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주의적 전회란 무엇인가?

 

마음을 소거할 수 있을까?

 

‘신실재론’의 가브리엘은 현대의 자연주의적인 철학의 경향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그렇지만 과학에 기초한 자연주의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또 하나의 포스트 ‘언어론적 전회’인 인지과학적인 ‘자연주의적 전회’를 다뤄보겠습니다.

 

우선 그 특징적인 경향을 알기 위해 캘리포니아 대학 샌프란시스코캠퍼스 교수인 폴 처치랜드(Paul Churchland, 1942~)의 논문 「소거적 유물론과 명제적 태도」(1981년)를 살펴보겠습니다. 그 논문에서 그는 ‘소박심리학’이라고 불리는 심리에 대한 상식적인 사고를 비판하고 신경과학 등의 인지과학적인 이론으로 대체하고자 합니다. 처치랜드의 주장을 살펴보기 전에 ‘소박심리학’이 무엇인지를 확인해두겠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보통 인간은 놀라우리만치 용이하게 그리고 수미일관되게 타자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측할 수도 있다. 그러한 설명이나 예측의 경우에 우리는 표준적으로 행위자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욕구, 신념, 공포, 의도, 지각 등으로 언급한다. 그러나 설명은 법칙을—적어도 대략적인 법칙을—전제로 삼는다. (중략) 이 지식의 총합체를 그 본성과 기능을 고려한다면 ‘소박심리학’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 심리학이 ‘소박심리학’으로 불리는 것은 학문적으로 형성된 심리학이 아니라 인간이 유년시절부터 길들여진 타인과 자신의 마음에 관한 이해이기 때문입니다. 처치랜드는 이 ‘소박심리학’에 대해 그 원리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비판하고 그 대안을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자연지(自然誌)와 동물과학의 관점에서 호모 사피엔스에 접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조성(組成), 발달, 행동능력에 관해 소립자물리학, 원자ㆍ분자이론, 진화론, 생물학, 생리학, 그리고 유물론적인 신경과학을 포함하는 정합적인 서사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중략) 우리는 이제야 인류사에서 가장 위대한 이론적 총합을 파악했고, 그 일부는 이미 인간의 감각입력, 신경활동, 그리고 운동제어에 관한 면밀한 기술과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처치랜드가 이 논문을 썼을 때에 신경과학은 아직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았고 또 희망적 예측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뇌과학과 인공지능연구 등의 발달에 의해 더 구체적인 논의가 전개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지과학—뇌과학에서 마음의 철학으로』(1995년)에서 처치랜드는 다소 흥미로운 이야기를 합니다.

 

뇌는 어떻게 작동되는 것일까? 어떻게 뇌는 사물을 생각하고 느끼고 꿈을 꾸는 자아를 유지하고 자기의식을 가진 사람의 지주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신경과학 혹은 최근의 인공 뉴럴 네트워크 연구에서 얻은 새로운 성과는 바로 이러한 문제에 일군의 통일적인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중략) 이 책의 집필 동기는 무엇보다도 지금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는 추상과 오랜 세월의 비밀에 관한 새로운 설명의 가능성을 목전에 두고 내가 흥분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다만 이것은 나 한 사람에 한정되지 않는다. 지금 몇몇 학술분야는 고양되는 분위기로 넘쳐난다.

 

이와 같이 처치랜드에 따르면, 신경과학과 정보과학, 인공지능연구 등의 학술적인 인지과학의 융성에 의해 지금까지 비밀에 쌓여있던 ‘마음’에 대한 이해 가능성이 크게 확장되기 시작했습니다.

 

 

확장된 ‘마음’

 

처치랜드의 ‘인지과학론적 전회’와 협력하면서 새로운 길로 향해가는 이가 있었으니 에딘버러대학 교수인 앤디 클라크(Andy Clark)입니다. 클라크는 1998년에 데이비드 차머스(David John Chalmers)(『의식하는 마음』의 저자)와 공저로 논문 「확장한 마음」을 발표하고, 마음에 관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합니다.

 

인간은 외적인 존재와 두 방식의 상호작용으로 연결되어 있고, 하나의 통일적인 시스템을 만들어낸다. 그 시스템은 독자의 인지 시스템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 시스템의 성분들은 능동적인 인과적 역할을 맡고 있으며 통상의 인지와 동일한 종류의 방식과 연동되어 행동을 지배한다. 만약 외적인 성분이 제거된다면 뇌의 일부를 제거할 때와 마찬가지로 시스템의 행동적인 능력이 저하될 것이다. 우리의 테제에 의하면 전체적으로 머릿속에 있든지 없든지 간에 이렇게 연결되고 통일된 과정은 인지과정과 완전히 똑같은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여기서 클라크와 처치랜드가 주창하는 것은 ‘마음’을 머릿속에 가두지 않고 오히려 신체와 그 주변 환경과의 상호연관에서 이해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즉 논문의 제목에도 나와 있다시피 ‘확장된 마음’이라는 테제입니다. 이러한 입장을 그들은 능동적 외재주의라고 부릅니다. 마음의 존재방식이나 움직임을 머릿속에 가두는 ‘내재주의’가 아니라 자신의 신체나 주변 환경과 연결짓고 움직이는 ‘외재주의’인 것입니다.

 

얼핏 보면 ‘마음’을 외부로 확장시킨다는 것이 낯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계산할 때를 생각해보면,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한 자릿수 덧셈이나 뺄셈이라면 머릿속에서 처리할 수 있지만, 세 자릿수나 네 자릿수가 되면 종이와 연필을 사용해서 계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즉 계산한다는 ‘마음’의 움직임은 종이와 연필, 그리고 쓴다는 신체의 움직임으로 운동해야 비로소 가능하게 됩니다. 이 점을 확인해두고 앞서 인용한 문장을 읽으면 그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이해될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기초하여 클라크는 1997년에 『나타나는 존재』를 출간합니다. 원제는 ‘Being There’인데, 이 말은 하이데거가 1927년에 출간한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의 존재방식에 대한 표현으로 제시한 독일어(Dasein ‘현존재’)의 영역(英譯)입니다.

 

그러므로 클라크의 책은 바로 인간의 존재방식(현존재)을 재검토하는 것입니다. 부제가 말해주듯이 인간의 ‘뇌와 신체의 세계’를 연결짓는 시스템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사고의 의의를 클라크는 다음과 같이 역설합니다.

 

뇌는 신체화된 활동의 컨트롤타워라고 생각한다 해도 그 이상의 성과는 없다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조금의 시점의 전환은 마음의 과학을 구성해가는 데에 큰 영향을 준다. 실은 이를 통해 지적행동에 대한 사고방식을 전면적으로 쇄신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고방식을 버릴 필요가 있다. (데카르트 이후 일반화된) 마음의 영역과 신체의 영역의 구별. 지각/인지/행위를 정연하게 분할하는 선. 고차원적인 차원의 추론을 작동시키는 뇌의 집행중추.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고와 신체화된 행위를 인위적으로 분리하는 연구방법을 버릴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새로운 마음의 과학이다.

 

이러한 클라크의 논의는 인간이나 환경, 그리고 사회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뒤집습니다. 즉 그가 제기한 사고는 철학에 대한 새로운 시점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도덕을 뇌과학으로 설명하다

 

철학의 ‘자연주의적 전회’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방향을 살펴봅시다. 그것은 조슈아 그린(Joshua Greene)의 연구입니다. 이 연구에 대해서는 3장에서 더 구체적으로 다루겠지만, 여기서 잠깐 그의 연구 활동을 살펴보면 철학은 드디어 심리학이나 뇌과학과 밀접하게 연계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대학ㆍ대학원 시절 그는 아마르티아 센(Amartya Kumar Sen, 1933~, 인도출신의 경제학자)과 피터 싱어(Peter Albert David Singer, 1946~)라는 저명한 철학자 밑에서 수학했습니다. 그 후 그는 심리학자의 길에 들어섰고 뇌과학의 방법을 습득하여 뇌가 어떻게 ‘마음’이 되는가를 해명하게 됩니다.

 

그린을 일약 유명하게 만든 것은 이른바 ‘광차문제(trolley problem)’라고 하는 두 선택지에 관한 사례에 대해 MRI를 사용한 뇌화상법으로 접근한 것입니다. 다섯 명을 살릴 것인가, 한 명을 살릴 것인가라는 같은 문제인데도 상황이 바뀌면 판단이 달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광차문제’에서 반복적으로 논의되어왔습니다. 이에 대해 그린은 뇌화상법을 통해 뇌가 움직이는 장소가 어떻게 달라지는 가를 명확하게 드러냈습니다.

 

그린의 연구가 획기적인 것은 선함과 악함이라는 도덕적인 판단이 뇌의 어떤 구조나 움직임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실증적인 방식으로 논증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금까지 논한 도덕문제가 뇌과학에 의해 실증적으로 해명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고에 대해 철학자들은 강한 비판을 쏟아냅니다. 그린이 출간한 『모랄 트라이브즈(Moral Tribes)』(2013년)에 대해 뉴욕대학 교수인 토마스 내겔(Thomas Nagel)이 서평을 썼는데, 그 제목이 「당신은 뇌스캔으로는 도덕에 대해 배울 수 없다—도덕심리학의 문제」로 매우 도전적입니다. 내겔은 그 서평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린은 우리를 도덕심리학이 도덕철학보다 근본적이라고 설득하고자 한다. (중략) 그린은 어떤 낡은 문제와 격투를 벌이고 있지만 그의 심리학적 접근방법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린의 연구가 도덕철학에 준 충격은 상상 이상입니다. 왜냐하면 이 연구를 계기로 ‘뇌신경윤리학(neuroethics)’이라는 학문이 크게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호주의 철학자인 닐 레비(Neil Levi)가 2007년에 출간한 『뇌신경윤리학—21세기에의 도전』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린의 연구 이후 도덕을 신경과학으로 설명하는 연구가 명확하게 제기된 것입니다.

 

나아가 다른 연구 분야로 확장된 것도 확인해두어야겠습니다. 『모랄 트라이브즈』에서도 언급됐지만, 그린의 연구는 노벨상 경제학자인 다니엘 카네만의 ‘행동경제학’과도 연결됩니다. 뇌화상법을 통해 인간의 경제행동이 어디까지 설명 가능한 것일까요? 이러한 ‘신경경제학’은 ‘신경윤리학’과 마찬가지로 아직까지는 초보 단계에 머물고 있지만 그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 확장은 경제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활동, 심적인 움직임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현재는 아직 그 맹아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구체적인 과학적 연구와 협동하여 크게 비약하지 않을까요?

 

 

20세기 이후의 철학의 동향

 

 

岡本裕一朗、2016年、「自然主義的転回とは何か」『いま世界の哲学者が考えていること』、ダイアモンド社。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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