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팀 잉골드의 경우
야나기사와 타미(柳澤田美)
0. 초콜릿과 치즈를 나란히 놓다
들뢰즈&가타리가 창출한 매력적인 개념 가운데 ‘도주선’(ligne de fuite)이라는 것이 있다. ‘선’(ligne)이란 우리의 삶 그 자체의 ‘욕망’을 의미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 무수한 방향으로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선’은 우리의 욕망을 억압하는 다양한 해석의 격자들, 서사, 개념, 존재론에서 빠져나와 도주한다. 도주한다는 것은 “현실을 생산하고 삶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들뢰즈&가타리는 이 개념을 국가라는 권력의 집중으로부터의 도주를 말하는 데에 사용하며 부모와 자식을 구성원으로 하는 ‘가족’이라는 모델과 이 ‘가족’ 모델에 입각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에 의한 억압으로부터의 도주를 말하는 데에도 사용한다. 즉 그들이 비판의 칼끝을 겨눈 곳은 주로 정신분석이라는, 담론에 의한 권력의 행사며 또 국가와 아버지로 대표되는 다양한 권력의 담지자다. 이는 아직까지는 온당하다.
인류학자인 팀 잉골드(Tim Ingold)는 이 ‘도주선’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선’(line)이라는 개념을 기축으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들뢰즈&가타리가 전제한 정신분석이라는 맥락을 완전히 도외시한 채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는데, 잉골드가 한 사람의 인류학자로서 오리지널한 모색을 전개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이러한 개념의 응용 자체가 비판받을 만한 일은 아니다. 그의 독해는 가타리는 물론 적어도 들뢰즈 철학의 큰 테두리에서 일탈하지는 않는다. 잉골드는 알프레드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 영국의 수학자ㆍ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을 잇는 노선에 들뢰즈&가타리를 위치짓고, 삶에 관해 그들의 이해를 매우 충실하게 공유한다. 잉골드를 포함하여 그들이 공유하는 삶의 이해란 다음과 같다. ‘살아 있는 것’은 분단할 수 없는 ‘흐름’이자 ‘운동’이며, 이 ‘운동’에는 외부가 없고 또 이 ‘운동’을 잘라 나눈 부분들의 집합으로 다뤄질 수 없다. 이 테제를 반복하는 잉골드는 사상사적으로는 화이트헤드, 베르그송, 들뢰즈를 잇는 계열의 직계임이 분명하다. 그 의미에서 기본도식의 측면에서 보면 그가 어떤 새로운 제안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사상의 계열에 잉골드 자신이 참조하고 있는 그레고리 베이트슨과 데이비드 봄(David Joseph Bohm)을 덧붙여도 무방하다.
그의 모색이 이채로울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선학들의 고도로 추상적인 철학적인 모색을 그 자신의 대담한 직감에 의해 구체적인 사상이나 실천과 결부시키는 그의 비상한 재주 때문이며, 또 그렇게 결부시킴으로써 오리지널한 사색을 스스로 전개시키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의도한 것은 아닌 것”이라고 해도 “초콜릿과 치즈”라는 극과 극에 있는 것들을 순식간에 나란히 놓게 된다고 술회한 것처럼, 제대로 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우스울 정도로 호쾌하게 잉골드는 철학적 사색과 구체적인 사례를 결부시키면서 논의를 전개시켜나간다. 나는 이번 기회에 잉골드의 ‘선’을 둘러싼 논의에서 특히 “선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실천적인 질문을 중심으로 논의를 검토하고, 이 작업을 통해 잉골드의 오리지널리티를 드러내고자 한다. 잉골드가 이 개념을 어떤 실천으로 구체화했는가를 확인함으로써, 들뢰즈&가타리가 고안한 ‘도주선’이라는 개념 자체의 실천적 의의에 대해서도 일부 밝혀지리라 기대한다.
1. 애니믹 온톨로지: 물질과 생명의 불가분성
들뢰즈&가타리의 저작과의 만남을 통해 ‘선’이라는 결정적인 이미지를 얻은 잉골드는 그 후 『Lines: A brief history』(2008)를 저술한다. 이 책에서 그는 음악, 보행, 문학, 소묘, 건축 등을 자유롭게 오가며 살아있는 것 그 자체의 궤적이 악보그리기, 교통수단, 인쇄기술, 원근법, 제도법 등의 다양한 제도에 의해 점과 점을 연결하는 고정적인 선이 되면서 그 역동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그려내었다. 앞서 나는 잉골드의 독자성은 추상적인 논의를 구체적인 사물과 연결하는 대담성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잉골드는 들뢰즈&가타리의 ‘선’을 단순한 비유로서 이해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문자 그대로의 ‘선’과 결부시켜 풍요로운 선의 세계를 그려내었다. 이러한 ‘선’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거쳐, 2011년 『Being Alive』라는 논문집을 출간한다. 잉골드는 “선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실천적인 탐구에 착수한다. 물론 잉골드는 들뢰즈&가타리가 말한 것처럼 권력기구에 대한 투쟁의 수단으로서 도주선을 자각적으로 논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 인류학이 삶을 억압하는 것으로부터의 가장 유망한 도주선인 이상, 우리는 그가 탐구하는 새로운 인류학의 기술법에서 잉골드에 의한 도주선의 묘사방식의 가이드라인을 읽어낼 수 있다.
이제 『Being Alive』에서 ‘도주선의 묘사방식’이라는 본고의 테마와 관련하여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장을 중심으로 논의를 재구성해보겠다. 잉골드의 사상은 말하자면 생명=물질의 일원론으로서 유물론이자 철저한 내재주의다. 요컨대 그는 인간의 정신이 자연이나 물질에 대해 초월적 입장을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인간을 포함한 모든 유기물과 무기물 각각이 생명의 선을 무수하게 도주해나가면서 뒤얽히는 상태로서 세계를 그려내고자 한다. 이러한 세계상을 전제하는 잉골드가 “선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물음에 어떻게 답했는가를 미리 서술하면, 무언가를 새롭게 이미지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물질에 따른다”(following the material)는 것이다. 잉골드는 이 문구를 들뢰즈&가타리의 『천의 고원』의 야금술에 관한 텍스트에서 인용하여 자신의 논문집의 제17장 ‘만들기의 텍스틸리티’(Textility of making)에서 전개시킨다. 그리고 이 “물질에 따른다”는 테제를 검토한 후에 제18장과 에필로그에서 사물을 대상화하지 않는 드로잉(drawing)을 논한다.
우선 제17장에서 언명한 “사물에 따른다”에 이르기까지의 논의를 확인해보자. 모든 존재자들의 무수한 선들의 일원적으로 뒤얽히는 모습으로 세계를 그리는 잉골드는 서구의 자연과학이 전제로 삼고 또 그 영향 하에 있는 우리가 습관적으로 행하는 다양한 존재론적인 이원론을 부정한다. 제5장 ‘생명 있는 것을 재고한다, 사고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Rethinking the animate, reanimating thought)에서 잉골드는 우선 비활성(非活性)의 물질과 생명을 나누어 생각하는 사고의 틀을 비판한다. 이러한 서구적인 사고에 의해 미개사회의 ‘애니미즘’은 비활성의 물질 혹은 물질에 생명을 귀속시키는 미신이라고 간주되어 왔다. 동시에 이러한 비활성의 물질이라는 이해에 의해, 우리는 환경을 생물이 활동하는 정적인 무대로 간주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상식이야말로 잘못된 것이라고 잉골드는 지적한다.
잉골드에 따르면, ‘활성’(animacy)이란 생명과 물질이라고 하는 이원론에 앞서는 것이며, 근본적으로 관계성에 대해 열려 있는 것이다. 또 ‘활성’은 무수하게 도주하는 선들에 의해 그물 세공(meshwork)을 형성한다. 잉골드는 이러한 생명에 대한 지각을 중심으로 하는 애니믹 온톨로지(animic ontology)에서 가장 우위에 있는 것이 바로 ‘운동’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운동이 생명의 표지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유보하면서도, “생명이 있는 곳에 운동이 있다”고 잉골드는 서술한다. 여기서 잉골드는 인류학자답게 애니믹 온톨로지의 사례로서 이누이트의 코유콘족의 문화를 가져온다. 이 종족에서 동물의 이름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또 북아메리카 평야에서 발견되는 비문에서 태양은 다음과 같은 상형문자로 표현된다(그림 참조). 여기서 발견되는 것은 태양이 하늘을 가로질러 가는 대상이 아니라 바로 “하늘을 통과하는 움직임의 길”이라는 이해다.
그림
잉골드는 이렇듯 아름다운 사례들에 기초하여 대지든 하늘이든 우리를 휘감는 환경 속에는 활기 없는(inanimate) 고정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움직이고 흐른다고 서술한다. 게다가 우리는 이 유동하는 세계를 관찰할 때 과학자들이 종종 상정하듯이 이 세계로부터 자신들이 분리되어 객관적인 입장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스스로 유동하는 자에 의한 관찰이라는, 행위와 지각을 통한 참여(participation)가 있을 뿐이며, 그 속에서 새로운 선, 즉 유동의 뒤얽힘이 필연적으로 생겨난다. 자연과학에도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한 관찰과 기술방법이 요구되고 있다고 잉골드는 서술하면서, 움직이는 흐름으로서 세계를 다루는 데에 능숙한 자로서 풍경을 사생하는 화가를 참조한다.
2. ‘방심’을 축복하다
이처럼 제5장에는 잉골드가 자신의 논문집에서 주장하는 기본적인 요소가 전부 담겨 있다. 첫째, 세계란 모든 존재자가 물질로서 유동하고 생성하는 상태에 있다. 둘째, 그 세계는 생성하는 선들의 뒤얽힘, 곧 그물 세공으로서 다뤄질 수 있다. 셋째, 이러한 세계관을 전제로 할 때, 비활성의 물질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사고나 표상을 투영한다는 이해방식은 중지되어야 한다. 넷째, 인간이 세계를 관찰하는 입장에 설 때조차 인간 또한 유동하는 선이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되고 관찰자 또한 참여자로서 세계의 흐름의 일부를 이룬다는 새로운 모델과 기술방법이 필요하다. 다섯째, 이 새로운 모델의 존재방식은 화가나 장인 등의 크리에이터에게서 발견된다. 그의 이 주장들은 책의 중반부와 후반부에서 구체적으로 기술되는데, 예를 들어 첫 번째, 두 번째 문제가 제10장의 ‘날씨 세계’(weather world)에서 다시금 전개된다. 또 세 번째 문제가 각각 소재를 달리 해서 제1장과 제17장에서 다뤄진다. “선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도주선의 문제는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문제의 핵심인데, 이를 중심적으로 다루는 장은 앞서 언급했다시피 제18장과 에필로그의 제19장이다.
제5장의 요약 내용처럼 잉골드에게 세계는 무엇보다 유동하는 선들의 뒤얽힘이며,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손상시키는 것은 우리 관찰자인 인간 측의 이해와 해석에 좌우된다. 우리는 살아있는 한, 이미 선들을 무수하게 도주시키며 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아무리 자각한다 해도 우리가 느닷없이 이누이트의 코유콘족이나 아메리카 선주민처럼 애니믹 온톨로지로 살아갈 수는 없다. 우리가 ‘동물화하는’ 것의 어려움에 관한 문제에 대해 잉골드는 제6장에서 더욱 깊게 파고든다.
제6장에 등장하는 것은 제임스 깁슨, 마르틴 하이데거, 야콥 폰 윅스퀼, 그리고 들뢰즈&가타리다. 조금 논의가 복잡하므로 가능한 단순하게 정리해보겠다. 우선 잉골드는 깁슨의 환경이해와 윅스퀼의 환경이해를 비교한다. 깁슨과 윅스퀼은 세계의 ‘의미’를 유기체와 환경과의 관계성 속에 위치짓는다는 점에서는 입장을 같이 한다. 이것은 인간의 정신이 세계 속에서 의미를 찾아낸다는 아마도 지금까지 가장 유력한 인지모델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다. 모든 존재자를 관계성의 그물 세공으로서 파악하는 잉골드 또한 이 입장을 공유한다. 그러나 깁슨은 유기체와 환경 속에서 행위를 통해 의미를 지각하고 채용한다고 말하면서도 이 환경 내의 의미, 더 강하게 표현하면 환경 그 자체의 자립성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점에서 모순적이라고 잉골드는 비판한다. 이러한 환경의 유기체에 대한 자립성은 결국 매우 서구적인, 곧 생물이 활약하는 고정적인 무대로서의 환경=세계라는 모델을 여전히 고수하는 것이라고 잉골드는 주장한다. 이에 대해 윅스퀼의 ‘환경세계’는 철저하게 관계적인 개념이다.
깁슨의 용어에서는 피난처 혹은 석전의 돌 무기는 모두 다듬어서 이용가능하게 된 돌의 특성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윅스퀼에게 그것은 해당의 생물이 필요로 함에 따라 바로 그 돌에 주의한다는 행위로부터 돌에 전수된 성질이다. 게는 급할 때 돌을 피난처 삼을 수 있다. 또 개똥지빠귀는 껍질을 부수는 받침으로 돌을 쓸 수 있고, 나아가 사람들이 그것을 던지기 위해 돌을 주워들었을 때 돌은 무기가 된다. 이러한 활동의 외부에서 이 사물들은 그 무엇도 아니다. 따라서 세계의 특정한 ‘니치’(niche)와는 적합하지 않고 동물 쪽이야말로 기능적인 성질을 자신이 맞부딪히는 사물에 대해 귀속시킴으로써, 그리고 그에 의해 그 성질들을 동물 자신의 정합적인 시스템과 통합함으로써, 세계를 자기 자신에게 접합시킨다. 이 시스템—동물의 지각과 행위의 회로의 내측에서 구성되는 것으로서의 세계—을 가리키기 위해 폰 윅스퀼은 환경세계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중략) 우리가 보아왔던 것처럼 ‘니치’(niche), 곧 의미장치는 환경 쪽에 있으며 유기체의 힘을 방향 짓는다. 그러나 환경세계는 정반대에 있다. 그것은 환경의 방향으로 향해 있는 유기체 쪽에 있다. 유기체를 제외하면 환경세계는 유기체와 함께 사라진다. (『Being Alive』79-80쪽)
그러나 인간에 관해서는 어떠할까? 라고 잉골드는 의문을 제기한다. 인간에게만 환경 내의 의미가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인식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윅스퀼에 입각하면서서 인간의 특권성을 견지한 하이데거로 잉골드는 향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하이데거는 윅스퀼의 논의에 경의를 품고 참조하면서도 “돌은…무세계적이다. 동물은 세계빈곤적이다. 인간은 세계형성적이다”라고 말했다. 돌은 환경 내에서 의미를 찾지 않기 때문에 세계를 갖지 않는다. 인간은 환경 내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나아가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에 반해 동물은 환경 내에서 의미를 찾아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세계를 가진다 해도 빈곤한 방식으로 가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세계에 열려 있음에 반해 동물은 환경에는 열려 있지만 세계에는 닫혀 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이다. 하이데거는 또한 동물이 자신이 놓인 상황을 인식할 수 없는 상태에서 환경에 촉발되어 행위를 하는 양태에 대해 “사로잡혀 있다”(benommen/captivated) 혹은 “방심”(Benommenheit/captivation)으로 표현한다.
하이데거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 잉골드는 다음의 세 가지로 답변한다. 첫째, 인간 또한 장인처럼 눈앞에 있는 것에 몰두할 때에는 얼핏 ‘방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세계를 가지지 않는’ 동물과, 세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닫혀 있을 수 있는 인간과의 차이는 분명 존재할 수 있다. 둘째, 하이데거의 환경 이해는 유기체로부터 독립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깁슨의 환경이해보다는 양호하지만 유기체와 환경을 분리하는 관점 자체를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셋째, 유기체와 환경을 분리하지 않고 생명을 뒤얽힘으로서 다루기 위해서는 동물의 ‘방심’을 하이데거와 달리(아마도 윅스퀼에 입각하여) ‘축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동물의 방심을 축복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잉골드는 동물에게 실현되는 ‘방심’이야말로 “용기에 담기지 않고 그 주변을 에두르는 모든 경계를 넘어 흐르는” 리좀 위로 확장해가는 “생명의 개방성”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유기체와 환경이라는 쌍방의 외부로부터 관찰된 생태학적 입장도 아니고(깁슨), 유기체 측으로부터 관찰된 현상학적 입장도 아니며(하이데거) 유기체와 환경이라는 구분에 앞서 생명의 차원에서의 개방성이다. 그리고 이 생명의 선들에 대해 말하는 자로 윅스퀼을 읽어내는 들뢰즈&가타리가 참조된다.
생성변화의 선은 그것과 결부되는 복수의 점들에 의해서도, 또 그것을 구성하는 복수의 점들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다. 생성변화의 선은 점과 점 사이를 빠져나와 중간에서만 맹아를 피울 뿐인가? … 근접하는 점과 떨어져 있는 점 사이로 국한되는 관계에 대해 선은 이 점들을 횡단하는 방향으로 질주한다. 점은 항상 기원이다. 그런데 생성변화의 선은 처음도 끝도 없고 … 생성변화의 선에는 <중간>이 있을 뿐이다. … 생성변화는 항상 <중간>이며, 이것을 취하기 위해서는 <중간>을 억압할 수밖에 없다. 생성변화는 일(一)도 이(二)도 아니고, 이 둘의 <사이>이며, 이 둘과 수직을 이룬다. … 도주…의 선이다. (『천의 고원』)
하이데거는 환경을 의미로 넘쳐나는 것으로 다루며 생명체는 환경으로부터 촉발되도록 환경을 ‘억지 해제하는’, 즉 다양한 자극에 대해 닫혀 있는 자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는 것으로 다루었다. 인간은 환경을 인식해서 행할 수 있지만 동물은 ‘억지 해제’를 선택하지도 못하며 자각하지도 못한다는 의미에서 ‘빈곤하다’. 잉골드는 여기서 생명체가 이미 포위되어 있음에 ‘열려 있다=억지 해제한다’는 의미에서의 ‘열려진’ 것이 아니고 생명이 근본적으로 살아있는 한 ‘열려’ 있고,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도 포위되거나 갇힐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렇듯 열려진 선에 의해 이뤄지는 세계는 그물 세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 핵심은 그것이 네트워크와 같이 점들의 연결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잉골드는 여기서 들뢰즈의 꿀벌과 난의 예, 그리고 곰과 파리의 예를 들면서 각각의 관계성은 분명 선상 위에 있지만 그것은 양자를 묶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상호작용하는 “가능성의 조건을 규정한다”고 서술하고, “만약 이 선들이 관계하고 있다면 그것들은 사이(between)의 관계가 아니라 따르는(along) 관계다”라고 말한다.
이상과 같이, 최종적으로 생명을 얽어매는 그물 세공에 대한 논리는 제5장과 동일하다. 제6장은 세계나 환경에 대해 초월적인 위치에 서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정신을 다룬다. 잉골드는 도주선을 유기체의 활기 있는 모습에서 찾아내어 동물의 ‘방심’을 ‘생명에 대해 열린’ 것과 동일시하여 이것을 ‘축복’하고자 한다. 동시에 그는 동물처럼 ‘방심’하는 것을 우리 인간에게 맹목적으로 권유하지 않는다. 잉골드는 들뢰즈&가타리의 ‘동물이 되는 것’(devenir animal)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으며 또 조르주 아감벤의 ‘동물의 방심’과 ‘인간의 권태’ 간의 유사성에 관한 논의를 당연히 알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동물이 되어’ ‘방심하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태도에서 나는 잉골드 특유의 리얼리즘을 본다. 생명세계에 대한 낭만적인 동경을 언제나 표명하면서도 소박한 실재론자이기도 한 잉골드는 좋든 나쁘든 인간일 수밖에 없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세계를 움직이는 흐름으로 지각하기 위한 도구적인 방책을 다음과 같이 찾아낸다.
이것들의 차시성(此是性, haecceitas)은 우리가 지각하는 무엇이 아니다(what we perceive). 왜냐하면 유동공간의 세계에 지각의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함께 지각하는 무엇이다(what we perceive with). 요컨대 환경을 지각하는 것은 세계에서 발견될 수 있는 사물을 회고하는 것도, 고정화된 형태나 배치를 식별하는 것도 아니며, 그 사물들의—그리고 우리의—진행 중에 형성에 기여하는 물질의 흐름이나 운동에서 그 사물들과 함께 되는 것이다. (『Being Alive』88쪽)
차시성(haecceitas)은 들뢰즈의 개념인데, 여기서 잉골드는 삶을 직조하는 선 더미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what we perceive와 what we perceive with의 대비다. 그는 이를 통해 드러나는 ‘대상화하지 않음’으로서 삶의 유동을 다루고, 유동과 일체화하는 행동을 중심으로 ‘선을 그리는 방법’에 관한 논의를 전개한다.
3. 물질에 따르다.
‘살아있는 것’을 역동적ㆍ창조적인 흐름으로 다루는 많은 사상가들은 살아있는 것의 발상 형태를 미개사회의 문화, 생명세계, 그리고 예술 속에서 찾아내었다. 들뢰즈&가타리,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베이트슨과 함께 잉골드 또한 이 사상적인 경향을 공유하고 있다. Being Alive의 마지막 파트, 제5부에서 “선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으로 그는 장인이나 예술가를 모델로 한 드로잉론을 제기한다. 이 논의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잉골드가 선 그리기를 단순한 은유로서 혹은 추상적인 모델로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인 우리가 유기적인 신체를 사용해서 능동적으로 선을 그려간다는 것을 우직하게 추구한다는 점이다.
잉골드에 따르면, 살아있는 것은 스스로 선을 그린다. 이는 다만 걸으면서 남은 흔적이 선이 된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제16장에서는 중세의 사본화가, 애버리지니(Aborigine, 오스트레일리아의 선주민)의 예술, 그리고 칸딘스키의 화법(畫法)을 사례로, 그림 그리기가 화가의 머릿속의 표상을 물질세계로 투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과 세계를 진행시키는 하나의 움직임으로 묶이는 것임을 논증한다. 그리고 제17장에서는 화가, 건축가, 장인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만들기’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이제까지와 동일한 논리로 전개해간다. 비활성의 물질세계에 이미지를 투영한다는 모델을 아리스토텔레스 기원의 질료ㆍ형상 개념을 사례로 비판한 다음, ‘만들기’란 “운동 상태에 있는 세계의 살결(texture)을 찾아내어서 그 전개를 덧그림과 함께 발전해가는 어떤 목적에 부합시키면서 그 흐름을 이끄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이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앞서도 서술했던 “이러한 흐름으로서의 물질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테제가 인용된다.
제17장에서는 본래 작품의 완성 모습, 대상으로 간주하는 관점으로부터 그 이미지를 소급하여 작가라는 행위주체성(agency)의 내적 표상과 의도를 파악한다는 유추를 ‘가설적 추론’(abduction)을 통해 비판한다.
예술작품은 대상(object)이 아니라 사물(thing)이다. 예술가를 포함하여 모든 창작인의 역할은 그것이 참신할 수 있다고 사전에 마음속에 품은 아이디어를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작품의 형태를 만드는 소재의 힘과 흐름에 합체하며 그것에 따르는 것이다. 작품은 관람자를 예술가의 여정으로 안내한다. 관람자는 작품이 세계에 전개하는 모습을 작품과 함께 보는 것이며(to look with it as it unfolds in the world), 그 배후에 작품이라는 최종형태를 일으킨 원래의 의도를 독해하는 것이 아니다. (『Being Alive』216쪽)
어떻게 ‘보는/관람하는’ 것이어야 할까? 코유콘족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며 장인전문가나 예술가도 아닌 우리가 ‘선 그리기’ 전에 미리 이 관점의 전환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인가? 앞 절의 마지막에서도 확인했다시피 우선은 ‘대상’(object)으로서 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unfold라는 말에서 표현되듯이 작품이 세계에 전개하는 열려진 모습을 그에 수반하는 방식으로 보아야 한다.
이 unfold라는 말이 염두에 두는 것은 물리학자인 데이비드 봄의 논의다. 봄은 유동하는 세계의 조직을 이루는 관계성 전체가 직조되면서 은폐된 질서가 전개되는(unfold) 세계를 내장질서(implicate order)로 부르고, 표상된(imagined) 질서가 전개된 세계를 외장질서(explicate order)로 부른다. 그리고 물리학이 내장질서를 기술하고자 한다면, 항상 실제의 양자(量子)의 움직임을 이해하면서 손상시킨다는 점을 봄은 지적한다. 봄은 관찰자를 포함한 운동 전체를 기술하는 방법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잉골드는 봄과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잉골드는 사물의 묘사(description)를 논할 때 봄의 두 질서의 대비를 사용한다. 내장질서와 외장질서는 단지 대립적으로 다뤄져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드러나지 않는 내장질서를 다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잉골드는 말한다. 우리가 주시하는 어떤 현상에도 그 속에는 관계성 전체가 직조되어 있다고. 본래 현상이란 관계성 전체가 전개할 때 그 전개의 순간적인 결과다. 따라서 어떤 현상 속에서도 이 내장질서를 알 수 있는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
결국 잉골드는 유동하는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지를 논한다. 대상으로서 보지 않고 그 전개에 수반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말이지만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관찰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관점은 관찰자적으로 맹목적인 것이라고 잉골드는 단언한다. 이러한 관찰방법을 저지하는 방법으로서 잉골드가 제안한 것이 바로 ‘소묘하기’(drawing)다. 그리기 전에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묘사함으로써 보는 것이다. 잉골드는 여기서 옥외에서 풍경화를 그리는 사생 화가를 예로 든다. 화가가 이젤을 세우고 옥외에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화가는 자신이 지각하는 것을 캔버스 위에 선으로 그린다. 화가는 자신이 지각하는 너무나도 풍부한 세계, 그리고 시시각각 변하는 세계와 마주하여 그것들을 캔버스 속에 종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부분적인 이미지의 단편을 종합함으로써 실현되지 않는다. 앞서 제17장의 요약에서 다루었듯이 바로 이 세계를 조성하는 무기물과 유기물을 포함한 복수의 존재자들에 의해 생겨나는 운동을 묶어내야만 실현될 수 있다. 나아가 매우 구체적이기 때문에 유머러스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잉골드는 객관적으로 관찰하지 않기 위해서는 ‘곁눈질’로 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대화(dialogue)에 참가하는 태도에 뿌리박힌 상대적인 태도(comparative attitude)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풍경을 드로잉하는 화가의 눈의 지각과 손의 움직임, 그리고 손의 그 움직임의 흔적은 그대로 캔버스 위에 선으로 남겨진다. 이러한 그리기 방식은 보는 것을 대상화한, 즉 전치사 of의 관계가 아니라 with 혹은 along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것은 소묘하는 화가가 붓이나 목탄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옥외의 빛과 공기와 호흡하며 종종 자세를 바꿔가면서 손과 팔목 등의 자기 자신의 신체 전체의 움직임을 조정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풍경을 사생하는 화가는 바로 복수의 유동하는 것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것들과 더불어 호흡하는 자신의 신체를 조정하면서 소묘한다. 여기서 행해지는 조정은 이미 손의 움직임으로 나타나고 캔버스 위의 선으로 그대로 반영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묘사(description)와 관찰(observation)은 분리될 수 없는 일체화의 상황에 놓인다고 잉골드는 말한다.
이와 같이 잉골드의 논의에 의하면, 선으로 그리는/소묘하는 드로잉(drawing)이라는 세계에 대한 태도에 의해 움직이는 흐름의 세계를 따라가다 보면 ‘보는 것’과 ‘그리는 것’의 양자가 일거에 실현된다. 잉골드에게는 이러한 관찰과 기술의 실천이야말로 인류학(anthropology)에 다름 아니다. 다양한 예외적인 사례와 이질적인 것을 사상해서 일반화하여 법칙을 세우는 자연과학과는 대조적으로, 또 현장으로부터 퇴각하려는 이른바 안락의자의 철학자들과는 달리, 오히려 ‘이질적인 것’(the unfamiliar)에 더욱 근접해서 그것을 이질적인 그대로 묶어나가며 “이 세계에서 인간의 삶의 조건과 가능성”을 탐구하는 철학, 그것이 잉골드가 제창하는 인류학이다. 그러나 본고의 서두에서 논했다시피 인류학이 서구적 사고 혹은 근대 과학적 사고에 억압된 우리의 삶을 적절하게 고쳐나가는 기술이라면 바로 이것이 잉골드가 말하는 ‘도주선을 그리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당장 눈앞에 있는 것을 소묘하는 태도로 살펴보자. 분명 새롭게 ‘보일’ 것이다. 즉 그것은 바라보는 것도 아니며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것도 아니고 전혀 다른 ‘보임’이다. 이 ‘보임’ 속에서 삶의 움직임의 모든 것은 도주선이 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잉골드가 상정하는 존재론에서 살아있는 것들과 움직이는 것들은 모두 도주선을 달리고 있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반복적으로 확인했던 서구적 존재론, 물질관, 세계관에 의해 그리고 그것들에 기초한 제도들에 의해 삶의 역동성이 억압되어 왔다. 예를 들어 차보다 달리기가 좋다, 키보드보다 필기가 좋다는 잉골드의 지적은 삶을 회복하기 위해 알기 쉽게 설명하는 처방전과 같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바로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 속에 우리를 맹목적으로 만드는 다양한 사고와 습관에서 재빨리 빠져나가는 ‘선’을 그리는 것이다. 단지 내일부터 차를 타지 않겠다거나 컴퓨터를 버리겠다거나 하는 이외에도 적극적인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이 방법의 전개는 잉골드의 텍스트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Being Alive』의 제13장 ‘분류에 대항하는 이야기’(Stories against classification)에서 ‘지식’(knowledge)에서 제기하는 문제를 다뤄보자. 이 문제의 도식은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지식을 실체화하고 공정하게 다루는 관점 대신 운동으로서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잉골드는 전달이나 학습을 독립적인 지식을 운반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소위 ‘운송’ 모델을 비판한다. 여기서 잉골드가 염두에 두는 것은 문화의 전달뿐만 아니라 유전자의 전달도 포함하며, 그 어느 쪽도 어떤 정보가 개체로부터 개체로 수직적으로 ‘운송’된다는 계보학 모델이 채용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 계보학 모델은 분류라는 사고방식을 전제로 하며 분류 또한 지식이 개별적으로 분할되어 독립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유전자를 예로 들어보면, 눈 모양의 유전자, 머리털 색깔의 유전자로 분할되어 분류된다. 이러한 지식을 분할ㆍ독립을 통해 다루는 이해에 대해 잉골드는 ‘이야기하기’(story-telling)를 대안으로서 제시한다. 분류에서 개개의 사상은 기능이나 그 밖의 것과의 접촉에서 영향을 받지 않는 성질에 의해 ‘무언가’가 결정된다. 그러나 이야기에서는 모든 것이 ‘무언가를 하는’ 것에 의해 ‘무언가’가 제시되며, 그 이야기에서 말해진 것들과의 관계만으로는 그것이 ‘무언가’인지를 알 수 없다. 잉골드는 여기서 다시금 봄을 가지고 와 분류를 외장질서에, 이야기를 내장질서에 대응시킨다.
이러한 이야기에 의한 지식의 전달은 ‘운송’이 아니다. 이야기된 지식은 실제로 그 청자들의 나아감에 의해 비로소 전달된다. 잉골드는 이러한 이야기에서의 지식의 전달을 ‘운송’(transport)과 대비하여 ‘도주여행’(wayfaring)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우리는 지식을 계보학적 모델을 따라 선조의 유산으로서 개개가 소유하게 되는 유전적인 성질과 같은 부류로 간주할 수 없다. 분명 숙련자는 미숙련자보다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차이는 머릿속에 담긴 학습된 표상의 증가로서의 내적 내용물의 축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환경에 있는 단서를 보다 잘 포착하는 감수성과 판단과 정직함에 기초하여 이용 가능한 단서에 보다 잘 반응할 수 있는 우수한 자질에 있다. 말하자면 이 차이는 얼마만큼 알고 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알고 있는가에 있다. 잘 알고 있는 자는 말할(tell) 수 있다. 그들이 세계의 서사를 상세하게 말할 수 있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변에 있는 자들의 지각적 깨달음을 상황에 맞게 조정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아는 것은 주위의 세계와 관계를 가지는 것이며 알면 알수록 지각의 깊이와 명확함이 더욱 확장된다. 요컨대 말하기는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뒤에서 잘 따라올 수 있도록 경로를 그리는 것이다. … 대체로 이야기는 의미가 새롭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각각의 사람들에게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가 의미하는 것은 오히려 듣는 쪽이 자신의 삶의 역사의 맥락 속에 그 이야기를 위치짓는 것을 통해 스스로 발견해내는 것이다. 실제로 이야기의 의미가 명확해지는 것은 말해진 다음일 수 있다. 그때 당신 자신은 이야기가 관계하는 것과 똑같은 경로를 따르고 있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때에 비로소 이야기는 사물이 어떻게 진행되는가에 대한 경로를 알려준다. 분명 볼로시노프(Volosinov)가 언어에 대해 논한 것처럼 사람들은 사건의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안내받은 재발견”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과정을 통해 그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이 프로세스는 지형을 통해 흔적을 더듬게 된다. (『Being Alive』162쪽)
이야기하기가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그 뒤를 더듬을 수 있는 길을 그려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삶의 흐름이 수반하는 다양한 삶의 행동 또한 말해짐에 의해 이미 도주선에 들어선 것이며 게다가 다른 자들을 안내할 수 있는 여행의 길에 들어선 것이 아닐까? 잉골드는 자신의 사례들에 입각해서 그것은 산보이기도 하며 연날리기이고 하다고 말한다. 어떤 일상적인 행동 또한 이러한 도주선의 길에 수반하여 합류하게 된다. 지금까지 여러 번 확인한 것처럼, 다양한 사물들이 뒤얽혀 살아가는 세계의 흐름에 시선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동물처럼 방심할 수는 없다. 또 숙련된 장인처럼 지금 당장 살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시선을 획득할 수 있을 수는 있다. 앞서의 인용에서 잉골드가 ‘아는 것’을 지각의 명료함과 깊이와 결부시켰듯이, 또 이제까지 여러 번 확인했듯이, 우리는 세계 이해에 대한 습관화된 착오를 그 때마다 정정할 수 있도록 세계의 대상화하지 않는 지각방식을 무엇보다도 학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지각의 훈련 또한 ‘선 그리기’라는 태도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에 우리는 우선 세계 속에 선을 그리기 시작해야 한다.
4. 착지하는 도주선
지식이란 타자들이 더듬을 수 있는 길이며 그것이 이야기됨에 따라 타자들을 안내하고 또 그 안내에 따르는 타자들에게 실질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Being Alive』의 다른 장들의 내용과 합치해서 사고할 때에 더욱 의미가 깊어진다. 우리는 이 책 속에서 미개사회의 문화, 자연현상, 예술, 공예, 건축과 같은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살아가는 것’의 흔적인 도주선과 만날 수 있다. 또한 잉골드 스스로가 이 도주선을 더듬어 찾아내고 나아가 다양한 우리의 사고의 제약에서 빠져나오면서 도주선을 그리는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잉골드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우리에게 도주선의 길을 안내해준다.
잉골드의 ‘도주선’ 해석은 들뢰즈&가타리가 가진 마이너 지향을 불식시킨 결과,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어떤 부류의 회고적인 보수주의로 받아들여질 수 있고 사상적으로는 생명을 절대시하는 낙관적인 낭만주의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잉골드의 ‘도주선’ 해석의 의의는 이 지구에서, 이 스케일에서, 이 신체에서, 이 중력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인간의 입장에 철저하게 입각하여 그러한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실천 가능한 방식이 무엇인지를 말한다는 점에 있다. 그 의미에서 잉골드의 ‘선’을 둘러싼 논의는 들뢰즈&가타리와 같이 사회적 규범을 돌파해가는 경쾌함을 결여한다 해도, 일상적으로 당연한 듯이 살아가는 경험을 심화시키기 위해서 바로 그러한 경험의 깊이 속으로 바람구멍을 내기 위한 유효한 도구를 풍부하게 지시하고 있다는 것이 현 시점에서 나의 생각이다.
柳澤田美 「どのように線を描けばよいのか」 『現代思想』 2017年3月臨時増刊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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