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적 전회’라는 이론적인 흐름에서 들뢰즈 계열을 대표하는 인류학자인 팀 잉골드의 논문 한편을 번역했다. 10년 전 글이고 『현대사상』 2017년 3월호에 실린 일본어 번역본을 참조했는데, 번역하기가 꽤 까다로웠다. 무엇보다 주체와 객체에 관한 사고의 틀 자체를 바꿔버리자는 그의 주장처럼 이 글에서 주어와 목적어가 예상과는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번역하고 나니 그 어격들이 ‘상식’처럼 느껴진다. 언어를 관통하는 바람! “바람의 인류학”이라는 부제를 달아주고 싶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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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하늘, 바람, 그리고 기후
팀 잉골드(Tim Ingold)
바람 부는 날 야외에서 느끼는 감각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그러나 막상 그 감각을 정립된 사고의 범주나 규범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막연하기 이를 데 없다. 야외/열린 공기(open air)란 무엇일까? 그것들은 하늘이나 대기를 순환하는 것일까? 그것들은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대기가 우리 혹성을 감싸고 하늘이 우리 머리 위에 원을 그린다고 한다면, 대지는 하늘과의 관계에서 어떤 형상이나 형태로 존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대지와 하늘로 이뤄진 이 열린 세계의 밖에 있다면, 그와 동시에 우리는 어떻게 바람 가운데 있을 수 있을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어떻게 열린 곳에 거할 수 있을까? 열림이 닫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면, 바람은 어떻게 부는 걸까? 나는 지금부터 ‘야외/열림’(in the open) 속에 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다음에서 논할 것처럼, 사람이 사는 세계가 지면에 의해 분할된 하늘과 대지라는 상호 배타적인 반구로 이뤄졌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바람과 기후의 흐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바람을 느낀다는 것은 외부로서의 주변과의 촉각적인 접촉을 가늠한다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 혼합된다는 것이다. 이 혼합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고 호흡하며 땅을 형상화하는 뒤섞인 삶-선들(life-lines) 속에서, 하늘의 바람과 빛과 습기는 끊임없이 경로를 자아내면서 대지의 물질과 결합된다.
이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본고는 네 단계를 밟는다. 먼저 대지의 형상에 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설명으로 간주되는 것들을 검토한다. 이를 통해 하늘의 현상이 쉽게 파악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대지는 하늘과의 관계에서 거주기능의 지면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이어 드러나듯이 사람과 사물만 거할 수 있는 지면과 새와 구름을 뺀 빈껍데기뿐인 하늘이라면, 그 하늘은 실내공간을 모델로 하는 세계의 유비 속에서만 존재할 따름이다. 세 번째 단계에 이르면, 열린 세계에서 존재자들이 관계할 수 있는 것은 열린 객체의 형상으로서가 아니라 매질(媒質)의 흐름에 한결같이 침투하기 때문임이 드러날 것이다. 유기체가 매질로부터 공기를 취하면서 방출하는 호흡과정은 모든 생명에 근원적이다. 마지막으로 열림 속에 거하는 것은 기후-세계(weather-world) 속에 거하는 것임을 밝힐 것이다. 모든 존재자는 그 자신을 지속하는 가운데 바람, 비, 햇빛, 그리고 대지와의 결합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하늘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아이들이 대지의 형상을 어떻게 습득하는지에 관해 인지발달심리학의 영역에서는 현재 몇몇 논쟁이 진행 중이다. 많은 연구는 우주에 둘러싸인 견고한 구체로서의 대지라는 ‘올바른’ 지식은 모든 곳의 아이들이 그 문화적 배경에 상관없이 세계를 이해할 때 맨 처음 받아들이는 근본적인 전제와 대립함을 시사한다. 그 전제에서 지면은 평평하다. 그리고 만일 지지대가 없다면 사물은 낙하한다. 대지는 공처럼 둥글며 사람들은 낙하하지 않고 그 표면의 어디서든 생활할 수 있다는 반직관적인 이해를 습득하기 위해서는 과학의 역사적 패러다임과 비견될 만큼 하나에서 열까지 개념적인 재구축이 아이들의 정신 속에서 요청된다. 6세에서 11세까지의 아동의 경험을 다룬 한 연구에서는 대지에 대한 사고가 팬케이크와 같은 평평한 대지라는 최초의 멘탈 모델에서 시작해서 이 전제를 선생님이나 책에서 얻은 정보와 조정하기 위해 아이들이 시도하는 다양한 중간적인 모델을 거쳐 최종적인 구 모양의 대지에 이른다는 발달의 시퀀스를 특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Vosniadou 1994; Vosniadou&Brewer 1992; 그림 1 참조).
그림1. 대지의 메타모델. Vosniadou&Brewer(1992: 549)에서 게재.
그런데 이 연구에 비판적인 이들도 있다. 많은 아이들이 이 실험에서 직면하는 조정의 문제는 세계에 대한 아이들 스스로의 직관 혹은 ‘소박한 이론’에 관여한다기보다 말한 것 혹은 질문에 의해 유도된 내용을 정당화하기 위한 실험상황의 요청과 관계한다고 비판자들은 주장한다. 이 비판자들은 실험 중의 아이들이 대지의 형상에 대한 어떤 신념이나 직감 혹은 이론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부터 오픈마인드적이라고 주장한다. 아이들의 지식은 교사 등의 지식을 가진 성인뿐만 아니라 교실 한구석에 있을 법한 지구의까지, 발판이 되는 사회·문화적 환경과 느슨하게 연결된 단편적인 모습으로 조금씩 획득된다. 여기서 넘어야 하는 최초의 관념적 장벽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적절한 발판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큰 어려움 없이 지구의의 ‘과학적’ 이해를 획득할 수 있다. 실제로 아이들에게 기성의 그림들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실험에서는 그 그림들을 그들 스스로 그리게 하거나 대화에 답하게 했을 때 작은 아이들과 큰 아이들 간에, 나아가 아이들과 어른들 간에 그 이해에는 거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Nobes, Martin&Pangiotaki 2005).
나는 이 논의에서 특정한 입장을 취할 생각이 없다. 그것은 지식의 획득이 생득적인 정신구조에 의해 결정되는가 혹은 학습의 사회문화적인 맥락에 더 근저적으로 의존하는가라는, 심리학에서 오랜 기간 지속되어온 논쟁의 또 다른 버전에 불과하다. 필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두 진영의 공통된 요소다. 이 두 논의 진영은 대지의 형상에 관한 ‘과학적으로 올바른’ 설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그에 반하는 다른 인식들은 정도의 차가 있을지언정 모두 잘못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더욱 기묘한 것은 대지가 있는 장소에는 하늘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두 진영이 합의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여하간 하늘의 성질과 형상에 관한 ‘과학적으로 올바른’ 설명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앞서 개략한 논쟁에서 대립적인 각각의 입장의 대표적인 연구에서 ‘올바른’ 사고방식으로 간주되는 두 사례를 살펴보자. 첫 번째 입장의 사례에서 실험자의 질문에 응한 여섯 살의 에단은 대지는 공의 형상을 취하며 그것을 보기 위해서 사람들은 발밑을 보아야 하고 대지는 우주(space)에 완전히 둘러싸여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험자가 에단에게 대지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커다란 원을 그리고 그 안에 대륙과 같은 형태의 윤곽을 그려 넣는다. 다음으로 실험자는 “그러면 하늘을 그려줘”라고 말한다. 당황한 에단은 “하늘은 형태가 없어”라고 반론하면서 “우주를 말하는 거지?”라고 되묻는다. 그럼에도 그는 하늘을 그려야 했고 대지를 나타내는 원 주변에 또 하나의 둘레를 덧그린다(Vosniadou&Brewer 1992: 557; 그림2 A 참조).
그림2. A: 에단이 그린, '하늘'에 둘러싸인 구형의 대지. B: 다아시가 그린 하늘과 (집이 있는) 지면 및 구형의 대지. Vosniadou&Brewer(1992: 558)에서 게재.
두 번째 입장의 사례에서 실험자는 대지, 사람들, 하늘에 관한 다음의 항목들에서 선택 가능한 16개의 조합이 하나씩 그려진 그림카드 한 세트를 준비했다. 대지: 고체의 구/평평한 구/떠 있는 구/원반, 사람들: 빙 둘러 서 있다/위에만 서 있다, 하늘: 빙 둘러 있다/위에만 있다. 아이들(5세에서 10세)과 어른들까지 포진된 참가자들에게 각각 우선 현실의 지구와 가장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카드를 선택하게 했다. 다음으로 ‘가장 비슷한 것’에서 ‘가장 비슷하지 않은 것’까지 순위를 정하기 위해 남은 카드에 대해서도 동일한 절차를 밟아나갔다(Nobes, Martin&Pangiotaki 2005:52-4). 피실험자의 3분의 2정도는 최초의 선택지로서 고체의 구를 빙 두른 사람들과 하늘이 배치된 조합을 선택했다. 이 조합의 그림에서 대지는 녹색과 갈색이 섞인 구로 표현되고 경직된 레고 모양의 사람들이 그것을 빙 둘러 서 있으며 구름을 묘사하는 것 같은 둥실둥실한 하얀 문양이 드문드문 그려진 강물 색의 배경을 하고 있다(그림3). 연구자는 대다수의 참가자들의 이 선택이 “지구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를 드러낸다”고 설명한다(Nobes, Martin&Pangiotaki 2005: 55-7). 그러나 이 그림은 기묘하게도 역설적이다. 구 모양을 한 고체의 대지의 바깥 표면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배치되는 한편, 하늘은 대지의 배경으로 깔리고 뒤를 쳐다 보아야 비로소 보이는 그러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대지를 구로 인식하기를 촉구하는 관점은 구름이 점재된 푸른 하늘의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없다.
그림3. 사람들과 하늘이 에워싼 구형의 대지. Nobes et al.(2005: 54)에서 게재.
구 모양의 대지와 하늘을 한 장에 그려 넣으려는 시도에 수반되는 관점의 이중성은 두 번째 실험의 참가자와 마찬가지로 첫 번째 실험의 참가자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에단은 실험자가 하늘이 아닌 우주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우주는 우리 주변 일대에 있다는 이해를 전달하기 위한 의사표시로 바깥쪽의 원으로 그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실험의 다른 참가자인 아홉 살의 다아시의 반응은 조금 색다르다. 다아시는 실험자의 요청에 응하여 둥근 대지를 그리고 달과 별 또한 그려 넣었다. 이때 실험자는 에단에게 한 것과 똑같이 다아시에게도 하늘을 그려줄 것을 부탁한다. 에단과 마찬가지로 다아시는 이 질문에 당황한다. “그것은 뭔가 이상해”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럼에도 그녀의 해결책은 구름의 밑단과 매우 비슷한 대충 몇 개의 수평선을 종이 상단에 이미 그려져 있는 대지, 달, 별의 위에 그려 넣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험자가 “사람들은 어디에 살지?”라고 묻자 다아시는 종이 하단에 밑 부분이 있는 것처럼 집을 그려 넣었다. 실험자가 같은 질문을 반복하자 다아시는 또 다른 집을 그려 넣었다. 세 번째 물었을 때 다아시는 결국 실험자의 요구에 굴복하여 집 하나를 지우고 막대 모양의 인간을 둥근 대지 위에 그려 넣었다(그림 2B 참조). 그런데 이것은 일련의 대화를 불러일으켰다. “이 집은 대지 위에 있는 거지?”라고 실험자는 지워 없어진 집 옆에 아직 남아있는 집 그림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좀 전에는 둥글게 그렸으면서 왜 이 대지는 평평한 거야?” 그 후 다음의 대화가 이어졌다.
다아시: 그래도 그것은 지면에 있기 때문이야.
실험자: 그렇긴 하지만 왜 평평하게 보이도록 그린 거야?
다아시: 그래도 지면은 평평하잖아.
실험자: 그렇긴 하지만 대지의 모습은...
다아시: 둥글지.
(Vosniadou&Brewer 1992: 570)
실험자에게 다아시는 둥근 대지의 표면과 평평한 대지의 표면이라는 관념 사이를 왔다 갔다 헤매는, 마치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기서 실험자가 깨닫지 못한 것은 다아시가 대지(earth)와 지면(ground)의 구분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완벽하게 수미일관된 모습을 취한다는 것이다. 다아시의 설명에 따르면, 그림에 그려진 대로 대지는 정말이지 둥글다. 그러면서도 사람이 사는 집은 지면 위에 지어졌고 지면은 평평하다. 즉 그림 속 집은 지면에 있고 결코 대지의 표면에 있지 않다.
물론 ‘earth’라는 말은 문맥에 따라 다양한 사물을 뜻할 수 있다. 발밑의 지면(ground)을 가리키는 데 사용할 수 있으며, 흙(soil) 그 자체를 가리킬 수도 있다. 혹은 이 혹성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실험의 인터뷰의 맥락에서 대지는 분명히 마지막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다아시는 그에 따른 구분을 지키기 위해 ‘ground’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실험자는 그 구분을 인식하지 못했다. 다시 검토해보면, 과제 전체를 혼란에 빠뜨린 것은 하늘을 덧그려서 혹성으로서의 대지의 그림을 완성하라는 실험자의 지시였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늘과의 관계의 차원에서 대지는 그 위에 사람들이 생활하고 그 생활이 만든 현상학적인 지면의 모습으로만 그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결과는 하나의 완결된 그림이 아니라 같은 페이지에 이중으로 그려진 두 개의 전혀 다른 그림이었다. 하나는 우주로부터 그렇게 보일 것이라는 우리 혹성의 그림이며, 또 하나는 거주자의 현상학적 세계에 나타나는 그대로의 지면과 하늘, 사람들이 사는 주거의 그림이다. 그러나 실험자들은 그 결과를 보고하면서 그들 자신의 관점의 이중성을 피험자에게 투영한다(Vosniadou&Brewer 1992: 569-71). 이와 같이 다아시는 그 외의 많은 피험자들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대지 모델(dual earth model)’의 소유주다. 즉 그 모델은 대지는 평평하다는 소박한 전제와 공처럼 둥글다는 성숙한 이해 사이를 매개하는 수많은 합성모델 중 하나다(그림 1).
두 개의 대지모델에 따르면, “대지는 두 개 존재한다. 하늘에 떠있는 둥그런 것과 사람들이 사는 평평한 것이다”(Vosniadou&Brewer 1992: 550). 두 개의 대지모델의 소유주는 지면에 서서 하늘을 쳐다보면서 구름, 태양, 달, 별뿐만 아니라 주민들 자신이 표면에 발 딛고 서 있는 또 다른 대지도 볼 수 있다. 이 파란 하늘에 떠 있는 구 모양의 대지는 앞서 다룬 두 사례 연구 중 후자에서 ‘올바른’ 그림 카드에 표현되어 있는 것과 완전히 동일한 관점을 보여준다(그림 3). 연구자에 따르면, 이 카드를 선택한 아이들은 “사람들과 하늘이 대지 주변에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Nobes et al. 2005: 59). 물론 과학적으로 말하면 대지를 감싸고 있는 것은 대기며, 그것은 대지와 거리가 멀어짐에 따라 희박해지는 가스 상태의 덮개다. 카드에 그려진 하늘이 대기의 정확한 표현으로 이해되리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으며, 실험자도 그렇게 의도한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이 카드를 선택한 피험자는 하늘의 디자인을 일상의 경험에서 실제로 본 형태와 색깔을 그려 넣는 일종의 벽지로 다루었고 그 위에 아마도 교실 한쪽에 놓여있는 눈에 익은 지구의를 모델로 하는 완전히 다른 대지의 이미지를 덧그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다아시가 혹성적인 대지와 발밑의 지면을 구별할 필요성을 제기했듯이, 대지를 견고한 구 모양이라고 여기는 생각에 완전히 길들여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혹성을 둘러싼 대기와 머리 위의 하늘을 구별하고 싶어 할 것이다.
이 하늘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는 정해져 있지 않다. 실제로 첫 번째 사례의 실험자는 “아이들에게 하늘을 그려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은 어른들에게는 기묘하게 보일 것이다”라고 인정한다(Vosniadou&Brewer 1992: 544).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과제의 목적은 하늘이 대지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과 하늘이 대지를 감싸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을 판별하는 것이다.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둥근 대지 위에 하늘을 그린 다아시는 과학적으로 부정확한 두 개의 대지 모델을 표명한 반면, 대지의 주변에 원을 그린 에단은 올바른 구 형상 모델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대기라는 관념을 결여한 에단은 실험자들이 언급하는 것이 하늘이 아닌 우주라고 생각했다. 다아시는 하늘이란 인간이 거주하는 지면으로 인식된 대지의 그림에서만 그려질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거주에 관계된 이상 하늘은 ‘위’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실험자들은 확실히 알지 못했지만) 알고 있었다. 정말이지 실험자들은 함께 작업한 아이들과는 달리 근본적으로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들은 “우리가 지구의 대지의 바깥쪽에 살고 있다는 생각은 반직감적이며, 일상의 경험과도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Vosniadou&Brewer 1992: 541). 바로 그대로다. ‘과학적’ 관점에서 인간은 대지의 외주자(外住者 exhabitants)다. 그러나 우리가 밟고 있는 이 지면과 마찬가지로 하늘 또한 사람들이 거주(inhabit)하는 세계의 일부다. 요컨대 하늘은 경험에 주어진 세계, 즉 현실의 물리적인 차원이 아닌 현상학적인 차원에 속한다. 혼란의 원인은 실험자가 이 차원들 간의 구별에 실패했다는 데에 있다.
대지를 설비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거주자의 관점에서 세계의 형상을 그릴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유력한 접근법 중 하나가 제임스 깁슨의 선구적인 작업인 『생태학적 시각론』(Gibson 1979)에서 제시된다. 깁슨은 우선 그가 ‘물리세계’와 ‘환경’으로 불리는 것들 간의 구별을 강조한다(1979: 8). 혹성인 대지는 자기를 둘러싼 대기와 함께 물리세계의 일부를 이룬다. 대지와 대기는 해양과 지표면에 생명이 나타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환경은 그 속에 거주하는 생명의 형태와의 관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환경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거주자 주변에 상황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다. 환경은 물리세계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이지만 공간 속의 사물과 신체의 현실이 아니라 그곳에서 삶을 영위하는 존재자의 현실이다. 이렇듯 상정된 환경은 “매질(medium)과 물질(substance) 및 양자를 나누는 면(surface)에 의해 적절하게 기술된다”고 깁슨은 주장한다(1976: 16).
보통 인간에게 매질이란 공기다. 당연히 호흡을 하기 위해서는 공기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공기는 약간의 저항과 함께 우리가 움직이고 일하고 무언가를 만들고 사물에 접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또 방출된 에너지나 규칙적인 진동을 전달하고, 그에 따라 우리는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 나아가 공기는 후각 수용체의 흥분을 일으키는 분자를 확산시키기 때문에 냄새를 맡을 수 있게 있다. 깁슨에 따르면, 그렇기 때문에 매질은 이동과 지각을 제공한다. 반면 물질은 이동과 지각의 상대적인 저항이다. 물질은 바위나 자갈, 모래, 진흙, 나무, 콘크리트 등과 같은 어느 정도의 경도차가 있는 모든 종류의 것들을 포함한다. 이것들의 소재는 생명에게 불가결한 물리적 기반을 설치한다. 여하간 우리는 서 있기 위해서도 그것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것들을 통해서 이동하거나 지각할 수 없다. 물의 지위는 양의적이다. 물고기와 같은 수생생물에게 물은 매질이다. 인간과 같은 육상생물에게 그것은 물질이다. 그런데 이 양의성은 그 자체로는 생물과 매질의 구분을 무효로 만들지 않으며, 다만 환경의 질이 특정한 생명 형태와의 관계에서만 고찰될 수 있다는 논점을 부각한다(Gibson 1979: 16-21).
면은 매질과 물질의 접점이 된다. 면은 방출된 에너지가 반사하거나 호흡하는 장소며, 진동이 매질에게 전달되는 장소며, 매질로의 증발이나 확산이 발생되는 장소며, 우리의 신체가 접촉하는 장소다. 지각에 관여하는 만큼 면은 “거의 모든 활동이 그 속에서 행해지는 장소”(Gibson 1979: 23)가 된다. 모든 면에는 고유한 특성이 있다. 그것은 특정한 그리고 상대적으로 지속적인 배치를 통해 변형과 붕괴에 저항하고 특유의 형상과 특징적이고 물질적인 결(texture)을 만들어낸다. 깁슨은 그 실례로서 자질구레한 주변의 면면을 담은 각기 다른 종류의 여섯 장의 사진을 제시한다. 나무의 단면, 하늘의 구름, 풀 베인 초원, 직조된 천, 잔물결이 일렁이는 연못, 그리고 돌무더기. 어떤 사진이더라도 표면의 결을 보고 그것이 어떤 면인가를 바로 특정할 수 있다(1979: 26-7). 우리는 면에 반사된 빛이 가지는 고유한 산란 패턴에 의해 시각적으로 결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런데 역으로 만약 포위광 속에 변별 가능한 패턴이나 구조가 없다면 그 속에서 특정 가능한 결은 존재할 수 없으며 면을 지각하는 대신 공허함만을 느낄 따름이다(Gibson 1979: 51-2).
하늘의 지각은 좋은 사례다. 청명한 여름날의 결 없는 푸른 하늘과 발밑의 대지의 결을 비교하면, 대지의 면은 통상 지면으로 불리는 무언가로 지각되는 반면 머리 위의 하늘은 끝없는 공허의 공간으로 지각된다. 깁슨에 따르면, 지면이란 “지상의 환경의 문자 그대로의 기초……그 외의 모든 면의 규준이 되는 면이다”(1979: 10, 33). 그것은 중력에 의해 대지로 이끌린 사물을 떠받치며, 대지와 하늘이 만나는 것처럼 보이는 지평선을 향해 뻗어나간다. 대조적으로 하늘은 면을 가지지 않는다. 다만 하늘의 결 없는 공허함 속에, 예를 들어 구름처럼 하늘 속에 면을 특정할 수 있는 결 있는 영역은 가능하다. 그래도 하늘의 노을구름은 예를 들어 강우로 지면에 내려앉은 물방울과 다르다. 물방울이 마르면 하나의 면(물의 면)이 사라지고 또 다른 면(마른 흙의 면)이 남는 반면, 구름이 사라질 때에는 어떤 면도 남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만약 숲 속에서 위를 쳐다보면 천장처럼 위를 덮은 나뭇잎들이 머리 위의 결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것들 사이의 빈공간은 하늘로 열려 있으며 우리는 단지 틈을 볼뿐이다. “새가 나는 것은 그것들 사이의 틈이다”라고 깁스는 말한다(Gibson 1979: 106).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하늘에 대한 깁슨의 설명에는 모순이 있다. 만약 하늘이 공허함의 전형이라면, 또 올려다 볼 때 지각되는 것이 그 공허함이라면, 하늘은 거주 환경의 일부인가 아닌가? 환경은 틈을 가질 수 있는가? 환경은 정말로 ‘열려’ 있는가? 깁슨이 이에 긍정적으로 답하는 것 같은 구절이 있다. 예를 들어 그는 환경이 공간 중의 사물, 즉 닫힌 윤곽선의 형태와 공허한 공간에 정지된 것들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환경은 오히려 “대지와 하늘로부터 이뤄지며 대지 위에 그리고 하늘 안에 산, 구름, 불, 일몰, 돌, 별이라는 다양한 물(物)을 가진다”(1979: 66). 이처럼 구름과 일몰 혹은 별은 환경 중에서 하늘로 불리는 부분에 위치 지어진 현상으로서 제시된다. 하늘은 거주자의 세계를 형성하는 두 부분, 혹은 반구의 한쪽이다. 또 다른 한쪽은 대지다. 거주자가 서 있는 지면은 대지-하늘의 경계며 수평선, 즉 “하늘과 대지를 가르는 상반구와 하반구 간의 경계의 큰 원”(1979: 162)으로 확장된다.
외견상 이 우주관은 ‘중공구(hollow sphere)’ 모델과 유사하다. 그것은 두 개의 대지 모델과 마찬가지로 평평한 대지의 관념과 고체의 구인 대지의 관념 사이를 매개한다. 중공구 모델에서 대지는 아랫부분이 고체이고 윗부분이 속이 빈 볼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두 개의 반구지대 사이의 평평한 경계면에 서 있다. 그들에게 하늘은 머리 위의 돔으로 나타난다(Vosniadou&Brewer 1992: 549-50 그림 1 참조). 그러나 이 우주관과 깁습의 모델 간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깁슨의 모델에서는 거주자의 지각에서 ‘구형의 영역’은 무한하다. 지평선은 거주자와 함께 이동하기 때문에 경계가 될 수 없다. 지평선에 도달하거나 지평선을 횡단할 수 없다. 사물은 가로막힌 장벽을 뚫고 시야에 들어올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은 위를 볼 때 닫힌 면에 둘러싸인 자기를 발견하지 않는다. 하늘 아래의 생명은 열림 속에서 살고 있으며 평평한 기반과 돔 형상의 상부를 가진 중공반구에 국한되지 않는다. 깁슨은 바로 그 국한이라는 사고가 윤곽을 그리는 실천에서 비롯된 인공물임을 시사한다(1979: 66). 그러나 하늘은 윤곽을 갖지 않으며 그것을 그릴 수 없다. 그릴 수 있는 것은 하늘 속 사물이며 하늘에 비춰진 실루엣이다.
그런데 깁슨은 다른 곳에서 “열린 환경은 좀처럼 혹은 전혀 일어날 수 없”으며 그렇게 열린 환경에서 생명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1978: 78). 보통 상황에서 환경은 언덕과 산, 그리고 동물과 식물, 물체와 인공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사물들로 “넘쳐나고” 있다. 혹은 달리 말하면, 환경은 설치된다(furnished). 그리고 깁슨은 “대지를 정비하는 것은 방에 배치된 가구처럼 대지를 생활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구름이 없는 하늘은 이러한 조건으로 보면 거주 불가능하고, 따라서 생물체에게 어떤 부분의 환경도 되어줄 수 없다. 새는 그 속을 날 수 없다. 그리고 텅 빈 대지는 서 있거나 걷기 위한 기반 이외의 그 무엇도 거주자에게 제공할 수 없다. “대지에 설치된 것들은 그 외의 모든 행동의 기반을 제공한다”(1979: 78). 깁슨이 생각하는 지각자는 열림에 남겨지는 만큼 앞서 묘사한 심리학적 실천 속에서 대지의 면의 “바깥쪽에 들러붙은” 인형처럼 세계의 외주자로 나타난다. 이렇듯 사람들은 무대 위의 배우로 연기를 계속하기 위해 비품과 배경이 설치된 면에 단 한 번 입장할 수 있다. 무대장치를 배회하듯이 혹은 다락방에 들어간 집주인처럼 이 사람들은 지저분하게 어질러진 세계의 한복판을 신중하게 걷도록 운명 지어진다.
환경은 단지 대상(object)만이 아니라 “대지와 하늘로부터 이뤄진, 대지 위에 그리고 하늘 속에 있는 대상”(1979: 66)이라고 깁슨은 말한다. 다음으로 그는 대상으로 다뤄지는 사물들을 생각해본다. 대지 위에는 산과 돌과 불이 있으며 하늘에는 구름과 일몰과 별이 있다. 대지 위의 사물들 중에 아마도 돌만이 통상의 의미에서 대상으로 간주될 것이다. 이때에도 각각의 돌은 그 주변의 돌들이나 그것이 있었던 지면과 흘러들어온 과정과 분리되어야 대상이 될 수 있다. 언덕은 대지의 면에 있는 대상이 아니다. 대지의 면을 형성하고 대지와 불가분하게 연결된 풍광(landscape)으로부터 자의적으로 떨어져 나와야만 언덕은 대상으로 사고될 수 있다. 또 불은 대상이 아니라 연소과정의 출현이다. 하늘을 살펴보자. 천문학적인 중요성이 어떠하든지 간에 별은 대상이 아닌 빛의 점으로 지각된다. 일몰은 태양이 태평양의 저편으로 가라앉음과 동시에 일시적으로 하늘을 물들이는 빛남으로 지각된다. 구름 또한 대상이 아니다. 모두 법칙성이 없는, 매질의 흐름 속에서 번영하고 흐르는 잠시잠깐의 팽창이다. 구름을 관찰한다는 것은 구름에 설비된 물품들을 본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오지 않는 형성-과정의 하늘/정보(sky-in-information)의 잠시잠깐의 출현을 포착한다는 것이다.
진정 열린 세계에서는 그 자체로서의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상은 자신 안에 갇혀서 세계에 등을 돌리고 자신에 이르게 된 경로와 차단하여 응결된 외면만을 누군가의 시선에 방치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린 세계에서는 안팎이 없으며 다만 오고 감(coming and going)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생성적인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것은 형성, 팽창, 성장, 융기, 발생이므로 대상을 산출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열린 세계에서 언덕은 융기한다. 또 언덕은 언덕을 오름으로써 혹은 멀리 있는 그 모습을 눈으로 좇음으로써 경험된다(Ingold 2000: 203). 불은 타오르는 불꽃의 흔들거림과 연기의 소용돌이와 그 열에 의해 알 수 있다. 돌은 구른다. 돌의 둥근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은 당연히 이 굴러다님이다. 돌 위를 걸을 때 밭 밑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낮에는 태양이 뜨고 밤에는 달과 별이 빛난다. 구름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그것들임(they are)이란 그 빛나는 각각이며 피어오르는 각각이다. 언덕임이란 융기하는 것이며, 불임이란 타오르는 것이며, 돌임이란 구르는 것이다.
즉 깁슨의 주장과는 반대로 하늘과 대지의 열린 지구가 거주 가능한 환경으로 변해올 수 있었던 것은 대상으로 설비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설비된 세계란 실물의 모형, 즉 실내로 끌고 들어와 전용의 공간에 재구축된 세계다. 그 세계에서 언덕은 무대장치처럼 지면위에 설치되고 별, 구름, 태양, 달은 매달린다. 이 본뜬 세계(as if world)에서 언덕은 융기하지 않으며 불은 타지 않으며 돌은 구르지 않으며 태양과 달과 별은 빛나지 않으며 구름은 피어오르지 않는다. 겉모습은 그럴 듯하지만 환상에 불과하다. 단1도 진행되지 않는다. 단 한번 무대가 설치되고 모든 준비가 완료되면 활동을 개시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열린 세계는 그들을 위해 새롭게 준비되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열린 세계는 서서히 사람들 주변에서 형태를 잡아간다. 열린 세계는 바로 그러한 형성과 변용의 과정의 세계다. 만약 그러한 과정이 지각의 본질이라면 그것은 또 지각된 것의 본질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어떻게 이 세계에 살아갈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각자와 지각된 현상 이 모두가 불가피하게 침투당하는 세계-형성의 동적인 과정에 착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세계의 응결된 물질과 그것이 보여주는 견고한 표면으로부터 물질이 그 속에서 형태를 취하며 녹아들어가는 매체로 시야를 옮겨야 한다. “대부분의 활동이 일어나는” 곳은 깁슨이 생각한 면 위(1979: 23)가 아니라 매질에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생명의 바람
야외/열림에서 아무 것도 없다 하더라도 매질은 중지하지 않는다. 매질은 거의 언제나 유동상태에 있다. 때로는 이러한 흐름이 거의 지각되지 않을 만큼 미비하지만, 때로는 나무를 부러뜨리거나 건물을 쓰러뜨릴 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것은 풍차를 움직일 수 있고 선박을 세계각지로 보낼 수 있다. 이 매질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가 바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바람이 부는 것을 어떻게 알까? 나는 몇 년 전 이 질문을 하버드대학 학생들에게 한 적이 있다. 그때 우리는 기후와 땅(land)의 관계(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살펴보겠다)에 대해 토론하는 중이었다. 나는 실내에서 학술적인 문헌을 통해 논의할 수 있는 것과 야외에서 주변 땅과 함께 기후에 녹아들어가면서 논의할 수 있는 것과의 차이를 검증하고자 했다. 그리고 땅과 기후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그것들 속에서 생각하는 것은 매우 다르리라고 예측했다. 우리는 대개 실내에서 생각하거나 글을 쓰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설비된 실내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다시 말해 이 내부공간에서 쫓겨난다면 외주자 외에 어떤 자가 될 수 있을까를 상상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메를로-퐁티의 표현을 빌면, 대지와 하늘의 열린 세계를 사유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사유의 환경의 고향”(메를로-퐁티 1967: 62)으로서 인식하는 것은 어떤 차이를 발생시킬까?
이 질문에 답을 내기 위해 우리는 교외를 거닐기로 했다. 그날은 화창한 봄날이었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고 미풍이 불었다. 우리는 미풍을 만질 수 없다. 그러나 학생들이 인정했듯이, 얼굴의 튀어나온 부분과 호흡을 통해 미풍이 불어온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처음에 이 느낌은 당혹감으로 다가온다. 바람을 만질 수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느낄 수 있을까? 이 난제를 풀기 위해 우선 느낀다는 것(feeling)과 만진다는 것(touch)이 촉감을 가리키는 데에서 단순 교환 가능한 용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는 매일의 일상 속에서 무언가를 만들 때, 사용할 때 혹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할 때 등 끊임없이 무언가를 만진다. 그리고 친밀한 사교의 형식에서 우리는 타자를 만지고 타자는 우리를 만진다. 만진다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특정기관, 특히 손, 입술, 혀, 발을 통해 이뤄진다. 그러나 느낀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 전체에 스며드는 것이다. 느낀다는 것은 특정한 개인이나 사물에 대한 신체적 접촉을 기도하는 방식이라기보다 자기와 그 주변 간의 어떤 종류의 상호침투다. 그것은 메를로-퐁티가 말한 것처럼 세계가 준비한 ‘우리에게 침입하는’ 존재방식이자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메를로-퐁티 1974: 168). 따라서 느낀다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것 일뿐만 아니라 우리임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지각자와 세계 간의 혼효는 만지는 대상으로서의 사물과 만지는 주체로서의 지각자, 이 둘을 분리시키기 위한 존재론적 전제다. 그리하여 무엇보다 느끼지 않고 만질 수 없다.
요컨대 바람을 느끼는 것은 이 혼효를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만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만지는 것이다. 좀 더 생각해보면, 촉각적인 지각에 대한 이 이해는 시각적인 혹은 청각적인 지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다시 하늘의 현상으로 되돌아가보자. 하늘은 바람 이상으로 지각의 대상인 것은 아니다. 하늘이란 우리가 그것을 보는 무언가가 아니다. 우리가 교외를 거닐면서 모든 종류의 현상을 볼 수 있는 것은 햇빛에 비춰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은 빛 속에서 보이는 무언가가 아니라 빛남 그 자체다. 바람을 느낀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람의 빛은 지각자와 세계 간의 혼효로서 경험되며 그것 없이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바람 속에서 만질 수 있듯이 우리는 하늘 속에서 본다. “하늘의 푸름을 바라보는 나는 무세계적 주체로서 그와 마주보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에 몸을 싣는다. 나는 이 신비함 속으로 들어간다. …하늘이 다가와 나와 하나가 됨으로써 나는 하늘 그 자체가 된다. …나의 의식은 이 무한한 푸름으로 채워진다”라고 메를로-퐁티는 쓰고 있다(1974: 19-20). 여기서 메를로-퐁티가 언급한 신비함이란 시각의 신비함이며, 사물이 보인다는 완전한 일상성의 이면에는 본다는 근원적인 경험이 있음을 발견한 경이로움이다. 빛은 바로 이 발견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Ingold 2000: 264-50). 마찬가지로 음의 신비함은 우리가 듣는다는 발견 속에 있다. 우리는 우리를 감싸는 주변의 바람 속에서 만지고 하늘 속에서 보고 비 속에서 듣는다. 신학자인 존 헐은 성인이 된 후 시력을 잃은 자신의 경험을 서술하면서 바로 태양이 세계를 빛에 적시듯이, 내리는 비가 어떻게 세계를 음에 적시면서 “모든 것의 윤곽을 분명히 하는지”를 묘사한다. “나의 신체와 비는 섞이면서 하나의 청각적으로 촉각 가능한 3차원의 우주가 되고 그 속에서 신체를 통해 나의 의식은 뻗어간다”(Hull 1997: 26-7, 120).
그리하여 열린 세계에 산다는 것은 매질의 흐름, 즉 햇빛, 비, 바람의 흐름에 잠기는 것이다. 이 잠김은 각각 보는 것, 듣는 것, 만지는 것의 능력을 우리에게 부여한다. 물론 바람을 느끼고 반응하는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마찬가지다. 니콜 레벨(Revel 2005)은 필리핀의 파라완 고산족이 어떻게 새와 특별한 관계를 맺는지를 기술한다. 새는 아주 일시적이긴 하나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동료로서 고찰된다. 이 관계에 대한 그들 자신의 해석은 연날리기의 실천으로 응축된다. 대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그 위에 잎사귀나 종이를 붙여 만드는 연은 새를 모방한 것이다. 연날리기는 육생의 인간이 조류인 동료를 경험할 수 있는 공유 가능한 매개다. 연날리기 기수는 얼레를 쥐고 실을 풀어 바람과 장난치면서 새가 날개로 느끼는 것을 느낀다. “대지에 붙어 있는” 파라완족의 연날리기 기수는 “하늘에서 꿈결 같은 기분이 되고 이 고양의 느낌은 하늘을 빙글빙글 도는 덧없는 공작물의 반짝임과 일치한다”(Revel 2005: 407). 새가 된 그들의 의식은 연에 생기를 부여한 것과 동일한 공기의 흐름에 투사되어 대기의 변덕스러움에 시달린다. 그러나 대상으로만 설비된 본뜬 세계에서는 연도 새도 날 수 없다. 대상들의 세계에 바람이 들어설 여지는 없다. 바람은 단지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람이 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예를 들어 불이나 구름이 대상이 아니라는 것과 같다. 불임이 타오르는 것이며 구름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과 같이 바람임은 부는 것이다. 바람은 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속하며, 세계에 대한 무언가의 실물모형에 속하지 않는다. 새는 공기의 ‘틈’을 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모든 나무는 활처럼 휜 기둥과 줄기 속에 자기를 키워준 바람의 흐름의 흔적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인류학과 물질문화연구 분야에서는 마치 사람들과 물질적인 사물이 실제로 이미 그곳에 있는 것처럼 기술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게 되면 지각은 서로에 대해 활동하는 신체화된 인격과 물질화된 사물 간의 상호작용이 된다. 나아가 만약 사물이 ‘반응한다(act back)’면 그것은 바로 인간과 마찬가지로 사물에도 행위주체성(agency)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다시 연의 사례를 살펴보자. 땅에 발 딛은 기수는 실이라는 경로를 통해 연에 작용하고 하늘의 연은 그에 상호적으로 기수에 작용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추측할 수 있다. 이(것)들의 활동을 통해 양자는 서로의 움직임에 대한 스스로의 움직임에 지속적으로 반응한다. 그런데 연은 기수의 행위주체성에 대항하는 독립적인 행위주체성을 가지고 있어서 나는 것이 아니다. 연이 나는 것은 바람의 흐름 속에 떠 있기 때문이다. 이 흐름이 단절되면 바람은 죽은 새처럼 생기를 잃고 축 늘어져 지면에 떨어진다. 바람을 품은 연에 의해 실이 팽팽하게 당겨진다면 그것은 상호작용의 힘이 발휘되는 것이다. 또 다른 사례로 크리스토퍼 틸리의 풍광(landscape) 현상학 탐구를 살펴보자. 틸리는 화가와 나무를 상상해보라고 주문한다. “화가는 나무를 보고 나무는 화가를 본다. 이는 나무가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고 화가의 감정을 흔들어(affect) 화가를 움직이게 하기 때문이다. … 이 의미에서 나무에게는 행위주체성이 있으며 단순한 수동적인 대상이 아니다”(2004: 18). 그리고 나무는 멈추지 않는다. 나무는 바람 속에서 흔들리고, 연필을 쥐고 그 나무의 고유한 곡선을 그려나가는 화가의 시각-수작업적인 몸의 움직임은 나무 그 자체의 움직임과 공진한다. 공기의 흐름 속에서 급강하하는 연의 움직임에 기수의 몸의 움직임이 공감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기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연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화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나무가 아니다. 오히려 기수와 연, 화가와 나무처럼 상호 공진하는 움직임은 매질의 흐름과 마찬가지로 적심/잠김을 기반으로 한다. 조금이라도 그(것)들이 상호작용할 수 있는 것은 이 적심/잠김 때문이다. 만약 바람이 없다면, 기수는 연과 상호작용할 수 없고 화가는 나무와 상호작용할 수 없다. 조금 더 일반화해서 말하면 사람과 사물로 환원된 세계에서 상호작용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단순히 사물에게 ‘행위주체성’을 부여할 뿐이라면 이 세계에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것이 아니다. 정말이지 과도하게 선언된 ‘행위주체성의 문제’는 우리 자신의 창작물이며, 그 연원은 현실에 대한 전도된 관점에 있다. 즉 다양한 종류의 형태들(forms)에 생기를 불어넣는 생세계(生世界)의 동적인 잠재력을 형태 그 자체 속에 분배된 내적인 속성으로 사고하고 그로부터 세계가 움직여나간다고 상정하는 관점이다(Ingold 2005b: 125). 이것은 마치 강이 흐르는 원인이 소용돌이와 강둑의 상호작용에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강의 흐름 그 자체가 없다면 상호작용하는 소용돌이도 강둑도 있을 수 없음을 간과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매질의 흐름이 없다면 사람도 나무도 새도 구름도 불도 일몰도 혹은 우리가 고찰해온 다른 모든 현상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논의는 바로 생명이 의미하는 것과 관계한다. 우리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새나 나무도 살아있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를 그 자체로 이미 닫힌 실재들이 거하고 있는 곳으로 추측하는 사고의 관습은 생명이 사물의 내적 속성이 아닌 무언가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저 멀리 떼어놓는 것이 아닐까? 오히려 생명 속에 사물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사물은 끊임없는 생성의 흐름에 감긴다. 모든 실재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부여된다는 인식은 고전적인 인류학 문헌에서 ‘애니미즘’의 우주관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에 의한 존재론적인 제약(commitment)의 저류로 흐르고 있다. 전통적인 오랜 사고관습에 의하면 애니미즘은 실로 비활성의 사물에 생명과 정령을 불어넣는 신념의 체계다. 그런데 이 사고관습은 이중으로 오해를 일으킨다. 하나는 애니미즘이 세계에 대한 신념체계라는 오해다. 애니미즘은 세계 속에 있는 방식의 하나인 것이다. 그것은 폐쇄성보다 개방성, 즉 항상 유동상태에 있는 환경에 대한 감수성과 응답성을 특징으로 한다. 또 하나는 애니미즘은 사물 속에 생명을 주입한다는 오해다. 애니미즘은 생명을 만들어내는 운동으로 사물을 복귀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거의 모든 애미니즘적 우주관이 바람에 최고의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바람은 사람들의 삶에 형상과 방향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가 창조적(이고 파괴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바람은 행위주체성을 가지지 않는다. 바람이 곧 행위주체성이다. 반복해서 말하건대, 바람임은 불어옴이며 부는 무언가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임은 그들이 무엇을 한다는 그 자체다. 따라서 바람에 인격적 힘을 복귀시키는 것은 어떤 기묘함도 아니고 의인화도 아니다.
열린 세계는 내부도 외부도 아닌 오가는 것임은 앞서 고찰했다. 메를리-퐁티는 화가의 작업을 논하면서 “당연히 존재에는 흡기(吸氣 inspiration)와 호기(呼氣 expiration)가 있다”(19666: 266)고 말한다. 숨을 마시고 내쉬면서 사람은 매질과 통섭하면서 개방한다. 흡기란 숨이 되는 바람이며, 호기란 바람이 되는 숨이다. 호흡에서 오고감의 교차는 생명의 본질이다. 수많은 언어에서 생명과 바람 그리고 호흡을 나타내는 단어가 병행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 사고를 뒷받침한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 애니미즘 개념의 기반이 된 ‘생기를 들이마신다(animate)’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animare(삶을 부여한다)와 anima(숨)에 유래하며, 바로 이 둘은 그리스어의 anemos(바람)에서 유래한다. 즉 생명은 그 생성하는 형태와 함께 매질의 흐름에 휘감긴다. 데이비드 메컬리가 쓴 것처럼 “대기의 두터움에 잠기는 머리 혹은 소용돌이치는 바람에 휘감기는 가슴과 다리와 함께 우리는 공기의 영역에서 반복적으로 호흡하고 사고하며 꿈을 꾼다”(Macauley 2005: 307). 바로 이 때문에 열림 속에 산다는 것은 생명이 신체의 모습을 띤 견고한 거푸집 속에 직조되거나 말려드는 것과 같은 육화(肉化)의 경험이 아니다. 또 정신이 세계의 물질적인 흐름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나가는 이탈의 경험도 생겨날 수 없다. 바람을 느끼고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뱉는 것은 오히려 세계 속에 형성의 파동을 계속해서 만드는 것이며 메를로-퐁티가 사람들과 사물들의 “끊임없는 탄생”(1966: 266)이라고 한 것에 영원히 입회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모든 호흡이 세계가 스스로를 그러한 곳으로 열어 보여주고자 하는 바로 그 순간에 토해낸 최초의 호기인 것처럼. 이 속에서는 바람이 신체로서 육화하기보다 신체가 호흡 속에 풍화(風化 enwinded)한다.
기후-세계
나의 관심은 내부에 산다/거한다(inhabit)는 것이 무엇인지, 즉 닫혀 있기보다 오히려 열려 있는 세계-구의 안에 산다/거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하는 데에 있다. 이 세계에 장벽은 없으며 거주자 각각의 다양한 이동에 따라 조금씩 노출되는 지평선만이 있을 따름이다. 평상은 없으며 단지 발아래의 지면이 있다. 천정은 없으며 머리 위 활을 그리는 하늘만이 있다. 설치된 비품은 없으며 형성과 함입만이 있다. 나는 앞서 우리가 주로 실내에서 사고와 집필을 하기 때문에 문서에서 묘사된 세계를 마치 닫힌 내부 공간에 이미 완비된 것처럼 상상한다고 지적했다. 그 본뜬 세계에는 오직 사람들과 사물들만 거하며 바람, 비, 햇빛, 안개, 서리, 눈 등으로 경험되는 매질의 흐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바로 이 점으로 인해 인간과 물질세계의 관계에 관한 모든 논의가 실질적으로 이러한 매질을 누락하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이에 대해 지금까지 설명했다. 내가 제시한 대안은 열림의 관점이다. 이 관점은 사물에 의해 구비가 끝났다는 세계의 면 위에서 생명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거주자들은 구비가 끝난 면을 횡단하는 것이 아니라 형성-과정의-세계 속을 통과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거주자가 그 속을 움직이는 매질의 흐름이 가장 중요하다.
이제 이 결론과 더불어 나와 학생들이 애버딘셔의 유원지를 걸으면서 고심한 문제로 되돌아왔다. 기후와 땅의 관계란 무엇인가? 이 둘은 지면에 의해 분할되는 서로 다른 영역, 즉 각각 하늘과 대지, 매질과 물질로 귀속되는 것일까? 요컨대 깁슨의 관점에서는 그러하다. 그는 “대기환경의 매질은 기후라 부르는 어떤 종류의 변화를 쉽게 받아들인다”고 한다(1979: 19). 따라서 기후는 매질 속에서 진행 중인 무언가다. 그러나 대지의 물질은 이 진행 중인 것을 투과하지 않는다. 지상의 면은 상대적으로 견고하고 불투명하며, 매질과 물질은 각각의 영역을 견지하면서 섞이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대지가 땅이라는 형태를 취하면서 하늘에 등지고 그 이상의 교류를 거부하는 것 같다. 그에 따라 기후는 땅 위를 휘감으면서도 그 형성에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거주자가 알고 있듯이 비는 경작지를 진흙의 바다로 만들고 우박은 견고한 바위를 깨뜨리고 번개는 여름의 건조한 땅에 산불을 내고 불어오는 바람은 모래를 모래 언덕으로, 눈은 눈덩이로, 호수와 바다에 파도를 일으킨다. 알래스카의 코유콘 사람들의 환경인지에 관한 한 연구에서 리처드 넬슨이 서술한 것처럼 “기후는 쇠망치고 땅은 철침”이다(Nelson 1983: 33). 땅이 매질의 흐름에 반응하는, 보다 미세하고 정밀한 방식도 있다. 서늘한 여름 아침에 식물의 덩굴이나 거미줄을 장식하는 이슬을 생각해보자. 혹은 수풀의 떨어지는 잎사귀나 구부러진 나무줄기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 남겨진 흔적을.
경험이 풍부한 거주자는 어떻게 땅을 바람과 기후의 치밀한 기록부로 읽어낼 수 있을까? 코유콘 사람들은 캠프파이어의 불꽃이 갑자기 타오르는 정도에 따라 태풍의 도래를 예감할 수 있고 유핏크족의 노인은 눈을 뚫고 나온 식물의 언 꽃송이의 방향이나 얼어붙은 호수의 눈의 ‘파도’로부터 탁월품의 방향을 읽어낼 수 있다(Bradly 2002: 249, Nelson 1983: 41). 그러나 땅을 읽어낼수록 물질의 끝과 매질의 시작을 확신에 차서 분석하기가 어려워진다. 바람과 기후가 그 흔적을 땅에 남기는 것은 바로 매질과 물질의 결부(binding)를 통해서다. 따라서 땅 자체는 양자를 분리하는 경계면이 아니라 모호하게 고정된 혼효와 혼합의 영역대가 된다. 누구나 여름에 침엽수림을 걷노라면 ‘지면’과 현실이 명료하게 나뉘는 면이 아니라 덩굴, 낙엽, 암설, 이끼, 돌과 바위, 나뭇가지, 크레바스의 균열, 나무뿌리의 엉킴, 늪과 습지를 뒤덮은 부초 등이 얽히고설킨 것임을 알 수 있다. 어느 장소의 지하는 딱딱한 돌덩이로 이뤄져 있고, 어느 장소는 청명한 하늘 위에 있다. 그런데 생명은 그 중간지대에서, 생물의 거대함과 계속해서 견고해지는 환경을 관통하는 능력에 조응한 그 깊이 속에서 살아간다.
이 의미에서 생물은 땅 속에서 사는 것이지 그 위에 사는 것이 아니다. 매질과 물질이 혼합되지 않는 세계, 즉 견고한 구 안에 대지가 갇혀 있고 하늘이 문을 열어주지 않는 세계에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이 거주하는 곳은 어디라도 물질과 매질의 경계면의 분리가 교란되고 상호 침투되며 연결된다. 생명이 세계를 통해 스스로 성장하고 운동하며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과정을 통해 매질과 물질을 연결시키는 것은 살아있는 생물 그 자체의 본질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성장과 운동에서 생명은 계속해서 전개되는 직물의 일부가 된다. 땅은 말하자면 항상 커나간다. 고고학자가 과거의 삶의 흔적을 해명하기 위해 땅을 파지 않으면 안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땅을 하나로 묶는 것은 만져질 수 있는 얽히고설킨 거주자들의 삶-선들(life-lines)이다. 바람 또한 땅을 불어서 물질과 혼합시키며 오솔길이나 산길에 통과의 흔적을 남긴다. 바람(wind)은 ‘구부러짐(winds)’이다. 그렇게 비틀어진 경로를 따라 지상의 여행자는 길을 떠난다. 경로는 때로 밧줄과 닮았다. 사미족 사람들은 자신들의 오랜 전통 속에서 밧줄에 매듭을 묶으면 바람이 멈추고 풀면 다시 불기 시작한다고 한다(Helander&Mustonen 2004: 537). 이처럼 땅과 기후의 관계는 대지와 하늘의 불투명한 경계면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묶고 푸는 관계다. 열린 세계에 살아가는 일은 기후를 물질적인 삶의 형태와 연결하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땅의 결을 짜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묶으면 경계는 사라진다. 매듭이 그것을 만든 실을 포함하지 않는 것처럼 묶는 것이 세계를 포함하거나 닫는 것이 아니다.
묶는 것이 생명이라면, 그것을 푸는 것은 불이다. 우리는 난로 연기에서 역의 변화, 즉 매질과 물질을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휘발적인 모습으로 물질을 매질로 방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기후-세계에서 연기는 촉발됨에 따라 공기의 흐름과 혼합, 구름으로 응축되기도 한다. 내가 조사한 핀란드 북부에서는 전통적으로 모든 거주가 ‘연기’로 설명된다. 한적한 한겨울에 백야가 하늘에 수직으로 올라서면 아무리 멀리 있다 해도 그 설명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서 난로가 있는 주거지는 그 안에서 영위되는 삶과 마찬가지로 열린 세계에 속한다. 살아있는 신체가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의 규칙적인 운동에 의해 유지되는 것처럼 주거지는 거주자의 끊임없는 오고감에 의해 지탱된다. 따라서 따뜻한 외투와 같이 거주자의 주위를 에워싸는 주거지로서의 ‘실내’를, 앞서 서술한 닫힌 공간에 재구축하는 본뜬 세계의 ‘실재’로부터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자가 삶을 위한 장소라면, 후자는 일종의 컨테이너다. 말할 것도 없이, 세계 전체를 내부로 가지고 들어와 자기완결적인 생활공간을 만드는 것은 근대건축에서 오랜 야망이었다. 이 봉쇄된 귀결의 일부는 장대한 계획을 유지하기 위해 그 자체로 불가피한 측면의 교란을 시야에 드러나지 않게 숨김으로써 대지와 하늘의 완전한 분리라는 환상을 창출했다. 이와 동일한 관점에서 근대건축에서 난로가 점차 사라지게 된 경위를 해명할 수 있다. 난로가 주거지의 중심에서 주변으로 내몰리는 한편 연기는 길게 이어지는 굴뚝의 내부로 격리되었다. 공장의 높은 굴뚝은 연기를 내뱉으면서 대지와 하늘의 절대적인 분리를 소리 높여 선언하고 그와 동시에 불꽃이 타오르는 교란의 지점을 은폐시켜버렸다. 그런데도 굴뚝의 역사는 아직까지 쓰이지 않고 있다.
출발점이 된 대지와 하늘의 이미지로부터 참으로 멀리 왔다. 그 이미지는 구 모양의 대지가 윤곽선의 하늘에 완전히 둘러싸인 에단의 그림에 응축되어 있다(그림 2 A). 아마도 과학적으로는 ‘올바른’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는 그림은 사람들을 대지의 외면에 외주자(外住者)로 남겨둘 것이다. 우리는 ‘거주가 가능한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질문했다. 깁슨은 사람들이 활동 속에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사물들로 박혀 있는 열린 대지의 면을 상상하라고 회답한다. 이 관점에 의하면 세계가 열려 있지 않고 오히려 닫혀 있는 한에서 지상은 환경으로서 거주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폐쇄는 부분적인 것 이상으로 확장될 수 없으며 바로 이 때문에 거주자는 크든 작든 세계로부터 추방자의 지위에 머물 수밖에 없다. 반면 나는 열린 세계에는 대상이 없다고 주장한다. 열림에 거주하는 것은 닫힌 면 위에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기후의 끊임없는 움직임 속에서 매질의 흐름에 잠기는 것이다. 생명은 거주자의 존재 전체를 관통하며 만져지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이러한 흐름에 잠겨 있다. 이 기후-세계에는 대지와 하늘을 분리하는 명확한 면이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은 물질과 매질이 존재자를 조성하는 혼합의 영역에서 살아가며, 존재자는 그 활동을 통해 기후-세계를 땅의 결로 묶는다. 그림4는 외주(外住)로부터 거주(居住)로의 이론적 여행을 추적한 것이다.
그림4. A: 대지의 외주자, B: 기후-세계의 주거(내) 거주자.
알래스카의 코유콘 족은 그들의 세계에 거주하는 존재들을 수수께끼를 통해 불러들인다. 수수께끼를 내는 자는 수수께끼에 언급된 존재의 주체의 위치를 점하고, 익숙한 인간의 움직임으로 그 존재를 모방함으로써 마치 그 자신이 수수께끼의 대상이 된 것처럼 특징적인 움직임을 표명한다. 그 존재들은 마치 일련의 바람처럼 모든 것을 휘감으며 결코 멈추지 않는 기후-세계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움직임들이다. 이 세계는 누구도/개체로서의 어떠한 일자(一者)도 가지지 않는다(no-one).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멈추는 것은 없으며 수수께끼를 내는 자가 불러오는 이미지가 나타나건 말건 사라져간다. 20세기 초엽 예수회 사제인 줄리안 제티가 기록한 수수께끼 중 하나에서 수수께끼를 낸 자는 그 자신을 한 묶음의 풀이라고 생각한다.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저기 주변을 나는 온몸으로 쓸어낸다
over-there around I-sweep-with-my-body
(Jetté 1913: 199-200)
수수께끼를 낸 자는 빗자루(broom)며 빗자루임은 쓸어내는 것이다. 그는 바로 첫눈 위를 의연히 뚫고 버티는 풀처럼 자신의 주변을 쓸어낸다. 바람 속에서 풀을 꺾거나 땅 위에 쌓인 부드러운 눈을 만지면 작은 원 모양이 그 주변을 쓸어낸다. 아마도 이 수수께끼는 에단이 그린 대지와 하늘 그림과는 스펙트럼의 대극을 이룰 것이다. 이 수수께끼는 거주자의 관점에서 본 대지, 하늘, 바람 그리고 기후의 다양성의 총체를 정밀도와 같이 응축하고 있다. 여기서 세계의 전체는 한 묶음의 풀 안에 있다. 한여름 햇빛을 받아 대지로부터 맹아를 틔우고 지금은 겨울의 추위에 얼어붙어 바람에 흔들리는 그 풀은 눈 속에 소구획을 창출함으로써 세계 내에 자신의 장소를 만든다. 이러한 운동을 통해 모든 살아있는 생물체는 열린 세계에 거하는 것이다.
Earth, Sky, Wind, and Weather. Journal of the Royal Anthropology Institute 13: S19-38, 2007.
(http://onlinelibrary.wiley.com/wol1/doi/10.1111/j.1467-9655.2007.00401.x/full)
「大地、空、風、そして天候」(古川不可知訳)『現代思想』2017年3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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