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오카모토 유이치로의 2016년 9월에 출간된 『지금 세계의 철학자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서 몇몇 부분들을 번역해올리겠다. 대중서인지라 내용이 그렇게 깊지는 않지만지금 학문의 세계에서 주요하게 제기되고 있는 논점들을 잘 정리해놓은 것 같다. 다음의 이 글은 '실재론'의 흐름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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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론적 전회란 무엇인가?

 

 

21세기의 시대정신이란?

 

21세기에 이르러 포스트 ‘언어론적 전회’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활동이 바로 ‘실재론적 전회’라고도 불리는 조류입니다. 그런데 이 조류는 젊은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아직은 번역서도 많지 않고 또 전체상도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소개의 의미로서 그 성립과정을 다루고자 합니다.

 

마우리치오 페라리스(Maurizio Ferraris, 1956~, 이탈리아의 철학자)의 『신실재론입문』(2015년)에 따르면, ‘실재론적 전회’가 분명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은 퀑탱 메이야수의 『유한성 이후: 우연성의 필연성에 대한 시론』(2006년)입니다. ‘이 책이 출판되고 2년 후에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운동, 즉 사변적실재론의 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 운동에 참가한 주요 멤버는 메이야수 자신과 3인의 사상가들(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 1968~, 미국의 철학자), 이안 해밀턴 그랜트(Iain Hamilton Grant, 영국의 철학자), 레이 브라시에(Ray Brassier, 1965~, 영국의 철학자))입니다. 그들의 논의에 대해서는 2011년의 논문집인 『사변적 전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운동과는 별도로 페라리스 자신과 독일의 마르쿠스 가브리엘 등에 의해 전개되는 ‘신실재론’이라 불리는 운동도 있습니다. 가브리엘의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2013년)에 따르면, “신실재론은 이른바 포스트모던 이후의 시대를 말해주는 철학적 입장을 기술한다”고 합니다. 페라리스는 이를 수용하여 2012년에 『신실재론 선언』을 저술하고 그 입장을 간결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페라리스의 이력을 살펴보면, 그는 이탈리아의 포스트모던적인 사상가인 잔니 바티모(Gianni Vattimo, 1936~) 밑에서 수학했습니다. 바티모의 철학은 ‘약한 사고’로 표현되는데, 그 모든 것은 해석이라는 니체의 사상과 가다모의 해석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페라리스에 따르면, 이러한 바티모 밑에서 배울 때에도 “나(페라리스)의 입장은 언제나 실재론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브리엘과 함께 ‘신실재론’을 선언한 것도, 입장의 선회라기보다는 지금까지의 사상을 명확하게 드러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변적실재론’이든 ‘신실재론’이든 현재 구태여 ‘실재로의 전회’를 의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목할만한 것은 실재론적 전회를 주창하는 사상가들이 두 가지 중요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는 그들 모두가 ‘포스트모던 이후’를 분명하게 표명한다는 것입니다. 20세기 말에 유행한 포스트모던 사상에 대해 그 종언을 고한다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포스트모던 사상을 역사적으로 보다 넓은 시야에서 다시금 다룬다는 것입니다. 실재론자들에 따르면, 포스트모던의 정점을 찍었던 언어론적 전회는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미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페라리스는 이에 대해 ‘푸칸트(푸코+칸트)’라는 농담 섞인 말로 표현했습니다.

 

나아가 이 전통은 어떤 의미에서는 근대철학의 창시자인 데카르트까지 거슬러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페라리스는 ‘데칸트(데카르트+칸트)’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푸칸트’라는 말도 ‘데칸트’라는 말도 존재는 사고에 의해 구축된다고 하는 ‘구축주의’를 희화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구축주의가 20세기 말의 포스트모던 사상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21세기를 맞이할 즈음에는 포스트모던의 유행도 종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재론적 전회는 그것을 사상적으로 매장하고자 했습니다. 그 의미에서 페라리스가 말한 것처럼 현대의 실재론적 조류를 ‘시대정신’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하는 것은 실재론적 전회라고 해도 하나로 묶여지는 것이 아니고 각각의 논자에 따라 내용이 제각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자들의 논의를 각각 다루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기서는 사변적 전회를 이해하는 첫걸음으로서 젊은 ‘스타’인 메이야수와 가브리엘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의 소멸 이후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20세기 후반(70년대 이후), 푸코, 데리다, 들뢰즈 등 프랑스의 현대 사상가들이 미국에서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21세기가 되면 그러한 거장들도 사라지고 사상적 카리스마가 부재하게 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사상적 히어로로서 등장한 이가 퀑탱 메이야수입니다. 현재 파리제1대학에 준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1967년생으로 아직 젊을 뿐만 아니라 30대에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2006년에 출간된 메이야수의 『유한성 이후』는 ‘사변적실재론’ 운동을 촉발시켰습니다. 이 책에 대해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인 알랭 바디우는 다음과 같은 상찬의 말을 서문에 싣습니다.

 

지금까지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역사를 사고해왔던 철학의 역사 속에서 퀑탱 메이야수가 새 장을 열어주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중략) 주목해야 하는 이 ‘비판철학의 비판’은 이 책에서 어떤 과잉의 수사도 달지 않고 각별히 명석하고 논증적인 문체로 본질을 파고들고 있다.

 

이러한 바디우의 추천사 때문인지 메이야수는 일약 현대사상계의 중심으로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그는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요? 그의 기본적인 시좌(視座)는 칸트 이후 근대철학의 중심개념이 ‘상관(相關)’에 있다는 통찰에 있습니다. 그 의미를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가 ‘상관’이라는 말로 불러들이는 관념에 따르면, 우리는 사고와 존재의 상관에만 접근할 수 있으며 한쪽만으로는 접근할 수 없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그렇게 이해되는 상관을 넘어서기 불가능한 성격을 인정한다는 사고의 모든 경향을 상관주의라고 부르겠다. 그리하여 소박한 실재론을 바라지 않는 모든 철학은 상관주의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메이야수에 따르면, 이러한 ‘상관주의’는 20세기의 현상학이든 분석철학이든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언어론적 전회와 포스트모던 사상도 예외가 아닙니다. 메이야수는 이러한 상관주의를 넘어서서 사고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로 향해갑니다. 그 의미에서 실재론을 목적지로 삼는 것이지만, 앞서의 ‘소박한 실재론’과는 구별됩니다. 오히려 그가 ‘실재’로 생각하는 것은 수학이나 과학에 의해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 입장을 메이야수는 ‘사변적 실재론’이라고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되묻습니다.

 

칸트 이후 (중략) 대체 왜 철학은 초월론적 혹은 현상학적인 관념론과는 반대의 길을, 즉 수학이 가진 비-상관적인 영역을—바꿔 말하면 사고를 탈중심화하는 힘으로서 정당하게 이해되는 과학적 사실 그 자체를—이해할 수 있는 사고의 길을 가지 않은 것일까? 철학은 왜 과학을 사고하기 위해 사변적 유물론으로 단호하게 향해가지 않고—그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앞서 서술한 것처럼 초월론적 관념론에 주력하게 된 것일까?

 

인간의 사고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를 사고하기 위해서 메이야수는 인류의 출현 이전의 ‘선조이전성’을 문제로 삼거나 혹은 인류의 소멸 이후의 ‘가능한 사건’을 상정합니다. 이것들은 ‘인간으로부터 분리 가능한 세계’로서 과학적으로는 충분히 고찰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상관주의’는 그러한 이해를 외면해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메이야수에 따르면, 칸트의 초월론적 관념론(인식론적 전회)도, 20세기의 언어론적 전회도, 포스트모던 사상도 상관주의에 다름 아니라고 비판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메이야수의 철학은 이제 겨우 기본적인 시점(視點)을 제시한 것에 불과하고 앞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사상을 전개해나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차후의 논의를 기대해봐야겠습니다.

 

 

‘신실재론’과 독일적인 ‘정신’의 부활?

 

마치 메이야수의 ‘사변적실재론(유물론)’에 호응하듯이 독일에서도 ‘실재론적 전회’가 제창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마르쿠스 가브리엘이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1980년생이며 아직 30대 중반이지만 현재 본 대학의 교수로서 발표한 저서만도 이미 수십 권에 이르며 종종 ‘천재’라고 평해지고 있습니다.

 

2013년에 출간된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는 철학서로서는 이례적으로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가브리엘의 재능을 일반인들에게도 알려주었습니다. 이 책은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전문서라기보다는 일반 독자들을 위한 저작인데, 그의 ‘신실재론’의 구상이 매우 간결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 책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에서 가브리엘은 ‘신실재론’을 ‘포스트모던 이후의 시대에 대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가브리엘에 따르면, 포스트모던의 문제점은 ‘구축주의’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축주의’의 원천은 메이야수와 마찬가지로 칸트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칸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세계를 그 자체로 알 수 없다. 우리가 무엇을 알고자 해도 그것은 어떤 점에서 항상 인간에 의해 가공된 것이라고 칸트는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를 설명하기 위해 가브리엘은 클라이스트의 ‘녹색의 안경’(메이야수의 전회(turn) 부분에서 전술)의 예를 끌어온 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구축주의는 칸트의 ‘녹색의 안경’을 믿는다. 여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우리가 몸에 길들이는 것은 단 하나의 안경만이 아니라 수많은 안경이다. 과학, 정치, 사랑의 언어게임, 시, 다양한 자연언어, 사회적인 규약 등이다.

 

이러한 포스트모던적인 ‘구축주의’에 대해 가브리엘은 ‘신실재론’을 제창하는 것인데요, 그것은 어떤 사상일까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가브리엘이 제창한 구체적인 예를 다뤄보겠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말합니다.

 

아스트리드(Astrid)가 소렌토에서 베수비오스 산을 바라보는 것에 비해 우리(너와 나)는 나폴리에서 베수비오스 산을 바라보고 있다.

 

우선 낡은 실재론(이것을 가브리엘은 형이상학이라고도 부릅니다)에 따르면,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베수비오스 산뿐입니다. 이것이 어떤 때는 소렌토에서, 또 어떤 때는 나폴리에서 우연하게 보일 뿐입니다. ‘구축주의’의 입장에서는 세 개의 대상, 즉 ‘아스트리드의 베수비오스 산’ ‘너의 베수비오스 산’ ‘나의 베수비오스 산’만이 있습니다. 그것을 넘어서 대상과 물(物) 그 자체가 있지 않습니다.

 

그에 반해 가브리엘이 주창한 ‘신실재론’은 적어도 네 개의 대상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① 베수비오스 산 ② 소렌토에서 보이는 베수비오스 산(아스트리드의 관점) ③ 나폴리에서 보이는 베수비오스 산(너의 관점) ④ 나폴리에서 보이는 베수비오스 산(나의 관점)입니다. 그는 이것들 모두가 존재한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화산을 볼 때 느끼는 나의 비밀스런 감각조차도 사실’이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가브리엘에 따르면, 한쪽의 낡은 실재론은 ‘보는 사람이 없는 세계’만을, 다른 한쪽의 구축주의는 ‘보는 사람의 세계’만을, 각각 현실로 간주합니다. 그에 대해 가브리엘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자신의 ‘신실재론’을 정당화합니다. “세계는 보는 사람이 없는 세계뿐일지라도 보는 사람의 세계만도 아니다. 이것이 신실재론이다.”

 

이와 같이 가브리엘의 ‘신실재론’은 물리적인 대상뿐만 아니라 그에 관한 ‘사상’ ‘마음’ ‘감정’ ‘신념’, 나아가 상상 속 동물과 같은 ‘공상’조차도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실재론’의 일반적인 메이야수와는 조금 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브리엘은 이렇게 존재하는 대상을 확장시킴으로써 무엇을 얻으려 한 것일까요?

 

그에 대해서는 2015년에 출간된 『나(자아)는 뇌가 아니다—21세기를 위한 정신과학』이라는 타이틀이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 책에서 가브리엘은 정신을 뇌로 환원하는 현대의 ‘자연주의’적 경향을 비판합니다. 그러한 ‘자연주의’에 의하면 존재하는 것은 물리적인 물(物)이나 그 과정뿐이며, 그 이외에는 독자의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가브리엘의 ‘신실재론’은 그것을 원리적인 차원해서 재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실재론이라고 할 때, 어쩌면 과학적인 대상만이 존재한다고 간주하는 ‘자연주의’가 상정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브리엘이 구상하는 ‘신실재론’은 그러한 과학적인 우주뿐만 아니라 마음(정신)의 고유한 움직임도 긍정합니다.

 

 

 

岡本裕一朗、2016年、「実在論的転回とは何か」『いま世界の哲学者が考えていること』、ダイアモンド社。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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