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기원이라는 사고 그 자체에 대하여

 

 

요시카와 히로미츠(吉川浩満, 문필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누구나 관심을 갖는 질문들이다. 그만큼 이 토픽—생물종으로서의 인류의 역사—은 바람직하지 않은 여러 도그마(편견이나 선입견)에 놓여있다. 그러나 그 한편으로 최근 인류학, 고고학, 집단유전학, 진화생물학 등에서 이뤄진 몇몇 획기적인 발견은 이 도그마를 돌파할 힘을 갖는 것 같다.

 

본고에서는 인류의 역사를 둘러싼 두 개의 도그마를 다루고, 그것이 최신연구를 통해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지 그 현황에 대해 간단하게 검토하겠다.

 

덧붙이면 현재 인류연구에서는 더 이상 그러한 도그마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TV프로그램, SNS, 각종 광고, 블로그 등을 통해 원치 않아도 그 도그마를 접하지 않을 수 없다. 본고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인류연구를 일부 포함하는 우리 사회 전체에 침투하고 있는 그러한 통념이다.

 

 

첫째, 인류는 기원을 가져야 한다는 특권성의 도그마다. 간단히 말해 인류는 기원을 갖는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왜 기원이라는 말이 즐겨 사용되는 것일까?

 

생명의 탄생 이래 생물진화는 언제나 이미 “중간부터 스타트”(Daniel Clement Dennett)하고 있다. 인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많은 경우, 기원이라는 말은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처럼 영어의 origin에 담긴 유래ㆍ출자(出自)라는 함의를 살려낸 진화적 용법보다는 창세기류의 일회적ㆍ특권적인 시점을 말하는 서사적 용법에 더 힘이 실리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기원을 통해 인류의 역사가 특권적인 역사적 서사, 즉 신화에 버금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신화란 “세계의 처음 시대에 일어난 일회적인 사건을 이야기하는 서사”이다. 그에 따라 신화는 “존재하는 것을 단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이유를 기초 짓는” 것이 된다.

 

이 의미에서 기원은 과학적이라기보다 신화적인 개념이다. 만약 ‘인류’가 침팬지와 공통된 선조에서 분기한 것이 문제라면, ‘분기’ 혹은 ‘(종)분화’로 말하는 것이 정확하며, 또 오해도 적을 것이다. 물론 누구나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분기나 분화에 그 역할을 맡길 수는 없다. 분기나 분화의 개념은 “처음 시대에 일어난 일회적인 사건”으로서 그 특권성을 결정적으로 결여하기 때문이다. 서사적인 호소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결과적으로 실질적으로는 분기나 분화에 대해 서술한 문헌 혹은 기록이 기원신화의 옷을 입고 우리 곁에 당도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 서사적인 호소력에 설득당한 만큼 기원신화를 믿고 있다.

 

 

둘째, 인류의 진화는 이미 완료했다는 동일성의 도그마다. 이에 대해서도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과거의 인류든 현대의 인류든 미래의 인류든 모두 각각의 완성품인 것처럼 다뤄지는 경향이 있다. 통상의 생물진화의 스케일에 비해 개별의 인간의 생애주기는 압도적으로 짧다는, 어느 정도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언제나 이미 진행 중인 인류 진화에 대한 관심은 ‘원시인’이나 ‘미래인’과 비교하면 현저하게 낮다. 실상 사람들은 진화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두 번째 도그마는 첫 번째 도그마와 연관된다. “처음 시대에 일어난 일회적인 사건”인 기원의 개념은 인류가 그 동일성을 보유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기원 신화가 효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당대의 인류가 변화해서는 안된다. 인간이 바뀌어버리면 신화는 서사적인 호소력을 잃기 때문이다.

 

생물종과 마찬가지로 진화하는 존재로 자주 이야기되는 기업체와 유비를 시도해보자. 통상 기업의 서사에 ‘기원’이 거론되는 아니다. 기껏해야 ‘탄생’이다. 왜일까? 그것은 대부분의 기업이 신화적 존재로서 갖춰야 할 충분한 특권성과 동일성을 보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통의 기업은 범속하기 마련이다. 만약 기업이 ‘기원’과 함께 말해질 수 있으려면, 그것은 GM, 애플사, 구글 등과 같이 특권성과 동일성을 그 나름의 제국적 기업으로서 갖춘 경우에 한할 것이다. 이때 인류는 거대기업보다 중소기업이나 개인사업주에 더 가깝다.

 

그 정도로 인류의 역사는 특권성과 동일성의 도그마에 의존하는 기원신화를 필요로 한다.

 

롤랑 바르트는 『현대사회의 신화』라는 제목의 저서에서 신화란 역사가 자연으로 변환된 것이라고 논했다. 신화는 역사를 소재로 사용하면서 그 구체성을 개발하여 일정불변의 자연의 섭리로 변형시킨다. 요컨대 오늘날의 신화란 자연스러움을 갖춰가는 사회현상이라는 것이다.

 

그 의미에서 인류의 역사라는 토픽은 과학적 연구의 대상임과 동시에 현대의 신화를 구성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것은 인간의 언어활동이나 사회현상에 흥미를 가진 이들에게 전혀 무관한 토픽이 아니다. 그 신화작용을 독해하고 개발시킨 구체적인 역사를 복원해야 하는 임무가 제기된다.

 

다행히도 현대의 인류연구는 그 재료로 적격이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인류의 기원신화를 일정정도 탈신화화하는 지식체계가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생인류(호모 사피엔스)의 선조가 침팬지와 공통된 선조로부터 분기한 것은 약 700만 년 전의 일로 추정되고 있다. 분기직후의 시점에서는 도저히 우리의 일원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그들은 언제 우리의 동류가 되었을까?

 

최근 연구가 밝혀낸 바에 따르면,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상식인데, 인류는 일거에 인류가 된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인류의 특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성질들—직립이족보행, 큰 뇌용량, 언어의 사용, 인간적인 사회성 등등—은 말하자면 모자이크모양의 점차적인 획득과정을 거쳐 왔다.

 

이 하나만 보더라도 “처음 시대에 일어난 일회적인 사건”을 상정하는 기원의 개념이 얼마나 유지되기 어려운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특징들의 기원을 묻는 것에는 충분한 의의가 있다. 또 그러한 특징들 중 하나둘을 주요소재로 삼아 서사를 직조하는 것도 가능하다.)

 

나아가 인류는 직선적으로 한길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 몇 번의 갈라짐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는 생각에 이르고 있다. 지금까지 몇 종류의 ‘인류’가 등장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는데, 신종의 설정에 신중한 통합주의자로 불리는 연구자들조차 10종류를 말하고, 신종의 설정을 좋아하는 분리주의자들은 20종류로 추정하고 있다. 인류는 그만큼 수많은 ‘기원’을 거쳐 왔다는 것이며 우리는 그렇게 일어난 몇 번의 갈라짐의 과정에서 한 가지의 끝에 매달려 있는 것에 불과하다.

 

과거에 다양한 인류가 등장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복수의 인류가 동시대에 공존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점차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예를 들어 그리 멀지 않은 과거(수만년전)에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은 시간과 장소를 공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인류’라고 말하면 우리 호모 사피엔스를 가리키지만, 인류의 역사에서는 ‘우리 이외의 인류’(우치무라 나오유키内村直之)들이 공존한 시대가 호모 사피엔스의 시대보다 훨씬 길었으며, 그들이 모습을 감추고 우리만이 남은 최근의 수만 년이 예외적인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의 인류 진화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인류가 지금도 진화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캐나다의 영장류 학자인 메리 파벨카(Mary Pavelka)가 제기한 “모든 사람이 같은 수의 자식을 갖는가?”라는 수사학적 질문을 되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물론 인류 진화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우유에 포함된 락토스(유당)을 소화하는 능력의 획득을 들 수 있다. 젖을 뗀 후에도 우유를 마실 수 있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포유류는 통상 젖을 뗀 이후에는 락토스를 분해할 능력을 잃는다. 그러나 인류는 목축문화에 의해 락토스를 분해하는 유전자의 변이를 가진 자의 비율이 높아지는 경향으로 진화해왔다. 이것은 우리의 게놈이 문화적 습관에 의해 일순간(수천 년 안에) 진화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례만으로도 인류의 기원설화와 그것을 지지하는 두 가지의 도그마를 돌파하기에 충분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러한 새로운 과학적 지식체계의 보급에 의해 우리의 도그마는 머지 않아 사라지게 될 것인가? 마지막으로 이에 대한 생각을 간단하게 서술하고자 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두 도그마는 일찍이 최전선에 있었던(하지만 이제는 시대에 뒤쳐진) 지식체계가 사회통념으로서 침전된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 두 도그마는 100년 전만 해도 학계의 공식적인 교의였다. 확실히 그러한 측면이 있었다. 이 도그마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해도, 현재 최전선의 지식체계는 점차 사회전체로 확장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이야기를 끝낼 생각은 아니다. 실증적인 증거도 없고 또 어떻게 실증할 수도 알 수 없는 채로 인간에게 특권성과 동일성에 도달하는 기원신화는 매우 뿌리 깊은 휴먼 유니버설의 하나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특권성과 동일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신화 혹은 신화 그 자체로부터 자유로워진 인간사회라는 것을 나는 과문한 탓인지 알지 못한다.

 

목축문화를 통해 인류가 락토스의 내성을 얻게 된 것처럼, 과학문화를 통해 인류가 신화로부터 해방되어 예지적 존재로 되어가는 도정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오귀스트 콩트나 테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hard de Chardin, 1881~1955, 예수회사제, 고생물학자)이 꿈꾸었던 발전적 진화관이며 그 자체가 초-신화적 서사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여기서 18세기 독일에서 일었던 헤르더와 칸트의 논쟁을 떠올려보자.

 

헤르더는 『인류사의 철학고』에서 풍부한 상상력에 기초하여 당시의 과학적ㆍ인문적ㆍ종교적 지식체계를 집대성했다. 그는 자연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도 신의 현현(顯現)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했다. 말하자면 그는 자연과 역사의 발전을 통일적으로 다루는 스피노자주의적인 역사철학을 제창했다. 헤르더는 헤겔에서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Mason Diamond, 1937~)까지 근대의 인류사를 다루는 작가 모두의 선조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찬물을 끼얹은 이가 비판철학의 선조인 칸트다. 칸트는 헤르더의 인류사의 구상을 독단적 형이상학이라고 비판했다. 칸트가 문제 삼은 것은 헤르더의 스피노자주의 그 자체는 아니었다. 문제는 자연과 역사의 통합에 스피노자주의를 관철시킬 수 있을 것인가였다.

 

칸트가 내린 진단은 우리 인간은 항상 통합이 결여되어 있든지(통합론), 과잉되어 있든지(합리론), 둘 중 하나에 있다는 것이다. (그 해결방안으로서 『비판력 비판』이 쓰인 것인데, 이를 제대로 다루려면 문제가 배증되므로 여기서는 더 들어가지 않겠다.)

 

그래서 칸트에게 전략은 인류사가 기원을 필요로 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기원의 개념을 (구성적으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규제적으로(regulatively) 사용하는 것, 바로 이것이었다. 기원을 구성적으로 사용하는, 즉 그것을 그 자체로 경험적 대상으로 확장하는 것은 인류사를 신화로 전화시키는 결과에 이른다. 그 대신 경험적 영역에서 지성의 움직임의 방향을 잡아내는 것으로만 기원개념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 적용사례의 하나가 「인류의 역사의 억측적 기원」이라는 소품이다. 이 에세이에서 칸트는 기원신화는 구성적인 억측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시하면서, 그 다음으로 자유롭게 ‘억측’을 구사하여 성서를 지도로서 역사의 유람여행을 펼쳐 보인다. 그것은 헤르더의 구성적인 인류사 서사에 대한 멋진 탈구축적 비평이며, 행간에는 자크 데리다의 “유한책임사회 abc...”를 떠올리게 하는 잔혹한 유머마저 부유하고 있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것인데, 현대사회의 신화를 자연의 역사로 전환, 자연스러움을 갖춘 역사로 간주하는 바르트의 신화분석은 그러한 칸트의 분석철학의 계승이자 발전이다. 역사와 자연의 분리를 고심한 칸트를 계승하면서 신화작용에 의해 일단은 자연으로 전화된 역사를 끊임없이 그 구체성으로 되돌리는 것, 그것이 바르트의 신화분석이기 때문이다. 18세기의 비판철학자는 20세기에 신화학자로서 변신한 것이다.

 

이것은 현재 우후죽순처럼 나타나고 있는, 천년만년 단위의 인류사라는 서사에 대한 비평으로도 유효할 것이다. 여하간 폭우로 형용하기에 적절할 정도로 다수의 발견이 이뤄지고 있다. 죽순이 쑥쑥 자라는 것은 필연이며, 신화학자가 해야 할 작업은 날로 쌓여간다. 일찍이 질 들뢰즈와 하시미 시게히코(蓮實重彥)가 가르쳐주었듯이 그것은 차이와 반복(개체발생과 계통발생)의 운동을 기원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기획으로서 의의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전략이 앞으로도 유효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나는 자신이 없다. 근년의 획기적인 몇몇 과학적 지식체계는 어쩌면 헤겔의 꿈을 실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스피노자주의의 관철이 실현될지도 모르겠다. 그 여명은 비판철학=신화학은 “사라져가는 매개자”(프레드릭 제임스)로서 그 역할을 끝낸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항간에 떠도는 포스트 휴먼의 시대의 도래와 궤를 같이 한다.

 

그 까닭에 지금 인류는 시대에 뒤쳐진 도그마와 프리휴먼에 관한 실증적 지식체계와 포스트 휴먼으로의 개막의 예감 간에 노출된 붕괴감각을 맞이하고 있지 않는가?! 이것이 나의 시대진단이다. 그러나 이 불편한 심정이 반드시 불쾌한 것만은 아니다. 매일 수신되는 과학뉴스를 체크하면서 그것이 일으키는 붕괴감각을 은밀히 즐기고 있으므로.

 

 

 

 

吉川浩満 「人類の起源という考えそのものについて」 『現代思想』 2016年5月。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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