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현대사상 '인공지능' 특집호에서 논문 한편을 번역했다. ANT를 공부하면서 이론적 한계로 내가 느낀 점을 잘 정리한 글이다. 행위자의 특성은 관계성에서 주어지는 것인데, 그것을 행위자로 실체화하게 되면 관계성의 사실성이 소거된다는 바로 그 점을 논리적으로 잘 분석해놓았다. 중간에 예시로 든 일본에서 행해진 장기버전의 "알파고와 인간의 대전"의 소상한 내용 부분은 생략했다. 아무래도 일본장기에 무지한 (나를 비롯한 일부) 독자들에게 독해의 흐름을 방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 그 예시가 없어도 글의 논지는 충분히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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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기계의 인류학: 행위자 네트워크론의 한계를 넘어서

 

쿠보 아키노리(久保明教 기술인류학)

 

 

 

우리는 기계를 사랑하면서도 증오한다. 확실히 인간과 기계의 일상적인 관계는 대체적으로 평온하다. 다기능 전자렌지, 하이브리드카, 스마트폰을 편리한 도구로 볼 것인가, 신체의 확장으로 볼 것인가, 집합지(集合知)의 매체로 볼 것인가의 문제는 별도로 하고, 현대생활이 엄청난 수의 기계와의 밀접한 제휴를 통해 성립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 속에서 기계가 떠받치는 현대사회의 시시비비를 기계에 대한 직접적 언급 없이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AI나 로봇 등의 지능기계를 화제에 올리면, 기계에 대한 우리의 애증은 증폭된다. 우리는 고도로 발달된 기계가 가져오는 빛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운운하는 한편으로, 기계가 지배하는 미래사회의 절망을 그린 소설이나 영화를 끊임없이 생산한다.

 

우리는 지능기계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그들’과 함께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 소박한 질문은 계속해서 중요한 과제로서 제기되면서도 사상의 언어를 통해 정면으로 논의되지는 않고 있다. 프레임 문제를 둘러싼 논의는 기계의 구체적인 양상보다 인간적인 지성의 문제로 제시된다. 가령 현대를 대표하는 어느 사상가는 휴대전화에 대한 자신의 증오의 근간에 자리한 인간적인 욕망을 분석한다. 기계를 둘러싼 문제를 인간에 관한 문제와 접속시킴으로써 우수한 성과물들을 쌓아가고는 있지만, 여전히 사상의 언어를 통해 기계의 구체적인 형태와 동작을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러한 단절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어떻게 하면 단절을 넘어서 기계와 인간에 대해 동시에 말할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브뤼노 라투르가 제창한 비근대론적 인류학을 길잡이 삼아 그 분석방법으로서 행위자 네트워크론의 한계를 넘어서는 도정을 제시함으로써 기계를 둘러싼 언어의 단절을 중화하고 지능기계와 우리의 관계를 보다 선명하게 파악하는 방법론을 구상하고자 한다.

 

 

1. 기계의 토테미즘

 

기계와 사상 사이를 가로막는 단절의 맹아는 기계를 둘러싼 근대적 사고의 단서가 된 데카르트의 동물=기계설 안에 이미 잠재되어 있다. 조르주 캉길렘(Georges Canguilhem 1904-1995, 프랑스의 생명과학철학자)에 따르면 유기체와 기계의 유비성을 인정하는 데카르트의 논의는 벽시계, 물레방아, 인공분수, 파이프오르간 등 당시의 선진기술에 의거하고 있다. 이 기계들은 도끼나 지레 등 인간의 생체에 ‘달라붙어 있는’ 기존의 도구와 달리, 제작과 시동을 별도로 하면 인간 없이 끝낼 수 있는 자동기계다. 그것들은 원활하게 작동할 때에는 인간의 관여 없이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다. 이때만큼은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유기체와 동일시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기계들은 그 동력원을 (시계나 지레와 비교하면 간접적이지만) 인간에 의지하며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임은 분명하다. 기계는 표면적으로는 개별적인 몸체로 작동하지만 그 내부는 동력과 목적을 부여한 인간과 항상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자연현상에서 ‘기계를 제작하고 동력과 목적을 부여하는 인간’에 대응하는 무언가는 무엇일까?

 

데카르트의 『인간론』의 서두를 장식한 “신체란 신이 가능한 한 자신과 유사한 것을 만들기 위해 완전히 의도적으로 모양을 낸 흙으로 만들어진 상 혹은 기계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 라고 나는 상정한다.”라는 기술에 기초하여 캉길렘은 동물=기계설은 다음의 두 가지 요청에 의해 처음으로 의미를 갖는다고 논한다. 첫째, 동물=기계(‘신체’)를 제작하는 자로서 신이 존재한다는 것. 둘째, 기계의 제작에 앞서 생체가 이데아로서 주어진다는 것.

 

동물=기계는 동력원으로서의 신, 그리고 형상인(形相因) 및 목적인(目的因)으로서 모방해야 하는 생체가 선재함으로써 비로소 생겨날 수 있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인 생명이해가 방기되는 것은 아니고 목적론의 배치가 달라진다. 즉 개개의 생물의 내부에 설정된 요인들은 신이 그것을 모방해서 신체를 만드는 생체의 이데아 및 동력인(動力因)으로서 신에게로 다시금 배치되며 자연 속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온 합목적성이 소거된다. 동물과 인간 신체를 필두로 하는 자연물은 고유의 목적과 영혼을 탈취당하고 객관적인 법칙에 따르는 존재=기계로서 파악된다. 이러한 이론상의 ‘생명의 기계화’를 통해 자연과 동물의 기술적인 이용이 정당화되고 ‘자연의 주인인 소유자’로서 인간이 나타난다.

 

캉길렘의 논의를 부연하면, 신에 의한 자연의 창조를 인간에 의한 기계의 제작에 빗대는 아날로지컬한 개념조작(자연:신::기계:인간)의 산물로서 동물=기계설을 다룰 수 있다. 표면상으로는 자율적으로 작동한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기계를 유기체에 빗댈 수 있는 한편으로, 이면상으로는 항상 인간과 연결된 기계에 빗대어진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유기체에서 합목적성이 소거된다. 나아가 이 개념조작은 이차원적인 인간의 분절화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요인들을 결여한 자연=기계의 일부로서의 신체(연장)와 그것들을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는 이성적인 판단능력을 가진 정신(사유)이라는 구분이 인간적인 영역에 도입된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논한 것과 같이 많은 인류학자가 분석해온 토템 신앙이 자연종들 간의 시차적(示差的) 격차와 인간집단들 간의 시차적 격차 사이에 상동성을 가정함으로써 자연의 체계에 의거하면서 인간사회의 체계를 확립하고자 했다면, 동물=기계설은 인간이 제작한 자동기계를 매개로 자연 속에 있는 분절(자연종/신)과 인간 속에 있는 분절(연장/사유) 사이에 상동성을 가정함으로써 자연의 체계에 의거하면서도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인간적인 영역을 구성하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기계의 토테미즘’에 있어서 벽시계나 파이프오르간 등의 구체적인 기계는 극히 중요함과 동시에 보잘 것 없는 하찮은 존재다. 그것들은 유기체와 기계 사이에 유비성을 보여주는 논의의 입구에서는 주요한 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자연의 주인인 소유자’로서의 인간이 도출되는 논의의 출구에서는 사상적인 동물=기계만이 전면화되며 현실의 기계들은 어떤 중요성도 갖지 않는다. 기계들은 인간이 소유한 자연을 이해하고 억제하기 위한 단순한 도구(실현기구나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기술)로 격하되며, ‘자연의 주인인 소유자’로서의 인간의 지위를 이성에 의해 정당화 내지는 비판하고자 하는 사상적 논의와는 저 멀리 멀어진다. 데카르트의 논의가 당시의 선진적인 기술의 구체적인 양상에 의해 가능해진 것, 즉 ‘이성적인 정당화에 대한 기계 제조의 선행성’은 모조리 망각되고 만다.

 

그런데 사상의 언어로부터 조금 떨어진 장에서 기계들은 그 존재감을 다시 강화한다. 기계와의 다름을 통해 인간적인 영역의 분절(연장/사유)이 보장되는 이상, 기계들 그 자체가 이 분절을 넘어 인간에 접근한다면 ‘자연의 주인인 소유자’로서 인간의 지위는 보증될 수 없다. 사상적인 기계와 달리 현실적인 기계들이 어떤 성질을 가질 수 있는가는 미리 확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기계 제조의 선행성’이 재생된다. 그것은 생물과 외견상 구별할 수 없는 정밀한 동작이 가능한 기계, 인간적인 사유를 실현한 기계, 자동기계(automaton), 로봇, AI 등으로 불리는 지능기계가 실제로 제작되는 것에 대한 기대와 공포라는 모습을 취하며 대중문화와 기술들이 교차하는 영역에서 다시 개화된다. 선행성의 망각이 떠받치는 사상의 언어를 통해 구체적인 기계들을 말하는 것은 항상 이차적인 것으로 밀려난다. 선행하는 기계들의 인간적인 영역으로의 삽입이 사상적으로 화제가 되면서 사상적 기계로의 변환을 통한 인간적인 영역으로서의 접속이 중심화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피하기 어려운 도정이라 할 수 있다.

 

 

2. 하이브리드한 위조품

 

그렇다면 이제까지 살펴본 사상과 기계의 단절, 사상에 의한 기계의 선행성의 망각을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까? ‘기술적 기계’나 ‘장치’ 등의 사상적 기계의 현대적 형상과 그 계보를 정밀하게 조사하여 현실적인 기계들과의 접점을 활성화시키는 것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본고에서는 우선 구체적인 기계들로 건너가기 위해 사상적 전통을 의도적으로 경시하는 몇몇 야만적인 논의, 브뤼노 라투르가 제창한 비근대론적 인류학을 참조하기로 한다.

 

브뤼노는 우선 근대라는 기구(Constitution)를 떠받쳐온 이중성을 주목한다. 즉 근대적인 지(知)와 제도는 자연과 사회, 과학과 문화, 인간과 비인간, 주체와 객체라는 대구로 표현되는 두 개의 영역을 표면상으로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순화’한 후 양자를 비대칭적으로 파악하는 한편, 그것들을 항상 암암리에 연결시키는 ‘번역’ 혹은 ‘매개’를 통해 양자의 혼합인 하이브리드한 존재를 증식시키는 이중의 실천에 의해 구동되어 왔다고 논한다.

 

근대주의자는 ‘순화’와 ‘번역’이라는 이중의 실천 속에서 전자에만 초점을 둠으로써 근대사회와 그 이외의 사회 혹은 근대과학과 문화적 전통을 대립시키고 양자를 비대칭적으로 파악한다. 이에 반해 라투르가 제시하는 것은 ‘번역’이나 ‘매개’가 이뤄지는 국면에 초점을 맞추고 양자를 대칭적으로 파악하는 ‘비근대론’(Non-Modernism)의 입장이다.

 

비근대론에서는 근대와 비근대, 과학과 문화가 그 본성상의 차이에 의해 환원론적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과 비인간을 불문하고 다양한 행위자(actor)가 엮어내는 관계의 그물망이 어떤 규모와 어떤 방식으로 조직되는가라는 점에서부터 연속적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관계의 그물망이 ‘행위자 네트워크’라고 하는 것인데, 그 속에서 모든 행위자의 형태와 성질은 항상 다른 존재자와의 관계들(네트워크)을 통해 만들어진다. 행위자 네트워크론(이하 ANT)은 네트워크의 운동을 통해 다양한 존재가 나타나고 변화하며 소멸되어 가는 과정을 추적하고 기술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제창되었다.

 

라투르의 논의를 검토하면 왜 근대인이 로봇이나 AI 등의 지능기계에 이 정도로 열중해왔는가가 명확해진다. 데카르트가 행한 아날로지컬한 개념조작은 유기체를 기계와 동일시함으로써 그 잉여(‘동물=기계가 아닌 것’)로서의 근대적인 인간상을 확립하고 인간에 고유한 영역(‘사회’와 ‘문화’)과 자연(을 해석ㆍ제어하는 과학ㆍ기술)의 영역을 엄밀하게 구별하는 ‘순화’를 추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그것은 인간에 무한히 접근하는 지능기계라는 특권적인 하이브리드를 순화의 바로 옆에 부상시킨다. 순화의 이면에서 수행되는 무분별한 번역이 사상(捨象)되는 한편, 지능기계—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기계인간’—만이 마치 유일무이의 중요한 하이브리드인 것처럼 표상되며 기계들의 발전을 가능하게 만드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계들의 인간에 대한 지배나 반란에 대한 공포가 운위된다는 것이다. 지능기계는 근대적인 사고틀이 사상(捨象)하는 번역의 영역으로 이성을 꾀어내는 주요한 회로임과 동시에 극단적인 지배/피지배의 서사를 통해 번역의 운동으로부터 그 즉시 눈을 돌리게 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한 모조품으로서 활약해왔다.

 

매일의 대인 커뮤니케이션의 상당부분을 SNS와 이메일을 통해 행하는 현재 우리의 생활은 반세기 전의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기계에 지배받는, 하이브리드화한 사람들의 디스토피아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화의 구분을 착각할 뿐이다. 우리는 자신의 주체적인 양상이 스마트폰, 페이스북, 카톡 등의 기계들과의 하이브리드화를 사상(捨象)하고 그것들을 편리한 도구로 활용하는 인간이라는 순화된 자기 이미지를 멋지게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2045년에 대단히 유능한 지능기계가 나타난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반세기 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30년 후의 사람들을 오해할 뿐이다. 현재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한 기계들의 지수함수적인 발전의 가능성이 아니라 그러한 발전에 수반되는 주체로서 일할 수 있는 인간의 양상을 단적으로 상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현실적인 기계들이 가속적으로 앞서감에 따라 순화와 번역이라는 이중구조 그 자체가 마침내 사상적으로도 기술적으로 타당성을 잃어가고 있는 사태를 목도하고 있다.

 

 

3. 네트워크의 구멍

 

라투르의 비근대론적 인류학에 기반하면, 근대인은 지능기계의 중요성을 적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제창된 ANT는 유감스럽게도 현대에서 지능기계의 움직임을 정밀하게 검토하는 것 이상으로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 물론 로봇과 AI로 불리는 동력기계와 소프트웨어를 행위자로 다루면서 그것들이 과학적ㆍ사회적ㆍ문화적 요소를 포섭하며 어떤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가는 분석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분석은 그 기계/소프트가 왜 로봇과 AI로 불리는가를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로봇과 AI는 기계나 소프트가 인간이나 생물과의 유비성 속에서 파악될 때에 비로소 나타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나 생물과 ‘닮았다’는 술어적 요소가 부여되지 않는다면, 기계와 소프트는 로봇이나 AI가 될 수 없다. 일반적으로 로봇이나 AI의 연구자로 간주되는 사람들이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기계공학자나 인지과학자로 명명되는 것은 그들의 존재가 과학적인 정의를 항상 벗어나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비성을 어떤 모습 속에서 찾아낼 것인가에 따라 지능기계의 정의는 항상 쉽게 변신된다. 따라서 지능기계가 인간이나 생물이 기계와 결부되는 관계성의 한 가운데에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들이 아무것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ANT에서의 행위자는 다른 행위자에 대해 어떠한 작용을 부여할 수 있는가를 검토하는 ‘시행’의 과정을 통해 그 움직임이 명확하게 정의된다. 행위자는 다른 행위자에게 다양한 작용을 행하는 주어적인 존재자다. 인간적인 주체성과 비교하면 그 힘에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확실한 주체성을 가진 무수한 행위자들이 상호 능동적/수동적으로 작용함으로써 행위자 네트워크는 운동한다. 이 때문에 ANT에서 분석의 초점은 네트워크의 운동이 안정화하여 자명한 현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필수적인 통과점’)을 맡는 행위자에 있다. 바로 그러한 중심적인 행위자가 될 수 있는 생화학자를 주역으로 한 라투르의 저작 『프랑스의 파스퇴르화(The Pasteurization of France 1984)』가 마키아벨리즘적인 과학자상(像)에 안이하게 의거한 분석으로서 사회학자 부르디외로부터 격렬하게 비판받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ANT논자가 마키아벨리즘적인 발상으로 방법론을 구축한 것이 아니라 해도 수많은 미세한 주어적 행위자들 간의 투쟁을 통해 이뤄진다는 네트워크 모델 자체가 그러한 발상을 이끌어내고 만 것이다.

 

비환원론을 표방해온 ANT는 그러나 지능기계를 단순한 기계로 환원해버린다. 그것은 기계적 행위자와 유기적 행위자의 관계성이 만들어내는 술어적 요소 자체가 ‘지능기계’라는 실체가 되어 네트워크의 일부를 맡는다는 사태를 ANT에서는 상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술어적 요소가 항상 행위자로 환원되는 행위자 네트워크의 세계에서는 행위자 동료들 간의 관계성 그 자체가 실체화된 존재자라는 수많은 구멍들을 잠재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관계성 자체가 실체적 권역(圈域)을 분리하고 현실적인 기계들과 인간의 상호작용에 주목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례로서 소프트와 인간 간의 치열한 전투에 의해 최근 크게 주목받은 장기전왕전(將棋電王戰)을 제시하겠다.

 

 

4. 두려움을 갖지 않는 기계

 

2011년 제1회부터 2015년 마지막 시리즈까지 4회에 걸쳐 행해진 장기전왕전에서는 최고의 장기기사에 필적하는 소프트의 실력(통산 10승 5패 1무)이 드러남과 동시에 기사와 소프트가 장기라는 게임을 다른 방식으로 다룬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 둘 간의 차이에 대해 제5회 최종국을 다툰 아쿠츠 치카라(阿久津主税)8단과 제2회와 3회 등장한 아베 코오루(阿部光瑠)5단은 각각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은 앞의 수를 계승하는 ‘선(線)’으로 사고합니다. 따라서 ‘선’이 연결되지 않을 때는 무언가 착각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바로 예정변경을 해야 할지 말지를 고심하여 다음의 한 수를 선택합니다. 컴퓨터는 한 수가 두어지면 그 국면에서 새로운 수를 덧붙여 생각하면서 두 수, 세 수를 앞서 가며 최선의 수를 선택합니다. 인간이라면 이 흐름을 탈 수 없는 수가 나오는 것이지요. 그 의미에서 [컴퓨터는] ‘점’으로 사고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한 수를 둘 때 자신과 상대가 두었던 수들에 대응해야 하므로 읽어야 하는 양이 늘어나고 그만큼 피로도가 쌓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불리해지는 변화를 두려워하고 읽기 어려워하기 때문에 보다 안전한 길을 가려고 하지요. 그러나 컴퓨터는 두려움 없이 읽고 밟아나갑니다. 강할 수밖에 없어요. 두려움이 없다, 지칠 줄 모른다, 이기고 싶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길이 평탄하지 않아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이는 모두 장기 기사들에게 필요한 덕목입니다.

 

‘선의 사고/점의 사고’, ‘두렵다/두렵지 않다’라는 대구로 기사와 소프트의 차이를 다루는 두 사람의 각기 다른 표현은 그러나 실전의 국면에서는 밀접하게 결부되어 나타난다. 우선 선의 사고와 점의 사고라는 대구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사례로서 제2회 전왕전(電王戰) 제3국ㆍ후나에 코헤이(船江恒平)5단-츠츠카나戰을 검토해보겠다. ‘카쿠가와리(角換わり 일본장기의 대표적인 전법 중 하나)’의 전투태세가 되었던 본국에서 선수를 잡은 후나에가 전반부에는 약간 우세했다. 그런데 종반부에 접어들면서 후수인 츠츠카나가 은(銀)을 버리는 기묘한 수를 두었다. 그 수를 읽지 못한 후나에 기사는 그 당시 매우 흔들렸음을 나중에 고백했다.

 

받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믿을 수 없는 수가 날아들었다. 6六銀. 종반부의 거의 막바지, 시급한 국면에서 읽기 어려운 한 수가 두어졌고, 나는 본능적으로 당했다고 생각했다. 긴장, 불안, 초조, 여러 감정이 마음속을 휘젓고 있었다.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국면에 임하고자 했다. 그런데 직후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6六銀은 버리는 수로밖에 읽히지 않았다. 몇 번이나 확인하고 나는 ▲6六同龍을 두었다.

 

대국이 끝난 후 검토할 때에 6六銀에 대해 ▲6六同龍과 銀을 두지 않은 방식(▲2七角△5五銀▲5七角)에서는 분명 선수가 이긴다는 결론이 나온다. 후나에 기사가 둔 ▲6六同龍은 결과적으로 거의 안전한 수였다. ▲6六同龍을 받고 다시 한 번 계산을 행한 츠츠카나는 銀을 희생시키고 상대의 玉의 앞을 가로막는다는 한 수 앞을 내다본 흐름(실제로는 츠츠카나의 玉이 가로막혀버렸다)을 버리고, 다른 흐름으로 틀어 △4二步의 수세로 돌린다. 바로 아쿠츠 기사가 말한 “바로 한 수 앞을 두었던 사람과 다른 사람이 두는 것 같은 수”다. 어느 쪽으로든 막히는 변화를 서로 회피하기 위해 국면은 다시 종반부의 입구로 돌아온다. 우세를 의식한 후나에 기사는 급소를 쳐서 승리를 가져오려 했지만 그 수는 점차 흩어져 안타깝게도 패배를 불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생각해보면, 이때부터 내 정신은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을지 모른다. [……] 기다리던 ▲1六步. 그리고 나는 생각을 끝내버렸다. 내가 이긴 것이 아닐까? 그래 분명 내가 이긴다. 나는 판도라 상자를 열어버렸다. 실제로 이 국면은 본국에서 내가 가장 승리에 가까운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또 다른 나는 현장을 떠나버렸다. [……] 승리에 들떠 기쁨에 취하고 싶은 그 유혹에 내가 진 것이다.

 

츠츠카나의 △6六銀→△4二步라는 수는 아쿠츠 기사가 말한 “바로 한 수 앞을 두었던 사람과 다른 사람이 두는 것 같은” 수임과 동시에 아베가 말한 “길이 평탄하지 않아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수이기도 하다. 본국을 관전한 토야마 마사아키(遠山雅亮)5단은 자신의 블로그 기사에 “(△6六銀에 대해 후나에 기사가 두었던 ▲6六同龍에) 인간 상대라면 △5八金으로 응수하고 다음으로 (후나에가 상대의 玉을) 가로막아서 끝나는 흐름을 갖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는 장면에서 소프트는 “두려움 없이” “포기하지 않았다”. 본국뿐만 아니라 전왕전에서 발휘된 소프트의 강점은 아베 기사가 말한 것처럼 장기기사와 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츠츠카나를 포함한 장기 소프트는 본래 공포, 체념, 피로에 대응하는 기능을 갖지 않는다. “두려움이 없다, 지칠 줄 모른다, 이기고 싶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길이 평탄하지 않아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이 성질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지치고 이기고 싶고 마지막에는 포기하기도 하는 인간 기사와의 관계성에서 발생하는 것들이다. 인간과 소프트의 관계성의 한 가운데에서 발생하는 술어적 요소들이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어 최초의 관계성에 재도입될 때 “두려워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소프트의 모습이 나타난다.

 

부정형으로 언급되는 소프트의 존재양상은 매우 순조롭게 관계성에서 실체로 이행하여 그 강한 요인이 되어간다.

 

…[중략]…

 

 

5. 네트워크와 추상적 관념

 

앞 절에서 검토한 것처럼 관계성 자체의 실체화는 그 관계성을 맡는 항이 가진 특성으로 쉽게 대체된다. 통상 우리는 AI나 로봇을 특정한 성질을 가진 확고한 행위자로 다루며, 그것들이 소프트나 기계와 무엇이 다른지를 묻는다면 명확하게 답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전혀 길들여지지 않는 관계성을 문제시 하는 경우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대체를 행하기는 쉽지 않다.

 

인류학의 역사에서 마나와 하우, 정령과 주술 등 추상적이고 내실이 불확실한 관념이 상당히 오랜 기간 타문화 연구의 핵심적인 열쇠가 되어 왔다. 마나와 하우를 도덕적인 강제력을 가진 가치체계의 기반으로 파악한 모스의 주술론과 증여론, 그리고 그것들을 인식론적인 체계에서 제로의 상징적 가치를 가진 기호로 다룬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세계를 인식하고 해석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체계로서 문화를 다뤄왔던 20세기의 주류 인류학은 이 추상적 관념에게 인식체계의 중축을 이루는 중요한 역할을 부여해 왔다.나아가 라투르나 ANT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존재론적 전회’라 불리는 현대인류학의 조류에서는 마나와 하우, 정령과 주술 등 우리에게는 ‘얼핏 비합리적인 신념’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 현지 사람들의 집합적인 실천을 통해 분명한 사실성(reality)을 갖는 과정을 분석해왔다. 그런데 이 존재자들을 ANT의 행위자와 같이 관계성 속에서 나타나는 주어적인 존재로 그려내면, 그 실재를 쉽게 인정하지 않는 근대적인 분석틀과의 괴리를 낳고 ‘그들은 그 존재들을 믿고 있다’라든지 ‘그들은 그 상징들을 통해 세계를 해석한다’는 기존의 담론을 ‘그들의 존재론에 따르면 그것들은 실재한다’는 담론으로 대체할 뿐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떨쳐낼 수가 없다. 나아가 추상적 관념을 행위자로 대체해버리면, 정령이나 주술사가 현지 사람들에게도 내실의 불확실한 존재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측면이 사상되고 만다.

 

정령도 지능기계도 그에 익숙한 어떤 사람들에게는 타자에게 분명한 영향을 끼치는 실체며 동시에 그 내실은 여전히 불확실한 존재이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행위자뿐만 아니라 추상적 관념을 노드(node)로 포함하는 존재자들의 네트워크를 구상할 수 있다. 추상적 관념은 행위자 동료들 간의 관계성이 실체화됨으로써 나타나며 확고한 행위자는 되지 않지만 존재자의 네트워크의 일부를 담당한다. 그 네트워크에 익숙한 자에게 추상적 관념은 비교적 쉽게 관계성의 일단을 이루는 항의 특성으로 파악되지만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분명히 존재를 공상하는 기묘한 행위로만 비춰진다.

 

네트워크의 노드로서 추상적 관념의 움직임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미지화하기 위해 우리에게 나름 익숙하지만 그 실재는 긍정되지 않는 관념을 다뤄보자. 코마츠 카즈히코(小松和彦)는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제로의 상징적 가치를 가진 기호”의 일례로서 ‘운’을 검토한다. 코마츠는 다음의 예를 든다. 실력이 그다지 좋지 못한 4인이 마작을 시작한다. 그 중 1인이 평상시라면 예상할 수 없는 승률을 올린다. 그때 그는 “오늘 난 어쩐지 운이 좋아”라며 기뻐하고 다른 이들은 “자네는 운이 붙었어”라며 희한해한다. 그런데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가 내리 지기 시작하고 다른 이들이 이기기 시작하면, “자네는 운을 쫓아냈어”라든지 “이제 운이 돌기 시작하는군”이라고 말할 것이다. ‘운’이라는 관념은 이 이상한 승률을 이끌어낸 요인을 지시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관계항의 특성(“자네는 운이 붙었어”)을 쉽게 부여하지만 그 내실은 극히 모호한 상태다.

 

‘운’이라는 추상적 관념은 어떤 행위자의 행위 결과가 그 당사자의 내적인 조건(실력이나 연습량)과도, 관계하는 다른 행위자의 개입(조언이나 도움)과도 연관된다고 상정할 수 없는 상태에서 발생한다. 마작의 게임장을 구성하는 행위자들의 관계성이 앞서와 같은 이상한 상황을 발생시킬 때 이상성을 띤 관계성 그 자체가 실체화되고 ‘운’이라는 추상적 관념이 발동되기 시작한다. 이 네트워크에 접속된 사람들에게 그것은 비합리적인 인식의 산물이 아니고 분명한 영향력과 내실의 불명료함을 겸비한 네트워크의 노드로서 움직인다. 관계성의 한 가운데에서 발생하는 ‘아름답다’라는 술어적 요소가 ‘아름다움’이 되어 ‘미(美)’로 실체화되고 회화, 아티스트, 미술관 등의 행위자들과 상호 작용하면서 그 내실을 바꿔나가는 것처럼. 추상적 관념은 실천을 배후에서 규정하는 상징체계의 구성요소로서가 아니라 실천을 구동하는 존재자들의 네트워크에 주어적인 행위자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참여하는 존재자로서 파악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추상적 관념을 노드로 포함하는 네트워크론의 구상은 보다 정밀한 이론적 정비와 풍부한 사례의 검토를 거쳐야 하는 잠정적인 모델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내면적인 정신활동에서 파악된 추상적 관념을 구체적인 존재자들과 상호 작용하는 자율적인 관념으로서 파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까운 미래의 특정 시점에 지적능력이 인간을 능가하는 지능기계가 나타나는”, 그 내실이 모호하고 불명료한 관념이 확실한 실효성과 함께 과학적ㆍ사회적ㆍ정치적인 네트워크를 움직이는 현재 상황에서, 그 타당성을 객관적인 데이터와 법칙을 통해 판정할 수 있다고 상정하는 것도, 그 의미를 사람들의 공상과 기대, 문화적 관념과 이데올로기로 환원해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상정하는 것도, 점차 가속화하는 기계들을 둘러싼 네트워크의 운동에 대해 충분히 분석적인 효력을 가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능기계가 인간과 기계의 아날로지컬한 관계성을 통해 나타나는 한, 그 미래의 모습은 기계와 우리의 일상적인 상호작용의 축적에 앞서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러한 몇몇 낙관적인 조망도가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순화와 번역의 이중구조를 폐기하고 ANT가 그 입구를 제시한 곳에서 머물러 있는 비근대론적 인류학의 흐름을 치밀하면서도 야만적인 방법론으로 추진해야 한다.

 

 

久保明教 「知能機械の人類学─アクターネットワーク論の限界を越えて」 『現代思想』 2015年12月。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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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안드로이드 기술 개발자인 이시구로 히로시의 『인간과 기계 사이: 마음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에 실린 글의 후반부를 번역해 올려둔다.

그 글전반부의 번역글은 http://sarantoya12.tistory.com/116 이다.

 

의식이 있고 언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있고 의식이 있는 것이라는 의견은 충분히 옳다. 그런데 언어가 있고 의식이 있는 것임에도 왜 의식은 의식이 있고 언어가 있게 만드는 것일까? 의식의 "무시간성"에 그 이유가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왜 의식은 시간을 소거하고 무한한 무(無)의 세계에 입성하려고 하는 것일까? 

안드로이드가 인간에게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한다는 점이 정말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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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진화의 역문제

 

그것은 진화일까?

 

이시구로: 본래 진화와 퇴화란 무엇일까요? 저는 진정한 진화란 인간이 기술을 통해 이 세계를 만들고 변화시키듯이 모든 에너지의 사이클, 자연의 사이클이 인공물로 대체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아직은 천재지변이나 기후변동 등에는 관여할 수 없으나 그런 것들까지도 조절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지배며 진화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배가 진화라는 것은 자신들이 가장 번영하기 수월한 상태에 놓인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태양플레어(solar flare)처럼 잠시잠깐 있다가 사라져버리는 생명이라면 어찌할 방법이 없고, 그래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태어나고 죽고 썩어간다’는 사이클에서 벗어나 신체와 환경을 더욱 기계화하여 인공적이고 항상적으로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완전히 신체와 환경의 항상 유지의 상태를 만들어낸다면, 보다 이상적인 인공물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주의 역사가 빅뱅으로부터 발생한 단순물리법칙의 세계로부터 지능생명체에 의한 재구조화의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케가미: 인간의 진화는 자연현상을 복사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자연에서는 태양만이 일으켰던 핵융합반응을 인간은 그보다 온도가 훨씬 낮은 지구표면에서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과학기술이지요. 그런데 복사가 지배라는 바로 그것이 생명의 특징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이시구로: 복사하는 것은 지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절 하에 두는 것입니다. 스스로 핵융합을 일으키게 한다는 것은 태양을 모조리 만들어내지 않아도 큰 에너지 원친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태양이 폭발한다면 모두 죽을 테지만,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태양이 없어도 견딜 수 있는 내성을 갖춘 인류로 진화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지요. 모든 자연현상에 대해 내성을 갖추고자 한다면 적어도 혹성 간 이동을 할 수 있어야 하며, 우주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물리현상을 반드시 능가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최종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물리현상은 이미 인공물로 대체되어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간의 규모와 범위를 벗어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100만배 혹은 1억배로 확장해서 생각하면 그 후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세상은 지수 함수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케가미: 바로 그것이 ‘인공생명화하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생명/비생명을 불문하고 공존하는 새로운 커뮤니티를 창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연의 생태계를 모방한 완전히 새로운 인공사회로 점차 진화하여 사람만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과학적 지식과 기술이 생기게 되는 것처럼…….

 

이시구로: 저는 그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요컨대 자연현상에 기초한 자연발생적인 생명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인공적으로, 지적생명체가 자기 재생하듯이 인공생명이 만들어지는 세계가 곧 도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어와 진화의 역문제

 

이시구로: 제가 안드로이드를 통해 진행하고 있는 것도 인간을 어디까지 기계화할 수 있는가라는 도전입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인간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이케가미: 그렇게 생각할 때 기술을 진화시키는 것이 언어라고 한다면, ‘인간이 만든다’는 것은 ‘언어로 파악될 수 있게 된다’는 것일는지도 모릅니다.

이시구로: 예를 들어 아픔 등의 감각질의 감각을 개념과 어떻게 결부시킬 것일까라는 것입니다. 언어의 세계가 없다면, 적어도 철학적인 개념의 세계는 없습니다.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린다는 명시적인 자아가 없었을지 모릅니다. 또 그 한편으로 언어라는 것은 객관성입니다. 자신만 보기 위해서는 필요 없을지 몰라도 세계 속에 자신을 위치 짓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의사소통할 수 있는 프로토콜(protocole)인 언어를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즉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말로 인해 바로 타인이 머릿속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단순한 감각이나 패턴만으로 우리는 언어 이전의 자신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자신을 현실세계로부터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으니까요. 감각질의 감각이 어떻게 개념으로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지가 요구됩니다.

 

이케가미: 그렇습니다.

 

이시구로: 머릿속에서 말이 들려옴으로써 객관성의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언어가 있기 때문에 시간개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이케가미: 확실히 언어는 무시간입니다. 언어와 의식이 가깝다는 것은 바로 그 ‘시간 없음’에서 공통의 성질을 가진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의식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말하게 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시구로: 그렇습니다. 말이 먼저입니다. 말하는 것에서 의식이 생겨납니다. 반드시 의식이 있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맨 처음에는 의미를 수반하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이케가미: 의미는 뒤에 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선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시구로: 그렇죠. 요컨대 되돌려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언어를 가지게 하면 그로부터 의도와 욕망이 생겨나고, 그로부터 생물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미가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요? 말을 사용해서 이야기를 하는 순간 의식이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케가미: 거기서 역문제가 제기된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보통은 욕구가 있기 때문에 언어가 생긴다고 생각하지만.

 

이시구로: 그렇습니다. 저는 안드로이드 연구를 통해 그러한 역문제의 해법을 찾고 있습니다. “욕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그 실체를 알지 못하면서도, 여하간 우리는 이야기를 나눕니다. 언어라는 존재는 전혀 의심스럽지 않습니다. 따라서 언어, 즉 시간 개념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면서 자기에 가까운 것에서 출발해서 그로부터 의도와 욕구를 거쳐 마지막으로 의식과 자아에 이르는 것이 제 연구의 골격입니다. 이케가미 씨가 생명의 정의에서 출발한다고 한다면, 저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인간의 활동에서부터 점차 파고들어 의식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간다운 무언가에서 갑자기 시작하려는 사람은 이제까지 거의 없었습니다.

다만 이런(인간다운 무언가를 찾는) 방법이라고 말하면 다양한 바이프로덕트(by-product)가 생기고 연구비도 따기 쉽기 때문에(웃음) 저는 약간 부풀려 말하긴 하지만, 우리는 같은 곳에서 정반대의 접근을 하고 있는 것이죠.

 

이케가미: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연구하고 있는 ALIFE(인공생명)은 무기물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시도입니다. 이 또한 역문제적인 접근을 취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생명 비슷한 것을 만들어내고, 그 후에 원리적인 것을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짚신벌레나 바퀴벌레에서 인간을 만드는 것은 너무나도 지난한 작업이기 때문에 그 대신 진화의 알고리즘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ALIFE입니다. 어쩌면 본래의 생명으로 되돌리는 편이 간단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ALIFE(Artificial Life)가 진화해서 BLIFE(Biological Life=유기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BLIFE로부터 ALIFE가 되는, 즉 생명으로부터 무수한 유사생명적인 것이 진화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개념과 기술

 

이시구로: 언어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하면 언어라는 것은 3인 이상이 있어야만 의미를 가집니다. 일대일의 서로에게 적응해버리면 변변한 언어가 생기지 않습니다. 세 번째 사람이 있어야만 자신들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언어란 강도 높은 사회성을 수반하게 됩니다.

 

이케가미: 반촘스키군요. 저도 사람이 있기 때문에 언어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언어가 없다면 핵융합반응도 원자역학도 없는 것이지요. 블랙홀이 우주와 관계없는 곳에서 탄생한 이유는 인간이 있기 때문이며, 인간의 개념세계와 언어조작에 의해 기술에 생겨나 블랙홀이 탄생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시구로: 개념세계라는 것은 실세계의 복잡한 현상을 모델화할 수 있는, 엄청나게 파워풀한 수법입니다.

 

이케가미: 핵융합반응까지 일으킨 인간의 개념세계와 언어조작이라는 것은 매우 파워풀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개념세계보다 현실의 기술 쪽이 더 나아간 것 같습니다.

 

이시구로: 그렇습니다. SF 발상이 둔해진 것과 때를 같이 하여 현실세계의 사이클이 더 앞서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개념 쪽이 훨씬 앞서갔지요. 예를 들어 30년쯤 전에 SF는 지금의 상황을 이미 예견했잖습니까? 그것은 개념세계 쪽이 훨씬 앞서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다시 한 번 개념세계가 앞설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다면 개념세계와 현실세계의 어느 쪽이 넒은 것일까? 현실이라는 관측 가능한 범위는 한정되어 있고 지구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현실세계가 시간개념에 포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세계는 빛이나 정보가 도달할 수 있는 범위의 한정된 세계이며 무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념세계는 현실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무한히 확장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개념은 비약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집니다.

 

이케가미: 저는 “인간의 기술의 변화 속에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감정, 다른 기술, 다른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루이지 노노(Luigi Nono, 1924~1990,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자)의 말을 자주 인용합니다만, 다른 언어가 만들어질 수 없다면 개념은 불어날 수 없습니다.

 

이시구로: 그렇습니다. 수학을 예로 들어보면, 양자역학 등이 유입됨으로써 고전수학이 아닌 확률론적인 수학 쪽이 주류가 되었습니다.

 

이케가미: 그 점이 흥미롭습니다. 예를 들어 “A인 확률과 B인 확률”과 “A면서 B인 확률”을 비교하면, “A면서 B인 확률” 쪽이 반드시 작다고 생각하지만, 양자역학에서는 후자가 큽니다. 이것은 개념이 없으면 제기될 수 없고, 이것을 사용해서 컴퓨터까지 만들 수 있습니다.

 

이시구로: 혹은 1과 2밖에 없던 세계에 “제로”라는 개념이 발견되고, 그 속에서 허수가 발견되고, 나아가 양자역학적인 수학으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개념이 발전해감에 따라 지금까지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케가미: 계산이라는 것도 개념입니다. 계산에서 다룰 수 없다 해도 계산을 구현화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따라서 개념이 가능하면 그것을 구현화하는 장치가 생겨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태초가 말씀이 계시니라”인 것이지요.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인간의 감각으로는 해석할 수 없습니다. “반은 살아있고 반은 죽어 있는 상태”라고 말한다 해도, 어찌되었든 어느 쪽으로 결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해버립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반은 살아있고 반은 죽어 있는 상태”를 실재로서 역력히 느낄 필요가 있습니다. 바꿔 말해 그것이 무리한 일인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빈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것이 인공생명연구의 마음입니다. 즉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같은 개념을 구성하는 모델이나 수학이 없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인공생명은 개념 측에 있지만, 개념이 현실에 발 딛고 있지 않다면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이시구로: 맞습니다. 그래서 저는 안드로이드에 계속 전념할 것입니다.

 

 

 

사회—로봇의 사회성

 

인간이 마이너리티가 되는 장면

 

코뮤-(CommU)는 두 대 이상이 대화할 수 있는 로봇을 말한다. 실제로 세 대의 코뮤와 한 인간이 이야기를 나눈다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여기에 참가하면 이상한 대화감을 느낀다’고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누구라도 이야기한다. 코뮤는 실은 음성인식을 전혀 하지 않지만 대화한다는 느낌을 준다.

 

대화란 스토리를 전개하는 것이다. 지금 수준에서는 처음부터 위화감 없이 로봇과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지만,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로봇 두 대가 가까이서 때때로 이쪽을 언뜻언뜻 본다면 어떠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토리를 상정하고 대화에 끼어들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영어에 능숙하지 못한다고 해보자. 함께 있는 두 사람이 영어로 대화를 나누면서 때때로 이쪽을 보고 방긋방긋 웃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자신도 대화에 참가하고 있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즉 대화라는 것은 그 ‘내용’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스토리가 어딘가로 전개하는 상태”를 만듦으로써 대화감이 채워진다.

 

마찬가지의 원리로 복수의 로봇을 가지고 와서 로봇들 사이에서 학습한다거나 협조한다거나 하는 동작이 나오면, 바로 로봇이 로봇의 언어로 대화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적인 모습을 보여주면, 인간은 갑자기 ‘인간다움’을 로봇으로부터 느끼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세 대의 로봇에 인간 한 사람이 끼어있다면, 인간은 그 장에서 마이너리티가 된다. 그렇다면 그 속에는 사회적 제약이 발생하고 인간은 상당 부분 로봇 측으로 끌려갈 것이 분명하다. 로봇의 수가 증가하면 할수록 더욱 그러할 것이다. 혹은 다른 인간이 있어도 그렇다. 로봇과 로봇의 움직임을 따라하는 인간 댄서가 있는 공간에 혼자 있다면 어떠할까? 인간 쪽이 기계에 맞추게 될 것이다.

 

인간에게는 이러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인간다움’이나 ‘생명다움’을 만들기 위한 가장 큰 조건은 로봇이 인간과 환경을 공유하는 것이다. 여러 대의 로봇과 함께 하는 것은 그것들과 같은 환경을 공유하는 것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것은 새롭게 개발한 “기계인간 오르타”에서 해보았던 실험이기도 하다.

 

 

마음은 존재인가 현상인가?

 

여러 대의 로봇이 있으면 그 속에서 개성도 생겨난다. 그것은 서 있는 위치만으로도 결정되며 사용하는 기재에 의해서도 바뀐다. 즉 그 속에서 사회성을 찾아내는 순간 인간은 그 단순한 하드웨어의 특징을 개성처럼 자유롭게 해석해버린다.

 

개성이라는 것이 어디에서 생겨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로봇의 경우에는 하드웨어의 유형이나 디바이스의 작은 불균형이 개성의 느낌을 충분히 자아낼 수 있다. 그것은 로봇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두드러진다. 즉 ‘개성’을 ‘기계의 사양’의 차이에서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보는 측이 임의적으로 구별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인간다움’이나 ‘마음’ 또한 보는 측의 인간이 찾아내는 것이 아닐까? 안드로이드 연극에서 안드로이드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재밌는 것은 ‘마음’이 어떤 언어에도 존재하는 단어라는 점이다. 타인을 보고 있으면 그 사람에게 ‘마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지는 실제로 잘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는 것을 그렇게 명명할 뿐으로 ‘마음’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나는 내 자신 속에 ‘마음’이 물질적으로 존재한다고 실감한 적이 없으며 정말로 ‘마음’이 있다고 실감한 사람이 분명 존재할까 라는 의구심을 품고 있다.

 

그러나 ‘마음’을 정의할 수 없다 해도, 또 물리적인 존재로 볼 수 없다 해도, 인간은 상대방으로부터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그 ‘마음’이 사회성과 함께 존재함으로써 인간은 그들을 ‘마음을 가진 자’로 간주한다. 따라서 ‘마음’이란 사회적인 상호작용에 머무는 주관적인 현상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음’은 말하자면 복잡한 인간의 뇌 활동을 외부에서 관찰한 것이다. ‘의식’은 뇌 활동 그 자체지만 ‘마음’은 외부에서 본 ‘의식의 용기’와 같은 것이다.

 

 

섬뜩한 골짜기를 넘어가는 길

 

로봇연구에 “섬뜩한 골짜기”라는 개념이 있다. 로봇의 움직임이나 시선이 인간에 가까워짐에 따라 인간은 로봇에 친근감을 느끼지만, 인간은 로봇을 인간으로 간주하기 직전의 어떤 시점에서 갑자기 섬뜩함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섬뜩한 골짜기”를 넘어서는 것이 로봇개발의 하나의 테마이기도 한데, 나는 오히려 인간 측의 적응의 문제가 크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마츠코 데랏쿠스(1972~, 일본의 여장 연예인)의 안드로이드인 “마츠코로이드”을 만들었을 때에도 처음에 마츠코 씨는 “이것은 내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거부감을 표했다. 그러나 세 번째로 녹음하는 날 마츠코 씨를 포함해서 관계자 전원이 마츠코로이드가 여기에 ‘있음’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즉 인간이 적응함으로써 마츠코로이드는 드디어 섬뜩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해진 ‘인간’으로서 현장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섬뜩한 골짜기를 매우 깊게 (가장 기분 나쁘게) 느끼는 부분은 좀비와 같이 “움직이는 사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가령 좀비라 해도 만약 한 달 정도 함께 산다면 친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음’이 사회적인 상호작용에 머무는 현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개인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공유되는 것이다. 모두가 행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도 한다든지 유행하기 때문에 여하간 하고 싶다든지 욕망과 의도의 생성 또한 논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그러한 상호작용은 인간 동료들 사이에서 행해져 왔지만, 반드시 인간 동료 간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성립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의식—‘나’를 둘러싼 철학

 

안드로이드 연구

 

로봇연구는 공장 등에서 일하는 산업용 로봇에서 인간생활의 장에서 일하는 일상 활동형 로봇으로 관심이 옮겨가고 있다. 나는 진작부터 이 일상 활동형 로봇 연구에 착수하였고, 주로 오사카대학과 ATR 이시구로 히로시 특별연구소에서 연구를 계속해왔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전세계적으로 로봇연구가 성행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일상 활동형 로봇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의 일상생활에서 인간에 관여하면서 활동한다”는 점이다. 즉 상대방이 인간이다. 따라서 기계공학이나 인공지능 연구뿐만 아니라 인지과학, 심리학, 뇌 과학 등의 지식도 불가결하다. 로봇연구란 기존의 학문분야의 범위를 뛰어넘어 전개되는 새로운 연구 분야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존 연구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로봇 그 자체의 개발에 있어서 로봇의 동작과 일반기능에만 주력하여 개발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이 일상 활동형 로봇의 이상형은 어디에 있을까? 본래 인간의 뇌의 신체는 다른 인간을 인식하고 다른 인간과 관계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로봇의 이상형은 인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물론 특정 작업을 효율적으로 해내기 위한 공장 등에서는 특정 기능을 가진 로봇 쪽이 훨씬 편리성이 높다. 그러나 예측 불가능한 인간을 상대하는 한에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로봇이 인간에게서 어떤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라는 기능이 가장 중요하다.

 

이렇듯 목표를 설정하면 기존 연구에서는 보지 못한 문제가 발생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로봇은 어디까지 인간다운 형상을 가질 수 있을까?

● 로봇의 움직임은 어느 정도 인간다워질 수 있을까?

● 로봇의 지각능력은 어느 정도 인간과 같아질 수 있을까?

● 인간다운 로봇이 어떻게 인간다운 대화능력을 실현시킬까?

● 인간다운 복잡한 로봇을 제어하는 소프트웨어를 어떻게 개발할까?

 

이 기초적인 문제들은 아직까지 충분히 연구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인간다운 로봇’을 만드는 목적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실험을 진행하면서 그 결과를 로봇 설계에 반영시킨다. 그렇게 인간이해와 기술개발이 동시에 진행된다. 그렇게 나는 인간과 완전히 똑같은 로봇=안드로이드 개발을 목표로 삼아왔다. 여기서는 지금까지 만들어온 안드로이드를 예시로 인간과 로봇을 둘러싼 철학적인 문제들을 살펴보겠다.

 

 

자기의식의 모호함

 

실재여성을 모델로 겉모습과 동작 등을 인간처럼 재현한 여성의 안드로이드를 2004년에 개발했다. 그러나 이 여성 안드로이드는 인간다운 겉모습과 움직임을 하고 있지만 인간다운 대화능력을 가지지 못했다. 사람은 안드로이드가 인간다워지면 인간답게 대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자연언어이해의 기능은 있지만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단어와 문장은 한정되었으며 인간과 똑같은 대화능력은 없었다. 또 발화 또한 미리 녹음된 음성을 그대로 재현할 뿐이었다.

 

접화 마이크로폰을 사용하면 90% 정도의 언어를 인식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한 인간이 명료한 음성으로 말하는 경우에 한한다. 다양한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대화를 해야 하지만, 수많은 노이즈가 마이크로 흘러 들어가는 순간 인식률은 급격히 떨어진다. 게다가 음성을 인식할 수 있다 해도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한 후 발화의 내용을 생성한다는 것은 인간의 지능을 해명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인공지능의 궁극의 연구과제이다. 요컨대 인간과 같은 레벨의 대화능력을 컴퓨터로 재현하는 것은 현 시점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개발한 것이 인터넷을 매개로 하여 원격조작으로 대화할 수 있는 안드로이드인 ‘제미노이드’이다. (나 자신을 모델로 하여 “이시구로이드”로 불리고 있다.) 나는 제미노이드를 개발하면서 무엇보다 시선을 진짜처럼 처리하려고 했다. 그리고 표정과 동작을 만드는 얼굴과 몸의 각 부분을 움직이기 위한 작동장치(actuator)의 수를 50개로 늘리고 (여성 안드로이드에서는 약 40개) 나의 습관적인 동작을 가능한 한 충실히 재현하려고 했다.

그렇게 완성된 제미노이드를 본 나 자신의 인상은 매우 흥미로웠다. 주변 사람들은 나와 똑같다고 말해주었지만, 나는 제미노이드가 ‘나 자신’이라고 느끼지 못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뿐만 아니라 동작까지도 나와 똑같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거울처럼 인식한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동일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 후 새로운 원격대화형 안드로이드 ‘제미노이드 F’를 만들었을 때에도 모델이 된 인간 여성 또한 나와 똑같이 말했다.) 그리고 이로부터 몇 가지를 깨달았다.

 

사람들은 보통 일상 속에서 자신을 제3자의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 거울은 매우 기묘한 정보매체며, 거울에 비쳐진 자신의 모습은 좌우가 뒤바뀐 실제의 자신과는 다른 인물이다. 인간의 얼굴은 좌우대칭이 아니기 때문에 좌우가 뒤바뀐 얼굴은 다른 인물로 보인다. 이것은 사진 속 얼굴과 거울 속 얼굴을 나란히 세워두면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 속에서 그 거울 속 얼굴을 ‘자신’이라고 인식한다. 물론 사진 속 얼굴도 자신의 얼굴로 인식할 수 있지만, 오히려 거울 속 얼굴 쪽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사진도 동영상도 그것들은 이차원으로 투영된 것이며 그 속에 투영된 정보는 매우 한정적이다.

 

또 습관 등의 동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습관은 거의 의식할 수 없다. 대화를 나눌 때에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가? 그것을 명확하게 인식하면서 대화할 수 있는 자는 배우 중에서도 극히 일부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는 일상생활에서 거의 전무하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제기되는 철학적 질문은 “인간은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객관화하지 않은 채 자아를 확립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이다. 자아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위치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아를 인식할 수 있다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제미노이드를 통해 내가 느낀 것은 그 인식이 매우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안드로이드와 인간의 차이

 

제미노이드의 원격조작 시스템을 내가 조작하면 제미노이드로부터 나의 음성이 들리고 제미노이드의 움직임에 나의 움직임이 그대로 전달된다. 입술의 움직임은 목젖으로부터 입이 열리는 방식을 추정하는 프로그램에 의해 자동 생성된다. 그 외 눈의 움직임이나 호흡에 수반되는 가슴과 어깨의 움직임 등의 무의식적인 동작은 프로그램으로 자동 생성되는데, 자동 생성된다는 의미의 측면에서 인간 또한 안드로이드와 동일하다.

 

이 제미노이드에서 제미노이드와 대화하는 자도 조작하는 자도 그 제미노이드를 조작자 본인처럼 느낀다. 그리고 대화자는 제미노이드의 조작자를 모를 때에도 제미노이드를 ‘인간’처럼 느낀다.

 

직접 대면한 상황에서 제미노이드와의 대화가 시작되면 그 즉시 대화자는 제미노이드의 눈을 본다. 그리고 대화가 계속 진행되면서 마치 대화자는 그것이 인간인 양 행동하게 된다. 예를 들어 제미노이드의 조작자가 목소리의 억양을 강하게 하여 화를 내면 대화자는 혼난다는 느낌을 갖는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많은 대화자가 안드로이드가 사람에 의해 조작되고 있음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원격조작의 얼개를 완전하게 이해하고 있는 연구자도 예를 들어 제미노이드가 “내 몸을 만져도 좋아!”라고 말하면 순간 머뭇거리게 된다.

 

여기서 “안드로이드와 인간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을까?”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물론 몸속은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인간도 제미노이드도 몸속을 확인할 기회는 없다. 제미노이드는 겉모습, 동작, 발화 등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두 인간 같다. 잘 보면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러한 인간이 존재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인간 같다. 그런 행동들을 상대방에게 했을 때 인간과 같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고령자에게 제미노이드와 인간의 구별은 더더욱 어렵고 실제로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즉 일부 고령자들에게 제미노이드는 인간과 같다. 일상생활에서 마주하는 자의 내부를 보통은 볼 수 없다. 따라서 인간도 표면만으로는 정의되기 어렵다. ‘인간의 정의’가 내려지기 위해서는 인간의 복잡한 내부구조가 전제되어야 하지만, 일상생활을 통해 인간을 정의하기에는 일상생활이 그 요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

 

나아가 사회적인 장면에서 제미노이드와 인간 간의 구별은 쉽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인 장면이란 제미노이드와 대화자가 대화하는 장면을 제3자가 관찰하는 정황이다. 인간 같은 안드로이드가 인간과 대화하는 것을 관찰할 때는 제미노이드와 직접적인 대화를 나눌 때보다 제미노이드를 더 인간처럼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사람과 대화하는 자는 사람이다’라는 선입관이 작동하기 때문이리라. 가령 그것이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해도 다른 인간이 이미 대화 상대자로서 받아들이는 모습을 관찰함으로써 제3자 또한 제미노이드를 대화가능한 상대로 인식하게 된다.

 

즉 상황을 잘 전개시켜나가면 지금의 제미노이드라도 충분히 사회적으로 인간으로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이는 인간의 정의에 어떤 영향을 줄까? 분명 지금까지 인간을 쏙 빼닮은 납 인형을 만들어왔지만, 그것들은 겉모습만 닮은 것이기 때문에 그 외의 양식(modality), 즉 행동방식은 인간과 확실히 다르므로 인간의 정의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움직임이나 대화까지도 인간과 같은 제미노이드의 경우는 어떠할까? 속을 확실히 알 수 없는 일상 속에서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차이는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

 

 

안드로이드에 연민을 느끼기 쉬운 이유

 

제미노이드의 인간다운 모습과 움직임은 대화자에게 무의식적으로 인간다움을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여성형 안드로이드를 개발할 때에 곧바로 조작한 것이 앞서 서술한 무의식적인 동작의 생성이다. 그와 동시에 인지심리학적인 실험도 행했다. ‘얼마의 시간을 들여 관찰해야만 대화자가 그것이 안드로이드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가’라는 실험이었다. 결과는 약 2초까지는 대화자의 7할 정도가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5초 이내에 전원이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다음으로 행한 것은 5분간 대화를 나누고 대화자의 시선의 움직임을 측정하는 실험이다. 그 결과는 매우 흥미로웠다.

 

실험에서 대화의 상대로서 인간ㆍ안드로이드ㆍ로봇(이 실험에 사용된 로봇은 “와카마루”라는 이름의 미츠비시(三菱重工)가 개발한 로봇의 겉모습을 가진 로봇)의 세 종류를 준비했다. 5초가 지나면 모든 대화자가 상대가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자는 인간과 안드로이드에 대해 거의 동일한 시선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로봇에 대해서는 완전히 다른 패턴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상대를 사회적인 대화상대로 보는지에 따라 시선의 무의식적인 움직임이 다르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이 가설에 따라 대화자는 무의식적으로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동일한 사회적인 대화상대로 보았으며 로봇은 그렇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대화자는 제미노이드를 의식적으로는 안드로이드로 보아도 무의식적으로는 인간을 느끼는 것이다.

 

다만 현 시점에서 제미노이드를 본인과 비교하면 그 존재감은 다소 미약하다. 그것은 표정의 풍부함이나 움직임의 빈약함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학생들은 필자인 나보다 제미노이드와 이야기하기가 더 쉽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하기 쉬움의 이유는 존재감의 미약함 때문이 아니다.

 

제미노이드를 주의해서 보면, 그 즉시 그것이 안드로이드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안드로이드와 대화한다는 것은 충분히 인식될 수 있고, 의식하면 그것을 안드로이드로 볼 수 있다.

 

안드로이드로 본다는 것은 상대에게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닿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관계로 치면 친한 동료와의 관계다. 즉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닿아도 괜찮다고 의식할 수 있고 그러함으로써 거리를 좁힐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안드로이드를 처음 대면하게 되면 안드로이드와의 심적인 거리가 가깝게 느껴진다.

 

이것은 나 자신을 복사한 제미노이드(Geminoid HI)보다도 미려한 성인 여성형 제미노이드(GeminoidF, 이하 “F”라고 한다)에서 보다 현저하게 나타난다. F는 미려하게 웃는 얼굴로 미소를 지을 수 있는데, 남성 대화자들 중에는 F에 대해 연인을 대하는 것과 같은 감각을 느끼는 이들도 있었다.

 

인간과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상대에 관해 알아야 하고 자신에 관해 알려야 하며 상호 호감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제미노이드에 대해서는 그런 프로세스 없이 거리감을 좁힐 수 있다. 이것이 필자의 제미노이드가 필자 자신보다도 이야기하기 쉬운 상대로 인식되는 이유일 것이다.

 

따라서 제미노이드는 인간과의 거리감을 조정하는 목적으로 사용될만하다.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안드로이드는 인간사회에서 어떻게 이용되는 것이 적절한가?”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근본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관계를 제미노이드가 조정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면 사회적인 인간의 정의는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안드로이드의 신체에 적응하는 인간

 

제미노이드의 대화실험에서는 조작자 또한 흥미로운 반응을 보인다. 대화자가 제미노이드의 볼을 찌르거나 안으면 조작자는 바로 자신이 당한 것과 같은 감각을 느낀다. 이것은 조작자가 제미노이드의 신체에 적응하여 제미노이드의 신체를 자신의 신체처럼 느끼는 것이다.

 

제미노이드의 시각과 청각은 이미 원격조작시스템에 의해 연결되어 있으므로 남은 감각은 촉각과 후각이다. 촉각이 가상적이면서도 공유될 수 있다는 것은 그 신체를 거의 자신의 신체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제미노이드가 완성도를 갖춰나가면 후각조차도 가상적으로 공유될 가능성이 있다.

내가 처음에 아동형 안드로이드를 개발할 때 그 아동형 안드로이드를 뒤에서 안고 안드로이드의 어깨 부근에 턱을 울리고 주변 시야로 안드로이드를 쳐다 본 적이 있는데, 그때 갑자기 아이 냄새가 났다. 물론 진짜 냄새가 아니라 가상의 냄새다. 다른 사람에게도 시도해보았는데, 몇몇이 같은 의견을 제출했다. 즉 안드로이드의 모습이 그 안드로이드의 냄새를 연상시키고 실제로 냄새를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제미노이드에게는 냄새까지도 가상적으로 공유할 가능성이 있다.

 

인간이 제미노이드의 신체에 적응하는 이유는 아마도 뇌와 신체의 연결 방식에 있을 것이다. 원래 뇌와 신체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걷고 있는 와중에는 어떤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감각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정확하게 보고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다. 신체는 뇌로부터 주어진 ‘걸어라’라는 지령 하에서 자율적으로 보행패턴을 만들어내고 자신을 걷게 만든다. 그리고 걷는다는 행위가 시각 등의 다른 감각을 기초로 한 예측에 반하지 않는 한 뇌는 신체가 적절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판단한다. 이처럼 원래 뇌와 신체의 연결이 느슨하다는 바로 이것 때문에 가령 그것이 제미노이드의 신체라 해도 뇌가 그 몸체의 일부에 대해 예상대로 움직이고 있음을 확인한다면 뇌는 예측에 기초하여 다른 감각까지도 가상적으로 재현해버린다.

 

여기서 제기되는 의문은 “뇌와 신체는 분리 가능한가?” 혹은 “뇌와 신체는 재배치 가능한가?”이다. 이제까지 철학에서는 ‘뇌가 신체와 분리되어 존재할 때 그 뇌는 인간인가?’에 대한 논의는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제미노이드 시스템이 상용가능하게 된다면, 이 문제는 현실적인 문제가 된다. 조작자는 세상 속에 있는 어떤 제미노이드와도 인터넷을 통해 접근할 수 있으며, 마음 내키면 다른 제미노이드(신체)로 갈아탈 수도 있다.

 

기술개발의 목적은 뇌를 신체적인 제약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기술은 인간의 능력 하에서 발상을 얻어 인간 능력을 기계로 대체해왔다. 전화를 사용하면 이동하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는 것처럼, 기술에 의해 뇌는 더 자유롭게 되고 신체의 물리적 의미는 점점 희박해진다.

 

한편 발달심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뇌의 성장에서 신체는 필요불가결하다. 발달단계에서 뇌와 신체는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신체적 발달의 장해가 뇌의 발달장해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신체발달의 어떤 단계에서 뇌와 신체가 분리되는 것일까, 혹은 본래 영구적으로 뇌와 신체는 제미노이드처럼 시스템 속에서 분리된 것은 아닐까? 가령 전화나 텔레비전은 뇌와 신체의 분리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을 지금 당장 제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제미노이드의 시스템은 이처럼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의문을 던져왔다.

 

 

안드로이드와 아이덴티티

 

자기 자신의 복사로서 제미노이드를 개발하면서 뇌리를 떠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어느 쪽이 자기 자신일까?”라는 질문이다. 제미노이드는 안드로이드고 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 쪽인 나를 가리키며 이쪽이 자신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에서 보는 방식은 과연 그러할까? 사회에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는 무엇일까?

 

자신의 제미노이드를 개발한 후 주변으로부터 자주 듣는 질문이 있다. 내가 제미노이드와 닮아간다는 의견이다. 사실이라면 제미노이드가 나와 닮아간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비교의 주체가 제미노이드가 되었다.

 

여기서 깨달은 것은 나의 아이덴티티는 나 자신이 아니라 내가 만든 것에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특징짓는 다양한 속성, 바로 그것이 아이덴티티며 벌거벗은 상태의 ‘특징 없는 인간’은 사회에서 아이덴티티를 가질 수 없다. 실제로 자신이 개발한 로봇이나 전신이 검은 복장 등이 나의 아이덴티티를 만들고 있다.

 

나의 경우 상황은 조금 더 복잡하다. 자신의 복사인 제미노이드는 나와 같은 겉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것을 작동시키면 현실세계에서 사회적으로도 나 자신이라고 간주된다. (아직은 한정된 상황 하에서지만 나를 대신해서 회의장에 갈 수도 있다.) 이것은 내게 매우 큰 문제다. 살아있는 몸의 나 자신과 제미노이드 중 어느 쪽이 나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는가라고 질문한다면 확실히 제미노이드 쪽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고심스러운 문제가 있다. 바로 노화다. 나는 늙어가지만 제미노이드는 인공물이기 때문에 젊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겉모습도 중요한 아이덴티티다. 어느 연령대의 겉모습에서 가장 두드러진 아이덴티티를 얻을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영화배우의 아이덴티티는 늙어 비실비실해진 모습과 한창 시절의 스크린 속의 활기찬 모습 중에서 어느 쪽에 있는 것일까?

 

제미노이드는 연구 성과며, 연구자로서의 아이덴티티이기도 하다. 그와 동시에 시선의 아이덴티티이기도 하다. 그러나 겉모습의 아이덴티티는 나이를 먹으면 상실될 가능성이 있다. 이 아이덴티티의 문제도 인간의 사회적인 존재를 묻는 철학적인 문제일 것이다.

 

 

안드로이드가 연기하는 인간

 

로봇에게서 사회성을 발견하는 순간, 즉 로봇이 다른 인간과 대면하는 순간, 로봇을 인간과 같은 것으로 느끼기 쉽다고 앞서 말했다. 이 주장을 더 밀고 가면 특정한 상황과 특정한 시나리오 하에서 시선도 철저히 인간다운 안드로이드로 재현하는 것이 가능하다. 앞서 소개한 히라타 오리자 씨와의 안드로이드 연극이 바로 그것이다.

 

히라타 오리자 씨와는 이 안드로이드 연극을 함께 하기 전부터 미츠비시가 개발한 “와카마루”라는, 로봇의 겉모습을 한 로봇을 사용한 로봇연극을 만들고 있다.

 

이것은 두 대의 로봇과 두 사람의 배우가 연기하는 20분 정도의 단막극으로 시나리오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래의 일본에서 실업자에게 생활지원대책으로 로봇이 지급되고, 실직한 부부의 가정에도 두 대의 로봇이 지급된다. 그런데 남편은 일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두 대의 로봇 중에 한 대도 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일한다는 것이란? 힘들다는 것이란? 인간이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자는 연극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히라타 씨의 연출이 인간에 대해서도 로봇에 대해서도 완전히 동일한 문제의식으로 다루었다는 점이다. “0.3초, 잠깐을 포착해보세요!”라든가 “30센티 앞에 서보세요!”와 같이 히라타 씨의 연출은 동작을 정확하게 제시한다. 그리고 정신론은 일절 없다. 그에 따라 로봇의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측도 히라타 씨의 연출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완성된 연극은 로봇에게도 인간인 배우에게도 완전히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을 느끼게 하는 감동적인 무대가 되었다. 관람 후의 설문조사에서 관객의 거의 대부분은 로봇과 배우 모두에게서 ‘인간다운 마음’을 느꼈다고 답했다. 즉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사람의 ‘마음’이란 몸짓과 발화로 충분히 존재를 느낄 수 있으며, 그 실체는 단순한 프로그램으로도 충분하다.

 

이는 역설적으로 ‘마음’은 실체가 없음을 말해준다. 오히려 타인이 그 사람에게 ‘마음’을 느끼는 것만이 문제시된다. 그리고 서로에게 ‘마음’을 느낌으로써 자신에게 그와 똑같은 ‘마음’이 있음을 느끼는 것이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의 정체가 아닐까?

 

 

안드로이드는 인권을 가지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조금 이야기를 비약해보겠다. 안드로이드가 사회에 받아들여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이 또한 히라타 오리자 씨가 생각한 사고 실험에 포함되어 있다.

 

영화에 나오는 완전 자율형의 안드로이드가 진짜 세상에 등장하는 것은 아직은 미래의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제미노이드와 같은 원격조작형의 안드로이드라면 비교적 가까운 미래에 실현 가능하다. 원격조작이라고 해도, 상당 부분은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고 인공지능의 기술에서는 재현될 수 없는 부분만이 원격 조작된다. 조정하는 한 사람이 복수의 안드로이드를 원격 조작한다는 것이 실용적인 안드로이드 시스템이다.

 

그러한 시대에 한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죽은 자신의 아이를 빼닮은 안드로이드를 구입했다고 치자. 교통사고로 죽기 전의 비디오나 사진 등의 다양한 기록을 참조로 하여 만들어진 아이의 안드로이드는 교통사고로 죽은 아이와 똑같이 행동하고 똑같이 이야기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의 안드로이드에게 애착을 품지 않을 리가 없다. 살아있었을 때의 아이와 마찬가지로 진심으로 애정을 쏟는다.

 

그러한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어머니 집에 강도가 들어왔다. 아이의 안드로이드는 강도로부터 어머니를 지키고자 강도 앞을 가로막았다. 강도는 봉으로 아이를 때려 쓰러뜨렸다. 강도는 “로봇은 인간에게 맞서지 마!”라며 쓰러진 아이의 안드로이드를 집요하게 봉으로 두들겨 팬다. 어머니가 울부짖으며 몇 번이나 멈추게 하려 해도 강도는 계속해서 아이의 안드로이드를 두들겨 팬다. 아이의 안드로이드는 점점 힘을 잃어간다. 그것을 본 어머니는 벌떡 일어나 부엌에서 식칼을 가져와 강도를 찔러 죽여 버린다.

 

이때 어머니의 행위는 정당방위로 인정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어머니는 단순한 살인범일까?

 

논점은 ‘아이의 안드로이드가 인간과 같은 자로 간주될 수 있는가?’에 있다. 아이의 안드로이드가 인간과 똑같은 인권을 가지고 있다고 간주된다면 당연히 정당방위일 것이다. 그러나 그 한편으로 아이의 안드로이드의 몸속은 기계이자 로봇이다. 로봇에게 ‘인권’은 인정될 수 있는지의 문제 또한 제기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과 로봇을 구별하는 것은 신체의 내부인가? 기계의 신체를 가진 자는 인간이 아닌가? 인공장기나 인공사지가 점차 진화해간다면 인간의 신체 또한 기계화될 것이다. 그때 무엇을 남겨서 인간이기를 계속할 수 있을까?

 

본래 인권이라는 것은 사회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일찍이 흑인 노예도 아메리카 사회로부터 인권을 인정받음으로써 인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흑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인권을 주장한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인권을 보장받을 수 없다. 로봇도 마찬가지다. 로봇이 스스로 인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게 하는 것은, 그렇게 프로그램화된다면 좋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로봇이 인권을 보장받을 수 없다. 문제는 그 사회가 로봇에게 인권을 인정해줄 것인가에 있다.

 

인간의 아이와 마찬가지로 그 어머니와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아이의 안드로이드에게 인간은 인권을 주고 싶어 하지 않을까?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인간이 사회로부터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사회가 어떻게 인간을 정의할 것인가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결정한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난폭하며 두려운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정의는 역사 속에서 점차 변화해왔으며, 바로 지금 새로운 기술의 출현에 의해 다시금 크게 바뀌려 하고 있다.

 

 

안드로이드와 철학

 

안드로이드 연구는 인간에 대한 모든 연구 분야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와 더불어 실제로도 안드로이드를 개발하여 현실세계에 출현시킴으로써 인간의 정의를 생각하는 새로운 재료를 제공하기도 한다. 어려운 철학용어를 알지 못한다 해도 실제로 그 문제를 느끼게 하는 뛰어난 매체며,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뇌 과학과 의학이 엄청나게 발전한다 해도 일상생활에서 인간의 내부를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인간의 정의란 표층적인 관측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아가 ‘나’라는 자아를 나타내는 말, ‘마음’이라는 존재의 불확실함을 드러내는 말, 그러한 것들의 의미를 생각하기에 걸맞는, 여기에 소개한 제미노이드를 비롯한 안드로이드는 인간의 일상에 근거한 새로운 철학의 툴(tool)이 될 것이다.

 

일찍이 철학은 학문의 중심이며 그 개념적 사고는 다양한 연구 분야를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개념적 사고만으로 인간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본래 개념적 사고를 가능하게 만드는 인간의 ‘의식’이란 무엇인가를 이제야 비로소 실질적으로 질문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을 이해한다고 한다면 개념적 사고를 떠받치는 신체와 감각의 의미, 나아가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 의한 사회의 의미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논증에만 의거해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현실세계에서 실증하는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인간 이해에 관한 연구는 앞으로 안드로이드와 로봇 연구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철학을 포함한 다양한 연구 분야가 배치될 것으로 예상된다. 의식의 연구를 통해 철학이 과학이 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진정 하고 싶은 바다.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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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독보적인 안드로이드 기술 개발자인 이시구로 히로시(石黒浩)의 글을 두 번에 걸쳐 번역해 올려둔다.

 

인공지능의 출현으로 비로소 인류는 '인간'이라는 개념을 '생산'으로부터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생산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생식이다. 생물학적 재생산이 인간의 삶(혹은 인류의 역사)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귀착되는 한, 인간의 본성은 동물적인 본능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즉 인류사회의 진화, 전쟁, 갈등, 위계, 계약과 협동까지도 동물집단의 유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레비-스트로스가 프로이트의 토템과 터부(의 디푸스 컴플렉스)를 비판적으로 지양하려고 한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된다. 레비-스트로스의 친족 개념은 혈연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끊는 것이라는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의 논의를 상기해보라.)

또 하나는 노동이다. '인간'의 개념이 노동과 결부되어 있는 한 자기의식은 해명되지 않는다. '인간'의 개념이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와질 때, 즉 현실세계로부터 메타화될 때, '인간'이라는 개념을 창출하는 인간의 의식이 해명된다. 가령 '가상세계'(virtual world)는 근대의 (노동의) 물질주의(materialism)가 은폐한 '보이지 않는 세계'(invisible world)를 복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인류는 인류세(anthropocene)를 마감하고 새로운 세기에 접어든 것이 아닐까? 이시구로 히로시는 그 최전선에서 '인간'의 개념을 새롭게 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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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3차원에서 자유롭기 위해

 

 

의식은 무엇에 필요한가?

 

요즈음 의식에 대해 쭉 생각했다. 계속 안개 속을 걷는 것 같다가 어느 날 밤 깜박 졸던 중에 설명할 수 있겠다는 기분이 문득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의식이란 감각질(感覺質 Qualia)이 아닌 자기의식이다. 자기의식이란 자신에 대해 제삼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자신에 관한 것, 즉 자신을 자신이라고 인식하는 의식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머리 속에 자기를 언급하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눈을 감으면 그 목소리를 보다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의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반사행동만으로 사는 동물은 자신이 자신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 지금까지 나는 인간과 대화할 수 있는 안드로이드를 만들어왔고, 지금 단계에서는 안드로이드가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드로이드를 복잡하게 만들면 만들수록 언젠가는 자기의식과 같은 것을 부여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을 때가 오리라고 생각한다. 의식이 없으면 뛰어넘을 수 없는 높은 ‘장벽’과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자기의식을 되도록 단순하고 기능적으로 이해하면 기억을 참조하는 주체로서 자기의식을 생각할 수 있다. 경험이 누적되면서 비축되는 기억들이 있다. 그러나 그 많은 기억들을 동시에 접속할 수는 없다. ‘나’라는 기억의 참조자가 기억의 발생과 함께 머릿속에 나타나고 그것이 순차적으로 기억을 찾아간다. 아마도 이것이 가장 기능적으로 자기의식을 이해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자신의 기억에 기초해서 세계를 모델화하고 그 모델화된 세계에서 다양한 언어로 생각하는 의식 혹은 머릿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반향시키는 안드로이드는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자신을 보는 자신

 

자신을 보는 자신이 있다. 이것이 자기의식이다.

 

머릿속의 자신은 조금이라도 현실세계로부터 떠 있는 느낌을 갖지 않는가? 그것은 그 구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신’을 메타적 관점에서 파악하는, 즉 모델화하는 감각으로서 의식의 ‘세계로부터 약간 떠 있는 느낌’ 혹은 ‘세계와 융합하는 느낌’이 발생한다.

 

반대로 만약 머릿속의 자신이 현실세계에 딱 들러붙어 있다면 현실세계에 무언가가 일어날 때 사고는 전부 멈추고 말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멈추지 않는다. 어떤 현실이 일어날지라도 머릿속의 ‘자신을 보는 자신’은 계속해서 존재한다. 혹은 잠자고 있을 때는 시간감각이 현실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바꿔 말하면 의식이란 ‘세계’와 ‘자신’의 모델화다. 뇌 속에서 만들어진 가상세계에서 자신을 시뮬레이션 하는 것이다. ‘세계’의 인식과 ‘자신’의 인식, 그것이 뇌 속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과 자신을 인식한다는 것은 같은 것이다. 다만 세계는 고정된 시간으로서, 자신은 시간을 주관하는 자로서 모델화된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와 자신이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즉 실세계를 고정된 시간과 자신이라는 시계로 분해하는 것이 의식을 갖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뒷모습을 보려고 거울을 등지고 앞에 또 다른 거울을 들고 등 뒤의 거울을 비춰보면 한순간 무한후퇴가 발생한다. 가깝게 비춰지는 자신과 멀리 비춰지는 자신 사이에는 현실에 대한 다른 느낌의 거리감이 있다. 마찬가지로 다양한 수준의 추상도에서 현실세계를 이러 저리 탐색하려하는 것, 그것이 의식이지 않을까? 현실에 뿌리 내린 자신과 현실로부터 분리된 자신을 연결시킴으로써 현실세계에서 활동하면서도 독립된 의식이 있는 감각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기억의 시간

 

기억이라는 것은 현실세계로부터 약간 떨어져 있다. 기억이 ‘지금 여기’에 단단히 붙어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완전히 ‘주관’에 불과하다. 게다가 여기서 말하는 ‘주관’이란 자기의식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현실의 시간과 완전히 일치된 세계의 관점을 가리킨다. 반사작용으로 움직이는 동물의 세계를 생각하면 된다.

 

한편 우리는 기억을 ‘객관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다. 예를 들어 “책상 위에 컴퓨터가 있다”고 말할 때에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로서 기억된다. 요컨대 컴퓨터를 계속 지켜보지 않아도 책상 위에 컴퓨터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전제를 하고 행동할 수 있다. 컴퓨터뿐만 아니라 우리는 세계 전체를 그와 같이 고정적인 시간으로 기억한다. 이것은 세계가 뇌 속에서 모델화되고 있음을 반영한다.

 

만약 조금 전 있었던 것이 지금도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계속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엄청난 정보량을 요하므로 관찰할 수 있는 세계는 매우 좁다. 마치 복수의 눈으로 세계를 계속 관찰하며 주의를 기울이는 벌레와 같다. 즉 현실세계에서 자신이 감각한 것이 ‘주관’(현실세계에 들러붙은 시간)에서 분리됨으로써 기억이라는 ‘자신이 객관세계라고 믿고 있는 것’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억의 시간감각은 엉터리다. 강한 기억은 가까운 일로 생각되지만, 가까운 일도 바로 잊힐 수 있다. 오늘 아침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아도 일년 전의 감동적인 요리는 기억날 수 있다. 싫은 일을 잘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중요한 것만이 강한 인상을 남긴다는 것을 보여준다. 앞뒤의 시간관념은 그리 간단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즉 기억이란 얼핏 시계열적인 것으로 느껴지지만 기억을 통해 “그것이 언제였지?”라는 질문에 실은 순간적으로 답할 수 없으며, 그때 그랬기 때문에 지금 이렇다는 식으로 그 외의 여러 에비던스(증거)와 관련지음으로써 논리적으로 추론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만약 그러한 정보가 전혀 포함되지 않은 기억이 있다면 “그것이 언제였지?”라는 질문에는 전혀 답할 수 없다. 꿈에서는 ‘언제’를 알 수 없는 것처럼 기억은 시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전자회로의 메모리는 플립플롭(flip-flop)이라는 회로로 만들어지는데, 여기서는 입력과 출력이 연결되어 루프를 구성한다. 인간의 기억의 메카니즘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입력과 출력이 연결됨으로써 신경회로가 루프를 뛰어넘어 ‘지금 여기’라는 현실세계의 시간으로부터 분리된다. 즉 기억한다는 것은 시간을 지운다는 것이다.

 

 

의식과 기억

 

여기서 기억이란 자기이외의 것이 ‘있다’(책상이 있다, 당신이 존재한다 등)는 객관성(이라고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이며, 의식이란 그 객관세계 속에서 ‘자신’을 시뮬레이션 하는 기능에 관한 것이다. 그 세계의 정보를 추출해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행위주체’가 필요한데, 그것이 자기의식이다. 즉 자신의 주관적 관측을 중첩시켜서 그것이 ‘객관세계’인 모델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 객관세계에서 ‘주관적 관찰을 행하는 자신’을 시뮬레이션 하는 것이며 이 시뮬레이션을 행하는 자신이야말로 자기의식이다.

 

현실세계에 계속해서 흐르는 시간과 그에 수반하여 광대한 정보량의 흐름을 뇌 속 모델로서 고정하는 기계야말로 의식과 기억의 역할이 아닐까?

 

옛 기억이 없다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기 어렵다. 어제와 오늘의 자신이 연속한다고 믿지 못한다면 아이덴티티는 구축될 수 없다. 그렇지만 초등학교 시절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의 자기의식은 같지 않으며 연결되어 있지도 않다.

 

의식은 과연 연속적인 것일까? 라는 질문은 과학적으로도 논의되고 있으며, ‘매우 순간적인 (0.1초 정도의) 단기기억’과 ‘가까운 미래의 예측’을 연속적으로 잇는 것이 의식의 주체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이 순간의 연쇄가 어떻게 해서 태어난 순간부터 동일인물로서 계속되고 있는 ‘자신’이 되는 것일까? 그것이 바로 시간을 지우는 것이리라. 우리는 시간관념을 버림으로써 보편성(기억)을 획득하고 어제에서 내일로 이어지는 자기(의식)를 획득한다.

 

시간이라는 것은 현실세계의 가장 큰 제약이다. 그리고 보편성이란 시간에 속박되지 않는 것이다. 그 제약을 벗어나 보편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자기를 형성해간다면, 그것은 마치 3차원세계를 살아가는 자들이 이 한 방향의 시간에 속박된 세계를 극복하려는 것과 같다.

 

이 실세계를 기술에 의해 다양하게 모델화해온 인간이 지금도 모델화할 수 없는 것이 시간이다. 의식이 무엇인지를 지금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시간과 의식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시간을 극복해야=모델화해야 3차원 세계를 완전하게 극복할 수 있다. 이 극복의 과정에 인공적인 의식의 생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안드로이드의 뇌

 

인간은 관찰에 의해 세계를 뇌 속 모델(기억)을 만들고, 그것을 기본으로 자기의식을 만들어낸다. 순간적으로 모든 것을 계속해서 관찰하지 않고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이 방이 이런 느낌이다 혹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이런 것이다 등등 방과 세계에 관한 뇌 속 모델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시간과 관계하지 않고서도 존재함을 믿을 수 있는 보편적인 모델이다.

 

따라서 안드로이드가 의식을 갖게 한다면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장치=뇌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를 생각해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그 장치가 현실세계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시간의 변화에 직면한 뇌 속 모델이 갱신될 수 있을까? 로 바꿔 말할 수 있다. 세계를 모델화함으로써 보편성=시간으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하면서 실세계에서의 변화에 따라 모델을 계속해서 변신해가는 것. 그 밸런스가 현실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열쇠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안드로이드에 한정되지 않으며 인간도 마찬가지다. 뇌 속 모델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 인간을 가리켜 망상벽이 강한 인간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는 유한한 시간 속에서 살고 있으며 시간과 함께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변화에 대응해서 살지 않으면 생물로서의 신체로서 유지해나갈 수 없다. 나아가 앞으로는 기술이 진보하고 무기물의 신체에 뇌를 다운로드할 수 있게 되어 죽을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면, 의식의 존재방식 또한 크게 변화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앞으로의 이야기다.

 

 

 

지능—세계의 모델화

 

 

인간의 두 진화방법

 

인간은 두 가지 방법으로 진화하고 있다. 하나는 유전자에 의한 진화며, 또 하나는 기술에 의한 진화다. 본래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도구와 기술의 사용여부에 있다. 도구와 기술을 사용하는 동물이 인간이며, 도구와 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 능력을 고양시켜가는 것이 인간의 진화방법이다.

 

달리기 속도는 변할 수 없지만 자동차와 비행기 등의 탈 것을 통해 장거리를 더 짧은 시간에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육체의 힘이 크게 변하지 않았는데도 기계를 통해 산을 통째로 무너뜨릴 수 있게 되었으며, 무기를 통해 도시를 한순간 파괴할 수 있게 되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여 해외에 있는 사람과 통화하는 인간은 100년 전의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텔레파시를 사용하는 초능력자일 것이다. 즉 인간은 유전자와 기술이라는 두 방법으로 진화를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기술에 의한 진화속도는 유전자에 의한 진화속도보다도 훨씬 빠르다. 그 때문에 인간과 동물 간에는 압도적인 능력차가 발생하였고 이 세상은 인간에 지배받는 세계가 되었다.

 

기술이 인간의 진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단서로 기술이 개발되어왔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도구와 기술은 인간 자신의 능력을 바꿔놓거나 고양시켜왔던 것이다. 더 멀리 이동하기 위해 자동차와 비행기를 만들고 건물을 보다 효율적으로 짓기 위해 다양한 건축기계를 개발한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발명하였으며, 언제 어디서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전화가 생겨났다. 이처럼 기술은 단기간에 인간의 능력을 기계로 치환하고 그 능력을 비약적으로 확장해왔던 것이다.

 

 

멈추지 않는 기술개발

 

인간의 능력을 대체하고 확장하는 기술개발의 역사에서 그 기술개발이 멈췄던 때는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인간은 능력을 확장해야 살아남는다는 숙명에 따라 그 능력을 계속해서 확장해왔다. 그리고 그 결과 만들어낸 기술은 풍부한 경제활동을 창출했다. 인간의 능력을 확장하는 새로운 기술은 이 세상에 번영해서 살아남는 데에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며, 그것을 손에 넣어 생활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 살아가는 목적이 된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에서 기술이 쇠퇴한 경우는 거의 없다.

 

또 하나의 이유는 기술개발 그 자체가 인간이성의 프로세스이기 때문이다. 더 강력한 힘을 얻어 살아남았다는 것, 이 하나만으로는 동물의 삶과 크게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기술개발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포함하기 때문에 멈춰지지 않는 것이 아닐까?

 

본래 인간이 기술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뇌의 큰 용량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뇌는 그 크기와 복잡함으로 인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지능을 가질 수 있었다. 인간에게는 ‘자신을 보는 자신’을 재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그 한편으로 인간은 자신의 얼굴조차 볼 수 없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많은 감각기관은 진화 과정에서 피부로 변해왔으며 대개 바깥쪽을 향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얼굴도 볼 수 없고, 자신의 위나 장 속도 볼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뇌는 감각기관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엄청난 정보들을 연결함으로써 뇌 속에 보편성을 갖는 ‘자신’의 모델을 만들어내었다. 이것이 ‘객관적으로 자신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뇌 속에서 자신과 세계를 모델화할 수 있는 지능을 가졌다는 바로 그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참조하여 기술로 치환할 수 있었다. (물론 ‘객관적 인식’이라는 것은 원리적으로는 있을 수 없다. ‘객관적인’ 자신의 이해란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가진 자기의식을 확립할 수 있다는 의미일 뿐이다.)

 

그래서 기술 그 자체가 인간을 모델화하여 이해하기 위한 직접적인 수단이 된다. 인간의 능력을 기술로 대체하는 것은 인간을 모델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예를 들어 살아있는 신체의 팔을 로봇 의수가 대체하여 그 신체의 팔이 가진 능력과 같거나 그 이상의 기능을 할 수 있다면, 그 로봇의 의수는 인간의 팔로 간주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로봇의 의수를 통해 ‘팔’을 완전히 모델링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자신을 모델화할 수 있는 지능 탓에 인간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질 수 있는 것일 수 있다.

 

 

인간은 어디까지 기계화될 수 있을까?

 

기술의 역사란 인간의 기능을 기계로 대체해온 역사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을 생각해왔다. 혁신적인 기술이 발명되면 언제나 그 기술에 기반해서 인간 전체의 대체를 시도해왔다.

 

예를 들어 시계 기술이 발전한 스위스에서는 그 자동화 기술에 의해 오토마타(autómata: 인간의 지능적 기능을 대체할 수 있는 장치)라 불리는 자동인형을 만들어내었다. 19세기에 조지 무어에 의해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기계인간이 고안되었다. 최근 일본에서 다양한 인간형 로봇이 개발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기능의 기술로의 대체는 인간을 모델화함으로써 인간을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거법적인 인간이해의 방법이기도 하다. 기술에 의해 대체될 수 있는 부분은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신체가 점차 기계로 바뀌어 가면 최종적으로 과연 인간의 코어 같은 것이 남아있겠는가?

 

몇 백 년 전의 사회에서는 손발이 없다거나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통상의 인간사회에 참가하기가 어려웠다. 통상의 인간으로 간주될 수 없었고 차별받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의수나 의족을 하고서도 충분히 보통의 인간으로서 인간사회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 페이스메이커(pacemaker)나 제세동기를 육체에 심는 수술도, 인공장기도 통상의 의료행위다. 이윽고 육체는 인간임의 조건에서 제외되고 있다. 따라서 기술에 의한 인간의 기능의 대체라는 것은 인간임의 조건에서 생물로서의 인간고유의 것을 지워냄으로써 인간의 정의를 검토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인간의 정의와 튜링 테스트

 

튜링 테스트(Turing test)란 기계(인공지능)에 인간과 동일한 지능이 있는지를 점검하는 테스트다. 키보드와 모니터를 통해 대화를 나누고 그 결과를 통해 상대가 인간인가 기계인가를 판단하는 것인데, 인간과 구별이 되지 않으면 (기계로 판단되지 않으면) 그 기계는 “튜링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말할 수 있다. 수학자로서 현재 컴퓨터의 기초가 된 튜링 머신을 구상한 앨런 튜링이 1950년의 논문 「계산기와 지능」(Computing machinery and intelligence)에서 제창한 이후 그렇게 불린다.

 

다만 인간을 속일 뿐이라면 테스트를 통과한 인공지능은 바로 제작되었으리다. 그러나 무엇이 인간과 기계를 구분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면, 다시 말해 이론적으로 인간을 정의할 수 없다면 최종적으로 그것이 인간인가 기계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튜링 테스트의 전제 자체가 케케묵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것은 ‘인간과 기계를 구별하기’ 위한 테스트고, ‘기계가 인간으로서 다뤄질’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테스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인간으로서 다뤄지는 것들과 그 이외의 것들을 구별하는’ 테스트라고 정의한다면, 인간을 완전히 이해해서 모델화할 수 있고 그에 따라 튜링 테스트의 목적 또한 규정될 것이다. 그때 재료, 즉 육체의 재질은 이미 질문의 대상이 아니다.

 

 

 

기계화—인간이 안드로이드가 될 때

 

 

이미 발생한 특이점(singularity)

 

기술은 이미 가속도로 진화를 시작했다. 인간이 만들어낸 기술 속에 가장 범용적이고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은 컴퓨터다. 컴퓨터는 해마다 두 배 이상의 속도로 성능이 향상되고 있으며, 이것을 ‘무어의 법칙’이라고 말한다.

 

무어의 법칙에 따른 컴퓨터의 진화 속도는 컴퓨터가 폭발적으로 발전한 초기현상에만 나타나는 것이라고, 그 과정에서 한계점에 도달한 많은 연구자들이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도 컴퓨터의 성능은 끊임없이 가속도로 향상되고 있다.

 

그 이유는 컴퓨터의 설계에 컴퓨터가 사용되기 때문이다. 컴퓨터 그 자체의 설계에 관해서는 이미 인간이 수작업으로 도면을 그린다거나 그를 위해 필요한 계산이나 시뮬레이션을 행할 수 없다. 그것들은 모두 컴퓨터가 한다. 물론 인간은 항상 새로운 설계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과 컴퓨터의 계산능력의 향상 중 어느 쪽이 새로운 컴퓨터설계에 더 큰 공헌을 하고 있는가? 문외한인 나는 명확하게 답변할 수 없지만 컴퓨터 자체의 성능향상이 설계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끼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컴퓨터가 컴퓨터를 개발하고 로봇이 로봇을 개발한다. 컴퓨터나 로봇이 인간의 지혜를 넘어서서 가속도로 발전하는 것을 ‘특이점’이라고 말한 것인데, 특이점은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인간다운 안드로이드

 

가속도가 붙은 기술의 진화는 컴퓨터뿐만 아니라 로봇에게도 적용된다. 인간의 뇌는 인간을 인식하고 인간에 관여해왔다. 따라서 그 인간이 사용하기 편한 제품을 만들고자 한다면, 그 제품에 필연적으로 인간다운 기능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인간의 시선을 모방한 로봇인 안드로이드(휴머노이드라고도 불린다)의 연구개발은 최근 10년에서 15년 사이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컴퓨터가 인간의 뇌의 기능을 대체하는 것이라면 안드로이드는 인간의 시선과 행동방식을 대체하고 나아가 실제 사회에서 타자와 상호작용하는 기능, 즉 타자와 사회적인 관계를 맺는 기능을 대체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다양한 안드로이드를 만들어왔다.

 

물론 아직 개량의 여지는 남아있지만, 상황과 목적을 임의로 선택할 수 있다면 인간에 더욱 가까운 안드로이드를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회사 접수대에서 인사하는 안드로이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간으로 착각한다. 또 무대에 선 안드로이드는 특히 인간의 역할 이상으로 인간 같다. 노래를 부르는 아이돌로서의 안드로이드는 홍콩에서 압도적인 팬덤을 형성하고 있다. 안드로이드는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다. 앞으로 가장 큰 목적은 안드로이드에 의도와 욕구를 심어주는 것이며 최종적으로는 의식을 부여하는 것이다.

 

지금의 안드로이드와 로봇 등에게 행위는 프로그램화되어 있지만 의도와 욕구는 프로그램화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대화를 나눈다 해도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주어진 질문에 정해진 답변을 의미 없이 되돌려줄 뿐이다. 대화가 성립된다 해도 진짜 인간다운 대화는 할 수 없다. 이 안드로이드에게 행동뿐만 아니라 그 행동을 만드는 배경으로서 의도와 욕구 또한 프로그램화된다면 더 인간다워질 것이다.

 

그러한 의도와 욕구를 가진 안드로이드는 대화상대인 인간의 의도와 욕구 또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발화와 행동을 관찰하고 그것을 자신의 내부 모델에 비추어 맞춰보고 자신이라면 어떤 의도와 욕구를 가지고 그 행동을 취할 것인가를 추정하는 것이다.

 

인간의 의도와 욕구를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의도와 욕구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며 자신의 의도의 일부를 특정한 인간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의도의 공유란 무엇일까? 물론 그것은 친밀한 관계를 의미한다. 서로가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것이 아닐까?

 

 

안드로이드로 살아가다

 

한편 인간 동료의 관계는 늘 대등하지만은 않다. 예를 들어 영화배우와 일반인은 일대다의 특수한 관계에 놓여있다. 그러한 관계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과 의도를 공유하고 마음을 통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보다 사회에서 어떻게 널리 인지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만담계의 두 번째 인간국보인 고 카츠라 베이초(桂米朝)의 안드로이드를 만들 기회를 얻은 적이 있다.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 미수(米壽: 88세)의 기념강연을 위해 제작한 것인데, 당시 카츠라 베이초 씨는 이미 만담을 연기하는 것이 힘든 지경이었다. 따라서 카츠라 씨가 만담가로서 전성기를 누렸을 즈음의 모습으로 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안드로이드는 지금까지도 카츠라 씨를 대신해서 만담을 연기하고 있다. 그것은 비디오 영상과는 완전히 다른, 카츠라 씨의 존재감을 그 자체로 재현한 매우 박력있는 모습이다. 물론 조금 주의 깊게 보면, 그것이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단 만담이 시작되면 그 만담에 점차 빠져들어 마치 진짜 카츠라 씨가 연기하고 있는 것처럼 현장감을 즐길 수 있다. 실제로 이 안드로이드가 참가하는 만담 공연은 언제나 만석으로 티켓은 바로 매진된다.

 

카츠라 씨와 일반 사람들과의 관계는 만담을 연기하는 자와 듣는 자의 관계다. 그 관계가 안드로이드에 의해 유지됨으로써 카츠라 씨는 만담가로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을 만담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카츠라 씨는 안드로이드가 되어 지금까지 사회에서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즉 안드로이드는 사회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수단, 영원한 생명을 제공하는 수단이 된다.

 

카츠라 씨는 말하자면 신체의 모든 것을 안드로이드로 대체한 것인데, 신체를 기계로 대체한다는 것은 카츠라 씨와 같은 저명인이 아니어도 다양한 모습으로 일어나고 있다. 사지, 장기, 세포……육체의 일부를 기계로 바꾼다 해도 그 사람이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살아있는 신체’가 이미 인간을 정의하는 필요조건에서 제외되고 있다.

 

앞서 서술한 것처럼 기술은 본래부터 인간의 능력을 기계로 대체해왔다. 인간의 능력이 기계로 대체됨과 동시에 로봇도 더 인간다워질 것이다. 그 로봇사회에서 사람들이 배우는 것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인간 자신의 존재를 묻는 질문에 대한 해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로봇 사회의 본질

 

로봇 사회에서 로봇은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다. ‘마음’, ‘의식’, ‘자아’, ‘사랑’이라는 인간의 본질에 관한 문제에 대해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왠지 풀어야 할 것 숙제로 느껴지면서도 마치 잘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이 말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로봇을 보면서 이 말들을 연상시킨다면 어떠할까? 상황은 한 순간 일변하지 않을까? 이 말들의 진정한 의미를 자신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는 예전에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히라타 로이자씨와 안드로이드 연극을 제작했다. 이것은 고전적인 연극예술로서 높은 평가를 받음과 동시에 관객들로부터 감동을 이끌어내었다. 연극을 본 사람들의 대부분이 안드로이드에 인간다운 마음을 느꼈다고 평가한 것이다.

 

그렇다면 안드로이드는 인간과 같은 마음을 가진 것일까? 연극에 사용한 안드로이드는 외모와 표정이 인간과 똑같게 제작되었지만, 프로그램으로 기록된 동작과 발화를 순차적으로 재생했을 뿐으로 지능을 가지지 않은 단순한 제작방식의 안드로이드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 안드로이드에게 인간과 똑같은 ‘마음’을 느낀다면, ‘마음’의 본질은 인간이나 로봇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관찰해서 느끼는 측에 있게 된다. 즉 ‘마음’이란 사회적인 상호작용에 머무는 주관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마음’의 해석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풀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것을 이제까지와는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로봇과의 관계가 증가하는 사회에서는 일상생활에서 ‘마음’, ‘의식’, ‘자아’, ‘사랑’이라는,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라고 모두가 믿으며 일상적으로 사용하면서도 의미 불명인 말들과 그 말들이 지시하는 문제에 대해 깊게 사고하는 계기를 맞이하고 있다.

 

로봇이 증가하면 생활은 편리하고 풍부해진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인간은 인간에 대해 깊게 사고하게 된다. 나는 그것이 로봇사회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란 기술을 사용하는 동물이며 기술에 의해 진화해왔다. 그 기술이 만들어낸 로봇사회에서 인간은 그 본질로 향해가고 있다. 인간의 진정한 진화란 인간 그 자체의 본질적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 아닐까?

 

 

안드로이드가 되기 위해 태어나다

 

기술이 더 진보하게 되면 인간의 신체는 점차 기계로 대체되고 그 수명은 점차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뇌 자체도 컴퓨터로 대체되고 인간은 완전히 기계화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유기체로서의 육체가 가진 질병이나 수명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은 기술에 의해 생명의 한계를 뛰어넘어 무기질로 진화해갈 것이다.

 

이것은 ‘브레인 업로드’라고 불리는 꿈의 기술이며 당장은 실현되기 어렵다. 그러나 먼 미래에 실현될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

 

가령 그러한 일이 가능한 시대가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다시 카츠라 씨의 안드로이드를 떠올려보자.

 

한 나라의 입장에서, 일본문화의 관점에서 중요한 존재인 인간국보 카츠라 씨의 안드로이드를 제작한 것은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그의 안드로이드가 사회 속에서 계속해서 살아감으로써 그 뛰어난 예술인을 후세에 전하게 된 것은 더욱 의미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삶의 목적은 어쩌면 사회 속에서 위업을 달성하고 그 후 안드로이드로서 영구히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안드로이드가 되어 그 존재가치를 불변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일지도 모른다.

 

 

 

池上高志・石黒浩、『人間と機械の間―心はどこにあるのか』、講談社、2016年12月。

 

 

Posted by Sarant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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