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독보적인 안드로이드 기술 개발자인 이시구로 히로시(石黒浩)의 글을 두 번에 걸쳐 번역해 올려둔다.
인공지능의 출현으로 비로소 인류는 '인간'이라는 개념을 '생산'으로부터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생산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생식이다. 생물학적 재생산이 인간의 삶(혹은 인류의 역사)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귀착되는 한, 인간의 본성은 동물적인 본능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즉 인류사회의 진화, 전쟁, 갈등, 위계, 계약과 협동까지도 동물집단의 유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레비-스트로스가 프로이트의 『토템과 터부』(의 외디푸스 컴플렉스)를 비판적으로 지양하려고 한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된다. 레비-스트로스의 친족 개념은 혈연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끊는 것이라는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논의를 상기해보라.)
또 하나는 노동이다. '인간'의 개념이 노동과 결부되어 있는 한 자기의식은 해명되지 않는다. '인간'의 개념이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와질 때, 즉 현실세계로부터 메타화될 때, '인간'이라는 개념을 창출하는 인간의 의식이 해명된다. 가령 '가상세계'(virtual world)는 근대의 (노동의) 물질주의(materialism)가 은폐한 '보이지 않는 세계'(invisible world)를 복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인류는 인류세(anthropocene)를 마감하고 새로운 세기에 접어든 것이 아닐까? 이시구로 히로시는 그 최전선에서 '인간'의 개념을 새롭게 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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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3차원에서 자유롭기 위해
의식은 무엇에 필요한가?
요즈음 의식에 대해 쭉 생각했다. 계속 안개 속을 걷는 것 같다가 어느 날 밤 깜박 졸던 중에 설명할 수 있겠다는 기분이 문득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의식이란 감각질(感覺質 Qualia)이 아닌 자기의식이다. 자기의식이란 자신에 대해 제삼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자신에 관한 것, 즉 자신을 자신이라고 인식하는 의식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머리 속에 자기를 언급하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눈을 감으면 그 목소리를 보다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의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반사행동만으로 사는 동물은 자신이 자신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 지금까지 나는 인간과 대화할 수 있는 안드로이드를 만들어왔고, 지금 단계에서는 안드로이드가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드로이드를 복잡하게 만들면 만들수록 언젠가는 자기의식과 같은 것을 부여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을 때가 오리라고 생각한다. 의식이 없으면 뛰어넘을 수 없는 높은 ‘장벽’과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자기의식을 되도록 단순하고 기능적으로 이해하면 기억을 참조하는 주체로서 자기의식을 생각할 수 있다. 경험이 누적되면서 비축되는 기억들이 있다. 그러나 그 많은 기억들을 동시에 접속할 수는 없다. ‘나’라는 기억의 참조자가 기억의 발생과 함께 머릿속에 나타나고 그것이 순차적으로 기억을 찾아간다. 아마도 이것이 가장 기능적으로 자기의식을 이해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자신의 기억에 기초해서 세계를 모델화하고 그 모델화된 세계에서 다양한 언어로 생각하는 의식 혹은 머릿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반향시키는 안드로이드는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자신을 보는 자신
자신을 보는 자신이 있다. 이것이 자기의식이다.
머릿속의 자신은 조금이라도 현실세계로부터 떠 있는 느낌을 갖지 않는가? 그것은 그 구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신’을 메타적 관점에서 파악하는, 즉 모델화하는 감각으로서 의식의 ‘세계로부터 약간 떠 있는 느낌’ 혹은 ‘세계와 융합하는 느낌’이 발생한다.
반대로 만약 머릿속의 자신이 현실세계에 딱 들러붙어 있다면 현실세계에 무언가가 일어날 때 사고는 전부 멈추고 말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멈추지 않는다. 어떤 현실이 일어날지라도 머릿속의 ‘자신을 보는 자신’은 계속해서 존재한다. 혹은 잠자고 있을 때는 시간감각이 현실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바꿔 말하면 의식이란 ‘세계’와 ‘자신’의 모델화다. 뇌 속에서 만들어진 가상세계에서 자신을 시뮬레이션 하는 것이다. ‘세계’의 인식과 ‘자신’의 인식, 그것이 뇌 속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과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은 같은 것이다. 다만 세계는 고정된 시간으로서, 자신은 시간을 주관하는 자로서 모델화된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와 자신이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즉 실세계를 고정된 시간과 자신이라는 시계로 분해하는 것이 의식을 갖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뒷모습을 보려고 거울을 등지고 앞에 또 다른 거울을 들고 등 뒤의 거울을 비춰보면 한순간 무한후퇴가 발생한다. 가깝게 비춰지는 자신과 멀리 비춰지는 자신 사이에는 현실에 대한 다른 느낌의 거리감이 있다. 마찬가지로 다양한 수준의 추상도에서 현실세계를 이러 저리 탐색하려하는 것, 그것이 의식이지 않을까? 현실에 뿌리 내린 자신과 현실로부터 분리된 자신을 연결시킴으로써 현실세계에서 활동하면서도 독립된 의식이 있는 감각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기억의 시간
기억이라는 것은 현실세계로부터 약간 떨어져 있다. 기억이 ‘지금 여기’에 단단히 붙어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완전히 ‘주관’에 불과하다. 게다가 여기서 말하는 ‘주관’이란 자기의식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현실의 시간과 완전히 일치된 세계의 관점을 가리킨다. 반사작용으로 움직이는 동물의 세계를 생각하면 된다.
한편 우리는 기억을 ‘객관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다. 예를 들어 “책상 위에 컴퓨터가 있다”고 말할 때에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로서 기억된다. 요컨대 컴퓨터를 계속 지켜보지 않아도 책상 위에 컴퓨터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전제를 하고 행동할 수 있다. 컴퓨터뿐만 아니라 우리는 세계 전체를 그와 같이 고정적인 시간으로 기억한다. 이것은 세계가 뇌 속에서 모델화되고 있음을 반영한다.
만약 조금 전 있었던 것이 지금도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계속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엄청난 정보량을 요하므로 관찰할 수 있는 세계는 매우 좁다. 마치 복수의 눈으로 세계를 계속 관찰하며 주의를 기울이는 벌레와 같다. 즉 현실세계에서 자신이 감각한 것이 ‘주관’(현실세계에 들러붙은 시간)에서 분리됨으로써 기억이라는 ‘자신이 객관세계라고 믿고 있는 것’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억의 시간감각은 엉터리다. 강한 기억은 가까운 일로 생각되지만, 가까운 일도 바로 잊힐 수 있다. 오늘 아침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아도 일년 전의 감동적인 요리는 기억날 수 있다. 싫은 일을 잘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중요한 것만이 강한 인상을 남긴다는 것을 보여준다. 앞뒤의 시간관념은 그리 간단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즉 기억이란 얼핏 시계열적인 것으로 느껴지지만 기억을 통해 “그것이 언제였지?”라는 질문에 실은 순간적으로 답할 수 없으며, 그때 그랬기 때문에 지금 이렇다는 식으로 그 외의 여러 에비던스(증거)와 관련지음으로써 논리적으로 추론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만약 그러한 정보가 전혀 포함되지 않은 기억이 있다면 “그것이 언제였지?”라는 질문에는 전혀 답할 수 없다. 꿈에서는 ‘언제’를 알 수 없는 것처럼 기억은 시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전자회로의 메모리는 플립플롭(flip-flop)이라는 회로로 만들어지는데, 여기서는 입력과 출력이 연결되어 루프를 구성한다. 인간의 기억의 메카니즘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입력과 출력이 연결됨으로써 신경회로가 루프를 뛰어넘어 ‘지금 여기’라는 현실세계의 시간으로부터 분리된다. 즉 기억한다는 것은 시간을 지운다는 것이다.
의식과 기억
여기서 기억이란 자기이외의 것이 ‘있다’(책상이 있다, 당신이 존재한다 등)는 객관성(이라고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며, 의식이란 그 객관세계 속에서 ‘자신’을 시뮬레이션 하는 기능에 관한 것이다. 그 세계의 정보를 추출해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행위주체’가 필요한데, 그것이 자기의식이다. 즉 자신의 주관적 관측을 중첩시켜서 그것이 ‘객관세계’인 모델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 객관세계에서 ‘주관적 관찰을 행하는 자신’을 시뮬레이션 하는 것이며 이 시뮬레이션을 행하는 자신이야말로 자기의식이다.
현실세계에 계속해서 흐르는 시간과 그에 수반하여 광대한 정보량의 흐름을 뇌 속 모델로서 고정하는 기계야말로 의식과 기억의 역할이 아닐까?
옛 기억이 없다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기 어렵다. 어제와 오늘의 자신이 연속한다고 믿지 못한다면 아이덴티티는 구축될 수 없다. 그렇지만 초등학교 시절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의 자기의식은 같지 않으며 연결되어 있지도 않다.
의식은 과연 연속적인 것일까? 라는 질문은 과학적으로도 논의되고 있으며, ‘매우 순간적인 (0.1초 정도의) 단기기억’과 ‘가까운 미래의 예측’을 연속적으로 잇는 것이 의식의 주체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이 순간의 연쇄가 어떻게 해서 태어난 순간부터 동일인물로서 계속되고 있는 ‘자신’이 되는 것일까? 그것이 바로 시간을 지우는 것이리라. 우리는 시간관념을 버림으로써 보편성(기억)을 획득하고 어제에서 내일로 이어지는 자기(의식)를 획득한다.
시간이라는 것은 현실세계의 가장 큰 제약이다. 그리고 보편성이란 시간에 속박되지 않는 것이다. 그 제약을 벗어나 보편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자기를 형성해간다면, 그것은 마치 3차원세계를 살아가는 자들이 이 한 방향의 시간에 속박된 세계를 극복하려는 것과 같다.
이 실세계를 기술에 의해 다양하게 모델화해온 인간이 지금도 모델화할 수 없는 것이 시간이다. 의식이 무엇인지를 지금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시간과 의식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시간을 극복해야=모델화해야 3차원 세계를 완전하게 극복할 수 있다. 이 극복의 과정에 인공적인 의식의 생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안드로이드의 뇌
인간은 관찰에 의해 세계를 뇌 속 모델(기억)을 만들고, 그것을 기본으로 자기의식을 만들어낸다. 순간적으로 모든 것을 계속해서 관찰하지 않고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이 방이 이런 느낌이다 혹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이런 것이다 등등 방과 세계에 관한 뇌 속 모델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시간과 관계하지 않고서도 존재함을 믿을 수 있는 보편적인 모델이다.
따라서 안드로이드가 의식을 갖게 한다면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장치=뇌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를 생각해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그 장치가 현실세계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시간의 변화에 직면한 뇌 속 모델이 갱신될 수 있을까? 로 바꿔 말할 수 있다. 세계를 모델화함으로써 보편성=시간으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하면서 실세계에서의 변화에 따라 모델을 계속해서 변신해가는 것. 그 밸런스가 현실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열쇠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안드로이드에 한정되지 않으며 인간도 마찬가지다. 뇌 속 모델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 인간을 가리켜 망상벽이 강한 인간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는 유한한 시간 속에서 살고 있으며 시간과 함께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변화에 대응해서 살지 않으면 생물로서의 신체로서 유지해나갈 수 없다. 나아가 앞으로는 기술이 진보하고 무기물의 신체에 뇌를 다운로드할 수 있게 되어 죽을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면, 의식의 존재방식 또한 크게 변화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앞으로의 이야기다.
지능—세계의 모델화
인간의 두 진화방법
인간은 두 가지 방법으로 진화하고 있다. 하나는 유전자에 의한 진화며, 또 하나는 기술에 의한 진화다. 본래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도구와 기술의 사용여부에 있다. 도구와 기술을 사용하는 동물이 인간이며, 도구와 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 능력을 고양시켜가는 것이 인간의 진화방법이다.
달리기 속도는 변할 수 없지만 자동차와 비행기 등의 탈 것을 통해 장거리를 더 짧은 시간에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육체의 힘이 크게 변하지 않았는데도 기계를 통해 산을 통째로 무너뜨릴 수 있게 되었으며, 무기를 통해 도시를 한순간 파괴할 수 있게 되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여 해외에 있는 사람과 통화하는 인간은 100년 전의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텔레파시를 사용하는 초능력자일 것이다. 즉 인간은 유전자와 기술이라는 두 방법으로 진화를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기술에 의한 진화속도는 유전자에 의한 진화속도보다도 훨씬 빠르다. 그 때문에 인간과 동물 간에는 압도적인 능력차가 발생하였고 이 세상은 인간에 지배받는 세계가 되었다.
기술이 인간의 진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단서로 기술이 개발되어왔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도구와 기술은 인간 자신의 능력을 바꿔놓거나 고양시켜왔던 것이다. 더 멀리 이동하기 위해 자동차와 비행기를 만들고 건물을 보다 효율적으로 짓기 위해 다양한 건축기계를 개발한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발명하였으며, 언제 어디서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전화가 생겨났다. 이처럼 기술은 단기간에 인간의 능력을 기계로 치환하고 그 능력을 비약적으로 확장해왔던 것이다.
멈추지 않는 기술개발
인간의 능력을 대체하고 확장하는 기술개발의 역사에서 그 기술개발이 멈췄던 때는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인간은 능력을 확장해야 살아남는다는 숙명에 따라 그 능력을 계속해서 확장해왔다. 그리고 그 결과 만들어낸 기술은 풍부한 경제활동을 창출했다. 인간의 능력을 확장하는 새로운 기술은 이 세상에 번영해서 살아남는 데에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며, 그것을 손에 넣어 생활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 살아가는 목적이 된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에서 기술이 쇠퇴한 경우는 거의 없다.
또 하나의 이유는 기술개발 그 자체가 인간이성의 프로세스이기 때문이다. 더 강력한 힘을 얻어 살아남았다는 것, 이 하나만으로는 동물의 삶과 크게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기술개발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포함하기 때문에 멈춰지지 않는 것이 아닐까?
본래 인간이 기술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뇌의 큰 용량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뇌는 그 크기와 복잡함으로 인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지능을 가질 수 있었다. 인간에게는 ‘자신을 보는 자신’을 재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그 한편으로 인간은 자신의 얼굴조차 볼 수 없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많은 감각기관은 진화 과정에서 피부로 변해왔으며 대개 바깥쪽을 향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얼굴도 볼 수 없고, 자신의 위나 장 속도 볼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뇌는 감각기관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엄청난 정보들을 연결함으로써 뇌 속에 보편성을 갖는 ‘자신’의 모델을 만들어내었다. 이것이 ‘객관적으로 자신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뇌 속에서 자신과 세계를 모델화할 수 있는 지능을 가졌다는 바로 그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참조하여 기술로 치환할 수 있었다. (물론 ‘객관적 인식’이라는 것은 원리적으로는 있을 수 없다. ‘객관적인’ 자신의 이해란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가진 자기의식을 확립할 수 있다는 의미일 뿐이다.)
그래서 기술 그 자체가 인간을 모델화하여 이해하기 위한 직접적인 수단이 된다. 인간의 능력을 기술로 대체하는 것은 인간을 모델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예를 들어 살아있는 신체의 팔을 로봇 의수가 대체하여 그 신체의 팔이 가진 능력과 같거나 그 이상의 기능을 할 수 있다면, 그 로봇의 의수는 인간의 팔로 간주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로봇의 의수를 통해 ‘팔’을 완전히 모델링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자신을 모델화할 수 있는 지능 탓에 인간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질 수 있는 것일 수 있다.
인간은 어디까지 기계화될 수 있을까?
기술의 역사란 인간의 기능을 기계로 대체해온 역사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을 생각해왔다. 혁신적인 기술이 발명되면 언제나 그 기술에 기반해서 인간 전체의 대체를 시도해왔다.
예를 들어 시계 기술이 발전한 스위스에서는 그 자동화 기술에 의해 오토마타(autómata: 인간의 지능적 기능을 대체할 수 있는 장치)라 불리는 자동인형을 만들어내었다. 19세기에 조지 무어에 의해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기계인간이 고안되었다. 최근 일본에서 다양한 인간형 로봇이 개발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기능의 기술로의 대체는 인간을 모델화함으로써 인간을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거법적인 인간이해의 방법이기도 하다. 기술에 의해 대체될 수 있는 부분은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신체가 점차 기계로 바뀌어 가면 최종적으로 과연 인간의 코어 같은 것이 남아있겠는가?
몇 백 년 전의 사회에서는 손발이 없다거나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통상의 인간사회에 참가하기가 어려웠다. 통상의 인간으로 간주될 수 없었고 차별받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의수나 의족을 하고서도 충분히 보통의 인간으로서 인간사회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 페이스메이커(pacemaker)나 제세동기를 육체에 심는 수술도, 인공장기도 통상의 의료행위다. 이윽고 육체는 인간임의 조건에서 제외되고 있다. 따라서 기술에 의한 인간의 기능의 대체라는 것은 인간임의 조건에서 생물로서의 인간고유의 것을 지워냄으로써 인간의 정의를 검토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인간의 정의와 튜링 테스트
튜링 테스트(Turing test)란 기계(인공지능)에 인간과 동일한 지능이 있는지를 점검하는 테스트다. 키보드와 모니터를 통해 대화를 나누고 그 결과를 통해 상대가 인간인가 기계인가를 판단하는 것인데, 인간과 구별이 되지 않으면 (기계로 판단되지 않으면) 그 기계는 “튜링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말할 수 있다. 수학자로서 현재 컴퓨터의 기초가 된 튜링 머신을 구상한 앨런 튜링이 1950년의 논문 「계산기와 지능」(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에서 제창한 이후 그렇게 불린다.
다만 인간을 속일 뿐이라면 테스트를 통과한 인공지능은 바로 제작되었으리다. 그러나 무엇이 인간과 기계를 구분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면, 다시 말해 이론적으로 인간을 정의할 수 없다면 최종적으로 그것이 인간인가 기계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튜링 테스트의 전제 자체가 케케묵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것은 ‘인간과 기계를 구별하기’ 위한 테스트고, ‘기계가 인간으로서 다뤄질’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테스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인간으로서 다뤄지는 것들과 그 이외의 것들을 구별하는’ 테스트라고 정의한다면, 인간을 완전히 이해해서 모델화할 수 있고 그에 따라 튜링 테스트의 목적 또한 규정될 것이다. 그때 재료, 즉 육체의 재질은 이미 질문의 대상이 아니다.
기계화—인간이 안드로이드가 될 때
이미 발생한 특이점(singularity)
기술은 이미 가속도로 진화를 시작했다. 인간이 만들어낸 기술 속에 가장 범용적이고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은 컴퓨터다. 컴퓨터는 해마다 두 배 이상의 속도로 성능이 향상되고 있으며, 이것을 ‘무어의 법칙’이라고 말한다.
무어의 법칙에 따른 컴퓨터의 진화 속도는 컴퓨터가 폭발적으로 발전한 초기현상에만 나타나는 것이라고, 그 과정에서 한계점에 도달한 많은 연구자들이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도 컴퓨터의 성능은 끊임없이 가속도로 향상되고 있다.
그 이유는 컴퓨터의 설계에 컴퓨터가 사용되기 때문이다. 컴퓨터 그 자체의 설계에 관해서는 이미 인간이 수작업으로 도면을 그린다거나 그를 위해 필요한 계산이나 시뮬레이션을 행할 수 없다. 그것들은 모두 컴퓨터가 한다. 물론 인간은 항상 새로운 설계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과 컴퓨터의 계산능력의 향상 중 어느 쪽이 새로운 컴퓨터설계에 더 큰 공헌을 하고 있는가? 문외한인 나는 명확하게 답변할 수 없지만 컴퓨터 자체의 성능향상이 설계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끼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컴퓨터가 컴퓨터를 개발하고 로봇이 로봇을 개발한다. 컴퓨터나 로봇이 인간의 지혜를 넘어서서 가속도로 발전하는 것을 ‘특이점’이라고 말한 것인데, 특이점은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인간다운 안드로이드
가속도가 붙은 기술의 진화는 컴퓨터뿐만 아니라 로봇에게도 적용된다. 인간의 뇌는 인간을 인식하고 인간에 관여해왔다. 따라서 그 인간이 사용하기 편한 제품을 만들고자 한다면, 그 제품에 필연적으로 인간다운 기능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인간의 시선을 모방한 로봇인 안드로이드(휴머노이드라고도 불린다)의 연구개발은 최근 10년에서 15년 사이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컴퓨터가 인간의 뇌의 기능을 대체하는 것이라면 안드로이드는 인간의 시선과 행동방식을 대체하고 나아가 실제 사회에서 타자와 상호작용하는 기능, 즉 타자와 사회적인 관계를 맺는 기능을 대체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다양한 안드로이드를 만들어왔다.
물론 아직 개량의 여지는 남아있지만, 상황과 목적을 임의로 선택할 수 있다면 인간에 더욱 가까운 안드로이드를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회사 접수대에서 인사하는 안드로이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간으로 착각한다. 또 무대에 선 안드로이드는 특히 인간의 역할 이상으로 인간 같다. 노래를 부르는 아이돌로서의 안드로이드는 홍콩에서 압도적인 팬덤을 형성하고 있다. 안드로이드는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다. 앞으로 가장 큰 목적은 안드로이드에 의도와 욕구를 심어주는 것이며 최종적으로는 의식을 부여하는 것이다.
지금의 안드로이드와 로봇 등에게 행위는 프로그램화되어 있지만 의도와 욕구는 프로그램화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대화를 나눈다 해도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주어진 질문에 정해진 답변을 의미 없이 되돌려줄 뿐이다. 대화가 성립된다 해도 진짜 인간다운 대화는 할 수 없다. 이 안드로이드에게 행동뿐만 아니라 그 행동을 만드는 배경으로서 의도와 욕구 또한 프로그램화된다면 더 인간다워질 것이다.
그러한 의도와 욕구를 가진 안드로이드는 대화상대인 인간의 의도와 욕구 또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발화와 행동을 관찰하고 그것을 자신의 내부 모델에 비추어 맞춰보고 자신이라면 어떤 의도와 욕구를 가지고 그 행동을 취할 것인가를 추정하는 것이다.
인간의 의도와 욕구를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의도와 욕구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며 자신의 의도의 일부를 특정한 인간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의도의 공유란 무엇일까? 물론 그것은 친밀한 관계를 의미한다. 서로가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것이 아닐까?
안드로이드로 살아가다
한편 인간 동료의 관계는 늘 대등하지만은 않다. 예를 들어 영화배우와 일반인은 일대다의 특수한 관계에 놓여있다. 그러한 관계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과 의도를 공유하고 마음을 통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보다 사회에서 어떻게 널리 인지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만담계의 두 번째 인간국보인 고 카츠라 베이초(桂米朝)의 안드로이드를 만들 기회를 얻은 적이 있다.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 미수(米壽: 88세)의 기념강연을 위해 제작한 것인데, 당시 카츠라 베이초 씨는 이미 만담을 연기하는 것이 힘든 지경이었다. 따라서 카츠라 씨가 만담가로서 전성기를 누렸을 즈음의 모습으로 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안드로이드는 지금까지도 카츠라 씨를 대신해서 만담을 연기하고 있다. 그것은 비디오 영상과는 완전히 다른, 카츠라 씨의 존재감을 그 자체로 재현한 매우 박력있는 모습이다. 물론 조금 주의 깊게 보면, 그것이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단 만담이 시작되면 그 만담에 점차 빠져들어 마치 진짜 카츠라 씨가 연기하고 있는 것처럼 현장감을 즐길 수 있다. 실제로 이 안드로이드가 참가하는 만담 공연은 언제나 만석으로 티켓은 바로 매진된다.
카츠라 씨와 일반 사람들과의 관계는 만담을 연기하는 자와 듣는 자의 관계다. 그 관계가 안드로이드에 의해 유지됨으로써 카츠라 씨는 만담가로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을 만담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카츠라 씨는 안드로이드가 되어 지금까지 사회에서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즉 안드로이드는 사회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수단, 영원한 생명을 제공하는 수단이 된다.
카츠라 씨는 말하자면 신체의 모든 것을 안드로이드로 대체한 것인데, 신체를 기계로 대체한다는 것은 카츠라 씨와 같은 저명인이 아니어도 다양한 모습으로 일어나고 있다. 사지, 장기, 세포……육체의 일부를 기계로 바꾼다 해도 그 사람이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살아있는 신체’가 이미 인간을 정의하는 필요조건에서 제외되고 있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기술은 본래부터 인간의 능력을 기계로 대체해왔다. 인간의 능력이 기계로 대체됨과 동시에 로봇도 더 인간다워질 것이다. 그 로봇사회에서 사람들이 배우는 것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인간 자신의 존재를 묻는 질문에 대한 해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로봇 사회의 본질
로봇 사회에서 로봇은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다. ‘마음’, ‘의식’, ‘자아’, ‘사랑’이라는 인간의 본질에 관한 문제에 대해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왠지 풀어야 할 것 숙제로 느껴지면서도 마치 잘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이 말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로봇을 보면서 이 말들을 연상시킨다면 어떠할까? 상황은 한 순간 일변하지 않을까? 이 말들의 진정한 의미를 자신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는 예전에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히라타 로이자씨와 안드로이드 연극을 제작했다. 이것은 고전적인 연극예술로서 높은 평가를 받음과 동시에 관객들로부터 감동을 이끌어내었다. 연극을 본 사람들의 대부분이 안드로이드에 인간다운 마음을 느꼈다고 평가한 것이다.
그렇다면 안드로이드는 인간과 같은 마음을 가진 것일까? 연극에 사용한 안드로이드는 외모와 표정이 인간과 똑같게 제작되었지만, 프로그램으로 기록된 동작과 발화를 순차적으로 재생했을 뿐으로 지능을 가지지 않은 단순한 제작방식의 안드로이드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안드로이드에게 인간과 똑같은 ‘마음’을 느낀다면, ‘마음’의 본질은 인간이나 로봇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관찰해서 느끼는 측에 있게 된다. 즉 ‘마음’이란 사회적인 상호작용에 머무는 주관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마음’의 해석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풀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것을 이제까지와는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로봇과의 관계가 증가하는 사회에서는 일상생활에서 ‘마음’, ‘의식’, ‘자아’, ‘사랑’이라는,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라고 모두가 믿으며 일상적으로 사용하면서도 의미 불명인 말들과 그 말들이 지시하는 문제에 대해 깊게 사고하는 계기를 맞이하고 있다.
로봇이 증가하면 생활은 편리하고 풍부해진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인간은 인간에 대해 깊게 사고하게 된다. 나는 그것이 로봇사회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란 기술을 사용하는 동물이며 기술에 의해 진화해왔다. 그 기술이 만들어낸 로봇사회에서 인간은 그 본질로 향해가고 있다. 인간의 진정한 진화란 인간 그 자체의 본질적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 아닐까?
안드로이드가 되기 위해 태어나다
기술이 더 진보하게 되면 인간의 신체는 점차 기계로 대체되고 그 수명은 점차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뇌 자체도 컴퓨터로 대체되고 인간은 완전히 기계화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유기체로서의 육체가 가진 질병이나 수명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은 기술에 의해 생명의 한계를 뛰어넘어 무기질로 진화해갈 것이다.
이것은 ‘브레인 업로드’라고 불리는 꿈의 기술이며 당장은 실현되기 어렵다. 그러나 먼 미래에 실현될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
가령 그러한 일이 가능한 시대가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다시 카츠라 씨의 안드로이드를 떠올려보자.
한 나라의 입장에서, 일본문화의 관점에서 중요한 존재인 인간국보 카츠라 씨의 안드로이드를 제작한 것은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그의 안드로이드가 사회 속에서 계속해서 살아감으로써 그 뛰어난 예술인을 후세에 전하게 된 것은 더욱 의미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삶의 목적은 어쩌면 사회 속에서 위업을 달성하고 그 후 안드로이드로서 영구히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안드로이드가 되어 그 존재가치를 불변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일지도 모른다.
池上高志・石黒浩、『人間と機械の間―心はどこにあるのか』、講談社、2016年12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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