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는 ‘탈종교화’의 과정이었다
약 100년 전 독일의 고명한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는 서양근대를 합리화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세계의 탈주술화’라는 표현으로 규정했습니다. 실제로 근대가 되면 서양에서는 종교적인 권위로부터 독립한 세속적인 국가가 형성되고 자본주의 경제가 사회적으로 침투해갑니다. 또 계몽정신에 기초하여 종교적인 편견이 탈각되고 근대과학이 발전합니다. 이 모든 사실은 이제 상식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경향이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종교의 힘은 점차 약화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받아들여 20세기에는 서양근대를 ‘세속화의 시대’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화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사회학자인 피터 버거(Peter Ludwig Berger, 1929~)는 ‘세속화’라는 개념을 사회와 문화의 영역들이 종교의 제도나 상징의 지배로부터 이탈되는 과정으로 정의하고, 현대사회를 이러한 세속화의 시대로 보았습니다. 확실히 유럽에서는 기독교의 역할이 축소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21세기 이후 이러한 세속화 상황이 세계적으로 전환되기 시작합니다. 남미와 아프리카에서는 종교를 신앙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또 유럽에서도 기독교 신자의 비율이 낮은 반면 반대로 이슬람교도의 숫자는 증가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미국에서는 주류파 프로테스탄트는 감소하고 있지만 원리주의적인 복음파 신도는 오히려 증가하는 경향에 있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은 이러한 상황을 검토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명합니다.
21세기 초두에 나타난 종교의 회귀현상은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200년 이상 지속되어온 사회통념〔세속화 이론〕을 깨고 있다.
그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이 2001년 9월 11일에 발생했습니다. 근대세계(글로벌 금융자본)의 중심지인 뉴욕에서 근대건축을 궁극에까지 구현했던 세계무역센타 건물에 이슬람교 원리주의의 테러리스트들이 공격을 가한 것입니다. 그 직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부시는 부주의하게도 ‘십자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기독교 대 이슬람교라는 대립구도를 내세웠습니다. 그 후 이러한 이슬람교 신자에 의한 대규모적인 테러리즘이 전세계적으로 빈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사회는 오히려 ‘포스트세속화의 시대’라 불리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요? 종교의 역할이 점차 축소되고 있다는 기존의 세속화 이론은 유럽의 기독교에 대해서 타당하다 할지라도, 세계전체를 생각하면 종교로의 회귀현상이 현저해지고 있습니다. 베버가 근대를 규정할 때에 ‘세계의 탈주술화’를 제창했다고 한다면, 현대에서는 오히려 ‘세계의 재주술화’가 일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계의 ‘탈주술화’인가 아니면 ‘재주술화’인가—현대사회는 바로 이 분기점에 서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현대사회의 어려움은 이 양자가 명확하게 분할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얽어매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그에 담긴 문제를 생각하고 미래를 전망해보겠습니다.
이성적으로 종교를 생각하다
1985년 독일의 철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는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한 포스트모던 사상을 비판하기 위해 근대(모던)의 의의를 재검토하며 『근대의 철학적 딜레마』를 출간합니다. 그 책의 서두에서 그는 막스 베버의 ‘합리화’ 개념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막스 베버에게는 그가 서양적 합리주의라고 이름붙인 것과 근대 사이에 어떤 내재적 관계, 즉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는 관계는 여전히 자명한 것이었다. 그가 <합리적>이라는 개념 하에서 기술한 것은 유럽에서 종교적 세계상이 붕괴하고 그 강력한 세속문화가 발생하는 탈주술화의 과정이기도 했다. 근대의 경험과학들, 자율을 획득한 예술, 또 원리를 기반으로 하는 도덕 및 법의 이론들과 함께 이 문화적 가치영역들이 형성되어 왔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이러한 서양근대의 합리화 과정은 지금까지도 미완성이므로 ‘커뮤니케이션적인 합리성(이성)’의 관점에서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 때문에 일반적으로 하버마스는 ‘근대’파 철학자로 분류되고 있으며 그 철학에는 종교적인 요소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고 생각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21세기에 이르러 하버마스 철학이 크게 방향전환을 합니다. 지금까지 근대적인 세속화론자라고 간주되었던 그가 놀랍게도 종교와의 대화를 시도한 것입니다. 왜 하버마스는 이러한 사상적 전환을 꾀한 것일까요?
아마도 그 원인 중 하나는 20세기 말에 생명과학이나 뇌과학 등이 ‘자연주의’를 강력하게 내세우며 인간의 인격이나 정신의 이해를 오도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두려움일 것입니다. 근대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 또한 자연계의 일원이며 그 인격과 정신을 자연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연주의’적 이해를 하버마스는 거부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그가 기독교와 만나게 되는 근거가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포스트세속화론적 전회’라 부르겠습니다.
2004년에 하버마스는 기독교 신학자인 요제프 라칭거(Joseph Aloisius Ratzinger)와 대화를 시도하고, 그 이듬해에 공저로 책을 출간합니다. 라칭거는 2005년부터 2013년까지 로마 교황 베네딕트 16세를 지냈기 때문에 이 대화는 매우 역사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기독교도와 근대와의 만남). 그 책에서 하버마스는 클라우스 에더(Klaus Eder, 1946~, 독일의 사회학자)의 ‘포스트세속화의 사회’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점차 세속화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종교가 계속해서 자기주장을 전개하며 앞으로도 당분간 사회가 종교적 공동체의 존속을 각오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지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포스트세속화’라는 표현은 종교적 공동체가 자신이 원하는 동기와 태도의 재생산을 행하는 기능에 공적인 감사를 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포스트세속화의 사회에서는 신앙을 가지지 않은 시민들이 신앙을 가진 시민들과 정치적으로 접촉하는 그 교류의 방식에서 중요한 규범적인 사고가 공공의 의식에도 반영되고 있다. (중략) 종교 측에서도, 세속 측에서도, 이 양자가 사회의 세속화를 상호보완적인 학습과정으로 이해한다면 공공의 장에서 논쟁되는 다양한 테마에 대해 상대로부터의 기여를 인식상의 이유에서 서로 진중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이와 같이 ‘세속화의 변증법’의 결과로서 하버마스는 현대를 ‘포스트세속화 사회’로 다루고 이성과 종교와의 화해를 기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 입장은 이전의 하버마스 철학으로 말한다면, 참으로 보수적인 해결법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버마스의 이 전회를 어떻게 평가한다 해도 ‘세속화—포스트세속화’ 문제가 현대의 긴급한 테마라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다문화주의에서 종교적 전회로
하버마스는 현대사회를 이해할 때에 ‘포스트세속화’라는 개념을 제창하고 근대적인 세속주의가 간과한 문제를 경고합니다. 그러나 본래 세속화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하는 것일까요? 세속화를 다르게 이해하게 되면 ‘포스트세속화’에 대한 이해도 달라지겠죠. 그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 캐나다의 철학자인 찰스 테일러(Charles Margrave Taylor, 1931~)가 2007년에 출간한 대작 『세속의 시대』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테일러에 대해 말하면, 1970년대부터 시작된 리버럴리즘 논쟁 시 코뮤니타리얼리즘(공동체주의)의 입장에서 리버럴리즘ㆍ리버타리아니즘을 함께 비판했습니다. 그 후 90년대에 이르러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의 대표적 논자로서 활발한 논의를 전개해왔습니다.
그런데 21세기가 되어 테일러는 ‘종교적 전회’를 꾀합니다. 본래 가톨릭 신자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지금까지 거의 거론하지 않았던 종교의 문제와 정면으로 부딪힌 것입니다. 하버마스와 마찬가지로 아마도 시대 상황이 테일러에게 ‘종교적 전회’를 재촉한 것이 아닐까요?
테일러에 따르면, ‘세속성’이라는 개념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국가와 종교 간의 분리, 즉 정치와 종교 간의 분리입니다. 이에 따라 종교는 ‘사사화(私事化)’됩니다. 또 하나는 신앙의 쇠퇴, 즉 사적 영역으로 종교가 쇠퇴해갑니다. 그에 대해 테일러가 착목한 ‘세속성’은 제3의 의미를 갖는데, 이것은 신앙의 조건의 변화라고 생각됩니다. 이 제3의 의미의 ‘세속성’과 관련하여 테일러는 『세속의 시대』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시도하는 것은 우리 사회를 이 제3의 의미에서의 세속적인 사회로 검토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여기서 내가 그 특징을 명확하게 하고 검토하려는 것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던 사회로부터, 단호하게 신앙을 갖는 신자에게도 단순한 하나의 선택지에 불과하게 된 사회로의 변화이다. (중략)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은 이미 자명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선택지에 불과하다. 그리고 아마도 이 속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환경에 따라 신앙을 이어가는 것이 곤란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속성’의 변화를 생각하기 위해 테일러는 서양근대의 500년을 대상으로 분석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서기 1500년 무렵에는 신을 믿지 않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에 비해 2000년에는 신을 믿지 않는 것이 용이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불가피하기조차 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할까요?
테일러가 이 질문을 제기할 때에 염두에 두었던 것은 표현주의 혹은 표현혁명이라고 불리는 현대의 상황입니다. 테일러에 따르면, 이것은 ‘자기 자신의 본래적인 삶의 방식, 표현의 방식’을 원리로 삼고 있으며, 패션으로 대표되는 소비중심사회와도 연결됩니다. 이 입장에서 말하면, 신앙은 자신의 본래의 삶의 방식을 영위하기 위한 하나의 선택지입니다.
주의해야 하는 것은 테일러가 현대의 ‘세속성’을 설명할 때에 신앙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확실히 표현주의의 입장에서는 제도적 종교는 쇠퇴하고 있지만, 개개인의 내면과 연결된 종교는 삶의 방식의 하나의 선택지로서 새롭게 모색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현대사회에서 ‘신종교’가 적극적으로 추구되는 이유가 숨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테일러는 『오늘날의 종교의 모습들』(2002년)에서 구체적인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방향을 따라가면 비기독교적인 종교, 특히 동양에 기원을 두는 종교의 부흥이 있으며, 뉴에이지형의 다양한 활동양태 그리고 인간주의적 환경과 영적인 것 간의 경계를 가교하고자 하는 견해들, 혹은 영적인 치료와도 연결되는 실천 등의 폭발적인 증대가 있다. 나아가 점차 많은 사람들이 예전이라면 채용하기 어려운 입장으로 간주된 것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자신을 가톨릭이라고 자인하면서 그 교의의 중핵적인 많은 부분들을 거부한다. 혹은 기독교와 불교를 조합한다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신앙의 유무를 확신하지 못한 채 기도를 올린다.
이렇게 보면 ‘세속의 시대’라고 해도 테일러가 단순히 종교의 쇠퇴설을 주장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간파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테일러의 ‘세속화’ 논의는 하버마스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서양지역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속화’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세계전체를 시야에 넣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최근 이슬람교 원리주의의 돌출적인 행동을 주시하면 서양에 한정된 논의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세속화론에서 탈세속화론으로
글로벌한 시점에서 세속화와 ‘포스트세속화’의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피터 버거의 논의를 검토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현대세계를 이해할 때에 버거 자신이 세속화론으로부터 탈세속화론으로 입장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버거는 왜 그랬을까요?
우선 1967년에 발표한 『성스러운 덮개—신성세계의 사회학』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세속화를 ‘사회와 문화의 영역들이 종교의 제도와 상징의 지배로부터 이탈하는 과정’이라고 규정하고 베버와 마찬가지로 서양근대를 세속화 과정이라고 보았습니다. 버거는 그 세속화론을 후년에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세속화’론이라는 용어는 1950년대와 1960년대 이후의 저작과 관련되는데, 그 개념의 열쇠를 생각하면 실제로 계몽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 생각은 단순하지 않다. 즉 근대화는 필연적으로 사회와 개인의 마음에서 종교의 쇠퇴를 이끌어낸다.
그런데 20세기 말이 되면 버거는 이러한 ‘세속화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1999년에 논집 『세계의 탈세속화—부활하는 종교와 세계정치』를 편집하는데, 그 책의 권두논문에서 이전의 ‘세속화론’이 잘못되었음을 명확하게 선언합니다. 버거는 미국이나 유럽만이 아니라 세계전체의 글로벌한 시점에서 보면 종교적 원리주의와 같은 탈세속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나의 논점은 우리가 세속화된 세계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가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예외가 있다 해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광폭하리만치 종교적이다. 이것은 역사가들과 사회과학자들이 ‘세속화론’이라고 딱지 붙인 연구 문헌의 상당 부분이 본질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의미한다. 나의 초기 저작은 그러한 연구들에 기여한 바가 있다.
버거는 세속화를 생각할 때에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인 의식의 차원의 두 차원을 구별하는데, 이 두 차원의 관계는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종교적인 조직이 쇠퇴한다 해도 개인의 신앙은 여전히 강한 경우가 있으며, 그 반대로 개개인이 종교적인 신앙을 갖고 있다 해도 종교적인 조직이 사회적ㆍ정치적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하간 ‘종교와 근대 간의 관계는 복잡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통찰은 현대세계를 살펴볼 때에 매우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모든 주류파의 프로테스탄티즘은 쇠퇴하고 있지만 그에 반해 복음주의는 융성하고 있습니다. 또 로마 가톨릭은 비서양지역에서 열광적인 신자들를 양산하고 있습니다.
소비에트연방의 붕괴 이후 러시아정교회가 부활했고 민중들 틈에 침투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유대교, 힌두교, 불교 등도 소멸하기는커녕 더욱 강력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것이 이슬람교의 원리주의 운동이겠지요.
확실히 유럽에 한정해서 말하면 세속화가 진행되어 기독교의 역할이 축소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이외의 지역에서는 세속화는커녕 오히려 탈세속화의 거센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세계는 어디로 향해가는 것일까요? 그 대답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岡本裕一朗、2016年、「近代は「脱宗教化」の過程だった」『いま世界の哲学者が考えていること』、ダイアモンド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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