주요한 학문활동이다.) 그래서 프레데릭 켁의 레비스트로스에 관한 논문을 번역해올리고자 한다. 켁은 레비스트로스 구조주의의 4세대 인류학자이다. 주로 불어로 책과 논문을 집필하는 탓에, 불어번역을 할 수 있는 인류학자가 희소한 한국에서 그의 한국어 번역본은 아직까지 나와있지 않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의 책의 영어번역본도 거의 없고, 특이하게도 일본어로 번역된 책과 논문은 다수 있다. 그중에서 2008년과 2013년 사상지에 게재된 두 편의 논문 중 전자를 번역(중역)했다. 후자는 한국어 번역본(중역)이 있다(http://multitude.co.kr/607).  이 일본어 번역본의 역자는 이미 고인이 된, 일본에서 상당히 저명한 레비스트로스 연구자이자 인류학자이다. 학문의 세계에서 그런 것들이 뭐 중요하겠냐만 30대 초반의 젊은 프랑스 인류학자의 글을 한갑의 일본인 노학자가 번역했다는 사실이 한국학계의 '중요하겠냐만'의 토를 달면서도 언급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부끄럽게 한다. 그 노학자의 '해제'가 있어 이 논문에 대해 따로 부연설명하지 않겠다.    

 

----------------------------------------------------

 

레비스트로스에 있어서 주체의 해체와 생태적 카타스트로피

 

프레데릭 켁(Frédéric Keck)

일어본 번역 와타나베 코우조(渡辺公三, 1949~2017, 인류학자)

 

[일어본 역자 해설]

이 글은 프레데릭 켁이 본지 특집호를 위해 특별히 투고한 논문을 번역한 것이다.

프레데릭 켁은 국립과학연구소(CNRS) 교수로서 고등사범학교 강사를 겸임하고 있다. 그는 프랑스에서 레비스트로스를 계승한 가장 젊은 4세대 인류학자를 대표한다. 이미 레비스트로스에 관한 두 권의 저작을 저술했으며, 20세기 전반의 프랑스철학에서 인류학적 성찰의 대표주자라 할 만한 뤼시앙 레비브뢸에 관한 한 권의 책을 간행했다. 또 레비스트로스 저작집의 편집을 담당한 4인의 젊은 연구자 중 한 사람으로서 오늘날의 토테미즘, 야생의 사고, ‘소신화학가면의 길, 질투심 많은 여 도공, 살쾡이 이야기등을 소개하고 상세한 평주(評註)를 붙이는 작업에 참여했다. 레비스트로스의 주요 업적이 세상에 낱낱이 알려지고 소위 구조주의의 붐도 지난 이 마당에 켁은 새삼스레 레비스트로스의 저작을 텍스트로서 읽어내고 21세기의 세계 현실에 비추어 그 의의를 재고하는 작업을 이끌고 있다. 켁은 원저자에게 저작의 배경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 희귀한 경험은 레비스트로스가 천수를 누린 덕분이다.

20085월 레비스트로스의 저작집 간행을 계기로 몇몇 잡지에서 레비스트로스 특집을 꾸몄고, 켁은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Le Nouvel Observateur)주간지의 인터뷰에서 레비스트로스의 탐구 궤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구조주의의 탄생을 알린 친족의 기본구조(1949)사이버네틱스에 의해 변신하게 된 뒤르켐 사회학이다. 사회는 일종의 유기체로서 혼인연대와 출자(出自 descent)의 보편적인 법을 통해 성 관계를 통제하고 인간고유의 질서를 생성시킨다.

그의 필생의 사업인 신화학(1964~71)생태학으로 확장된 마르크스주의이다. 한 사회의 신화 혹은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생산의 조건과 관계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 그 조건에서 동물과 식물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고 야생의 사고(1962)는 위의 둘 사이의 휴지기에 해당한다. 사회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인간정신의 수준에 진입해야 한다. 이 저작의 주제는 토테미즘과 공희(供犧)라는 인류학의 고전적인 문제를 1960년대 사상의 대주제인 역사와 변증법의 철학논쟁에 도입하는 것이었다.

 

이는 뛰어난 지적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간결하여 독단적인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에 관한 켁의 저작을 읽으면 그가 폭넓은 시야로 대상을 깊게 파고들어 읽어내었음을 납득할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와 야생의 사고(2004)레비스트로스하나의 서론(2005) 이 두 저작은 모두 젊은 독자를 염두에 두고 간단명료한 문장으로 레비스트로스의 난해한 업적을 명쾌하게 논하고 있다. 나아가 켁은 레비스트로스의 작품전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음은 물론2005년의 저작에서는 레비스트로스가 신화연구에 사용한 텍스트군을 상호 공명시킨 수법을 레비스트로스 작품군을 독해하는 데에 적용했다고 서술한다., 프랑스에서의 철학, 사회학, 인류학의 조류를 두루 살피고 있으며, 특히 2005년 저작의 후반부의 논쟁과 응용에서는 동시대의 인문과학분야와 인류학에서 레비스트로스가 어떻게 평가되고 있으며 그 쟁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문학연구에 어떻게 적용되었는지(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등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여주고 있다. 알튀세르의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호의적 평가에서부터 비판에 이르는 전개과정, 푸코에 대한 영향, 들뢰즈의 독자적인 레비스트로스 독해 등의 소개는 프랑스 철학사상의 지적 중심인 고등사범학교(École normale supérieure)에서 레비스트로스가 어떻게 읽혀왔는지를 짐작케 하는데, 이는 젊고 뛰어난 지식인들 간의 일종의 비의적인 전승의 분위기마저 느끼게 한다. 모리스 고들리에 등의 2세대에 이어 3세대의 브뤼노 라투르, 룩 볼탄스키(Luc Boltanski), 필리프 데스콜라 등이 레비스트로스 작품을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인문사회과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왔는지에 대한 소개 또한 매우 흥미롭다.

이러한 저작들과 병행해서 20048-9월호의 레탕모데른(Les Temps Modernes)지 기고문 「『야생의 사고에 있어서 개체와 사건, 그리고 2004엘느(Elne)지 레비스트로스 특집호(82)에 게재된 「『벌거벗은 인간』 「에필로그에서 인간의 해체를 통합한 것이 본 논문이다.

 

 ----------------------------------------------

 

주체의 해체는 1960년대 구조주의의 가장 큰 테마군 중 하나였다. 미셸 푸코는 말과 사물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의 죽음이라는 제목 하에서 이 테마를 다뤘다. 푸코는 여기서 근대서구의 인간이 그것들[생명, 노동, 언어] 가운데 하나의 특이한 습곡에 불과한, 생명과 노동과 언어의 다양한 형태의 연구영역을 개척했다. 스피노자의 목적론에 대한 공격을 재현한 이 테마는 윤리적인 차원을 갖는다. 즉 주체 비판은 존재와 사물에 깊은 경의를 품은 관계의 조건이다. 스피노자에게서 이와 마찬가지로 해체라는 부정적인 처사가 긍정적인 의식화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어떤 수준에서 부정된 것이 다른 수준에서는 긍정된다는 변증법의 새로운 버전으로서, 환상의 부정으로서의 주체의 해체가 어떻게 해서 그 자체로 참다운 긍정성을 열어주는가를 설파하기 위해 레비스트로스는 종종 불교를 언급했다. 그러나 불교와 변증법은 그의 저작 내부로 흡수되지 않았고, ‘이러한 부정의 역전이 레비스트로스의 사고에서 어떻게 실행되었는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나는 이 주체의 해체라는 테마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에게서 자연에 관한 끊임없는 사고와 연결된다는 것,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사고 속에서 점차 명확해지는 생태적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파국]라는 테마와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나는 또한 이 연결이 야생의 사고의 다양한 형태를 기점으로 야생의 사고신화학에서 각기 다른 형태를 취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자연 속에서 주체는 카타스트로피로서, 즉 테마의 연속성 속의 불연속으로서, 그 외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레비스트로스의 가장 깊은 직관이다. 이러한 카타스트로피적인 존재는 바로 생태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책임을 내포한다. 이것이 그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인데, 우리의 성찰을 요구하는 그 가르침의 의미는 아직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주체의 해체와 생태적 카타스트로피를 두 방식으로 연결해볼 수 있다. 즉 근대적 주체의 출현을 생태적 카타스트로피와 연결하는 하나의 카타스트로피로서 다룰 것인지, 아니면 현재진행중인 카타스트로피에 대한 주체적인 응답의 방식으로서 해체를 다룰 것인지 이다. ‘생태적 카타스트로피라는 표현의 한쪽 의미로부터 다른 쪽 의미로 이행하는 것이 주체의 해체에 대한 새로운 성찰에서 제기되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주체주의적인 철학에 대항해서 인문과학의 객관성을 주제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가 갈수록 우리의 이 세계를 더욱더 특징짓고 있는 생태적 카타스트로피의 도전에 정면으로 맞부딪히기 위해서는 다시금 주체의 해체의 의미를 되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체의 해체가 야생의 사고(1962)의 핵심을 이룬다면, 생태적 카타스트로피는 슬픈 열대(1955)의 핵심을 이룬다. 열대가 슬프다는 것은 정복하는 주체성이 전개하는 연속된 선을 따라 구세계로부터 신세계로 이동하는 따위는 이미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여행이란 것을 싫어하며, 또 탐험가들도 싫어한다”(슬픈 열대한국어번역본 105). 이 책머리의 선언은 인류학자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타지에서 집으로 돌아온 날 이러저러한 경험이 가득 담긴 여행 사진들 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과시하기 위해 가는 곳마다 주체성을 가지고 다니는 정복자에게도 향한다. 인류학자는 세계를 통일하기 위해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가 붕괴되었기 때문에 여행한다. “만약 서양세계가 민족학자를 만들어내었다면 그것은 하나의 깊은 회한이 서양세계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서양세계는 어쩔 수 없이 그 자신의 모습을 다른 사회의 모습과 마주보게 하여 다른 사회로부터 그와 같은 결점이 비치지는 않는지, 어떻게 해서 그 결점이 서양세계에서 자라나고 심해졌는지를 해명하기 위해 다른 사회가 서양사회를 도와줘야 한다는 바람을 품고 있다”(한국어번역본 698, 전면수정).

슬픈 열대에서도 레비스트로스에게 아메리카로의 망명을 강권한 1940년대의 카타스트로피가 근대의 주체성의 출발점이었다는 것, 그리고 구세계와 신세계를 구분한 훨씬 더 근저적인 카타스트로피의 귀결이었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것이 이 저작에 20세기의 목격증언으로서의 성격을 부여함과 동시에 이 세기의 관심의 양상과 간극을 벌려놓았다. 이야기는 1934년 레비스트로스가 브라질로 출발하는 데에서, 그리고 1941년 뉴욕으로 망명하는 데에서 상호 중첩되며 시작된다. 인류학자와 인디오는 진행 중인 카타스트로피에서 살아남은 자로서 한순간 동일시된다. 학자와 야만인이 공통적으로 문화의 차이를 넘어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 것은 존재와 사물을 파괴의 위협에 노출시키는 카타스트로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주체화하는 바로 그 방식이다. 레비스트로스가 신석기 시대의 인간의 지능이라고 자인한 것은 아이와 같은 정동에 사로잡힌 더딘 지성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과는 정반대로 들이닥친 굶주림이나 가뭄을 이겨내려고 개척한 땅을 버리고 떠난 다른 환경에서도 동일한 도구를 사용해서 브리콜라주로서 헤쳐갈 수 있는 상징을 탐하는 야심에 들끓는지성을 뜻한다. 원시적 생활의 지성이 아니라 야만적인 환경에서 살아남는 지성이다.

 

야생의 사고슬픈 열대의 문학적 명상에 대한 과학적인 대응물로서 쓰였다. 자신의 경험으로 되돌아간 민족학자의 우울은 모든 사회에 공통하는 지성에 닿으려는 인류학자의 즐거움으로 반전한다. 근대의 시작을 표지한 카타스트로피는 모든 현상을 기호로 받아들이는 야생의 사회와 기호를 현상으로 고찰하는 근대 학자와의 만남으로 변환된다. 이 책은 다음의 말로 끝맺는다. “가장 현대적인 모습의 과학 정신은 그 자신만이 예견할 수 있었던 야생의 사고와의 만남을 통해서 야생의 사고의 원리를 정당화하고 그 원리를 회복하는 데 공헌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을 터득하는 것은 곧 야생의 사고의 정신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다”(야생의 사고한국어번역본 382-83, 부분수정). 레비스트로스는 모든 현상을 복수의 결정의 수준에서 파악하려는 야생의 사고와 각각의 현상에 단 하나의 결정의 수준을 지정하려는 과학적 사고에 공통하는 언어의 발견을 목표로 삼았다. 인류학이 바로 그 공통언어다. 왜냐하면 인류학은 현상이 주어지는 사회적자연적 장일뿐더러, 실제 일어나고 있는 분류체계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지각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슬픈 열대는 지각의 층의 착종된 축적에 의해 기억이 구성되는 만화경의 논리로 되돌아간다. 다른 한편으로 야생의 사고는 감각적인 것에 추상적인 카타스트로피를 투사하지 않고 감각적인 것 그 자체에서 기호를 만들어내는 감각적인 논리의 이론으로서 제시된다.

그러나 야생의 사고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주체성의 환상을 비판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것은 슬픈 열대에서 인류학자가 문명의 조건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앞선 탐험가들을 비판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야생의 사고의 경우 주체의 환상은 두 가지 형태를 띤다. 즉 민족학에 있어서 토테미즘의 환상, 그리고 철학에 있어서 사건의 환상이다. 이 환상을 비판하기 위해 1962년의 레비스트로스가 두 권의 저작(야생의 사고오늘날의 토테미즘)을 필요로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날의 토테미즘은 집합적 주체, 즉 사회의 환상을 해체한다. 집합적인 주체를 통해, 인간과 인간 이외의 것 간의 동일성을 긍정하는 사회조직, 음식물 금기, 신앙체계의 총체가 의미를 획득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여기서 종교생활의 원시형태에서 뒤르켐이 제시한 이론을 표적으로 삼는다. 뒤르켐의 이론에 따르면, 토테미즘은 사회가 그 집단적 비등상태(沸騰狀態)에서 스스로를 표상하는 증표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사회학적 관념론을, 영국류의 경험론에 의거하면서 이 관념론이 통일적인 이론을 토대로 모아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민족지적 사실이 실은 제각각이라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뒤집어버린다. 레비스트로는 극히 칸트적으로 경험론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고 쌍분적인 구조의 사실에서 지성으로향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보편적인 현상을 찾아낸다. 뒤르켐이 사회학적 방법의 규준의 서문에서 보여준 초월적인 예감에 따른다면, 지성은 새로운 종류의 구조적 상관관계가 관찰되는 현상의 영역이다. 그 영역은 폴 리쾨르의 표현에 의하면 초월론적 주체 없는 칸트주의이며, 들뢰즈의 표현에 의하면 초월론적 경험론이다. 그리고 야생의 사회에서 관찰되는 분류는, 분류의 미개형태에서 뒤르켐과 모스가 보여준 길을 따라가면, 이 지성의 영역이 원초적으로 현현(顯現)하는 장이다.

민족학에서 주체의 해체가 토테미즘 비판과 뒤르켐에 대한 논박에 의해 행해졌다면, 철학에서 그것은 사건의 비판과 샤르트르에 대한 논박으로 행해졌다. 샤르트르는 그 자신이 후설을 탁월하게 독해한 논문 자아의 초월에서 주체 없는 초월의 영역 탐구의 기초를 닦은 것 같다. 그러나 존재와 무를 기점으로 실존주의의 정식화를 통해 샤르트르는 자기의 자유의 의식화를, 주체성의 기초를 이루는 사건이라는 소여를 무화하는 것으로 다루게 된다. 그리고 샤르트르는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 혁명적 실천의 사건에 의해 역사의 운동에 접근할 수 있는 변증법적 이성과 실천적 타성태(pratico-inerte)에 주목하고, 이러한 재구축의 길을 닫아버린 분석적 이성을 준별하기 위해 야생의 사회에 견주어 사건을 고려하는 가능성을 부정한다. 야생의 사고에서 레비스트로스가 하나의 사건으로부터 데이터를 전체화하는 힘을 가진 변증법적 이성이 야생의 사회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논증함으로써 이러한 대비를 논박하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 생각에 인간에 관한 것(나아가 살아있는 것)이라면 어느 하나도 배제됨을 용납지 않는 야생의 사고에 대한 강경한 거부에서 [샤르트르가 말하는] 변증법적 이성의 참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변증법적 이성에 대한 나의 견해는 샤르트르와는 완전히 다르다”(한국어 번역본 352쪽 부분수정). 그래서 레비스트로는 샤르트르의 휴머니즘에 대항하여 인문과학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용해하는 것”(354)이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겼다.

그리하여 야생의 사고의 논증 전체는 샤르트르가 제기한 문제에 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현상을 분류체계에 끼어 맞추기 위해 분류하는 일에서 이렇게나 즐거움을 찾아내는 사고는 사건을 위한 장을 갖추고 있을까? 왜냐하면 사건이란 외부로부터 도래하여 또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을 강권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레비스트로스는 샤르트르에게서 그의 주요한 착상 가운데 하나를 채용한다. 그것은 전체화라는 착상이다. 그것은 전체화를 총합적인 방식으로 선취하여 실현하는 주체를 전제로 삼는 착상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경험 내부에 복수의 전체성이 출현하는가?’를 기술할 수 있게 만드는 착상으로서, 확실히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 가장 흥미로운 착상 가운데 하나이다. 샤르트르에 의하면, 사건이 현상의 희소성을 의식화한다는 사실로 인해 사건이야말로 이 전체화의 과정을 현실화한다. 혁명적 주체를 만들어낸 1789년의 바스티유 요새 탈취는 그에 앞선 몇 년의 기아와 연결되고 그와 동시에 궁정의 추문과도 연결된다. 정치적 경험만이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감정적 등등 경험의 장의 모든 차원을 관통하는 경험의 장을 전도(轉倒)하는 사건.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경험의 모든 차원이 필연적으로 상호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한다. 자전거 기아를 바꾼다고 해서 반드시 속도가 오르는 것이 아니다. 기아가 체인에 제동을 걸 듯이 그 사이에 제동의 작용이 이뤄져야 한다. 어떤 수준에서 전체화는 다른 수준에서 탈전체화를 수반하며 복수의 수준에서 현실화하는 또 다른 전체화를 계산에 넣지 않고, 그와 반대로 서로를 지워버린다고 레비스트로스는 말한다. 따라서 역사적 사고는 그 기원의 산출력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사건을 또 다시 가열하기보다 오히려 역으로 사건이 복수의 수준에서 지각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서 냉각하는 사고이다. 사회에서 의미작용 하는 존재와 사물의 총체를 탐지하면서 원천에서 벌어지는 투쟁으로 되돌아감으로써 현상을 설명하는 근대사회의 신화적 사고는 새로운 주체성을 기초짓는 것에 의의를 두는 철학자에게서 실행되지 않고 고문서의 경험적인 풍요성을 존중하는 역사연구자에게서 실행되는 만큼 근대사회의 역사적 사고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가 곧이곧대로 변증법적 이성비판에 의해 제기된 문제는 결국 프랑스혁명이라는 신화는 어떤 조건에서 가능했는가?’라는 문제로 요약된다”(한국어번역본 364, 부분수정)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샤르트르의 착오는 프랑스혁명을 전체화작용의 한 형태로 분석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새로운 코기토의 원천으로 변경한 것, 그렇게 해서 존재와 사물의 다양성을 그렸건만 전통적으로 폐쇄사회의 특징인 왜소성을 드러낸”(357) 것에 있다.

야생의 사고에서 레비스트로스가 실행한 조작은 원천으로서의 사건이 아니라 카타스트로피이다. 도덕적으로 부정적인 함의를 품은 것이 아닌 연속성의 내부의 불연속이라는 수학적인 의미에서의 카타스트로피이며, 이 카타스트로피로 프랑스혁명을 기술하는 것이다. 확실히 구조주의적 방법은 인간의 정신이 현상적인 연속성을 지각하는 다양한 과정을 불연속의 격자를 통해 분석하면서 정신적인 것 본래의 연속성을 재구축하는 데에 있다. 최초의, 그리고 그로부터 다른 모든 것이 파생되는 카타스트로피가 언어의 출현이며, 그렇게 생성된 의미하는 것과 의미되는 것 간의 어긋남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아마도 레비스트로스의 가장 대범하면서도 사변적인 텍스트인 마르셀 모스의 작품에 대한 서론을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레비스트로스가 이 전체화 작용을 가진 자아의 연속성”(야생의 사고367, 부분수정)을 비판하면서, 의미를 산출하려고 복수의 카타스트로피를 관계 짓기 위해 그로부터 이끌어낸 귀결이다. 레비스트로스의 분석에 따르면, 실상 프랑스혁명을 새로운 주체성의 기초로 삼을 이유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기술하려고 사용한 격자에 의해, 이 사건은 이를테면 물리-화학적 작용이라거나 경제적 원인에서 일어났다거나 정치적 슬로건의 효과라거나 등등 각기 다른 의미작용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사건이 다른 사건과 관련짓는 이러한 다양한 수준의 각각에 의해 사건은 의미를 달리 하는데 그 의미가 올바른 의미라고는 할 수 없다”(364). 따라서 정신적인 고유한 의미를 가진 카타스트로피 자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의 정신과 그것이 고려하는 장과의 관계를 서로 비쳐주는 카타스트로피의 계열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관계는 언제나 국소적인 편성의 산물이다.

 

야생의 사고의 마지막 장에 대한 나의 이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이 책 전체를 재독하여 불확정한 것을 찾아낼 수 있다. 레비스트로스의 분석은 분류체계가 대립한다고 간주되는 두 개의 현상 사이의 모순을 대립하는 이항 사이에 중간적인 항을 도입함으로써 해결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간적인 항은 분류의 내부에서 다른 존재와 관계 짓고 의미를 부여받는다. 바꿔 말하면, 개인 혹은 집단에 의해 카타스트로피적인 것으로 경험된 상황(구덩이에 숨어서 매를 사냥하는 히다차 족의 사냥꾼과 같은)은 야생의 사고의 안정적인 분류체계 내에서 카타스트로피가 의미를 획득한다는 것을 드러내고(예를 들어 히다차족은 오소리와 여성의 월경을 관계 짓는다) 카타스트로피를 순화한다. 그런데 분류체계는 다른 방향으로도 향할 수 있다. 토템적 분류에 있어서 자연의 종으로 향할 것인가, 혹은 카스트 체계에 있어서 문화적 직능으로 향할 것인가 이듯이. 자연과 문화의 대립은 방법적가치만을 가질 뿐이다. 자연의 카타스트로피도 문화의 카타스트로피도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카타스트로피의 사고의 방향이 자연으로 방향지어질 것인지, 문화로 방향지어질 것인지의 문제만이 문제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야생의 사고의 분석에서 보편과 개별의 대립 또한 확고하지 않다. 그것은 분류가 보다 추상적인 대상을 향해 열릴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보다 구체적인 존재를 향해 졸라맬 것인지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야생의 사고는 자연으로부터 문화로, 그리고 개별로부터 보편으로, 복수의 수준에서 전개되는 분류의 동력학이다. 자연과 문화, 구체와 추상은 존재들을 양극성으로서 보족하며 다양한 수준에서 또 다른 양극성과 관계 짓는 분류도식이 이동하는 수평축과 수직축을 이룬다.

생각해보면 분류의 모든 수준에는 하나의 공통된 성질이 있다. 고찰대상 사회가 어느 수준을 내세운다 해도 그것은 다른 수준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하며 오히려 그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특별히 선택된 수준도 다른 수준과 형식면에서는 같은 것으로서 그 차이는 일반과 특수, 자연과 문화라는 한 쌍의 대비에 근거하여 작용하는 총괄적 좌표에서 상대적 위치의 차이일 뿐이다.

토테미즘을 논하는 논자의 잘못은 자연종에 기초를 두고 구성된 수준이라고 하는 하나의 분류 수준만을 자의적으로 분리시켜 취급하여 그것에 제도의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그 수준도 다른 여러 수준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수준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 만큼 그것만을 끄집어내어 가령 추상적 범주나 명사적 분류를 사용하여 작동하는 다른 분류의 수준보다 그것을 특히 중요시할 이유는 전혀 없다. 중요한 것은 수준의 존재 여부라기보다 말하자면 조절장치가 있는분류의 존재이다.

그것을 수용한 집단은 지적 도구를 다른 것과 바꾸지 않고 가장 추상적인 면에서 가장 구체적인 면까지 또 가장 문화적인 면에서 가장 자연적인 면에 이르는 모든 면에 초점을 맞추는수단을 갖는 셈이다”(212, 부분수정).

민족학자의 잘못은 분류의 역동학의 부푼부분을 정상적인 제도, 즉 토템으로 잘못 잡은 것이다. 주체가 기초지어질 수 있기 위해서는 자연과 문화, 추상과 구체가 매우 안정된 혼합체, 즉 제도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야생의 사고는 그물코가 막힌 중심부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주변으로 향하고 그 주변에서 카타스트로피가 생성한다. 야생의 사고는 소쉬르가 묘사한 언어의 움직임과는 정반대의 과정을 밟는다. 즉 자의적인 것으로부터 동기지어진 것으로 향해가는 것이 아니라 동기지어진 것으로부터 자의적인 것으로 향해간다. 분류체계가 현실적인 것의 전체를 정상상태로 만들기 위해서 그물망을 끊임없이 확장시켜야 하는 까닭은 사건이 반드시 체계의 외부로부터 도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류의 이 불확정한 확장은 한계에 도달하면, 즉 사고가 더는 그 이상으로 분류할 수 없고 지시만 가능한 한계에 도달하면 정지(停止)한다. 거기서는 야생의 사고와, 그에 저항하여 야생의 사고로서는 포섭될 수 없는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포섭할 수밖에 없는 요소와의 만남 가운데 현실적인 것의 요소가 순수상태로 존재한다. 레비스트로스에게 현실적인 것은 분류적 사고의 핵심부분, 주체와 객체의 대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한계에, 정상상태가 된 분류의 내부에서는 의미를 획득할 수 없는 카타스트로피와의 만남 가운데 위치한다.

그리하여 다음의 귀결을 견지해야 한다. 즉 현실적인 것은 가장 구체적인 극과 더불어 가장 추상적인 극에 존재한다. “종 조작매체의 논리적 효력은 이밖에도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에 힘입어서 상호 간에 상당히 다른 여러 분야를 분류도식 내에 통합할 수 있게 되며 이렇게 해서 분류법은 그 한계를 넘어서는 수단, 즉 보편화에 의해서 초기의 집합 밖의 분야로 진출하거나 특수화에 의해서 분류작업을 그 자연의 한계 너머, 즉 개별화까지 연장한다”(247-48, 부분수정). 레비스트로스가 보편화의 극은 질병이 발병하거나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출현했을 때 무대로 올라온다는 것을 언급하는 데에 그치고 거의 분석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은 의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분류체계 내에서 아직 장소를 찾지 못한 새로운 개체가 등장하는, 특수화의 극에 대해서는 훨씬 많은 분석을 행하고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개체화의 문제를 두 장에 걸쳐 자크 데리다와 에드먼드 리치와 같은 노련한 평론가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고유명 체계에 관한 훌륭한 분석을 전개하고 있다. 보편화에 대한 분석을 한 번도 행하고 있지 않은 이유에는 가능성이 풍부하다.

왜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의 특수화의 형태를 중시하고 보편화의 형태를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사건에 관한 샤르트르와의 논쟁을 염두에 두었던 탓이 아닐까? 실제로 고유명 분석은 야생의 사회가 사람의 탄생이라는 사건에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대한 기술을 가능하게 만든다. “단지 새로운 사람, 즉 태어나는 아이들만이 문제가 된다. 아이들은 현재 존재한다. 그런데 개별화를 하나의 분류로 취급하는 어떤 체계이든지(어떤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은 지금까지 보아온 것과 같다) 새로운 구성원이 들어올 때마다 그 구조가 새삼스레 문제시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289) 이러한 사회가 취하는 해결은 신생아를 두 개의 요소로 분류하는 것이다. 즉 환원할 수 없는 잔여로서 분류의 체계 외부에 머무르는 개체와, 개인이 사회의 무대에서 알려져 인식되기 위해 장착하는, 가면과도 같은 인격이라는 두 개의 요소이다. 근대의 주체의 탄생이란 개체와 인격이 유일한 실체로서 일치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사회적 분류에 저항하는 무언가로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현상의 인식을 기초지은 자로서 자기를 노정한다. “서양문화[civilization]에 있어서는 마치 개인이 각각 자기의 개성을 토템으로 하고 있는 것같이 느껴진다. 개인의 존재를 기표라 하면 개성은 기의가 된다”(312). 좀 더 파보면, 놀라운 역전에 의해 개인이 사회에게 가장 인식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사회야말로 가장 인식되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는 사회성을 간주관성으로부터 설명하려는 후설이 직면한 어려움이나 집렬성(集列性, série)으로부터 집단을 고찰하려 한 샤르트르가 직면한 어려움에 의해 드러난다.

이 분석이 얼마나 훌륭하다 해도 그것은 주체의 해체라는 테마가 가진 차원 중 하나를 상실시키는 것처럼 내게는 생각된다. 근대의 주체의 출현은 인식과 세계의 관계를 전도시킨다. 그것은 인식이 주체에 빌붙어 방출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축으로 회전하도록 강제한다는 의미에서 카타스트로피로서 다뤄질 수 있다. 이 지적인 혁명은 신기한 것이 분류적 사고로부터 그 수단을 잃게 만드는 놀라운 현상으로 출현하는 대신 모든 사고의 원천으로서 신기한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삼았던 르네상스시기에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로서 스스로를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해체라는 테마는 비판적인 차원을 잃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보수주의적인 것처럼 보이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근대인이 아닌 야만인으로서 사고하는 것을 장려하는 것처럼 보이는 위험을 띠게 된다. 레비스트로스가 보여준 교훈은 이와 다르다. 카타스트로피는 신기한 것을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근대적 주체가 창출된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살아있는 장으로서 이 가치부여를 일으킨 귀결이라는 점에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카타스트로피는 야생의 사고가 인격으로서 자기를 노정하는, 새롭게 태어난 자와 조우하는 특수화의 극이 아니라 질병으로서 스스로를 노정하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과 조우하는 보편화의 극에서 탐구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속에는 근대의 주체를 창출함으로써 인식의 흐름을 바꾼 서구의 장과는 다른, 서구의 정복자와의 만남에서 살아남은 아메리카 인디오들의 사회의 장이라는 제2의 근대에서 장이 존재하게 된다. 그렇다면 보편화의 극을 공백인 채로 남겨둠으로써 레비스트로스는 아메리카 인디오 사회에서 고유의 주체화의 형태를 분석하기 위한 여지를 열어두고 그것을 신화학으로서 제기했듯이 사태는 진행하게 된다. 이리하여 벌거벗은 인간에필로그를 기점으로 주체의 해체라는 테마를 해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야생의 사고(1962)신화학(1964-71)에는 방법의 차이가 있다. 1962년의 책에서는 철학적 증명의 필요성에 대응하여 오스트레일리아,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사회들을 비교한 반면, 신화학의 사부작은 변환의 관계를 보이는 신화군을 비교함으로써 남북아메리카의 사회들을 연구한다. 그 결과로서 레비스트로스는 토테미즘 사회로부터 데스콜라가 애니미즘 사회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행하며 야생의 사고와는 또 다른 주체화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즉 토템적인 주체에게는 미분차이적으로 배분된 질()의 전체를 통해 개체를 집합적인 주체로 귀속시키는 것이 문제인 반면, 애니미즘적 주체에게는 신체의 불연속성을 통해 혼의 연속성을 지각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야생의 사고의 분석은 개체가 선조와 연결되기 위한 매개체인 성스러운 대상으로서의 추링가의 표상에 이르러 종결된다. 신화학의 분석은 새의 둥지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주인공이 요리의 불에 의해 구분된 영역을 활보한다. 야생의 사고가 분류와 명명의 문제들을 분석하는 반면, 신화학은 식도락과 작법과 존재들 간의 적절한 거리를 분석한다. 야생의 사고에서 생태적 카타스트로피는 자연이 발하는 기호를 사용하여 브리콜라주하는 대신에 자연에 스스로의 관념을 밀어 넣는 기술자의 사고를 창출하지만, 신화학에서 그것은 수천 년간 변환을 통해 천천히 세련되게 마감된 존재들 간의 적절한 거리를 폐절시키는 정복자의 도래를 다룬다. 식탁작법의 기원의 논증의 마지막은 다음의 성찰로 마무리된다. “우리가 사고하듯이 주체의 내적인 청정함을 존재와 사물의 외적인 부정함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의례작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야만인에게는 주체의 부정함으로부터 존재와 사물의 청정함을 보호하기 위해 의례작법이 있다.” 주체는 야생의 사고가 점차 편협한 것이 되어가는 역사의 단계가 아니라 신화가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부정’(不淨)이다.

이 차이는 벌거벗은 인간에필로그에서 주체의 해체라는 테마의 의미를 바꿔놓는다. 이 또한 다시금 논쟁적인 텍스트가 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논쟁의 하나는 리쾨르처럼 신화분석에서 주체에 충분한 장소를 부여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는 철학자에 향해 있고, 또 하나는 에드먼드 리치처럼 의례와 감정성(憾情性)을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민족학자에 향해 있다. 그렇지만 이 텍스트의 입장은 야생의 사고의 마지막장과 완전히 다르다. 야생의 사고의 논증전체가 사건과 관련해서 샤르트르를 논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반면, 신화학의 궤적은 에필로그에서 중단하지 않고 제한 없이 뻗어간다. 실제로 신화의 구조분석은 스스로 서로 사고하는신화의 변천에 따라 순수하게 내재적인 형태로 산출되어야 하는 것에 대해, 레비스트로스는 이 속에서 이러한 변천을 사고한 주체의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변천의 연쇄를 조감하는 어떤 위치를 취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본서의 주체는 익명적인 사고에 내밀어진 실체 없는 장소가 되려는 것이다. 이때 익명적인 사고는 이 실체 없는 장을 가득 채우며 자기 자신과 거리를 두고 스스로 참된 의지를 되찾아 실현하고 스스로의 유일무이한 본성에 고유한 제약을 배려하면서 자기편성을 취하기”(신화학4 벌거벗은 인간) 위한 것이다. 이 텍스트는 레비스트로스가 행한 신화에 대한 코멘트이며 분석을 재개하면서 각각의 장의 서두에 색다른 에피그라프(épigraphe)를 붙이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허용한 수많은 여담 중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신화들의 변천의 연속하는 계보를 분절하지 않고 오히려 신화가 자신 안에 편성해서 자신과 수직으로 교차시키며 신화들 간의 차이로 충전한 의미작용을 밝히기 위한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것들은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잠시잠깐 주체가 스스로를 위임한 자유로운 몽상이며, 자신의 임무로부터 해방된 주체는 그 속에서 어떤 몽상 속에서 자신이 해체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주체의 해체라는 테마는 여기서 간주관성과 타자성의 쟁점을 극복하기 위해 호출되고 있다. 질문은 두 주체성 간의 관계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신화적 사고의 고유성이란 바로 그것이 주체 없는 사고에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개인적인 작품이든 집합적인 구술전승의 작품이든 신화는 주체보다 더 먼 장소, 특정한 신화를 말하는 개인에 구조적인 속박을 부과하고 신화들의 성운으로부터 도래한다는 시차적인 특성을 가진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방법론적이라고도 부를 만한 차원에서 주체의 말소가 필연적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주체의 말소야말로 신화를 오로지 신화에 의해서만 설명하는 것에 대한 세심한 주의, 그에 따라 신화를 외부로부터 검토함으로써 그 외부요인을 발견하는 경향을 가진 판정자의 시점을 배제하는 것에 대한 세심한 배려에 따르기 때문이라고 레비스트로스는 말한다. 따라서 인류학자라는 주체는 다른 주체와 관련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접근불가능한 채로 멈춰있는 다른 대상과 관련되지도 않는다. 이렇듯 레비스트로스는 라캉적인 시점을 암묵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실제로 레비스트로스는 이에 대해 루소, 마르크스, 뒤르켐, 소쉬르, 프로이트 등의 선학들을 따라서 구조주의가 완수하려는 것은 다른 객체의 모습을 의식 속에서 개시하는 것이다. [] 다만 의식한다는 표현은 이 정도까지는 아니고 여전히 머리로 생각되는 차원에 머물러 있다. 바꿔 말하면, 의식은 스스로가 적응하는 현실과 실체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만 구비되는 특성조차도 몸에 두르는 현실 그 자체이다. 이 때문에 현실이라는 또 하나의 외관 하에서는 의식에 주체를 다시금 인도할 필요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다. [] 자아를 한편에서는 익명적인 타자로, 다른 한편에서는 개별화된 욕망(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존재)으로 바꿔 놓는다 해도 이 두 개를 재차 붙여서 그 전체를 뒤집는 것만으로, 그 폐기가 큰 소리로 선언된 해당 자아를 이면에서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은폐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다. 따라서 주체를 그로부터 영원히 도주시키는 타자의 존재를 향한 욕망에 의해 운반되는 주체로서 이해할 수 없다. 그림자에 들이치는 빛처럼 주체는 그에 용모를 맞추는 객관성의 체제에 참여하는데, 주체는 자신이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한다. 자신 이외의 것인 땅 위에서 출현한다. 주체는 언제나 종말 없는 운동 속에서 자신을 의식화하는 현실적인 것의 총체이다. 이 주체에 대해 레비스트로스는 현실적인 것을 구성하는 광선이 상()을 형성하는 탓에 교차하는 허초점’(virtual focus)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이 주체의 해체를 다루는 데에는 하나의 결론이 아니라 음악적인 의미에서의 에필로그가 더 적합한 형식임을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분석을 구성하는 스스로 닫힌 주체를 재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일시적인 소실을 확인하고 레비스트로스가 자아라고 부르는 잔재가 환원 불가능한 방식으로 현존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자아가 다시금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작품을 다 쓴 후일뿐이다. 그때까지 시종일관 그 장에서 배제된 자아는 이제야 작품전체를 조감하는 권리와 의무를 갖게 된다.”라고 레비스트로스는 말한다. 따라서 저작의 중단만이 주체의 해체를 정지시킨다. 주체를 소멸시킬 수도 있는 저작의 다른 장소에서 도래하는 광선의 허초점으로서의 주체는 잠시잠깐 현실의 자아가 된다. 오케스트라는 그것을 지휘한다. 그리고 그 순간 이전까지 오케스트라의 화음을 이뤘던 경험적인 개체에 장소를 내준다. 주체란 하나의 동일한 유기체를 통과하는 감정적인 반향의 총체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

그러나 이 음악적 형식이 가진 위기는 스스로에게 닫힌 경험적 주체의 형상을 다시금 설립한다는 데에 있다. 실제로 신화학의 통일성의 유일한 보증은 신화들 간의 변천이 인류학자의 정신이라는 동일한 정신을 통해 생성된다는 것이다. 이 인류학자의 정신은 경험적으로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고들이 교차하는 경험의 장으로 간주된다. 여기서 주체는 궤적의 형태를 띤다. 신화들 간의 불연속성은 음악적 감동의 형식 하에서 변천을 경험하는 자아의 연속성 속에서 폐절된다. “음악의 청자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은 작품이 실제로 완수되어 어려움(이라고 청자만이 느껴지는 것)을 떼어내고 성공에 이르는 그 도정에 대한 것이다. 발명의 재능을 혜택 받아 음악의 세계에 잠재된 가능성을 탐구하려는 작곡가라면, 그는 어려움뿐만 아니라 그 어려움에 부과되는 갖가지 해답들을 겹겹이 쌓아올려 보여주었을 것이다.” 여기서 카타스트로피는 신화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와중에 신화학자가 경험하는 단순한 어려움으로 되돌아간다. 여기서 신화학의 독자가 이 저작에게서 받은 유별난 신화적인 경험과 레비스트로스가 자신의 정신 그 자체에 부여한 경험을 분리해야하는 어려움이 발생한다. 레비스트로스 자신은 에필로그에서 이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의미로 넘쳐난다고 내게 생각되는 어떤 저작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의미 없는 형식이 발전한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에필로그에서는 이 경험적 주체의 막다른 길을 신화에서 음악으로의 이행에 대한 대범한 가설을 설정함으로써 성공리에 우회하고 있다. 즉 신화가 그 형식적 가능성을 고갈시켰을 때, 음악이 신화를 대신한다. 이것은 악극을 통해 신화체계의 잠재적인 힘을 재발견한 바그너에게서 음악이 정점을 이루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때 신화의 변환을 자신 속에서 전체화하는 경험적 주체를 통과하는 것은 이미 필요치 않게 되고, 음악의 청취를 종결시키는 침묵이 과거 형태의 잠재적 힘과 그것을 지워버리는 카타스트로피를 함께 표출하도록 놓아두면 된다. 에필로그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수학과 달리 음악은 주체에 있어서 공허한 형식에 육체를 끼어 맞출 수 있다면서 머뭇거리는 듯하다. 그러나 에필로그의 마지막 페이지에서는 문명의 파괴적인 카타스트로피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에 의해 무언가 분명히 생성된것을 증언하는 능력을 갖춘 이 공허한 형식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하나의 혹성의 표면으로부터 인간이 분명히 사라져가고 그와 동시에 대립하는 현실 또한 소멸하고 있다. 인간의 노동, 고통, 기쁨, 희망, 작품 또한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질 것이라는 저편의 확실함을 한순간도 놓쳐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 잠시잠깐의 현상에 관한 기억을 보존하고자 하는 의식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지상의 이미 무감각한 표층으로부터 머지않아 사라진다 해도 잠시잠깐의 몇몇 현상은 예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음을 소소한 증거로 남기겠지만, 결국 무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 글은 조제프 아르튀르 고비노(Joseph-Arthur Gobineau, 1816-82, 인종주의를 주창한 프랑스의 민족학자)오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 1842-98, 프랑스의 시인)의 구조이기도 하며 푸코의 말과 사물의 마지막 부분을 상기시킨다. 레비스트로스는 공허한 형식의 작품이란 일어난 것임에 주목한다. 주체는 이러한 형식이 파괴되도록 운명 지어진 이 지구의 표면에 남겨진 궤적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

 

신화학에필로그는 주체의 두 모델, 즉 카타스트로피가 남긴 형식을 자신 속에 통합할 수 있는 카타스트로피의 증인으로서의 주체, 그리고 존재들과 사물들의 복수성에 대해 열린 카타스트로피의 산물로서의 주체 사이에 주저함을 보여준다. 그것은 레비스트로스가 주체 없는 초월론주의의 틀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감각적인 것의 논리에서부터 형태의 논리로, 그리고 명제의 논리(이것들은 각각 신화학의 최초의 세 권에 담겨있다)로 이행하면서 그는 하나의 ’, 칸트의 정식화에 따르면 모든 표상과 함께 하는이 공허한 형식에 도달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내가 순수한 사고 속에서 나 자신에 대해서 갖는 의식 속에서 나는 존재 그 자체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이 존재의 무엇도 나에게 사고해야 하는 것으로서는 주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칸트의 주체를 그 외의 다른 사회에서 행사되는 인간적 사고의 총체로까지 확장함으로써 레비스트로스는 칸트가 비판서와 현실적 견지에 있어서 인간학사이를 파고든 깊은 틈, 초월론적 주체와 경험적 주체 사이를 파고든 깊은 틈을 메우려 했다. 나아가 그는 주체의 위치지움을 칸트가 비판력 비판에서 행한 것과 상당히 유사한 방식으로 나는 생각한다’(코기토)를 다시 파악하고 차이의 게임에서의 산출로 이동시키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체에 관한 서구적인 사고를 강력하게 형태지우는 칸트주의에 특이한 뒤틀림을 부과하면서도 그 틀의 내부에 머물러 있다.

많은 점에서 소신화이론가운데 벌거벗은 인간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살쾡이 이야기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주체의 해체에 대한 자신의 사고에 대해서 칸트가 아닌 몽테뉴를 참고하고 있다. “우리는 존재와 어떤 의사소통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몽테뉴의 말은 존재를 공허한 형식으로 보는 칸트의 사고보다 과격하다. 그것은 몽테뉴가 칸트처럼 근대성을 순수주체의 형식 속에서 내면화 해버린 것이 아니라 근대성의 기점이 된 카타스로피의 진정한 증인이기 때문이다. 몽테뉴의 사고는 자신들이 인류의 모든 전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들이 인류의 반만을 형성한 데 불과하다는 명백한 사실에 직면했을 때의 최초의 응답이다. 이 사고는 이성이 예비한 다른 형태의 사고를 흡수해버릴 가능성에 대한 근저적인 비판이며 그로부터 시론(에세이)과 단편의 형태로 금욕적인 문장을 이끌어내고 있다. “내가 나의 책을 썼다기보다 나의 책이 나를 만들었다.”는 몽테뉴의 말은 레비스트로스에 쉽게 적용할 수 있다.

살쾡이 이야기에서는 몽테뉴를 언급한 후에 주체 철학에 대한 새로운 비판이 이어진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적 사고의 보편적인 형식을 순수주체에서 찾아낸 일반신화학의 연구를 비판하고 있다. “어느 특정한 문화의 집합에 속할 뿐더러 지리적인 지역과 시대구분에 한정된 신화들의 비교대조에는 멈추지 않는 위험이 없지 않지만, 이 운동에 의해 신화적 사고가 점차 자신의 형식으로 환원되어 간다는 것을 자각하지만 한다면 결코 쓸데없지는 않다. 문제는 이제 신화가 말해준 것을 아는 것이 아니다. 가령 이 수준에서 파악할 때 신화가 점차 무엇도 말하지 않게 된다 해도 신화가 어떻게 말했을까를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이다. 이때 구조분석에 기대되는 바는 구조분석이 그 외에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탓에 공허한 담론만을 발산하면서 그 동작 메카니즘을 샅샅이 드러내어 노골적인 정신의말하자면 순수상태에서움직임을 해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허한 상태에 있는 인간정신, ‘벌거벗은 인간은 이미 형식적 연산의 주체가 아니라 어떤 금욕의, 자신과의 적절한 거리를 두는 작업의 성과이다. 이 작업은 각각의 신화를 민족적인 맥락으로 되돌려놓음을 함의하며 자연 속의 산책에 가깝다.

살쾡이 이야기는 무엇보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대륙이 그 정도로 닫힌 것레비스트로스가 신화학에서 주장했듯이 신화의 대지는 둥글다이 아니라 타자성에 대해 스스로를 열어두며, 그것이 역사속에 기입되어 있음을 증명한다. 초기 쌍분제(双分制) 사회를 재차 고찰하면서 안개와 바람의 테마 분석과 뒤섞음으로써 레비스트로스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사고에 특징적인 쌍분관(双分觀)가령 그것이 일본에서도 발견된다 해도은 근본적인 불균형 하에 성립되었고 새로운 존재의 여지를 남기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캐나다의 몇몇 신화는 초기 유럽인 탐험가들과의 접촉으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해석된다. 새둥지 잡이 신화의 모티브인 요리의 불의 출현 등 기원의 카타스트로피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는 신화학적인 주체성의 구축을 통해 이에 응답한다로부터 시작되는 대신, 살쾡이 이야기는 살쾡이와 코요테라는 쌍둥이 이야기를 통해 불가능한 주체성에서 시작해서 아메리카 인디언의 사고가 항상 예견해온 카타스트로피로 열려간다. 주체는 존재들과 사물들에 장소를 내어주기 때문에 해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래적으로 타자성에게 장소를 예비해두었기 때문에 역사에 의해 해체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의 모든 사고를 지배하는 주체의 해체라는 이 기획은 1999년에 비평지가 바친 찬사에 대한 응답에서 특히 감동을 주었다. 고령에 이른 레비스트로스는 몽테뉴를 언급하면서 책을 쓰고 싶어 하는 잠재적인 자아와 그것을 할 수 없는 현실의 자아 사이에서 무너진 홀로그램의 감각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현실의 자아는 마지막 해체에 이르기까지 용해되어간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손을 뻗는 동안 그것과는 다른 고마움의 감각을 준 것에 감사하고 싶습니다.” 의사소통하는 개체가 존재하는 한 주체는 존재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해체로부터 잠시잠깐 피해있는 것에 불과하다. 신체의 죽음은 정신이 자기와 자기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설정함으로써 준비된 물리적인 카타스트로피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사상은 근대의 시작을 기록한 카타스트로피가 자신과 화해한 주체의 형상으로서 닫혀버리지 않고 다른 일련의 카타스트로피와 연관지어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의 게으름 피우지 않는 자연에 대한 고찰자연은 야생의 사고의 실습의 장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의 생태적 조건에 대한 배려는 근대의 주체의 해체로부터 비로소 형태의 생명이 출현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카타스트로피, 그리고 다른 형태의 주체성에 대한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レヴィストロースにおける主体解体生態的カタストロフィー」 『思想No. 1016200812岩波書店

Posted by Sarantoy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