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미즘

 

오쿠노 가츠미(奥野克巳)

 

키워드: 에드워드 타일러, 종교기원론, 인지진화, 데카르트주의, 서구이원론, 인간과 비인간

 

생물학자 야콥 폰 윅스퀼은 생물의 인지능력이 만들어낸 세계를 환경세계로 파악했다. 진드기가 진드기의 인지능력을 통해 환경세계를 만들어내듯이, 인간은 인간의 인지능력을 통해 환경세계를 살아간다. 그런데 인간은 지금과 여기를 넘어서 물리적인 환경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감지하는 능력까지 갖고 있다. 현실뿐만 아니라 초현실의 영역으로 뻗어가는 지각이야말로 인간의 인지능력이며 인간의 환경세계의 특징이다.

그러한 인지능력을 인간은 어떻게 해서 갖게 된 것일까? 19세기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타일러는 원초의 인간이 꿈이나 죽음을 통해 평소 머무는 신체로부터 이탈할 수 있는 인격적인 실체로서의 혼이 존재한다는 관념을 가지게 되었다고 추론한다. 타일러는 인간 이외의 존재에도 혼이나 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고방식을 애니미즘이라고 이름 붙였고 그것을 종교의 원초형태로 규정했다. 애니미즘이란 움직이는’ ‘이라는 뜻이며 여러 장의 그림을 연속해서 그림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애니메이션이라는 말에도 그 뜻이 이어지고 있다.

애니미즘이 다신교로, 나아가 일신교로 진화한다는 주장에서 알 수 있듯이 타일러는 종교의 기원론에도 관심이 컸다. 타일러와 동시대 학자인 제임스 프레이저, 20세기에 들어선 후에는 에밀 뒤르켐 등이 이끈 종교의 기원을 둘러싼 연구는 문화인류학의 주요한 토픽이었다. 20세기 후반에는 문화진화론이 비판받으면서 문화인류학은 종교의 기원이라는 테마를 더 이상 다루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20세기 후반이 되면 동물행동학과 영장류학, 진화론과 인지과학등의 영향을 받은 심리학과 고고학 등이 종교의 기원을 둘러싼 연구를 행하였다.

인지고고학자 스티븐 마이슨에 의해 제기된 종교의 기원을 둘러싼 가설에 의하면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6~3만년 전에 종교가 출현했다. 네안데르탈인의 뇌에는 언어영역, 사회영역, 기술영역, 박물영역 등의 영역들이 분리되어 있었고 그래서 사물 그 자체로밖에 파악할 수 없었다. 반면 현생인류의 뇌에서는 각각의 영역을 분리한 벽이 무너지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신경조직이 형성되며 그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회로를 통해 영역들을 횡단하는 유동적인 지능이 작동할 수 있게 되었다. 현생인류는 비유나 상징을 조작해서 인간 이외의 존재에도 의식과 같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파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현생인류는 지금과 여기를 초월한 영역으로 뻗어가는 인지능력을 손에 넣게 되었고 종교를 만들어내었다. 이는 또한 타일러가 애니미즘이라고 부른 현상과 동일하다.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애니미즘은 인류학 내부에서 다시금 조명받기 시작한다. 남미 선주민 사회에 대한 조사에 기반하여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는 남미 선주민이 인간, 동물, 정령이라는 존재자에 대해 각각의 스스로가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간주하며 동물이나 정령들은 자신들에게도 사회가 있다고 본다고 말한다. 인간과 동물 등 인간이외의 존재들 간의 차이는 몸에 두르는 것(의상과 장식)에 있다. 그 점에서 인간, 동물, 정령은 내면적으로는 동일한 존재이며 다른 것은 신체적인 면일 뿐이다.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에 의하면 애니미즘은 인간, 동물, 정령 등의 존재들이 자신들에 대해 가지는 재귀적인 관계가 논리적으로 동등하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필리프 데스콜라는 남미 선주민 사회에 대한 조사에 기반하여 인간과 비인간(인간 이외의 존재)이 서로 유사한 내면성과 각기 다른 신체성을 가지는 양태를 애니미즘으로 고찰했다. 그의 애니미즘에서는 인간이 동식물 및 그 외의 환경적 요소들에게 주체성을 부여한다. 이 속에서 인간은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비인간들 사이에서 그것들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타일러의 애니미즘은 인간과 비인간을 확연히 구분한 후에 인간만이 혼이나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파악하는 데카르트주의적인 서구이원론에 기초한다. 인간 이외의 생물이나 사물에 대해서는 인간이 가진 혼이나 정신을 투영하는 프로세스를 거쳐야 한다. 이에 반해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 등의 애니미즘의 새로운 정의는 데카르트주의적인 이원론에서 벗어나 보다 본질적인 이해에 기반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레인 윌러스레브(Rane Willerslev)의 애니미즘론 또한 데카르트주의적인 주객이원론의 탈중심화를 지향한다. 서구가 잃어버린 세계를 상정하고 그 속에서 세계와 다른 존재자들 간의 차이를 흡수해서 연결함으로써 성장하는 것이 애니미즘이라고 파악한 누리트 버드-데이비드(Nurit Bird-David)를 비판하고 인간과 비인간이 이거냐 저거냐가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라는 모호함의 존재양태를 가지는 것이 애니미즘이라고 주장한다. 월러스레비의 애니미즘은 또한 팀 잉골드의 애니미즘과 공명한다. 잉골드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분할선 이전의 사물의 끊김 없는 삶의 흐름 그 자체를 지향하며 살아가는 것’(animacy)이 정신과 물질의 존재론적 분할에 앞서는 애니미즘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나무는 바람의 흐름과 어울리고 그 움직임 속에서 바람가운데나무로서 살고 있다. 잉골드가 말하는 애니믹한 존재론’(animic ontology)이란 존재들이 한 몸이 되어 생성과 운동을 부단하게 반복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19세기의 철학자 뤼시앙 레비브뢸의 참여의 원리’(principe de participation) 또한 데카르트주의적인 이원론을 넘어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참여란 원초의 인간이 가지는 심성을 뜻한다. 미개인의 심성에게 일()과 다(), 같음과 다름 등의 대립은 한쪽을 긍정하는 것이 다른 한쪽을 부정하는 필연을 포함하지 않는다. 양자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민속학자 오리구치 시노부(折口信夫)는 인간이 가진 비교의 능력을 유사점을 직관하는 동화[類化]성능순간적으로 차이점을 느끼는 구별화[別化]성능으로 나누었다. 동화성능이란 표면적으로 다른 것들 간에 공통성과 동질성을 찾아내는 사고법이며, 구별화성능이란 차이에 기초해서 구성되는, ‘AA’ 라는 과학사고의 기본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리를 포함하는 사고법이다. 오리구치는 고대인의 마음이 동화성능에 기초한다고 생각했다. 애니미즘이란 동화성능적인 사고에 대한 것이다. 이 사고는 또한 오늘날의 애니미즘론을 선취한다. 인간과 비인간, 정신과 물질, 주체와 객체라는 서구이원론의 사고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주의적인 이원론의 비판의 입장에서 철학자 오모리 쇼조(大森荘藏)는 인간이 인간 이외의 존재와 인격적 관계를 맺을 때 인간 이외의 존재가 마음 있는 것으로 등장하는 상황에 착목하고, 이 지점에서 애니미즘의 본질을 발견한다. 시인 야모오 산세이(山尾三省)가 도쿄에서 이주한 야쿠시마(屋久島)에서 애니미즘을 발견한 것은 특기할만하다. 애니미즘은 과학합리주의와는 대극에 있는 자연에 대한 낭만주의와 결합될 가능성을 언제나 품고 있다. 바람과 공기를 포함한 자연이 힘을 가지고 있었던 옛 애니미즘으로부터 숨이 모음으로 알파벳 속에 불어넣어짐으로써 외부의 자연에 잠재된 영력이 인간의 머릿속에 스며든 덕분에 인간에만 적용되는 자기재귀적인 애니미즘으로서 화현했다고 주창한 데이비드 아브람(David Abram)의 애니미즘론은 이색적이다. 마지막으로 이와타 케이지(岩田慶治)의 애니미즘에 대해서 언급해두고자 한다. 이와타는 서구이원론의 사고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거쳐 지리학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와 도원(道元)의 사상에 이끌려 독자의 풍부한 애니미즘론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Abram, David (1997) The Spell of the Sensuous Perception and Language in a More-Than-Human World. Vintage Books.

Bird-David, Nurit (1999) “Animism Revisited: Personhood, Environment, and Related Epistemology”, Current Anthropology 40(S1): S67-S91.

Descola, Philippe (2006) “Beyond Nature and Culture”, Proceedings of the British Academy 139: 137-155.

Ingold, Tim (2000) The Perception of the Environment: Essays on livelihood, Dwelling and Skill. Routledge.

--------- (2011) Being Alive: Essays on Movement, Knowledge and Description. Routledge.

Viveiros de Castro, Eduardo (1998) “Cosmology Deixis and Ameridian Perspectivism”, Journal of the Royal Anthropological Institute, n.s. 4(3): 469-88.

Willerslev, Rane (2007) Soul Hunter: Hunting, Animism, and Personhood Among the Siberian Yukagir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Lexicon 現代人類学3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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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성

 

콘도 히로시(近藤宏)

 

키워드: 통약불가능성, 이방인적 개념, 민족지 이론, 비교, 다문화주의

 

 

인류학이라는 학지(學知)는 궁지에 몰렸다. 무엇보다 주요한 분석 개념을 철학에 기대는 상황이 연출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 진단 하에 2011민족지적 이론을 위한 학술지로서 하우(HAU)가 창간되었다. 이 잡지를 발기한 데이비드 그레이버와 지오바니 다 콜(Giovani da Col)에 따르면 현재 인류학은 초창기 인류학과 역전의 관계에 있다. 즉 토템, 포틀래치, 터부 등 현지의 여러 개념들이 타 분야에 영향을 준 시대는 이미 끝났다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오늘날의 인류학이 놓인 상황을 만들어낸 요인 중 하나는 다음의 딜레마에 있다.

초창기와 비교하면 서구의 권위가 추락한 한편으로 서구 외의 세계를 둘러싼 지()가 더욱더 복잡해지고 있다. 그러한 상황 하에서 전개된 1980년대 인류학의 자기비판은 기존의 모든 인류학이 서구중심적인 것임을 자각조차 못했다는 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적인 논의 틀이 철학으로 옮겨갔다. 이 속에서 서구의 개념사를 거슬러 검토하는 비판 작업이 전개되었고 서구 외의 개념들이 비판의 도구로 활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현대의 민족지가 [기존 인류학을 포함한 서구사상 전반에] 비판적이기 때문에 민족지적 사상(事象)[기존 인류학의] 기술분석 개념에 의거하면 의거할수록 그 개념적 의의가 인정되지 않는 대상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는 역설에 빠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타개를 염두에 두면서 하우에서는 모든 민족지적 통찰의 이론적 잠세력(潛勢力)을 받아들일 것을 호소하였다. 그들이 제창하는 민족지 이론에서 이방인적 개념’(stranger-concept)은 이형동의어(異型同義語)를 스스로 민족지에서 찾아내는 방식으로 이해되며 그렇게 찾아낸 이형동의어가 각기 다른 세계들 간에 조화를 이루기보다 동형이의어(同型異義語)처럼 이해되는 것에 무게를 둔다. 같은 용어들 사이에서 틈이 생기도록 사고를 놓아두어야 기존의 개념과 이해를 변화시킬 수 있는 비판의 여지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나아가 타자성을 비판적 사고와 연결시키는 사고의 전개를 호소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학술지가 조직 가능했던 현실이 보여주듯이, 타자성을 비판적 사고와 연결시키려는 사고가 인류학에 부재했던 것은 아니다. 하우의 창간 이전부터 현대 인류학에서 타자성이라는 논점의 중요성은 계속해서 부각되어왔다. 실제로 그레이버 등은 민족지 이론의 재구축을 목표로 하는 움직임이 단일한 이름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개별적으로 있어왔다고 말한다. 그중 하나가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의 착오의 논의를 들 수 있다. 인류학이라는 지()를 활성화하기 위해 타자성에 다시금 주목한다는 점은 잡지명 및 그 특유의 논조에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하우는 마오리족의 개념으로 마르셀 모스는 증여론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하우에서는 인류학/민족지의 고전적 논고가 재록되고 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민족지란 쓰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읽히는 것이라는 이해일 것이다. 물론 독해는 기술에 의해 대상을 표상하는 저자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사고를 촉발시키는 이방인적 개념그리고 그것들을 만들어내는 사람의 영위에 달려있다.

2001년에 인류학연보(Annual Review of Anthropology)에 게재된 엘리자베스 포비넬리(Elizabeth Povineli)의 논문 주제는 근원적 타자성이다. 이 주제는 자유주의 사회에서 통약가능성이라는 문제를 둘러싼 쟁점을 다룬다. 우선 포비넬리는 각기 다른 해석이나 의견이 통양가능한 방식에 의해 어떻게 이론화되고 있는가를 묻기 위해 언어인류학의 성과를 가져온다. 겉으로 보기에는 순수하게 언어학으로 생각되는 문법언어적인 문제라고 해도 사회관계의 권력성을 띤다. 그 권력관계에 의해 문제 그 자체가 규정될 수 있음을 언급하면서 포비넬리는 자유주의 철학에 기초한 사회적인 통약가능성을 만들어내는 문법논의를 문제화한다. 이 논의에서 통약가능성은 한쪽 세계로 다른 쪽 세계가 합쳐지도록 한쪽 세계가 다른 쪽 세계를 교정하는 가능성에 다름 아니다. 다문화주의에서 승인또한 그 하나로 말할 수 있다. 동시대에서 목격되는 통약가능성에는 이러한 한계가 있다. 여기서 타자성을 둘러싼 인류학적 연구인도 뭄바이의 노숙자들, 기독교원리주의자들과 이슬람원리주의자들, 퀴어 활동가들, 브라질의 선주민권리활동가 등에 관한 인류학이 참조되고 있다가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근원적 세계와 마주하기 위해서는 교정의 가능성을 은폐시키는 통약가능성과도 비판적으로 마주할 필요성이 있다. 타자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대상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휘감는 상황, 어쩌면 우리도 그 일부일 수 있는 상황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포비넬리는 근원적 타자성이라는 논점을 자유주의가 확장하는 20세기 말의 동시대적 상황에서 찾아내었지만 이것은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에게도 다른 맥락에서 문제시된다. 카스트루가 논한 아메리카대륙 선주민의 퍼스펙티비즘 또한 다문화주의 비판의 성격을 갖는다. 20세기 말에 이르러 비판적인 사고를 이끌어내기 위해 다문화주의적인 승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타자성을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통약불가능성이라는 논점은 하우창간호 서문에서도 언급되었다. ‘민족지적 이론이 찾아내려는 것은 필드에서 바로 이해될 수 없는 과잉민족지적 번역이다. 그 번역은 통약불가능성과 관계가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낭만주의적으로 문화적 통약불가능성을 말할 것도 아니다. 오히려 언어학적 통약불가능성을 받아들인 번역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 통약불가능성을 받아들임으로써 비교불가능성이 아니라 생성중인 비교가능성의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통약불가능성의 교정의 연장선상에 있는 타자성에 대한 태도와는 결정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러나 타자성에 대한 감수성은 여전히 현대인류학의 민족지 이론에 스며들어 있다. 예를 들어 그레이버는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 등으로 대표되는 존재론적 전회를 비판하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어떤 현실에 대해 (적어도 부분적으로) 통약 불가능한 이론적 퍼스펙티브가 다양성을 풍부하게 전개시킨다는 점에서 가치를 두지만, 실재가 그것들 중 어느 것에도 포위되지는 않는다고 믿고 있다”(Graeber 2015: 31). 그레이버에게 근원적 타자성이란 완전하게 파악되지 않는 실재이며 논의의 사정 밖에 머물러 있다. 한편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의 논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산 하게(Ghassan Hage)는 근원적 타자성을 통해 비판적 인류학을 논하고 있다. 하게는 타자성이라는 가능성에 우리를 내놓음으로써 우리의 삶에 힘을 창출시키고 타자성을 우리 세계에 빙의시키는 것이 현대적인 인류학 비판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는 교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을 타자성에 기대하고 있다.

루카스 베시레(Lucas Bessire)는 남미파라과이의 선주민이 직면한 외부사회와의 접촉상황 하에서 존재론적 타자성, 즉 통약불가능성에 주목하는 논의는 현실비판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한편으로 마리오 블라세(Mario Blaser)와 마리솔 데 라 카데나(Marisol de la Cadena) 등은 자원개발과 환경보존이라는 현대적인 상황을 문제화하기 위해서는 근원적 타자성이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통약불가능성을 받아들인다면, 그것과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 현대인류학이 직면한 이 질문에 과연 일반화할 수 있는 해답이 있을까? 인류학이 설정하는 상황은 더욱더 복잡해지고 있다. 그 상황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사고, 그 속에서 생기는 타자성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상황에 대한 이해와 판단, 진단이 요구되어야 한다. 각각의 상황에 대한 진단과 함께 타자성을 사고한다면 그 속에는 다각적인 독해가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통약불가능성으로 향해갈 것인가? 마주하는 각각의 방식은 무엇을 고려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 속에서 축적된 논의와 대화를 병행함으로써 인류학은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Bessire, Lucas (2015) Behold the Black Caiman: A Chronicle of Ayoreo Life. The Chicago University Press.

Blaser, Mario (2010) Storytelling Globalization from the Chaco and Beyond. Duke University Press.

de la Cadena, Marisol (2015) Earth Beings: Ecologies of Practice across Andean Worlds. Duke University Press.

Greaber, David (2015) “Radical alterity is just another way of saying “reality”: A reply to Eduardo Viveiros de Castro”, HAU: Journal of Ethnographic Theory 5(2): 1-41.

Greaber, David and Giovani da Col (2011) “Foreward: The return of ethnographic theory’, HAU: Journal of Ethnographic Theory1: -XXXV.

Hage, Ghassan (2015) Alter-Politics: Critical Anthropology and the Radical Imagination. Melbourne University Press.

Povineli, Elizabeth (2011) “Radical worlds: the anthropology of incommensurability and inconceivability”, Annual Review of Anthropology 30: 319-334.

Viveiros de Castro, Eduardo (2016) The relative native. Hau book.

 

 

 

 

Lexicon 現代人類学5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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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식_콘도 히로시

번역글 2018. 7. 17. 14:05

포식 

콘도 히로시(近藤宏)

 

 

키워드: 폭력, 인척, 아마존, 정체성, 네이션

 

포식. 동물행동을 생각나게 하는 이 말을 인류학 용어로 다룬 논의는 다음의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아르준 아파두라이의 글로벌리제이션 론에서 정체성 개념으로서의 포식성이다. 또 하나는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 이후의 아마존 민족지학에서 관계개념으로서의 포식이다.

먼저 아파두라이 논의를 살펴보자. “집단이 자신의 정체성을 사회적으로 구축하고 또 그것을 동원하기 위해 그 자신에 근접하는 다른 사회적 범주를 말소해야 하는 정체성을 아파두라이는 포식성 정체성이라고 불렀다. 그 전형적인 예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나치즘인데, 인도에서 힌두교도가 이슬람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할 때에도 이와 동일한 타입의 정체성을 드러내었다고 그는 말한다. 후자의 경우 무슬림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면서 그 카테고리의 섬멸을 통해 자기 획정한다는 것이다.

아파두라이에 따르면, 이러한 정체성은 메이저리티 집단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특히 메이저리티와 네이션이 집단적으로 일치하지 않을 때 불확실성의 불안을 메이저리티가 품는 경우가 생긴다. 마이너리티에 대한 공포라는 감정이 양성되면 그 사회적 카테고리를 말소하는 폭력을 긍정하면서 자기획정이 이뤄진다. 이 논의에서 포식이 의미하는 바는 섬멸의 역능이다.

아파두라이는 이러한 포식성을 불러들이는 조건을 소수자를 본질적 마이너리티집단으로 규정하는 것에서 찾는다. 마이너리티가 본질적으로 메이저리티로부터 구별된 집단이 된다는 것은 자기 동질적인 메이저리티로부터 계속해서 배제되어 잠재적인 위협이 된다는 뜻이다. 아울러 메이저리티 또한 자신의 특성을 본질화 한다. 아파두라이는 지배자집단이 수적으로 소수이면서 열등집단의 섬멸을 지향하는 사례가 역사적으로 종종 등장한다는 것을 의식하지만 수적으로 많고 적음이 절대적인 지표는 아니다. 오히려 국가적 사회 속에서 네이션이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집단과 선을 긋는 것이야말로 포식성 정체성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이 정체성 논의는 현대사회를 대상화하는 하나의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존 민족지에서 포식의 개념은 아파두라이 논의와는 대조적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아마존의 특유의 관계를 개념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전개된 논의의 성과를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인간과 신, 친구와 적, 친지와 외부자 등 대립물 간의 이음새로서 남미의 선주민이 생각하는 인척의 개념에 대한 비판적 분석에 기초하여, 브라질의 동업자들은 포식의 형이상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이끌어낸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레비스트로스 2000: 719). 즉 포식이란 인척이라는 고전적인 친족관계의 개념과 연결된다.

아마존에서 인척이란 혼인에 의해 결합된 관계만을 뜻하지 않는다. 인척이라는 개념은 혼인으로부터 해방된 형태로 관계성을 사고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으며, 죽은 자, , 동물, 신 등의 타자성을 띤 모든 존재 사이에서 생기는 관계까지 지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라우에테족에서는 티와라는 인척을 가리키는 말이 알게 모르게 백인, 친구 등 아직 인척관계가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그 가능성이 있는 자들까지 포괄한다. 나아가 죽인 적이나 신 등을 지시하는 경우에도 같은 말을 사용한다.

실제로 아마존에서는 혼인이 발생하게 되면 양의적인 상태에 있는 인물과의 관계는 혈연성을 띠게 된다. 아마존에서 혈연이란 생활을 공유함으로써 깊어지는 관계성, 즉 구축되는 것이다. 혼인에 의해 연결된 인척과의 관계는 혈연성을 점차 강화해간다. 이에 반해 순수한 인척이란 혼인에 의해 관계하지 않는 인격 사이에서 생긴다. 이에 따라 인척이란 외부성 혹은 타자성과의 관계이며 구축성과 연결되는 혈연성에 앞서서 소여로 주어지는 관계성이다. 다만 앞서 서술했듯이 그 타자가 반드시 인간적인 타자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인간적인 존재도 타자성을 띤 존재이므로 그것과의 또한 인척성을 띨 수 있다.

이러한 아마존적인 인척관계는 위험이나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오히려 타자성을 띠는 존재와의 관계는 사냥, 전쟁, 수렵, 카니발리즘 등의 활동과 친화적이다. 앞서 인용한 레비스트로스의 글처럼 바로 이것이 아마존적 포식의 특징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포식이란 단지 폭력의 대상으로서 타자성을 띤 존재의 위치를 매기는 관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타자성을 띤 존재와의 관계에는 외부의 내화라고 할 수 있는 사상(事象)이 수반된다. 히바로족의 수렵이나 투피남바족의 전쟁에서 적의 타자성을 자신에게 도입함으로써 자시변용이 일어난다. 아라우에테족에서 전자는 죽인 적의 시점에서 바라본 세계를 노래하며 그 노래를 통해 전사로서의 새로운 자기가 된다. 그 속에서 죽인 자는 적이라는 타자로의 변성을 이뤄낸다. 즉 위험한 타자로부터의 작용에 의해 자기가 생겨나는 것이다. 요컨대 불가결한 타자와의 관계성이 포식이다.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는 이러한 타자와의 관계의 특징을 타자의 절대적 필요성혹은 타자 없는 세계의 사고불가능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카스트루 2015b).

이 점에서 아마존적 포식관계는 아파두라이가 정체성이 기술하는 포식성의 정체성과는 정반대에 놓인다. 즉 아마존적 포식이란 스스로를 규정하는 데에 불가결한 타자성 그 자체와의 관계성이며 타자 없는 세계를 지향하지 않는다.

 

이 외에도 이 두 논의에서 포식이 의미하는 바의 차이는 몇 가지가 더 있다. 아파두라이의 논의에서 네이션과 그 타자를 둘러싼 사회적 카테고리의 문제와 연결된 포식성에서 타자는 섬멸 가능한 것으로 상상되며, 포식성의 정체성 속에서 자기 획정할 수 있는 집단은 섬멸이라는 행위의 동작주의 입장에 고정된다. 이 상상력의 기제 속에서 죽임을 당한 후의 타자를 위한 장소는 없다. 반면 아마존의 포식에서는 죽임을 당한 자와의 사이에서 생기는 관계가 문제시된다. 적의 시점이야말로 자기를 구성한다고 할 때 자기는 적으로부터 작용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성립될 수 있다. 에두아르도 콘은 송곳니가 육지거북이의 등껍질에 꽂혀 부서져서 더 이상 포식할 수 없게 되어 죽어버린 재규어가 썩은 고기를 좋아하는 육지거북이에 의해 포식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콘이 사냥을 통해 그려낸 포식성처럼, 아마존적 포식에서 드러난 관계성의 두 입장은 그 관계에 의해 연결된 이항 사이에서 쉽게 반전된다. 즉 동작주의 입장이 특정한 존재에 고정되지 않는 관계성이 아마존적 포식성의 관계성이다(2011).

동일한 용어를 둘러싼 두 논의의 차이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우선 포스트콜로니얼리즘과 존재론적 전회라는 인류학의 논의 흐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여기에는 포식이라는 용어의 다양성, 그 동형이의(同型異義)적인 어긋남 또한 볼 수 있다. 현대인류학에서 포식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크게 다른 두 세계를 연결해준다. 타자와의 폭력성을 띠는 관계성을 둘러싼 각기 다른 상상력의 연결을 받아들임으로써, “적이란 섬멸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적에 의해 우리는 상처 입어서는 안된다라고, 행위의 능력을 본질화하면서 자기 획정하는 네이션의 상상력 바로 옆에는 적을 통해야 비로소 우리가 변한다라며 타자와의 관계성을 찾아내는 아마존의 포식성이 있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처럼 이방인적 개념을 의식하면서 포식이라는 용어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는 세계를 떠올려봄으로써 타자와의 폭력성을 띠는 관계성이 네이션이 상상하는 모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는 않을까?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박이대승박수경 역) 식인의 형이상학, 후마니타스, 2018.

아라준 아파두라이(장희권 역) 소수에 대한 두려움: 분노의 지리학, 에코리브르, 2011.

에두아르도 콘(차은정 역) 숲은 생각한다, 사월의 책, 2018.

Lévi-Strauss, Claude (2000) “Postface”, L’Homme: 154-55.

 

 

 

Lexicon 現代人類学84-87.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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